연단하시는 하나님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정금 같게 하는 연단 (욥23:10) 2005.5.19 수요예배 1
2. 은을 단련함 같이 (시66:10) 2004.5.23 주일오전 6
3. 달콤한 연단 (사48:10) 2004.5.30 주일오전 15
4. 연단을 이루는 인내 (롬5:4上) 2004.6.2 수요예배 25
5. 복 주시려고 (신8:16) 2004.6.6 주일오전 35
6. 온전해진 자의 섬김을 받으심 (시101:6下) 2004.6.13 주일오전 47
7. 온전해진 삶과 연단 된 마음 (잠17:3) 2004.6.20 주일오전 55
8. 연단과 충성 (빌2:22) 2004.6.27 주일오전 62
9. 연단중의 즐거움 (시119:92) 2004.6.30 수요예배 76
10. 연단과 의뢰 (고후1:8~9) 2004.7.4 주일오전 82
11. 연단과 믿음 (계3:18上) 2004.7.11 주일오전 92
12. 연단과 성품의 변화 (민12:3) 2004.7.14 수요예배 105
1. 정금 같게 하는 연단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죄 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이 바로 이 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을 생각하면 두 가지가 떠오르니 하나는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옳은 사람, 즉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가 특별히 발견되지 않는데도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그때 자신이 욥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의 극심한 고난을 통과할 때 조용히 앉아서 무릎을 꿇고 매일 몇 절씩 욥기를 노트에 마지막장까지 베껴가면서 성경을 필사하다가 은혜를 받고 그 고난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도 듣곤 했습니다.
확실히 이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렇게 인정했다면 우리들이 시비를 걸어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사단보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 땅에서 욥과 같이 순전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욥을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절대로 그가 완전히 순전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시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은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여러 학자들은 이 욥기가 생각보다는 훨씬 오래 전에 써진 것이라고 보고 이 욥이 역사적으로 아브라함 시대정도에 살았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쩜 이 욥기는 성경적으로 가장 오래 전에 써진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시대를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바로 아브라함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면을 두루 살펴도 반역과 패배에 흐르고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 부지중에 지은 죄라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던 이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욥이 시대가 악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신앙이 하나님 앞에 빛나고 또 그래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대낮에 가로등을 켜놓으면 아무 도움이 안 되지만 지금과 같이 캄캄한 밤에 가로등불 하나만 켜놓아도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작은 불빛 하나로 풍랑을 만난 수많은 배들을 안전하게 포구로 인도하는 등대를 보십시오. 사람이 살면서 지키는 등대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등대는 거의 없어졌고 무인 등대가 있습니다. 밧데리에 전기를 잔뜩 충전해서 갖다놓으면 밤이고 낮이고 계속 불이 켜져 있는 것입니다. 낮에는 주위가 환하니까 안 보이고 어두운 밤이 되면 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순전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어째든 혹독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재산이 날라 가고, 자식들이 죽고, 그리고 자신의 몸은 병들고, 그리고 아내는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큰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처음에는 욥도 우리들이 흔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다. 나는 순전하여 죄가 없다. 그러면서 고난에 반응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깊이를 더하면서 특별히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서 온 그 세 친구가 자신의 죄를 정죄하는 그 모든 변론의 과정들을 통해서 욥은 새로운 신앙의 차원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고백이 무엇입니까? “오직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그가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큰지 앞을 보아도 주님이 보이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아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단절까지도 경험된 그런 처절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 뼈저린 고난 속에서 욥은 자신이 이제껏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진 생각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게 되는 변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새로운 생각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을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할 때는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고난을 통해서 자기 속에 남아 있는 부패한 찌꺼기를 보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정결케 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지금은 뭐라고 그러는 것입니까? 정금과 같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순결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의로운 사람이 사단에 의해서 놀아나는 그런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다 큰 섭리 속에서 도덕적으로는 흠이 없고 정말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죄를 지은 적이 거의 없는 사람, 그래도 그 속에 부패의 찌꺼기가 남아 있지만 그런 평범한 인생의 과정을 통해서는 도저히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성을 발견할 수 없는 이 욥을 하나님께서 극심한 고난 속에서 연단을 받게 하심으로서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평안하게 살 때는 도저히 볼 수없었던 자신 안에 부패의 찌꺼기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의 마음속에 예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하여야 하나. 그러면서 불평밖에 안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실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을 했지만 그러나 이 지점까지 와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바뀝니다. 내 안에 이전에 내가 몰랐던 많은 부패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마음의 소원이 생기는데 이것까지도 모두 씻어내고 정금과 같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전에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생각을 했는데 이제 연단을 받고 여기에 와서는 순결해지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생깁니다.
정금이 무엇입니까? 순금입니다. 99. 99%의 순금을 자랑하는 순금입니다. 순금이 아니면 그 다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금속들이 많이 섞여 있는 분량에 따라서 18금, 14금 계속 내려갑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14금하고 순금의 값은 어떻습니까?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순금은 사고 팔 때 차이가 별로 안 나는데 14금이나 18금은 살 때 돈을 주어도 팔 때는 절대 제 값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순금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그랬는데 지금이야 새로운 방법들이 많이 나왔겠지만 그러나 고전적인 방법은 그냥 불로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불로 녹이면 각 금속의 비중이 틀리니까 그러니까 녹으면 금물은 금물대로 모래와 찌꺼기들은 찌꺼기들대로 다른 금속은 금속대로 분리가 됩니다. 그것을 여러 번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되는가 하면 순결한 금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거의 그런 것을 거의 안 하지만 옛날에는 쌀을 이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쌀을 씻어서 조리를 이렇게 건져내고 그 다음에 조금 남으면 바가지로 이렇게 하면 쌀부터 흘러나오고 돌맹이가 뒤에 남습니다. 그것을 한두 번 해야지만 바위를 씹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밥을 이렇게 해서 밥을 합니다. 그런데 금을 재련하는 방법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도가니에 집어넣고 치열한 불로 달굽니다. 금속이니까 얼마나 열을 가해야지 녹겠습니까? 센 불을 가해서 녹여버립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평안할 때는 평안할 때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 영향을 잘 받는 어린아이같이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잘 휩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면 정말 뻣뻣합니다. 말도 행동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도 모든 것이 뻣뻣합니다. 잘 되지 않습니다. 꺾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타이르시면서 네 마음을 버려라, 이 삶을 버려라.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 끊임없이 가르치시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환란과 풍파를 보내십니다.
큰 풍랑 일어나는 곳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나 건너가리
환란을 많이 당하고 시련을 당하면서 처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쓸 수 있는 꾀, 쓸 수 있는 재주는 다 써보는데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풍랑과 시련에는 일반적인 것이 있고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를 고치시려고 작정하고 보내시는 풍랑이 있습니다. 전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만 후자는 하나님이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 인간의 힘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하다가 손을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손을 듭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교만함과 모든 자기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고백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십니다. 거기에서 깊이 깨트려집니다.
그때 이 세상에서 일어난 환란의 풍파가 가져다준 불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녹이기 위한 은혜의 불을 붙이는 부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큰 환란을 통해서 우리를 흔들어놓으시고 그 환란 속에서 그 풍랑을 통해서 우리를 부채질하실 때 우리의 심령이 데워지기 시작합니다. 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확 녹아내립니다. 그렇게 녹아내릴 때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의 길이 눈물의 골짜기였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고통 속에서 흘린 아픔의 눈물과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 앞에 참회하면서 흘린 회개의 눈물이 함께 뒤범벅이 된 그런 종류의 눈물입니다.
그래서 깊이 매달려서 기도합니다. 녹아내립니다. 그때 그렇게 마음이 녹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그 굳어진 마음이었을 때는 도저히 느낄 수 없고 감지할 수 없었던 우리 안에 부패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한곳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흘러내리기 시작합니다. 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전혀 몰랐는데 그 환란의 불을 통해서 그 불을 이용해서 우리의 마음을 데움으로 우리의 심령을 녹아내리게 하기 시작하시자 우리와 하나 되었던 우리 안에 있는 예전에는 전혀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부패를 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자만했으나 겸손하게 되고 내가 예전에는 완전하다고 믿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무나 불안전하고 더럽고 추악한 인간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그 연단의 불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얼마나 우리 자신이 쓰라립니까? 그래서 이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이유가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고난 때문에 아픕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그 연단의 불을 통해서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십니다. 자기도 예전에 몰랐던 자기 안에 있는 그 부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아파하셨던 그 옛날에 아픈 마음이 내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내가 환란 때문에 아파했던 것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내 모습, 부패한 내 본성에 감추어진 나의 이 더러움 때문에 얼마나 아프셨을까?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위로받고 싶었던 마음이 오히려 하나님을 위로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심령이 순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종종 당하는 커다란 환란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고귀하고 값비싼 성도로 만드시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제가 싱가포르로 집회를 갔다가 제 나이쯤 되어 보이는 배가 불룩 나온 남자 성도님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이어트 이야기가 어떻게 나와서 자기가 밥만 먹으면 살이 계속 쪄서, 사실 당연합니다. 밥을 먹으면 살이 계속 찝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배를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지방흡입술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해본 적이 없고 본적이 없어 모르는데 그분의 설명을 들으니까 뭐 여기 해보신 분은 잘 알겠습니다만 쉽게 생각하면 배를 이렇게 껍질을 찢어서 찢으면 살같이 나오고 그 다음에 살이 나오고 그 밑에 기름이 나올 것입니다. 거기다가 진공청소기를 집어놓고 기름을 짝 빨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 하는 이야기가 싱가포르에서 그것을 받았는데 돈도 비싸지만 어떻게 아픈지 죽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안 아픈 것도 나왔다고 합니다. 뭐 또 그렇게까지 고개를 끄덕일 필요는 없고, 하여튼 그것을 빼내는데 죽을 것 같이 아프더랍니다. 그래도 어떻게 참았는가 하면 불룩 나온 배가 한 3-4인치 들어가니까 그리고 날씬해지고 그 다음에 거기 기름기가 있으면 건강에도 안 좋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죽어라고 참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들이고 죽다가 살아나다시피 아파서 고생을 한 다음에 그 다음에 실밥을 다시 꿰매는 것인데 나는 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제왕절개 한 것처럼 표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6개월 만에 원위치가 되더라고 합니다. 원상복구가 되었습니다. 보람도 없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집사님 애쓰셨습니다. 애쓰셨는데 만약에 우리가 그 결심을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끼여 있는 지방질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한다면 아마 벌써 좋은 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픔이 없이 예뻐질 수 있습니까? 여성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눈썹도 찢어야 예뻐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도 갈라야 예뻐집니다. 심지어는 종아리까지 가르고 지방을 뽑아냅니다. 그렇게 고통을 치르면서도 외모를 가꾸고 싶어 하는데 우리 안에 낀 이 많은 때들을 하나님이 매일매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도 그것으로서 우리의 영혼 안에 낀 이 더러운 비만증이 치료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인생을 살다가 몇 번씩 우리를 수술대 위에 눕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환란을 통해 연단하심으로 우리를 수술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치열하게 우리들 안에 있는 부패한 것들을 모두 쓸어내고 정결해지기를 간곡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되기까지 그 길이 얼마나 될는지 어떤 연단의 과정을 겪는지 욥은 아무 작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러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아는 것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이렇게 연단하시고 또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 고귀하고 순결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 고백 속에 무엇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사상,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괜찮습니다. 고난을 좀 당해도 괜찮습니다. 시련을 좀 당해도 괜찮습니다. 왜 믿음으로 주님이 나를 정결하게 하시는 기회로 사용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믿음? 환란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이것을 단지 인간의 괴로운 고통으로 끝나게 해서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없습니다. 어떻게? 승화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이 고난의 괴로움은 내 굳어진 마음과 망가진 영혼, 더러운 것들이 녹아 있는 내 심령을 녹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불이다. 그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환란이 밀려오고 연단의 칼바람이 불수록 우리는 주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그분을 붙들면 대부분 다 해결이 됩니다. 꽉 붙들고 그래서 내 인생이 평화롭고 행복했던 때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을 꼭 붙들고 거기서 받는 환란과 눈을 뜰 수 없는 시련과 수많은 연단이 자기를 정결케 하는 기회로 삼을 때 지금은 그 연단이 쓰리고 아프지만 그 연단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이 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매일매일 살아가는 신앙, 이것이 연단을 받는 자의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2. 은을 단련함과 같이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시66:10)
시편 66편의 표제에는 누가 이 시를 지었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시 역시 다윗이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우리가 읽은 그 본문 앞부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원한 소명이 되고 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사건이 노래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애굽에서 십대 재앙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430년간의 노예 살이를 끝내고 애굽을 떠나올 때는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마주하게 되었고 뒤에는 뒤늦게 이들을 보내준 것을 후회하는 바로의 강퍅함으로 수많은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원수들의 병거소리가 광야에 가득하고 앞에는 천길 물속 같은 그런 망망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보태어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밤늦도록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튿날 이른 아침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것입니다. 2-300만이 족히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땅과 같이 좌우로 벽면하고 선 물을 지나 홍해를 건너게 되었고 이윽고 뒤따라온 애굽의 600승의 병거를 수장해버리셨을 때 그들은 강 건너편 언덕에 올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는 바로 이 위대한 여호와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고 그리고 이 노래는 그 후로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리사이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적을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절망의 어두운 밤바다가 변하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목격하는 찬양의 바다가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어 오신 것을 회상하면서 자기 개인의 환난과 시련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지를 결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살 때도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들이 잘못 살 때도 우리가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에는 어떤 변동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 것을 한번도 후회하시는 적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도 시집장가 가서 어린아이들을 낳아보면 지금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 자녀의 아비된 것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울 때가 있으리만치 자식이 잘못하는 적도 있지만 그러나 단 한번도 그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하는 부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을 후회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식을 낳아놓은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기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끊임없이 만들어 가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풀밭을 거닐며 들꽃이나 따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이런 절망에 바다 벼랑 끝에 세우시기도 하고 아무 도움이 없는 바다를 뒤로 하고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원수들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위기를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놓으신 후에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고치고 또 고쳐서 당신의 마음에 정말 좋은 자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여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그 명분에 부합하는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그 내면의 세계와 통일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울 삼으셔서 우리의 존재가 당신을 반영하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철판에 가이사의 얼굴이 찍혔기 때문에 값진 화폐가 되었듯이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가 값진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혹하리만치 혹독하게 다루셔서라도 우리를 정결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모르거니와 거듭난 사람들, 그리고 특히 복음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맞본 사람들은 그렇게 주님을 만난 이후로 이제껏 까지 생애 전체가 구도의 길이었습니다. 달려가던 적도 있고, 걸어가던 적도 있고, 주저앉은 적도 있고, 혹은 쓰러져 엎드려서 피 흘리며 원수의 조롱거리가 된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길을 떠난 적은 한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우리들이 하나님 보다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우세한 욕망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평생에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회복시키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그 구원의 계획을 성취시켜드리는 것이 인생에 가장 커다란 보람이요 기쁨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종종 견고한 신앙생활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자를 견고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자를 견고케 하시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신앙의 견고함은 그 사람의 결단과 용기, 그리고 그 사람의 분투하는 삶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견고함은 마치 그 사람이 전쟁터에서 탈취한 탈취물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무용담처럼 자신이 얼마나 견고하게 살아왔는지를 들으며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먼 영화배우들을 보고 박수를 치듯이 우리는 그들의 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견고하게 하시는 당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신자를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하시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이 연단을 통해서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유리할 때 주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몰랐습니다.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헐떡이는 짐승처럼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어두운 지성을 깨고 어느 날 복음의 밝은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오래 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내가 주 예수를 알기 전 그때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서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을 깊이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일평생 가도 약해질 수는 없지만 파멸될 수 없는 한 소망을 심으셨으니 그것은 우리 하나님과 및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후로 한 아이가 복음 안에서 태어나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거듭난 이후에 인생의 발자국들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걸어왔는지 아십니다.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서고 나면 모든 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었고 우리의 평생 힘쓸 의무가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주님의 고쳐주심을 바라고 그리고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려고 매 순간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내 안에 있는 경향성들과 싸우며 힘겹게 마음을 지키려고 애썼던 이 모든 발자취들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경망한 신자의 마음속에도 부패와 그리고 죄악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렇게 드리는 일상적인 예배와 그리고 이렇게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와 그리고 찬송과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습과 이 모든 일속에 그 모든 은혜의 공격을 피하고 살아남는 부패성과 죄들입니다. 이런 부패성과 죄는 뛰어난 경건한 삶을 이어가는 신자들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패성과 죄는 그들의 타고난 성품과 기질을 특별히 활용해서 그 갈피갈피에 끼어 있으니 그것이 자기와 하나 되어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더 순전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연단이라고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연단하셔서 흠 없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그 작업을 은을 단련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역사마다 금과 은을 제련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항상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고체 상태에 은이 섞인 광석을 잘게 부스고 부서진 것에서 은을 많이 함유한 금속가루들을 다시 모으고 그것들을 강한 불로 녹여서 재료 분류를 시킨 후에 그 순도 높은 은들을 거기에서 걸러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작업을 통해서 은이 순도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은으로 만든 작품이 있다고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녹이 슬고 그리고 색깔이 변한다면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결하게 정제된 은은 세월이 많이 지나도 그 아름다운 본질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를 불과 같이 혹독한 시련이나 고통을 통해서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성화의 작업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단련하시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험한다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바한”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바한은 원래 어떤 작업을 통해서 그것이 참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거나 혹은 섞여 있는 것들을 분리해서 참된 것들을 가려내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시편 27편에서 경건한 시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시험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자신만만하게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도 자신을 다 알지 못하니 주님이 무엇으로든지 시험하셔서 내 안에 마땅히 되어야 할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보게 해달라고 하는 고도의 성화를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바한이 바로 거기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우리 나름대로의 철학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잘살든지 못살든지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었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마치 달팽이가 껍질 속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고 보호를 받듯이 남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우리는 그런 인생관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우리의 그 기질이 우리의 인생관에 알맞게끔 맞추어졌고 성품도 그렇게 빚어져갔습니다. 때로는 좋은 환경이 우리를 좋게도 만들었지만 방종하게도 만들었고 때로는 나쁜 환경이 우리를 강하게도 만들었지만 그러나 왜곡되게도 만들면서 우리는 그렇게 성장해왔고 이제는 그런 성품과 기질과 그리고 우리의 본성이 이제 더 이상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 될 것은 이런 성품 속에 우리의 기질 속에 일생을 우리들이 살아온 동안에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죄가 숨는 은신처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가 우리의 성품과 기질 속에 은신처 역할을 했고 그리고 그것은 분리되지 않은 채 우리의 경향이 우리의 성품과 하나 되어서 그 모두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런 평범한 예배생활과 일상적인 신앙생활, 틀에 박힌 기도생활과 그리고 말씀에 대한 접근들, 이 모든 것들은 항상 기회일 뿐이지 그것이 결정적으로 우리를 바꾸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이 처음에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열망은 뜨거워지기도 하였지만 식어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는 일에 있어서 엄격해지기보다는 너그러워지기가 쉬웠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죄와 부패성들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들이 모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만난 이후로 우리 삶의 최고의 숙제는 어떻게 그분께 온전히 사랑받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얼마 안 되는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살아온 인생의 길이만큼 회고록을 써두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처럼 젊은 나이에 주님을 만나고 신앙의 길에 들어섰는데 하는 것 없이 긴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인생을 회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런 인생의 길을 잠깐 동안에 걸어왔습니다. 돌아보면 주님이 주신 많은 구원의 은혜들을 가슴에 품고 치열하게 산다고 살았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성화의 길을 갔던 적은 부끄럽게도 너무 적은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걸어온 모든 인생의 길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남들이 우리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존재이고 그 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가 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도록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수시로 불같은 시험을 만나고 그리고 고난을 만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실패 속에서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사랑받는 것으로 만족하던 정말 하늘에 속했던 것과 같은 그런 아름다운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불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의 불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불에 의해서 달구어지고 제련된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난을 통해서, 때로는 인간관계의 고통을 통해서, 때로는 물질을 통해서, 때로는 건강을 통해서, 때로는 그 모든 것들이 그냥 그대로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자신의 밑도 끝도 없는 부패한 성품의 바닥을 보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절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성도 한분이 장암에 걸렸습니다. 3기에 접어들었으니까 사실 수술해도 소용이 없는데 가족들의 마음이야 그렇습니까, 8시간에 걸쳐서 대수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간신히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서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의사의 성미도 괴팍하지 수술이 끝난 지 한참이 되었는데 세수 대야를 들고 회복실로 오더니 보여주는데 피에 흥건히 고인 암 덩어리가 거의 반이 넘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면서하는 말이 이게 당신 몸속에서 뜯어낸 암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그 환자도 그것을 보는 순간에 막 토할 것 같은 구토증을 느꼈습니다. 그게 자신의 몸속에 있었을 때는 살이었고 한번도 자신의 몸속에 그런 살이 있어서 구토증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떼어놓고 보는 그 순간 그는 정말 더럽고 자기의 생명을 갈아먹은 암 덩어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도 내면의 세계는 양파껍질과 같습니다. 경건한 겉모습을 벗겨내면 그 속에 부패한 인간의 욕망이 있고 욕망을 벗겨내고 나면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을 더 벗겨내면 그 안에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사랑받는 것으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감정과 제 멋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아가 그 속에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과 틀에 박힌 잘 짜여진 섬김의 삶 속에서 자신도 그 안에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면서 불편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영혼에 실증을 주고 성화의 진전이 거의 없도록 만들어주며 말씀을 깨달아도 차갑게 지식적으로 정립되는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드는 주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핏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너무나 불쌍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때로는 그들 가운데 한 덩어리가 되어서 붙어 있는 자신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그들의 죄와 부패성들을 한곳으로 재료 분류시키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작업을 오늘 히브리 성경에서 바한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불순물들이 섞여 있는 채 철판 상태로 있는 그 은을 도가니에 던져놓고 치열한 불을 가하면 녹기 시작하고 은은 액체가 됩니다. 고체 상태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던 재료들 중에 은이 아닌 것들 그 중에서 불을 견디지 못하는 것들을 타버리고 견딜 수 있는 것들을 액체가 된 은 아래 갈아 앉으면서 모레는 모레대로 흙은 흙대로 그리고 이제 순결한 은 국물은 국물대로 분류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도가니에서 따라내고 찌꺼기를 버리고 굳혀서 다시 뜨겁게 달구어서 다시 세미한 찌꺼기를 갈아내고 걸러내고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무한히 반복하는 동안에 임금의 상에 올라갈 수 있는 아름다운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여전히 자기도 모르는 깊은 부패성과 죄 성을 간직한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고 성화의 진전이 없는 무기력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연단하십니다. 때로는 그렇게 우리를 연단하시는 그 과정이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인 순결한 고난을 통해서 올 때도 있지만 인간의 머리를 굴리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잔재주로 살아온 사람을 치셔서 그래서 자기의 꾀에 빠지게 하시는 때도 있고, 그리고 자기가 잘못한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당하게 하심으로서 그 마음을 불과 같이 연단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뜨겁게 단련하시는데 때로는 신자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면서 당하는 그 불같은 시련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는 방법을 가혹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다루시는 그 시련의 불길을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죄와 함께 역사하는 율법과 그리고 양심의 송사요 정죄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의 자녀를 향해서 복수하시는 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자녀를 낳아서 때로는 화가 나면 이성을 잃고 자녀를 때리는 적은 있지만 그러나 자녀를 낳은 것을 후회한 적이 없고 자녀가 행한 일에 대해서 인간은 보복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치열한 불속에 녹이시더라도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통을 피하고 싶고 때로는 차라리 조용히 눈을 감고 영원히 뜨지 말았으면 하는 그런 고통의 때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열하게 다루십니다.
한 아이가 거리에서 놀다가 넘어졌습니다. 이마가 찢어져서 15바늘 꿰매야 될 정도로 껍질이 찢어져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고 엄마는 사색이 되어서 붕대로 이 아이의 피를 누르면서 병원으로 업고 뛰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의사는 그 아이를 수술대 위에 누였고 그런 수술은 마취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취 크림을 그 자리에 바르고 수술을 합니다. 아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엄마를 봅니다. 간호원 두 사람이 다리를 붙들고 엄마가 두 팔을 꼭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큰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꿰매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자지러지기 시작합니다. 엄마 이 사람들이 나를 저 아픈 바늘로 찌르려고 해. 엄마 나 좀 도와줘. 엄마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그 고통 속에 두려워 떨며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그 아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생각에는 큰 바늘을 가지고 다가오는 의사의 팔목을 붙들고 비틀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의사가 그 큰 바늘로 자기의 살을 찌르도록 내버려둡니다. 아마 그 어린아이는 엄마가 왜 그러는지 그 순간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고치기 위해서 엄마는 잠시 당하는 아들의 고통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참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불같이 연단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련의 불을 가하시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도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고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아름다운 풀밭이나 그리고 잔잔한 물가에서 물장구나 치면서 혹은 잔디밭에서 들꽃이나 뜯으며 놀게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시련과 폭풍 한 가운데를 지나게 하시고 그리고 강력한 그 불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 불에 대일 때 얼마나 아픈지 연단을 받아본 사람들은 잘 압니다. 그 불은 우리의 인내를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신비한 고통과 치료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인내했던 부분까지만 하나님이 고통을 가하시면 예전에 고쳤던 부분까지만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살을 찢는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고통, 때로는 하나님이 이 고통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시는지 때로는 하나님이 시인이 고백하듯이 하나님은 정녕 나를 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정녕 나에게 은혜를 거두셨는가?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처절한 외로움 속에 우리를 홀로 두시면서 고통의 쓴맛을 보게 하시면서 예전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기 안에 있는 자기가 아닌 것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 치열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재료분류가 되는 것처럼 그 악과 그 모든 부패의 찌꺼기들이 한군데 모이기 시작할 때 그때 최초로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사실 때문에 고통하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성품과 기질 갈피갈피에 끼어서 우리로 거짓되고 그리고 위선된 삶을 살게 만들었던 그것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때 신자는 비로소 최초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질과 성품, 그리고 거기에 한 덩어리가 되어서 붙어 있던 죄가 동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최초로 그것들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나님이 바꾸어놓으십니다. 자기 몸 안에 붙어 있을 때는 다른 몸의 지체처럼 아끼고 사랑했지만 수술하는 의사의 칼에 의해서 떼어내게 되자 그 암 덩어리로부터 혐오하는 마음을 갖고 구토증을 일으키게 된 그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매일 우리가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은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깊은 밑바닥을 볼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우리도 알지 못하는 너무나 많은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은혜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행복이기 때문에 시편 첫 편의 머리말에서 말하기를 “복이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고 그렇게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도저히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열한 불 가운데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넘은 어느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대든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녹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은 그때에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몇을 죽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순응하는 마음이 안 들고 하나님은 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다 가져가시냐고, 그리고 생명처럼 사랑하는 지체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사랑했는데 가슴에 큰 칼을 꽂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내가 뭐라도 좀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은 다 가져가십니까?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외롭게 서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좋으시냐고, 얼마를 그렇게 기도하다가 책상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깨고 나서 다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 전해졌습니다. 나 자신이 너의 기업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철저하게 연단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홀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때를 기준으로 한 5년 전에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이사야 40장을 읽는데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오,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여기에서 제 가슴을 깊이 후벼 팠던 것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였습니다. 6개월 동안을 침대에 엎드려서 매일 울었습니다. 지금도 왜 울었는지 우리 집 사람은 모릅니다. 매일 울었습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 한복판에 단독자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렸을 때 읽었던 팡세를 최초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하네. 더 진전시킬 수 없지만 이 주제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6개월 동안을 통곡하며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시편을 보니까 이미 시인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습니까? 그러면서 이 세상에 있는 소위 보람이오, 가치라고 불리던 많은 것들 젊은 나이에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던 그 수많은 인간적인 꿈들이 중공군이 전투 중에 이성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마셨다고 하는 배갈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정말 무서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너무 무섭고 그리스도 안에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그 영원히 계속되는 그 긴 우주공간 속에 한 단독자로서 예전에는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사는 그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삶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이 신자로 사는 그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든 것인지를 인식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의 피상성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나면 하나님이 그 과정을 통해서 유리그릇처럼 부서지기 쉬운 저를 강한 사람으로 다루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지금도 다시 돌아가서 경험하고 싶지 않은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매 순간 그런 구도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만약 그런 구도의 도상에 서서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께만 귀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얼마나 달라진 모습이 되었을까요?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고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가지만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이 시험하심으로 우리가 녹아버리고 이전의 신앙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알 수 없었던, 감지될 수 없었던 있어도 우리가 관용을 베풀었던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와 그리고 부패한 욕망들이 재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매일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며 우리의 죄와 부패함들이 재료 분리되어도 우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고 끊임없는 거룩의 작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오늘 묻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최근에 하나님 앞에 녹아내린 적이 있습니까? 견딜 수 없는 불과 같은 고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진저리치는 인식 속에서 우리 자신이 녹아내린 경험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욕망과 부패의 찌꺼기들이 재료 분리가 되고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지 않을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인을 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을 거슬려 살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복음적인 성화의 교리가 너무 가혹하고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은혜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이 아니오, 숫 송아지로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 물같이 녹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범죄하고 난 후에 깨달았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니 주께서 그것을 원하셨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보면 단련한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녹여서 주저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철판쪼가리로 존재하던 그 이질적인 금속이 섞여 있는 싸구려 은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서 열을 가했더니 탈 수 있는 것들은 타버리고 그래도 열을 견딜 수 있는 것들은 액체가 된 은 속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재료분리가 되었습니다. 재련사는 그것을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이나 걸러내면서 순전한 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다운 꽃병 모양의 틀에 부었습니다. 예전에는 발에 채여 굴러다니던 가짜 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철판쪼가리였는데 재료분리가 되고 그리고 녹아져서 새로운 틀에 부어지고 나니까 왕의 침상에 오르는 아름다운 화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주님의 형상을 내 마음에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만들어달라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녹지 않고는 하나님도 그렇게 만드실 수가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분이 시골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장로님 한분이 그렇게 젊은 목회자인 자기를 말할 수 없이 괴롭게 갈구더랍니다.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장로님 좀 변화시켜주십시오. 눈물로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데 애야, 그 애는 나도 못 바꾼다. 네가 바뀌어라. 마음이 녹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새사람을 만드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빼어난 지식이 없어도, 높은 명예나 그리고 많은 재물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마음이 물같이 녹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살면서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 죄 가운데서 마음이 녹아지고 참회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사용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더러운 죄인이었고 그리고 창녀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녹이시고 새 사람을 만드셔서 이제는 시인들이 노래하는 풀 미역과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거룩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약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연단하셔서 우리를 순결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합니다. 더 많이 불을 통과해야 합니다. 더 많이 우리 안에 있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안에 밑바닥이 드러나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단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이렇게 우리를 시험하시고 새롭게 단련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3. 달콤한 연단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 택하였노라”(사48:10)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할 때에 그들의 신앙은 많이 침체되어 있었고 그리고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애틋한 사랑은 물질적인 번영과 세속화 속에서 많이 퇴색되어버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1장부터 39장까지 엄위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면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40장서부터 마지막 끝나는 66장까지는 어조가 변하여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와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이 많이 깨트려지고 망가졌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고쳐서 당신이 그들을 선택하신 목적대로 살게끔 만들어주시려고 작정하신 것을 하반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내가 너희를 연단하되 은을 단련함 같이 하지 아니하고 고난의 풀무에서 너를 건져내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연단의 목적은 그 앞에 나와 있는 성경구절에 의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하셔서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연단하실 때는 항상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만약에 고통이 아니라면 그것은 연단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락을 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이 원하시는 뜻대로 바꾸어놓으실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마음에 맞는 존재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이렇게 연단하실 때에도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연단을 받으면서 환난을 통과할 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입니다.
