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헌신 7-1
녹취자: 오정민
그래서 오늘 내용은 뭐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1번, 2번, 3번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4번과 5번이 중요합니다.
문제 1-3
1.전제와 독주 전제에는 포도주와 독주가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의 용례로 볼 때 전제에 사용된 포도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2.세례요한에 관한 예언과 디모데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볼 때 신약에서 소주 혹은 포도주의 용례는 어떠 했습니까?
...용례를 통해 볼 때 전제에 사용된 포도주의 성분은 어떤 것입니까? ... 생각해 보십시오.
1번, 2번, 3번을 한꺼번에 모두 풀어 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독주라고 번역된 것이 인제 세카르라고 하는 단어예요. 히브리말로 이게 인제 누가복음에 가면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언이 나올 때 그는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라고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그것이 바로 식케라입니다. 식케라 그래서 세카르 식케라 비슷하죠. 그게 뭐냐하면 나라 말은 틀려도 마치 영어의 버스를 우리가 뻐스라 그러는 것처럼 그렇게 가차음으로 해서 만들은 거다 말이죠. 같은 거라 이거예요. 그래서 오늘에 먹는 무슨 진로 소주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요. 그런거 하고는 종류가 좀 틀린 술이예요. 그래서 어쨌든지 간에 인제 이 전제에는 인제 포도주와 혹은 독주가 사용되었어요. 그래서 피의 전제라는 말도 나오고 하는데 그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제사에서 드려지는 거기 때문에 결국은 포두주와 독주로 요약이 된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독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번역이 좀 안 좋아요. 독이라는게 독이라는게 사실 안 좋은 의미잖아요 사실 여기에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말하자면은 뭐라 그럴까 아주 강한 마취 성분을 가진 그런 고농도의 알콜을 함유한 술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인제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말이죠. 문제가 될게 별로 없는데 여기에서 지금 현재 전제로 드릴때 독주가 사용된거 아닙니까. 이건 제일 마지막에 삼번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에 소제를 드리는 거죠. 그래서 소제를 드리는데 소제가 뭐냐하면 기름을 섞어서 그 곡식에다 기름을 섞은 그 가루예요. 기름의 양이 감남류 찧어낸 감남류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요. 그래서 4대 1정도로 들어가요. 그러니까 가루 4에 기름이 1이 들어가니까 사실 뭐 충분한 양의 기름이죠. 이렇게 해서 그래서 아마도 이걸 고운 가루로 채에 내려서 그 가루를 마지막으로 이제 제사가 삼제가 화제 번제 삼번제에 이르는 삼제가 있잖아요. 그 제사를 다 드리면서 마지막 세 번째 제사로 이것을 드리는 데 이제 이렇게 곡식 가루를 거기다 제단에 뿌리는 거예요. 인제 이게 가루가 그냥 가루가 아니라 기름을 흠뻑 먹음은 거기 때문에 뿌리자 마자 불이 확 붙을 거 아니에요. 그 위에 독주를 뿌리는 거예요. 독주를 뿌리는데 이 독주가 이제 뭐 여러 가지 뭐 이야기가 나와요. 이 독주를 뭘로 만들었겠느냐 포도가 아닌 다른 곡물들을 발효해서 주정처럼 만든 것이 이게 세카르 일꺼라는 학설이 있고 또 저 같은 경우는 그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고농도로 만들어서 그래서 강한 알콜 성분이 있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어쩌든 그러면 결국은 제가 생각하는 바는 이거죠. 굉장히 고농도의 알콜 성분 이었을 거라는 거죠. 지금 불이 붙는 알콜올 술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합니까. 40도면 붙을 까요.. 40도면 붙죠. 40도 정도면 아마 붙을 거예요. 저도 상당히 많이 알죠. 40정도면 붙고 45도씩 되는 술도 있잖아요. 그런 소주가 30도정도 되는 거로 제가 알고 있어요. 안 붙죠. 포도주는 좀 세면은 15프로 약하면 5프로까지 내려가구요. 절대 불이 안 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중국집에서 먹는 고량주 같은 것들은 40도 넘어요. 