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헌신 7-2
녹취자: 장형주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교제 31쪽 순결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순결을 잃어버리는 요인이라고 그랬는데 자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던 것을 잠시 살펴보면 이중의 순결을 이야기하면서 첫째는 헌제자 자신의 순결, 그다음에 삶의 순결 사실 이 두 가지가 나뉘어 지진 않지만 내적인 순결에서 순결한 섬김이 나오지만 그러나 때때로는 내적으론 순결한 사람인데 매우 어리석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쉽게 부패와 위험에 자신의 섬김이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 앞에 정말 그 순결한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동일하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섬김 자체가 아주 말하자면 지혜로워야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김 자체가 내적인 순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마음과 생각을 동원해서 그래서 자신의 내적인 순전함이 자신의 섬김 구석구석에 잘 베이도록 그렇게 배려하고 그리고 거기에 온 마음을 기울여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검증하지 않으면 그러면 자기의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오염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그 대표적인 예가 약간 거리감이 있는 예이긴 하지만 그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를 들어본다면 일곱 집사를 세우는 장면입니다. 사도들이 과부들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과부들을 돌봤는데 사도들에게 솔직히 어떤 편견이 있겠습니까? 그런대도 그것들이 효과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사도들은 사도들대로 말씀을 젖혀놓게 되고 그리고 또 헬라파 과부들은 히브리파 과부들에 의해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불평이 생겨나게 되면서 초대교회 때 가지고 있었던 아주 순결하고 깨끗한 모습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적극적으로 범죄한 것이 아닌데도 이런 상황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순결한 삶이 충성스러운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끊임없는 자기 점검, 그리고 지혜 이런 것들이 요구된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다음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공부에서
(순결을 잃어버리는 이유 6번 신자가 순결을 잃어버린 대는 크게 적극적인 요소와 소극적인 요인이 작용합니다. 적극적인 요인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자신은 어떤 경우인지 적용해 보십시오.
7번 신자가 순결을 잃어버린 소극적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점검해 보십시오.)
요인에 대해서 몇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교제 186쪽을 보면 적극적인 요인과 소극적인 요인으로 나뉘어집니다. 적극적인 요인을 세 가지를 들었고 소극적인 요인을 다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순결을 잃어버리는 첫째 요인은 불순종의 영역을 방치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전 포괄적이고 무제한의 순종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에 있어서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근데 신자는 그것이 완벽한 순종, 그 다음에 무제한의 순종이 가능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려고 애쓰고 분투하고 그렇지 못하는 자신을 찾아내면서 거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깨뜨려지는 그런 자세가 바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순종을 해서 죄를 없이 한다든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결과적으로 지킨다든지 하는 것은 성취할 수 없는 일이지만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이 되는 상태는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혼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순종을 해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고 마음에 어떠한 죄도 없는 결과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결코 이 땅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온전히 순종하려고 하는 자기드림, 이것은 가능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생활 속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에는 주님이 뭘 요구하시든지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게 하고 싶다 라고 하는 경향을 가진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뭐든지. 그것은 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자기 사랑, 교만, 아집, 그다음에 육체의 정욕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버릴 때 하나님의 모든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까지는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것들을 방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되는 것을 방치할 때에 그때에 순결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틈새하고 똑같습니다. 처음에 조금 틈이 나면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나가면 더 많은 틈으로 벌어지지 않습니까?