연단을 받지만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 때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고 고통으로 말미암은 혼란된 생각이 그들 안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난과 큰 고통 속에서 아파하고 신음하지만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고 있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도움을 구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 연단을 통해서 당하고 있는 고통을 어떻게 피해보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울부짖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환난을 당하고 그리고 아파하지만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예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범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복수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을 때 신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 찬 가운데 양심의 정죄와 송사에 시달리게 됩니다.
두 번째 경우는 그 연단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경우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 연단을 받고 그 연단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연단 속에서 자신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은 비로소 자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환난과 이 고난이 자신의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나 분풀이, 혹은 보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전에는 그냥 고통을 당할 뿐이었는데 이제 그 자신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연단이 아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를 바꾸어놓고 자기를 어디론가 데려가기를 원하는 계획이 있는 연단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되면 될 수록 예전에 많은 관심사들이 단순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신다고 할 때 매개체 없이 우리를 연단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많이 있는 물질 때문에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한다면 적절하게 그 물질을 다루셔서 손해를 보게 하실 텐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까 금고에 있는 돈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그릇된 방식으로 사업을 하게 하시거나 아니면 잘못된 사람들을 만나서 손해를 보게 하시거나 어째든 매개체를 사용하셔서 일하실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이 많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한 마음이 생겼다면 적절하게 하나님이 우리의 지위를 낮추시기도 하고 우리의 명예를 축내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매개자 없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건이나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의 지위를 낮추시고 명예를 손상시키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다 분복을 사용하셔서 그런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환난 속에서 못 만나면 하나님을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 매개자만을 가지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분내고 이러면서 자신의 인생의 정욕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두웠던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주신 이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연단 그 속에서 경험하는 그 환난과 시련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깊이 주님을 만나고 깨트려진 다음에는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자신이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삶의 상황을 마지막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 있는 관심, 사람을 향한 원망과 미움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직접 이 환난의 연단 속에서 건져내주셨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이 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선지자는 두 가지 연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을 연단하는 것과 그리고 성도를 연단하는 것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 가운데 위로가 연단 당하는 성도들에게 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은을 연단하는 것입니다. 은을 연단할 때는 은과 하나 되어서 붙어 있는 불순물들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사정없이 뜨거운 열을 가해서 그 은에 섞인 불순물들을 태워버리거나 타지 않는 것들은 은을 완전히 녹여 물로 만들어서 비중에 차이에 의해서 바닥에 갈아 앉아버리게 그래서 순수한 은만을 골라내는 그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련사는 정결케 하여야 할 그 은 덩어리를 도가니에 넣고 사정없이 뜨거운 풀무불로 그 도가니를 달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도가니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그 속에 있는 물들이 은이 녹아서 그래서 물처럼 녹고 거기 섞인 불순물들이 연기를 내면서 타버리고 섞여 있는 무거운 불순물들이 은물 아래로 가라앉아버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제련사의 목적은 은을 깨끗한 은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탈 때까지 은과 섞여 있는 그 불순물의 이물질이 떨어져 나올 때까지 은이 얼마나 많은 열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강력한 불을 보내서 은을 완전히 녹여버리는 일을 합니다. 은 자체를 정결케 하기위해서 사정없이 불길을 보내는 것이 제련사의 은을 제련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성도를 연단의 불의 통해서 정결하게 하고자 한다는 의도에 있어서는 제련사와 동일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연단하시는 방법이 제련사를 은을 연단하는 방법과는 그 점에서 있어서는 같지만 그러나 또 다른 점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은을 연단할 때는 사정없이 불을 보내시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를 연단하실 때에는 성도들의 그 존재와 상황을 보시면서 불길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에게 너무 뜨거운 연단을 보내시면 다 타버립니다. 이제 방금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볼까 하는 사람에게 순교할래? 그러면 차라리 주님을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가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다, 우리가 시련을 당하면 그것은 반드시 감당할 수 있거나 혹은 감당할 시험을 주시거나 혹은 지혜를 구하면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사정없이 죽든지 말든지 그렇게 연단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자녀를 야단칠 때 그때도 자녀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하면서 각각 다르게 다루어야 합니다. 조금만 야단치면 거의 자존감이 상해서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는 그런 마음의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워낙 강하면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놓고 이 자식 저 자식 그러면서 야단치면 완전히 돌아버립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어느 형제 하나는 누가 심하게 모욕을 주었는데 그때 이후로 정신병이 생겼다고 그렇습니다. 의학적으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합니다. 안 되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계기가 되어서 어떤 원인자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기가 됩니다. 확 드러나서 정신병 증세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차별대우를 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다루는 방법이 그 기질에 따라서 각각 달라야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맷집이 좋은 사람들은 야단을 많이 쳐야 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제이고 그리고 자존감이 높고 아직 많이 고쳐지지 않은 사람들은 살살 다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 하나님이 다루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다루되 은을 제련하는 사람이 사정없이 불을 가해서 은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찌꺼기만 뽑아내려고 하는 방식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친히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어느 부분이 약한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고통을 견디고 어디까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지 다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보시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인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이유로 환난을 당하고 연단을 받든지 간에 그 연단이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연단, 그리고 도저히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연단, 그런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자리로 돌아오면 그것을 잘 연단을 감당하고 그래서 우리들이 고통 속에서도 정결한 은과 같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 변화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경험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은은 사정없는 불길에 연단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연단하시는 가운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단 속에서 우리에게 그 연단을 감당할 수 있는 넘치는 위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연단 속에서 주님의 달콤함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환난의 연단 속에서 오히려 주님의 넘치는 위로를 경험함으로서 우리 자신의 결점과 모순들을 발견하고 좋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더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연단 중에 성도에게 주시는 위로가 무엇인가? 우선 총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연단 중에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환난의 많은 연단 가운데서 시련과 고통을 받을 때는 심령이 찢어지는 것과 같고 고통스럽고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복수당하는 것과 같고 그리고 자신이 버려진 것과 같이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그 모든 연단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 만약에 이런 징계의 단련이 없으면 그는 참 아들이 아니라 사생자라.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기대를 가지십니다. 버린 자식에게 신경을 씁니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기대와 관심이 많이 갑니다. 그래서 부모인 우리의 마음이 많이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받는 그 일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아픈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마음과 죄가 하나로 되어 있고 부패한 성품과 우리의 본성이 하나 되어 있을 때는 마치 오랫동안 모세가 신고 다녔던 신발처럼 정말 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을 때는 편했지만 호렙산 불붙는 가시나무떨기 앞에 와서 주님을 대면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편하게 신고 다녔던 신발을 벗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던 것처럼 그것을 벗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벗어버리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신발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던 이 죄와 부패함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예전에 갖고 있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갖게 하셔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흔들어놓지 않으시면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력한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심으로 말미암아 단단했던 우리의 마음과 함께 붙어있던 우리의 죄와 욕심들의 정체를 객관적으로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철저히 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이제까지 사랑했던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고통을 드린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미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단단했던 마음이 흔들려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하나 되었던 죄와 욕심, 부패 함들이 분리되기 시작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녹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녹이시지 아니하고는 우리와 함께 붙어 있는 그 죄의 더러움들을 떼어내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연단의 불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릴 때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껏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던 것들로 격리될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과 결별하거나 혹은 편안했던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내동댕이쳐질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익숙해왔던 것들을 잃어버리고 외톨박이가 되어서 사는 것보다는 우리가 갖고 싶고 누리고 싶었던 것과 함께 헤어지는 것과 함께 우리도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날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자기 아집과 그리고 집착에 매달리는 우리의 강한 집착은 실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요한 것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떼어놓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순결하게 연단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만들기까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연단이 없이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마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이 통회하는 마음, 마음의 중심에 통회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통회하는 자의 마음이 히브리어에서는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고기 같은 것을 막 짓이기면 다져버리면 아주 부드럽게 됩니다. 그렇게 깨진 정도가 아니라, 깨진 마음은 상한 마음이고 깨진 정도가 아니라 그냥 짓이겨서 자기의 고유한 본성적인 형체를 거의 잃어버린 그렇게 된 마음입니다. 그게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고통 없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흔히 생활하다가 어디에 쾅 하고 부딪혀서 어디에 시퍼렇게 멍이 들게 되면 며칠동안 그 부분에 손을 댈 수가 없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지고 아픕니다.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그런 짓이겨진 마음속에서 그 마음이 곧 은으로 말하자면 완전히 녹은 상태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딱딱한 마음속에 함께 붙어있던 모든 더러운 죄악과 하나님이 아닌 것들, 허탄한 것들에 대한 소망 같은 것들이 모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타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고통을 사용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몰라서 그렇지 생각보다도 매우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깊이 믿으면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실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망하지 않는 방법은 기대를 안 걸면 됩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난을 사용하셔서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계속 연단을 가하시면 어느 순간에 우리가 부서져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연단 가운데서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위로를 주시는가 하면 두 가지 방법으로 위로를 주십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서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 경험을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을 들으심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밖에 느끼지 못하도록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돈이 생겼다든지 아니면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복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십일조도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몰라 또 다 바치면서 회개하면,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두 바치면 그럼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벌써 그 돈을 깨끗한 돈이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안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아무리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물같이 쏟아지고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고 당신의 친밀한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느끼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경배해요 하나님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존귀히 높이 높이 울리리
그래서 주님이 나의 음성을 모두 듣고 계시다. 그리고 이 환난의 연단 가운데 내가 부르짖는 기도에 간절히 귀를 기울이시고 그렇게 기도하는 나를 받아주고 계시다는 경험을 통해서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간에 만약에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만 있다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고 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만 살아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성도들이 누구인가? 가난하고 돈이 없는 성도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한 성도들이 불쌍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성도들은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듣지 아니하시는 것과 같은 영혼의 상태에 있는 신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주님이 말씀을 안 해주십니다. 그렇게 살수 있는 힘을 공급받고 싶은데 주님께로부터 그 얼굴빛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십시오. 경건한 성도들의 간절한 소원이 “주의 얼굴빛을 내게 비추시고 주의 도를 만방에 알리소서. 내가 부르짖을 때 잠잠치 마옵소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게 경건한 신자의 간절한 목마름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자의 간절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연단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연단 가운데서 이런 위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환난의 비바람은 불지만 그 속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든든한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위로를 주십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바라고 주만 바라볼지라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연단을 받는 성도들은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 환난 가운데 오게 되었는지, 어떤 인간이 나를 이 고통 속에 몰아넣었는지, 그 사람들을 향한 복수의 일념에 불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 사용하신 수단들이었을 뿐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 풍랑을 인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을 녹이시고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모두 깨트리시고 태워버리시기를 위해서 부르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달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위로 때문에 우리에게 담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내가 불 가운데를 지날지라도, 내가 물 가운데를 통과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 연단을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실 것이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연단을 받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119편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는 고난을 당할 때는 그게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쓴 약을 먹어서 몸에 좋은 것은 나중 문제고 쓴 것은 항상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에 대한 해석은 나중 문제고 일단 고난과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참 좋다. 뭔가 정신이상이 아니면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어째든 자기에게 가해지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피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식물 중에서도 툭 치면 오그라드는 식물이 있습니다. 싫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면서 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는데 고난을 당하면서 굳어진 마음이 녹고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당신의 율례를 가르쳐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었는데 고난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주 뜻대로 살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시인에게는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위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앙생활 잘하고 충만한 사람들을 더 충만하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연단하시는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많은 연단은 정신 차리고 못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번 흔들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연단을 통해서 그 사람을 새롭게 하시기 전에 이미 이 사람의 마음이 세상에 대한 염려와 사랑에 대해서 굳어지고 흐트러져 있어서 그래서 이 사람의 마음이 단단해져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해주셔도 그 주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혹은 세상에 있는 사랑 때문에 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면 될 것들에 대한 과도한 염려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에는 자기는 잘한다고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마치 더듬이가 잘린 귀뚜라미와 같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귀뚜라미를 갖고 장난을 많이 했습니다. 애들이 가을에 귀뚜라미를 잡아서 더듬이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립니다. 잔인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워낙 놀이기구가 없으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도 애들이 놀았습니다. 이 귀뚜라미가 조금 난 더듬이가 막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게 길어야지만 더듬어보고 지형지물을 파악해서 그래서 뛸 텐데 아무리 까딱여도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은 뛰는데 삼지 사방으로 막 뛰다가 벽에 부딪힙니다. 그런 신세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돈 많이 갖고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오른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언제든지 자신의 인생에 가는 길을 물을 때 말씀해주신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는 신자, 그래서 언제든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자,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신자, 그 사람이복이 있는 신자입니다. 연단 가운데서 갈 길을 모르고 환난에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때에 이미 그 환난과 연단 속에서 신자의 마음은 지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양심에 많은 가책을 느끼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릅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할 때 어느 순간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그들에게 얼마나 달콤합니까!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게 해주시고 오랫동안 메말랐던 마음에 하나님의 온유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예전에는 세상사랑 때문에 귀먹어서 안 들려, 그리고 혼란 속에 어두워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십니다. 세상 사랑을 죽이시고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욕망을 죽이시고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불로 태우실 때 우리 안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여기 나와서 만의 태도만 아니라 일주일동안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일에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만나고난 다음에는 만난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제가 살고 싶습니다. 그게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사모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예배입니다.
침체 속에 있어서 불같은 연단을 받을 때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거기서 허탄한 것들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인격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놀랍고 큰 증거, 이런 것들은 큰 것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통해서 느껴집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잠깐 나갈 일이 있어서 행 길에 나갔는데 중학교 1학년짜리 우리 딸애가 거기서 걸어옵니다. 내가 반가워서 길거리에서 끌어안고 뽀뽀를 했습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사니까. 그것도 한 5번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뽀뽀를 했는데 눈물이 흐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뭔 일이 있니? 설마 아빠가 해준 뽀뽀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은 아닐 것이고, 왜 그러는 거니? 아빠, 그래 왜? 우리 교생선생님이 도로 간데. 대학교 청년 애들이 교생실습을 나오는데 한달 딱 하는데 애네 반을 아마 맡았던 모양입니다.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편지를 보내주고 선물 보내주고 사랑한다고 그러고, 애가 한 달 동안 사랑에 푹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선물을 뭐 얼만한 것을 보내겠습니까? 애들도 많은데, 편지 몇 줄을 써서 보냈는데 그게 아이의 마음을 확 사로잡은 것입니다. 사실 한달도 안 되어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헤어지는 것이 그렇게 슬퍼서 눈물을 흘리면서 학교가 꽤 먼데 걸어오면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 우리가 연단을 받고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돈이 우리의 위로가 됩니까?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까? 나의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나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위로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움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동안 불순종하고 살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구나. 어떤 때는 은혜를 많이 받는 지체를 보면서 소외감을 느끼고 더 낙심합니다. 아! 저 사람은 그렇게 순종하더니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는구나. 그리고 나는 그 동안에 불순종하고 살았으니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다했구나. 그리고 이제 주님이 더 이상 내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구나.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나를 잊으셨구나. 이렇게 느껴질 때 어느 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모으고 주님이 이 환난의 연단 속에서 나를 구해주시기를 호소할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정말 불순종하고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던 지체가 있었습니다. 너무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먼 길을 찾아서 물어서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대원들이 잠시 나가고 같이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살던 그 지체가 나이도 많은 사람이 어깨를 들먹이면서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목사님, 이제는 목사님이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잊혀지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짐승은 그 주인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잊어버리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타나고 싶어 하고 기도를 들어주고 싶어 하시고 말씀해주시고 싶어 하시지 웬만하면 말씀 안하시고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안 만나주시고 하는 하나님이시겠는가. 그래서 주님이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도 찾으십니다. 그래서 많은 연단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혔다고 칩시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어디로 나가는지 알 수가 없고 아무리 외쳐도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저 끝에서 실락 같은 빛줄기 하나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얼마나 사소한 빛인지 그 빛줄기가 하나 들어왔다고 해서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벽에 끼어 있는 이끼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마 동굴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 실락 같은 빛줄기를 향해서 달려갈 것입니다. 왜 그 빛이 지금은 충분하지 않지만 그 빛이 곧 그 밖에 찬란한 광명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우리들이 다 들을 수는 없어도 환난가운데서 연단을 받으며 들리는 하나님의 그 한마디의 음성, 환난 가운데서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그 한마디의 음성, 그것을 우리의 귀에 듣게 하실 때 그때 성도의 영혼은 큰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그것은 곧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그것은 당신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여 저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받는 이 연단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이 연단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죄의 찌꺼기들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과 부패한 욕망들에 대한 이 모든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주님이 충분히 우리를 연단하시도록 허락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나를 빚으시고, 나를 녹이시고, 나를 변화시키시기까지, 하나님이 나를 깨트리시기까지, 새로 빚으시기까지, 녹아지고 형체 없이 망가지고 깨트려지도록 내가 세운 것은 모두 부서지고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은 모두 깨트려지고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빚어지는 새사람을 우리 안에 세우시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를 허물고 주님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받는 이 연단은 결코 하나님의 복수나 보복이 아니고 하나님은 오히려 이 연단을 통해서 우리를 더 정결케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고 아버지 앞에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끝.
4. 연단을 이루시는 인내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상)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를 연단하신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잘 깎여진 잘 만들어진 조각품 중에 칼에 깎이지 않고 그렇게 아름다운 조각품 나무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많이 받는 진실한 성도들 중에 단 한사람도 연단하시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서 많이 아팠던 사람들이 훌륭하게 잘 깎고 다듬어진 것입니다.
산에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둘이 말벗도 하면서 오랜 세월 어디 이사 가지도 않고 둘이 그렇게 나란히 서서 살았습니다. 태어난 나이도 비슷한데 세월이 흘러서 한 5-60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옆에 있는 친구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큰일 났다. 저 아래 좀 봐라. 나무꾼들이 큰 톱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러더니 그 많은 나무를 피해서 자기 둘이 서있는 그 앞에 오더니 둘이 같이 톱을 들고 잘라버립니다. 친구가 잘리고 그리고 자기도 잘렸습니다. 그래서 둘이 이제 나무꾼의 줄에 매여서 산 아래까지 끌려왔습니다. 거기 보니까 이미 산에서 잘려서 체포되어온 나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봤더니 한번 잘린 것은 유도 아니고 그것을 다시 톱으로 더 자릅니다. 그냥 한 일 미터 되게끔 툭툭 다 자릅니다. 야, 우리 큰일 났다. 우리도 저렇게 잘리겠지. 그러더니 툭툭 자기들도 그렇게 자릅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나무들을 다 깎아놓더니 건장한 사람이 오더니 도끼로 나무를 세워놓고 내려칩니다. 뻑 소리가 나면서 나무가 으악! 하고 반이 잘라졌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또 뒤집어놓고 한번 더 정수리를 뻑 하고 치더니 으악! 하더니 쪼개졌습니다. 그렇게 세 번씩 쳐서 네 쪼가리를 냅니다.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나도 이제 저 사람이 와서 저렇게 치겠구나. 그랬더니 드디어 자기를 가지고 오더니 세워놓더니 커다란 도끼를 갖고 내려쳐서 네 쪼가리를 내어서 저기가 쌓아놓을 줄 알았더니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더니 그 나무를 갖다가 소금물에 풍덩 집어넣습니다. 생전 나무가 바다에서 수영을 해본 적이 있나, 지독하게 짠 소금물에 들어갔습니다. 며칠동안 절어서 이제는 정말 코에서 단내가 날 정도가 되었더니 이제 다시 꺼냅니다. 그러더니 그다음에는 정성껏 털어서 그늘에다가 말렸습니다.
이 나무가 참 이상하다. 왜 저 나무는 네 번식 얻어맞고는 쪼개져서 저기 가서 누워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쪼개지도 않고 짠물에 집어넣었다가 그늘에 놓았다가 하면서 이렇게 나를 오랫동안 불안하게 할까? 그리고 드디어 여기 나를 놔두려나보다 하고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그 그늘에서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자기를 번쩍 들고 어떤 사람이 창고 같은 곳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드디어 이 나무를 쳐서 살갗을 벗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그 다음에는 살갗을 다 벗겨내고 나니까 추웠습니다. 부끄럽게 알몸으로 이렇게 서 있는데 그 다음에는 뭘 가져오는지 도끼는 안 가져오고 기다란 연장들을 가지고 두들기고 깎고 구멍을 파고 생난리를 하는데 차라리 세대 맞고 쪼개져서 저 구석에 친구들과 같이 쌓여있는 게 낫지 결국은 뭐 후벼 파고 쪼개서 잘라내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는 생전 보지도 못한 싹 하는 불꽃이 나오는 것을 가져와서 막 구워버립니다. 그리고 까무러쳤습니다. 그리고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득한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까무러친 가운데 멀리서 웅성웅성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이렇게 눈을 떠보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렸습니다. 눈을 떠서 보니까 찬란한 불빛이 자기에게 이렇게 비칩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주 고급스러운 비단위에 누워있습니다.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여서 쳐다봅니다. 쳐다보는 표정을 가만히 보니까 자기를 보면서 감탄을 하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뭔 일인가 하고 보니까 자기 앞에 이름표가 하나 있어서 보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대가의 명품입니다. 건드리지 마시고 구경만 하십시오.’ 이 정도에서 설교를 마쳐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바이올린 중에서 제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제 기억으로는 17세기로 기억이 되는데 바이올린 중에 스타리 디발디라고 하는 장인이 만든 바이올린이 있습니다. 아직도 아마 전 세계에서 200개 정도 남았다고 하는 것 같은데 개수는 제가 확실하게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서 세어본 것은 아니고, 제 기억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어마어마합니다.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 몇 개만 팔면 교육관을 살 수도 있을 정도로 그렇게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세월동안 바이올린을 만들었는데 19세기도 아니고 20세기도 아니고 17세기에 그 한사람이 그 한곳에 있는 나무를 만든 그것이 그렇게 명품이 될 수 있을까?
이제 거기에 몇 가지 요인이 나왔는데 하나는 탁월한 장인의 솜씨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사람보다도 더 이 세상에 태어나기 힘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무의 특수성입니다. 그래서 기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시대를 다 연구하고 그 사람이 살던 시대를 다 지상학적으로 조사해보니까 매우 특별한 시기여서 나무가 아직 단단하게 자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가지고 했기 때문에 변성이 거의 없이 그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모두 그 악기로 한번 연주해보는 것이 꿈입니다. 그런 꿈의 악기가 탄생한 것입니다.
악기를 제조하는 분야를 제가 전문적으로 연구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주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꼭 스트라 디발디와 같은 그런 매우 특별한 장인이 만든 악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단단한 나무로 만든 악기가 오랫동안 변성해가지 않는다는 것은 전문가가 이야기를 안 해도 자기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소나무나 나왕이나 이런 나무를 가지고는 그런 나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나무 고목나무, 나왕, 미송, 뭐 육송 이런 많은 나무들이 단단한 나무들이 아닙니다. 왜 나무도 많은 종류가 있는데 못을 치면 못에 불이 티면서도 못이 안 들어가는 그런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꼬챙이로 찔러도 쑥 들어갈 것 같은 두부 같은 그런 나무도 존재합니다. 그런 후자의 나무들을 가지고는 그런 명기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한번 읽은 이야기에 의하면 여러분 벼랑 끝에 있는 나무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설악산 같은 곳에 보면 나무가 잘 자라지 않고 모진 바람을 맞으면서 휘었습니다. 산이 높으니까 바람이 많이 부니까 비가 조금 와도 금방 말라버립니다. 표피도 두껍지가 않고 영양분이 없으니까 아주 최고를 다해서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그 나무가 자생력이 강해지고 단단한 수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를 사서 옮겨 심습니다. 나무가 모두 크기가 똑같고 모양이 같다고 해서 같은 가격이 아닙니다. 모양이 아주아름다워도 산에 뿌리를 뻗고 있는 그 나무를 지금 캐서 옮겨 심어줄 때의 나무의 가격이 매우 쌉니다. 왜 산다는 보장이 50%미만입니다. 그것도 때를 정확하게 맞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5월이 넘어서 6월로 넘어가게 되면 지표가 열을 받으면서 나무가 착근하기 어려운 시기가 옵니다. 더 빠르면? 추우니까 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나무가 비싸고 좋은가? 화원에 가보면 나무를 잘라서 땅에 심어놓은 게 아니라 밧줄 같은 것으로 엮어서 물을 주면서 그냥 지금 살아있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게 비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죽을 확률이 20% 미만입니다. 왜 그런 상황에서 몇 번을 파 옮기면서 살아나기 위해서 몸부림친 가운데 자생력이 강해진 것입니다. 그 나무와 그 나무를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있는데 일본말이라서 생략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무를 갖다가 단단하게 조직을 갖춘 나무를 가지고 잘 절이고 잘 말려서 몇 번이나 시간을 오래 두고 보면 그 나무가 터지는지 안 터지는지 압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안 터지는 나무는 몇 십 년이 가도 안 터집니다. 또 그런 나무를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른 나무로 악기를 만들 때는 다섯 개 정도 쓸 수 있는 연장을 그런 단단한 나무로 만들기에는 하나밖에 못 쓰고 연장을 갈거나 바꾸는 상황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그리고 떼를 쓰는데 그것은 좀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으옵소서 그 이야기는 깊이 깨트려지면서 나는 더 이상 내 마음대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주님 저를 어루만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십시오. 그런 고백 속에서 마음이 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녹은 사람이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그럴 때 주님이 너는 너를 빚을 수 없으나 네가 이렇게 많이 녹아진바 되었으니 연단되어서 이렇게 많이 녹아진바 되었으니 내가 너를 정결하게 된 너를 빚으리라.
