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년 주일오전)
설교기간|2019년 02월 10일- 05월 1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20년 2월 4일
목 차
설교프레임
1. 시험을 당할 때 (약 1:1-3) 2019.02.10 주일오전 1
2. 인내하게 하심은(약 1:4) 2015.02.17 주일오전 12
3. 지혜를 구하라(약 1:5) 2019.03.03 주일오전 20
4.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약 1:5) 2019.03.17 주일오전 30
5. 시험을 이기는 믿음(약 1:6-8) 2019.03.24 주일오전 37
6. 인생의 허무함을 알라(약 1:9-11) 2019.03.31 주일오전 44
7. 시험을 이기는 사랑(약 1:12) 2019.04.07 주일오전 52
8. 시험의 원인(약 1:13-15) 2019.04.28. 주일오전 60
9. 시험의 결말(약 1:14-15) 2019.05.05. 주일오전 79
10. 하나님을 기억하라(약 1:16-18) 2019.05.12. 주일오전 89
시험을 이기는 길 2(2019.02.10. 주일오전1)
1.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작은 서신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흩어져 있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흩어진 열두 지파라고 하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유대교적인 표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아마 신약의 책 중 이 야고보서만큼 과연 성경 속에 들어가야 되는지를 의심받았던 책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 작은 서신을 가리켜 지푸라기의 서신이라고 까지 말하였습니다. 믿음 보다는 오히려 행위를 강조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큰 핍박이 있었고, 이 핍박은 교회 안팎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교회에 신자들의 마음에는 커다란 변화가 왔습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못 사용하여 믿음의 핑계를 대면서 윤리적인 생활에서 물러가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 때에 이 야고보 선생은 참된 믿음에 대한 교회의 오해를 바로 잡습니다. 그리고 시험, 지혜, 참된 경건, 경건의 실천, 그리고 사랑, 기도 등에 대해서 다루면서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잡아주고 있습니다.
II. 시험의 보편성
제일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이 거론하는 것은 ‘시험의 보편성’입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여기에서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시험을 당하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고 늘 있을 수 있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신자의 삶에 있어서 시험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 ‘시험’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로 ‘페라스모이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복수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사전적으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사물의 특성이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이 견디는 것입니다. 둘째, 연속적이고 이어지는 질문의 과정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셋째, 어떤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 하는 유혹입니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서는 유혹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도록 견디고 감내해야하는 어떤 상황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과 시련이 아예 발생적으로 처음부터 다르다고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서 시험은 기원이 마귀에게로부터 오는 것이고, 파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이 시험에 떨어질 때 인간은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시련은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창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시험을 견딜 때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에 과연 이 시험과 시련이 그렇게 발생적으로 나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존 오웬 같은 신학자는 시험과 시련이 동일한 상황에 대한 신자의 마음의 적용의 차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나이가 많아 아들을 낳기를 포기한 부부에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아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씨를 통하여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며 그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언약 하십니다. 이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인지 이제 백세에 낳은 그 아들이 장작을 지고 아버지를 따라 갈만한 나이가 되었을 그때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산 채로 죽여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자, 이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아마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아들을 달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주실 때는 언제고 또 가져가시는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 아들인데 이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대항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시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의 복잡한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아브라함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뿐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히브리서에서는 11장에서 우리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을 열거합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쳤던 이 행동을 믿음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낼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구름처럼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별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시험, 시련, 이런 것들이 발생론적으로 다르다기보다는 신자가 그 상황에 직면해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신자는 미끄러져 타락하기도 하고, 또 어떤 신자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삶은 끊임없이 시험과 시련에 잇대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이 살았다는 것 자체가 시험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좋은 환경을 만나면 그것을 잃어버릴까 불안해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상황 속에 있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서 벗어나 보려고 괴로워 몸부림치니 살았다는 것 자체가 시련이 아닌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이처럼 시련으로 혹은 시험으로 둘러싸인 사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시험 당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렇게 시험과 시련으로 가득 찬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험이 지나가고 나면 또 다른 시험은 올 것이고 그대로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하는 결의를 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냇물 속에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물길과 함께 힘없이 떠내려가는 것은 쓰레기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우리가 놓이든지 우리는 인생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할 독립적인 인격체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렇게 마주치면 안 되는 시험과 시련으로 가득 찬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헤쳐 나갈 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시련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요? 제일 먼저 “기뻐하라”라고 말합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말하는데 희랍어 혹은 그리스어 원전에서는 그것을 “모든 기쁨으로 여겨라”입니다. “시련을 모든 기쁨으로 여겨라.” ‘모든 기쁨으로 여긴다’라는 것은 시험 자체가 즐겁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그 계획이 이룰 어떤 나의 삶의 또 다른 꿈 때문에 내가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III. 시험을 당할 때
신자는 늘 시험을 겪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인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시험을 당했다고 낙심하고 미끄러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모든 신자에게 시험이 보편적일까요? 왜 신자는 살아있는 날 동안 끊임없이 시련 혹은 시험을 겪게 되는 것일까요? 은혜가 떨어졌을 때도 시험은 계속 되고, 성령 충만할 때도 시련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성경은 정리합니다.
첫째는 세상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타락하고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자연에는 원래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 완성의 상태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자연 악을 경험하고 인간 속에 들어온 죄는 도덕 악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사랑해야 할 관계가 미워하고 고통 받는 관계로 바뀌고 가장 기대 걸었던 인간관계에 실망하게 되고 상처를 받게 된 것은 세상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신자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안전하고 구원은 완전하지만 상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 안에 있는 죄로 우리 스스로 부패하기 쉽고 스스로 시험에 떨어져 미끄러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시험이 가득 찬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마귀의 대적하는 세력 때문입니다. 신자는 완전한 구원을 받았으나 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시험은 신자 안팎에 질서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마음 안에서 시험은 신자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질서를 공격합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 가지런했던 마음의 질서를 깨뜨리면서 시험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역사합니다. 이때에 당연히 신자의 마음에는 혼란과 고통이 깃들게 됩니다. 신자 밖에 있는 질서에 대한 공격으로도 나타납니다. 시험은 항상 매개하는 사물, 그리고 사물들의 질서와 함께 나타납니다. 그래서 시험을 받을 때는 환경의 변화가 반드시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되는 질서로 공격을 합니다. 편안했던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혼란이 생기고, 고통을 받게 되고, 그리고 풍족했던 환경이 궁핍해지면서 물질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험이 안팎으로 밀려올 때 신자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은 이곳을 ‘깊은 곳’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곳에 빠져 절망적인 웅덩이에 갇힌 처지가 되고, 환경적으로도 깊은 데에 빠져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 당연히 이 모든 시험은 고통을 동반하게 됩니다.
A. 기뻐하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시험 속에서 기뻐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성경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그것을 모든 기쁨으로 여기라”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시험과 시련이 밀려와서 실제로 마음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3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앎이라” 그래서 시험 속에서 우리가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사실은 이 번역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내가 우리 안에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NIV 성경이 번역하는 것처럼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발전시키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모든 기쁨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어 단어 ‘그노스 콘테스’라는 분사인데 ‘인식하다, 깨닫다, 혹은 경험적으로 알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입증, 증명,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누군가에게 세계에서 아주 유명한 명품백을 선물 받았다고 칩시다. 여러분의 관심사는 제일 먼저 ‘이게 진짜 오리지날일까? 혹은 모조품일까?’ 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가방을 샅샅이 뒤져서 상표부터 확인하고, 그 다음에 바느질부터 확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품이라면 바느질 땀을 건너뛰거나 실밥이 빠져있거나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죽의 재질을 만져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죽처럼 위장한 비닐로 명품백을 만들었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죽백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장식을 살펴볼 것입니다. 조잡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흠집은 없는가? 명품이라면 절대 그런 것을 간과하고 제작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도키미온’입니다. 꼼꼼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꼼꼼히, 그렇게 확인해 보는 것, 믿음의 증명이 너희의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해 내는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너희의 인내는 점점 더 발전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좋을 것이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미 완전케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견뎌야 할 과제를 가져다줍니다. 시련을 통해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인내를 점점 더 발전시켜 줍니다. 그러나 시련 자체가 인내를 이룰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립적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인내를 이루고,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과 시련이 고통의 기억만 남깁니다.
시험을 주실 때는 하나님은 그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십니다. 모든 시험을 맞서서 싸워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라고 말합니다. 유혹은 피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시련은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어려움을 만나면서도 미끄러져 죄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뻐하기 위해서는 그 시험이 나에게 허락된 의미를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것과 시련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믿음과 시련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동안 신자는 믿음 생활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단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점점 더 증대시키는데 바로 이 시험 혹은 시련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우리는 인내함에 있어서 자라갑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때든지 우리가 참고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쓰지 않는 물건이지만 외국 사람들이 호두를 까는데 즐겨 사용하는 호두까기가 있습니다. 스크루를 돌리게 되어 있는 나무틀에 호두를 넣고 그리고 핸들을 돌리면 호두가 깨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라고 하는 인간성 안에 참음이라고 한 덕성이 있는데 항상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량을 넘어서면 부서져 버리는 것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이것을 ‘빙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빙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워싸고 있는 삶의 상황의 환경은 우리가 인내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계보다 클까요? 작을까요? 만약에 항상 작다면 우리는 신앙을 가질 필요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항상 우리 앞에 전개된 현실은 우리에게 넉넉히 감당할만하기보다는 버겁고 힘들고 때로는 내가 선 이 자리에서 내가 아니었으면 좋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상황은 우리가 쉽게 그렇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내게 주신 능력으로 바꾸어 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른 능력도 길러야 합니다. 예전에 감당할 수 없었던 그 빙점을 넘어서는 어떤 상황도 넉넉히 감내할 수 있도록 인내의 크기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쓰고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멘탈 자체를 더 강력하게 키워서 어차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자녀들인데도 하나님이 시험을 당하게 하시고, 때로는 시련을 당하게 하십니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누구도 시험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3-14). 이 모든 시험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것 때문에도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랑이 그렇게 완벽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 속에도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굳이 그것이 도덕적인 악을 구성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분량을 약간 초과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인정, 그리고 육정에 대한 집착, 사물에 대한 분수에 넘어서는 적도를 초월하는 그런 바람 같은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상실하고, 이런 것들과의 연결이 끊어질 때 그 사랑의 크기만큼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 드릴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시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도 좋고, 잃어버려도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험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그런 시험을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늘 당하며 살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인내의 크기를 더 크게 하시고, 우리의 멘탈을 단단하게 하시고, 사랑을 증대시키십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리 멘탈로는 세상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자기가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이게 부서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타나는 많은 정신적인 질병들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에 대해서 인간의 눈으로 너무 세상을 낙관하지도 말고, 너무 비관하지도 말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해석하면서 믿음 안에서 어떤 종류의 낙관을 가져야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유리 멘탈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점점 더, 점점 더 연단하여 강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어렵기는 하지만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시련 당하는 현실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며 기뻐할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일체의 오래 참음으로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놀랍게 그리스도 예수와 동행하는데서 오는 영적인 힘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보다 더 큰 인내를 갖게 되고, 그리고 마음은 더욱 더 단단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험과 시련을 믿음으로 감당할 때 그것이 없었더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순전한 믿음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시인이 66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시 66:10). 여기에 ‘단련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광업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은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데 그것을 용광로에 넣어서 뜨거운 풀무불에 달굽니다. 액체가 됩니다. 거기에서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다시 그 은을 덜어냅니다. 차가운 물에서 식힙니다. 다시 용광로 속에 집어넣기를 반복하면서 그 은은 순결한 은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같은 처지에서 또 다른 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누구입니까? 우리는 지금 끊임없이 시험을 피하려고 하고, 그런 시련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는 스스로 불속에 들어가기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시험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요? 시험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정결해진 지성과 양심 속에서 사는 것은 불결한 채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이 시인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불에다가 금속을 녹여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제련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살아있는 사람이 누가 고통 받기를 원하겠습니까? 자기가 익숙해지고 편안한 질서를 벗어나 바라지 않는 힘든 질서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일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시험 속에서 고통 속에서 기뻐하는 것은 인간이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하나가 바로 나와 환경, 그 시험의 정체와 목적을 깨닫게 하는 빛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으로서 지성은 명료하게 되고, 그리고 감춘 것 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가 드러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감당할 수 있고 내 멘탈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과 시련을 인내할 수 있게 하는 어떤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운동을 해보셨죠? 참을 수 있는 데까지 힘들지 않은 데까지 운동을 하고 내버려두면 백날 운동해도 그 운동이 아닙니다.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어떤 사람이 한번 방송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운동한답시고 개 끌고 산책하시죠? 그리고 개 오줌도 몇 번 누이고 왔다 갔다 하시죠. 죄송하지만 미세 먼지를 마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근육이 통증을 느끼면서 고통을 받고 운동이 끝나고 나면 아픕니다. 염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이 치료되고 그 한계를 하나씩 하나씩 넘어가면서 살덩어리가 근육으로 바뀌고, 체지방이 녹아내려 가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넘어설 수 없는 이 한계에서 통증을 느끼는 일 없이는 자신의 체력이 향상되지 않는 것처럼 멘탈도 똑같이 도저히 자기가 견딜 수 없는 그 지점을 넘어서는 것을 견디려고 애쓰는 것을 통해서 이 멘탈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느 한 시점에서 한 번의 상황을 맞이해서 삶이 와르르 무너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7회전까지 압도적으로 상대선수를 리드하며 공격하던 박서가 한 번의 훅에 캠버스에 뻗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멘탈을 신앙 안에서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고난과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이런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시인은 119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B. 이해하라
시험에 관한 지성적인 이해는 단지 이성으로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서도 옵니다. 시련은 어느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종류의 시험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없는 시험은 없습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신자가 시험에 들게 되면 제일 먼저 그 시험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이 지성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빛을 잃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아주 혼란스럽게 얽힌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모든 좋은 것으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회심하기 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가바와타 야스나리에 심취했습니다. 결국 자살을 했지만 그 후로 회심을 한 후에는 특히 목회의 길에 들어서고 난 후에는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소설류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죄송했기 때문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나 미와나미 신서 시리즈들을 애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작가들의 특히 소설가들 작품들을 그 후로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최근 휴일 기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보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한 예닐곱 권을 단숨에 읽어낸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의 작품 세계를 거의 다 알 수 있을 것 같고 새로운 책을 읽지 않아도 그냥 그려집니다. 읽었던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제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책은 『노르웨이 숲』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만 450만부가 팔렸고, 특히 유럽에서 엄청나게 팔렸고, 50개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르웨이 숲』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별로 안 읽어서 『상실의 시대』라고 제목을 갈아치운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원래 제목은 ‘노르웨이 숲’이고 실제 노르웨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이라는 노래에서 테마를 따온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 장을 넘기고 한 장을 거의 읽어갈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계속 울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음악이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 무슨 음악이 가장 좋을까 그리고 무라카미가 좋아했던 곡 중에서 부지런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행히 그 책의 독서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라는 곡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기에는 딱 좋은 음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계속 울었고, 책을 덮었을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책을 적시지는 않았으나 마음에 더 깊은 통곡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숲 이야기를 내용을 여기에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젊은이 몇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대상을 바꾸어 가고, 혹은 사랑 때문에 죽고 혹은 인생의 허무 때문에 죽으면서 각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 사상 이런 거는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는 사상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을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깊은 인상을 받았느냐, 그냥 인간이 근거 없이 그렇게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러나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철저히 소외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그 적나라한 모습을 내가 만난 어떤 작가들 중에서도 생생하게 표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마치 제임스 조이스와 카프카의 문체를 혼합해 놓은 것 같은 그런 묘한 분위기였는데, 어쨌든 그 속에서 노래하는 이야기하는 테마는 현대, 도시, 섹스, 젊음, 소외, 이런 것들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계속 울었던 이유는 나의 회심 직전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회심하기 전에 꼭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 중 아무나 한 사람하고 똑같았습니다. 특히 와다나베 하고 꼭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속으로 말도 되지 않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는 절대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싱싱한 젊음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은 나를 목사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워서 그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미친 듯이 그 책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중의 상당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제가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사람을 그렇게 움직일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읽도록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외되고 근거가 없이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다 앞에 있는 철학자들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처럼 유려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늘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그렇게 살아갔을 사람을 하나님이 목사로 만드셔서 아직도 이 세상에는 그렇게 근거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지만 그 중의 몇 사람이라도 나의 섬김을 통하여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또 한 편으로 침체에 빠져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일까? 내가 묻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싱싱한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그렇게 철저하게 소외되고, 고독하고, 근거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 삶을 정말 살고 싶습니까?’ 라고 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답을 압니다. 거기서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대답할 기력이 없을 때 선택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많은 책들에서 자살은 빼놓을 수 없는 테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기로 돌아갈 수 없는데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버거워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시험을 통해서 종종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밤을 주면 밤을 처음 본 아이는 그냥 굴리며 놀거나 입에 물고 그냥 뱉을 것입니다. 엄마가 그 밤을 깨어서 그래서 삶은 밤을 작은 티스푼으로 긁어서 아기의 입에 넣어줍니다. 그러면 아기는 그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경험하면서 다음부터 밤을 볼 때마다 말은 못해도 엄마 보고 그것을 까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껍질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도 잘 모르는데 시험을 통해서 굉장한 믿음을 가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는 정말 믿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련을 만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믿음을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항상 인내를 배웁니다. 그 인내가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거기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이 시련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과 기쁨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과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때로는 신자들에게 불같은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파괴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시련에 맞서기만 하면 그 시련은 오히려 우리를 연단하여 우리의 믿음을 금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은과 같이 그렇게 고귀하게 만들어 예전보다 존귀한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고, 멘탈이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잃지 않는 지성을 갖게 하십니다.