그래서 탁 붙이면 불이 붙습니다. 위스키 같은 것도 붙구요. 그런데 그렇게 붙잖아요. 그러면은 그런 정도 일꺼라 보는 거죠. 왜냐하면 거기에다 그걸 확 붓거든요. 확 이렇게 불 때에 그게 가루가 떨어지면서 불이 붙고 다시 그 위에 독주가 확 뿌려지니까 그게 확 태워서 한꺼번에 불길이 확 쏟아오르는 그거라고 저는 믿는 거예요. 이것이 말하자면은 독주의 작용이라 보는 거예요. 독주를 뿌리는 이유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그 독주의 전제를 드림으로서 말하자면은 향내가 냄새가 굉장히 좋을꺼 아니예요. 기름을 섞은 가루를 태우고 그 위에 포도주를 고 농축해서 만든 그런 것들을 휙 뿌리면은 그러면은 이제 어떻게 됩니까. 거기서 나는 향기는 알코올 성분은 불에 타지만 향기는 향연과 함께 확 올라갈꺼 아닙니까. 그런 상황이 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이 독주가 재미있는게 디모데서에 가게 되면 말이죠. 물만 쓰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하나의 동사로 나와요. 히트라포테이 그 다음에 오히노라는 말인데 물만 사용하다 또 포도주를 사용하다. 이런 뜻이 되는데 그래서 그러면은 포도주를 사용한다. 자주 나는 소위의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사용한다라고 할 때 이제 그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제가 쭉 힘 닫는대로 조사해보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포도주를 쓰다라는 동사가 고대 히랍 문헌에서 마취시키다 라는 동사로 사용되요.. 그래서 우리들이 무얼 깨닫을 수 있냐면 케로투스 작품들에 보면은 “포도주를 먹은“ 그 단어가 ”의학상태에서 마취된“ 이거하고 같은 단어를 사용이 되요. 그래서 결국 추론하는바는요. 제 추론이 맞을 꺼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이게 무슨 뭐 장기간 뭘 복용해서 위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속병으로 인해서 강한 통증을 느꼈던거 같아요. 그러니까 포도주를 써라 그러는데 정상적인 포도주라기 보다 아주 독한 술이예요. 포도로 만든 독한 술을 먹고 먹으면은 순간적으로 통증이 멎을텐데 어런 것에 대해서 어쩌면은 디모데가 자유함이 없었을 수 있어요. 언젠가 제가 어깨가 너무 아프다고 그러니까 어느 목사님이 소주를 한병 줬어요. 소주를 한 병 줬는데 굉장히 귀한거니까 김 목사님만 꼭 드시라고 그게 무슨 소주냐 그랬더니 대나무 순인가 이거를 집어 넣고, 소주에 담근거예요. 근데 그게 오십견에 아주 좋다고 자기도 이거를 먹고 아주 특효를 받다고 그래가지고 줬어요. 한 병 소주병을 두 병쯤 될려나 줬어요. 그거를 먹는데 물론 저는 자유함이 있었어요. 있었는데 아마 그런 경우일 꺼 같아요. 근데 굉장히 쓰고 그 다음에 세상에 제가 예수 믿기 전에도 싫어하는 술이 소주입니다. 코 끝에서 토할 듯이 나는 냄새가 저는 아주 너무 싫었어요. 근데 그걸 하여튼 눈 꼭 감고 좋다고 그래가지고 그걸 꾸준히 해서 다 먹었습니다. 효과는 하나도 없었어요. 효과는 없었는데 아마 그런 부자유함을 느꼈을지 몰라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등등 이런 바울의 명령을 볼때 부자유함을 느꼈을 꺼에요. 그거를 사도 바울이 윤리적으로 풀어주는 거죠. 그러지않다 괜찮다 약이니까 써라 그러면서 이제 곤고한 장면이 나오는 거죠. 이런 모든 걸로 미루어 볼 때에 사실 독주가 모두 그런거는 아니지만은 부분적으로는 독주가 포도주라는 말과 함께 혼용되어서 사용되었고 그래서 어떤 포도주는 이런 독주일 가능성이 있고 독주는 그 포도주에서 만들어진 아주 강한 알콜 성분울 가진 술이었을 거라 여겨지는 거죠. 이것들에게는 여러분 잘 알다시피 술에는 아주 알코올 도수가 높게 되면은 살균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급하면 위스키 드리 붓고 그리고 그걸로 처지를 한다 말이죠. 그렇잖아요. 그런 것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인제 이런 점에서 볼때에 하나님께서 이런 독한 술을 이 전제에 사용하게 하신 것은 분명히 뜻이 있을 것이다. 이 독한 술을 전제에 사용하게 하신 것은 결국은 마지막 제물에 남아있는 그리고 헌제자에게 남아 있는 불결한 요소들을 모두 태우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불결한 것들을 모두 정화시키는 하나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속에 복음을 담으셨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제 1, 2, 3번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읽어보시면 넘어가는 문제예요. 그 다음에 이걸 적용시키는데 와서 이중의 순결이라는 것이 나와요.
