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인간의 본질을 고치시는 예수님 (눅12:13-14) 1998.1.12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소유냐 생명이냐 (눅 12:15) 1998.1.13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1
3. 어리석은 마음의 생각 (눅12:16-18) 1998.1.14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4
4. 영혼은 무엇으로 사는가 (눅12:19) 1998.1.15 새해말씀사경회(새벽) 37
5. 영원을 준비하는 삶(눅12: 20-21) 1998.1.16 새해말씀사경회(새벽) 49
1. 인간의 본질을 고치시는 예수님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눅12:13-14)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어리석은 부자’라는 제목이 있고 주일 학교 때부터 참 많이 들어왔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는 우리가 웃어넘길 우화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부자는 어리석다는 그 간단한 사실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참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고, 또 신앙 생활을 하면서 참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지를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기독교 신앙의 진리들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비유가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무리 중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라고 요청을 하였더니 이 사람아 누가 나를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무리 중 한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무리가 누구였겠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 됩니다. 무리가 누구였겠습니까? 사실 본분에는 어떤 무리들이 있고 그리고 무리라는 집단이 어떤 집단인지 구체적으로 설명도 없고 또 무리 중의 한 사람의 이름도 나와 있지 않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 에수님께 나와서 이처럼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청구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 가까이, 그리고 늘 다니시는 곳마다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무리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박해하는 무리도 있었지만 그것은 여기의 문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예수님께 찾아와 존경 어린 경칭을 사용하고 예수님께 하소연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박해하고 핍박하려는 적대적인 무리는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수만 명이 함께 모여서 밟힐 정도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에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바리세인과 당시 종교 지도자의 말과는 같지 않는 어떤 충만한 권능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하고 성경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의 내용 자체도 그 시대도 흔히 들을 수 없는 참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증거 하시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말씀의 전하주시는 방식 그 자체가 매우 영적이고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감화력이 있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무엇인가 그 말씀을 거역 할 수 없는 어떤 강한 신적인 힘이 말씀을 전하는 갈피갈피에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던 방식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선택받은 자의 삶이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쳐서 그들을 살리기를 원하였지만 그들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정죄하고 멸망시키기를 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 이따금 부어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그 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종종 눈물이 글썽이기도 하셨을 것이며 종종 흐느껴 울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자 잃은 양과 같이 고생하고 유리 하는 그 당시의 많은 백성들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안타까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내용 가르치는 방식, 그리고 말씀을 듣는 자들의 대한 말할 수 없는 애정이 어우러진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은 매력이 있는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주변에 모였습니다.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밟힐 정도의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적도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고 회개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을 받는 것과 자기가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 사람되는 것은 단지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영화 한편을 보는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고 바꾸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저기에 무언가 있고 무엇인가는 다르다고 깨닫는 것과 감동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마지막에 목표하고 있는 우리가 변하는 것과 우리가 단지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인가를 느끼면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는 것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말씀을 듣고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는 진실하게 변화된 훌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그리고 무엇인가 깨달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께 여쭙는 이 사람이 바로 그 무리 가운데 말씀은 들으면서도 변화되지 못한 그러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리 중 한사람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이 내 형을 명하여 나와 유업을 나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동생의 형이 아마 아버지가 주신 유업을 율법이고 뭐고 상관없이 다 가로채었고 그리고 그 형이 아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도 다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동생이 형에게 예수님이 명령을 하여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몫을 돌려달라는 간청이었을 것이다라는 견해가 있고 두 번째는 그것이 아니라 신명기에 보면 아버지가 죽으면 장자에게는 두 배의 몫을 주게 되어 있는데 그 유업을 나눌 대 형에게 두 몫을 가졌는데 이 동생이 예수님께 나와서 형이 은혜를 받은 것 같으니 우리형에게 명령을 하여서 재산을 똑같이 가지도록 좀 분배를 하였으면 하고 요청하고 있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후자가 사실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라면 형에게 광포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예수님께서 형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 오히려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동생이 뭔가 예수님의 권위를 빌어서 차지하려는 몫이 합법적인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후자가 훨씬 사실에 가깝지 않는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 동생이 분수 이상의 재물을 탐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동생이 예수님께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청을 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그런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을 요청을 하고 있을 정도이니 탄원하고 하고 있는 이 동생이 예수님을 우선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예수님을 잘 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현장에서 가르침을 받고 병든 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러한 능력을 행하는 모습을 보았더라고 하여야지만 문맥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형에게 명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는 세속적인 권한은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저 갈릴리에서 온 선생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형에게 명하였을 때 형이 들어줄 거라고 동생이 생각하였다면 형도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 사람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다면 자기가 관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수님의 말씀의 현장에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이 진리를 듣는 그 무리들 중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어쩌면은 그 도가 특심해서 우리형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는 인물일 수 있다는 느낌을 우리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우선 성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말씀하실 때 커다란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속에는 율법을 능가하는 그런 권위 권세 같은 것이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이 말하시면 율법에 그렇게 나와 있어도 우리형이 승복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는 무리들 속에 속해 있었고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경칭으로 부르고 있고 그리고 또 자기형에 대한 예수님의 감화력을 믿을 수 있을 정도까지 그래도 신앙에 접근한 사람인데 예수님의 분명한 교훈, 권위 있는 가르침과 그 교훈을 듣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자비나 마음과 인자한 성품으로 자기들을 가르치는 아가페의 사랑을 보면서 깊이 깨달았을 텐데 이 사람은 여전히 그러한 감화력과는 거리가 먼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감화력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인가 덕을 입어서 재물을 더 얻을 수 없을까 라고 생각을 했다 라고 하는 사실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이 얼마나 본질에 접근하기가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교회를 다니고 남들이 여러분들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수요일마다 금요일마다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니까 믿지 않는 가족들은 여러분들을 보고 예수에 미쳤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남들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여러분들이 정말로 예수에 미쳤는지 그러하지 않는지는 남들이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혹시 여러분들이 이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의 교훈에 반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참 진리를 들을 때 화가 난다든지 박해하고 싶다든지 고발하고 싶다든지의 그러한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기적도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새로운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까이 하면서 사는 것이 뭔가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는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예수님의 순수하고 정결하고 죄인을 변화시키는 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명한 메시지가 이 사람의 마음속에 빗겨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쓰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닌데 정말 참 신자가 되는 것은 이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참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훈이 기독교의 진리가 자신에게 다가와서 빗겨 가면 안됩니다.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에 대해서 곧장 날아와서 그것을 뚫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신앙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유업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동생과 같은 처지에서 사는지를 모릅니다. 언젠가 봄에 남쪽에 집회를 가는데 벚꽃이 바람에 날려서 떨어지는데 차를 타고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꽃비가 내리는데 신기하게 꽃잎이 차에 유리에 와서 붙을 것 같은데 유리창 앞에까지 꽃잎이 날아와서는 차의 곡선을 따라서 떨어져서 차는 깨끗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런 상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도 저항감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도 아닌데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신앙의 본질에 들어가서 꽂혀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마치 달려가는 자동차의 유리창을 거쳐서 지붕위로 날아가는 꽃비처럼 그렇게 훌훌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날아오다가 본질적인 면에서는 부드럽게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고 눈물도 흘리고 땅을 치며 통곡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껍질을 바꾸는데 기여할 뿐이지 이 본질에 속하는 문제는 건드리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아무리 오랜 세월 예수님을 믿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말씀의 경험들을 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쓴 사람들에게는 이 신앙의 연초라는 것이 대단히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1년 동안 그렇게 산사람과 10년 동안 산 사람이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심겨지는 거룩한 생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선별된 생활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자신의 본성이 변하게 되면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그리움, 왕년에 놀던 그리움들의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정말 변화되면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전의 관심사와 예수 믿은 후의 관심사를 체크를 해 보십시오. 그래서 만일 그것이 동일하거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의 본성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의 눈빛을 보았고 그리고 그 음성을 들었고 그리고 권위에 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만일 자신이 변화되었다면 그는 적어도 이런 식의 요구를 예수 그리스도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보다 더 신앙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접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런 경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신앙의 경험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한번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고 감탄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만하면 안됩니다. 예수를 믿고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길은 끊임없이 걸어가야 할 싸움의 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정결케 하고 거룩하게 하면서 그것을 방해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싸우고 고치고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아 가야지만 우리가 비로소 예수 믿는 사람 비슷한 길을 걸어 갈 수 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태까지의 신앙 생활의 뒤를 돌아보십시오. 신앙의 발자국들이 어떻습니까? 비교적 똑바른 길을 따라서 가끔 옆으로 한 발짝 두발 짝씩 나와 있는 경우는 있어도 대체로 비교적 똑바른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아니면 뒤를 돌아볼 때 주님이 걸어가라고 걸어주신 그 금을 밟은 적은 가끔 이고 줄이 쳐져있으면 한쪽으로 휘돌다가 한번 금 밟고 지나가고 이쪽으로 휘돌다가 한번 금 밟고 지나가고 더 멀리 가버리는 이런 신앙의 길을 걸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신앙길이라고 말하지 않고 불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주로 하다가 가끔 불 신앙을 하는 것과 불 신앙의 길을 휘돌다가 가끔 신앙의 길의 금을 밟은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에 속하고 게십니까? 지금 이 시간도 신앙의 길을 떠나서 먼길로 원을 그리면서 휘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제 그런 식으로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시간에 초를 태우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의 초가 다하면 여러분의 생명의 촛불도 끊어질 것입니다. 많이 시험해 볼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저것 해 볼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참된 신앙의 길을 곧장 걸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본질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관심사가 변화 받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관심사는 여러분들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보여주고 있습니까? 정말 물질보다는 생명이 우선 이고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관계가 우선이 되고 있습니까?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이 중요하고 여러분의 행복보다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에 요긴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뭔가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형통한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짐승같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난을 받더라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원이 여러분 밑바닥에서 울어 나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정말 예수 믿고 변화되었구나, 내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 내가 보았던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예수님의 크신 은혜가 정말 진실하게 내 마음, 내 삶의 본질을 변화시켰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누가 나를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삼았느냐’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서 분명하게 엿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해 자기 소관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세상의 관심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헤롯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동방박사가 와서 단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시뇨? 라고 물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왕인데 유대인의 왕을 찾으니까 그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다는 이가 나중에 자라서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혹은 운명의 약속으로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고 할 때는 영적인 유대인의 영적인 왕으로 오신 것인데 바보같이 이 사람들은 지상의 나라와 영적인 나라를 혼돈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마치 네로 시대에 자기가 불을 질러놓고 기독교인에게 둘러씌운 것과 동일합니다. 그 근거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 매일 모이면 불불 그러지 않느냐 그러니까 불을 질렸을 가능성이 많다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불과 물리적인 불을 혼돈한 것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에, 은혜의 세계에 눈뜨지 못한 사람의 한심할 정도로 어리석은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 사람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재물을 움직이시는 지휘관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재물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양심을 지휘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관심은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고치는 것이 주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본질적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매일 싸우고 난리를 피우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희들 그렇게 살려면 헤어져라 라는 말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일 싸우는 그 부부 중 한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심으로 혹은 두 명 다 예수 믿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 마음속에 예수님의 참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어떠하든지 내가 먼저 예수를 믿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의 사정은 다양합니다. 혹은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해서 혹은 시부모님에게 시달림을 당해서 그럴 수도 있고 병이 들려서 고생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곤고하고 괴로워서 의지 할 바가 없어서 교회 문을 두드립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은 불신자가 손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올 수도 없고 늘 울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음의 갈등이나 억압이나 이런 속에서 고민을 하다가 교회를 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올 때는 그렇게 왔는데 예수님이 그 사람 앞에 진리를 보여주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신앙을 그 속에 심기 시작하면, 은혜를 받고 신앙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세상도 없고 문제도 없고 그리고 여태까지 가진 그 문제도 없고 나를 고치시고 다듬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작아 보이고 자신이 여태까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커다란 문제에 부딪히는데 그것이 ‘아 내가 이 모습을 가지고 살았다니 주님 나를 고쳐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보고 자기 남편이나 주변의 사람이 ‘야 당신은 좀 고쳐져야 하겠다’ 라고 말하였다면 아마 살인 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주님 나를 고쳐 주시옵소서, 이 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본질적인 불행이 소유나 사람들과의 관계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고장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기 이전에 많은 불행한 일들이 대부분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면 나 때문에 라는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 제가 부족합니다 라는 신앙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착한 것이겠습니까? 무엇인가 신앙이 들어가기 시작하니까 자기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고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부 중 한 사람만 변화만 받아도 매일 지겹도록 바가지를 긁는 부인이 왜 그러한가를 생각하니까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신 이유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불행이 다가오고 고통이 다가오면 이전에는 누가 나에게 이것을 제공하였는가를 따지면서 범인을 색출해서 박살을 내어버리겠다 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내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해주고 싶어하는 말씀을 들리고 큰 환난 속에서도 그 환난의 차가운 비바람에 못지 않게 뜨거운 손으로 우리를 진흙과 같은 우리를 새사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본질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눈을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변화 받지 않고 소 갈데 말 갈데 방종한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뭔가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아 주님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을까요, 당신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보여주십시오 제 인생의 문제는 지금 행복해 진다거나 단순히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위기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가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깨닫지 못하면 고통을 가중시켜서라도 제가 깨닫는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불행과 고통이 주님께 영광으로 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그런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돼지보고 아리아를 부르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오페라의 가수가 되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질이 바뀌고 나면 그러면 그런 눈이 생기는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큰 재앙이 다가온 후에 부인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하니까 그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여 어찌 그리 말하느냐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또한 가져가시지도 않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결국은 아무리 신앙 생활이라고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교회를 다녀도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시커먼 탈 쓰고 하나님 앞에 대들다가 이제는 하얀 탈을 쓰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껍질만 바뀌고 속 사람은 바뀌지 않았는데 정말 행복해 질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속 사람이 완전히 새로워져서 주님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손이 우리를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 손을 푹 집어넣으셔서 우리의 잘못한 본질적인 문제를 휘집어서 우리의 영혼의 내장이 새롭게되는 진정한 변화가 있게되면 행복해 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신앙의 문제를 이렇게 따집니까? 여러분 혹시 말씀 듣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때 상대방이 왜 그렇게 복잡하냐? 뭘 그렇게 따지기를 좋아하냐 아무렇게나 믿으면 되는 거지 그런 말을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가 자꾸 옳은 것은 무엇이고 그른 것은 무엇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고 어떤 것들은 참된 것이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고 어떤 것들은 깨끗한 것이고 어떤 것은 불결하다라는 아무 피곤할 정도로 마치 영어권의 표현으로 머리카락을 하나를 가라놓는 것처럼 그렇게 참된 것과 그른 것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참으로 믿을 만한 것과 버릴 것을 따지듯이 파고들면서 구분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여야 지만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순결한 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국이나 죽 같은 것을 먹다가 보관할 때에 애들이 뚜껑을 열면은 질색을 합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잘 끓였어도 뚜껑을 한번 열면 그 사이에 거기에 뭔가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식이 부패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본질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런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사람을 .예수님을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기적도 보았고 자비로운 음성도 들었지만 그러나 자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관심사가 여전히 지금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달았습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아셨습니까? 그러나 이전에 사랑하는 것을 지금도 사랑하십니까? 