조상 대대로 칼을 만들며 가업을 이어온 사람이 텔레비전에 출연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실 부엌에서 쓰는 칼 이외에는 별로 칼에 대해서 애착을 갖지 않지만 돈이 있는 사람은 명검을 집에 걸어주면 사악한 기운을 내쫓고, 그리고 집안을 불행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속설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아주 훌륭하게 제작된 검을 거실 벽에 혹은 벽 아래 장식해 두기도 한답니다. 이 사람은 대대로 칼을 만들어 온 집안의 자손이었는데 한 자루의 칼을 만들기 위해 어떤 과정을 겪어야 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금속의 선택입니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금속들을 합해서 합금하여 가장 강력한 강도, 그러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그러한 성질을 가진 금속을 먼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금속을 불에다가 달구어서 눈부실 정도로 붉은 빛이 나는 것을 망치로 두드려서 폅니다. 그렇게 펴진 것을 다시 불속에 넣어 또 다시 눈부시게 밝은 빛이 되도록 붉은 빛이 되면 그 다음에는 접습니다. 그리고 접힌 것을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달구어서 펴고 접기를 2000번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칼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작된 칼은 그것으로 바위를 내려쳐도 바위는 부스러질지언정 칼날에는 손상을 가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제작된 크지 않은 칼 한 자루에 2000만원에 판매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명검처럼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기가 막히게 잘 들지만 한 번의 부딪힘에 이빨이 빠지고 칼이 부러지는 그런 칼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래는 견기도 휘어지거나 부러지지는 않지만 날이 서지 않아서 아무것도 자를 수 없는 칼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잘 들뿐 아니라 무엇에도 부러지거나 이가 빠지지 않는 명검처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수시로 뜨거운 불길 같은 시험 속에, 시련 속에 우리를 담그시고 당신의 말씀의 망치를 두들겨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렇게 지성적으로 시험을 당할 때의 그 의미와 시험과 시련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사랑의 빛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연단하여 참된 사랑, 참된 멘탈리티를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에 자신을 내어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고 눈을 감는 날까지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인생입니다. 삶의 거룩한 기술은 매일매일 그런 시련을 만나는데도 매일매일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장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서 오늘 만나는 시험의 고통이 오늘 살아있는 인생의 기쁨을 앗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거룩한 삶의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누구인지를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시험의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묻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시험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시험은 시험이 아니라 시험에 떨어져 죄에 빠져버린 상태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시험은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이 시험에 든 상태입니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거기에서 미끄러져서 죄에 빠지고 악에 넘어져 버리는 것은 우리가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시험에 들어있는 상태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으로 그 시험의 본질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십시오. 끊임없이 전개되는 모든 인간사 위에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신실하신 주님이십니다. 당신의 모든 주권을 우리의 인생에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을 깊이 신뢰하고 믿으십시오. 그래서 때로는 도저히 내게 일어나는 이 시험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완전히 설명할 수 없을 때에도 내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이 시험과 시련을 이기기만 하면 이 시험과 시련을 당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열매가 내 인격과 삶에 맺히게 되고, 나는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혼란에서 벗어나서 시험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자신을 바르게 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험을 당합니다. 어떤 시험은 우리를 죄에 빠져 미끄러지는 결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시험에 담긴 뜻을 말씀의 빛으로 이해하면 그것을 쉽게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신자는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련이 아니면 줄 수 없는 어떤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어떤 시험에 있든지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 시험에서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헤쳐 나갈 수 있는 말씀의 지혜와 은혜의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나는 매일 기도합니다. 앞으로 한 15주 정도 계속될 이 시리즈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시험에서 벗어나 밝은 은혜의 빛으로 나아오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오히려 그 시련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보다 순결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마음과 양심이 연단을 받아 주님 앞에 깨끗케 되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2.17. 주일오전2)
2. 인내하게 하심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신자의 일생은 크고 작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때로는 시험이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은 불같은 시련을 겪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많은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인내함에 있어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던 사람들이 이런 시험과 인내의 과정을 거친 후에 꽤 큰 시험을 만나도 담대하게 대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II. 인내하게 하심은
A. 온전한 인격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시련의 고통을 겪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의 인내를 자라게 하실까요? 그래서 오늘 생각해볼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련 속에서 인내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그리스어에서 직접 옮겨보면 그 뜻이 다음과 같이 명료해집니다. “인내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다 이루게 하라 이는 네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주신 교훈의 핵심을 생각나게 합니다. 5장에서부터 예수님은 천국 백성의 자질과 그 사람됨, 그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핵심적으로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5:48). 우리가 감히 누구이건데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 구절은 우리에게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그분을 본받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뜻대로 사람다워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련을 통해 신자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목표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인격적인 성숙이고, 두 번째는 완전한 생활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련 속에서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는 것은 첫째로 온전한 인격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시련을 당하면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그 인내 속에서 인격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 ‘온전하고’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텔레이오이’라는 복수인데 이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어른이 되기까지 다 자란’, ‘도덕적으로 성숙한’, ‘신비 종교에 들어간’ 등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인격적으로 어른스러워진’, ‘인격적으로 성숙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시작으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진정한 일을 이루기 시작하십니다. 결혼을 하고도 자녀가 없는 부부는 간절히 자녀 갖기를 원합니다. 드디어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되고 달이 차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자녀가 없을 때 자녀를 갖고 싶어 했던 마음의 소원에서 보면 출산은 목표 달성입니다. 그러나 그 출산과 함께 이제 이 아이를 어떻게 돌보고, 양육하고, 교훈하고, 신앙을 갖게 하고, 선한 덕성을 갖추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경쟁 사회에서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할 것인가 이것은 겨우 시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구원하신 것을 시작으로 또 다른 당신의 궁극적인 계획을 향하여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맏아들은 가장 사려 깊은 자녀이고, 부모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자식이며 부모의 성품을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맏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어 동생들을 돌보게 하시고 조카와 일가들을 돕게 하십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맏아들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끔씩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도 사랑하지만 궁극적으로 여러분들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디서도 하나님 이외에 다른 사람으로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게끔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인격적으로 온전히 성숙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일생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혹은 불같은 시련을 겪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인격을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은 크고 작은 시험과 시련의 연속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시험과 시련, 그 자체 안에는 우리의 인격을 온전하게 하는 어떠한 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수단일 뿐이고, 그 시험에 들었을 때에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매달리며 의지하는 믿음과 시련을 만날 때에 거기서 믿음을 잃지 않으려는 하나님을 붙드는 열렬한 은혜 생활 속에서 우리는 거칠고 모났던 인격이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마땅히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길지는 않지만 그 분이 사셨던 짧은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사람이 누구여야 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실 우리는 구약에 있는 성도들보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이 훨씬 더 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예수를 닮아가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련을 만나고 시험을 당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고 고난이 우리에게 겹쳐오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는 죄와 부패한 성품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마음에 있지만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자 하는 부패한 본성도 우리의 마음에 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많은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이로써 그 고통스러운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을 보다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또 다른 여성을 부러워하듯이 남자들은 아주 강인한 체력을 가진 남자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흐물흐물해서 힘없어 보이는 체격보다는 다부지고 그리고 멋있게 근육으로 다져진 몸을 가진 남자들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운동해야 합니다. 근육이 생기는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운동을 하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고 끝나면 근육은 생기지 않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를 안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개 끌고 슬슬 산책하는 것은 열량은 소모하지만 절대로 강인한 근육이 형성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무거운 유산소 운동만이 아니라 무산소 운동을 하면서 무거운 기구들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 무거운 것을 들고 잡아당기면서 근육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근육이 찢어집니다. 파열됩니다. 찢어진 근육 사이에서 새 살이 돋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치료되면서 살이 되면 또 다른 운동을 통해서 다시 그것이 찢어집니다. 그러면서 찢어진 근육의 새 살이 돋고, 아문 근육이 또 찢어져서 새 살이 돕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군살은 싹 빠져 나가고 근육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고 싶을 때까지만 운동을 하고 그만 두는 것은 열량은 소비할 수 있지만 절대로 근육질의 몸을 갖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인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사람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참고 싶은 데까지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참기 싫은데 참는 것을 통해서 더 도달하고 싶은 더 높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 가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목표를 삼아서 참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다른 몸을 갖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과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단련하심으로써 고통을 겪게 하고, 그 고통 속에서 보다 높은 하나님의 목표를 이해하고 참게 하십니다. 예전에 참을 수 있던 그 수준을 넘을 때 우리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고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참아냅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인내에 있어서 발전을 하게 되고, 그 인내의 발전 속에서 우리의 인격이 점점 선하게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럭저럭 가깝게 지내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기억이 자세히 안 나는데 3대 독자인가 6대 독자인가 그럽니다. 손이 매우 귀한 집 아들인데 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권사님이고 아버지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수리로 중고등부 아이들을 데리고 보조교사로 수련회를 갔습니다. 수영을 워낙 잘하니까 아이들을 배를 타고 건너가고 이 친구는 헤엄을 치며 배를 뒤쫓아 갔습니다. 그런데 건너편에 보트가 도착하고 났는데 따라오던 친구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잠수부를 동원해서 3일을 수색한 끝에 결국은 찾아냈는데 사인은 급성 심장마비였습니다. 그 부모님이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님 못지않게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 애하고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 모임 중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친구들 속에서 최초로 경험한 것입니다. 어제까지 술 먹고 같이 까불고 놀던 그런 친구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거의 멘붕 상태가 됐습니다. 그리고는 수습을 하면서 의견을 모으기를 좋은 친구였으니까 우리가 돈을 모아서 비석이라도 하나 만들어주자. 그리고 네가 비문을 써와라 그래서 저는 비문을 한 10개쯤 써서 보여주었고, 그 중의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셰익스피어 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이용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양수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비석 만드는 집을 찾았습니다. 예쁘고 멋있는 돌은 엄청 비쌌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허접한 돌을 하나 주고 글씨를 주니까 그 글씨를 돌멩이 위에 붙이고 기계로 이 아저씨가 새겨주었습니다. 그렇게 새겨놓고 보니까 다른 비석보다 너무 후집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아저씨 같은 비석인데 이것은 왜 이렇게 보기가 싫어요? 저기 있는 저렇게 예쁜 비석처럼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그랬더니 아저씨 웃으시면서 “청년들, 저거는 되게 비싸.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만드는 비법은 가르쳐 줄게.” 그러면서 둥근 숯돌 두 개와 샌드페이퍼 몇 장을 주면서 둘이 앉아서 계속 갈면 저렇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도 아니고 그때 텔런트를 했던 친구하고 둘이 양수리에서 우물가에 앉아서 아침서부터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그 비석을 갈았습니다. 그래서 둥근 숯돌로 계속 문지르면서 물을 부었습니다. 정말 하루 종일 갈고 마지막에 샌드페이퍼로 문질렀는데 정말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유리처럼 반질반질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가 원래는 구원 받았어도 그런 거친 돌멩이 같은 인격밖에 못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를 고치십니다. 구원 받았지만 그래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에게 부딪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인격의 문제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을 만나게 하시고, 때로는 시련을 숯돌 삼으셔서 우리의 인격을 가시는 것입니다. 연마 하십니다. 마지막에 모두 갈아진 다음에는 빛나고 아름다운 돌이 되었지만 갈리기까지 돌은 살이 깎이는 같은 고통을 겪고, 그리고 살이 갈아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 거친 표면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시련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고, 시험을 당하여 위험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 그리고 구약의 위대한 산맥중의 하나인 다윗,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 정의로웠던 사람 요한, 그리고 탁월한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과 죽기까지 순전한 믿음을 지켰던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도 요한,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이런 시련을 비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붉은 카펫으로 난 길을 걷고 싶고, 꽃길만 산책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사람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꽃길만 걷게 하지 않으시고, 가시밭길을 걷게 하시고 카펫 깔린 길이 아닌 거친 땅을 걸으면서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닮은 온전한 인격체가 되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격이 선하게 변화되어 온전케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 성화된다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날 끝에도 향기를 묻혀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결국은 우리의 그 만남의 열매는 우리의 인격의 깊이, 인격의 품질에 비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복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지혜가 있고, 참된 인간의 행복에 대한 통찰이 있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기회의 본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신앙은 나의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스쳐가는 이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 손에 잡힌 물질과 놀이들은 잠시 우리의 감각을 기쁘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험과 시련 속에서 고통하는 모든 사람들을 오늘도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셨고,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고, 인내를 통해 온전한 인격을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능히 이 시험과 시련을 감당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모든 시험과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한 인격을 갖추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완전한 생활
마지막 두 번째는 완전한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인내를 통해서 우리가 선을 행함에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 ‘구비하여’라고 번역된 ‘홀로클레루이’라고 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원래 전체의, 전부의, 완결된, 완전한, 전적인,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 나와 있는 온전함이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뒤에 있는 완전함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생활에 있어서 흠집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성경을 주신 두 번째의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7절 하반절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위도식하면 자기가 얼마나 갖추어지지 못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물론 잘나가는 친구들 만났을 때 열등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자기가 부족한 것에 대한 통찰은 아닙니다. 그런데 순장이라도, 구역장이라도 한번 해보고 나면 자기가 얼마나 갖추어지지 않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겨보면 아무 선한 일도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기는 그렇게 선한 섬김을 위해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년도 걸리지 않고 석 달이면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정욕대로 사는 데는 육체의 건강과 이 세상의 자원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에게는 없는 많은 선한 자질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삶을 치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의 부족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더 많은 능력과 자질을 주셔서 하나님 섬기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굳센 믿음, 빛나는 지혜, 그리고 반짝이는 창의력,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요동치 않는 신중함, 남에 대한 깊은 배려,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끈질김, 변화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 강한 멘탈, 혼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마음을 모아 한길을 가게 하는 리더십, 그리고 모두들 종잡을 수 없는 위기 속에서 발휘되는 순발력, 그리고 죄와 유혹이 가득한 한복판을 지나가면서 여전히 간직한 순결함, 이런 것들은 본성적으로 우리 안에 원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통해서 새롭게, 새롭게 주실 때에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비하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시련과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시험이 좋은 사람이 없고, 불같은 시련이 신나는 사람 없습니다. 즐겁게 고난 길을 가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로운 것이 좋고, 괴롭지 않은 것이 유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하도록 훈련시키시고,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면서 이러한 자질들을 갖추어 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정처 없이 방향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일생 사는 동안에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가 사람으로 창조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우리는 창조될 때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본분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지음 바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충동적인 삶으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지만 그렇게 해서 온전한 생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마음은 요동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이 출렁거리는 것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출렁거리게 됩니다. 오늘 얻었다 하는 만족도 내일 계속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그리고 오늘 얻은 사람은 또한 그것을 끝까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없고 고통당하기 때문에 괴로운 삶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을 온전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활에 좋은 자질들을 갖추게 하십니다.
우리가 매우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있다고 합시다. 전투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군인들은 그 명령을 받자마자 완전 군장을 하게 되고, 아마 단 하나도 전투에서 필요한 물건 중 빠진 것이 없도록 골고루 갖추어 무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우리의 삶은 전쟁터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전투의 승패는 우연이 없고 아주 인과적으로 명료합니다.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더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 더 많은 장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예전에는 구비하지 못했던 훌륭한 자질들을 갖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선한 일에 헌신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아픈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왜 삽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정말 만족을 줍니까? 무위도식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인생을 갉아 먹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미 예전에 다 해봤던 허무한 삶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반복하려고 합니까?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같은 인간을 어디에 쓰시기 위해서 만드셨는지를 깊이 숙고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기 위한 마음으로 자신이 선한일을 위해 창조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을 부르고 있는 보람있는 일, 가치 있는 선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섬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무릎을 굽혀서, 조금만 수고하고, 아주 조금만 봉사해도 거기서 사람들이 살아나고 구겨졌던 사회와 생활이 올바르게 펴지고, 미움과 복수심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여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호연지기를 주고, 우리의 마음을 광활하게 하고 아름다움에 찬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이 만남은 동시에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훌륭한 친구, 훌륭한 스승, 그리고 훌륭한 이웃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뀌고, 그리고 예전에는 꿈꿀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의 길로 접어드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을 불행에 떨어뜨리고 악에 빠지고, 고통을 겪게 하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왜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누군가를 만나서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그렇게 선한 일에 쓰시기 위해서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어먹기 위해서 직업 활동에 봉사한다는 것은 너무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부르심을 삶의 도처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청년부에 내려가서 간절히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거라, 그리고 돈 봉투 받을 생각 포기하고, 방황하는 그 청소년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목회자가 되라. 그리고 그게 안 되면 학원 선생이라도 되고, 안 되면 과외 선생이라도 되라. 왜냐하면 이제는 애들이 이렇게 살아가면서 주님을 만나고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는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선한 일을 위해서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갖추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면서 이것들을 갖추어 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시험과 이 시련을 당한 사람들은 종종 자기만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고, 아주 어두운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자식을 낳은 부모 중 누가 어린 아이가 어두운 들판에서 홀로 울고 있는데 찾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부모모보다 더 완전한 부모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험을 당할 때 그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불같은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완전한 생활로 이끄셔서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게 하시나니 이 모든 시험들을 반드시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험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엄마의 마음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돌보십니다. 예수를 닮은 선한 인격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구비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이 시험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3.03._주일오전)
3. 지혜를 구하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시험의 연속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험 속에서 미끄러져 죄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시험을 이겨내 보다 더 온전한 신앙을 갖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신자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II. 지혜를 구하라
본문 말씀은 시험과 시련에 관한 교훈을 계속하는 중에 마치 삽입된 내용처럼 등장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혹은 시련을 겪을 때 우리의 소원은 빨리 그 상황이 종식되고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구도 기도 없이는 시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했을 때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시험 당했을 때 왜 그렇게 지혜가 가장 필요할까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시험과 마음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A. 시험과 마음
인간은 모두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의 사령탑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안으로는 끊임없는 상상에 의해서 창의적인 생각으로 움직이게 되고, 밖으로는 외부 환경이 변함에 따라 마음의 물결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별히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삶의 상황과 주관적인 인간의 마음이 결합할 때에 신자의 영혼에 위험한 상황이 됩니다. 만약 어떤 변화된 삶의 상황이 그 사람의 마음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 강물과 같은 평안이 마음에 차고 넘칩니다. 그 와중에 어떤 나쁘고 힘든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 워낙 탁월해서 그 상황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그것은 시험이 아닙니다.
신자가 시험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공격을 받는 것은 신자의 생각입니다. 신자가 시험을 당할 때 실제적으로 그는 두 가지 어려움을 함께 겪습니다. 첫째는 환경의 변화입니다. 이제껏 익숙하고 편안해져 있는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으로 인해 요동칩니다. 삶의 상황이 바뀌거나, 인간관계가 깨지거나, 소유하고 있던 물질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질병을 얻게 되는 등 다양한 인간사에 의해서 변화된 환경을 맞이하고 여기에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때 몸과 마음은 고도의 에너지들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런 에너지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때 어려움은 가중됩니다. 둘째는 영혼의 혼란입니다. 영혼은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에 의해서 조율되어 있을 때에 생각과 감정, 의지 사이에는 아주 놀라운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고 집에 두었던 기타를 다락에서 꺼내어서 피크로 한번 두들기면 아주 듣기 싫은 소리가 나지만 몇 분에 걸쳐서 정성을 기울여 튜닝을 하고 나면 예전에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소리가 그 악기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튜닝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당하게 되면 먼저 이런 튜닝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보통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고는 조화로운 튜닝의 그 결들이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시간이 흘러도 아무 변화가 없이 시험에 든 상황이 계속될 때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지치게 되고, 결국은 열렬한 기도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고 결국은 신앙적으로 미끄러지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시험을 당했을 때에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죄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에 아주 적합한 기회를 얻게 됩니다. 죄는 먼저 생각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죄는 아주 쉽게 자신을 숨깁니다. 그렇게 자신을 숨기며 들어온 죄는 이제 사람의 정서에 침투합니다. 외로움, 고통, 상처와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정서에 깊이 침투하게 되고, 정서가 죄에 대해서 친화적이 될 때 죄에 대한 경계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정서가 의지를 공격해서 죄를 실행해 내도록 독촉을 하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이런 것들이 깊이 무르익고 나면 만삭이 된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죄를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죄가 시험에 든 신자의 마음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영혼을 공격하는 방식은 인간의 마음의 구조에 맞도록 매우 친화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죄의 정서를 욕망으로 가득 채운 후에 의지에게 출산을 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두 주 전에 신문을 보니까 건강에 관한 특집 기사가 실렸습니다. 남자들에게 코털을 뽑지 말도록 충고하는 기사였습니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코털이 굉장히 빨리 자랍니다. 그래서 상당한 정성을 기울여서 관리를 하지 않고 바쁘게 몇 주 살고 나면 콧구멍 안에 있는 코털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몰골이 너무 흉악해서 남자들은 종종 급하게 손톱을 이용해서 그 털을 뽑습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매우 위험한 행동이라고 의사들이 충고합니다.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몸에 정상적인 면역력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그까짓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코털은 금방 납니다. 그러나 면역력이 거의 제로가 되어 있을 때에는 코털을 서너 개만 뽑아도 그 모낭이 고스란히 공기에 노출되고 운이 나쁘면 균에 의해 감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균이 우리의 몸에 증식하는 속도는 어마어마합니다. 순식간에 균이 증식하고 면역력이 없어서 그 균을 이기지 못할 때에는 코털 몇 개 때문에 48시간 안에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우습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시험은 그저 단순한 상황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 활동하는 죄의 원대한 계획 때문에 위험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는 아주 정교한 작용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사람은 시련 속에서 고통은 당할지 모르지만 마음이 부패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평소에 열심히 운동하고 체력을 비축하면 건강한 삶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었을 때에도 그 상황을 육체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건강 상태에서 커다란 질병에 걸리게 되거나 수술을 받게 되면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히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기에 시험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서 죄가 우리의 영혼 전체를 공격하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왜 예수님이 이런 기도를 가르치셨을까요? 시험에 들면 대게 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험과 악에 대해서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B. 지혜와 말씀
그렇다면 시험이 이런 계획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고 우리의 마음을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험 속에서 이러한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생각하는 기능은 침투하는 죄와 유혹에 대한 레이더입니다. 각 나라마다 공격용 무기에 열심을 내어서 투자를 합니다. 남보다 더 빠르고 강력한 공격을 해서 적군을 이기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발달하는 것만큼 또 한쪽에서는 적보다 더 멀리서 더 정확하게 적의 공격을 탐지할 수 있는 레이다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쟁에서는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표적을 파악할 수 있는 레이더가 강력한 공격용 무기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기능은 죄에 대한 레이더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의 생각이 레이더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죄에 대한 레이더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고 있을 때에만 죄를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불신자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불신자들의 마음 안에서도 그 생각이 도덕률의 빛 아래 있을 때에만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생겨납니다. 비록 하나님은 모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률의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양심의 빛을 인류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짐승들처럼 약육강식하는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혜’, 그리스어로 소피아(sophia)라는 말은 ‘삶에 대한 판단력’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내리는 판단력입니다. 시험에 든 신자가 그 무엇보다도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생각의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혼란스러워진 것은 결국 진리의 빛이 없기 때문이고, 지혜는 이 진리의 빛을 받은 인간의 판단력입니다. 둘째는 지혜가 그 시험 속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지성적인 인류를 산출했던 그리스 시대에 철학자들은 이 지혜를 누구보다 갈망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이 지혜를 인간의 명정한 이성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인간의 명정한 이성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시편 111편 10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즉,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가장 명정한 판단력을 갖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아주 쉽게 증명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에 휘둘리지 않으면 결코 판단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올바른 질서를 따라 사랑하는 사람은 판단이 정확합니다. 좀 못 배웠다고 하더라고 사람이 어떤 도리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력이 정확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향한 굽어있는 사랑, 혹은 오해와 편견에 집착하는 아집과 같은 것들에 붙잡혀 있을 때에는 인간의 판단력이 동의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은 마땅히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많이 사랑할 것을 많이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덜 사랑하면서 균형을 이루며 사랑을 갖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랑이 이런 균형을 갖게 해줍니까?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사랑입니다. 그분을 향해 최고의 사랑의 마음이 쏠려 있을 때 인간은 놀랍게도 가장 올바른 사랑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로 돌아간 그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 사물들에게 질서 있게 배분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지혜가 생겨납니다.
