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시련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고후 1:5
녹취자:이병두
고린도 후서는 신약의 예례미야서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목회자의 고난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에게 넘치는 것 같이’ 목회사역의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이 천년 전에 죽으신 그 고난을 영적으로 이 천년 후인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시 체득하는 것을 체화하는 그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참답게 복음사역을 하려고 하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식인종이 아프리카 밀림에서 벌거벗고 창을 들고 뛰어다닐 때는 식인종이 아닙니다. 단정한 옷 입고 래미안 아파트에 있어도 사람을 먹을 수 있으면 식인종입니다. 세상이 많이 변해서 달구지 타던 사람들이 자동차 타고 다니고,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다닌다고 해서 인간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은 사도 시대부터 처음부터 걸어 다니는 사람 비행기 태우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자전거 타는 사람 자동차 태워주는 것이 목회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목회자들은 자신의 사역의 본질을 직접적인 눈으로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부차적인 사역이고 주변적인 사역이고 어떤 것이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사역인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사역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싫어서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들이고, 그 예수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의 기질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교회에서 양떼라고 여기면서 목양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신나는 목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잠시 그럴 수는 있을 것입니다. 잠시. 그러나 그것은 잠시고 본질적으로는 목회는 살을 에는 것이고 뼈를 깎는 것이고 피를 흘리는 것이고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예화) 몇 달 전에 인덕원에 사거리에 차를 세우고 신호대기를 하는데, 옆에 교회 봉고가 붕 오더니 탁 서는 것입니다. 문짝에 교회 이름이 붙여 있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그래서 제가 참담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뭐 본인이야 신나는 것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 열 받는 교회’는 왜 없습니까? 참을 수 없는 이 가벼움들이 가득합니다. 목회사역 자체는 제가 어는 책에서도 썼지만 ‘너무 목회가 행복하다.’ 그러는 분들을 보면 제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 것은 둘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워낙 목회에서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이 목회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그 모든 걸 초월하신 분이든지, 아니면 목회를 한 면만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런 것은 한번 생각보아야 합니다.
옛날 교회 한번 보면, 이층에 서 있는 조그만 교회를 이렇게 쳐다보면 눈물이 납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교회를 하고 10년 동안 이층에서 저러고 있을까?’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또 어떤 젊은 한사람이 저기서 죽었겠구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목회 사역의 본질은 고난입니다. 오죽했으면 마르틴 루터가 ‘참된 설교자와 거짓된 설교자의 구분이 무엇입니까?’ 누가 질문을 했더니 ‘그가 고난 받으면 참된 목회자고, 고난 안 받으면 가짜다.’ 두 마디로 아니도 한마디로 칼같이 정리를 해버렸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자기의 신학적인 제자인 멜랑히톤에게 충고하기를 ‘당신은 설교할 때 당신 설교를 듣고 회중들이 화를 내든지, 아니면 설교를 하고 니가 니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게끔 설교를 해라.’ 그랬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멜랑히톤이 제자였고 목회 쪽으로는 부겐하겐이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신학적인 제자한테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고난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목회에서 이 세상의 영광이나 이 세상의 기쁨, 혹은 어떤 일에 성과를 내게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즐거움과 행복, 기쁨, 이런 것들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리 목회 사역을 사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종 큰 교회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기 교회를 무슨 자기 회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저는 아주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 사역을 아까 말씀 드린 것 같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반드시 고난에 넘칠 수 밖에 없는 사역인데, 만약에 그 사역을 고통이 없이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을 득도의 경지의 올려놓은 목회자 이거나 아니면 목회 사역에 초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여러해 전에 일본에서 무통분만이라는 것이 유행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와서 원하면, 아마도 무통분만을 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학자들이 무통분만과 유통분만을 경험한 사람들을 끝까지 앙케이트하고 끝까지 추적을 했습니다. 어떤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느냐하면 무통분만으로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이 후에 가정 관계에 아이들과 이 모든 것들에서 애정이 훨씬 떨어진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혼할 때 아이를 쉽게 포기한다던지 이런 것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회는 고난 속에서 목회를 하게끔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배우게 되는 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기독교 교리사에서 ‘유니오 쿰 크리스토(unio cum Christo)’라고 알려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교리는 정말 신비한 교리이고 그런 유니오를 통해서 우리들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간략하게만 설명을 드리면 골격이 이런 내용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천년 후에 목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목회 사역을 하는 중에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이 고난은 원인이 어디로부터 왔느냐도 중요하지만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환란과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아서 자기가 고생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데 나의 약함 때문에 잘 되지 않아서 환경과 자신 사이에서 이렇게 우겨쌈을 당하는 고통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든지 이런 고난이 오게 될 때 그 때 이런 고난들을 영적으로 잘 생각해 보면, 나의 개인적인 고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의미 자체가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영적인 연결이 끊어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적으로 살리심을 얻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인바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생 이 자체도 사실은 기독론적인 중생이고 교회론적인 중생입니다. 