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투스 크리스투스 교역자 스터디
녹취자: 장형주
(조희숙 전도사님) 저는 이 시리즈를 들으면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이루는 연합의 관계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와 너무 똑같이 일치 하는 것을 묘사 하는 것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 역사하시는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토투스 크리스투스라는 것이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는 교리인데 이것은 모든 보이는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섬기는 것, 그것이 지상의 교회의 사명이라고 ? 실질적으로 이 시리즈 중에서 4번 테이프?를 들으면서는 그리스도의 연합에 중점을 맞추어서 목사님이 설교 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
가장 은혜가 되었고 기억에 남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서 머리와 몸의 관계를 유지해 가시는데 그 가운데 있어서 실제적으로 원리적인 연합도 이루어지고 실제적인 연합도 이루어지지만 실제적인 연합에 있어서 개인이 겪는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교회적으로 연합이 이루어질 때는 단지 그냥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 정말 ?뿐 아니라 그 연합이 교회 공동체에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함께 사랑하는 하나 되도록 이끌어 주는 것,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순종한다고 했을 때에도 그 공동체의 순종은 단순한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순종이 돼야 한다는 측면이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실은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뜨려지게 하시면서 공동체의 순종과 일치를 이루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을 성화의 어떤 도구로 다루어가는 모습들을 설명하셨습니다.
(오숙녀 전도사님) 인간의 영혼은 중생과 함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을 목사님이 영적이고 신비적으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원리적인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생명을 누리며 공급받으며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그런 교회를 이야기 하셨는데 여기에서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서 유지되고 통치에 의해 유지되는데 있어서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은혜에 사로잡혀야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가는데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는 이유가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접붙임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나를 통해서 교회를, 교회를 통해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접붙이셨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두 번째로 교회로 하여금 한 몸을 이루고 잘 섬기라고 접붙이셨다.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 ?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나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접붙이셨다고 말씀하셨고 여러 지체들이 올바른 교회론과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잘 이루어졌는데 교회와 신자와 공동체적인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서 말씀을 통해서 ?
(여성사역자)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듣고 공부하면서 교회됨의 영광스러움을 셍각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토투스 크리스투스 이것은 아직 지체로 붙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들으면서 사실은 가상칠언과 더불어 내가 교회됨이 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역이 십자가 앞에서 이루셔서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보편적 교회에 한 일부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또 이 설교가운데 말씀하신 것처럼 일치되어서 하나 되어 나아가는 것이 교회의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하는 방법이 실질적으로 그런 연합을 공고히 하면서 나갈 수 있는 것이 사랑과 순종이다 하는 부분을 들으면서 다시 교회 안에서 살아나갈 때에 어떤 태도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실천적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김찬제 목사님) 서두에서 토투스 크리스투스 교리가 신자 됨의 여부와 상관없이 지상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알고 섬겨야한다는 것이 사명이라고 하는 교리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고 연합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리고 이런 연합의 성격들 이런 것을 이야기하시면서 끝에 가셔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이중적 연합에 대해서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을 말씀해주시고 또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을 섬기야 되는 교회의 사명과 관련하여서 교회가 실제적인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전히 그 사명을 감당할 없다는 것,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이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의 이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교회들이 끊임없이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은 그 일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목사님이 여기에 대해서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한다고 하셨던 그것, 교회 안에서 보여 지는 어떤 부조리들과 모순들을 우리가 잘못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헌신하면 그것을 섬기는 것이 실제적 연합 속에 있는 성도들의 의무고 사명이라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성 사역자) 설교를 들으면서 개인의 신앙생활이 공동체적 사건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그 은혜 생활을 하는 것이나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비루하게 사는 것 자체가 공동체적 사건, 자기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특별히 실제적인 연합 가운데서 목사님이 그 십 여년 전 집회에 갔을 때 성도 고백들을 거론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정말 사랑하신다는 것, 예배당 마당을 밟을 때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예배당에 들어올 때 그 순간부터 성령의 임재와 눈물이 나는 그런 은혜체험들을 성도들이 사경회 기간 동안 많이 했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개인의 신자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정말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느꼈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함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 가운데 채운다는 그 사명 자체가 계승 됐다고 말씀하시면서 제가 이러한 교리에 대한 지식은 알고 있진 않았지만 청년 시절에 시골에서 교회생활을 할 때 교회의 분열과 아픔가운데서 그냥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기도한 그런 체험들이 생각나서 그게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그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성사역자) 이 설교를 듣고 요약을 하면서 중등부 첫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딱 강단에 올라갔는데 아이들이 절반은 고개 숙이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찬양을 부르는 시간임에도 찬양은 전혀 부르지 않고 동물원의 원숭이 쳐다보는 양 바라보고 있을 때 정말 그 영혼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정말 목자의 마음이 정말 여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을 마땅히 받은 신자로서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결론에서 마지막에 교회의 생명력이 있는 비밀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셨을 때 그 답으로 목회자의 죽음이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제가 아직까지 죽지 않은 그 영혼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그 