(예화)여러분 아주 과학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가 컨테이너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컨테이너 그 까짓것 박스 그냥 척척 척척 만들어서 쌓으면 되지’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일미리만 오차가 생겨도 컨테이너가 수십개씩 쌓아 올리지 않습니까? 빌딩처럼 그게 바다에 들어가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로 만드는 대도 어떤 때 오차가 난답니다. 오차가 나면 그걸 전부 절단해서 버린답니다. 여기 길거리에 놓고 거기다 유리창도 매달고 현장 사무실로 쓰고 그러는 거 그건 아에 처음부터 그렇게 쓸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치수하고 상관없고 바다에 실리는 것들은 그렇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난 오차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작은 행동 속에서 그가 앞으로 어떤 경향으로 살아갈까 하는 것을 보게 되듯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데 있어서 무엇인가 흐릿하고 선명하지 않은 사람은 큰 것도 그렇습니다. 절대 그런 사람들에게 물질 맡기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작은 것에 있어서 철두철미하고 깔끔한 사람들은 큰일을 처리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의 그 사람의 성향이기 때문에 일의 규모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생관념이 철저한 사람은 어디가서나 위생관념이 철저하고 신통치 않은 사람들은 어디가나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의 성향이기 때문에 불순종의 영역을 방치하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사역의 성공을 위해서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게 결국에 무엇이냐 하면 영혼이 끊임없이 변화되는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고 자기의 사역이 축복이 있으면 사실 타협할 필요를 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건 것들이 없게 되면 타협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제 섬김이 잘 안되니까 자꾸 타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그러한 사역의 태도가 그 사람 자신을 말하자면 부패하게 만드는 순결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보다도 사역을 더 높이게 되는 것. 이런 위험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는 미명하에 행하는데 그리스도와의 어떤 인격적인 관계 같은 것들이 진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떤 결과가 오느냐하면 이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하는데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에게 행복의 이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데 하나님 자신은 정작 자기에게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다른 데서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신속히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 자체 안에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효과도 없고 우리를 부패하게 만드는 효과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일을 할 때 어떠한 믿음과 마음,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느냐의 문제에 달린 것입니다.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태도가 올바르고 하나님 앞에 은혜 생활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계속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화)여러분 아웃리치 가라고 신신 당부 하는 것이 작년에 제가 진도에 갔었는데 진짜 청년들이 불덩어리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이 가기 전에 120명이 갔는데 그렇게 많이 간 적이 없었습니다. 한 40명씩 갔었는데 다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4교구가 청소부터 지역을 할당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가야될 데니까 답사부터 시작해서 기도를 참 많이 하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가니까 진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들을 때에 전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종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거기서 진짜 척박한 시골에서 영혼들이 변화되고 심지어는 말이지 목회자 자신들이 시큰둥하던 사람들이 거기서 은혜 받고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골로 전도활동 간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덩어리가 돼서 돌아오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피곤에 쩔어서 돌아오는 사람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자세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 보다 사역을 높이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들의 기쁨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역만 더 중시하게 되고 거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참으로 거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런 진실한 비밀들이 사라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 자체 안에는 매력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일 자체가 재미있고 마음을 끌게 되면 자기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네 조기 축구회 임원들 열심히 하는 것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어디 집안에 행사 있어도 팽개치고 안가고 자기 돈 대면서 축구화 사다주고 그러면서 하지 않습니까? 모든지 그런 것입니다. 동네 반장 시켜놔도 다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 사실 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얼굴에 뽀뽀하면서 한편으로는 칼을 들이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소극적인 요인입니다. 그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의 증진 없이 기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그냥 일이니까 계속 일하는 것입니다. 