모든 계명 중 첫째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놀랍게도 이 말씀은 예수님의 창작이 아닙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서 이미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르침을 모든 율법의 근본으로 가슴에 새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그 뒤를 잇는 유대인들은 이 사랑의 가르침에서 멀어졌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자 구약의 올바른 이 가르침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들은 지혜 없는 자가 되어 예수가 친히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은 버리고, 자잘한 계명에 목숨을 거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신약에서 신학적인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에 관해서 말입니다. 즉, 이 지혜는 넓게 보면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 세계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며, 나는 누구이고, 이웃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예수님을 안 믿고 살던 불신자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왜 이렇게 세상에 내던져졌는지 모르는 채 살았습니다. 최근에 인도에 있는 어느 청년이 법원에 자기 부모를 고소했습니다. 그 고발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나의 동의도 없이 이 힘든 세상에 나를 낳아 놨습니까? 이에 대해서 부모는 책임지시오.’ 그런데 부모의 답변이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네게 동의를 구할 수 있었겠는지 대답을 하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내던져지듯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도대체 이 세계는 왜 존재하고,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줄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분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깨달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쓸데없는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밖에 없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신관이 생겨나게 된 것이고, 후자는 세계관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나니까 그 세계 속에 던져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의미 없이 살았던 인생 가운데 의미라는 빛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보는 관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인생관 말입니다. 이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고, 매일매일 부딪치며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영혼을 향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생활관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아주 지혜롭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만났을 뿐인데 순식간에 놀라운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귀뚜라미는 더듬이로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 더듬이가 매우 깁니다. 그런데 그 두 더듬이를 가위로 딱 잘라놓고 나면 이 귀뚜라미는 어디로 뛸지를 모릅니다. 쩔쩔 매고 안절부절 합니다. 예전의 우리는 마치 더듬이 잘린 귀뚜라미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만났을 뿐인데 그분을 통해서 세계와 하나님과 인간과 인생과 나 자신의 생활을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인류가 이제까지 고민해온 모든 철학들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인간이 행복한지를 묻는 것이었고 그것은 철학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철학 중에 잘못된 것을 다 빼버리고 올바른 것을 모두 모아서 꽉 짜면 성경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신학은 참된 철학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성경은 올바른데 철학이 그릇됐기 때문에 충돌이 생겨납니다. 원래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그 계시의 지도를 받으면서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불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신약에서 이루어지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전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이 참된 지혜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인격 안에 창조와 회복과 세계의 완성에 이르는 모든 전망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렌즈를 통해서 세계와 인생과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영적인 은혜도 주시지만 많은 물질을 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복을 제시하고 있으나 신약에서는 당신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 당신 자기를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써 인간은 참된 지혜에 도달하게 되고, 지혜로운 것만큼 그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행복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자기를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제 이 지혜의 신학에 관한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구도를 놓고 보면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소피아는 구약에서 호크마인데, 이 구약의 호크마라는 지혜는 신령한 지혜에서부터 세속적인 지혜까지 모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모든 지혜가 우리를 행복에 이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비참에 이르게 하고, 타락에 빠지게 하는 잘못된 지혜도 있습니다. 신령하고 올바른 지혜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아래서 정확한 판단력을 갖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결국 바라보며 달려온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이 신자가 전심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아가야 할 것을 촉구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지혜로 말미암는 참다운 행복에 이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원리적인 지혜와 실천적인 지혜입니다. 이 둘은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원리적인 지혜는 마음을 다해 구속주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세상과 자신의 삶의 질서를 깨닫는 것입니다. 실천적인 지혜는 그 원리를 실제의 생활에서 크고 작은 실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시험에 들었음을 깨닫기 오래전에 이미 마음에 변질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멀어지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일날 꼬박꼬박 교회에 나오고, 하던 봉사도 꼬박꼬박 의무를 이행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시험에 들었습니다. 풍부한 진리의 빛 아래서만 신령한 지혜를 유지할 수 있는데도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졌습니다.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말씀에 대한 명민함도 이미 상실했습니다. 이런 속에서 신자의 마음 안에는 이미 죄의 작용이 시작되고 있고, 놀랍게도 죄는 어리석은 신자와는 비교되지 않는 탁월한 지혜로써 자신의 계획을 시험에 든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늘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시험과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그 말씀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설사 시험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놀라울 정도의 영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말씀을 붙들고 살고자 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순발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런 시험 속에서도 죄의 영향을 이기고 다시 회복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당해서 이렇게 마음이 어두워지고 있을 때에 어떻게 하면 다시 지혜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 귀에 들린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마음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귀에 들린 말씀 중 얼마만큼의 말씀만이 우리의 마음에 떨어져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못 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고, 이것이 곧 자신이 시험에 든 상태를 입증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한 번의 예배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기 위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살 수 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힘과 지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번, 두 번 예배 속에서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생활이 계속 됩니다. 그런 사람이 집에 돌아가서 마음을 쏟으며 성경을 읽을 리가 없습니다. 또 성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신학 책을 탐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잠들었던 영혼이 깨어나고, 멈추었던 레이다가 다시 작동하듯 놀라운 사고의 변화와 생각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잠시 전까지 탐지되지 않던 자신의 죄와 위험한 상황에 대해서 아주 급하게 경고등을 켜게 하고, 그것을 자신의 온 영혼이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충격적인 말씀의 깨달음들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난 후에는 그것을 간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는 것은 마음의 화로에 불타는 숯불을 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숯불을 가득 담았다고 할지라도 눈보라치는 벌판으로 난로를 들고 간다면 금방 싸늘한 숯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의무의 재로 그 숯불을 덮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 말씀의 열기로 한 주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하루에 단 세 장씩이라도 꾸준히 읽고, 그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깊은 깨달음이 옵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오는 경험을 합니다. 그렇게 빛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음이 없이 드리는 일천마디의 기도보다는 단 한 마디의 탄식이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올 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냅니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하며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그 일이 매우 고통스럽지만 깨달은 말씀의 빛이 있을 때에는 마치 오랫동안 막혀있었던 수로를 곡괭이로 두드려 깨뜨리는 것처럼 어느 한 순간에 우리 마음을 터뜨리고 회개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닫혔던 기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자 언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에 이런 많은 소원과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다는 것을 예전에 미처 몰랐는데 쏟아져 나오는 언어와 함께 기도는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그런 기도가 계속되면서 우리의 마음에 펌프질이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게 됩니다. 오랫동안 눈비를 맞고 싸늘하게 식은 채로 서 있던 기차의 화실에 다시금 불이 지펴지고 증기가 끓어오르게 되자 기차가 다시 큰 소리를 내며 운행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받고 힘을 얻게 되자 간절히 기도하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거기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설교 시간에 수없이 얘기하지만 어차피 여러분들의 인생은 여러분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인생에 좋은 날이 저절로 올 것이라고 기대를 걸면서 상황에 희망을 걸며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로또나 붙들고 사는 사람하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전개가 되어도 내 인생이고, 내 뜻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어서 피눈물 나게 고생해도 내 인생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나 내 마음대로 누리며 살았느냐에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라는 이 한 페이지를 어떻게 내 글씨로 써내려가고 있느냐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도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련하지만 그 지혜를 따라 살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119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빛은 한꺼번에 커다랗게 비춰주지만 등불은 한 걸음, 한 걸음을 헛디디지 않도록 내 발 앞을 비춰줍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인간은 결국 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의 일생은 바로 이렇게 끊임없는 시련을 만나면서도 어떻게 말씀의 빛으로 지혜를 얻으며 그것을 극복하며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자신과 유사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어떻게 시험에 들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나님이 시험에서 건져주셨고, 어느 때에 어떠한 약속으로 그들을 찾아와 주셨는지를 배우면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당신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생사 간에 우리가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리의 빛을 받은 마음으로 힘써야 하는 것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 말씀의 빛을 사모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열렬하게 기도하는 이 마음은 이미 받은 말씀의 빛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소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영양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아주 질이 좋은 식품을 적절한 때마다 섭취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건강이 회복될 수 없습니다. 약으로 처방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음식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탱해야 합니다. 너무 육체에 기력이 없을 때에 한 끼만 맛있게 먹고 소화를 잘 시키더라도 몸이 달라집니다. 더군다나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교제를 나누면서 식사교제를 하고나면 이튿날 일어나면 몸의 상태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끼는 육체의 생명과 같습니다. 그런데 위가 심각하게 고장 나서 어떠한 영양분도 흡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럴 경우에는 제아무리 좋은 음식도 그에게 주어도 이것은 건강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말씀과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빛이 우리 영혼에 주어지는 양식이라면 열렬한 기도는 이 지식을 우리 안에서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제대로 소화되면 우리의 몸 전체에 퍼지면서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그러나 열렬한 기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약간 빛을 얻었는데도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생활을 역동적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기도하셔야 합니다. “눈물 없는 기도 생활은 없다.” 단 30분이라도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눈물이 있는 기도 생활을 하면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상에 모든 질서를 움직이는 힘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의 인생을 위한 가장 놀라운 계획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이기게 만드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석탄을 우리 마음에 집어넣어서 기도의 엔진을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실천하며 마음을 지키면서 말씀의 석탄을 지속적으로 집어넣고 불을 떼야 합니다. 그래야지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할 때에 무엇이 달라지셨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수없이 세월을 보냈는데 10년 전에 시험에 든 사람이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었다가도 며칠 만에 털고 일어나 새 삶을 사는데, 어떤 사람은 젊었을 때 시험 들고 그것이 노년까지 갑니다.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에 들었어도 그 시험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길 수 있는 길을 놀랍게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죽지 않습니다. 그 시험을 당했을 때 우리는 이상한 일을 만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평생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것이 본디 신자의 일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오래된 시험도 우리는 한 번에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마른 뼈처럼 살았던 사람이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서 군자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마음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시험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밝은 지혜를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어떤 면에서 시험은 고마운 것입니다. 시험을 당함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도 모르던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의지하며 잘난 척했던 마음이 꺾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더욱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끝없는 죄를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눈물로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았던 것이 죄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그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시험을 당했든지 반드시 이기고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3.17._주일오전)
4.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어쨌든 그 상황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시험 중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당했을 때 신자의 생각은 공격을 받고, 또 마음 자체가 요동치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지혜는 자신과 자신의 삶의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이 지혜는 신령한 지혜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옵니다.
II.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
지난주에 이미 이 5절을 설교했지만 다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 한 번 더 설교를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겠지만 시험을 당할 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혜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렇게 시험을 당했을 때 지혜가 부족한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이미 신자의 마음에서는 지혜의 빛이 멀어지기가 일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그를 서서히 떠나고 마음은 미혹을 받게 됨으로써 시험에 떨어지고, 그 시험의 상태는 악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더욱 밝은 지혜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험을 당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지혜를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A. 후히 주시는 하나님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혜와 관련된 하나님의 성품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라고 말입니다. 즉, 이 두 말씀은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아낌없이 지혜를 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자녀들을 지혜가 부족하다고 꾸짖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같은 관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 그리고 세계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에서 죄를 이루는 얕은꾀와 같은 지혜가 아닙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삶과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보게 만들어 주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데서 오는 정신의 맑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가 지혜의 빛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항상 진리를 따라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 본질적으로 미련한 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본분을 망각하며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악에 악을 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험에 빠져 있는 신자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곧 진리의 말씀으로 그의 지성을 비추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력이 뛰어나도 일단 방에 불을 끄면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나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어차피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나 밝은 불이 커졌을 때에는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빛이 만물을 비추고, 또 그 빛으로 자신의 마음이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육신의 눈으로는 누구나 똑같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꽃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돌이 있으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출 때에는 꽃이 거기에 있는 의미가 무엇이고, 돌이 거기에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빛이 비추면 시험을 당하는 중에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 또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일이 일어나도 깨닫지 못하나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 시작과 경과, 그리고 마지막 결과를 잘 압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은 너무나 어려운 일을 당하여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평안하여 모든 것이 마음대로 잘 됐을 때에는 말씀이 귀에 들어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들리는 것은 그의 믿음의 문제이고, 그의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깨닫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당하는 모든 사람이 악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지혜로워지는 첩경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할 때 인간은 욕망에 붙잡히게 되고, 일단 욕망에 붙잡히면 그 마음은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기에 지혜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15장 33절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경외하는 것과 겸손을 연관시키고, 지혜롭게 되는 것과 존귀하게 되는 것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마음에 진리가 깃들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워지는 첩경이 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졌을 경우에는 시험에 들었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리의 빛의 도움을 받지 않는 신자는 시험을 당했을 때 자신의 온 꾀를 동원하여 어려움을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꾀는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자신을 더욱 더 얽어매는 밧줄이 되고야 맙니다. 마치 톱니바퀴 같은 덫에 걸린 짐승이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그 발목이 더욱 더 날카로운 톱니 같은 덫에 걸려 살이 깊이 파이는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9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경외와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을 일치시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에 뛰어난 거룩하신 분임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은 지혜롭게 되고, 이 지혜는 곧 사물들을 판단하는 명철을 가져옵니다.
시험이 우리에게 항상 나쁜 것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제법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함으로써 마음 깊이 감추어져 있어서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재발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평안할 때는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던 자신의 신앙을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아, 내 믿음이 이 정도였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 마음속에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이 많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믿음이 충만한 줄 알았는데 잔꾀로 살아가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에 신자는 자기를 의지하며 사는 것이 지혜 없음의 근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가 자기를 사로잡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에 신자는 하나님 이외의 것을 의뢰하던 마음을 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자신에 대한 신뢰조차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분을 간절한 마음을 기울여 찾게 됩니다. 시험에 든 줄 몰랐을 때에는 자기를 믿었지만 깨닫고 난 후에는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형통하여 내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환경이 계속될 때에는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말씀 갈피갈피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됩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이 최고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그 사람 마음 안에 역사하는 진리의 영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몰랐던 무지를 발견하게 합니다.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없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만 시험을 당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시험을 당하게끔 허락하셔서 거기서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 하십니다.
가정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 기도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고 남편의 사업이 위기를 만났을 때에 부부가 함께 금식하는 경우는 있지만, 시험을 당했을 때에 말씀의 밝은 빛을 달라고, 빛나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관한 가장 위대한 교훈을 담고 있는 이 야고보서 1장은, 시작하면서부터 시험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늘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이 지혜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을 하고, 영혼이 망가지면 육체가 큰 고통을 겪습니다. 온몸으로 부딪혀 피투성이가 되어도 진리의 말씀이 그에게 없기 때문에 시험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거기에서 자칫하면 미끄러져 악으로 빠져 그 나중 상황은 처음 상황보다 더욱 나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시험 중에 우리가 얼마나 모자라는 인간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특히 더 밝은 지혜의 빛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달라고, 지혜의 빛을 달라고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많은 날들을 시름에 잠기고, 근심하고, 걱정하며 때로는 먹지 못하고 마음이 타들어가며 밤을 지새웁니다. 그렇게 고생하는 것의 1/10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지혜를 구하면 놀랍게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웬만한 신자에게 학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시험 중에 무지를 깨닫게 되면 간절히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되 차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한 국면입니다. 마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고 거지가 된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것을 다시 누리게 해주신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시험에 든 자들이 무엇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되었든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당신의 지혜를 부어주십니다.
보십시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췄을 때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지를 보십시오. 지극히 현명하고 똑똑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멀어질 때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어지는지를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시련 속에서 갈 길을 모르던 사람, 시험을 당해서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이 깨닫습니다.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전심으로 자신의 인생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 시험에 당할수록 조용히 말씀 앞으로 나아와 말씀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십시오. 그렇게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어리석다는 이유로, 혹은 어리석게 살아왔다는 이유로 꾸짖지 아니하시고 넘치도록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B. 하나님께 구하라
두 번째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 중에 있을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먹고 입고 쓰는 것이나 명예와 다른 사람의 박수갈채, 또는 이 세상의 쾌락과 영광이 아니라 빛나는 지혜임을 알게 하십니다. 지혜롭지 못한 임금은 비명에 죽어도 슬기로운 농부는 행복하게 삽니다. 미련한 귀족보다는 지혜로운 평민이 훨씬 행복한 삶을 삽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광과 좋은 것들은 잠시 지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은 영원까지 이어질 우리의 삶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시간에도 진리의 빛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설교자로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끝없는 시련 속에서 어리석게 사는데도 그에게 꼭 필요한 진리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시험 속에 있어서 갈 길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성경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을 깨우고 싶어 하십니다.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 어리석을 길을 버리고 지혜로운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지혜를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험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왠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자고 있는 우리에게 저절로 이 지혜를 주시거나, 놀고 있는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지혜가 생겨나도록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이 지혜를 주심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지혜롭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며 사는 것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첫째는 갈 길을 모를 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인생을 살아온 경험으로 이 시험을 이기려고 합니다. 상식으로 이 시험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뜻이 계셔서 이 시험을 만나게 하셨는데 우리는 말씀 따위는 필요 없고 이제껏 살아온 삶의 경험으로, 또 잔꾀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것보다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침마당’에서나 발견하는 지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결국은 진리의 빛과의 상관없이 상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의 갈 길을 새롭게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힘입어서 신앙의 비밀로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점점 더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살아갈 길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커다란 시험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둘째는 그 길을 알지만 그 길대로 살아갈 힘이 없을 때입니다. 그때 인간은 전심으로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정보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예전에는 이길 수 없는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의 빛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체험입니다. 이 은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사 아들을 죽이기까지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었을 때에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현실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알 수 있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할 수 없다고 인간이 포기할 때 인간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아봐야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함께 주십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할 수 있는 길들이 많이 보입니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키스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 절벽인데 끝에 바위가 튀어나왔습니다. 남자는 오직 두 팔로 그것을 잡고 허공에 매달려 있고 여자는 아래서 머리를 올려 키스하는 장면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키스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것을 준다고 해도 우리는 못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팔을 잡아 당겨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위로 올리려면 적어도 자신의 체중의 80% 정도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지닌 팔뚝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그런 꿈을 꿈꾸지 않습니다. 이처럼 할 수 없을 때에 우리는 하고자 하는 생각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힘이 생기게 될 때 우리의 생각의 지평도 놀랍게 넓어집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사랑은 항상 함께 가는데 하나님은 시험 속에서 당신의 말씀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를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때였습니다. 불과 네 달 정도 됐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큰 시험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꼭 극복해야 되겠기에 처음 하나님을 믿었던 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놀랍게 기도가 잘 되었는데도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티끌만큼의 징조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벌판을 걸어가다 보니 헤엄쳐서 건널 정도까지는 아니고 제가 보기에 그저 100여 미터 정도의 넓은 강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깊이가 강 같지 않고 깊은 바다 같았습니다.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짙은 푸른색의 물이 흐르고 있는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제가 그 강을 건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발을 집어넣으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주여.” (발을 넣기 전까지) 상상하기를 끝없는 깊은 물속으로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비명을 지르고 눈을 떠보니까 물이 발목밖에 차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났는데 마음에 놀라운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꿈을 꾸면 대게 잊어버리기 쉬운데 아주 또렷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기도인가?’ 나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시험이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무시무시한 시험이지만, 막상 부딪히고 보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한 메시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이 저의 마음속에 넘쳐났습니다. 결국 며칠 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저의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당연히 능가합니다. 우리는 항상 시험을 당할 때 이런 식으로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저런 식으로 해결해 주실 수도 있고, 오히려 우리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송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든 여러분들은 말씀의 은혜를 받기를 더더욱 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길고 긴 세월을 그 시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보내다가 결국은 악에 떨어질 상황을 놀랍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상하고 깨어진 마음과 자신의 지혜와 잔꾀를 의지하며 살 수 없다고 믿는 마음은 기도의 간절함을 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라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헌신입니다. 제사입니다. 심정으로 드리는 제사, 마음으로 울리는 헌신을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보다도 더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이야말로 자기의 꾀를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간절히 기도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시험에 들어있는 여러분께 권합니다. 이제 그 시험을 인간의 꾀로 극복해 보려고 하던 노력을 거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길을 깨달으십시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일찍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을 여러분들에게 보이시고, 그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험 속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만났다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온 우주를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 중심으로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지혜를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간구하여 시험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3.24._주일오전)
5. 시험을 이기는 믿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5-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 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당할 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시험을 당한 모든 사람은 속히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는 길은 그렇게 자기가 직면한 상황에서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수록 지혜가 필요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지혜 얻기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II. 시험을 이기는 믿음
A. 믿음을 가지라
오늘 우리가 다루는 이 본문에서는 지혜를 구할 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구해야 할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시험을 이기는 믿음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고 말입니다. 이 믿음은 그냥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기도하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앞에서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시험에 들었을 때에 지혜를 구하여야 하는데 이 지혜를 구할 때는 하나님이 꾸짖지 않고 후히 지혜를 주시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하고’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아이테오(aiteo)’라는 단어인데 원래 이 단어의 뜻은 ‘묻다, 요구하다’ 심지어 사도행전 3장 2절에서는 ‘구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래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험 당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험 든 것을 자각하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잠시 죄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깐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시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험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열렬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그 깨달은 빛을 가지고 간절하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은 믿음의 훌륭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적은 것을 깨닫고 열렬히 마음을 실어 기도하는 사람들이 시험에서 더 쉽게 벗어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가장 뚜렷한 표는 간절히 눈물로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은 그런 기도 속에서 용서해 주실 것이고, 시험을 당해 갈 길을 모른다면 그런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험 중에 기도하는 방식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리스어로 ‘엔피스테이’입니다. 곧 믿음 안에서 하는 기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믿음입니다. 내 눈에는 갈 길이 보이지 않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그때에도 간절히 주님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가 모르는 놀라운 길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지혜에 대한 믿음입니다. 가져야 될 믿음은 시험 중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시험을 만나 어떤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든지 일생 두 가지 사실을 붙들면 우리는 그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래서 어떤 뜻으로도 결코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다.’ 내가 어려움에 빠졌다면 이 어려움은 나에게 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하시기 때문에 당신을 찾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며,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도 나를 버리시고 나에게 나쁜 것을 하실 수 없다라고 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나를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내 마음을 바꾸시고 내 인생의 길에 지혜를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사건들, 그리고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나를 말씀으로 인도하신다고 믿어야 됩니다. 내 마음이 굳었을 때 하나님이 별다른 상황을 내게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또 다른 마음으로 깨닫도록 인도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얼마 되지 않는 신앙의 삶의 궤적들을 회고해 보십시오. 어둠과 무지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깨우셨습니까? 시련과 고통의 올무에 붙잡혔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끊어내셨습니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웅덩이에 따져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그 웅덩이에 밧줄을 내리셨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지혜를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알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를 깨닫게 생겨서 나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갖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살아계신 분이어서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그 지성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만들어 주심으로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나의 인생의 길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시험에 들어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셨고, 그리고 불구가 되어서 도저히 행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우리를 일깨워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심으로 오래된 시험의 터널을 벗어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을 믿을 때에 일어나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시험에 빠졌을 때 우리의 믿음도 함께 약화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들고 믿음을 가지고 헤쳐 나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의심하지 말라
마지막 두 번째는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의심하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디아크리노메노스(diakrinomenos)’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구별하다, 찢어지다, 분리하다, 나뉘다, 혹은 신뢰하지 않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잃어버린 신자의 마음은 끊임없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도저히 한쪽으로 몰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한편으로는 믿는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마음으로 나눠진 마음입니다. 분리된 마음이어서 하나님을 향해 모아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세상 방식대로 판단했다가 말씀대로 판단했다가 또 다시 흔들려서 육신의 정욕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라고 한 이 말씀이 성도들에게 준 말씀임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깨달은 신자도 늘 믿음 안에서 굳세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의심하는 신자에 대해서 세 가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삶의 태도는 늘 요동하는 것입니다. ‘요동하는’ 이라고 번역된 그리스 단어는 ‘흐리피조(hripizo)’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리피스(ripis)’라는 명사에서 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뜻은 ‘부채’입니다. 그래서 ‘부채질 하다, 바람이 불다, 요동치다, 흔들리다’의 뜻입니다. 마치 흔들리는 바다 물결위에 떠 있는 물건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끊임없이 표면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마음에 정한 것이 없이 늘 요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늘 의심하는 사람의 결국은 아무것도 좋은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간구하지 않음으로 시험을 당하지만 지혜는 얻지 못합니다.
