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자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1-6)
녹취자: 이경순
(예화) 중년의 잘 나가던 한 신사가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해서 임원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불현 듯 건강에 이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느 병원에 가도 그 병명을 정확히 알아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밤이면 잠이 들 수 없고 가슴이 조이는 것처럼 통증이 오고 식은땀이 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증세였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소개로 그리스도인인 정신과 의사가 진료하고 있는 병원에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한두 시간 넘게 고통스러운 자신의 상황을 모두 털어놓자 의사선생님은 들어주시고 진단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곧 나을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봉투에 넣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약국으로 바로가지 마시고 집에서 조용한 저녁시간에 혼자 이 봉투를 뜯어보십시오. 반드시 고쳐질 것입니다.” 밤 시간이 되어서 혼자 조용히 침실에서 선생님이 준 봉투를 뜯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처방전 이름 아무개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하나이다. 첫째 약 이름 구약 약의 종류 시편23편 용법 및 용량 일절부터 육 절까지 천천히 하루 여섯 차례 씹어 드십시오. 기타 꾸준히 복용하시면 속히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편지를 확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화가 났습니다.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의사도 이제 나를 조롱하는구나.’ 밤새도록 그날 한잠도 못 이루었습니다. 고통 속에 새벽에 엉금엉금 무릎을 꿇고 기어 간곳은 쓰레기통이었습니다. 거기서 꾸겨버린 처방전을 다시 들고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라면 수술을 하던지 약을 팔아야 돈을 벌 텐데 왜 한 푼도 돈도 남지 않는 이런 엉뚱한 처방전을 내게 주었을까? 도대체 시편 23편이 무엇인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언제 교회에 마지막 출석했는지 기억도 없는 이 사람은 성경을 펴서 23편을 열어보았더니 주일 학교 때 자주 부르던 찬송가의 일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부터 시편 23편을 낭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하루에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그담에 아침 먹고 점심사이에 한번 점심 먹고 오후에 한번 저녁 먹기 전에 한번 저녁 먹고 한번 밤에 자기 전에 한번 이렇게 여섯 번씩 시편 23편을 읽으니까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제는 그 메모쪽지가 필요 없고 스스로 암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아침시간에 조용히 앉아서 시편 23편을 낭송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 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니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 바로 그 순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지은 지가 오래된 낡은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렇게 뼈대가 부스러지면서 우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이에 결코 흔히 해본 적이 없었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엎드려서 통곡을 하며 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의 삶에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목자가 없이 인생을 살아온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가 언제 쓰였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가장 믿을만한 추측은 이 시가 어린 시절 혹은 목동시절에 쓰인 시가 아니라 오히려 다윗이 인생 말년에 쓴 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비록 그 풍경은 목동시절을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목가적 분위기를 담고 있지만 그 시속에 담긴 메시지는 시련과 환란의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해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이 시가 그 다윗의 아름다운 이 시의 저작시기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세토 막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토막은 1절인데 이것은 시 전체의 표제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이런 뜻이고, 두 번째 토막은 2절부터 5절입니다. 왜 이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게 되었는지 2절부터 5절까지 논증해 가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의 회복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에서도 건져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토막은 6절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의 미래에 대한 확신과 그리고 삶의 방식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세 번 설교 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2절과 4절 그리고 6절을 건너뛰고 1절 내일은 3절 그리고 마지막 날은 5절을 설교하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자, 구약성경 속에 하나님의 성함이 나옵니다. 크게 3종류의 하나님의 성함이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여호와 주님 이 세 단어입니다. 그러면 왜 여기서 하나님의 세 성함 중 왜 두 개 즉 하나님이나 주님이 아니고 여호와라는 단어가 여기에 쓰여졌을까 하고 묻는 것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소한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용어의 선택이 깊은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그 성함의 원래 히브리어 성함은 ‘엘로힘’이라는 단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엘로힘이 어디서 왔을 가를 규명하지만 그 근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엘’, 신 혹은 하나님이라는 명사의 복수형태일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엘이 어디에서 왔을 까라는 것은 많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정확할지를 단숨에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제가 공부한 바로는 설득력 있는 이론은 아마 그 엘 이라는 이름이 ‘울’에서 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울은 원래 도토리나무를 가리킵니다. 도토리나무는 뿌리가 매우 강해서 웬만한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강인한 나무입니다. 