무슨 영혼에 대한 깊은 그런 것 없고 제가 알고 있는 후배 선교사가 한번 아프리카에서 사역을 하다가 와서 자기의 기가 막힌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모여서 사람들하고 하는데 사람들은 흑인들이 정직하고 이런 게 아니라 여러분 지금 상황 보면 이번에 아프카니스탄 가지만 지금 아프리카 대륙은 진짜 거의 지옥을 방불케 하는 상황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시무시한 전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이 올곧은 질서를 배우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까 선교사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의를 하다가 모든 서로 털어놓으면서 왜 원주민들이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막 이야기를 하는데 그 중에 한 선교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것입니다. ‘검둥이 새끼들 말이야’ 자기도 모르게 탁 튀어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열심히 그냥 일만 하다가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관계, 주님이 사랑하셔서 내게 영혼들을 맡기셨지, 그러니까 내가 잘 섬겨야지,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그래서 주님을 의지해야지 이런 은혜의 작용이 사라지게 되면 그냥 똑같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 마음의 은혜 없이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이나 헌제자들이 닭 집에서 닭 잡는 사람들하고 뭐가 틀리겠습니까? 아무생각 없이 그냥 두둘겨 잡아가지고 웃고 떠들면서 그 피 묻은 동물 끌어다가 빨리 태어버리라고 그러고 심지어 ‘뒷다리 살 많이 붙었는데 아깝다 태우지 말고 잘라내라‘ 성경에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전부다 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일에만 기능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일을 잘 하는 것도 굉장히 경계해야 될 일입니다. 잘하면서도 자기는 그 일을 잘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화)예를 들면 여러분 보고 사명이 주어져서 혹 전투기를 한번 몰라고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정말 살려달라고 주님 제가 어떻게 이 전투기를 몰겠냐고 매달리겠지만 자전거 몰고 평촌까지 갔다 오라고 하면 여러분 중에 기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수단이나 재능, 자원 이런 모든 것들은 말하자면 다윗의 손에 들렸던 물맷돌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잘 하는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의지한건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자기의 재능이 있지만 그걸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런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사역에 대한 조급함으로 영혼의 실증과 타협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섬겨야 될 일들이 많고 그러면 분주해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영혼의 실증하고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말입니다. 마르다야 한 두가지만 하여도 족하다 마리아는 더 좋은 것을 택했다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히려 밥을 준비하는 마르다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그 자리를 칭찬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어느 청교도가 한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자리가 가장 훌륭한 자리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문제는 실질적으로 이런 것들을 강조하니까 아무도 교회에서 일할려고 하지 않는다고 그럽니다. 무조건 설교만 들으려고 한다고 그러는데 사실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을 전심으로 사모하고 그것을 듣고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이 그냥 일로만 작용하는 것입니다. 전부다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증을 자기가 해야 할 의무의 조급함으로 합리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주님을 섬기면서도 그 영혼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영혼이 위험한 사람들이 교역자들입니다. 장로들, 그의 부인들, 예배 위원들, 예배 빨리 마치고 가서 어린 영혼들을 돌봐야 하는 교사들 등등 이런 사람들의 영혼이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기능으로 관리하기가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교회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영혼에는 찬바람이 깃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맨날 아무것도 안 섬기던 그때가 그립다고 그러고 돌아가 봅니다. 다 집어치우고 하나님 맡겨주신 사명 팽가치고 옛날로 돌아가 봤더니 은혜는 왠 은혜? 무슨 은혜가 있습니까? 그 때는 아무것도 안하고 설교만 들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마음이 순수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명을 맡겨주시니까 다 때려 친다고 그러고 가서 옛날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돌아가 보십시오. 돌아가지나. 자기에게 맡겨진 우는 영혼들 다 팽가치고 가서 그러면서 조용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하면 자기에게 옛날의 그 은혜가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해보십시오. 되나 안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신앙생활을 자기가 무엇을 하던지 어디 있던지 자신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만하고 올바라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위원을 하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겠습니까? 핑계에 불과합니다. 교역자기 때문에 말씀의 은혜를 못 받겠습니까? 거짓말입니다. 교회일이 하도 많은 장로이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겠습니까? 그것도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고 그 의무를 하나님 앞에 잘 감당할 때에 오히려 그 의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는 비결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하는 가운데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8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제자로서 순결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헌신의 목표가 어떠해야 합니까? 여러분 삶의 전 방면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사역에 성공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첫째는 총체적인 순종을 목표로 해야 된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총체적인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정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방면에 있어서 특히 그렇습니다. 보면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본성의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성의 경향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경향이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와 상당히 합치할 수 있습니다. 근데 사실 그게 같은 게 아닙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아주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혼돈 일으키기 매우 쉬운 대목입니다.