그래선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은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좋아 할 수 없었던 것,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좋아하여야 하고 예전에 싫어하는 것도 예수님 때문에 너무 좋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 때문에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낮아지는 것을 좋아하고 예수님 때문에 겸손해 지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그런 신앙 생활을 우리가 해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의 욕망은 무저갱과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쓸어 넣어도 계속 배고프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면서 삶의 비애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잘 사는 나라도 아닌데 아버지가 딸에게 생일 선물을 커다란 비행기를 선물했는데 그러니 비행기를 준다고 해서 그 아이가 그것을 몰수 있는 아이가 아니니까 아마 사람을 조정사 부조정사 등을 포함하여 5 사람을 더 주었을 것입니다. 800억 정도의 비행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네의 어느 한 갑부는 한 여배우에게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 1억불을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 한 적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쓸어 넣어도 쓸어 넣어도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 필요를 채워주면서 만족을 시키는 것은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주셔요 주셔요 할 때 실컷 주어서 주심으로써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망가진 부분을 본질적으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행복은 성적순도, 물질 순도 얼굴 잘 생긴 순도 아닙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본질을 고치시니까 인간이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완전한 만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인간의 내면을 고치시는 일없이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시는 것으로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왜 그럽니까? 인간이 잘못된 망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정말 하나님 앞에 고쳐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야지만 그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잘못 믿으면 도저히 행복해 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본질이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예전의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상 앞에 가서 무엇 무엇을 달라고 빌던 사람이 이제 예수 앞에서 고개 숙이고 찬송 부르고 비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곳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고치시려고 오신 것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때에 우리는 물질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우리는 돈 몇 푼을 쥐어주고 쌀 얼마를 주어서 그 사람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두신 자비심 때문에 우리가 남을 돕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저 사람의 궁극적인 불행의 원인은 돈이 없거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아니라, 혹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궁극적인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 있던지 예수 잘 믿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나누거나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내면을 고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음으로 고쳐서 새 사람 만들어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을 치료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불행이라는 것은 환경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환경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불행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는 이제껏 청소년이 타락하고 나쁜 짓을 하면 부모에게 문제가 있는 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앙케이트하고 조사를 해보면 그런 상식을 깨뜨립니다. 타락한 아이들의 35%는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의 아이들입니다. 그러면 왜 그럽니까? 그들 속에 있는 타락한 경향이 그들을 어두운 곳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물건을 나누고 재판장의 역할을 하는 것들은 세상의 사람, 세상의 것들도 많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쳐서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아서 새 사람되게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고통 하는 영혼들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전하는 전도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고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에게는 그 신앙이 참 그리스도의 신앙인가 그가 정말 예수를 말미암아 진정으로 변화되었는가하는 이 문제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제 참된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그것은 바로 이세상의 있는 그 무엇이 해 줄 수 없는 것 우리의 인생에 근본적으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망가진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고 새롭게 해서 그래서 불행의 많은 궁극적인 뿌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는 이 일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인가 정말 이제 나는 이전의 예수님을 몰랐을 때의 관심사와는 다른 관심사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를 주님에 의해서 온전히 고침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우리에게 여기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형의 재산을 나눠 달라고 하는 몰상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신자에게는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한 탐심이요 탐욕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곳에는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속에 있는 더러운 욕심이나 탐욕이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되면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 속에 부은 바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들인지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여러분들 속에 있을 때 주는 만족이 세상의 물질이나 세상의 탐욕의 대상이 여러분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를 본질적으로 고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대충 때우는 임시 방편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수술을 필요로 합니다. 소망도 거듭나고 우리의 삶에 향한 꿈도 거듭나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태도도 다시 바뀌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 생활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엄숙한 것이고 얼마나 심각한 것이고 내 인생의 모든 성패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올바르게 바라고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소유냐 생명이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당시에 유대인의 선생 즉 랍비들은 아주 공공연하게 민사상의 문제에 대해서 개입을 했었 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가져와서 물어보면 답을 내려주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이런 답을 내려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무슨 질문을 받든지 혹은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지 항상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궁극적으로 하시고자 하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으로 연결을 짖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이 세상이 그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로 말미암는 진정한 구원이 사람과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복음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그 일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우리의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참 많이 느낍니다. 목사만 그러는 것은 아니라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잘 신앙 생활만 잘하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돈 많고 형통한 사람보고는 우리는 ‘아 저런 사람은 하나님 믿으면 잘 섬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보면 ‘아 저런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지만 구원받고 축복을 받을 텐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상하게 뒤틀린 사람을 보고는 ‘아 저 사람은 예수를 믿어야지만 주님을 만나고 새 사람되어서 고침을 받을텐데’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서 만나든지 어떤 동기에서 만나든지 항상 생각은 저 사람을 어떻게 예수 믿게 만들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그런 생각 속에서 사는데 하물며 우리보다 훨씬 더 이세상의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셨던 예수님께서 얼마나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일들을 하고 싶으셨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누게 하소서’라는 요구 자체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더 받을 생각을 하고 나왔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죽어 있는 그 영혼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치 자신은 그런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관심이 바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덧붙여서 말씀을 드리면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그 교회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 가 이렇게 사람을 근본적으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깃들여야 합니다. 금과 은이 없어도 이렇게 사람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교회는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과 은밖에 없고 근본적으로 사람을 고칠 수 있는 힘이 교회에서 사라져 갈 때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처럼 자신 속에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지식이나 도덕이나 상식 같은 것으로 고칠 수 없는 망가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받아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전파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가지고 패역한 사람이 이제 반쯤 수리된 채로 돌아다니니까 이제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질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 망가진 것은 예수를 믿어서 망가진 것이 아니라 패기처분 직전에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 그 예수 믿는 신앙이라는 공장에서 수리를 하려고 하려는데 자기가 수리 안 받겠다고 하면서 그 공장을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예수님을 책임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잘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잘 살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잘 살지 고치다만 차를 끌고 나왔는데 어떻게 매연이 안 나고 어떻게 똑바로 가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실하게 고치려고 노력하고 또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은 영혼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가 망가지고 패역된 부분들을 하나님 앞에 고치고 치료되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생이 예수 믿어서 행복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쳐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생명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아주 훌륭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다 망가져서 인생 막장까지 갔던 폐차와 같던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정비 공장에 들어가서 예수님 만나고 본질이 변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니까 완전히 새차같이 고쳐져서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고쳐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집이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비가 계속 세어서 앞의 베란다를 때고 유리창을 넓혔습니다. 여러 집이 그런 공사를 하였는데 우리 집이 제일 잘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막 내려와서 우리도 그런 공사를 어떻게 할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잘되면 자기도 그런 고침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한 전파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신앙의 세계에서 신자의 가장 커다란 의무가 두 가지인데 그것이 바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웃을 섬기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고 하는 이 존재가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을 형상이 이루기까지 하나님이 우리가 거룩해지고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자기를 희생하고 버려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함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됩니까? 또 날마다 이 모난 돌멩이같이 말씀에 의해 깎여지고 다듬어서 주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기쁨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그 두 가지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인데 그런 목표 자체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도 않고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목표를 좇아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고쳐지지도 않고 고쳐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망가진 채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낯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닮아 가는 기쁨이 있습니까? 주님을 마음을 날마다 본받아 가는 행복이 있습니까? 날마다 주님 닮기를 더 원하는 사모함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이제 성자에게나 묻는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본질로부터 멀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섬깁니까? 뭐 얼마나 주님을 섬깁니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희생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이전의 질문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비밀 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성품은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고침을 안 받으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자기를 낮추고 종의 형제를 입어서 죽기까지 복종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이 성품이 자신 속에 끊임없이 변화되어서 자신 속에 부어지는 본질적인 변화 없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헌신과 하나님을 향한 희생적인 사랑을 아버지 앞에 보이면서 살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본질이 고쳐진 것과 그리고 본질적인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이 그렇게 우울한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고 우울한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청산하지 아니하면 예수 믿기 대 때문에 행복한 삶, 예수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이런 생명 적인 연합과 기쁨 이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묻는 이 사람에게 이 사람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소유를 통해서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성패의 관건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에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생명의 조건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소유냐 생명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소유를 통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이 물질을 모으고 물질을 위해서 사는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나면 사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기는 무엇인가를 벌고 모으기 위해 몰두한 생애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의 뜻이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가 어떻게 하여야지만 내가 정말 거룩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하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교육을 받고 사회 속에 뛰어 들면서 돈을 벌고 물질을 모으는 일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여도 그 복음의 씨앗이 아름답게 자라기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세상을 향한 사랑과 그 이면에 깃든 염려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소유에 있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재물을 형으로부터 얻어내고 싶어하였던 것입니다. 형의 마음을 자신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위를 빌어서 형의 마음을 움직여서 형의 재물을 더 많이 얻으면 자신이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이 사람이 평소에 관심도 갖지 못하였던 한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참된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끔 신문에 나오는 유엔 본부 건물을 기증한 사람이 미국의 로펠러라고 하는 갑부였습니다. 매년 기자 회견 시 기자들이 물어봅니다. 올해는 사업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조금 더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재작년과 비교 할 때 작년은 어떠하였습니까.? 조금 더 벌었습니다. 내년은 어떨까요? 조금 더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매년 같은 소리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고 한이 없습니다. 소유가 인생의 행복을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핍한 사람을 사랑 살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많은 것을 얻고 난 후 항상 넋두리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그때가 좋았는데 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결핍 속에 있는 사람들은 많을 것을 얻은 후에는 이전의 삶을 그리워합니다. 그것을 보면 확실히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임 없이 착시 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물질 자체가 소유 자체가 인간의 행복을 움직이는 커다란 원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물질 없이 는 살수 없습니다. 물질 없이는 한 발 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질 인간의 소유는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찾아가기 위해 필요한 필요조건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차를 타고 부산을 가는 데 물질이라고 하는 나를 목표인 부산까지 데려다주기 위한 교통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버스에 올라타서는 버스 자체를 타고 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가난하던 신학생 시절에 학교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 기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나하고 어떤 친구하고 버스편이 없어서 택시를 탔습니다. 한 친구는 강남이 집이고 저는 강북이 집이었는데 가는 길에 내리려고 같이 탔는데 차는 우리 집에 점점 더 가까워오고 그 친구 집에서는 더 멀어지니까 한 친구가 이럽니다. 내려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는데 그 친구 대답이 그래도 택시인데...라는 것입니다. 타는 것이 편하고 좋으니까 계속 타고 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 그 자체를 사랑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삶의 허망함을 하는 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다운 인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그 목표가 바르게 설정되어야지만 올바른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생명이 어디에 있느냐 생명이 존재하다라는 곳이 소유냐 명예인가 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소유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명이 소유나 명예냐 혹은 이 세상의 다른 것에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소유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생소한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에게는 생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형을 명하여 물질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이 세속적인 사람에게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사람은 거의 깨닫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목숨 정도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뒷편의 어리석은 부자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그 부자를 불시에 취해 가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인간의 목숨도 말하지만 사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그 자체는 아닙니다. 부자의 목숨을 하나님이 취해 가실 것을 말씀하시지만 사실 부자라고 먼저 목숨을 취해 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영혼을 취해 가려고 하실 때는 부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말은 그것을 포함한 훨씬 포괄적인 말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이 어리석은 사람에서 사람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생명이란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제껏까지 배운 성경 적인 지식과 신앙 적인 상식을 모두 동원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여 보십시오. 무엇입니까? 이건 단순히 목숨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신자의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말은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것은 단지 종교적인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 그래서 자기 맡은 일은 감당하는 이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전에 경험한지 못한 어떤 체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신앙적으로 허해지면 그런 것을 병적으로 갈구하게 됩니다. 저는 직접보지 못하였지만 신학교에 다닐 때 한 형제가 자기가 기도원에 가서 방언을 교습 받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방언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은사라고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교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은사이겠느냐 하면서 말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에서는 사람을 쭉 앉혀 놓고 가르쳐 주는데 할렐루야를 빨리 따라하면 방언이 떠진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어떤 신비한 체험에 몰두하기 위해 어쩔 줄 모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꾸 의심이 가니까 그런 식으로 무엇인가 증거를 찾아보려고 하고 그런 식으로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상을 받아 보려고 하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트 싸 가지고 다니면서 1단계 2단계 계속 공부하면서 지식만을 축적하는 것도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리고 단지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것도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한 18세기 청교도인 한 사람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이루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우리와 그리스도가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 신앙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출발은 거듭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이여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 부패한 심성 속에 영적인 생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그 원리를 심어서 그 원리가 주장하고 주관하는 삶을 살아가게끔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셨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시 말하면 예수 믿기 전 살아갈 때는 그냥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심지어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지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앞에 믿음으로 살고 선하게 살면 내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그러나 내가 죄 짓고 하나님을 떠나고 패역하게 살아가면 내 영혼에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는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고통을 느끼지만 훨씬 더 심한 것입니다. 여러분 불신자의 죄의식이 더 심각하겠습니까? 신자들의 죄의식이 더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거듭나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없을 때에는 세상에서 마구 살아갑니다. 물론 마음의 가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경미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담대하게 죄를 지으면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희의 자랑은 부끄러움이요 저희의 신은 배라고 말하였습니다. 배가 무슨 뜻입니까? 이곳이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부패한 욕망을 신처럼 모시고 몸의 모든 지체가 그 배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옛 삶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살다가 생명의 원리가 우리 안에 심겨지게 됩니다. 신적인 하나님의 원리가 우리 안에 심겨지게 됩니다. 그러한 생명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우리 안에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가책도 받지 않고 지나가던 일이 우리 안에서 아픔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고 잘 믿는 사람과 예수 안 믿는 사람이 함께 살면 정상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항상 세상으로는 손해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실컷 욕먹고도 가서 자신의 먼저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원수 맺지 말아라 용서하여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가서 잘못도 없는데 잘못하였다고 사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그렇게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부동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지배해 가는 방식을 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을 정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본질이 변화되어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기면서도 궁극적으로 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지배하고 신앙적으로 지배하는 힘이 있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배해 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어떤 때는 꿈을 꾸고 나거나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원인도 없이 불안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예전 같으면 어쩔 줄 모르고 근심하고 쩔쩔매거나 만나는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친한 사람에게 넋두리를 하면서 세월을 보낼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보냈을 사람인데 이제는 불안이 오고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그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많은 곳에서는 이 생명이 더 강력하게 역사 합니다. 