주님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마음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주님이 다 빚으십니다. 그런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단단하기는 모질게 단단하고 그런 완고하기 짝이 없는 죄인을 그 찬송을 부르면 신성모독입니다. 아니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서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슨 쓰레기 수거하시는 분입니까? 그것을 받아서 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헌신은 거의 쓸모가 없거나 아무리 자신을 몸을 드려 헌신해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섬김은 참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대한 이 세상에서 성도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깎으십니다. 그러면 많은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없이 환난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깊이 깨트려지고 그래서 그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이고 형편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날마다 깨달으면서 흐느끼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 앞에 잘 다듬어진 사람들, 그리고 진짜 나 같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거룩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어쩜 우리가 그렇게 미숙한 존재이고 그리고 부패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인간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그런 자만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뭐 좀 잘하는 게 있으면 자만해지고 싶어 합니다. 이게 누구도 없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가지고 한 3,4,5번만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보십시오. 그러면 자기도 그런 줄 압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아무리 발견해도 자만할만한 게 별로 없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을 아무리 만나도 너 이것 잘한다. 저것을 잘한다. 그래도 자만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팬들이 없을 때 그때 택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를 높이는 사람이 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니까 누군가 어떤 인간을 향해 열렬한 숭배자가 되는 것, 잘 들으십시오. 내가 정확하게 표현할 테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누군가 인간을 향한 열렬한 숭배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교만해지려고 하다가 실패한 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보면 사람들이 열렬하게 우상같이 그렇게 사람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들은 좀 안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설훈도씨에게 미치겠어요? 아니면 가수 이름도 이제는 하나도 몰라. 누구에게 미치겠습니까? (?) 그 할아버지에게 미치겠습니까? 그러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데 이번에 한국에 사라 브라에트 맨이라고 하는 가수가 옵니다. 저는 그 가수의 노래 몇 곡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그 사람을 뉴 에이즈니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어째든 음악성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가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유 때문에 안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첫째는 거기 너무 많이 사람이 모인다는 것, 그 속에 하나 끼어서 나도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이 없고, 두 번째는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는 것, 그래서 안 가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를 이렇게 열렬히 높이는 것은 스스로 자만해지려다 실패한 좌절한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스스로 높아지는 경우든 누군가를 막 떠 높이는 경우든지 그 사람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혹은 있어도 매우 작든지,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다가 누군가로부터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으면 그럼 마음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대놓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겠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오늘 또 허무한 인간 하나를 만나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 앞에 잘 다듬어진 사람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다듬지 않고 다듬어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잘 다듬어서 온전한 인격을 갖추고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신자는 칼 많이 맞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나무라면 하나님이 그 칼로 끊임없이 깎으십니다. 다 깎아놓고 마음에 안 드니까 불로 지져서 새카맣게 만들어서 사포로 문질러서 불로 태우면 나무 조직이 숯이 됩니다. 이게 샌드 페퍼로 문지르면 이런 동그란 면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조각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칼 많이 맞고 사포에 많이 긁힌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찬송해야지 되겠습니까? 그 사람을 만드신 온 저자이신 하나님을 찬송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올바른 신앙입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잘 깎고 다듬어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좀 동의가 안 됩니다. 왜? 제 주위에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도 있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사람도 있는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은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거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받았지만 어느 정도 받았는데 아직까지도 성격이 다듬어지지 않은 엉망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정말 불같은 시험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주님 앞에 잘 깎여지고 다듬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많이 연단하신 사람이다. 많이 깎여진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굉장히 좋은 질문이고 그리고 날카롭기 짝이 없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제가 답해주는 게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기서 기억해야지 될 것이 있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한 주님의 사람으로 연단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정결하게 만들고 거룩한 신자로 만들고 성화된 신자로 만드는 그 힘은 환난 자체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생고생을 한 사람 순서대로 성화의 순서가 똑같이 매겨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고행의 신앙이지 이게 어떻게 복음신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환난과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도구일 뿐이지 환난과 시련, 그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성결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는가? 환난과 시련이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성결하게 됩니까? 그 정답은 환난과 시련이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만이 우리들이 성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아무리 많이 만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생고생하면서 일평생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많은 환난 자체가 성결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처절한 환난과 시련을 통과했다고 할지라도 그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의 영향아래 있지 않았으면 그냥 고생만 했을 뿐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사람이 태어나서 크게 경쟁하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면서 살던 사람들이 선량합니까? 아니면 넉넉하고 좋은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온 사람이 더 선합니까? 후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이 자체가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이 사회 속에서 교육을 통해서 가르쳐주어야 할 것은 경쟁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고 동무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먼저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교육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불행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답은 나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 연단되어서 순결하고 주님의 손에 의해서 잘 다듬어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지속적인 은혜를 통해서 그 환난과 시련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가 순결해지는구나.
그래서 환경은 환난과 시련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도구일 뿐이고 정작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진정으로 연단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구나. 이런 사실을 깨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면 이제 좀더 치명적인 의문이 하나 더 떠오릅니다. 그러면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성령님의 은혜를 그 속에서 받고 거룩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환난과 시련의 그 비바람 속에서 고생하면서 마음이 강퍅해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똑같이 환난을 당하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를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하시는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 믿음이 환난을 당할 때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인내로 나타납니다. 그 인내를 두고 이야기를 하자면 한이 없겠지만 환난을 당하는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뢰와 실례의 최고의 표현은, 그러니까 한 성도가 환난과 시련의 비바람 속에서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앙의 고백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는 것은 이를 악물고 증오심으로 참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우리교회 마당에서 뜨겁게 포옹했던 우리 30년 전에 우리 영어선생님, 그분의 별명이 포도대장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별명이 검찰 청장이었습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얼마나 무섭게 애들을 때리는지, 내 친구 중에는 밤에 집에 가서 오줌을 쌌다고 합니다. 중학교 1-2학년 때니 얼마나 무섭게 때리는지 제 친구 중에 하나가 고등학교 때 맞았는데 엎어놓고 때리는데 우리는 사실 한 세대쯤 맞으면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약은 애들은 맞기 전에 친구의 신발주머니를 다 빌려서 바지 속에 다 집어넣습니다. 일간스포츠를 다 구겨 넣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리고 가서 한 세대쯤 맞으면 한번쯤 교탁에 뒹굴면서 죽는 시늉을 하면 10대 때릴 것 7대 때리고 7대 때릴 것 5대 때리지 않겠습니까? 이 친구는 똑바로 서서 짝짝 소리가 나는데 자세하나 안 흐트러집니다. 진짜 요조숙녀처럼 맞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10대 때릴 것을 12대를 때렸습니다. 참는데 그 참는 게 무엇인가 하면 깊이 반성하면서 참는 게 아닙니다. 전 대학에서 가르쳤으니까 애들을 별로 때릴 기회가 없습니다만 별로가 아니라 한번도 없었습니다.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애들을 때릴 때는 어느 순간까지는 화가 나다가 그 다음에는 두려움이 확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증오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그 신앙은 인내로 나타난다고 할 때 그 인내는 그 인내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인내일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인내입니다.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환난을 당해보셨나요? 정말 폭풍과 같은 시험을 당해보셨습니까? 오늘 저녁에 눈을 감으면 내일 아침에는 뜨고 싶지 않은 그런 환난을 당해보셨습니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이 환난 속에 있는 이 모습이 꿈이라면 이 고통이 잠시 졸다가 꾸는 한마당의 어지러운 꿈이라면, 지금 내 인생을 모두 마름하고 주님의 나라에 가서 지금 쉬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할 정도의 환난을 당해보셨습니까?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때는 죽음을 생각합니다. 많은 이 세상의 성도들이 그런 환난을 당했습니다.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했습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남은 날들이라고 하는 것은 눈물흘림을 며칠 더 담고 행할 길 다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인내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해보든가 혹은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마음을 강퍅하게 해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도전하는 것, 증오의 감정을 품고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아주 대담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어느 경우에도 그가 연단될 수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를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아이들이 동네에 있는 철공소에 새카맣게 모여서 반바지를 입고 쭈그리고 앉아서 그 아저씨가 철 작업하는 것을 봤습니다. 매일 저리가라고 소리를 질러도 코 질질이 쭉 모여 앉아서 그때 제일 눈길을 끄는 작업이 무엇인가 하면 커다란 쇠를 자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전기용접기가 많지만 그때는 산소 용접기였습니다. 산소가스를 카바이트에 넣어서 픽 하고 불을 붙인 다음에 그것을 커다란 철판에다가 대고 분필로 쭉 그은 다음에 거기다 대고 그으면 철판에 붙은 찌꺼기들이 타기 시작하면서 철판이 벌겋게 한쪽이 달아오릅니다. 지나고 나면 새빨개지고 조금 있으면 흰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왔다갔다. 만약에 이러고 있다면 그것이 잘라질 수 있겠습니까? 집중입니다.
그때 성도의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왜 성도가 그 고통 속에서 성도를 바라보는 것은 신앙화 작업이 끝난 후의 일이고 아픈 것은 성도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양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배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강퍅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환난을 당한 것을 통해서는 도저히 성도가 연단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인내하지 않고 많은 환난과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성격이 다듬어져서 거룩해지기는커녕 고난 속에서 아주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고 환난을 보내실 때 잘 인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인내는 자기가 참을 수 있는 한도까지만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자기 자신이 변해지지를 않습니다. 절대로 변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참고 견디면서 계속 인내할 때 그 치열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참게 되고 하나님을 치열하게 찾는 가운데 나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내 안에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인내하려고 할 때 바로 거기에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일들로 인해서 환난을 당하는데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속사람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깨끗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오셔서 환난을 보내시고 그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려 우리 안에 마음과 하나 되어 있었던 모든 불순물들이 재료분리가 되는 이런 역사가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어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아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내 안에 이렇게 더러운 내가 많았구나. 아. 내가 이렇게 불결하고 비참한 인간이었구나. 이러고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살다니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모욕이구나. 그런 생각을 이속에서 깊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인내의 과정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아름답게 빚어지고 거룩한 성화의 길에 있어서 현저한 진전을 이룬 모든 사람들마다 단지 환난을 당하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잘 인내함으로 자기를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에 잠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만 환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서 정결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많이 연단하셔서 정결하게 한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에는 이 세상으로부터 너무 배신을 많이 당했고 그리고 이 세상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맛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들이 정결하고 깨끗하게 연단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은혜 받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거듭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너저분한 신앙생활을 할 때 그때와 요만큼이라도 주님을 믿고 달라지고 좀더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할 때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났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더 많이 정결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더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으로 드러난 삶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세계 자체를 통해서도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제 우리 직원예배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하루에 수무 번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지금보다 훨씬 깊이 있는 영적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지만 그러나 기도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하루를 닫을 때까지 그 사이에 기간이 너무 깁니다. 그래서 시간을 정해놓고 깊이 기도하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주님의 이름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수시로 부르며 설거지 하다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아버지! 일을 하다가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잠시 눈을 감고 하나님! 제 마음과 내면의 세계를 통해서도 영광 받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자녀인 내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시면서도 나를 그렇게 거룩하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주님, 제가 오늘도주님을 바라봅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얼마나 허무합니까? 내가 그 나라를 사모합니다. 하루에 더도 말고 20번만 기도하십시오. 그냥 한 15초씩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경함합니다. 그래서 어느 때든지 주님의 면전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고 사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기도 하면서 인생을 이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깊이 그런 사람들에게 오셔서 연단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항상 마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은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여러분,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돈을 맡기시겠습니까?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명예를 맡기신다면 호기심 많은 아이의 손에 쌍칼을 들려주는 것과 똑같지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그렇게 하시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미친 듯이 세상의 것을 구하면서 기도하며 몸부림을 쳐도 못 얻고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사는 데도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채워주십니다. 왜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난할 때든지, 부할 때든지, 주님이 나를 아주 높이 사용하실 때든지, 혹은 나를 무명하게 하실 때든지, 상 주실 때든지, 징계하실 때든지 변함없이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환난을 통해서 빚으시고 정결하게 하시려고 할 때 그때 하나님 앞에 깊이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게 독기를 품고 그렇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본질인 인내, 내가 지금 여기 있게 되는 것도 주님 때문이고 어떤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삼아주셨는가.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참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연단은 너무나 쓰고 그리고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말할 수 없이 괴로워서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러나 이 연단의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사랑의 찌꺼기를 모두 불사르시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시고 순결하고 정결하게 하시고 나를 주님 앞에 다시 세우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면서 잘 인내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연단을 감당하면 하나님과 놀라운 평화를 누립니다. 왜 그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연단을 받으면서 자기도 예전에 몰랐던 이 찌꺼기와 더러운 것들을 쭉 재료분리가 되면서 빠져나갑니다.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결한 마음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나니 찬송가도 나옵니다. 주님이 학식이 높은 사람에게 신령한 빛을 비추십니까? 아닙니다. 누구에게?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빛을 비추십니다. 깨끗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빛을 비추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 이 팔복 가운데 최고 정상에 있는 복입니다. 복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당하면서 믿음으로 인내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그것을 피해보려고 잔꾀나 부리고 하면 인간이 아주 추악해지고 너절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파산하는 자가 됩니다. 그 속에서 연단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내 안에는 이 세상 사랑의 쓴 뿌리를 보고 마음에 이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마음을 하늘나라를 향해 오로지 그때 이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악의 찌꺼기들이 모두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의 영혼이 아주 놀랍게 쇄신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때 우리에게 복수하시기 위해서 주신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환난과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잘 인내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환난을 통해 순결한 은혜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살아계심을 놀라운 방법으로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끝.
5. 복 주시려고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8:16)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두 달이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는 그 거리를 40년 동안을 유리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된 것을 그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40년 동안이나 훈련시키셨고 거기에서 그들은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후에 주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에서 살만한 사람들로 주님께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그런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죄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셨지만 그들을 광야에서 온갖 연단을 당하게 하심으로서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한없이 낮아지게 하심으로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백성들이 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중 상당히 많은 기간을 노예로서 지냈습니다. 우리가 일제 36년을 식민지 지배를 받았는데도 식민지 근성, 남의 지배를 받는 근성이 생겨났다고들 말을 하는데 430년이나 되는 동안 애굽에서 살았고 또 그 중에 대부분의 기간을 노에로 지내었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자존감 같은 것들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이 노예 살이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숙명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일찍이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애굽의 모든 신들은 헛것이고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신들 가운데 뛰어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함성을 지르며 430년 동안이나 종노릇하던 그 애굽에서 튀어 나올 때는 사기충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열광했지만 사실은 그들 속에는 여전히 열광하는 종교적인 그 감동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죄와 불순종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광야에서 모두 드러나게 해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다루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신앙을 갱신시키셔서 옛 세대는 광야에 묻으시고 새롭게 훈련된 세대를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심으로 그들을 거기에서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빛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치열하도록 연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치열하게 연단하셔서 그들을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시키시는 방법은 크게 오늘 두 가지로 나오는데 그 중에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을 한없이 낮아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당신 자신이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함과 신성의 충만함, 내적인 영광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 속으로 흘러들어서 그래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충만하게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진 존재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통해서는 결코 영광 받을 수 없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경배의 정신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자기의 백성들이 낮아질 때 그곳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하신 그 혹독한 시련, 그 많은 고난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을 믿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오늘도 이 세상에 있는 자원, 자기를 믿는 특심을 가지고 쾌활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들 속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 주신 이 세상의 물질이나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육신의 건강이나 형통한 삶, 이런 것들 때문에 자고해지고 그래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매우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이 모든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해서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을 욕하게 되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교만의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사는 동안에는 아직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의 세계와 질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과 내면의 세계의 질이 실제의 삶과 일치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매우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반듯하고 도덕적인 삶, 많은 제사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삶을 하나님이 좋아하셔도 그런 제사와 헌신의 삶에 어울리는 내면의 세계가 없을 때는 하나님이 그들이 드리는 외면적인 삶을 통해서 그들을 인정해주시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외면의 삶의 질은 하나님 앞에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고 애를 써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부분은 있는데 마음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져서 깨트려져서 녹아져서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게 될 때 신자는 자기의 밖에 있는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녹아내린 자신의 마음의 세계에 일치되지 않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때 신자는 애통하는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렇게 내면의 세계에서 깨트려지고 아파하는 사람들,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어울리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의 죄악 된 삶을 인해서 애통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들의 내면의 세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면서 외면의 삶을 하나님이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입증하셨으니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고 바리새인은 아주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으나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지 않은 사람이었고 세리는 아직까지도 죄를 지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처참하게 깨트려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 한 자신 사이에 있는 이 무한한 간격을 좁힐 수가 없어서 감히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두드리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낮아진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일생을 살면서 언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의 인격이 잘 빚어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언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잘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낮아지던 때 만물의 찌끼와 같이 나는 중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 정말 쓸개와 같은 존재이고 나는 아무 쓸데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나에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깊이 엎드려지던 때, 그때 주님이 빚으시던 대로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 되어갔고 주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대로 주님 앞에 고쳐져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여” 그리고 그 마음이 가난해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의 결정적인 인격의 특징이 바로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깊이 낮아진 사람,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도덕적인 열심히 쌓아올린 선행보다는 한순간 하나님 앞에서 주님 없이는 도저히 살수 없는 마음이 된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훨씬 더 고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낮아진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참한 마음이 되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신 바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의 힘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까지나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속에 정말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 그것을 어느 한순간 생애적인 회개를 할 때만 간직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로만 아니라 심경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새벽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가 없고 그리고 오늘도 내가 주님을 섬겨야 할 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야할 모든 힘이 하나님이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내가 도저히 그런 삶을 살수 없다고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렇게 새벽기도를 통해서 하늘의 이슬로 우리의 영혼이 흠뻑 젖은 가운데 하루를 시작해도 밤중이 되어서 이제 잠자리에 들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까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굳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절대로 그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한번에 2-30초씩이라도 마음에 손을 얹고 간절한 심경으로 하나님, 나는 도저히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나는 원래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다가 혼자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예수님을 의지하려고 주님이 나를 불러주신 사람입니다.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여 도와주십시오, 이 죄인을 하나님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루에 20분씩만이라도 이렇게 기도한다면 여러분들의 삶이 많이 변할 것입니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나님이 저를 목사를 만드시겠다고 그랬을 때 진짜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럴 때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자신 있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게도 살고 고생을 억수로 했으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고생하는 것은 그래도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교만이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여름이 다가오면 항상 생각이 나는데 꼭 이맘때쯤 되었는데,
(예화: 87년도에 전도사로 있던 교회를 떠나 학교 옆에 살았을 때 매일 학생들이 데모 를 함으로 어린 아기가 고통을 받으며 병원을 다니고 엎친대 덮친 격으로 할머니 까지 병환으로 병상에 계시고 장모님이 쌀을 가지고 오실 정도로 가난함으로 마 음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학교 채플실에서 기도하며 하나님 매달리며 오랜 시간 을 속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기도하며 한없이 낮아진 마음이었다.)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제 생애 잊혀질 수 없는 경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깊은 어두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숨에, 그리고 그 후로부터 정확하게 6개월 뒤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지금도생각하면, 오늘 아침에도 걸어 내려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정말 낮아진 마음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된 마음인가. 사실 우리가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었고 또 지금도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높아질 수 없습니다. 설령 한번 양보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우리의 지위나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들이 만약에 높아진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가지고 높아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힘에 지나도록 주님께 봉사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 때문이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높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낮아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환난과 고난이 엄습할 때는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용사처럼 신앙을 지니던 사람이 모든 것이 평안하게 되었을 때 미끄러져서 타락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낮아져야 합니다. 하루에 열 번. 스무 번씩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 나 같이 더러운 인생을 왜 구원하셨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 오,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의지합니다. 형통할 때나,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사업이 잘 될 때나, 위기를 만날 때나 수시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주님,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실 때만 우리가 주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수 있습니다. 분초라도 주님이 우리를 놓으시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들에게 많이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게 낮아진 마음입니다. 깊이 낮아진 마음, 내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존재이고 매우 유용한 존재라고 생각이 되고 그리고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머리와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한없이 낮아진 이런 마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연단하십니다. 지금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 연단의 불을 통과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시련의 폭풍 한가운데를 지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인생의 항해 한복판에서 먹구름으로 별빛도 그 빛을 가리고 어디를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그런 삶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기에서 여러분들의 지능지수를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여러분들이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거기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한없이 낮아져서 그래서 내 인생의 주인이 오직 주님이시고 그리고 내 인생의 항로를 밝히시는 분이 오로지 하나님 한분이실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그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하려고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 시련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없이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을 많이 받고 그 연단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신자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방법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캐나다나 미국이나 호주나 이런 나라에 가보면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풍부한 나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캐나다를 갔는데 비행기를 타고 로키를 넘는데 깜짝 놀랐는데 강인지 호수인지 어마어마하게 떠있는 목재들이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떠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나무가 가느다랗습니다. 이런 것은 나무가 아니라 톱밥을 잘라서 찝니다. 그래서 그것을 풀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 떡볶이처럼 뽑는 것입니다. 그것을 MDF 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다가 진짜 나무를 대패로 얇게 밀어서 종이처럼 만들어서 풀로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나무로 보이는데 두들기면 다 합판이거나 아니면 MDF입니다. 쭉 찢어서 물 부으면 퉁퉁 붓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해도 아주 나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갔더니 이렇게 두툼하게 진짜 나무로 책상 책꽂이까지 다 만들어서 100불이라고 붙여났는데 그때 100불이면 IMF나기 전이니까 한 56.000원밖에 안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돈의 10배를 보태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책상을 살 수 없습니다. 진짜 크기만 작으면 사가지고 메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렇게 나무를 좋아해도 나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보면 우리나라같이 이렇게 모조 나무가 발달한 나무가 없습니다. 중국만 가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모조나무가 너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나무 결을 수십 가지의 나무를 똑같이 프린터를 해서 그것을 합판이나 아니면 톱밥을 쪄서 눌러놓은 거기에다 기계로 다림질을 해서 딱 눌러놓았습니다. 그러면 똑같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 정교해서 진짜 가서 들여다봐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싱크대 같은 것들은 대부분 다 그런 것입니다. 성냥불을 붙여보면 그냥 시커먼 연기를 내면서 비닐이 뚝뚝 떨어지면서 탑니다.
어느 식당에 갔는데 좀 좋은 식당인데 기둥이 있는데 나무하고 똑같았습니다. 진짜 나무인지 가짜 나무인지 밥 먹는 동안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만져 봐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밥을 다 먹고 나가다가 자동차 키로 구석을 긁었습니다. 꼭 알고 싶어서 그랬더니 비닐이었습니다. 시험한다고 그러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평상적으로 둔 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을 뭔가 평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둠으로서 그것을 시험해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을 때는 항상 충격과 함께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충격이 없이 받은 은혜는 기분전환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어떤 충격을 받는가 하면 두 가지 충격인데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지를 몰랐다. 그런 충격, 또 하나는 내가 그렇게 못된 놈인지 몰랐다. 그 두 충격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제나 그렇습니다. 5월에 나온 신문도 읽어보면 똑같이 그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깨닫게 하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기 전까지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귀를 기울이기 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나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까 정말 내가 하나님 없이 산 사람이고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는지를 몰랐는데 눈을 뜨고 시험을 받아서 깨닫고 나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위선과 거짓, 그리고 자만심이 있는 곳에는 당신의 성실하심을 나타내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도 정직하고 깨트려져서 낮아진 마음이 된 그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늘 시험하십니다. 그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깊이 낮아진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르셔서 시험하실 리는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 없이는 참회도 없습니다. 깨닫는 것 없이는 마음이 낮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는 것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평화로운 환경에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뒤흔들어놓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상당히 성격이 좋고 온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여튼 형편없는 사람을 옆에 두어서 꼬챙이로 수시로 속을 쑤십니다. 그래서 그 꼬챙이가 마음속에 들어와서 쑤셔서 똥물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괜찮은 사람들 속에 에워싸여 있을 때는 나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말도 되지 않은 이상한 사람이 옆에 와서 수시로 꼬챙이에 쑤셔서 그래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네 배속에 든 것은 똥밖에 없다. 그것을 수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디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시험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들은 그런 시험을 통해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을 회피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선합니다. 로버트 멕체인이 말했듯이 깨트려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 불행과 고통과 많은 것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더 좋은 신자로 만드실 것이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형통함도 있고 그리고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아주 달콤한 연단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환난은 모두 쓰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환난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지 아니하고 보여주실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은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을 통해 연단하셔서 우리도 몰랐던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인가 하면 드러나게 하심이고 드러난 것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시험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시험하셔서 수시로 자기 자신 안에 시험을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자기 안에 있는 은밀한 죄들을 보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연단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치열하게 연단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그 첫째는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에 신앙생활을 회상해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걸어오던 때도 있었고 하나님께 많이 순종하면서 걸어오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걸어오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 하나님께 잘 순종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돈 많을 때, 하나님이 복줄 때 하나님께 순종한 게 아니라 마음이 한없이 낮아졌을 때 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만 기대며 살고 싶어 하던 마음이었던 그 순간에 잘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는 마음이 바로 절대로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불러옵니다.