영혼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애타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들이 생각나게 되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그 마음과 그리스도께 붙잡혀 있는 연합된 상태가 우리에게 더욱 더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연합이 신비한 연합이라고 목사님 말씀하고 계시는데 경험되어지지만 지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또한 우리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영혼 안에 거주하시므로 성령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신비적 연합을 이룬다는데 이러한 신비적 연합을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가 있고 보여줄 수 있을까 했을 때 어제 목사님이 기도회 하면서 말씀하신 가운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지나간 자리가 나의 삶 속에서 보여질 때 그런 신비적인 연합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김재한 목사님) 저도 개인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공동체적인 사건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한 성도도 마땅히 그런데 교역자로서 섬길 때는 얼마나 이것이 중요하고 또 무겁게 생각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 교회에 아픔을 끌어안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바로 머리이신 예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목사님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그렇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몸 된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내가 속한 유년부나 열린 교회에 있어서 얼마나 마음을 생각하면서 기도했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면서 좀 더 많이 마음을 내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희찬 목사님) 저도 이 설교를 통해서 신앙생활이 개인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특별히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통해서 모든 좋은 것들, 특별히 창조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생각하면서 정말 이 모든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공동체적인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의현 목사님) 저는 계속해서 보고 듣고 하면서 이런 식의 교회론의 접근이 배워본 적이 있던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또 독특하게 기억났던 것이 예전에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추천선가 어딘가에서 서철원 교수님이 이 책의 백미는 성화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해서 아주 목회적으로 잘 진술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게 정확하게 여기도 또 나온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지만 공동체적으로 그렇게 해서 교회론을 접근하는 것들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왜 이것을 안 가르치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굉장히 조금 낯설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배운 것과 비교해보면 낯설면서도 굉장히 기존의 사역자들이 선교단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교회론적인 부분에 관해서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게 뭐가 아니냐고 이야기 했을 때 이야기 하지 못했던 부분을 신학적으로 풀어낸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교회의 전체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따뜻한 사랑 같은 부분도 느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통치 같은 것? 그래서 이렇게 옳지 않은 생각, 옳지 않은 사상들에 대해서 이렇게 전체적으로 다스리고 그래서 이렇게 목회자가 진리의 교훈으로 이렇게 전체를 하나 되게 하고 교정시켜주고 영적인 의사같이 이렇게 섬세하게 다루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분들에 관해서 이야기 하신 대로 신학적인 부분, 인격적인 부분, 그 다음에 깊은 영적체험 이것들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목회자로서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 있구나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 시간들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원리는 전에도 제가 한번 이야기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미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사건 자체를 통해서 우리 자신은 일단 분열한 사람들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우리들이 로마 가톨릭에서 나왔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로마 가톨릭이 사도들과 전통적으로 보편교회 교부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에서 이탈되었고 그리고 이제 종교개혁은 사실은 그것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예외 없이 교부들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에 기본을 이루었던 위대한 신학자들이 원래부터 개신교 신학자였던 사람들이 아니라 가톨릭 신학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가톨릭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가톨릭 신학자나 가톨릭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가톨릭 신학자나 가톨릭 수도사, 가톨릭 목회자들이었는데 선두에 나간 사람들은 아무래도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수도사들도 이때는 단순히 수도사라고 볼 수 없는 게 뭐냐면 그 당시에는 수도사들 기독교 지성에 흐르던 두 맥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학이었고 하나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근데 수도원의 수준이 대학보다 못지않게 높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각도에서 보면 그 사람들이 고민했던 게 뭐냐면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원래의 가톨릭 사람이나 개신교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초창기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들이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묘사하고 그 전통들을 청교도까지 계속 끌고나갔던 이유가 뭐냐면 관심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사실은 모르겠습니다. 더 많이 공부를 했더라면 어디선가 더 빨리 찾을 수 있었겠지만 저의 짧은 학식과 독서로서는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관점이 열리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나의 지성에 굉장히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목회를 하면서 매우 힘든 시험의 시기를 지나게 하시면서 사실은 그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던 옛날에 읽은 내용들을 정리하고 보니까 맥들이 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 발견한 이야기를 제가 설교 속에서 간간히 묻어서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우리는 처음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상세계를 창조하시고 지상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에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은 천사들입니다. 천사는 하나님과 가족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시중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운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천사들을 모두 다 하나님께서 소멸하신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면 사실은 궁극적인 관심은 뭐냐면 하나님이 천상세계와 함께 지상에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만큼 우월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중심인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성경을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하나 창조하셔서 ‘각자 상관없이 알아서 살아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자연의 모든 세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그 세계들이 전부다 연결을 이루었습니다.