모든 시험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해서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시험과 같은 상황이 아무리 많이 전개 되도 내 마음이 요동하지 않으면 고통은 당하겠지만 시험에 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험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은 변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부터 역으로 고치시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시험 속에서 이 시험을 속히 사라져 버리기를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망가진 마음부터 고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시험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때 그렇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간구의 과정을 통해서 시험에 들었던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십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망가진 우리를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나주시고, 마음을 다시 고치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의 정체는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 ‘정함이 없다’라는 이 단어는 ‘아카타스타토스(akatastatos)’라고 나오는데 ‘아’는 없다는 뜻이고, ‘카타스타토스’라는 단어는 ‘밑으로부터 서있다’는 뜻입니다. 무언가 깊은 기초를 가지고, 뿌리를 깊이 박고, 흔들리지 않도록 서있지 못하다는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닌데 어디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늘 흔들리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고, 형편이 넉넉하면 세상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신앙이 견고하지 못하게 흔들리고, 시련과 어려움이 오면 불안하고 두렵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기 때문에 마음이 정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해지는 것, 신앙의 굳셈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마음이 정해지는 것은 말씀의 빛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빛을 받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굳건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 비유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그리고 돌짝 밭에, 가시 떨기 속에 뿌려졌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돌밭에 떨어진 씨에는 분명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뿌리가 나왔고, 그러나 더 이상 뿌리가 뻗지 못해서 결국 말라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싹이 났던 것입니다.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만큼은 자랐으나 가시덤불에 가려져 영양을 빼앗기고 햇빛을 받지 못함으로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도 일시적으로 말씀을 깨닫고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마음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든든히 서 있는 뿌리를 확고히 내린 신앙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은 의심과 양립할 수 없고 믿는 마음에는 추호도 의심이 있을 수 없으며,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어떠한 믿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에서 33절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훌륭한 증거입니다. 무대는 뱃세다 광야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들은 너무 오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나머지 기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 이어의 축복하심으로 그들을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넉넉히 먹이셨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직 그 모임이 파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배 태워 갈릴리 건너편으로 떠나보내십니다. 그리고 홀로 그 모임의 뒷정리를 하시며 사람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배가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물결로 인하여 고생하게 되고 어느덧 밤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물결치는 그 파도 위를 걸어서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두려워하였으나 예수님은 당신이라고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풍랑을 만났으니 그렇게 물결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평소 기질대로 베드로는 가만있지 못하고 예수님처럼 자기도 물결 위를 걸어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4장 2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 14:28-29)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풍랑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그는 예수님처럼 물결 위를 걸었습니다. 바라보던 모든 제자들은 아마 놀라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30절과 31절에서는 의외로 이런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를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우리가 생각을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시험을 극복해 볼 온갖 술책들을 생각합니다. 해결의 길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아, 내가 이 시험을 만난 것이 결국은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구나.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이 시험을 이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옛날에 시험에 들었을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으로 자기를 건져주셨던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떨립니다. 그리고 눈물이 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문제는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자기 앞에 상황을 보고 또 다시 낙심하는 것입니다. 조금 아까까지 말씀을 굳게 믿고 붙들었을 때는 믿음으로 이 시험을 헤쳐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물결치는 파도를 바라보았을 때에 베드로가 물에 빠졌던 것처럼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바라볼 때 아까 있었던 믿음은 어디 갔는지 없어지고 끊임없이 시험의 물결 속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이미 이런 믿음을 가졌다 나의 신앙은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생각하며 안일하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내 마음을 깨우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나를 두드리셔서 나에게 심어주신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미끄러지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우리가 어제의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신자는 썩을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립니다. 왕년에 깨달은 신앙으로는 왕년에 살았고, 지금은 우리에게 지금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며 물결 위를 담대히 걸었던 물결치는 그 파도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믿었던 그 믿음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우리 마음속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에게 어떤 처지에 있든지, 시험을 만나든지 모든 길이 평탄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라고 여러분들에게 외치는 이유입니다.
마음이 정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사하는 은혜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이 없지만 상황은 우리의 마음을 늘 요동치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시험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신비한 방법으로 이렇게 마음을 확정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오 주여 나의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찬송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했을까요? 그가 만난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뿌리 내리는 그 믿음이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대한 감각을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의 손에 나의 인생이 있고, 그 하나님의 손에 세계가 있고, 그리고 나의 생사 간에 모든 운명, 이 광활한 우주의 모든 운행까지도 그 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눈앞에 펼쳐진 끊임없이 요동하는 세상의 물결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물결보다는 그 분이 말씀하시는 권능의 말씀이 더욱 확실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어차피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항상 예기치 않는 일들을 만납니다. 예기치 않는 행운보다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들이 더 많습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인생을 살면서 요동하지 않고 뿌리를 든든히 내려 정해진 마음을 갖는데 있습니다. 이 믿음은 상황을 바라보는 감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시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데서 오는 마음의 확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신령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고,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인도하셨는지를 믿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나의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때 그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 집회가 있어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상하게 말할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 수 있을까라는 근거 없는 불안과 떨림이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설교를 하고 글을 썼지만 내가 바람에 나부끼는 티끌과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제가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 때문이었는지 근거를 알 수 없는 그런 커다란 힘이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기도해도 이상하게 기도가 되지 않고 눈물만 나왔습니다. 도착해서 그날 밤 숙소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유도 없고 근원도 알 수 없지만 내 삶을 지탱하던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런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하고 근심 서린 마음으로 숙소에서 외롭게 잠이 들었습니다. 응답은 놀랍게 빨랐습니다. 새벽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청중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내내 하나님이 나의 설교를 통해 나를 깨우시는 것 같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저는 강대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고, 놀랍게 며칠 동안 계속되던 그 마음의 시험들을 단숨에 극복하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감격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시험은 이렇게 우리의 재산이 사라진다든지, 우리의 건강이 중대한 위협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을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상황에 아무 변화가 없는데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지는 방식으로 시험이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굳세게 정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위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의 경건 속에서 충분히 느낄 때에만 감각에 휘둘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물보다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우리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게 되고 요동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간절히 말씀의 빛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지혜를 주실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시험에서 이기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험 중에는 하나님의 지혜를 간절히 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진리의 빛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을 갖고, 이렇게 지혜를 간구하는 나를 꾸짖지 않고, 넉넉히 주실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뿌리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마음을 깊이 담구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심과 그리고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실 것을 굳게 믿어서 이 시험에서 꼭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3.31._주일오전)
6. 인생의 허무함을 알라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9-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제껏 가르침을 요약하면 시험을 이기는 길의 시작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에 당했을 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앞의 문맥하고도 관계가 없어 보이고 뒤의 문맥하고도 관계가 없어 마치 삽입된 구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험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처방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인생의 허무함을 알라는 가르침입니다.
II. 인생의 허무함을 알라
A. 부유한 자들에게
인생의 허무함을 알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을 듣는 청중이 크게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한쪽은 부유한 사람들이고, 또 한쪽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부요한 사람들이 높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있을 때에는 빈한 자나 부한 자 모두가 형제로 여기며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불길이 사위어 가고, 교회는 세속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금과 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사람이 들어올 때에는 더 특별한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2장 3절-4절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격렬하게 비판합니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3-4)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과 부자들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속주의를 따르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주의는 인생의 허무를 직시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10-11) 고 말합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시험을 이기는 길에 대해서 말하다가 갑자기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길게 거론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시험을 당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 때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된 욕망에 붙들리면 그는 인생을 올바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지 못할 때 신자라도 잘못된 욕망에 붙들리고 헛된 사랑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일 때는 우리의 마음에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욕망을 가지고 있을 때에 객관적으로 들어오는 사물들에게 요 정도 가치밖에 없는데 그보다 훨씬 높은 가치가 있는 것처럼 그것들을 위장하게 됩니다. 그거를 받아들일 때 생겨나는 인상을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에 붙잡히는 것은 욕망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이 이것을 잘 보여주는데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아마도 소작인을 통해 많은 곡식을 거뒀습니다. 일부는 소작인들에게 주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풍년이 들었습니다. 부자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할까? 이 많은 곡식을 쌓아둘 창고가 없구나.’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아, 그렇구나. 큰 창고를 짓고 그 창고에다가 이 곡식을 모두 보관하자.’ 그리고는 자신에게 말하기를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매일매일 이어지는 호사스러운 연회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연회를 베푼 자신을 칭송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고, 그리고 쾌락도 꿈꾸었을 것입니다. 자, 곡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있는 식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잘못된 표상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이것이 곡식으로 보이지를 않고, 자신의 영혼을 영원히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어리석은 부자를 한순간에 깨우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내가 네 영혼을 취하리니’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는 비로소 이 곡식이 단지 식물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의 영혼은 결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요? 죽음의 빛 아래서 인생을 보고나니까 이 표상이 사라지면서 자신의 잘못된 욕망의 결과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최초에 인류의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이런 표상의 위험을 더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동산의 모든 실과를 마음대로 먹게 하였으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눈을 이 선악과가 가득 채우자 이 여자는 그 선악과가 단지 과일로 보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보다 높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보다 좋은 과일을 많이 주셨지만 그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한 과일이 그를 비상하게 잡아당겼습니다. 모두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욕망이 빚어낸 표상입니다. 이 표상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멈추지 않고 표상 때문에 지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에 대한 생각은 이 표상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줍니다. 특히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아가는 인생이 잠시 잠깐의 인생이며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눈을 뜨게 해줍니다. 죽음에 들어간 이후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습니다. 그 죽음은 영원으로 통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이든지, 영원한 형벌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시인 김지하씨가 자기의 옥중 생활을 회고하는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권에 항거하면서 그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오적’이라는 시를 쓰고 지명수배를 당해 도망을 다녔고, 체포되었고, 그리고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가정도 돌볼 수가 없이 그렇게 옥고를 치루고 있었으니 이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그 미운 마음과 복수심은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감옥 속에 있는데 감옥이 웅성웅성 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하고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박정희씨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더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자기가 영원히 박정희씨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생명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잠시 머무는 인생의 길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미움도 사라지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왜 이렇게 영원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더욱이 신자는 이미 영원한 하나님을 만났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붙잡혔는데 왜 그는 영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유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육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한정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거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영원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은 매일 매일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그 즐거움 때문에 영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영원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서 빛을 비추지 않으면 사고방식이나 행동하는 것이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기도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빛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원한 것이고, 진리보다 더 큰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빛을 받음으로써 죽음의 빛 아래서 인생을 생각할 때에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이 시간 안에 살고 있으나 영원을 잇대어 사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영적인 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이 모자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이 영혼에 빛을 가져다주어 어두운 눈을 뜨게 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이 표상에 사로잡혀 헛된 욕망을 가지고 삽니다. 잃어버려도 괜찮은 것에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잃어버려서 안 되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아가면서 그는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영화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줍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언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6-7) 고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봄에 새싹이 돋기 시작하고 여름에는 무성해집니다. 풀숲에서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풀이 자랍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풀은 히브리어로 ‘하찌르’라고 하는 명사인데 특별한 풀이 아니라 그냥 잡초입니다. 어떤 특별한 가치가 없이 그저 특별히 사람들이 눈여겨 볼 필요가 없는 그냥 들판에 널려져 있는 그런 잡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일년생 풀들이 그렇게 무성하여 벌판을 바꾸어 놓지만 이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고, 그리고 바람이 불고 오면 언제 그런 풀들이 있었냐는 듯이 누런 대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도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가 영원의 빛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자신이 잠시 피었다가는 지는 들풀 같으며 그 아름다움이 풀의 꽃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마음이 표상에 붙잡혀 영원한 진리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고 말입니다. 저는 35세 때 이 말씀을 깊이 경험하고 6개월 동안을 눈물로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라고 했던 시인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잠시 지나는 것들이고 그런 점에서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헛된 신기루를 잡으려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던 톱스타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미모를 가진 아름다운 배우들은 대게 젊은 시절 한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영원히 사라지고, 매스컴에 자신의 얼굴을 내지 않습니다. 아름다웠던 기억만 팬들에게 남겨두고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세상도 끊임없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고, 그 세상을 사랑하는 나도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고, 죽음의 기운에 삼켜 소멸하는 존재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은 잠시 지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붙들고, 미워하고, 그리고 원한을 품고, 그리고 서로 경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허무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런데 소망이 있는 것은 그렇게 육체는 풀이요, 그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고, 풀도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인생도, 아름다움도 사라져 가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있습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꺾이거나 망가지지 않고 서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져도 말씀은 영원히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은 말합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11) 부유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특별한 자리를 제공받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수그리며 용납하지만 그러나 그 부자의 부함도 이렇게 들의 풀과 같이, 꽃과 같이 허무한 것이어서 곧 사라질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풀이 마르고 꽃은 떨어져 아름다움이 사라집니다. 이런 물질적인 부유함은 허무한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겪는 많은 시험이 사실은 세상에 대한 집착과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정말 영원의 빛을 받고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나면 어떤 것들은 그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표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는 목숨을 겁니다. 그러는 동안에 정말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은 아무렇게나 되도록 팽개쳐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영혼은 어둠속에 들어가고, 어둠속에 들어갈수록 마음은 욕망에 사로잡혀 시험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특별대우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부자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가슴에 손을 얹고 저는 누구의 어느 교인이 부유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분의 눈치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부자만 오늘 이 경고를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은 이 사람처럼 많지 않아도 비록 금과 아름다운 의복은 없어도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모든 것 때문에 여러분들은 부유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부유함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비춰도 그 말씀을 붙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그 사랑이 간절히 마음속에 사모함이 없습니다. 이런 속에서 인생은 흘러갑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합니다. 자신은 시험에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이 시험의 상태라고 보면 그는 계속 시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감격이 없는 것만큼 그는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영혼의 감격이 없기 때문에 그는 육신의 감격이라도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보다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 이 세상이 주는 만족에 우리의 마음을 쏟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유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름다운 비싼 의복으로 몸을 휘감은 사람들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뒤집어 말하면 “심령이 부유한 자는 벌이 있나니”가 아닐까요?
모든 시험의 대부분이 세상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어 세상에 고정된 여러분들의 마음을 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심으로 영원의 빛 아래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가난한 자들에게
마지막 두 번째는 가난한 자들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는 그 가난한 자들을 “낮은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낮은’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타페이노스(tapeinos)’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비천한, 가난한’, 혹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는 ‘영적으로 겸손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야고보서는 매우 짧은 서신서인데 다른 성경책에 비해서 형제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열다섯 번 이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가족입니다. 주인과 노예와 같은 상하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2장 1절에서 이렇게 심각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고 말입니다.
세상은 지위의 고하와 재산의 유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대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모두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광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현재 뿐만이 아니라 오고가는 모든 세대와 영원까지 인류를 다스리시는 통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의 도리를 오해해서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특권인 것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이미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극단에 빠지고 있는 신앙을 경계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증거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참되다면 사랑이 있을 것이고, 사랑이 있다면 그는 사랑 가운데 행동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될 때 부자는 회개해야 하고, 교회는 반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형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자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나오는데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나옵니다. 9절이 말합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높음’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휘포스’(hyphos)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원래 ‘교양, 고귀함, 존엄성, 위엄, 높음’, 혹은 누가복음 1장 78절과 에베소서 4장 8절에 의하면 ‘위로’라는 말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소 애매해 보이는 이 구절을 아마 해석하자면 이런 뜻이 될 것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낮은 대우를 받는 형제들은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하나님이 그를 고귀하게 여겨주신 것,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신 것, 하나님이 그를 위로해 주시는 것을 자랑해야 할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비록 교회가 잘못해서 부자는 높이 대우하고, 가난한 사람은 멸시하지만 그런 피해를 당한 형제는 복수의 칼을 갈고 피를 흘리는 죄를 짓지 말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이렇게 낮은 대우를 받지만 사실 하나님은 나를 높여주셨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더 솔직히 말해서 ‘거들먹거리는 저 부자 영감이 알지 못한 하나님의 신비한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너희들은 그것을 모르겠지’라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가치관이 잠시 있다 지나가는 세상의 물질이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영원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구원하고 높이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그 위에 하나님이 은혜를 더하시고 또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 그 지체가 되게 해 주시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약속하시고 그 보증으로 오늘도 내 안에서 나를 위로하시는 성령을 주신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할 수 있는 그 하늘의 자원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랑하고, 자존심 상하거나 혹은 꺾이지 말고 당당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보다 잘되는 사람을 보면 위축감을 느끼고, 또 우리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때때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나는 나의 독특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태어났지 남의 인생을 흉내 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저 늙은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그 누런 금반지와 어울리지도 않게 온 몸을 휘감고 있는 값비싼 옷은 내게 없지만 나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 나에게는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는 의로운 삶의 옷이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고, 금보다 더한 귀한 믿음이 부자인 너에게는 없으나 가난한 나에게 있으니 나는 너에 대해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을 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때로는 낮아질 때도 있고, 가난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악한 자들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것들로는 자신을 깎아 내릴 수 없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지극히 높여주신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참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만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가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고장 난 증거입니다.
