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년 설교모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2009/08/09, 온가족수련회 저녁집회)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회심과 신앙의 물러남(시119:25) 2009.8.9 온가족수련회(저녁) 1
2. 부패와 신앙의 물러남(시119:25) 2009.8.10 온가족수련회(저녁) 23
3. 물러난 영혼의 회복(시119:25) 2009.8.11 온가족수련회(저녁) 43
4. 나그네의 간절한 소원(시119:18-20) 2009.8.10 온가족수련회(새벽) 66
5. 생명의 근원을 지킴(잠4:23) 2009.8.11 온가족수련회(새벽) 75
1.회심과 신앙의 물러남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 25).
Ⅰ.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중에서도 이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시편 모든 것들이 그러하지만 특별히 이 시편 119편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는 큰 유익은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에 대한 전달뿐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는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는데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이 시를 기록한 다윗은 영적으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객관적인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크기도 그러했거니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와 만물에 대한 지식의 크기도 굉장히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훌륭한 것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중국의 의학사에 보면 신농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중국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인간의 어떤 질병에 무슨 약초가 요긴한지를 집대성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그 약효를 시험하기 위하여 환자들에게 약초를 먹이기 전에 먼저 자기가 질병을 얻고 그 질병에 걸린 몸을 재료삼아서 여러 가지 많은 약초들을 사용하면서 그 각각의 것이 자기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험한 결과 임상을 토대로 처방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물론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우고 그리고 지식적으로 이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범위를 더 넓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흔적을 배우는 일들도 우리의 신앙을 내면화하고 교회 안에 갇히게 하는 대신 이것들을 확장하고 우리의 신앙을 우주적인 지평으로 확장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 두 가지 못지않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진리를 알았으면 그 진리를 우리 스스로 실천하고 자신에게 적용해봄으로써 그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의 과정은 자기 자신을 그 진리에 끊임없이 합치시키는 진실해지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놀랍게 확증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뜻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우리의 영혼이 움직일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어떻게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어떻게 우리 밖에 있는 환경과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전개되는 정동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반응하는지도 배우게 되는 것이죠.
존 오웬 목사님은 신자가 마지막 때에 깨어있으라는 요구를 주님께로부터 많이 받는데 신자가 깨어있다는 의미는 최소한 이 두 가지 의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환경에 대해서 깨어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 환경에 대해서 시시각각으로 반응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어있는 것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우리는 깨어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에 관한 우리의 잘 앎의 관계는 영혼에 대한 우리의 앎의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번 술을 마시면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술자리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육식을 많이 함으로써 심혈관계통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오게 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 습성 속에 한번 불판 앞에 앉으면 계속 먹는 성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서 가능하면 고기 굽는 근처에 가지 말아야합니다. 낭비벽이 심한 사람은 그렇게 수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있는 호화스런 마켓이나 백화점에 가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이 자신의 기질과 성향을 알 때에 환경으로부터 자신이 잘 보호되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여우는 같은 덫에 걸리지 않는다는 영국속담이 있습니다만 신자는 언제나 똑같은 덫에 늘 걸리게 마련이지요. 자신의 성향이 하나님 앞에 바뀌지 않으면 언제나 그렇게 되는 법이죠. 그래서 저는 이번 수련회에서 삼일이라는 길지 않은 짧은 시간에 저는 회심과 그리고 신앙의 물러남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신앙의 물러남이 전개되는지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신앙의 물러남에서 그것을 떨치고 다시 소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삼일동안 같은 본문을 가지고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Ⅱ. 회심과 신앙의 물러감
우선 우리들이 회심과 신앙의 물러남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지만 이 모든 문제들을 전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고 나를 주인 삼으면서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복음을 통해서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고 나는 죄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는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주심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예수께로 피할 길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회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과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 피하는 믿음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절실한 믿음 이 두 가지가 바로 회심인 것이죠.
A. 회심과 은혜의 부으심
인간이 이러한 회심을 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강력한 최초의 부으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회심과 은혜의 부으심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회심을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부어지게 됩니다.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0,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최소한 세 가지의 감각을 가져다주는데 이 감각은 예전에는 전혀 없던 감각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그리고 탁월하게 뛰어나신 분이신가에 대한 감각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용서의 감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감각이 발생하는 순서는 우리들이 시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들이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제일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감각이 첫 번째일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이 두 번째 감각일 것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게 아름다우시고 탁월하신분이시라는 감각이 그 모든 것 맨 앞에 오기도하고 뒤에 오기도하는 논리적인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심한 신자는 회심하자마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는 비록 아직 성경을 배울 시간이 없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그러나 표현은 못해도 그와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왔던 이전의 모든 삶의 태도와 정신의 가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초로 자기를 깊이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회심하기 전에도 자기가 용서가 안 되고 미운 적이 있지요. 그렇지요? 회심하기 전에도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합니다.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이야기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속속들이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회심하기 전에도 감정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속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회심하기 전에 하나님을 속속들이 미워하는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감정적으로 우리자신을 미워하는 때가 있었다고 하지만 속속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를 원수처럼 여기는 일들이 예전에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회심과 함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속속들이 미워하게 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 모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죄 된 우리 자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과 어긋나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배치되게 사는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나 자신에 대한 속속 들이의 미움입니다. 이것이 회심과 함께 부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의 옛 자아를 속속들이 미워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그는 하나님을 속속들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 사랑은 완전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은 얼마든지 출렁거리며 변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회심과 함께 부어지는 은혜는 하나님을 속속들이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거슬러 살던 자기를 속속들이 미워하게 되는 그러한 고백을 낳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사도바울이 했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혹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 할 때의 그 고백이 이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신자에게 부어지게 됩니다. 비록 그가 성경을 한번 읽은 적이 없고 그리고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부으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사랑, 첫 번째 부어지는 이 회심의 놀라운 사랑은 마치 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그래서 회심의 이 씨는 결코 죽는 법이 없고 그리고 자라지 못하는 법이 없지만 환경에 따라서 이제 그 하나님을 향해서 처음 부어진 이 회심의 은혜의 부으심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가 결정이 되고 그 열정의 강도 같은 것들도 좌우되는 것이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똑같이 불을 피운다고 할지라도 비가 쏟아지는 날 밀림에서 불을 피운다면 그 불이 쉽게 붙겠습니까? 또 비는 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바람이 매우 많이 부는 장작 자체가 매우 얼어서 한기가 느껴지는 그런 장작들을 가지고 불을 지핀다면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따뜻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건조한 날에 불을 붙인다면 아마 굉장히 빠른 속도로 타오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부으신 이 회심의 은혜는 여러분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의해서 이렇게 부으시는 회심의 은혜는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그리고 곧 사위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받은 신자의 회심과 함께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히 고갈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B. 신앙의 물러감이란?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물러감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신앙의 물러감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구원받은 신자가 아니면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물러감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신자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다가 교회에 안 나올 수도 있고 예배에 잘 참석하다가 예배를 빠뜨릴 수도 있고 성경을 늘 읽다가 집어치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을 가지고 물러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물러감이라는 용어 그 자체는 외형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영적인 물러남이 주 관심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자가 맺고 있는 이 영적인 관계의 건강한 상태가 뒤로 물러나고 침체가 시작됨으로써 그 영혼의 물러난 증거가 그의 내면의 세계뿐만 아니라 급기야 그의 외형적인 삶에 있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때에 그 때에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신앙의 물러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물러남의 외형적인 효과는 너무나 다양하고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예를 일일이 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선 외형적으로 우리들이 그래도 몇 가지만 살펴본다면 외형적인 우리의 삶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의 물러남이 시작되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매우 느슨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즐겨 참여하던 은혜의 수단들이 주는 즐거움이 현저히 감퇴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실천, 개인 경건의 실천이 제일 먼저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자신이 잘 지키고 준행하던 모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생활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 더 나아가면 욕망에 이끌리게 되고 죄를 범하게 되는가하면 또 어떤 습관적인 죄에 빠져서 물질을 탐함으로 탐심의 죄를 짓거나 기타 여러 가지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모든 신앙의 외형적인 물러남은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놀랍게 입증됩니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부여된 의무를 하나님 앞에 영광으로 알고 봉사하던 사람들이 태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현저히 교회를 향한 사랑과 열심이 식게 되는 것이죠. 얼마든지 참고 인내하면서 받아주고 돌보던 지체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그리고 반목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미워하게 되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서 그는 현저히 교회의 공동체성을 해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모든 외형적인 물러남의 증상들은 마음의 물러남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마음의 물러남이란 결국은 신앙의 물러남이니 신앙의 자리가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C. 신앙의 물러감과 침륜
침륜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를 성경이 우리에게 히브리서 10장 38절, 39절에서 하고 있지요. 교리적으로 보면 이 침륜에 빠지는 것은 사실은 엄격하게 말하면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가상적인 침륜에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심각한 죄에 빠지거나 그리고 신앙의 깊은 물러남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해태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신앙의 물러남이 극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물러남의 맨 시작부터 접근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신앙의 물러남은 우리의 삶이 무질서해지고 그렇게 사랑하던 하나님과 단절과 거리감이 생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한 생활을 버리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거룩한 의무들을 태만히 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놓으신 계획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 이러한 잘못된 일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우리자신도 스스로 우리를 추스를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인간은 자신이 왜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올바르게 성찰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마치 불에 빠진 벌레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온 몸을 뒤틀면서 그렇게 고통 하는 것처럼 영혼은 고통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뿌리가 깊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게 되고 자신 나름대로 생각하는 상식적인 방법으로 이 혼란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상식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도 이러한 문제들을 올바로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존 오웬 목사님은 이런 상황에서 헤매는 많은 사람들에게 권고하기를 탁월하게 이러한 인간의 영적 생활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도움을 받으라고 구체적으로 충고했습니다. 이미 오웬 목사님이 살고 계시던 그 탁월한 청교도시대에도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 문제들을 손쉽게 다룰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기는 우리들이 이 설교를 듣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아서 오웬 목사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환경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제일 먼저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까요? 이렇게 혼란 속에 빠진 신자는 자신이 괴롭기 때문에 여기에서 극복해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하게 효과적으로 자신을 건져주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예를 들자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울부짖으면서 기도하지만 기도할 때뿐이고 끝나고 나면 다시 커다란 벽이 느껴지고 기도의 어떤 응답도 없는 것 같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낯섦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논의를 더 많이 펼치지 않기 위해서 생략하겠습니다만 우리가 은혜 상태에 있고 충분히 뒤로 물러나지 않을 때에도 마음이 건조해지고 갈급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한, 두 번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면 놀랍게 우리의 영혼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죠. 저는 지금 그런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으로 많이 물러갔기 때문에 껍질은 교회에 나오고 이렇게 수련회에 참석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첫 회심에서의 많은 좋은 감각들을 상실했고 말씀을 대하면서 자신에게 이야기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들도 현저히 사라지고 그리고 기도에 있어서 생기도 현저히 사라져서 기도의 의무를 지탱하는 것조차도 힘겹게 느껴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너무 괴로워서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에 어는 한순간에 울음이 터져 나오고 간절히 부르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때에는 기도가 되는 것 같은 그러한 간절함이 있지만 끝나고 나도 그 기도가 어느 한순간에 자신에게 놀라운 힘으로 예전처럼 발휘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알 수 없고 또 어떤 것들을 찾아낸다고 할지라도 고백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지 옛날에 회개할 때처럼 뼈저리게 내가 이런 죄를 지었구나하는 그 아픔과 괴로움이 내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는 것이죠. 이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노력을 하다가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때에 신자는 아주 쉽게 자기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정 반대의 생각을 하는 것이죠. 예전에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나?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이제 이번에는 정 반대로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고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까지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더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되면서 이렇게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는데 이런 저런 죄를 더 지은들 내 상황에 더 나빠질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자포자기한 마음이 그의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합니다. 이러면서 마음속에서,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고 이것들을 정리해서 자기에게 적용하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를 고칠 수 있는 내적인 은혜의 힘이 소멸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사람과 이 세상의 사건들 속에서 나타나는 의미를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결시키고자 하시는데 이럴 능력이 이미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독한 원망 같은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품고 이해해주는 아가페의 사랑이 현저히 식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사소한 일에도 지체와 부딪히고 예전에 이미 하나님이 다 치료하셨다고 생각되었던 상처들까지도 들추어내고 상상하면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죠. 이런 속에서 그는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이상하게 깊은 늪 속에서 몸부림을 치는 사람이 그 몸부림 때문에 늪과 자신 사이에 간격을 더 넓힘으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이렇게 혼란스러운 속에서 영혼의 침체는 더 깊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붙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진토는 진흙, 혹은 먼지, 티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의 대명사입니다. 영혼은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록 부자도 아니고 그리고 미인도 아니고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우리는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영혼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기 때문이지요. 그 영혼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닮은 것이고 인간이 고귀한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동물적인 육체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속에 깃들여있는 하나님의 형상, 곧 그의 영혼 때문에 존귀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그 영혼이 그렇게 고귀한 영혼이 오늘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진토에 붙어버렸습니다. 내 영혼이 아주 가치 없고 그리고 무가치하고 쓸모없게 되어버렸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후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단순한 시련과 환란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시련과 환란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영혼의 더러움과 악함 때문에 그런 것인지 우리는 이 모든 문제들을 쉽게 결론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지금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진토에 붙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영혼은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고 그리고 그의 영혼은 아주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고 깊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일수록 영혼의 침체도 매우 깊습니다. 산이 높으면 반드시 골이 깊듯이 바로 시인도 이런 사실을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전에 사랑하고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이르는데 있어서는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안전합니다만 우리가 처음 회심 때와 같은 그러한 충만한 사죄의 감각과 사랑의 감각, 영광의 감각을 누리면서 영혼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사는 이 생활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이렇게 늘 하나님이 지켜주시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의지적 선택 안에서 흔들릴 수 있고 불안할 수 있는 이 영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이 영혼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관리함으로써 마음도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이 되고 여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외형적인 삶까지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사로서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들이 신앙에 있어서 물러나게 될 때에 많은 혼란이 생겨나게 되고 몸부림을 쳐도 거기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속에서 더군다나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일 때 객관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를 판단하고 어떻게 대처해야겠다고 하는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깨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많은 신앙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우리의 온전한 마음의 의지가 매우 요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앎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고 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앎의 깊이는 하나님에 대한 앎의 깊이이고 자신에 대한 앎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신앙에서 물러나게 되어서 우리가 물러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후에는 대부분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걸어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 스스로 ‘나는 주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물러갔나이다. 그리고 내 영혼은 진토에 붙었나이다. 나 자신은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도대체 우리의 마음과 영혼, 우리의 삶속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철저히 죄에 대해서 지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길까지 물러나게 된 것일까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저는 이제 오늘과 내일, 모레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이 모든 설교를 듣는 기간 동안 우리의 몸을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일 먼저 신앙의 물러남은 우리의 머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번째로는 우리의 가슴으로 내려오고 세 번째로는 우리의 배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 배에서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충분히 물러난 후에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물러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돌아가려고 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떠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나있고 물러나있는 신자들이 자기의 처지를 행복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아무도 그 상태를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행복하지 않은데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죠. 또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있는 의지의 힘이 현저히 부족한 것이죠. 이런 속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자신이 구원을 취소하게 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완전히 대적하는 가운데 배교적인 침륜에 빠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하는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도록 그 모든 영적인 힘을 다 빼앗아 버리고 마치 머리를 깎인 삼손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자원을 거의 다 빼앗아 버려서 명목상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지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도 행복하지 않고 그런 일을 경험하는 자신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뒤로 물러간 속에서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자는 오직 마귀 하나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이 창조의 계획의 목적을 훼방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그렇게 어느 날 눈을 떠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왔고 돌아갈 길을 찾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길을 걸어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Ⅲ. 은혜와 지성
제일 먼저 이 일들은 우리의 지성 속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우리의 지성의 관계를 말씀드림으로 여러분들의 뒤로 물러나간 신앙의 과거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경종을 주고자하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어느 성도가 우리 교회에 와서 마음지킴이라는 책을 숙독했어요. 그러고 나서 고백하는 말이 ‘아 왜 나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요? 내가 만약에 이 책을 그 때에 읽었더라면 이렇게 깊이 뒤로 물러나 침체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지요. 그 고백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미리 알고 자신을 대비했으면 그렇게 멀리 굴러 떨어지지 않지만 굴러 떨어진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곧바로 즉시 그 자리로 돌아가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그것도 모른다면 우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전혀 모를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질병이 걸렸다면 우리는 제일 먼저 ‘어떻게 치료하면 된데?’ 라는 것을 묻기 전에 먼저 ‘왜 그런 병이 생겼는데?’ 라고 묻지 않겠습니까? 거기에서 모든 치료책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자, 그러면 도대체 이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들의 영혼에 여러 가지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 영혼의 기능 가운데는 높은 기능이 있고 낮은 기능이 있어요. 영혼의 낮은 기능이라는 것은 동물들로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영혼의 작용들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동물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이것이 동물들에게는 이것들이 육체 속에 하나님이 종족을 보존하고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기능을 영혼이 없어도 주신 것이죠. 인간도 육신적으로는 동물의 그것과 흡사한 피조물들이에요. 그래서 그런 속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이 모든 우리의 육신을 움직이고 감각적인 많은 사물들로부터 욕망을 느끼는 이런 작용들은 인간의 육체 속에 달라붙어있는 그런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작용하면서 이루어지는 작용이에요. 그게 동물하고는 다른 점이에요. 그래서 똑같이 먹고 마시는 작용이라고 할지라도 동물은 영혼 없이 그 작용을 하는 것이고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그 작용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중세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이 영혼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 낮은 기능과 높은 기능으로 분리하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자연적인 인간의 욕구를 움직이는 많은 마음과 정신의 작용들은 영혼의 낮은 기능들이에요. 그러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영혼의 높은 기능 때문이에요. 이 영혼의 높은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많은 교부들은 영혼의 높은 작용으로 지성을 유일한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럴 정도로 인간의 높은 작용의 대부분이 지성이라고 본 것이죠. 이 지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죠. 지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그런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영혼 안에서 그것을 사랑하기도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하는 수많은 정들이 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죠. 위로는 진리를 비롯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 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같은 고상한 것들을 향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사랑의 감정도 있고 아주 정욕적이고 육체의 쾌락적인 것에 마음이 끌려 마음이 출렁거리는 그런 동물적이고 육욕적인 이 마음의 정의 솟구침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러한 지성이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속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사물도 보고 하나님도 보게 되는 것이죠. 본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들이 마음속에 사진이 찍히듯이 퍽하고 찍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에요.
A. 은혜와 총명
이런 것들을 담당하는 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우리는 어느 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전혀 모르다가 어느 순간에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왜 어제까지 안계시던 하나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고 내 마음속에 다가오고 있는지를 설명하라고 요구받는다면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소경이 눈을 뜨고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니 예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보나이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내가 몰랐으나 지금은 그 하나님을 느끼게 되고 알고 그리고 예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라는 고백뿐이죠.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의 영혼의 총명의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지적했듯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여러분들이 분명히 이해를 하고 있어야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이 아니겠어요? 산 너머에서 연기가 나면 우리는 연기를 보면서 아 거기서 불이 났구나! 라고 알지만 눈앞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으면 우리는 굳이 그것이 왜 불인지를 설명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불이 난 것을 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죠.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총명이 맑을수록 그래서 우리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깨닫게 되요. 그것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이에요.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이 여러분들이 설득되어서 아멘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학자가 와서 열 시간 동안 여러분들을 설득한다고 할지라도 이중에 있는 대부분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서 설득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요? 논리적으로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으나 우리의 마음에 확 찍혀서 우리들이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러한 사실들이 성경에 많이 있어요. 우리들이 이해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덜 중요한 사실이고 이해를 하려고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사실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에요.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 이천년 전에 오신 나사렛의 그 젊은이가 사실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셔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고난이 오늘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 죽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나셨다는 것, 살아나신 그분이 지금 내 마음 안에 계시다는 것, 이런 것들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이 총명이 맑고 깨끗한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총명의 맑은 스크린에 화면이 뜨듯이 착착 뜨는 것이에요. 이 말을 더 쉽게 얘기하면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성경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놀랍게 잘 믿어지는 것이에요. 중심으로 이 안에서 아멘하고 믿어지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런데 잘 들으세요.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이렇게 우리의 모든 관심이 영적인 것, 진리에 속한 것,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런 것에 끌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자가 예수를 믿고 깊이 은혜의 상태에 들어가면 자매로 바뀌어요. 그리고 남성이 예수를 믿고 깊은 은혜의 속으로 들어가면 이게 형제로 바뀌는 것이에요. 무슨 얘기인지 알아요? 관심이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교회에 나온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런데 마음의 즐거움이 자기를 단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즐거움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찬양)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그러니까 어때요? 성경을 읽으면 금싸라기처럼 하나님이 매일 매일 말씀을 주시는 것이에요. ‘아멘, 아멘, 아! 그랬구나! 아멘, 아멘.’ 아직 성경의 지식이 뛰어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지 못해도 놀라게 믿어지는 것이에요. ‘아멘, 아멘, 아멘.’ 믿어져요. 참 놀라워요. 믿어지는 것이에요. 아마 제가 쓴 책 가운데 읽기에 힘들어 했던 책 그리고 아직까지도 구역공부를 안했던 책이 도덕적 통치일 것이에요. 그렇지요? 아직까지도 못했는데……. 그것을 읽고 회심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화도 받았어요. 이분은 자기가 고백하는데 중학교를 나온 오십대 남성이에요. 그런데 그 책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교회에서 대학 나온 사람들도 되게 읽기 힘들어하는 책인데…….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요. 이해가 다 됩디까? 놀랍게 다 이해가 된대요. 그 사람이 지식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아멘, 아멘하고 믿는 이 총명의 상태가 아주 뛰어나니까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해도 아멘, 하고 믿어지는 것이에요. 그게 그렇게 될 때에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 세상의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왜냐하면 마음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영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바라보는데 쓰기 때문에 그래요.
자 그런데 문제는 은혜가 식기 시작하는 거예요. 은혜가 식기 시작할 때 두 가지 어려움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요. 잘 들으세요. 첫째 어떤 어려움이 일어나느냐 하면 총명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맑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이든지 그렇게 가슴에 다가오며 잘 믿어졌는데 이게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마치 화면이 흐려지는 것처럼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그게 예전처럼 그렇게 또렷하게 보이면서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것이에요. 그건 여러분들이 경험하셨을 것이에요. 성경을 읽으면서 처음에 회심하고 성경을 읽으면 삼십 장, 오십 장씩 읽으면서 줄을 치면서 기쁨으로 읽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읽기는 읽어요. 그런데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 것이죠. 그런데 뭐냐 하면 감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에요.
