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2023년 여름수련회
설교기간 | 2023년 07월 30일 – 08월 01일
2023년 08월 13일 – 08월 15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10월 13일
목 차
<청년부 수련회>
1. 절망 속에 탄식함(욥 7:15-18)2023.07.30. 청년부여름수련회 첫째날 저녁집회 15
2. 희망 속에 위로하심(욥 19:23-26)2023.07.31. 청년부여름수련회 둘째날 저녁집회 28
3.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욥 23:8-10)2023.08.01. 청년부여름수련회 셋째날 저녁집회 42
<장년부 수련회>
1. 절망 속에 탄식함(욥 7:15-18)2023.08.13. 장년부여름수련회 첫째날 저녁집회 54
2. 희망 속에 위로하심(욥 19:23-26)2023.08.14. 장년부여름수련회 둘째날 저녁집회 66
3.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욥 23:8-10)2023.08.15. 장년부여름수련회 셋째날 저녁집회 78
<설교 프레임>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1 2023.7.30. 청년부여름수련회 첫째날 저녁집회
< 절망 속에 탄식함 >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5-18)
I. 본문 해설
욥은 순전한 믿음으로 고난(苦難)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히브리어에서 왔다면 “미움받는 자”라는 뜻이고, 아랍어에서 왔다면 “회개하는 자”라는 의미다.
욥기는 욥 자신의 자전적 기록으로 판단되며, 저술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쯤인 족장들의 시대로 여겨진다.
그 근거는 당시 제사장이 없이 제사가 드려졌던 것과 “케쉬타”라는 화폐 단위, 200세까지 장수한 욥의 삶 등이 역사적 증거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욥은 마음의 고통 때문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의 아픔은 이를 악물어 참을 수 있으나, 마음의 아픔은 온갖 정염(情炎)들을 쏟아 놓게 하였다. 그는 가슴에 있는 말을 토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 내 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 7:11下)
고통받는 자에게는 잠자는 것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나 욥에게는 침상에 잠들어 수심(愁心)을 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욥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두렵게 하셨기 때문이다(욥 7:14).
그는 거듭되는 시련들 속에서 시험 초기에 고백했던 신앙을 잃어버렸다.
“…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下)
II. 절망 속에 탄식함
A. 죽기를 희망함
욥은 거듭되는 시련(試鍊) 속에서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 지쳐서 더 이상 고난을 인내할 힘을 상실하였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욥 7:15)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과 불행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意味)를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행복의 의미를 알 때 타락하지 않을 수 있고, 불행의 의미를 알 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신 것이 그의 순전함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욥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사람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순전함을 두고 하나님께서 사탄과 나누신 대화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計劃)안에 있는 작은 고안이었다.
그것은 욥으로 하여금 고난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세계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것들의 시행 방식에 관해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순전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처음 고난을 당했을 때, 당시 욥의 믿음은 유치원 수준에 불과하였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성숙(成熟)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자신도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큰 섭리에 눈뜨게 하시려고 고난 속에서 연단 받게 하셨다.
오랜 시험을 겪고 보니, 욥은 이전에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자신은 온전하지도 않았고 또한 순결(純潔)하지도 않음을 깨달았다.
또한 자기가 결심한 것만큼 온전함을 굳게 지키지도 못하였다(욥 2:3).
오히려 일련의 시험들을 통해서, 욥은 그토록 자신했던 자신의 믿음의 한계(限界)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 자기는 정결하다고 믿는 자기의(自己義)에 갇힌 채 살아온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세계관이 전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은혜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셨다.
고통을 받으나 그 의미를 모르는 자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욥의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있었으니, 그는 차라리 목이 졸린 채 숨이 막혀 죽기를 원했다(욥 7:15).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意味)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의인으로서 애매히 고난을 받은 자의 위대한 표상으로 추앙되고 있는 욥이 가진 믿음의 실체(實體)였다.
욥은 괴로워서 죽고 싶었다. 이것은 그가 당한 시련(試鍊)의 크기를 말해 준다기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의 한계를 말해 준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고난을 인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不幸)의 근원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끄러져 침륜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데, 거기서 겪는 기쁨과 고통에 어찌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의미 없는 불행은 없다. 그러나 고통(苦痛)의 뜻과 불행의 의미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잠시 당신의 마음을 불행과 고통에서 떼어놓으라. 그것들을 마치 남이 당하는 일처럼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라.
그때 죽기를 희망하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살길이 보인다.
B. 허무를 경험함
욥은 고난받을 때, 처음에는 자신이 엄청나게 순전한 믿음을 지닌 사람인양 행동했다. 그러나 이유(理由)를 알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었다.
결국 욥은 자기 신앙(信仰)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고, 인생의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는 사라졌고, 인생은 허무(虛無)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6)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욥은 이제껏 애착하던 생명(生命)이 싫어졌다.
나아가서 욥은 자신을 여전히 살려 두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항거는 불신앙이었다.
“…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6) 이것이 어찌 믿음의 사람 욥에게 어울리는 고백인가? 그것은 명백한 불신앙(不信仰)의 고백이었다.
그는 한때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 건강하던 자신의 온몸이 종기로 가득하였을 때조차 자기의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그러나 그것은 다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금 욥은 자기의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꼈으며, 스스로 살아있는 것 자체가 슬픔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께 매일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곧 사라질 아침 안개 같은 희망(希望)을 붙들며 사는 삶은 의미가 없었다.
고난이든, 행복이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무엇인가를 상실한 박탈감을 느끼고 허무(虛無)하기는 매일반이 아니겠는가?
*불행보다 무서운 괴물 : 허무감
욥은 비로소 자신이 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무게를 느꼈다. 아마 그의 인생 최초로 느끼는 것이었으리라.
그는 이제껏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순전함에 대한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 세 가지에 대해 원망(怨望)하였다. (1)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 (2)그에게 마음을 주신 것 (3)그 마음을 꾸짖어 단련하시는 것.
그러나 그것들 중 무엇이 하나님이 잘못하신 일이란 말인가? 시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는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이 찬송 제목이 되지 않았던가?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상만사(世上萬事)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 마음을 주셨기에 욥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지 않았던가? 그를 찬송하고 감사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속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경험한 시인(詩人)은 욥과 같은 마음으로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고백한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4)
지금 욥은 바로 그 시인과 같은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다. 이런 고백은 욥이 큰 시련을 겪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닫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6)
욥은 거듭되는 시련을 통해서 비로소 인생의 허무(虛無)함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으로 나아갈 기회였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가 “바다괴물”이냐고 물었으니, 이는 곧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怨讐)”냐고 묻는 것이었다(욥 7:12). 이는 당시 그의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욥은 무지하였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 수시로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했다.
인간이 탁월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조차도 괴로움의 이유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정신이 탁월하기 때문에 질문(質問)은 하지만 스스로 답(答)을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번민하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조차 그것을 따라 행하며 살지 못하기에 괴로워했다.
결국 인간은 지성(知性)과 마음에 있어서 모든 만물들에 비해 탁월하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독립하심으로 아름다우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依支)함으로 아름답다.
욥은 거듭되고 심화되는 고난 속에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거기에까지 도달하기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에 있어서 그의 수준은 아직 일천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의존(依存)할 수 없었다. 그의 반복되는 원망과 낙심은 그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욥은 감히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책망(責望)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짜증 섞인 투로 말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여기서 우리는 욥의 신앙의 바닥을 본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下)하던 그 아름다운 고백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단지 침체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던 욥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절망(絶望)이란, 단지 희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자기가 겪는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없는데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토록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욥이 이렇게 쉽사리 절망에 굴복하리라 누가 어찌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찬송(讚頌)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욥은 아주 짧은 시일 내에 그토록 쉽게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꼈다.
그리고 진심으로 죽기를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다.
이러한 절망(絶望)은 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사람만큼 순전하지도 않고, 믿음이 굳세지도 않은 우리는 얼마나 그럴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인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시 욥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는 더 풍부한 지식이 있다. 그가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그리스도를 우리는 분명하게 보았다.
욥이 확신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모두 십자가에서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무를 이길 수 있다.
III. 적용과 결론
삶의 목적(目的)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인생길에서 겪는 모든 시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매 순간 겪는 일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성품(性品)을 배우게 하는 도구인 것을 기억하라.
때때로 지상에서 발견하는 삶의 허무함을 기꺼이 인정하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라.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2 2023.7.31. 청년부여름수련회 둘째날 저녁집회
< 희망 속에 위로하심 >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3-26)
I. 본문 해설
욥의 친구들은 선악 상벌론을 굳게 믿었다. 하나님은 정의(正義)로우시기에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들이 잘못 믿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선악 상벌론(賞罰論)이 항상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로 앞장에서 수아 사람 빌닷의 비판적 논리는 욥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으로 기계적인 선악 상벌론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욥이 거듭 고난을 받는 것은 곧 그가 죄(罪)를 지었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뜻은 드러난 뜻과 숨겨진 뜻으로 나뉜다. 전자는 계시(啓示)고 후자는 섭리(攝理)다. 섭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빌닷의 논리에 따르면 욥이 거듭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며, 이는 필시 그에게 숨겨진 죄(罪)가 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사에는 때때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엄격한 기계적 선악 상벌론에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ideology)였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욥 18:4)
욥은 빌닷의 비난과 정죄에 대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욥 자신도 처음 겪는 고난이었다.
당시 욥의 신앙(信仰) 수준으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죄 때문인지는 몰랐다. 자신을 더 온전케 하시기 위함인 줄 몰랐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이 나를 치셨구나”(욥 19:21)
II. 희망 속에 위로하심
그러나 욥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비록 그는 자기가 고난을 당하는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불신앙으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지식(知識)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받는 고난(苦難)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를 원하셨다.
A. 대속자가 계시다
드디어 그는 처음에 고난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깨우침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대속자(代贖者)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나의 대속자”( )라는 단어는 “구속하는 자” 혹은 “기업 무르는 자”를 뜻하는 “고엘”에서 온 것이다.
*고엘()과 구속에 대한 설명
이제껏 욥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했다. 자신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인간 만사(萬事)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런데 욥은 이토록 큰 고난들을 겪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대속자(代贖者)가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곧 중보자(仲保者)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욥이 약 4천 년 후에야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그렇게 풍부하게 알지는 못하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를 대속할 중보자가 있음을 깨달았다.
대속자(代贖者)이신 그분의 도우심으로 자기가 이 환란에서 반드시 구원받을 것을 확실히 믿었다.
이는 성경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에 비춰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깨달음이었다. 이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1. 살아계심
욥에게 그 대속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고는 알 수도 없는 이유로 징벌(懲罰)을 받고 있는 자신을 건져 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욥 자신은 사람인 구속자(救贖者)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대속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과 같은 중보자(仲保者)여야 했다. 욥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대가를 치러주심으로써 고난에 처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분이셔야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자신 사이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그를 대신하여 대가(代價)를 치러 주실 수 있는 분이셔야 했다.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또 다른 하나님 같은 분, 곧 대속자를 기대했다.
욥도 그 당시 대속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신지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중보자셔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중재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인간을 위해 변호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仲裁)하여 화목하게 되도록 도와 주실 구속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되었을 것이다.
욥은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큰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그분에게만 소망(所望)을 둘 수 있었다.
욥은 비로소 중보자이신 대속자가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 또한 욥이 고난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비록 그는 이미 정결하고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知識)을 주고 싶으셨다.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더 많이 알게 하고 싶으셨다. 당신의 더 큰 뜻을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뜻은 고난(苦難)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욥은 고난 없이 연단 받을 수 없고, 연단 없이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더 광대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자,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욥으로 하여금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셨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하셨다.
욥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겪은 후에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스스로 죄 없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고난(苦難)을 받고 있다고 믿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렇듯 욥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現實)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보자이시고 대속자이신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생각하라. 무엇보다도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仲保者)가 계심을 기억하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시고, 친히 도우시며,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다.
무지할 때 지혜롭게 하시며, 약할 때 강하시며, 고난받을 때 건져주시며, 범죄했을 때 용서(容恕)하신다. 중보자가 계심을 기억하라. 고난받을 때 그리스도가 희망이시니, 오직 그분을 의지하라.
2. 땅에 서심
욥은 중보자이신 대속자(代贖者)가 언젠가 땅에 서실 것을 믿었다. 이 말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감춰지지 않고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도록 그분이 통치하실 때가 온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욥 자신조차,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의 한계 때문에 자신이 왜 고난을 받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대속자는 살아있기에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시며, 언젠가 욥의 친구들도 자신이 고난받는 이유를 명백히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욥은 자기의 세 친구들도 대속자(代贖者))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눈뜨게 되기를 바랐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발전사에 있어서, 욥이 구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 하나님을 보리라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더 놀라운 복음(福音)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고난 속에서 죽을지라도 다시 부활(復活)하리라는 믿음이었다.
1. 육체의 죽음
욥은 큰 고난을 통해 인생의 허무(虛無)에 눈을 떴다. 자신이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을 수 있음도 받아들였다.
시험을 당하던 초기와 비교할 때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성장이었다.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여기서 “가죽이 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그림 언어다.
당시 유목문화 사회에서 짐승의 가죽을 벗기기 전에 먼저 그것을 죽여야 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고난의 초기에 욥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확신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믿음의 경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신이 겪은 그 모든 고난의 이유가 해명(解明)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고난 속에서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이 계획(計劃)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비록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人生)을 모두 맡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이제 욥에게 고통과 행복, 생존과 죽음 사이의 경계는 아이들이 놀이를 위해 땅바닥에 분필로 그어 놓은 줄에 불과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떻게 그런 담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2. 육체 밖에서
그것은 부활(復活)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처한 고난에 대해 그 원인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해도 기꺼이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며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육체 바깥에서라도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뵈옵겠다”라고 한 욥의 고백(告白)은 그의 부활(復活) 신앙을 보여준다.
비록 세상에서는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으나 결국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정의(正義)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또한 자기가 죽은 후에 반드시 부활한 육체로 맞이할 내세(來世)가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날에는 자기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다.
욥은 자신이 죽어 육신(肉身)이 사라진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영혼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비록 자신이 애매히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바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인생 끝나도...”
이 땅에서는 비록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만나고 기뻐하는 것이 신앙이다.
또 죽은 후에 육체 바깥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리라는 지복(至福)의 행복을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苦痛)의 이유를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인류 역사상, 악과 고통의 문제는 단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거대한 담론이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악(惡)할 수 있는가?
III. 적용과 결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탐구가 요구된다.
물론 그런 노력(努力)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악(惡)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믿음(faith)을 갖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분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 그때 거기 육체(肉體) 밖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육체 안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라!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3 2023.8.1. 청년부여름수련회 셋째날 저녁집회
<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8-10)
I. 본문 해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시 변론한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하는 욥을 비난하며 “네가 경건하다면 어찌 하나님께 심문을 당하겠느냐”고 반문한다(욥 22: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4-5)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은 알지도 못하는 죄를 거론하며 참소한다. 욥이 이웃에 매정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였다는 것이다.
엘리바스가 그렇게 고발하듯이 말한 것은 어떤 증거(證據)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계적인 선악 상벌론에 입각해서 욥이 지은 죄를 거꾸로 추론해 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욥에게 충고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다시 말해서 욥이 겪는 모든 고난이 바로 그의 죄(罪) 때문에,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욥의 친구들은 이렇게 긴 논쟁적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고정관념, 곧 개인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며, 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욥기가 쓰여진 것이 족장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선악 상벌론은 그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이었을 것이다.
엘리바스로부터 터무니없는 공격을 당한 욥은 답답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욥 자신도 자기가 겪는 고난(苦難)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 이유를 변증할 수 없는 고난의 현실에 대해 한탄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변론할 말을 가질 수 있겠는지” 스스로 묻는다(욥 23:3-4).
당시 욥의 믿음이 비교적 순전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의 수준은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뵙고 답을 얻기를 원하였다.
욥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그리고 그 유명한 믿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II.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정확하게 논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논쟁의 과정을 통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焦點)을 자신에게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A. 나의 길을 아심
그렇게 하고나니까 비로소 현실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다. 그것은 믿음이 가져다 준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비록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計劃) 속에서 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 나의 가는 길
여기서 “길”은 “인생길”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길을 걸어가는 주체는 욥 자신인데, 그 길을 왜 가야 하는지, 어디로 향하여 가야 할지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욥이 불현듯 그런 믿음을 갖게 되자, 이제껏 자신이 당한 고난 때문에 더 이상 무질서한 혼란과 정신적인 방황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計劃)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가 가야 하는 길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길이었다.
비록 자기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겪는 자신의 처지를 “나의 가는 길”이라고 부른다.
처음에 욥은 이제껏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苦難)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믿었다.
무엇인가 자기 인생이 꼬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로움과 정당함을 주장했다.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할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욥은 이제 믿음으로 그 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현실의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이해(理解)할 수 없을 때라도, 비록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지만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마땅히 주체적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야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이해(理解)를 초월하는 고난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마음을 열어 두는 믿음이다.
그 고난의 원인들을 비록 다 이해(理解) 못할지라도 여전히 자기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고통의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덜 불행(不幸)해 지는 길이 무엇인가? 만나지 않은 불행은 피하고, 이미 만난 불행은 더 이상 큰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구든지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더 많은 인생을 살다가 보면 깨닫게 된다. 고난받을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때 겪었던 일의 의미(意味)를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나의 인생이 그분의 주권 안에 있으며, 그분의 뜻을 거슬러서, 그분이 모르시는 일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은 모든 선(善)하심과 자비(慈悲)하심으로써 나의 인생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이다.
2. “아신다”는 의미
욥은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여기서 “아신다” 는 것은, 단지 객관적인 지식(知識)으로 아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런 길을 가는 욥을 사랑으로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그 길을 오직 하나님 의지하는 믿음으로 걸어가는 욥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뜻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치자, 욥은 이제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 비록 자신은 앞길을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자기가 가는 모든 길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선악 상벌론이나 인과응보의 신앙, 곧 욥의 세 친구들이 갇혀있는 그 이념(理念)에 묶여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괜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욥이 가는 길을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비록 한치 앞을 볼 수 없고 얼마나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욥은 그 사실을 믿는 것으로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욥의 이 위대한 고백(告白)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담함과 물처럼 녹아내리는 욥의 마음이 담겨 있다.
고체는 자기 형체로 있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액체는 그러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냥 어디로든지 흘러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이제 욥에게는 자기가 겪는 고난(苦難)이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든,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지 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 계획을 갖고 계시며, 그 길을 가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욥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실지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욥은 자신의 인생(人生)을 그분 손에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되었다.
B. 나를 단련하심
욥은 자신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더 정결(淨潔)하게 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욥은 한때, 어리석게도 자신이 순전(純全)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무지와 불결을 깨달았다.
그것은 제사나 예식, 행동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껏 자신도 알지 못하던 마음 갈피갈피에 깃들여 있는 죄악의 결과였다.
욥은 비로소 자신이 더욱 정결(淨潔)케 되어야 하고 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인생 전체가 자기를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껏 주신 형통함이나 고난도 그 목적을 위해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동안 자기가 의롭다고 믿은 것이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신앙의 변화였다.
1. 순금처럼
욥은 그것을 “순금(純金)”이 되는 것에 비유하였다. 금이 통용되던 시대는 어느 때나 그것은 순도에 따라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었다.
어떤 좋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더 좋게 만들면 더 좋은 것이 된다.
순도 낮은 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더 좋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 완전하지 않다지 않은가?
지금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없는 죄를 마른 행주를 짜듯이 닦달하여 고난으로 책임(責任)을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니었다.
욥의 믿음은 훌륭하였고 마음도 순전하였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욥에게 기대하시는 최고의 것은 아니었다.
욥의 믿음은 순전하였으나 더 완전(完全)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때로는 죄 때문에, 때로는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다.
욥은 삶에서나 마음에서나 더 높은 수준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까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세 친구들의 수준과 별반 다르지 아니했던 욥은 더욱 완전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
* 높은 산에 올라서 경관을 보는 경험
2. 단련하심
욥의 신앙과 인격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는 단련(鍛鍊)되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단련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단련(鍛鍊)하다”는 금의 제련법의 공정을 암시한다. 치열한 불길에 거듭해서 금광석을 녹아내리게 하고 거기서 불순물이 걸러지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더욱 순도가 높은 순금(純金)이 나온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단련되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형상(形狀)을 본받을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커다란 유익(有益)이 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목적(目的)으로부터 세계의 종말과 천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과 만물을 아우르는 큰 그림이다. 그 안에서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苦難) 속에서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듬으신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인생은 내 손에 있다. 내가 보호하고 지켜준다. 그러나 네가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순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타고난 성향(性向)과는 전혀 다른 소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함이다.
*소명과 다른 성향의 비밀
무엇 때문일까? 우리의 약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로 하여금 연단(鍊鍛) 받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된 옛 성품을 정결하게 하시고 은혜로운 새 성품을 북돋우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연단을 통해 빚어졌다.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연단을 받을 때 기뻐하라. 우리를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形狀)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
III. 적용과 결론
고통 없는 연단은 없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 없이 금을 정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낙심(落心)하지 말라.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가 어디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지 아신다.
당신이 당하는 고난(苦難)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굳게 믿으라. 당신이 가는 길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라.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1 2023.8.13. 온가족여름수련회 첫째날 저녁집회
< 절망 속에 탄식함 >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5-18)
I. 본문 해설
우리에게 욥은 순전한 믿음으로 고난(苦難)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히브리어에서 왔다면 “미움받는 자”라는 뜻이고, 아랍어에서 왔다면 “회개하는 자”라는 의미다.
욥기는 욥 자신의 자전적(自傳的) 기록으로 판단되며, 저술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쯤인 족장들의 시대로 여겨진다.
그 역사적 근거는 당시 제사장이 없이 제사가 드려졌던 것과 “케쉬타”라는 화폐 단위가 사용된 점, 욥이 200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이다.
욥은 마음의 고통(苦痛) 때문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의 아픔은 이를 악물어 참을 수 있으나, 마음의 아픔은 온갖 정염(情炎)들을 쏟아 놓게 하였다.
그러면 그 마음의 고통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理由)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욥은 가슴에서 정제되지 않은 말을 쏟아놓지 않을 수 없었다.
“… 내 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 7:11下)
고통받는 자에게는 잠자는 것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나 욥에게는 침상에 잠들어 수심(愁心)을 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욥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두렵게 하셨기 때문이다(욥 7:14).
