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세미나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녹취자 : 김세나
이제 우리나라의 조선공업이 많이 발달했는데 한 40만 톤, 50만 톤 이렇게 되는 60만 톤 되는 배들도 나온다고 그래요. 그러한 커다란 배는 갑판의 크기가 축구장 네 개, 혹은 네 개 반을 모아 놓을 정도로 그렇게 큰 갑판입니다. 그 갑판에 아무 짐이 없어서 자유롭게 사람이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배가 망망대해에 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를 걸어갑니다. 손에는 나침반이 들려 있고, 그래서 북쪽을 향해 가야되겠다 라고 결심을 하고 나침반으로 북쪽을 가리키는 쪽을 향해서 계속 걸어갑니다. 그 배의 크기가 길이가 막 500m씩 되니까 상당히 걸어가도 자신은 계속 북쪽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믿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그 배 전체가 자신은 갑판위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도 그 배 전체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은 계속 배 위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도 배는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교회의 성장, 성장 문제도 우리에게 매우 시급하고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나침반을 바라보면서 북쪽으로 걸어가는 이 발걸음을 좀 멈추고 배 전체가 바다위에서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에 대해서 이렇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이유는 앞의 두 분의 강사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일 년이면 천개 교회 이상이 목회를 그만두고 문을 닫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실제로 교회가 세워지면 3년 뒤에까지 살아남는 교회가 열 교회 중에 한 교회가 안 된다고 하는 통계가 나오는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 성장에 대해서 우리들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성장을 가지고 고민을 한다고 해서 성장을 하는 것 같으면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고민만 하면 성장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우리 단순히 교회의 문제뿐만 아니라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하에서 진리라는 절대 가치를 거부하고 흘러가는 세상의 정신, 산업화 사회 그리고 이 가정들이 깨어지는 문제, 이러한 사회적인 많은 문제와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풀기가 간단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오늘날의 그 사조와 당장 우리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우리의 선택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정말 우리가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그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마다 목회를 하는데 어느 교회는 수만 명씩 모이는 교회도 이 있고, 어느 교회는 오랫동안 목회를 해도 백여명도 안 모이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본질로 돌아가고 애를 쓴다고 해서 모든 교회들이 그렇게 커다란 대형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늘에는 크고 빛나는 별도 있고, 작고 빛나지 않는 별들도 있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를 이렇게 여러 개의 지역 교회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게 하실 때에 그 때에 그 교회가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고 다양하고 또 어떤 사람이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설교를 해도 절대로 큰 교회가 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먼저 마음을 내려놓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 본질로 돌아가면 큰 교회가 되든 작은 교회가 되든 이것은 주님의 주권에 있다고 보고 작게 하든 크게 하든 상관이 없이 본질에 충실하면 작은 교회도 충성스러운 교회가 될 것이요, 본질로부터 멀어지면 큰 교회도 하나님 앞에 잘못 세워진 교회가 되지 않겠어요?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1970년대가 굉장한 폭발적인 성장의 시기였습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 운동과 함께 한국교회가 굉장히 많이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기 때문에 사실 마음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많은 위로를 받았고 또 이 세상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교회에서 발견하면서 종말론 같은 것에 깊이 심취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열렬한 기도운동과 전도운동으로 교회가 70년, 80년이 지나면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성장이 전 세계의 교회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서 산업화 사회에서 일궈낸 그 한강의 기적과 버금가는 영적인 발전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거기에는 아주 긍정적이고 좋은 면들이 있죠. 예를 들자면 성령 중심의 전도라든지, 기도 중심의 신앙이라든지, 복음 중심의 생활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한국교회에 좋은 유산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성장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이제 한국교회의 각계각층에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한국교회가 귀하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보자면 그런 시기들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굉장한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제발전 과정에서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영적인 것들을 계량화 하는 문제라든지, 목회자의 권위를 비성경적으로 절대화하는 문제라든지, 교회의 물량주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었거든요. 미국에 있는 교회의 기준으로는 1850년대, 그리고 한국의 교회를 기준으로는 1960년대, 70년대까지만 해도 안 그랬던 것 같아요. 70년대까지 기준으로 보면 사실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사이기 때문에 더 많이 존경을 표하고 또 작은 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시하고 하는 그러한 경향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사회를 기준으로 보면 19세기 중반, 그러니까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목사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분명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자리 매김이 분명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들이 목사이지만, 큰 절의 승려를 우리들이 더 존중하고 작은 절의 승려를 덜 존중하고 저는 뭐 불교 신자가 아니니까 불교 안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불교 안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해요. 또 천주교에서도 신부들이 계속 이동을 하는데 큰 성당을 맡고 있는 신부는 뭐 우리들이 볼 때에 굉장히 높게 생각하고 뭐 작은 시골 성당 맡고 있는 신부는 하찮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개신교 안에 훨씬 더 강하게 베어있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자본주의 정신이 개신교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온 것을 보여준 것이죠.