우리들이 흔히 순종하는 삶, 그러면 어마어마한 고행을 통해서나 가능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을 처음부터 아예 그렇게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것이다. 누구도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부분 거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면 우리들이 죽도록 하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면서 안 하고 또 죽도록 안 하고 싶은데도 하여튼 입술을 깨물고 고행을 하는 마음으로 하고 그래서 순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순종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신자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시는지를 생각해보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눈물이 흐르는 마음을 갖지 않은 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은 불순종이 이깁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삶이기 때문에 이 삶에 순종하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이 내면 세계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져서 그래서 하나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내면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천 같은 곳에 가보면 진흙을 가지고 토기를 빚습니다. 녹로에 놓고 그리고 돌리면서 이제 토기장이들이 그릇을 만듭니다. 그게 마음 가질 때처럼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불에 굽다가 실패하는 경우는 깨트려서 버리지만 녹로에 올려놓고 빚었는데 형태가 원하는 대로 안 되었을 때는 거두어내서 웅덩이 같은 곳에 던져버립니다. 잠깐 형태를 가졌지만 그러나 아직 굳어지지 않은 것들을 그 속에 집어넣고 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이제 토기장이들이 밟습니다. 그러면 원래 있던 형태가 다 뭉개져버리고 금방 떠온 부드러운 흙처럼 다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갖다가 다시 빚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화로에 들어가서 구워져버린 것은 토기장이들이 아무리 녹로에 놓고 돌리면서 매만져도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다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을 좋은 신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진실한 성도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데 왜 그렇게 여러분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도록 자기가 변화되지 않을까요? 그게 결국은 마음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빚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온전히 낮아져서 주님이 아니면 도저히 의지할 분이 없다고 할 정도로 깊이 낮아지면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그 사람을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삶은 입술을 깨문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굳어짐이 없이 하나님 앞에 깊이 녹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마음속에 흘러들어가서 그 마음의 틀들을 깨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틀들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2-30분씩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 나의 마음속을 어루만져주십시오. 내 마음이 세상의 유혹에 노출되었습니다. 허탄한 것들이 내 마음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나게 해주십시오. 끊임없이 마음이 낮아질 때 그때 우리는 순종하는 것이 매우 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드려서 순종하는 삶을 살기까지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들을 낮추십니다. 오늘도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연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러분들을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삶, 내 뜻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드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항상 덧붙여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보여주시면, 하나님의 뜻이 다른데 있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기도의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게 순종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끊임없는 연단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깊이 순종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빚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복 주시려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불행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뜻을 가지고 계시고 나는 나대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뜻대로 무엇인가를 이루기를 원하고 내 뜻대로 내 인생이 되어 가기를 원할 때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질끈 눈을 감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거나 혹은 세게 기도해서 하나님을 굴복시킬 생각을 합니다. 그런 동안에는 항상 갈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일은 이루어질 수 있어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연단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시고 또 낮추심으로 말미암아 이루고 싶어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 온전히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과 계획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 창조의 부합한 정신을 가지고 내가 살아가면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소원이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하시고자 하는 목적과 일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내 뜻 안에 있고 내 뜻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내가 기쁨으로 받아들이니까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주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돈을 조금만 주면 가출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을 아는 자기 자식에게 돈을 주겠습니까? 있는 돈도 빼앗아서 한 푼도 없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해보시지 않으셔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다 보시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고 무엇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여러분들이 그 시련과 어려움을 주목하지 말고 그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드러난 내 모습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꾸고 계신가, 그것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우리의 뜻을 꺾어야 합니다. 우리의 뜻을 꺾고 우리의 의지를 꺾어서 우리의 쓸데없는 욕망을 버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하나님이외에 다른 곳에서 자꾸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행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이 우리의 즐거움의 이유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우신데 하나님이 뭘 아끼시겠습니까? 물질을 많이 주어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 확정되어서 주님을 가장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왜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지위를 높여주셔도 오로지 하나님 한분 밖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두 주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많은 연단을 받으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극복해보려고 애를 쓰면서 결국은 점점 나쁜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고 나서 얼마 안 되니까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때에 그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은 얼마나 큰 것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곡식 하나 심을 수 없는 광야의 그 여정에서 먹을 것을 공급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만나를 내리십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얗게 서리같이 지면에 내려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주변에만 내립니다. 가서 그것들을 바가지로 긁어모아서 가지고 와서 가루로 만들어서 과자로 만들어먹고 떡도 만들어먹으면서 자기 허기짐을 모면했습니다.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먹을 것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습니다. 선지자를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날라 먹이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무슨 방법으로든지 못 먹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모두 잠들어있는 새벽에 그 만나가 내리게 하시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는 이틀 치도 안 되고 매일매일 먹어야 할 그 양식을 거두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뭔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너희들이 먹고 사는 것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을 통해서 먹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세상 백성들과는 다른 양식이 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 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건강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도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많은 고난과 시련과 연단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던 그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영혼이 그 만나를 먹고 소생하고 변화되고 그리고 주님이 그 은혜를 내게 주시면 어떠한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내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강한 믿음. 그리고 세상의 물질이나 세상의 명예나 좋은 친구나 안락한 환경이나 모든 것 필요 없고 오로지 내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께 내 영혼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것만을 간절히 갈망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 메마른 광야의 나그네 길에 만나가 무엇인가. 그게 만나라는 히브리말이 원래 ‘마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게 무어냐 그 뜻입니다. 이게 웬 떡이냐. 그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것을 감격해합니다. 그러던 백성들이 나중에 신앙이 떨어지게 되니까 애굽에서 먹던 마늘, 부추, 파, 왜 이런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역사에 보면 애굽에서 피라미드 같은 것을 건설할 때 노예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늘을 먹였습니다. 예뻐서 먹였습니까? 그게 아니라 병들지 말고 죽어라고 골병들도록 일하라고 먹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예로서 아무 희망이 없이 살아가던 그 신분은 생각은 안 하고 그때 먹던 마늘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만나가 맛대가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호랑이가 늑대가 무섭습니까? 파리나 모기가 무섭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호랑이와 늑대는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한번도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민은 모기와 파리입니다. 지금 공부중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여름에 열린 공간 마당이 얼마나 좋습니까? 거기 앉아서 차도 마시고 바람도 산들산들 불고 새들도 노래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 시기만 딱 지나고 나면 앉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기가 어떻게나 와서 달라붙는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열심히 연구를 하는데 새로 기계가 나왔는데 천이백 평 근방에 있는 모기를 탄산가스를 뿜어내서 유혹을 해서 한번 확 빨아들여서 죽여 버리는 기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문을 다 열어놓고 마당에 그것 한대만 피어놓으면 그러면 아마 새벽의 시간에도 거의 발이 안 물릴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모기가 좋아하는 게 탄산가스입니다. 그래서 LPG가스를 걸어서 살살 피웁니다. 일주일에 한통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냄새를 맡고 모기들이 좋아서 모입니다. 모깃불을 피면 모기들이 없어지는 이유가 탄산가스를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내려오면 또 피면 또 올라가고 계속해서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해서 쭉 피면 탄산가스 냄새를 맡고 숨어 있던 모기들이 다 전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다 모이면 훅 빨아들여서 다 태워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기구가 나왔다고 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든 늑대와 호랑이가 무섭지만 사실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늑대와 호랑이가 아니라 사실은 파리와 모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살인이나 간음 이런 것들은 늑대와 호랑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평균적인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죄보다는 잘잘한 죄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잘잘한 죄, 마음에 이 죄와 정리되지 않은 세상사랑,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없이 살아가는 핏기어린 성도들의 얼굴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과거에는 다 전설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 개척해서 얼마 안 되어서 지하실에서 신앙생활 할 때는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교인 120명모이던 시절에 테입이 일년에 1억 원어치가 팔렸습니다. 심방을 가면 그때도 1500원이었습니다. 그때 심방을 가면 집집마다 라면박스로 최소한 두 박스 이상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것을 매일 직장에 가면서 듣고, 돌아와서 듣고, 들은 것을 또 듣고, 쉬는 시간에는 그것을 닦아서 정리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터득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끊임없이 그 말씀으로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 정결케 하고 그랬습니다. 이제는 너무 마음이 여유가 있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갈망하고 애착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못 받고 돌아가면서도 테입이 있는데 뭐 그러고 돌아갑니다. 오늘 예배를 못 드렸어도 인터넷에 가면 다 나오는데, 그리고 가고 그 다음에 테입을 못 들었으면 어때 책으로 나올 것인데, 가고 책을 못 읽으면 어때, 수련회 가서 할 텐데, 그런 동안에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매순간 어린아이처럼, 어제 은혜는 어제 우리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데 충분했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성도들이 될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부딪히고 있는 말씀의 파도가 무엇입니까? 어떤 말씀이 여러분들 속에서 출렁거리고 있습니까? 어떤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어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파도치게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을 깨트리고 여러분들을 자기 부인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끔 만들고 있습니까? 어떤 말씀입니까? 어떤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끊임없이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파도쳐도 정말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이 여러분들이 어떤 삶을 살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끝.
6. 온전해진 자의 섬김을 받으심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시101:6하)
오늘 이 시편 101편은 표제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에 대부분의 많은 시들을 다윗이 남겼습니다. 이 101편에서는 하나님과 더 온전히 가까워지기를 소원하며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올바르게 행하고 온전한 가운데 거하기를 힘쓸 테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임하여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종종 나오는 관입되어 들어오는 것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 부분이 부분적으로는 다윗이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부분적으로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들려주신 음성을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1편에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처음부터 이때까지 계속해서 다윗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6절부터 한 두절에 걸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늘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순종하리로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다윗에게 준 응답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섬기는 것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주님의 계시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충성된 삶과 온전함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종을 든다는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곧 충성이라는 덕목으로 집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으로 나타나기를 여러 차례 걸쳐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 모세에 대해서 구약에서 신약에서도 그를 칭찬할 때에 그는 여호와의 온 집에 충성된 사람이었다고 묘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오늘 자신의 편지에서 “맡은 자들의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 말합니다. 계시록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의 별명이 소개가 되고 있는데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시오. 예수님의 별명은 또한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충성 그 자체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함이 없는 아멘이 바로 그분의 별명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널리 알고 있는 달란트의 비유에도 보면 그 주인이 돌아와서 칭찬을 한 부분들은 모두 충성된 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충성된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그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모든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성경에 보면 온전한 자가 주님을 수종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수종들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사는 모든 주님의 섬기는 종들의 덕목은 충성입니다. 이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밖으로 드러난 삶인데 이것은 단순히 생각 속에 머물고 있는 그런 감동이 아닙니다. 이 충성은 실제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삶이 재편되어 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충성 되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구 선수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야구선수인데 공을 던지는 사람인데 그래서 공을 잘 던져서 타자들이 공을 못 맞추게 하고 또 자기네 편 타자들은 상대방 투수의 공을 잘 때릴 때 최후 승리가 오는 것이 아닙니까? 공을 가지고 부지런히 연습을 하는데 손가락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그 사이에 공을 끼어 넣어서 특별한 공을 던져서 자기의 공을 맞추게 힘들도록 만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두 손가락을 1센티 정도 찢었습니다. 그러면 병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수술을 해서 손가락을 찢어서 그래서 공을 던지기에 적합하도록 자기 손을 만들었습니다. 한번 찢으면 나중에 다시 봉합을 해서 원위치를 시킬 수도 없을 텐데 손가락을 병신으로 만들기까지 그렇게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한 것은 공을 잘 던지는 투수가 되고 싶다고 하는 그 일념이 그의 삶의 방향을 재편한 것입니다.
미국에 한번 집회를 갔습니다. 그 교회에 이제 도착했으니 어떤 집사님인지 권사님인지를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남자분인데,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이 분이 목사님 여기 계시는 동안에 목사님을 모시고 참석하고 식사 대접하는 데까지 모시고 가고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운전기사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분이 자기를 소개하기를 자기는 강사영접 위원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참 별난 것이 많지만 그런 것은 없는데, 그리고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세상에 많이 집회를 다녀 봐도 강사영접 위원장이라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 사람이 얘기를 하는데 이 일을 자기가 7년 째 하고 있는데 얼마나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왜?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들을 자기가 모시고 일주일씩 다니니까 좋은 얘기도 듣게 되고 또 강사를 모시고 다니려니까 한번도 집회에 빠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새벽이건 밤이건 그러다보니까 은혜를 받으니까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를 탔는데 생전 못 타보던 차입니다. 승용차도 아니고 봉고도 아닌 것이 희안하 게 보이고 하여튼 아주 튼튼해 보이는 차입니다. 편했습니다. 그래서 화제를 차로 돌렸습니다. 이 차는 이게 상표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제 얘기를 쭉 하는데 목사님, 사실 기도를 많이 하고 이 차를 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했더니 제 평소의 용도에는 적합하지가 않고 승용차가 적합합니다. 그런데 제가 강사영접 위원장이니까 강사님을 모셔야 하는데 혹시 뒤에서 차가 받아서 사고가 나더라도 강사가 안전해야지 되겠고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의 이유를 다 들으면서 자기 평소의 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래서 이 차를 샀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차가 높아서 시야가 좋고 그리고 정말 튼튼하게 생겼습니다. 뒤에서 진짜 탱크가 와서 들이받지 않는 한 끄떡없도록 만든 그런 튼튼한 차입니다. 거의 6800만원인가 주고 그 차를 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이 차를 사야지만 강사들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이 차를 마련해서 타고 다닙니다.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강사는 일년에 한두 번 오고 그리고 자기는 일년 내내 차를 타고 다니는데 누가 차를 살 때 일주일을 생각하고 차를 사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했습니다. 왜? 위원장이니까. 나는 그 짧은 대화였지만 참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저렇게 자기가 맡은 일에 최고의 목표를 생각하고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재편한다면 그러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일주일 동안에 아주 참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책 한권 사인해서 미국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것을 통해서 삶이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재편된 것입니다. 야구선수가 공을 잘 던지기 위해서 손가락을 1센티 찢어버렸는데 우리는 한번 그래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무엇인가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려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하기 싫은데 꼭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해당되지 않은 분들에게는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참 미안한데 방배동에서 이리로 이사를 오겠다고 그래놓고 예정보다 1년 늦게 왔습니다. 왜, 일부 교회가 간다고 그러더라 그랬더니 성도들 중에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 믿음만 있고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가 금방 갈 줄 알고 교회가 간다면 나도 간다. 그리고 복덕방 비를 다 물어서 그래서 무조건 집을 하나씩 사고 이사를 왔습니다. 복덕방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와서 집을 달라고 하는데 전부다 이 근처에만 살겠다고 그러니까 웬일인가 그랬더니 교회가 이리로 옵니다. 그래서 무슨 교회인가 하니 열린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왔나 그러니까 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니 무슨 교인들이 교회는 오지도 않았는데 집을 구하려고 생난리고 방을 구하려고 다니려고 그러는가. 그래서 한 50가정이 이사를 왔고 막바지에는 80가정 이상이 온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제 아무 생각이 없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교회가 옵니까? 안 오지, 그러니 이번에는 바로 교회 옆에서 살다가 이번에는 거꾸로 여기서부터 교회까지 새벽에 출퇴근을 합니다. 그럴 때 낙심도 좀 했을 것입니다. 아 이게 너무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닌데, 그랬습니다. 참 제가 미안했습니다. 미안했지만 제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그랬으니까 그렇게 해서 한 예정보다 일년이 훨씬 더 지나서 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동산 경기가 올라가면서 집값이 폭등하지 않았습니까? 다 1-2억씩 다 벌었습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돈을 번 것입니다. 그 온 사람들 가운데는 단 한사람도 여기 와서 집을 사면 몇 개월 만에 얼마 오르고 다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며 계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어떤 것, 교회 가까이 와서 새벽기도 생활하고 싶다. 그러고 싶다. 그렇게 해서 온 것입니다.
그렇게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 자체가 재편되는 것,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본 적이 있습니까? 충성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충성하고 미래에 충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희생이 따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지금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인격과 같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된 삶은 인격과 나누어지지 않는 삶입니다. 그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예루살렘에 첫 번째 지도자로 세우실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날 사랑하는가? 이것만 물으셨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의지하고 살기만 한다면 베드로는 충성되게 주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 그 사람 안에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면 충성되다 고 인정받았던 두 종은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하는 칭찬을 아울러 들었습니다. 그래서 충성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사람, 자신의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전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그런 진실한 소원을 가지고 성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진실한 삶이 없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진실한 노력이 없이 충성되고 헌신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모래위에 세워놓은 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일관되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서 충성되게 사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곧게 준비되어 있고 그 마음이 순전하고 그리고 그 생각이 올바르고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의해서 충만한 상태가 될 때 그 모든 내적 자원들을 기반으로 해서 충성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충동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죽어버릴거야. 이런 것은 충성된 삶이 아닙니다. 충동적인 연애감정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이 이런 충동적인 충성심도 역시 성경이 말하는 그런 충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날마다 온전히 성화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과 주를 위해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결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그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았지만 그는 비난 받을 때 온유한 지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고상한 인격을 아울러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거칠고 황폐하고 폭압적이고 이런 모습의 충성된 삶은 진정으로 그 충성의 뿌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에 기반을 둔 뿌리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성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 수많은 난관들을 만나고 그리고 수많은 어려움들을 만납니다. 시시때때로 결단이 필요하고 그리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오도 필요합니다. 그때는 강인함이 요구됩니다. 그런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온전하여지는 인격이 없이 거칠고 황폐한 가운데 그렇게 살아가는 충성된 삶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충성된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충성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더 온전해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날마다 더 온전해져가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시종일관 충성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온전한 인격을 통해서 일관성 있는 충성된 삶을 살게 하시는데 연단이 완전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27편에서 똑같은 이 다윗이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마음을 시험하사 나를 단련하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사실 시험이 무엇인지를 당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모르지만 시험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당해본 사람, 그리고 그 연단이 무엇인지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감히 이런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불같은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위선과 거짓의 껍질이 벗겨질 때 그 고통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으며 불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자기도 알지 못하게 내제되어 있던 더러운 찌꺼기들이 자신에게서 쏟아져 나올 때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시인 다윗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시련과 연단 속에서 자라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시련의 아픔, 연단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많이 시험하다. 나를 단련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좋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해서 특수인간이 아닙니다. 그들도 굶주리면 배고프고 피곤하면 쉬고 싶고,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이 좋고, 그리고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은 그들도 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이 이렇게 처절하도록 “나의 마음을 시험하사 나를 단련해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했던 이유는 그의 고백대로 행위 완전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전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 속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죄와 부패, 악과 정욕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주님께서 끊임없는 시험으로 드러내 보여주시고 끊임없이 그것들을 단련함으로서 자신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를 순결하게 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질 수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험과 단련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런 시험과 단련을 구하면서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더욱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이 살아왔던 생애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많은 연단을 거치게 하셨고 그 연단을 통해서 시인을 더 온전하게 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는 연단 받는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많이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이유 때문에 연단을 덜 받은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람위에 뛰어나게 많은 연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많은 연단을 받으면서 그 연단 속에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떨쳐버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인에게 주셨던 연단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형제들로부터 고임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아내로부터 깊이 이해받지 못한 외로운 생애를 살았습니다. 아내 미갈은 다윗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에 대해서 거의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이 부부로서 살았지만 아마 진정한 연합은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미워해본 적이 없었지만 반미치광이가 되어서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자객을 푸는 그 사울의 그 집요한 추격과 그리고 도전 앞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긴 세월동안에 처절하도록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그 사랑에 못지않은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의 사건은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동정이 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인을 사랑한 죄로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을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보냅니다. 하나님이 자신으로부터 얼굴을 가리시고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얼굴도 들 수 없고 노래도 부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주께 기대할 수도 없는 사랑이 되었을 때 이제껏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받았던 그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들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온 몸으로 겪고 나서 그리고 나서 이 시인은 정말 진정한 연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받은 반역은 그를 정말 더 말할 수 없이 낮아지게 만들었고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통곡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처럼 연단하는 것일까요?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다윗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또 누가 있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사랑받고 또 그 하나님을 사랑했던 그 사람인데 어쩌면 이렇게 가혹하리만치 연단하시는 것일까요?
이 모든 치열한 연단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죄에 대해서 앙심을 품으시는 하나님이신가? 그리고 만약에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옹졸한 앙심을 품으시는 분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연단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확실히 다윗이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한 앙심을 품고 하나님이 복수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치열하도록 당신을 그렇게 사랑했던 다윗을 연단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를 사모하고 밤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이 고양되기를 사모하던 사람, 헐떡거리며 그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목말라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가혹한 연단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윗을 치열하도록 연단하신 것은 오늘 성경에 의하면 두 가지 목적이었으니 하나는 그를 가까이 하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에게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사랑할수록 치열하게 연단하신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그래서 더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치열하게 연단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아무리 고난을 주셔도 변화될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하나님께서 고생 속에서 살아가도록 허락할지는 모르지만 정말 연단이 되게끔 그렇게 그들을 돕지 않으십니다. 그냥 그들은 고생만 할 뿐입니다. 치열하게 연단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원어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뜻이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오는 사람” “혹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느끼는 사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의해서 가장 훌륭하게 구현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은 보이는 아들 예수의 삶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시고 싶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우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싶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즐거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싶은 그곳에서 아들 예수님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시기까지 그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고 말씀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가 당신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주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치열하게 연단을 받으면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점점 더 그를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불같은 연단, 폭풍 같은 시련을 통해서 그 마음이 정결하게 빚어지고 그래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시련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과 늘 동행했고 비록 자기의 죄를 인해서 당한 시련이었지만 그 시련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죄와 악함을 인해 당하게 된 시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련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약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을 깨닫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단이 없이도 하나님 앞에 순전해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종자들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우리의 밑바닥에 있는 죄와 악함,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죄악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영혼의 고통과 많은 아픔들이 수없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는 수없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연단하셔서 그래서 그들을 당신 가까이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불같은 연단을 통해서 더러운 그들을 순결하게 하시고 게으른 그들을 부지런하게 하시고 악한 그들을 착하게 만드시고 무지한 그들을 지혜롭게 만드셔서 삶의 모든 목표가 하나님을 향해 오로지 모아지도록 그렇게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 연단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쏟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연단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씻어버립니다. 연단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고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날마다 우리를 연단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더 순종하게 하시려고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고 고난의 때를 지나게 하십니다.
이 땅에는 정말 껍데기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형식적인 신자들도 많지만 뼈 속 깊이 사무치도록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는데도 사자처럼 강인하고 충성된 삶을 살던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끊임없는 연단 속에서 주님을 냉대하고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의 정체를 그 연단 속에서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영화의 눈에 보이는 한계와 같은 번영이 그 헛되고 헛됨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이 세상 대신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잠시 사라질 변덕스러울 세상에서 이 세상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을 더 사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치열한 연단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구도자들이 되어갑니다. 연단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들은 요한 크리소스팀이 부르짖었던 것처럼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린다.’ 그리고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 눈빛이 오로지 우리의 인생의 목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추구하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랑과 썩을 육신에 대한 집착들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일수록 더 온전하게 되어갔습니다. 더 진실하게 되어갔습니다. 더 바르게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워갔고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의 참 사랑의 품으로 들어가서 합일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쉼을 얻었고 그 주님의 품을 피난처로 삼아서 고통과 환난이 있는 날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주님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들,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살수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일에 익숙해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충만한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치열한 연단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당신의 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치열한 연단의 고통 속에서 연단의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크신 친교의 사랑을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간절히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놀라운 특권을 부여받아서 이 세상의 참된 행복을 누렸습니다. 마음으로 가장 하나님을 사랑했고 삶으로는 그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래서 폭풍과 같은 시련을 이기고 핍박과 고난을 이기면서 예수 가신 길을 따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연단과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런 연단과 시련의 불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닮은 진실하고 순결한 신자가 되어가서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살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닿는 대로 주님을 훌륭하게 섬겨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연단을 받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끝.
7. 온전해진 삶과 연단 된 마음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17: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섬김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배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기를 기뻐하시지 당신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봉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다니던 교회는 서울 아주 변두리에 있는 그저 우리 교회에 수십 분의 일정도도 안 되는 그냥 20평정도 되는 빌딩의 2층 교회였습니다. 그것도 상가들이 밀집해있는 지역에 2층 빌딩이 아니라 허허벌판에 그야말로 한 20평짜리 세워놓은 빌딩에 한 층을 얻어서 예배를 드리고 톱밥난로를 피면서 모임을 갖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성탄절쯤 되어서 모두 모여 앉아서 담소하고 있는데 어떤 술 취한 사람이 오더니 뭐라고 그러더니 오천 원짜리 한 장을 주었습니다. 그때 그 돈은 꽤 큰 돈이었습니다. 교회당 안에다 휙 던지고 갔습니다. 왜 그것을 던지고 갔는지는 사실 지금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지체가 그것을 가져다가 정성스럽게 봉투에 넣어서 헌금으로 처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 헌금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청년들이 모임을 가질 때 과자나 사먹으라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교회도 가난했고 그때 오천 원이면 쌀을 정부미를 4포대 정도살 돈이었습니다. 꽤 큰 돈이었으니까 왜 그러셨을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 말씀이 헌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낸 돈이 헌금이지 청년들이 모여서 놀고 있는데 여기 있다. 그러면서 지갑에서 꺼내서 땅바닥에 던지고 간 그 돈이 어떻게 헌금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당신의 것이며 설령 하나님이 배고프고 주린다고 할지라도 사람에게서 먹을 것을 찾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그런 사람을 통해서 섬김을 받으십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향해서 진실한 섬김을 다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께서 섬김을 받으시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온전하게 된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고 가까이 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주일에 들었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되고자 하는 노력이 없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일일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일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섬기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마다 당신과 더 깊은 관계를 갖고 그리고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섬김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일할 때 그냥 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는 그가 단순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온전케 되어진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을 가까이 두시고 그들의 섬김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으로서 가장 큰 보람이 있다면 그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잘 섬겨서 그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행복하고 기쁜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온전케 된 사람을 당신 가까이 두시고 그 사람이 섬김을 받으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온전케 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섬김을 받으신다고 하면 누가 이렇게 온전케 된 사람일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을 비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도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으면서 부지런히 분투하면서 사는 그런 존재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가까이 하고 그 가까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듯이 연단이라고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일수록 걸어온 그의 인생의 길은 연단의 길이었습니다. 단지 일하면서 고생한 길이 아니라 삶의 모든 여정을 통해서 주님의 간섭하심을 경험하고 환난과 시련, 고난과 풍파, 아픔과 슬픔을 통해서 더러운 찌끼들을 뽑아내고 그리고 모든 삶이 고난을 통해서 더 온전케 되어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당신을 가까이 다가오고 또 당신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싶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고 싶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다가오실만한 사람이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의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이 속에서 메아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1904-6년 사이에 인도카시라고 하는 지방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학설에 의하면 바로 이 부흥, 1901-4년에 있었던 웨일리의 부흥, 그리고 4-6년에 있었던 인도 카시지방의 부흥을 보고 온 선교사에 의해서 부흥의 절박한 필요가 알려졌고 그것이 1907년도에 있었던 평양 대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인도 카시지방에 선교사로 가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교회를 나갔습니다. 골목에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눈물을 흘리고 울고 있었는데 선교사 생각에는 부모들이 애들을 버리고 집회를 갔기 때문에 애들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희들 왜 그렇게 울고 있니? 그랬더니 그 중에 한 아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6-7세밖에 안 된 아이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회개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신자이든지 간에 정말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반듯이 이렇게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데는 그 치열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연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연단이 필요한데 사실 그 연단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의 연단입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고치가 자아낸 명주실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마음을 보면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과 마음은 불가분의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영혼 한복판에서 우리의 인격과 그리고 우리의 존재의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통제하는 사령부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장악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끼치시게 하려고 또 우리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유혹이 노리는 과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단의 집요한 표적이 되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부패성과 많은 근심에 의해서 점령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들은 모두 부차적인 요인들이고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순종함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신령한 은혜와 정서로 가득 채우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이 신령한 생각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죄에 지고 정욕에 순종해서 육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드리기도 합니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하여튼 그렇게 성령님께서 혹은 이 세상의 죄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에는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홀리라고 하는 말, 거룩하다는 말과 홀 전체적인 온전함이라고 하는 그 두 형용사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것이 온전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거룩한 것이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더러운 것이고 그것이 흉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연단하시되 우리의 육신을 연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육신적인 어려움과 환경적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로 연단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비록 거듭나고 하나님의 것이 된 마음이지만 신자의 마음 안에는 또한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의해서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그런 세속적인 마음이 부분적으로 신자 안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 우리의 영혼에 천지창조와 방불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파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의 마음에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나서 예전에는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으로 알고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자기를 스스로 행복하게 하는데 있다고 생각하며 그 생각에 의해서 마음이 장악되어 걸어오던 인생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그가 깊이 참회하고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정복됩니다. 그러고 나면 이런 모든 가치관들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온 우주에.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신 하나님을 뵈옵게 되고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은 창조주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존재 앞에서는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온 우주의 가치이고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던 어리석은 생각은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과 온 땅이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과 나의 죄 때문에 스스로 창조주를 멀리 떠나서 하늘의 자원이 끊어진 가운데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서 이 지상에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고난의 형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내 평생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죽는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님을 위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마음속에는 부패한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찰 때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다 바쳐지고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아까운 것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해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 모든 행위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입니다.
그러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렇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피 흘리고 고난을 받은 것 때문에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던 그 모든 착한 마음은 사라지고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처럼 은혜의 상태에 따라서 신자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마음과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 불안전한 마음, 죄악 된 마음이 공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을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연단하심으로서 그 정결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마음을 주님이 주신 많은 은혜의 수단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연단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지난 신앙생활을 한번 이렇게 돌아보십시오. 가장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던 때, 이렇게 찬송할 수 있었던 때 말입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하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행복하던 때는 마음이 편안하던 때가 아니라 고통 받던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고통은 곧 물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평판, 지위 같은 것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세상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있어서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 있을 때는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기만 하면 그렇게 찔림이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천천히 읽기 시작할 때 그 말씀이 나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진리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깊이 찌르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큰 찔림이 됩니다. 물론 참여하고 난 다음에는 아픔 보다 더 큰 기쁨과 신령한 은혜의 행복이 밀려오지만 말씀이 우리를 찌를 때 그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고통을 줍니다.
세상을 사랑하려는 나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말씀하실 때 그 찔림이 얼마나 큽니까? 때로는 우리는 그 말씀을 펴놓고 통곡하며 웁니다. 내 안에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은 있으나 또한 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죄와 악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깊이 하나님의 말씀이 찔립니다. 얼마나 아픕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연단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도할 때도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기도도 멀어지게 됩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기도하려고 엎드려도 별로 마음이 큰 찔림이 오지 않습니다. 왜요? 깊은 기도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예배에 참석할 때 아무 감동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치 중 고등학교 때 조회에 참석한 것처럼 회사에서 열리는 그런 직원조회에 참여한 것처럼 그저 의식에 참여했을 뿐이지 어떤 마음에 감동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오면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연단을 받습니다. 그래서 큰 찔림이 옵니다. 아! 맞아. 이렇게 우리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내가 지난 일주일동안 하나님을 얼마나 멸시하고 살았을까? 그리고 기도할 때도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큰 찔림이 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가 생각이 나고 생각 없이 살았던 많은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것인데 아직까지도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너무 많다는 것을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그러면서 깊이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 없이 교회에 왔지만 거기서 주님의 은혜를 맛봅니다. 돌맹이같이 무딘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 그래서 그 많은 어두움 속에서 나를 구해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굳었던 우리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얼마나 아픕니까? 그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두가 연단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묵상하는 그 율법대로 살지 않은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깊이 느끼며 하나님 앞에 아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깊이 토설하고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가장 아프게 연단을 받았던 그때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던 때였습니다.