또 하나 일어나는 현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이 총명이 흐려지기 시작하는데 이 총명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에 진리에 대해서는 흐려지는데 세상의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또렷해지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진리에 대한 인상도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새겨지고 이 세상의 감각적인 것, 먹을 것, 입을 것, 보석, 돈, 눈에 보이는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나 자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도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인상으로 다가오는 그 부분과 세상의모든 물상들에 대한 인상이 새겨지는 장소가 똑같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철학에서 오성이라고 이야기해요. 똑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옛날에 이런 이치를 잘 모르던 사람들도 뭔가 이렇게 깊은 인생의 도를 깨치기 위해서 찾는 곳이 어디냐 하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거기 숲속으로 들어가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없잖아요. 맛있는 빵은 숲속에 없어요. 예쁜 여자 그런 것 없다고요. 잘생긴 남자 그런 것도 없고요. 지글지글 거리는 고기 굽는 냄새도 안 나고 그리고 술이나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부터 자기 마음을 떼어놓는 것이죠. 이제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은혜가 식을수록 이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진리가 새겨지는 것은 점점 희미하게 새겨지기 시작하고 세상의 물상에 대한 인상들은 콱콱 박히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이렇게 우리의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떨어진 진리에 대한 인상,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인상,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이것들은 우리들의 마음에 정동을 불러일으켜요. 마음을 출렁거리게 만들어줘요. 마치 돌멩이를 물에 던지면 물이 출렁거리듯이 출렁거리게 만들어요. 그런데 진리가 총명이라는 막에 떨어져서 우리의 마음을 출렁거리게 만들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진리를 기뻐하고 그리고 영원을 생각하고 사라지지 않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부당하게 자기의 육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올바른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게끔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진실한 생활이에요. 그런데 이제 은혜가 식을 때 이 진리는 우리의 총명이라는 막에 희미하게 떨어져요. 마음이 움직이는데 이게 희미하게 떨어지니까 이 출렁거리는 마음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에요. ‘아휴! 그렇게 살았으면 참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렇게 마음이 편한데…….’ 그리고 조그맣게 찰랑하고 움직이는데 이게 내 삶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출렁거리지를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은혜가 식을 때 세상의 물상에 대한 생각들은 막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에요. 이쪽 진리가 60년대 흑백텔레비전이라면 이것은 LCD화면의 고화질 텔레비전으로 막 다가오는 것이에요. 이게 선명하게 떨어지니까 여기에서 출렁하고 움직이는 것이에요. 출렁거리는 정동들이 막 일어나는 것이에요. 예쁜 옷을 보면 막 사 입고 싶고 그리고 막 예쁜 여자들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쌀 살돈이라도 아껴서 다이어트 하는데 가서 랩으로 허리를 감을 마음이 생기고 그런 마음들이 막 생겨나서 출렁거리는 것이에요. 이게 출렁거리는데 여건이 그 출렁거리는 것을 못 따라가는 여건이 되면 나는 왜 이런 집에 시집을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런 낙심하는 마음들로 출렁거려요. 여러분은 웃으면서 듣지만 이게 여러분 중에 단 한명도 예외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이 다 적용되는 것이에요. 모든 뒤로 물러간 사람, 모든 타락한 사람이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에요. 아세요? 예외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인류의 타락과 신자의 물러감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에요. 특히 구원받은 신자의 물러감이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에요. 회심한 사람들이 여러분 모두에게 이 진리가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이렇게 선명하게 떨어져서 출렁거리는 때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에요. 눈물로 드린 그 수많은 예배, 성경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던 지금도 성경 곳곳에 남아있는 그 눈물자국들……. 그게 바로 여러분들의 과거를 말해주잖아요? 예외가 아니에요. 아무도 예외가 없어요. 은혜가 식으면서 총명이 흐려지기 시작해요. 총명이 흐려질 때 세상의 물상들의 감각은 선명하게 떨어지면서 크게 출렁 출렁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선명한 인상을 받고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리는 정동을 경험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큰일 날 일이 없는 것이에요. 뭐가 큰일이 있겠어요.
(찬양)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포도 비유 같은데 뭐가 어려운 일이 있겠어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잘 들어보세요. 그런데 이렇게 총명의 막이 은혜가 사라지면서 희미해지는 변화가 일어날 때 그의 외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신앙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하나님과 나만 아는 것이에요. 자기도 모르기 때문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예외가 없어요. 여기에서 멀어져요. 저도 신앙생활을 하고나서 오랜 실패 끝에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런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 것이에요. 제일 먼저 시작은 생각의 미끄러짐부터 시작하는 것이에요. 좀 더 하고 싶은데 진도를 나가겠어요.
B. 은혜와 이성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의 지성적인 기능 가운데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하나 따져서 아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우리들은 흔히 이성은 신앙의 원수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성을 형으로 앞서 보내고 신앙이 이성을 따라가려고 할 때 이성은 절대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영혼이 부패했기 때문에 인도하지 못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러면 거듭난 사람의 이성도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이성도 역시 부패했기 때문에 이성이 형 노릇을 해서는 그의 영혼이 안전하게 인도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뭐가 형 노릇을 해야 되요? 믿음이 형 노릇을 해야 되요. 오성 속에서 흠 없는 진리를 선명하게 받고 막 출렁거릴 때 그 믿음이 형이 되어서 이성에게 ‘결론은 이것이란다. 네가 생각해 보거라.’ 형이 가라는 길로 가면서 생각을 하게 될 때에 이성은 올바른 길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있을 때에는 이성이 우리를 앞서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성이라고하는 그것도 결국은 우리의 옛 자아와 거듭난 새 자아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존재거든요. 우리의 옛 자아는 신뢰할 수 없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왜 나를 따르려거든 너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였겠어요.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우리들이 이성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주지 않아요. 언제든지 형을 따라가라고 우리는 지시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공부를 하잖아요. 신학공부를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사람들은 신학공부를 열심히 하면 거기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신학공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읽기에요. 그것이 모든 신학공부보다 더 중요해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아멘, 아! 이것이 진리이구나!’ 하면서 마음이 출렁거려서 오성의 막이 깨끗한 가운데 그 떨어지는 진리 앞에 아멘하고 출렁거리면서 뜨겁게 눈물이 솟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감동이 있어야지만 책상 앞에 매달려서하는 이 신학에 대한 공부가 제 길을 찾게 되는 것이에요. 머리가 조금 좋으면서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또 너무 나쁘면 가르쳐줘도 못 따라와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만약에 신학교 보내려면 계속 대학교 떨어지는 아들을 보내지 말고 한방에 대학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아들을 보내요. 써금써금한 아들은 그냥 대충 쓰고 좋은 것을 보내야지요. 대학교 계속 떨어졌다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신학교를 보내지 말고 여러분들의 후손들이 불쌍하잖아요. 좋은 것을 주님께 드려야지요!……. 그리고 머리가 조금 좋으면 시키는 대로 해요. 머리가 아주 좋으면 선생이 없어요. 시키는 대로 안 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도 못 만나요. 그럴 때 그 사람의 머리 좋은 것은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는 재앙이 되는 것이에요. 대개 이단을 창설하고 교리를 이상하게 비비꼬아서 교회를 혼란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천재였어요. 멍한 사람은 감히 그런 것을 발표 못해요. 어떻게 그런 것을 해요. 신학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이게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아멘’ 하면서 자기가 확 깨뜨려지는 경험을 잘 안 해요. 믿음이 적은 것이죠. 그런데 종종 그런 사람들이 역사 속에 나타나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죠. 지적인 능력이 없으면서 믿음이 좋으면 그냥 착하게 살다가 죽는데 자기만 잘 믿으면서 자기가 왜 잘 믿는지 설명을 못하니까…….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되는 것이니까 아멘, 아멘하고 그냥 자기 혼자 감격스럽게 그 길을 가는 것이에요. ‘너희들은 몰라.’ 그러면서 가는 것이지요. 자기가 맛보았으면 설명을 좀 해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것도 뛰어나고 그것도 뛰어나야 되요. 제일 중요한 것이죠. 놀라워요.
어떤 때에 수많은 책들을 읽다가는 다 쓸어서 돈을 주고 샀지만 불더미 속에 휙 던져버리고 싶어요. 아니 한번만 아침에 일어나서 큐티를 할 때에 가슴에 확 다가와서 ‘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구나! 내가 그분을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구나! 아멘.’ 하고 펑펑 울면 해결될 것인데 그것이 없으니까 수십 권의 책으로 늘어서 쓰는데 다 개소리라는 것이에요. 대부분이 다 개소리라는 것이에요. 그게 중요한 것이에요.
C. 감각과 생각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믿음이 언제나 형 노릇을 하고 이성은 그 형 아래에서 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행복해하는 것이에요. ‘아멘, 형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지 아멘.’ 하면서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과 이성은 아주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죠. 믿음이라는 형이 있기 때문에 이성이라는 동생은 보람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이성이라는 동생이 있기 때문에 형은 더 잘 믿어야 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동생은 언제나 ‘아 형 말이 맞았어.’ 한참 공부하고 나서 항상 박수를 치는 게 ‘아 형 말이 맞았어. 그 때는 내가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내가 공부하고 보니까 형 말이 맞아 아멘.’ 하면서 형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은혜가 떨어질 때에 이게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네.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그런 어머니였는데 은혜가 식으면 이런 일들이 사라지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에 이성은 믿음 아래서 동생노릇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속에서 지성 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결국 뭐냐 하면 알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형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이에요. 이러면서 결국은 신자는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누구인데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겠어요. 이렇게 뒤로 물러가는 동안에 그의 외적인 삶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이에요. 새벽기도도 계속 나오고, 구역장도 계속하고, 십일조도 계속 드리고, 교회의 봉사도 하고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에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요.
Ⅳ. 생각의 속임과 신앙의 물러감
A. 내재하는 죄와 생각
이때에 이제 우리에게 드디어 생각의 속임이 들어오면서 신앙의 물러남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우리들은 내재하는 죄와 생각의 관계를 우리들이 이해해야 해요. 자,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분명히 죄가 남아있다는 것은 인정하지요? 그렇지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남아있는 죄는 절대적인 죄에요.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죄는 상대적인 죄에요. 하나님에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것이 쭈그러들고 쭈그러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거의 영향을 못 느끼게 하는 죄에요. 그런데 내버려두고 방치하면 이것들이 계속 자라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이 죄는 성향이에요. 우리 안의 성향이에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려고 하는 성향, 하나님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도 자기를 섬겨야한다고 생각하는 성향이에요.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의 성향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방법으로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목적을 이탈하게끔 도와요. 그 첫째가 뭐냐 하면 속임이에요. 속임. 그래서 죄는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강압인데 이것은 우리를 밀어붙이는 것이죠.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은 왜 그런 것이에요? 지나가는 참새는 처형합니까? 그게 아니죠. 그렇게 지나갈 수 없다는 필연은 방앗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진 낱알을 주어먹으려는 참새의 성향이에요. 그것 때문에 거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죠. 반드시 거기에 머물러 곡식을 먹어야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인간의 마음의 죄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을 힘으로 밀어붙여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성향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창조의 목적을 이탈해서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에요.
그 속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속임은 끊임없이 죄가 우리를 속인다는 것이죠. 어떻게 속일까요? 자, 이런 것이죠.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결과가 있겠죠. ‘이런, 이런 일을 행치 말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이 맨 처음에 받았던 계명이 그것이었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그랬는데 죄는 이 둘 사이에 있는 아주 명백하게 계시된 관계를 감추는 것이죠. 먹어도 꼭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감추는 것이죠.
(예화) 제가 직장생활을 할 때 상사 한분이 근무하는 도중에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시면서 쓰러져서 결국은 돌아가셨어요. 순직했지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조짐이 몇 달 전에 벌써 있었어요. 쓰러졌었어요. 쓰러졌는데 여기에서 피가 막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병원에 싣고 갔더니 심혈관계통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이에요. 구체적인 병명은 모르겠는데 어쨌든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이 의사의 충고였어요. 그런데 이분이 담배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까짓 짧은 인생 사는데 뭐 담배 피운다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가?’ 그러면서 전혀 상관없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에요. 어떻게 되지요? 두 가지죠. 뭐냐 하면 ‘그까짓 거 짧은 세상 피다가 죽지!’ 하는 그런 태도 그것은 말하자면 강압하는 것이죠. 그런데 또 ‘뭐 꼭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랴?’ 이것은 결과를 속이는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죄는 우리에게 그것을 지어도 좋다고 계속 우리의 생각을 꼬이는 것이에요. 죄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제일 먼저 총명의 막을 흐리게 만들어요. 그래서 진리가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만들고 우리의 육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선명하게 맺히도록 만들어 줘요. 정동이 출렁거리게 만들어줘요. 이렇게 출렁거리는 정동들에 의해서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이 죄는 힘을 얻으면서 그러면서 양육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생각들이 끊임없이 출렁거리게 하는데 죄가 제일 먼저 이런 인간의 생각의 작용을 공격하는 것이죠.
B. 죄가 생각을 공격하는 이유
그 첫 번째 이유가 뭐냐 하면 생각을 지배하지 않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물러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총명에 선명히 맺혀서 그 진리의 말씀에 출렁거리면서 우리들이 감동을 받는데 우리들이 죄에 빠질 수가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서 특공대의 지휘관이 되어서 어느 적을 공격한다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밤에 공격하지 않겠어요? 공격할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두 폭탄을 안고 자살폭탄 하듯이 뛰어가겠습니까? 저 같으면 제일 먼저 경계를 서는 병사부터 죽이겠어요. 왜? 그가 만약에 나팔을 불어버리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군대들이 깨어나서 우리를 대적 할 텐데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어요. 경계병을 제일 먼저 죽이는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면 비 오듯이 폭탄이 날아들고 미사일이 날아드는 곳이 어디인지 아세요? 무기 만드는 공장이나 탱크가 가득 모인 부대가 아니라 미사일기지로 제일 먼저 날아드는 것이에요. 그것을 초토화시키지 않고는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일 먼저 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이에요. 이 공격이 유리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교회를 나오다가 안 나오든지, 목회를 하다가 집어치운다든지, 아니면 십일조를 떼어먹고 도망을 간다든지, 이러면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생각하지만 겉모양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가운데 생활하고 있으면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기도 잘 모르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안전하게 그렇게 생각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죠. 그래서 죄에 대해서 그 모든 움직임을 간파하고 파악할 수 있는 레이더 기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생각의 작용자체가 영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생각의 작용이 영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면 이 생각은 우리의 감정을 낳고 이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결국은 행동을 하게 만들고 이렇게 우리를 계속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원동력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죄는 생각을 공격을 하는 것이죠. 이때에 우리는 이제 겉모양은 예전과 똑같이 생활하고 있으면서 여기서부터 지배당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으로 올곧게 살기 위해서는 이 지성의 총명이 뛰어나서 진리가 선명하게 맺혀야 되요. 이 진리가 선명하게 맺혀서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리면 이 세상의 감각적인 물상들이 맺히는 이 육욕적인 정동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죠.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육욕의 의해서 똑같이 충동을 일으키고 그러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그 기능을 먼저 망가뜨려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일 먼저 신자가 물러가기 시작할 때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 마음을 적시는 뜨거운 기도가 사라지는 것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뭐냐 하면 진리의 영향을 받는 이 정신의 기능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위로부터 들어오는 은혜들이 차단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여기부터 정복하기 시작해서 내려가는 것이에요. 여기를 정복한 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아요. 그 다음에 두 번째 겨냥하는 것이 가슴을 겨냥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내일 할 거예요. 가슴을 겨냥하면서 들어오는 것이에요.
Ⅴ. 생각의 태만과 신앙의 물러감
그러므로 회심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와 그 충만한 사랑에 대한 감각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생각의 태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에요. 오늘의 결론은 생각의 태만함이 신앙의 물러감에 첫 번째 실패에요. 그것을 교두보삼아서 죄가 우리의 머리를 밟고 그 다음에는 가슴을 향해 쳐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리고 가슴을 지배한 다음에는 배를 향해 내려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 배에서 우리의 모든 의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A. 생각이 태만해질 때
그러면 이제 생각이 태만해질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느냐는 것이죠. 네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이 부주의하게 되는 것이에요. 부주의하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의력이 떨어지는 것이죠.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맛을 잘 알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깨어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 사이에 다른 맛들이 느껴져요. 마치 우리가 육신이 건강하고 미각이 깨어있을 때에는 조금 소금이 덜 들어가고 그 다음에 향신료가 더 들어간 것을 정확하게 구별해내듯이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고 총명의 막이 선명할 때에는 부딪히며 다가와서 우리를 출렁거리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각기 다른 색깔로 와 닿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그렇지 않은 것, 그 다음에 섞인 것,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육욕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구분이 아주 명료해지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이러한 감각이 현저하게 쇠퇴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구별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마음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 은혜가 식게 되면 그런 것들을 온 힘을 기울여서 구별해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보면 누가 와서 무슨 소리를 해도 은혜 받는 사람들이 있지요. 신뢰하지 마세요. 그것은 진짜가 아니에요. 그것은 은혜가 아니에요. 여기에 와서 이런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저기로 가서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명백히 이탈했는데도 아멘, 아멘,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것은 가짜에요. 참된 은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에요. 부주의하게 되는 것이죠. 진리의 말씀을 구별하는 일에 있어서만 부주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기뻐하실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과 반성을 많이 해요. 그런데 은혜가 식을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이죠. 또 은혜가 있을 때에는 여러분들이 하루 동안 살았던 자신의 삶을 많이 반성합니다. 그래서 ‘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기도하고 자기를 고치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이런 주의 깊음이 사라지는 것이죠. 경외함의 진수는 주의 깊음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의 깊음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물 한잔을 달라는 사람이 여러분이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저 물을 턱 갖다 놓든지 ‘네가 알아서 떠먹어’ 그러든지 하지만 그분이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들은 같은 물이라도 그릇을 씻고 또 씻고 좋은 그릇을 골라서 밑에 받침대까지 받혀서 그렇게 정성껏 갖다가 바치지 않겠어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때에 그렇게 최고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그 하나님을 모시는 삶의 영역은 앎, 느낌, 삶, 이 세 가지 영역에 모두에 걸쳐서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 대해서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 합당할까? 하나님께 어긋나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생각하잖아요. 그렇잖아요? 집회에 가면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늘 그 교회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오셔서 마지막 인사처럼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목사님, 불편하신데 우리 교회에서 일주일동안 집회하시느라고 애쓰셨습니다. 혹시 저희가 결례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널리 이해하십시오.’ ‘아니 없습니다.’ ‘그래도 만약에 있다면 이해하십시오.’ 이러거든요. 존중의 표시지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면 ‘아니 그만큼 섬겨주었으면 되었지 뭐 그렇게 자꾸 나보고만 더하라고 그러셔요? 얼마나 더 섬겨야 되겠어요? 뭐 그리 엄청나게 높으시기에 자꾸 섬기라고 그러십니까? 뭐 주는 것도 없는데 자꾸 섬기라고해요?’ 은혜가 떨어졌을 때 그런 태도를 보이지 정말 은혜가 뛰어나게 되면 이러지요.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을 드립니다.’ 라는 고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신앙이잖아요. 늘 부족하다는 것…….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의무에 분발하지 않는 것이죠.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항상 하나님께 묻는 것이 의무에요.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저를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하나님 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을 묻는 것이죠. 그런데 은혜가 식게 되면 자기의 의무에 대해서 예전같이 분발하지 않아요. 마지못해서 끌려나오면서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죠. 진리를 깨닫는 일에 있어서나,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분쟁과 그리고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도 이런 의무에 대한 분발함이 없기 때문이에요.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무를 일깨우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들을 교회를 잘 섬기도록 훈련시킨다고 하지만 훈련 중의 최고의 훈련은 은혜를 받는 것이에요. 은혜를 받으면 도저히 불편해서 그냥 교회를 다닐 수가 없어요. 무엇이라도 섬기고 싶은 것이에요. ‘무엇을 내가 섬기면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에요. 은혜가 식으면 맡겨준 것들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것이죠. 분발함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생각이 태만해지게 될 때에 ‘나의 의무는 무엇일까? 나는 하나님 앞에 올바로 믿고 있는 것일까?’ 이런 반성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데 이것을 위해서 분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세 번째는 생각이 미끄러졌다고 해서 순간에 죄를 덜컥 붙잡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싸우는데 아주 힘없이 싸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싸우긴 싸우는데 그냥 마지못해서 힘겹게 싸우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이미 그 죄와 싸우려고 하는 단호한 의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속에서 총명은 흐려지지요……. 선명하게 비치던 진리는 이제 더 이상 공급되지 않지요……. 오히려 공급되지 않던 선명한 육욕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을 울리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출렁거리는 정동을 일으키지요. 그 때에 인간의 영혼은 매우 외로워지고 그리고 아무도 도울 자가 없는 것처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생각 안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마지막 네 번째는 이런 속에서 우리가 진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끊임없는 일들이 일어나요. 은혜로 나아갈 때에는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도움이 되도록 작용하지만 미끄러질 때는 놀랍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미끄러지는데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죠. 잘되면 잘되기 때문에 더 방심하면서 미끄러지고 안 될 때에는 낙심과 근심 속에 휩싸이면서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러면서 아주 신속하게 우리의 머리를 지배한 죄의 힘이 우리의 가슴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행이 지금 이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면 자기를 점검해보세요.
B. 죄의 계획과 물러감
죄의 계획과 물러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죄는 아주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을 한번 은혜를 못 받게 하고 한번 불순종 하게하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여러분들 속에 아주 깊게 자리를 잡고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끔 그렇게 만들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은 취소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깨뜨려지고 진리를 인하여 기뻐하는 생활과는 정반대의 삶,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공동체에 고통을 주고 자신의 영혼을 찌르는 도구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이죠.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의 삶은 이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있는 가족들과 지체들에게 막 영향을 주는 것이죠. 그래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하나님께도 끊임없는 고통이 되고 자신도 끊임없이 고통이 되는데 기뻐하는 자는 오직 마귀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도록 죄의 자원을 공급해주고 육욕으로 그의 마음을 정동시키고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그를 끊임없이 떼어놓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마음속에서 불평과 불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사랑하던 좋은 친구들과의 관계도 깨뜨려지고 그 다음에 자기를 지도하고 가르쳐주던 영적인 인도자들과의 관계도 깨뜨려지고 목자들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하면서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충분히 물러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이에요.