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참된 교회의 성장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생각하는 성장이 세 가지인데,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모든 이 그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이 지성에 있어서 성장하는 거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성경의 진리가 어떠한 것이고 인간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에서 잘 자라나서 예전보다 훨씬 더 지성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성장의 첫 번째로 뽑고 있는 성장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인격이 되는 거죠. 첫째가 지성의 성장이라면, 두 번째는 인격의 성장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다운 진실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교회 성장의 두 번째 요소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교회도 기본적으로 시설을 유지하고 조직을 지탱해 나가야 되니까 그러니까 사실 사람이 모여야지만 교회가 존립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교회는 존립 자체가 교회의 목적일 수가 없어요. 교회는 존립 자체를 위해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가 교회가 잘 올바르게 성장해서 아름답고 큰 교회가 되는 것은 비난할 일은 없지만, 그러나 좀 더 우리들이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교회가 참 그렇게 성장하고 성장한 그것이 정말 올바른 성장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 자체가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참된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건물이나, 교회의 영광은 건물이나 교인들의 수나 아니면 목회의 독창성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참된 요소는 그 곳을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그것이 그 지식이 그 인격에 영향을 미쳐서, 그래서 예전에는 아무렇게나 살던 사람들이 참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그 교인들의 숫자가 많았을 때 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폴란드가 공산화 될 때, 기독교의 인구가 95%였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침공했을 때 별 저항 없이 모두 공산주의에 굴복했습니다. 우리들이 그 일제시대 때에 혹은 공산치하에서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이 되었는데, 그 때에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을 한국의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여러분들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 기독교인의 그 숫자라고 하는 것은 1% 미만이었어요. 그런데 세상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죠. 그러니까 많은 숫자를 형성해서 인해전술처럼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가 세상에 끼칠 영향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를 혼돈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캄캄한 밤바다에 배가 해안으로 저반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조명탄을 수천발을 쏘아서 대낮처럼 해변을 밝히고 배가 들어오면 제일 좋겠죠.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등대 하나만 제 자리에 빛나고 있으면 그 해안의 캄캄한 어두움은 오히려 등대의 불빛을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하나의 등불만 올바르게 비추고 있어도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조명탄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교회는 그 등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이 그렇게 찬란한 태양 빛처럼 그러한 희미한 등불이나 등대불이 필요 없는 광명한 세상이 되어서 하나님이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그렇게 충만하게 되는 시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지만 그 날이 도래하기 전까지 교회는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고, 소수인 교회의 유용성은 사람들의 수에 의해서 그 교회의 참된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라도 몇 사람이라도 참된 신자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데 달린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수준이 심하게 저하되어서 그래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대로 그러한 비난을 받게 되니까 황급히 어떻게 하면 교회를 좀 고쳐서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뭐 선한 일도 하기를 도모하고 그러는데 그것도 사실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담을 만들거나 혹은 많은 신문지상의 선한 행실을 한 교회로 오르내리기 위한 그러한 도덕적인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번 교회를 교회로 오는 길에 사거리에 신호대기에 정차를 했는데, 옆에 은색 봉고가 와서 탁 섰어요. 이렇게 보니까 교회의 봉고에요. 그 교회 운전석 문짝에 교회 이름을 써 붙였는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그게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그게 뭡니까. 무슨 뭐 그 이름을 지은 분들에게는 심오한 뜻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무슨 황수관 박사의 신바람 건강도 아니고 교회의 이름이 뭐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죄를 짓고 무슨 돈을 횡령하고 하는 것이 세속주의가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 도덕적인 세속주의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인문사회학에서는 어떠한 종교적인 가치나 도덕적인 가치가 사회적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을 세속화라고 말하고 신학 쪽에서 세속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할 자리에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에 교회가 윤리적으로 욕을 먹기 때문에 윤리를 좀 개선해봐야 되겠다라고 많이 노력을 하는데 이것은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성공을 거둔 예는 지극히 드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질이 바뀌지 않는데 그 사람의 인격이 변화되지 않았는데 그 교회가 변화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오늘날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30년 전에 한국교회를 되새겨보고 30년 후인 지금의 살고 있는 교회의 시대를 되돌아보면 아주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허술한 예배당에서 블록으로 벽돌로 미장도 못한 채 호떡집의 의자 같은 것 놓고 앞에 성경 놓는 다이도 없이 예배드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에 비하면 오늘 예배당은 뭐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에요. 죄인이 수레를 타고 다니고 마차를 타고 다닐 때도 죄인이고 그랜저를 타고 다니고 에쿠스를 타고 다녀도 죄인이고, 로켓을 타고 달나라를 가도 그 운송수단과는 상관없이 죄인의 정채성은 항상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정말 하나님 앞에 30년, 40년 전 한국교회에서 그래도 들리던 선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되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하라는 선포에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는 복음적인 사실에 대한 메시지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지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몇 시까지 하면 됩니까 50분까지 하라고요?)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보는 거예요.