그는 거듭되는 시련(試鍊)들 속에서 시험 초기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훌륭한 신앙을 지탱하지 못했다.
“…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下)
II. 절망 속에 탄식함
욥은 거듭되는 시련(試鍊) 속에서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듯 형벌(刑罰) 같은 고통이 계속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더 이상 인내할 힘을 상실하였다.
A. 죽기를 희망함
욥은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성품(性品)을 가진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망발을 쏟아 놓는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욥 7:15)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굳건하게 하는 것은 행복과 불행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意味)를 알며 사는 것이다.
행복해도 그 의미를 모를 때 타락(墮落)하게 되고, 불행하다고 해도 그 의미를 알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시 73:28).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의 의미(意味)를 깨달을 수 있는가? 그 깨달음은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이란 하나님의 성품(性品)들과 그것들이 시행되는 방식에 관해 아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試驗)하신 것이 그의 순전함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욥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사람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또 만약 욥이 그 정도로 순전(純全)한 사람이었으면 시련 속에서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하였겠는가?(욥 7:15)
그의 순전함을 두고 하나님께서 사탄(Satan)과 나누신 대화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그의 신앙적 순전함이 당대의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탄에게 그를 시험하도록 넘겨주신 것은 하나님의 더 큰 계획(計劃)안에 있는 작은 고안이었다.
그 계획이란 이것이다. 욥으로 하여금 이처럼 이어지는 큰 고난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성품, 곧 은혜(恩惠)의 세계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비록 당대에 욥의 신앙은 순전(純全)하기는 했지만, 처음 고난을 당했을 때, 당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에 있어서 욥의 믿음은 유치원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귀하게 여기셨다. 따라서 그의 믿음이 깊고 넓게 성숙(成熟)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마치 시인 다윗과 같이 고난(苦難) 속에서 이제껏 자신도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광대(廣大)하심과 지혜에 눈뜨게 하시려고 장기간 연단을 받게 하셨다.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큰 시험(試驗)을 겪고 나서, 욥은 비로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에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자신은 그렇게 온전하지도 않았고 또한 순결(純潔)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자기가 결심한 것만큼 그 온전함을 굳게 지키지도 못하였다(욥 2:3).
오히려 일련의 시험들을 통해서, 욥은 그토록 자신했던 자신의 믿음의 한계(限界)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알고 보니 자신은 스스로 정결하다고 믿는 자기의(自己義)에 갇힌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세계관이 전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은혜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셨다.
고통을 받으나 그 의미를 모르는 자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욥은 오래도록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있었으니, 그는 차라리 목이 졸린 채 숨이 막혀 죽기를 원했다(욥 7:15).
이는 자신이 이 땅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意味)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형통한 자로 지상의 부귀(富貴)를 누렸을 때는 그 행복의 의미를 잘 몰랐을 것이다.
그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福)을 주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공경(恭敬)해야 한다는 사실 빼놓고는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만,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意味)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의인(義人)으로서 애매히 고난을 받은 자의 표상으로 추앙되고 있는 욥이 가진 믿음의 실체(實體)였다.
욥은 계속되는 고통에 마침내 괴로운 나머지 죽고 싶었다. 이것은 그가 당한 시련(試鍊)의 크기를 말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의 한계(限界)를 보여 준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고난을 인내(限界)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不幸)의 근원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자기 꾀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더 큰 불행에 떨어져버린다.
혹은 스스로 시험에 들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끄러져 침륜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다.
고통(苦痛)의 형이상학적 의미는 잘못된 상태에 있는 삶이 올바른 질서(秩序)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이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많은 멸시와 치욕을 받기도 하는데 이 또한 본래의 질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모든 사람이 고통 대신 기쁨을 원하고, 불행 대신 행복(幸福)을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항상 올바른 질서 안에 있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본래의, 혹은 더 많은 질서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한 과정(過程)이 필요하다. 이것이 고통의 형이상학적인 의미다.
욥의 신앙(信仰)은 상태에 있어서 순전하기는 했지만, 영적 수준(水準)에 있어서는 가야할 길이 멀었다.
그 길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의 순전한 상태는 아브람의 소명에 비유한다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 있지만 “떠나야 할 갈대아 우르”였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데, 거기서 겪는 기쁨과 고통에 어찌 의미(意味)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 의미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다.
더욱이 의미 없는 불행은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애매히 고통당하는 것이 고통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통(苦痛)과 불행의 의미를 즉시 아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비례한다.
평소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벧후 3:18).
잠시 당신의 마음을 불행(不幸)과 고통에서 떼어놓으라. 그것들을 마치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라.
마치 수술하는 의사가 환자의 배를 가르고 수술 부위에 집중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보라!
그때 욥처럼 죽기를 바라던 마음이 변하여 그 의미를 하나님의 성품을 더 깨닫고자 하는 열망(熱望)으로 바뀌게 된다.
B. 허무를 경험함
욥은 고난받을 때, 처음에는 자신이 매우 순전한 믿음을 지닌 사람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이유(理由)를 알 수 없는 고통은 계속되었다.
결국 욥은 자기 신앙(信仰)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에 대해 허무(虛無)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6)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욥은 이제껏 애착하던 육신의 생명이 싫어졌다.
나아가서 모든 감사(感謝)는 사라졌고, 욥은 자신을 여전히 살려 두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항거하는 불신앙이었다.
“…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6) 이것이 어찌 믿음의 사람 욥에게 어울리는 고백인가? 그것은 명백한 불신앙(不信仰)의 고백이었다.
그는 한때 모든 재산과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 건강하던 자신의 온몸이 종기로 가득하였을 때조차 자기의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그러나 그것은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금 욥은 자기의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꼈으며, 스스로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곧 슬픔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께 매일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곧 사라질 아침 안개 같은 희망(希望)을 붙들며 사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신앙(信仰)이란, 세계와 자기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關係)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신자일지라도 어떤 박탈감과 허무감(虛無感)을 느끼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인생에 있어서 불행(不幸)보다 무서운 괴물은 허무감이다. 왜냐하면 시험속에서 압도하는 허무감은 사물들의 존재의 질서와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의 서사와 하나님의 메타서사
욥이 큰 고난의 불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생(人生)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인생 최초로 느끼는 것이었으리라.
그는 이제껏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순전함에 대한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께 세 가지에 대해 원망(怨望)하였다. (1)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 (2)그에게 마음을 주신 것. (3)그 마음을 꾸짖어 단련하시는 것.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것들 중 무엇이 하나님이 잘못하신 일이란 말인가? 시인들의 고백을 기억해 보라.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이 찬송(讚頌) 제목이 되지 않았던가?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상만사(世上萬事)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가 어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었을까?
인간에게 마음을 주셨기에 욥도 하나님을 믿고 교제(交際)하며 살 수 있지 않았던가? 그것은 찬송하고 감사해야 할 제목이지 원망(怨望)할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렇게 인생에 대해 깊은 허무(虛無)를 자각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아는 보다 깊은 지식으로 자라가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허무(虛無)는 ‘텅 빔’, 곧 의미 없음이다. 따라서 세상과 자기 인생에서 허무를 경험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갈 동기를 부여 받는다.
그래서 경건한 시인도 한때는 욥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의 무상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하였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4)
지금 욥이 바로 그 시인(詩人)과 같은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다. 이런 고백은 욥이 시련을 겪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일이었다.
욥은 거듭되는 연단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허무(虛無)한지를 경험했다.
이때 인간은 세 가지 길을 택하게 된다. (1)허무감에 헤어나오지 못하여 저열한 쾌락으로 그것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2)허무감 속에서 의미없는 인생을 계속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3)그 허무의 경험을 깨고 나아가서 자신과 세계를 초월해 있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신앙(信仰)이라고 부른다.
욥에게 이러한 허무의 경험(經驗)은 보다 깊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으로 나아갈 기회였다.
이것이 바로 순전한 신앙을 가진 욥에게 큰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였다.
그러나 욥은 아직 그러한 깊은 영적 깨달음에 까지 이르지는 못 하였다.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이 “바다괴물”이냐고 물었으니, 이는 곧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怨讐)”냐고 대든 것이었다(욥 7:12).
그 당시 욥의 신앙적인 무지(無知)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에게 계속되는 시련은 파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물결을 따라 요동치는 마음은 결코 그가 “그와 같이 온전한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의 마음이 아니었다(욥 1:8).
인간이 탁월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조차도 괴로움의 이유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정신이 탁월하기 때문에 세상과 인간사에 대한 질문(質問)은 하지만 스스로 대답(對答)을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고난(苦難)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번민하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조차 그것을 따라 행하며 살지 못하기에 괴로워했다.
인간은 지성(知性)과 마음에 있어서 모든 만물들에 비해 탁월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존(依存)하지 않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심리(心理)와 마음의 복잡한 기능 등을 생각해보라. 인간은 바로 그 마음 안에 자기를 찾기도 하지만,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잊지 말라! 하나님은 독립(獨立)하심으로 아름다우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依支)함으로 아름답다.
욥은 거듭되고 심화되는 고난 속에서도 그 불행(不幸)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는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에 있어서 일천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의존(依存)하기까지 겸비해질 수 없었다. 이후로 욥의 반복되는 원망과 낙심(落心)은 그러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욥은 감히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그가 바르게 되도록 책망(責望)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짜증 섞인 투로 항변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여기서 우리는 욥의 신앙의 바닥을 본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下)하던 그 아름다운 고백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단지 영적 침체가 아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그것은 당시 욥의 신앙(信仰)의 수준을 보여 준다.
절망(絶望)이란, 단지 희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의미(意味)를 찾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때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만을 찬송(讚頌)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일 내에 그토록 쉽게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꼈다.
그리고 진심으로 죽기를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다.
이러한 난관은 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만큼 순전하지도 않고, 믿음이 굳세지도 않은 우리가 이어지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不平)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기억하라! 우리에게는 당시 욥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는 더욱 풍부한 지식(知識)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가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그리스도(Christ)를 우리는 분명하게 보았다.
우리에게는 욥이 확신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 모두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서도 허무를 이길 수 있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이 세상에 살아있는 삶의 목적(目的)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인생길에서 겪는 모든 시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때때로 지상에서 발견하는 삶의 허무(虛無)를 기꺼이 인정하라.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라.
매 순간 겪는 일들은 개인의 서사다. 그것을 메타서사에 얹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성품(性品)을 배워가라.
거기서 찬란히 빛나는 하나님의 성품(性品)을 배우라. 그때 하나님은 자유로운 주체(主體)로 살 용기를 주신다.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2 2023.8.14. 온가족여름수련회 둘째날 저녁집회
< 희망 속에 위로하심 >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 …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3-26)
I. 본문 해설
욥의 친구들은 선악 상벌론을 굳게 믿었다. 하나님은 정의(正義)로우시기에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들이 잘못 믿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의 선악 상벌론(賞罰論)이 항상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확신한 것이다.
바로 앞장에서 수아 사람 빌닷이 편 비판적 논리는 욥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으로 기계적인 선악 상벌론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욥이 거듭 고난을 받는 것은 곧 그가 죄(罪)를 지었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빌닷의 논리에 따르면 욥이 거듭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懲罰)이며, 이는 그에게 숨겨진 죄(罪)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사에는 때때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고집하고 있는 엄격한 기계적 선악 상벌론은 성경적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ideology)였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욥 18:4)
욥은 빌닷의 비난과 정죄(定罪)에 대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욥 자신도 처음 겪는 고난의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순전하였으나 당시 욥의 영적 수준(水準)으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의 무슨 죄(罪) 때문인지는 몰랐다.
욥은 아직, 그 고난을 통해 자기를 더욱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줄 몰랐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이 나를 치셨구나”(욥 19:21)
II. 희망 속에 위로하심
그러나 욥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당하는 이유 없는 고난(苦難)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慈悲)하심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불신앙으로 돌아서기까지는 아니 하였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지식(知識)을 총동원하였다.
그러나 곧 한계에 부딪혔다. 그는 지성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때로는 분노와 절망의 감정으로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받는 고난(苦難)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를 원하셨다.
A. 대속자가 계시다
드디어 욥은 그토록 고난받으면서도 배우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 없던 전혀 새로운 깨우침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대속자(代贖者)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나의 대속자”( )라는 단어는 “구속하는 자” 혹은 “기업 무르는 자”를 뜻하는 “고엘”에서 온 것이다.
대속자(代贖者)의 개념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기업 무름의 제도와 관계가 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의 상속이나 유업을 대신 희생(犧牲)해서 회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갔다면,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그를 노예의 신분에서 합법적으로 구출할 권리가 있었다(레 25:25,48).
이와 같은 예를 룻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은 일찍이 죽었고, 룻의 남편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때 부유한 사람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상속자인 룻과 혼인하여 후사를 끼친 것도 바로 ‘고엘’, 곧 구속자 혹은 대속자의 역할을 이행한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을 때 가장 가까운 친척은 그 죽은 자의 피에 대해 복수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민 35:12).
이 모든 규례들은 온 인류를 영원히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실 궁극적인 대속자 예수를 바라 본 것이다.
예수는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자신이 구속해야 할 친족으로 보셨다. 그리하여 당신 자신의 몸을 대속제물로 바치사 율법과 죄의 속박에서 영원히 구원하신 대속자(代贖者)가 되셨다.
이제껏 욥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했다. 자신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인간 만사(萬事)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런데 욥은 이토록 큰 고난들을 겪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대속자(代贖者)가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곧 구속하시는 중보자(仲保者)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욥이 약 4천 년 후에야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깊고 풍부하게 알고 있었는지를 확정(確定)할 수는 없다.
지금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비하면 희미하게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를 대속할 중보자가 있음을 깨달았다.
대속자(代贖者)이신 그분의 도우심으로 자기가 이 환란에서 반드시 구원받을 것을 확실히 믿었다. 그것은 놀라운 계시에 대한 깨달음 이었다.
이는 성경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漸進性)에 비춰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시대(時代)를 앞서간 깨달음이었다.
이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膳物)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1. 살아계심
욥에게 그 대속자(代贖者)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누구도 알 수도 없는 이유로 고난을 겪고 있는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욥이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사람인 구속자(救贖者)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대속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과 같은 중보자(仲保者)여야 했다. 욥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대가를 치러주심으로써 고난에 처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분이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자신 사이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그를 대신하여 속전(贖錢)을 치러 주실 수 있는 분이셔야 했다.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또 다른 하나님 같은 분, 곧 대속자를 기대하였다.
욥도 그 당시 대속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신지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 대속자(代贖者)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셔야만 하였으니, 그 중재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신(神)이셔야 했고, 인간을 위해 변호하시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仲裁)하여 화목하게 되도록 도와 주실 신(神)이시며 인간이신 구속주(救贖主)가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욥은 대속자(代贖者)가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 얻은 놀라운 계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욥은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큰 시련의 경험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께만 소망(所望)을 둘 수밖에 없었다.
고난받는 욥에게 중보자이신 대속자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은 고난 속에서 발견한 희망(希望)이었다.
비록 그는 순전하고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知識)을 주고 싶으셨다.
하나님의 가장 큰 탄식거리는 우리가 당신을 알지 아니 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 …그들이 이 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 9:3下)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God)을 아는 지식에서 어른처럼 장성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들의 죄까지 용서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 31:34)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하박국 선지자에 의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다(합 2:14).
그래서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더 많이 알게 하고 싶으셨다. 당신의 더 높은 뜻을 알며 더 큰 비전(vision)을 가지고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뜻은 고난(苦難)을 통하지 않고서는 욥의 마음에 경험적으로 전달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난 없이 연단 받을 수 없고, 연단 없이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에 눈 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단은 욥으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감춰진 커다란 섭리(攝理) 속에서, 욥으로 하여금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던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셨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의 좁디 좁은 지성(知性)은 찢어졌고 새로운 은혜의 빛이 비추었다.
욥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이 일을 겪은 후에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스스로 죄 없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고난(苦難)을 받고 있다고 믿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렇듯 욥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의 현실(現實)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보자이시고 대속자이신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어제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존재(存在)와 성품에 대한 전혀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생각하라. 연단 받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구원하시는 중보자(仲保者)가 계심을 기억하라. 그는 보혜사(保惠師)로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요 14:26).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시고, 친히 도우시며,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대속자이시다.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무지할 때 지혜롭게 하시며, 약할 때 강하시며, 고난받을 때 건져 주시며, 범죄했을 때 용서(容恕)하신다.
중보자가 함께 계심을 기억하라. 고난받을 때 그리스도가 희망이시니, 오직 그분이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굳게 믿으라!
2. 땅에 서심
욥은 중보자이신 대속자(代贖者)가 언젠가 땅에 서실 것을 믿었다. 이 말의 뜻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감춰지지 않고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도록 그분이 통치하실 때가 온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욥 자신조차,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의 한계 때문에 자신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대속자(代贖者)는 반드시 살아계시기에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시며, 언젠가는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드러내시며 통치하실 것이다.
또한 그때에는 욥의 친구들도 자신이 고난(苦難)받는 이유를 명백히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욥은 자기의 세 친구들도 대속자(代贖者)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눈뜨게 되기를 바랐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발전사(發展史)에 있어서, 욥이 구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 하나님을 보리라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더 놀라운 복음(福音)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이 큰 고난 속에서 죽을지라도 다시 부활(復活)하게 되리라는 믿음이었다.
1. 육체의 죽음
욥은 큰 고난을 통해 인생의 허무(虛無)에 눈을 떴다. 그러자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높으신 하나님만을 의지할 마음이 확정되었다(시 108:5)
욥은 자신이 거듭되는 고난(苦難) 속에서 자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음도 받아들였다.
이는 시험을 당하던 초기와 비교할 때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성장이었다.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여기서 “가죽이 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시 사회 속에서 통용되던 일종의 그림 언어다.
당시 유목문화 사회에서 짐승의 가죽을 벗기기 전에 먼저 그것을 죽여야 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시험을 당하던 고난(苦難)의 초기에 욥은 자기가 의(義)롭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해야 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였다.
그러나 대속자(代贖者)가 계시고 죽을 육체를 벗은 후에는 거기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새로운 믿음의 경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그 모든 고난의 이유가 충분히 해명(解明)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놀라운 믿음의 성장이었다.
이는 고난 속에서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또 다른 하나님의 선한 계획(計劃)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새롭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비록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人生)의 현재와 미래를 통째로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제 욥에게 고통과 행복, 생존과 죽음 사이의 경계는 아이들이 놀이를 위해 땅바닥에 분필로 그어 놓은 줄에 불과하였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떻게 그런 담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대속자(代贖者)가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말고 또 하나의 비결이 있었다.
2. 육체 밖에서
그것은 부활(復活)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처한 큰 고난(苦難)에 대해 그 원인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기의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며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자기를 변호해 줄 대속자(代贖者)가 살아계시고, 죽음 후에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뵈옵겠다”(엽 19:26)라고 한 욥의 고백(告白)은 그의 확고한 부활(復活) 신앙을 보여준다.
지금은 비록 희미하게 보다 그때에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뵈올 것이며(고전 13:12), 그동안 자신이 당한 고난(苦難))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세상에서는 자신이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으나 결국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정의(正義)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또한 그것은 자기가 죽은 후에 반드시 부활한 육체로 맞이할 내세(來世)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날에는 자기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다.
욥은 자신이 죽어 육신(肉身)이 사라진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영혼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비록 자신이 애매히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바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인생 끝나도...”
이 땅에서는 비록 육신(肉身)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만나고 기뻐하는 것이 신앙이다.
또 죽은 후에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리라는 천상지복(天上至福)의 행복을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苦痛)의 이유를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오직 이성(理性)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악(惡)과 고통의 문제는 단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거대한 담론이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악(惡)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탐구가 요구된다. 그런 노력(努力)이 필요하다.
"우리가 믿은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함이다" Anselmus, Cur Deus Homo, 1.1
안셀무스가 또 다른 곳에서 신앙(信仰)과 이성(理性)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는 것은 교만이며, 이성의 사용 없이 신앙만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는 것은 태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길은 중세시대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만큼 길고 어렵고 먼 길이다.
진리를 알기 위해 마음과 뜻을 바치고 기꺼이 수고(受苦)와 희생을 치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善)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의미 없는 인생사(人生事)가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자.
이 세상 순간의 삶은 영원(永遠)에 잇대어 있으니, 고난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배운 욥을 기억하자.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復活)의 의미를 알고 있는 우리들이 못견딜 고난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 내세와 부활의 소망으로 승화시킬 수 없는 시련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악(惡)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믿음(faith)을 갖는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분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 그때 거기 육체(肉體) 밖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육체 안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라!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3 2023.8.15 온가족여름수련회 셋째날 저녁집회
<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8-10)
I. 본문 해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시 변론한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죄(罪) 없음을 주장하는 욥을 비난하며 “네가 경건하다면 어찌 하나님께 심문을 당하겠느냐”고 반문한다(욥 22: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4-5)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은 알지도 못하는 죄를 거론하며 참소한다. 욥이 이웃에 매정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였다는 것이다.
엘리바스가 그렇게 고발하듯이 말한 것은 실제로 어떤 증거(證據)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계적인 선악 상벌론에 입각해서 욥이 지었을 만한 죄들를 짐작해서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욥에게 충고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다시 말해서 욥이 겪는 모든 고난이 바로 그의 죄(罪) 때문에, 그로써 하나님과 불화(不和)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욥의 친구들은 이렇게 긴 논쟁적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고정관념, 곧 개인의 모든 고난은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懲罰) 때문이며, 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욥기가 쓰여진 것이 족장시대(族長時代)였음을 감안한다면, 욥의 세 친구들이 확신한 선악 상벌론은 그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인 의식이었을 것이다.
엘리바스로부터 터무니없는 공격을 당한 욥은 답답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욥 자신도 자기가 겪는 고난(苦難)의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 고난의 이유를 변증(辨證)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한탄하면서 스스로 묻는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 어찌하면 …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 내가 깨달으랴”(욥 23:3-5)
당시 욥의 믿음이 순전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에 있어서 그의 수준은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苦難)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답을 얻기를 원하였다.
욥은 자신을 변호(苦難)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마음의 시선을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는 하나님(God)께로 향한다.