참된 만족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을 시험을 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들이며 사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들입니다. 표상에 붙들려 시험에 깊이 빠져드는 여러분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중에, 시험을 당한 중에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이기고자 하나님 앞에 분투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시험을 이길 길을 내시고, 이길 수 있는 힘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바로 이런 수많은 시험을 당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이런 상황을 헤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억울하고 힘겨운 일이 있다면 오늘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교인 중 한 사람이 화재를 당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불타버렸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답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없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셨는데 주시지 않은 몇 가지를 생각하면서 마치 선악과 하나를 탐욕하면서 그 나무로 다가가는 하와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표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번 조용히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을 헤아려 보십시오. 오늘 자기 발로 걸어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해주신 건강을 생각해 보십시오. 건강할 때는 자기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오는 줄 알지만 병에 걸려서 침대에 누워 보면 그렇게 교회 다녔던 것들이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식 때문에 속이 상하시다고요? 자식이 없어서 괴로운 사람도 많습니다. 마음이 괴로워 기도할 수 있는 자식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안 주신 것만 생각하지 말고 주신 것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그러면 불현듯 여러분들이 자기가 얼마나 감사를 잊어버리고 산 사람들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열등감에 붙잡힐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 되셨고,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가 되셨으니 지금 여러분들도 그렇게 심령으로 가난한 자가 되고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는 목마른 자들이 된다면 주님은 부유한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많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주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험에 드는 것은 대부분 육신의 욕망에 붙잡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부요함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참 행복에 이르게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자신이 시험에 든 것 같을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가 사라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때문에 이런 구원의 은혜, 행복한 은혜를 얻었으니 또한 하나님 때문에 시련도 당할 수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이미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자녀 삼으시고 이제 것까지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해 주시고, 성령을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입니다. 오늘은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은총이 깃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선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찾는 모든 자녀들을 말씀으로 만나주심을 굳게 믿고 이 시험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4.07._주일오전)
7. 시험을 이기는 사랑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신자가 당하는 대부분의 시험은 자기 육신을 위한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가난한 자는 없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고, 부자는 있는 것 때문에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자랑하고, 부자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II. 시험을 이기는 사랑
오늘 우리가 읽은 12절의 본문은 궁극적으로 신자가 시험을 이기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시험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시험을 이기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어떤 시험에 들었다 할지라도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한 그는 넉넉히 시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A. 참는 자에게 복 주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2절은 시험을 이기는 사랑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로 참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시험을 참고 견디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복이 있나니”라고 한 이 말씀은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복 중에서도 특별한 복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같은 그리스어 단어가 쓰인 성경 구절이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4절 이하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라고 하셨습니다. ‘마카리오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아쉐르’()라고 부르는 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1절과 2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실 때에 바로 그 복입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사업을 했는데 뜻밖에 돈을 벌게 되었다든지, 시집을 왔는데 뜻밖에 좋은 남편이었다든지, 아이를 낳는데 뜻밖에 엄마 아빠를 보고는 전혀 그런 애가 태어날 수 없는데 너무 머리 좋은 아이가 태어났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이보다 성경이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복이 있는데 영적인 복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심으로 주시는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복의 개념은 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의 복이 가운데 있고, 이 복이 확장된 복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령한 의미의 복을 시험을 참는 자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즉, 시험을 참는 자는 이미 그런 복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참는다고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닙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떤 보다 높은 이유 때문에 그 어려움을 억누르고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자체가 커다란 힘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당할 때 당신을 믿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에게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복을 주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 참으면 한꺼번에 지위와 권세, 물질, 건강, 모든 것을 주신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시험을 믿음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즉시 그 영혼을 어루만져 신령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편안하고 좋은 길을 가고 싶어 하지, 고달프고 힘겨운 길을 걷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없었더라면 결코 될 수 없는 우리를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험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이미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의 사람인 시인은 66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시 66:10). 12편 6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라고 하였습니다.
자, 이제 산에서 광석을 캡니다. 혹은 냇가에서 광석을 줍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망치로 부숩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로 칩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을 뿌려 흘러가게 합니다. 이제 반짝이는 은가루들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만을 잘 거둡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반짝 반짝 빛나는 은가루 같지만 그러나 은으로서 가치가 매우 적도록 거기에는 많은 불순물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을 흙 도가니에 넣고 뜨거운 불을 지펴 그 은을 녹여버립니다. 은보다 비중이 높은 것들은 가라앉으면서 불순물이 제거가 되고, 더 가볍고 잘 타는 것들은 뜨거운 열기에 타서 없어져 버립니다. 거기에서 살살 그 은물을 따라 내고 그것을 시원한 곳에 두어 딱딱하게 굳힌 다음 다시 흙 도가니에 넣고 뜨거운 불을 붙여 녹여내며 제련의 과정을 되풀이하고 되풀이 합니다. 여기에서 일곱 번은 꼭 일곱이라는 숫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순도 높은 은이 나올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끊임없이 제련해서, 그렇게 연단해서 만들어진 순수한 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 순수한 은과 같은 말씀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먹고, 그들도 진리의 사람으로 순수한 인격으로 변화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참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순수한 신자로 만들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견디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음 최소한 다음 세 가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나빠 보이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 그 나빠 보이는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당하는 많은 시험 속에서 이것이 웬 쓸데없는 고생인가 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붙들어 줄 때 생각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시험 속에서 의지의 변화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며 살기 원하도록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최고의 반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불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 속에 들어가 충분히 달궈져 녹아버린 쇠는 그것으로 제련함으로 쓸모 있는 쇠로 다시 태어나지만 불에 어설프게 담겨졌다가 다시 차갑게 굳은 쇠는 잘 부러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태만한 사람들은 예배에 나와 있으나 벌거벗은 채로 침대에 뒹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좋은 것을 얻을 줄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시험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에 버려두면 그저 도끼에 얻어맞고 쪼개져 아궁이 속에 들어갈 나무인데 조각가의 손으로 넘어가면 수많은 사람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한번 톱에 잘리고, 도끼에 찢어져 아궁이에 던져지는 일은 쉬운 일이나 조각가의 손에 들려 불로 지져지고, 칼로 깎여내고, 톱으로 썰림을 당하고, 샌드페이퍼로 긁힘을 당하는 그 고통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대가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듯이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자르고, 깎고 다듬고, 불에 굽고 그렇게 연단해서 아무 짝에 쓸모없을 것 같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교회에 요긴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시험이 없이는 누구도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계속 당하는 것이 반드시 자기의 많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모두 시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시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고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됐던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 11:36-38)고 하였습니다. 누가요? 누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의 삶을 사랑하여 모두 한결같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그들의 시험으로 인생을 살면서 믿음을 가지고 견뎠습니다. 세상에서는 시험에 당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삼킬 듯이 달려오는 맹수와 같은 시험을 통해서 연약한 자가 강한 자로, 쓸모없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요긴한 자로, 예전에는 하나님에게 근심거리였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시험 자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합니다. 시험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욕심과 불신앙, 경건하지 않음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단절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에게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라고 묘사합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시험을 어떻게 당했는지, 시험을 당한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고통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지를 온몸으로 체득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당신의 몸의 지체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 분은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시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버릴 수 없다고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 중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셨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시험을 잘 참아서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생명의 면류관 주심
두 번째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시험을 참고 이기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 이름에 스테판이라는 이름은 모두 이 면류관이라고 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 스테파노스는 원래 그리스 시대 때에 각기 도시 국가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도시 국가들이 모여서 전체의 화합을 다지는 의미에서 운동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긴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이때 승리한 사람에게 씌워주는 그 관이 바로 면류관이었습니다. 올리브 잎, 혹은 월계수로 만든 그 관이 바로 스테파노스입니다. 이러한 운동 경기를 통해 나라 전체의 침묵을 다지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관습은 로마 시대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이때에도 승리하던 사람들에게 씌워주던 관이 바로 면류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 면류관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면류관을 모두 분류해 보면 이 면류관은 세 가지 뜻을 가졌다고 기록합니다. 첫째는 계시록 6장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면류관은 높은 지위와 그리고 계급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로는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면류관은 어떤 사람의 자랑, 긍지, 자부심,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면류관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특별한 봉사와 그 행함에 대한 상급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위해 특별히 봉사한 것과 그런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상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면류관을 혹은 금 면류관이라고도 묘사를 했지만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두 단어가 앞에 붙어서 면류관을 묘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표현과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나오는 의의 면류관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면류관 앞에 생명의 면류관 혹은 의의 면류관이 붙어서 이런 단어가 형성된 것은 신학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다음과 같이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어떤 사람이 여기서 많은 시험을 당하고 시련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눈앞에는 어떤 좋은 것이 당장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딥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천국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한 그 사람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생명을 주십니다. 태어난 시점은 있지만 소멸하거나 멸망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며 영생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무슨 머리에 쓰는 관을 만들어서 우리의 머리 위에 올려놓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그런 생명을 우리가 충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죽음으로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제는 우리 임직할 분들이 열린 교회가 시작된 교회당에 가서, 지금은 연기 학원이 됐는데 거기에 가서 거기서 어떻게 예배를 드렸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발자취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저때는 정말 젊었네요.’였습니다. 당연합니다. 만 37세였는데 당연히 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늙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면 여러분들이 지금을 보면서 정말 그때만 해도 젊으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이 우리의 육체를 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 육신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되어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충만한 생명으로 가득 차게 변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을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는 의의 면류관이라고 말할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의는 ‘옳음’입니다. 그 옳음이 그냥 사람 앞에 옳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옳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으면 책망 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이 책망하셔도 사람은 옳다고 하는 경우가 있고, 사람은 옳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잘못됐다고 말씀하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의 옳음대로 살지 못했고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속죄로 우리를 옳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옳음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옳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천국에서 흠 없이 옳은 사람들이 됩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과 천국에 있는 우리 사이에 어떠한 틈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 우리를 꾸짖으시고, 책망하시고, 고치시고, 의롭게 만드시고 하는 일이 필요 없도록 완전히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와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까지 충만한 사랑을 누릴 수 없으니 의의 면류관은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은 모든 시험 속에서 믿음으로 참고 견뎌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의 복을 주님을 사랑함으로 시험을 참는 사람에게 지금 여기서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맛보게 하시는지 궁금하죠? 이런 방식으로 맛보게 하십니다. 도저히 내가 이길 수 없는 큰 시험을 당했습니다. 큰 시련 속에서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감당할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뜹니다. 말씀이 없이는 그런 믿음이 생길 수가 없고, 그 믿음이 유지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없이는 믿음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은혜를 받습니다. 걱정이 되는 자기 인생사만 바라보며 한참 낙심을 했다가 말씀을 보면서 눈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주님을 보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그것을 믿음으로 눈을 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자기를 향해 베풀었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시험을 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랍게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예기치 않았던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눈앞에 시험이 든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바꾸어 주셔서 능히 이길 수 있도록 이 속에서 생명의 즐거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삽니다.
두 번째는 의의 면류관도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우리가 항상 순종하나요? 그리고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나요? 여러분들은 그럴 수 있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양심은 요동치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고발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하나님 앞에 뻔뻔스럽게 예배를 드려? 기도를 해서 주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너 같은 인간의 아버지일 수가 없다 양심이 송사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도저히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를 바라보게 됩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께로 갑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의지할게 없다고 믿고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우리의 양심의 멍에를 벗겨 주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나를 의롭게 하셔서 세상 사람이 다 나를 향해 손가락질해도 하나님이 나를 옳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한번 불순종이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불행에 몰아넣지 못하도록 하나님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험을 당하고 있는 여러분들 아마 예외 없이 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에 이끌려 여러분들이 어지러워지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심의 흔적들을 어디에서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그 마음의 온유들을 어디에서 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방법과 수단으로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결코 되지 않습니다. 마치 올무에 걸려 미친 듯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그 다리 사이를 찍어 누른 그 톱니들이 계속 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여러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때 우리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시험을 이기고 다시 살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믿고 잠시 시험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매우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정말 죽어도 가기 싫은 곳이 병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병원에 가서 BCG 예방 주사를 맞고, 홍역 예방 주사를 맞고 이러면서 우리는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시험 없이는 여러분들을 온전한 신자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을 믿고 끝까지 주님의 생명으로 이 시험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C. 주를 사랑하는 자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많은 시험 속에서 괴로움을 당할 때 그것을 참게 만들어 주는 힘은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은 자기를 지탱하는 힘이고, 이 생명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랑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늘 부어주시는 이 생명 속에서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생명이 모자라는 것만큼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시련을 견딘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시련을 견디는 것이니 시험을 참는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경주를 하듯이 우리의 인생길을 달려갑니다. 왜 어떤 사람은 시험을 이겨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어떤 사람은 시험 중에 패배하여 악에 빠지게 될까요? 예전에는 우리가 넉넉히 이겼는데 지금은 그 시험 중에 낙담하고 미끄러져 부패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예전의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알고 교회에서 직분도 갖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생명,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때만큼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큰 시험은 없습니다. 우리가 당한 시험이 큰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은혜가 너무 작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충만한 은혜를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했는데 시험 좀 피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투덜거리며 기도하는 마음이 원망이 되고, 원망이 낙담이 되고, 낙담이 반역하는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시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까짓 시험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길 수 있는 큰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도 은혜가 없으면 이론만 많아지고 논쟁적이 됩니다. 생명의 힘이 없으면 아주 작은 시험에도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시험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충만한 은혜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은혜의 경험에서 우리는 사랑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니 다시 이 말씀을 붙들고 충만한 은혜를 받아서 오랫동안 견뎌온 이 시험을 깔보듯이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시험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는 모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시험을 당합니다. 그래서 생각 없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복임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은 시험을 참고 믿음으로 견디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더욱 충만한 생명을, 사랑을 누리게 하십니다. 원망과 불평을 거두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눈물로 구하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4.28._주일오전)
8. 시험의 원인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두주동안 고난과 십자가, 부활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3주 만에 다시 야고보서 본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억이 잘 나시지 않겠지만 3주 전에 설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를 다루었는데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신령한 복이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련을 견뎌내게 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배웠습니다. 시험을 이긴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생명의 면류관은 천국에서 받을 미래의 면류관일 뿐만 아니라 지금 시험을 이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II.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 하시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의문점 중의 하나인 시험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해서 먼저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 1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나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바치는 시험이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구절은 아니지만 역대하 32장 31절은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 32:31) 라고 나옵니다. 아주 분명히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모두 알고자 하여 시험하셨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타협의 여지없이 명백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명제가 주어질 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성경의 계시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성경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성경을 쓰시지 않고 사람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전달하고자 주신 계시가 오류가 있는 인간에 의해 기록되었을 때 그 기록된 결과를 보고 원래 있었던 하나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영감의 교리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는 동안 기록자들의 정신과 마음을 보호해 주셔서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류가 없이 기록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저자는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지만 기록자는 사람이고, 성경을 읽는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과 인간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어떤 사실의 본질을 보여주고,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동쪽에서 해가 떠서 달음질을 하며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보고 해는 떴다가 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우리는 과학 시간에 그렇게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밤과 낮이 바뀌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에 가면 그 원리를 보다 상세하게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노래하거나 시를 쓰거나 또 흔히 대화할 때에도 아침에 일어났더니 해가 벌써 떴더라고, 해가 지고 나니 참 깜깜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이제 해가 져서 어두운 밤이 되었지만 잠시 후면 태양이 다시 뜰 거예요. 그때가 되면 슬픔은 물러가고 기쁨은 올 것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이런 종류의 노래를 우리는 훨씬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지구가 반 바퀴 회전해서 저녁이 되었다고 하는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부정확한 문학적인 표현들을 더 편안하게 사용하면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가 하는 문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시험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시는 분도 아니시지만 그러한 시험 속에 들어가게 된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면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모든 삶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해석을 하고 거기서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공중변소 앞에서 여러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 죄송한데요. 이거 잠깐만 맡아주시겠어요?” “이게 뭔데요?”, “돈이거든요.” “꼭 부탁해요” 화장실 다녀와서 주인이 그것을 가져갔다고 해서 여러분들은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돈 가방을 맡겼습니다. 화장실 들어갔는데 안 나옵니다. 그래서 화장실까지 따라가 보니까 없어졌습니다. 당연히 바로 경찰서 갖다 주고 신고를 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또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미적미적하다가 집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열어보니까 1억 원의 돈 다발이 들었는데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명백한 범죄인 것 아시죠? 점유이탈물 횡령죄입니다. 그래서 즉시 경찰에 신고해야 됩니다.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범죄행위입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안 찾으러오고, 2년이 지나도 안 옵니다. 그래서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10년 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저 그때 돈 가방 맡긴 사람인데요.”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경찰서에 갖다 신고하면 1년 후면 여러분의 소유가 됩니다. 세금 떼고 여러분들에게 줍니다. 그런데 보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전화가 오니까 양심에 안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인에게 건네주고 오는데 그렇게 섭섭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100세에 아이를 낳기를 포기했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주셨습니다. 누구 아들입니까? 하나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달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살아온 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록하면서 아브라함의 관점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아브라함은 엄청나게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해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논변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한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이 하나님의 관점 하나로 쓰였다면 우리는 매우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쓰였으면 하나님을 불변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 사이를 오가면서 기록되어 그렇게 우리를 소통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III. 시험의 원인
이제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과 시험하지 않으시는 것과 인간이 실제로 시험을 당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고 나면 이제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한 가지 중요한 주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험의 원인이 무엇인가? 본문은 시험의 원인뿐만 아니라 진전, 그리고 다음 주에 설교할 내용에서는 결말을 한 번에 보여줍니다. 먼저 본문은 시험의 원인과 진행의 경로에 대해 다음 네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욕심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했습니다.
A. 욕심에 이끌림
첫째로 욕심에 이끌립니다. 신자가 시험을 당할 때 마음의 첫 번째 활동은, 움직임은 욕심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 욕심은 대상이 아주 다양합니다. 아주 돈이나 물질부터 시작해서 명예와 외모, 권세, 쾌락, 사람 등등 모든 사물에 포괄하는 폭 넓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욕심에 이끌린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없었던 것을 어떤 상황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바닥에 이미 있었던 것을 어떤 계기와 상황을 통해서 그것을 다시 의식의 수면위로 올라오도록 끄집어내는 활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은 어떤 대상에 집중하게 되고 그것을 갖고 싶은 혹은 그것과 함께하고 싶은 욕심에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끌리면서 그러면서 특정한 기회를 만나 그 욕망이 의식의 수면위에서 확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도 그 자체가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시험이라고 할 때 여러분들이 흔히 말하는 언어의 용례에서 시험이 들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악에 이미 빠진 상태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가 들어있는, 어떤 사람이 들어있는 어떤 상태보다는 훨씬 훨씬 더 초기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에 시작을 하면서 저는 시험에 대해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 정의에서 시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가 모두 시험의 상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떠한 환경도 그 자체가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깊이 시험에 들고, 어떤 사람은 은혜의 절정을 구가하는 것도 환경이 동일하게 모든 사람을 시험으로 데려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그 용어 자체가 환경과 무관하지 않지만 환경에 둘러싸여서 영향을 받고 있는 신자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시험에 드는 것은 결국 신자의 마음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고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사람이면 100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소위 신테레시스라고 하는 공통적인 감각이 있어서 그래서 인간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공감을 하고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사람이 단일한 마음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서로 다른 마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다른 마음도 동일한 마음의 능력(faculty)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 가지인데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합니다. 이것을 고전적인 용어로 지성, 정서, 의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마지막 죄에 관련해서는 의지의 역할이 있는데 의지나 지성, 정서는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능력이 있고 사태가 발생하면 지성이 그것이 알고 판단하고, 정서가 그것을 보며 싫어하고 좋아하는 느낌을 발휘하고, 의지는 그것을 따라서 두 가지를 선택하게 되는데 원하는 것을 하는 능력과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소위 라틴어에서 볼로(volo)와 놀로(nolo)라고 하는 두 가지 능력이 의지의 능력입니다.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시험에 드는 것이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신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성경이 그리는 인간관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차꼬에 쇠사슬로 꽁꽁 묶여서 어두운 지하 감옥에 던져진 죄수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손발이 모두 묶였기 때문에 일정하게 발걸음을 떼어놓을 자유는 있으나 그 방을 나가거나 달려가거나 뛰어가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도덕에 관한한 인간이 이런 노예 의지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도 아주 착한 남편도 있고, 선한 아들도 있고, 인자한 부모도 있고, 예수 믿는 사람보다도 훨씬 더 충실한 시민도 있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만 성령의 역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성령의 역사조차 거두어 버리시면 그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류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사회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예배당에 모였는데 점심에 먹은 것이 부실하다고 옆에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무서워서 어떻게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우리 중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완전히 거두어 버리시면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어서 인류가 안전하게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도덕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그 근거가 없습니다. 혹은 약합니다. 왜 부모를 공경해야 되나? 왜 한 여자가 한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자식은 사랑해야 하는가? 과연 이성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일반 성령의 일반적인 작용 속에서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인류는 보존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의지가 차꼬에 묶인 상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덕스러운 삶을 살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전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또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위해 죽었다거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는 길을 안다거나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생각해 보시겠죠. 자, 북극에서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여기에 있는 이 헌금통만 합니다. 그 위에 섰을 때 여러분들은 얼마나 불안할까요? 아마 잠잘 수도 없을 것이고, 당연히 누울 수 없으니까 아마 자기를 구조해줄 배만 기다릴 것입니다. 여러 해전에 북극에서 얼음이 떨어져 나왔는데 한반도 크기의 두 배쯤 되는 것이 떨어져 나왔답니다. 만약에 그런 부빙 위에 있다면 여러분들은 놀라운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지평선이 보이고, 그리고 보는 모든 것이 하나의 벌판이니까 여러분들은 그게 떨어져 나왔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따뜻한 바다로 내려오면서 결국은 언젠가는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한주먹의 얼음이 되어서 사라질 것입니다.