이중의 순결 누가 읽어보실까요. 그 다음에 4번 5번 한사람씩 읽어보십시오.
자 그 옆에 분 큰 소리로 읽어보십시오.
그 다음에 5번
이것은 제가 이중의 순결이라 붙였는데 이중의 순결은 뭐냐하면 첫 번째 순결은 헌제자의 마음의 순결이예요. 헌제자의 마음의 순결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순결은 뭐냐하면 그 헌제자가 그 마음을 가지고 외적 삶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순결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오늘 우리가 이중의 순결이라 부르는 거예요. 이 두 가지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죠. 왜냐하면 외적으로 순결하다 라고 하는 것은 외형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하나님의 기대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목표에 부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섬겨라 라고 말씀 하실 때 거기에 부합한 거를 이야기 하는 거든요. 내적인 순결은 뭐냐하면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순결해 질 때 거기에서 순결한 삶이 흘러나온다는 거든요. 물론 인간이 완전할 수 없지만 어쩠든 순결한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순결한 삶이 흘러나오잖아요. 이거 두 개를 이중의 순결이라 본거죠. 그러니까 나뉘어 지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휘돌아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적으로 순결한 사람에게서 순결한 삶이 흘러나오고 또 그 사람이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맡겨주셨을 때 순전하게 그 일을 처리하고 섬기고자 노력하고 그 의무의 부합하는 삶을 살 때 그 의무에 부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 내면의 세계에 쇄신이 일어나는 거죠. 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거기에 부합하게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개별적인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에 이제 이런 외적인 삶을 하나님의 표준에 맞추는 가운데 자신이 내적으로 하나님 앞에 쇄신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외적인 삶에서 내적인 삶으로 이렇게 함께 계속 휘둘면서 그러면서 휘 돌면서 이러면서 이중의 순결이 충족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이런 내적인 순결이 없이 외적이 순결이 있다. 사실 그 자체가 순결일 수 없죠. 그래서 어저께 설교에서도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만 조다단 에드워드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름이 생각이 않나는데 거기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라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나님과 원수다. 라는 그 논문이 있어요. 거기에서 그 논문에서 뭘 얘기하냐면 이런 얘기를 하죠. 하나님을 향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행동이 이게 하나가 되어야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거시는 기대다 이거죠. 근데 이런 내적인 순결이 없이 외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삶을 산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런 삶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혹시 그런 삶을 흉내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굉장히 불쾌한 것이라 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런 반문을 해요. 만약에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을 향해서 아주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데 상냥하게 대한다면 더 적대감을 느끼지 않겠냐는 거예요. 중요한 거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런 경향들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 그런 본성들이 새롭게 갱신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시는 기대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이중의 순결을 구성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그러면 첫 번째 이 내적 순결은 무얼 의미하느냐 내적 순결은 순결이라는 그 말 자체가 백지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상태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게예요. 그러니까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공허하고 비어있는 진공의 상태가 아니라 꽉 채워진 상태예요. 무엇이 채워져 있냐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꽉 차있는 상태죠. 그러니까 순결한 사람은 따라서 항상 뜨거운 사람이예요. 차갑고 냉정한 순결한 사람 그런거 없다 이예요. 왜냐하면 순결하기 위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대한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법에 복종 시키려는 성향을 갖게 되는 거죠. 그리고 자기가 선이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고 믿는 것을 받아드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하나님의 선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그 선으로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계명을 이행하고자 하는 열린 욕구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순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있고 꽉 차이 있는 그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강력하게 흐르는 흐름을 가지고 있는 거죠. 내적 작용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것이 순결이예요. 