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변화와 자기 깨어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이후에 나타났던 복음의 역사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도들의 설교를 통한 복음전도의 대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들의 선포를 듣고 가슴에 깊이 찔리며 우리가 어찌해야할꼬 하고 무너지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에 대해서 베드로는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광경을 우리들이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현장에서 진정한 참다운 영혼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우리가 어찌해야할꼬 하는 이것은 정말 무엇인가를 몰라서 질문을 하는 그런 여유 있는 질문이 아니라 자기가 이제껏 그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자신의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가졌던 모든 신앙과 사상이 무너뜨려지는 자기 해체의 광경인 것입니다 이 같은 것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큰 영광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주 경험하던 공통된 고백 이었습니다 후일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었던 사도바울도 역시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아직 사울이던 그 시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실 때에 그분의 찬란한 부활의 영광 앞에서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 이어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대답하는 사울의 고백은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진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여유 있는 질문이 아니라 이제껏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명백하게 알고 있었던 지식들은 하나의 나름대로의 인생의 신앙관에 기초한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이것들이 모두 해체되어 버린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만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세워져 나갑니다. 우리인간은 외부에서 입력되는 많은 환경과 정보에 의해서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 자신 속에 무엇인가를 세워가는 건축가 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의 참다운 변화는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나야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 없이 세워진 잘못된 것들이 무너지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세워지는 건축 이 두 가지가 같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변화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무너짐은 사울이 깊이 경험하고 그 허물어진 토대위에 그리스도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아주 순수한 신앙의 사람으로 자기의 인생을 이어가게 만들어주는 기독교신앙의 집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유대교의 관점에서 세상과 그다음의 인생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험하게 된 제일 크고 놀라운 변화가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들은 혐오의 대상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뜨겁게 사랑하는 대상으로 변했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예수의 고난과 그 십자가사건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자 사상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도 이런 경험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의 경우는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나이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깊이 절망 합니다 나는 아이입니다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실제의 질문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선지자로 소명하시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자기가 해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런 자기 무너짐의 과정을 경험하여야 했습니다. 이사야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찬란한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을 성전에서 뵈옵고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그는 철저하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단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고 자기가 이제껏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정도 되었으니까 무엇인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고 있다고 믿었고 또 부름을 받았지만 이제껏 자신이 쌓아올리고 살아왔던 이 신앙의 얼개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빛 앞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메시야의 고난과 그 찬란한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위대한 약속들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 앞에서 자신이 정말 비참한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 이것을 모두 깨닫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기가 무너지는 깊은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았을 때에 민족을 사랑하는 내면의 열정으로 치자면 처음 자기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고자 애굽의 병사들을 때려눕힌 그때에도 그 후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민족에 대한 자기 의 불붙는 가슴을 치는 청년 이었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를 누리며 사는 것 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너지기 전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들이 많은 사람들 갖춘 것들이 많은 사람들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예가 철학자의 회심입니다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뼈저린 실패를 경험하고 안락했던 삶들의 터전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애굽의 왕족으로서의 영예를 모두 상실하고 미디안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정도의 실패가지고도 이 사람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긴 세월동안 자기의 모든 꿈을 버려야 했습니다. 애굽의 땅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건져내는 아주 위대하고 혁혁한 지도자로서의 꿈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거친돌처럼 천하게 생활했습니다. 