아침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주일입니다. 마당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은 얼마나 먼 가시밭길인가.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이 모든 수고와 고생과 그리고 모든 슬픔으로부터 온전히 구원해주실 그 날을 우리에게 속히 이루게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 것일까? 욥이 고백했듯이 “내가 육신의 껍질을 벗은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했던 것처럼 그 육체 밖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소망을 우리들이 가졌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이렇게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이런 연단이 없는 마음은 무지 무각한 마음이고 굳어진 마음이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일상적인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부지런히 연단되어야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심하게 굳어있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는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환경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그 수많은 시인들이 그 뼈저린 연단의 경험들,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했던 온전해진 성도들이 경험했던 그 치열한 풀무불과 같은 연단이 바로 이런 특별한 방식의 연단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 중에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어디에 있으며 자신의 모든 전인적인 부패성을 딛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분을 보이는 세상보다 더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 가운데 불꽃과 같은 치열한 연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두운 세상에 반짝이는 샛별처럼 찬란한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남모르는 칠흙과 같은 어두운 밤에 연단의 계절을 지나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어두운 하늘을 헌신적인 삶으로 불꽃처럼 수놓았던 사람들은 풀무불보다 더 치열한 고난의 불에 의해서 연단되고 또 연단되고 연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치열한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죄 많은 이 세상이 자신들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살았으나 세상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권면한 바와 같이 “너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얻었은즉 이제는 위에 것을 바라라”고 말한바 바로 그런 삶을 실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땅에 매인 수많은 욕망들이 우리를 얼마나 굳게 잡아매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치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려는 새의 발목을 말뚝에다가 기다란 줄로 묶어놓은 것처럼 신자에게 있어서 하늘로 날려고 하는 신자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이처럼 잔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자녀들이고 그리고 땅의 것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그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주셔서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지만 그 어떤 것에도 사랑으로 매이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수시로 성도인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환경적인 연단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를 통해서 이 연단을 경험하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이나 혹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는 뼈저린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유업으로 주시고 또 그것들을 누리며 살게 할지라도 성도로서 우리의 진정한 꿈과 모든 기쁨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수시로 연단하십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마음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공정하게 이 세상을 생각하고 다룰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시는 형통함 때문에 온 땅과 하늘위에 드높으신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주님이 가지고 계시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왔고 우리의 모든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은 모두 주님 안에 있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많이 사랑하십니다.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도 주님이 없는 이 세상으로 만족할 수 없도록 만드시고 잠시 머물 이 세상에 마음을 두는 대신 주님 자신에 대한 신실한 소망으로 우리의 마음이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와 슬픔이 있는 이 세상, 그 모든 연단의 고통을 벗어나서 죽음과 그리고 질병이 없고 환난이 없으면 위로와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는 그 완전한 때를 바라보며 신음하기까지 사모하도록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 사랑이 모든 찌끼들을 걸러버리고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주님을 위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정말 잘 연단되어서 날이 갈수록 주님이 보시기에 더 순결한 성도들이 되어가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8. 연단과 충성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2)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어느 감옥에서 썼는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로마의 옥중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던 목회자였습니다. 그 역시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받았다고 봅니다. 어머니는 유니게였고 유대인이었으며 아버지는 희랍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로부터는 경건한 영양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감화를 받고 크리스천에 되었다고 믿어집니다. 어머니는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까 불분명하지만 아마 일차나 혹은 이차 전도여행 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고 집안이 신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째든 이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정말 사랑스러운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디모데를 바울은 깊이 사랑했고 바울 가까이에서 동역하던 사람들 가운데 사실 성경의 증거만을 미루어보자면 디모데만큼 사도 바울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사랑과 돌봄을 많이 받았고 신약성경 안에도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가 두통이나 들어있을 정도로 이렇게 관심과 고임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디모데는 약점과 어려운 상황이 많이 있는 불리한 목회자였습니다. 서신의 내용을 보관대 이 디모데는 우선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래서 디모데 서에서 네 연소함을 인하여 교인들이 너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 디모데는 나이가 어린 나이에 목회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디모데는 건강도 원만하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많은 바울을 디모데가 염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울이 디모데를 염려하면서 너의 자주 나는 속병에 대해서 포도주를 조금 사용하라고 의학적인 권고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디모데는 다른 목회자들보다도 불리하고 연약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신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디모데는 섬세하기는 하지만 아마 약간 심약한 데가 있는 목회자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서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넘치는 사랑이 오히려 디모데를 약한 사람으로 보도록 연민의 정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판단내릴 수 있지만 서신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는 바울이 늘 이 디모데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이었고 그래서 강하고 담대 하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이 목회하는 지방은 이제 여러 가지 이단사상들이 침몰하던 시대였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참된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마 더더욱 이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옥 속에 갇혀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디모데를 천거하면서 이제 이 디모데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약점이 많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디모데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하라고 부르셨을 때 또 사도 바울이 디모데 후서 1장 8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도록 초청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이 많은 연약한 부분들을 그대로 들어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연단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를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강하게 하심으로서 자기의 쓰심에 합당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 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시기에 어떤 연단을 어떤 심정으로 받아서 얼마큼 괴로움을 당하고 영적인 진보를 이루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목사로 세움을 받을 때 물밀 듯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 후에 간단없이 닥쳐오는 수많은 약점과 그리고 수많은 연단과 시련들을 경험하면서 이제 약한 사람에서 강한 사람으로 불안전한 사람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아까 열거한 것과 같은 육신적인 연약함이나 그리고 또 목회적인 환경이나 연소한 나이나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커다란 연단을 받기 위한 도구가 되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겠고 교회 안에 목회적인 어려움이나 교회 밖에 있는 이단적인 사상들의 박해로 말미암아서 이런 시련과 고통은 훨씬 가중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연단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효과입니다.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이 연단이 가져오는 우리를 혼란케 하는 효과입니다. 이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환난과 시련, 고난과 고통 이런 것들을 도구로 써서 연단이 가해진 것입니다. 그런 시련과 환난, 고통, 핍박, 내적인 시련 이런 많은 것들이 연단의 도구가 되는데 이런 것들이 신자 속에서 일어나게 될 때는 신자는 제일 먼저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혼란은 이런 시련이나 고통, 핍박이나 고난 이런 것만을 통해서만 경험되는 게 아니라 평화로운 가운데서 유혹과 죄의 영향에 의해서 내적인 마음의 틀들이 무너지고 그렇게 됨으로서 그들이 모든 것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은혜의 상태를 유지함에 있어서 가장 내면의 질서가 가지런하게 되고 그리고 선악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말씀을 순종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과 고통 같은 것들이 일어나게 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잘 감당해서 연단으로 승화시키면 그런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마음이 안으로, 안으로 잘 정리되어서 더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견고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만 우선적으로 시련과 고난이 찾아올 때 인간의 마음과 모든 생각과 정서들은 이제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경험하는 것이 마음의 혼란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을 잠시 상실한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미혹을 받을 때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기를 깨우쳐주시는데 오히려 그것이 걸림이 되어서 마음이 산란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동기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시련과 고난, 고통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질 때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렇게 혼란스러워질 때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가 어렵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이 신앙의 목표, 우리의 삶의 방향에 헌신하기가 매우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시험과 시련 고통 같은 것들을 당하게 될 때 생각의 혼란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은혜아래 있다가 죄와 그리고 이 세상 사랑의 유혹을 받으면서 마음의 줄이 흐트러질 때도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분명히 악이라고 생각했던 데에서 생각이 혼란해져서 판단이 흐려지거나 혹은 분명하게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게 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영혼이 총명이라는 기능이 방해받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련과 고통, 고난, 박해 같은 것들이 와서 외부적인 고통이 우리 안에 가해질 때 그때에 생각의 혼란이 오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게 되거나 목숨보다 신앙을 하찮게 생각하게 되거나 하는 이렇게 가치관이 뒤바뀐 그런 혼란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혼란이 바로 고통 속에서 신자들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정서의 기복이 찾아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평안할 때도 물론 우리의 마음의 유혹에 미끄러지고 세상 사랑에 빠지게 되면 정서의 기복이 찾아오게 되지만 그러나 좀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시련을 당하게 되고 고통과 시련, 고난을 당하게 되면 정서에 큰 기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두려움과 놀람을 인해서 영혼은 혼란을 경험하게 되고 감정 역시 종잡을 수 없는 기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는 이 감정의 기복이 적고 그리고 이 성숙한 가운데 이 감정이 평정을 유지하게 됩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이제 이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해지게 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죽어야지 되겠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죽으신다면 이 사람들은 다 주님을 배반할지라도 나는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군병들이 왔을 때 그는 칼을 빼서 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어떤 예수님을 위하는 육적인 열정이 솟구쳤고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예수님이 끌려가시자 또 멀찌감치 서서 예수님 때문에 피해를 볼까봐 숨어서 예수님을 따라가던 정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야바의 뜰에 가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하고 그러다가 새벽닭이 우니까 담벼락 아래서 대성통곡하면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불안전한 정서의 기복이 많이 솟구치게 됩니다. 이것이 고통과 시련, 환난과 박해 같은 것을 통해서 연단 받고 있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역시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나가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디모데는 바로 이렇게 수많은 연단을 받는 속에서도 자기의 맡겨진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많은 시련과 고통, 고난과 박해, 어려운 육적인 상황, 이 모든 부정적인 요인들이 디모데를 참으로 연단을 받아 디모데가 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며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들을 분명히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 주어졌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모든 신자들에게 주셨지만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받음으로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신의 사명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명을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자기 좋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산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따라서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 이것이 곧 사명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과 동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사울이었습니다. 예전에도 그에게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유대교의 교훈을 가르쳐야지 된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자기는 적어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까 그것에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선생이며 그리고 자기는 이 길을 계속 걸어서 종교지도자가 되겠노라고 하는 미래의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사명감이 아니었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명감이었고 인간적인 사명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거꾸러지게 되면서 그러자 비로소 그는 예수님 앞에 처절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이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대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말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자기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너는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것을 사환과 증인으로 너를 불렀으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사명이 되었습니다.
세계 선교를 하나님이 바울 한 사람에게 위탁하셨습니까? 당시에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말하기를 내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모두 복음이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유대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에 대해서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는 무한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고 예수님이 보복을 약속하지 않으셨어도 그는 마음의 무한한 부담을 느꼈으니 이것이 바로 디바인 엔포스먼트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강력하게 느끼며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 같은 그런 처절한 소명감을 느꼈는데 이것이 바로 사명에 대한 그의 견해였습니다. 그런 철저한 마음으로 그는 사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니 그 사명감이야말로 그를 그 되게 만들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구원하신 목적으로 살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해서 모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너무 비참한 인생입니다. 먹고 그냥 마시고 그냥 살다가 죽는 삶이라면 플랑크톤의 삶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으며 아메바의 삶과 무엇이 차이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창조주를 기억하고 자신의 인생의 참된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부여하면서 사는 것에 인생의 가치를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짐승과 인간이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발견한 사명은 바로 자신의 존재가 그것을 따라 살 때 비로소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통해 만족하실 때 자기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자신의 인생의 전체를 거기에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에게도 모두 사명이 있고 은혜를 받게 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조그만 사명밖에 못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기 면에서는 작아 보이는 사명을 가졌는데도 큰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어느 동리에서 불치병에 걸린 한 소녀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가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전도자가 그의 집에 찾아가서 병상에 누운 그를 위로하면서 절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녀가 병상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의사의 판단에 따르면 한두 달 안에 죽을 것이라는 소견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인생 마지막에 구원을 막차를 타고 십자가에서 한쪽에 달렸던 강도가 구원을 얻은 사람과 같이 럭키하게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한두 달 후에 그 소녀가 죽은 후에 이제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가 사용하던 물건과 그가 누웠던 병상을 수습하는 가운데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때 묻은 배게 잇을 벗기는데 그 베게 잇속에서 새카맣게 손때가 묻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는데 50명이 넘는 동네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적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수가 그 소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부터 죽기 직전까지 주님을 모시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명단이 그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는 불치병에 걸려서 일어날 수가 없고 그래서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그런 연약한 처지였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동리 사람들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병상에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 기도명단에 손때를 묻히며 동리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 기도는 놀랍게 응답이 되어서 죄인들의 마음에 복음이 전해질 때 그 마음을 찔렀고 그래서 명단에 적힌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의 품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가 받은 사명을 살아있는 우리가 받은 사명보다 더 작은 것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으며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소녀보다 더 뛰어난 사명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누구에게든지 그런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에 대한 인식이 흐리다고 한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자기의 그 사명에 대한 인식이 흐리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매우 분명하게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혹은 그 은혜가 부족하거나 혹은 예전에 은혜를 받았거나 받았으나 지금은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사명에 대한 인식도 흐려졌다고 하는 것을 반문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교역자들이 가끔 와서 이 형제 자매들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교제하려는 것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는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교제를 하겠으면 하십시오. 이왕 시작했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길이 혹시 하나님이 이뤄주신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잘 신앙생활을 한 목사님께서 두 사람을 엮어주어도 자라온 환경과 문화와 신앙의 차이 때문에 늘 고통을 받고 어려운데 하물며 불신자하고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해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믿는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것이 불공평하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뛰어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데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데 그런데 믿음의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 그 많은 기회들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보다 훨씬 못한 형제를 만나서 결혼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희생이겠습니까? 심지어는 그래서 혼기를 놓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은혜 받겠네. 만약에 우선 결혼을 하기 위해서 고민을 하지만 연단하다가 결혼 쪽으로 가는데 고민은 하지만 고민하는 분량만큼 열렬하게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많을 뿐이지 실제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머리만 굴릴 뿐이지 기도하지 않습니다. 은혜 없이 머리를 계속 굴리면 나중에 한번 불신자하고 한번 잘해보면 가능성이 있겠다. 그렇게 머리가 돕니다. 그렇게 해서 가는데 결론을 내립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왜 기도를 하지 않으십니까? 열렬히 기도를 해야지, 간절히 그러다가 아니면 결혼을 꼭 해야지 되나. 이렇게 접든지,
어느 분이 그러시는데 지금 70이 다 되신 분인데 왜 결혼을 안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그분이 그랬습니다. 아니 지금 결혼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 위해 살기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그렇게 해서 그분이 70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총각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지 떠밀리다가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불신자하고 사귀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이 시간을 통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당장에 집어 치우라고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굉장히 일말의 안도감을 갖는 분위기인데 그러면 나는 당장 때려 치라고 하지는 않겠는데 당장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장, 지금 당장, 그리고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정말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십니까?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연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세례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마십시오. 이제 결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도 힘들면 학습 받을 때까지 절대로 결혼하지 마십시오. 결혼은 절대로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주례 안 서줍니다. 저의 신조는 무엇인가 하면 정작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예식장에서 10만원주고 사람을 사서 결혼을 합니다. 그 앞에 무슨 축복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태도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런 신앙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십시오. 그 대신 변화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확실합니다. 변화될 때까지 그래서 신앙을 고백하고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러다 안 되면 내년, 내년이 안 되면 후년,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릴 정도까지 사랑하면 그렇게 기다리십시오.
예배 시간에 누구 실명을 걸어놓고 안 되었습니다만 우리 교회에 이번에 장로님이 되신 김기현 장로님이 있습니다. 부인은 신앙이 독실한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같이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나한테 신앙생활을 했으면 못하게 했을 텐데 하여튼 무슨 밖에서 교제를 하고 왔습니다. 그러니 그 교회 목사님이 펄펄 뛰었습니다. 와서 무슨 세례도 받지 않은 불신자하고 신앙도 독실한 자매가 결혼을 하려고 하는가. 하지 말라, 그렇게 했는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는데 끝까지 기도를 했는데 그러고 나서 형제에게 편지를 써서 서울에 있는 열린 교회에 나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좋은 교회라고 하니까 거기 가봐라. 그랬더니 이 형제가 처음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첫날 참석을 했는데 설교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사도행전에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더라 그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 다음서부터 신사적으로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좋다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습 받고 그리고 생전 처음 우리 교회에 와서 크리스천이 되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교회에서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케이스가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실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흘리는 눈물을 생각해보십시오. 왜 미적거립니까? 기도하십시오. 간절히,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확신을 갖고 그리고 헌신하십시오. 그래서 진짜 하라고 그런다면 마치 그 형제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그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마치 자신이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처럼 고뇌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분별됩니다. 모든 삶이라고 하는 것이 가치질서가 정돈될 때에 사명감도 있는 것이지 다 필요 없고 자기가 하고 싶고 자기 되고 싶은 일에 몰두할 때 거기에 무슨 사명감이 있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사명을 느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단순하고 열렬했습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그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사명가진 사람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사명이 있는 그곳에 바로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가 있고 그리고 삶에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이나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나만 해결하고 그 하나를 위해서 잠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얄팍한 수법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누구를 만나도 하나님 앞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정 포괄적이고 그리고 전인이 그 신앙에 굴복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는 삶의 다른 부분들이 없고 그분의 눈빛 앞에 감추어질 수 없는 분야가 없다.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결국 사명은 이처럼 우리가 사명감을 요구합니다. 왜? 사명이 있어도 사명감이 불탈 때에 그 사명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이지 사명감이 없으면 불타도록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감이라고 하는 것은 수시로 변합니다. 사명은 안 변해도 사명감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것은 성화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성화되어서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예민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면 이 사명감에 불타게 됩니다. 뜨겁게 불타게 됩니다. 이렇게 변합니다.
지금도 오엠 선교사들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지에 제일 먼저 도착하면 그 날 밤에 보따리도 풀기 전에 등불 밑에서 유서를 씁니다. 왜 쓸까요? 선교하러왔지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닌데. 그런데 왜 유서를 쓸까요? 그 마음이 수시로 변하니까. 그래서 그것을 꺼내서 읽어봅니다. 내가 예전에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고해야 합니다. 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고, 모든 유혹과 시련 속에서 견고한 신앙의 삶을 촉구하고 뜨거운 사랑을 촉구하던 그 요한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뭘 너희들이 지금 걸어가는 이 신앙의 길, 핍박을 이기고 걸어가는 이 믿음의 생활, 그리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그 모든 수고가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또 여기까지 인도하게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그러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신앙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소중해보이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매순간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 십자가 아래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가시로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그래서 그 십자가 아래 자기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사명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정말 유일하게 중요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 대한 승복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주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를 하나님 앞에 바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해서 사용되는 기쁨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이 디모데 하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디모데에 대한 인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연단을 많이 받은 내 아들,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 얼마나 많이 연단을 받았는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연단 받는 그것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디모데 하면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 그렇게 떠올렸던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어렸을 때라기보다 신학교 다닐 때 성경을 가르쳐주시는 목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교회이름을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아는 우리나라에서 큰 대형교회입니다. 작년에 80이 훨씬 넘는 일기로 해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신문에도 났는데 그분이 맨 처음 저희 신학교에 강의를 하러 오셨을 때 학생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데모하려고, 분명히 그래도 신학교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시간인데 이분이 오셨는데 다 늙은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모자를 쓰고 강의실에 성경 한권을 들고 오셨습니다. 학생들이 수군수군 거리며 신학교가 무슨 경로당이야 뭐야 이게 아니 젊고 싱싱한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어디서 지팡이를 짚고 강의실까지 들어온 할아버지를 데려다가 우리를 도대체 뭘로 아는가 하고 막 수군수군 대었습니다. 저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는데 저는 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첫 시간 70분을 수업하고 학생들이 압도되어버렸습니다. 올라오시더니 기운이 없는데 누가 의자 하나 주려오. 그러시더니 그리고 지팡이를 놓고 모자를 벗어놓고 학생들이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마이크를 한손에 들고 천천히 디모데서를 가르치러 오셨는데 꼭 디모데를 데모데라고 그러셨습니다. 데모데 전서, 그리고는 무슨 여러 가지 이론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 다 낡은 성경 하나 펴놓고 무릎위에 올려놓고 디모데에 나타난 목회사상을 쭉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랬습니다. 신학교 4년 만에 정말 압도하는 강의를 처음 들었습니다. 정말 이것이 바로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이구나. 지금도 제 책꽂이에 가면 깨알 같은 글씨로 한 학기동안 그분이 가르치신 내용들을 새카맣게 적어났습니다. 지금도 읽어보면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서전을 하나 내셨는데 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초라한 것을 하나 쓰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그 자서전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북에 신의주인가 어디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그때는 사실 담임목사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 수는 워낙 작고 교회는 많으니까 한 사람이 여러 교회를 맡거나 아니면 목사님 없이 신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가르치거나 뭐 그 정도만 되어도 행복한 상태였는데 신학교라고 해봐야 신학교는 하나밖에 없고 학생은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신앙이 그냥 좋은 중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와서 사실 신학생도 아닌데 전도사 노릇을 하고 했습니다.
시골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가 몇 명인지 제가 지금 잘 모르겠는데 그 책의 내용으로 보면 한 100여명 되는 교회였는데 목사님을 모실 가능성이 없고 조사, 지금으로 말하자면 전도사인데 조사라도 하나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이제 목사님에게 청을 했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사람이 없었고 또 모셔온다고 해도 생활을 해드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안 되었데 어째든 그 목사님이 강력하게 추천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이 사람이 아직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진짜 예수님의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데려다가 조사로 모시도록 해라. 그래서 온 교인들이 좋아해서 그분을 불러왔는데 오자마자 보통 심란한 게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분이 어렸을 때에 제대로 먹지를 못하고 자라서 키가 작습니다. 돌아가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 작은 애가 16살이면 이제 중학생 3학년 나이인데 그런데다가 키라도 훤칠하고 좀 이러면 폼이라도 나겠는데 작은데다가 얼굴도 새카맣고 못 먹어서 배배 틀어져서 옷은 헐렁하게 큰 것을 입고 그리고 왔는데 아고 저게 무슨 조산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설교를 하려고 조사를 불러왔는데 그 조사한테는 설교할 기회를 두 달인가 석 달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로가 하거나 이웃에 있는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을 불러다가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저히 다른 사람은 할 상황이 아니어서 할 수없이 그 조사에게 설교할 시간을 주었는데 수요일 예배시간에 교인들이 밭일을 하다가 와서 이제 쭉 앉았는데 모든 교인들이 참 저 볼품없는 체구 저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그리고 한번 읖어봐라. 그리고 이렇게 하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콩알만한 전도사가 올라가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책의 표현대로라면 이러고 설교를 듣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신앙생활을 그따위로 해서 되겠는가 하고 16살짜리가 카랑카랑한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는데 예배가 딱 끝나자마자 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이 내려와서 바닥에서 대굴대굴 구르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뭐 누구한테 설교를 들어도 그렇게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온 교인이, 장로부터 시작해서 평신도인까지 가슴을 찢으면서 회개를 하고 예배가 끝나도 바닥에 엎드려서 벌벌 떨면서 기도하면서 집에를 못 가는 성도들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눈물을 훔치면서 예배당에서 이제 설교를 했으니까 이제 가서 인사를 해야지 되니까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가면서 그러더랍니다. 작밥구리가, 작밥구리란 무엇인가 하면 저도 잘 모르는데 무슨 전래 같습니다. 미세한 벌래 같습니다. 힘이 센 벌래 같습니다. 물위를 헤엄치는 무슨 벌래 같습니다. 야야, 작밥구리가 대동강을 건널 때에 알아봤어야 했다니, 그 잡박구리 같이 볼품없는 그 친구가 대동강을 건너올 때 우리가 알아봤어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태까지 이러다가 오늘 말이지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라고 16살짜리에게 두들겨 맞고 하나님 만나고 회개하고, 그러니까 그 조사를 사람취급도 안 하던 장로가 결국은 그때 은혜를 깊이 받고 그 조사를 존경하게 되어서 자기 딸을 제공했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 지금 16살짜리 먹은 애들이 도대체 뭘 알까? 핸드폰가지고 게임이나 하다가 자기 엄마에게 혼나고 뺏기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PC방이나 돌아다니고 너절하게 그렇게 생각도 없이 사는 그런 애들이 허다한데 어떻게 그 16살짜리 아이가 강대에 올라가서 카랑카랑한 소리로 그긴 인생을 산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예배 시간이 끝나고 나니까 막 진짜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고 맨 바닥에 와서 대굴대굴 그르게 만드는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연단입니다. 이 목사님이 어렸을 때 얼마나 대단한 양반인지 아주 어렸을 때 주님을 영접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교회에서 가르칠 때는 세상의 신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그러셨는데 동리 사람들이 매일 고목나무에 가서 떡을 해놓고 불을 펴 놓고 돼지머리를 갖다가 빌고 춤추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거기에 매일 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밖에 없는데 왜 우리 동리 사람들이 이 고목나무 밑에서 절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한번 고목나무를 어디든 날려버리시든지 해달라고 그러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때가 6살 때입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어마어마하게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는데 정통으로 맞아서 박살이 났습니다. 그 나무를, 두려움이 그 동리에 가득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지금도 그분은 자기가 한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확실히 그렇겠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치열하게 연단을 받으니까 그러니까 그 연단 속에서 강하고 빛나는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연단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고 큰 사람들은 뭐하고 똑같은가 하면 체구는 커다란데 쵸콜렛이니 햄버거니 치즈덩어리를 실컷 먹고 TV앞에서 리모컨이나 가지고 뒹굴던 애들이 살찌는 것처럼 꼭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무 향기로운 것이 없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연단을 받고 그 연단 속에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그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거기에 온전히 헌신되어서 자기가 강인하게 다듬어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향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어려도 무시할 수 없는 인생에 대한 통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단하십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그렇게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라고 기도를 해야 하는가 하면 물질이나 좋은 환경이나 높은 지위를 주시지 마시고 하나님 나를 연단해주십시오. 그렇게 말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받지 마시고 나를 연단해주십시오. 그래서 지금보다는 내일이 하나님 오늘보다는 내일이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금년보다는 내년이 더 주님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오늘은 약해도 내일은 강한 사람이 되도록 나를 연단해달라고 그래서 갈수록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는 이 연단 받은 디모데는 어떻게 그 연단 속에서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을까? 연단 받는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잘 충성할 때 그 연단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잇는데 첫째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라는 말로 요약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식처럼 사랑했고 실제로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디모데는 그 수많은 연단을 경험하면서도 그 고통과 핍박 그리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바울과의 관계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한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헌신이었다기보다는 바울을 통해 주신 꿈이 바로 자기를 구원해서 목회자로 만드신 꿈이었고 그리고 그 관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바울과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가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약한 디모데가 치열하게 연단을 받으며 살아있는 동안에 아버지 같은 바울이 언제나 손을 뻗으면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것이 이 디모데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까? 아버지 같은 목자였고 그 많은 연단의 시련 속에서도 이 디모데는 바울과의 관계에 헌신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가 그 연단 속에서 잃지 않았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우리가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섬길 수 있는 지체들이 있고 그리고 섬김을 받을 수 있는 목자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관과 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날 동안을 유리하고 방황하며 고생하는 목자 없는 양같이 살았습니까? 그러다가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광야에서 홀로 양육하지 아니하시고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서 사랑스러운 지체들을 만나 그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신앙이 자라게 하셨고 이윽고 우리도 예전에 섬김을 받았던 것처럼 지체들을 섬길수록 여러 모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자를 만나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신자로 하여금 이어두운 세상을 이기게 하는 큰 원동력을 공급해주는 통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 붙은 욕심을 떨쳐버리고 사랑스러운 지체들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걸어가야 할 또 다른 길이 구도의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교회의 울타리, 목양의 울타리와 그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빨리 주님의 사람으로부터 멀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잘 섬기고 봉사하며 쓰러진 지체들을 일으켜 세우고 연약한 지체들을 붙들어주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자신의 몸을 보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의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디모데가 그 숱한 고통과 시련과 고난, 핍박의 연단을 감당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순종했던 것이 바로 이 관계였습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런 삶을 본받아야 됩니다.