그런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해 사랑이 열열해지고 그런 순결한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 열열한 기도가 나오고 열열한 삶이 가능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아파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 지는 거죠. 은혜가 바로 그런 역할들을 한다. 은혜가 바로 그런 역할들을 한다. 그런 은혜가 강력하게 흐르는 거예요. 이번에 죄와 은혜의 지배 책을 썼는데 여기저기서 그 책을 읽고 뭐 자기 의견들을 이야기 하고 요번에 신문에도 몇 개 실었는데 보십시오. 어떤 분은 어느 잡지에다 내 책을 읽고 두 페이지에 걸쳐 서평을 실었어요. 서평 내용은 책에 대한 비난이나 뭐 이런 건 아닌데 잘 썼어요. 근데 책을 지적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결국 우리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다. 그게 사실 처음 듣는 얘기면 안 되거든요. 평신도들도 깊이 알고 있어야할 아주 기본적인 교리인데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구속을 위해서다. 사실 그게 아니라 반대이거든요. 구속은 구원을 위한 것이고 구원은 창조를 위한 거다. 그래서 창조하셨고 죄로 타락해서 망가졌는데 구속을 통해서 창조를 회복 시키시고 그 구속의 과정은 그 창조를 회복해 가는 점진적인 과정이야. 그래서 마지막에 그 세안과 세댐으로 완성된 그림이 그 창조가 다시 완전히 구속을 통해서 회복된 상태예요. 그래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일치하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수많은 성향들이 있는데 그것과 더불어 싸우게 하고 그래서 그것을 이겨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죄와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거지 같은 삶을 살아도 거듭난 신자에게는 창조의 목적대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어요. 내적 몸부림이 있어요. 그것이 없으면 그건 은혜받은 사람이 아니예요. 지속적인 몸부림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이행하는 과정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찼을 때에 그 때에 비로소 내 이기적인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행하며 걸어갈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자원들을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든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있는 거 다 쓰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예요. 자식을 사랑하면 돈 벌고 다 아끼고 자식에게 다 털어 놓아요. 그렇잖아요. 하다 못해 취미 생활해도 여러분 좋아하는 취미생활이 있으면은 다 버리고 자기 취미 생활에다 쏟아 놓는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게 인간의 모습이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이 순결하고 거룩해져야 해요. 이게 가장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도 주에 대해서 참회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한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거죠.
두 번째는 이제 외적 순결이예요. 외적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 가지 방해 요인에 의해서 내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외적으로 나타난 삶이 여기에 어울리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죠. 그런 것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삶을 단정히 하고 하나님의 뜻에 모두 부합하는 그런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순결한 삶이예요. 가끔 보면은 우리들이 이런 때가 있죠. 본인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데 일이 매우 잘못되는 적이 있죠. 그죠. 예를 들자면은 물질 같은 것에 대해서 저 사람이 탐심을 가진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어떻게 하고 보니까 일을 잘못 처리해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아주 매우 오해할 만한 소지를 남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또 비록 명예나 이런 것들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데 처신을 잘못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런 오해를 받을 소지를 남기고 그래서 사역에 오점을 남기는 사람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바로 이제 외적인 순결의 문제예요. 외적인 순결의 문제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 하죠. 책망 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나타나도록 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여러차례 권면을 하죠. 또 흠없이 빛없이 나타나도록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야기 하죠. 또 한번은 어떤 얘기 합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그들을 돕기 위해 많은 부조금을 갖다가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그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조금도 거액의 연보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힘썼다는 그런 고백들이 나오잖아요. 이 모든 것들은 외적인 순결한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외적 순결의 삶이 내적 순결에 기초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내적으로 순결해지기만 하면은 외적 삶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거예요. 흘러나오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지혜도 필요하고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슬기가 필요해요. 그리고 끊임없이 매일매일 자신의 삶과 섬김이 원래의 순결한 정신에 부합하는 외적 삶으로 열매 맺도록 그리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은혜를 주시도록 열열히 기도하고 능력을 구하고 주님의 도움을 사모하고 하는 일도 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순수함이 어떻게 순수하게 우리의 섬김 속에 그대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해요. 