그것이 당시 근동 사람들에게 마치 신은 그렇게 뿌리가 강해서 바람에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뿌리 뽑히지 않는 강한 면모를 가진 존재가 신이라고 하는 말에서 아마 이렇게 왔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학자는 명사에서 하나님의 성함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엘로힘은 동사에서 온 것이고 그 동사는 ‘알라흐’ 라는 동사인데 두려워하다는 동사에서 하나님의 성함이 왔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라는 이 성함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존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고 강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야훼’라고 하는 우리말 성경에서 여호와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하나님의 존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라고 하는 이 말은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시인이 하나님 앞에 위대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 앞에 한 연약한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그 하늘에 계신 위대한 분을 여호와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하나님과 이 시인 사이에 이미 맺어있는 언약관계 그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신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하는 언약관계에 있는 인간이라는 이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합니다. 그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이실까요? 하나님은 만질 수도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그리고 들을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추측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존재를 계시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 정보는 아주 작습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라고 하는 정도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정도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존재의 전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분을 믿을 수 있을까? 놀라운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진 존재일까요? 우리들은 종종 여행을 합니다. 외국에 수천 년 된 적어도 오천년 혹은 육천 년 된 유적지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때의 사람들을 대면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유적을 보면서 작품들을 보면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갖게 됩니다. 그런 재미로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눈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서 밤하늘을 봅시다. 불빛이 찬란한 도시에서는 별 볼일이 없지만 그러나 산속에 깊이 들어가 도시의 불빛이 비치니 않는 곳에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에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로 가득합니다. 그 별이 얼마나 멀리 있고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의 수는 약 6천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하늘에 비치는 별들은 우리의 눈에 반짝이는 그 빛이 이미 그 별을 천년 이천년 혹은 수 만년 혹은 수십만 년 혹은 수백만 년 수천광년 떨어진 곳에서 출발한 빛이 겨우 오늘 우리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칼 세이건(Carl Sagan)이라고 하는 미국의 천문학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즐겨보셨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라고 하는 대작이 바로 그 사람의 원작을 다시 현대화한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모든 국민들에게 시청하도록 적극 권장하였던 다큐멘터리입니다. 칼 세이건은 거기서 우리 지구가 속한 은하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럼 우리는 태양에 딸린 ‘수금지화목토천혜’라고 하는 일곱 개의 별무리들이 있는데 그 한 가족을 태양계라고 부르고 거기에서 세 번째 별이 바로 우리 지구입니다. 과학시간에 어느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선생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그걸 내가 알면 여기서 너희들이나 가르치고 있겠니? 그러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설명해주지 온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였다고 치자. 그런데 너희 집이 있다고 치자 화장실에 붉은 전구가 있고 거기에 일곱 마리의 하루살이가 돌아간다고 치자. 그중에 세 번째 하루살이가 지구다. 그리고 너는 그 날파리의 등에 붙은 아주 작은 세균 한 마리에 불과하단다.” 이게 우주입니다. 우주는 별들이 모여서 하나의 은하계를 형성합니다. 우리 지구가 속한 은하계는 타원형 모양의 쟁반과 같은데 바람개비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그 중심에서부터 이만육천광년 왼쪽하단에 떨어진 곳에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은 수금지화목토천혜를 비롯해 그 주위를 돌고 잇는 또 다른 위성 약 모두 합쳐서 250개정도의 별을 거느린 태양계입니다. 그런 태양과 같은 항성 즉 위성이나 행성이 아니라 항상 불타오르고 있는 별들이 이천 억 개쯤 모인 곳이 우리 은하계이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10만 광년쯤 되는 것이 우리 은하계이고 옆에서 보면 계란 프라이모양으로 생겼는데 얇은 쪽이 약 800광년정도 되는 두께의 은하계입니다. 그렇게 이천 억 개 정도의 항성이 모여 있는 그 별이 칼 세이건의 계산에 의하면 지구와 같은 모든 위성들의 수를 다 집어넣어서 계산할 때 약 4조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우리 은하계입니다.
그럼 이 온 우주에는 그런 은하계가 몇 개나 있을까? 약 천억 개 정도 있다고 봅니다. 그것도 관측 가능한 범위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의 추측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빛이 150억년정도 달려가는 거리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현재의 과학으로 관측 가능할 때 추측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공간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최근의 학자들은 “끝에까지 갈수도 없지만 가봐야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매초 폭발과 함께 2천키로 미터씩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 맨 끝은 공간이 아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주공간에서 우리가 인식하고 아는 바를 그 우주바깥에 있는 우주와 공간에는 접영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입니다. 하나님이 이 드넓은 우주공간을 하나님이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간신히 만드신 것이나 혹은 힘들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 한마디 있을지어다. 