그래서 원만한 것들은 모두 쓸어버리면서 강력하게 역사 합니다. 발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이 생명이 점점 점점 죽어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 창성하고 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희미해지고 늘 하던 기도인데 한없이 기도가 낯설어집니다. 존오웬은 아무리 뛰어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어느 날 잘못 살면 기도를 한없이 낯설게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죄는 죽이고 이 생명이 풍부하게 역사 하여서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라는 고백이 가능하여야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내 안에 풍성하게 사시니까 이런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합니다. 미움이 다가와도 이 생명이 죽음과 같은 미움을 삼킵니다. 고난이 와서 마음의 아픔이 와도 이 생명이 너무 크니까 이 생명이 아픔도 소망으로 바꿉니다. 좌절을 경험하면 그럴수록 우리 안에 생명 주시는 주님을 더 의지하면서 좌절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영적인 특성이 너무나 무시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태와 더불어 단절하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거저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는 삶을 다 살 수 있다라고 하면 성자들로 이 세상은 넘칠 것입니다. 알아도 아는 것과 실제 그것을 살 수 있다는 것과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도 그것을 산다라고 하나는 것은 별개입니다.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떤 원동력이 우리를 지배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차고 넘치면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차고 넘치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생명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을 피울 때 그 불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불을 무섭게 타는 것도 있고 꺼져 가는 것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은혜가 다 소멸되는 소진되어 가는 것 같은 그런 어려운 때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후 하고 불 때 불길이 다시 일어나듯이 생명이 우리 안에 다시 한번 소성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심령의 부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확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감격하게 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저절로 간단하게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말씀으로 말미암아 큰 생명의 은혜를 부어주셨어도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그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죽이느냐에 따라서 그 불이 금방 꺼져 버릴 수도 있고 계속 타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밭의 비유로 다시 비교를 하면 잠시 기쁨으로 받아 뿌리가 내리지만 곧 말씀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을 때 금방 마르는 뿌리이고 후자의 비유는 옥토에 뿌리는 씨의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명의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부어지면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서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의 신앙적인 결심과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결심은 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내 안에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없는 사람이 결심을 하면 그 사람이 부를 수 있는 것은 ‘내 결심 약하여’라는 찬송 한가지뿐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은혜를 받아서 그것이 자신 안에 풍성한 사람이 결심을 할 때에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풍성한 생명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생명의 은혜를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차이의 크기가 얼마나 크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살아간다면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와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 지능지수는 높고 좀더 많은 물질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지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른 바 없는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 속에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 마음속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의 원리가 심겨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거듭났지만 이 생명의 은혜가 충만하게 역사 하여서 물질적인 탐심을 넘어서셔 인생의 참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가 정리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속하든지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 마음속에는 생명이 없거나 생명이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삶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비극이란 사실을 주님이 지적해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올바른 것을 바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이 이모저모로 우리의 이끌어 가십니다. 직장도 주시고 때가 되면 우리의 지위를 높이시기도 하시고 우리의 꿈도 이루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더욱이 나아가서 자신의 생명과 이세상의 소유나 지위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입장에서 보시면 얼마나 어리석게 느껴지는 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일 하는 것입니다. 우린 안에 생명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생명이 우리에게 생명처럼 소중하게 느껴지고 있습니까? 그렇게 소중하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영적인 생명 하나님과의 관계에 생명을 자 담는 그릇이 육신의 생명이라면 그 그릇보다 소중한 것이 그 안에 담긴 진정한 하나님과의 생명인데 이것들을 하찮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언제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과 이 예수 안에 누리는 있는 생명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핍절하고 고통받는 삶을 늘 면하지 못하고 신앙을 통해서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 받는 복된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부어지는 영적인 은혜 생명의 풍성함들을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냐는 것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하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끔 산에 올라가서 나무 같은 것을 나무를 툭툭 치면 가지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나무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지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살아있는 나무는 그렇게 부서지지 않습니다. 이제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가지는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막대기로 딱 치면 부러집니다. 나무 자체는 부러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가지는 말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생명적인 나무와의 연합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풀을 베어보면 베어서 쓰러뜨려 놓으면 아직 베지 않은 풀은 초록의 생명의 기운이 있는데 베어놓은 풀들은 처음에는 베지 않는 것들과 구분이 없는데 한시간 두 시간 지나면 잘라놓은 것들은 잎이 마르면서 색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악인들의 형편에 대해서도 벤 풀과 같이 속이 마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적인 연합이 끊어지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그래도 기본적인 신앙이 있지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본적인 것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적인 은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고 생명적인 관계가 있을 때 거기에서부터 수액이 올라갈 때 기본이 있고 특별이 있는 것이지 그런 하나님을 떠나고 막 내린 신앙을 가지면 얼마나 인간이 막가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생명이 떠나가고 나서 이제껏 가지 자기가 가지고 살아왔던 상식, 그리고 신앙 생활 하면서 배워왔던 좋은 습관 이런 것들이 자신의 삶을 간신히 떠 받히고 있다가 그러다가 힘이 없으면 받히던 것들을 와르르 떨어뜨리게 되는데 그때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잘못되고 영적인 관계가 잘못되어 거기로부터 생명적인 은혜가 부어지는 삶을 살지 못 한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삶을 통해서 그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하찮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주일을 어기는 것은 예사이고 자신의 게으른 삶의 편안함을 위해 신앙적인 의무를 등한시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그 사람 마음속에서 늘 역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벌 때는 눈이 새빨개지고 예배드릴 때는 눈이 허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어디에 와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 속에 있는 이 생명이 자신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늘 은혜 받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 인생 전체의 성패와 관련이 되어있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세상에서 한번 물질을 잃어버리는 것은 영원히 보충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그래서 심지어는 그러니까 한 그릇의 생명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그리스도 인의 자존심도 잃어버리고 자기 안에 있는 순결도 잃어버린 그런 삶을 얼마 안 되는 물질과 바꾸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무슨 생명을 누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값없이 되는 것이지만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우리의 삶 자체를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런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장 이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 사람은 그냥 탐심을 갖게 되는 그 순간 그것 하나만 이루어지면 여한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탐심의 마음입니다. 그것 하나만 눈에 보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것을 버리라는 것은 사실 생명을 버리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안에 예수는 사시고 우리가 살 때 우리 안에 예수는 죽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살게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패가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말하고 있고 이 곤고함이라는 말은 아주 비참한 사람을 나타낸다고 영어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모두 살아져가고 있는 고갈된 상태에서 나오는 몸부림치는 고백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 2장의 차이는 로마서는 거의 신음 속에서 죽어가고 잇는 아사 상태이고 갈라디아서는 죽음도 밟고 일어서고 세상도 밟고 일어서서 이제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강력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생명이 모두 사라지고 죄가 역사 하는 상태이고 한 사람은 죄는 모두 죽고 생명이 그 안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신나는 삶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나는 죽고 예수는 살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나를 통해서 주님이 하시고 나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내 안의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연합되어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나에게 가져다줍니다. 그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합니다. 그 은혜를 힘으로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런 사랑, 이런 크고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대항하여 싸우게 하고 하나님과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고 풍성한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내 안의 불신앙의 요소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대신 육신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사고 방식 등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어떤 선한 것도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를 믿으면 우리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매 시간 매 분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여야지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는 방법이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1년 10년이 지나가도 마음 시원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함 한번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 깊은 깨달음을 받으면서 주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피 맺힌 결심도 없고 또 나는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능가하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를 지배하여서 환경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도 없고 큰 풍랑이 일어나는 것 같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오리려 사람들에게 평안을 선언할 수 없는 담력도 없고 아무 것도 이런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는 그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부은바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이런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내 안에 생명이 있는가 그리고 그 생명이 살아있는지 늘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합니다. 살아있는 신앙입니까? 당신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합니까? 나는 죽어도 예수가 사는 참된 은혜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우리가 늘 받아야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찮게 만들고 예수의 생명이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참된 것들을 자랑하고 거짓된 것들이 미워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나를 사랑하면서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로 하여금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는데 거치는 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서 우리에게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이 소유에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그 말씀을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는 것은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역사 하는데 가로막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역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욕망을 탐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양주동 박사는 한자로 인간의 욕망을 쓸 때 마음 심자를 밑에 쓰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는데 마음 심자를 쓰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마음 심자를 쓰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식욕은 마음 심자가 붙어 있지 않아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탐욕이란 글자는 밑에 마음 심변을 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탐심이란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일반적인 욕망이 아닙니다. 분수에 넘치고 인간에게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을 취하고자하는 과장된 욕망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여기서 탐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은 뒤틀린 사랑입니다. 정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어쨌든지 탐욕의 중심 자리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만큼이나 이 탐욕은 집착이 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고 예수의 생명이 있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율법 중 가자 큰 강령에 대한 답을 해 주시면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f을 사랑하고’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신자의 마음 안에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마음 안에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지게 하고 또 부어진 것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지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기도도 많이 하여야 하고 말씀도 열심히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읽어야하고 은혜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기도 자체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지식 자체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기도 속에 역사 하실 때에 우리에게 생명이 부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오셔야 우리마음 속에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우 유지하는데 결정적으로 큰 방해가 됩니까? 그것은 사랑이 떠나가는 것이고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과도한 사랑, 그리고 분에 넘치는 욕망 이런 것들이 모두 탐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가복음 10장에서 돈 많은 관원이 나와서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라고 질문 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10계명을 말씀하실 때에 이 청년의 얼굴의 희색이 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그것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나 너에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는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쫒으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래야지만 생명이 너의 안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젊은 관원에게만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젊은 관원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그의 마음속에 들여다보시면서 그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돌맹이와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마음속에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물질에 대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전에 그가 지켰다고 믿는 것들도 그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동기가 되고 기초해서 그 힘으로 지킨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영생을 얻고자하는 그의 마음이 그것을 지키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일시에 그 청년에게 들어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점은 네가 영생을 얻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할 텐데 그러나 너의 안에 있는 물질에 대한 탐심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니 네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쫓으면 네 안에 탐심이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지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완벽한 탐심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은혜 생활을 잘하려면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있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아십시오. 그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이 네게 먹고 입을 것들을 주시고 또 이 고달픈 상황에서 의지할 가족들을 주시고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살 수 있는 이 행복한 믿음 생활로 인하여 감사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고 그리고 그 탐욕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위해서는 가끔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동안 평안히 쉴 곳 전혀 없네
걱정과 슬픔이 어딘 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날 사랑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
그리던 벗들도 한가지 만마리 돌아갈 내고향 하늘 나라
12년 전에 교회를 섬기면서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상하고 아프고 눈물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자기가 너무 비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때면 교회 뚝길을 걸어가면서 이 찬송을 부릅니다. 산너머 눈보라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죽 걸어가면서 한번 울고 나면 조금 전까지 아등바등 치면서 분노가 나고 화가 나던 그런 일이 다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느껴집니다. 세상이 그렇게 꿀맛같이 달콤하면 우리는 참신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사는 불신자들이 가끔 갖는 착각입니다. 신자가 우리 안에 거룩한 예수의 생명의 은혜가 우리 안에 심겨졌습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망이고 사망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을 안 느낀다면 그것이 논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신자라면 이 세상에서 눈물도 많이 흘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꿈을 많이 꾸고 있으면 좌절도 많이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충 때묻은 신앙 생활을 하면 갈등을 느끼지 않으나 순결한 신앙 생활, 정결한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하면 우리가 어찌 갈등이 없겠습니까? 세상이 밀면 밀리고 잡아당기면 당겨가고 이렇게 줏대 없이 그저 흐느적거리는 문어발 같은 신앙 생활 속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에게 그릇된 길을 요구할 때 용감하게 맞서고 세상이 우리에게 잘못된 길을 걸어가도록 유혹할 때 단호하게 믿음의 칼로 자르며 걸어가면 살 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은혜의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점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그것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있으면 그런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갈등이 너무 심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를 지탱할 수 없는 것 같은 그 때에 믿음으로 살려고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하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충만한 하늘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믿음을 따라 살려는 사람, 날마다 이세상의 탐심을 버리고 신령한 은혜를 따라 그분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려는 예수의 생명의 은혜를 머금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생명 놓치지 않기 위해 탐욕을 버리고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거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누구든지 세상을 떠나고 탐욕을 버리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이런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앞선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고난을 견디며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생명의 은혜로 견디며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능 가진 사람입니다. 타락함에도 무한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능력이 있는 쪽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관건은 우리 안에 생명이 풍성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삼가 우리의 탐심을 물리치라고 명령하고 것입니다. 명령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참된 생명, 영원한 것들을 지니기 위해서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을 버려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은 희생 없이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고 끝까지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견디며 이기는 일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통째로 삼킬려고 합니까? 세상나라 하나님 나라를 마음속에 넣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다니며 살려고 합니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는 동안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초라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우리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의 생명이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와서 그래서 이만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의 관계를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살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의 인생의 경험도 우리 스스로 예수의 생명을 끊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대적은 우리 안에 있는 탐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과도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씨를 말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 늘 깨뜨려지는 심령, 상한 마음인 동시에 주님만을 사랑하는 착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신앙의 결정적인 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 사랑에 늘 감격할 수 있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늘 역사하여서 우리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어야지만 우리가 비로소 예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한해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모든 탐욕과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심들을 우리 안에 솟아나서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야 하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적당히 세상을 경멸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야합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이 세상을 사랑하던 우리 자신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그리고 이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도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야지만 우리가 예수의 생명, 충만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 1년이 이런 예수의 생명의 지배를 받는 한해가 될 수 있도록 축원합니다.