그럼 거기서 지혜가 동시에 열정과 함께 충성과 함께 지혜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슬기롭게 모든 사람이 볼 때 책망 받을 것이 없이 순전하게 효율적으로 잘 일하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우리 자신을 계획하고 정비하는 거죠. 그 두 가지가 같이 행해져야되요. 그래서 섬기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그렇게 섬기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둘 다 같이 해야 해요. 어떤 사람은 일이야 되든 말든 맨날 자기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어떡하면 자기 이 영적 침체에서 헤어날까 이 생각만 해요. 그것이 우선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맞겨주신 자신에게 맞겨주신 일들이 막 망가지고 그리고 막 무너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요. 이거 굉장히 무책임한 거죠. 그럼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영혼의 고뇌나 그 괴로움이나 이런 것들을 진짜 건전한 고민으로 받아들일 수 가 없는 거죠. 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고 막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위해서 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고민하는 삶을 위해서 자신의 섬김이나 이런 것들은 아무렇게나 다 되든지 상관없고 그렇게 팽겨치는 것은 옳지 않죠. 로드존슨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목회자들을 상대로 강의를 많이 하셨는데 목사는 이래야 하고 설교자는 이래야 한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막 낙심하는 거예요. 나는 딱 보니까 자기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만 목회를 그만 두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내가 하고 있는 설교는 지금 설교도 아닌데 집어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마다 목사님이 항상 타이른 말씀이 있어요. 하면서 고민하십시오. 하면서 하면서 하면서 고민하십시오. 그래야지만이 실제적으로 고민이 되요. 여러분들이 영혼들을 돌보면서 영혼을 돌본다는 돌보는지 사람에 대해서 계속 설교하고 강의 하잖아요. 지난주에도 했고 이번주에도 했고 어떤 의미에서 격려 받을 때도 있고 그렇지만 낙심할 때도 있죠. 아 진짜 나는 영혼을 섬기는 것도 아니구나. 그래 나는 정말 자격이 없어 때려치자 그만두면 그 다음에 고민도 끝나 무슨 뜻 인줄 알죠. 고민도 같이 끝나지 현장이 없는데 무슨 고민을 하겠어요. 현장이 없는데 무슨 고민을 하겠어요.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금방 바꿔지지 않아도 계속 고민 하면서 자기에게 적용하면서 근데 그 후자의 삶이 집어치우는 전자의 삶 보다 훨씬 더 어려워요. 그래서 뭐 이렇게 섬길바에야 그만두고 그런게 자기 잘난 척 하는 거죠. 이게 이렇게 섬김바에야 그럼 그냥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예요. 이렇게 섬길 바에야 저렇게 섬길 바에야 저처럼 그만 두는 것이 훨씬 양심적이다. 그런데 고민도 동시에 끝나버려요. 현장을 가지고 있어야지 계속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적으로 자기가 순결하지 않은 것을 외적을 삶을 통해서 보고 그 은혜를 받고 그것을 고쳐서 다시 외적이 삶이 온전해지고 하는 이런 순환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매주 명쾌했나보죠.
번죄를 제사장이 드릴 때요.
그것이 문제인데 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뭐냐하면은 그게 모형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사실은 그것을 부어 주신 것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후에 기록으로 남아서 그 제사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 뿐만 아니라 기록을 읽으면서 우리처럼 복음을 알게 될 때 무슨 뜻이냐 하면 두가지면이 있는 거에요. 여기서 이런 잘 이해할 수 없는 거를 속에 복음을 담으셔서 그래서 이거를 깊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점차 점차 복음이 흘러나와서 보게 하시는 측면이 있고 그 다음에 잘 몰랐는데 복음의 빛을 가지고 나중에 확 비춰보니까 다시 이 속에 아직 감춰져 있던 복음들이 확하고 드러나는 거예요.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제사장들이 그걸을 행하면서 그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었느냐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았을까에 대해서는 깊이 느끼는 사람도 있고 못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거라는 거죠. 왜냐하면 영적인 수준의 문제예요. 예를들면 지금 모든 것이 밝히 들어났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해줘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못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거는 그 당시에도 신앙이 문제라고 봐야되는 거죠. 그러니까 다윗 같은 사람이 그걸을 깨달은 대표적인 인물잖아요 그죠. 신앙의 제사장도 아닌데 하나님이 기뻐하는 하나님은 번죄를 안 기뻐하시는 구나. 그걸 깨닫는 거예요. 그거는 당시 제사장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 거든요. 그 당시 주전 10세기에 말도 안 되는 얘기죠. 하나님이 제사를 안 기뻐하신다. 이거는 완전히 반 여호와의 종교적인 선언이예요. 그런데 그게 성경 속에 들어 있잖아요. 깨달은 거는 뭐냐하면 다윗은 그 이상을 깨달은 거죠. 어떻게 보면 그 이상을 깨들은 거죠. 아 이게 그 제사 속에 그 놀라운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이것을 가지고 내가 치료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나님은 이런식으로 드리는 것은 기뻐하지 아니 하시는 구나. 나 자신의 본성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내가 깨트려질 때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것이 사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제사 속에 담겨져 있는 핵심이구나. 이런 거를 깨닫은 거예요. 이런 사람도 있으니까 더더욱 제사장 중에 다윗처럼 깨달은 사람이 없다고 우리가 말 할 수가 없는 거죠.