Ⅵ. 결론: 생각을 지키라
그러므로 결론은 이것이에요. 제일 먼저 자신의 영혼의 처음 상태를 살펴라. 지금 나의 영혼 속에서 이 생각의 기능들이 죄에 속지 않고 올바로 작용하면서 나 자신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고 그리고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 수많은 혼란들이 일어납니다만 그러나 답은 언제나 하나에요. 하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혼란스러운 미끄러짐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이에요. 그게 뭐에요? 총명의 막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명하게 떨어져 그 진리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려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던 이것들이 끊어져버리면서 우리의 영혼의 미끄러짐은 이제 신속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가끔 설교를 하거나 혹은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하면서 사람들을 한번 봐요. 그런데 비록 연약하고 성격도 원만하지 못하고 또 마음에 아픔도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늘 깨뜨려지는 사람 주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마음에 출렁거리고 정동을 느끼면서 아멘, 하면서
(찬양)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렇게 하는 사람을 아주 귀하게 생각해요 좋은 학교 못나오고 가방끈이 짧아도 그리고 돈 많고 젊지 않아서 교회에 도움이 별로 안 되는 것 같아도 그 사람들이 진정한 교회의 지체다운 사람이에요. 그 진리의 말씀에 자기가 출렁거리면서 살기 때문이에요. 비록 부족한 것이 많아도 그렇게 자신의 총명에 비추어서 그의 마음을 출렁거리게 만드는 그 진리가 그를 끊임없이 붙들어줘요. 그래서 그가 오류가 있을지라도 진리의 빛이 그를 바로잡아줘요. 미끄러질지라도 진리의 말씀이 그를 굳게 붙들어줍니다. 이것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첫 회심으로부터 미끄러져서 밑도 끝도 없는 영적인 물러남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에요.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이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선명히 맺히도록, 그것에 우리의 마음에 출렁거리도록 그 출렁거림 속에서 힘없이 우리의 정신 속에 붙어있던 모든 육정과 그리고 이 세상의 감각에 대한 물상들, 이 그릇된 인상들은 한 번의 출렁거림 속에서 떨쳐져 나가는 것이에요. 그리고 온 땅과 만물위에 가장 뛰어나신 참되신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아갈 마음의 결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의 큰 미끄러짐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미끄러짐에서 시작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오성의 막에 주님의 진리가 선명하게 맺혀서 우리를 그 진리 앞에서 출렁거리게 만들 때에 우리는 그것을 매우 행복해 했지만 이것이 서서히 사라져갈 때에 우리가 그것을 커다란 재앙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때는 좋았지만 지금도 견딜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밑도 끝도 없는 신앙의 미끄러짐의 출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비록 우리들이 이제까지는 몰라서 그렇게 미끄러졌지만 우리의 이 삶의 모든 미끄러짐의 첫 시발은 사실은 큰 죄가 시작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것이 있기 전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말씀에 우리의 총명에 맺히며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출렁거리게 만드는 이 신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과의 말씀에 영향을 받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급속하게 우리의 신앙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세요. ‘내가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명하게 내 마음의 창에 맺히고 그것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진리를 기뻐하고 진리를 즐거워하고 그 진리에 나 자신을 합치시키는 이 진실한 신앙의 생활이 나의 내면에서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다. 거기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은 움직이지 않고 흔들이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당신께로 돌아오려고 할 때 하나님은 돌아올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물질이나 영광이 아니라 진리가 다시 내 마음에 다시 그렇게 선명히 맺히도록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매순간 사랑하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나의 온 영혼이 떨려 그 하나님께 붙어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만약에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이지요. 무슨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나의 이 신앙의 큰 미끄러짐이 그러한 사소한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음에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에만 멈추지 말고 오늘 우리가 기도합시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다시 나의 영혼을 그렇게 진리의 말씀에 출렁거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을 정결하게 해달라고, 도와달라고, 그리고 맑은 마음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다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2009/08/09, 온가족수련회 저녁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0,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1,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2.부패와 신앙의 물러남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25).
Ⅰ. 들어가는 말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고 또 말씀의 심오한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침체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복음의 능력 속에 살 때에는 우리의 이 영적인 충만함과 견고한 신앙생활이 오래도록 자동적으로 지속될 것 같은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구원받은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이처럼 견고하도록 만드심에 있어서 하나님 홀로 건물을 세우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신앙을 심으셔서 견고케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그 견인의 은혜에 참여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견고한 삶을 살아가도록 붙들어주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의지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충만하고 견고하고 건강한 상태가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저절로 되도록 만들어 주시지 아니하시고 신자가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오직 두 가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에 굳게 붙들린 가운데서만 건강하고 견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경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구원의 은혜는 정말 크고 아주 놀라운 은혜이고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를 그 죽음에서 살려내신 재창조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이렇게 이미 구원받아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은 그것만으로 주님이 우리를 살려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가지고 넉넉히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던 불신자 때보다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의 때에 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이죠.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본질상 우리 자신이 죽어있는 영혼입니다. 그러니까 살아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지요. 구원받기 전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까지는 구원받기 전에 갈급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본성적인 양심의 가책으로 그런 적은 있지만 우리의 영혼의 고갈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이미 그런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는 우리는 수시로 이런 것을 느낍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불신자일 때에는 먹고 입고 마시는 물질이 있으면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런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결국 하나님을 점점 더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으신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이에요.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신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와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게 될 때에는 우리는 항상 약한 자였어요. 그래서 주님의 손에 붙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으로 물러나서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뒤로 물러가 침체에 빠지는 이런 일들이 있게 되는데, 그 맨 처음 시작이 지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어제 말씀드렸어요.
우리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의 미끄러짐은 자기가 지은 어떤 죄에서부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절대 그렇지 않고요. 성령의 은혜도 준비된 마음에 부어지고 그리고 죄도 사람의 마음이 그 죄에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에 그 때에 죄가 들어와 역사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뒤로 물러가서 죄를 짓고 혹은 불순종을 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하게 된다면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자기가 구체적으로 불순종한 어느 시점이 미끄러짐의 시작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미끄러진 그 시점에서 보면 그 이전에 이미 행동으로 미끄러져 불순종하기 전에 이전에 자신의 정신 속에서 충분히 미끄러질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죠. 그 미끄러진 것이 거슬러 올라가면 정서가 나오고, 의지가 나오고, 그것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제 지난시간에 배운 생각의 미끄러짐이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렇게 졸고 태만하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 것들을 굉장히 책망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굉장히 영혼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죠.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수를 믿는 신자가 아니라 경매꾼들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지금 화면에 경매 나온 집들이 막 뜨면서 서로 투표를 한다고 하면 저 한쪽 구석에 앉아서 끄덕거리고 졸겠어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른 사람이 얼마를 썼는지 눈치 빠르게 해서 금액을 써넣고 손을 들고 그래야지만 경락을 받을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하나의 자기의 먹고살기 위한 사업인데도 그렇게 사는데 하물며 여러분들은 어제 배운 교리에 의하면 결국은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은 나의 지성이 맑고 명징한 상태에서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박혀 인상지어지고 그것이 나의 마음을 움직여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 이 일들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지만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진리를 깨닫고 찾기 위해 애써야 되겠느냐는 것이죠. 집중하지 않는 마음에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흔들리는 물병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요. 교육이 될 수가 없고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래서 주일학교를 하면서 어린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똑바로 앉아서 교역자를 쳐다보면서 집중하는 것부터 가르치는 것이에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이들이 무릎에 손을 얹고 전도사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그것부터 교육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집에서도 가정예배를 드릴 때에 그것을 교육해야 되는 것이에요.
죄는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의 지성을 공격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백 명이면 95명이상은 자기가 이 지성의 부분에 있어서 죄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죄와 미끄러짐에 대한 생각이 매우 율법 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실제로 죄를 짓고 불순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사람들의 모든 질병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결국은 유전적인 요인과 생활의 태도, 그리고 환경 이 세 가지로 집약 되요. 그러면 그것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생각이 먼저 공격을 당하는 것이죠. 죄가 생각을 공격해서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총명이 있는데 이 총명에 하나님의 진리가 선명하게 맺히고 그 진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면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인격과 삶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려고 몸부림치게 되는데 이것이 진실한 삶이에요. 그러니까 진리라는 기준이 없는 사람에게는 진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죠. 진리라는 기준이 있고 그것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야지만 그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신의 삶의 추함을 발견하고 자기를 돌이켜서 그 진리에 합치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진실에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많이 애를 쓰게 될 때에 그것이 내적인 특성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진실한 것이 숨길 수 없이 이 속에서 쭉 흐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믿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우리 교회에 이렇게 다니면서 아이들을 보면 초등학교, 중학교만 되어도 아이들이 회심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뉘우치고 그 진리에 합치하려는 삶을 살려고 하면 이 어린아이들인데도 성도의 흔적이 얼굴에 쭉 흘러요. 오히려 여러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 같지 않게 느껴지는 적이 있는데 걔네들은 예수 믿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왜? 은혜가 떨어지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요? 여자가 은혜를 받으면 자매가 되고 자매가 은혜가 떨어지면 여자가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죄가 생각을 미끄러지게 하면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이런 것들이 선명하게 들어오면서 여기서 각가지 정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에 별로 오랜 시간이 안 걸려요. 여러분 넉넉잡고 육 개월만 말씀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아보면 여러분의 인간의 바닥이 다 나오는 것이에요. 그 바닥이 다 드러나는 것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커다랗고, 집요하고, 치열한 전쟁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루 중 제일 정신이 맑고 깨끗한 시간에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것이에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데 나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요즘은 옛날보다 훨씬 많이 해요. 그래도 안하는 사람은 절대 안 해요. 내가 알아요. 기도할 때에 뭐 ‘건강을 주시옵소서.’ 뭐 물론 건강을 주셔야지요. 뭐 ‘마음의 근심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뭐도 주십시오. 뭐도 주십시오.’ 그러는데 그런 것은 대부분 여러분들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이에요. 여러분들이 못해주는 것을 위해서 ‘목사님 마음 편하게 해주십시오.’ 속 썩이지 마요. 그러면 되요. 기도보다도 실천이 있어야 되요. 제일 첫 번째 와야 하는 기도가 뭐냐 하면 우리 목사님이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명하게 와 닿아서 마음의 출렁거림이 이는 정동이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의 기도제목이에요. 그것도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도 그런 일이 매일 매일 일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막 출렁거리고 깊은 정동이 일어나면 하루의 오전만 그렇게 붙잡히게 되면 여러분들이 한 육 개월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말씀 속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해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나에게 돈을 갖다 주고 새 양복을 사준다고해서 그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공부하는 테이블을 외제로 사준다고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해요. 이것이 며칠만 계속되지 않으면 위기의식을 느껴야 되는 것이에요. ‘아, 지금 나의 지성이 죄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고 있구나! 흐려지고 있구나.’ 탁탁 느껴져야 해요.
Ⅱ. 은혜로부터의 부패
그런데 죄는 이제 여기로 이렇게 우리의 지성을 혼란시켜서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총명 속에 아로새겨져서 마음이 출렁거리는 정동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은혜로운 정서로부터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게 은혜로부터의 부패에요.
A. 은혜와 정서
여기서 우리들이 은혜와 정서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정서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느끼는 그 감정은 우리들이 감정이라고 부르지만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이것을 우리들이 정서라고 부르기도 하고 저 같은 경우는 이것을 애성이라고 불러요. 지성과 애성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애성은 이러한 사랑의 감정 혹은 혐오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느끼고 그것들이 작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이러한 능력이 그게 뭐냐 하면 둘로 나눠지는데 애호할 수 있는 능력과 혐오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뉘어요. 애호할 수 있는 능력은 좋고 자기의 마음에 아름다운 것을 볼 때에 친근하게 느껴지고 사랑이 우러나오는 감정이에요. 기뻐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좋음의 감정이에요. 이게 애호의 능력이에요. 반대로는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거나 질서에 어긋나거나 자기의 판단에 추하게 느껴지는 것이 떠오를 때에는 그것을 배척하고 싶고 멀리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데 이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혐오, 혹은 오혐의 능력이라고 해요.
이러한 애호의 능력과 혐오의 능력이 바로 우리의 정서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우리의 정서는 이제 우리 속에 죄가 침투해서 우리를 속이고 힘을 발휘하는데 있어서는 맨 처음 공격하는 지점이 우리의 지성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우리 속에 들어온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어떤 행동을 산출해낼 때에는 사실은 이 지성보다는 우리의 이 감정이 더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봅시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내가 그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제로 마음이 그것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 지성의 판단을 어기고 우리들이 행하는 때는 많이 있지만 반대로 마음속에서는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기 싫어할 때 그것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이에요. 내가 종종 드는 예지만 누구하고 싸워요. 그러다가 ‘내가 이 말은 하면 안 되지.’ 머리가 그렇게 판단하는데 너무 화가 나면 나중에 사과하고 뒷감당을 하는 한이 있더라고 배설하듯이 확 쏟아놓고 말잖아요. 그것은 이성이 시킨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시킨 것이라고요.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우리의 마음의 정서는 배의 방향타와 같다고 했어요. 우리의 감정의 움직이는 방향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이 정서를 하나님 앞에 올바로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것은 은혜와 마음의 관계가 되는 것이죠. 마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영혼의 기능인데 이 지성을 통해서 들어온 생각과 그 다음에 이것을 받아들였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반응과 이 모든 것이 작용을 하면서 마지막에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 이것이 실제로 작용하는 그 본거지가 우리의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영혼으로부터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지성으로부터 받아들이고 그리고 받아들인 지식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감정과 함께 움직이면서 영혼의 하위의 기능들이 움직이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음은 위로는 영혼과 만나고 아래로는 우리의 육체와 만나요.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작용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어요. 그러니까 이 마음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영혼이 육체와 만나는 이 지점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기능이에요. 그래서 영혼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도 없어요. 영혼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없는 것이에요. 영혼이 있어야지만 마음의 작용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동물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마음이라고까지 얘기를 안 하죠. 이때에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고 하는데 이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음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통해 영혼으로 가기도 하고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통해 육체로 내려가기도 해요.
예를 들자면 언젠가 제가 설교 시간에 신 사과이야기를 쭉 했잖아요. 여러분들도 침을 삼켰잖아요. 사과는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 사과에 대한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니까 사과는 보이지도 않는데 여기서 사과를 먹을 때 흘러나오는 침이 확 흘러나오는 것이죠. 이게 육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잠자리에서 오줌싸개를 종종 했잖아요. 오줌이 마려운데 옛날에는 시골에서 화장실이 멀었어요. 안가고 추운 겨울에 무조건 참아요. 그러면 꿈속에서 항상 화장실이 나타나요. 그래서 충분히 볼일을 보고나면 축축한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 모두 경험했을 것이에요. 화장실이 안 나타나면 볼일을 볼만한 장소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렇게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게 되면 이것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요. 그리고 또 이것이 영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요. 그래서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 마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 항상 이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에요. 성화과정에서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서 역사해요. 마음을 움직이게 되요.
이제 잘 들어보세요.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사람들이 여기저기 구경하겠다고 여행을 다닙니다만 우리가 정말 여행하여야할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땅이 있으니 그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랬어요. 그래서 탐구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에요. 들어보세요. 자, 우리가 이제 육신의 감각으로는 풀이나 꽃이나 나무 같은 것들을 보죠.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지요. 그때 이 안에서 우리의 정동이 일어나잖아요. 좋아하는 감정, 싫어하는 감정, 또 어떤 감정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이런 것들은 육체를 통해서 들어오지만 이런 육체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어요. 그게 뭐죠. 진리에 대한 인상, ‘어떻게 육체의 도움을 안 받습니까? 성경을 읽어야 되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을 읽어야지 성경은 읽지만 이것은 성경이 그림책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읽으면서 진리에 대한 증거하시는 말씀을 보면서 성령이 역사할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상이 우리의 총명 위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죠. 그 때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출렁거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처럼 순수한 지성적인 것이 우리의 육체의 감각을 통하지 않고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총명의 막에 맺히든지 혹은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인상처럼 육체의 감각기관을 사용해서 들어와서 우리의 총명의 막에 맺히든 지간에 이것이 항상 우리에게 똑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죠.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이것은 새롭게 다가오잖아요.
그래서 제가 가끔 얘기하잖아요. 짜증나고 바쁠 때는 새가 떠드는 것처럼 들리고, 그리고 슬프고 서러울 때는 우는 것처럼 들리고, 신나고 기쁜 일이 있으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똑같이 귀를 통해서 들려오는 동일한 소리인데 왜 어떤 때는 시끄럽게 떠드는 것처럼 들리고, 어떤 때는 우는 것처럼 들리고, 어떤 때는 지저귀면서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느냐는 것이죠. 동일한 소리인데도 우리에게 다른 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시끄럽게 들릴 때는 이 속에서 짜증의 정동이 확 일어나는 것이에요. ‘저거 그냥 확 다 잡아버려?, 새총으로 다 쏴버려?’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죠. 그런데 마음이 막 서러울 때는 ‘너도 그렇게 슬프게 우는구나!’ 그러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죠. ‘네가 내 심정이구나!’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자기가 즐겁고 행복하고 비발디의 사계 중에서 봄을 틀어놓으면서 오늘 데이트하러갈 생각으로 너무 신나는 것이에요. ‘이게 몇 년 만이냐.’ 그러면서 신나하면서 그 때는 새가 노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똑같은데 그렇잖아요. 그러면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동일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뭐가 문제가 되느냐하면 이제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른 봄에 비가 내리잖아요. 경칩이 지나고 우수가 되어서 비가 내리게 되면 그러면서 그 습기를 머금으면서 새싹들이 나기 시작하잖아요. 살아있는 나무일 경우에는 봄비를 맞으면서 싹을 내는 것이에요. 그런데 죽어있는 나무는 그 비를 맞으면서 더 빨리 썩는 것이죠. 여러분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이 마음이 강퍅해질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얼마나 강퍅해졌는지를 은혜에 멀어진 사람이 오늘 발표회 하는 것 내가 위에서 텔레비전으로 봤거든요. 고스톱을 치고 그럴 때는 그가 얼마나 강퍅해졌는지 안 나타나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그가 얼마나 강퍅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 속에서 그 진리를 배척하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확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진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보여주는데 이 안에서 싫은 감정이 확하고 솟아나는 것이에요.
선생님들이 그런 얘기를 해요. 어린아이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역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대요. ‘야,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돌아가셨지? 우리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싫어요, 안 해요, 체,’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서 뛰어가는 것이에요.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이 시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게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마음을 바꿔놓는 것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로운 작용인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게 되요. 그게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에요. 우리의 마음에 뜨거움이 일어나고 주님을 위해 잘 살아봐야지 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충성스럽게 일해야지 하는 감정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진리를 통해 보여주실 때 그것들을 좋아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감동은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은 감동일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오전 시간에 내게 사실은 한30분만 시간을 더 주었으면 말끔하게 끝낼 수 있었을 텐데 하여튼 나도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제트기처럼 지나갔는데 그거 뭐 한 열 시간 해야 할 것을 두 시간에 했으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거기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굉장한 성령의 운동들이 있지요. 굉장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죠. 평신도이고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다 잘 믿자고 하는 것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나쁜가? 가보니까 은혜롭던데…….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그 은혜가 그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예화)제가 신 대원 3학년 때니까 지금부터 한 23년 전 일이에요. 시골교회를 가서 어린이 부흥집회를 했어요. 그때도 아이들이 한 50명 정도 모였는데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데 그 아이들이 똑 부러지게 회심을 하는 것이에요.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더운데 선풍기도 안틀고 십자가 찬송을 부르며 기도회를 하는데 막 울어요. 그 때 따라갔던 자매 하나가 비회심자거든요. 펑펑 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끝나고 나서 너무 흥분한 거예요. 야, 얘가 드디어 회심을 했구나! 그런데 그러면 자기가 전도사님 은혜를 받았어요. 제가 회심했어요. 그럴 텐데 그런 얘기를 안 해요. 하도 궁금해서 ‘얘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니?’ 그랬더니 주셨대요. ‘너 왜 그렇게 많이 울었니?’ 물었더니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시골 애들이 너무 불쌍해서 울었대요. 짜증이 확 나요. 그 광경을 보면서 누가 그것을 회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얘기를 하겠느냐고요. 얘는 시골 애들이 연필도 없이 그 먼 길을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서 인도주의자의 눈물을 흑흑흑 흐느끼면서……. 그러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에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의 역사지요. 그렇잖아요. 걔는 얼마나 본인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겠느냐는 것이죠. 제일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찬송을 부를 때에 펑펑 울고 설교들을 때에 졸고 기도할 때에 열렬해지는 사람들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위험한 사람들이에요. 순수하지 않은 가짜 영성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놓아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리를 아주 좋아하는 정서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만약에 우리를 그렇게 한다면 그 은혜는 결국 어디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죠? 정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요. 정동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물과 같은데 거기에다가 큰 돌멩이를 던지면 그 돌멩이가 날아가서 풍덩 떨어지면 물결이 출렁출렁 하겠지요. 이 물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보고 돌멩이를 지식이라고 보고 어떤 것들에 대한 깨달음이나 지식, 인상, 출렁거리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라고 보면 그 감정의 출렁거리는 움직임을 정동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떨어지는 그 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지식일 경우에는 출렁거림이 일어나요. 이 출렁거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출렁거림이 일어나게 되요. 그러니까 죄를 미워하는 출렁거림이 일어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출렁거림이 일어나게 되요. 이것이 바로 경건한 감정의 시작이에요. 그 속에서 자기 깨어짐이 있고 회개가 있고 눈물이 있고 그리고 말씀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이렇게 영향을 미친다면 또 무엇이 그것에 대응해서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겠어요? 죄가…….
B. 은혜의 부패란?
그래서 우리의 지성을 혼란케 해서 그래서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인상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총명의 막에 맺히지 못하도록 방해한 이 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제 정복을 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가슴을 향해 내려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은혜로운 정서의 부패라고 말해요. 은혜의 부패라고 말해요. 그래서 항상 진리에 대한 신령한 체험은 반드시 은혜로운 정서를 동반하게 되어있는 것이죠. 그게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은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인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에요. 우리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적이 많은데 하나님은 마음에 하시고 싶으신 말이 없으시면 말씀을 안 하셔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말씀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전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는 말의 의미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도 전달해준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앎이 없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수시로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로운 정서를 지니게 되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찬송 한절만 불러도 그렇게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것이에요.