그는 앞으로 가도 뒤로 물러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데 어느 쪽에서도 그분을 뵈올 수 없었다. 그때 욥은 그 유명한 믿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II.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정확하게 논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와의 논쟁(論爭)의 과정을 통해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焦點)을 자신에게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A. 나의 길을 아심
그렇게 하고나니까 비로소 현실(現實)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 가져다 준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왜 이 큰 고난(苦難)을 이토록 오랫동안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計劃) 속에서 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 나의 가는 길
여기서 “길”은 “인생길”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길을 걸어가는 주체는 욥 자신인데, 자신은 그 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갈 뿐이었다.
욥 자신이 왜 그 길을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길은 어디로 향하여 가는 길인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셨다.
욥이 불현듯 그런 믿음을 갖게 되자, 이제껏 자신이 당한 고난 때문에 겪던 무질서한 혼란과 정신적인 방황이 끝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計劃)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도 가야 하는 길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길이었다.
비록 욥은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苦難)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 거기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 길은 결코 나쁜 길 일 수 없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겪는 자신의 처지를 “나의 가는 길”이라고 부른다.
처음에 욥은 이제껏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苦難)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때까지 욥은 무엇인가 자기 인생이 잘못 꼬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하나님이 실수로 자신을 때리시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苦難)로움과 정당(正當)함을 주장했다.
자신은 결코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할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욥은 믿음으로 그 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자신이 가는 길을 모를지라도 그 길을 하나님은 아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속자(代贖者)가 계시며, 육체의 가죽을 벗은 후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해주었다.
하늘의 하나님이 죽음 이후에라도 자신의 믿음과 순전함에 대해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내세신앙에서 현실을 다시 해석하게 되었다.
현실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현실(現實)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이해(理解)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準備)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마땅히 주체적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이해(理解)를 초월하는 고난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모든 고난(苦難)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믿음이다.
*비단을 짜는 비유
우리가 만나는 고난의 원인들을 비록 다 이해(理解)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자기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요구된다.
고통의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덜 불행(不幸)해 지는 길이 무엇인가? 만나지 않은 불행은 피하고, 이미 만난 불행은 더 이상 피해가 없도록 방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구든지 자신의 고난(苦難)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더 많은 인생을 살다가 보면 깨닫게 된다. 고난받을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때 겪었던 일의 의미(意味)를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나의 인생이 그분의 주권 안에 있으며, 그분의 뜻을 거슬러서, 그분이 모르시는 일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다. 나를 반드시 도우시리라는 믿음이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은 나에게 나쁜 일을 행하실 수 없고, 모든 선(善)하심과 자비(慈悲)하심으로써 나의 인생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이다.
2. “아신다”는 의미
욥은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여기서 “아신다” 는 것은, 단지 객관적인 지식(知識)으로 아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런 길을 가는 욥을 사랑의 경험으로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依支)하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욥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뜻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욥은 이제 위로(慰勞)를 받을 수가 있었다.
비록 욥은 자신의 앞길을 알지 못하나, 하나님이 자기가 가는 길을 모두 알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길을 걸어갈 때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선악 상벌론이나 인과응보의 신앙, 곧 욥의 세 친구들이 갇혀 있는 그 이념에 묶여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자유(自由)를 가져다 주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괜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욥이 가는 길을 결코 알 수 없었다. 욥 자신조차도 모르는 길이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비록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욥은 그 사실을 믿는 것으로 충분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욥의 이 위대한 고백(告白)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담대함과 물처럼 녹아내리는 욥의 뉘우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고체는 자기 형체로 있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액체는 그러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냥 어디로든지 흘러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물처럼 녹아내리는 욥의 마음이 그러하였다.
이제 욥에게는 자기가 겪는 고난(苦難)이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든,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지 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가 가는 고난 길에 대해 계획을 갖고 계시며, 그 길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길이 어디로 향하든지 욥과 함께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욥은 자신의 인생(人生)을 그분 손에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되었다.
B. 나를 단련하심
욥은 자신의 고난(苦難)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더 정결(淨潔)하게 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욥은 한때, 어리석게도 자신이 순전(純全)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불결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제사나 예식, 행동(行動) 속에 있는 죄가 아니었다. 이제껏 자신도 무지하여 결코 알지 못하던 자신의 마음 갈피갈피에 깃들여 있는 죄악이었다.
욥은 비로소 자신이 더욱 정결(淨潔)케 되어야 하고 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인생 전체가 자기를 더욱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껏 주신 형통함이나 고난도 그 목적을 위해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동안 자기가 의롭다고 믿은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의 죄(罪)인지 깨달았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 얼마나 망령된 일인 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 자기의(自己義)가 아니라, 대속자(代贖者)의 중보이며, 희망은 육신으로 사는 지상세계를 넘어서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뵈오리라는 부활(復活)신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이전에 욥이 알던 신앙의 세계를 한참 뛰어넘은 새로운 차원과 영원한 지평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1. 순금처럼
욥은 그것을 “순금(純金)”이 되는 것에 비유하였다. 금이 통용되던 시대는 어느 때나 그것은 순도에 따라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었다.
어떤 좋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더 좋게 만들면 더 좋은 것이 된다.
순도 낮은 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더 좋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 않은가?
지금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없는 죄를 마른 행주를 짜듯이 닦달하여 고난으로 책임(責任)을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니었다.
욥의 믿음은 훌륭하였고 마음도 순전하였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욥에게 기대하시는 최고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욥의 믿음은 순전하였으나 더 완전(完全)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子女)들에게, 때로는 죄 때문에, 때로는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다.
* 높은 산에 올라서 경관을 보는 경험
2. 단련하심
욥의 신앙과 인격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는 단련(鍛鍊)되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연단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단련(鍛鍊)하다”는 금의 제련법의 공정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치열한 불길 속에서 거듭해서 금광석을 녹아 내리게 하고 거기서 불순물이 걸러지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더욱 순도가 높은 금(金)이 나온다.
순금(純金)과 같은 믿음은 신약에서 그리스도 형상(形狀)을 반영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단련되지 않고는 결코 그분의 형상(形狀)을 본받을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커다란 유익(有益)이 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목적(目的)으로부터 세계의 종말과 천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과 만물을 아우르는 큰 그림이다.
그 장엄한 하나님의 메타(meta)서사 안에서 고난을 겪는 개인의 서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고난의 의미는 명료해지고 하나님의 뜻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고난(苦難) 속에서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듬으신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인생은 내 손에 있다. 내가 보호하고 지켜준다. 그러나 네가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순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타고난 성향(性向)과는 전혀 다른 소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함이다.
*소명과 다른 성향의 비밀
무엇 때문일까? 우리의 약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로 하여금 연단(鍊鍛) 받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된 옛 성품을 정결(淨潔)하게 하시고 은혜로운 새 성품을 북돋우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연단(鍊鍛)을 통해 빚어졌다.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연단을 받을 때 기뻐하라. 우리를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形狀)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
III. 적용과 결론
신앙에 있어서 고통 없는 연단(鍊鍛)은 없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의 불길을 통과하지 않고는 순도 높은 금을 정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落心)하지 말라. 모든 고난(苦難)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은 어디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지를 아신다.
당신이 당하는 고난(苦難)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굳게 믿으라. 당신이 가는 길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라.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1(2023.07.30.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1)
1. 절망 속에 탄식함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5-18)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 해설
욥은 순전한 믿음으로 고난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욥인데 히브리에서 왔다면 “미움을 받는 자” 라는 뜻이고 아랍어에서 왔다면 “회개하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욥기는 욥 자신의 자전적 기록으로 판단되며 저술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쯤인 족장시대 아브라함 정도의 시대로 여겨집니다. 그 근거는 당시 제사장이 없이 제사가 드려졌던 것과 “케쉬타” 라는 화폐 단위가 나오고 200세까지 장수한 욥의 삶 등이 역사적인 증거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욥은 마음의 고통 때문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육체의 아픔은 이를 악물어 참을 수 있지만 마음의 아픔은 온갖 정념들을 쏟아놓게 하였습니다. 그는 가슴에 있는 말을 토해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7:11下)
고통받는 자에게는 잠자는 것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침상에 누워도 수심을 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욥을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두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듭되는 시련들 속에서 시험 초기에 고백했던 아름다운 신앙을 이제는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그는 감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下)
Ⅱ. 절망 속에 탄식함
A. 죽기를 희망함
그는 절망 속에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기를 희망했습니다.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 욥은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지쳐서 더 이상 고난을 인내할 힘을 상실했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욥7:15)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과 불행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아느냐 모르느냐입니다. 의미를 알지 못하는 행복은 결국 우리를 끝까지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불행은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할 수 없습니다. 행복의 의미를 알 때 비로소 행복해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고, 불행의 의미를 알 때 비로소 불행해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리스더 맥그라스라는 신학자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서사를 들려주십니다. 서사라는 것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이 이야기를 너무나 공통으로 좋아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야기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타락했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키고 돌보시고, 마지막에 이 세계를 완성하시는 세계 역사를 완성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메타 서사 혹은 메가 서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보다 훨씬 뛰어난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따라서 우리 개인의 서사들이 쓰인 것입니다.
여기 5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우리 모두 다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고 괴로움을 겪고 혹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혹은 행복한 시간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예수를 믿고 주님을 만나고 신앙에서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그런 개인의 서사가 있고, 그 서사를 따라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 우리 개인의 서사입니다. 신앙은 이 개인의 서사를 메타 서사 즉 하나님의 서사와 어떻게 연결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인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먼저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거대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설교는 바로 그 서사를 들려주는 수단입니다. 성경 공부는 그 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고, 성경과 관련된 학문의 공부 그리고 철학과 일반학문과 인문학에 관한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어떻게 인간의 개인의 서사와 연결할 수 있을 것인지를 배우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서 자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서사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들이 잘 이해 못 할 테니까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쯤 제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교할 때 예고 없이 구원초청을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1부는 하지 않았고 2, 3, 4부에 100명의 사람이 그날 주님을 영접했다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연합의 교리를 가르쳐 주면서 제가 했던 그 설교내용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이천 년 전에 끝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무엇이냐 하면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오늘 나의 개인 서사를 그 메타 서사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박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우리는 그런 이유가 아닌 다양한 이유로 고통을 당합니다. 무능한 아버지, 그리고 자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은 엄마, 깨어진 가족관계, 경제적인 어려움, 타고난 성격의 문제, 우연히 들어간 직장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가스라이팅 하는 직장 상사와 선배들, 이런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고통을 겪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서사입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랐으면 그 괴로움 속에서 그냥 신음하고 고통받으면서 살아있으니까 어떻게 한번 여기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고통받는 순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을 때 맨 처음에는 사람을 향한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고 진짜 묻지마살인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갈 정도로 정신의 강한 혼란이 옵니다. 그런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을 보아도 길이 없고 뒤를 보아도 길이 없습니다. 온갖 시련에 시달리는데 나의 이 고통을 공감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부모도 타인입니다. 이해한다고 하지만 나만큼은 이 고통을 못 느낍니다. 그때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때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이천 년 전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거기에 자기의 개인의 서사를 그 메타 서사에 투사시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신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느끼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지금 고통을 받고 계시는 메타 서사와 나 개인의 서사가 합쳐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어 고통을 겪고 있고 내가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것이 나 혼자 겪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와 함께 아파하고 계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어가시는 메타 서사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운이 내 마음속으로 Actually 실제화되어서 지금 이천 년 후에 살아가는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내 속에 있는 미움과 정욕, 세상 사랑과 원망, 미움 하나님에 대한 불신 같은 것들을 한마디로 그 죄를 내 안에서 죽여가는 것입니다. 신기하게 죽는 것만큼 죄가 죽는 것만큼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충만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그 메타 서사에 자기의 개인의 서사를 합치시키면서 그것을 해석하면서 자기가 혼자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만큼 예수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실제화되면서 그것들이 내 마음속에서 생명을 가져다주는데 그 생명이 곧 사랑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은혜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기하게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기운이 내 마음속에 넘치게 들어오고 나면 죄가 죽으면서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쁨이 내 안에서 샘솟듯 솟아나면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자기의 개인의 서사를 끊임없이 연결하는 그 능력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만큼 그 두 가지 서사를 연결하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를 되새기고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 행복의 의미도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나갈 때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결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잘 나갈 때 기뻐하고 까불고 즐거워하고, 잘못될 때 좌절하고 주저앉아서 낙심한다면 신앙을 갖는 유익이라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만나서 교제하고 사귀는 모임 같은 것들은 이 세상에 쌓인 것이 그런 모임입니다.
그런 메타 서사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고통을 당하는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어떻게 자신의 고통스러운 서사를 개인의 서사를 하나님의 메타 서사와 연결하면서 다른 시각으로 자신의 불행과 인생을 보는 지를 배우는 유익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그런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외로 철학 강좌를 많이 듣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신앙은 없는데 인생의 의문은 너무 많습니다. 메타 서사는 모르고 또 듣기도 싫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으로 자신의 문제에 대한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보면서 풀어볼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주전 5세기에 3세기 때에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그리스시대에 별처럼 쏟아집니다. 굉장히 많은 퍼센트의 사람들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 천재들이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욥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의 순전함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욥은 그야말로 죄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아주 의로운 사람의 표상으로 사람들이 여깁니다. 그것은 선입견이고 팩트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순전함을 두고 하나님과 사단이 나누시는 대화가 나옵니다. 욥처럼 순전한 사람을 보았느냐는 대화가 나오지만 그것은 정말 욥이 모든 인간 중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계획안에 있는 작은 고안입니다. 그것은 욥으로 하여금 고난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과 그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두 번째는 그 사랑이 나의 개인의 서사에 그리고 메타 서사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 시행방식에 관해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욥이 순전하기는 했지만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처음 고난당할 때 욥의 믿음의 수준은 유치원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더 성숙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욥 자신이 미처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큰 섭리에 눈을 뜨게 하시려고 고난 속에서 연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오랜 시험을 겪고 보니 욥은 이전에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온전하지도 않았고 순결하지도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결심한 것만큼 온전함을 굳게 지키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일련의 시험들을 통해서 욥은 그토록 자신했던 자기의 믿음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정결하다고 믿었던 자기의에 갇힌 채 살아온 교만한 인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세계관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친구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하나님은 그런 인과응보의 세계를 넘어서는 그런 위대한 은혜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고통을 받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자에게는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고문입니다. 욥의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있었으니 그는 차라리 목이 졸린 채 숨이 막혀 죽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발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메타 서사, 하나님의 성품과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실천하든지 말든지 심지어는 은혜를 받든지 못 받든지 그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일단은 알아야 합니다. 알지 않고는 마음에 다가올 수 없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고는 삶이 바뀔 수 없습니다. 일단은 힘껏 힘을 다해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에서 땡중과 고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땡중은 공부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고승은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불심을 깊게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고승입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아는 것도 없이 그렇게 다녀서는 교회를 다니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대해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의 메타 서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듣고 그다음에 자기 개인의 서사를 매 순간 연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서사를 들려주면 그 서사를 이해하고 자신의 서사에 적용하고, 자기 서사에서 깨달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의 이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끊임없는 연관을 찾는 것이 묵상입니다. 찬양과 기도, 예배와 사색, 모두 이것들은 그 둘을 밀접하게 연결시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던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이 하나님에 메타 서사에 자기의 개인의 서사를 훌륭하게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장 풍부하게 보여주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욥기, 시편, 잠언 이렇게 세 가지 책입니다. 전도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시편은 시인들이 항상 출발을 이렇게 두 군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는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해서 메타 서사로 가거나 아니면 메타 서사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서사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큰 고통 속에서 온갖 괴로움을 다 겪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치고 구원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메타 서사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개인이 너무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수많은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가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항상 생각했던 메타 서사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실 때 베푸셨던 놀라운 기적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고, 그리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들의 현재의 공동체에 적용하고 개인의 서사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해서 메타 서사로 가거나 메타 서사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서사로 내려오는 것을 그것이 매 순간 잘 되었던 사람들이 성경 속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무슨 작은 일을 만나도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것을 잘하는 것이 신앙의 깊이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욥은 시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정말로 순전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고 시험에 강도가 깊어지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욥은 자기 마음속에 저 밑에 가라앉아있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의인으로서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자의 위대한 표상으로 추앙되고 있던 욥이 가진 믿음의 실체였습니다. 욥은 괴로워서 죽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당한 시련의 크기를 말해준다기보다는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순수하기는 했으나 신앙은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의 근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끄러져서 침륜에 빠집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데 거기서 겪는 기쁨과 고통에 어찌 의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의미 없는 불행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뜻과 불행의 의미를 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신앙이 점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바로 얼마 전까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인생의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때 그 고난을 기꺼이 견디어 나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우리 안에서 솟아납니다. 잠시 여러분의 마음을 불행과 고통에서 떼어놓아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마치 남이 당하는 일처럼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그때 죽기를 희망하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살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고통을 겪는 일은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 겪는 일입니다. 신앙은 그 겪는 일을 모두 없애주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힘을 다시 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내 가면서 마지막에는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받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받은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얼마 안 되는 인생이지만 가만히 뒤돌아보면 신나고 행복했던 시간은 우리에게 별로 크게 가르쳐주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경종을 울려주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해준 때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기도가 가장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그 고난을 통해서 그 고난이 아니고는 결코 선사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절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허무를 경험함
마지막 두 번째는 욥은 허무를 경험했습니다. 고난받을 때 처음에는 자신이 엄청나게 순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욥은 결국 자기 신앙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고 거기서 하나님을 붙들고 살 수 있는 힘의 한계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는 사라졌고 인생은 허무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7장 16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욥7:16)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것은 최악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결국 욥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욥의 신앙이 얼마나 어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욥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자신의 육체까지도 질병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런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욥은 이제껏 애착했던 생명이 싫어졌습니다. 나아가서 욥은 자신을 여전히 살려두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항거하는 불신앙이었습니다. “내 날은 헛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믿음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고백이겠습니까? 이것은 명백한 불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는 한때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었습니다. 건강하던 자신의 온몸이 종기로 가득했을 때조차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하던 아내에게 뭐라고 답했는지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2:10) 이것을 놓고 어마어마한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고 욥을 영웅화시키는 것입니다. 사실은 저런 정도의 신앙은 우리 중에도 상당한 사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속되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것이 진짜 욥의 신앙이요, 본마음이었다면 지금까지도 그것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내 날은 헛것입니다. 나를 차라리 죽여버리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그냥 어떻게 보면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한번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어떤 아름다운 말 한마디를 토해내는 것에 의해서 신앙의 깊이가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고백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면 감정이 복받치면 얼마든지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사랑의 고백하는 감정을 오래도록 상황이 바뀌어도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은 다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욥은 자신의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슬픔이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께 매일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곧 사라질 아침 안개 같은 희망에 붙들려 사는 삶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고난이든 행복이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무엇인가를 상실한 허탈함을 느끼고 허무하기는 매일반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행보다도 더 무서운 우리의 인생에 괴물이 있습니다. 허무감입니다. 오늘날 이 밤에도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락과 타락상은 모두 이 불행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인간의 허무감을 이기지 못해서 나타나는 단말마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도덕적으로 심하게 타락한 사람들을 우리들이 그의 죄를 미워하지만 그 사람을 병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환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사람의 마음속에 허무감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삶이 모두 잿빛으로 보입니다. 희망을 주는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사람이 자살할 때는 사실 고통스러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허무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애착하는 강아지 한 마리라도 있는 사람은 못 죽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절대 못 합니다. 반려견 하나라도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안 죽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불행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허무감으로 확 밀려옵니다. 그것은 쓰나미처럼 어느 순간에 덮쳐올 수도 있고 물이 천천히 들어오는 것처럼 물줄기에 바위가 패이듯이 그렇게 천천히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일단 그런 허무감이 밀려 들어오면 온 육체와 정신 속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그때 사람은 가장 손쉬운 선택을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결코 충동적으로 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충동적으로 보이지만 이미 그의 정신상태가 오래전에 죽음과 친숙해지느니 과정이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삶이 낯설어지고 죽음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단계가 있고 이때 그것을 촉진하는 것이 허무감입니다. 이런 것이 밀려옵니다. 그때 정신상태가 좀 사람마다 각각 다른데 그때 미친 듯이 쾌락에 빠지거나 마약에 빠지고 도박하거나 이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것들도 아무 관심을 끌지 못해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정신상태는 마지막에 마찬가지로 허무감입니다. 욥이 바로 그 허무감의 끝까지 가본 것입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까 자신이 이제껏 신앙이라고 여겨왔던 그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자기를 의존하던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욥에게 사실은 그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욥은 바로 그 허무감의 끝까지 도달하게 되었을 때 신앙이 없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방식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자살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죽여주시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가지고 욥은 비로소 거기서 자신이 참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인생이 최초로 느끼는 자신의 삶의 무게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의 믿음과 순전함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는 자신의 신앙의 바닥을 모두 드러내고 하나님께 세 가지에 대해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첫째는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 둘째는 그에게 마음을 주신 것 셋째는 그 마음을 꾸짖어서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제목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찬양)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그렇게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은 모든 인간의 찬송할 제목이 되어야지 하나님 앞에 원망할 제목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말합니다. “생각 없이 행복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생각을 가지고 고민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똑같은 이야기를 어거스틴도 합니다. “술주정뱅이를 보면서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이 나보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닮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에게 원망의 제목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그에게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를 때는 사실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메타 서사와 그리고 나 개인의 서사가 만나는 곳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만납니다. 교차합니다. 오직 그 장소에서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신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욥에게 마음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마음을 꾸짖어 단련하신다고 순간마다 단련하신다고 원망을 쏟아부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위대하고 만드시고 마음을 주시고 단련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온 땅에 가득한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만들어 가시는데 그것 중 하나님이 잘못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시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이 찬송 제목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4:3) 그것이 이 시인들에게는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그에게 세상만사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그 마음을 주셨기에 욥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지 않았던 것입니까? 그를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속에서 인생에서 무상함을 경험한 시인은 욥과 같은 허무한 마음으로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똑같이 고백합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144:4) 그런데 이제 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이 매우 소중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역으로 더 많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 고백을 토해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욥은 바로 그 시인과 같은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욥이 큰 시련을 겪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일입니다. 거기서 끊임없는 고난을 겪으며 자기의 믿음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욥7:16) 고난은 가득 찼지만 아직 그 고난을 해석할 수 있는 개인의 고통받는 서사를 어떻게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연결할 수 있는지를 아직 못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거듭되는 시련을 겪으면서 비로소 인생의 허무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그렇게 욥을 극단에까지 밀어붙이셔서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고난을 깊게 깊게 경험함으로써 인생의 허무를 체험하게 하셨는데 좋으신 하나님은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더 큰 지식으로 나아갈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기가 “바다괴물”이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가 “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고통받는 개인의 서사를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연결하지 못할 때 인간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송을 받으실 이가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그 사람이 이제야 와서 하나님께 “내가 당신에게 원수입니까?” 하고 대드는 것을 보십시오. 욥은 무지했습니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 수시로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탁월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조차도 괴로움의 이유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탁월하기 때문에 질문은 하지만 스스로 답을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그는 고통 속에서 번민이 쌓였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조차 이제는 그것을 따라 행하며 살 수 있는 은혜까지 사라졌기에 결국은 불신자와 똑같이 괴로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지성과 마음에 있어서 모든 만물에 비해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 고민이 많을 때는 코코가 부럽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밤에 자다가 벨을 누르고 들어가면 막 달려와서 내 발을 핥습니다. 그렇게 발을 핥는 것은 “어디 갔다 왔어? 내가 걱정했잖아.” 그런 뜻이랍니다. 발을 막 핥습니다. 그리고 안아달라고 합니다. 안아주면 폭풍 키스를 합니다. 그러면 오리고기 말린 것 하나를 꺼내서 “앉아” “엎드려” 그러면서 줍니다. 그러면 그것을 물고 꼬리를 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저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수많은 생각과 상념들이 시름에 잠기게 만듭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고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잘 나가던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진짜 전문의도 되고 의사들의 연봉이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 높습니다. 더군다나 경력이 10년 정도 쌓이면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찾아다니니까 진짜 많이 법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용히 자살로 자기 생애를 마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대 들어가려면 학력고사 1% 안에 들어가야 한답니다. 똑똑합니다. 그런데 인생에 대해서 수많은 고뇌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그때 좋은 직업이나 다 소용없습니다. 똑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변호사입니다. 로펌에서 젊은 나이에 엄청나게 성공해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인데 조용히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우울증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모두 삶이 양상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장 행복한 것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참다운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는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비에 대한 욕망만 줄이면 돈이 그렇게 필요 없습니다. 소비에 대한 욕망이 팽창되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모자랍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인생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달하는 과학기술을 한번 보십시오. 나는 반도체의 원리에 대해서 수없이 유튜브를 보았는데도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용어 자체가 너무 어려운 용어들이 쏟아져나옵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작동해서 그 반도체가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나는 몇 번만 들으면 이해하는데 여러 번을 들었는데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구 반도체 전공하는 사람 있으면 내가 과외비를 줄 테니까 나를 이해시켜 주십시오. 무슨 음극과 양극이 있고 전자가 나오고 설명하는데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마어마하게 발전하는 광경을 보십시오. 그런데 인간이 이 과학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훨씬 더 많은 소외감을 느끼고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쓸쓸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소비에 자기를 매몰시키는 이유가 그것이 허무를 잊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스마트 폰을 떠나지 못하고 컴퓨터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게임, 중독이 되면서 사람들이 폐인이 됩니다. 이 정신이 뛰어난 만큼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립하심으로 아름다우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던 때 여러분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던 때였습니다.