기도 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공부하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들이 구역 하나하나 잘 돌보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고 힘을 주시옵소서 우리 구역에 변화를 주시고 영혼들의 회심을 주시옵소서. 오는 영혼들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랑과 은혜를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들에게 권고의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요새 제가 광고를 안하니까 의사소통할 기회가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제 뭐 박목사를 중심으로 잘들 하시니까 그렇게 제가 간섭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 가지 분명한 거는 이번에 아웃리치 나가는 것에 대해서 인제 국내전도 쪽에서는 해외는 그런대로 뭐 그렇게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저는 그래도 한 200명 이상 정도는 갔으면 했는데 지금 아마 160명 정도 가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그렇게 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들이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유혹을 받을 때도 있거든요. 지금 아프카니스탄 같은데 가면은 비행기 삯만 100만원이 훨씬 더들죠. 130만원정도 아주 싸게 끊어도 130만원 정도 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가고 뭐 다들 만만하지가 않아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돈을 내고 가서 일주일이나 한 열흘동안 선교하는 동안에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인원이 아주 제한적이예요. 몇 명 안되요. 그리고 또 어떤 지역은 그렇게 비싼 돈을 내고 갔는데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유 같은 것들이 잘 주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데 우리는 무슨 생각이 드냐 하면은 야 이렇게 많은 돈을 쓰고 가서 이렇게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며는 회개 하셔야 되요. 선교에 있어서는 선교는 코스트를 생각하는게 아니예요. 그럼 코스트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제너널셔먼호를 타고 토마스 선교사가 들어왔어요. 혹자는 토마스 선교사가 타고 들어온 배가 식민지를 확장하기 위한 배 였다는 거를 가지고 뭐 같은 놈이다 이렇게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토마스 선교사는 식민지를 세우기 위한 일환으로 온 것이 아니라 그 배가 온다니까 접근할 수 없으니까 그 배를 탄거든요. 그래서 와서 몇 사람에게 전도하고 죽었어요. 전도 못하고 한문 성경책 한권 남겨놓고 목 짤렸어요. 죽었어요. 그러면 그보다 미친 짓이 어디 있어요. 코스트 코스트가 들어갔는데 사람의 생명을 버렸는데 그 젊은이가 근데 무슨 선교를 했어요. 그 배를 타고 들어갈 때 한국 사람 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꺼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셔먼호는 불타고 죽었어요. 근데 그 코스트를 드려서 뭘 했어요. 이렇게 되었는데 결국은 떨어진 그 성경 때문에 이 땅이 복음화 되는 시초가 된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순교자의 피를 먹고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거기 앉아서 그 알량한 돈 타령하고 앉은 거예요. 그거는 굉장히 회개할 일이예요. 그렇게 코스트를 생각해서라면 이 은둔의 땅 조선에 아무도 안 왔어요. 언제 올 수 있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봉건시대에 그 무서운 유교사상 때에 올 수가 없었고 일제시대에는 그 일본의 억압 때문에 올수가 없었고 그죠. 그 다음에 자유롭게 된 때에는 그 치안이 얼마나 어려웠어요. 올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군사정권 들어 갈 때에는 서슬이 시퍼런 독재의 시대예요. 올수가 있었겠어요. 그럼 어떻게 되겠냐 이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거 아니예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거예요. 기본이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굉장히 슬퍼하시는 거예요. 몰라서 그러면은 조금 낳겠지만은 알면서 그러면은 굉장히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요. 