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시는 하나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녹취자 : 오희열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2절부터, 왜 자신이 그렇게 고백하게 되었는지를 논증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불꽃놀이를 생각해보십시오. 포에서 쏘면 불꽃이 하늘을 향해 가느다란 연깃줄을 그리며 올라갑니다. 정상까지 올라간 후에 쾅! 하고 터지면서 하늘에 수를 놓습니다. 시편 23편의 5절이 바로 그 정상에서 작렬하듯이 폭발하면서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말씀이 이 5절에 담겨 있겠습니까?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번에 개역된 성경에는 ‘밥상’이라고 나왔지만 예전에는 ‘상’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절반 이상이 이 ‘상’을 졸업식 때 교장 선생님께서 주시는 ‘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말로 ‘슐한’이라고 하는데 ‘밥상’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밥상을 야트막하게 해서 티테이블 같은 곳에 차려놓고 소파 같은 것에 비스듬히 기대어 편안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본문속 ‘상’은 그 ‘밥상’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원수’가 복수로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로 나옵니다. 즉, 직역하면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에게 하나의 밥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발라주셨기 때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잔치하는 집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신랑신부가 혼인을 하고 하객들이 축하를 할 때 주인은 감추어두었던 가장 진귀한 포도주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하객들의 잔에 가득가득 부어줍니다. 그 넘치는 잔을 들면서 신랑신부의 혼인을 축하하는, 아무도 우울하고 슬픈 사람이 없는 잔칫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기쁨의 삶이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세상의 물질, 세상의 명예, 세상의 미모에 취해서 즐거움을 얻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 세상에 없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데 그렇게 우울하고 힘들어하며 살아가는지 말입니다. ‘상품’은 확실히 써보고 효과를 본 사람이 그것을 팔 때 그 상품에 대해 강력한 선전효과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이 고객이고 여러분이 복음을 파는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의 표정을 보면 그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항상 우울하고,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불같이 화를 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우리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가끔 이야기하는데 저 사람을 보니 효험이 별로 없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잔을 주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둘째 날 설교시간에 ‘영혼’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 ‘잔’이 있으면 거기에 물을 붓습니다. 한참을 부으면 당연히 넘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이러한 잔을 하나씩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잔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진리의 말씀이 아니면,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저렇게 거의 미친 짓을 하며 살아가는 이유, 우리가 30년, 4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욕망이 극대화된 것입니다. 이 영혼의 빈 잔이 있어서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잔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인간들이 공허하다는 것은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순간적인 쾌락과 범죄, 악을 행하면서 그 순간순간의 쾌락을 느끼며 빈 잔을 채웁니다. 그것은 그런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질 수 있는 잔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최근에 이런 단어를 사용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기쁨’, ‘넘치는 기쁨’, ‘환희’, ‘감격’, ‘희열’, ‘가슴 벅참’ 등 써 본 적이 있습니까? 조용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우리도 언젠가 그랬던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자의식이 생기는 열네 살 때 교회를 끊었습니다. 교회를 가던 제 나이가 14년 2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계속 다니던 예배당을 그날 주일에도 가고 있었는데 둑길을 20, 30분 걸어야만 갈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말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확 밀려왔고 그 논둑에 엎드려서 14년 2개월을 산 그 아이가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는 물론 가난하기는 했지만 가난 때문에 운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못해서 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질문 때문에 울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신은 정말 있는가?’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수 없는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의 설교를 들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 엎드려 통곡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 2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울고 난 후에 눈물을 씻고 결심을 했습니다. ‘신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나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하고 무신론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다가 여차여차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제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불행한 일을 만나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인격적으로 설득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데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그렇게 눈물을 씻고 일어난 후에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작품들을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각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서는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참을 읽고 나니 계속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사랑하고 배신하고 죽고 죽이고 허무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상과 철학에 대한 책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다 읽고 나서 내 인생에 무엇인가를 찾았다고 생각을 했던 나이가 열여덟, 열아홉, 스무 살이었습니다. 