욥은 거듭되고 심화되는 고난 속에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거기에까지 도달하기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이 아직 일천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의존할 수 없었습니다. 반복되는 원망과 낙심은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욥은 감히 말씀으로 훈계하고 책망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짜증 섞인 말로 투덜대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7:17-18) 개도 내버려 두면 결코 인간의 반려동물이 될 수 없습니다. 야수에 불과합니다. 들개입니다. 그놈을 데려다가 대변을 가르치고, 참는 것도 가르치고, 눈치 보는 것도 가르쳐야 반려가 가능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자신의 서사를 연결시키면서 살기 위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단을 받아야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발전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강아지를 한번 훈련 시켜 보십시오. 개들이 하니까 저절로 되는 것 같지만 맛있는 과자 열 봉지는 소비해야지만 훈련이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도 당연히 수많은 연단을 하나님이 시키시고 꾸짖으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이 결국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졌을 때 자신의 인생을 보는 것과 신앙이 바닥이었을 때 인생을 보는 것 사이에 말도 안 되는 층차가 있습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저런 식으로 살아가나? 왜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저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옛날에 자기도 그렇게 살았지만 이미 떠난 생활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양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신앙의 바닥을 보는 것입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이런 아름다운 고백은 다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단지 침체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일컬어지던 욥의 신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망이란 희망이 사라진 것만을 절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절망은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망의 끝은 사람마다 똑같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그 이유 때문에 죽는데 옆의 사람은 그것 때문에 죽는 그 사람이 이해가 안 됩니다. “인생에서 늘 있는 일이고 한 번의 시련쯤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뭐 그런 것 때문에 살고 죽냐?” 그리고 “싫어서 떠났으면 더 좋은 사람이 온다는 사인이겠지!” 한번 사업에 망하면 돈은 잃었지만 “이렇게 사업을 하면 말아먹는 수도 있구나!” 하는 아주 소중한 지식을 배웠습니다. 그 지식을 가지면 “내가 다시 이런 식으로는 망하지는 않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업에 망했다고 목숨을 끊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망의 끝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도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절망 속에서 자신에게 실망하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고 불신앙은 자신에게 낙담하고 하나님께 실망하면서 거기서 인생을 끝내고 싶은 것이 불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겪는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없는데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토록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욥이 어떻게 이렇게 쉽사리 실망에 굴복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일 내에 이토록 쉽게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끼고 차라리 죽기를 진심으로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은 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만큼 순전하지도 않고 믿음이 굳세지도 않은 우리는 얼마나 그럴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시 욥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는 풍부한 지식이 있습니다. 왜? 이들은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우리만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왜? 아직 예수 그리스도도 오시지 않았고 구원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서도 희미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가 어떻게 완성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우리보다 몰랐습니다. 그들이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그 메타 서사를 우리는 분명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희미하게 발견했던 그리스도를 우리는 확실하게 만났습니다. 욥이 확신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매달려 죽으신 십자가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인류가 마땅히 당하여야 할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으로 오셔서 당신이 겪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겪는 시험과 고난을 당신 몸소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연민을 가지고 계시고 이것은 당신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경험하신 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가져다준 연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희미하게 알던 메타 서사를 우리는 물결치듯이 장엄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이 끝없는 우주의 한 모퉁이에 한 행성 위에 있는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고 하나님은 이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높이 계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 불행해진 인간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하나님을 위해 인간에게 호소하시는 중보자가 되시고, 그리고 우리 인간이 짊어질 모든 고난과 형벌을 대신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 연단 받고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그들을 향해 연민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하시는 분입니다.”
루돌프 불트만이라는 신학자가 그런 질문을 합니다. “홀로코스트의 사건이 있을 때 600만의 유대인이 그렇게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물었다.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있었는가?” 대답합니다. “그렇게 학살당하며 죽어가던 그 사람들 속에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아픔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메타 서사를 생각하며 그러면 내가 홀로 버려졌던 것 같은 그 시간이 결코 나 혼자 있었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 시간이었고 내가 흐느껴 울 때 주님이 함께 통곡하시고 내가 피 흘릴 때 그분도 함께 피를 쏟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홀로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고통받는 나의 이 연단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호흡하시고 나와 함께 숨 쉬고 우시고 고통받으시며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리스도가 그 모든 고난을 그 모든 연단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의 열매로 삼아주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삶의 허무를 이기고 우리가 겪는 수많은 연단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 아름다운 인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길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한층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분 앞에 나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내 인생은 당신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그분의 손에 맡겨드릴 수 있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전정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마칩니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인생길에서 겪는 모든 시련과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매 순간 생각하십시오. 매 순간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개인의 서사에서의 모든 시련과 고통을 메타 서사에 연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무한한 성품을 배우는 도구가 바로 고난과 연단임을 기억하십시오. 때때로 지상에서 발견하는 삶의 허무함을 직시하고 정직하게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삶이 허무하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에게 의미를 주시는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이유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배우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없이 어디서도 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모든 일들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 하나님이 한순간도 나를 놓지 않고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지금은 아주 값어치 없는 광석이지만 그것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녹여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사람 가치 있는 인격과 마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연단을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는지를 되새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매 순간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의 손을 붙들고 그분과의 연합 속에서 연단을 감당해 나아가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2(2023.07.31._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2)
2. 희망 속에 위로하심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3-26)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 해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만 논쟁하는 가운데 욥에게 끊임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욥의 친구들은 선악 상벌론을 굳게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기에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잘못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선악 상벌론이라는 것이 항상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욥의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의 비판적인 논리는 욥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으로 기계적인 선악 상벌론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욥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자신들은 알 수 없지만 거듭거듭 고난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가 죄를 지었다는 증거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드러난 뜻도 있지만 숨겨진 뜻도 있습니다. 드러난 뜻은 계시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모두 알려집니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뜻이 있는데 이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내가 왜 이 일을 겪어야 하는지, 왜 바로 이 시점에 그 일이 생겼는지, 블레이즈 파스칼에 의하면 “나의 태어난 출생과 죽음, 그 양쪽은 이미 영원에 삼켜져 버렸고 나는 여기에 있는데 왜 내가 다른 때가 아니라 이 때에 태어났으며,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뜻입니다. 그러나 섭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루마리가 열리듯이 하나씩 하나씩 시간이 전개되면서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전에 어렸을 때 겪으셨던 가정환경, 혹은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때 고난을 겪은 것이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깨달음을 주었고 그 때 그 경험이 지금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무나 커다란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섭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빌닷의 논리에 따르면, 욥이 거듭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며, 이는 필시 그에게 숨겨진 죄가 있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닷은 인간사에는 때때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엄격하고 기계적인 선악 상벌론에 빠져 있었는데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욥은 빌닷의 이러한 비난과 정죄에 대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욥 자신도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욥의 신앙의 수준으로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도저히 알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동의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죄 때문인지는 몰랐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욥이 지은 커다란 죄 때문에 징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 안에 감추어져 있는 자기 의를 드러내시고 또 그가 아직 고난을 받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지식에 도달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자기를 치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아직까지도 불완전한 자신을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이러한 고난을 주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 원인을 깨달을 수 없으니 애처러운 목소리로 친구를 향해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했습니다. 하나님이 희망 속에서 이 욥을 위로하시는 장면이 반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욥은 비록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모든 의미를 알지는 못했지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 고난의 의미는 다 알지 못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불신앙으로 아주 돌아서지는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그런 유혹을 받았지만 욥은 기본적으로 신앙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II. 희망 속에 위로하심
욥은 지금 당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기의 모든 지식을 동원했습니다. 그렇지만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받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A. 대속자가 계시다
여기서 그가 고난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속자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깨우침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의 대속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고헬리”라는 단어인데 “구속하는 자”, 혹은 “기업을 무르는 자”를 뜻하는 “고헤리”라는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만든 아주 기가 막힌 제도였습니다.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이 어떤 불행과 고통을 당했을 때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주어야 했습니다. 그 방편으로 “고헬 제도”가 생기는데 예를 들어, 가난한 형제가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면 그 사람이 빚을 갚기 전에는 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종으로 팔려간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그를 구속할 수 있는 의무 내지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종 된 처지에서 해방될 수 없지만 그의 친척이 가서 종으로 팔려간 값을 무르고 그를 사면 그가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신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재산에까지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자신들의 토지를 여러 가지 경제적인 이유와 법적인 이유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친척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그가 토지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그 빚의 규모를 찾아내어 대신 갚아주면 그 땅을 친척 형제에게 되돌려주는 규약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를 들자면, 형제가 어떤 죄를 지어 큰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가까운 친척이 그 죄 값을 재산으로 대신 치러주면 형벌을 면하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극적인 제도는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홀로 남았습니다. 대를 이을 자식이 없습니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형제, 친형제일 경우라면 형이 그렇게 죽었을 때 밑에 있는 동생이 죽은 형의 아내와 동침하여 형의 집안의 씨를 이어가게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룻의 이야기, 룻은 망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이삭을 줍는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보아스라는 부자가 바로 그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혼하고 거기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거기로부터 구속자이신 예수께서 오실 계보를 잇는 사람이 된 것도 결국 고헬 제도, 대속자 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곳은 레위기 25장과 민수기 5장에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제도가 그 당시 법으로 확정된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이 있기 이미 오래 전부터 관습적으로 그 일이 이루어져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고헬 제도를 욥이 알지 못했다면 자기 변론 속에서 이러한 설명을 그림처럼 묘사하면서 대속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라고 할 때의 “대속자”가 의미하는 풍부한 그림입니다. 자기는 무엇 때문에 벌을 받는지도 모르겠고, 혹시 남에게 죄를 지어 벌을 받는다면 자신의 힘으로는 그 빚을 갚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고헬 제도가 생각났고 그 구속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메타서사와 개인의 서사가 환상적으로 결합되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고헬 제도를 만드신 것이 메타서사라면 욥은 개인적인 서사로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고난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메사서사에 나오는 구속에 연결시키면서 자신이 구원받을 소망을 하나님에게로 두는 것입니다. 이제껏 욥은 자신과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간만사를 다스리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토록 큰 고난들을 겪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빚을 받아야할 채권자와 그 사람에게 빚을 줘서 팔려간 불쌍한 나의 형제 사이에 가장 가까운 친척인 내가 제 3의 구속자가 되어 그를 운명적인 종살이에서 구해낼 수 있는 것처럼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자신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제 3의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중보자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욥이 이후 약 4천년 후에나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아마 희미한 지식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그렇게 풍부하게 알지는 못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를 대속할 중보자가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가 이제껏 보아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람인 중보자가 아니었습니다. 대속자이신 그분의 도움으로 자신은 이 환란에서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자기가 겪고 있는 이 큰 고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집이 모두 무너지고, 자식들이 다 죽고, 자신도 병에 걸려서 온 몸에 종기 투성이가 되고 환란이 더 깊어지는 이때에 설령 욥에게 사람인 대속자가 있다고 합시다. 채권자는 하나님이시고 채무자는 욥입니다. 그러면 그 대속자, 고헬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에게 진 빚을 대신 갚아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여기서 “대속자”라고 말할 때 자기가 이제껏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아왔던 사람과 사람의 채권이나 채무 사이에서 긍휼의 대속을 해주는 인간 구속자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대속자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메타서사, 즉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타락하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교회가 승리하고 세계가 완성되는 이 메타서사의 대 드라마를 보여주실 때 한 번에 모든 것을 명확하고 완결된 것으로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시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를 이해하고 그 다음을 이해하고 이해하고 이해하면서 희미한 계시가 점점 더 명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커다란 캔버스를 놓고 화가가 커다란 구도를 잡고 연필로 처음 드로잉을 할 때는 무엇을 그리려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선과 면이 점점 뚜렷해지고 사물의 모양이 분명해지고 이어서 색칠이 시작되고 나면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것 같지만 작품이 거의 끝날쯤에는 환상적인 풍경화가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메타서사를 시간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을 가리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경계시의 점진성에 비춰볼 때 거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과 같은 족장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구속주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 정도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1. 살아계심
욥에게 그 대속자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고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징벌을 받고 있는 자신을 구속해 줄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한 상황으로 볼 때 욥 자신은 사람인 구속자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대속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선정한 대속자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과 같은 중보자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욥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대가를 치러주심으로 고난에 처한 자신을 구해주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자신 사이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그를 대신해 대가를 치러줄 수 있는 분이기 위해서 그는 인간 대속자여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 같은 대속자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오늘 고백하고 있는 “대속자”에 대한 고백입니다.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사람이 아닌 또 다른 하나님 같은 분, 그러면서도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도 관계를 맺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에게, 사람의 처지를 하나님에게 중재할 수 있는 그런 대속자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욥도 아마 이러한 계시는 이 고난을 통해 처음 깨달은 사실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 아무나 흔히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계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아들이 스스로 장작을 짊어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나이였으니 소년기를 지난 청년기가 시작된 나이였을 것입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제물을 어디에 있습니까?” 이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바로 너란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고 할 때 천사가 나타나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하고 끝이 납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스스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는 그 심정을 상상해 볼 때 얼마나 가슴 아프고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그 마음을 메타서사인 하나님께로 적용해볼 때 그 때 그 사건은 단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한 사건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그런 마음으로 실제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예표적인 사건이었다고 해석하게 되는데 아브라함이 그 정도까지 해석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의 사람들이 그런 해석을 들으면서 정말 놀라워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구약에 나타난 그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대속자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치르신 그 희생과 고통을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인생이 바뀐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의 황실 수사학 학교의 교장으로 가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하게 출세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문화담당 특별보좌관 정도, 그렇지 않으며 문화공보부 장관 정도 된 샘입니다. 그 당시 황제가 밀라노에 있었습니다. 단숨에 로마에서 밀라노로 가면서 벼락출세를 한 것입니다. 완전 상류층 사회에 접어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바람 피우는 일도 잘 했지만 잘 하는 것이 공부 밖에 없었고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 수사학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수사학을 잘 모를 것입니다. 수사학은 말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변증술입니다. 지금은 수사학적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대 철학은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엄밀한 수사학적인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무튼 지금으로 말하자면 뉴욕과 같은 최고의 도시라는 밀라노로 갔습니다. 그곳 황실 문법 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했으니 로마에서 최고의 수사학자를 모셔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길을 가도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수사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나도 정말 수사학을 배우고 싶어. 그런데 이 밀라노에서 수사학 하면 암브로시우스 주교님을 능가할 사람이 없지. 지난 주 설교 들어봤어? 판타스틱했어. 누구도 그런 수사학으로 표현할 수가 없을거야.” 어거스틴은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자신은 수사학으로 잔뼈가 굵어온 사람인데 일개 설교하는 목회자의 수사학을 그렇게 한없이 칭송하는 소리를 듣다보니 예수를 믿으려고 밀라노 성당에 간 것이 아니라, 밀라노 성당을 가보면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성당이라 계속 짓고 있는 그 성당을 간 것입니다. 설교가 좀 딴 데로 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재밌을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지가 어느 정도나 수사학을 하는지 내가 좀 봐야겠다.”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다리를 꼬고 앉아서 턱을 궤고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환상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예전에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키케로의 호르틴시우스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철학하는 사람이 되길 원해서 성경을 한 번 읽어보려고 했는데 성경이 너무 후지게 느껴졌습니다. 우선 라틴어가 아주 조잡한 라틴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무라도 조금 언어를 하는 사람이라면 성경 번역을 했기 때문에 볼품이 없었습니다. 말이 안 되고 모순된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집어치우고 결국 마니교에 빠지게 되는데, 어거스틴은 성경에 한 가지 의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암브로시우스가 설교할 때 다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한 가지 예를 드는 것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지금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해서라도 그 병에서 아이를 낫게 해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병이 아니라 아예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의 고통을 당신은 느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그냥 아버지가 아들을 바친 사건이 아니라 먼 후일 2천여 년 후에 이루어질 어떤 사건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서사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설명할 때 어거스틴이 엄청난 감동을 받으면서 성경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회심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대속자를 이 세상에 보내실 그 사건을,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는 사건으로 미리 맛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모두 겪은 우리가 역으로 투사해서 그 사건을 볼 때는 아주 놀라운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해지고, 하나님의 메타서사가 얼마나 커다란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개되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욥이 발견한 대속자 사상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로서는 아브라함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대속자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놀라운 사상에 눈을 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욥은 그 당시 대속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신지 설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중보자이셔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중재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인간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여 화목하게 되도록 도와주실 구속주가 계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욥은 그러한 신세계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욥은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사람을 대속하다가 그 사람과 함께 죽어가는 대속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신 대속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큰 고난의 극한경험을 통하여 그분에게만 소망을 둘 수 있었습니다. 욥은 비로소 중보자이신 대속자가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욥이 고난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단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는 이미 정결하고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시대에는 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 이제껏 도달해보지 못했던 더 광대한 지식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그 지식 안에서 당신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더 많이 알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큰 그림을 보면서 당신의 더 큰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뜻은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고난 없이는 연단 받을 수 없었고 연단 받지 않고는 결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광대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 만족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 자신은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고난이 계속 계속 겹치자 그는 모든 것이 이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예전에 확실하던 것이 이제는 희미해졌고, 예전에는 알 수 있었던 길을 자기가 어느 길로 가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보다 욥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욥이 알고 있는 그 정도의 지식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서 욥으로 하여금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심으로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제껏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그 껍질을 깨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두 알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수학을 공부하면 수학 지식이 증가하고, 과학을 공부하면 과학 지식이 늘어나는 것처럼 그런 종류의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다트 엘로힘”이라고 합니다. “다트”는 “지식”이라는 명사인데 “야다”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이 단어가 처음 쓰여진 곳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가인을 낳은지라” 할 때 “동침하다”라는 단어가 “야다”라는 단어이고 “알다”라는 뜻입니다. 이 “알다”라는 말에는 히브리인의 문화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안다”라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보로서 무엇을 안다는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어사전을 좀 두꺼운 것을 가져다가 “know”를 찾아보면 저 끝에 “성교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1611년에 킹제임스 버전을 번역하는 과정이 영향을 주어 영어 “know”에 그런 의미가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난 저 남자 잘 알아.”라는 말을 절대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마치 영어에서 “나 그 남자와 매우 친해”라는 의미로 intimate 라는 단어를 쓰면 사람들은 그것을 전부 sex와 관련해서 생각합니다. 그런 표현을 쓰면 심각한 오해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문맥에서도 그런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대신에 close를 쓰면 됩니다. 그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트 엘로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그분을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외국인이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는데 어디서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불고기가 유명하다더라. 코리안 바비큐라고 하는데 미국의 바비큐와는 전혀 다르다.”하면서 양념이 어떻고 어떻고 설명하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개념은 들어오겠지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짭조름하고 달콤한 고기가 둥그런 철판에 수북이 쌓여서 막 구워지면서 국물이 줄줄 흐르고 거기에 당면도 들어가고, 그것을 후루룩 먹어본 후에야 “아, 이것이 한국의 불고기구나!”하고 알게 되듯이 그런 경험적인 앎,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호세아 4장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그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노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이 그 지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을 버려서 더 이상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겠다고 하실 정도로 진노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체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얻어진 체험적인 지식으로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백성다운 독특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사도바울의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세계 선교? 아닙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궁극적인 인생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능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구약에서 강조됩니다. 신약에 넘어오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간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응축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응축해서 보여주신 본체가 바로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을 통해 다 하나님을 알 수 없었던 사람에게 이제는 그 사람 예수를 보면서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을 명백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추상적으로 추론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꼭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런 기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기적의 정점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고도의 생각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과 사건들을 통해서 추상적으로 추론하여 하나님의 성품들을 예측해 나갔어야 했는데 이제는 예수 한 분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 예수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보입니다. 왜? 일정한 키와 일정한 몸집, 그리고 일정한 표정과 일정한 장소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똑같이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구약을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나면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가 눈에 다 보입니다.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품에 안으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 하나님이 만약 계시다면 저런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하는 지식”이라고 할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다트 엘로힘이 신약에서는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서 “그노시스 크리스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전환됩니다.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그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기를 원하노라” 할 때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원하노라”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 만큼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었는데 신약시대 백성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 만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모든 계시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속에 담겼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예전에 사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버릴 수가 있는가 입니다. 버릴 수가 없다면 말이 좀 안 되는 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버렸다는 것은 예전에는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서 그것을 결코 영원히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흔적은 남아있는데 온전히 다 버리지는 못하지만 버릴 수도 있고 다시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지 모르겠지만, 남녀가 둘이 사랑합니다. 너무나 너무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자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첫사랑을 깨고 더 좋은 남자에게 시집갑니다. 그 다음에 불행해졌는지 행복해졌는지는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다면 또 다른 사랑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합니까? 안 됩니다. 정말 사랑하면 세상에는 남자는 한 사람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사람입니다. 사랑은 그런 독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흔들리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을 간음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냥 순수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그 사람 대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대상이 바뀌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간음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질투라는 것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는데 진도를 나가야 하니 이 정도에서 멈추고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백성답게 넉넉히 살아가게 하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그 무엇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지식과 결합된 사랑의 힘,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되었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참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시 지식과 사랑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의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고 더 풍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해서 더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된 삶을 정체성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행복이 달렸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 행복관입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설명했습니다.