(예화) 어제 밤에 기도회하고 돌아와서 다큐멘터리를 한 번 봤는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지구라는 다큐멘터리였는데 태평양 한 가운데서 배가 침몰했습니다. 물에 떠다니는 요만한 작은 장난감 오리 있지 않습니까? 그 컨테이너 박스가 이제 풀어지면서 배가 침몰하면서 그게 뚜껑이 열리면서 26,000개의 오리가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서 다 쏟아진 것입니다. 그게 한 16개월에서 18개월 후에 발견됐는데 해양학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알라스카부터 시작해서 동남아, 미국에서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해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난류가 쭉 해서 북극으로 올라가면 물이 얼음과 만나면서 어떻게 됩니까? 차가워지지 않습니까? 차가우면 어떻게 됩니까? 밀도가 높아지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가라앉습니다. 가라앉으니까 이게 그냥 가라앉는 게 아니라 가라앉으면 저쪽에서는 이게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지구 전체를 휘돌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차가운 북극에 가라앉은 해류가 다시 해서 북극으로 돌아오는 데 천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게 잠수정을 타고 내려갈 수 있는 게 얼마 안됐습니다. 지금은 만천미터 이하까지 다 내려갑니다. 거기에서는 죽음의 바다일 것 같은데 놀랍게 해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맨 밑바닥에. 이게 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연관을 이루고 있는데 인간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각자 알아서 살게끔 만드셨다고 하면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그렇게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무엇이었냐면 그들을 하나님과 가족처럼 살게 하시고 가족인 그들이 또 다른 가족처럼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인간의 집단들이 뭔가 상호유기체성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너무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는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탁월한 영혼의 기능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기능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이 성향이지만 내재적으로는 경향성이지만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지성과 의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정은 의지 쪽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럼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아는 것이고 의지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로 만드셔서 그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사회를 만드신 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흙을 두 덩어리를 만드셔서 하나님이 성 평등주의자라고 생각하는데 남자들이 성경해석을 전행하고 신학을 주도하면서 여성들을 성경에 근거 없이 깔아뭉갠 것입니다. 그리고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해석으로서 성경의 해석을 심각하게 굽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크리스쳔 페니스트들의 주장에 대해서 모두 동조하지는 않지만 그러니 이제 기본적으로 나는 성 평등주의자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보면 웃겠지만 그러려고 애를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교회에서 여성교역자들의 권익이 향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흙덩어리를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의 신체의 일부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은 뭐하면 여성이 남성에 대한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속이라고 볼 수 없는 게 흙보다는 인간의 갈비뼈가 훨씬 고품질입니다. 원재료가 다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하나는 흙이고 하나는 이미 인간의 갈비뼈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우월성을 따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뭐냐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만약에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가 남녀의 사랑 이런 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가족이 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식이고 자기 아내고 자기 남편이고 손자고 다 이렇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 모든 인류가 서로에 대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공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인간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이 죄가 들어오면서 다 깨졌는데도 못 깨뜨린 겁니다. 그게 뭐냐면 인간 안에 인간이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고 한자가 서로 기대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런 개념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형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면 유배를 보내는 것입니다. 인간 집단에서 따로 떼어서 고립시키는 자체가 죽음 다음의 형벌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수련회가서 독방 주는 것은 대우해주는 것이지만 감옥소에서 독방은 징벌입니다. 거기서 정신이상까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그런 존재인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강영안 교수님을 만났는데 13장 마지막 편 설교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 들어봐야겠다고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독자적인 나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전체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은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사랑의 나라라고 보는 것입니다. 난 정확하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린도전서 13장만 안 읽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안 읽었습니다. 내가 13장을 완성하고 읽는다. 월요스터디 하는 형제가운데 고린도전서 13장 읽고 에드워즈 것 보고 이렇게 공부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긴지 아시겠습니까? 에드워즈 것보단 제 것이 더 양이 많은데 목사님 보고 쓰지 않았는데 너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게 그리스도 그 다음에 사랑.