3.어리석은 마음의 생각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야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12:16-18)
참된 생명을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 생명과 사랑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뿌리가 사랑이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집중되고 그래서 삶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그 생명의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지고 그리고 그 생명의 은혜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는 그런 신앙 생활을 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잘못된 사랑,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분수가 있습니다. 그 분수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때에 우리 안에 주신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담과 화와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고 관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그의 분수였습니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먹되 그 중앙의 선악나무 앞에 와서는 ‘아 내가 저것은 욕심 내어서는 안되는 것이구나’하는 자기 인식을 하고 그것을 보면서 저것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바 된 자이니까 나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나의 몫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하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하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사망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행하며 살면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은 죽음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심판의 사망이 찾아오는 죽음도 있지만 영적인 것들이 모두 무너지고 파괴되어서 죽음과 방불한 영혼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님은 뭘 하지 말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가 없고 자기가 생명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면 자기도 얼마든지 죄책감 느끼지 않고 나쁜 짓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하는 것을 보면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내 멍에는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시는 말씀이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가 잘못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생명과 공존할 수 없고 탐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눈이 흐려져서 참으로 우리에게 정확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오염되어서 생명이 없는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준다고 하여도 그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입니다.
오늘 이어서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부자였지만 그는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마음의 소원도 있었고 그 소원을 실제로 행하였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그 부자에게 진정을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것은 탐심에 사로잡히고 나면 자기에게 더 좋은 것,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기 아는 것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이 있는 그곳에 생명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런 것은 없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적인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추억이나 이전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는 오늘 우리의 삶이 통제되기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선지가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힘입어야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 감동이 새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뭘 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생명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 생명적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매일 매일 새로운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깜짝 놀랍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고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나실 때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갈 이유들을 수시로 발견하게 되는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날마다 감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사랑의 성실을 새롭게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사람들마다 공통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무리 악하고 못돼먹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성품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감동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을 때 외에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겨우 인간의 본분을 돌아가는 것입니다.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늘 하여야 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분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 성경의 진리를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중요한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조심해야 될 것은 이 성경의 진리 밑에 우리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바꾸면 이제 이상한 신앙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신앙의 경험을 하면 그 말씀에 빛을 받으면서 우리의 경험이 성경의 비춰 보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되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나면 그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경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계속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있다 그러면 나는 왜 매일 매일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에서 오는 감화가 없을까 이 무디고 딱딱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과 같이 밀려들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아 나는 그런 경험을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라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입니다. 청교도들이 설교를 듣던 때에 가지고 있던 태도들 중에 오늘 날 잃어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를 경험하는 태도로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가 굉장히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떠나 버리면 주관적인 신앙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굽은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을 참 많이 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열심도 있고 헌신도 있으면 그러면 그것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망가진 차를 끌고 나왔어도 겁을 먹고 무서워하면서 슬슬 운전을 하면 사고를 내어도 접촉사고 밖에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 망가져서 핸들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배기 가스는 풍풍 나오고 브레이크도 작동이 되지 않고 라이트도 다 깨어지고 부러쉬도 드러누운 그런 차를 가지고 운전하면 나지 하고 끌고 나오면 사고가 나면 몇 명 사망에 정면 충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착각 속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자기 좋아하는 성경만 읽습니다. 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옳다고 인정해 주는 성경 구절만 찾아서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선경을 그런 식으로 공부하면 할수록 잘못된 생각이 더 굳어지는 것입니다. 진짜 소망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신앙의 경험이 있고 그 위에 성경에 대한 탄탄한 지식이 있으면 말씀을 잘 깨닫고 나면 이전에의 경험,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 이것이 이것이었구나 아 내가 왜 눈물을 흘리면 서 왜 회개해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죄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밀려오지 않았을까? 왜 나에게 축복이 없는 것일까? 왜 나의 인격이 아름답게 변화되지 않는 걸까? 왜 나의 신앙은 거품처럼 떠돌아다니고 뿌리 없는 것일까? 그 말씀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경험이 해명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굉장히 신앙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제는 내가 추상적으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그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커다란 확신이 생기고 동일한 잘못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불이라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 다. 그 아이가 자라니까 엄마가 종이에다가 빨간 불꽃을 그려주고서 이것이 무엇 인지 아냐 하고 불꽃이라는 것과 그것이 뜨겁다는 것을 계속 주입시키는 것입니 다.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진짜 불을 보았을 때의 불과 그 그림에서의 불을 매치 시키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그림만 가지고 불이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애가 한번 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뜨거워서 자지러지는 경험 이 있으면 그것이 불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그 불이 그림을 그릴 때는 한가지 불밖에는 못 그리지만 그 불을 경험하면 파란 불에서 나오든지 촛불 에서 나오든지 성냥에서 나오든지 가스렌즈에서 나오든지 아니면 석유 난로에서 나오든지 간에 동일한 불에 대해서 동일한 공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이와 같은 법칙이 성립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험은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경험이냐 하면 말씀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분석된 조명, 그런 것이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경험이 말씀에 의해 빛을 받아서 분석되고 조명을 받으면 그것은 성경 다음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의 자료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많이 배우고 신앙적인 은혜의 체험을 풍부하게 경험을 하고 나면 강하고 정말 놀라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경험이 이런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역사 하던 신앙 생활을 할 때가 언제인가를 회상해 보면 그 때는 내 인생에 있어서 주님만을 사랑하던 그 때가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역사 하던 때였습니다. 물론 그때에도 직장도 다녔고 세상살이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도망간다고 해서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다 살고 다른 일 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라고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주님만을 사랑할 때가 우리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풍부하게 역사 할 때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생명을 잃어버리고 건조한 신앙 생활의 원인은 결국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형의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이 동생의 마음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것을 보았고 그 생명을 부어지지 못하게 한 가장 커다란 이유가 하나님 이 이외의 것들에 대한 과도한 사랑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이 확 바꿔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 많이 사랑하는 첫 번 째 대상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랑을 독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밖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도 자녀도 우리의 일도 사랑합니다. 어느 것도 사랑하는 일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도 가족도 일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영적인 선을 결핍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안습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모릅니다. 구역장을 맡겨주어도 구역장이 자기의 직분과 일을 깊이 사랑하면서 하는 것과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간에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나는 지 모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신학생들이 몰려오니까 목사님이 아 이제 우리 교회에 부흥이 오 는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그 교회 구역장들을 다 자르고 신학생을 구역장으로 세 웠습니다. 그리고는 연말이 가서는 구역이 반으로 줄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한 영혼을 사랑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자신에게 이 직분을 주신 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감당하는 사람과 12월 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의 사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자동차를 사랑하면서 아끼며 한 그 자동차는 오래 씁니다. 때워주고 고쳐주고 칠도 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다양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교회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 조기 축구회의 회장이 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동기로 삼지 않으니까 섬기다가 쓰러지고 낙심하고 영적인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주님을 향해 독점적일 때 우리는 마치 우리가 독점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 같은 감동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매우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 같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가 연약하지만 나의 연약한 것에도 불구하고 나의 능력 밖의 일을 내 안의 생명의 은혜로 성취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봅니다. 나의 지혜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미련한 나를 앞서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나가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런 사랑을 그런 생명적인 관계 속에서 부어주십니다.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도저히 내 힘으로는 참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내 안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게 하십니다. 기도가 필요할 때를 알게 하시고 강한 용기를 필요로 할 때를 알게 하시고 한 걸음 물러날 때를 알게 하십니다. 무릎 꿇을 때를 알게 하시고 사람들을 호령해야 될 때를 알게 합니다. 이것이 모두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부어지고 순환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특별히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자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재물 삼겠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그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재물 삼겠네
그 생명의 관계를 통해서 능력 사랑 평화 권능 인내 양선 충성스러운 마음 모든 지혜들이 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소유가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원래 만드신 창조의 원래의 목적과 의도대로 살수 있고 그럴 때에만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런 모든 소유보다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동생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의 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 부자는 어느 해 소출이 풍성해졌습니다. 혼자서 밭을 일구어서 얻은 소출이 아니라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소작농들로부터 많은 곡식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는데 창고 용량보다 더 많은 곡식을 거둬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어디다가 쌓아둘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자가 고민을 하고 창고를 더 짓고 창고에다 곡식을 쌓아두면서 그는 스스로 한 일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 영혼아 이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그랬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내가 이제 오늘밤에 네 목숨을 취하리라 그러면 네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가 주님이 비유를 하신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사실 예수님이 아버지가 형에게 주신 이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는 동생을 깨우치기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동생이 예외적이고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후일 성경을 읽게 되는 모든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의 동생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볼 수 없는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 대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심령에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의 대표이고, 예수의 생명의 은혜가 충만히 거하지 못하는 인간의 표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바로 우리라면 아주 솔직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이 청중자체가 여러분 자신이라고 해야지만 가슴에 다가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이고 연구대상이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변화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은 이 동생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마음속에 심겨져서 그 크신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감화 속에서 살아가고 매일 매일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잇는 신령한 은혜를 생명적인 관계 속에서 공급받고 그것을 인생의 귀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고 살지 않는 모든 평범한 사람의 대표로서 이 동생을 거론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부자의 문제의 발단이 어디에서부터입니까? 소출이 풍성하지 않을 때는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성공과 번영에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소출이 풍성하여졌습니다 이것을 어떠하겠는가 고민을 하였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모둔 곳이 것이 풍성해 질 때에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문제는 그 해의 곡식을 많이 거두면서 발생된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풍성한 번영이 찾아오니까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나면 우리가 누구인지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우리들이 궁핍하고 어려울 때도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궁핍하고 어려울 때 믿음을 따라 살고 믿음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고 그 궁핍하고 어려울 때에 그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궁핍도 우리에게 정말 참 신앙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 우리 속마음의 경향이 어떤 것인지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풍성할 때에도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없고 가난할 때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곤고하고 피곤할 때에는 주님밖에 힘주실 이가 없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 이제 살만 해지면 그리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고 물질적으로 여유를 찾게 되니까 마음에는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게 보다는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기회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기보다는 자기를 자랑하고 타락하는 기회로 삼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믿음이 좋다고 생각되던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곤란과 시련으로 고통스런 세월동안 하나님을 잘 의지하던 사람들이 그 고난과 고통의 길에서 벗어나고 번영의 길을 달리게 되자 그 믿음을 속히 잃어버리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유행하던 간증의 스토리가 이것이 아닙니까? 맨 처음에는 막살았는데 깊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라고 이렇게 끝나는 간증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축복한 다음에 다시 타락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 얻어맞고 정신이 번쩍 나고 이제는 다시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곤고하고 고난이 많이 있을 때 주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 받고 형통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속히 잃어버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부자가 결국은 소출은 많이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그 사람이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적기에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주시고 여러 가지 재해로부터 보호해 주시니까 큰 풍년이 되어서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IMF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풍년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어제 트럭에 과일을 싣고 지나가는데 한 궤짝에 만원만 내라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고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복 주셨기 때문에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부유하게 된 것이 누구에게 인한 것이고 그리고 이 곡식들을 누구를 위해 써야 할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렇게 부유하게 가진 것으로 더 신속히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리고 오히려 생명과는 관계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풍성한 곡식은 죄인에게 고민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가 마음으로 생각하여 이르기를 내가 어찌할꼬’ 라고 나옵니다. 고민하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염려합니까? 어떨 때에는 너무나 많이 고민하여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고민하고 사는 동안 살이 마르고 마음이 상하고 건강을 해칩니다. 이렇게 많은 염려와 걱정으로 마음을 태우고 그러지만 그 염려 가운데 가치 있고 영원을 향해 의미 있는 신령한 염려는 몇 개나 됩니까? 신령한 염려는 두통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사랑의 클리닉에 갔다가 황성주 박사가 쓴 책을 로비에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암에도 걸리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하는데 사실 목사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야 근무시간에 받는다고 하는데 목사는 출근 시간도 없고 퇴근 시간도 없고 근무시간이 없습니다. 기도 할 때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어서 기도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름 석자만 생각해도 스트레스가 시작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찌하면 좋을 지 모르는 사람은 목사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이름만 떠오르면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금년에도 변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구나 그렇게 변하지 않으니까 힘든 일들이 찾아오는데 그것도 못 깨닫는 그 사람을 이름만 떠오르면 스트레스를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 교회 사도들에게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조금만 전하려고 하면 몽둥이가 날아오고 돌멩이가 날아오고 채찍이 날아옵니다. 그러니 복음 이야기만 들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습니까? 제가 평소에 궁금하였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목사들은 스트레스와 결별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또 자기 때문에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왜 입니까? 왜 나는 이렇게 밖에 못 사는가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펴도 스트레스로, 그리고 기도를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뭐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에 대해서 그분이 그리스도인이니까 아주 간단하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아야지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고생하고 일 많이 하다가 이제 돈을 많이 벌어서 집안을 예쁘게 치장하면 죽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심 걱정이 모두 살아지니까 이제까지의 삶의 진지한 긴장이 확 풀어지면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인 해체현상이 함께 일어나면서 죽는 것입니다. 