거기서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욥은 아주 격렬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가 너무 자유로워서 대학에 가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습니까? 대학에 들어가 보니까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는 느낌이 듭니까? 하도 오래 전에 졸업해서 기억이 안 납니까? 확실히 새로운 세계라는 느낌이 듭니까? 우리 때처럼 아주 엄격한 고등학교는 “미성년자 입장가” 극장을 들어가면 바로 정학이었습니다. “미성년자 입장불가”에 들어가면 더 심각한 징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성년자 입장가” 극장에 들어가면 일주일 정학이었고 “미성년자 입장불가” 극장에 들어가면 3주 이상의 중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무슨 영화든지 간에 교복을 입고 극장이라는 곳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격하게 살던 학생들이 대학을 들어가서 남녀가 한 교실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미팅하는 그런 사회에 들어간 것 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을 욥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잠깐 살았는데 재밌는 것이, 엄마 닭이 계란을 품으면 거기서 진짜 병아리가 나옵니다. 나올 때가 되면 톡, 톡, 톡 소리가 납니다. 안에서 병아리가 노란 부리로 깨는 것입니다. 엄마 닭이 도와줍니다. 밖에서 때려서 깹니다. 드디어 병아리가 젖은 몸으로 툭하고 튀어나옵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는 계속 두리번거립니다. 왜냐하면 본 적도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계란이 자신이 아는 세계의 전부였는데 깨고 나오니까 모든 것이 다 처음 본 것들입니다. 욥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죄가 없고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고난은 반드시 죄에 대한 징벌로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아로 버려졌습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부모님이 아주 어린 나이에 이혼했습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기들이 살기 싫어서 헤어진 것인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렇게 세상의 모든 고통이라는 것은 개인의 죄로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욥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중보자이고 대속자이신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욥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중보자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친히 도우시고,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지할 때 지혜롭게 하시며, 약할 때 강하게 하시고, 고난 받을 때 건져주시며, 범죄 할 때 용서해주시고,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고난 받을 때 그리스도가 희망이시는 그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저는 젊은 시절에 다른 것은 몰라도 게으르게 살지 않은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낮잠이라는 것을 거의 자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주 경멸해야 할 나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힘들 때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한 것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도 사람이 몸을 입으셨으니까 한계가 있으셨습니다. 날이 뜨거우면 더우셨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셨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셨고, 매 맞으면 아프셨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나의 개인적인 서사가 그리스도의 메타서사에 연결됩니다. 주님이 2천 년 전에 배고프시고, 매 맞으시고, 욕을 먹으시고 멸시 당하셨던 것이 그대로 내 마음에 전해집니다. “그때는 주님이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으니까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당할 차례다.”라는 마음이 들면 주님의 위로가 전해져 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의 서사에 개인의 고통의 서사를 얹으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땅에 서심
욥은 중보자이신 대속자가 언젠가 땅에 서실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감춰지지 않고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도록 그분이 통치하실 때가 온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욥 자신 조차 하나님을 하는 지식의 한계 때문에 자기가 왜 고난을 받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 큰 고난을 통하여 나에게 이 대속자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구나!” 결국 대속자는 살아계시기에 언젠가는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실 것이며 언젠가 욥의 친구들도, 욥 자신도 지금 받는 고난의 이유를 명백히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욥은 자기의 세 친구들도 이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눈 뜨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발전사에 있어서 욥이 구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B. 하나님을 보리라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보리라”입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더 놀라운 복음 진리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고난 속에서 이렇게 죽어갈지라도 다시 부활하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욥은 큰 고난을 통해 인생의 허무에 눈을 떴습니다.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당하던 초기의 불평하던 모습과 비교해보면 이것은 놀라운 믿음의 성장이었습니다.
1. 육체의 죽음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여기서 “가죽이 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그림언어입니다. 유목문화 사회였던 당시에 비춰본다면 짐승의 가죽을 벗기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짐승을 죽여야 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고난의 초기에 욥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확신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새로운 믿음의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아직도 자기가 왜 이 고난을 받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이신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과 자신은 죽어도 부활할 것이며 그때에는 자기가 겪는 이 모든 고난의 일들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며 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겪은 모든 고난의 이유가 지금 당장 모두 해명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증가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는 고난 속에서 그가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비록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공로 없으나 하나님이신 대속자가 계셔서 억울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이 모든 일을 옳은 대로 보여주실 것이며 자신은 육체 바깥에서 죽은 후에라도 하나님을 뵈옵고 이 고난의 현실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맡기고 나니 이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시달리다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2. 육체 밖에서
이제 욥에게 고통과 행복, 생존과 죽음 사이의 경계는 아이들이 놀이를 위해서 땅바닥에 분필로 그어놓은 줄에 불과했습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그런 담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자기가 처한 고난에 대해 원인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해도 기꺼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죽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결국은 자신이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 바깥에서라도 자신은 그 대속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라는 욥의 고백은 그의 부활 신앙을 보여줍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죽은 후에 반드시 부활한 육체로 맞이할 내세가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날에는 자기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죽어 육신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을 믿었고, 그래서 죽은 후에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자신이 애매하게 고난당한다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자기의 뜻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바가 있고 그것은 반드시 좋은 것이며,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현실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히 고백합니다.
(찬양)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 끝나도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시니 주님을 의지하여 새 힘을 얻으리, 이것이 고난당하는 성도의 신앙입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만나고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라도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서사에 자신의 개인의 서사를 연결시키면서 내가 고통 받는 곳에 그분이 함께 고통 받으시며 내 곁에 계시고, 내가 이 고난을 당신을 의뢰하며 믿음으로 통과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아직까지 내가 보지 못한 새로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 육체 바깥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리라는 지복의 행복을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와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인류 역사상 악과 고통의 문제는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없는 거대한 담론이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만약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이렇게 세상이 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을 궁극적으로 토론하고 탐구해가는 과정도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더 급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하나님이 나에게 들려주시기 원하시는 당신의 구원 서사에 나의 개인의 서사를 함께 연결시키면서 욥이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고난을 통해서 대속자에 대한 지식, 부활에 대한 지식을 주셨듯이,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지식을 내게 주셔서 보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멸시와 욕, 고난을 모두 겪고 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겪는 우리를 당신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처럼 여기시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난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탐구가 요구됩니다. 그런 노력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으며 우리가 겪는 고난 중에 그분의 능력이 모자라서 막지 못하시는 고난은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을 사용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때 거기 육체 바깥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육체 안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역경을 이겨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8~10)
녹취자 : 박나리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3(2023.08.01._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3)
I. 본문 해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시 변론합니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하는 욥을 비난하며, 네가 경건하다면 어찌 하나님께 신문을 당하겠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내 악이 크지 아니하냐 내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은 알지도 못하는 죄를 거론하면서 참소합니다. 욥이 이웃에 매정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했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그렇게 고발하듯이 말한 것은 그런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계적인 선악상벌론에 입각해서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는 욥을 생각하면서, 고난이 저렇게 크다면 죄도 엄청나게 클 것이라고 그러면서, 자신은 증거도 없이 욥이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매정하게 행했다고 추론해 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충고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내게 임하리라” 22장 21절에서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겪는 모든 고난이 바로 그의 죄 때문에, 특히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매정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불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불화 때문에 결국은 고난이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렇게 긴 논쟁적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고정관념, 곧 개인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며, 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욥기가 쓰인 것이 족장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선악상벌론은 그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엘리바스로부터 터무니없는 공격을 당한 욥은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욥 자신도 자기가 겪는 고난의 의미를 아직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그 이유를 변명할 수 없는 고난의 현실에 대해 한탄하면서, 그는 3절과 4절에서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변론할 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스스로 묻습니다. 욥의 믿음이 비교적 순전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은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특별히 친구들이 지적한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속해서 당하는 고난이 주는 의미,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뵙고 답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사람들의 설득에 의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설득은 수단일 뿐입니다. 설교는 도구일 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뵈옵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하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굳게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주시기 때문에,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의지를 갖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나타나셔서 때로는 그를 변화시키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에 끝날 때까지 성경 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 하나님을 찾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하나님을 떠나 세상 속에서 아끼는 이 없이 죽어갔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 곳을 열어보든지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을 갈망하라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욥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믿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구절이 바로 10절입니다. ‘그러나’라고 하는 말은 앞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뒤집는 것입니다. 앞에 무슨 이야기가 있길래 뒤집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만나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거기 안 계시고, 뒤로 가도 하나님은 보이질 않고, 왼쪽에서 일하셔서 왼쪽으로 가도 왠지 그분을 만날 수가 없고, 오른쪽으로 돌이키셨는데 오른쪽으로 가도 그분을 뵈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이제 간절히 찾겠다고 갈망하는데, 하나님은 숨으시는 하나님처럼, 숨바꼭질하시는 하나님처럼, 좀처럼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포기할 만한데, ‘그러나’의 믿음을 욥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이야기를 뒤집으면서 ‘내가 그토록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지만,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구나. 그렇지만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과 같이 나오리라.’ 여기서 이 욥은 비록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II.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정확하게 논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의 과정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을 자신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나는 그 일어난 일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의미가 없을 수 없으니, 나는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분은 의미를 알고 계시며 이 고난을 나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그 의미를 아직은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가는 길을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에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의미는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고, 그 의미가 결국은 자신의 가는 길을 가치 있게 할 것이라는 것,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의미가 언젠가는 자신에게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A. 나의 길을 아심
이렇게 하고 나니까 비로소 현실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습니다. 믿음이 가져다준 깨달음이었습니다. 욥은 여전히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고난을 이렇게 오래도록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은 우연히, 그리고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비록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길은 인생길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길을 걸어가는 주체는 욥 자신인데, 그 길을 왜 가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욥이 불현듯 그런 믿음을 갖게 되자, 이제껏 자신이 당한 고난 때문에 더이상 무질서한 혼란과 정신적인 방황을 겪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때도 아니고 저 때도 아니고 바로 이때 태어난 것, 그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200개가 넘는 수많은 나라 중에서 하필이면 한국에 태어난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 중에서도 북한에서 안 태어나고 남한에서 태어난 것도,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도, 여자로 태어난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부모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나라고 하는 존재를 둘러싸서 나를 나로 규정하고 있는 대부분 모든 것들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어진 나를 대부분 바꿀 수 없는 극히 제한된 한도 안에서만 내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영웅전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여성으로 태어난 내가 남자가 될 수가 없고 남자가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여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그 수많은 것들이 결국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이미 결정이 되어서 나를 여기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에 내가 남자나 여자로 태어났고, 다른 시대가 아니라 여기에 태어났고, 그리고 여기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정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있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면, 그러면 그런 나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지가 없다면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노비로 태어나게 하셨을 때 하나님이 가진 의지와, 우리를 이 민주국가에 태어나게 하셔서 남성으로 여성으로 살게 하신 그 의지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 과연 인간이 주체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까지 듭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어진 것은 내가 바꿀 수가 없습니다. 부모도 바꿀 수가 없고,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변경할 수 없고, 여권 바꾸면 국적이야 바꿀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거를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남자로 다시 고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 대부분 것들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주어졌는데, 그 주어진 삶 속에서 과연 내가 나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그런 회의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그렇게 나를 지금의 나라는 존재로 여기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시니까,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리고 그 주어진 한도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가 가는 가야 하는 길이고, 또 그 길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그게 바로 ‘그러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욥은 고난을 겪는 자신의 처지를 나의 가는 길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욥은 이제껏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꼬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모든 것이 원래의 질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로움과 순전함, 정당함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할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나님께로부터 들을 수가 없었고, 욥의 친구는 고난받는 그것 자체가 네가 매우 큰 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도 답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욥은 친구들로부터도 버림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음성을 들을 수 없어 고립된 존재가 되었고, 아무것도 새롭게 안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본 것과 같이 그는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대속자가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대속자가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변호해 주셔서 자신을 대신 구해줄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사라져도 자신은 부활할 것이며, 그 육체의 바깥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런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욥은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그 고통스러운 고난의 서사를 하나님의 서사에 연결시키면서 그는 새로운 하나님을 아는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고, 욥은 이제 믿음으로 그 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실의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욥의 믿음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비록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할지라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마땅히 주체적으로 자기의 인생길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마십시오. 때로는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고난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한번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시험해 본다고 여겨야 합니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마음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록 그 고난의 원인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자기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시며, 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고통의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덜 불행해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만나지 않은 불행은 피하고, 이미 만난 불행은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틀 동안 보아왔습니다. 더 많은 인생을 살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고난받을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하나님께 포악스럽게 대들고 싶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비로소 그때 겪었던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인생이 그분의 주권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이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나를 바로 여기에 나로 의지적으로 있게 하신 것처럼, 내 인생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이 낱낱이 알고 계시며, 그 현실과 내가 부딪히며, 그 속에서 고뇌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가기를 바라는 것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은 다시 한번 깨달으며, 하나님을 아는 세계를 확장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며,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느 것도 하나님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은 모든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써 내 인생을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가는 길을 아시나니’ 할 때 바로 내가 가는 길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여기서 아신다고 하는 것은 어제 설명한 바와 같이 객관적인 지식으로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욥을 사랑함으로써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 욥이 걸어가는 길을 경험적으로 알고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욥과 함께 그 고난의 불구덩이 속을 지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그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아시나니’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대목을 보면 이미 욥이 이제 마치 알의 세계에서 껍질을 깨고 튀어나온 병아리처럼 이전에 있었던 믿음의 한계를 깨뜨리고, 그 한 번 그 세계의 벽을 부수고 나와서, 아직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이제껏 결코 도달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신앙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불평이 사라져 버렸고, 오히려 그의 마음은 놀라운 위로가 밀려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비록 만나서 내가 왜 이런 고난을 겪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나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경험한 것처럼 나와 함께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위로와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걸어가는 욥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욥은 이제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앞길이 어떤 앞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일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아니 더 나쁜 일이 연속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가 가는 모든 길을 경험적으로 알고 계시고, 그리고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위로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악상벌론이나 인과응보의 신앙, 곧 욥의 새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그 기계적인 이념에 묶여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오직 그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괜찮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욥이 가는 길을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한 치 앞을 볼 수 없고 얼마나 더 커다란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가는 길을 알고 계시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를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욥의 이 위대한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담대함과 물처럼 녹아내리는 욥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고체는 자기 형체대로 있기를 고집합니다. 그러나 액체는 그러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냥 어디든지 흘러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욥에게는 자기가 겪는 고난이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든, 애매하게 당하는 것이든, 그것은 더이상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고 자신에게 그 길을 가라고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뜨면서 그는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길을 가는 것을 경험적으로 자기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알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당하는 그곳에서 욥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고난을 겪어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욥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실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욥은 자신의 인생을 그분의 손에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며 낙심하던 그 시련의 초기에 있었던 신앙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새로운 경지의 신앙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욥의 생각이 여기에 미칠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는 미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궁리하고 공부하고 탐구하고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알게 할 수 없는 지식이었습니다.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순전한 사람이오, 의인이오, 그리고 잘살고 있는 사람이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B. 나를 단련하심
그러나 이렇게 고통을 주시는 것에는 하나님이 그를 단련하시기 위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단련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단련한다고 하는 이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자라프’라는 단어입니다. 이게 어떤 용도에 쓰는 것이냐면, 맨 처음에 최초의 금을 캘 때 금덩어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걸 금맥이라 그럽니다. 노다지라 그럽니다. 그런데 그걸 매우 희귀한 일입니다. 내가 뉴질랜드 가보니까 사람들이 그 개울가에서 쭉 서서 금을 줍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은 그 손가락 마디 하나 만한 그런 금을 주었다고 그랬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아주 작은 거, 눈에 보일까 말까 한 깨알 같은 것들을 줍습니다. 그런데 그게 순도가 매우 떨어집니다. 맨 처음에는 금의 성분이 붙어 있는 광석을 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은 발전된 시대니까 이제 또 다른 방법들이 나왔겠지만, 고전적인 방법은 그것을 망치로 부숩니다. 부서뜨려서 그것을 이렇게 가루로 만듭니다. 그리고 물을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쌀을 이렇게 조리로 읽듯이 비중이 같은 것끼리 이렇게 모이면서 노란 금 색깔의 그 성분들이 한 군데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거를 걷는 것입니다. 그걸 반복해서 합니다. 그것은 금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순전한 금은 아닙니다. 그걸 흑연으로 만든 용광로에 넣고, 불을 때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금속을 녹이는 것입니다. 녹이면 이제 불순물은 다 없어지고 액체가 되니까 비중이 다른 건 가라앉게 됩니다. 그거를 다시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찌꺼기는 버리고 다 굳은 다음에 다시 용광로에 들어가서 또다시 정제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번 연단 한 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연단을 해서 순전한 은이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똑같은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생각이 아주 놀랍게 바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바뀌게 되었냐 하면 자신이 예전과 다르게 자신의 어떤 불결을 발견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이 이런 일들을 당해야만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다고는 아직도 생각을 안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련의 고난의 사건들을 통해서 욥은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순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금은 금인데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금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진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라프’, 단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원래 제련입니다. 제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녹아내려야 됩니다. 녹아내리고 그것이 액체가 쏟아지고, 불순물이 걸러지고, 다시 굳어지고, 다시 용광로 속에 녹여지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하는데, 자기의 마음을 그렇게 녹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녹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왜 마음이 녹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시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고난이 없을 때, 평안할 때 바라보는 관심사와 현실은 극심한 고난을 겪을 때 바라보는 현실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 다릅니다. 왜입니까? 내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나 큰 신앙적인 씨름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가하게 세월을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신을 못 차릴 때 가끔 우리의 마음을 때리시는 것입니다. 따귀를 때리듯이 우리의 마음을 찰싹하고 한 번 때리시는 겁니다. 그러면 정신이 차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의 마음이 고난을 받을 때 녹는다고 하는 것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크고 두려운 일을 겪으면서 그 공포감 때문에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것을 가나안 원주민들도 경험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난을 당할 때 그런 경험을 똑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만으로는, 그런 마음 하나로만은, 그 마음이 단련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하냐면 두 번째, 또 다른 의미에서의 녹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녹는 마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러분이 ‘라합’이라는 여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수색대원들을 감추어 줍니다. 그리고 그들과 약조를 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을 점령하기 위해 밀려 들어올 때, 그때 자신의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주기로 약조합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우리가 들으면서 우리가 마음이 녹아내렸다.’, 거기서 끝났으면 공포의 하나님으로 끝났을 텐데 내가 그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육신에 속한 나라를 버리고, 그리고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그늘 아래 그 백성으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욥은 이 큰 고난 때문에 두려워서만 마음이 녹은 것이 아니라 이제 그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자기를 향하여 계획을 가지고 이런 일을 겪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가는 길을 사랑으로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이제는 기꺼이 이 연단을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같은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백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담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은 한때 어리석게도 자신이 순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자신의 무지와 불결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제사나 예식,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껏 자신도 알지 못하던 마음 갈피 갈피에 깃들여 있는 그러한 죄였습니다. 욥은 비로소 자신이 비록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순전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욱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인생 전체가 자기를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주신 형통함이나 고난조차도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주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자기가 의롭다고 믿은 것이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앙의 변화였던 것입니다.