그래서 참된 중생과 회심에 대한 강조가 사라지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교회 안에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구성원이 되면서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의 형세를 하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숙제를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일단 내려놓으시고요. 그리고 교회에 돌아가서 교인들 이름을 다 적고 그 교회를 사랑하는 목회자가 아닌 한 목사로서 전도자로서 정직한 양심으로 한 사람씩 옆에다가 체크를 해 보세요. 이 사람이 내 교인이 아니고 남의 교인이라면 필요하면 만나서 상담도 해 보고, 아니면 여태까지 목회 하면서 그 사람의 행적을 보았으니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한번 확인을 해 보십시오.
제가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그 교회에서 부 목사님이 자기네 교회 자랑을 많이 해요. 그래서 좋게 들었죠. 그래서 이제 물어 보았어요. 당신이 이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장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대요. 그러면 신학교를 총신을 나오셨겠죠?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개혁 신학을 배웠죠?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인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니까 그럴 수 없대요. 반드시 회심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대요. 그러면 양심의 손을 얹고 목사님이 돌보는 교인이 몇 명입니까? 그러니까 500명쯤 된대요. 500명 쯤 되면 그 중에서 목사의 양심으로 이 사람은 반드시 중생했다, 구원 받은 사람이다라고 확인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몇 % 쯤 됩니까. 그러니까 20-30%쯤 될 거래요. 그래서 내가 따끔하게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나한테 뭘 자랑하는 거냐. 당신이 돌보고 있는 양떼 500명 중에서 20%밖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지금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당신들 교회가 점점 커지는 것이 나에게 어떻게 자랑할 거리가 되느냐.
지금은 있잖아요. 목회자들 자신이 저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일까라는 이 원초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안 해요. 지극히 죄송한 말씀드리지만, 저를 포함하여 묻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이 교회 성장에 대해서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고민하지만, 영혼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 있습니까. 저 영혼이 저렇게 오래도록 교회에 나와서 집사까지 되었는데, 저게 구원도 못 받은 저 영혼을 저것을 어떻게 할까. 아니면, 저 사람이 교회에 저렇게 오래 다녔는데 정말 회심한 것 같지가 않다. 그러면 결국은 그 사람이 교회에 와서 5년씩, 10년씩 교회를 다녔는데도 목회자인 내가 저 사람의 회심을 보증할 수 없다면 보증한 사람이 다 회심한 것도 아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의 운명은 얼마나 비참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러면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든지 그 영혼을 붙들고 고뇌해야 되지 않겠어요? 이러한 고뇌들이 우리 목회자들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죠. 역사를 보면 구라파에서도 교회가 세속화 되어 갈 때, 강단 밑에서 먼저 세속화 된 것이 아니에요. 목회자 자신이 그렇게 변화되는 거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목회 일정 속에서 최소한 주일 낮 설교는 우리가 할테니까 52주 설교 한 중에 마지막으로 설교자로서 가슴에 손을 얹고 나와 나의 교인들은 정말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저런 사람들이 정말 회개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는 구원이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치밀어 오르는 그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교한 마지막이 언제인지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우리가 큰 교회 되려고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목회를 해서 큰 교회를 이루고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질 좋은 조건 때문에 우리들이 목회의 길에 들어선 것 아니죠.