(예화) 원래 사랑이 짭니다. 구두쇠입니다. 그리고 자린고비 기질이 있어서 하여튼 어쨌든지 간에 낭비를 안 합니다. 그러는 사람이 이렇게 사치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순종하는 데는 쉽겠습니까? 안 쉽겠습니까? 쉽습니다. 그 사람은 쉽습니다. 그런데 사치하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한테도 인색합니다. 그 다음에 또 원래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래 눈만 뜨면 하여튼 새벽에 일어나서 할 일이 없어도 하여튼 새벽에 일찍 일어납니다. 우리 아버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항상 새벽 4시에 뉴스를 들으시던 분입니다.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시는지 나 같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났으면 가서 조깅이라고 할 텐데 그런 것도 안하시고 이불 속에서 제일 먼저 눈 뜨면서 담배 한 대 피우시고 그 다음에 삐지지직 들려오는 4시 뉴스를 들으시면서 하루를 시작하시는 겁니다. 물론 아침에 나가셔서 마당이라도 쓸던지 뭐든지 하십니다. 그렇게 저희 아버님처럼 본성이 부지런한 분들은 게으르지 말라는 잠언의 명령을 순종하는데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확실히 쉽습니다. 근데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게으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은 일찍 일어나서 아무거나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근데 일찍 일어나는 것은 본성의 기질이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본성의 기질 가지고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인데 부지런히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계속 사고치는 것입니다. 죄 짓고 다른 사람이 늦게부터 시작하는 잘못을 이 사람은 새벽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도둑들이 얼마나 부지런합니까? 야밤에 주무시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그게 같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색깔이 비슷한 것 같지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순종한다 라고 할 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본성과 어울리는 하나님의 계명에는 쉽게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순종을 많이 합니다. 근데 어느 한 부분에 있어서는 순종을 잘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하면 그 순종을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계속해서 죄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예화) 시골에 가면 옛날에 ?같은 것을 시골에다 잔뜩 모아놓고 비닐을 씌워 놓고 거기서 발효 시켜가지고 매탄가스 나오게 해가지고 불 떼고 그것도 새로운 발명품이라고 해가지고 돈 안 들어간다고 하던 것 기억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기분 나쁜 예지만 소똥을 잔뜩 모아 놨다고 칩시다. 넓은 멍석 깔아놓은 것 같은 파진 웅덩이에다 잔뜩 넣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거기에다가 탄탄한 비닐을 덮었습니다. 그 비닐이 어디도 뚫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틀에다 꽁꽁 세지 않게 동여맸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예화입니다. 비유입니다. 딱 동여맸습니다. 그러면 그 소똥이 올라와서 아무리 춤추고 뛰고 노래해도 사실 더러워질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거기에다가 그 비닐을 씌우라고 그랬더니 무엇을 갖다 씌웠냐면 그물망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뜁니다. 그러면 사실은 그 사람은 그물에서 뛴다고 하지만 사실 똥통에 빠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무엇이냐 하면 좋은 비닐을 씌웠는데 가운데 구멍이 조그맣게 뚫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뛸 때는 굉장히 뛸만합니다. 계속 뛸 때마다 꿈벅거리면서 똥물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 개가 무엇이냐 하면 첫 번째 것은 온전한 순종입니다. 두 번째 것은 아무 것도 순종 안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것은 상당히 많이 순종하는데 어느 특정한 부분에 구멍이 뚫어졌습니다. 거기서 뛰면 똥물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은 마찬가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삐져나오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완전하진 않지만 그러나 온전해지려고 지적 받은 모든 방면에 대해서 그렇게 살아야지 ‘아이고 목사님 이 만큼만 살면 됐지. 뭘 또 살라고 그럽니까? 공부 이만큼만 하면 됐지? 내 주위에 친구들 아무리 돌아봐도 이렇게 열심히 예수 믿고 공부하는 사람 없습디다. 내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공부를 안했는데’ 당연합니다. 공부를 안했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공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포기해 버리면 바로 그 구멍으로 똥물이 올라오듯이 죄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의도 자체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돼야 되겠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야지 특기생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내 특기는 전도하는 것이니까 경건생활이 어떻게 됐든 인격이 개차반이 됐든 전도 하나로 끝을 보겠다 그건 사업하는 사람들의 ?지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가 아닙니다. 똥물에 튀겨진 전도자를 하나님이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쁜 예화였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9번 ?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섬김의 영역이 우선적인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습니까?