그가 거기서 얼마나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한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하나는 그 민족을 사랑하는 불붙는 마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혈기를 섞어서 이루었던 애족적인 행동들이 좌절에 빠지면서 아마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신앙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낙망하고 절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42년 동안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이제 애굽의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고자하는 모든 꿈들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 백성을 건져내라 말씀하시는데 내가 누군데 그것을 하겠습니까? 나는 못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듭해서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 꿈은 그에게 있어서 완전히 접혀진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모든 학문을 통달하고 언어에 능통했으나 한 가지를 몰랐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부서짐으로서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는 것 하나님 앞에 무너짐으로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몰랐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발의 신을 벗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험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사람의 지도자로 주님을 섬기는 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이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증거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깊이 자기의 무너짐 우리가 어찌할꼬 그렇게 묻는 이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보게 되는데 이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큰 영광과 그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이들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이 선포 앞에서 이런 무너짐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에는 유대교의 가르침이 지배적이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메시야 이신 그리스도가 죽어야한다는 사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주 희귀하고 나타나도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하신영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찬란한 어떤 영광과는 상관이 없는 아주 세상적 이고 세속적인 그런 권력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라기보다는 자기가 희망하고 꿈에 그리는 이스라엘역사의 어떤 주인공을 자신들이 지어낸 이야기 속에 수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입니다 그런 사상에 깊이 젖어있던 사람들이 무너짐을 경험했다는 것은 그 시대가 가르쳐주고 있는 일반적인 신앙사상과 결별하였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교회들을 돌아보고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고 여러 목회 현장들을 돌아봄으로서 신앙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런 일들도 어떤 점에서는 필요할 수 있지만 우리는 너무나 오늘날 이 기독교신앙자체가 투철한 모본신앙을 세상에 양보하는 세상과 더불어 호양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좀 폭 좁아질 필요도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직할 정도로 그리스도예수의 가르침에 입각한 신앙을 고집하는 사람 미련할 정도로 고전적인 신앙 성경적인 신앙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따지는 그런 태도 성경이 강조하는 것들을 끝까지 강조하면서 복음에 충실한 신앙 그래서 이시대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예수를 믿는 복음의 신앙을 당연 화 시켜서 세상과 거의 차별이 없는 그런 신앙의 양태를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예수께서 이것이 없이는 기독교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신 그 본질적인 내용의 복음을 굳게 붙들고 그리고 그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외치는 그런 아주 강력한 신앙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조국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예수의 권한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이 잊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그리스도에게 붙잡히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에게 붙잡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당에 가득 차고 있습니다. 스펄젼이 말한바와 같이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도는 프리즘을 통과하는 햇살과 같아서 그 교리를 깨닫고 배우면 배울수록 프리즘을 통과하는 그 빛이 통과하기 전에는 그저 한줄기 빛이었지만 통과하고 나면 빨주노초파남보 찬란한 빛깔을 가진 파장으로 우리 앞에 화려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예수께서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성도들과 수많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먹고 마시고 누렸던 그 기독교신앙의 보고의 원천은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풍부한 강조를 오늘 우리시대의 교회에서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자는 구호가 우리에게 유행하지만 그 일은 언제나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그리스도예수의 뒤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로이드존스박사가 말했듯이 철저히 타락한 죄인이 그리스도예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가소로운 일입니다 어떻게 죄인들이 그리스도예수의 뒤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신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원리적으로 계실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분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당신 자신이 십자가를 지신 그 고난의 정신을 우리의 삶 구석구석 에 불어넣으시고 그래서 우리 안에 주님이 친히 동행하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예수의 도구가 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경험하고 흉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강해져서 세상을 깊이 끌어안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우리 안에 진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없는 한 우리품안에 들어오는 그 수많은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변화시키기 전에 그들이 우리를 녹이고야 말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이렇게 자유 하는 신앙이 유행하고 있는 이런 시대에는 우리의 신앙이 폭넓어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번 이렇게 폭 좁아지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알고 우직할 정도로 그 기본적인 복음에 깊이 사로잡힌 사람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피가 그의 선포와 삶 전하는 복음과 이웃에게 보여주는 모든 선행 속에 낱낱이 배여 있되 아주 순도 높은 피가 그 속에 깊이 배여 있어서 무엇을 통해서든지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신앙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독신학대학교의 교수로 있을 때에 일 이었습니다 나중에 생명의 말씀 사에서 책으로 나왔습니다만 처음에 타이프로 쳐서 얇은 인쇄물을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읽혔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을 공부하고 앞으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데 열심 은 있는데 복음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입니다 몇 권씩 만들어서 읽히고 만들어서 읽히고 했는데 어느 날 학생이 리포트를 냈는데 펼치니까 깨끗한 글씨로 타이프를 했는데 내용은 예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리포트 안에 편지를 썼는데 몇 학년 몇 반 누군데 이런 건 왜 만들어 와서 우리에게 읽으라고 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욕을 한참 하더니 마지막에 유감 있으면 자기를 부르라는 겁니다. 