다.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사는 것만이 최고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분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스트레스는 창조적 스트레스와 파괴적인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파괴적 스트레스는 이 부자와 같은 생각이 파괴적 스트레스입니다. 월급이 오르는데 이것을 어디다 맞길까? 어떤 은행이 튼튼한가? 종금사는 부도날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 신용 회사도 위험하다는 데 이것을 어떻게 할까? 이런 것이 바로 파괴적인 스트레스입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스트레스는 어찌하면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할까 어떠하면 내가 참 주님만을 위해 살고 어떠하면 내게 맡겨진 주님의 사명이 거룩하게 성취될 수 있을까? 어떠하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목자 없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양과 같은 영혼들이 생명을 얻으면서 살 수 있을까 어떠하면 내가 더 거룩하면 온전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스트레스가 바로 창조적인 스트레스라는 것입니다. 삶 속에 생기를 불어넣고 건강을 촉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웨슬레가 생각이 납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스트레스 투성이었습니다. 그 사람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교회의 부흥을 지도해 나가는 동안 수많은 대적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끊임없는 논쟁에 시달리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1년에 약 1천 200번 정도의 설교를 하였다고 하니까 하루에 보통 3번 이상 설교를 하였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보통 설교하면 2-3시간을 하였고 이동하는 시간은 계산하지 않고 그는 일평생을 순회하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루의 강대상에 구명이 날 정도로 기도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부인이 또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머리가 길으니까 남편의 머리채 쥐고 온 방안을 흔들고 다닌 여자였습니다. 한번 휘돌리고 나면 허연 머리털이 한줌씩 뽑혔다고 합니다. 그러니 들어와도 스트레스 나가도 스트레스 투성인데 90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스트레스 받으면 일찍 죽는다는 것도 사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이런 파괴적인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부자가 되었는데 창조적인 스트레스가 안 오고 이런 파괴적인 스트레스가 오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주님이 축복해주셔도 그것을 아는 진실한 지식이 없이는 이 축복이 자기를 파괴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여기서 확실히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나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어떤 관계를 누리며 사느냐에 따라 달려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는 심중에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마음에 한번 스쳐 가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에 골똘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적절한 방법이 어떤 것인지 이 풍부한 소출을 보면서 자신과의 대화를 깊이 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뭔가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 속의 자아와 교류를 나누면서 뭔가 깊이 생각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면서 얼마나 한심하였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면 여러분들에게 자녀가 있습니다. 애들은 확실히 뭔가를 사다주면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어느 날 자녀들에게 과자를 사다가 주었습니다. 몇 년 동안 돈을 번다고 헐떡이면서 애들이 좋아하는 과자도 한번 사 주지 못하였구나 하는 그 마음이 부모의 마음에 항상 걸려서 한 번 실컷 먹어보라고 과자를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애가 이 과자를 보는 순간 수심에 잠기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엄마 사랑, 아빠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그러나보다하고 애야 그것을 네 방에 가져가서 먹어라 하니까 그리고 이제 몇 시간이 지난 후 방이 조용해서 뭐하나 하고 방을 들여다보니까 애가 과자를 앞에 두고 깊은 수심에 잠겨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 애가 하는 말이 엄마 이 과자를 어떻게 해야 돼? 뭐부터 먹어야 돼? 그것을 물어본다면 아마 정신 병원에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과자를 앞에 두고 시름에 잠긴 아이나 쌀 몇십 가마를 앞에 두고 심중에 고민하는 인생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놈이 그놈이란 말입니다.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슬프게도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오래도록 생각을 하였으면 뭔가 묘안이 나와야 되는데 그 머리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떠오른 생각이 창고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자기의 생각에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물질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오늘 저녁에 죽을 사람이 창고를 크게 지으면서 완공도 못보고 죽을 사람이면서 혼자 히죽거리면서 자신의 지혜에 대해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창고를 크게 짓고 거기다가 이 많은 곡식을 쌓아 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말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쌓아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머리 나쁜 부자가 내린 마지막 결론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가리켜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주일 학교 시절에 배웠습니다. 사실 이 사람이 뭐가 어리석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랑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어떡하지 곡식을 쌓아둘 데가 없네, 추수나 좀 적게 하지 흉년이나 좀 들지 라고 주인이 생각할 때 종이 와서 이 많은 곡식을 어떠해야 되느냐고 물으면 야 그것을 말로 해야 아냐 쌓을 데 가 없으니까 다 퍼 줘야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이 사람은 가장 지혜로운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서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미련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의 지혜로운 신앙의 순서는 세상에 있어서의 지혜로운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정말 똑똑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은 어쩌면 그렇게 멍청하게 하는 사람도 만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똑똑하지 못해도 신앙생활에서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하늘의 지혜로 무장된 신앙 생활을 잘 하면 얼마든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이렇데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의 잘못된 생각은 재물이 자기를 보호해 줄 것이고 만족을 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탐욕의 제일 잘못된 것은 자기만을 위한 사고방식을 가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모르는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고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지 않는 사람의 삶의 사고 방식이 이렇게 자기만을 위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정말 예수를 안 사람인가는 그 사람의 물질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기심, 자기만을 위하는 욕심은 회심하지 못한 자의 대표적인 것이 탐심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자주 봅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알고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이 나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사랑 받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 못 받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이 신앙 생활 하면서도 자꾸 더 주고 싶고 더 섬겨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버르장머리도 없고 예의도 없는 저런 사람이 와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가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랑이 안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가 아무리 무지막지하고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에 대한 사랑과 비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을 사랑을 기초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잘못되고 모자란 사람이 많이 있어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우리는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존귀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뉘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일서가 계속 거듭해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형제 속에 있는 형상을 보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는 그래서 기독교인의 진정한 사랑의 핵심을 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지 않고 요한 일서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삶과 형제 사랑이 없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괴리를 메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을 찾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심치 못한 자들의 대표적이 표본이 자기만을 사랑하는 욕심에 바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쌓아 두리라 맘먹을 때 그것은 결국 자기를 위해서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교훈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는 돈이 좋아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얼마나 솔직한지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 다음으로 돈이 좋아요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 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진실이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음으로는 무엇이 좋다는 것은 체면이지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가끔 과격한 표현이 나옵니다. 가족도 미워하고 동기간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쫓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 방법입니다.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은 미워하는 것 같은 대조를 이루어야지만 그것이 참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른 것은 미워하는 것처럼 하찮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만 사랑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것으로부터의 사랑은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면 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쌓아두리라는 고백 이면에는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생명이 끊어진 사람이고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과 가치를 포기하고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붙잡게 되는 일과 생명이 부어지는 일이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번 하나님께 은혜 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제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던 사람이 오늘 완전히 변해서 딴 사람이 되어서 세상과 함께 짝하고 놀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질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이 사랑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탐심을 멀리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도어야 합니다.
쌓아두리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며 살 맘이 있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물질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을 믿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거듭나지 못하고 예수의 생명이 마음속에 역사하지 못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돈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차를 산다든지 가구를 들여놓는다든지 인물이 훤해지는 옷을 사다 놓고 참 돈은 좋은 것이구나 라는 말을 예수 믿는 사람임에도 할 때가 있습니다. 돈은 우리의 외모도 바꾸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운명도 바꾸는 것 같은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이 세상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돈이 많은 면 법적으로는 계급이 없어도 왕처럼 군림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돈의 위력이고 마력입니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누구를 종 삼을 생각하지 않아도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진정으로 예수의 생명이 심겨지지 않은 사람이 돈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돈에 다한 매력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돈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집착을 하고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돈이 얼마나 큰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놓고 사람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 놓고 외모를 바꾸어 놓습니다. 결국은 오늘 이 부자의 경우는 오늘 넉넉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오늘도 계속하고 내일도 계속하고 모레도 계속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의 단 하나의 방법이 쌓아두는 것이었습니다. 쌓아놓으면 그런 삶이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돈을 너무 많이 모으면 좋지 않습니다. 뜻을 세우고 돈을 모으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뜻이 있는 사업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돈을 모은다든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그런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단지 미래의 안전을 위해 많을 돈을 모으고 사는 것은 죄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그것을 쌓아 두는 이면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쌓아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국에서 편지 오면 그냥 읽고는 다 버립니다. 그러나 우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 와서는 덜덜 떨면서 오리는 것을 봅니다. 어쨌든 사랑하지 않고는 모을 수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가지고 성경은 죄악이 무성하게 자라는데 그 뿌리를 더듬어 가면 한군데서 만나는데 그 뿌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부자가 예수의 생명이 속에 없으니까 이런 식의 삶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그러면서 성경이 하는 말이 결국은 이렇게 돈을 사랑하고 미래를 위해서 끊임없이 돈을 쌓아두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것을 족한 줄 알라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다시 말하면 자기를 의해 철저하게 쌓아두려는 탐심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결핍은 예수의 생명이 역사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돈에 대해 집착하며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부름을 받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보좌를 다투는 신이 물질에 대한 신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한 주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쌓아두리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보다는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통해서 자신의 안전을 보호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쌓아두리라는 이 사람의 어리석은 결심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대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에 대한 진정한 지혜 없이 삶에 대한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인생에 대해 한 무대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급히 휘장이 내리고 우리는 이제 삶의 저편 너머로 퇴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음 앞에 직면할 때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주님과 휘장이 드리운 채로 만나던 관계에서 휘장이 완전히 거치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완전한 만남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측면에서 본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이 죽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 매일 기도할 때 주님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하지만 안 올 것이 확실하니까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 정말 주님이 오시면 큰일날 사람들 얼마나 많을 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시간마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도하는데 정말 주님의 오시면 큰일 날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주님 오시옵소서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는 것은 전혀 주님 사랑하지 않고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나님 등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 기도의 응답을 해주지 않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요한 같이 산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십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닌 자는 자신의 양심이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랑을 뛰어넘어서 주님만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넘쳐서 언제나 주님이 주시는 사랑, 자비 그러한 은총 안에서 늘 살면서 예수님을 늘 자신의 온 삶으로 느꼈던 사람의 소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몸소 배우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의 그 휘장이 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것은 평소에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지는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이런 감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쓸 물건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사랑하지 않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죽음 그 자체가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남은 물건이 아까워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주는 만족으로부터 이제는 더 이상 만족을 누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한 영원과의 만남이 그를 두려움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모든 사람이 죽음을 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대표, 인간이 가장 사랑하기 쉬운 것을 예로 든 것입니다. 모든 사랑이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이 많을 물질을 주어도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고 형통함을 주셔도 그런 생명의 은혜를 그런 부어주심을 통해 누렸던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그 거룩한 만남에 대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순결한 사랑, 더 순결한 은혜를 갖고 하나님 앞에 예수 생명의 비밀을 간직하면서 이 곤고하고 괴로운 세상에서 찬송하며 사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소유를 어디다 쌓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4. 영혼은 무엇으로 사는가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19)
이제 곳간을 모두 더 크게 짓고 드디어 그는 걱정거리가 끝이 났습니다. 창고에 넘치도록 곡식을 거둬들여서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걱정을 하고 고민을 하였는데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자기 스스로 자신의 지혜에 감탄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곡식을 거기에 모두 들이고 조용히 영혼과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수준의 그 정도인데 영혼과의 대화가 오죽하였겠습니까? 영혼을 향해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풍족히 쌓아두었으니 이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는 이야기를 영혼에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과의 대화입니다. 평안 하라 그리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줄거워하자 라고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뭔가 영혼과의 대화를 하려면 마음에 설령 그런 것이 없더라도 좀 고상하여야지 자기 육신이 먹고 마시는 것도 지겨울 텐데 영혼에 대해서도 평안 하라 이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는 것이 이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의 속 사람과 나눈 대화의 전부였습니다. 이 사람이 속 사람과 더불어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은 흉볼 것도 불평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그런 대화를 나누니 우리가 감 나라 곶감 나라 할 처지가 안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무엇인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향해 평안 하라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의 중대한 실수입니다. 자신의 영혼은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와 무슨 대화가 가능합니까? 그러나 마치 이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살아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죽어있는 영혼과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에서 이 사람은 뭔가 깊이 잘못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은 살아있습니까? 죽어있습니까? 영혼이 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시 태어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는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방탕하고 우리 마음대로 살 때에는 세상이 참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직전에 세상이 옛날같이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돌아옵니다. 세상과 더불어 찰떡 궁합처럼 붙어 다니면서 깨가 쏟아질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그렇게 오랫동안 찰떡 궁합처럼 살아오는 세상과의 사이에 뭔가 배신감을 느끼고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 신앙에 대한 관심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고 여기저기서 찬바람이 생생 불고 사람들이 곤고하고 어려워지면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되고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가 세상에 배신감을 느낄 때 무엇인가 신앙에 대해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서점에 찾아오는 인구가 예년에 비해 50%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불티나게 팔리는 책이 있는데 바로 ‘피묻은 복음에 빠져라’ 라는 저의 책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잘 팔리는 책이 운수, 손금, 관상 이런 것 보는 책이 잘 팔린다는 것입니다. 평화롭던 시절에는 이런 종류의 책이 잘 팔리지 않는데 세월이 뒤숭숭하고 사는 것이 곤고하고 세상에 자꾸 바람맞는 것 같으니까 이제 종교, 신앙 이런 것에 대해 눈을 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정신적인 진공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하여서 여태까지는 전해도 바늘도 안 들어가던 사람들에게 한번씩 다시 접근을 해 보십시오.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냐 어떻게 지내냐 나도 고달프다, 우리 만나서 따뜻한 밥한 끼나 같이 먹자하고 불러다가 한 그릇 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제 주저리주저리 한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때는 잘 나갔는데 하면서 넋두리를 할 때 그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복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지할 데가 어디 있느냐 나와 함께 열린 교회에 가보자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만 관심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미신, 토정비결 이런 세계에도 관심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에 대해서 뭔가 배신감을 느낄 때 신앙의 세계, 종교의 세계의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부자는 자신의 영혼이 이렇게 신앙으로 돌아오기 전 죽어있던 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관계가 좋을 때 신앙이 생각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나와의 금술이 깨지고 그리고 세상과의 평화가 깨뜨려지기 시작하는 그 때에 신앙에 대한 관심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살아있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혼에게 끊임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42편에서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하면서 속 사람을 타이릅니다. 