라고 하는 한마디의 말씀으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계산할 수 없는 무한대의 격차를 느끼면서 그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 속에 굴복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나나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며 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전적인 타자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 위대하심과 광대하심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워하는데서 신앙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그리고 무슨 코미디의 소재로 하나님을 삼습니다. 구약시대 같았으면 다 돌에 맞아 처형되었을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무서움 속에서 두려워 떠는 것에서 신앙은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서워 떨기만 하면 그것이 신앙이 될 수 없고 공포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거기에서 시작을 하지만 한 가지를 더 요구합니다. 그것은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그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고 크시지만 왜 그런지 그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고 싶지가 않고 왜 그런지 그 하나님께 더 이끌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이끌림이 공존하는 것으로서 신앙이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시작은 우리 인생사에 오셔서 슬픔과 설움을 함께하시는 하나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밖에 눈에 보이는 이 세계 밖에 또 다른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리고 이 모든 우주와 세계와 모든 만물이 그 위엄과 위대한 통치 앞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신앙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영 혼이 찬양하네.
(예화) 한 15년도 더 지난 때입니다. 말씀을 전하러 가서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그곳 교회에서 저를 케이블카를 태워서 한번에 3800미터 가까이 되는 록키 산맥 중 한 봉우리 정상에 세워주었습니다. 거기에 딱 서니까 3천-4천의 록키의 영봉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마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거기서 삼겹살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아, 이 위대한 사천 미터의 영봉들을 하나님이 말씀한마디로 비 데어 거기 있어라 하는 한마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구나. 그러니 나는 그 위대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재미있는 게 무엇이냐면 17세기에 근대 미학이 태동됩니다. 그런데 이 미학의 시작이 숭고함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얼마나 놀랐습니까?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았냐면 눈썹을 그리고 장식을 하고 이런데서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갈 때에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원천이 무엇이냐 하면 숭고함입니다.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가까이 범접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어떤 숭고함이 아름다움의 원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폭발하듯이 낭만주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제일 먼저 ‘그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여호와이시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시인이 목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무엇이라는 것이죠? 왜 소망교회 교인들은 대답을 못합니까?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목자라고 고백하면 자기는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런데 시편 23편을 눈을 부릅뜨고 쳐다봐도 양이라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냥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나오고, 양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살기는 개떡같이 살아도 자기는 양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양이라고 그러면 기분 나빠 합니다. 무슨 양이라고 하냐면 어린 양, 순한 양이길 원합니다. 헐! 어린양이라는 것이랍니다. 늙은이들도 자기는 어린양이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코리안 컨텍스트(context)에서 써진 책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컨텍스트(context)에서 써진 책입니다. 인정하시지요? 그 정도는 배우셨을 거 아닙니까? 코리안 컨텍스트(context)에서는 양이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반면에 “그 사람 어때?” “정말 순해. 양 같아.” 긍정적입니까? 부정적 입니까? 능력 없는 남자를 칭찬할 때는 “착해.” “순해.” “성실해.” 이렇게 부르고, 별로 능력이 없는 남자를 그래도 칭찬해줄 때는 “성실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별로 예쁘지 않은 여자를 그래도 인정해 줄때는 “착해.” 그렇게 얘기해줍니다. 별로 안 친하세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능력이 없거나 못생기면 다 착할까? 그건 또 착각입니다. 아무튼 코리안 컨텍스트(context)에서는 양은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대신에 부정적인 짐승의 대표적인 것은 뱀입니다. 뱀은 부정적입니다. 물론 뱀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보다 훨씬 도시에 사시는데 더 늦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티안 컨텍스트(context)에서는 양이 긍정적인 짐승만은 아닙니다. 이야기를 했더니 중동 선교사 한분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리고 자기네 원주민들한테 물어보니까 내말이 맞더랍니다. 그리고 나한테 고백을 합니다. 이라크에서 웬만한 욕은 원주민들이 참아도 절대로 더 이상 못 참는 욕이 있답니다. 양 같은 놈이라는 욕이랍니다. 왜 그게 모욕이냐고 하니까 우리로 말하자면 닭같이 머리가 나쁘고 돼지같이 욕심이 많고 그리고 지저분한사람 이라는 뜻이 양 같은 놈이랍니다. 그럼 여러분 들이 혼란이 생깁니다. “아, 목사님 정말 이상하네요. 성경에 보면 우리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묘사했는데 그건 어떻게 되나요?” 