뭐 누구 개인 얘기해서 안되었습니다만 제가 데리고 있는 우리 교회에 있는 자매 가운데 하나 있는데 참 칭찬 할만 해요. 하나님 앞에 아주 어린 나이에 제가 일년에 한 두 번씩은 꼭 단기 선교를 가겠습니다. 그러고 벌써 몇 년째 한 10년 된 모양이예요. 매해 다녀요. 자비로 다 돈을 모아서 지난해에도 그 자매가 아프카니스탄을 갔어요. 어떻게 가느냐 하니까. 자매 둘이 간데 그 누구 만나는 사람 있느냐 그러니까 아무도 없데 그럼 어떡할꺼냐 그러니까 우리 이런식으로 여태까지 해왔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펄쩍 뛰었어요. 너 그렇게 하면 안된다. 니가 그래도 이 교회에 지체인데 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 실종될 들 알겠어요. 그래서 충성도 필요하지만 지혜도 필요하다. 그래서 너 거기에 있는 선교사하고 먼저 연결을 해라 그래서 그 선교사는 정착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늘 연결이 될테니까 내가 너의 거처와 안전함을 확인 할 수 있겠금 만들어 놓은 다음에 너 가라 그랬더니 굉장히 감격하는 거예요. 여태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단교선교 다녀 보왔지만 이렇게 염려해 주는 교회는 처음 봤다 이거예요. 가면 가나 보다 오면 왔나 보다 그래서 갔다 와서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130만원씩 드려서 그렇게 해서 24시간을 비행기를 타게 되요 아프카니스탄을 가면 알지만 24시간 타고 가서 일주일 만에 돌아오니까 어떻게 되요. 가는 거 하루 오는 거 하루면 닷새잖아요. 날짜 바뀌고 머 하고 그러면 실제로 거기서 밤시간 빼고 그러면 실제로 전하는 시간 3일 밖에 안되 만나는 사람 한정되어 있어요. 근데 그때 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번에는 저기 티벳에 갔다온 이야기를 해주는데 가기 전서부터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는데 마음을 도대체 열지를 않더래요. 마지막 날 복음을 말이 안 통하잖아요. 통역 세우고 손짓 말 짓하고 그림 그려서 마지막날 그 티벳트 자매가 가정 주부인데 부끄러워서 인사는 잘 못하면서도 자기들이 인사를 하고 떠나는데 그렇게 문틈 문뒤에 서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더라는 거죠. 주님도 영접하고 말이죠. 거기는 기적이 일어나도 복음을 들을 가능성이 없는 곳이예요. 그런 곳은 누군가가 가야지 가야지 가서 130만원 150만원 드려가지고 가서 5살 박이 어린 아이 한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셨단다. 예수님이 날 많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내가 널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예수 믿고 주님의 사람이 되라 그거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들을 수 없는 소식이예요. 지금 아프리카의 코소보나 라이베리아 같은 곳에는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요. 소말리아 마찬가지예요. 거기은 요새 다이아몬드 때문에 난리래요. 그걸 점령해서 돈줄로 삼아서 반군들이 그 군인들을 사가지고 정부군하고 싸우는데 그 군인들이 열네살 열다섯살 먹은 애들이예요. 어제 책을 읽으면서 정말 너무 놀랬어요. 뭐냐하면 그 아이들이 열여섯 열일곱 먹은 아이들이 미친듯이 양민을 학살하는 거예요. 반군들이 마약을 주입시킨 상태에서 죽여라 그러고 정부군 쪽에 있는 사람들 한테 보내는 거죠. 심지어는 눕혀놓고 왼팔 짤라줄까 오른 팔 짤라 줄까 그때에 나 왼팔이요 한 사람은 왼팔만 짤리는데 대답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두 팔을 다 짤라데요. 눈 뜨고 말로 차마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일들이 벌려지는 거예요. 머가 없어서 그래요. 복음이 없어서 그런거예요. 가야되요. 그래서 내가 부탁해요 여러분 돈 없는 거요. 여러분 아직 선교를 본격적으로 안해 봐서 그렇지 무릎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주셔요. 아주 신기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주신다고요. 그게 간증이예요. 그래서 선교는 먼 처음 무릎꿇고 기도하면서 시작되어서 마지막 뿌리고 온 다음에도 무릎꿇는 거예요. 그러면 가는 것 뿐만 아니라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모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세요. 신기해요.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세요. 하나님이 신기하게 그렇게 신기하게 역사해 주세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 문제는 뭐냐하면 돈도 없는데 이게 여행이 아니예요. 