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결국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개념이 사실은 우리가 발견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신국론의 그 완성이 신국의 완성이 사랑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세상나라에 대한 것들 자체가 결국은 사랑의 변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각도에서 이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맨 처음 그렇게 만들려고 했던 나라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아담이 하와를 그렇게 사랑하고 그 다음에 자식을 낳고도 사랑하지 않았겠습니까? 근데 그 자식에 이어서 자식이 자식을 또 낳는데 그 형제들끼리 살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현저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근대국가의 개념을 볼 때 이것은 단순히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이번에도 프랑스에서 14억 이상 버는 사람은 75%의 세금을 가져가겠다고 하니까 갑부들이 지금 망명신청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냐하면 어떤 때에는 나라가 우리의 어마어마한 것을 가져가고 재산을 축내고 심지어는 우리를 죽이기까지 하면서도 우리가 이 사회를 못 떠나는 이유는 뭐냐면 결국은 그런 사랑의 그림자를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인간은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립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들이 결국 좌절하는 것입니다. 이 후에 생겨나는 많은 갈등들은 그런 사랑의 성향과 능력은 남아있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만들려고 하다가 보니까 거기에서 수많은 이익집단들이 생겨나면서 가정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 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원래의 인간의 창조하신 의도대로 사랑을 하는데 그것이 잘못된 세계관과 잘못된 동기로 오염이 되어버리니까 사랑을 하면 할수록 그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전라도 사람들과 경상도 사람들이 다 말아먹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 대해서 그렇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고향에 대해서 묻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근데 그렇게 해서 그런 사랑을 자기의 동향 속에서 실현하려고 할 때 그때 타향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반감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면서 사랑이 오히려 엄청난 미움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미움자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성취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게 완전한 성취가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과도기에서 여기를 향해 가는 종자 씨를 하나 심으셨는데 그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근데 교회가 완성된 신국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완성된 신국은 이 모든 것들의 갈등이 끝난 상태인데 여기서는 이쪽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남은 것들이 함께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두 개가. 그게 바로 조지 엘던 라드(George Eldon Ladd)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already... but not yet'의 contrast인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바로 그런 것이 된 것입니다. 근데 세상에는 그런 두 개가 already... but not yet 이런 형태가 아니라 이미 희미하게만 그런 것을 가지고 있고 옛날의 정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런 상태입니다. 그것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현실적으로 우리들에게 엘던 라드는 Penetrate라는 단어를 썼는데 침투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안에서 두 개가 함께 싸우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결국은 가족이나 가족관계나 모든 것들이 신국론의 개념으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빠서 할 시간이 없겠지만 뜻을 세우고 아우렐리우스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한번 읽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워낙 두껍지만 한번 읽고 나면 여러분들은 그래도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맨 듣던 이야기 이니까.
그래서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냐면 이런 식의 교회관을 교부들이 찾아낸 것입니다.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쭉. 이것들이 보편교회의 신학으로서 전수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근데 개신교에서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근데 사실은 1대, 2대까지 내려오면서 사실은 그것을 무한정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발전시키는 것 자체가 그 당시로서는 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갈라져 나온 개신교를 카톨릭이라고 이야기하고 카톨릭을 separatist라고 이야기 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더 발전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자들 속에 갖고 있었던 그 그리움은 카톨릭입니다. 보편교회입니다. 여러분 칼빈 이야기하지만 칼빈이 말년까지 카톨릭과의 연합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 하든지 카톨릭과 연합하려고 시도한 아주 온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제 그런 점에서 현저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생각을 갖다보니까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개신교회에서는 universal church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catholic church에 대해서. 그러면서 교회끼리 물고 뜯으면서... 그래서 제가 이 교리를 깨닫고 나서 우리교회에서 보편교회에 대한 강조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아웃리치나 이런데 가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 저변에 보편교회 사상이라고 하는 이것들이 깊이 깔려있기 때문에 사실은 이 교인들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교리를 깊이 깨달은 다음서부터 제 마음속에서 단 한 번도 교회가 작다고 무시하거나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경멸하거나 마음에 어떤 모진 감정을 가지고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구도 속에서 이 교회론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아마 책을 찾아보십시오. 