자,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비교적 넓은 얼음위에 있고, 그런 사람은 덕스럽게 보이고, 어떤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좁은 얼음 위에 있어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그렇게 의지가 노예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도 선을 행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선을 행했을 경우에는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경우에는 차꼬에서 풀려나와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구원 받았으나 아직 완전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안에 인간의 죄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성령 충만하면 은혜에 붙들려서 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그러나 그렇게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을 때 생명의 원리는 약해지고 죄의 원리는 강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원리적으로는 그가 모든 차꼬에서 벗어났으나 실제적으로는 죄에 묶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령님이 감화시키셔서 그래서 성령님이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때문에 선을 행한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해야지 도구였던 자신을 자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나 그가 악을 행했을 때에는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물을 수 없으니 하나님이 만약에 인간의 악을 조장하시거나 혹은 그 죄를 짓게끔 만드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자해적인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데 악은 자신의 존재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셔서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해하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특히 악한 의지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오직 하나, 죄 밖에 없습니다. 모든 선한 것과 존재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하와의 시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는 금세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류의 첫 조상 하와의 시험을 생각해 보라. 마음이 하나님 사랑에서 떠나자, 욕심에 이끌려 계명을 어기게 되었다(창 3:6) 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어떤 즐거움에 탐닉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는 자기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자기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관,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을 있게 한 하나님과의 연관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참다운 인생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그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고, 커서는 형제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더 커서는 친구들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더 커서는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그리고 사회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하는데 불가능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는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경험의 깊이만큼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이 주는 사랑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우리 존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나 그것은 궁극적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아닌 것에 대한 사랑은 항상 마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도 인간은 처음부터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타락했다고 사랑의 크기가 줄어든 게 아니라 사랑의 능력은 그대로인데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는데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고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 사랑하면서 살지만 그 사랑은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얘기는 인간에게 주신 참된 사람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의 죄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 위에는 자기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의 존재의 원인이며 자기의 존재의 목적이고, 결국 이 세계가 있게 된 발생 원인이며 그리고 세계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목적론적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구나.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있구나.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구나’고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그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고백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하는 주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세상에는 하고 많은 사랑이 있습니다. 작은 장신구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동물들, 그리고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사람들, 연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자신의 꿈과 야망, 때로는 쾌락, 외모, 이런 것들에 대한 사랑의 대상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동기가 된 사랑인지를 추적해 들어가면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늘로 향하고, 하나는 땅으로 향합니다. 땅으로 향한 것은 자기 사랑이고 하늘로 향한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 둘 중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세상의 나라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결국 시험 당했을 때 마음의 첫 번째 활동은 욕심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신자도 이렇게 욕심에 이끌립니다. 시험은 예외적인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그릇된 안전에 취하지 말고 이렇게 시험을 대비하십시오. 그리고 이미 시험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자기가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며 욕심에 더 이상 이끌리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생각이 미혹됨
두 번째는 생각이 미혹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당하지 않은 욕심에 이끌리면 그러한 욕망의 정동에 의해 인간의 생각은 미혹됩니다. 죄가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한데 첫째는 죄가 자신을 감추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생각을 혼란시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을 통하지 않고는 죄가 결코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말해서 죄는 지성의 동의 없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한중일러 이 네 나라는 아주 넓지 않은 국경을 맞대고 스텔스 경쟁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스텔스기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레이다로 감지할 수 없는 비행기를 뜻합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모든 비행기는 그 나라의 공항을 이륙하면서부터 적의 레이다에 완벽하게 탐지됩니다. 심지어 그 비행기가 떠서 관제탑과 송수신하는 모든 내용도 거의 완벽하게 감청됩니다. 그런데 스텔스기는 특수한 도료를 이용해서 레이다의 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레이다의 전파를 흡수해서 그래서 레이다의 표면에 거의 안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F35의 크기가 12.5m정도 되는데 실제 레이다에 잡힐 때에는 새만하게 잡히는데, 그것을 일일이 전투기로 간주하려면 24시간 거의 비상상태에 있어야 되기 때문에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성능이 우수한 F22기는 매미 정도의 크기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700조의 개발비를 들인 이 비행기는 미국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팔지 않는 비행기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F35는 여태까지도 많이 팔았는데 앞으로도 3200대를 더 팔 예정이라고 합니다. 돈 있는 모든 나라가 그 비행기를 사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자, 이렇게 스텔스기가 있으면 왜 무서울까요? 레이다에 감지되지 않고 곧바로 날아가는데 20km 반경 안에 들어와야지만 레이다에 정상적으로 잡힌다고 하는데 20km정도면 불과 한 30여초 만에 날아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니 이미 감지되었을 때에는 4층에서 지하로 내려가기도 바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텔스기를 서로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스텔스기가 없었던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비행기가, 전투기가 뜨기 위해서는 사전 작업을 합니다. 폭격기가 아주 높이 떠서 대공포화가 미치지 않는 곳에 높이 떠서 철저하게 폭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이더와 그 다음에 대공포 시설을 무력화시킨 후 확인 후에 본격적으로 전투기가 떠야지만 희생을 줄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 예화를 들고 있는 것일까요?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가장 큰 난관을 헤쳐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성의 감시입니다. 생각의 감시를 피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의 마음이 욕심에 이끌리자마자 즉시 욕심에 이끌린 마음은 지성에 영향을 주어서 그런 자신의 욕심과 죄를 분간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 넓은 호수가 있는데 바람 한 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물가에 서 있는 풍경과 호수 수면 위에 있는 풍경 사이의 데칼코마니를 경험합니다. 똑같은 것이 두 개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실물을 보지 않고 호수면을 보면서도 그 실제 있는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붑니다. 그래서 물결이 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욕심에 이끌린 마음은 즉시 지성에 영향을 주어서 죄가 침투하고 들어온 죄가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의 질서가 혼란하게 되면 이것은 그릇된 욕망이 들어와 오래 거주할 수 있는 자리를 준비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인간의 정신 작용은 영혼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모든 정신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그 기능이 지성, 감정, 의지, 판단력, 이런 모든 다양한 정신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영혼의 상태가 아주 올바르게 되면 즉,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성에 딱 바르게 자리가 잡고 있으면 그 하부에 있는 정신 작용이 굉장히 정상에 가깝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경우에는 그 모든 정신의 작용들이 심각한 결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한 대에 45억, 50억에 경매가 나오고, 요요마가 가지고 있는 첼로는 75억짜리라고 합니다. 아마 그 가격은 매해마다 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명품 악기를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명연주자들도 반드시 연주회 전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모두 풀어가지고 온 현을 연주회 발표 직전에 피아노에 맞춰서 그 현을 튜닝하는 것입니다. 한 줄, 한 줄을 튜닝해서 정확하게 피아노 음에 맞추고 하나하나를 모두 맞춘 다음에 활을 들어서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연주해 보면 복합음이 나옵니다. 화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완벽히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연주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관계에서 보자면 그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경향성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인간의 각 정신의 줄, 지성, 정서, 의지는 하나하나 완벽한 음으로 튜닝이 되고, 그것이 마음속에 있는데 어떤 삶의 사태가 도래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건드립니다. 건드리면 아주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분명히 다가온 것이 시련이고 역경인데 그 삶의 사태가 마음을 스치고 지나갈 때 아주 아름다운 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쁜 일이 있고,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러한 좋은 삶의 사태가 그 사람의 마음을 건들고 지나가면서 아주 아름다운 가락을 품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야, 저렇게 바이올린 소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그리고 저 사람이 당한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저 소리가 더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하면서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저 사람의 정신의 줄을 저렇게 아름답게 튜닝하게 만들었을까? 궁금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와서 보니까 나는 이런 사람들만 모인 줄 알았는데 와보니까 이 사람은 바이올린인데, 이 사람은 첼로입니다. 이 사람은 세컨 바이올린이고, 이 사람은 콘트라베이스고, 이 사람은 비올라, 클라리넷, 풀룻, 오보에 등등등 다 악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나는 소리가 다 다른데 기가 막히게 튜닝이 되어 있어서 각자 다른 소리를 내서 이상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신비하게 어울리면서 심포니가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소리에 커다란 울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저 곡조는 누가 작곡 했을까? 저 완벽에 가까운 악기의 튜닝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저 아름다운 곡조를 지휘하고 있는 저분은 누구일까?’ 생각하면서 여태까지 보였던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과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저는 바이올린을 켜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단언할 수 있습니다. 과르네리(guarneri)나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같이 수십억짜리 바이올린이라도 튜닝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주를 한다면 100 만원 짜리 바이올린을 완벽히 튜닝했을 때 더 아름다운 소리가 나리라고 확신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줄 풀어진 피아노를 쳐봐야 꽹과리 소리밖에 더 나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목사님,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스트라디바리우스 없어요. 그냥 길거리에서 장난감 가게에서 사온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임무는 지금 길거리표 바이올린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되는 것은 내 몫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사온 바이올린 같은 나의 인생이지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 자신이 어떤 일을 만나도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일을 만나도 내 마음에는 아주 아름다운 울림이 퍼져서 적어도 나 때문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고, 또 나의 쓴물을 받아주어야 하는 사람은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기본적인 의미가 아닙니까?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쓴물 같이 고통을 주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겠습니까? 정말 싫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면 정말 살아야 할 가치가 있을까요? 무엇인가 끊임없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역경을 겪지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정신의 줄을 켤 때에 그 속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게 해서 결국은 그 때문에 더 향기로운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수도 없이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 대부분 살아있는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만 명심하세요. 절대 여러분 마음대로 인생은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식물학자들이 이런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꽃이 왜 향기를 품어낼까? 벌을 부르기 위해서 그러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꽃이 향기를 냄으로써 해충의 침입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향기를 품어낸답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침범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식물원에 가면 허브를 맛볼 때에는 허브를 막 때려야 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향기를 확 품어냅니다. 허브가 양쪽에 있을 때 막 치면서 두 바퀴만 돌면 그 방을 가득 향기로 채웁니다. 그런 것입니다.
(찬양)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명심하세요. 절대 여러분들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목표를 그냥 육신적인 행복에서 구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방향을 정한 것이고 혹시 그것이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에서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 퍼지지 않는데 누가 옆에 붙어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면서 생각이 미혹되는 것입니다.
C. 욕망이 증가함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 욕망이 증가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욕심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에피투미아’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많이 철학 시간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에미투미아’입니다. 그런데 ‘에피투미아’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빌립보서 1장 21절에 의하면 좋은 것에 대한 욕심을 의미합니다. 긍정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는, 로마서 7장 7절에서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에 대한 욕망입니다. 세 번째는 부정적이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은데 어쨌든 그래도 적극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2절인데 거기에 ‘정욕’이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한 여자가 사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쁘게 몇 년 살다보니까 남자가 너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부부생활도 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질서 지워진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서 지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바람입니다. 원함입니다.
예를 들자면, ‘남자가 너무 그립다. 그리고 함께 살갑게 부부생활도 하고 살고 싶다.’ 그러려면 먼저 결혼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세워지고- 가정이라는 게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안 낳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와 같은 구도가 세워지고 나서 그 다음에 이런 원함들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는 다 필요 없고, 바로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피투미아’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인 부정의 뜻이 아니지만 맥락이 없이 확 솟아나오는 어떤 감정을 가리키니까 긍정적이라고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욕심이라는 ‘에피투미아’가 가리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분간하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 자신이 선입니다. 최고의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고의 선인 동시에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좋을 것과 아름다운 것은 그분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최고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부에 있는 모든 우리가 발견하는 진리와 규칙들은 그분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분이 그 모든 사물들을 붙들고 관계를 맺으시기 때문에 여전히 선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참된 것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경향이 있냐 하면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이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가 보기에 ‘예쁘다’라는 것이 있을 때에는 객관적으로 명백한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가 예뻐 보이는 것을 따라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미에 대한, 참된 아름다움에 대한 착시현상 때문에 인간은 선을 떠난 예쁜 것을 선택해 버려서 결국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인간에게는 크게 세 가지 숙제가 남게 됩니다. 첫째, 정말로 아름다우면서도 좋은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훈련된 정신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둘째,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선으로부터 이탈된 착시현상에서 온 아름다움일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됩니다. 자기가 좋은 것이 모두 하나님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결국 마음 안에서 자기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하다고 하는 것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을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자신의 능력으로만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그 분께 붙어있는 영혼으로서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성화의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 가지 숙제를 가지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이 숙제를 모두 풀었다고 하기에는 매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것이 뭐냐 하면 욕심에 이끌려 생각이 미혹되고, 욕망은 마음속에서 증가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었다든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든지, 아니면 내 마음을 나도 통제할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미 싫증이 나도록 우리에게 널리 들어오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우리들이 지성적으로 정돈된 생각을 갖는 것이 영적인 회복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영적 회복 세미나를 지금 2회째 했는데 첫 시간은 무수한 질문의 시간입니다. 궁금한 것을 모두 내놓고 그 다음에 가치가 없는 질문만 빼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질문은 말도 안 되는 질문도 있으니까 그것은 공통성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 놓고 띄워놓고 충분히 이해될 때까지 설명합니다. 그게 사실 기도보다 더 중요합니다. 지성적으로 정돈된 사람이 모두 열렬히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일 없이는 후자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성을 바르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두 개의 레이더가 있는데 한쪽 레이더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압니다. 막힘이 없습니다. ‘얘야, 평촌에 맛집이 어디지?’ 다 꿰고 있습니다. ‘어디서 머리 잘하니?’ 다 뀁니다. ‘어디 사우나가 시절이 좋지?’ ‘체육관 어디가 새로 지었어?’ 모두 다 압니다. ‘어디서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나오지?’ 다 압니다. 이쪽에 신령한 레이더가 있습니다. 자연적 레이다입니다. 신령한 레이더는 대게 이런 것을 탐지합니다. ‘너 왜 사니? 그리고 지금 너에게 일어나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니? 니가 계속 이렇게 기도도 안하고 시험에 빠져서 살면 5년 후에 너가 무엇이 될까?’ 이런 질문 해보면 자연적 레이다에서는 답을 수없이 내었던 사람이 모두 ‘아 몰라!’주의로 일관합니다. ‘아, 몰라. 생각 안 해봤어.’ ‘나 몰라. 너 그런 질문 계속하려면 나 만나지마.’ 그렇습니다. 그런 자들은 (영적인 것들을 탐지하는 레이더가) 고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돌리고 있는 것이 세속적인 삶입니다. 여기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무슨 평안이 거기에 있겠습니까? 그냥 놀 때 잠깐 재미있는 것입니다. 뭐가 재미있겠습니까? 이 레이더가 근본적으로 자기 인생에 대한 답을 주는 것입니다.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마음이 시험에 빠져 있으면 이상하게 이쪽 정보를 피합니다. 오늘 저녁에 모든 것을 끝내고 죽고 싶습니다. 그래서 드러누웠다가 이제 약을 먹어야지 하고 몸을 탁 틀었는데 책꽂이에 책이 딱 눈앞에 꽂혀있는데 ‘자살을 피하는 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사람은 그 책을 꺼내서 돌려 꽂아놓고 자살을 실행합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이미 너무 강해졌습니다.
그렇게 시험에 들고 나면 욕망이 점점 증대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은혜 받은 사람에게서 연락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전화만 받아도 자기가 진리에서 멀어져 있고, 은혜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에 그 사람을 피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죄와 시험에 들어있는 상태가 그렇게 하도록 사람을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인생을 살면서 잘 보십시오. 조금 성공했다고 남의 말 절대 안 듣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사람들은 덕스러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때로는 너무 써도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경청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이 정말 뭐가 잘못됐는지를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쓰라리고 아파도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몸에도 정말 병이 심각하면 쓰디쓴 약을 쓰고, 때로는 칼로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야 하듯이 우리의 망가진 영혼도 때로는 그렇게 쓰디쓴 약이 필요한 것이고, 그런 약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이 영혼과 정신이 얼마나 망가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약국 가는 심정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정확하게 아파도 그냥 아 몰라 그러고 피하지 말고,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들어보고, 내 영혼의 상태가 어디에 와 있고, 무엇이 잘못됐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어떻게 미끄러졌고, 여러분의 상태는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무슨 조치를 취하여야 할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이 ‘널 위해 기도해줄게. 그리고 너도 저녁때마다 와서 기도해라.’ 그렇게까지 말해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을 무슨 수로 끌고 나와서 저녁 8시에, 그것도 피곤하게 퇴근한 시간에 교회에 무릎을 꿇어놓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은 같이 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그것도 일단 알고 나서 그대로 할 건지 말건지에 대해서는 자기가 결정해야 될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모르고는 절대로 그런 영혼의 회복이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영혼의 회복이 있을 때는 항상 회개가 있었고, 회개는 항상 찌르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그것이 양심을 찌르는 고통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진실한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진리입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필적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심에 이끌리고, 생각이 미혹되어 혼란스럽고, 욕망이 증가해서 자기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진리의 빛이 환하게 비치면 필요 없는 것들은 빨리 들어가 숨어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은 진리를 기뻐하면서 숨었다가 튀어나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그것을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물입니다. 하나님도 사물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고, 그리고 동물과 식물들이 있고, 무생물들이 있고, 이것들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사물이고, 인간도 사물이고, 천사도 사물이고, 그리스도도 사물이고, 댕댕이도 사물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 풀꽃도 사물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물이 다 똑같은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사물이면서도 그분은 다른 사물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사물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물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존재는 스스로 영원히 있는 존재이고, 나머지 모든 존재는 그 존재 때문에 존재하는 사물들입니다. 그것은 존재의 질서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인간, 천사들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이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위고, 그 다음이 우리 인간이고, 그 밑에 있는 것들은 우리 이하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밟고, 지배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는 이라고 하는 말에는 ‘백인’만 들어갔습니다. 특별한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기독교 죄악사를 양산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인데,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지만 우리를 그렇게 짓밟고, 지배하시고, 폭압하시고, 파괴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까? 아닙니다. 위에 있는 상위의 존재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하위 존재에 그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만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인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생각할 때, 이런 나무, 풀, 자연, 모든 것들이 인격까지는 아니지만 목격(木格), 초격(草格), 화격(華格), 견격(犬格), 공격 등 이런 격조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지음받은 같은 피조물로 여기고 깊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들조차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화해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이런 식으로 기술 혁명 하나에 의존해서 (무제한 생산해내는) 비닐을 사용하여 세상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문명을 건설해 가는 것은 자멸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도 그 안에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뉴질랜드 청정해역에서 2000km 떨어진, 어떤 의미에서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청정해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해수를 떠서 조사를 했는데 이미 플라스틱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전 세계를 따라 돌고 있고, 해류가 수면에서 수면 아래까지 뒤집히면서 전 세계를 도는데 1000년이 걸립니다. 그러면 이제 1000년 정도 후면 이것은 단순히 국지적인 일이 아니라 저 7000m 심해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지구 표면이 오염되고 인간은 그것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런 존재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이 존재의 질서가 가치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하위의 가치와 상위의 가치를 뒤집으려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것을 공정하게 사랑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이 인간의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마음 안에 들어온 죄가 이미 욕망을 증가시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해결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밝은 빛이 확 비춤으로써 그 존재의 질서를 보여주고, 가치의 질서를 보여주고 나면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허무한 것을 사랑해 왔는가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고, 이에 비해서 참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들은 얼마나 사랑하지 않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런 진리의 빛 아래 살면 살수록 이렇게 수시로 마음에 이끌린 욕심들이 제거되고, 그 다음에 미혹했던 생각이 다시 해방이 되어서 맑은 정신을 갖게 되고 그리고 의지가 올곧음을 다시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런 진리의 빛 아래 살지 않을 때 그릇된 욕망은 마음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는 무지라는 환경을 너무 좋아합니다. 죄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여러분 성경공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는 것입니다. 아주 질색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그렇게 받는 진리의 빛이 결국 자기를 탐색해내고, 은혜는 그것을 아예 칼로 찔러서 내쫓아버리고 죽여 버리니까 너무너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설교 시간에 졸고, 딴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일체 성경공부 안하고 그렇게 다닐 때 악마는 박수를 치고 성령은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새 가족 공부 안한 사람들은 가세요.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 그렇게 지겹도록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기 싫으면 그냥 예수 믿는 것을 관두십시오. 여러분들은 계속 갈등을 일으키고 교회에 있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괴롭게 할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안 믿어야지,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 낯간지럽지 않습니까? 이게 믿어야 될 종교인지, 관둬야 될 종교인지, 그래도 한 달은 심사숙고하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제가 조금 유해진 것 같습니다 설교도 너무 물렁물렁해졌습니다. 옛날 테이프 들어보면 성도들을 향해 맨날 하는 소리가 ‘나가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려면 가라고 말입니다.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또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의 한 인간으로서 저도 그런 삶을 살아온 날이 없지는 않기에 수치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주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마지막에 목이 잘려도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 주체성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느낀다. 내가 선택한다. 나는 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영혼으로, 내 마음으로 나는 산다.’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답게 사는 길을 수없이 찾으며 살았는데 그것들은 나를 불행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면 이제 그분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예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 나이에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될 지도 모르고, 심지어 더 수치스러운 것은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도 결정 못하는 그런 우유부단한 존재가 되어서 매일매일 맛집이나 찾아다니고, 예쁜 옷이나 입고, 장신구나 사고,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이 거리, 저 거리 다니면서 희희덕거리고, 공허한 마음에 술잔이나 기울이고, 그리고 재미있는 영화나 보면서 좋아하고 그게 무슨 인생입니까? 소비에 기대는 인생은 인생이 아닙니다. 소비는 하지만 우리는 기댈 수 없습니다.