(찬양)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찬송 한절만 불러도 눈물이 확 쏟아져요. 내가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간증하려고 아직 말도 안 꺼내고 마음만 먹었는데도 눈물이 확 쏟아져요. 누군가가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랑하는 지체의 미끄러짐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것이에요. 그리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승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막 소리치면서 기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의 정서에요. 그러니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것이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버티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말하자면 이제 진짜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은혜의 부패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은혜의 부패…….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해요. ‘은혜의 부패란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떡처럼 딱 주어지는데 어느 순간에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리고 사니까 야금야금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만나를 벌레들이 먹어버린 것처럼 이렇게 썩어가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표현을 우리들이 은혜의 부패라는 말을 써서 우리에게 마음의 이해를 갖게 만들어주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가 우리를 부패하게 만들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는 아주 좋은 음식이지만 상하기 쉬운 물건과 같고 그리고 죄는 그것을 부패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그런 것이 아니고 이런 이해를 여러분들이 평생 가슴에 새길 때에 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 것이에요. 우리는 실제의 삶에서 경험해보면 죄의 능력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까? 은혜의 능력이 강하게 느껴집니까? 솔직하게 고백을 하면? 그렇지요. 죄의 능력이 훨씬 강하게 느껴지잖아요. 예를 들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찰 때에는 그냥 가득차고…….
(찬양)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런 마음이 생겨요. 그런 정도에요. 그런데 이 속에서 정욕이 확 차오를 때는 확 뛰쳐나가서 미워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고 죄를 짓고 싶을 정도로 강하고 어두운 힘을 우리가 느끼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가 현실 속에서는 은혜의 힘보다는 죄의 힘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이에요. 저도 이 문제를 가지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철학자들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결핍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오늘날의 많은 철학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결핍이 이렇게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이게 성경적인 생각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죄가 은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어떤 죄를 지을 때에는 하나님이 물러나시고 그렇죠? 짓지 않을 때조차도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죄를 짓고자하는 의도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아시잖아요. 그래서 사도들이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뽑을 때 주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여…….’ 그러잖아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 모든 사람의 마음까지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까지도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알잖아요. 그렇게 우리들은 몰라도 생각 속에 죄가 들어오는 것도 아시잖아요. 이렇게 우리 안에 죄가 있는 이것은 우리들이 의지적으로 선택한 죄일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 죄가 우리의 의지 안에서 마음 안에 허용된 것만큼 당신이 이미 주신 은혜를 거두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벌레가 파먹듯이 죄가 들어와서 이 은혜를 파괴하고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어요. 그게 아니라 신자가 신자의 마음 안에 의도된 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세로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중의 일부를 거두어버리시는 것이죠. 그것만큼 우리에게 주신 총명의 일부도 하나님이 거두시는 것이에요. 할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거두시는 것이죠. 이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에 비춰서도 그렇게 해야지 마땅한 것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들은 정확하게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에 의해서 거두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 자기가 짓고 있는 죄, 자기의 마음의 변질되는 것, 이런 것들이 얼마큼 하나님 앞에서 나쁜 것인가 하는 것을 알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죄에 의해서 하나님이 의지적으로 당신의 무한한 주권 속에서 이미 주신 은혜의 영적인 영향력들을 하나님께서 철수시키시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은혜의 부패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본바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원래의 우리의 본바탕은 타락한 이후로는 뼈 속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싫어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나를 주인 삼으며 살려고 하는 것이 이 타락한 인간의 뼈 속까지 사무친 본성이에요. 구원받은 자 안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잘 들으세요.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된 의지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본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게 바로 은혜의 효과에요. 중생과 함께 주어지는 그 영적인 은혜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그것을 거두어 버리시고 나면 그러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은혜 생활을 할 때에는 본래 여러분들의 모습이 누구인지 서로 모두 속아요.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이제 그 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아 저랬기 때문에 그렇게 곤고한 인생을 보냈구나! 아, 그렇구나!’ 알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탕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부패하는 신자의 모습이에요.
Ⅲ. 정서의 부패와 신앙의 물러감
이제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생각을 공격해서 결국은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총명에 새겨져서 그래서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정서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출렁거리게 하지 못하도록 충분히 우리의 지성을 장악한 다음에 이제 죄는 온 힘을 결집해서 우리의 정서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정서의 부패와 신앙의 물러감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게 되는 것이죠.
A. 내재하는 죄와 정서
제일 먼저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내재하는 죄, 신자라 할지라도 이 안에 남아있는 이 죄는 우리의 정서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은혜가 우리의 마음 안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아름다운 것들을 전달해주는 진리를 향해서 감정을 느끼는 방향이 바뀌게 해주듯이 이 죄는 하나님과 이 모든 사물들에 관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보면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을 구현해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죠. 제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인데 초창기에 은혜를 받고 고등학생들을 데리고 사역을 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 학생 중의 하나가 여학생이었는데 가운데 앉아서 똑바로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데 최고로 모범적인 예배의 태도에요.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에요.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그 자매가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기도회에 모여 서로 간증을 하는데 자기 얘기를 하는데 무슨 얘기냐 하면 자기는 전도사님이 오시고 나서 너무 싫었대요. 왜냐하면 오자마자 전부 다 바꿔놔서 예전에 따뜻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설교를 막 세 시간씩 설교를 하고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잡아먹을 듯이 야단을 치고 우리를 모두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하고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항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예배시간마다 당신을 노려보기로 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운데 앉아서 노려본 것이에요. 어떻게 저런 인간이 있을까하고 노려보았대요. 그러니 말씀이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가지. 그런데 그렇게 쳐다보니까 집중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살살 말씀이 들려오는 것이죠. 그래서 집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그래요. 그렇게 집중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갔어요. 그 미워하는 사람을 노려보면서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서 얘가 회심을 하게 되었어요. 깨뜨려졌어요. 어느 날 예배가 끝나고 나서 허물어지듯이 땅바닥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것이에요. 나는 너무 은혜를 사모하다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을 했지 날 째려보는지 누가 알았겠어요. 차라리 마음에 안 들면 째려봐요. 째려보면 희망이 있어요. 그렇게 째려보더니 불과 몇 주 만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에요. 누가 한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반감을 가지고 바라보던 그 사람 때문에 배척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정서를 움직인 것이에요. 정말 놀라워요. 그렇게 짠돌이 같던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구제해달라고, 누구를 도와달라고 헌금해요. 그렇게 말하자면 악한 성품이었던 사람이 변화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지 몰라요. 죄는 이 반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존 오웬 목사님에 의하면 죄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파괴시키는 세 가지 단계가 있어요. 그게 제일 먼저 뭐냐 하면 지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에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마음이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에요. 마음이 굳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무조건 딱딱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딱딱해진다는 것이에요.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주면 출렁거렸어요. 그래서 회개도 하고 고백도 하고 다시 뉘우치기도 하고 진리를 붙잡는 쇄신의 작용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사라져버리고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딱 때리면 전에는 풍덩하고 들어가면서 출렁거리며 마음이 움직이면서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믿음이 생기고 하는 이런 출렁거림이었는데 굳어지고 나니까 확 하고 진리의 돌멩이를 던지면 딱하고 튀는 것이에요. 마치 쇳덩어리를 대리석 위에 던진 것과 같이 말이죠. 탁하고 튀어 올라요. 그런 마음이 세상의 욕심과 정욕에 대해서는 아주 부드러워서 그래서 어떤 육욕적인 것들이 떨어지면 출렁하고 막 일어나는 것이에요. ‘아 그 옷 나도 입고 싶어, 그것 나도 먹고 싶어, 거기 나도 가고 싶어.’ 그러면서 출렁거리는 마음이 생겨요. 그런 욕망들이 생겨나게 되요. 이렇게 바꾸어 놓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은 자기 좋아하는 것은 자꾸 자꾸 그것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어나가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점점 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점점 바꾸어나가잖아요.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죠? 조금 희미해도 마음에서 이렇게 희미한 것이라도 보면서 출렁거리는 것이 일어나면 그게 즐거우니까 자꾸 말씀도 보고 설교도 듣고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할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점점 싫은 것이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지성이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주었지만 다음에는 이 감정이 지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 통속이 되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차츰 멀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기뻐하던 사람들이 이제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니까 이게 자주 말씀을 접해야지만 변화될 텐데 아예 멀어지는 것이에요.
옛날에 제가 고등부 지도할 때 윤 시내라는 가수가 있었는데 ‘공부해’ 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그것을 틀어주면 애들이 그것 좀 틀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한테 ‘공부 잘하는 법’, ‘이렇게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누구처럼 공부해서 무엇을 해라’, ‘어렸을 때 반기문은 어떻게 공부했나!, 이런 책들을 잔뜩 사줘 봐요.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요. 차라리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낫지……. 탈영할 생각만 계속하고 있는데 최신 무기를 계속 갖다 줘 봐요. 이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러니까 점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죠. 그러다가 급기야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새록새록 다가와요. 그 다음에는 그냥 읽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그냥 읽기가 싫어져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것을 덮어놓고 멀리 올려놓고 그 다음에는 이것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요. 그렇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볼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이미 걸어온 길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뭐가 그렇게 신기한 것처럼 고개를 그렇게 끄덕거려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이게요. 예수 믿는 사람이 알록달록 해도 미끄러지는 길은 똑같이 모여서 한길로 걸어가는 것이에요. 미끄러진 사람들이 가는 길이 있어요. 그것을 가리켜서 넓은 길이라고 해요. 다 똑같아요. 시작은 다른데서 시작했지만 가는 길은 그렇게 똑같게 가는 것이에요.
B. 죄가 정서를 공격하는 이유
그러면 왜 그렇게 죄가 정서를 집요하게 공격하려고 할까? 그것이지요. 이유는 정서가 지성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 죄와 은혜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은혜도 반드시 밖으로 선행을 산출하고 싶어 해요.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우리 몸 밖으로 악을 산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마음에 품고 있는 것 정도로는 만족을 안 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잖아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만족적일 수가 없어요. 그럴 수가 없어요. 여러분 제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자주 예를 드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사랑에 빠졌다고 칩시다. 형제가 자매를 너무 사랑한다든지 자매가 형제를 뜨겁게 사랑한다든지 사랑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 힘들어요? 너무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해주지 않고 참는 것이 힘들어요? 전자가 힘들어요? 후자가 힘들어요? 후자가 힘들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수치스러울 뿐이지만 너무 사랑하면서도 그에게 행동으로 그것을 해주지 못하는 것은 가슴을 에는 고문이에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복음의 영광을 경험하고 나니까 고민은 딱 두 개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나인 것이 죄송하고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미안한 것이에요. 그것 두 개에요. 내가 나인 것이 죄송하고 내가 이렇게밖에 못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송해요. 그게 가슴을 에는 것처럼 아파요.
(찬양)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주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그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결국은 정서가 가득 차게 되면 그러면 반드시 그것은 밖으로 산출되게 되어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만약에 아무리 생각을 공격한다고 하더라고 아직 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따듯한 정서가 남아있다면 이것은 생각 속에서 돌뿐이고 우리들이 생각 속에서 죄를 짓는 적이 많잖아요. 그런데 안 옮기잖아요. 기도를 한번하고 나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하다가도 머릿속으로는 별생각을 다 해도 찬송 한 장 부르고 나면 ‘그래, 인간이 그럴 수 있지!’ 결국 실행에 못 옮겨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지요. 이 마음을, 정서를 바꿔놓지 않으면 이것은 계속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유산되는 죄의 활동이 되는 것이에요. 이해가 되지요? 이게 계속해서 유산되는 것이에요. 씨는 계속해서 머리에다 뿌리는데 소득이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 가지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서를 공격하는 것이에요.
결국 사랑의 본질은 정서에요. 지식에 기초한 정서에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할 때에는 우리의 정서의 나타남이 풍부해지게 되고 우리가 거룩한 정서로 가득 찼을 때에는 거룩한 생활이 그렇게 쉽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여러분 은혜가 충만한데 기도하는 게 힘들어요? 기도의 영이 충만한데 기도가 힘들어요? 그래서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그런데 그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렇게 즐거운데 왜 안 해요?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하나님의 은혜로운 정서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 관련한 많은 일들은 우리에게 고통이 아니라 너무 기쁜 의무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한 번도 은혜 많이 받았을 때 기도가 의무라고 그러면 피식 웃지요. ‘그게 왜 의무일까? 아니 숨 쉬는 게 의무에요?’ 얼마나 그 시간이 기다려져요. 너무 감사하지요. 그래서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에요. 은혜가 충만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있을 때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는 교사생활이 힘들어요?
언젠가 오래전에 은혜 받은 어느 자매가 새 가족 환영회에서 간증을 하는데 자기는 열린 교회에 나와서 너무 행복한데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갑자기 목사님이 나타나서(내가 거기에 왜 갔는지 모르겠어요.) ‘너 이제 교회에 나오지 마!’ 그러더래요. 자기가 펑펑 울다가 깼는데 끔찍한 생각이 들더래요. 거봐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교회에 나오고 어린 영혼을 가르치는 이 모든 일들이 행복하고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이에요. 왜? 은혜로운 정서가 우리 안에 가득 있으니까. 그런데 잘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하면 결국은 이런 정서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거의 전부를 주관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요. 그래서 사역자들이 가슴을 겨냥하는 것이에요. 뭐라고 그래요. ‘목사님! 네. 설교 끝나고 기도회 좀 인도해주시면 안 될까요?’ ‘예 그러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가슴에 불을 댕겨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장난스럽게 ‘불은 누가 줍니까?’ ‘그것은 목사님이 주셔야지요.’ ‘그런데 내가 라이터를 안가지고 와서…….’ 그래서 가슴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슴에 불을 지르고 싶어 해요. 뜨겁게 찬양합시다. 너무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개혁주의가 아니에요. 오늘 이 교수님이 오셔서 아주 좋은 말씀을 해주셨잖아요. 그래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불러 일으켜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에서 하나님 앞에 이런 회개를 해요. ‘하나님 내가 이전에 찬송을 불렀는데 혹시 내가 가락에 취해서 가사를 잊었다면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내 생각에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니에요.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나는 오늘날의 이런 찬양들을 개인적으로 썩 내켜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묵상해서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찬양이어야 해요. 그렇게 그런 가락으로 우리들이 찬양해야 해요. 그런데 그것을 가슴을 겨냥해서 눈물을 짜내고 열정을 불어넣고……. 그것이 그 당시에는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데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무것도 없이 감정을 겨냥해서 뜨겁게 일으키려고 하는 시도는 감정을 겨냥하는 것이에요. 감정 자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이것은 신령한 정서가 아니에요.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들어주는 신령한 정서는 이런 것이 아니에요. 이런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식이 들어와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어서 이 지성으로 그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만나 거기서 불꽃이 일어나면서 확하고 감정의 불길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거룩한 정서에요. 그런데 떨어지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면 진리의 말씀만이 이것을 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죄는 얼마나 집요하게 이러한 정서를 파괴하려고 할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이것을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내려오는 것이에요. 내려오면서 정서를 공격하는 것이에요. 이게 이제 별로 시간이 오래 안 걸려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총명의 막에 맺혀서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기뻐하고 그리고 자기가 잘못한 것들을 뉘우치고 새롭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새 출발을 하고 하는 이런 작용들이 계속 일어나야 되는데 이게 다 그치잖아요. 그러면 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마치 불길은 타오르는데 연료를 공급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금방 식어버려요. 그래서 결국은 딱딱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조금만 우스워도 막 웃고, 조금만 슬퍼도 눈물이 쏟아지고, 조금만 가슴 아픈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마음이 생기잖아요. 이게 식어져서 딱딱하게 굳어져요. 그래서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C. 생각의 미혹과 정서의 뒤엉킴
이렇게 될 때에 이제 다음 단계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생각이 미혹되는 상태에서 정서가 뒤엉키게 되는 것이죠. 이 정서가 뒤엉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것이에요. 들어보세요. 우리가 은혜에서 많이 물러나 있다고 해서 줄을 그을 수 있도록 어제 오후5시까지는 내가 은혜 안에 있었는데 5시 1분부터는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물론 이제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은혜로운 정동이 일어나기 보다는 이 세상의 사물들을 보고 육욕이 일어나서 자기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게 두부모 자르듯이 어느 순간에 몇 시 몇 분을 기준으로 해서 줄을 긋듯이 일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무슨 얘기인지 알지요. 그러니까 은혜 안에 살고 있는 성도들도 가끔 세상의 것을 보면서 갖고 싶다는 욕망도 느끼고 정욕도 느끼고 죄를 지을 마음도 순간적으로 생기는가 하면 은혜로부터 상당히 멀어진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때 어떤 때에는 ‘아 내가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사랑해주셨습니다.’ 이런 감동의 눈물이나 정서의 움직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지요! 이 두 개가 섞이는 것이에요. 이때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시죠. 이게 섞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죠? 언제까지는 이쪽에서 진리만 착착 달라붙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만 눈부시게 내려와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세상 것은 아무것도 안 들어오다가 몇 시 몇 분을 기준으로 이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완전히 육욕적인 것만 들어와서 정욕으로 출렁거리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 것이 두 개가 겹치는 거예요. 이 속에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진리의 아름다움이 와서 마음이 출렁거리는가하면 조금 있다가는 갑자기 육욕들이 막 들어와서 이렇게 되면서 마음에서 막 욕망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은 불순종하는 심정들이 막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막 이런 것들이 섞여서 이것들이 지성 속에서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결국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이런 혼란스러운 싸움이 혼란스럽게 계속 될 때에 이것은 벌써 우리의 싸움이 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런 혼란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잘 지켜야하는 것이에요. 어쨌든 혼란이 일어나게 되요. 이때에 지성 속에서 혼란이 일어나는데 똑같이 이것들이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때에는 ‘아, 그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것을 일으키는 것이죠. 그런데 멀어지고 나면 ‘아, 내 마음대로 살 테야.’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래도 이렇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요. 왜 도움이 되느냐하면 이쪽의 출렁거리는 이 물결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좋게 얘기하면 그렇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우리가 은혜에서 물러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도 이 은혜가 원래 이 은혜는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순종하고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데 이런데 사용되지 않고 이 출렁거리는 죄를 진정시키는데 거의 모두 쏟아 부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삶이 거룩해지지 않고 이 안에서 그냥 내면적인 싸움만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여기에 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데 이 은혜가 거룩한 삶을 위해서 산출되는 힘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출렁거리는 이 욕망을 진정시키는데 쓰이는 것이에요. 그러면 소용없겠네요? 소용없는 것은 아니지요. 불이 계속 탈 때에는 물을 좀 부어야지요. 만약에 이것도 부어지지 않으면 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이죠.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 때 이제 이 정서가 이 안에서 뒤엉키게 되는 것이에요. 그 때 이 안에서 이 정서가 이제 마치 물 위의 기름이나 장마철에 떠내려 온 쓰레기 같은 것들이 떠돌아다니듯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마음에서 빙빙 돌아다닐 때가 있어요. 떠돌아다니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이것을 정욕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좁은 의미로 사용하면 성적인 욕망이지만 그러나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면 자기를 주인으로 삼으며 살려고 하는 모든 총체적인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 두 가지 용도로 정욕이라는 말을 사용해요.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 세상 정욕을 못 박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이에요. 그래서 이 넓은 의미의 정욕이 이 안에서 떠돌아다니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성도가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성 속에서 만나고 그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꼬.……. 정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계속 살아야하는데 그렇게 살아야지만 그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되는데 이러한 작용이 거의 없어요. 그 때에 우리의 마음을 떠돌아다니는 커다란 욕망은 나를 주인 삼으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의 만족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아직 커다란 정욕의 덩어리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막 떠돌아다닐 때에 그는 아직 특별한 어떤 죄를 짓지 않아요. 이것을 가리켜서 나는 일반적 물러남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런 상태가 된 것은 일반적인 물러남이에요. 그래서 은혜가 거의 빠져나가고 그리고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을 살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지배를 받을 때 아직은 어떤 죄를 고착해서 짓지는 않았지만 광범위하게 떠돌아다닐 때 이것이 결국은 삶속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결국 그것이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이에요. 그게 결국은 일반적인 물러남이에요. 이런 일반적인 물러남에 빠지게 될 때 영적인 것, 진리에 관한 것,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것, 모든 것들에 관한 마음의 끌림이 현저히 사라지고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이때쯤 되면 이제 성경도 거의 안 읽고 읽어도 건성으로 의무적으로 하루에 몇 장씩 읽을 것을 정해놓은 것을 수행하는 정도로 하게 되고 그리고 마음을 쏟는 기도 같은 것도 거의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이러다가 이 정서가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착될 때가 있어요. 이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면서 거기에 집중적으로 파고들 때가 있는 것이죠. 이때를 나는 개별적인 물러남이라고 불러요. 이때에는 이제 구체적으로 신자가 불순종하게 되는 것이에요. 자,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것이죠. 은혜를 많이 받고나서는 놀랍게 세상의 욕심이 많이 사라지게 되요. 예전에는 돈밖에 모르던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나니까 이제 이 세상은 이 땅의 자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그러면서 모든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을 일순위에 놓고 그 다음에 판단하고 움직이게 되요.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을 살려는 이 커다란 욕망의 부유물들이 떠돌아다니다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망이 딱 생기면 그것으로 확 쏠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결국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미끄러지게 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경우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잖아요. 또 여러분들이 사울을 생각해보세요. 사울의 경우는 어땠지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아주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때에 총체적으로 정욕이 떠돌아다니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교만의 죄에 몰두하기 시작하니까 제사장이외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자기가 하려고 하고 그리고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약한 어느 쪽으로 이런 욕망들이 쏠리면서 마치 많은 물들이 목욕탕에서 하수도를 빼면 한쪽으로 몰려서 물이 빨려 들어가듯이 그렇게 들어갈 때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물질일수도 있고 명예욕일수도 있고 여러 가지 불순종을 만드는 죄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쪽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요. 그 때에 이제 개별적인 물러남이 이루어지게 되요. 어떤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멀리 물러나게 되는 것이죠. 다윗과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였잖아요. 이미 죄를 짓기 전에 충분히 물러나고 떠도는 부유물과 같은 이러한 정욕의 덩어리들이 움직이다가 어느 한 사건에 확 쏟아져내려가면서 교만의 죄에 빠지면서 인구조사를 하게 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사건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정서를 공격하는 죄의 마지막 작용은 뭐냐 하면 넓은 의미의 정욕 자체를 많이 불러일으켜서 힘을 잔뜩 축적한 다음에 어느 순간에 시험의 때를 만났을 때에 그곳으로 확 쏠리면서 도저히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이 지식과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도록 신자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것이 죄의 계획인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그렇게 해서 덜컥 잘못을 해놓고 거기가 시작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저쪽에서 보면 마지막지점이에요. 이쪽에서 볼 때에 시작지점이에요.