이런 이야기들을 발견한 것이 휙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점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나 테르텔리아누스나 이레네우스나 무슨 책이든지 서너 번만 읽으면 지금 내가 이야기한 사상이 수천 년의 세월동안 교회 속에 면면히 깔려져 온 사상이라고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찢어 가지고 나간 히폴리투스나 이런 사람들의 글 속에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이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신학을 할 때 사도전승 중에서 무엇을 읽냐 하면 성직자를 서품할 때에 올리는 기도를 한 번 읽어보십시오.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 한글로 되어있습니다. 쉽습니다. 라틴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닙니다. 게을러서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그니깐 뻥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대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뻥 칩니다. 덤벙덤벙하면서 브로커처럼 뻥치는 것 있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브로커같이 그렇게 건들건들 다니면서 뻥 치는 것입니다.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엄청난 작품들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일부를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면면히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야기를 제가 책으로 쓰고 있지만 18세기 슐라이어마흐 이후로 신학교육 자체가 성도 모두를 아우르는 교육이 아니라 성직자전문교육으로 완전히 이분화 되면서부터 이제 이런 것들에 대한 모든 의식과 감각들이 성도들에게서 깡그리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이기주의와 교회끼리 서로 물고 싸우고 하는 그런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집착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면서 그 다음에 이 교회론을 가지고 고린도전서13장을 들으면 아주 이해가 빠르게 되리라고 그렇게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그러면서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교회가 단순히 사랑만하는 나라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려는 게 가족과의 관계지만 궁극적으로 나라이지 않습니까? 나라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왕이 있어야 합니다. 법보다는 왕입니다. 법을 왕이 만든 것입니다. 왕이 만들려는 의도와 다른 법은 재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왕정국가에서. 왕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거기에는 법도가 세워질 것 아닙니까? 그럼 단순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랑의 나라는 그것은 사랑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아나키즘(anarchism)을 만약에 지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어디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전 인류가 산상수훈대로 살아간다면 변화 안 받은 사람이 왕이고 은혜 못 받은 사람이 왕입니다. 이쪽 뺨 때리면 이쪽 뺨 돌려 대는데 이놈은 때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오리를 가라면 십리를 간다는 데 이놈은 맨날 바래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속옷 뿐 아니라 겉옷도 주라고 하시는데 은혜 받은 사람들은 다 벌거벗고 살고 짐승 같은 놈들만 옷 잔득 껴입고 맨날 바래다 달라고 하고 맨날 때리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식이 사랑의 나라가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죄 짓고 불순종하면 곤고해지고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고 마지막에는 자살까지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땅에 세우시려고 하는 나라가 사실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교회는 그렇게 되면 안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결국은 교인들이 회심해서 하나의 사랑으로 모이고 끊임없이 성화되어서 그 사랑으로 떨어져나가지 않고 계속 그 사랑에 말하자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지하게 하는 게 칼이나 몽둥이나 이런 것 가지고 교회 지하에 감옥에 가두고 인두로 고문하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나라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교회에서는 그렇게 안하고 진리와 성령의 은혜로서 그 사람들을 그 상태를 유지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사안이고 한번 여러분들이 찾아보십시오. 근데 개혁파 신학자들 속에서는 사실 이런 식의 교부들의 교회론을 계승하긴 했지만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이미 19세기 이후의 개혁신학들은 이 교회론의 ? 관계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토투스 크리스투스의 교리도 사실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교회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그리고 그것을 끌고 나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개혁신학을 해서 면도칼 같은 것으로 정확히 “넌 틀렸어! 넌 맞았어!”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그러면 칼빈파만 남을 것이냐? 쯔빙글리파만 남을 것이냐는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옳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도려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고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종교다원주의로 가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오늘날의 개혁신학의 이 형태를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학을 할 때는 universality와 particularity가 있습니다. particularity가 뭐냐 하면 우리가 정초하고 있는 신학입니다. 우리는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개신교도입니다. 아니면 루터교도라고 하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여기가 가장 성경적인 기독교를 계승한 입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의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particularity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이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기 그리스 철학부터 시작을 해서 사도들과 속사도교부들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들이 거쳐 내려오면서 갈라지고 갈라지고 갈라져서 지금 내가 지지하는 성결교, 칼빈 등등을 찾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은 이거대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이쪽 universality를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particularity에 대한 조명을 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독특한 신앙의 고백은 universality를 해석하는 상관관계가 계속 