성경에서 비유를 사용할 때 명심해야 될 사실은 하나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한 비유를 채택할 때 모든 것을 다 함께 채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부른 것은 크게 두 가지 이미지를 채택한 것인데 하나는 희생당할 때 순순히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의 희생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택한 것이고, 머리가 나쁘고 갈피를 못 잡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양이라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러니까 성경에서도 양에 대해서 긍정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시인이 지금 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한 사람의 목자로서 양을 돌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고 보니까 자기가 양을 돌보고 인도해 온 방식과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고 보호해 온 방식 사이에 놀라운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것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게 세 가지가 나오는데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마지막은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드라크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잃어버린 운명에 대해서 나오는 것이고, 양은 자신 스스로 길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처지의 잃어버린 자를 묘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 의지로 아버지 곁을 떠났지만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의지를 가지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귀환할 수 있는 탕자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모든 비유가 지시하고자 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잃어버린바 되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되찾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거기서 우리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바로 두 번째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저녁 무렵에 목동이 자기의 양을 헤아렸습니다. 그러자 양은 한 마리가 모자랐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누군지 목동은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늘 연약하던 그 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합니다. 그 양을 찾아서 길을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 양한마리의 가격이 얼마나 할까요? 지금 아마 호주 같은데서 물어보면 한 20만 원 정도, 200불정도 한다고 합니다. 아마 중동가면 더 쌀 것입니다. 그 양을 찾아서 떠납니다.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가는 길에 다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더 많은 손해를 보지만 그 양을 잡아 데려오지 않고는 편안하게 잠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양 한 마리에 얼마라는 계산이 아니라 그 양과 목자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말로 풀어서 현대화 시켜서 설명하자면 양을 찾아서 어깨위에 메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멧돼지 잡은 것처럼 맨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 메었으니 이것은 양으로 하여금 편안히 쉬게 하기 위한 동작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이 나옵니다. 동네사람을 향해 말합니다. “어이, 여러분!” 많은 동네사람들이 빌라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습니다. “무슨 일이야?” “저녁 먹었어?” “아니.” “조금 이따가 우리 집으로 모두 모여!” “왜?” “잔치를 하려고.” “무슨 일이 있어?” “아, 잃어버린 이 양을 오늘 찾아서 내가 너무 기뻐. 저녁 때 모두 모여. 내가 한 턱 낼게!” 설마 그 양을 바비큐해서 대접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 한 마리 얼마라고 그 빌라에 사는 동네 모든 사람을 다 불러 모읍니까? 너무 많이 불러서 소 한 마리를 잡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양 한 마리 찾은 것은 너무 기뻐서 소 한 마리 잡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 목자의 마음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청년이 와서 “전도사님.” “왜?” “저는 요새 하나님이 너무 불쌍해요.” 그래서 “말이 되냐?” 하니까 “아니,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 구원해서 뭐 덕 볼 것이 있다고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차대조표가 있다고 칩시다. 이쪽은 남은 것이고 이쪽은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들을 구원해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한 것 대변에 들어가겠죠?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서 33년 동안 고생하며 살게 하신 것 차변에 들어가겠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도 마이너스로 들어갑니다. ‘똑똑똑’ 들어갔을 때 “나의 구원의 대차대조표는 하나님에게 분명히 남는 장사였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실 분 손들어 보세요. 어느 교회 갔더니 여러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이 계속 조시던 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구원하신 것은 백번 생각해도 하나님에게 남는 장사였다.’ 손들어 보세요. 다행이 없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화) 저는 50년 동안 개를 안 키웠습니다. 개가 싫어서가 아니라 개를 너무 좋아했는데 몇 마리가 내 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 그다음서부터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과 인연을 맺고 헤어지는 것도 괴로운데 내가 무슨 개새끼와 또 인연을 맺어서 그 상처를 받으랴 그리고 50년 동안 안 키웠고 우리 애들이 애 좀 키우자고 사정하는 대도 우리부부가 반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이제 손자손녀 데리고 공부하러 떠나고 나니까 딸 하나 달랑 남는데 맨날 새벽에 직장 갔다가 밤늦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딸이 한 20년 동안 졸랐습니다. 개한마리 키우자고 해서 그러면 “키워봐라.” 하고 우리 집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개를 데려왔습니다. 요만한 말티즈입니다. 한 달짜리 데리고 왔는데 지금 이제 한 8개월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너무 귀엽습니다. 제 딸이 어렸을 때에는 아빠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사춘기가 된 다음부터 아빠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짝사랑했습니다. 늘 백화점에 가서 ‘우리 딸한테 무슨 선물을 살까’ 그러다가 손녀를 낳고 나서는 유아용품 코너에서 ‘우리 손녀한테 무엇을 사줄까’ 손녀를 낳으니까 너무너무 귀엽고 연애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손녀도 가버리고 나니까 요새는 애견용품 센터 앞에서 기웃거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너무 귀엽습니다. 요새 우리 집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웃음꽃이 활짝 폈습니다. 그러더니 우리 집사람이 엊그제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나는 솔직히 그렇게 오래 예수를 믿었지만 스바냐서에 나오는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그 말이 자기는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런데 이 강아지를 키우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겠다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온지 딱 한주가 되니까 대소변을 가리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우리 집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가장 자기하고 오래 있어주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막 똥을 누다가 우리 집사람이 들어온 것입니다. 