이 과목 점수 안 나와도 자기는 점수가 좋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두 달 있다가 또 같은 것을 또다시 내주었더니 또 똑같은 내용으로 다시 편지가 왔습니다. 읽기는 다 읽었는데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로 또다시 세 번을 썼는데 똑같은 종이에다 똑같은 글씨로 그렇게 깨끗하게 써서 보낸 겁니다. 세 번째가 십자가를 경험하라 그 전 즈음인데 또 그 내용이겠거니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리포트를 넘기는데 이번에는 편지가 아니고 자기 고백인겁니다 아 내가 왜 이럴까 두 번의 리포트는 내가 강렬하게 비판을 하고 썼는데 이 세 번째 인쇄물도 반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써내려가다 보니까 자기가 정말 거듭났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더랍니다. 아 내안에 십자가의 감격이 없다는 것이 느껴지더라 면서 하는 말이 나는 지금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그 피아래 서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이렇게 초라하게 보여 지기는 처음입니다 하고 온 것입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래서 제가 초라하게 보여 지는 정도로는 아직 멀었다고 했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고 그 앞에 자기가 무너질 때에 초라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도 내가 너무 싫어지는 것입니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나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무너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안 무너집니까? 무너지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수십 년 동안 예수를 믿어도 한 쪽 눈은 정상적이고 한 쪽 눈에는 개 눈을 끼었는데 개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사람 눈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던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무엇으로 말미암았든지 간에 그가 깨뜨려졌다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광경은 씩씩하게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도 아름답지만 깨뜨려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정복하시는 광경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죄를 이기는 광경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무지를 이기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순종이 불순종을 제압하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그렇게 깨뜨려지기만 하면 모두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다 금이 아니듯이 깨뜨려지는 모든 것이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깨뜨려지는 것 이것이 처음 예수 믿을 때 뿐 만 아니라 지속적인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사경회 때 넷째 날에 아주 강조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것이 꼭 필요 합니다 그런 깊은 깨뜨려짐을 통해서 신령한 그리스도인들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쌓아 올려진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그러한 경험도 필요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인간적인 욕망과세속적인 사상 이것과 타협하면서 신앙의 집을 지으려고 하는 자신을 계속해서 부서지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복음을 깨닫고 깨뜨려지는 자기 깨어짐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자기 깨어짐 그것은 잔디밭에 뿌리는 제초제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심지 않은 것들을 나지 못하게 하는 제초제와 같은 역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 우리들이 이번 사경회 때에 기대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한번 은혜를 받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번은혜를 주시는 것은 여러분과 계속해서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열린 교회 에는 사경회를 왜 그렇게 자주하는지 누가 물어 보길래 제가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를 꿈꾸기 때문에 우리는 사경회를 자주 합니다 한번 절기마다 주렸던 허리띠를 풀고 포식하는 사경회가 아니라 그것으로서 우리의 신앙을 이어갈 수는 없고 우리의 필요한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 회개의 날을 정해놓지 않고 눌러 짜지 않아도 내안에 있는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내가 밝히 알게 된 하나님의 마음을 보면서 늘 아침이나 저녁에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그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의 형벌을 생각할 때에 자기 무너짐이 있는 이런 삶에 사경회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마 열린 교회는 계속해서 이런 사경회를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완전히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 언제나 모두 다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 자기 깨뜨려짐을 경험하고 다시금 고갈됐던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어 다시 역사하도록 그래서 이번에는 주님이 자기 깨뜨려짐의 은혜를 주신다면 우리가 이은혜안에서 지속적으로 살겠습니다. 라는 진지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자기 깨뜨려짐이 있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것은 첫째 성경에서 오늘 이야기하는 것이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이 말을 듣고 입니다. 