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universality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처음부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가 처음부터 사도바울이 딱 해놓고 나머지는 모두 믿지 말라고 이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석들이 전개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오해하고 올바르게 해석해 온 폭넓은 진폭들의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 때 사회에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선대들이 보지 못했던 성경의 진리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지 않았더라면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발견되어 내려오는 것들을 이 universality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particularity를 주장하는 것과 이것들의 이해 없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로슬라브 볼프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바르트를 인용한 것인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과 신앙고백이 다른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아무 생각이 없으면 당신은 훌륭한 루터파 교인, 훌륭한 개혁파 교인, 훌륭한 성결교 교인은 될 줄 모른다. 그러나 good christian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universality를 강조하고 particularity가 없으면 이것은 뭐냐면 온갖 해석이 가능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나 신비주의나 이쪽으로 모든 길을 다 열어놓는 것입니다. 왜? universality속에 그 길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뭘 계승해도 그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줄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게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 취급하면서 이 사람들이 우리의 선조들에게 자꾸 자신들의 원천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오류가 바로 이것입니다. particularity가 없으니까 universality가 주어졌을 때 그 해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입장이 없는 universality에 대한 해석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계속 말하자면 대화를 이룬 가운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학문을 하던지 간에 역사를 안 하고는 독선, 독단에 빠지게 됩니다. 주석을 한다고 하면 주석사, 교리를 공부하면 교리사, 그 다음에 교회성장을 공부한다고 하면 교회성장연구사, 심지어 종교개혁을 연구한다고 하면 종교개혁사학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사를 연구한 역사를 공부해야지만 자신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공부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너무 마음 아픈 게 뭐냐면 웨스터 민스터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다 뒤집어 졌는데 개혁신학을 잘 가르쳐 놨더니 그 청렴도를 가지고 제일 먼저 목을 자르는 복음주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도 잘못할 때가 있으니까 고쳐줘야겠지만 근데 더 나쁜 놈들이 많습니다. 세속주의 목 베야 되지 않습니까? 이교주의, 이교적 신비주의, 영지주의 이런 것들을 목 베어야 하지 않습니까? 근데 모릅니다. universality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particularity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을 공부하는데 이 속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증오심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딱 붙들고 뭔지를 조금만 가르치면 개혁주의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잠재적 동지입니다. 근데 이것을 저쪽으로 발전해가지고 개혁주의와 차이가 나서 계속 벌어지다가 저 놈들이 영지주의자나 아니면 율법주의자나 아니면 이교도주의자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제일 먼저 거기에다가 목을 겨누고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군 소멸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칼을 휘두르는 자기 자신만 남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칼을 가지고 교인들을 하나씩 마지막으로 자신을 찌르고 자살하는 개혁주의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최근에 우리가 읽는 책이 리차드 백스터와 존 오웬에 관한 팀 쿠퍼라는 사람의 논문을 읽고 있는데 그 사람도 이야기 하고 칼 트루먼도 이야기 했는데 무엇을 이야기 하냐면 ‘존 오웬은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그게 트루먼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칼빈주의자가 아니면 무엇이냐?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칼빈주의자나 아니냐 논쟁 많이 하지 않습니까? 논문도 많이 나오고 싸우지 않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들으면 웃을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야에는 칼빈이 눈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6세기를 살았던 많은 보편교회의 신학자 중에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한 신학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면 그들은 모두 보편신학을 토대로 신학을 이루려고 했던 개혁파 신학자들입니다. 개혁파의 particularity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지만 universality와 대화를 하면서 자기 신학을 이루려고 했던 인물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교회론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하고 언제 기회가 있으면 교부를 맛이라도 좀 보면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산상수훈이나 복음서나 로마서의 모든 설교들이 교회에 대한 이런 관점 속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근데 이런 큰 틀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모든 작품들은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교회론에 진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근데 지금 개혁신학에서 나오는 책들이 이런 흔적조차도 거의 발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그것들을 재복원해 내면서도 개혁주의의 particularity에 굳게 서서 그것들을 풍성하게 만드는 그런 교회론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다음으로 간절하게 쓰고 싶은 책이 신론하고 교회론입니다. 근데 아무래도 교회론 먼저 쓰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바짝 덤벼들어서 의문 나는 것들은 책을 또 읽고 이렇게 하면서 그냥 이렇게 숙제니까 한번 와서 했다고 하지 말고 끝나고 난 다음에 여러분 자신 속에 새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