막 똥을 누다가 주인님한테 달려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용변 보는 장소는 정해져 있으니까 막 끙끙 거리면서 계속 똥을 떨구면서 아내한테 달려오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아유, 더러워.” 그랬을 것인데 그것을 보면서 너무 귀엽다는 것입니다. 저렇게 똥을 떨어뜨리면서 주인이 좋다고 막 꼬리를 치며 달려오는 것입니다. 저도 그 개를 기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예화) 텔레비전에서 한번은 뭐가 나왔냐면 모란시장이 특집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 아시죠? 개는 가축도 아니고 소고기가 돼지고기처럼 취급을 안 합니다. 그래서 그냥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잡아서 팝니다. 도축장이 없습니다. 뒤에서 전기로 푹 지져서 찍 하고 죽어버리면 세탁기 통 같은데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막 돌면서 털이 빠집니다. 그것을 토치로 확 구워서 큰 칼로 뚝뚝 잘라서 1킬로에 4000원씩 팝니다. 보신탕 장사들이 그걸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얘네들은 다 압니다. 저쪽 밑에서 이미 피냄새가 다 납니다. 같이 있던 동료가 하나씩 끌려가서 크악 거리고 죽는 소리가 다 들리고 그 냄새가 다 나는 것입니다. 이 개들이 막 공포에 절어있는 그 얼굴로 자기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강아지 이름이 코코 인데 이 강아지를 끌어안으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강아지와 모란 시장 좌판아래 있는 강아지는 얼마나 다른가.’ 그러면서 한 동안 눈물이 막 납니다. 13년을 산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개를 끌어안고 온지 한 달 되었을 때 정이 들면서 이 강아지가 불치의 병이 걸리면 내가 얼마까지 지출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냥 난 살릴 것 같습니다. 그게 얼마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러나 그런 계산을 할 수가 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우리를 위해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무슨 심부름을 했겠어요? 말썽만 계속 부리지 그런 데도 댓돌위에 있는 모든 신발을 물어다 거실에다 종류대로 펼쳐놓습니다. 어떤 것은 못 찾게 아예 못 찾게 감춰놓습니다. 그래도 너무 귀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자체가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용적 사랑과 목적적 사랑이 있습니다. 유용적 사랑은 자기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적 사랑은 대상의 특징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탁월성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워낙 뛰어난 박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사랑 성품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게 목적적 사랑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이 이 시인을 사랑하시는 것을 시인이 깊이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불러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당신 자신의 박애성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에 감화를 받고 그런 박애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유용적 사랑에 대해서 일평생 잊히지 않는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예화) 자매가 있었습니다. 어떤 형제가 대시를 합니다. 사람도 괜찮고 신앙도 있어 보이고 집안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혼을 결심하기 전에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그럼. 당연히 사랑하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사랑해?” 이렇게 물었을 때 정말 결혼하고 싶으면 “나도 몰라.” 그렇게 말해야 정답입니다. “그냥 네가 좋아.”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좋아?” 그런데 “그냥 좋아” 그래도 “이유 없어?” “너희 아빠가 부자잖아.”라고 답하면 그게 유용적 사랑입니다. 그럼 유용적 사랑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하나님조차도 그런 식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이제 하나님은 이 시인에게 목자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을 가지고 당신 자신의 박애 때문에 이 시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언 약적 사랑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두 번째로 이 ‘목자’라는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매우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서부영화를 보시면 말들을 방목합니다. 말들을 놓아기르다가 저녁때가 되면 목동들이 말을 휘달리면서 채찍으로 혹은 총으로 위협을 해서 말들을 한곳으로 몹니다. 그러면 말들이 미친 듯이 달리면서 한쪽으로 향하고 그리고 목장으로 들어가고 문을 잠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게 몰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양은 우선 지독한 근시입니다. 그래서 한 이삼 미터밖에 못 본답니다. 나머지는 눈 나쁜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는 것처럼 보인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길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는데 돌아온 양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양 자체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궁금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 혹은 더 넓게 우리 인간을 비유하실 때 수많은 짐승가운데 하필이면 양에다가 비유하셨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수많은 짐승이 있는데 구약부터 신약까지 한결같이 우리를 양떼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그 양이 매우 훌륭한 짐승이냐 하면 사실은 다 사실을 뒤져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거기에 무언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방어기제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예를 들자면 남이 공격해올 때 물어뜯을 수 있는 강력한 이빨, 그담에 도망갈 수 있는 엄청나게 빠른 다리, 그다움에 심지어 그렇게 달려갈 능력이 없으면 순식간에 자신의 색깔을 변화시켜서 주변의 풀이나 나무색깔과 똑같이 만들어 버려서 자기를 은폐해 버리는 카멜레온 같은 짐승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도저히 능력이 안 되면 고슴도치같이 온몸에 털이 돋아서 완전히 감싸버리면 누구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간 치사하긴 하지만 방귀를 뀌어서라도 웬만한 짐승들은 기절을 한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답니다. 자기의 애완견에게 뒤에다가 강력한 가스를 발사했답니다. 그런데 개가 졸도했답니다. 그렇게 못된 애들도 있습니다. 세탁기에다 넣고 돌리고 한 나쁜 놈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양을 생각해보세요. 빠른 다리 양 절대 안 빠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빨 무슨 이빨입니까? 