이 말은 정녕히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설교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요약입니다 이것보다 훨씬 더 풍부했을 것입니다 첫째가 너희가 못 박은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에게 강력한 깨뜨려짐이 있기 전에 먼저 메시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이 너희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로마병사들이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여기서 지금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을 리가 만무 합니다 처음에 이 복음은 누구에게 전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이 결국 죄인 것입니다 못 박은 것은 로마 병정들ㅇ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였는데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사용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거룩해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자인데 거룩에 대한 갈망과죄의 정체를 알고자하는 갈망은 비례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변화되기 전에 가끔 죄에 대해서 설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은혜에 대해서 설교를 해도 다 못 할 텐데 죄에 대해서 저렇게 설교를 하나 그리고 죄에 대한 설교는 모두가 아주 재밌게 예화를 들어가면서 웃으면서 설교할 수가 대개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키득키득 웃을 수 있겠습니까 굉장히 심각하고 죄에 대해서 심각하고 항상 논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죄에 대해 설교 하는 것을 싫어하는 세 번째는 사람의 사고가 굉장히 부정적이 되고 우우하게 되기 때문에 이세가지는 현대인들이 싫어하는 삼박자를 모두 갖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자유화된 교회성장에 대해 죄에 대해서는 20%만 설교하고 은혜에 대해서 80%만 설교하라는 실제 그런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 와서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성장하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변화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참된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죄에 대해서 설교함으로 교회가 거의 성장하지 않고 나중에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성경에서 그것이 옳다고 하면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신자를 위해서 그래서 기억하십시오. 저는 안 듣는 사람은 고려하지 않고 듣는 사람만 고려해서 설교 합니다 왜냐하면 안 듣고 뒤에서 조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지금이라도 축도해야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고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눈길도 고개를 끄덕이고 졸거나 멍하니 딴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도 안 줍니다 그런 사람에게 눈길을 주면 내 마음이 자꾸 닫히기 때문에 제일 집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설교를 합니다. 무엇이 편리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룩에 대한 갈망과 죄를 알기위한 탐구의 갈망은 같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해지고자 애를 쓰면 쓸수록 환란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그 거룩에 이르는 자신의 갈망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장애물이 죄 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정체가 아주 애매모호 합니다 여러분들이 죄에 대해서 생각 하고 있는 모호한 생각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호함 만큼이나 모호 합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한번 파헤쳐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잃어버리는가 은혜가 우리에게 올 때에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인격이 어떤 영향이 미처 지고 그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할 때에 우리의 내면의 세계는 어떻게 고쳐 지는가 은혜의 작용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기독교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대한 단어들은 이처럼 어렴풋한 인식 속에서 오고가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은혜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좋은 것이랍니다. 맞습니다. 좋은 것 이지요. 그런데 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것에 대해서 파헤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해부해나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27주정도 했는데 앞으로 다시 시작할 텐데 하면서 계속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이 완전히 갈라져야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룩하고자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갈망이 약한 사람들은 들어가면 갈수록 너무 힘겨운 것입니다 힘겨운 정도가 아니라 누구의 표현대로라면 짜증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죄에 대한 정직한 선포입니다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못 박아 죽인 예수그리스도 그런데 사실 이것도 얼마나 어려운 설교였겠습니까? 그때 사도의 마음은 이사실자체가 그리스도예수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사무치는 정을 가지고 있는 이 사도들이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라고 말했을 때에 어떤 식으로든지 유대인들이 유쾌한 느낌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 했습니다 그런데 담대하게 그들을 향해서 죄를 폭로하면서 그들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변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언제든지 그렇습니다. 참된 부흥이 이런 진실한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하나님의 힘이라고 정의할 것 같으면 부흥회 때에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예외 없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그 고난의 신중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리스도예수를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인간의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깊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경회에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예수를 못 박게 했던 우리의 죄들이 정직하게 밝혀져서 우리영혼에 참된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전에도 그리스도이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으셔서 성부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을 그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셔서 그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의 높아지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그렇게 못 박아 죽인 예수그리스도가 너희들 보기에는 단지 나사렛 촌 동네서 온 사람이지만 사실은 그분이 메시야 였다. 