내가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입니다. 왜 진지해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인생이 달린 문제이고, 행복이 달린 문제입니다. 너무나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애매모호한 태도로 예수를 믿고, 한 인간으로서도 전혀 주체성이 없는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 날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50이 넘어서 엄마를 원망할래요?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 주인공) 정준호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정준호처럼 전국 수석도 못했잖아요. 그런데 드라마 내에서 정준호는 전국 1등이라도 하고 나서 엄마가 자신의 교육은 제대로 시켰지만 사람은 못 만들었다고 울부짖습니다. 우리 중 그런 고백을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둘 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아니 왜 진지해지지 않아요? 진지해질 능력이 있고, 건강이 있고, 그리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곤충처럼, 불나방처럼 빛이면 마구 뛰어들고 어둠에서는 또 다시 빛을 찾고, 그러다가 모깃불에 타죽는 그런 인생이 그렇게 좋은 인생입니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을 가지고 살아가면 영적인 변화를 받아도 그게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손안에 붙잡았던 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D. 의지로 산출함
네 번째 단계는 욕망이 증가해서 정점에 다다르게 되면 의지로 죄를 산출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서 선택한 악을 실행함으로서 죄는 산출됩니다. 그런데 마음 안에서 성장한 모든 욕망이 모두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산출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죄를 산출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필요합니다. 자, 이것을 이제 잉태하는 것을 성경에서 묘사했는데 다음 시간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것입니다. 이제 여자가 아이를 가집니다. 그래서 산달이 됩니다. 그러면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고 아기가 제 위치에 있는지 확인을 합니다.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예정일이 딱 됐는데 산기가 옵니다. 병원으로 바로 갑니다. 그러면 양수가 터지고 아이가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한 채로 몸 밖으로 자꾸 나가려는 자세를 갖게 되면 여자의 하복부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근육의 힘이 발동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오려고 할 때 반사적으로 이 하복부에 엄청난 힘이 들어갑니다. 호흡한 것 같은 유사한 속도로 훅훅 하고 힘이 들어가면서 근육이 모두 수축되어서 아이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밖으로 출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을 주세요. 힘을 주세요.’ 그러는데 힘을 주지 않아도 정상적인 여성은 아이가 나오려고 하면 비상하리만치 복부에 근육이 뭉치면서 내장에 어떠한 공간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이 뭉치면서 아이를 몸 안에 있을 수 없게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출산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신체에 문제가 있어서 도저히 힘을 동원해도 애를 못 납니다. 출산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그 안에서 아이가 죽습니다. 요즘은 제왕절개로 꺼내지만 출산이 안 됩니다. 이게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죄를 산출하고자 하는 의지가 지속되어야 됩니다. 6시 15분쯤 모든 교회 일과를 마치고 가방을 들고 막 계단을 내려가는데 얼음을 띄운 시원한 콜라를 유리잔에 담아서 한번 쭉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가서 먹어야지’하면서 길을 가다가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편의점을 지나쳤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데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니야. 혹시 집에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콜라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우유만 있습니다. 문을 도로 닫아버렸습니다. ‘지금 빨리 내려가서 편의점에서 하나 사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심각한 내용의 뉴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옷도 벗지 않고 뉴스를 계속 보았습니다. 빨려 들어갈 듯이 한 30분 시청을 했는데 그제서야 콜라가 먹고 싶은 것입니다. ‘아차, 콜라 먹어야지.’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옷을 전부 벗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것입니다. 콜라를 사러 가려면 다시 양말을 신고, 옷을 갈아입고, 코트를 걸치고, 지갑을 들고 나가야 하는데 ‘아우, 귀찮아. 에이 그냥 물이나 먹고 말지.’고 하며 정수기 옆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날 저는 결국 콜라를 마시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떠날 때 콜라를 마시고 싶은 욕망은 진실했습니다. 그럴 의지도 있었습니다. 의지의 힘이 콜라를 사먹지 못하게 하는 많은 요인과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지속성(continuity)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도 그런 의지의 지속성이 없으면 산출이 안 됩니다. 한 사람의 행동으로 어떤 죄가 산출되었을 때 그것은 오늘 생긴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 출산하기 위해서 누적되고 누적된 힘, 그리고 충분히 성숙할 수 있는 지속성이라는 조건이 무르익었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조건이 모두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죄는 아무 때나 산출하지 않습니다. 죄는 아주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번 소모품으로 쓰이고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기를 낳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 죄의 결과들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퍼트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목적하는 것은 선이고, 죄가 마지막 목표로 삼는 것은 악입니다. 죄를 낳았는데 일체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친구를 만나서 온갖 못된 소리를 다 쏟아 붓습니다. 충분히 산출한 것입니다. 가는 길에 처음 생각이 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저 인간을 만나면 언젠가 한 대판 해야지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쫙 쌓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적합한 시점을 만나 폭발한 것입니다. 그날 그 친구를 만났지만 그 친구가 나를 천사처럼 대접했으면 절대 안 그랬을 텐데- 왜냐하면 거기는 죄를 산출하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임- 평소와 똑같이 갈등이 생기면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죄가 산출하기에 기가 막힌 장소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확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죄가 산출되고 나면 이 죄는 이제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악이 되어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욕을 먹은) 이 자매가 심각한 상처를 입어서 돌아다니면서 나라는 인간은 사람도 아니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그러면 그 자매에게 복수심이 생깁니다.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그 자매도 밉고 그 얘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도 미운 것입니다. 이러면서 악을 퍼트리고 죄의 결과들을 만들어 내면서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어떻게 하길 바라셨겠습니까? 사랑하고 섬겨서 은혜가 상대방에게 흘러 들어가고, 나와의 만남을 통해서 상대방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널리 퍼져서 그 사람도 나도 하나님 사랑하게 되고, 종국에 사회 전체가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 은혜의 계획인데, 마음이 욕심에 이끌리고, 생각이 미혹되고, 죄가 자라고, 마지막에 의지로 산출되어 버리고 나니까 그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정말 사랑하며 살아야 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인간으로 생각도 안하고 살고, 심지어 그런 일이 교회 지체 안에서도 벌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일 수록 끊임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핑계를 대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썩어문들어진 여러분의 마음을 보세요. 그리고 한번이라도 무릎을 꿇고 ‘주여, 이 모든 악이 내 마음에서 나왔나이다.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옵나이다. 내 이 죄를 어떻게 해야 하오리이까’ 라고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제 얘기가 너무 쓰죠? 그리고 너무 아프죠? 그게 여러분들이 시험에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이미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도 아는 것이 유치원생도만도 못하고, 어른다운 결심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쏠리는 것도 아니고, 무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려고 합니까? 설마 예수 안 믿는 지금의 인생의 삶에 다시 한 번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어떤 카드를 만지는 것은 아니십니까? 그렇게 만지지만 말고 그냥 뽑으세요. 만지지 말고 한번 패를 던져 보세요. 해보라는 것입니다. 박쥐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삶을 살 바에야 한번 던져보고 진짜 온 몸으로 부딪혀서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죽음 직전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참된 신앙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아오기 전에 여러분들이 죽어버릴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농담처럼 하지 마세요.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집어치우세요. 여러분, 주체성이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의 공격을 받고 있는 동안에 신자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무얼 하실까? 하나님은 여전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죄가 산출되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죄들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억제시키십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말하면 ‘억제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많은 악한 생각을 품지만 실현되는 것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런데 소수인데 그게 너무나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마음은 얼마나 많은 욕심과 그릇된 악이 있을까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신자가 이렇게 죄의 공격을 받으며 갈등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우리 성령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귀를 막고 안 듣습니다. 들어도 마음을 기울여서 한 줄의 책도 읽지 않습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를 향한 자해적인 행위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귀에 흘려보내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거의 자해적인 수준의 고통스러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살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련의 강도가 더 높아지면 울부짖으면서 자기를 좀 살려달라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조금 생각이 달라질까요? 달라지면 여러분들이 구원 받은 사람이고, 안 달라지면 불신자입니다.
그런데 왜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왜 그렇게 걸레로 만든 다음에 주님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무슨 넝마 수집상입니까? 전부 다 걸레가 된 사람들만, 다 늙어서 기운도 없고 젊음도 사라지고 그리고 아무 능력도 없는 상태로 돌아오는 사람들만 주님이 수집하셔야 됩니까? 그러고도 얻는 이익이 있다면 해볼 만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여러분, 말씀 집회를 하고, 사람들이 은혜 받고, 주님을 만나고 하는 광경을 보면서 냉담한 여러분들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게 계속 살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덕스러운 인생을 자신에게 가져오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내가 무엇이고, 왜 태어났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인생에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집요한 질문을 던지면서 그것의 해결을 찾아야 됩니다.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너무나 이런 사실을 몰라서 괴로웠기 때문에 ‘하나님 저 좀 살려 주세요’라고 ‘제가 제발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진짜 한 3일이라도 금식기도 해봤습니까? 여러분 체력에 3일은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이어트도 좋고, 혈액 순환에도 좋고, 온 몸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 단식의 힘입니다. 그래서 200만원씩, 300만원씩 내고 가서 단식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왜 못합니까? 한참 젊은 나이에 그리고 아직도 살아야 될 인생의 날이 너무나 많은데 왜 못합니까? 그런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교회에 와서 철야할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 앞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주께 이끌린 마음을 주시고 붙들어 주셔서 여기서 돌이키게 해주시고, (죄에) 미혹된 생각을 주님이 맑게 해주시어 다시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나게 해달라고, 주님의 뜻을 알지만 행할 수 없는 나의 의지를 주님이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험 속에 있는 사람들은 외면하고 지나가시지 않습니다. 깊은 시험에 든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의 크기에 비해 시험의 깊이가 너무 깊기 때문에 그 은혜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하지는 못하고, 그 시험의 상황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준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다시 힘을 주셔서 순종하게 하십니다. 시험에 들어서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지만 회복되는 것도 그렇게 긴 기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번에 그 영혼을 살려내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은 은혜의 세계를 다시 들어가게 하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시험에 드는 것은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짐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질병에 들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 원하는 데로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고, 놀고 싶을 때 놀면서 그냥 살아가면 병이 듭니다. 노력을 특별히 안 해도 됩니다. 자연과 몸의 규칙에서 멀어지면 질병에 성큼 다가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삶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시험을 당합니다. 때로는 불같은 시험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겁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 속에서도 우리가 온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으면 주님은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감당해야 하는 시험이라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리고 감당해야 할 필요가 없는 시험이라면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피해가게 하십니다.
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서 사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영혼이 하나님 사랑의 경향으로 가득차고 마음의 현들은 아주 고르게 조율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살면서 때로는 시련과 고난을 만나겠지만 그 모든 환경은 그의 정신의 줄을 두드릴 것이고, 그것은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가락을 울려 퍼지게 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이 훨씬 많으니 안 될 때마다 마음에 끊임없는 불협 화음과 악취를 쏟아내고 죄를 생산해 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그런 인간이 되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모든 어려운 상황을 통해 하늘의 가락을 연주해 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리고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시험에서 능히 이겨 은혜 안에 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이 세상을 그렇게 아름다운 가락을 연주하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 2 (2019.05.05._주일오전)
9. 시험의 결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신자가 시험에 들어 죄를 짓게 되는 경로를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욕심에 이끌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생각이 미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욕심이 성장하는 것이고, 마지막에 의지로서 죄를 산출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어서 본문은 시험의 궁극적인 결말에 대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신자를 시험에 들게 할 때 신자에게 의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그 죄가 장성하게 하고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II. 시험의 결말
오늘 본문은 시험의 결말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목표는 시험 자체가 아닙니다. 신약에서 죄라고 하는 말,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단어는 세 가지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4절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행위를 죄라고 지정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된 상태, 혹은 죄를 지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9장 34절에 “너희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세 번째는 사람 안에 있는 파괴적인 악으로서의 힘을 죄라고 지칭합니다. 로마서 5장 20절과 21절에 죄가 왕 노릇한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람 안에서 죄가 성향이 되어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죄는 이렇게 세 가지의 뜻으로 크게 사용 됩니다.
A. 죄를 짓게 함
신자의 마음에 들어온 욕심은 즉시 생각이라는 기능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죄에 미혹된 생각의 동의를 받아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게 될 때 생각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망이 가득차고 나면 지성의 동의를 얻어내고 마지막에 의지를 재촉하여 죄를 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국은 생각이 죄를 짓도록 판단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이 더 옳다는 생각에서 비록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아비는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교만이 욕심을 키우고 욕심에게 동의를 해주기 때문에 죄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어떤 시험도 여러분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목적인 시험은 없습니다. 시험은 더 큰 일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시험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내면을 준비시키는 영적이고 심리적인 작용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시험의 이런 강력한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든 사람들은 그런 시험이 자기 속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될 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이미 욕망이 사고의 기능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온 즉시 죄의 원인과 결과를 감추고 흐릿하게 하여 우리의 의식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여러분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시험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여러분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은혜로부터 소외되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죄의 목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드는 것은 나도 피해를 입은 당사자일 뿐이고 주위의 환경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이 시험의 아주 정교한 계획을 무시하는 판단입니다. 시험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결국은 마음에 있는 경건의 세계를 무너뜨려 하나님 앞에 욕심에 이끌리게 하고, 생각을 미혹시켜 결국은 죄를 짓게 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B. 죄가 장성함
시험의 두 번째 결말은 그 산출한 죄가 장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죄의 성장은 마음속에서도 이루어지고 몸 바깥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마음에서 이 죄가 성장할 때 악한 경향성이 점점 자랍니다. 죄를 산출하게 되면 그 죄는 동생을 간절히 원합니다. 죄는 많은 형제를 거느리고 싶어합니다. 이미 시험을 통해 잉태되어 있는 죄의 태아들이 하나씩 하나씩 산출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어난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듯이 이제 통제할 수 없도록 죄는 생산되었고, 생산된 죄는 여러분들을 주장하며 여러분들의 삶의 질서를 어지럽힙니다. 그 죄는 또 다른 동생들을 원하고, 그 태어난 죄들의 힘을 결합해서 여러분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여러분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은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며 둘째는, 죄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며 마음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에 악한 성향인 죄는 감화의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시험에 든 우리 안에서 자신을 강화합니다. 은혜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서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구원의 길, 둘째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호의, 그리고 셋째는, 주관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죄는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수 있도록 악한 힘을 더해 불러일으키는 자기 사랑의 감동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계획과 죄의 계획은 정면충돌합니다. 은혜는 죄를 죽이고, 죄는 은혜를 죽이고자 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곳에서는 죄가 힘을 잃어버리고, 죄가 득세하는 곳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은혜가 소멸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초음파를 여러분의 복부에 대고 여러분들 안에 얼마나 많은 욕심이 잉태하여 생산을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 비추어 보십시오. 자기반성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아는 뱃속에서 출산되기까지 성장합니다.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산되는 경우는 있지만 성장을 멈추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처럼 신자도 욕심에 이끌렸을 때 죄는 마음에 잉태되고 잉태된 죄는 산출을 목표로 성장하게 됩니다. 만약에 산출된 모든 죄가 저절로 생산이 된다면 아마 여러분은 지금쯤 지옥 같은 세상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간절한 신앙생활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 속에 잉태된 죄를 놀랍게 죽이십니다.