그것은 씹어 먹기 위해서 어금니가 발달된 이빨이지 양이 누굴 물어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리고 임팔라라고 아십니까? 자동차 말고 임팔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체구가 작고 뿔이 60센티에서 70센티 있습니다. 임팔라가 사파리에서 다큐멘터리에서 보았습니다. 사파리에서 풀을 뜯고 있는데 너무 배고픈 사자가 접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람 반대방향으로 항상 서서 다가가서 사정거리 안에 딱 들어오니까 미친 듯이 질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임팔라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미친 듯이 도망을 가는데 도저히 도망갈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는 사자를 향해서 몸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부딪혀버렸더니 임팔라의 뿔이 사자의 겨드랑이로 들어가서 등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함께 둘이서 뒹굴었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이 뿔을 뽑고 임팔라는 도망을 갑니다. 사자는 그 때 그 상처가 있고 정확하게 2개월 후에 죽습니다. 이만한 짐승에게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빠르지도 않고 이빨도 없고 눈도 안보입니다. 뿔이 있는데 뿔은 무엇에 쓸려고 만들었는지 우리가 봐도 이해가 안 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미학적 디자인입니다. 만두처럼 딱 말린 것이 딱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양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처음부터 양은 혼자 살수 없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으며 인간에게 유익을 제공하고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창조된 짐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짐승중 양을 탁! 찍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야생 양,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의 동물이 산양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추해 보면 정확히 인간의 품을 이탈했거나 이렇게 하면서 산양이 된 것인데 결국 왜 죽느냐면 포식동물들을 피해서 계속 위로 올라갑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많은 거리를 여행을 해야 합니다. 위험한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양의 운명합니다. 그래서 메시지는 아주 명확합니다. 그것은 인간 너희는 모든 동물위에 탁월한 이성과 영혼 정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권능이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더 비독립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직 이해가 안 되었습니까? 보세요. 개가 아무리 영리해도 자신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개를 본적 있습니까? 돌고래가 아무리 영리해도 사춘기에 방황을 이기지 못해서 목을 매었다는 돌고래를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기억하세요. 연세 드신 분들은 제 이야기에 실감을 하실 것입니다. 좀 더 인생을 사시면 인간이 저렇게 살아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왔구나.’ 거기에 위대함을 느끼는 때가옵니다. 그게 인간이 이제 사람이 되는 때입니다. 철이 드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제일 싫어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힘 믿고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더욱이 돈 때문에 씩씩해진 사람 권력 때문에 용감해진 사람 미모 때문에 누구도 의존하지 않고 자만해진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아주 예뻐지는 때가 두 번 있습니다. 그게 언제냐 하면 하나님 사랑으로 꽉 찼을 때 두 번째는 자기 사랑에 대해서 가슴을 찢으며 회개할 때입니다. 그때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혼자 힘으로 씩씩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시고 때로는 그 사람이 돈 때문에 씩씩하게 살면 하나님이 그 돈을 거두어 가셔서 씩씩해지지 못하도록 만드시고 권력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자신이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 권력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서 자신을 도저히 스스로 의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자신의 신뢰를 내려놓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로운 마음은 도저히 자신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매 순간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깊어지고 길어집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마음은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교회에 가장 소중한 재산은 건물이나 학위를 받은 목회자나 예배당의 크기나 더욱이 그 교회에 사회에 유력한 인물들이 출석 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한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자산은 많은 성도들이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려서 어린아이처럼 그 분을 의지하는 마음. 그게 교회에 가장 소중한 재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산을 두루 살피며 지금도 그렇게 절대 의존의 마음으로 당신을 의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향합니다.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의 찬양에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목자라는 이 단어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얼마나 인격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지만 뒤편에 보면 이런 의미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번역은 잘못된 번역을 성경이 계속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쉴만한’ 이라는 번역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이렇게 번역을 안 합니다. 이 원문은 히브리어로 ‘네메노오트’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직역을 하면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그런 뜻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양은 두터운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에 빠지면 물을 그 털이 모두 흡수하기 때문에 헤엄을 칠 수 없습니다. 헤엄하고는 거리가 먼 짐승입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홍수가 어마어마하게 납니다. 민둥산이었기 때문에 홍수가 어마어마하게 나면 우리는 그 강둑에 서서 떠내려 오는 수많은 가축들을 보았습니다. 소는 헤엄을 잘 칩니다. 돼지도 물에 빠져죽지 않고 잘 헤엄칩니다. 닭도 안 빠져 죽습니다. 오리는 물에서 원래 물에서 노는 짐승입니다. 개도 헤엄을 잘 칩니다. 고양이는 물에 안 가라앉습니다. 물론 이제 멀리 가면 지쳐서 가라않지만 그러나 금방 빠져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은 물에 들어가자마자 깊이 가라앉아버립니다. 