개별적인 의무 이행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존 오웬에 의하면 죄를 죽이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만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긴 하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위해서 잘 섬기려고 하고 어떻게 하든지 다른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의 연약함이나 부패함이 영향을 안 미쳐서 주님의 일을 잘 성취하려고 하는 그 마음은 기도의 영이랑 통합니다. 이해가 안 가시는 눈빛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테니 이해를 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사명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 사명을 너무 귀하게 생각합니다. 떨립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이것을 잘 하고 싶습니다. 외부의 위험, 핍박이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또 내 자신 안에 있는 야망이나 여러 가지 정욕에 의해서 물들지 않고 이것을 잘 완수해야 되겠다고 어쩔 줄 모르면서 두려워 떠는 그 마음은 기도의 영과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되면 된다고 아멘을 해보십시오. 됩니까 안 됩니까? 나 지금 네 번째 설교니까 말입니다. 세 번만 딱하고 그만하고 싶은 마음인데 여기 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쌩쌩해야지 계속해서 뭐가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끝날 시간만 기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속에서 그 기도의 영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잘 섬기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하는 영이 기도하는 영입니다. 기도하는 영이 일하는 영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사니까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사도 바울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누가 지어낸 것이겠지만 진짜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저도 청년 때에 할아버지 목사님께 들은 것입니다. 어설프더라도 제 책임이 아니라 할아버지 책임이니까 잘 들어 보십시오. 그때 상당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예화) 어느 기도원에서 목사님들이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냐 성경 토론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때 마지막 목사님들이 모두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의 그렇게 하면 좋다고 하는 과장이지 실재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겠느냐 우리가 일을 하다가 보면 기도 못할 때도 있고 또 딴 생각을 할 때도 있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렇게 대체적으로 만장일치를 볼 때 기도원에서 청소하는 자매가 하도 답답하니까 제가 한마디 해도 되냐고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이 하도 기가 막히니까 네가 와서 한번 이야기 해보라고 하니까 저는 성경을 잘 모르지만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냐고 그랬더니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찾으면 항상 기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요 기도원에서 청소할 때도 기도하고 똥간에서도 기도하고 설거지 하면서도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바뀌긴 하지만 그 상황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면 기도가 나오고 잠 잘 때도 기도하면서 잠들고 아침에 기도 속에서 깹니다‘ 목사님들이 항복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어쨌든지 간에 본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무를 이행할 때 마음을 싣지 않는 것은 일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기억나실 것입니다. 아마 이 표현을 똑같은 방식으로 몇 번을 했습니다. 한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잘 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이 망가지고 있는 중입니다. 기억나십니까?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이 주님의 일을 잘 하면 그 사람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잘못하면 일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일을 맡았는지 간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목회자는 여러분들이 집에서 어떻게 사는 지 회사에서 어떻게 하는지 그것까진 사실 모르지 않습니까? 정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면 안 새겠습니까? 여기서 제 앞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그 다음에 가정에서 어떻게 할지 직장에서 어떻게 할지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눈 앞에서는 일을 참 잘하는데 직장이나 집에 가서는 엉망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반대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를 하면서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감당할 때에 개차반으로 감당을 하니까 거기에서 그 사람이 영혼이 자꾸 망가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를 거룩하게 할 힘을 그 속에서 일하면서 그 사람의 망가지는 것을 보충하기에도 급급해지는 것입니다. 근데 결국은 그 공급이 필요보다 밀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뒤로 물러가서 그 사람이 아주 망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섬기기 전에는 사람이 꽤 순순하고 괜찮았는데 한참 섬기고 나니까 영 형편없이 망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껄’ 그랬으면 더 빨리 망가졌습니다.