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산출하고자 하는 힘과 의지의 존속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힘과 의지의 존속을 꺾어서 수없이 많은 죄들을 유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것들은 핏덩이로 쏟아지고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 숫자는 살아남아서 결국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산출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신자이면서 은혜에서 멀어져 죄를 짓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죄는 은혜와 똑같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의 열매를 맺고, 선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그러나 죄는 반대의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수많은 죄를 잉태하도록 시험에 들게 만들고, 그 중의 많은 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산될지라도 실한 놈을 출산시켜서 그것들로 집단을 만들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좌우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죄와 욕심이 충돌하게 하고, 추악한 싸움이 일어나게 하고, 그리고 급기야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백성들은 불의의 열매를 맺고, 선한 영광을 드러내야할 백성들은 악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기에 실패한 교회로 만듭니다. 이렇게 죄의 목표는 인류를 창조의 목적을 거슬러 살게 하는 것인데, 이는 선한 열매로서 인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 10절은 말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신자들 마음 안에서 강화된 죄는 마음에 대한 욕망의 지배력을 지속적으로 넓혀갑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아주 작은 유혹으로도 큰 죄를 짓게 하기 까지 신자의 내면의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이 시험의 목표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성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마음 안에서 점차 자라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시험을 하찮게 여깁니다. 시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을 시험에서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을 적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열렬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비추는 진리의 밝은 빛을 간절히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든 마음은 진리로부터 멀어져 거짓과 친근하게 되고, 마음은 더욱 어두워져 욕심이 생각을 미혹시키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비추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정말 시험에 들어있습니까? 혹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이 여러분들에게 사물의 질서를 보여줍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일치하는지 말씀의 빛으로 확인합니까? 그 말씀의 빛이 나의 허무한 자기 사랑을 내려놓게 하는 뉘우침을 가져다줍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오하리만치 깊은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난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의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죄에 짓는 상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덮으며 시험에 깊이 빠져서 예전에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죄로 돌아갑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치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는 살아남겠지만 그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욱 비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때에는 언제나 책임을 함께 물으십니다. 많은 물질을 준 사람에게는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책임을 물으시고, 사회에서 존귀한 지위를 주신 사람에게는 그 지위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책임을 물으십니다. 많은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더 진리에 합치된 삶을 요구하시고, 그리고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그 은혜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것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시험에 드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하나님은 내가 너를 그 시험에서 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시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그렇게 말해서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순결한 사랑에 붙잡혀야 할 마음이 욕심에 사로잡히고 죄에 이끌려가도록 준비되고 있는데, 또 마음이 약탈당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하는 신부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걸레 신자는 사실은 아무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심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걸레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전한 하나님의 신부는 그 사랑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며 자신의 몸도 마음도 그 분의 것이라는 뚜렷한 사랑의 인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주의 신부로서의 보람이요,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짐이요, 무거운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시험에 드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이 죄를 짓도록 그 죄가 점점 장성하도록 하는 우리의 마음의 내면의 세계의 허물어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가 장성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비록 욕망을 품었으나 더 이상 이 욕망이 우리에게 죄를 산출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진리의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감겼던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어두웠던 사물들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무질서의 질서를 부여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줄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주님이 고치실 줄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저히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유혹들을, 시험의 무거운 짐들을 하나님이 놀랍게 벗겨버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서 무엇을 가져가신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어서 잃어버렸던 우리의 영혼의 정신과 힘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은혜에서 벗어나면 그가 이전에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든지 상관이 없이 그의 마음에서는 죄가 산출되고, 그 죄가 장성하게 되는 것이니 부디 은혜로 시험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사망을 낳음
세 번째는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만삭인 여자가 제때에 때가 이르면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것과 같이 사망을 출산하게 됩니다. 욕심과 죄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만큼 죄와 사망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아포쿠웨이’(apokuei)라고 되어 있는 ‘낳는다’라는 표현이 주는 필연적인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욕심은 마음의 죄를 잉태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잉태된 죄는 사망을 산출하려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관계는 거래의 관계이고, 구원과 생명의 관계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삯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옵소니아’(opsonia)라고 하는 이 말은 복종적 고용관계에 있는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급료를 뜻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고전 그리스어 학자들은 이 ‘옵소니아’의 이러한 해석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고전 그리스어가 신약 성경에서 항상 꼭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를 공부할 때 고전 Greek과 그리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읽는 그리스어 사이에는 상당한 단어의 뜻과 그리고 문맥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로 이 ‘옵소니아’가 급료라는 뜻으로 쓰인 용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7절에 의하면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라고 할 때 그 비용을 옵소니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리스의 군사로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비용이 드는데 그것은 우리 스스로 부담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비용을 우리에게 넉넉히 후하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교묘한 문학적 역설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급료 ‘옵소니아’가 우리의 군사로서의 삶에 비해서 아주 넉넉하고 풍족한 것이라면 죄에 대해서 주는 옵소니아도 적은 죄에 대한 봉사에 대해 커다란 대가를 돌려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작은 죄에도 그 죄의 크기보다 훨씬 큰 대가가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은혜는 우리에게 넘치는 영생을 선물로 주지만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우리의 죄는 그 죄에 대해서 넘치는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망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끝 날에 받을 영원한 형벌로서의 사망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에게는 두 번의 죽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번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요,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이고, 두 번째 죽음은 영혼의 죽음인데 이는 사망하기로 작정된 자들이 받는 형벌입니다. 이것은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볼 때에는 신자로서 계속 시험에 드는 것 같아도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사실은 신자이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히 거듭나 본 경험이 없는 사실상 불신자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 사람들 보기에 시험으로 비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야고보 선생의 이 가르침의 무게의 중심은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는 두 번째의 뜻에 있습니다. 그 두 번째의 뜻은 바로 신자가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영혼의 죽음의 경험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육체의 기능이 멈추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의학에서 죽음을 무엇을 기준으로 죽음이라고 정할 것이냐는 아직도 논의가 끝나지 않습니다. 뇌가 죽었어도 몸이 살아있는 경우가 있고, 그리고 몸이 거의 죽은 것 같아도 뇌가 살아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죽음은 의미가 다릅니다.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을 영혼답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때로는 성경에서 그 힘이 현저하게 약화된 상태도 죽음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의미의 죽음은 신자의 영혼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사실은 죽은 자처럼 살았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영혼이 오랜 세월 동안 생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온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생기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직면하기 싫은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고, 그리고 헤어지고 싶은 사람과 만나야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슬픈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일은 항상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만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피하고 싶은 일들을 직면해야 되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가 좋아하는 길을 걸어감으로써만 당신의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도저히 우리가 걸어가기 싫은 인생의 길, 혹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또 다른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삶의 상황이 어둡습니다. 그리고 좌절스럽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어떻게 견딜 수가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고백할 그때 주님께 기도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자신의 이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을 호소하며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때 고립무언의 처지에서 내 인생을 나 스스로 해결해 가지 않으면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 하나님이 은혜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홀로 어두운 벌판에 버려진 줄 알았는데, 주님의 관심에서도 멀어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내게 가까이 있었던 어려움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이 내 가까이에서 나를 지키고 계시는데도 그렇게 표독스럽게 시험에 빠져서 주님께 대적하고 그리고 마음에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앙탈을 부렸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아픔 속에서 바로 이런 죄를 위해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죽으셨음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고, 시험에 마음을 내어준 채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었는지 자신을 책망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나무에 나를 주인 삼으며 살고 싶어했던 이기적인 나의 자만심이 못 박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신기합니다. 그 우울과 걱정, 근심,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과 헝클어진 삶,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던 무기력했던 사람인데 그렇게 눈물의 기도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빛이 비춥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마치 내 눈물을 물 삼아 마음의 유리창을 닦기라도 하시는 듯이 내 영혼은 다시 맑음으로 빛납니다. 사물들의 질서가 또렷해지고, 나를 속였던 죄의 작용의 순서가 깨끗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끌어안았던 것이 뱀처럼 징그러운 세상의 욕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것을 이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버려도 예수님이 나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습니다. 이게 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셨던 영혼의 생명입니다. 시험에 들고 죄가 장성하게 되면 그 죄는 이러한 생명을 모두 앗아가 버립니다. 그렇게 순수하게,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던 성도의 마음을 그렇게 거친 벌판으로 만들어 버리고 묵은 땅이 되게 하는 것이 시험과 죄가 하는 일입니다. 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유익은 친구를 많이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유익은 집안에 대소사에 목사가 가서 기념식을 드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되는 유익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영적인 연합 안에서 끊임없이 그 충만한 영혼의 생명을 공급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완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넘어질 때 저 사람은 서 있었고, 저 사람이 넘어졌을 때 나는 서 있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입니다. 그것을 좌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이 누구 안에 있었는가에 의해 삶의 양상은 사뭇 다르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도 승리한 삶을 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는 나로 이 모든 인생의 길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 예수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제입니까? 마지막 흐느껴 울며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내게 달라고, 그리고 나 혼자 힘으로 도저히 헤쳐갈 수 없는 현실이지만 주님은 나보다 지혜로우시니 기대하지 못했던 길을 보이실 것이고, 주님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내게 없는 힘을 주실 것이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이 생명에 넘치는 삶을 살도록 눈물로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그 눈물이 아직도 남아있기는 합니까?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여러분 속에 간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생명에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에 들어 죄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는 피할 길을 주시고, 피할 수 없을 때에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을 당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그 시험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시험을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시험의 터널을 수없이 통과했던 신앙의 영웅으로서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 안에 가장 약한 성도로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시험에 처해 있든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무지한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를 기억하고 충만한 은혜의 때와 지금을 비교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세상의 남자들은 한번 걸레가 된 여자를, 세상의 여자들은 한번 걸레가 된 남자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없이 걸레로 살아온 사람들을 당신의 보혈의 피로 씻으셔서 당신의 순결한 신부를 만드시나니 이 용서와 은혜의 작용으로서 모든 신부들로 하여금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라는 속삭임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태어났고,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반드시 이 시험을 이기고 은혜의 세계 안에 생명의 삶을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바는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최고로 여기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원하는 질서로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악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에 어긋난 것을 사랑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도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행하고,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도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행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사물의 잘못된 시각 효과, 표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그 사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사물에도 진리의 빛이 비추고, 그 사물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진리의 빛이 공정하게 비출 때 그 사물을 그 사물로 알아보고 높낮이를 정하게 됩니다. 의복은 몸을 위해 있는 것이고, 음식은 건강을 위해 있는 것이고, 나의 재능은 나의 덕스러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사라지면 사물도 어둠 속에 들어가고 인간의 마음도 어둠 속에 들어갈 때 그 어둠 속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 욕망을 따라서 진리와 상관없이 가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표상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잘못된 질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 마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진리와는 적이 되어야 됩니다. 이 진리로부터 멀어진 영혼은 어두움에 떨어지게 되고 영적 생명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결국 그는 예수를 믿었지만 잘못된 사랑의 질서 때문에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고 예전에 누렸던 예수의 참된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 역사하는 경건의 기쁨도 누리지 못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진리를 마주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하나님께 나의 고통스러운 사정을 토할 때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까? 새벽에 일찍 눈을 떴습니다. 몸이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했습니다. 정말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한 인간을 주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잠깐의 기도에 충만한 은혜를 주시고 마음은 다시 기쁨을 찾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비밀입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리로다
이와 같은 신앙의 비밀에 대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신국론』에서 이렇게 인상 깊게 노래했습니다. “그러므로 미덕에 대한 분명하고 참된 정의는 사랑의 질서다. 그래서 <노래들 중의 노래>인 아가서에서 그리스도의 신부, 곧 하나님의 도성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질서롭게 하옵소서’”(… quod definitio breuis et uera uirtutis ordo est amoris; propter quod in sancto cantico canticorum cantat sponsa Christi, ciuitas Dei: ‘Ordinate in me caritatem.’, Augustinus, De civitate Dei, 15.22)라고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이 세상에 있는 두 나라를 설명했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뭉쳐져 있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사랑으로 뭉쳐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할 것인데 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간절한 기도 제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더해 달라거나 사랑을 덜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질서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가장 높이 사랑하고 나머지 것들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적도에 맞도록 사랑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없는 그런 단일한 사랑의 체계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잘못된 사랑에 고통을 받고 시험에 들고 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험은 진리의 빛을 잃어버리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고집하는 질서를 하나님이 행복하도록 주신 질서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데서 모든 비극이 초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시험에 들어있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고, 빛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기도는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시험을 이기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보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여러분들이 무엇을 위해 간구해야 할지도 깨닫게 되고, 어떤 종류의 도움이 필요한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를 포기하고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나는 밤에 가끔 교회당을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성도들이 그냥 조용히 찾아와서 이 넓은 예배당에서 어느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은밀하게 자신의 시험에 든 상태를 조목조목 고백하며 예수의 생명 없이 살 수 없다고 눈물 흘리는 성도들이 많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 라고 말입니다.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예수께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은 몸소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 욕심에 이끌려 미끄러져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시험의 목표는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장성하게 하고, 그리고 예수의 참된 생명을 잃어버린 채 영적인 고아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시험에 미끄러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자신의 탓이 아니라 사람들 탓이라고 미워하고 그들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관계가 파괴되었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계획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 끝이 무엇일까요? 그 긴 시험의 끝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겠으며 예수의 생명을 잃어버린 채 걸레처럼 살아가는 것 아니며 무엇이겠으며 소금이 맛을 잃고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 이외에 무슨 결말이 그 긴 시험의 끝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지 마셔야 합니다. 이제 진리의 빛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은혜를 회복하고 예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하나님을 기억하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6-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험의 목표는 단지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사람이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으로써 시험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근원적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지성적인 측면에서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판단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더러 이런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셔도 그것보다는 내 판단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욱 사랑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시험에 관한 긴 가르침을 끝맺고자 합니다.
II. 속지 말라
그러면서 그는 ‘속지 말라’는 말씀으로 맺음말을 대신합니다. 야고보서 1장 16절은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이것은 신자들이 시험을 당하여 얼마나 많이 속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했으니 당연히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였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꽤 신앙이 깊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누구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한때 탁월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도 물론 속일 수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두려울 정도로 강하게, 때로는 가엾을 정도로 약하게, 때로는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때로는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측은하게 자기의 정체를 감춘 채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평생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의 은혜에 붙들려 진리의 빛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자기를 정확하게 볼 수 없고, 자기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환경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지하게 되고, 죄에 속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시험과 시련을 만나 실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믿음에서 미끄러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야고보 선생은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시험에 관한 그 긴 강론을 끝낸 다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며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라고 충고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깨어나서 그 속임을 당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빛 앞에 은혜롭게 사는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때만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속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결코 속지 않도록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구하며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러면서 사도는 속지 말라는 말로 서론을 말한 후, 이제 그 모든 강론의 끝을 맺으며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촉구합니다. 시험은 세상 안에서 겪는 것입니다. 시험은 상황과 함께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영적이고, 심리적인 상태요, 작용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시험에 관해서 결론을 맺으면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세 가지로 말합니다.
A. 선(善)하심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7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상)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온갖 좋은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선물을 주시는 행위이고,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의 그 행위로 받게 된 실제적인 선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물을 주심으로 우리는 그것을 받는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파트로스 톤 포톤(patros ton poton)”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해와 달과 별을 가리킵니다. 즉, 빛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은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보여줍니다.
첫째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 그 모든 우주의 천체를 다스리시는 우주적인 왕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에 의해 그 모든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되고, 보존되고, 통치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사와 밀접히 연관시키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울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시는 유한한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험에서 이기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광명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우주적 왕권을 가지신 분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다스리고 사람들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온 땅과 하늘위에 높고 뛰어나셔서 이 모든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침묵 속에 무한히 먼 과거에 태어나 끝도 없는 현재를 지나 가없는 미래로 흘러가는 그 우주의 적막 속에서 하나님 홀로 그 온 천체들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런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아버지시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쁜 것들은 원래는 좋은 것이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악하게 된 것입니다.
결혼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 나쁜 분입니까? 결혼생활을 잘못해서 파탄에 이르게 된 것이 나쁜 것입니까? 결혼은 좋은 것이요, 각자를 선물로 주셨지만 신앙 안에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이 나쁜 것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그 돈 때문에 타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 건강을 욕되게 사용하여 타락에 이르는 여러분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끝없이 좋으신 분이시고 나쁜 것은 모두 인간이 잘못 사용함으로 나쁘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시험에 드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믿음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갖고 싶어하는 것들 중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인색하시기 때문에 안 주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욱이 여러분들을 덜 사랑하시기 때문에 안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잘못이 없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를 능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제때에 우리에게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 중에는 좋은 것이 없고, 주님이 주신 것 중에는 나쁜 것이 없습니다. 시험은 이 좋으신 하나님을 세상만 못하게 여기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믿음을 가졌던 신자라 할지라도 그를 시험에 붙들어 주는 것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 그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은혜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을 매일매일 경험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은 나쁘게 여기고, 선하지 않은 것들은 사랑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선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당신은 선하신 분이시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베푼 그 선은 곧 당신 자신을 위한 선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이기적이면 이기적일수록 사랑에 넘치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이기적이면 이기적일수록 그것은 하나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살아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의 은혜를 주십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시인의 고백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 하고 말입니다. 은혜에 감격이 넘치는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알아봅니다. 무한히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알아봅니다. 영원하시고 끝없이 완전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맞보아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그 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시험에 들어 미각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맛보며 행복해야 할 입맛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만나에 그렇게 감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날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며 하나님 앞에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렸던 것 같은 마음이 변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기억에서 멀어집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내 원하는 대로 될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하고, 내가 원하는 길을 막으실 때에도 주님의 선하심을 노래합니다. 장미꽃 가시에도 감사합니다. 지나간 세월의 아픈 기억들을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즐거운 기억들을 통해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변해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해 노래가 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빛들의 아버지이신 그분에 나의 인생이 붙들려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시험에 들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불변하심
두 번째는 불변하심입니다. 본문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앞에 나온 빛들의 그림자입니다. 빛이 어떻게 그림자를 가질 수 있을까요?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당시 사람들이 보던 일식과 월식의 현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달에 의해 해가 가려지는 일식(日蝕)이나 지구에 의해 달이 가려지는 월식(月蝕)이 일어나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은데 그와 같은 것들이 바로 빛의 그림자로 보인 것입니다.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은 돌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무엇에 의해서도 그 영광의 빛이 가려지지 않는 변함없는 분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주시나 자신은 빛이 아니십니다. 모든 만물을 움직이게 하시지만 당신은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모든 별들을 회전시키시지만 당신은 돌지 않으십니다. 모든 만물이 그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나 그 모든 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실체가 아닙니다. 일기가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햇살이 많이 쏟아지고, 농작물이 풍부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쾌활하고 낙천적입니다. 그러나 구름이 많이 끼고 햇빛이 거의 없고, 작물이 풍부하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민족성까지 우울합니다. 비오고, 천둥치고, 바람 불고, 번개치고, 그리고 이슬이 맺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쏟아지고, 이런 모든 변화무쌍한 현상은 대부분 지구의 두께, 지구 위의 지표면 10km이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구의 반지름이 6350km쯤 된다고 하니까 그 위에 덮여져 있는 그 막 10km는 1/600도 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얇은 막입니다. 마치 크고 둥그런 초콜릿을 얇은 습자지로 싼 것 같은 두께도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있는 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 대기가 없다면 아름다운 노을도, 그 다음에 동트는 아침에 그 아름다운 빛깔도 없을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서 느끼는 일입니다. 아침에 출국을 하기로 했는데 엄청나게 비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얼마나 두텁게 구름이 끼어 있는지 아침인데도 헤드라이트를 켜야지만 운행을 할 정도로 구름이 가득 꼈습니다. 바람까지 부니 비행기가 뜰까 하지만 비행기가 뜹니다. 굉음 소리를 내며 큰 몸체의 비행기가 하늘로 치솟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검은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저 멀리 랜딩 기어가 접히는 소리가 들리고, 비행기는 더 큰 소리를 내며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창밖으로는 억수같은 비가 내립니다. 그러나 잠시 후 한참을 지난 후 그 구름을 뚫고 비행기는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거기에는 빗물도 없고 구름도 없고 안개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만 있을 뿐입니다. 그때 저 발아래 양탄자처럼 깔린 그 하얀 구름이 온 시야에 들어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태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대기의 현상으로 구름이 끼었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 연관시켜서 생각하다보면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인간들처럼 울고, 웃고,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런 하나님도 여러분들이 느끼는 하나님이시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모든 세계를 초월하여 그리고 이 모든 세계 위에 계시는 전적인 타자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험은 대기권 안에서 일어나는 요변하는 기상 현상과 같습니다. 시험은 그래서 자기를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가 흔들리고, 마음의 결이 흐트러짐으로써 발생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동시에 심리적인 것입니다. 변하는 것들에 에워싸이셨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곧 참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지만 그 분은 결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풀꽃의 아름다움을 기억해 보십시오.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과 그 하찮은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십시오. 모든 시험은 불변하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붙들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희로애락, 그리고 욕심으로 끊임없이 요동치며 사람들은 미워하고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악인에게 복수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태어난 때가 있고, 그리고 흘러가고, 죽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고통을 주던 사람도 조만간 죽을 것이며 괴롭힘을 당하던 여러분도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하나님 앞에서 왜 그런 식으로 밖에 인생을 살지 못했는지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 행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이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사물 속에서 자신도 변화되어 가는 존재로 불변하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변하는 세계 속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을 붙들고 그 분께 소망을 두고, 그 분이 영원한 것처럼 순간을 살지만 영원을 잇대어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라면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믿음은 그 등불을 달 수 있는 방안의 천장입니다. 모든 주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불변성이라고 하는 불변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천장위에 매달릴 때에 온 방은 그 작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광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을 만나든지 삶이 여러분들을 속이고,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든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 모든 것은 변하고 흘러가나니 이 고통스러운 상황도 나에게는 곧 추억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상황을 초월하셔서 언제나 거기 계셔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은 것을 후회할 때가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끊임없이 요동치고 변천하는 세상에 시선을 고정 시킨 채 그 현란한 상황들의 움직임에 울고, 웃으며 사는 것은 신앙이 없는 짐승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통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만날 때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일어난 이 가슴 아픈 일, 그리고 무엇을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속박 받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0대 젊은 여자가 KTX를 탔습니다. 그리고는 기차 한 칸과 한 칸 사이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비상 망치를 꺼내어 미친 듯이 두드려서 그 잘 깨어지지 않는 유리창을 두드려 내고, 170km로 달리는 차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살았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그 젊은 여자가 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웠으면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지 어떻게 담대하게 망치로 유리창을 깨고 그 철로에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던질 생각을 했을까?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가슴이 에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변화하는 세상에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인간이 용기를 내서 할 수 있는 일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신 하나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셨다면 그때만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변함없이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을 뜯으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 끈끈이에 달라붙어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떼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단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참된 인간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가지고 살고 싶다는 목마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살고 죽는 것이 그 분의 손에 달렸으니 내가 그 분을 믿고 의지하리라는 신앙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저는 10번을 설교했습니다.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최상의 설교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10번 전에 설교를 시작할 때와 지금 동일하게 시험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좀 더 고통을 받을 것이고, 눈물 흘리는 괴로운 일들을 며칠 더 당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시험에서 벗어난 분들은 자만하면 안 됩니다. 과거에 일어난 우연한 일들을 이 말씀의 빛으로 보니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나 자신이 시험에 든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빛으로 충격적인 광채를 받아 자신이 벌거벗은 채 시험의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곧 다시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아주 가까운 날에 다시 시험에 빠질 수 있으니 은혜 받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말씀에 단단히 묶어 매고 기도로 동이시기를 바랍니다.
C. 구원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구원하심입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고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번 태어납니다. 육체로는 부모에게로부터 태어나고 영혼으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세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욕심을 잉태해서 죄를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으로 우리를 잉태하여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시험에 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태어나게 된 진리의 말씀에 우리를 단단히 붙들어 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은 욕심에 이끌리게 되고, 욕심에 이끌린 사람은 생각이 혼란스러워져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은 그렇게 나음 바 된 우리들이 진리에 붙들려 계속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세 번째는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후 인간의 육체를 빚으셨고, 그리고 영혼을 창조하셔서 결합시킴으로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맨 처음 창조에서는 인간이 맨 나중에 창조된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로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심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순서로 하십니다. 제일 먼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육체를 다시 영원히 살도록 부활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런 몸의 구속과 함께 저주 아래 놓여있던 모든 피조물들은 신음과 탄식을 끝내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아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은 나머지 모든 세계를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 첫 번째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첫 열매들 중 각 하나하나씩입니다. 그래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말씀으로 명령하셔서 만드셨고, 우리의 영혼도 다시 태어날 때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낳으신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시되 다른 것으로 우리를 낳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욕심으로 죄를 낳았지만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진리가 우리에게는 믿어졌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게 여기고, 거짓말 같다고 여기던 그 복음이 어느 날 우리에게 믿어졌습니다. 왜 그것이 믿어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지만 마치 눈먼 맹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되어 ‘이제는 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을 이제는 보나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그 복음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21살에 회심을 경험하고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하나님이 참 이슬 같은 믿음을 주셨구나.’ 아마 조용하게 예배당에 다니며 주님을 믿는 모습이 그 분의 눈에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경험을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저는 요즘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이 성경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해 보여도 저는 믿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이슬 같은 믿음이 아니라 불같은 믿음을 네게 주셨구나 하셨습니다.
그게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복음을 전해보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기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이 믿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은 이 진리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은 말씀으로 생명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말씀으로 생명을 끊임없이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을 보며 또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과 아픔을 끝없이 토해도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어떤 미국인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힘들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9명은 무시할 것이고, 9명은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고, 한 사람은 여러분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불완전한 세상, 거기에 구원 받았으나 완전하지 않은 내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의 인생에 시련과 고난이 없겠습니까?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구름 같은 인생의 변화무쌍한 일기를 초월하신 그 너머에 계신 불변하는 빛이신 태양과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삽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 말씀에 여러분 자신을 묻고 시험에서 벗어나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 때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에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죄의 힘으로 나뒹굴어져 우리는 스스로 고통 받고 상처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나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꾸짖으십시오. 그리고 요동치는 세상에 묶여 희로애락의 휘둘리며 사는 날들을 후회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없이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헛된 꿈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생각하든 언제나 높이 떠서 빛나는 태양과 같이 그렇게 선하시고, 불변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도록 구원 받았습니다. 인생에 대해 잘 모를 때, 갈 길을 알 수 없을 때, 길은 알지만 살아갈 힘이 없을 때, 찾으라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시험과 작별하고, 하나님 사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앞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