D. 경건한 삶을 위한 내적 질서가 깨어짐
이러면서 결국은 경건한 삶을 위한 내적인 질서가 우리의 정서 안에서 깨뜨려져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로마서 8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육신의 생각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을 거스른다.’ 거기에서 나오는 생각이라는 것이 사실은 수동태에요. 그래서 생각되어지는 것이에요. 그것을 희랍어로 프로네마 라고해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게 되면 육욕적인 프로네마가 생기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것들을 육욕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거슬러서 생각하게 하는 해석의 작용이, 경향이 우리 안에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돈이 생겼다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이 돈을 가지고 선교를 하고 싶다, 혹은 이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 혹은 이 돈을 가지고 미래의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생겨나지만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돈을 볼 때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감출까? 누가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이것을 가지고 나를 어떻게 즐겁게 할까? 이런 마음들이 생겨나지 않겠어요? 그렇게 똑같은 것을 보면서 다르게 해석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프로네마에요. 그래서 육신적인 방식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성령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고 성령의 마음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육욕적인 생각과는 거스른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그 둘 사이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신령한 방향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사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 결단을 하며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지만 더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프로네마가 생겨서 괴로운 일을 만나도 이러한 마음속에서 신령한 방식으로 생각되어지는 프로네마가 있을 때에는 괴로운 일을 만나면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고 나의 참 본향은 하늘나라구나!’ 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요.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시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높여주시는데 나는 이 은혜를 어찌 갚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육신의 영달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기회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되겠습니까?’ 이런 마음이 자꾸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여러분 성경지식을 많이 알고 교리를 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모르는 지체들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육신적인 프로네마가 가득 찼기 때문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저 형제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저 형제를 섬기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런 방향으로 해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신령한 프로네마에요.
그래서 결국은 정신을 공격해서 지성을 장악한 죄는 우리의 정서를 공격하고 죄로 가득채운 다음에 우리의 심성 속에 이렇게 항구적인 프로네마를 만들어서 주님의 은혜를 욕망으로 바꾸고 주님이 주신 은사들을 자기의 육체적인 욕심의 만족을 위해서 사용하고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기회들을 방탕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데 활용하도록 그렇게 우리들을 이끌어가고 변화시켜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게임이 안 되는 것이에요. 죄는 이러한 주도면밀한 계획 속에서 차근차근히 자기를 알고 우리를 알면서 이것을 꾸려나가는 것이에요. 죄는 인간의 마음이 고향이에요. 그래서 죄는 인간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아요. 은혜는 하나님이 고향이며 본거지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도 우리의 마음이 고향이에요. 그런데 죄는 우리의 마음속에 놀라운 붙임성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놀랍게 다가와요. 그래서 치열한 싸움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되요. 죄는 지성을 정복한 것을 가지고는 마음에 내켜하지 않아요. 그래서 감정으로 내려와요. 정서를 장악하려고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고, 진리를 향해서는 감격할 수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자기를 쏟아 부을 수도 없는 텅 빈 사람으로 만들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의 판도만을 보면 거의 이길 수 없는 절망감이 들지만 그러나 주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찬양)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늘 빌으시네.
IV. 결론 : 마음을 지키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이 간구하시면서 기도하셔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붙드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들이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주님을 붙들면 하나님은 아주 놀랍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 때문에 패배한 이 싸움을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아멘. 그러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은사로 내어주신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라도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의 CT촬영을 한 거예요. MRI를 찍은 것이에요. 보면서 ‘아! 하나님 나의 신앙생활의 미끄러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다시 은혜의 힘을 그 은혜의 능력을 나 때문에 패배한 이 영적인 싸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매달릴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도와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2009/08/09, 온가족수련회 저녁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0,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1,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3.물러난 영혼의 회복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25).
Ⅰ.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세 번째로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는 우리의 생각을 침투한 죄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총명을 흐린 후에 우리의 정서를 향하여 전진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정서는 사실 우리의 마음의 가장 중요한 기능중의 하나이고 이 죄가 우리의 생각을 점령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정서를 겨냥하는 것은 정서가 의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서를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고자하는 강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물러남이라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내면의 세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총명이 위협을 받는 지성의 세계로부터 물러남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불순종을 행하고 나서야 그 지점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속에서 이미 일어난 영혼의 물러남이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신앙의 물러남으로 나타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마치 우리의 겉피부의 질병이 있을 때 약을 바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주사를 맞고 내복약을 먹으며 함께 치료해야지만 온전한 치료가 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하게 되어서 그것이 신앙이 미끄러지는 계기라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준비된 미끄러짐이 우리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것을 생각하고 거기서부터 우리들이 치료해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들이 올바른 은혜 안에서의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Ⅱ. 물러난 영혼이 소성하는 길
A. 미끄러진 마음을 생각함
그러면 이렇게 물러난 영혼, 이 물러난 영혼이 오늘 시인이 기도하는 것처럼 영적이 소성을 경험하는 길이 무엇이이겠습니까? 우선 첫째는 미끄러진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은 말했습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고…….’ 라고 했습니다. 회개하기에 앞서서 제일 필요한 것은 최초의 미끄러짐이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있기 전에 이미 그 이전에 의지가 거기에 굴복하는 일이 있고 그 이전에 정서가 이미 죄에 지배되는 일이 있고 그 이전에는 우리의 생각이 온전한 성도의 생각으로부터 이탈되는 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미끄러진 지점이 어디인가를 먼저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제일 마음을 기울여야할 것은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총명에 하나님의 진리가 언제나 아름답게 비취고 그 진리에 대한 인식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정동이 발생하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수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인상으로 우리의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신앙의 세계의 복됨,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많은 분복들을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해나 갈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여러분들은 김복남 전도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을 줄 압니다. 저는 12년 전에 들은 강의인데도 오늘 다시 들으면서 참 눈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무엇인가 인생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기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헛된 욕심 속에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정신과 생각에 붙잡히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의해서 뜨거워지는 이러한 최초의 은혜로운 신앙생활, 특별히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전위되어있는 이 올바른 정신의 생활에서 이탈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미끄러진 것은 아직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커다란 잘못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커다란 미끄러짐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생각의 흔들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그래서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은혜를 받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총명에 끊임없이 맺혔던 진리의 아름다운 인상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이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 누구도 알 수 없고 본인은 아마 차근차근 자신의 과거의 달력을 더듬어 가보면 어느 시점쯤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는지 그 시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실패는 앞으로도 여러분들이 반복할 수 있는 실패이기 때문에 그 미끄러진 지점이 어느 지점이었는지, 그 때 여러분들의 마음의 성향이 어땠는지, 그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지 않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영향을 받는 신앙생활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할 때 여러분 주위가 어떤 환경이었고, 여러분 자신의 마음은 어땠고,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들은 예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세밀하게 가능하면 노트에 정리까지 해가면서 분석을 해봐요. 왜냐하면 그 지점이 다음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단이 여러분들을 미끄러뜨리는 지점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새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지만 사단은 새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요. 언제나 우리를 미혹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아주 뚜렷한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에요. 그 때마다 쓰이는 도구가 좀 다를 뿐이지 방식은 언제나 똑같아요. 지금 넘어 미끄러진 그 지점에서 은혜가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바로 그 지점에서 또 미끄러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여러분들이 정리해두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번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충격적으로 은혜를 받고 영적인 소생을 경험하고 나면 다음에는 미끄러진다고 하더라도 태도가 많이 달라질 것이에요. 예전에는 죄를 짓고 불순종하기까지는 여러분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 서서히 자신의 마음이 미끄러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잊어버리고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의 아주 여린 움직임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아, 드디어 시작되었구나!’ 하는 느낌을 갖지 않겠어요? 그 지점이 어디였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이에요. 그게 회개보다 더 급한 것이에요. 그리고 그 때에 은밀한 내 생각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라는 것이에요.
B. 불순종한 죄악을 회개함
그리고 두 번째 해야 할 일이 그렇게 진전된 생각의 미끄러짐이 정서를 지배하고 의지를 장악한 후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었지요. 불순종은 크게 둘로 나눠지지요. 은혜가 있을 때는 능히 행하던 의무를 폐기해버리거나 혹은 은혜가 있을 때는 안하던 일을 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작위의 불순종이거나 혹은 부작위의 불순종이잖아요. 그러니까 행해서 불순종하거나 행하여야할 것을 안 해서 불순종하거나 둘 중의 하나지요.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구체적으로 딱 남아있는 것이에요.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희미하게 남아있을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시편 23편을 강해하면서 그런 비유를 들었지요. 군인이 병사들 세 사람에게 냇가에서 50㎏씩 돌멩이를 주어오라고 했어요. 한 개에 50㎏짜리를 들고 온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서 그것을 주어왔는지 금방 알아요. 그런데 자잘한 공기 돌을 천개쯤 주어서 50㎏를 들고 온 사람은 한 개의 돌멩이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지요. 뒤로 물러난 모든 사람이 50㎏짜리 돌멩이 같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어제 설명하기를 신앙의 물러남은 일반적인 물러남이 있는데 정서가 욕망으로 부유하게 되어서 떠돌면서 아직까지도 정착할 지점을 찾지 못했을 때에는 바로 이렇게 생각도 안 나는 자잘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완고하게 거스르면서 사는 것이에요. 그것이 어느 지점을 찾으면 그 쪽으로 욕망이 확 쏠리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이죠.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넘어진 지점이 뚜렷한 사람은 회개할 것도 분명해요. 그러나 문제는 그 지점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항상 의롭다고 생각해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그리고 내가 왜 죄인인가? 물론 내가 회심했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그렇게 뼈저리게 회개할 것이 무엇이 있나?’ 그러니까 자기가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자기가 잘못 신앙생활해온 것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하나의 심리적인 현상이지 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환경이 좀 좋아지고 모든 것들이 다 잘 풀리면 다시 내 신앙은 저절로 뜨거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생활을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환란과 시련이 우리 속에 있는 주님 사랑의 불을 끌 수 있었습니까?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고 노래했습니다. 같은 시를 지은 시인은 오히려 말하기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시련과 환란 속에서는 ‘오히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런 지은 죄도 없고 특별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먼저 믿지 말고 즉 다시 말해서 자기가 지은 죄가 분명하게 생각나는 사람은 거기서부터 회개하여야 할 것이고 이것이 분명하게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곧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많이 물러나서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되어서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이 무기력해진 영혼의 상태는 내가 아직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나의 마음과 생각과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라고 결론부터 내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전도사 때에 섬기던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기도를 아주 많이 하는 권사님이 한분 계셨어요. 70이 넘으신 분인데 아주 정정하셔서 수련회에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밥을 해주시고 그랬어요.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가서 이분이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면 한 한 시간 반 또는 두 시간씩 하는데 한 문장이에요. ‘했고, 했으면, 했는데, 했으나, 했지,’ 그래서 계속 이어져요. 그런데 하여튼 그렇게 그 교회에서 평신도들 중에서 그렇게 그분처럼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이 많지 않았어요. 늘 기도했어요. 어느 날은 주일날 교회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데 이 권사님이 나의 손을 꽉 잡더니 얘기 좀 하재요. 그래서 정신도 또렷하시고 카랑카랑하시죠. 그러더니 계단 난간에서 붙잡더니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전도사님!’ ‘네 권사님.’ ‘우리가 너무 냉랭하지요?’ ‘왜요?’ ‘저는 소원이 있어요. 온 교인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주 불같이 뜨거워지도록 은혜를 받는 게 소원이에요. 우리 예배당에 온 교인들의 열렬한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소원입니다.’ 그러시더니 그분이 제가 개척교회를 한다고 하니까 어느 날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찾아오셨어요. 그 비닐봉지가 무엇인가 했더니 소고기를 한 근을 사서 신문지에 싸서 들고 오신 것이에요. 그러더니 수요예배가 끝났는데 ‘전도사님! 나하고 얘기 좀 합시다.’ 그래서 사무실에 들어가서 얘기를 했는데 ‘전도사님 제가 최근에 아주 놀라운 일을 경험했어요.’ ‘뭐예요? 권사님!’ 이분은 공부도 많이 못하셔서 말도 어눌하셔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기도하는데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까 자기는 여태까지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서 일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보여주시더라는 것이에요. ‘어떻게 보여주셨어요?’ ‘그러니까 전도사님 왜 우리가 (그 동네에는 판잣집들이 많았어요.) 아침에 새벽이 일찍 일어나서 펄럭거리고 이불을 개잖아요?’ ‘그렇죠.’ ‘그때는 우리가 뭣도 모르고 이불을 막 개다가 커튼을 열면 햇볕이 확 들어올 때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뿌연 먼지가 일어나잖아요?’ ‘그렇죠.’ ‘제가 예전에는 커튼을 치고 신앙생활을 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커튼을 살짝 벗기시니까 빛이 확 들어오면서 전에는 내게 그런 죄가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크고 작은 많은 죄들이 떠오르는데 감당할 수없이 하나님이 나를 회개시키셔요.’ 그게 신학적으로 성령의 조명이에요. 그 간증을 하시고 권사님이 몇 달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 소식을 듣고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장례식에 제가 갔겠지요.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제가 생각한 것이 ‘아, 하나님이 이 자매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당신께로 부르시기 직전에 신실하게 주님을 의지하면서 안나처럼 신앙생활 했지만 한번 자신의 영혼에 밝혀지지 않은 먼지와 같은 죄들을 성령의 조명으로 쫙 비춰주셔서 간절히 회개하는 가운데 정말 비단 같은 영혼으로, 세모시 같은 영혼으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가게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이제 분명해졌지요.
영혼의 깊은 물러감은 있지만 원인을 모르겠다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이 기도를 해야 해요. ‘하나님 나는 내안에 있는 많은 죄와 악들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앙이 뒤로 많이 물러났고 영혼은 진토에 붙은 것 같으며 기도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회심 때에 간직했던 주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뜨거운 사랑은 식었습니다. 성경은 죄 이외에 아무것도 이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하나님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바라보시는 대로 나도 나를 볼 수 있도록 성령에 비춰주시옵소서.’ 이 기도도 응답되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도에요. 왜냐하면 돈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주어서는 안 될 때도 있지만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정결해지겠다는데 하나님이 왜 안주시겠어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면 그러면 양심의 빛이 들어오면서 그러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두 번째에요. 그러므로 회개하라. 이거에요. 첫 번째는 생각하라. 두 번째는 회개하라.
C. 잃어버린 경건을 실천함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러고 나서 세 번째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잃어버린 경건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최초의 우리의 미끄러짐은 결국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이미 의지가 굴복되었고 정서가 무르익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생각이 미혹된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런 것들을 예방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한편으로는 산출할 수밖에 없는 죄를 억제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미끄러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시는 역할을 해요.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간접적인 은혜의 도구일 뿐이에요. 직접적인 은혜의 도구는 경건생활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생활로 돌아가야 되요. 만약에 생각이 죄에 의해서 잠깐 미혹당해서 미끄러졌다고 하더라고 여러분들이 계속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생활이 몸에 배이고 그리고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했다면 오늘은 잠시 생각이 미끄러져서 성경을 읽으며 은혜를 못 받아도 내일은 어제 그렇게 마음의 미끄러진 것을 발견하면서 뉘우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주실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미끄러짐이 계속 가속이 붙으면서 결국은 그나마 읽던 성경도 집어치우고 교리묵상이니 새벽기도니 다 하나씩 접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을 점령한 죄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다음 단계로 다음 단계로 그 다음 단계로 계속 진전될 수 있던 것이에요.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기도생활이지요. 설령 죄가 우리의 생각을 미끄러지게 한 다음 성공을 해서 어느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 와서 우리에게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켰다고 칩시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시인 다윗도 고백하기를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인격적인 주님을 경험하면서 진리를 아는 깊이가 더해갈수록 자기 안에는 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을 향한 죄와 그리고 악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우리의 마음에 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섭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감사하기도 한 것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자기의 논설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도록 허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 자신의 영광을 아주 찬란하게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셨다.’ 고 말했습니다. 밤하늘에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대낮에 쐈더라면 얼마나 시시하겠어요. 여러분 그 폭죽이 얼마나 비싼지 압니까? 그게 공중에 터져서 여러분들이 볼 때 ‘아’ 하고 찬탄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그 크고 예쁜 것 있잖아요. 한방에 이백만원이래요. 여러분 표정이 ‘아이 그 돈을 나나 주지…….’ 그래서 그 불꽃놀이를 하루 밤새도록 쏘면 몇 억 원어치를 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게 팡하고 터질 때 밤하늘이니까 그렇게 예쁘게 빛나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그것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인데 그 사랑을 우리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올바로 감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느냐하면 사실 아담도 그것을 못했어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도 그것을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불순종에 의해서 죄가 들어왔지만 그 죄인을 구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찬란하게 그것을 드러내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설령 우리들이 죄에 의해서 생각이 지배당하고 우리 정서까지 공격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생활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앞에 바로 그렇게 침투당한 그 다음날 혹은 그 순간에라도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토해놓을 수 있었을 것이에요. 어린아이들이 먹어서는 안 될 것을 잘못 먹었을 때 제일 먼저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붙들고 등을 치면서 토하게 하잖아요. 기도는 그런 것들을 토하게 만들어주는 힘인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하죠?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기도에서 물러나기 시작해요.
특히 여러분들 여기에서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을 한번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해보세요. 신앙이 어렸을 때든지 오래 예수를 믿었든지 간에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지점이 틀리는 게 아니라 항상 똑같아요. 처음 예수를 믿고 신앙이 식은 사람도 더듬어 올라가보면 말씀에 은혜를 안 받고 기도를 안 한 것이에요. ‘오래도록 예수를 믿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뒤로 물러나갔는데 왜 침체에 빠졌나? 그 사람은 그래도 오래된 신자니까 이유가 틀리겠지!’ 무슨 이유가 틀려요. 똑같아요. 그것도 똑같이 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말씀이 맛있게 감격하며 다가오다가 그 은혜가 사라지고 그리고 그렇게 열렬히 눈물로 기도하던 그 마음이 변질되면서 기도의 등불이 꺼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마찬가지에요. 산을 올라가는데 일부 능선쯤 올라가다가 시동 꺼진 차하고 구부 능선쯤 올라가다 시동 꺼진 차하고 어느 차가 더 빨리 내려가겠어요? 그러니까 오래 믿은 사람들이 엔진이 꺼지면 대형사고가 나는 것이에요. 오늘 믿기 시작한 사람이 방금 회심했는데 일주일 뒤에 침체에 빠졌다면 조용히 교회를 떠나요. 그런데 이것은 대형트럭이에요. 구부능선까지 올라갔어요. 그 뒤에 수많은 조무래기 차들까지 따라서 올라가고 있는데 엔진이 뚝 꺼지고 20톤 트럭이 거꾸로 내려온다고 생각해봐요. 깨지고 터지고 온갖 난리를 치는 것이지요.
그게 결국은 잃어버린 경건생활의 실천으로 돌아가야 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수련회 백번 해봐야 소용없어요. ‘아, 그렇구나! 아 그런 것이로구나! 아, 내가 그래서 병에 걸렸구나! 그래서 내 영혼이 죽었구나! 아, 이제는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전에는 모르고 괴로운데 이제는 알고 괴롭지요. 해결의 길은 돌아가야 되요. 그래서 다시 말씀에 은혜를 받고 다시 열렬하게 기도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이에요. ‘아이 목사님!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핑계가 있겠지만 그것은 이틀 동안에 다 정리했잖아요. 그 핑계를 대서 내가 아무리 여러분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당신 말이 옳다고 해서 집에 갔을 때에 영혼이 소성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의미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가 된 사람들은 사람에게 자꾸 인정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 이제 그 때부터 우리는 중생하고 회심한 영혼으로서 성화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 성화의 길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끊임없이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성화는 계속 되는 것이죠. 그 대신 불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은혜 없이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 마치 애들이 성장 판에 이상이 생겨서 못 자라는 것처럼 그렇게 되요. 그렇지만 않으면 우리는 계속 영적으로 점점 더 성화되게 되어있어요.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 대신 불순종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성화시키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에 거스르는 삶을 살지 말아야하는 것이에요.
Ⅲ. 물러난 영혼이 성장하는 길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는 계속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성장해야하는 것이에요. 지금 방금 생각이 났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에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지요? 저는 옛날에 가스차를 타고 다녔어요. 가스차가 기름 값이 좀 덜 들어서 한참 타고 다녔는데 이게 문제가 뭐냐 하면 언덕으로 올라갈 때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언덕이 높은 게 나오면 못 올라가요. 그래서 파워를 틀고 그냥 가스를 많이 쏟아 부으면서 올라가면 헉헉대면서 힘들게 올라가요. 그러니 멈추면 큰일 나요. 너무나 가파르기 때문에 기를 쓰더라도 올라가야 해요.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의 삶이 그런 것이에요. 신앙생활에 스톱이라는 것은 없어요. 스톱하는 그 순간에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고 아멘, 아멘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고 잠시 전 까기 생각이 죄에 의해서 혼란되고 마음도 잠시 빼앗겼지만 다시 가다듬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기도하면서 노래하는 것이죠.
(찬양)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러면 다시 은혜가 회복 되요. 그리고 계속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길이 없어요. 잠시 쉬었다갈 수 없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우리의 믿음의 길을 뭐라고 그랬어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러면서 올라가야 해요. 조금씩 올라가도 괜찮아요. 그런데 계속 올라가야 해요. 문제는 시동이 꺼지는 게 문제에요. 시동이 꺼지면 확 내려가요. 신앙이 올라갈 때는 힘겹게 올라가는데 내려갈 때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총알같이 내려가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은혜 받은 사람의 마음이 죄에 식을 때 그것은 마치 불에 달군 쇠가 식을 때 그게 예전보다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강퍅해집니다.’ 그것이 수없이 많이 은혜를 받고 물러난 사람들을 다루었던 부흥사로서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화의 생활에 휴게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없어요. 외길의 비탈길이에요. 시동을 끄면 바로 내려가는 것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여러분 자신들이 증명해주잖아요. 그래서 쭉 은혜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성화되었는데 어느 순간에 마음의 스위치를 딱 끄고 아무 영향을 안 받고 기도의 스위치를 딱 끄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딱 끊어졌을 때 그곳에 가만히 있었어요?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 순간에 바로 미끄럼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리고 홀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뒤따라오는 크고 작은 차들을 들이받으면서 내려오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어디 갔는지 없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수색대를 보내서 찾아보면 저기 개골창에 빠졌어요.
(찬양)손들고 옵니다.