저도 21살, 25살에 소명을 받았습니다만, 맨 처음에 소명을 받고 목회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 잡혔을 때, 제가 꿈꾸는 생활은 이러한 생활이 아니었어요. 그냥 전도자로서 사는 것이 꿈이었고, 시골 교회 작은 교회에 가서 일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채마밭을 일구고 어구를 다듬으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는 것이 꿈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어린이 전도 평생 하다가 죽는 것이 꿈이었어요. 이미 목사가 된 그 순간에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수와 갈채, 이런 것들은 이미 버린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목회자들 속에 있는 이 큰 교회 목사님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의 표현, 작은 교회 목사님에 대한 지나친 하대 이런 것들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부끄러운 것일 수도 없고 자랑스러운 것일 수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의 참된 가치는 그가 얼마나 설교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우리들은 오늘날 목회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상당히 많이 겪고 있지만, 청교도들은 그것에 대한 생각이 분명했어요. 우리 목사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다가 죽은 사도들의 후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들도 많이 있고 선지자들도 많이 있는데 여러분, 그 선지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언을 했으면 우리가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소수의 무리를 놓고 예언을 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그 선지자를 멸시 했습니까.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가장 멸시를 받아야 하고 에스겔은 가장 하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존경스럽고 영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거지 선지자들일 것이에요.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교회에 깊이 들어온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상들이 얼마나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정말 목회자는 마치 이제는 커다란 회사를 경영하는 CEO처럼 변질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수많은 정책을 결정하고 대외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탁월한 행정가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금융이나 이런 것들을 해서 교회의 쓸 돈들을 모으고 하는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많은 헌신들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것도 목사로서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감옥 속에서도 기도하고 있는 빌립보교회의 성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그 교인들의 인격이 흠 없고 그리고 정결한 인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육체 속에 채운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이 목회의 영광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회심의 영광입니다. 한 영혼이 제 멋대로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 목사의 돌봄을 받고 자기가 죄인인 줄을 깨닫고,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이 회심의 영광, 이것이 목회의 꽃입니다. 큰 교회도 이러한 회심이 없이 성장을 한다면, 미래에 그 교회는 반드시 참된 부흥의 대적자가 될 것이고, 작은 교회도 이러한 진정한 회심과 그리고 영혼 변화의 진정한 축복이 있다면 그 교회는 작아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마지막 세 번째, 사도바울이 생각한 교회의 성장이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이 성장이었습니다. 그들의 인격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 사랑을 드러내는 그것이 바로 이 교회의 진정한 성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결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들이 본질로 돌아가서 제일 먼저 교회의 성장을 이 세 가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어떻게 하든지 내가 부지런히 탐구하고 성경의 진리와 함께 씨름해서 그래서 교인들에게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로서 먹여야 되겠다라고 하는 사명감에 불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 일부의 목회자들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없습니다. 설교를 다 듣고 났을 때 아 하나님은 그런 분이셨구나. 내가 참 성경을 모르는구나. 내가 정말 성경을 다시 배워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도록 그렇게 지적인 내용들이 설교에 채워져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저의 강의를 들으면서 지난 한 해 동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신학 책을 몇 권이나 읽으셨는지 한번 깊이 반성해 보십시오.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설교의 내용을 성경의 진리로 가득 채워서 이 세상에서 텔레비전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만담이나 우스개소리로 설교 시간을 채우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렇게 깊이 지식을 채우고 그 다음에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설교 사역이 하나님 앞에 정말 받으심 직한 그러한 설교사역이 되도록 설교를 교인들이 들을 때에 정말 저 목사님은 간절하게 설교하는 구나 그럴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예화 하나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죠. 박윤선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개척교회를 조그마한 것을 했습니다. 그 때 개척교회를 하시는 데, 그 교회에 마침 문선명 교파에 속한 이화여자대학교 어느 교수가 그 예배에 전도를 받고 출석을 했대요. 한 6개월 정도 출석한 다음에 부 목사님이 그 교수에게 물어보았어요. 교수님, 이제 박 목사님이 저렇게 성경을 설교하시는데, 이제 기독교의 진리를 알아들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교수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래요. 솔직히 나는 문 선생님 말씀이 맞는지, 저 박 목사님 말씀이 맞는지 아직도 좀 이렇게 확신이 잘 안 섭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저녁때 마다 와서 주일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 분명하게 느끼는 것은 있습니다. 저 분이 외치는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저 노고를 이끌고 저렇게 피를 토하듯이 울부짖듯이 설교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온 마음을 다해서 설교에 눈물이 젖어야 해요. 목사님들이 성경을 읽다가 매일은 그럴 수 없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성경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야 해요. 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시고 우리에게 이러한 소명을 주셨구나 하는 것들 때문에 펑펑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성으로 잘 정리해서 기도 많이 하고 한번 설교해서 교인들을 확 꺾어 놔야 해요. 그게 몇 달에 한번 정도는 그런 일이 있어야지 교인들이 꺾어지죠. 그렇게 해서 변화되는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서 목회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냥 죽는 것이, 그것이 목회자의 일생이지 무슨 그렇게 커다란 비전이 목회 사역에 있어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