자신의 영혼에게 권면하면서 그 영혼에게 용기를 새롭게 주고 그 낙망 가운데서 일어나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이 동시에 하나가 되어서 구원의 소망이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과 더불어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영혼에게 무슨 대화를 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이 사람은 뭔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영혼에 대해 나눈 대화를 들어보면 이 사람은 영혼의 속성에 대해서 뭔가 중요한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오해한 것이 사람의 생각에 영혼의 만족이라는 것이 육신의 만족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입니까? 자신의 육신이 그저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실컷 먹고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서 일어나서 또 먹고 이러고 나니까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내 영혼도 아마 내 육신하고 똑같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도 많이 먹고 자고 또 먹고 하면서 이런 세월을 보내라고 이렇게 영혼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혼에 대한 중대한 오해입니다. 내 육신은 아마 그럴 지도 모릅니다. 육신은 부분적으로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정말 잘 먹고 근심 걱정이 없으면 만사가 오케이라는 사고 방식을 우리의 육신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런 우린 나라에서의 전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견해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원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민족성 자체가 내세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불교나 유교를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유교는 더더욱 그렇고 불교는 내세에 대한 생각이 불투명하고 내세라고 하여도 우리가 죽으면 나중에 귀신이 되어서 우리의 후손들이 밥 차려주면 먹는 것밖에는 내세의 세상이 없습니다. 그리니 우리 민족이 추구해온 행복이라는 것은 나쁜 놈하고 착한 놈하고 같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나쁜 놈이 잘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나쁜 놈은 깡통차고 밥 빌어먹는 신세가 되고 착한 사람은 나중에 풍년이 되고 종들을 많이 거느리고 잘 살다가 죽는다고 그러더라 이런 것이 옛날 이야기의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사고 방식이나 생각이 지극히 현세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원래 종교성이 매우 특별한 민족, 예를 들면 이스라엘 같은 민족이 있듯이 내세에 대한 그런 감각과 내세에 대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 면에 있어서 감각이 발달된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서 내세 신앙이라고 하는 기독교에서의 커다란 부분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주제가 소망, 내세라는 말 대신 장례라는 말이 써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자체가 얼마나 내세에 대해 무감각한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뭔가 결핍된 내세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면 깊은 은혜, 하나님의 충만 사랑, 복음의 커다란 감격에 빠져 있을 때에 경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는 내세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성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 내세에 대한 생각이 기독교 신앙에서 빠진 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천국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에 불타오르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죽음이 가까운 성도가 잠시 후 뵙게 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정결해 지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죽음이란 주제 자체를 성경에서 발견하든지 일상 생활에서 발견하든지 아주 기분 나빠하는 지극히 현세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어리석은 부자가 착각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이 만족을 누리는 것과 같은 조건으로 영혼도 만족을 누릴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물질을 쌓아두는 것으로는 결코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입니다. 그것을 이 부자는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의 영혼의 진정한 만족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이런 것이 영혼의 진정한 만족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통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하는 영혼 속에는 만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은혜로 차고 넘치나이다 하는 이런 고백은 우리 육신의 물질이나 우리 육신에 필요한 금이나 은이나 의복이나 이런 보화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고 하여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그렇게 큰 부자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정말 돈이 많고 재물이 많은 사람이 나는 물질과 함께 행복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늘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물론 돈 없어도 쫓기듯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자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실 때 그렇게 육신이 만족해하는 그 물질이나 쾌락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만족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즐기는 재물로는
내 근심과 고초를 못 면하리
또 숨질 때 우리로 위로를 못 얻으며
저 천국의 갈 길도 못 찾으리
이것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공통된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이 찬송을 부르면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지금도 한 23-24년 전 처음 하나님께로 돌아 올 때 조금만 개척 교회에 나이 많은 할머니들과 모이면서 이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많이 흐르던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진정한 만족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영혼의 무엇을 통해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창세기를 펴 보면 영혼을 누가 만드셨는지 어떻게 만드셨는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빗으시고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직접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이 있어라 생겨나라 하니까 생겨났습니다. 100톤이 넘는 바다의 고래도 공룡도 그렇게 하여서 생겨났습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그 많은 바다 속의 것들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이 많은 피조물들을 명령만 하시면서 만드셨는데 인간은 그 존귀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주 하나님 우리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의 주 하나님을 찬양해
나는 하나님 형상 따라 지은 몸이니
하나님이 당신의 그 귀한 손으로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옛날에 기와 엮을 때 진흙에다 짚을 짓이겨서 던지면 가운데 기와가 동그랗게 얻혀지면 진흙 위에다 그것을 덮는 것입니다. 그것을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냥 주물떡 주물떡 해서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하신 것이 아니라 손으로 빚으셨는데 그 빚으셨다는 단어는 토기쟁이가 토기를 빚을 때 쓰는 말입니다. 인간을 정성껏 빚으신 것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해 놓으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비로소 성경은 생령이 된지라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번역은 잘못된 것이고 잘된 것이 산사람이 된지라 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어넣으시니 비로소 사람 산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는 그 생기가 빠져나가면 죽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산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중대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왜 하나님은 복잡하게 만드셨을까 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의 피조물 중에 가장 인체구조가 복잡합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신비합니다. 그래서 생물학을 전공한 어느 형제의 말이 생물학을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비합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하고 화성에 가고 목성에 가고 달나라에 몇 십 년 후에는 사람이 살게 만든다고 하는데도 인간은 파리 한 마리 만들 수가 없습니다. 파리가 아니라 병균하나도 못 만드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처럼 신비한 것입니다. 유전자로 양을 복제하고 인간을 복제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창조 행위는 아닙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인간에게만 그런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인간을 만드셨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생기를 불어넣는 그런 절차가 의미가 없다면 이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다른 기대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몸집이 큰 동물, 인간보다 힘이 세니 이센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을 향해서는 전혀 갖지 않는 그런 다른 기대를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따라서 인간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에게는 행하지 않는 다른 것을 행하셔서 인간에게 영혼이라고 하는 실제를 주신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산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불어넣지 않고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러면 인간은 살아있을 수도 있고 움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능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돌고래가 얼마나 영리한지 아십니까? 아이큐가 35가 넘고 세 살 박이 정도 됩니다. 그리고 훈련을 시키면 이 지능지수도 더 높아지고 아주 똑똑해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영혼이 없었더라도 지금처럼 높은 과학 발달의 문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그런 지능 지수를 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돌고래가 아이큐 120정도 된다면 얼마든지 사람들과 같은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다면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지능지수가 높은 것은 영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혼을 주신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혼을 통로로 해서 하나님께서 생명과 하늘에 속한 모든 좋은 것 자신의 성품에 대한 지식 이런 은혜가 공급되는 통로로 하나님께서 이런 영혼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돌고래가 머리가 좋고 아이큐 150짜리 돼지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지만 아이큐 30짜리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하나님이 독점적으로 그런 영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생각해 보십니다. 영혼을 주신 것은 그런 어리석은 대화나 나누고 그리고 실컷 먹어라 실컷 퍼져라 평안 하라 배부르지? 하는 이런 식의 동물적인 대화나 나누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부자는 깨달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교통하여야지만 만족을 누릴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음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당신들 영혼들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영혼을 잘 먹여 주고 잘 입혀주고 재워주면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든 주인이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만든 분이 더 잘 알지 쓰는 사람이 더 잘 알겠습니까? 가전 제품 같은 것도 쓰다가 고장이 나면 자기가 잘 안다고 뜯어보면 뒤에 ‘전문가 이외에는 위험하니 손대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할 수없이 뚜껑을 덮고 전화해서 공장에 만든 전문가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만들었으니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무리 행복하다 괜찮다 어떠다 라고 말하여도 영혼이 망가지고 영혼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은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자의 두 번째 실수는 영혼이 그런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데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의 것들로 만족을 누릴 수 없고 이 세상의 것들로 육신이 만족을 누리는 것과 같은 만족을 영혼이 누릴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뵈옵기를 갈망하고 있고 말씀을 먹기를 갈망하고 있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은혜로 채워지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이 아니면 도저히 만족을 눌릴 수가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과의 생명 적인 교제의 만족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영혼에게는 진정한 만족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미친 듯이 쾌락을 좇고 쾌락을 추구하고 방종하고 하나님께 대들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극단적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이러한 모든 현상들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이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영혼들의 말할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끔찍합니까?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뜨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마약을 하지 말자는 광고를 보여주는데 얼마나 끔찍한지 모릅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가 있는데 화장을 이제 지우고 나니까 눈썹은 다 빠져서 없고 또 입을 벌리니까 틀니인데 그것을 빼고 나면 이가 다 빠져서 듬성듬성 있습니다. 눈은 쾡하고 들어가고 눈가는 시컴해져서 괴기 영화에 나오는 한 사람 같았습니다. 마약의 복용은 생각보다 비참한데도 사람들이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무지막지할 정도로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혼의 왜곡된 만족을 찾기 때문에 그런 불행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이 부자가 간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부자는 자신의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 지극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런 두 번째 교훈 속에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미친 듯이 추구하는 동안에 영혼을 돌보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돌아볼 기회를 잃어버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더 깊은 죽음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나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로 들어가고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불리는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부자가 음부로 들어갔는가 라는 것입니다. 역시 부자는 다 지옥으로 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지 나사로의 부자가 악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의 생각일 뿐이고 성경에서는 이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 쓰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정황들과 상황들을 보아서는 이 사람이 마음씨 좋은 부자가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부로 들어오게 되었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져오게 만들었습니까? 단지 그 부자가 악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음부로 떨어졌다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부유한 삶을 사는 동안 자신의 영혼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무관심이 자신을 그렇게 비참한 자리로 심판의 자리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리는 중간 결론은 세상을 열심히 사랑하고 탐닉하면서 사는 동안 결국은 자신의 영혼은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우리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영혼이 진정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지 알아보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끊임없는 점검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부자의 어리석은 상태에 우리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그가 자신의 영혼에게 한말이 이 사람은 영혼의 진정한 평화가 물질에서 온다라고 생각한 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우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정말 우리의 영혼의 진정한 평화는 땅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생명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질 때 거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고 거기에 진정한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이 얼마나 견고하고 깊이가 있는지는 그 사람이 누리고 있는 평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 제대로 안 들어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는 사람들은 조바심하지 않아도 될 때에 조바심하고 조바심하지 않아도 될 때에 만사 태평입니다. 집회를 갔는데 그곳의 사모님이 내게 하소연을 합니다. 남편이 바로 옆에 있어도 열심히 우리 목사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합니다. 무엇이냐면 우리 목사님이 너무 만사 태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이 좋은가 봅니다 라고 하였더니 그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신도 그것이 처음에는 믿음인줄 알았는데 신방도 안가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토요일 설교 준비를 한다고 밤을 샌다는데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데 우리 목사님은 만사 태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보니까 자신도 그렇게 되어간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은 평화가 있습니다. 큰일났다고 하여도 괜찮다고 합니다.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진짜 사람들이 감각도 없이 멍하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하면 좋은가하고 늘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사람,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급해야 될 것들에 대해 조급해 하고 태평해야 될 것들에 대해 태평 하는 이런 올바른 태도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로 충만할 때 하나님의 마음도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가지고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이 아무렴 어떠냐 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범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사람이 ‘내 영혼아 평안하라’ 라고 하는데 영혼의 평화가 어떻게 물질을 통해서 오느냐는 것입니다. 돈이나 이 세상의 것들로 어떻게 영혼의 평화가 오느냐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앗아가는 것은 죄이고 영혼의 평화를 다시 우리에게 오게 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즐거이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깊이 자신의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늘 느끼며 살 때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이 비로소 평안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평안합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평화가 어떻게 하여서 깨어지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못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참 많이 말합니다. 요즘 어떠냐고 물으면 바빠서 혹은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핑계 거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이유는 바빠서도 아니고 일 때문에도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쁘게 일하고 헌신적으로 산 사람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산사람도 있는가하면 아무 것도 안하고 먹고 뒹굴 뒹굴 구르면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잇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평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만나서 진정으로 깨닫기 전에 우리 마음대로 살 때는 곤고하고 불안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만나서 변화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상황이 확 바뀝니까? 이렇게 은혜 받고 나면 갑자기 복권이 당첨이 됩니까? 공부 안하고 속썩이는 자식이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 들으면 기이한 빛이 오락실에 있는 아들 위에 내려서 갑자기 새 사람이 됩니까? 은혜 받고 돌아가 보아도 은혜 받기 전에 비어있던 쌀통 은혜 받고 돌아가 발로 차 보아도 여전히 비어있고 돌 머리이던 그 애들은 여전히 그런 상태입니다. 아무리 예수 믿으라고 말해도 뒤도 안 돌아보던 남편, 저녁에 돌아가 보아도 여전히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은혜 한번 받고 뭔가 상황이 엎어져있겠지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만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평안이 부어집니다. 그 평화가 우리에게 강물과 같이 밀려옵니다. 우리는 가끔 강 같은 평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강물이 흘러오는 것을 막을 수가 있습니까?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에 가면 물이 풍부합니다. 들여다보면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산골에 물이 흐르는 것은 얼마나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흘러가는지 모릅니다. 강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흘러갑니다. 산골 물 막는 것은 포크레인으로 한 삽 퍼서 가운데 흙으로 막으면 금방 물이 막힙니다. 그러나 흘러오는 강을 막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것은 국가적인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통성기도 하고 그래도 모든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빗진 사람 은혜 받고 가도 빚쟁이가 또 돈 달라고 합니다. 쌀통에 쌀이 없었는데 은혜 받고 가봐도 쌀통에는 쌀이 없습니다. 공부 못하던 자식은 여전히 공부를 못해 속을 썩입니다. 그런데 변합니다. 이전에 은혜 받기 전에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돌 같은 자식들, 저 녀석들 때문에 내 인생이 고달프다라고 생각되었는데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그 아이들이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런 마음, 전에는 도저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미친 듯이 괴로워하는 그런 마음이 변합니다. 무엇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까? 상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물과 같이 밀려오는 영혼의 평안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당신과 관련된 인생들을 바꾸시는 방법은 절묘합니다. 누구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나면 그 영혼에 강물과 같은 평안이 밀려오고 자기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아픔과 갈등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을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움과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속에서 아픔은 없습니까? 아무리 마음이 열리고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지 생각하는 사람이어도 속상하는 것은 속상하는 것이고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나니까 괴로울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답답할 때는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이전에는 자신을 고통 하게 하는 환경을 합력 하여 이제는 나로 하여금 더 하나님께 나아가게 가까이 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누가 나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주면 마음속에서 칼을 갈고 죄를 쌓았을 텐데 이제는 마음속에 고통이 밀려오면서 눈을 감고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고통 가운데 마지막 결론은 주님을 더 섬기며 살아야지 라는 착한 결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착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눈물 흘리며 아파하는 것보다 더 큰 위로를 주시고 고통과 갈등보다 더 큰 평안을 주시고 그리고 아픔을 능가하는 더 큰사랑을 하나님이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고 그런 모든 힘이 영혼의 평안함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평안은 금이나 은 같은 없어질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 예수의 보혈의 피로 우리에게 열어주신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걸어가서 주님과 품에 안기며 주님과 함께 평화를 누릴 때 진정한 영혼의 평안이 그의 심령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임하는 평화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염려보다 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괴로움보다는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평안이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 어리석은 부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까?