그리고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도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게 왜 말로 할 때 못 깨닫고……. 이렇게 물러난 영혼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끊임없는 영적인 성장이에요. 하나님은 예수 믿은 다음에 여러분들이 부자 되는 것을 싫어하시지는 않지만 그게 여러분들을 구원해놓은 목표는 아니에요. 김복남 전도사님이 말하기를 어느 학생이 회심하더니 일등만 계속했다고 하는데 모든 집의 아이들이 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에 회심했다고 일등만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엄마, 아빠가 신앙생활 잘한 사람이 모두 700억씩 버는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분명하게 가지고 계신 뜻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자라가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장성한 사람처럼 자라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오늘도 엘리베이터를 타니까 요만한 아이가 ‘엄마 뭐 좀 줘’ 얼마나 귀여워요. ‘엄마 나도 마시는 것 먹을래. 나도 줘.’ 그런데 40살 먹은 장가도 안간 아들이 그래 봐요. ‘엄마 나도 쭈쭈바 사줘 저 아래에서 판단 말이야 유치부 애들은 다 먹는데…….’ 소름이 돋지 않겠어요? 장가도 가기 전에 치매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게 그때에 맞게끔 아름다우려면 성장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A. 중생과 변화
그런데 이런 영적 성장의 토대를 하나님께서 중생과 회심에서 놓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중생과 변화의 관계를 우리들이 살펴보게 되는데 이게 중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살아난 그 영혼이 하나님을 알아보고 제일 먼저 꼼지락 거리는 것이 회심이에요.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중생이 먼저 일어나고 회심이 오는 것이죠. 그것은 논리적인 순서지요. 그 회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믿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전에 자기를 믿던 삶, 자기를 주인 삼았던 삶을 포기하고 이제는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르게 되는 것이에요. 이때에 영혼이 거듭날 때에 영혼의 기능과 관련해서 두 가지의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요.
1. 인식능력의 변화
그 하나는 인식 능력의 변화에요. 인식능력의 변화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전에는 영적인 것들을 전혀 못 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거의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총명이 있지만 그 총명이라는 스크린에 맺히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오관을 통해서 접촉하는 사물들에 대한 인상밖에는 들어오는 게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과장을 하자면 예수를 믿기 전의 인간의 이 정신 상태는 구원받은 성도들 보다는 오히려 동물에 훨씬 더 가까운 그런 삶을 살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인식능력에 변화가 오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새로운 감각이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 감각이 무엇이냐 하면 영혼의 감각이에요. 지성의 감각이에요. 예전에는 눈으로 보는 것만 겨우 볼 수 있었는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보았지요. 뭐냐 하면 말 한마디를 안 해도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말 한마디를 안 해도 저 사람이 나를 짝사랑하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잖아요. 물론 그것도 얼마든지 착각일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그런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중생한 다음에는 뭐가 보이느냐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 보이는 것이에요. 이것을 에드워드 목사님은 New sense 라고 불렀어요. 새로운 감각이 우리의 마음 안에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다른 사람은 못 보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죠. 그런 능력이 주어지니까 이제는 예전에 보던 것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2. 의지능력의 변화
또 하나의 능력의 변화가 있는데 의지능력의 변화가 오는 것이에요. 이것이 새로운 성향이에요. 그게 무슨 성향이냐? 사랑의 성향이에요.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를 미워하게 되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그렇게 일생동안 사랑하고 좋아하던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분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예전의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인 내가 사랑하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나 때문에 죽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때 일평생 손잡고 오던 나와 불신의 관계가 되는 것이에요.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어. 그래 나를 믿을 수 없는 것만큼
(찬양)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사는 것이라
예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그분을 믿고 나를 배반하는 것이에요. 그게 자기 부인의 삶이에요.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이란 말이에요. 그러한 놀라운 변화를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랑은 의지의 변화에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쓴 성경책에서 말하기를 이렇게 말해요.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여 가라. 그 은혜가 바로 사랑이에요. 왜냐하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뭐냐 하면 예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게 가장 빨리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정의를 내리기를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할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라고 했어요. 기독교 교양이라는 책속에서 그는 은혜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를 이렇게 내린 것이죠.
그러니까 자꾸 우리들이 어떤 행위가 없을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행위와 믿음이 분리되면 되느냐고 자꾸 그러는데 분리가 가능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믿음은 은혜 없이 산출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은혜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로 돌아가게 하고 예전에는 그것을 알았어도 못하던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의지의 힘을 주는 것이 은혜인데 그 힘을 주는 방식이 강압이나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사랑을 확 불러일으켜요. 그래서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 그분을 더 사랑하는 사랑, 이 두 가지에서 성장해나가는 것이 이게 성화의 길이고, 신앙의 성장이고, 영적인 성숙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흔들리던 삶이 창조의 목적을 향해서 구속의 계획을 따라서 올곧게 가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B. 영적 성장의 핵심
그럼 이런 영적인 성장은 도대체 핵심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이제 아주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으세요. 영적 성장의 핵심이 무엇이냐? 결국 우리가 뒤로 물러난 것도 이렇게 하나님의 뜻인 지속적인 영적인 성장에서 이탈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들이 물러난 것 아니에요? 또 물러나갔기 때문에 성장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고 아까처럼 쉽게 얘기하면 계속 시동을 끄지 않고 계속 올라갔더라면 안 미끄러졌을 텐데 어느 순간에 시동을 끈 것이에요. 그러니까 미끄러진 것이지요. 그러면 그러한 영적 성장을 우리들이 수없이 이야기를 듣는데 그 영적 성장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1. 인식과 정동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요. 첫째는 인식과 정동이에요. 우리들이 마음이 출렁거리는 감동은 어떤 행동을 하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지요? 그렇지요? 요즘도 그런 사람이 많은지 모르지만 예전에 우리가 전철타고 다닐 때는 항상 밤중이 되면 사람들이 와서 뭐 좀 팔아달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별로 그렇게 신경이 안 쓰여요. 저런 사람들 또 앵벌이 하는 것 아냐? 저것들이 또 돈을 주면 마약을 하거나 술을 먹는 것이 아니야? 저것 봐 비척거리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 사람이 이제 하모니카를 한번 불고 나서 자기 인생살이를 한 3분 동안 읊는 것이죠. 그러면 예전에는 없던 어떤 지식이 우리에게 전달 되요. 그 때 그것이 내려오면서 우리의 마음을 출렁거리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죠. 그 때에 도와주지 말자고 생각했던 사람이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게 되잖아요. 그거잖아요. 대부분의 우리의 호, 불호의 감정들이 그렇게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별로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옆에서 맛있게 비빔국수를 먹는 것을 보면 침이 싹 돌면서 먹으면 굉장히 맛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좀 달라고 젓가락을 들고 가까이 가서 먹는 것이죠.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죠. 제가 지금 이 예화를 들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출렁거리는 정동과 사물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이것이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보면서도 이 두 가지가 나눠지지 않는데 이 사물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가 더 나눠지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지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다고 칩시다. 미끄러진다고 칩시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무엇이 지배당했기 때문이지요? 의지가 지배당했기 때문이지요. 의지 이전에는 감정이 지배당했기 때문이고 그 위로 올라가면 생각이 미끄러져서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러면 정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내가 지금 뒤로 많이 물러가서 하나님 앞에 은혜가 식은 가운데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는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세상 정동이 일어날 것이에요. 세상의 정동들……. 물질을 보면서 일어나는 물욕, 명예를 보면서 일어나는 명예욕, 성적인 욕망 뭐 이런 것들이 출렁거리면서 계속 일어나잖아요. 이것을 내버려두고 계속 출렁거리게 두면 의지는 계속 공격을 받아서 계속 불순종을 하기에 적합한 의지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선한 의지가 점점 악한 의지로 변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기가 아주 쉬워지는 것이에요. 아까 십일조 얘기가 나왔지만 처음에 그 십일조를 한번 떼어먹을 때에 얼마나 두렵고 떨렸어요? 그럴 때가 있었을 것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없었어도 나는 처음 믿을 때 그런 적이 있거든요. 십일조하려고 성경에다 떼어놓았다가 아무래도 써야겠어요. 그래서 봉투를 뜯을 때 마음이 떨려요. ‘거기 너 있었느냐?’ 그렇게는 떨리지 않지만 새로운 기분으로 떨려요. 그리고 몇 달 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원래 안하던 사람도 있는데 하다가 좀 쉬는데 그 사람들 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이렇게 쉬워지는 것이에요. 그러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불순종은 의지의 약함 때문이니까 그 불순종을 치유하려면 의지가 선한 의지가 강해져야겠지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러면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정동이 아니라 은혜의 정동이 많이 일어나면 그 은혜의 정동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의지의 힘이 선한 쪽으로 방향을 바꿀 것이 아니에요? 너무나 분명하잖아요.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자, 그러면 이제 하세요. 다 가르쳐준 대로 하세요. 자 지금부터 10분 동안에 우리가 은혜로운 감동이 우리 안에 출렁거리도록 하는 거예요.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자, 시작! 안되잖아요. 그게 뭐 우리 팔은 우리 마음이 ‘이것 들어’ 그러면 들어요. ‘주먹 쥐어’ 그러면 주먹을 쥐어요. ‘저 사람을 가리켜.’ 그러면 이렇게 가리켜요.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의 명령을 잘 안 들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러잖아요. ‘이상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더러 명하고 발더러 명령하면 즉각, 즉각 순종하는데 마음과 손의 거리보다는 마음과 마음의 거리가 가깝건만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할라치면 그 마음은 저 마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 것이에요. 자 주님을 사랑하는 정동을 계속 펌프질해! 그러면 의자가 강해지고 결국은 불순종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시작. 시작. 시작. 안되잖아요. 왜 안 될까요? 인식이 들어와야지만 출렁거리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조용히 고여 있는 호수 물을 출렁거리게 하려면 돌을 던져야 출렁거리지 가만히 있으면서 출렁거린다고 시작. 시작. 그러면 호수가 ‘바보’ 그래요. ‘나를 움직이게 하려면 돌을 던져 인마.’ 호수가 그렇게 외치는 것이에요. 똑같이 ‘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렁거립시다. 시작.’ 안되잖아요. 돌을 던져야지요. 그게 뭐에요? 그렇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에요. ‘아! 하나님이 그래서 내가 은혜에 미끄러지게 두셨구나! 아 그래서 하나님이 그 때 나를 그렇게 기뻐하셨구나! 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구나! 아멘.’ 할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찬란하게 보이는 것이에요.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이에요. 더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그 하나님의 성품이 역사하는 방식이에요. 더 쉽게 얘기하면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보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죄인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도 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속성이고 나 같은 죄인을 다루시는 그 손길은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이에요. 이 두 가지에 대한 앎이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게 될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던져지는 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풍덩하고 일어나면서 ‘아, 그렇구나!’
(찬양)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러면서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에요. ‘아, 그 좋으신 주님 아, 그런 분이셨구나! 아, 주님!’ 감동하는 것이에요. 이때에 그러지 말라고 해도 이 안에서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찬양)순결한 예수 더 아름다워 참 비교할 것 없도다.
그러면서 막 출렁거리는 것이에요. 잠시 전에 세상의 것들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가 이게 출렁거리면서 힘없는 돛단배 하나가 왔다가 파도가 일어나면서 고꾸라져 파선하듯이 막 털어내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주님을 꼭 붙들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무엇을 통해서 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말씀에 대한 인식과 은혜의 정동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방금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 하나님이 그렇게 아름다우시구나!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죽으셨어! 이봐, 여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쓰여 있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어! 하나님이 이렇게 거룩하신 분이야! 하나님은 이렇게 의로우신 분이야! 하나님은 이렇게 자비로우신분이야! 하나님은 이렇게 긍휼이 많으신 분이야!’ 이런 것을 말씀을 통해서 막 깨달으면서 새벽마다 아침마다 밤마다 막 마음속에서 정동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이게 막 정신없이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에요. 그게 회심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쭉쭉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요.
신앙생활은 연륜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연륜으로 하는 것은 골동품이나 고목이 연륜이지 신앙생활은 아니에요. 죽은 나무에 무슨 연륜이 필요 있어요? 세월이 흘러갈수록 썩는 것이지. 그게 없으면 신앙이 성장 안 돼요. 성장이 안 되는 얘기는 뭐라고 그랬어요? 올라가다가 시동이 꺼지고 계속 내려오는 것의 반복이에요. 이러면서 교회를 오래 다녀요. 그러니까 직분은 올라갈 수도 있고 성경도 많이 배울 수 있겠지만 그게 영적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에요. 돋보기를 쓰고 흰머리가 나는데 기저귀를 차고 젖병물고 누워있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거에요. 그래서 인식과 정동이에요.
2. 지식과 실천
영적성장의 핵심은 뭐냐 하면 이 똑같은 것들이 진전되면서 지식과 실천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그렇게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잖아요. 그러면 자꾸 우리는 설교를 듣다가 우리교회는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가끔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설교를 듣다보면 너무 깊이가 있고 그런데 저는 마지막에 이런 의문이 들어요.’ ‘뭐가요?’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밑에다가 다른 목사님들처럼 적용을 이렇게 달아주시면 안 돼요?’ 뭐 그 이야기도 아주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이것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은혜는(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공식과 같은 것이에요.) 의무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어도 오늘 예수를 믿고 회심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대부분 알아요. 그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그렇게 깨달은 지식을 가지고 그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런 인식과 정동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은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물론 이제 훈련을 잘 시키면 더 잘 실천하겠지요. 환경이 또 너무 나쁘면 실천을 잘 못하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렇게 진리에 대한 인식과 정동을 받게 되면 그러면 이제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에요. 또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에요.
제가 자주 드는 예이지만 남녀가 뜨겁게 사랑을 하게 될 때에 선물 안가지고 오면 죽인다고 해요? 그런데도 그렇게 선물이 주고 싶잖아요. 선물을 받아서 좋아하는 사람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서 주는 자기가 더 즐거워하잖아요. 그게 이 속에 있는 진정한 사랑이에요. 어떤 자매가 나한테 그래요. ‘목사님 저는 아직도 십일조를 못하고 있어요.’ ‘그래요? 왜 그러니?’ ‘제가 계속 선교단체만 다녀서 훈련이 안 되어서 그래요.’ ‘얘야, 훈련이 안된 것이 아니라 은혜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도 은혜 받고 나니까 너무 괴로운 것은 다 드리고 싶은데 무엇이 없어요.
그 유명한 예화가 있잖아요. 어느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선교헌금을 하는데 목사님이 아주 설교를 감동적으로 하고 헌금을 거두는데 그 때는 쟁반 같은 것으로 돈을 거두었는데 쟁반이 이렇게 돌아왔는데 쪼그만 초등학생 아이가 그 쟁반에 올라가서 앉아버리더래요. 그러니까 어른들이 왜 그러느냐고 야단을 쳤지요. 그 대답은 ‘집사님 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요. 나를 드리고 싶어요.’ 그 쟁반을 들고 축복기도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마음이 어린애든 어른이든 똑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3. 체계적인 앎과 삶
영적 성장의 세 번째 핵심은 뭐냐 하면 체계적인 앎과 삶이에요. 체계적인 앎과 그리고 삶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는 것,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가슴에 와 닿는 말이죠. 체계적인 앎과 삶이 필요한 것이죠. 자 보세요. 여러분 어제 제가 두 시간 20분에 걸쳐서 현대 복음주의의 동향에 대해서 쭉 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1/3밖에 못했어요. 그런데 잘 보면 굉장히 세속적이고 이상한 방향으로 기독교신앙을 이끌었던 사람들 중에는 제가 부인할 수 없이 진실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의 연구를 통해 말할 수 있어요. 사심이 없고 정말 신실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잘못된 방향으로 갔어요. 왜 그랬죠? 기독교 신앙을 아는 체계가 없어서 그래요. 체계가 없으면 어떻게 하죠? 팍하고 필이 꽂히는 쪽으로 확 가버리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죠.
한 선교지에서 있었던 일인데 제가 알고 있던 목사님인데 여러 번 만났어요. 너무 신실하셔요. 그리고 벌써 이렇게 은혜가 흘러요. 그래서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만나는 것을 서로 좋아하고 앞으로도 같이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최근에 가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분이 사람을 쓰러뜨리는 신비주의 운동에 뽕하고 간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이 ‘목사님 그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안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마귀의 자식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관계가 다 파괴되었어요. 아마 말해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에요. 그래서 체계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몸에 좋다는 것을 막 먹으면 안 돼요. 그리고 몸에 나쁘다는 것을 절대 안 먹으면 안 돼요. 그것은 어느 의사가 어느 한 시점에서만 이야기한 것이죠. 그렇잖아요. 최근에 논문이 나왔잖아요. 커피가 심장병을 예방하는데 그렇게 좋다고 나오잖아요. 그래서 하루에 한잔 정도는 꼭 마시라고 하잖아요. 언제는 그것이 독약처럼 손도 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또 마시는 것이 좋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죠. 의사는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장점 하나를 봐도 그것에 완전히 꽂히지 않고 인체에 미칠 종합적인 영향을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당연한 것도 의사에게 물어보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육체가 그렇게 미묘하다면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체계적인 지식에 기초해야하고 우리의 모든 체계적인 지식은 반드시 모든 삶으로 나타나야 되요.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지식이에요. 성경책 전체가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는 지식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체계화되어 있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도 여러 곳에서 말하기를 ‘성숙한 신자는 이 세상의 사조, 헛된 이 세상의 지식에 의해서 요동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자의 표.’ 라고 지적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철저히 교리를 배워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에요. 성경을 충분히 읽고 은혜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의 체계를 탄탄하게 배워야하는 것이에요. 그것도 아무데서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그리고 이 청교도들을 통해서 건전하고 아주 깊이 있는 이 신앙적인 교리들을 이 든든한 우리의 참된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되는 뿌리들을 공부해가야 되요. 그리고 이런 일들을 위해서 분투하는 신학자들을 아주 존중하고 그들의 연구를 도와야 해요. 이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었고 힘이었어요. 그리고 무엇인가 혼란스러운 문제가 있으면 선생님들에게 물어보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는 지도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탄탄한 교리의 체계가 있고 그 다음에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왜 우리가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대해서 그 이유와 근거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이때 세상의 사조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집사생활을 하고 권사생활을 하고 장로 생활을 했어도 이상한 책 한권 읽고 나서는 맛이 가고 뿅 가서 필이 꽂혀서 이단적인 교리에 빠지고 신비운동에 빠져서 그렇게 가는 것이에요. 잘못된 것이에요. 미숙해서 그런 것이에요. 탄탄한 신앙의 교리를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 것이에요. 나는 그래도 하는 것만큼 공부를 하면서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항상 내가 하는 말이 나는 지금도 고3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그 신학의 유산들을 보면서 한없이 자랑스러워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죠.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는 이교도가 아니고 기독교인인 것을 무한히 감사했고,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개혁파교인이라는 사실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지금도 생각하면 벅차요.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개혁파 교인이 되게 하셨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벅차요. 그렇게 탄탄하게 체계를 세우는 것이 바로 영적인 성숙이에요. 흔들리지 않는 성숙이라는 것이에요.
Ⅳ. 물러난 영혼이 사는 길
그러면 결론적으로 물러난 영혼이 사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요번 수련회의 대단원의 마지막 결론이에요. 무엇입니까? 다 각설하고 두 가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에 창처럼 꽂을 테니까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요.
A. 말씀을 숙고하라
첫째 말씀을 숙고하라는 것이에요. 말씀을 숙고하라. 거기에서 미끄러진 것이에요.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막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러던 사람들이 마치 굶어죽을 수밖에 없을 때 만나를 내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감사하던 사람들이 (만나라는 이름이 ‘이게 웬 떡이냐’ 라는 뜻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그 만나를 먹으면서 애굽의 고기를 생각하면 안 되고 이 세상에 존재했던 민족들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이 이렇게 친히 먹이신 백성들이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만나를 먹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했어요. ‘에이 씨 만날 맛대가리 없는 맛나야!’ 그러면서 꺼이꺼이 울지요. 왜 울었어요? 고기를 먹고 싶다고 울었잖아요. 거기서부터 변질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첫째 성경을 가까이 하라. 왜냐하면 이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에요. 진수!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둬요.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이다. 그래서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인지 그 성품이 어떻게 행사되는지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개인의 간증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오늘 간증을 들으면서도 이층에서 눈물이 계속 나왔거든요. 아, 정말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다면 성경을 넘길 텐데 그것을 뺨으로 비비면서 침을 발라서 그 성경을 넘기는 광경을 생각해보세요.
성경은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직접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은혜의 정동이 일어나야할 우리의 마음에 던질 크고 좋은 돌멩이가 가득한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에요. 정동은 다 일어나요. 드라마 보다가도 눈물 찍, 콧물 찍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마음이 출렁거리죠. 마음이 출렁거려서 마지막에 무엇을 내놓겠어요? 드라마 작가를 사랑하고 MBC를 사랑하는 것 밖에 더 무엇이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성경의 돌을 던져야하는 것이에요. ‘아, 그것이었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는구나!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통치하시는구나! 아, 하나님 아멘, 아멘.’ 막 출렁거려요.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다. 그런데 이런 진수의 핵심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에요. 예수는 이 아름다움의 극치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진수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아름다움의 극치에요. 왜 예수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극치이신가? 시간이 없어서 짧게 설명 할 테니까 잘 알아들으세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약의 성경을 주셨고 그리고 신약의 성경을 주셨어요.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 주신 그 모든 말씀은 눈에 보이는 말씀은 아니에요. 들리는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이에요.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해석해서 알게 되는 것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긍휼, 자비, 선하심, 능력, 이런 것들을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아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역사하셨으니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이런 성품을 가지고 계시겠구나! 아, 하나님은 참 아름다우신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에게 지키며 살 수 있게 주신 이 율법은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를 짐승처럼 살지 않게 하시고 법도를 따라 살게 하시고 그렇게 살지 않았을 때는 우리를 징벌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아, 하나님은 아름다우시다! 이렇게 생각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간접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에요.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에요. 예전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전에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만 겨우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이에요.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당신 자신이 그대로 받아가지고 오셔서 이것을 시시때때로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다 보여주면 눈이 부실 테니까 이것을 인성에 감춰서 그래서 이것을 인간이 볼 수 있게 끔만 명도를 조절하셔서 그래서 보게 해주신 것이에요.