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를 부활하게 하셔서 지금 이 말씀을 전하는 동안 너희들까지 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과 그 예수그리스도를 죽었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통치의 주로 삼으셨다는 것 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예수께서 이미 하신 일과그리스도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그리고 그리스도예수께서 지금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정확한 말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말입니다 그것을 들었을 때에 사람들이 마음에 깊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 찔림은 쉽게 얘기하면 양심의 강력한 가책입니다 그래서 여기 뿐 만 아니라 스데반의 설교로 넘어가면 거기서도 똑같이 스데반의 장엄한 설교를 7장에서 들으면서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반응은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7장에서는 가슴에 찔리니까 모두 돌을 잡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양심의 강력한 가책이 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회심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양심에 아픈 가책을 능가하는 무엇이 더 필요 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찌르는 어떤 것들을 말할 때 모두 무릎을 꿇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해도 자기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마음에 찔려 이것이 양심의 강력한 가책이었다라고 한다면 이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심에 강력한 가책을 받는 것이 결국은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복음 앞에 와르르 무너지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신의 양심의 강력한 가책을 받는 이런 것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은 가슴에 깊이 찔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다. 라는 그런 절망감을 깊이 느끼면서 거기에서 와르르 무너지면서 우리가 어찌해야 할꼬.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오장육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급소가 있듯이 우리의 양심은 우리자신이 견지해오던 삶의 방식을 무너뜨리는 아주 중요한 약점입니다 딱 찌르면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칼날과 같은 분석으로 우리의 죄를 해부하고 우리의 악을 들춰 보여준다 할지라도 그 들춰냄에 의해서 깊이 찔림을 받고 가책을 느끼는 작용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코 회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회심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꼭 필요 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강력한 찔림의 작용들이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사도들의 이 말을 들을 때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가깝게는 그리스도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때에 돌아갔던 사람들이고 멀리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사람들이고 좀더 멀리는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에 열광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무엇인가 귀를 기울이고 듣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힘없이 빌라도의 법정에 서있을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는가. 들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리스도예수를 위하는 제자들 중 한사람이 나와서 내가 이제 그리스도예수에 대해서 사실을 말하겠다고 해도 사람들은 들었을까요 그들은 목표가 분명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예수를 빨리 십자가에 못 박게 허락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법적인 선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빌라도 밖에 없으니까 빨리 그렇게 해서 우리종족들이 유대교에서 지내오고 있는 종교적인 재판에 의해서 확정된 사형확정을 집행할 수 있도록 너희들이 법적으로 확정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여기에서 귀를 기울여서 들음으로서 깊이 양심의 찔림을 받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내면은 신령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이 광경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껏 까지 유대교의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사도들이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명인사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이 가서 종교지도자도 아닌 사람들이 종교적인 도리를 설파할 때에 그들은 모두 집중하면서 거기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면서 그것도 사람의 일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광경자체가 상당히 의외의 광경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나 요한이나 이미 엄청난 사람들이지만 거꾸로 올라가 봐도 처음부터 엄청난 사람들이어야 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설교할 때 조용히 듣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 사람들은 아직 그렇게 알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지명수배당해서 예수를 쫒는 무리들의 종교적인 사람들 중 한사람이었을 뿐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에 사람들이 거기에서 모두 긴 설교가 끝나면서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귀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들은 결국 예전에 성령이 강림하시기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떤 실질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신들린 사람들 보면 힘이 굉장히 센데 바짝 마른사람이면서도 어른 여럿이 매달려도 나가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 보면 즉시 느껴지지 않습니까? 귀신이 들려도 강하게 느껴지는데 강력한 성령의 임재하심에 그가 아직 말하지 않아도 그 사도들의 모습과 성령강림을 경험한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무언가 신들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통해서 무언가 흘러나오는 증언은 우리들이 저들을 보면서 느끼고 있는 영적인 실제에 대해서 해명을 해주는 것일 것 이라고 하는 기대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회복되어야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세세히 말하고 다니는 교회의 주보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결코 그리스도인임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습니다. 저들은 신들린 사람들이다 그 신은 성령님이시다 그들이 무엇인가 다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저들이 입을 열고 무엇인가 말하면 우리가 다르게 느끼는 실제에 대해서 이들이 말해줄 것이다 그것을 깊이 경험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사경회가 그런 사경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기념식하려고 우리가 모이는 것 아닙니다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슬프지는 않지만 부고를 쓰고 장죽을 집고 할아버지가 소리 지르니까 할 수 없이 애고애고 곡하는 그런 사람들처럼 무언가 그리스도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고 슬픔에 잠겨보려고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감상적인 목적으로 모이는 사경회일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결핍된 것들을 다시 한번 깊이 체험을 받고 세상에 주목을 받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존재 그자체로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보여주고 그 복음으로 우리의 존재와 삶에 차이들을 설명해줄 수 있는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예수와 동행하며 사는 이것이 정말 부럽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 합니다 그것을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