욥은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만족스러운 상태를 순금이 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금이 통용되던 시대는 어느 때나 그것은 순도에 따라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금은 현금과의 교환성이 가장 뛰어난 재화이고 유행도 타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는 금이 사람들이 매우 가치 있게 생각했지만 몇 년 지나면 금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 내버리는 때가 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꿈꿨겠습니까? 연금술을 꿈꾼 것입니다.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금을 만들어보려고 했습니다. 만들 수만 있다면 대박 사건입니다. 혼자 그런 기술을 가지고 금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러면 정말 대박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못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도 못 만듭니다. 모르겠습니다. 더 과학이 발전하면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H라는 원소에서 금으로 바뀌려면 H가 우주에 있는 기본 원소인데 이게 바뀌기 위해서는 5억 도의 열이 필요합니다. 그게 못 만든 이유입니다. 그런데 지금 기껏 해서 한 3억 도까지는 올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잠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5억 도까지 올릴 수 있다면 금을 생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좋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더 좋게 만들면 더 좋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 있는 그대로도 굉장히 좋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더 좋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신앙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순도 낮은 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더 좋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없는 죄를 마른 행주 쥐어짜듯이 닦달하여 고난으로 그 책임을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믿음은 훌륭했고 마음도 순전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욥에게 기대하시는 최고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순전했지만, 더 완전해질 여지가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사랑하는 욥에게 때로는 죄 때문에, 때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고난받을 때 자기를 반성하고 왜 이런 고난이 내게 올까, 이 고난이 혹시 나의 죄 때문은 아닐까 돌아보는 것은 너무 경건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더 넓게 인생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에 이런 고난을 내게 겪게 하시는 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보다 큰 그 계획이 무엇일까 하고 묻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유 없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적도 없고, 까닭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적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고통에는, 모든 형통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며 자기가 겪는 이 고난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씨름하는 것입니다. 욥은 모든 일을 포기했습니다. 생업도 없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었고, 자녀도 잃었고, 가족도 없고, 이제 홀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살아있어야 하는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숙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그 이유를 깨달으면서 죽는 것이 오히려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삶에 있어서나 그의 마음에 있어서나 더 높은 수준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 이 욥은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매우 미천하며,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새로운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 만족했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순전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세 친구들의 수준과 별반 다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욥이 아니라 다른 세 친구 중 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였더라면, 욥도 그 세 친구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 같이 똑같이 했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해서 욥은 더 높은 신앙의 세계, 자신이 아직 가보지 못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땅에 서서 보는 벌판과 4천 미터 꼭대기 산에 올라가서 만년설을 밟으며 내려다보는 들판은 같지 않습니다. 그 느낌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4천 미터 정도 되는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만년설로 이어지는 로키의 영봉들을 발아래 내려다볼 때, 그때 드는 감정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고 커질수록 인생에 대한 더 깊고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끊임없이 씨름하며 괴로워하고 해답을 못 찾는데, 그 사람은 너무나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의미를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께 붙어 있게 만들고, 그를 사랑하게 만들고, 그의 품을 연모하게 만들고, 고난 속에서 그 의미를 기억하며,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이제 이 모든 고난을 혼자 겪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단련하시는 이유는 순금처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자기를 다루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그렇게 순전한 금처럼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오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뛰어난 수준을 갖고, 어떤 사람은 오래 교회에 다녔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현저하게 미천한 지식을 가지고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과 인격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는 단련되어야 했습니다. 이 단련은 고난의 불에서 자신이 액체처럼 녹는 과정입니다. 그 속에서, 회개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하나님 서사에 자기 고난의 서사를 엮으면서, 연관시키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토해내 버리는 과정입니다. 그리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단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련한다는 말은 금 제련법의 공정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치열한 불길에 거듭해서 금광석을 녹아내리게 하고, 거기서 불순물이 걸러지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더욱 순도가 높은 금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단련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형상을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려고 애쓸 때,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의 마음과 인격과 삶 속에 녹여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커다란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인생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세계의 종말과,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과 영혼, 그리고 만물과 하나님 자신을 아우르는 큰 그림입니다. 그런 지도를 놓고 자기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다듬으십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인생은 내 손에 있다. 내가 보호하고 지켜준다. 그러나 내가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순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타고난 성향과는 전혀 다른 소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살 성향의 사람은 아닙니다. 성향 검사를 해보니까 봉사가 제일 크게 나오고, 그다음에 창조형도 있고, 그다음에 진취성도 있고, 뭐 그런 거 다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생각할 때 저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많지 않았고, 그 대신 있으면 그 친구하고 아주 친하게 지내고, 사람들하고 별로 대화도 나누지 않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격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환경 속에 저를 두시면서 바꿔 가시는 것입니다. MBTI를 전공한 사람이 칼빈을 검사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가 나왔는데 칼빈은 지극히 내성적이고 혼자 조용히 책이나 읽으면서 선비처럼 살 사람이었는데, 제네바 종교 개혁의 파도와 해일 속에서 헤쳐나가면서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거치면서 살아서 결국 그게 몸으로 다 나타나니까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향상 도저히 그런 삶을 살 것 같지 않은데, 하나님이 우리의 성향과는 다소 다른 성향을 필요로 하는 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속에서 우리의 약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연단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에 매우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범사에 모든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자신의 재능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우리의 성향과는 다른 자리에 우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신앙으로 분투하고 노력하면서 자기가 깨어지고, A형의 사람인데, B형을 요구하는 위치에서 훌륭하게, 원래의 B형인 사람보다도 더 훌륭하게, 그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비밀들은 심리 검사에서 파악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 된 성품을 정결하게 하시고, 은혜로운 새해 성품을 우리에게 새롭게 북돋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연단을 통해 빚어졌습니다.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게 될 것이고, 어떻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사람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 있으니,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람들이 되어가기를 도전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단 받을 때 기뻐하십시오. 우리를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고난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가는 길을 그분이 알고 계신다는 뜻이며,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며, 우리를 위한 거대하고 위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담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만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 고난과 연단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신앙은 고난의 불 속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놀다가 변화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의 눈물과 생각이 바뀌는 충격의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앞에 깨어지는 사람의 마음을 어떠한 제물보다도 훌륭한 제물로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깨달음과 깨어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되어 갈 것이고, 당신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새롭게 알면 알수록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공동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이바지할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돈을 주면 바로 그 비전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고, 높은 지위를 주면 그 지위를 그 비전을 위해서 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래서 지극히 미천하여 자기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면, 고난을 받으면 얼마 전 욥이 그랬던 것처럼 불평하고 원망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대들 것입니다. 그리고 넉넉히 모든 좋은 것을 주면 그것 때문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결국 모든 좋은 것들도 나쁜 사람에게 가면 나쁘게 사용이 되고 나빠 보이는 모든 것도 좋은 사람에게 가면 좋은 것으로 사용이 됩니다. 누가 고난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 욥에게 이 고난이 다가가니 처음에는 잠시 혼란을 겪었지만, 나중에는 정리하면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느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아오리라.”
그런 순금과 같은 자신을 생각할 때 욥은 자기 자신의 불결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결한 자신이 아니라 순결한 자신이 되고 싶었고,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의 발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또 그의 길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 입술의 명령대로 어기지 않고 따르기를 원하고, 그리고 값진 음식보다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더욱 소중한 양식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가는 길을 경험적으로 알고 계시며, 그리고 그 고통 속에 나와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진흙 같은 나를 정금 같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의 도가니에 나를 단련하시니, 내가 이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지만 제대로 된 순금처럼 연단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통이 없는 연단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 없이 금을 정제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가 어디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지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분량을 넘어서는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하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굳게 믿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모두 겪으셨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속자로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용기와 위로를 얻으십시오. 당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이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면서,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더 높은 지식에 이르러 신앙의 환희와 기쁨을 완전히 다른 세계의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1(2023.08.13._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1)
1. 절망 속에 탄식함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5-18)
녹취자:장미연
Ⅰ. 본문 해설
우리에게 욥은 순전한 믿음으로 고난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그의 이름이 히브리어에서 왔다면 ‘미움을 받는 자’라는 뜻이고 아랍어에서 왔다면 ‘회개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욥기는 욥 자신의 자전적인 기록으로 판단이 되며 저술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사천 년쯤 전인 족장 시대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근거는 당시 제사장 없이 제사가 드려졌다는 사실과 ‘케쉬타’라고 하는 화폐 단위가 족장 시대의 화폐 단위였던 점, 그리고 욥이 이백 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Ⅱ. 절망 속에 탄식함
욥은 마음의 고통 때문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육체의 아픔은 이를 악물고 참을 수 있었지만 마음의 아픔은 온갖 정념들을 쏟아놓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의 고통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가슴에서 정제되지 않은 말을 쏟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고통받는 자에게는 잠자는 것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침상에 잠들어 수심을 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꿈에 나타나서 그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두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A. 죽기를 희망함
그는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 시험 초기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훌륭한 신앙을 지탱하지를 못했습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욥은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듯 형벌과 같은 고통이 계속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인내할 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죽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원래 그는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욥 답지 않은 망발을 쏟아놓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굳건하게 하는 것은 행복과 불행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알면서 사는 것입니다. 행복해도 의미를 모르면 타락하게 되고 불행하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알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그 불행 속에서 가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것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 깨달음은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식을 빼놓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욥기와 관련해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그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호세아 4장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저이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백성을 구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는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가 뛰어날 때 그는 거목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지만 그 지식이 매우 미약할 때 그는 묘목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히브리어로 ‘다트 엘로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다트’는 ‘알다’라는 단어에서 온 명사입니다. 이 동사가 제일 먼저 쓰인 곳이 창세기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가인을 낳으니라” 할 때 ‘동침하다’라는 그 단어가 ‘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다’라는 개념과 히브리 사람들이 ‘안다’라고 하는 개념은 사유에 있어서 매우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 사람의 맥락에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1611년에 킹제임스 버전이 번역될 때에 이 ‘야다’를 영어의 know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옥스퍼드 딕셔너리에 찾아가 보면 know라는 단어 안에 ‘성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 남자가 “나는 그 여자를 안다” 혹은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나는 그 남자를 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다른 의미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답게 만드시기 위해서 당신을 아는 지식을 끊임없이 주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해석해주시고 그것을 적용해주시는가 하면 아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돈독하지 않았을 때는 큰 기적과 놀라운 이적을 일으켜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각 시대를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매우 풍성했던 시대가 있고 아주 빈약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히스기야 왕이나 다윗 시대 같은 경우. 이런 경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국가적으로 아주 뛰어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시대나 이런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거의 사라지고 사사시대에는 거의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사라져버리게 되었고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껍질만 이스라엘 백성들일 뿐이지 이방인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인간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 속에서 작용하는지를 아는 지식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과 그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개인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방식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넘어오면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희미하게 보여주던 그림자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게 됩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으로 오셔야만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었고 또 사람으로 오셔야만 우리에게 참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구약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으니 마음이 아주 탁월하게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신령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 누구든지 눈을 가진 사람은 그 인간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병든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 흐느끼실 때 그들을 위해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실 때 병든 자를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문둥병자를 치료해주실 때 그 모든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시대에 넘어와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서는 희미한 그림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알려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할 때 바로 그 지식이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그리스도가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그 성품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아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구별될 수 없다고 단언해도 전혀 과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모여있는 여러분 모두는 예수를 대부분 믿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의 대학원 수준이고 박사 수준이고 어떤 사람은 아직 유치원에도 들어오지도 못한 정도의 미천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며 살든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분량을 넘어선 훌륭한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일생을 통하여 간절히 추구했던 인생의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계 선교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독립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 그의 부활의 능력과 권한에 참여함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그의 일생일대의 비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 욥이 비록 순전하고 훌륭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완전한 사람이었을 리는 없습니다. 순전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지만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았기 때문에 이 순결한 사람을 놀라운 방식으로 연단함으로써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 욥을 아주 높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것이 이번 사경회의 중요한 골자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성품들과 그것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신 것이 그의 순전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욥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은 사람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또 만약 욥이 그 정도로 순전한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시련 속에서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하였겠습니까?
그의 순전함을 두고 하나님과 사탄이 나눈 대화는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첫째는 그의 신앙의 순전함이 당대의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단에게 그를 시험하도록 그를 넘겨주신 것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안에 있는 작은 고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계획이란 이것입니다. 욥으로 하여금 이처럼 이어지는 큰 고난을 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성품, 곧 그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은혜의 세계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당대의 욥의 신앙은 순전하기는 하였지만 처음 고난을 당했을 때 당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욥의 믿음은 유치원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욥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더 깊고 넓게 성숙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시인 다윗과 같이 고난 속에서도 이제껏 자기도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에 눈을 뜨게 하시려고 장기간 연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는 큰 시험을 당하고 나서 욥은 비로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자신은 그렇게 온전한 사람도 아니고 순결한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자기가 결심한 것만큼 그 온전함을 굳게 지키지도 못하였다는 사실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오히려 욥은 일련의 시험들을 통해서 그토록 자신했던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처절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신은 스스로 정결하다고 믿는 자기의에 갇힌 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세계관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은혜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고통을 받으나 그 의미를 모르는 자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문입니다. 욥은 오래도록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있었으니 그는 차라리 목이 졸린 채 숨이 막혀 죽기를 원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땅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형통한 자로 지상의 부귀를 누렸을 때는 그 행복의 의미를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과 그분을 공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은 사람일수록 고통이 가득한 이 고해의 바다의 인생에서 덜 흔들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의인으로서 애매히 고난을 받는 자의 표상으로 추앙되고 있는 욥이 가지지 못한 믿음의 실체였습니다.
욥은 계속되는 고통 가운데 마침내 괴로운 나머지 죽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당한 시련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지식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사랑하는 만큼 그 고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의 근원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자기의 꾀로 문제를 해결하다가 더 큰 불행에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시험에 들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끄러져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보통의 형이상학적인 의미는 잘못된 상태에 있는 삶이 올바른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입니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많은 멸시와 치욕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본래의 질서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모든 사람이 고통 대신 기쁨을 원하고 불행 대신 행복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항상 올바른 질서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종종 우리의 삶은 요동치고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고 기쁨은 탄식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본래의 혹은 더 나은 질서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과정을 우리에게 겪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겪는 이유입니다.
욥의 신앙은 상태에 있어서는 순전하기는 했지만 영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가야 할 길이 아직 먼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 길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의 순전한 상태는 아브라함의 소명에 비유한다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 있지만 반드시 떠나야 할 갈대아 우르 같은 곳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겪는 기쁨과 고통에 의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의미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입니다. 더욱이 의미 없는 불행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애매히 당하는 것이 당신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불행의 의미를 즉시 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비례하고 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때로는 우리의 고통의 이유가 오랜세월 동안 그 원인을 알 수 없도록 감추어진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은 사람은 항공모함을 타고 이 세상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 있는 사람은 쪽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은 맨몸으로 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잠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겪고 있는 많은 불행과 고통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잠깐 떼어 놓으십시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고통이 일어나고 나는 도대체 왜 나에게만 이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할 때마다 화가 나고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것 같은 마음이 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웅변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끔은 마치 남의 일처럼 자신의 마음에서 떼어놓고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마치 수술하는 의사가 환자의 배를 가르고 수술할 부위에 집중하여 살펴보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때 욥처럼 죽기를 바라던 마음은 변하여 그 의미를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더 깨닫고자 하는 열망으로 바꿀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신앙을 지켰으나 얼마 못 가 죽기를 희망한다고 망발을 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계속되는 인생의 고통과 시련 때문에 욥처럼 차라리 저녁때 눈을 감으면 아침에 저세상에서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찌하든지 살아있는 오늘을 살아내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껏 절망과 고통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희망을 발견할 수 없어서 죽기를 바랐다면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현실이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커다란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고난을 통해 나를 연단하심으로써 나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해주셔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죽기를 희망하던 이 불신앙이 변하여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연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연단은 쓰디쓰고 고통스럽지만 믿음으로 이 연단을 감당함으로써 여러분들은 이전과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운 신앙을 갖고 어제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니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 욥의 실패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배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허무를 경험함
욥은 고난을 받을 때 처음에는 자신이 매우 순전한 믿음을 지닌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계속되었고 결국 욥은 자기의 신앙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에 대해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욥은 이제껏 애착하던 육신의 생명이 갑자기 싫어졌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 대한 모든 감사와 찬송은 사라졌고 욥은 자신을 여전히 살려두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욥 답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에 항거하는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이것이 어찌 믿음의 사람 욥에게 어울리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불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모든 재산과 자녀를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건강하던 자신의 온몸이 종기로 가득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의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이것은 다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욥은 자기의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꼈으며 스스로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곧 슬픔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께 매일 정성껏 제사를 드리고 곧 사라질 아침 안개 같은 희망을 붙들며 사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세계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신자라고 할지라도 어떤 박탈감과 허무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불행보다 무서운 괴물은 허무감입니다. 왜냐하면 시험 속에서 압도한 허무감은 사물들의 존재와 질서와 가치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를 비롯해서 요즘에 많은 신학자들이 서사의 이야기를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서사라고 하는 것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 흔히 간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간증이 너무 주관적인 감상에 치우친 나머지 때로는 부정직하거나 혹은 과장된 이런 어투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기보다는 개인의 어떤 자랑을 드러내는 그런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간증을 멀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간증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을 좀 드릴 테니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사에는 우리 개개인의 서사가 있고 하나님의 서사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이야기책입니다. 그래서 학식이 별로 없는 사람도 대화식으로 되어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경책을 재미나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서사가 있습니다. 그 서사는 인간의 서사를 초월한다고 해서 메타 서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사의 이야기보다도 더 거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메가 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메가 서사 혹은 메타 서사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굽이치며 흐릅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서사가 그 밑에서 굽이치며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은 이 두 개가 따로 움직이는 동안에는 신앙의 힘이 발휘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메타 서사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곤고하고 고난을 당하고 연단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경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시편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시편에서 시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 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메타 서사를 배우고 그다음에 정신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자신 개인의 서사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고통과 연단을 받고 고민과 괴로움이 생기고 때로는 격렬하게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생애적인 불행한 일과 위기까지 닥칩니다. 그때 개인의 일어나는 그 서사를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다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래도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민족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신당부하신 말씀이 새로운 것을 배우라는 이야기를 많이 말씀하신 게 아니라 “잊지 마라. 잊지 말라. 기억하라.” 그 말씀을 수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개인의 서사를 겪으면서 그 자신이 겪는 개인적인 서사의 의미를 메타 서사에 묶으며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에게 실재적으로 힘을 주시는가? 하나님의 메타 서사가 어떻게 자신에게 현실을 이길 놀라운 힘을 주는가? 하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서사에서 때로는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고 믿음의 자유를 얻지 못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그냥 그것을 견뎌낸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끔찍한 고통을 계속 겪고 원하지 않는 불행한 일을 만날 때마다 고통받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메타 서사에 자기의 고난 받는 현실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바로 이런 아픔을 느끼셨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눈물로 가족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곧 멸망이 다가오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메타 서사에 자신의 마음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이 마치 그리스도와 한마음이 되어 그 똑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내 가족을 위해 통곡하고 기도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내 가족을 위해서 우는 것인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내 가족을 위해 통곡하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개인의 서사와 하나님의 메타 서사는 하나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증진시켰던 방식이고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던 사람들이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모든 청교도들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이 그런 방법으로 자신 개인의 서사를 하나님의 메타 서사와 연결시키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비밀을 간직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욥이 커다란 불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참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생의 무게를 느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인생 최초로 느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제껏 자신에 대한 믿음과 순전함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세 가지에 대해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과 둘째 그에게 마음을 주신 것 그리고 셋째 그 마음을 꾸짖어 단련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 중 무엇이 하나님이 잘못하신 일이란 말입니까? 시인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신 것이 찬송의 제목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보십시오. 은혜받은 시인에게는 인간을 그렇게 위대하게 만드시고 마음을 주신 것이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상만사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이제까지 욥이 그것이 없었더라면 어찌 마음 없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섬길 수 있었겠습니까? 마음을 주셨기에 욥도 하나님을 믿고 신령한 교제를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찬송하고 감사할 제목이지 원망해야 할 이유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인생에 대해 깊은 허무를 자각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아는 보다 깊은 지식으로 자라가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허무’라고 하는 것은 ‘텅 빔’입니다. 곧 장소적으로 지리적으로 사물에 있어서 텅 비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뜻이 없다는 점에서 텅 빈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자기 인생에서 허무를 경험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갈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시인도 한때는 욥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에 무상함과 인생의 허무를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지금 욥이 바로 그 시인과 같은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욥이 시련을 겪지 아니하였더라면 연단을 받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일이었습니다. 욥은 거듭되는 연단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작은 불행 하나에도 이렇게 나락까지 떨어져 버리는 자신을 보며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생에 대해 허무를 느끼게 될 때 크게 세 가지 길을 택하게 됩니다. 허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저열한 쾌락으로 허무감을 잊어버리고자 쾌락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허무감 속에서 의미 없는 인생을 계속하기를 그만두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그 허무의 경험을 깨치고 나아가서 자신이 이제껏 몰랐던 자신과 세계를 초월해있는 의미를 하나님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을 하나님은 연단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욥에게 이러한 허무의 경험은 보다 깊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갈 기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전한 신앙을 가진 욥에게 하나님이 그토록 큰 시험으로 장기간 연단을 허락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아직 그러한 깊은 영적인 깨달음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 시점을 기준으로 욥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이 바다 괴물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는 곧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냐고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신 욥의 신앙적인 무지가 얼마나 극치에 달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에게 계속되는 시련은 파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파도의 물결을 따라 요동치는 마음은 결코 그가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의 마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탁월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조차도 욥은 시험에 들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에 도달하자 괴로움의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연단 같은 개념은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탁월하기 때문에 세상과 인간사에 대한 질문은 하지만 스스로 대답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이상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에 욥은 순전한 사람이었음에도 번민하였고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조차도 그것을 따라 행하며 살지 못하기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의 밑바닥을 부끄럽게 모두 드러내 보여 주었고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지성과 마음이 있어서 모든 만물들에 비해 탁월함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의 심리와 마음의 복잡한 기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바로 그 마음 안에 자기를 찾기도 하지만 그 마음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길을 스스로 잃어버리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만물의 영장이므로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아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홀로 독립하여 계심으로 아름다우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면 할수록 추루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욥은 거듭되고 심화되는 고난 속에서도 그 불행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일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의존하기까지 겸비해지는 것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는 원망과 낙심의 바닥에까지 그를 던져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감히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그가 바르게 되도록 책망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서까지 짜증 섞인 말투로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우리는 여기서 욥의 신앙의 바닥을 봅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둔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하던 그 아름다운 고백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것은 단지 영적인 침체가 아닙니다. 그는 흔히 믿음의 사람으로 일컬어졌지만 그것은 그 당시 욥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절망은 단지 희망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애쓰고 희생하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개고생을 하고 정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런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겪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가지만 자기의 자식이 성공하여 잘될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는 아직 절망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한때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만을 찬송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끝나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쉽게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바닥이 드러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신앙이 바닥나자 전심으로 죽기를 사모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난관은 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만큼 순전하지 않고 믿음이 굳세지도 않은 우리가 이어지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당시 욥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는 풍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계시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가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그리스도를 우리는 보고 만져본 것처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욥이 확신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서도 허무를 이기며 살 수 있는 인생의 이유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의 바다로 알려져 있습니다. 꽃길만 걷는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껏 걸어온 길도 수많은 가시밭길과 자갈밭을 헤치며 몇 번씩 죽을뻔한 경우를 기적처럼 지나서 이렇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이 그러해 왔다면 지금도 우리 앞에 있는 날들도 또한 유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이 세상이 그렇게 우리에게 때로는 대적과 같이 덤벼들어도 우리는 결코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생명 싸개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당신의 핏덩어리처럼 여기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모든 희망이 끊어질 것 같은 그 지점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피 묻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난날들을 우리 개인의 서사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서사에 연결해 보았습니다. 탕자처럼 집을 나갔던 나를 다시 받아 주신 것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그 탕자의 서사에 나오는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말아먹고 집안의 명예에 먹칠을 한 그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으며 아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도 그러했습니다. 혼자 살아온 것 같았는데 우리 개인의 서사가 극에 달할 때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의 메타 서사로 우리의 서사를 연결할 믿음을 주셔서 세상에서는 희망이 없지만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 용기를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같은 연단의 시간을 보내는 우리들도 결코 하나님이 홀로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그의 죽음의 메타 서사에 동참하는 이들에게 현재적으로 당신의 부활의 메타 서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이 겹치십니까? 여러분들을 연단하시기 위함임을 기억하십시오. 복잡한 생각을 모두 떨쳐버리십시오. 나의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도 그만두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손에 여러분들의 손을 여러분들의 인생을 맡기십시오. 생사 간에 나의 인생이 주님의 손에 있사옵나이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하나님 진흙과 같은 나를 마음껏 당신 원하는 대로 빚으시고 순전하지 않은 나의 믿음을 정금 같게 하시기 위해 당신 소신껏 나를 연단하소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연단을 견디고 마지막에는 정금과 같은 사람으로 나와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사옵나이다.’ 고백하십시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살아있는 삶의 목적을 먼저 분명히 하십시오. 그래서 인생길에서 겪는 모든 시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때로는 지상에서 발견한 삶의 허무를 기꺼이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고 우리의 육신은 한 덩어리에 불과하며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께 돌아갈 바람 같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마십시오.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계획안에서 보석과 같은 의미를 발견하십시오. 매 순간 겪는 일들은 우리 개인의 서사입니다. 그것을 매 순간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얹으십시오. 그리하여 고난을 통해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성품을 배워가십시오. 거기서 찬란히 빛나는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반드시 이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채 우리가 자유로운 주체로 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연단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2(2023.08.14._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2)
2. 희망 속에 위로하심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3-26)
녹취자 : 오지윤
I. 본문 해설
어제는 절망 속에 탄식하는 욥의 모습을 통해서 그가 완전한 믿음을 가진, 완벽하게 순전한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봤습니다. 오늘은 막판까지 온 욥을 하나님이 희망으로 위로하시는 모습을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론과 선악상벌론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기에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잘못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선악상벌론이, 혹은 인과응보론이 항상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수와사람 빌닷이 펼친 비판적인 논리는 욥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으로 기계적인 인과응보론과 선악상벌론을 가지고 욥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욥이 거듭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은 그가 죄를 지었다는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빌닷의 논리에 따르면 욥이 고난을 계속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며, 그는 숨기고 있지만 분명히 죄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 사회는 때때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기는 욥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가 오직 자기의 견해를 따라서 고집스럽게 인과응보론과 선악상벌론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닷이 고수하고 있는 엄격한, 기계적인 선악상벌론은 성경적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이데올로기였던 것이었습니다.