그래서 이 양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움직이는 물은 못 마십니다. 공포 때문에. 그러면 목자가 어떻게 하냐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을 양떼를 위해서 돌멩이나 풀뿌리 큰 것을 갔다가 댐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움직이던 물이 댐에 막히면서 멈춥니다. 그때에 움직이고 흔들림이 없이 댐에 딱 갇혀있는 물. 그게 바로 히브리어 본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안 되고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양떼들이 걸어와서 그 물가에서 물을 먹으며 메마른 목을 축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수가 된 다음에도 그 교회에서 몇 년을 더 봉사를 했습니다. 그 때에 그 교회는 유난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다 스카이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절반이상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학생이 있는데 지금 서울대 교수님으로 계십니다. 하루는 예배가 끝났는데 저 뒤에서 어느 집사님하고 길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 선생, 왜 그래?” 그랬더니 자기아들 공부 되게 못한다고 안한다고 집사님이 속상해서 나한테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래.” 그랬더니 뜬금없이 얼굴도 굉장히 선한 청년이었어요. “그런데 전도사님. 이상한 게 있어요.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할까요?” 진심으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있었더니 “저는 이해가 잘 안 돼요.” “왜?” “어떻게 일부로 노력하지 않는데 공부를 못할 수가 있어요?” 웃으시는 분들은 상당히 학교 다닐 때 문제가 있으신 분들입니다. 나는 공부 못하는 게 너무 이해가 잘되었기 때문에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할 때까지 맹세코 단 하루도 학교 다니는 게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엄청난 학습 지진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했고 신학대학 다닐 때 안 그런 것 같았습니다.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도 아니었습니다. 학교 박사과정까지 다 끝나고 그 다음에 혼자 공부하면서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 학습지진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뭐였느냐면 이 나라 교육제도가 하여튼 더럽게 나한테 안 맞았던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를 되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원 없이 공부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자꾸 웃으셔서 내가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말하는데 제가 제 서재를 갖고 있습니다. 책이 6만권이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녀들이 공부 못해도 “아유, 병신.” 그러지 마세요. 절대 그렇지 않고, 그 아이가 외국에 보내면 두각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안 맞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여기서 안 맞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 못하는 모든 사람이 다 교육이 안 맞았기 때문이 아니고 원래 이렇게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데 저는 학교로부터 멀어질수록 공부가 잘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공부 잘 될 때는 학교 다 때려치우고 혼자 앉아서 공부할 때가 제일 잘 되었습니다. 지금도 지난주에도 아프리카에 외국인 목사들이 저를 불러서 가서 강의하고 왔습니다.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부릅니다. 항상 하고 학자들도 만나고 합니다. 왜 이 말씀을 들이냐면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난 이해가 되게 잘되는데 너는 왜 안 되냐?’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체질상 고3 때도 8시간을 안자면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학원은 물론 다닌 적이 없답니다. 무슨 신문에 나오는 기사 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시험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운전면허를 포함해서 한 번에 붙지 않은 시험은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도 시험에 떨어진 사람이 어떤 심리 일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답니다.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나한테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아니 전도사님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습니까?” 책에 다 나오고 모르는 것은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가르쳐주는데 왜 공부를 못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안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대화가 안 되었습니다. 속으로 ‘잘났다.’ 그러고 말았습니다. 한두 달 지났는데 굉장히 우울한 얼굴이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우울해 했더니 “전도사님, 저 살맛이 안 납니다.” 너무 공부만 해서 몸이 약해져서 그래서 학교 옆에 있는 테니스 학원에 갔더랍니다. 가르쳐 주더랍니다. 한 일주일 배웠는데 어느 날 코치가 오더니 신경질을 내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못하냐고 내가 7년 동안 여기서 가르쳤는데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 처음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못하냐고 교본에 다 나오고 모르면 내가 가르쳐주는데 그때 생전 처음으로 ‘아, 안 될 수도 있구나. 공부도 이렇겠구나.’ 정확하게 맞을 것 같은데 안 맞더라는 것입니다. ‘아 애들도 할 것 같은데 안 되는 애들이 있겠구나. 아 그렇구나.’ 그것을 자기가 깊이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이제 겸손해졌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큰 맥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며 인도하시는지는 우리 모두 각 사람의 지문과 같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획일화 시켜서 그것을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방법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가 우리를 그렇게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고 귀를 기울이고 지문과 같이 우리에게만 꼭 맞는 방식으로 우리를 향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그렇게 우리를 돌보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대다수는 엄마에게도 그런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런 모든 연약함을 알면서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이 시인은 그렇게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기는 마지막 말이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나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없습니다. 