중생이 내 편에서 보면 나 한 사람이 구원을 얻어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이지만 교회론적으로 보면,개인의 중생은 그리스도 몸 전체가 확장되어 가는 수단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분량만큼 교회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붙어서 한 지체로서 우리들이 주님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은 내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든 몸에 공동체적으로 성례전적으로 봉헌되는 고난입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니까 그런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실제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 이 천년 전에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 몸에 참예한 한 지체로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뱅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의 마침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에 참여하게 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이 살아있는 이 사람을 덮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덮으니까 그 죽음의 기운이 삼키면서 사람들이 죽는 것입니다. ‘사망이 우리를 삼킨다.’는 것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죽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죽는게 아니라 육체의 죽임이 그리스도 육체를 죽이면서 오히려 영혼은 살아나게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적으로 우리 속에 리액트 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육에 속한 성품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회를 하면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모든 고통들을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내가 체득하고 자기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이 목회를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목회자를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드시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교회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놀랍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고난이 없는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부패와 잘못된 교회론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상에 있어서나 영적인 능력에 있어서나 신비한 경험에 있어서나 은사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서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교회의 초석을 세운 사도들 중 한사람 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이렇게 내가 충분히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손에 넣고 이렇게 움직이고 조작할 정도로 가지고 놀고 있을 수 있는 정도의 이런 것이 아니라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해일처럼 밀려와서 자신을 덮쳐버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그 고난 속에서 내가 고난을 가지고 놀고 조작하기는 커녕 그 고난에 삼킨바 되어서 나도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 까지 가게 되는 그런 고난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사역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역을 하다가 고통이나 어려움이 올 때 그것이 환경적인 것이든지 혹은 사람을 통해 오는 것이든지 나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서 오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연하다. 가족도 없이 염려할 식구들도 없이 그냥 나 혼자 혈혈단신으로 그렇게 목회를 한다면, 우리 목회의 짐이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짐을 그대로 지고 목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끊임없는 우환이 겹칠 때도 있고, 심지어는 불신가족이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내와 남편이 마음에 화합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질병 속에 고통을 받으면서 목회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적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짐을 지고 갑니다. 계백이야 싸움에 나갈 때에 가족들의 목을 베고 나갔지만, 가족들 모두 살려두고 그러면서도 계백 장군보다 더 열심히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련과 고난들이 밀려옵니다. 그때에 목회자가 별다른 사람입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연약한 형제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너무나 깊이 만났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을 너무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이 주셨다는 이유 이외에는 모두 연약한 지체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 것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마음을 흔들고 수많이 근심들이 안팎에 있으나~’ 찬송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기 때문에 목회를 내려놓을 생각을 한다든지 고통스럽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서 있는 이 자리를 피해보려고 생각하는 것은 목회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축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군인들은 이렇게 평화롭게 월급을 받으면서 전쟁 없이 살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비상시기이고 전쟁이 나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면 이것이 정상적인 군인의 삶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뒤바꾸어 생각을 하면, 남들 다 도망가는데 자기만 고생한다는 생각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 사역이 항상 불벼락이 쏟아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안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올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분 아는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도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도직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처음에 은혜 받을 때는 안 그랬는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까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정말 사도 맞아! 자기 혼자 만났다는데 그게 진짜일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이 그 유명한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내가 나의 사도된 표는 너희들이 나를 사도가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사도인 증거를 너희들에게 두 가지를 보여 주겠다.’ 그 첫 번째가 참음이었고, 두 번째가 기사였습니다. 기사는 여러분 알다시피 원더로우서핀입니다. 큰 능력을 행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이적적 은사였습니다. 그것을 뒤에다 놓고 첫 번째 앞에 둔 것은 참음 이었습니다. ‘내가 사도가 맞다. 증거가 뭐냐 하면, 내가 오래 참았잖아! 내가 진짜 사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참았을 수가 있겠니!’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목회의 본질에 도전하면서 바르게 목회하려고 하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안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불안전하고 눈물 흘리며 씨를 뿌려도 오늘 뿌린다고 내일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잘 당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 성공한 목회 바라보시지 마십시오. 오히려 고난을 잘 감당하는 목회를 바라보십시오.