그럼 가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해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내가 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묻고 싶은 거예요. 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예요. 묻고 싶은 거예요. 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냐 이거예요. 돈이 없어서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이 주신다니까요. 하나님이 안 주시면 제가 드릴께요. 믿음을 가야지 그래서 아주 명백한 이유가 있지 않는한 다 가시라 이거예요. 왜 아멘들을 안해 못 가야할 명백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못가죠 그렇지만 나머지는 다 가라 이겁니다. 아멘 그리고 가가지고 말이야 거기에서 가서 뭐 구경이나 하고 올 생각을 처음서부터 하고 가면 안되요. 관광이나 하고 그렇게 하면 안돼. 관광하고 싶으면 적금 들어서 돈 모아서 여행사 쫗아가서 관광 실컷 해요. 선교하러 가는 거예요. 즐거움을 포기하고 영혼을 생각하면서 가시라 이거예요. 가서 그래서 정말 한 사람이도 끌어 안고 눈물 흘리고 복음을 뿌리고 와요. 그럼 역사가 일어나잖아요. 지나번에는 중국에서 가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적이었어요. 저기 남쪽에 있는 묘족들 한테 말이죠. 학교를 세워주고 복음을 전하러 예배를 드리러 갔더니 교회도 하나도 없는 교회에다 찬송을 부르면서 온 주민이 언덕에서 걸어 내려 오더래요. 언제 누가 여기와서 복음을 당신 언제적부터 당신 마을이 예수를 믿었냐 그랬더니 대답이 걸작이예요. 조상적부터 믿었습니다. 기록을 보니까 100년전에 마지막으로 선교사가 왔다 가고 그 다음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근데 두 사람이 거기에서 순교했었요. 그 이후로 아무도 거기에 복음 전하러 안들어 갔어요. 그런데 그야 말로 조상적부터 믿어온 신앙이 그 고립된 마을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는거죠. 그 두 사람의 피가 얼마나 고결해요. 우리의 목숨을 어디에다 드리겠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많은 사람이 은혜받고 움직이는데 아직 안 움직이는 지체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안되요. 기도하세요. 그리고 펼쳐놓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가고 싶은 나라 있으면 선교회에 가서 늦어서 미안하다 그러고 붙여달라고 그래요. 그럼 아마 붙여줄꺼예요. 그렇게 해가지고 가요 왜 그래요.. 그리고 가는거는 돈 있으면 자기돈으로 가지만 없으면 남의 돈으로 가는 거예요. 기도하면서 보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보내주세요. 귀가 시간이나 모든 것이 여력이 안되시는 분은 국내에 다 가세요. 왜 안가는지 내가 다 물어 볼꺼예요. 안가는 사람은 모두 모아서 교회에서 매일 기도회를 하자고 가든지 보내든지 돈을 내든지 셋중에 하나 해야 될꺼 아니예요. 그럼 모든지 해야 될꺼 아니예요. 가서 말이죠. 불쌍하지 않아요. 시골에 너무 많은 교회들이 지금 죽어 있어요. 내가 애기는 안 하겠습니다. 작년에 여러분들이 진도를 갔었어야 되요. 진도 120명 청년들 갈 때 거기 일어 났던 성령의 역사들을 여러분들이 봤어해 해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거예요. 도시에서 이렇게 안락하게 살면서 말이지 하나님 앞에 섬기는 것이 쥐뿔이나 뭐가 있습니까. 진짜 하나님 앞에 누리고면 살지 쏟아져 낸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청년들 가서 그렇게 했어요. 정말 사도행전적으로 했어요. 정말 진짜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더라고요. 그 완고한 사람들이 깨트려지더라고 눈물나지 않아요 한번 조용히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봐요. 주님을 마음을 해서 가세요. 진짜 꼭 가세요. 그래서 가서 우리 힘 없죠 능력 없죠. 그렇지만 가서 힘껏 한 일주일이라도 온몸을 다해서 조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가 가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희망이 없는 임실에 갔을 때도 할머니 할아버지들 복음을 전하면 그렇게 우는 거예요. 얼마나 맺힌 것이 많으면 말이죠.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다라고 생각하면 안되요. 가세요 내가 정말 눈물로 여러분께 권합니다. 가십시오. 주님을 위해 마지막 죽을 길 그래도 손들고 일어나야 하는데 거의 다 살아서 돌아와요. 순교하지 않고 옵니다. 가세요. 이제 진짜 집에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