욥기 18장 4절에서 그는 욥에게 이렇게 꾸짖듯 토해놓습니다. “울분을 터트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욥은 빌닷의 비난과 정죄에 대해 반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욥 자신도 자신의 고난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이 그 정도였기 때문에 도저히 그 고난 받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욥 자신도 처음 겪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 비해 순전하기는 했지만, 당시 욥의 수준으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욥은 차라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여주시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갑갑한 것이 있었으니, 도대체 자신의 무슨 죄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때리시는지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욥은 아직 그 고난을 통해 자기를 더욱 위대하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기 위한 특별한 계획 속에서 주시는 고난인 줄을 아직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에게 사정하듯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그렇지만 욥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 없는 고통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심을 품거나 완전한 불신앙으로 돌아서기까지는 아니하였습니다.
II. 희망 속에 위로하심
욥은 자기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지성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때로는 분노와 절망의 감정으로 마음이 몹시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받는 고난을 통해서 당시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A. 대속자가 계시다
여기서 하나의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전의 욥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평이 열리게 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많은 축복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어떤 놀라운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배우지 못했던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생애에 전혀 없던, 전혀 새로운 깨우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의 대속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구속하는 자’ 혹은 ‘기업을 무르는 자’를 뜻하는 고엘에서 온 것입니다. 대속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대신 값을 치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기업 무름의 제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의 상속이나 유업을 대신 희생해서 잃어버린 그것을 그 사람에게 회복해줄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빚 때문에 자기 자신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를 찾아가서 그 주인에게 그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면 그 친척을 노예의 신분에서 합법적으로 구출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권리인 동시에 반드시 가까운 친척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할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레위기 25장 25절과 48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예를 룻기에서 볼 수 있는데, 룻의 시아버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일찍 죽었고, 룻의 남편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왔지만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때 부유한 사람 보아스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속자인 룻과 혼인하여 자손이 없는 그 집안의 자손을 끼치게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여자를 받아들여 아이를 갖게 해 주는 역할까지도 대속자가 하는 일 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는 가장 가까운 친척은 그 죽은 자의 피에 대해 복수할 권리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민수기 35장 12절은 말합니다. 이것이 대속자 혹은 구속자의 개념입니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대속자가 나를 대신해서 대가를 치르고 나를 구해주는 것, 그것이 대속자의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율법의 규례는 하나의 메타 서사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흘러오면서 모든 대속자에 대한 규례들은 온 인류를 영원히 구속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실 궁극적인 대속자이신 예수를 바라보고 주신 계시의 말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오늘 욥은 굉장히 커다란 자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원인도 알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모든 재앙으로 한꺼번에 받아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이 거의 4000년 전 사람입니다. 4000년 전이면 족장 시대인데 족장 시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었겠습니까? 그 시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인과응보론과 선악상벌론 가지고 인간사를 모두 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비교적 순전하게 믿는 순결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런 것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사람들보다 아주 탁월하게 뛰어난 신앙의 수준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그 많은 고난을 겪다가 마지막에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정도까지 마지막으로 내려가게 되고, 환난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던 처음의 그 태도는 간 곳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망발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신앙의 바닥을 모두 다 보여주고 나니까, 욥은 도대체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이 고난을 계속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믿으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이 지점에서는 자기 자신의 믿음이라는 것도 것이거 아니고 바닥까지 다 드러내고 나니까 믿을 자신의 믿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눈이 열리면서 완전히 신앙의 새로운 개념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속자의 개념입니다. 대속자의 개념이 율법에는 민수기와 레위기에 나오지만, 민수기와 레위기가 기록되면서 그때부터 대속자 혹은 고엘의 제도가 생긴 게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그런 제도가 있었다고 봐야 됩니다. 그것을 모세를 통해 율법의 명문화한 것입니다. 그렇게 대속자의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자신의 신앙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대속하시는 그 분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의 말이 책에 쓰여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알기에는’ 드디어 무엇인가 깊은 신앙의 한 진리를 깨닫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다” 자신은 빚에 팔려서 남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 같은 신세가 되었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거나 빚을 졌어도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곤고한 곳에서 스스로 구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는데 욥의 마음이 열리면서 자신을 위한 대속자가 보였던 것입니다. 그 대속자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충직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속자, 곧 고엘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여 이렇게 빚으로 팔려 노예가 된 친척들을 구해내는 것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이 대속자가 되셔서 나를 이 깊은 고통과 난관에서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면 모두 지불하고 나를 건지실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믿음의 세계에 대한 지평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타 서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대속의 제도를 주시고 누군가가 가엾이 빚에 팔려 노예가 되면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위하여 대신 돈을 지불하고 그를 노예 상태에서 건져내어 자유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메타 서사가 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다가 욥 개인의 서사인 자기가 무슨 죄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무엇인가 자기를 싫어하셔서 두들겨 패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대속하는 하나님의, 성경의 메타 서사와 고난당하고 누구도 도울 길이 없는 자신의 개인의 서사를 거기에 연결시키면서, 그 영원한 대속자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것은 마치 어두웠던 욥의 지성에 하늘이 찢어지면서 눈부신 햇살이 찬란하게 들어오는 것처럼 예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이성으로는 알고 있고 그런 제도를 흔히 보면서 살았지만 그게 자신의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몰랐는데 고난의 서사를 개인적으로 겪고 보니까 계시된 메타 서사와 자신의 고난 받는 개인 서사가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노예로 팔려가는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하여금 명령하여 그를 대속해내게 하신,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이렇게 고통받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풍년이 들고 짐승이 많이 늘어나고 매일 제사를 드려봐야 욥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고 순전한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만 더해줄 뿐이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을 특별한 섭리 속에서 연단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죄와는 상관이 없이 보다 더 욥의 신앙을 하나님을 아는 높은 지식의 세계로 올려보내셔서, 더욱더 탁월한 인간으로서 지복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지복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눈을 열어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이니까? 그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인과응보론이나 선악상벌론을 가지고 수없이 말씨름을 해도 어떠한 답도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욥에게 희망으로 위로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자신이 대속해주어야 할 친족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당신 자신의 몸의 일부로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몸을 대속제물로 바치셔서 율법과 죄의 속박에서 영원히 구원하시는 대속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자신과 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자기는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은 자기를 다스린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토록 큰 고난을 겪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구속하시는 중보자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욥이 약 4000년 후에야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깊고 풍부하게 알고 있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미 역사 속의 중보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를 성령 안에서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찬란한 햇빛이라면 욥이 발견한 대속자의 개념은 촛불 같은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캄캄한 시대였고 암흑과 같은 상황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불빛은 욥을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를 대속할 중보자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대속자이신 그분의 도움으로 자기가 이 환란에서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자신의 이 고난은 인과응보론이나 선악상벌론을 가지고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대속자에 대한 놀라운 계시와 연결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뜻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여주시는 것이 역사를 타고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에 있어서 한 번에 모두 보도록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여주셔도 인간이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할 때 조금씩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성경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이라고 부릅니다. 조금씩 진도가 나가면서 자세하게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계시의 점진성에 비춰볼 때 욥의 이러한 대속자이신 하나님의 깨달음은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는 욥의 인생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건이었고 이전에는 알지 못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경험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대속의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이라는 사실까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욥에게 대속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율법에 나오는 대속자는 모두 사람입니다. 그러나 욥이 선정하고 있는 대속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을 겪고 있는 자신을 구해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욥이 노예로 팔려 간 것도 아니고 여자로서 후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인 구속자로 이루어줄 수 있는 대속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속자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과 같은 중보자여야 했습니다. 욥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지불할 능력이 없는 대가를 기꺼이 치러주심으로써 고난에 처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분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자신, 욥 사이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요구하시는 바, 그렇지만 욥은 지불할 수 없는 바를 욥을 대신하여 속전을 치러주실 수 있는 분이셔야 했습니다.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또 다른 하나님 같은 분, 곧 대속자를 기대했습니다. 욥도 그 당시 대속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욥이 상정하는 대속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여야 했으니 그 중재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신이셔야 했고 인간을 위해 변화하시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여 화목케 하도록 구속해줄 신이시며 인간이신 구속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되었으니, 이것은 욥의 시대에 계시를 받은 것 치고는 놀라운 진리를 하나님이 욥에게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욥은 대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것은 고난 속에서 얻은 놀라운 계시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욥은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자기의 큰 시련을 경험함으로써 대속자이신 그 분께 소망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난 받는 욥에게 중보자이신 대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고난 속에서 발견한 희망이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순전하고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믿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당신을 아는 더 큰 지식을 선물로 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가장 큰 탄식 거리는 우리가 당신을 알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나쁜 것이고, 그 분에게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만큼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것만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어린 아이 같은 때를 지나, 어른처럼 장성하게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하나님을 그렇게 진심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죄까지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결국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함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신기합니다. 아무리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라도 한 번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눈빛이 다릅니다. 눈빛이 모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흡수하고 빨아들이려고 하는 열기의 불꽃이 눈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깊이 빨아들이면서 그 지식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아이들이 처음 회심했거나 혹은 반복적으로 회심해서 은혜를 받았거나 할 때,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아이 속에 들어가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때 그것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에 의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 그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당신 자신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더 많이 알게 하고 싶으셨으니, 당신의 더 높은 뜻을 배워 알며 예전에는 없던 더 큰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간절하고 위대한 뜻은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욥의 마음에 경험적으로 전달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무지했고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뉘우침과 반성이 없다면 하나님을 새롭게 생각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없이는 연단을 받을 수 없고, 연단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새롭게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연단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처럼 감추어진 커다란 당신의 섭리 속에서 욥으로 하여금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던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욥은 자기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반항심,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망발을 쏟아놓는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수많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도저히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방법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영원히 살아계시며 그가 자기 같은 사랑을 대속해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좁은 지성은 찢어졌고 이전에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찬란한 은혜의 빛이 욥의 어두운 지성에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총천연색의 하나님의 성품들, 사랑과 의로움과 정의와 자비와 긍휼과 영원하심과 완전하심과 불변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들이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경험했고, 그 하나님의 성품들이 대속자를 통해서 어떻게 자신과 인간 속에서 시행되는지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 4장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그들을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까 그 말을 바꾸면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내 백성이 지식을 버리지 않았으니 내 백성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의 제사장같이 살았구나. 내가 너희를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겠노라.” 이것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살 수 없었을 완전히 새로운 삶과 완전히 달라진 인격을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욥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가혹하리만치 긴 연단의 어느 한 끝에 하나님이 한 번에 주신 것입니다. 욥은 이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죄 없고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고난받고 있다고 믿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욥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극단적인 고난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죽음의 절망에 빠지려는 그 순간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보자이시고 대속자이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전혀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욥과 같이 무지한데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어떤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비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는 것은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여러분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사이에만 해결되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죄를 다시 대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 중보해주신 대속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는 죄를 지은 사람들의 피난처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죄의 길에서 고난과 시련을 겪지만, 언제 이것이 끝날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실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어떠한 희망도 없는 것인지 명백하지가 않습니다. 그때 그 대속자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나의 고난이 나의 죄, 허물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피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빌기를 ‘나의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 권리가 없지만 나를 대속하기 위해 나의 구속자로서 나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치르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당신의 아들, 중보자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나이다.’라고 비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은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맸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은혜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거나, 혹은 욥처럼 자기의에 갇히고 나면 형식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으면서 마음속에서는 그분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시위에 화살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를 향해 쏘는 것입니다. 자신이 화살이 되어 그분의 사랑의 마음에 꽂혀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이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그때는 대속자이신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사라지는 때입니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욥이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대속자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셨고, 멸시와 욕을 모두 당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허기진 자를 먹이시고 눈물 흘리는 자의 눈물을 뺨에서 씻겨주시고 헐벗은 자를 입혀주시던,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시던 나사렛의 예수이십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총천연색으로 보여주셨고 그분이 남기신 사랑의 메타 서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그렇게 당신처럼 불안정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고통의 바다를 해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개인적인 서사를 그분의 서사에 연결시켜 그와 함께 살고 그와 함께 죽고 예수가 우시던 곳에서 우리도 울고 예수가 죽으신 곳에서 우리도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이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는 보혜사이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며 친히 도우시며 무지한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대속자이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는 무지할 때 지혜롭게 하시고, 약할 때 강하게 하시며 고난받을 때 건져주시고 범죄했을 때 용서해주십니다. 한 번 당신이 구속한 우리를 어떤 경우에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손을 꼭 붙들고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고아와 같이 혼자 버려지지 않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도우심으로 살아온 일생이었던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유혹 가시관 쓰셨네
그 대속자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지식을 계시받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일찍이 보기 드문 끔찍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나라면 잔인하리만치 무서운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욥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대속자가 살아계시다. 너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혼자가 아니니 그 대속자가 너를 위해 변화하고 너를 돕고 너를 가르치리라.’ 하는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 그 큰 고난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받을때 그리스도가 이처럼 희망이시니 오직 그분이 성령으로서 함께 하시는 것을 굳게 믿고,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은 중보자이신 대속자가 언젠가 땅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감추어지지 않고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도록 그분이 통치하실 때가 온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욥 자신조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 때문에 자신이 왜 계속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속자는 반드시 살아계시기에 이 땅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며, 언젠가는 자신이 스스로를 감추지 않으시고 온 세상에 드러내시어 영광을 받으시며 통치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때는 욥의 친구들도 자신이 고난을 받는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님을 명백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세친구들도 자신과 같이,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위대한 대속자가 계시며 그가 고난받고 죄지은 자들의 소망이 되신다는 사실에 눈뜨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발전사에 있어서 욥이 구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보리라
마지막으로 욥이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을 보리라는 희망으로 이 말을 끝냅니다. 극심한 고난 속에서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 큰 고난 속에서 죽을지라도 다시 부활하게 되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욥은 큰 고난을 통해 인생의 허무에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높으신 하나님 이외에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오직 전능하시고 높으신 하나님만 의지할 마음이 확정이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서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 희미하게 대속자에 대해서 알았으나 결국은 자신이 왜 이렇게 죄도 없이 끔찍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마지막까지 속 시원하게 대답을 못 얻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죽을 수가 있었으니, 이것은 시험을 당하는 초기와 비교할 때 놀라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이었습니다.
이 감격적인 신앙의 고백을 19장 26절에서 이렇게 남깁니다.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의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여기에서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통영 되었던 일종의 그림 언어입니다. 즉, 유목문화 사회에서 짐승의 가죽이 벗겨진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짐승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던 고난의 초기에 욥은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커다란 위안을 얻었고 거기에 한 가지 더 죽을 육체를 벗은 후에는 내가 육체 바깥에서 나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뵈올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믿음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의 이유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 즉 대속자가 계셔서 자기의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죽은 후에는 내 영혼이 여전히 육체 바깥에 살아남아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기꺼이 그분의 품에 안겨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은 욥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커다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진전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고난 속에서 가는 길을 그가 다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자기가 혼자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무게를 얹고 그분의 주권에 자기 자신을 맡기며 고요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대속자가 자기를 건져주실 것과 썩을 육체를 지나서 반드시 바깥에서 주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신앙을 갖는 것이 욥이 새롭게 깨달은 믿음의 세계였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인생의 현재와 미래를 통째로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욥에게 고통과 행복, 생존과 죽음 사이에 경계는 아이들이 놀이를 위해 땅바닥에 그어놓은 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담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조금 전 친구들의 비난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분노하고 요동하던 사람이 아무 관심 없이, 오직 평안을 찾으면 자신의 생사에 대한 관심을 끊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사실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대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말고 또 하나의 비결이 있었으니, 그것은 부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자기가 처한 고난에 대해 원인을 해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죽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변호해줄 대속자가 살아계시고 그렇게 죽은 후에는 육체 바깥에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되돌려놓으시는 질서의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뵈옵는다고 한 욥의 고백은 그의 확고한 부활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족장 시대 사람이면서 그렇게 부활의 신앙을 확고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비록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하나님을 마주대하여 뵈올 것이며 그 동안 자신이 당한 고난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난을 겪었지만 그것도 결국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는 반드시 부활한 육체로 맞이할 내세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날에는 자신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죽어 육신이 사라진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어서, 그래서 죽은 후에도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애매히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바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찬양)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 끝나도
사나운 풍랑일 때 날 지켜주시고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되시네
비록 이 땅에서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이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만나고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죽은 후에는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리라는 천상지복의 행복을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이유를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성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악과 고통의 문제는 개인의 것이든지 사회의 것이든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거대한 담론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사상이 이렇게 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일평생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탐구가 요구됩니다.
안셀무스라고 하는 중세의 하나님의 사람은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책에서 이 말을 남깁니다. “우리가 믿은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함이다. 안셀무스가 또 다른 곳에서 신앙과 이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는 것은 교만이며 이성의 사용 없이 신앙만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태만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길은 아마 중세 시대에 성지 순례를 떠나는 것만큼이나 길고 어렵고 먼 길 입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 마음과 뜻을 바치고 기꺼이 수고와 희생을 치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천상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과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의미 없는 인생사가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당신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 순간적인 삶은 모두 영혼에 잇대어 있으니, 고난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배운 욥을 기억합시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고 경험한 우리들이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왔고 한두 번쯤은 그런 일을 겪는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아는 지식의 세계를 열어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를 불치의 병으로, 경제적인 가난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우리의 삶의 어떤 파산으로 고통을 겪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우리의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면 우리는 내세와 부활의 소망으로 승화시킬 수 없는 고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전체는 이 땅에서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은 이 땅과 이 땅에 두고 갈 육체의 죽음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하늘나라와 거기에서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다시 결합하며 완전한 몸으로 우리 하나님을 영적으로 직접 뵙게 될 소망을 가진 것이 우리의 인생의 대드라마인 것입니다.
욥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깊은 고난 속에서 고통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지극히 연단하여 이제껏 자기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큰 지혜안에서 고난을 겪게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하나님 나 같이 무지몽매 하고 자기의에 사로잡혀있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을 주님이 깨뜨리시기 위해 당신도 아프시면서 나에게 고난을 주시고 온갖 고통을 겪은 후에 결국 대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을 주시옵소서.”라고 빌어야 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 믿음 안에서 선악 간에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내게 행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일이라고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변함없이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반드시 뵈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육체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이 육체 안에서도 성령 안에서 고난받는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내가 위로를 받고 새로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겪는 여러분 개인의 고통스러운 서사를 생전 처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메타 서사 속에서 나와는 비교되지 않는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큰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상에 나의 몸을 포개고 그의 팔에 나의 손을 포개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죽은 그곳에서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경험으로 다시 살아날 때 이 연단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으니 이 연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람이 아니라 성도로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가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8-10)
녹취자: 조경훈
I. 본문 해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신 변론을 합니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이 죄가 없음을 주장하는 욥을 비난하며 말합니다. ‘네가 경건하다면 어찌 하나님께 심문을 당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4-5) 엘리바스는 욥은 알지도 못하는 죄를 거론하며 참소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욥이 이웃에게 매정하게 했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고발하듯이 말한 것은 실제로 욥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증거를 찾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계적인 응보론과 선악징벌론에 입각해서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결론을 먼저 내고 보지는 못했지만 욥이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짐작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잖이 욥에게 충고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가 임하리라”(욥 22:21) 이 말씀을 거꾸로 뒤집으면 ‘욥아, 너는 지금 하나님과 매우 불화한 상태다. 그러니까 네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겪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지 않으면 너는 복 대신에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고난이 하나님과의 불화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아주 답답했습니다. 비록 자신이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치셨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욥은 하나님과 불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죄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왜 거리끼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큰 고난을 받아야 되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당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는 이렇게 높은 차원의 문제를 풀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렇게 긴 논쟁적인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고정관념, 곧 개인의 모든 고난은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며 죄를 짓지 않고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견해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욥기가 쓰여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족장 시대였음을 감안 한다면 욥의 세친구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인과응보론과 선악상벌론은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윤리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엘리바스로부터 터무니없는 공격을 당한 욥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욥 자신도 자기가 겪는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밝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고난의 이유를 변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한탄하면서 스스로 묻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가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욥 23:3-5) 당시 욥의 믿음이 순전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그의 수준은 그의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통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여쭤보아 답을 얻고 싶었습니다. 욥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마음에 시선을 어디 계신지는 알 수 없는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그는 앞으로 가도 뒤로 물러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실 텐데 어느 쪽에서도 그분을 뵈올 수 없었습니다.