10번 그리스도를 위해 넘치도록 헌신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
그렇게 될 경우에는 무엇입니까? 아까 나온 것이랑 똑같은 이야기인데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모든 일에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와의 기쁨과 친교, 사랑은 사라지고 일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잘 해내는 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를 않습니다. 교회에 가장 큰 재산은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동시에 일도 잘하는 사람은 보배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뽑을 때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있고 이웃에게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설교했지 않습니까? 임직자들 세울 때. 그러니까 왜 그러면 복잡하게 그냥 성령 충만한 한 사람만 하지 성령 충만한데 열심히 섬겼는데 지혜가 없습니다. 이건 진짜 교회의 재앙입니다. 섭섭한 이야기지만 그 사람이 불 받으면 여러 사람 괴로운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안 되어 있어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은혜를 받아도 하나님께서 진짜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은 골고루 갖추어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1번 신자의 순결을 해치는 가장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신자의 순결을 해치는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죄입니다. 지난번에도 설교하면서 그런 말씀 드렸지만 이제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죄가 신자 안에서 작용을 하는데 인간이 죄를 짓고 잘못 행할 때 죄 때문이라고 핑계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의 힘이 워낙 쌔서.. 그러면 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냐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오’ 그래서 어거스틴이 악은 어거스틴도 마찬가지고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어떻게 생각했냐면 악은 실재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본 것입니다. 선만 실재이고 악은 실재라고 보지 않은 것입니다. 선이 결핍된 것입니다. 불결도 실재가 아닙니다. 실재가 무엇이냐 하면 순결입니다. 순결이 사라진 곳에 불결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자 안에 죄가 사라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이 우리 안에서 가득해지면 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죄는 실체처럼 작용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죄는 실체가 아니라는 논리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은혜가 있는 곳에서 죄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이런 논리로 해서 신자의 순결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순결이 해쳐지겠습니까? 아니면 다 쫓겨나서 벌거벗고 거리를 헤매는 핍박받는 그런 처지가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결해 지겠습니까? 사람의 눈에는 그럴 수 있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순결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죄 죽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11번 죄 죽임의 경험은 기도생활 속에서 그 진수를 맛 볼 수 있습니다. ?
204페이지 두 번째 단락입니다. 이러한 죄 죽임의 경험은 기도 생활 속에서 진수를 맛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과 마음을 드리는 열렬한 기도생활이야 말로 불결과 더러움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비결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유감으로 생각은 합니다. 그렇지만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심각하냐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신자가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것 오늘 하루를 기도하지 않고 한 주 정도를 기도를 게을리 했다 그래서 그의 삶에 기도하지 않은 것이 몰고 올 파괴적인 결과 그것도 역시 두려워해야 할 것이지만 사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중대한 변화가 오고 마음의 틀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기에 적합하지 않은 틀들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를 들면 적합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생각이 났습니다.