문제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놀라워하며 책을 읽었지만 정작 그 사람도 인생의 말로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민을 할 때 밤마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데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 없이 깊이 고민하던 어느 날 그 새벽마다 들리는 종소리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쬐끄만 교회, 크기가 여기 성가대석만한 교회로 수요일에 혼자 걸어갔더니 톱밥 난로를 때며 20여명의 성도들이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깔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느 할아버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니까 삐그덕 삐그덕 하는 풍금소리가 들렸습니다. 철들고 나서 인생 처음으로 ‘아~ 평화롭다.’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문학에서도 철학에서도 사상에서도 아무데서도 줄 수 없었던, 심지어 부모님에게서도 받을 수 없었던 그 놀라운 평화를 그 밤에 ‘타다닥! 타다닥!’ 소리를 내며 타는 톱밥난로 옆에서 처음으로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첫사랑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거짓말을 티끌만큼도 보태지 않고 집에서 교회를 걸어가는데 발걸음이 구름 위를 밟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몸 전체의 체중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렇게 정신적인 방탕한 길로 갔을까 생각하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들어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내 안에 있는 이 빈 잔은 문학으로도 사상으로도 철학으로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어리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원 없이 돈을 써본다거나 술을 마시고 방탕해 본다거나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채워졌겠습니까? 안 채워졌겠습니까? 안 채워졌을 것입니다.
25년 전쯤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직접 읽었습니다. 서울 저 끝에 가면 수유리라고 있습니다. 한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는데 택시가 오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들쳐 업고 막 병원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이 사람이 쓰러졌는데 살려달라고 했답니다. 의사가 보니 이미 죽었습니다. “운명하셨습니다.” 합니다. 사람들이 가서 전화를 돌리고 가족들이 새벽에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의사생활을 20년이나 했는데 대개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펴고 죽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한 손은 쥐고, 한 손은 편 채로 죽었습니다. 의사의 경험으로 볼 때 저런 자세로 죽은 시신은 처음 보았습니다. 유족들은 울고불고하고 밖에서는 왁자지껄하는데 의사는 그 손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가서 그 손을 펴보니까 ‘투두둑!’ 하며 화투 두 장이 떨어졌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펴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38광땡이네!”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이야기인고 하니 상갓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친 것입니다. 돈을 다 잃었는데 새벽에 끗발이 붙어서 돈이 이만큼 쌓였습니다. 두 장 들어온 패를 펴보니 38광땡이었습니다. 돈을 다 쓸어갈 뿐만 아니라 거기 돈보다 더 많은 것을 사람들이 내놔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넌 패가 뭐냐?”, “무슨 패를 가졌냐?” 하는데 자기에게 들어온 38광땡을 보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엄마는 어디에서 태어났어?” 묻는 자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 우리 아빠는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하고 묻기는 합니다. 그 엄마는 자기 자녀들에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38광땡이 들어와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돌연사하셨어.” 하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웃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은 요만한 명함 크기만 한 동양화 두 개를 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땅문서, 집문서, 학위, 이런 것을 들고 펼치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고 자살합니다. 그것이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우리에게 맡겨 놓으시고 그것으로 하나님과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다가 가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미모를,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비상한 재능을, 어떤 사람에게는 큰 재물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잠시 맡겨두신 것입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재능 없는 사람을 섬기고 권력 있는 사람은 권력 없는 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돈 있는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없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이 그렇게 공허하고 허기진 것 이유가, 이런 것들을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그런 허무를 채우지 못해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끔찍한 일들을 서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정리할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 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충만한 가운데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고 영혼을 살려주시는 것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 기쁨, 환희, 희열을 경험했습니다.