(찬송)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런 믿음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의 목회 사역에 늘 깃드는 것은 감사할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 사역을 해서 교회를 예쁜 가정처럼 만들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본질적인 목회사역에 끊임없이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저보고 그럽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누가 나에게 목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목회란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것, 그것이 목회다.”라고 말입니다. 저도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고 저도 인간이니까 힘들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때마다 주님 앞에 한 기도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받으십시오. 성공을 추구하지 말고 옳은 것을 찾고, 선한 것을 추구하시면서 목회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는 당신의 종들을 어떻게 대우하시는가? 그것은 위로입니다. 이 위로는 반드시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주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껍질일 뿐이고 진짜 위로는 영적인 위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참여하면서 그의 죽으심이 나의 이 내면의 세계 속에 재연될 때, 죽는 그곳에서 살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새 사람의 성품, 그래서 우리들이 죄 지은 것을 깊이 회개하고 나면, 올바르게 살고 싶고, 무기력함 속에서 깊이 깨어나고 나면,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위로는 바로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로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어떤 기쁨과 위로를 찾으려고 하면, 그것은 영혼에 빨간불이 들어 온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고통스러운 일,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들이 도구가 되어서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섭리, 그 뜻을 알고 주님을 배워가는 그것이 말하자면 진정한 목회의 본질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로는 고난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사랑의 놀라운 힘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을 때, 자기 남편 이름 부르면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때로는 욕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노라면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리기에 얼마 있다가 다시 둘째를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고난을 받고 위로로 치료되고, 또 고난을 받고 위로로 쓰다듬어지고 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없으면, 그것이 목회라고 하더라도 모두 가슴 속에 한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선 없습니다.
언젠가 목회자들이 저희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드 파크 야외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데 교회를 개척한 두 목사가 제 옆에서 절친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습니다. “삼년이 채 안 좋았어!” 옆에 있는 목사가 “맞아요. 맞아!” 그러더니 저보고 “목사님‘ 그렇죠!” “그게 뭔데요?” 교회 개척하고 삼년 동안은 개척을 한 사람들 하고 너무 가족 같고 행복하답니다. 그런데 삼년이 지나면서 부터는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부부가 권태기가 오는 것 같다고 하면서 “목사님도 그랬죠?”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교인들을 한 번도 부부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우린 권태기도 없었고 갈등기도 없었습니다. 저를 사랑하던 교인이 저를 버렸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고, 제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제가 버렸다는 느낌도 제가 받은 적도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만약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의 몫이라면 회피하지 않고, 그 위로를 사람에게서 구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에게 ’주님, 제가 이렇게 아프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고난을 통해 주님을 배웁니다.‘
그래서 칼뱅 선생이 자기의 글 속에서 십자가를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성숙시키고 순결하게 하실 목적으로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용하시는데 그 사용하시는 모든 환경과 여건이 고난이다 십자가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믿음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맨 처음에 이 길에 들어설 때 우리들이 찬송을 불렀던 것처럼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니’ 그런 마음으로 목회의 길에 접어들었으니 목회의 기쁜 일이 없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난다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는 고통을 당하는냐 안 당하느냐가 아니라, 이 고통이 내가 올바르기 때문에 오는 고난이냐 그릇되기 때문에 오는 고난이냐 그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목회 사역을 해 나갈 때, 아마 우리의 사역 속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어려움이 산처럼 파도처럼 커서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오늘 목회하다가 고난 때문에 과로사를 하던지 핍박을 받는다든지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생스럽게 목회 안 해도 되고, 안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람함 링컨이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랬다고 합니다. ‘적군들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편에 서서 올곧게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탐구하고 알고 사랑하고 그대로 살고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토해놓고 가는 그것이 우리의 목회 사역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기대하지 않아도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진리를 토해 놓으면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어둠 속에서 그 진리를 붙잡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줄기 빛처럼 지나가는 것이 목회자의 일생이고 이쪽 하늘에서 쫘악하고 별똥이 떨어질 처음에는 어두운 하늘 아래 아주 분명한 하얀 선을 그리면서 떨어지지만, 몇 초 지나지 못해서 아무도 볼 수 없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떨어지는 별의 최후인 것처럼 우리 목회자의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유명해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부르심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