모자라는 것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결핍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남겼으면 그래도 동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고백에 동의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새의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시인이요 문필가인 동시에 역사가 이었고 군인이었고 시인이었고 정치인이었고 그리고 탁월한 전략 전문가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시없을 위대한 왕이었고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았던 이스라엘의 여러 왕은 여로보암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리고 신실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왕들은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고 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하고 하나님을 의미하는 열 왕의 표준이 되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이 사람은 모자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결핍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략히 말씀을 드리고 마칩니다. 그는 이새 집안의 한 아들이었습니다. 엄마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옵니다. 아빠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윗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못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서 증명이 됩니까? 사무엘이 주님의 계시를 받고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삼상 16:2) “이새의 아들 중에 네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자가 있으니 가서 기름을 부으라.” 그러자 이새가 자기의 아들들을 모두 데려왔습니다. 사무엘은 그 사람인줄 알고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이집에 가라고 했는데 이제 더 이상 아들이 없습니다. 물었습니다. “너희에게 아들이 이뿐이냐” 했을 때 이새가 “하나 더 있네요.” 그리고 겨우 생각난 자식이 다윗이었습니다. 형들에게도 사랑을 거의 못 받았습니다. 형들이 전쟁터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 때 형들은 독한말로 쏘아붙이며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그는 늘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로운 인생길에서 유일한 위로가 있었으니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신앙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공감조차도 할 의지가 없는 여자였습니다. 잘못된 결혼이었습니다. 그가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식들을 사랑했지만 자식들은 그를 버렸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새끼들 중 아무도 아버지의 믿음을 본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강간을 당했는데 가슴 아프게도 그 강간범은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큰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고자 했고 목숨을 나누며 나라를 건국했던 동지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 목에 칼을 겨누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많은 백성들은 발길을 돌렸고 흙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며 다윗을 저주하며 욕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반란을 당했을 때 법궤를 내려놓고 황망히 이방 땅으로 도망가야 했던 이 시인이었습니다. 자 지금 일어난 일중에 한 가지만 여러분들 중의 인생에 한 가지만 일어나도 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을 텐데 이 시인에게는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슴 아픈 인생 중에 정말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너무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어둠속에 헤매며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신음했습니다. 자 이 일중에 도대체 어떤 것들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하였을까요? 아마 시인에게 다시 한 번 네 인생을 리피트 해보겠냐고 할 때에 과연 그가 반복을 선택했을까요.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하였을까요? 자신의 삶의 상황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 비극적인 삶의 모든 상황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선하심 주님의 위대하심 그 주님의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어머니 같은 사랑 때문에 이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가슴 아픈 모든 사연을 접고 그 주님을 향해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을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니라
성실하신 주님
시인이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져도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탁월한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을 한손에 넣고 심부름꾼처럼 부리는 인생의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의 변화 속에서 만족을 구하는 사람들은 일평생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불행하고 잘되면 교만해서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신자의 가장 큰 기쁨은 나는 그 하나님의 손에서 기르는 어린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오늘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풍랑이 난 바다 한복판을 지나는 것 같아도 내 인생이 그 분의 손에 붙들려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 나의 선함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그 무한한 박애 때문에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과 폭풍 속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붙듭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우리를 그분이 버리실 리가 없다는 확신 그리고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희망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가분의 한 어린양으로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라고 하는 확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인격적인 신앙의 비결입니다. 노예처럼 두려움과 공포 게으름과 마지못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유 안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주님을 인격적으로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을 드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시편 23편 1절이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