두 번째, 왜 그랬을까?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 시인의 마음이 터질 것처럼 감격하며 기뻤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이”, “당신께서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한 상을 베푸시고”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서 밥상을 차려주신 것이 이 다윗에게 가슴 벅찬 기쁨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기쁠 수가 없나이다!” 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문학입니다. 이 시인이 왜 이렇게 감격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사와 관습, 신앙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는 양반과 상민이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시절에 살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양반의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상것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잡니다. 그러나 딱 하나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밥은 같이 먹지 않습니다. 동양의 문맥에서는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가족이요 형제라고 하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상민과 양반은 잠은 같이 잘 수 있지만, 식탁은 함께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상민과 양반은 형제나 혹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양반은 절대로 상님과 함께 한 상에서 식사를 들지 않습니다. 굶어 죽을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양반의 정신입니다.
성경에도 바로 그런 것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삼촌을 속이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아서 도주를 할 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추격해오고 한 번에 쓸어버리고 재산을 다시 회수해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을 건들지 마라. 좋은 말 할 때 건들지 마라.”하셨습니다. 라반은 그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합니다. “왜 그냥 갔느냐? 인사라도 하고 가야 내가 환송을 했을 것 아니냐? 우리가 돌무덤을 쌓아놓고 이 무덤을 경계로 절대로 너를 추격해서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평화롭게 지내자.”라고 한 것이 함께 밥을 먹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최소한 200만 명에서 많으면 300만 명 되었을 사람들을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이 모두 떨어진 후 그들을 위해 만나를 베푸십니다. 그 만나를 모든 백성이 먹으면서 우리가 한 식구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성찬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은 그 죄인들과 먹고 마셨으니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깨뜨린 것이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도전을 받을 때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소외된 창기와 세리들, 당시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밥상을 차려주심으로써 “너희들이 나의 형제다.”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요한계시록에까지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라고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한 상에서 먹는다는 것, 상을 차려준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 시인 다윗이 한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큰 상에 온갖 반찬과 밥을 차려서 낚싯줄로 달아서 구름을 통과하여 땅으로 내렸다고 상상하는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24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1년 정도 밖에 안 되었을 때 이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쓰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너무 감격을 해서 마음속으로 수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였습니다. ‘차려 주시고’ 는 히브리어로 ‘아라크’인데 원래 이 단어는 전쟁하는 것을 묘사할 때 많이 나옵니다. 군대가 행렬을 맞춰서 진을 짜고 배열을 하는 동작을 ‘아라크’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인을 위해서 상을 차려주셨는데 그 상은 아주 가벼운 밥상이 아니라 아주 화려한 식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 손님이 왔을 때 그 손님을 위해 어떻게 밥상을 준비하는가는 그 주인집에 그 손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한 부모에게 과년한 딸이 있었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지나서 시집을 가길 바랐는데 마침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 내가 그 사람을 데리고 인사 올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물었는데 딸은 우물쭈물합니다. 그래도 얼굴은 보자고 하고 데려왔는데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봤더니 너무나 아니었습니다. ‘저 남자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앉아서 인사를 하는데, “자네 고향은 어딘가? 