가끔 가다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이러이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거나 강연을 하면 항상 찾아오는 사람이 저는 그런 부르심, 그런 준비에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역에 열매가 없고 내 설교를 듣고 변화되는 사람이 없는데 성도들이 내는 헌금을 받아먹으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가책이 됩니다. 제가 그만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그때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게 그만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고민하면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장은 이래야지 됩니다. 그리고 장로님은 이래야 합니다. 집사는 이래야 합니다, 교사라면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지도 않고 어떻게 교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동안 나오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못할 바에야 그렇게 못하면서 죄를 지을 바에야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때마다 말합니다. 하면서 가책을 받으십시오. 자, 내가 구역장입니다. 내가 교사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고민을 하고 어떻게 영혼을 섬겨야할지 다 듣고 보니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가책을 받고 괴로워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구역장이라는 현실과 그리고 내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명에 어울리지 못하는 그런 삶을 못 살고 있다고 하는 현실 두 개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만둡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아 내가 이렇게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서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구역장도 아닌데 뭘 그래.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뒤로 마음 놓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서 고민을 하면 결국은 열렬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매달리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세리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괴롭습니다. 왜 죄밖에는 지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다시 하나님 앞에 서지 말고 가서 세금이나 떼먹으면서 그렇게 나쁜 짓 하며 살아야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려니까 그게 가책이 되고 괴롭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래야 합니다. 연단 받을 때 시련이 옵니다. 고난이 옵니다. 고통이 닥칩니다. 핍박도 오고 안팎에 수많은 시련들이 우리를 곤고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때에도 충성되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관계를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에 그 고통과 고난, 시련의 그 아픔들이 승화되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디모데가 그 고난 속에서도 충성을 다한 것은 복음을 위한 수고였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수고함으로서 그 수많은 연단의 아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연단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연단이 연단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스러운 상황이 그에게 닥쳐옵니다. 그때에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뒤로 물러가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그 일을 위해서 힘에 넘치도록 수고할 때 그 고통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 시련의 아픔이 그를 하나님을 원망하지 못하게 합니다. 고난의 큰 상처들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불신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더 많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디모데는 어린 나이에 육신의 질병을 가지고 그리고 핍박과 시련에 직면하면서 그렇게 심약한 가운데 목회를 했지만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치열한 연단 속에서도 한 가지 사실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 수고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그게 그의 사명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연단을 받을 때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연단을 감당할 때 그 연단이 그를 순결하게 만들어서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닮게 만들고 그리고 십자가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고통이 곧 고통이고 기쁨이 곧 기쁨이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기쁨이 될 수 있고 기쁨이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승화시키는 힘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련을 받을 때, 고난을 받을 때 그 자리에 견고하게 서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려고 할 때 그 고난을 사용하셔서 여러분들을 진정으로 연단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의 사람들로 세워져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생애를 사셨던 분이 아니셨습니까? 일생을 사시면서 죄 없으신 분이었지만 온갖 고난과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필요했다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자마자 핏덩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으면 되셨는데 왜 예수님을 이 세상에 33년이나 살게 하시고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맛보게 하시고 그리고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의 환난과 고통을 모두 경험하게 하시고 그래서 질고를 아는 사람으로 만드셨을까요? 그렇게 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온전한 재물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도 시험을 당하셨은 즉 또한 시험당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도 이렇게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보다 더 온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죄와 그리고 부패성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를 유혹과 온갖 부패하게 하는 이 요소들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 앞에 연단되어져야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곤고한 인생의 길을 걸으셨던 분이었고 그래서 인간의 질고를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시련과 도전과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셨고 그리고 거기에 충성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별명은 아멘이오,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변함없으신 충성된 하나님의 집의 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로 가치를 높이시기 위해서 연단하실 때 반드시 시련의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그때에 그 작은 시련의 고통 때문에 사명이고 뭐고 다 팽개쳐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도망치고 싶을 때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태하게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것을 단지 내가 지금 고통스럽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합리화시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하찮게 생각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살려주셔서 오늘은 변하려나, 내일은 변하려나, 기대하시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그치지 않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성실함으로 우리에게 새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깊이 가슴에 손을 얹고 내 사명의 자리가 어디인가? 내 고난의 자리가 어디인가 깊이 생각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길을 알게 하십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 교수로 들어가고 나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도사 일을 같이 봤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애들이 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3분의 2이상은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뭘 해보려고 해도 설교를 들어야지 듣지를 않습니다. 까불고 장난치고 그래서 혼을 내서 듣게 하는데 이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지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끼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처음 교수로 들어갔을 때 나는 교수는 노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학생들 하나, 하나를 상담하랴 그 다음에 강의하랴 강의 준비하랴 뭐 특강하랴. 클럽활동하면 거기 쫓아다니랴 완전히 삼 비 업종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신이 없이 학교에서 보냅니다. 토요일이 되면 설교준비를 하는데 마음 한구석이 천근만근해집니다. 설교 준비를 하나 마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안 들으니까. 너무 괴로운데 건강까지 해쳐서 화장실에 들어가면 한 컵씩 피가 쏟아집니다. 그러니까 내가 상황을 보고 하여튼 동료교수들이 김교수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삽니까? 교수 한 가지 일에 헌신해야지. 토요일도 공부하고 또 주일날 예배드리고 와서 잘 가르치도록 준비하고 그러지, 얘기를 듣고 보니까 맞는 것 같습니다. 내주위에 아무도 그렇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내가 주의 인도를 따라 여기 왔는데 내 마음대로 사표를 내면 내가 어떻게 선한 목자일 수 있겠습니까? 주님 도장 좀 찍어주시고 가서 이제 한 가지 일에 몰두해라 그러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한 이주 기도했더니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양쪽에 산인데 줄 둘이 이어져있는데 유격대원처럼 이러고 가는 것입니다. 실미도에서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밑에 보면 천길 낭떠러지입니다.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릴 그런 계곡인데 그것을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고 괴로워 펑펑 울 정도로 힘든데 그런데 보니까 굉장히 많이 걸어왔습니다. 남은 게 요만큼밖에 없습니다. 꿈을 다 꾸고 나서 새벽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 꿈이 무슨 뜻일까? 아주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명쾌하게 떠올랐는데 고생을 많이 하면서 이 길을 걸어왔고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하니까 기대감을 가지고 제가 기도를 하고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아니나 달라 한 석 달쯤 되니까 그것을 그만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연단의 장으로 옮기셨습니다. 거기로 올라가니까 아까 얘기한 그 고생은 예고편에도 안 됩니다. 진짜 거기에 가니까 진짜로 제대로 된 연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밑에가 성냥불이었다면 거기는 모닥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에 튀기다시피 연단을 받고 거기서 제가 주님을 만나고 제가 설교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지금 연단을 받는 것이 끝나고 나면 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편안히 쉴곳 전혀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딘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광야의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 넘어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그러니까 너무 기대함을 갖지 마십시오. 이 연단이 끝나고 나면 짜릿한 기쁨이 기다리겠지, 아마 놀라운 안락함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생각하지 마십시오. 리차드 백스터는 말하기를 “성도에게는 하늘나라 이외에는 이 세상에는 완전한 안식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런 안식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신 그 나라를 사모하지 않을까봐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런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게끔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잠시 맛보는 안식의 모형들일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가치관이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 호의호식하고 그리고 부귀를 누리고 세상의 안락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가치관이라면 우리는 종교를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참된 가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 길은 그런 길이 아닙니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주님이 그 놀라운 은혜를 따라서 우리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우리가 고난과 시련과 고통을 통해 연단을 받으면서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게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해나가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서 그래서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을 인생의 유업으로 알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시련을 연단으로 감당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때까지 맡은 바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끝.
9. 연단 중의 즐거움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119:92)
연단의 결과가 아무리 아름답고 그리고 그 열매가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과정은 너무나 치열하고 그리고 연단을 받는 순간은 고통이라고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한번 제련사가 금을 연단하거나 은을 연단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사정없이 그 금붙이가 완전히 녹을 때까지 치열한 열을 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금과 금이 아닌 것들이 재료분리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불을 가합니다.
똑같이 그렇습니다. 아픔 없이도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좋은 믿음으로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렸을 때는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그 연단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거나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고 신앙이 깊어지고 나면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면 정말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연단의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현실의 고통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나의 믿음을 깨트릴 수 없다. 이런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연단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두 이 연단의 불 가운데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뭔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남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은 여러분들이 만약에 만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거기에 들어간 사람이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하는 연단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뜻을 우리들이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살기 위해서는 옛사람에 속한 우리의 죄성들이 철저하게 죽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온전히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만큼 자기의 계획을 따라 살게 되고 그 자기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 우리에게 주셨던 계획과 배치되는 것인 그것을 결국은 죄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계획과 죄의 계획은 항상 갈등을 일으키고 충돌을 합니다. 그래서 죄는 은혜를 죽이기 위해 싸우고 은혜는 죄를 죽이기 위해서 싸웁니다. 각각이 궁극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완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리의 신앙문제가 외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잡혀 있을 때는 이 세상에서 기쁜 일을 만나면 하나님을 찬송하고 고난을 만나면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굳게 붙들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이 세상에서 즐거운 일을 만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해석은 각각 달라지 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변화시켜서 당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품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이용해서 우리의 환경을 바꾸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덜 희생하고 고난을 받고 안락하고 내 인생을 살아감에서 있어서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내 인생의 계획을 따라서 살 것인가. 거기에 어떻게 이 신앙을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밖에는 너희의 참 행복이 없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게 하시고 그분의 마음에 있는 우리의 모든 삶의 계획을 아멘 하고 받아들이게 하셔서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하시면서 우리가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연단하셔서 당신의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제 고집대로 강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를 강하게 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온전히 버리게 하십니다. 약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고 포기하게 하셔서 그때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강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약하게 하시고 또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사랑하는 모든 삶과 마음의 묵상까지 그분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고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참된 계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 계획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때까지 연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연단이 결국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연단의 그 부분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연단의 결국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연단을 감당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당해야 하는 고난은 쓰지만 그 연단의 결국은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는 정말 그 장차 사라지지 않을 영광의 빛이고 그리고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면류관이 되게 하는 그런 복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거룩하게 하시는 그 마지막 결과는 그렇게 아름답지만 그것이 결과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연단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의 세계의 구석구석을 누렸던 성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연단의 아픔을 감당하지 못해서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면서 그 피 절인 기도를 우리들은 듣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주일학교 학생이나 초신자 같은 신앙이 아니라 잘 단련된 훈련한 신앙을 가진 경건한 성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얼마나 아프고 이 연단의 고통이 얼마나 쓰라렸으면 그렇겠습니까? 모세와 같이 능력이 충만하고 온유한 사람도 오죽했으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이제는 내 생명이 족하오니 나를 취하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이 하늘에 능력을 한손에 쥔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도 똑같이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내 생명이 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그 연단의 고통스러웠으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호소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연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로 값지고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물속을 통과하게 하고, 불속을 통과하게 하고, 고난의 폭풍 속을 통과하게 하셨는데도 그런 연단을 받고도 이렇게 포악하고, 모질고, 불순종하고, 죄를 좋아하고, 제멋대로 살려고 하고, 자기 의에 차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주님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셨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짐승 같은 삶을 살았을까?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여정이 다 끝나고 나면 연단의 풀무를 통해서 우리들이 흘렸던 그 모든 땀은 하나님 앞에서 그 아름다운 보석알갱이가 되고 우리가 그 연단의 고통 속에서 남모르는 가운데 흘렸던 그 수많은 눈물들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써내려갈 수 있는 우리의 사랑의 사연을 적을 수 있는 그 투명한 먹물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난 속에서 찢기고 흘린 그 모든 것은 주님 앞에 우리가 찬송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 주님의 손에 안겨드릴 붉은 장미꽃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고난을 많이 겪고 연단을 겪었던 믿음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처절한 고난밖에 만약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이 아무리 연단 후에 찾아오는 결과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연단 가운데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 큰 연단의 고통을 통과하는 것이 항상 그의 마음속에 연단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항상 그 마음속에 그 연단의 고통을 소화 낼 수 있는 기쁨의 샘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소화하는지 비결을 모두 터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그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연단하시고 그 연단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 고통 속에서 사랑해서 그 말씀을 통해서 기쁨의 샘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고통이 그를 거룩하게 연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성이라고 하는 것은 평탄하게 살아오고 자극을 받지 않으면 비교적 온순해지게 마련이고 자극을 많이 받으면서도 그 자극과 고통을 소화 낼 수 있는 어떤 기쁨이 그 속에 없다면 고통을 당하게 되면 될 수록 그 인간의 내면의 인성은 거칠고 그리고 폭력적인 인성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원리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은혜가 없으면 고생만 실컷 한 사람들은 성격이 굽어있고 거칠고 포악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샘을 소유하고 있다면 폭풍과 같은 고난, 불길과 같은 시련, 가시밭길과 같은 연단의 과정을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모르는 말씀의 은혜의 샘이 있습니다.
온 다리가 피범벅이 되어서 가시밭길을 걸어가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의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한 아름다운 가락이 되어서 울려 퍼질 때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시고 그분이 자비로우시며 내 이름은 그분의 마음에 기억된바 되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확 밀려올 때 연단을 받기 위해서 당해야 하는 그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 쓰라리고 아프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지금 그 하나님이 나를 이 고난의 골짜기에 홀로 두시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을 깊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주의법이 내 마음에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히브리 성경에 이게 복수입니다. 법은 단수인데 이 즐거움은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한 마디의 말씀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기쁨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연단을 통해서 고매한 신앙의 인격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사선을 넘나드는 고통의 비밀과 함께 그 고통 속에서 자기 혼자만 맛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됨, 그리고 비밀스러운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면서도 그것을 소화내서 그 고난 때문에 주께로부터 더 가까이 가고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놀라운 축복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4-5년 전에 미국에 알라바마 라고 하는 남부지방에 집회를 갔습니다. 말로만 듣던 테니시 강도 보고 집회 중간에 가까운 곳에 있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목사님이 다른 데는 못 가셔도 여기는 꼭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한 30분차를 타고 가니까 거기에 바로 헬렌 켈러의 생가가 있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오래된 사람인데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고등학교 다닐 때 읽었던 어느 영어로 된 에세이집에 그 헬렌 켈러의 글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나온 사진과 똑같이 헬렌 켈러가 설리버 선생과 뛰놀던 잔디밭, 그 다음에 노예들이 밥을 해주던 부엌,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부자가 아니면 소유할 수 없었던 밀펌프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방과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앞도 못보고 그리고 귀도 멀고 말도 못하는 그야말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설리반 선생을 만나서 그 선생님이 30년 동안을 이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나중에 이 헬렌 켈러가 그 모든 불행을 딛고 그리고 미국의 수많은 신앙의 가슴속에 희망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동이 되었던 것은 그 헬렌 켈러의 큰 사진이 있고 그 사진 밑에는 앞도 못 보는 헬렌 켈러가 손으로 쓴 글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영어로 물론 쓰여 있었습니다만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썼다면 그렇게 크게 감동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읽는 순간에 다른 성경구절이 아니라 그 성경구절을 읽는 순간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오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얼마나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가. 그리고 정말 내가 받은 연단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가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저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사람입니다. 거기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한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없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그런 약속을 붙들고 그 고난의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며 가시에 찔리고 쓴물을 머금어야 했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위로가 있었고 그 위로가 바로 고난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살 지혜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고 그래서 그 말씀에 자기의 마음의 뿌리를 박고 이 고난 받는 연단 받는 과정에서의 아픔이 자신의 마음에 뿌리를 연단의 고통과 쓴물에 담구지 아니하고 자신의 마음에 뿌리를 어디에다가 담가야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담가야 합니다. 그러면 큰 폭풍이 지나는 것 같은 연단, 그리고 눈보라치는 벌판에 혼자 내팽겨 친 것 같은 그 연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외로운 벌판에 혼자서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정말 뜨겁게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그리고 쓴물을 머금으며 가시에 찔려 온 피투성이가 되는 것 같은 고난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양약이 되어서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를 깊이 두드리며 우리가 주님을 붙들며 주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시기를 48장 10절로 기억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연단하되 은을 연단함과 같이 아니하고 고난의 풀무에서 너희를 구원하였노라” 그러니까 은을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을 가하는 사람은 은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그냥 센 불을 사정없이 가해서 재료분리 시키고 은만 뽑아내면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들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얼마큼 우리를 압박하되 우리의 믿음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도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연단을 가하실 때 그 연단이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속도를 조절하시고 크기를 조절하십니다. 무엇보다도 그 연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자에게 연단의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즐거움들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셔서 그래서 그 연단 속에서 연단을 바라보며 쓰러지지 아니하고 연단 받는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단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고 그 연단의 계곡을 통과해서 우리들이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치열한 연단을 받으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자식이 잘못되어도 심하게 때리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도 완전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반듯이 우리를 연단하시되 무지한 폭군과 같이 연단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연단을 받으면서 주님과 말할 수 없이 행복한 밀어를 나누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간에 사랑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우리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고 나빠 보이는 모든 일, 그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사랑을 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쁘고 행복할 뿐만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도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가까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즐거움을 터득하도록 더더욱 힘써야 합니다. 언제? 고난의 먹구름이 끼고 그리고 연단의 고통의 비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들이 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리고 그 말씀의 위로와 사랑, 용기와 비밀들을 터득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연단의 때에 우리의 겉 사람은 그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후퇴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그 연단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을 더 꼭 붙들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들로 새로워져가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날 우리는 이 치열한 연단을 통과한 사람들로 그 아프고 쓰라린 고통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주님과 나누었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밀어를,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눈부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식, 이런 것들 때문에 얼마나 훌륭하게 고난을 극복하고 시련의 터널을 통과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그 풍랑을 인하여 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 되게 하신 우리 주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단을 당한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고 그 말씀 안에 붙들려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0. 연단과 의뢰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1:8-9)
고린도 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첫 번째 편지는 아마 삼차 전도여행 후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보고 첫 번째 편지와 두 번째 편지 사이에 기간은 짧은 6개월 그렇지 않으면 1년 정도 흘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사도 바울이 심히 격양된 목소리를 고린도 교회를 질타하는 광경이 나타납니다.
고린도 시는 항구 도시였고 그래서 돈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정신자체가 저만을 위한 이기심이었기 때문에 사랑이 현저히 식어져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은혜가 사라지자 바로 그 이기심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파당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여러 가지 지식을 좇은 학파가 있어서 각기 그 학파에 속한 사람들로 자처하였습니다. 은혜가 떨어지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었던 교회는 바울 파, 게바 파 등등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고 많은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돈이 많고 여유가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자연히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고 고린도 교회가 은혜가 사라지자 교회는 이런 육신을 사랑하는 정욕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음행과 같은 일들까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꾸짖는 교훈을 편지로 보내고 바울은 곧 고린도를 방문하기로 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도저히 방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고린도 후서를 쓰기 직전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온 소식을 접하게 되자 그 소식은 대단히 고무적인 소식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수가 그 첫 번째 편지가 도착한 후 회개하고 그리고 새 삶을 찾게 되었고 교회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격양된 감정을 억누르고 이제는 어머니와 같이 차분하고 애정 어린 음성으로 이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고린도 후서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 등등을 이유로 삼아서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무리들이 거짓 선생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 문제가 일으키는 일도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회개하고 변화된 고린도 교회를 위로하며 이 서신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1장 첫머리부터 우리가 읽은 약간 뒷부분까지 사도 바울은 인사를 하고 있는데 이 인사 속에서 자기들이 아시아에서 당한 그 처절한 고난과 연단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고생한 자기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고난 받을 때 자기들을 도우셨던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 고난 받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와 같이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라는 아주 간곡한 표현으로 자신들이 에베소서에서 당한 그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간곡하게 상기하면서 그들에게 그 고난이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였습니까? 그는 젊은 날에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생이 바뀐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구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영생이 무엇이고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리고는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부터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에게 매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그 많은 사람들의 불행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어찌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식으로 말하자면 당대에 최고의 학자였던 가마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은혜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삼층천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으로 말하자면 이방과 임금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비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오늘 아시아에서 고난당한 이유는 자기 자신의 육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고난을 당한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을 위한 것이었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 예수의 참된 생명을 전하기 위한 그 사명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육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뛰어난 능력과 은혜의 경험, 학식에도 불구하고 그런 요인들을 고난을 덜 받는데 사용되게끔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성령에 매어서 올라가기 직전에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에 청해서 무언에 가까운 교훈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교훈 직전에 개인적인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너희 가운데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니 유대인의 간교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거리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전한 것이라. 곧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파한 것이라” 했습니다.
능력이 모자랐습니까, 은혜가 모자랐습니까, 지식이 모자랐습니까? 병든 자를 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핵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성령의 역사를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그는 고난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능력 있는 자로 사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한 마리에 힘없는 어린양처럼 그 힘든 고난의 풍파를 모두 겪어야 했습니다.
사도는 오늘 여기에서 자기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에 깊이와 넓이를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아시아에서 생활하면 떠오르는 것이 힘에 지나도록 당해야 했던 그 모질고 힘든 고생이었습니다. 그 힘든 고생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오늘 그는 표현하기를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했다고 말합니다. 인내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가 있고 고생을 당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점이 있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것 같은 고생을 아시아에서 하여야 했습니다. 에워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적수였고 직면하고 있는 모든 상황은 철저하게 불리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어리석다고 비난했고 유대인들은 기적이 별로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병약한 몸을 가진 그리고 말도 훌륭하게 잘 못하는 전승에 의하면 외모도 별로 볼품이 없는 사도 바울을 사람들이 보면서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힘에 지나도록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서 고생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돈도 많이 주시고 그리고 높은 지위도 주시고 우리의 날들을 형통하고 또 형통하게 하셔서 이 세상의 온갖 행복을 다 누리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가는 평화를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으셨을까? 깨달은 사람, 그리고 이렇게 자기를 위해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일생동안 빚진 자가 되어서 그 부채 속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 그들의 삶 속에는 언제나 고난이 친구처럼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지조도 없이 이 세상과 짝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온다면 그것은 자기의 죄 값으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고난 속에서는 생명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사람들만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 그래서 얼마 안 되는 이 인생길을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하는지를 깨닫는 사람들의 인생의 길에는 항상 고난이 친구이고 외로움이 이웃이며 시련이 친척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좋은 집에서 그리고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 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왜 보내셨는지를 알고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해주셨는지를 깨닫고 그 방향대로 사는 것, 거기에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만족을 얻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와 그의 일행은 세상의 사랑과 욕심을 비었습니다. 아시아에 금이 있었습니까? 아시아에 돈이 있었습니까? 굶주린 영혼과 병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곳으로 갔고 거기에서 철저하게 낮아져서 오직 예수의 복음을 전해 그들을 구원하여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것이 바울과 그의 일행의 온 소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들은 힘에 지나는 고생을 했고 두 번째로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는 환경을 통해서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환경을 보면서 이렇게 피할 길이 있었구나. 벗어날 길이 있겠구나.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어떤 희망을 주는 환경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희망도 살 소망조차 사라져버린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사명이 있습니까? 힘에 지나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차마 내려놓을 수 없는 내게 맡겨진 사명, 사방에서 자기를 우겨 싸고 그리고 자기를 에워서 쓰러트리려고 하는 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자기의 사명을 붙든 나머지 살 소망까지 끊어진 것 같은 절망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을 잃어버릴 때 대체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포괄적인 고백에 만족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 없이도 포괄적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고백에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우리는 절망할 수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절망의 어두운 밤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희망이 무엇인지를 그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아시아에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나가며 살 소망까지 완전히 끊어지는 인생의 위기를 경험하였습니다. 이렇게 절망하기까지 붙잡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불손한 사람들입니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사는 갈대와 같은 인생이 아닐까요? 거기에 어떤 견고함과 고난을 이긴 자의 담대함 같은 것들이 깃들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과 바울의 일행은 힘에 지난 고생을 당하면서도 내려놓을 수 없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져도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일터가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단지 일군으로만 부르셨다면 오히려 일을 잘하게 도와주셨을 텐데 하나님이 그들을 노예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근원이시며 영과 육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쓰라린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자신들이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이 이 세상에는 없고 그리고 자신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안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당한 그 고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번째로 말하기를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철저한 절망을 넘어서서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서에서 고백하기를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육로의 위험과 해로의 경험과 모든 고생을 겪었으니 그 후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면서 바다 한가운데서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일주일동안을 표류하며 어두움 가운데도 있었고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고난의 과정을 밟아야 했습니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이제는 더 이상 살 수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모든 인생을 끝내고 부르시는 지점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고난의 큰 파도를 넘었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다루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로 달려가는 그들의 길을 막으시기 위해서 가시넝쿨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그러나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고 오로지 복음의 빚진 자로 자처하며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으로 나타나게 위해서 그래서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모진 고생을 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는 마치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뼈 속 깊이 패역과 죄가 배인 존재이며 고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합니까? 죄인들이 이런 고백을 합니까? 죄를 물먹듯이 먹고 마시고 그의 마음속에서 죄가 이미 주관화되어버린 사람들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줄 아십니까? 불가능합니다.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서 죄가 주관화된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비참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죄가 객관화되기 전까지 그들이 죄를 사랑하지 않고 죄를 버리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 죄와 죄가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비참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은 턱없이 희망이 들떠있고 주님 앞에서 날마다 성화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가혹하리만치 자기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그 고통하시는 손길을 봅니다.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 욕심대로 먹고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절망, 이런 고생,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마음이 사형선고를 당한 것 같은 처절한 절망은 없습니다. 거룩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성도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자기를 살리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 그래서 그 사명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한 사람, 그런 사람들은 힘에 지나도록 고생하고 살 소망이 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자기와 같이 쓰레기 같은 죄인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하는 그런 거룩한 절망감에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지난주간에도 며칠동안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정말 핍절한 그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지 6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자기가 제일 많이 은혜를 받았다고 사람들이 자기를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이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될 터인데 신약성경 순서도 모릅니다. 그래서 훈련을 받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방법, 예수 믿는 길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5일씩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걸어서 그 성경학교 같은 신학교에 찾아온 사람들, 그것을 생각하면서 만약에 정말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참사랑을 외치고 그리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고 그들의 품에서 잠드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인줄 알고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살 소망이 끊어지고 심한 고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생겨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을 들어 사방을 보면 벌판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가슴이 저미는 사명감을 가지고 나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나 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구름처럼 많고 예수 때문에 입시양명하고 알량한 방식에 선별을 하고 싶어 하는 현실주의자들은 많아도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사시며 나는 이 세상에서 잊혀지고 그리스도는 기억에 오래 남게 하는, 나는 버림을 받고 영혼들은 구원을 얻게 하는 그 일에 쓰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인가.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메이며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래서 그날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중국을 위해서 이 중국에 있는 영혼들과 함께 이 중국에서 죽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도록 말입니다. 인생에 진정한 가치는 자신에게 주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의 인생을 향해서 가지신 계획이 최고로 성취되는 그곳에서 그 사람의 인생은 가장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틀을 머물건 삼일을 머물건 우리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가득합니다. 중국에 가면 과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없다면 여러분들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누구의 노예이신가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해 삽니까? 힘에 지나도록 고생하고 그 사명을 부여잡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그래도 놓을 수 없이 붙들고 살아가니까 사형선고를 받는 것 같이 그렇게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다가가게 됩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 누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그러실까? 그렇게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런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힘에 지나도록 고생하도록 놔두시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생명을 벼랑 끝에 내모셔서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여기게끔 끝까지 그렇게 만드실까? 바울과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이렇게 다루셔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게 다루셔야만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사도 바울은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이유를 절망 속에서 배웠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지는 모든 절망 속에서 그는 고통 가운데 자기를 연단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의뢰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연단의 고통 속에서 사도는 터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바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의지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며 삽니까? 자기의 재물을 의지합니다. 누가 주셨습니까? 자기 건강을 의지할 것입니다. 누가 주셨습니까? 재능을 의지할 것입니다. 재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심지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의지하는 것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자신을 의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을 곧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니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은혜, 심지어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도 활용해야 할 것이지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무엇을 의지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가 그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심지어는 죄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하실 때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그 무엇에 비유하는 대신 양에 비유하셨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지킬 수 없는 한 마리의 어린양 목자의 품안에서 목자의 목양의 그늘 아래서 그 목자를 의지하고 그 목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피조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곳에서 많이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는 곳에서는 죄는 번성하고 하나님은 모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처음 죄가 들어올 때 통로가 되었던 하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다. 선악을 앎에 있어서 그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 하와의 마음을 사로잡은 뱀의 유혹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종속되어있지 않고 그와 동등 되어서 그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유혹이 하와의 마음에 가장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열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기를 선택하게 되자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죄에 종속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존재가 이제는 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자신을 의뢰하는 자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시설들이 좋아져서 덜 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봄이 되면 그 벚꽃놀이를 많이 갔습니다. 그 벚꽃이 여기저기 벚꽃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많은 것이 아니라 창경원으로 모두 몰렸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인파에 에워싸여서 벚꽃을 구경합니다. 고무풍선도 하나 사서 손에 들고 막대 사탕도 하나 사서 손에 듭니다. 엄마 손잡고 가다가 동리에서 못 보던 신기한 것들이 많으니까 손을 놓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엄마 아빠도 그만 잃어버리고 아이를 놓치게 됩니다. 잠시 사방을 돌아보아서 엄마 아빠가 사라진 것을 알고 나면 이 아이는 풍선도 필요 없고 사탕도 필요 없고 땅바닥에 다 던지고 얼굴이 흙빛이 됩니다. 그리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 엄마를 부르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한시도 하나님을 떨어져서 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감정이 갖게 만들고 죄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게 하는 담대함을 제공해줍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 구원의 은혜를 입고도 매일매일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이 게으르고 권태감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보면서 깊이 절망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명백히 주셨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명을 감당할 수없어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옷깃을 붙잡고 주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제가 잠시 주님을 떠날지라도 주님은 저를 버리지 마시고 저를 놓지 마시옵소서.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그리고 한번 펑펑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나의 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로지 주님께만 목 매이는 자가 되어서 오로지 주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것 이외에 아무 희망이 없는 자가 되어서 원하는 것은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에서 몸부림치는 것처럼 그렇게 도움을 구하며 매달리며 살고 계십니까?