여러분 돈 많이 벌고 마음이 편안이 있으며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마음에 나중에 편안이 오는 것이 아니라 기름이 끼게 됩니다. 기름이 끼게 되면 감각이 흐려지고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이 더 무지 무각하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유일한 만족이 되시고 당신의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인생을 지혜롭게 무엇이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지를 생각하며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오늘 성경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인생의 목표를 즐거움에 둔 것입니다. 육신의 즐거움과 영혼의 즐거움을 동일하게 생각한 것도 문제였지만 인생의 목표가 즐거움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목표를 즐거움에 둔 나머지 그 목표를 따라가다가 자신의 영혼의 무엇으로 만족을 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 영혼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사도 바울은 ‘내 영혼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고백을 통해서 자시의 섬김 중심에 영혼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은 먹고 마시고 쾌락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영혼은 하나님을 섬기고 갈망하고 하나님을 인하여 만족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우리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즐거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시며 즐거워하시면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의 인생이 고달파 보여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고 그리고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신앙의 성패 여부를 이 세상에서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가에 잣대를 재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면 대단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축복과 거리가 말 멀고 이 세상의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높임을 받는 장면을 목격해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우리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한없이 즐거워하시는데 있는 것입니다.
저는 10년쯤 전에 성경 하나를 보면서 눈이 확 열리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 복음 21장에 나오는 인생의 목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장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 아시리.
예수님이 세 번째 물으시니 베드로가 아 주님이 내 말이 안 믿나 보구나, 주를 다 버리고 도망가도 저는 당신 곁에 있겠다고 한 나였으니 그럴 만도 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에수님께 주께서 내 마음을 아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결국은 그런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상을 줘야 합니까? 벌을 줘야 합니까? 마땅히 그런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때 때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라고 말하면서 상을 주는 대신 순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21장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보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주님 너무하신다 그러면 누가 주님 앞에 가서 사랑한다고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성경구절이 이 다음의 우리의 의문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하나님이 베드로와 같이 실패한 사람을 들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예수의 놀라운 은혜로 쓰레기 같은 우리를 살리셔서 하나님께서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것이 인생의 목표지 먹고 마시고 그렇게 사는 것은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살아온 인생인가 하나님을 위한 인생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인생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락은 술 먹고 못된 짓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일락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그런 식으로 일락에 빠진 삶에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주신 생명도 점점 고갈됩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살고 주님을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살면 우리가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하나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더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자녀로 살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삶에 목표는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인생가운데 주님을 기쁘게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고통받으면서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면서 우리의 뜻대로 우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패역을 고치기는커녕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았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말할 수 없이 즐겁고 또 우리도 주님을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여 이 한세상을 마음껏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즐거워하는 그런 인생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영원을 준비하는 삶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 20-21)
이 부자는 궁리를 많이 한 끝에 좋은 묘안을 하나 내었는데 그것이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거기다가 거두어들이는 곡식과 그리고 곡식과 바꾼 물건들을 잔뜩 쌓아두고 앞으로 자기가 할 행동까지 미리 연습을 한 것입니다. 한해만 농사를 잘 지어서 한 해 쓰는 것만 풍족히 있어도 걱정이 없는데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쌓아두어서 거듭되는 흉년이나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의 부유함은 자신을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평안하고 자신의 영혼더러 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람 나름대로는 참 지혜로운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감탄할 만한 지혜는 아니지만 이 부자는 자신이 쾌 대견스러워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자의 생각이 그리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묘사이고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의 재주와 방식으로 세상을 것들을 따라서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우리가 이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장해 보려고 하는 이러한 지혜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발휘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제 읽은 성경구절에서 하나님의 평가와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교훈이 나옵니다.
우선 주님은 이 부자를 가상적으로 말씀하신 다음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면서 이제 사람이 동일한 상황에 대해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평가는 어리석은 자여 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기껏 궁리를 하고 궁리를 하여서 최상의 해결책을 만들고 자신도 스스로를 대견해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놓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한마디로 달랐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보다는 어리석은 것이 분명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비교할 때에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평균수준도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리시기를 이 어리석은 자여 라고 말씀을 형의 유업을 나눠달라고 하는 자에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한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어리석은 자입니다. 누가 그 신묘막측한 그 지혜를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예화) 얼마 전 영동지방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1미터의 눈이 왔다고 합니다. 차들이 대 관령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갇혀있다고 합니다. 대 관령은 지금은 눈이 별로 안 오지만 예전에는 눈이 한번 쏟아지면 시외버스가 눈 이 오면 잘 구르는데 그런데 눈이 많이 왔을 때 차가 구르면 그 해 겨울에는 눈 이 너무 많이 와서 꺼낼 수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눈이 많이 오는 곳입니 다. 강원도 지방에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그것이 몇 트럭이나 되겠습니까? 헤 아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다 만드실까를 생각하면 참 신 비합니다. 스키장에 눈이 안 오면 제설기가 밤새도록 돌아가면서 눈을 만들어냅 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만든 눈을 맞아보면 빙수입니다. 눈 같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만드는데 밤새도록 몇 대의 기계가 돌아가면서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구름을 명하사 보내시고 눈을 보냅니다. 눈이 많이 와서 버스 안에 서 보는 광경은 황홀합니다. 눈이 많이 싸이고 가지가지마다 눈꽃이 핍니다.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생각하셨으며 만드셨겠습니까? 욥기에서도 논쟁을 하면서 감탄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그 신묘막측한 은혜를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이 옵니다. 그러면 이제 말랐던 나무에 물이 오르면서 잎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연구대상입니다. 파란 잎이 오르면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온산의 색이 일주일 단위로 달라집니다. 연한 연둣빛에서 짙은 녹색에서 나중에는 시커먼 녹음으로 변합니다. 전 또 그런 상상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하루면 잎이 몇 개씩 더 생기는데 그것을 다 뜯어 모으면 몇 트럭이나 될까? 그것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만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어쩌면 그렇게 신비한 자연을 신비를 통해 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봅니다. 큰 것만이 아니라 미물을 가장 작은 곤충이나 짐승을 들여다보아도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이 다 만드시니 아이큐 150인 사람이나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잘생긴 사람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만 그 앞에서는 똑같은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 신묘하고 막측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자연의 세계를 움직이시는 것에 대해 수많은 법칙과 실제들을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간이 파악한 것이라고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것들은 이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우주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보같이 우주 이곳에서 저 끝까지 100광년이다 150광년이 다 700광년이다라고 자기네들끼리 논쟁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가진 지혜가 유한한데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겸비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예배 마치고 교회밖에 나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압니까? 한치 앞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의 기원부터 이 만물이 진행되고 어디로 가는지 한꺼번에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인간이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너는 평균수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과 비교할 때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라 평균적인 인간들과 비교해도 너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왜 하나님이 그 사람도 인격이 있는 사람인데 그를 평균도 안 되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한가지를 계산하고 생각한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는 그 계산이 한가지 사실을 빠뜨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부자의 편에서 무엇 그렇게 멍청한 일을 하였습니까? 곡식이 소출이 많아져서 그냥 그대로 나두면 썩으니까 창고를 만들어서 넣어두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하고 바보 같은 이일을 한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내 영혼아 잘먹고 잘 지내자라고 말한 것도 보통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빠뜨린 것은 것이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생각을 빠뜨린 것입니다. 죽음이란 것을 삶 속에 계산에 넣지 않고 건축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부자는 자기가 그렇게 모든 물질을 모아두고 물질이 있는 동안만큼 자신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생명에 대한 확신은 습관에 불과 할 때가 많습니다. 다음달에 만납시다 그러고 이 달에 죽을 수도 있고 내일 만나자고 해도 한 사람은 나무로 만든 침대에 않아서 만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언제나 죽음이라는 것의 불시에 방문을 받을 수도 있고 곧 내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눈뜨게끔 만들어 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그런 내세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성공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머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부에 대해 탐닉하는 생활을 너무한 나머지 영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은 영혼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겠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또 가난하여서 먹고살기에 바빠서 고달픈 사람은 고달프기 때문에 평안한 사람은 또 너무 편안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해 관심을 못 갖게 됩니다. 그런 사이에 자신은 적절하게 자신의 내세에 대해 대비를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언제든지 이 현세에 살면은 불안하고 또 불안하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이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증세가 영혼에 찾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커다란 신앙이 없어도 인생의 본모습을 바로 바라보면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장사 집에 가서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것은 화투치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술 마시기입니다. 잔칫집에는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이 죽어서 슬퍼하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장사 집에 가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또 싸우기까지 합니다. 밤새도록 고스톱 치다가 잃은 사람은 핏대 내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왜 사회의 인습은 그런 것을 너그럽게 봐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사람이 죽기 직전에 아픈 사람을 곁에 두고 고스톱 치고 술 먹고 싸우는 것을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를 인간들이 직시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 자체를 주목하면서 애도하고 슬퍼하고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싫은 것입니다. 고스톱 치고 술 먹고 싸우는데 정신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이 죽으면 웃어른 이 문상을 가지 않습니다. 사위가 죽거나 며느리가 죽어도 어른들은 문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물론 부모를 남겨두고 죽었으니 불효하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연세가 많은 사람은 가까운 사람이 죽어도 문상하지 않아도 실례가 되지 않는 것이 우리 나라의 관습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것은 노인들을 향한 배례입니다. 저희 할머니가 남의 일 돌, 무슨 일은 다 돌아다니시면 도와주셨는데 누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면은 그곳에는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인간은 죽음을 직면하기 싫어하는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처럼 죽음을 예찬하는 종교도 참 드뭅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괴로움과 죄만 있는 곳 이곳에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그렇게 해서 죄와 슬픔이 없는 죽음 너머의 안식의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형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믿고 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죄에 대한 형벌에 한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죄에 대해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러 가는 거룩의 한 과정입니다. 그러니 죽음이란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찬송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수고를 다 거두신 후에 우리를 부르실 때 참 소망에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가는 한 다리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상한 생각까지는 잘 믿고 신앙이 들어가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게는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하고 평균적인 인간이라도 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 세상이라는 것이 돈 많이 있다는 것만으로 바랄 것 없다는 생각은 인간이 조금만 신경 쓰고 정상적으로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혀 모르는 마르쿠리아우렐리우스 같은 로마시대 사람은 교회를 혹독하게 박해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기 전에 제가 참 좋아하였는데 이 사람의 글을 읽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왜 그럽니까? 그 사람의 글을 통해 인생의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허무함 등을 말입니다. 그리고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신앙 밖의 사람도 깨달은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의 진지함과 그리고 인생에 그런 것들을 계산에 넣고 살아야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예화) 어느 집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군산의 횟집에 얼마나 사람들이 회를 많이 먹으로 오는지 많이 팔리는 날에는 하루에 매상이 1억이 된다고 합니 다. 하루에 그 집에서 8톤 트럭이 없어지고 50명의 종업원들이 접시를 들고 다닌 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회 한 접시 먹겠다고 그 집사님이 군산까지 갔는데 저 앞에서 차가 뒤에 오던 차가 앞으로 튀어나가 달리더니 나중에 끽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고가 나서 2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가 던 길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니까 삶에 대한 기대가 바뀌어 그 자리에서 돌아 서서 다시 서울로 왔다고 합니다. 생선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역시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너는 평균이하라고 것입니다. 조금만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영혼의 행복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을 모으고 평안하고 마음껏 먹고 즐긴다고 해서 인간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 이 수준에 안 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그래서 언젠가 시편 23편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하였지 않습니까?