부모님은 살아 계신가? 직장은 어디를 다니는가? 공부는 얼마나 했는가?”하고 물어보는데 대답이 전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얼굴도 별로이고 능력도 없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를 볼 때 미모를 봅니다. 남자분들, 맞습니까? 여자들은 남자를 볼 때 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능력은 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여자 눈에는 다 멋있어 보입니다. 바보 같은 남자 청년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머리에 기름만 바르면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착각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가 보니 남자가 능력도 없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정말 쓰레기 같은 남자를 하나 주워온 것입니다. 남자를 보내고 나서 딸을 앉혀놓고 이야기합니다. “얘야, 한번 밖에 안 하는 결혼이다. 저 남자랑 하지 마라.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기다려라.” 했지만 딸에게는 첫 번째 연애라서 맨날 방에서 울더니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나오더니 “엄마, 나 이 결혼 반대하면 죽어 버릴 거야!”합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사돈이 왔는데 그분들도 마음에 안 듭니다. 어쨌든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와서 전화를 합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 다녀왔어요.”, “그래.”, “내일 낮에 박서방과 갈 테니까 점심 줄 거지요?”, “그래.” 하고 툭 전화를 끊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신랑이 “나 배고픈데 밥 줘.” 합니다. 밥하기 싫어서, “조금만 참아. 이제 엄마 집에 가면 엄청나게 차려 놨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참아.” 하고 선물 하나를 들고 둘이서 덜렁덜렁 처갓집을 갔습니다. 집에 가보니 문이 그냥 열려있습니다.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쯤이면 이모까지 와서 부침개를 하고 고기를 굽고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조용합니다. “엄마!” 하고 들어갔더니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다시 “엄마!” 하니까 낮잠을 주무시다가 일어나셔서 “응, 왔니?” 하십니다. “아빠는 어디 가셨어?”, “볼일 있다고 어디 나가셨어.”,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절…” 하며 절은 받는데 속으로는 '아, 진짜 싫다.’하고 절을 받습니다. “엄마, 우리 배고파. 밥 줘.”, “응”하고 엄마가 나가더니 정확하게 1분 만에 상을 차려왔습니다. 상을 가져왔는데 자그마한 팔각상에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있고 밥풀이 말라 비틀어져 있는 상에 먹다 남은 밥 두 그릇을 놓고 거기에 찬물을 붓고 숟가락을 콱 꽂아놓고 반찬이라고는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를 달랑 놓은 것입니다. 그 상을 바닥에 “탕!” 놓는데 물이 찍! 엎질러집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게.” 하십니다. 그 사위는 지금 그 엄마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싫어! 난 네가 싫거든! 왜 네가 우리 집 딸이 너 같은 인간과 얽혔는지 난 정말 싫다. 진짜 싫다!” 이것이 밥상에 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해서 콩나물국도 끓일 줄 모르는 아내를 하나하나 가르쳐서 주부수업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첫해에 김장을 제가 심장에서 배추와 무를 함께 사다가 어떻게 담그는 것인지 시범을 다 보여주고 만들어서 땅속에 묻어주었는데 아주 기가 막힌 김치가 되었습니다. 하나하나를 다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요리를 잘합니다. 지금도 가서 식당에서 밥을 먹어 보면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요리를 잘하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주부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저는 압니다.
제가 교인이 1천 명 모일 때까지는 등록한 모든 교인들을 심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포기를 하고 그때부터는 부교역자에게 심방을 맡겼습니다. 그 중에 한번 있었던 일입니다. 50대 초중반 정도의 집사님 한 분이 와서 생애적인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자리에 그림같이 앉아서 그 긴 설교를 들었습니다. 요즘은 제가 힘이 없어서 부드럽게 합니다. 여러분은 당회장 목사님께 하도 많이 깨지셔서 부흥강사까지 와서 깨면 성할 데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따뜻하게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 앞자리에 앉아서 긴 설교를 듣고,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설교를 했는데 앰프가 제 목소리를 감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항상 터져나갈 정도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설교를 매 주일 100분씩 했습니다. 그런데 펑펑 울면서 은혜를 받는데 한두 달이 아니라 계속 그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교역자를 통해서 “아무개 집사님이 목사님께서 심방을 해 주실 수 있는지를 물어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닌데 목사님께 심방을 받고 점심을 대접하겠답니다.”, “그러면 절대 밥은 하지 말라고 해라.” 너무 고생하는 것을 아니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식당에서 간단하게 먹고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해라.” 