바울은 사명을 감당해나가려고 하는데 거기에서 당하는 힘에 넘치는 고생과 끊어진 소망,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 속에서 마지막 티끌만큼 남은 자신을 향한 의뢰의 마음을 떨쳐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 앞에 철저히 절망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신자의 참된 특권이 무엇일까요? 정말 자신의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서 누군가에게 맡기고 당신은 내가 내 인생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선한 계획보다 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이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신뢰하기보다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그렇게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말고 누구에게 있을까요? 나의 인생을 그분께 모두 맡기고 주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기 위해서 부르신 높은 분, 나의 손을 잡아주시고 그리고 또한 나의 전 생애도 붙잡아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이외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 말고 누구의 인생을 통째로 맡아주셨으며 생사간에 모든 희망이 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고통 가운데 치열하게 연단하시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전혀 의지할 수 없는 존재들이며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남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뛰어난 은사를 소유하고 넉넉한 환경에서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런 것을 의지하는 것은 모두 미친 짓입니다.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하나님께서 더 많이 끝까지 우리를 연단하셔서 믿었던 사람들로부터는 배신을 당하게 하시고 의뢰하였던 것들로부터는 맺힘을 당하게 하시고 신뢰하던 것들로부터는 실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전 재산이라고 하는 사실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치열한 고난의 연단, 그로 말미암은 절망 속에서 배운 것은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위대한 능력이었습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선한 사명을 품고 죽기까지 충성했지만 절망의 막바지까지 다 달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처절한 실패와 그리고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도저히 의뢰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만들었고 그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관록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재적인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만약에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이 약한데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연약한 자를 들어서 강하게 사용하심으로 사람은 가려지고 주님은 나타나게 하십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성도의 길을 걸어가게 하심으로 그가 걸어간 거룩한 길이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길이 아니라 그를 거룩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이루어진 길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진지하고 거룩한 삶을 살 때에만 죄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때나 한결같이 우리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고백하기를 이렇게 하시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잘 죽은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선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힘에 지나도록 고생을 하고 살 소망조차 끊어지고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아서 죽음이 벼랑 끝에 내몰린 것 같은 위기를 맞이하여서 고통을 당할 때 그들 속에 이런 죽음의 그림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예수님이 죽음을 읽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런 이유로, 이런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분 속에 역사한 그 죽음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고생 속에서도 소망이 끊어진 절망 속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리면서도 잘 죽을 수 있었습니다. 왜 예수가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도수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고난의 길을 가셨던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미말에 더러운 죄인들이 이렇게 힘에 지나도록 주의 일을 위해서 고생하고 연단을 받아서 소망이 끊어진 고통 속에서 죽음의 벼랑 끝에까지 내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특권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예수와 함께 잘 죽었더니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의 위대한 능력을 그 현재 속에서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침에 설교를 준비하고 잠시 묵상을 한 가운데 지나온 저의 인생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살아온 인생의 날들 중에 대부분 다시 살고 싶은 날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걸어온 인생의 길이 고통스러운 연단의 과정이었구나. 삶의 굽이굽이마다 피가 배이고 눈물이 흘러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죄 때문에 흘린 피눈물이구나. 때로는 주님을 위해서 잘 감당하려고 하는데 이런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내게 부여된 연단을 인하여 흘린 피와 눈물들, 그런 인생의 길을 이렇게 회고하면서 결국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이 왜 우리를 우리가 의지할 분이 어디에 있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예수가 전부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모든 것처럼 생각하십니다. 우리도 또한 그분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한분에 목을 건 사람들입니다. 오직 그분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예수와 함께 잘 죽은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부활의 현재적인 능력을 그들에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껏 우겨쌈을 당하여도 고난을 당하여도 잠시 엎드려지나 아주 거꾸러지지 아니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아주 잊혀지지 아니하고 오늘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만약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것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그 고난을 자신의 삶 속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이 절망, 그리스도와 함께 이 현재적인 죽음의 경험,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다시 살기 위해서 예수와 함께 죽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의 고난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자리가 무엇이든지 거기에 오래 계십시오, 잘 참으십시오. 거기서 죽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목표를 응시하며 분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화의 삶을 걸어가면서도 똑같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신앙도 우리들이 예수와 함께 잘 죽고 그 죽음은 잠시이고 그렇게 잘 죽은 사람들 속에 넘치는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적인 부활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을 정복하며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비밀들을 터득하기까지 고통의 연단을 감당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1. 연단과 믿음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8상)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마지막 때에 될 일을 계시해주시는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적은 글입니다. 그 계시가 본격적으로 전달되기에 앞서서 소아시아에 있는 7교회를 판단하시는 예수님의 판단이 계시로서 주어져 그 2장서부터 3장까지 실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모두 7교회가 나오는데 두 교회는 칭찬만 들었고 두 교회는 책망만 들었고 나머지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에베소 교회부터 시작해서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7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말세에 7시대를 가리키고 각 교회는 그 시대를 비유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바로 이 라오디게아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해석은 소아시아에 있는 7교회가 처해있는 영적인 상황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새롭게 일으켜주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복음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한 지역으로서 예전부터 고약으로 유명한 동리였다고 합니다. 고약 중에서 특별히 눈에 바르는 안약이 아주 많이 생산되어서 명품으로 로마 지역 전역에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산 안약하면 개성인삼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눈병을 치료하는데 매우 특효약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동리는 이 안약을 팔아서 부자동리가 되었고 따라서 교회도 아마 부요한 교인들이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아마 어느 교회보다도 넉넉한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형태는 그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부요하다. 부자라. 그래서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영적 상태를 살펴보실 때는 가난하고 헐벗고 눈멀고 그런 형편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급히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얻어서 눈을 뜨고 벌거벗은 옷을 입고 알몸을 가리고 이렇게 가난한 것은 다시 물질로 채움을 받아서 부요해지고 이렇게 되지 않으면 거의 가사상태에 있는 것 같은 영적인 형편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짧은 18절 상반절의말씀에서 이제 믿음과 연단, 연단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서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자교회였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헐벗고 굶주리고 눈멀고 병든 아주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왜 많은 물질들을 소유하고 부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보실 때 이렇게 가난한 교회가 되었을까? 우리는 여기에서 부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부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먼저 이 부에 대한 세속적인 관점입니다. 부에 대한 관점은 세상에 있는 자원을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이 부라고 할 때 단순히 물질만을 의지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권력,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지식, 혹은 미모, 혹은 건강,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부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높은 권력에 오른 사람, 그 사람을 우리들이 절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부에 대한 세속적인 관점은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부에 대한 세속적인 관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이제 이런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얼마나 많이 누리고 그것을 소유하는가, 그것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습니다. 6-7살짜리를 데려다놓고 학원에서 주식투자 요령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이 다음에 그 애들이 무엇이 될지 나는 참 걱정스럽습니다. 자본주의사회는 그 자체가 이미 치열한 경쟁의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안 가르쳐주어도 자기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가르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얼마나 우리의 인생이 경쟁만 가지고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주어서 그 경쟁관계에서 오히려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 되고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살고 하는 이런 차원 높은 가치들을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 토대 위에서 적절한 경쟁의 관계를 일구어나가고 그래서 승리한 사람은 승리했기 때문에 진 사람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승자의 아량을 보여서 자신이 이긴 것을 이겨서 얻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그래서 이렇게 공평한 사회가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노름을 하다가도 돈을 많이 주면 깨평을 주는데 하다못해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성공해서 얻었으면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얻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어서 또 좋은 경쟁관계로 살아가도록 이렇게 함께 사는 사회로 구성하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교육열이 높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관점에서의 부를 손에 넣기 위한 그런 팽전중심의 그런 교육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는 절대로이 세상에 행복해질 수 없고 우리의 자녀들이 가치 있는 인생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에 대한 세속적인 관점, 그것을 우리들이 그것만을 가지고 우리들이 부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은 유한하고 그리고 유한한 이 세상에 자원으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죄와 죽음, 이 고통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의 자원을 많이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도 있고 적게 소유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은 이 세속적인 자원이 아니라 또 다른 부였습니다. 그 부가 바로 신앙적인 부였습니다. 이 영적인 부, 신앙적인 부였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영생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인간이 고통 받고 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그 영적인 부요함,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되고 살아가는 그 영적인 풍성함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고달프고 고통으로 가득 찬 그런 생활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크기가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모든 고통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부요한 순서대로 회복한 나라가 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적인 부, 영적인 부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영혼의 축복들, 그리고 삶의 환경을 능가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진정한 행복, 거기로부터 주어지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 이런 것들을 많이 소유할 때 우리들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부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 신앙적인 부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어도 사실은 많이 가진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21살 때 회심을 했습니다. 그 전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회심하지 못했고 회심에 이르기 한 6년 동안은 교회를 나가지 않는 불신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정말 미워했고 그리고 성경의 진리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굳게 믿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 세상의 인간의 사상,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기를 바라면서 탐구했던 세상의 많은 사상과 인간의 세운 철학들은 제 마음에 잠시 깨달음은 가져다주었지만 흔들리지 않은 평안이나 기쁨은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언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고 아주 작은 교회에서 회심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회심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나니까 예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세속적인 부를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영적이고 신앙적인 부가 충분하지 않으면 결코 이 세속적인 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은 세속적인 부를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사람이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회심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 사랑과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뭘 좀 바쳤으면 바칠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정말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그리고 헌신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바치지 못할 때 그때 그것이 정말 커다란 고통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아도 외로운 사람이 있지만 한 사람을 위해서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은 결코 외로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바치고 싶은데 그때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꿈을 꾸었지만 좌절하고 그리고 건강도 매우 안 좋은 매우 연약한 실패하고 좌절한 한 청년의 불과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알고 나니까 주님을 위해서 많이 바쳐야지 되겠는데 뭐 바칠 게 있어야지, 아무리 집에 와서 봐도 바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가대에서 노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나는 사실 찬송가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무엇 하나 하나님 앞에 섬길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연은 다 밝히 말할 수 없지만 어떻게 해서 그때 우연히 닭 한 마리가 생겼습니다. 생닭이 하나 생겼는데 이게 계획에 의하면 갖고 가서 집식구들과 함께 삶아먹게 되는 그런 닭이었습니다. 누구한테 얻었습니다. 그것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받았습니다. 봉지가 있는데 닭보다 봉지가 작아서 노란 닭이 튀어나오는 그런 닭이었습니다. 정말 이것이라도 주님께 바치고 싶은데 그 한 마리를 들고 시장에 나가서 팔수도 없고 그것을 들고 예배당에 갔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날 수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할아버지 목사님이 광고를 하는데 교인이 한 30명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 교회 어떤 여집사님이 있는데 몸이 아파서 누워서 하혈을 하고 고통을 받는다. 예배가 끝나고 심방을 가려고 하는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달라고 그러셨습니다. 아, 이게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리고 목사님이 차도 없으시니까 예배가 끝나고 나서 저녁예배를 드리기 전에 심방을 가시느라고 곤색 양복을 입고 목사님의 가방을 들고 따라갔는데 내가 목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가시려고 하는 그 길 어구까지 따라가서 목사님, 가면 누워있는 그 자매가 있을 텐데 이것 제가 정말 주님 앞에 드리고 싶은데 가지고 가셔서 푹 끓여서 누구 주지 말고 혼자서 먹으라고 그러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노란 닭이 쑥 삐져나온 그 비료 푸대를 목사님에게 건네주었더니 목사님이 그것을 들고 그 집에 가서 심방을 마치신 후 그 집에 그것을 주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끓였는지 누가 끓였는지 하여튼 끓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하여튼 3년을 두고 그 예화를 계속 하셨습니다. 두고 두고 예화를 하셨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오고 나서 몇 년 후에 그 목사님을 가서 뵈었는데 자기네 교회교인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그때 다른 것은 생각이 안 나고 그 생각이 났습니다. 노란닭발이 나온 그 닭을 나를 주어서 당신이 배달해주었다고, 그 이후로 전도사로 교수로 또 열린 교회에 정착하고 나서는 담임목사로 섬기면서 닭 한 마리와 비교될 수 없는 큰 헌금을 저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그 닭을 바쳤을 때처럼 그 정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게 그 정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 후에도 전부를 바쳐봤지만 그러나 그때처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닭을 바치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가 정말 우리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 신앙적인 부를 소유할 때 비로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가 주님의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지하실에서 있다가 교회가 이제 방배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교인이 200명밖에 안 되는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1억에 1100만원의 월세를 내는 교회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저는 그런 점에 있어서 욕심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인정을 못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 저는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욕심이 없습니다. 있으니까 잘 가꾸고 예쁘고 편리하게 하려고 고민하지 정말 욕심이 없습니다. 광야에 텐트를 쳐도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면 그곳이 하늘나라가 아닙니까? 거기에 가서도 욕심이 없었는데 어디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서너 사람이 목사님에게 실망했다. 알고 보니까 목사님도 야망이 있는 사람이다. 뭐 아니면 교인 200명이 1200만원씩 월세를 어떻게 내려고 그러는가. 이런 사람들이 구시렁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거기로 갔습니다. 그러니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삼주 헌금을 모아야지만 겨우 월세가 나왔으니 그러나 교역자들의 생활비나 이런 것들을 해결할 것인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딸이 학교에서 왔는데 눈물이 글썽글썽 거려서 왔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애들이 어떻게 알고 놀리더랍니다. 너는 빚이 많은 교회 목사님 딸이라며, 빚쟁이라고, 마음이 짠하고 아팠습니다. 애들이 뭔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오죽했으면 그때 재정을 맡았던 재정위원장이 어느 날 결제를 맡으러 왔는데 눈물이 글썽거리는데 너무 재정적으로 힘드니까, 그래서 내가 위로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지금도 놀라운 은혜가 그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조금 하나님 앞에 헌신을 해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참 좋아하는 것이 요즘 교인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교회가 어려운데 또 저는 그런 점에 있어서 자존감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절대로 교인들을 만나도 혹은 다른 교회 목사님을 만나도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다, 힘들다. 그런 이야기를 전 집에 가서도 저의 집사람에게도 거의 안 합니다. 그게 한다고 그게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밖에서 목사님을 만나서 교회가 어떻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어갑니다. 그래도 죽을 것 같아도 항상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교인들이 힘드시지요,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힘드시죠.? 그러면 자네가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도 힘들 것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속을 끓여도 그저 몇 사람이 끓이고 이렇게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이름도 밝히지 않고 무명으로 거액의 헌금들이 필요한 때마다 들어옵니다. 500만원, 1000만원, 2000만원, 심지어는 3000만원, 4000만원 그래서 수표를 추적해본다고 해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 틀립니다. 지금도 누가 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만 아십니다. 비밀입니다. 오죽했으면 재정부에서 돈을 세다가 1000만 원짜리를 100만 원짜리로 알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계산하다가 보니까 1000만 원짜리고 500만 원짜리가 나옵니다. 지금도 모릅니다. 누가 그렇게 하는지, 그 사람이 아직까지 교회에 남아 있는지 아니면 밖에 있는 사람이 와서 몇 번 해주고 갔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그렇게 해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부자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대부분 돈도 없고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는 돈이 아무리 많이 있고 이 세상의 세속적인 부를 많이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부가 그들 속에 없으면 그들이 결코 그렇게 많이 헌신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그 부요함이지 세상의 물질 그것만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마게도니아 교회에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큰 흉년이 들어서 이제는 끼니가 간데,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니까 예루살렘을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받았는데 거기에 있는 교인들을 좀 돕자. 그래서 이방에 흩어져 있는 많은 교회들이 헌금을 하게 하였습니다. 연보입니다. 그랬는데 오히려 돈이 많은 교회들은 그런 일에 있어서 인색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니아 교회는 정말 불리한 조건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환난에 많은 시험이 있고 무엇보다도 극도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마게도니아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못하지를 아니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넘치는 연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 교회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믿음이라고 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넘치도록 헌금을 해서 예루살렘의 고통 받는 교회에 성도들을 돕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정말 부요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부만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부요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바로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사람이 될 거의 없고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많이 소유해서 부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열망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는 매우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냥 세속적인 교인이고 아마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별로 영광을 받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높은 지위와 많은 물질,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모아 놓은 많은 재물들이 자기를 보호할 것이라고 굳게 믿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람, 주님께 대한 큰 믿음을 소유함으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부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도대체 그 믿음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구원과 관련해서 구원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누구도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믿음을 열심히 노력하고 쟁취해서 얻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친 자신의 공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고 못 얻은 사람들에 대해서 멸시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 믿음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이르는 이 믿음 말고 또 다른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기에서 두 가지 믿음이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일방적인 은혜로서의 믿음을 이야기한다면 뒤에 나오는 그 믿음에서 출발해서 다시 또 다른 믿음에 이르게 되는 이 믿음은 성화의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서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그러면 그 믿음을 완전히 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절대로 천지를 창조하신 일이 없는 것처럼 믿어지는 사람, 성경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일 리가 없다고 확신이 오거나 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확신이 오거나 자신이 절대로 죄인일 리가 없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할 리가 없고 죽은 후에는 부활이 있을 리가 없고, 그리고 천국과 지옥도 없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들면 그것은 전에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사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한번 그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성령의 인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지게 되는데 새겨지게 되면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에서 미끄러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다시 살 것이라고 하는 부활에 대한 믿음도 그에게서 사라질 수 없습니다. 한번 믿음이 심겨지면 그것은 그 사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항상 똑같은 정도로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은 믿어지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리가 없다고 하는 그런 불신앙으로 간 것은 아닌데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데 그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감격해서 그런 사랑을 받고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안 섬길 수가 있을까? 이런 가책 같은 것이 밀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럼 무엇인가? 그게 성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도 자기가 성화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정도에 따라서 예전에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았지만 그 믿음이 오늘 내 안에서 재현된, 그래서 역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가, 그분을 사랑하면서 그분의 계획대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과거에 얻은 믿음, 더하기 오늘 성화의 은혜를 통해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쉼 없이 역사해야지만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구원을 얻은 믿음의 상태가 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은혜에서 미끄러져지고 매우 게으른 삶을 살게 되면 영혼의 실증을 방치하고 말씀의 은혜, 기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마음이 차갑게 식으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사실인데 예수님보다도 내가 훨씬 더 중요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 속에 있는 믿음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이게 안 맞는 것입니다. 이게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이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질서 가운데 행복하고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국어시간에 국어강의를 들으면서 산수 공부를 해도 머리가 복잡한 게 하물며 머리 속에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있는데 실제로 가슴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살고 정욕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것조차도 없을 때 더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안 믿으면 예수를 안 믿었을 때보다도 더 정신적으로 불행해 보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삼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가면 안 됩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제 세상도 내 손에 넣고 예수님의 축복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화될수록 더 열렬하고 뜨거운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화가 되면 될 수록 뜨거운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성화되고 변화될수록 더 충만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데 그런 충만한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그 비결이 바로 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은혜를 높이고 그 사랑에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 점점 더 우리들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도 더 풍부하게 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자가 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자가 되니까 비록 세속적인 면에 있어서는 육체적인 부는 적게 소유하였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풍성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니까 아주 강하고 능력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랑 앞에서 우리를 낮추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같이 더러운 죄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는 그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우리가 더 성화되고 그리고 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믿음을 성화를 통해서 더 풍부한 믿음을 소유하게 해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실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연단과 믿음의 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불로 연단한 금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결국은 금은 성경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영광, 혹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금속 가운데 변하지 않는 금속이기 때문에 믿음을 나타내는데 가장 좋은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금으로 묘사한 부분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금은 의심할 여지없이 믿음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금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부자입니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집회가 없었으니까 금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이 곧 재산이었습니다. 가장 유동성이 풍부한 재화였습니다. 그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바로 부자였고 그것을 많이 소유한 나라가 바로 부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금을 많이 소유한 나라가 부국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통해서라도 그 금을 소유하고 싶었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금을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으로 사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금을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몇 천 년이 지난 무덤을 파헤칠 때 변하지 않는 형태로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금입니다. 이것이 그대로 녹슬지 않고 상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이게 바로 금을 통해서 믿음을 보여주시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불로 연단한 금이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연단을 통해서 순결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한 순도의 믿음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믿음 속에는 의심도 섞여있고 또 믿음이 있는 그곳에 함께 하나님을 향한 의뢰의 마음과 함께 또한 자신을 의지하는 인간적인 욕망도 그 속에 깃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은 이런 불순물들이 많이 섞여 있는 불안정하고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믿음은 크기가 비록 작을지라도 순결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끊임없는 성화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 속에서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이나 아들을 향한 사랑이 적당하게 뒤섞여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주님만을 향한 순결한 사랑이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느 정도는 나를 의지하고 어느 정도는 물질을 의지하는 그런 세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순결한 믿음입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 그 사람이 비록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많이 소유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부를 소유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을 보이시고 그 믿음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그렇게 묘사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탁월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중에는 약한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능력과 재주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왕도 있었고 노예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두 그런 다양성을 능가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정말 나그네라 일컬음을 받고 그리고 유리하는 양처럼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렇게 여김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 모두가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지위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들이 그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들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의지하는 그 신앙이 그들 모두를 부요한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 무명한 자 같았으나 유명한 자로 살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짓밟히는 사람들 같았으나 결코 죽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멸시를 받았으나 결국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순결한 신앙으로 만드시려고 하는 노력과 기대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많은 시련 가운데 두셨습니다. 환란 가운데 두셨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두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그 시련과 어려움과 환란, 고통과 박해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 연단의 불로 인해서 더 순결해지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많이 섬긴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거듭되는 환란과 시련, 고난과 박해 속에서 그들은 열렬히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고 하나님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어갈 수 이 세상을 보았고 그리고 이속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같은 믿음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열렬히 주님의 이름을 불렀고 생사간에 주님을 더 온전히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을 믿는 그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 가운데도 지났고 물 가운데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을 빼앗아가기 위해서 고난을 가했지만 육신의 생명을 멸하고 자신의 영혼의 믿음을 앗아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영과 육을 아울러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켜갔습니다. 이 세상에 유혹이 심하고 세상의 환란과 박해가 심하고 그리고 고난으로 가득 차고 어디서든지 참된 신앙을 소유하기 어려운 불신앙의 시대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옛날부터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이 세상이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순결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세상이 되었던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빛은 소수였고 어두움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부패하는 것들은 세상에 가득했고 그 부패하며 항거하며 사는 소금과 같은 존재는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언제나 다수가 아니었고 소수가, 소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소수가 곧 다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멸시와 욕을 당하고 천대를 당합니다. 고난을 당해도 그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유일신 신앙으로 담대하게 맞섰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담대하게 맞섰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를 통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그로부터 무한한 감화와 그리고 무한한 은혜의 원천을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박해를 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우리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금보다 소중한 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그들은 슬픈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하나님만을 뜨겁게 사랑했던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불같은 연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일수록 남이 알지 못하는 치열한 연단을 거쳤습니다. 영과 육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은 치열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그 속에서 연단 받는 자기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은혜의 계획들을 그 치열한 연단 속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그들은 연단받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동안에 단지 인내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 치열한 연단을 받으면서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곳에는 주님이 세워놓으시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쉽게 쓰러지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셔서 은혜 받은 사람들을 거기에 세워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쉽게 쓰러지고 자기의 자리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치열한 연단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크신 사랑을 너무나 작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으로는 부요하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너무나 가난해져있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교인들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와라. 저는 교회를 시작한 이래로 어떠하든지 주님의 음성을 따라서 여러분들을 인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변화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주님께 바칠 최고의 선물은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면 머리에 리본만 묶으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선물입니다. 우리 한번 언제 주일날 정해서 리본을 묶고 다 나올까요? 이렇게, 십자로 이렇게 묶어서 그래서 여기다 리본을 묶어서 주님께 바칩니다. 나아볼까요? 최고의 선물입니다.
몇 해 전에 제가 부산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뭐도 모르고 그 교회에 가서 집회를 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큰 은혜가 주어질 때 동기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광고 시간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교인들이 마음을 다 풀어주셨습니다. 목사님이 뭐라고 광고를 하셨는가 하면 저도 참 황당했습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광고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김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해주셨는데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앞으로 삼일동안도 우리가 많은 은혜를 받으십시다. 그러면서 자기의 간증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 전화를 걸었는데 나하고 직접 통화를 못하니까 어느 직원이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자매님,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시는데 목사님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미리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자매가 나보다도 더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데 뭐라고 대답을 했는가 하면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 모든 음식보다도 목사님 교회 교인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 받는 것을 가장 훌륭한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거기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돌아와서 여러분들이 참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최고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직원이 있으니 그 얼마나 은혜로운 교회입니까? 이 목사님은 우리가 일식, 중식, 한식 아무것을 대접해주어도 여러분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목사님은 허기집니다. 여러분, 목사님을 위해서라도 좀 변화되십시오.