바리새인을 엄중하게 꾸짖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해주셨어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면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구원받은 백성들을 오류와 그리고 비진리 가운데서 건져내주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자한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발견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에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당신 자신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을 등지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 비참한 삶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스스로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시는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두 눈으로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그 선하신 사랑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후의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이후의 모든 신약의 성도들은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게 될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면서 그 돌멩이가 무수히, 무수히 내 마음의 수면위에 떨어지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정동들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 정동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선교지로, 어떤 사람은 목회자로, 어떤 사람은 한 교회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 긴 세월 동안을 봉사하고 섬기면서 늙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마음이 출렁거려서 주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전선에, 어떤 사람은 후방에, 어떤 사람은 밥 짓는 곳에, 어떤 사람은 군복을 짓는 곳에, 어떤 사람은 방위산업체에, 어떤 사람은 비행기 만드는 곳에, 그렇게 보내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이것에 의해서 정동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핵심이신, 극치이신 그리스도를 매일 매일 만나야 되는 것이에요.
(찬양)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이게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언제나 강조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에요. 나의 목회의 간절한 소원이 나 자신에 대한 것도 있지만 여러분들에 대한 것도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제 저와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주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는 있지 않겠어요. 그게 십년이든지 십오 년 후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청년의 때에 온 사람들이 지금 벌써 중년부인들이 되었거든요. 중년에 온 사람들은 노년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 때 청년 때쯤 온 사람들이 노년이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백발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성경을 읽으며 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찬양)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임종을 맞이할 수 있다면 저는 너무 기쁘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극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리게 될 때에 그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 노회에 목사님 한분이 계신데 이제 은퇴하셔요. 올해나 아마 내년에 은퇴하셔요. 개인적으로 간증을 하셨어요. 새벽에 자는데 꿈을 꾸었어요. 그런 꿈은 별로 안 꾸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가 많이 흐르는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계시더래요.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예배당에 가서 엎드렸는데 은퇴를 앞두셨으니까 칠십이시잖아요. 눈물이 막 쏟아지더래요.
(찬양)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나는 목회를 잘한 것 일까? 그러면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더래요. 그런 정동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우리는 물러날 수 없어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숙고하라.
B. 기도를 실천하라
1. 간절함
마지막으로 기로를 실천하라. 이게 마지막이에요. 기도를 실천하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것이에요. 신앙이 뒤로 물러났다고 해서 기도를 전혀 안합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제 너무 멀리 간 것이고 대부분은 그냥 합니다. 그런데 뭐가 결핍되어 있지요? 간절함이 결핍되어 있어요. 예전에 은혜 생활을 할 때에는 무릎을 꿇으면 수도꼭지처럼 기도의 언어가 막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왜? 사랑의 정동은 수많은 언어를 만들어내요.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생전 외상장부 쓰는 것 이외에는 연필을 안 들던 사람들이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이에요. 분노했을 때에도 수많은 언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기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의 정동이 그쳤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가 안 될 때에는 기도를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마음을 추스르면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음을 출렁거려주셔요.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써야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을 만져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렇게 안 되던 기도가 마음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출렁거리게 해주시면서 언어가 생겨나오기 시작하면서 회개도 나오고, 미끄러진 것에 대한 고백도 나오고, 용서를 비는 마음이 나오고,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간절함이 나오는 것이에요. 나는 이 간절함을 피의 펌프질이라고 해요.
여러분 옛날이 시골에서나 도시에서 펌프질을 해본 사람들이 있지요. 한참 안하다가 물 좀 붓고 펌프질을 하면 뻘건 녹물이 올라와요. 거기서 멈추면 칙하고 다시 펌프물이 다시 빠져 내려가요. 녹물이 올라와도 계속 펌프질을 힘차게 하는 거예요. 힘차게 한 5분을 하면 맑은 물이 확 올라와요.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끼어있는 바르지 않은 생각과 모든 사물이 남긴 그릇된 인상의 찌꺼기들을 길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막 퍼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간절하게 기도를 할 수 있을 때에 끈을 놓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 유명한 이야기를 했잖아요. ‘기도가 됩니까? 그러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안됩니까? 그러니까 기도해야합니다.’ 안되니까 기도를 해야지만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에요. 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 아니니까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계속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2. 지속함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이 간절함이 어느 순간에 와서 한 번씩 두드리고 지나가는 간절함이 되어서는 안 되고 비가 오나 눈이오나 계속되는 지속성이 있어야 해요. 이렇게 될 때에 간절한 기도는 정서의 변화를 가져오지만 지속적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이 마음의 틀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고 은혜에서 멀어지고 이러고 싶어 하는 마음의 틀이었는데 기도를 하면서 이것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리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깨닫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지속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나면 며칠은 열심히 기도를 해요. 그 약발이 그저 짧으면 두주 길면 두 달 정도 가요.
3. 투쟁함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러면 그렇게 하는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투쟁이 없어서 그래요. 그러면 무엇과의 투쟁이냐?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 사이의 투쟁이에요. 여름은 더워서 기도하기 싫고 겨울은 너무 추워서 기도하기 싫고 봄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기도할 시간이 없고 가을은 기온이 딱 좋기 때문에 기도하기에 너무 아까와요. 그래서 결국은 이 마음 안에 있는 이 싫증과 게으름은 다 이것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들어요. 반대로 기도할 마음이 가득하게 되면 봄이면 춥지 않아서 기도하기 좋고 겨울이면 날도 추운에 무엇을 하겠어요? 기도나 하지……. 가을에는 산득산득해서 새벽에 걸어 나오는 시간이 좋아서 기도하고 여름에는 육체의 열을 영혼의 열기로 이겨야 되기 때문에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요.(이열치열) 그래서 이 투쟁이 없어서 그래요. 싸움이 없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은 전투적인 생활이에요. 싸우고 이기고 분투하면서 걸어가는 길이에요.
V. 결론 : 살리시는 하나님
결국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신앙적으로 미끄러져서 진토에 붙은 영혼처럼 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가 보증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버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예수를 버릴 수 없는 것과 똑같아요. 머리이신 그분이 버림을 받을 수 없는데 거기에 붙어있는 지체들인 우리가 어떻게 버림받을 수 있겠어요. 버림받았다는 모든 속삭임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성령으로부터 오는 속삭임이 아니에요. 악마의 속삭임이에요.
오늘도 하나님은 집나간 탕자와 같은 여러분들을 부르셔요. 어제는 무지 속에 미끄러지고 죄에 졌지만 이제 오늘은 다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소생된 영혼으로 깊은 물러감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영혼의 비밀, 그리고 신앙의 비밀스러운 지식들을 진리와 함께 깨닫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2009/08/09, 온가족수련회 저녁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0,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1,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4.나그네의 간절한 소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율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18-20).
성경은 이미 구약에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를 나그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구약에서 조차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들이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면서 이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군인을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우고 전쟁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러나 그 전쟁터가 자기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거기서 전투를 할뿐이지 오늘도 싸우는 병사의 마음속에는 가족들이 있는 고향이 그립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분투합니다. 한순간도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이렇게 분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사랑,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참된 그리움은 그 하늘나라에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 갈 때 우리가 부당하게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겁니다.
시인 역시 비록 우리보다는 한 삼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옳게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러 곳에서 자기는 나그네요 지나가는 과객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과 관련해서 여러 차례 언급을 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는 동안 이 신인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원이 오늘 읽은 성경에서 이렇게 나타납니다.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나에게서 숨기지 마옵소서.’하는 거죠. 이것이 나그네로서 사는 동안에 다윗이 위로를 삼았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나그네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의 위로를 우리 본향과 관련해서 찾지를 않으려고 한다는 것에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싸우기에 적합한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수많은 악들이 믿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불의들이 가득합니다.
여러분, 은혜로운 교회의 공동체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지체들과의 만남을 제외해 놓고 우리들이 악한 이 세상에서 여기가 정말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들이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불의와 유혹거리들이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착한 우리 자아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 하나님을 거스르고 살려고 하고 우리의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는 부패한 성품이 끊임없이 싸움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이세상과 짝하려고 하는 우리의 옛 자아가 이기게 마련입니다. 새로운 성품이 은혜 안에서 이기게 위해서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도와 깨달음, 자기결단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옛 자아가 이기기 위해서는 그저 가만히 살기만 하면 이깁니다. 이렇게 우리의 안팎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있을 뿐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도 이 세상을 후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는 악한 삶을 우리들에게 강요합니다. 이런 속에서 이 세상이 나그네와 같이 나그네의 길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죠. 이런 속에서 우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영적이지 못하다면 우리는 이런 삶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이죠. 적당한 타협이나 그리고 적절한 제 삼의 길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길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악한 주관자들과 함께 대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힘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줘서 이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들지만 우리에게 이길 힘을 주는 성령의 그 충만한 능력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결코 떨어지지 않고 그리고 떨어져 있는 것들은 우리가 신뢰하기 매우 어려운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가 아침 먹고 오전 시간에 이제 현대교회의 흐름들을 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이 신앙의 요점을 굳게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은 살아있는 것 같고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은 그러나 오류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과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굳게 붙들었던 확신이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누군가가 이렇게 나그네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켜켜이 에워싸인 대적들에게 서 자기 자신들을 지키고 지킬 뿐 아니라 이기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할 것이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의 능력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대한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 18~20절 사실에서 최소한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여기서 눈이라는 것은 당연히 지성의 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나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고 마음의 눈으로 그 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지만 비로소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눈이 감겨져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의 눈은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언제나 띄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있으면 수많은 이 세상의 사물들의 정보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온 수많은 사물들의 정보는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어 출렁이는 감정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눈이 떠있고 사물들의 정보가 들어오고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려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향해서 눈이 열렸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그래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들을 보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이한 것이라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서 성경에 복수로 나옵니다. 성경에 기적을 의미하는 단어와 같이 사용된 것이죠. 즉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과 같은 놀라운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죠.
홍해가 갈라졌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뒤웅치는 파도 속에 죽어가던 모든 애굽 사람들이 두려움과 그리고 놀라움에 떨면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비가 내리고 심판에 행해질 때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 롯 얼마나 두려움과 놀라움에 떨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바로를 향하여 애굽에 열대 재앙을 하나님께서 내리셨을 때 그들은 가슴이 먹먹하고 그리고 터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깊은 놀라움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사용하는 단어를 오늘 여기에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런 놀라움을 자아내는 엄청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그 말씀의 진리를 깨달으며 살아온 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수많은 기이한 것들 중에서 지극히 일부 일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합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어서 막 깨닫게 하실 때에는 어떤 때는 이 성경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는 구나라는 느낌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는 기이하고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이 세상에 기이하고 놀라운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연상시키지 못하고 놀라움과 호기심에 대한 만족으로 끝날 때가 많이 있지만 성경 진리 안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그 기이함은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예요. 그 놀랍고 기이함을 보고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진수예요. 하나님이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 진리를 통해서 발견하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대한 큰 지식을 접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안에서 놀랍게 자라가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올 바른 지식을 갖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 전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진리의 책 이예요.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한 자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지혜를 갖게 만들어주고 그렇게 살 힘이 없는 사람에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이죠. 이 속에서 끝임 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 죄를 이기고, 이 세상의 불의를 이기며 굴복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공급받은 사람들은 절대로 또 다른 신비를 찾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신비 자체가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놀라운 신비이기 때문에 더 놀라운 신비를 찾을 마음도 없고 그런 호기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이 눈이 언제나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닫히려고 하기 때문에 끝임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또 한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 예배를 드릴 때,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명하게 그 총명에 맺히고 그것이 그 마음들을 흔들어 놓을 때 여러분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기이한 법을 수없이 발견했어요. 바로 그런 진리의 깨달음 안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여러분들을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였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움직여서 섭리 속에서 우리를 축복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든지, 질병이 낫게 되었다든지,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든지, 자녀들이 좋은 배필을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직접 만지시는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띄어지고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이제껏 우리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리의 깊은 세계 안에서 이제껏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이적들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가슴 깊이 아로 새겨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경험하고 나도 우리가 갑자기 부자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질병이 나은 적도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진리의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그리고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심을, 고난 가운데에서도 나를 지켜 주시는 것, 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긍휼이 여기시고, 지금도 나를 이끌고 계시는 것을 선명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때 밀려오는 마음의 감격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대한 깊은 감동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성을 맑게 하고 이 세상에 붙은 것들을 떨어버리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와서 박힐 수 있도록 우리를 정돈시켜 주는 역할들을 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시편119편 무대의 전체는 시인이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죠. 그런 속에서도 그는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원망하고 그리고 그를 향해 보복을 꿈꾸면서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직 자기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봄으로 거기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을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때는 열어주셨던 마음의 눈,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 자신의 게으름과 영원의 실증으로 닫혀있는 그 마음의 눈을 그것을 하나님께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계명을 나에게서 숨기지 말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계명이라는 것은 계명, 율례, 율법, 이것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뜻으로 쓰입니다만은 약간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비근한 말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응하는 말로써 율례라는 말도 많이 나오고, 규례라는 말도 많이 나오고, 또 여기 나오는 것처럼 또 계명이라는 말도 많이 나옵니다. 거의 비슷한 말이지만은 약간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율례라고 하는 말은 대부분 제사와 관련된 법규들을 가리킨다고 주석가들은 해석을 합니다.
규례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하나님의 율법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규칙들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에 반해서 여기에 나오는 있는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에요. 너는 이렇게 살아라하는 그런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명령이에요. 그것을 보면 이 시인이 나의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것인지의 알기 위한 호기심이나 혹은 지적인 만족을 위한 하나님의 기이한 것을 보여 달고 한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서 이것을 보여 달라고 했던 것을 우리들이 여기서 간파 할 수 있는 것이죠.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은 지성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죄의 속임이 시작되어집니다. 이때의 모든 신자들이 일치하게 은혜가 떨어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가 식었는데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습득하려고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상적인 말씀에 대한 욕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지게 될 때에 여전히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지적인 호기심이고 그리고 이러한 지적인 호기심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말씀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한 개념만을 계속 쌓아가는 그러한 생활을 이어가게끔 만들어 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하겠다 라고 하는 삶을 위한 결단과 요구에서 비롯되는 욕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지적인 호기심이죠. 이것은 자기의 만족을 위한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단시일 내 교리를 많이 빨리 남보다 더 많은 양을 배우고 싶어 하는데, 삶이 동반되는 가운데에 그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가는 것이 가장 건강한 신앙생활의 양식이라는 것이죠.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기를 ‘주의 계명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면 만약에 주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나에게 숨기시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삽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니고 내 눈을 열어달라는 성도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 앞에 항상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의지의 크기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의지의 크기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하나님 앞에 잘 살고 싶고 하나님 앞에 잘 살아드리고자 하는 욕구가 강할수록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 진지해 지고 그리고 많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득 찰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어여쁘게 여기시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이시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도 저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거죠. 그래서 있는 자들에게는 점점 더 많이 주시고 없는 자들은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오늘 시인이 고백하는 봐와 같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향하여 마음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주의 법의 기이한 것들에 마음이 움직이는 정동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그 말씀을 가르쳐주시면 그 뜻대로 살고자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관심사는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을 때나 개인적으로 성경을 대할 때나 항상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의 관심사가 내가 하나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지 주님의 마음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런 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 시인의 내면의 상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주의 율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율례는 율법과 관련이 있는데 어떤 주석가들은 이 율례가 율법의 계명이나 혹은 많은 규례와 차이가 없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이 특별히 제사와 관련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여러분 구약에서 보면 제사에 관한 율법의 기록들을 보면 ‘누가 이 세밀한 것을 다 지킬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품게도 되죠. 오히려 이것을 다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또 그것을 다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율례를 주셨을까? 음식에 관한 수많은 규례들은 또 얼마나 복잡합니까? 이것은 먹을 수도 없고 이것은 만져서도 안 되고 이것을 만지면 며칠 동안 부정해서 성전에도 못 올라가고 이러는 수많은 규례들이 주워지는 것이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섭생학적인 하나님의 배려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구약에 나오는 율법을 따라서 그 음식들을 안 먹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보다 더 타당성이 있는 해석은 광범위한 구약 학자들 의해서 설득되고 있는 해석은 물론 그 중에는 섭생학적 배려도 있겠지 만은 그것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몸에 해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섭생학적인 배려로 그것을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그게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죠.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먹을 것과 사물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래서 오히려 설득받고 있는 이론은 거기에는 그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을 경외하는 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복잡하게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아서 결국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해 온전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하기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규례들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 율례를 이 시인도 모두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뜻을 알고 싶어 했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율례에 대해서 깨닫길 원했습니다. 더 많이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이 그 뜻을 아는 것이 행복이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인은 ‘주의 율례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상합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리고 그를 볼 수 없을 때 우리의 마음이 상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너무 보고 싶을 때 우리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은 그리움을 경험 합니다. 이러한 그리움이야 말로 마음속에 그를 사랑이 있다는 진실한 표시 인 것입니다.
이번에 히말라야 산을 오르다가 순직한 여성 등반가가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결혼을 할 뻔 했대요. 그래서 어느 남자와 선도 보고 좋은 감정을 갖고 사랑하게 되었는데 과연 이 사랑이 참된 것인가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고 백일 동안 유럽으로 여행을 가 산을 타기로 했대요.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약속하기로 백일동안 산을 등반하면서 이 남자가 보고 싶으면 달려와서 결혼하리라. 백일동안 산을 타는데 이 남자가 보고 싶지 안더래요. 그래서 결국은 그 결혼이 무산되고 더 높은 산에 도전을 하다가 순직한 것이죠. 참 애석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사랑은 사랑할 때에는 사랑의 깊이가 얼마인지 잘 몰라요. 그러나 그를 볼 수 없을 때, 만날 수 없을 때, 만질 수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되는 거죠. "(찬양)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나그네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가 있어요. 우리 실제 기도생활에는 어떤 기도는 응답하지만 어떤 기도는 응답이 안 되잖아요. 내 눈에는 그렇게 되는 것이 좋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넓은 시야로, 높은 지혜로 판단 하시기에는 그렇게 안하시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응답이 안 될 때도 많이 있어요. 신앙이 성숙할수록 기도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가지를 고집하기 보다는 그분께 맡기는 성숙한 자세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절대 응답되지 않을리 없는 기도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사오니, 주님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해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마음이 모아지고 그리고 간절해지는 적이 있죠. 은혜가운데 있는 분들은 언제나 그러실 터이고. 은혜가운데 멀어진 분은 가끔 그러실 터이고, 아주 멀어진 분은 아주 가끔 그러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나의 지성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인생의 많은 문제가 있을 때 우리들이 특별 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지만 나의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나의 지성이 오염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지식이 선명하게 맺히게 해달라고 그래서 내 마음이 이 세상에서 헛된 것들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출렁거리게 해달라고 금식하면서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사도 요한이 반모섬에 갇혔을 때에 그의 나이는 구십이 넘어 백 살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천사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명령해 주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지막 때 될 미리 한 계시를 잘 적어서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들었습니다. 그게 늙은 사도요한의 마지막 소명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두루마리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 두루마리에 마지막 때에 될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기 때문에 너는 이것을 볼 수가 없다.’ 이 선포를 들었을 때 이 늙은 사도요한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였습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큰 소리로 방성대곡 하였다고 나옵니다. 고난도 이기고 핍박도 이기면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떠나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요한이 ‘이제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가 없다.’ 이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통고하면서 울었습니다. 백발의 노사도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니.’하면서 통고했고 ‘이 율법을 열어서 이 두루마리를 열어서 마지막 때의 일들을 하나님의 일들을 보여줄 사람이 없다니.’ 그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이외에는 그렇게 통곡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통곡은 단지 원통한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탄원의 통곡이었죠. 그러자 새로운 하나님의 음성이 천사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하늘아래서도 땅에서도 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적합한자가 없지만, 그러나 ‘이새의 집안 다윗의 뿌리에서 나신 어린양이 이 인을 떼기에 합당하니’하며 그리스도께서 인봉을 떼어주셨을 때 마지막의 미리 한 일들이 확 펼쳐졌어요.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심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어제 밤에는 너무 괴로운 일이 많아서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마치 슬픔과 죄만 있는 것처럼 괴로움과 고통이 가득한 나를 본, 마음이 가라앉은 가운데 베갯잇을 적시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무릎을 꿇고 취침기상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조용히 물러가 혼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폅니다. 천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갑니다. 처음에는 어제 밤의 걱정과 근심, 낙심한 것같이 가라앉은 나의 마음, 그리고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외로움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겉 돌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간절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내를 발견하여 물을 마시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마음을 잠그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근심하고 괴로워하고 원망하고 몸부림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베갯잇을 적시던 어젯밤에는 멀게만 느껴지던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신기하게 어제 나를 괴롭게 했던 일들 중에 오늘 아침에 단한가지도 해결되었단 소식이 들어온 적이 없는데 혼란하던 마음은 평정을 찾고 근심 속에 아파하던 마음은 위로를 얻고 두려움 속에 떨던 마음은 담대해 지기 시작합니다. “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을 꼭 붙들고 살아갈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폭풍우 흑암 속을 지나도 그 폭풍과 어둠보다는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때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지금 미끄러진 사람들 있죠? 내가 일으켜 세울 수 있어. 많죠. 그런 가운데서 사람을 향한 원망,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 수없이 마음에 들어와 있는데 그게 자기 영혼을 죽이는 거지, 아무 도움이 안돼. 무얼 잃어버렸는지 기억해 보세요. 그게 미끄러진 사람들이 많네. 그런 미끄러진 처지에서 예전에 있었던 어떤 것들이 없어.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붙들고 조용히 물러가 있는 시간이 없어진 거예요. 조용히 물러가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면하고 세상도 얻고 나도 얻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해. 성경읽기가 그렇고 테입을 듣든지,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이러면서 방해받지 않고 그 말씀이 자신 속에 주~욱 들어와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대하면 우리가 말씀을 탐구하는 것 같지만 더 깊이 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파헤치고 탐구하는 그렇게 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은 강력한 증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 때 비로소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겨요. 눈에는 아무 증거 보이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생기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이것이 마음 세계라는 거예요. 이것을 사단이 파괴하니 죄가 이것을 부숴나가니 그렇게 부수고 들어와도 자기가 심각한 도전을 받는 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사모해야 되요. 그래서 홀로 물러나가 앉은 시간을 꼭 가져야 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가요. 그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미끄러지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물러간 신앙을 하는 것도 제일 먼저 그것을 통해서 회복되는 거예요. 근심걱정 한 번에 물러가지 않아요. 마음의 욕망 한 번에 물러가지 않아요. 마음 안에 있는 불신앙 한 번에 물러가지 않아요. 내버려두고 제일 먼저 여기부터 청소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서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면서 그런 은혜의 수단들이 우리 교회에는 얼마나 많아요. 손만 펴면 성경, 손만 펴면 설교, 손만 펴면 교리 묵상집, 손만 펴면 경건서적 수 없이 많아요. 그중에 하나라도 붙들고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한적한곳에서 물러나서 말씀을 접하면 여기에서 물러난 자들이 물러난 자들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변화시켜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도 한때는 이렇게 내 눈을 열어달라고,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님의 뜻대로 너무 살고 싶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만 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상하였고 주님을 더 많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인해 하나님 앞에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마음은 이 진리로부터 너무 많이 떠났습니다. 식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함께 식어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디서 미끄러졌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오늘 찾아와주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옵소서. 다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그렇게 해주시옵소서.”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 (2009/08/09, 온가족수련회 저녁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0,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2009/08/11, 온가족수련회 새벽집회)
5.생명의 근원을 지킴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0-23).