막다른 고비에 이르렀을 때 욥은 욥기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다시 한번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앞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뒤집어버리는 문법상의 역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실 텐데 내가 당하는 고난이 우연한 일이 아닐 텐데, 나의 죄 때문에 당하는 일이 아닐 텐데, 무슨 일로 이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움직이고 계시는지 도저히 자신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그렇게 만나고 싶었지만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고통받는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이것이 욥의 인생에 있어서 믿음의 대전환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전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대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원망을 쏟아놓고 망발을 퍼붓기까지 했는데 그게 안 되니까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어느 길로든 결국 갈 텐데 그 길이 어느 길로 이어질지 자신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 그것으로 자신의 고민에 대한 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떤 해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 사실에 큰 위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왜 이런 길을 가야 되는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은 아신다. 여기에서 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중심으로 모든 세상과 인생사를 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내 관점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여 모든 사물과 인간, 선과 악이나 혹은 좋고 나쁜 것까지 내 중심으로 판단하고 하나님도 나의 시각에서 바로 봅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봤지만 어떠한 답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어마어마한 환란과 시련을 만나고 재산과 종들과 가족들과 가축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신의 온몸도 질병에 걸려서 환자가 되어버린 저주받은 이 모습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II. 깨달음 속에 인도하심
그때 욥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보는 입각점을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중요한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욥을 내려다본다고 하시면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가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내려다보신다면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이 일이 진행될지, 동기가 무엇인지, 마지막에 이 고난을 통해서 어디로 데려가시려고 하는지, 그 길은 마지막에 어떻게 결론이 날 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생각, 즉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무질서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완벽한 질서를 향하고 있다는 평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죽음을 경험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연단을 받으면서 비로소 발상의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바라보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시는 것이 기준이구나 하는 것을 욥이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새로운 수준으로 도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그의 마음속에 이해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큰 깨달음 속에서 욥을 인도하십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정확하게 논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의 논쟁의 과정을 통해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을 자신에게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A. 나의 길을 아심
이렇게 하고 나니까 비로소 현실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 가져다준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왜 이 큰 고난을 오래도록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결코 우연히 실수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서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였습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이고 그 과정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이고 그 과정을 어떠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일을 진행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길’ 히브리어로 ‘데레크’라고 하는 단어는 인생길에 대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길을 걸어가는 주체는 욥 자신인데 자신은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끝없이 고통을 당하며 고통의 의미를 몰라서 괴로워하면서 마지못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욥 자신은 왜 자기가 그 길을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길은 어디로 향하여 어디를 목적지로 하여 가는 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웠는데 괴롭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가는 길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첫 시간에 설명을 드린 바와 같이 여기서 ‘아시나니’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의 사유에서 보면 과학적인 지식으로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욥과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며 경험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사랑으로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욥이 불현듯 이런 믿음을 갖게 되자 이제껏 자신이 당한 고난 때문에 겪던 무질서한 혼란과 정신적인 방황이 모두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혼란을 느낀 것은 불행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길을 계획 속에서 섭리하고 계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지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방황을 하고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도 자기가 가는 길이었고 그 길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욥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욥이 한 세계가 깨어지고 새로운 신앙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위대한 계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전히 욥은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거기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고 자기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시고 이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가는 길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나니까 그 길이 고통스러운 길이기는 할지언정 나쁜 길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능가하는 신령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겪는 자신의 처지를 ‘나의 가는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 욥은 이제껏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자기 인생이 잘못되어서 꼬이고 있다고 생각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무질서 속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처럼 혼란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은 이러한 고난을 당할 만큼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이며 정당한 사람임을 강변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은 결코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할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꼬인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더 심하게 꼬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욥은 버틸 수가 없게 되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죽음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욥에게 이 큰 고난을 주실 때 욥을 낙심하게 하여 좌절시키고 절망 속에 파멸하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욥이 이러한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일정한 자기 신앙의 틀 안에 갇혀서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누구도 당해본 적이 없는 극단적인 시련을 통해서 평범하던 욥의 생각을 깨뜨려 이제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지혜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새로운 세계로 욥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이 목적이 실현이 될 시기가 왔습니다. 여전히 욥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왜 이 고난을 당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기고 나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나니까 믿음으로 자기가 어느 길로 가게 되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가는 길을 여전히 모를지라도 그 길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계기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가 완벽한 한계 상황에서 자신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그때 대속자가 계시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자신은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지만 자신을 위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시고 대속자로 말미암아 구속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대속자 사상에 눈을 뜬 것과 이 고난에 대한 모든 답을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죽을지라도 내가 죽은 후에는 육체의 가죽을 벗은 후에 육체 바깥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때는 비로소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끔찍한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 이 두 가지가 욥의 마음에 커다란 용기를 준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욥의 신앙관은 지극히 현세적이었습니다.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예쁜 자식들을 많이 낳고 짐승들이 계속 번성하고 종들의 수가 늘어나고 재산이 계속 많아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정성껏 예배하고 구별된 백성답게 사는 것이 욥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신앙관이었습니다. 이 고난이 아니었다면 이 사람은 결코 대속자의 신앙에 눈뜰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부활이 있다는 사실과 부활한 후에는 이 저주받은 육체 바깥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영으로 마주 대하며 볼 것이라는, 그리고 해결되지 않았던 인생사의 모든 궁금했던 의문들이 그때는 모두 해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정도의 신앙은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차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세계 속으로 욥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고난이 계기가 되어서 그 고난으로 평범했던 욥의 마음을 수없이 내려치는 고통 속에서 욥은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식을 주십니다. 당신을 아는 지식을 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알게 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죽음 이후에라도 자신의 믿음과 순전함에 대해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내세 신앙에서 현실을 다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모든 것이 딱 떨어지게끔 정답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는 내세가 있고 내세에서 우리의 인생이 겪은 부당한 일들에 대한 정당한 결말을 볼 수 있다면 그때 받는 위로로 현실에서 이해하지 못한 모든 답답함이 완벽하게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현실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완전히 깊어졌습니다. 이전에 욥이 달걀 속에 있었던 병아리라면 지금의 욥은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나와서 바라보는 세상이었습니다. 현실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 때뿐 아니라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이 순간에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마땅히 주체적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고난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고난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이며 나를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난을 겪고 있다면 하나님이 잘못한 나를 꾸짖으셔서 고치시기 위함이고, 만약에 내가 양심에 부끄러운 죄악이 없다면 고난을 통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새로운 비밀을 보여주시기 위한 커다란 선물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은 침대 생활을 하니까 비단이라는 것을 잘 쓰지도 않습니다. 옛날에는 시집올 때 반드시 비단으로 이불을 해서 옵니다. 비단을 보면 빨간색, 파란색으로 돼 있고, 봉황이 날아다니고, 개울이 흐르고, 구름이 떠가고 합니다. 비단을 짜는 것을 보면 옛날에 수직으로 짜는데 비단을 짜는 기술자가 여러 가지 색실이 내려오고 그것을 코에 맞춰서 끼운 다음에 편집처럼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죽 하면서 짜는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기한 게 비단이불을 뒤집어 보면 앞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놓여있는데 뒤집으면 전혀 아름답지 않고 실밥들이 막 흩어져 있어서 무질서합니다. 그게 짜질 때 아름다운 게 위로 올라오는 게 아니라 밑으로 내려옵니다. 숙련된 직조공들이 색실을 넣고 자기가 생각하는 디자인대로 코를 끼면서 비단을 짭니다. 위를 보면 붉은 실밥, 하얀 실밥, 까만 실밥, 파란 실밥들이 무질서하게 막 돌아다녀서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장인은 밑에서 어떤 무늬가 짜지고 있는지를 다 압니다. 위는 무질서해 보이는데 한 필을 다 짜 놓은 다음에 펼쳐놓고 보면 동양화 같은 그림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이 없으면 사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커녕 과거에 일어난 일의 의미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으면 과거에 일어난 일을 알 뿐만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도 무엇인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메타 서사, 하나님의 이야기가 성경에 흐르고 그 밑에는 나의 인생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기뻐하시고 안타까워하시고 가슴 아파하시고 감격하시고 진노하시고 기뻐하시는 일들이 수없이 물결처럼 이렇게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밑에서는 나의 개인의 서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로애락을 경험합니다. 희로애락수오욕의 7개의 감정들을 다 경험하면서 출렁거리는 감정을 가지고 기쁨과 슬픔, 고통과 아픔, 미움과 사랑 같은 것들을 다 느끼면서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쓰여져서 흘러갑니다. 그것을 그냥 기쁜 일일 때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깊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가면 인간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널뛰는 인생을 살면 안 됩니다. 평안하고 평정한 것이 있어야지만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널뛰어서 위로 올라갈 때는 기분이 좋은데 떨어질 때는 지옥이 되는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된다면 그런 삶을 행복이라고 선택하며 살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 보면 사람들이 자꾸 현실을 도피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인터넷 같은 데 깊이 빠져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구글인가 애플에서 쓰는 게 나온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시제품을 얘기하는 게 굉장하다고 합니다. 현실보다도 현실 같은 것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자꾸 그런 것들에 사람의 마음이 끌리고 많은 시간을 가상적인 공간 속에서 보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현실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기쁨과 슬픔이 출렁거리면서 전개되는 인생에서 평정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이탈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 게 뭐가 좋겠습니까? 그런데도 몰래 법을 위반하면서 심지어는 200만원어치 졸피뎀을 맞으면서 계속 자는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것도 현실 속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돈을 많이 벌고 가슴이 터지도록 신나는 일이 있는 것이 행복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 만으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해서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을 평정하게 잡아줄 수 있는 어떤 수평이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현실을 떠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요동치는 파도와 같은 것이 현실인데 거기에 일희일비하고 울고 웃는 삶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가상적으로 가슴 벅차고 말할 수 없이 기쁜 일만 계속되기를 꿈꾸는데 그것은 가상이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안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정신적으로라도 계속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한계를 거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보기에는 논리가 안 맞는 것 같고 불공평한 것 같고 무질서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마치 비단을 짜시듯이 사람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을 때는 무질서해 보일 뿐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저 밑에서 완벽하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면서 짜져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높아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면 이 세상에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는 어린 시절에 불행을 겪었던 일도, 내가 장애를 겪었던 일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상처를 받은 것도, 고난을 겪은 것도, 모든 것도 하나님의 어떤 계획을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일어난 일이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쉬운 말로 연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연단하고 고생은 다릅니다. 고생은 목적이 없습니다. 아주 심하게 목적이 없이 고생을 많이 하는 것을 개고생이라고 합니다. ‘개’가 영어에 ‘very’입니다. 연단은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어떤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일어난 일입니다. 연단이나 고생이나 모두 괴로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신앙이 있을 때는 그 고생이 연단이 될 수가 있고 신앙이 없을 때는 연단도 고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생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욥이 연단을 받을 때 여기서 연단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무슨 뜻입니까? 여태까지는 그런 고백을 절대 안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가는 이 길이 고생이라고 생각되었고 뭔가 인생이 꼬이고 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 일은 하나님이 아시면서도 나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길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이것이 연단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연단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없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고생이 연단이 되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니까 욥의 마음에 혼란이 사라지고 질서정연해지면서 고생하게 하시는 주권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욥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고난의 원인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고통의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덜 불행해지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만나지 않은 불행은 피하고 이미 만난 불행은 더 이상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인생을 살다가 보면 더 많이 깨닫게 됩니다. 고난받을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때 겪었던 의미를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경건한 시인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고난받은 것이 나에게 유익입니다.’ 그도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는 그런 고백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까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했는데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냥 개고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개고생을 하면 사람의 성격이 망가집니다. 부서집니다. 될 수 있으면 시집 장가갈 때 곱게 자란 사람한테 가는 게 제일 좋습니다. 험한 일을 안 겪으면서 산 사람한테 가는 게 좋습니다. 곱게 자란 사람을 만나서 가는 게 좋습니다. 더 좋은 것은 곱게 못 자랐는데 많은 시련을 만나서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숙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남독녀 외동딸로 부잣집에서 혼자 자랄 때는 곱게 자랐지만 외동아들로 부잣집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을 때는 누구 말대로 왕의 DNA를 가지고 자랐을지 모르지만 둘이 만나서 똑같이 곱게 자란 사람이 만나서 한 번 살아 보십시오. 그렇게 곱게 자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이해하겠습니까? 네가 왕의 DNA를 가졌으면 나는 여자 황제의 DNA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당할 때 믿음이 없으면 그것은 개고생으로 끝납니다. 성격도 망가지고 인격도 부서지고 때로는 정신도 망가져 버리고 인간관계도 파괴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음으로 감당하면 그것이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그분의 주권 안에 있으며 그분의 뜻을 거슬러 그분이 모르시는 일이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믿음이며 나를 반드시 도우시고 나의 가는 길을 알고 계시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그분의 손에 모두 던져도 충분히 그분이 책임을 지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은 내게 결코 나쁜 일을 행하실 수 없고 모든 선과 자비하심으로 내 인생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것은 객관적인 지식으로만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런 길을 가는 욥을 사랑하는 경험으로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길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욥을 알고 기억하고 잊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느니 너는 내 것이라’ 그러니 그가 가는 길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욥을 결코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무지하기 짝이 없었던 욥이 한 세계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깨져나가면서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라는 생각이 미치게 되자 욥은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르는 놀라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앞길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그 길을 모두 알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길을 자기가 걸어갈 때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걸어가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신앙이나 선악상벌론 같은 허접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인간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낮고 낮은 이 모든 세계를 다 다스리고 계시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자신의 인생의 가는 길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욥에게 무한한 위로를 준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신앙, 선악상벌론의 윤리에 갇혀있는 욥의 세친구들의 이념 속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제 다른 친구들이 자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욥이 가는 길을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욥 자체도 모르는 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가는 길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욥의 위대한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담대함과 물처럼 녹아내리는 그 동안의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깊은 회개가 함께 담겨있는 것입니다. 고체는 자기 형체로 있기를 고집합니다. 그러나 액체는 그렇게 하기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어디로든지 낮은 곳으로 흘러갈 준비가 돼 있는 상태입니다. 물처럼 녹아내리던 욥의 마음이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욥에게는 자기가 겪는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든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최고로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자기가 가는 고난의 길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계획을 갖고 계셨으며 그 길을 준비하셨으며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욥을 알고 계시며 욥과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은 욥 옆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욥은 자신의 인생을 그분의 손에 온전히 맡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본문을 읽으면서 욥이 느꼈을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어떻게 비유해 봤느냐 하면, 방배동에 제가 잠시 살았는데 아침이며 사람들이 새벽인데 ‘야호!’ 하는 소리를 냅니다. 그게 10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산이고 사실 언덕입니다. 창문 앞에서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아주 짜증이 났습니다. 100미터 산을 올라가서 아래 빌라를 내려다보면서 남의 집 창문에 대고 ‘야호!’ 하는 사람도 뭔가 풍치를 느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캐나다에 집회를 갔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한 번에 3,800미터를 올라갑니다. 딱 서니까 4,000미터의 로키산맥에 만년설들이 있는 영봉들이 900킬로를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거기 올라서 ‘야호!’ 하는 그 기분과 남의 집 빌라 창문 앞에다 ‘야호!’ 하는 기분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읽으면서 욥보다 내가 더 기뻤습니다. 욥이 얼마나 기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무 기뻤습니다. 무지하기 짝이 없던, 어떤 의미에서 자기가 의롭다고 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구나! 그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라
새로운 세계를 본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본 것은 욥인데 내가 너무 기쁜 것입니다. 너무 축하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나도 부분적으로 한 껍질을 깨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어떤 느낌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B. 나를 단련하심
욥은 자신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더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암시가 나옵니까? ‘단련하신 후에는’이라고 나옵니다. ‘단련’이 무슨 뜻이냐 하면 히브리어로 ‘짜라프’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제련소에서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금이 들어가 있는 광석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서 물을 쏟아서 부유법으로 비중의 차이를 두어서 흙과 모래와 금가루를 따로 분리를 하는 것입니다. 금가루를 분리했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보기에는 금가루지만 순수한 금가루가 아닙니다. 그것을 흑연 용광로에 넣고 불을 때서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중이 달라서 금은 금대로 다른 물질은 물질대로 갈라질 것입니다. 그것을 따로 떠내서 굳힙니다. 다시 집어넣어서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할 때 순금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이라는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익숙하게 가지고 있던 금을 제련하는 관점에서 보면 욥은 자신에 대한 놀라운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불결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순금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 속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제련을 해서 찌꺼기를 쏟아내듯이 자기가 그렇게 제련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그렇게 발견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런 연단을 주시는 이유가 자신은 순금처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자신이 양심에 거슬리는 죄는 짓지 않았지만 쇳덩어리 같은 존재였습니다. 존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단을 통해서 자기를 새롭게 보면서 온갖 더러운 찌꺼기가 있는 자신을 보면서 자기가 제련되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순금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눈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신앙의 세계 속으로 날아가버린 것입니다.
욥은 한때 어리석게도 자신이 순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그리고 불결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결이라는 것은 잘못 제사를 드렸다거나, 예식이 틀렸다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제껏 자신도 무지해서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에 갈피 갈피에 깃들여있는 무지와 죄의 찌꺼기들이었습니다. 욥은 비로소 자신이 더욱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인생 전체가 자기를 더욱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주신 형통함이나 고난도 자기가 그것을 즐기고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의롭다고 믿은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의 죄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 얼마나 망령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 자기의가 아니라 대속자의 중보이며 희망은 육신으로 사는 지상 세계를 넘어 육체 바깥에서도 하나님을 뵈리라는 부활 신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현실주의자에서 보던 관점이 영혼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위대한 시야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욥이 알던 신앙의 세계를 한참 뛰어넘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 영원한 지평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욥은 그것을 순금이 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금이 통용되던 시대는 어느 때가 그것은 순도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었습니다. 어떤 좋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이 됩니다. 순도 낮은 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더 좋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없는 죄를 마른 행주를 짜듯이 닦달하여 책임을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믿음은 훌륭했고 순전했습니다. 그것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기대하시는 최고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욥의 믿음은 순전했었으나 더 완전하고 고양되어질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높이 깊이 넓게 자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때로는 죄 때문에, 때로는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욥의 신앙과 인격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단련되어져야 했습니다. 단련이라고 하는 것,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찌꺼기를 뽑아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치열한 불길 속에서 거듭해서 금강석을 녹아내리게 하고 불순물이 걸러지는 반복을 통해 더욱 순도가 높은 금이 나오지 않습니까?
순금과 같은 믿음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영합니다. 즉, 우리가 완전히 순결한 신앙을 갖게 될 때 그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그 인격과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단련되지 않고는, 다시 말해서 연단 받지 않고는 결코 그분의 형상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커다란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 큰 그림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세계가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고 이 세계는 시작이 있는 것처럼 종말이 있을 것이며 천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과 만물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 속에서 나와 이웃이 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큰 그림입니다. 그 장엄한 하나님의 메타 서사 안에서 지금 현실적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개인의 서사를 메타 서사의 빛 아래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는 명료해지고 하나님의 뜻은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듬으십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이 결코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인생은 내 손에 있다. 내가 보호하고 지켜준다. 그러나 네가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순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 혼자서 나무를 깎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손잡고 함께 해가야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어떤 소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소명이 우리의 성향과는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그것이 아주 놀라운 하나의 비밀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16세기에 살았던 칼빈의 심리를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MBTI를 가지고 분류를 했는데 마지막 결론이 얼마나 재미있게 나왔냐 하면 칼빈은 성향상 그런 인생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내향적이고 조용하고 선비처럼 글이나 쓰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아야 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가장 큰 소용돌이 속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다가 쫓겨납니다. 다시 갔을 때 교인이 5,000명이었습니다. 자신이 다 돌보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에 사역을 마칠 때 15,000명의 교인을 돌보았습니다. 30여 가지가 넘는 질병에 걸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보면 세 명이 모이면 말을 못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중에 여학생이 껴있으면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혼자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거나 아니면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나서 하루 종일 인생에 대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할 정도였고 술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춤추고 놀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심리분석을 한 사람의 결과가 쉽게 얘기해서 저 같은 사람은 공부하고 교수가 됐는데 교수하면 딱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그만두고 개척교회를 하게 하셨습니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고난의 고비를 지나면서 교회를 두 번이나 옮기고 건축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 성향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 일에 전혀 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내가 그것을 평생 소명으로 여기면서 살아왔으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적성에 맞는 일을 해도 힘든데 적성에 안 맞는 일이 소명으로 주어집니다. 적성과 소명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도 상대적인 것이 적성이라고 하는 것도 평범한 조건에서 적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발견하는 것과 고난의 불속을 통과하면서 적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사하면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냐 하면 안 맞는 것 같은데도 하나님이 그 길을 소명으로 주셔서 전혀 그 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 힘을 다해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가운데 그 속에서 끊임없는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다듬으셔서 주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마지막에는 자기의 모든 성향과 심리로 볼 때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연단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 된 옛 성품을 정결하게 하시고 은혜로운 성품을 북돋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연단을 통해 빚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위대한 사람 중에 연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불같은 연단을 모두 통과하고 그 속에서 최고의 복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를 닮아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받을 때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이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 알면서도 여러분들에게 힘든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게 하시고 지금은 여러분들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마주 불 수 있을 것 같은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연단을 받게 하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고통이 없는 연단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용광로의 불길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순도 높은 금을 정제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디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지 한계도 아십니다. 당신이 당하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굳게 믿으십시오. 고생이 아니라 연단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당신이 가는 그 길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깊은 위로를 받으며 비록 지금 나를 연단하시는 불과 같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지만 이것을 통과한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곧게 믿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