했습니다. “밥을 하겠답니다.”, “하지 말라고 해라.”, “그래도 하겠답니다.”,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해라.”, “그래도 한답니다.”, “에이, 모르겠다!”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갔습니다. 예배를 11시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개인 주택이었고 옛날 집이었습니다. 절대로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은혜를 받습니다. 함께 심방을 간 제 아내와 몇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식사를 하십시오.” 라고 말하자마자 바로 상이 들어오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교자상은 처음 봤습니다. 교자상을 서너 명이 들고 세로로 들여왔습니다. 상을 놓았는데, 저는 그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밥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생애 최고의 밥상이었습니다. 제 입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조금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 한 끼 먹으면 사라질 밥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수고를 했습니까? 이거 할 시간에 기도를 좀 더하고 성경을 더 읽지 그랬습니까?” 했더니, 그렇게 공손하던 집사님이,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드세요!” 합니다. 그 밥상을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고 합니다.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열흘 전부터 김치와 밑반찬을 만들기 시작하고, 모두 직접 만든 것입니다. 3일 전에 준비하고 전날 저녁에 가서 싱싱한 것을 사다 두었다가 새벽부터 조리를 시작해서 예배시간이 딱 마쳤을 때 언니 두 사람과 함께 세 사람이 완벽한 요리를 끝내서 가져온 것입니다. 젓가락을 잡았는데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으셔서 반찬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제가 언제 목사님께 식사를 대접하겠습니까? 교인들은 많고, 이게 아마 마지막일 것입니다. 주님이 목사님을 통해서 주신 은혜가 너무나 커서 한 달 동안 간절히 기도하며 지혜를 달라고 하면서 이 밥상을 차렸습니다. 그중에서 얼마나 먹을 수가 있었겠습니다. 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예수의 사랑이 아니면 내가 왜 내 인생도 곤고한데 그 사람에게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겠으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겠으며 또 그가 누구 건데, 아마 그 밥상을 그의 아버지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엄마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절대로 남편에게 그런 밥상을 차려줬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거리십니다. 유독 유일하게 세사에서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차려준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그냥 밥상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절절이 담긴 하나의 잊히지 않는 선물이었습니다. 아마 누가 나에게 집 한 채를 사줬어도 그렇게 감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밥상, 그 불빛, 그 방이 잊히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집사님에게 저는 누구였습니까? 주님 안에서 너무 사랑하는 목사님, 너무 소중한 손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차려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찬물 부은 밥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의 공격을 수없이 받은 고추장 하나를 던져주신 것이 아니라, 왕의 밥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놓고 주님과 마주 앉아있는데 주님께서 시인에게 “얼마나 허기졌니? 이것도 좀 먹어 보아라. 이것은 특별히 산지에서 공수해온 반찬이니 이것도 좀 먹어 보아라. 이것도 몸에 참 좋단다. 이것도 먹어 보아라.” 그 광경을 구름같이 수많은 다윗의 원수들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수들은 다윗을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아주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원수들의 면전에서 그 밥상을 차려주시는 것을 보면서 한없는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 시인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를 이기고 정복하고 노예들을 데려오고 수많은 금을 모았지만 그것이 이 시인 다윗의 빈 잔을 채워준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지는 잔이 아니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 나같이 정말 하찮은 인간, 내가 스스로 생각할 때 어디 가서 “내가 진짜 좋은 목사요!”라고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사용하셔서 그렇게 영혼을 살리시고 살아난 그 영혼이 그런 밥상을 베푸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시인의 감격이 어땠을까?” 그러면 낚싯줄 네 개에 달아서 온갖 반찬을 내려 보내는 것은 아닐 것이라면 시인은 이러한 은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비록 그 모진 고난의 길을 걷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구름같이 수많은 원수들이 나를 에워싸 나를 짓밟고 죽이려고 했고 나를 모함하고 나의 영광을 땅에 짓밟아버리고자 했지만 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이런 놀라운 대접을 받으면서 나는 그 힘으로 나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입니다.