(예화) 한번은 병원에 심장마비 환자가 왔는데 손에 무엇인가를 꼭 쥐고 있었는데 나중 에 의사가 그 손을 펴보니까 화투 두 장이 들려있는데 삼광과 팔광이 들려있습니 다. 화투 치다가 삼팔 광이 나오니까 설레 가지고 광광광 그러다가 죽은 것입니 다.
그것보고 우리는 웃지만 사실 그렇게 죽은 사람이나 요즘 통장 몇 개 움켜지고 죽은 사람이나 땅문서 들고 내 땅 땅 하고 죽은 사람이 나 뭐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닙니까? 결국은 우리들이 이 하나님의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우리는 정말 내세를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시렵니까? 내세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 어리석은 부자의 수준밖에 안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결국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살아서 자신의 몸을 대속제물로 바치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에수님은 생애진실에 직면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죽으셨지만 주님은 잠시 후에 있을 부활의 상급을 바라보시면서 잠시 받는 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잠시 괴로움과 시련과 아픔과 고난을 개의치 않으시고 그것과 비교되지 않는 큰 영광 가운데로 주님은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 자체가 이처럼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부활시킴,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실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시면서 고난을 다 당하신 것인데 그런 우리들이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결국 탐욕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서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사랑한는데서 비롯되는 뒤틀린 사랑의 작용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을 다 끊고 나면 그러면 이 세상에서 탐욕에 대한 많은 것들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음 직전의 순간에 직면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는 무욕의 마음이 됩니다. 그러니까 욕심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운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잠시 지혜로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상을 이기는 중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을 처절하게 경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곡식이 많이 거둬지고 소출이 많이 되어도 사람이 곡식과 물건으로만 사나 하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였어도 이 부자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평가는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적당히 멸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할 때는 우리는 그래 네가 내 눈에 눈물이 흐리게 한다마는 몇 해나 더 그렇게 하나 보자 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눈물흘림을 몇 칠 더 담고 내 갈 길을 다가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이 찬송가 작사자는 아예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시민권이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물 흘림을 몇 칠 더 담고 행할 길을 다 가고 날이 저물어 오라고 하시면 그렇게 믿음을 지키고 살았으니까 영광 중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고 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입니다. 이러한 내세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다른 모든 방면에서 지혜롭게 처리하였지만 기초 자체가 자기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기초를 하나님이 발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지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농사를 지어서 곡식이 수없이 많이 거둬들이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여야 하게겠습니까? 여러분이 직장을 다니는데 공고가 붙었는데 회사 사정이 좋아지고 수출이 너무나 많이 늘어나서 300%의 보너스를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문제는 창고를 짓고 곡식을 보관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이 사람이 이렇게 현실만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마음쓰지 못하고 산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곡식이 많이 쌓이면 창고도 짓고 보너스를 받으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통장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물질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세를 위해 살도록 주신 기회이면 달란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곡식을 주셨으니 창고를 지은 다음에 다 모아들인 다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일단 제가 보관합니다. 주님 쓰시고자 하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일단 제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였다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물건과 이런 것들을 쌓아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판단을 하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생 살면서 항상 미래를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죽음을 건너가고 나면 사랑하던 물질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결혼을 하였어도 죽을 때까지 만나는 계약 결혼입니다. 그러니까 자식도 잠시 있다 사라지는 관계입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남편을 남겨두고 존경하는 부모들을 버려 두고 끔찍이 사랑하던 자식들도 버리고 이 땅을 떠나면 오직 내 구주 예수 한분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그 분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만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나 이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제 보고 나면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니 우리도 주를 알리
안보일 때 믿음이란 것이 필요한 법입니다. 사람도 속을 모를 때 그래 내가 너를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지 시커먼 속을 다보고 나서 그렇게 믿는다고 할 말이 있겠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소망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뵈옵는 것이 소망인데 다 이루어지고 나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주님만을 사랑하려고 하면 자구 거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뭔가 주님을 향해 올려보내는 사랑의 멜로디가 자꾸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자꾸 곤고하고 갈등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면 이 사랑은 눈물이 없는 사랑입니다. 기쁨과 평화와 은혜로운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사랑은 계속됩니다. 동질의 사랑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음껏 주님을 사랑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죽어라고 이 세상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천국이 지겨운 지옥이 되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해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갈 리도 없지만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찬송하고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 인생의 모든 계획을 세움에 있어서 언제나 한가지 사실은 잊지 말라고 하고 게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담대하게 아멘 아멘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밤에 네 영혼을 취하면 네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시고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죽음이 뜻밖의 사건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영혼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산다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산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우리 영혼에 대한 관심을 말할 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서 불순종함으로 거의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니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 있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나니까 살게 됩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나서 부흥을 누리던 사람들이 사 다시 범죄하고 패역한 길을 걸어가면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하고 그리고 아무 소망도 없는 사람처럼 죽은 자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될 때 영혼에는 깊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그렇게 우리들이 내세를 준비하며 산다라는 것은 현재를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방종하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세 이 현세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사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완전한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원에 대해서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 있게 죽음을 맞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큰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감히 누가 저는 정말 이 세상에서 잘 살았습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의 부끄럼도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더라도 지나간 길을 돌아보면 우리는 믿음을 따라 살아온 길과 불신앙을 따라 살아오던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주님을 믿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날이 가슴에 밀려오고 마음 아픔이 밀려옵니다.
저는 20살 정도에 예수를 믿었는데 가끔 연세 드신 분들이 이렇게 일찍 예수님을 알았으니 얼마나 좋을까라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 기분이 좋은 기분이 아니라 명절 때 오랜만에 본 친척이 ‘어 너가 이렇게 많이 컸니? 길거리에서 보면 못 알아 보겠구나’ 라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예화) 그런데 언젠가 목사님들 모임에서 목사님 한 분 한 분이 자기 소개를 하는데 어 느 목사님은 54세에 목사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제는 나이가 70세에 접어드는 데 참 목회를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 하시는 이야기가 나이 30인 저 에게 이렇게 일찍 하나님 앞에 살아가니까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하십니다. 그러시 면서 당신은 그 시절에 천방지축 술 먹고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일찍 주의 종이 되겠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분 이야기가 자기 나이 30살 들어서면서 하나님께서 주의 종이 되라고 부르셨는데 그 목사님은 ‘하나님 제가 축복은 바라지 않을 테니 저 잘사는 것 훼방만 놓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잘 사는지 보 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돌아다니다가 40이 넘어서는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반대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들어서 뿌리만 남고 꽃이 피어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구린내가 나고 감람나무와 같이 귀하게 되 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와 같이 천하게 되고 결국은 사업도 망하고 좋아하던 사람 들도 다 배신하고 떠나가고 마지막에는 몸까지 사형 선고를 받고 이리 채이고 저 리 채이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그 곳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고 나이 40이 넘어서 목회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다짐을 하였다고 합니다. 20대의 팔팔한 사람이 와도 신학교에서 헤매는데 나이가 든 사람이 와서 그런 처지가 되어서 신 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 길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참 이상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30에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시기에 놔 두셔요 저대로 살겁니다. 라고 말하고 20년 털어먹고 왔으면 당연히 70까지 산다 면 40년이 20년으로 되었으니 할 일을 반만 시키시겠지 그렇게 생각하였더니 내 가 그 동안에 못한 일 그대로 미루어 두었다가 덤텅이로 씌우셨다고 합니다. 나 이가 드니까 심방을 가도 산동네를 올라가도 몇 걸음을 못 가서 허덕거리는데 그 런데도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을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50에 목사가 될 때는 그 저 작은 교회를 하면서 돌보다가 나중에 죽으면 너는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 으면 젊어서는 제가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그래도 늙어서는 목사를 하다가 왔 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하였더니 하나님이 계속 자기 교회를 부흥시켜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0에 목사가 되어 교회가 커지니까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자꾸 주님 없이 불순종하던 날들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심방을 하거나 교회를 돌보거나 집회를 다니다가 피곤하면 이런 생각을 한 다고 합니다. 내가 왜 젊어서 하나님이 시간 줄 때 일 안하고 막판에 농축해서 고난을 당하니까 벌받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그분이야 마지막에 농축해서 지워진 십자가의 짐을 졌으니까 마지막에 죽은 다음에 할 말이 있지만 끝까지 미꾸라지처럼 뺀질뺀질 주님 만나기를 거부하다 십자가 짐 같은 고생 그것 싫어서 돌다가 마지막에 주님이 그러면 관둬라 라고 말하시면 그 사람 인생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패기 처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못살고 사명을 주었더니 그것은 감당하려 하지 않으면 그 인생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패기 처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하나님 앞에 쓰임도 받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의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이야기가 이런 것입니다. 사실은 힘들고 고달픈데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결론은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고 이제 잘 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혼을 위해 준비하는 최선의 길은,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길은 영혼을 위해 가장 잘 관심을 갖는 비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충만할 은혜가 가득 찰 때가 있습니다. 또 바닥으로 한없이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닥으로 내려가 있을 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뭐 좀 잘 살고 있을 때 주님이 부르셔서 가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충만한 속에서 인생의 수고를 다 끝내고 이제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느라고 늦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는데 그 여인은 31에 칼빈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 40에 칼빈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그 여인이 살아있는 동안에 제네바의 종교 개혁 동안 칼빈에게는 대적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물고 늘어졌습니다. 뭐 사생아가 있었다더라 그리고 혼외 자녀를 두었다더라 든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여인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은 꿋꿋이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여인이 죽을 때 숨을 몰아쉬면서 헐떡거려다가 죽으면서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면서 죽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여, 우리 믿음의 조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이 당신만을 바라보나이다. 부활의 소망이신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늘 소망하면서 사니까 죽을 때 그렇게 훌륭한 고백을 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아직 죽지 않는 부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음 이후에 천국은 어떻게 가게 되고 그곳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축복을 받는지의 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부인은 그것을 들으면서 서서히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죽음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더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그리고 일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숨길수가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산 사람과 인격적으로 진심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산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섞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삶의 소망은 무엇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진정한 희망과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황혼이 깃들여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결국 신자의 소망은 죽음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보다 완전한 죽음을 통해서 맛보게 되는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워하면서 잠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살도록 허락하신 그 때에 한번밖에 없는 그 기회에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섬길 수 있는 그 단 한번의 기회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의 이 바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잘 준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히 하면서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부자가 ‘오늘밤 네 영혼을 취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많은 것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있는 것이라고는 창고를 넓혀서 넣어둔 곡식과 재물밖에는 없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생명을 부지하고 살 동안에만 소용이 있는 것이지 죽어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밤에 네 목숨을 취하리니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는 뜻밖에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서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은 말하길 아직 40도 안 넘었는데 어떻게 복음에다가 생명을 걸 수가 있겠느냐는 말합니다. 예수 믿으려면 한 60쯤 되어서 명퇴하고 애들 다 출가시키고 적적해지면 이제 그때가 되면 자기가 교회를 나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70이상 살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일찍 폐기 처분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십시오.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 것도 주님이 무엇하게 하시려고 하심입니까? 하나님 섬기면서 살게 하시려고 은혜를 많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고 경배하면서 살게 하시려고 죄 있는 죄인들을 깨닫게 하시고 변화를 주시고 인격적으로 승복을 시키시고 남이 모르는 신앙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진하고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남아있는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부모님의 은혜를 한없이 받고 그래서 부모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헌신을 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하고 사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항공기를 조정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택시를 모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가계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학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삶의 한 양식일 뿐이고 그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부모님을 공경하면서 사랑하다가 죽는 것이 효도의 근본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 그러면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늘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런 삶으로 한결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에 오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또 그 은혜로 그렇게 삽니다. 잘못하면 회개하고 회개 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생이 도대체 살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벌써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회갑잔치 때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환갑이라는 이것이 말이나 됩니까?’ 라고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당신이 환갑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문학작품에나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단한 착각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신학교 때 친구들과 모여서 낄낄거리고 교수들 흉내나 내던 그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머리가 희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월 흘러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상 가는 것 금할 길 아주 없네
그러면서도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겉 사람은 후패하여도 소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운 사람들은 날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새롭고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맛보면서 감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감격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이 있으니까 괴로운 인생 길을 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목마르지 굶주리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살다가 죽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힘닿는 데까지 주님을 마음을 다해서 섬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며 살면 그것이 바로 가장 미래를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을 오직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 두시는데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재물을 쌓아두는데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 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둡니다. 왜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둡니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물질을 쌓아두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인색한 것이 이 어리석은 부자와 같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물질뿐이겠습니까? 자신의 건강과 재능 많은 것들이 하나님을 위해 쓰여질 때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중에 우리의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도록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어리석은 부자가 어리석은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물질을 자기를 위해 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공부해서 남을 주어야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섬기면서 살도록 우리는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슨 재능과 직업을 가지고 있던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며 드릴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하고 그분께 마음을 드리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비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정리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의 세상은 무엇인가를 쌓아두기 위해 부름 받은 세상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그것이 소망이 되고 이유가 되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또 물질도 관리하고 저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 닫는 대로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도 주십니다. 건강이나 물질이나 뜻밖의 좋은 지위도 주십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영원을 향해 주님을 섬기면서 사도록 주시는 도구들입니다. 그것을 각지 가지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사랑하면 재물이 많아져도 그것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는 대신 많아진 재물을 가지고 섬기다 보니까 섬길수록 하나님이 더 귀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 시간 ,재능 기회들을 주님을 위해서 쓰고 바칠 때에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을 통해서 영혼에 대해 멀어지고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니까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순수해지고 하나님을 향해 더 순전해지고 온전해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이 세상의 모든 수고를 끝내고 내게로 오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 다한 일 많아 부끄럽네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관 주시리라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육체의 껍질, 근심, 죄의 요소 이 세상의 걱정, 우리의 육체에 한계 이런 모든 것을 벗어놓고 하나님과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소망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지혜로운 성도들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지혜롭고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