(예화) 깨끗하게 새로 빨아온 하얀 이불을 덮고 잠자리이 들었는데 갑자기 기침을 했는데 피가 반 컵쯤 쏟아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아내는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왜 놀라겠습니까? ‘새 이불을 이렇게 버리다니 이걸 어떻게 빨으라고’ 그래서 놀란다면은 그건 인간도 아닙니다. 그럼 왜 놀라겠습니까? ‘저 피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이 콩나물을 먹여야 되는데.. 반찬값이 얼만데..’ 그래서 놀래도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피를 토하면 우리 남편 몸에 피가 모자랄텐데 그래서 깜짝 놀라는 사람은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입니다. 그 정도 피 쏟아도 죽지 않고 산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건강의 심각한 위험이 속에 없는 한 피가 나올 리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보다 나쁜 그 사람의 건강상태에 대한 징후가 된다는 점에서 무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있으면 지금 기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사역과 모든 일에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거나 뺀질대고 기도 안하다가 하나님 앞에 받을 징계가 무섭기 때문에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상태에 지금 있다는 것, 이것을 그 사람이 기도 안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하는 이유는 왜 안한다고 했습니까? 기도를 못하니까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죄와 은혜의 지배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죄만이 우리의 기도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죄가 기도를 죽이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외우시는 분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이 책 한 권 드리겠습니다. 손들어 보십시오. 보람을 느낍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항상 말씀드리는 데 잘 들으십시오. 따라해 보십시오. ‘외우지 못한 성경 교리는 끈 떨어진 가방이다‘ 끈 떨어져도 들고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힘듭니까? 끈이 있으면 매기도 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어깨에 걸치기도 하고 이렇게 목에다 걸기도 할텐데 끈이 떨어졌으니 들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항상 외우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들을. 일 삼아서 외우셔야 됩니다. 그것이 의무입니다. 신자의. 그러면서 이것이 쭉 쌓여져 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무엇입니까? 기도의 준비 되지 못하게 함. 소위 얘기하는 영어로 readiness ‘준비 땅!’ 하면 탁 뛰어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의 영으로 꽉 차 있어서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면 ‘주여‘ 그러고 탁 뛰어나갈 수 있는 순발력이 있는데 기도의 순발력을 먼저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준비되지 못하게 함.
두 번째가 무엇입니까? 기도의 능력이 사라지게 함. 무슨 뜻이냐 하면 기도하는 습관은 계속 남아있습니다. 새벽에 늘 나옵니다. 저녁에 기도시간에도 항상 자기 방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냐 하면 엎드리면 계속 졸거나 잡념으로 꽉 차서 한두시간 보내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능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무엇입니까? 기도하기를 꺼림. 기도하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무엇을 찾냐하면 기도를 안해도 되는 상황, 핑계될 수 있는 상황만 찾는 것입니다. 상황 딱 찾으면 ‘오늘은 피곤해서 안돼. 의사가 쉬라고 했어.’ 언제부터 그렇게 의사 말을 잘 들었는지 하여튼 등등의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의무를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기도의 의무를 무시해버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기도의 틀 자체가 완전히 부서져 버리면서 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꺼려할 때 까지만 해도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가책이 있는데 네 번째 단계까지 가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가책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완전히 무장해제 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기도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두 요소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도의 지속성과 두 번째는 열렬함. 그 열렬함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기도입니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두레박을 던지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길어 올려야 되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이 점에 있어서 거의 자기 죄를 죽일 수 없을 정도로 무장해제 되는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55%가 하루에 10분도 기도를 안한다고 통계가 나왔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무 슬픈 이야기입니다. 명목상의 신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교회 가서 한 자리씩 다 할 것 아닙니까? 그냥 일할 뿐 이지 거기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신들은 있다고 우기지만 진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충만한 은혜의 표징들, 그 속에서 넘치는 생명력 속에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우린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 태어나서 주님을 위해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잘 섬기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 끊임없는 경험, 끊임없는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삶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섬김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어제도 그래서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요새 토요일 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랬습니다. 아웃리치 가는 것 얘기 들어보면 가관입니다. 푸른 초원을 보고 싶어서 몽골 간다는 사람,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생각나서 아프카니스탄 간다는 사람, 한국 전쟁 생각나서 베트남 선택했다는 사람, 중국 자장면이 맛있어서 중국 선택했다는 사람 총천연색 Cinema Scope입니다. 사실은 농담 삼아서 그런 것이지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선교는 기도로 시작을 해서 눈물 속에서 마치는 것입니다. 그 때 거기에서 싹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600-800명이 덜렁덜렁 따라가기 십상입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마음을 모아서 영적전투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가보십시오. 하나님이 놀랍게 여러분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정말 놀랍게 사용하십니다. 이게 선교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