(찬양)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고단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인생의 시기를 지나면서 시인에게는 때로는 친구도 이웃도 자기를 보호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그 선하신 하나님, 그리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자신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셨던 하나님이 자기에게 항상 풍성한 말씀의 식탁으로 차려주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언약의 자녀라는 것을 일깨워주셨기 때문에 그 폭풍과 시련의 계곡을 지나면서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없는데 살만한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많이 부패해서 악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이 시인은 바로 그런 복음의 진리를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이 말씀으로 그 많은 시련을 이기면서 온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 중에는 정말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그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넘치게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누가 묻더라도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어디를 읽고 계십니까?”, 답할 수 있어야 하고, “요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답할 수 있어야 하고, 세 번째는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말씀으로 기름지게 하는 그 은혜를 누림으로써 영혼의 빈 잔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이 시인에게 가슴 벅찬 환희를 경험했습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오는 삼직을 이해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통치하시기 원하셨지만 그들은 왕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주셨고 호세아서에 보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삼직이 생겨나게 됩니다. 삼직은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세 개의 솥발과 같은 직임입니다. 첫째는 ‘왕’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 구현해서 하늘의 뜻이 그 이스라엘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왕의 소명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그 계시를 가감 없이 전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사명은 백성들 편에 서서 죄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지를 인도해주는 사람이었고 그 제사장의 임무는 그들의 죄를 일시적으로나마 용서받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제사 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중에 어떤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비상한 크기의 정신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아셨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불러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기름을 부으면 그 기름의 재료는 감람유 즉, 올리브기름이었지만 그 기름을 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정결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 그리고 지혜, 능력, 이런 것들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그에게 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와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의 경륜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신약시대에는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성령이 우리에게 계셔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인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한번 그렇게 오신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근심하실 수는 있으나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령충만할 때만 성령이 계신 것이 아니라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에도 구원받은 자 안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서 성령을 주시고 그 일이 끝나면 성령이 다시 떠나가시는 방법으로 성령의 사역이 구분됩니다. 이렇게 선지자나 왕이나 제사장을 세우기 위해서 기름을 붓는 것은, 신약시대의 신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할 성령을 예표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구약시대의 그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표였습니다. 이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져서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에게 차려주신 말씀의 식탁과 인격적인 교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은혜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성령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교회의 성장을 위한 계획을 짜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현대인에게 맞는 목회방법과 트렌드를 찾고 온갖 계획을 해도 한 가지가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 성령의 은혜는 사람의 제도나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는 삶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간증을 남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해주시고 나를 위해서 일하시는지 놀라운 역사를 보여줍니다.
저도 그러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처음 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것은 세례를 받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멀끔한 청년이 20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는 수요예배에 나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봤으니 거기 목사님께서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저는 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에 간 것이 9월 정도였는데 목사님께서 11월에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학습도 안 받았습니다.”, “넌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니 학습이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하늘같은 목사님의 말씀을 어떻게 거역합니까? 그날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내 양심이 허락하지만 내가 어떻게 세례를 받고 그분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 더구나 그때는 누구 하나 말씀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녁때마다 먼 길을 걸어서 빌딩 2층에 있는 그 손바닥만한 예배당에 갔습니다. 강대위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같은 사람이 세례를 받아서 주님과 혼인예식을 해도 되는 것입니까?” 일주일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문답을 거쳐서 다음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교회를 가서 정말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세례식을 하는데 장로님이 물을 받쳐 들고 목사님이 오셔서 손에 찍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위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마치 교통사고 난 후에 주먹만한 링거를 맞을 때 그 약이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쑤욱 내려오면서 온몸을 감싸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눈물이 났습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 하나님이, 내가 당신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내 죄 때문에 살을 찢고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졌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영문학자가 되고 싶었고 수필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꿈이 다 필요 없고 비록 저 광야 한복판에서 혼자 살아도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얼마를 울면서 소리 내지 않고 흐느끼며 울었던지 눈물을 씻고 나니까 예배는 이미 파했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졌습니다. 눈을 들어보니까 그 추운 11월 중순에 가난한 교회에 성에가 하얗게 끼었는데 찬란한 햇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마음에 아무 소원도 없고,
(찬양)
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그냥 주님을 위해서 눈꽃처럼 순결하게 살 수만 있다면 빌어먹어도 나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정말 그런 “내 잔이 넘치나이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러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서 여러분의 영혼의 빈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