정말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니까, 그런 사람이 변화되어서 예전에 주님을 모르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십자가를 하찮게 알던 사람이 그 십자가의 사랑의 은혜를 받고 그래서 정말 감사하고 그때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은혜를 받아도 가까이 우리 자녀들이 우리 지체들이 은혜를 받은 날이면 목이 미어서 밥이 안 넘어가는데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를 흘리고 살을 찢어서 주신 예수님은 얼마나 기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그런 믿음을 소유하고 예수님이 우리밖에 없으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연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이 연단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은 그냥 살게 내버려두십니다. 왜 어차피 죽을 것이니까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치열하게 연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어떤 고통, 그리고 마음의 괴로움, 그리고 여러분들이 생활 속에서 찾아오는 근심과 많은 고통들 만약에 그것과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 마음만 굳어지고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죄를 지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런 많은 환란과 시련을 보면서 예수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예수님께 찾아가서 이르고 그리고 그들을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하는 환란 속에서 우리의 불결한 믿음을 보고 그 시련의 불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더 순결하게 더 온전하게 하시려는 그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우리들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보십시오. 그 금이라고 이름 된 아름다운 믿음은 산에서 캐어온 노다지가 아니라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연단된 금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든 여러분들을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장로님들과 그리고 모든 교역자들과 스텝들이 함께 지혜를 짜내고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불편함이 없이 교회생활을 하도록 도우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즘 마음속에 근심이 쌓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모자라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러나 정말 믿음에 있어서 영적으로 벌거벗은 사람이 있고 눈먼 자가 있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다 드러낸 그런 사람들로 자라간다면 이 좋은 교회당이 어떻게 주님의 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많은 노력들은 헛된 것들이 되고 우리의 많은 수고는 폐기처분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정말 우리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 세상의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가치를 붙들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큰 사랑과 십자가에 대한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이 세상을 의지하며 사는 대신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살기로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이 정말 그 순결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더러운 욕심과 우리의 불평과 불만,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이 없는 이 메마른 생활을 인해서 우리의 믿음이 이런 더러운 욕정들이 섞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 믿음에서 연단하고 그래서 순결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분투가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불로 연단한 금을 내게서 사서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얻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희생의 대가를 통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소유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 방탕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있었으면 한번 호명해보십시오. 누가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왕의 자리에 있었고 사람도 나오고 그리고 지극히 가난했던 평범한 사람도 나옵니다. 모세와 같이 학식이 뛰어나고 지도력이 탁월한 사람도 나오지만 그보다 못한 사람들도 거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분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사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와 타협하면서 잠시 유익을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을 받기를 즐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을 양보하기 위해서 날마다 세상과 타협한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순간 장렬한 죽음을 선택한 순교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찮은 것이었지만 믿음은 양보할 수 없는 금같이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지만 그러나 믿음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믿음의 집에서 그리스도와 만났고, 그 믿음의 집에서 사명을 받았고, 그 믿음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잃어버린 것은 곧 모든 것을 상실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분투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십자가가 있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립니까? 우리의 신앙, 성도들을 지키며 살았던 그 믿음의 본을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들이 (?)분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안일과 적당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속에서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속에서 우리가 순결해질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한순간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 너무나 쉽게 믿음을 버리고 죄와 타협해서 잠시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 너무나 쉽게 이 믿음을 저버린 우리들의 삶, 그리고 구원 얻은 믿음으로 만족하고 믿음에서 성화의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많이 그리스도를 알고 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 분투하지 않는 이 게으르고 영적인 권태감에 사로잡힌 이 하찮은 삶들을 겨우 이런 믿음의 생활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까? 그분이 피 흘려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시고 싶어 했던 구원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불로 연단한 금을 내게서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어떤 곳에도 믿음은 없습니다. 오로지 순결하게 하시는 믿음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내게서 금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자라간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십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생애에 가장 큰 소원이 예수를 더 알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분에게 모든 비밀이 있습니다. 정말 그분을 추구합니까? 그분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더 많이 깨달으려고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비밀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깨트리신 그 비밀들을 오늘 내가 그분처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그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가 살고 내가 죽는 그 삶을 통해서 배워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님께 은혜 받은 그것을 회상하면서 오늘은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어거지로 사는 것처럼 그렇게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을 죽은 자와 같은 많은 사람들, 주님이 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가진 것이 없어도 높은 지위와 권세가 없어도,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유명해지는 것도 싫고, 그리고 큰 교회가 되는 것도 싫고,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도 싫고, 한 가지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온전한 신자가 되어서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는 무명한 자와 같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고 그리고 비천한 자와 같지만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인생에 전부로 여기고 그분과 합일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순간 우리는 우리를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것은 제 힘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모든 비밀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게 무엇을 해주시려거든 그리스도를 보여주십시오. 내가 예수를 더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가지신 그 마음을 가지고 나도 나를 바라보면서 살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되었을 때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 세상에 붙은 헛된 욕심을 버리고 이제는 예수님이 제일인줄 알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주님의 자녀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했던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불같은 연단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순결해지기를 원하고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자녀들이 고통 받을 것을 아시면서도 얼마나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시면 그 고통의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길을 걸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2. 연단과 성품의 변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에게 닥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지혜와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작정 속에서 우리에게 수많은 환란과 그리고 시련과 어려움들이 일어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하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된 것도 있고 그리고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그런 고통을 당할만한 허물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지혜 속에서 우리에게 적절하게 보내어지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그 연단은 우리에게 커다란 결과들을 남깁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폭풍은 이미 사라졌어도 폭풍의 흔적이 온 도시와 들판에 그리고 산과 강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처럼 환란과 시련도 지나갔지만 지나간 흔적은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우리들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기서 신앙으로 그 시련과 환란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그 고난의 폭풍 속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과 많은 어려움을 통과하게 될 때 폭풍과 같은 시련과 고난이 지나가고 그 사람이 인격적인 어떤 열매를 맺히고 지나갑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불신앙으로 그 고난과 시련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역시 고난과 시련, 환란은 불신앙으로 그 고난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몸부림을 쳐도 역시 그 사람 속에서 어떤 영향을 남겨놓기 마련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여튼 영향을 남겨놓고 맙니다. 저는 예전에 강가에만 가면 한동안 신비스러운 느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강가에 가면 반질반질한 조약돌들이 수도 없이 수십 리 길을 강가에 쭉 깔려 있습니다. 그 조약돌 하나를 보면서 그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봅니다. 이 동글동글한 조약돌, 그리고 조약돌까지는 아니지만 꽤 커 보이는 저 바위, 거의 공처럼 동그랗게 된 바위, 저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물살에 씻겼으며 저렇게 동그랗게 되었을까? 그렇게 울퉁불퉁한 것은 아마 얼마 안 된 것이고 이렇게 반들반들한 돌맹이는 아마 수 백 년, 아니야 수 천 년, 아마 그 정도 되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해 그런 상상이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 하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홍수가 났습니다. 홍수가 날 때 기도원에 있었을 때였는데 계곡에서 쾅 하면서 전혀 개울이 그저 발을 담구면 무릎까지 오기 때문에 발을 벗고 다리도 필요 없이 건널 수 있었던 개울이 삽시간에 불어나서 어마어마하게 물이 흘렀습니다. 그런 강물로 변했습니다. 그때 저녁때 저녁을 먹고 뜰에 나와서 계곡에 무섭게 흐르는 물을 지켜보는데 그 개울이 흐르는 물소리가 쏵 하고 물길이 두세 길을 될 정도의 그 어마어마한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그런데 저 아우성치는 개울소리 밑바닥에서 아주 둔탁한 괴음이 계속 들립니다. 그게 무엇인가 했더니 산이 물을 먹으면서 산사태가 나면서 깎일 때 흙이 있는 곳에는 사태가 나고 돌이 있는 곳에서는 돌이 균열된 틈으로 물이 쭉 들어가면서 바위가 물을 먹으면서 그 바위를 쓰러지는 쪽에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이 틈에 물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균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커다란 산 한쪽이 우르르 하면서 무너집니다. 쾅 하고 떨어지면서 돌맹이가 잘라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승용차만한 바위도 있고 밤만 한 것도 있고 혹은 쾅 떨어지면서 베개 덩어리만한 것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가파른 물살을 타고 그것들이 밀려옵니다. 내려오면서 물속에서는 돌맹이가 가볍습니다. 그래서 가볍게 뜬데다가 거기다 강력한 물살이 내려 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내려오면서 돌맹이끼리 부딪히는데 부딪히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고 옆에 돌맹이까지 끌어내서 같이 굴러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속에서 둔탁한 굉음을 수없이 천둥치는 소리처럼 내려오면서 계곡을 향해서 흐르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몇 주 있다가 물이 빠지고 저 계곡 하류에 내려가니까 돌맹이들이 모였습니다. 참 신기한 게 그게 채석장에서 자른 돌도 아니고 그냥 확 굴러서 쾅 하고 떨어진 바위 조각인데 그런데 그게 막 구르면서 내려오니까 그 바위들이 거의 크기가 같아집니다. 그러면서 너무 너무 놀라운 것은 그 바위산에서 방금 떨어져 나온지 며칠 혹은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은 바위들이 저 아래서는 아주 동그란 바위가 되어서 거기 잔뜩 쌓인 것입니다. 큰 돌은 앞에 쌓여 있고 작은 돌은 좀더 멀리 더 작은 아주 더 멀리 물의 흐름을 따라서 질량의 크기에 의해서 분류가 되어서 쭉 깔려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아, 이게 바보같이 강가에 모든 돌들이 물의 흐름에 의해서만 동그랗게 다듬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따금 일어나는 홍수 이런 것을 통해서 막 굴러오면서 다듬어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의문이 풀렸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여러분 잘 한번 제 이야기가 맞나 보십시오. 바위 중에 매우 큰 바위가 개울가나 산 계곡에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바위가 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나온 것인데 떨어져 나왔겠지 산에서 솟았겠습니까? 떨어져 나온 것은 나온 것인데 매우 큽니다. 승용차 한 두세대만하든지 뭐 버스 반 토막 만하든지 그 정도입니다. 그런 게 이렇게 서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바위 중에는 동그란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굴러서 내려오기는 했는데 어느 정도 굴러오다가 바위가 너무 크니까 바위가 못 구르고 멈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위가 다듬어지기는 어느 정도 다듬어져서 그러나 부딪혀서 이렇게 막 굴러다니 동그랗게 된 큰 바위, 그런 것은 거의 못 봤습니다. 더군다나 개울가에서 있는 것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게 결국은 대답이구나,
우리가 물론 자연적으로 인생을 살면 나이가 들면서 인간의 기질이나 생각 같은 것들도 많이 변합니다. 젊어서 공격적인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훨씬 덜 공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 성질머리가 팔팔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호랑이 발톱이 빠지듯이 기운이 없어지고 눈빛이 희미해지면서 자연적으로 그런 성질머리 같은 것들이 퇴화됩니다. 성화가 아니라 퇴화, 성질낼 기운이 없어서 이제 그렇게 됩니다. 확 성질을 내는 것을 분노라고 합니다. 희랍어로 ‘오르게’라고 그러는데 진짜 열이 확 오르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듭니다. 나이가 들면 그 에너지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기가 분노를 버린 게 아니라 육체의 힘이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분노가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런 것들도 자연적으로 생겨납니다. 그래서 젊어서 매우 까다로웠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좀 덜 까다로워지고 그리고 젊어서 성질이 팔팔해서 불같은 사람들이 그저 나중에는 꺼진 모닥불같이 되고 이렇게 되면서 나이가 들면서 뭔가 이렇게 퇴화되어서 이게 성품에도 어느 자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나 정말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아름다운 성품의 변화, 거룩한 성품에로의 아름다운 변화, 이것은 결코 자연적으로 퇴화된 감정이나 능력에 저하 때문에 생겨나게 된 그런 인간성의 어떤 결함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무언가가 빠져나가서 힘이 없어져서 결국은 무엇인가 좀 덜 날카롭거나 덜 해로운 상태가 된 그런 인간성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하나는 은혜의 주입과 죄의 소멸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는 하나님의 새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이 그러셨다고 그러면 좀 말이 안 되지만 마귀가 특별히 야, 너 한번 진짜 아주 악랄한 사람이 한번 되어봐라. 그리고 악랄한 성품을 마귀가 순간적으로 주입하지 않아도 은혜를 쭉 빼버리면 악랄한 사람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마귀가 야, 너 이제 한번 마음껏 게으름뱅이가 되어봐라. 그리고 게으름에 독소 같은 것들을 네 영혼 속에 확 주입해서 게으름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영적인 영향으로 우리의 영혼이 충만해지지 않아도 하나님이 어떤 계기가 있어서 은혜를 쭉 빼 가면 그 다음에 인간은 한없이 게으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뭐에 대해서? 물론 선한 일에 대해서 게으른 자가 됩니다. 특별히 자기만을 독선적인 성품을 집어넣어주지 않아도 은혜가 쭉 빠져나가고 나면 저밖에 모르는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통해서 우리의 성품이 변화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입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깃들어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경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이 그에게 총명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는 흔들리지 않고 아주 똑바로 지름길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또 하나는 죄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들어와서 제일먼저 하는 일은 우리 안에 내제하는 죄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죄는 결국은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고자 하는 강력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는 죄를 죽이고 죄는 은혜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둘이 서로 팽팽하게 지배권을 놓고 줄다리기를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죄가 은혜에 의해서 거의 소멸될 때가 있는가 하면 죄에 의해서 은혜가 거의 소멸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주입되고 또 한편으로는 죄를 죽임으로서 우리의 성품이 거룩한 성품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이렇게 거룩한 은혜로 말미암아 죄 된 성품을 죽여가고 그래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삶을 살게 하시는데 그때 연단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하시는 중요한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가? 결국은 마지막에 도달되는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하나님을 닮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본받게 하시기 위해서,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실제적으로 가장 잘 반영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훨씬 추상적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우리에게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보여주셨고 그리고 그 인간이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성품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주님께서 미리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환란과 시련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국은 마지막에는 그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이 변화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 밖에서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도 하나님 앞에는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자신이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하신 일뿐 아니라 당신 자신의 됨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될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죄 있는 자로 정죄되어서 죽으신 그 죽음에 동참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는데 다시 살아나신 그 일에 우리들이 동참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우리를 위해서 죄 값을 지불한 적이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그 하신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동시에 또한 그분의 됨됨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그분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안에서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십자가에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또한 고난을 받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또한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뿐 아니라 그분의 됨됨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하신 일에 참여하고 그분의 됨됨이에 함께 참여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각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충만한 신성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서 이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깃들게 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성품이 있고 그 성품이 자연스럽게 성품에 어울리는 삶을 창출해서 그 흘러나온 삶과 우리 안에 변화된 삶이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는 짓은 하나님 앞에 참 예뻤는데 인간이 하나님보시기에 매우 더러운 인간,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는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할지 알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두 가지가 항상 일치가 됩니다. 그런데 일치가 안 되는 것 같은 적이 있습니다.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것은 자기는 됨됨이는 악한데 본질은 악한데 어떤 다른 목적에 의해서 선하게 흉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하는 짓은 굉장히 선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시각이지 하나님의 시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삶이 그렇게 분리되었을 때 그 외면의 삶이 아무리 선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하나님이 그것을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하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렇게 선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정리하십니다.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외식과 위선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면서 사는 삶이라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 그래서 정말 변화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런 존재가 되는 것, 그 사람에게서는 삶과 그 사람의 됨됨이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됨됨이만큼만 살고 사는 것만큼만 그 됨됨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마음에는 정말 더 하나님을 위해서 삶을 살고 싶은데 이렇게 밖에 못 사는 것으로 인해서 안타까워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부분이 우리의 마음이 전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 사는지 아니면 주님을 위해서는 정말 충분히 그렇게 하고 싶은데 너무 그렇게 하고 싶은데 환경과 여건에 의해서 살수 없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정말 충성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건강이 허락을 안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또 마음은 더 많은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싶어 합니다. 돈이 없습니다. 없으면 못 합니다. 그런 것 사이의 불균형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도 사실은 이미 드러난 삶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아파하고 진정으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바쳐지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내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통해서 이미 밖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사는 당신의 사랑받는 자식들이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직까지도 멀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충분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이 보실 때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변화됨으로 더 영광을 받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복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란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관찰 자체를 그 인간의 내면의 세계부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환경이 아니라,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말 가난한 사람.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높임을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인식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외부에 물리적인 커다란 환란이 없어도 항상 눈앞에 보이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 자기 자신의 모습, 그 자체가 경건한 자기 자신의 눈앞에 비친 세상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 그 자체가 자신에게 연단의 재료가 됩니다.
시편 119편 가운데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아니함으로 내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하나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시인은 고고를 고백하는 그 시점에서는 어떤 지금 치열한 환란을 당하면서 막 피투성이가 된 그런 모습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날 눈을 떠서 세상 사람들을 본 것입니다. 물론 이 시인이 항상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도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서 세상 사람들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가슴이 확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왜 저들이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면서도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죽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가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구속과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나. 가슴이 막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아픈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눈물이 시냇물처럼 막 흐르는 것입니다. 이게 비 오듯 온다는 표현보다 훨씬 더 강렬한 표현입니다. 눈물이 그냥 뚝뚝 떨어지고 그렁그렁 고이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이 시인 속에 있는 그 아픔을 조금은 여러분들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아픔이 있습니다. 또 시인이 인생을 살다가 보면 환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을 다니던 때 그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또 그것은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가슴아파했지만 또 그것 말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나서 하나님이 없는 가혹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때 가슴이 쓰라린 세월들을 보내는 장면이 참회 시 속에 나옵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아까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고 할 때 마음속에 찢어지는 고통과 그 다음에 자기가 죄를 짓고 하나님이 얼굴빛을 안 비쳐주셔서 아파하고 고통 하는 것 사이에 통증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아니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통증의 크기를 이야기하자면 여러분들이 예 아니요, 하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통증의 종류가 틀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 참 아니 문학을 알아야 이야기를 하지. 통증의 종류가 틀리냐 하는 것입니다. 집게로 꼬집으나 손으로 꼬집으나 아픈 것은 마찬가지지, 칼로 찌르나 창으로 찌르나 물론 묵직하게 찌르는가, 뾰족하게 찌르는가, 차이는 나겠지만 아픈 것은 차이지 종류의 차이는 아닙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입니다. 이해가 갈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의 사람의 경우에는 사울이 죽이려고 쫒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외적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백척 관계에 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니까 마음이 막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당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외적으로는 집이 날아가거나 원수가 쳐들어오거나 나라를 잃어버릴 위기는 외적인 풍파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 연단 중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은혜아래 주의 신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게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온전한 은혜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신자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십시오. 오해하지 말고, 모든 죄의 지배에서 최대한 벗어나서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상태로 들어가면 지금보다 더 많은 고통이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럼 뭐 하러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를 받으면 더 고통스럽다는데, 그런데 고통은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에게 생명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키는 고통이 있고, 우리의 생명의 불을 끄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고통은 바로 전자의 고통입니다. 고통 가운데 생명을 계속 불러일으키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가장 행복하던 때는 가장 아팠던 때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내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으면 말릴 텐데, 왜 그렇게 고결하신 분이 완전하신 분이 아무 가치가 없는 더러운 죄인을 위해, 살려 주셔봐야 이렇게 밖에 못사는 쓰레기와 다름이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을까? 우리 주위에 직장을 잃거나 가족들이 고통을 받거나 사업이 위기를 만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평온한 상태에 있는데도 그 깨달음이 오면 가슴이 저리도록 아픕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을까? 막 아픕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니까 더 아픈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우리 안에 내가 가득하게 되면 그런 고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고통이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송보송하게 마른눈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아무리 행복한 신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언제나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상태,
그래서 나도 언젠가 추억해둘만한 말 하나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후배가 그러는데 목사님, 목회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내가 목회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그게 목회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서 있지만 조금도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해주는 것, 아무리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웃기지만 아무리 목회가 잘 되고 보람이 있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아까 이야기한 그런 아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왜 이 세상에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까? 그리고 그를 위해서 나는 왜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을까? 이렇게 느끼는 그 처절한 고통, 아무리 목회가 성공을 하고 번성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워질 수 있다면 세속적인 기쁨이 거룩한 슬픔을 몰아낸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엉겁결에 이야기를 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진짜 참 멋있는 말을 할 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것, 똑같습니다. 신자가 성화를 위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를 찾아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 속에서 신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것, 그것이 성화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보송보송한 마음을 가진 신자의 마음은 정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전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이런 영적인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결국은 연단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어떤 외적인 환경을 연단을 사용하시는데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안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상 부귀 안일함과 않으며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테입이 자꾸 끊어져서 연결이 안 되어 자세히 찬양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 찬송가에 이렇게 좋은 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세상 부귀 안일함이 다 싫습니다. 그리고 명성도 싫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고 싶은 것은 주님을 위해서 즐겁게 고난의 길을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서 돈을 빼앗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세상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치 않는데 빼앗아가 본들 이 사람이 변하겠습니까?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바보 같은 비유인지 모르지만 즉각적으로 생각이 났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애 녀석이 하나 집에 있는데 공부를 죽어도 안 합니다. 뺀질거리고 매일 놀고 컴퓨터나 하고 이상한 잡지책이나 끼고 다니고 나쁜 짓이나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애한테 협박을 합니다. 애는 반대로 합니다. 세상 공부 잘하는 것,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원치 않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애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협박을 합니다. 너 지금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학원에 안 보내준다. 애가 협박이 되겠습니까? 지겹게 다니기 싫은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실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어떻게? 너 정신 차리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학원에 한군데 더 보낸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럼 역설적으로 공부하기 싫어서 공부를 합니다. 더 할까봐. 아니며 또 반대로 공부하기 싫으니까 컴퓨터나 하고 휴대폰으로 장난이나 할 때 너 그렇게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휴대폰도 뺏고 휴대폰도 뺏어버린다. 이렇게 해야지만 이 아이에게 자극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치 않고 정말 주님에 의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잘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명성을 빼앗으십니까? 그게 그 사람에게 무슨 상관입니까?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환경을 움직여서 인간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시지 않으시면 인간이 절대로 연단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한 사람이 거룩한 신앙의 인격은 환경적인 고난의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주님의 말씀의 은혜로운 영향력 앞에 승복하였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정말 일일이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생을 해도 그 고생이 계기가 되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빈손 들고 십자가를 붙드는 경험을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람의 성품이 더 모질어지고 포악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진짜 복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환경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보는 사람, 그러면서 내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빛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그리고 아무도 쓸모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그래서 주님의 그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하지 않은 내가 얼마나 더럽고 이기적인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관심자체가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명성을 얻고 지위를 누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주셔도 문제를 안 일으킵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나두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보면 환란과 시련의 풍파가 많을 때도 심령이 괴로워지면 그러나 그것은 마음고생이었을 때고 그런 환경에 강력한 변화, 환란과 시련이 없어도 하나님의 임재와 그 은혜의 보좌 앞에서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게 될 때 그때에 깊은 아픔 속에서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집안이 거덜나지도 않았고 그리고 죽을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사업이 망하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집안이 모두 망하고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보다도 더 뼈아프게 가슴 아파해 본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변해갑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오늘 이 모세가 정말 인생을 살다가 지도자로서 심한 험악한 일을 만납니다. 이것도 하나의 목회가 아닙니까? 그야말로 이 사람이 아마 역사상 가장 대형 교회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남전도 회원만 60만 명이 넘었으니까, 여전도회, 유년주일학교까지 다하면 300만 명이 넘는 담임목회를 한 사람입니다. 교회 이름이 무엇입니까? 광야교회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우리는 이사를 두 번 하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이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구름이 이동하면 이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믿고 그냥 헌금을 해서 이사만 하면 되지만 이 사람은 전쟁까지 하면서 목회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초 울트라매가 슈퍼 처칠을 목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공정한 눈으로 본다면 이 사람의 사역은 누가 표현한대로 삼비 업종이었습니다. 정말, dangerous, difficult 이 굉장히 어려운 속에서 이 사람이 그런 목회를 한 것입니다. 어디 봐도 사례금한번 제대로 주었다는 이야기가 한번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뭘 잘못했다고 구스 여인을 취해서 아내로 삼았는데 미리암과 아론이라는 인물이 육신으로 치면 자기의 피붙인데 그런데 다른 인간들이 다 배신하고 가도 이 바보 둘은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 바보들이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세로 봐서 교회가 갈라나갈 그런 기회입니다. 그때에 이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는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이나 친교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나를 배반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처음서부터 원수인데, 배반하는 언제나 친구가 하는 것입니다, 적군이 나를 실망시켰다. 그런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보면 미리암의 행동은 자기가 갈대 상자에 떠내려가서 바로 공주의 집에 들어가서 자기 갈대상자를 끝가지 보고 따라와서 엄마를 데려다준 장본인이 아닙니까? 아론도 자기가 소명을 받았을 때 자기 대신 스피커가 되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혼자 한 것입니까? 이 일을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 사람을 엮어주셔서 이 구원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해준 그런 장본입니다. 그런데 모세 한 사람에게 두 사람이 당당하게 한 동아리가 되어서 백성들을 선동하면서 모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모세의 권위를 깎아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말씀하시더냐. 모세만 은혜를 받았나. 우리도 받았다. 그러면서 모세가 영원한 모세가 아니다. 이러면서 모세를 깎아내렸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상처받는 모든 목회자의 선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처를 받아야 할 그때인데 모세에 대해서 매우 특이한 보도를 성경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난받을 때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 모든 사람들보다도, 온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모세의 온유함이 훨씬 뛰어났다고, 그래서 오히려 가장 열 받을 상황에서 이 모세의 온유함이 모든 사람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 성품의 탁월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는 양심의 담대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스 여자니까 지금으로 치면 에티오피아였습니다. 흑인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내를 취했는데 그때 일부다처제가 허용될 때니까 그런데 그 아내를 취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구스 여자입니다. 이 구스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출애굽기 12장 38절에 기사를 미루어볼 때 이 여자는 틀림없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그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많은 잡 족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세는 이 여인을 취해서 자기의 아내로 삼아도 당시 율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리암과 아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하나님 앞에 이 일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지도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혈통적 이스라엘과 혼인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는 선입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입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지받지 못한 선입견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오늘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인데 모세가 그동안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이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기 전에 있었던 기록과 미디안 광야에 간 후에도 하나님이 일을 위해 부르실 때 보였던 반응, 그 후에 광야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언뜻언뜻 나타나는 그의 옛 성품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경건한 어머니 밑에서 잘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히브리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결단이 생겼고 그리고 왕족,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며 어쩌면 왕에 오를 수도 있을지 모르는 모든 기회와 좋은 전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
그가 고작 한 일은 무엇인가 하면 애굽 병사를 때려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 일을 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혈기가 많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사고를 치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거기에서 무엇을 했는지 안 나오지만 사십년 동안 거기에서 모세는 어째든 겸손해질만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선 그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이제는 남의 집에서 짐승이나 치는 목부의 신세로 사십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 동안에 이 사람이 얼마나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성질머리가 그대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나타납니다. 모세야, 나 여호와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자로 보내려고 한다. 가서 내 백성을 이끌어서 내가 너에게 약속한 땅으로 데리고 가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웬만한 사람들 같았으면 모세가 늘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던 것이 아닙니다. 아마 짝 엎드려졌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말만 했는데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잊혀진 하나님이 나타나셨구나. 그리고 짝 엎드려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종이 여기 엎드려졌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아니면 더 겸손하게 주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성질머리 속에서 뭐가 생각이 났는가 하면 하나님의 그 두렵고 엄위하심이 생각나지 않고 가슴에 맺힌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에 사십년 전에 내가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사고를 쳤는데 그때는 한번도 쳐다 도 안 봐주시고 이제야 80이 넘어 다 늙었는데 당신이 필요하니까 이제야 나타나셔서 나하고 손잡자고 하십니까? 잡으려면 그때 잡지. 그리고 이 속에서 그 성질머리가 확 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세가 얼마나 영적인 인물로서는 아주 조잡한 상태였는가가 나타납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막 대듭니다. 따집니다. 못 간다고 합니다. 어떻게 못 간다고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까? 나중에 간다고 그러고 혹시 사정이 생겨서 못 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거기 대놓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가라고 그러시는데 나는 못합니다. 이게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은 사람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게 다 무엇인가하면 성화되지 않은 오만방자한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모세지만 하도 수준이 기가 막히니까 하나님이 그 수준대로 대해주십니다. 핑계도 많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그렇게 합니까? 겸손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게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꼬장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객기 부리고 하나님 앞에 떼 부리고 이러는 것입니다. 신앙이 안 들어가서, 그런 진짜 다른 사람 같았으면 한번에 후려치시면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인데 그런데도 하나님이 다 봐주십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논리를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도 못하는데 왜 나보고 가라고 하는가 하니까 너에게 아론이 있잖니. 그 사람이 너의 선지자가 되리라. 하나님이 나중에 화를 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 속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엄청난 사명을 맡고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사람들의 유모입니까? 내가 이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날 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막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그 300백 만 명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목회하는 동안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환란과 시련을 많이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눈물의 목회를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 같지 않아서 모세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모세를 사람을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애굽의 왕으로 안 만드시고 떠도는 백성들의 우두머리 목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큰 환란을 다 당합니다. 쓰라린 환란을 다 당합니다. 온갖 모진 고난과 시련을 당합니다. 정말 구약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구약에서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 충성을 다한 사람이 없습니다. 한번도 좋은날 한번 못 보고 죽었습니다. 가나안의 그 맛있는 포도하나 제대로 못 먹어보고 설교만 실컷 하고 싸움만 죽어라 하고 그 기름진 산아를 내려다보면서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그런 환란을 많이 당합니다. 그 속에서 이 모세를 혈기방자하고 오만하고 자존감이 강하고 그리고 쉽게 분노하고 자기중심적이고 하는 것들이 다 깨트려집니다. 이 모세는 왕궁에 두어서는 아무리 제가 엄마에 의해서 신앙교육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광야의 사역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러운 이 모세를 하나님이 시련의 불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수시로 죽기를 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신약의 바울과 같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심한 고생과 고난, 환란과 시련을 모두 당했습니다. 그렇게 환란과 고생을 많이 당하면서 이 모세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온전히 자기의 온 지성과 그리고 생각과 마음을 관통해서 자신에게 주시는 그 거룩한 명령과 계시를 온 마음으로 받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성령이 감동하셔서 이 모세 오경이라고 하는 율법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러나 대부분 하나님이 감동하실 때 모세를 빈 통으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의 인생의 경험과 지성, 그의 성향과 기질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그의 인격 속에 오류 없이 담아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크고 중후한 인격이었습니까?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 시련의 연단을 통해서 이 모세의 인격이 깎이고 깎여서 결국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학식과 문물, 그리고 그 모든 언어에 능통한 그 왕성한 사십 세의 혈기 충천할 때 안 부르시고 사십년 동안 그런 학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개의 목부의 생활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사십년이 지나면 다 잃어버립니다. 뭐가 기억에 남겠습니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으면 뭐 합니까? 다 잃어버리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예전에 출중한 학문이나 이런 것들에 의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저히 의지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초기의 혈기를 부리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만 그러나 다 응답하고 이제 이 목회의 길로 들어서고 나니까 옛날에 배운 학문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련히 잊혀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런 속에서 치열한 환란이 다 일어납니다. 그 연단 속에서 모세가 깎이고 또 깎였더니 오늘날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그렇게 치열하게 비난을 받을 때 아마 처음 소명을 받았을 때였으면 아마 칼을 빼들었을 것입니다. 한번 붙어볼래, 한번 해볼래. 그런데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납니다. 결국은 모세는 홍해바다를 갈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이렇게 철저하게 광야의 교회가 시험에 들었을 때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대적자들이 처처에 횡횡하던 때 이 연단된 아름다운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의 한없는 친밀한 교제 속에서 일생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내 성품은 원래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나는 워낙 강퍅합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죄 가운데 절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것이 몸에 배었습니다. 상처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의 더러운 품성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이 치열한 연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이 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젖어서 그래서 그 말씀 때문에 마음을 짓 뜯고 그리고 마음을 오로지 하여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환경으로 연단하실 필요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영혼의 실증과 육신의 게으름, 여타의 여러 가지 이유를 인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변화를 갈망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환란을 보내십니다. 연단을 보내십니다. 시련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의 육신은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거룩해지는 연단을 통해서 성화된 그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인데도 이런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한번 마음을 깊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은혜에 마주하는 그 감격과 감화를 통해서 우리가 정말 연단되고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럼 감화와 연단의 은혜를 통해서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있는가. 진실해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환경을 통해서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시려고 할 때 내가 정말 그분의 품성을 따라 변화되기를 갈망하며 이 연단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는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연단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