이 지혜자는 아마도 인생의 말년이 되겠죠? 자기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지키면서 살지를 상세히 기록하며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녀에게 가르치기를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여라.” 지시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발견되면 하나님의 그 말씀을 그러면서 그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고 그것을 잘 지키는 그것이 바로 심지어 육체의 건강까지 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성경구절이 “이제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이거죠.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라. 이것이 우리 밖에 있는 거라면, 네 마음을 잘 지켜라 이것은 안에 있는 거예요. 이 두 가지를 온전하게 잘 이루어질 때 그때 우리가 물러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레브, 혹은 레브아브’ 단어에요. 구약성경에서는 아직 히브리사람들이 인간의 정신의 기능이나 영혼의 여러 가지 작용에 대해서 세분해서 나눠지는 가운데 각각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브’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서 거의 모두 마음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성을 가르칠 때도 있고, 감정을 가르칠 때도 있고, 또 마음을 가르칠 때도 있고, 이해의 작용을 가르칠 때도 있고, 오성을 가르칠 때도 있고, 총명을 가르칠 때도 있고 우리의 영혼의 기능 마음의 많은 작용들을 가르치는 많은 단어를, 많은 의미로 ‘레브’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하기를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것은 영적생명이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있잖습니까,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들이 늘 살아있습니다. 그 육체의 살아있는 기운으로 그것을 우리의 온 지체를 움직여서 말도하고 행동도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또 육체의 힘은 정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너무 피곤하면 정신의 활동이 저해되고 심지어 며칠 동안 잠을 안재우고 육신의 힘이 사라지게 되면 거의 생각이 멈출 정도로 그렇게 육체는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체의 힘이 우리의 육체의 지체뿐 아니라 정신에 까지 영향을 주는데 똑같이 또 이러한 힘이 우리의 정신에 있어서 육체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지치고 힘이 없는데 정신이 새롭게 되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은 육체에도 힘이 솟습니다. 아프고 그리고 피곤하다가도 아주 기쁜 소식이 들려올 때 우리의 육체는 새 힘이 솟게 되죠. 그래서 육체의 생명이 영혼에 영향을 주고 영혼의 생명이 육체에도 영향을 주는 것에요. 이 인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아주 신비스러운 존재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길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이 생명이라는 것은 결국 영적인 생명이고 이 생명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되어지는 영적인 힘을 가리키는 거예요. 생명은 무한한 힘이에요. 그래서 이 무한한 힘이 우리의 영혼을 속에서 영혼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게 되는데 이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거죠. 우리 자신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흘러오는 것이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도 살고 선한 사람도 살아요. 그러나 영혼의 생명은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가운데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공급되는 거예요.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영적인 생명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영적인 생명이 공급되는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계획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들이 마음으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저는 스포츠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체조, 특히 리듬체조예요. 어린선수들이 신기하게 여우처럼 몇 바퀴를 돌고 돌면은 우리가 그렇게 돌면은 어지러워서 쓰러질 거예요. 여러분도 오늘 집에 가서 흉내를 내보세요. 그러면 틀림없이 그 다음날 허리를 삐어서 한의원을 간다든지 뭐 어떻게 되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하고 싶은 모든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우리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야만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는 거죠. 아무리 어렵다할지라도 정신일도면 하사불성이다. 내가 정신을 집중하고 온 마음 내서 죽을 각오로 하면 못할까? 못하거든요. 안됩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히 훈련이 되어서 그런 리듬체조의 연기를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을 때 그것이 가능해 지는 거죠. 우리의 육체의 대부분의 특별한 특기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가 이러하다면 똑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생활을 보면서 특히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누가 참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벌컥 마음이 솟구쳐서 여러분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안들겠어요? 그런데 해봐야 되나? 해봐야 되나? 안되죠. 왜냐하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은 있는데 본데로 행할 수 힘이 없는 것처럼, 보았어도 그것을 행할 육체의 힘이 없으면 못하는 것처럼 똑같이 우리의 정신의 힘도 보았어도 그것을 따라 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이 없으면 우리가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 때는 매주일 교회 나와서 봉사하는게 여러분 힘으로 하는 거라 생각을 합니다.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와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에도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도 여러분 자신이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은혜에서 물러나고 영혼의 깊은 침체가 올 때 그때 우리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예요. ‘내가 교회에 가서 작은 일로 봉사를 하는 것도 알고 보니까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것이 예전에는 내 힘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은혜에서 물러나고 보니까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이런저런 괴로운 일이 있을 때 꾹 참는 것이 내 자연적인 성품이 온유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신앙에서 뒤로 물러나 보니까 이것이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럼 그게 무슨 힘이 였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였단 말이죠. 은혜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은혜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잘 몰라요. 은혜의 힘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요. 그렇게 보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 거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티끌만큼도 살 수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는 이런 질문을 했어요. “왜 하나님은 우리가 때로는 죄에 지고 영혼의 침체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실가?” 이에 대해서 답변을 하면서 자신이 평소에 얼마나 부주의 하게 사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것이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이라도 뒤로 물러가고 영혼의 침체에 빠져 고통을 느끼게 내버려두는 이유다. 모두 내 힘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뒤로 물러가 침체의 빠지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부터 멀어지고 그렇게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들로부터 멀어진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되도록 자기가 미끄러진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반성하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회개하고 뉘우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더 올바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경험적으로 깨우쳐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신지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것을 잃어버리게도 하신다 이런 이야기에요. 만약에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자신이 뒤로 물러가있고 많은 고통 속에 있다가 어제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야겠다하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깨달았다고 하면 여러분 마음속에는 대단한 결심이 섯을 거요. 하나님 만약에 나를 다시 한 번 회복해 주셔서 다시 나의 총명에 진리의 아름다운 말씀들이 새겨지고 그래서 내 마음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이 은혜의 자리로 나를 돌려나 주신다면 하나님 제가 이제는 이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꼭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 고백을 하게 될 거고 그 고백은 영원이 지킬지는 모르지만 예전보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그 결심이 유지될 거요. 왜냐하면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던 그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주 뼈져리게 경험했고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미끄러졌는지를 자기가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꼭 붙들려는 마음의 의지가 예전보다 큰 거죠. 그렇게 하면서 상당한 기간 동안 가지 않겠어요? 그러다 다시 미끄러진다고 하면은 그땐 더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잖아요.
그래서 뒤로 물러갔을 때 영혼의 고통의 크기는 그 이전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에 비례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많이 맡은 사람들에게는 많이 구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 앞에 살게 하시는 거죠.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기계처럼 붙들고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물러갈 때 물러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산다라고 하는 의미가 기계적으로 붙들려 산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늘 찬송한 것처럼 주의 그 사랑에 메어 주의 그 인자에 메어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어요. 우리의 마음을 다 안 지킬 수 있어요. 진리에서 멀어질 수 도 있고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질 수 도 있고 심지어 하나님을 떠날 수 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인자하심의 깊이를 깨닫고 나니까 그리고 그 인자와 사랑에 꽉 붙들려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고 보니까 이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허락된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요. 그게 하나님의 사랑에 메여서 살아가게 되는 거죠. 꼭 붙들려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거죠. 이게 바른 신앙생활인 거예요. 이렇게 붙들려 살 수 있는 그 힘, 그것이 이 생명이에요.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투스는 그래서 말하길, ‘너희의 영혼은 너희 육체의 생명이요. 하나님은 그 생명의 생명이시니라.’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간 존재는 영혼의 힘으로 살고 우리의 영혼은 이 생명의 생명 이신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아가게 되는 거죠. 이것을 여러분에게 잠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자 보십시오. 시련과 고난이 옵니다. 그래서 깊이 낙심이 되고 아무리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보아도 아무 희망이 없어. 몸부림치면서 시련과 고난 혹은 나의 죄 가운데에서 헤어나려해도 마치 깊은 늪 속에서 몸부림치면 몸부림치는 가운데 늪과 자기 몸 사이에 거리가 뜨면서 더 깊이 빠져 들어가듯이 그렇게 깊은 고통 속에 아무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저녁에 눈을 감으면서 아침에는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 거죠. 그래서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낙심되고 그리고 어떤 위로의 말도 내 영혼을 일으킬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그땐 어떤 때일까요. 육체의 힘은 남아있으나 영혼의 생명이 되는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되는 영혼과 마음의 힘이 소진되었기 때문이죠. 그때에 육체의 힘이 많이 남아있어도 도저히 더 이상 살 힘이 없는 거죠. 그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한순간에 놀랍고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줘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채워지면 우리의 모든 어젯밤의 생각과 이 모든 마음이 모두 바뀌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주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대학생 선교회를 일생동안 이끄시던 김준곤 목사님을 아실 거예요. 그분의 당신의 자신의 간증을 하시던 가운데 그 분이 예뻐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일찍 시집을 갔어요. 그래서 다섯 살, 두 살의 어린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암에 걸렸어요. 처음에는 온 가족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시리라.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했는데 결국 죽었어요. 스물아홉 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임종의 광경을 모든 것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딸이 죽었어요. 그 딸은 아버지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존재 인데 그렇게 스물아홉의 나이에 꽃다운 나이에 두 아이나 남겨 놓고 죽으니, 차라리 자신이 죽을 수 있다면 어느 아버지든지 그것을 너무나도 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죽었어요. 가족들이 막 울고 그러는데, 목사님이 “제발 다 나가라, 나 혼자 있게 좀 해다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병상에 홀로 딸이 있고 모두 다 나갔어요. 딸의 손을 꼭 잡으니 벌써 온기가 다 식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말할 수 없는 주최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확 밀려오는 거요. 홀로 그 병실에서 이미 죽은 딸의 손을 꼭 잡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슬픔과 고통에 확 밀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을 부를 수밖에 없죠. 오~주님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꼭 붙들고 있는데, 한순간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 깊은 곳에서 찬양이 들려오더래요.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서 달릴 때 오 오 오 때론 그 일로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그러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아버지의 마음이 이 마음이었겠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그 죽음의 고통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확 밀려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 고난의 대한 찬송이 확 솟아나. 이 하나님의 생명이요. 이 생명은 만약에 우리가 그런 스물아홉 살의 두 아이를 남기고 죽은 딸에 대한 죽음의 기억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고치려고 한다면 이게 가능하겠어요. 맛있는 것을 먹는다고 딸의 생각을 잊어버리겠어요. 돈을 많이 번다고 그 슬픔을 지울 수 있겠어요. 무엇으로도 되지 않죠.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죠. 여러분의 삶의 상황을 다 다를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돈 때문에 고생하고 가정의 불화 때문에 고생하고 또 직장의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건강의 문제 때문에 삶의 위기에서 혹은 죄의 문제로 고통하겠지만, 그 문제가 그렇게 다양하여도 해결책은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자원이 아니라 잠시 그런 것들이 잊어버릴 수 있게는 해주지만 그렇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아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그렇게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겠금 우리가 고갈 되어 있을 때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든지 간에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상황은 다양해도 오직 하나이다. 그 하나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이예요. 영적인 생명이예요.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한거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시인이 그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난다. 이 말은 인간의 마음 자체에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가 역사하는 곳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하는 거죠. 문제가 여기에 있는 거죠. 이 마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 작용하는 곳이기도 하고 즉 하나님이 직접 작용하셔서 우리에게 영혼의 생명을 부어주시는 곳이기도 하고 동시에 죄가 영향을 미쳐서 그 생명을 고갈시키기도 하는 곳이고 이 양자 사이에서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선택하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기도 하는 복잡한 곳이죠. 여기서 우리들의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되는 거죠.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선을 행하고자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 때문에 인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 사람의 마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시면 그러면 그 사람이 선한 것을 행하려고 마음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신앙적으로 물러나갔다가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가 되면 열렬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의 귀를 기울이면서 변화 받을 마음을 갖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고통을 느끼게 해주시고 또 예전에 느꼈던 고통을 못 느끼도록 만들어 주셔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를 어루만져주시는 거죠. 그것도 넒은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인거죠.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안에 역사하게 하신다 하실 때 그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은혜의 작용 그 자체가 우리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지성에 작용할 때 우리의 총명이 깨끗해지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라보게 되지만 죄가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것처럼 은혜도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정서까지도 지배하고 마지막에 우리의 의지까지 지배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우리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산출해 가며 살게 되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결국 우리의 지성과 정서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의지에게 감화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 결단을 내리면 내릴 수 있고 내린 그 결단을 지속적으로 수행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이런 은혜의 힘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해보려고 할 때 늘 실패해요. 그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겸손해지게 되는 거죠. 은혜의 힘이 없이 자신만의 결단으로 결단한 바를 이행할 수 있다면 아마 물러난 자리에서 되돌아온 사람들은 교만해 질 거요. 근데 침체에 빠졌다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겸손해지게 되는 거죠. 왜? 내가 그렇게 악한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런데 그 악한 곳에서 돌이켜 선한 곳으로 돌아오는 이것이 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매 순간 의지하며 살게 해주는 거죠. 영적으로 침체에 빠졌다가 회복이 되고나면 기도생활 열심히 하게 합니다. 말씀생활 열렬히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 자기를 붙들어 줄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한 관계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 인간의 의지는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 인간의 의지가 움직이는 그 의혹을 갖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역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아무리 악한 세상에 떨어졌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이 아무리 악한 상태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선한 것은 선택할 능력은 남아있어요. 문제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남아있지만 선택한 것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힘은 없는 거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게 된 거죠. 물론 더 넓은 견지에서 보면 우리가 선한 것을 선택 한 것도 하나님 없이 우리 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하신 것이죠.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봐야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선한 것을 택하고 악한 것을 택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에게 책임 있다고 말하고 있죠.
비유를 들자면 이런거 거든요. 저는 회심하기 전에 술을 조금 먹었습니다. 그리 썩 좋아하지 않았어요. 포도주 몇 잔정도 먹으면 충분한 주량이었어요. 회심을 하고나서 술을 끊는 건 그리 큰 고통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나마 조금 남았던 술을 먹는 것을 즐겨하던 성향이 모두 사라졌어요. 그래서 술을 안먹으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거다 하는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그러나 내 안에 술을 먹고자 하는 강한 성향이 살아있다면 매순간 그것을 참으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버릇은 왜 생겼겠어요. 오래도록 먹고 익숙해지니까 생겨난거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힘든거죠. 하나님의 은혜는 그래서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놀라운 것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는거죠.
어느 아이엄마가 있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었대요. 이 아이가 아버지가 예수를 안믿었지만 엄마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앤데, 어려서부터 도벽이 심해요. 그래가지고 어디가든지 뭘 훔치는 거요. 그래서 학용품 같은 것은 늘 스스로 부모에게 돈을 받고 그건 자기가 쓰고 자급자족하는 거요. 문방구에 가서 그렇게 가져오는 거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은 그렇게 얻는 거요. 마트에 가서 슬슬 가져오는 거요. 그러니까 엄마는 이 아이가 너무 고통스러운 거요. 그래서 매도 때리고 야단도 치고 겁주기 위해서 경찰서도 데리고 가고 해도 고쳐지지 않는 거요. 그래서 이 엄마가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눈물로 매일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잠자면서 그러면서 ‘너 왜 그러냐?’ 그러니까 ‘엄마 내안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남의 물건만 보면 막 훔치라고 해. 그리고 잘돼.’ 이렇게 정직하게 살던 사람이 뭘 하나 훔치면 꼭 그 사람이 걸려요. 잘하다가 한번 요령피우면 그 사람이 군대에서도 제일 먼저 걸려요. 그러니까 생기대로 살아야 돼. 원래 성실하게 살던 사람은 계속 성실하게 살아야 돼. 계속 훔치는 거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어느 날 봄에 보니까 이 아이가 평화롭게 잠드는데 얼굴로 봐서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야. 그런데 이걸 때려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되니까. 그래서 이 아이를 붙들고 침대머리 아래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엄마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아이의 손등을 적시며 그렇게 기도를 했어요. 그러고 며칠이 지났는데, 어느 날 이 아이가 밤에 일어나더라는 거예요. 이 녀석이 화장실을 가나, 그런데 옷을 주섬주섬 입더래요. 그래서 이 엄마가 너무 놀라서 눈을 뜨고 이 아이를 지켜보는 거예요. 이 녀석이 어디론가 자기 책상으로 가더니 서랍을 열면서 저 속에서 물건들을 이 만큼 꺼내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하면 훔친 거요. 새로운 물건이 발견이 되면 엄마가 틀림없이 훔쳐왔다고 혼내니까. 저 속에 감춘거야. 그래서 그것을 꺼내 걸어나가는 거예요. 창문에서 문을 열고 뭐하나 이렇게 보니까 광으로 들어가더라 삽을 들고 뒷마당으로 가서 땅을 파더니, 그걸 거기다 묻고 꼭꼭 밟고 거기 서서 기도하더라는 거요. 그 후로부터 도벽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이게 누가 한거요? 하나님의 은혜가. 이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 안에서 역사하는 거요. 그래서 항상 우리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선택은 내가 하지만 이 좋은 선택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선택한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선택은 이렇게 이루어졌으나 이것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내게 없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생명을 주시옵소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한 거요.
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거요. 그러니 이 마음이 수시로 공격을 당하는 거요. 그저께 설교를 할 때, 우리의 지성을 감시하는 탑이라면 우리의 이 정서, 우리의 이 마음은 이것은 군대 전체를 지시하는 사령부요. 그러니까 당연히 경계를 서고 있는 보초를 죽인 후에는 어디를 공격하겠어요. 군대에서 쓰레기 청소하는 청소부가 모여 있는 막사를 공격하겠습니까? 수천 명들이 모여 있는 졸병 막사를 공격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모든 나라에서 철저히 심혈을 기울여 양성하는 특수 군인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저격병이에요. 이북에는 이 저격병이 이십 만 명이나 된대요. 이 사람들의 임무가 뭐냐 하면 ‘돌격’ 하면서 그렇게 뛰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총을 들고 절대 눈에 띄지 않을 곳에 배치되어 그리고 망원경으로 세밀히 살피면서 적의 동향을 보면서 지휘관을 찾아내서 그 사람을 죽이는 거요. 그러면 수백 명의 군인들이 있어도 병사가 이삼십 명이 죽는 건 문제가 안돼. 지휘관이 죽으면 부대 자체가 통제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지휘관들만 찾아내서 죽이는 거죠. 그런 저격병을 어느 나라든지 다 기르고 전쟁이 나면 이 저격병들을 요소요소에 전투현장에 배치해서 그래서 사사로운 군인들은 안죽이고 그 지휘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전쟁 때 계급장을 다 띠잖아요. 그래도 가만히 지켜보면 지휘하는 사람이 보이는 거요. 그럼 당연히 죄가 어디를 공격을 하겠어요. 우리의 사령부를 공격하는 거예요. 그래서 참 놀라워요. 시험에 들일이 아닌데 마음이 잘못되면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시험에 확 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하면서 자폭해 버리려는 태도를 갖는 거요. 그런데 시험이 진짜 일어났어. 커다란 머리에 움(?)이 일어날 때 이 마음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거요. 그러면 이 수많은 정보들이 들어올 때 마음에서 떨어내면서 마음을 지키는 거요. 큰 시련이 있을 것 같은데 인내하고 참고 이길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거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의 근원이 우리에게 하는 일이라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만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이 잘 안돼요.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하면 매일매일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필요해요. ‘지킬만한 것보다.’ 번역이 좀 이상하게 되었는데 ‘지킬 가치가 있는 것들이 너희에게는 많이 있단다.’ 그 뜻이에요. 지켜야 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겠어요. 많잖아요. 재물도 지켜야 되겠고 나라도 지켜야 되겠고 또 명예도 지켜야 되겠고 고운 외모도 지켜야 되겠고 그래도 뭐라도 찍어 바르면 좀 천천히 늙잖아요. 그러니 그것도 지켜야지.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만, 그것보다도 네가 힘써서 지켜야 할 것이 있단다. 그게 바로 네 마음이란다.
여기 ‘지킨다’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전쟁할 때, 성을 파수할 때, 성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파수할 때, 또 율법의 말씀을 지킬 때 그럴 때 사용되는 동사가 여기에 쓰여 졌어요. 그러니까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속에서 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철저히 온 마음을 다해서 성벽을 오르는 적군과 치열하게 싸워요. 뜨거운 기름을 위에서 쏟아 붓고 돌멩이를 굴리고 그다음에 불붙은 나무를 던지고 혹은 짚을 던지고 뜨거운 물을 끓여 붓고 하면서 온 힘을 다해 싸워요. 행주산성의 전투, 여러분들은 다 알죠. 여자들까지 치마에다 돌을 담아 날랐다고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잖아요.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싸우는 거죠. “내 안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송을 할 때도 우리의,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깨어나듯이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다가오는 대적들의 싸울 때도 우리 안에 모든 것들이 깨어나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지혜자가 자녀에게 지킬만한 가치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네가 최선을 다해 지킬 것이 있는데 그것이 너의 마음이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요. 그 때 마음을 잘 지켰다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은혜를 받는 기회가 되었을텐데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미끄러졌기 때문에 그 파괴적인 결과가 우리의 마음, 영혼, 우리 지체들의 마음, 교회, 우리의 가정, 삶 속에 확 쏟아져 나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거죠. 여러분들이 어린아이처럼 은혜를 받고 주 앞에 믿음 생활하다 미끄러졌을 때에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서 수시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던 일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여러분들의 지성을 침투해 들어온 죄가 급기야는 여러분들의 정서까지 지배하고 마음 전체를 좌우하는 데까지 가게 된 거죠.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이런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환경의 변화 이런 저런 시련과 고난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마음을 지키지 못 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들에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마음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책임인거죠. 그래서 원망하는 마음과 그 모든 불평을 거두고 하나님 한분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께서 판단하실 때 ‘주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잘못되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죠. 그런 속에서 깊이 뉘우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 우리의 힘으로 수선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고칠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그분이 주신 은혜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매달릴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고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소망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합시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 다시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주시고 그리고 치료해 주시도록 은혜를 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새롭게 되기를 소원하오니, 주여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신앙의 물러남에 관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