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하나님의 형상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8-11)
녹취자: 백지영
목회자가 되는 길은 당연히 많은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전하는 말씀대로 살아갈 때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라서 스스로 진실한 신자가 되는 종교적인 삶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경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주고 또 참 사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똑같이 목회자는 그 원리를 따라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육화(肉化)된 진리를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는 목회에서 목회가 나오는 게 아니라 신앙에서 목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시기 전에 한 가지를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을 세 번을 반복하셨습니다. 질문에 나오는 동사가 세 가지가 각각 다르다는 이유를 가지고 여러 모양으로 설명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그것은 한분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모든 목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전하고자 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육화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식은 들리는 방식과 보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교리와 성경의 내용들이 들리는 방식의 가르침이라면 인격과 생활 이것은 보이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는 전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 가지를 위해서입니다. 죽음으로 속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 참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되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제물이 되어 죽기 위해서는 생명이 있는 피조물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두 번째로는 그 속성이 어떤 방식으로 시행되는지, 소위 이야기하는 모두스 오페란디입니다. 어떻게 이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들 속에서 실행되는지에 대한 방식을 보여주는 것, 이 두 가지 지식을 합쳐서 우리는 이것을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구약의 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어서 이것이 그노시스 크리스투가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면 곧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미궁에 빠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특히 서신서에 와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을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비춰주셨는데 이 렌즈와 같은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게 되고,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독특한 인격을 가짐으로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이 누구신가 묻게 되는 것입니다.
참 사람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과 섬김을 통해서, 이것(인격)이 존재와 관련된다면 이것(섬김)은 생활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마땅히 존재해야할 자신이 이런 존재라면 사실 실제는 이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있는 존재와 진짜로 존재해야할 자신 사이에 격차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행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의 진전입니다. 이것을 본받고 이해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고 이 사람들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와 향기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에서의 죽음은 반복할 수 없지만, 왜냐하면 그것은 속죄를 위한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인간이신 분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셨던 목표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살아계셨더라면 지금 그때와 다른 문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사셨을 지를 생각하고, 신학은 이것을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목표를 자신의 삶 속에 계승해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주후 1세기에 이루고 싶었던 공동체의 그 모습을 좁게는 교회 안에서 넓게는 온 인류 안에서 이루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동체의 모습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주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부분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기도문을 요즘은 많이 가르치지 않지만 종교개혁시대에는 이 주기도문을 굉장히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거의 핵심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각성을 가지고 제가 깊이 있는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썼는데 두꺼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많이 안삽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기도문을 깊이 있고 올바르게 풀어내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 인간이 여기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을 멀리 떠납니다. 등졌습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배향(背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치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게 됩니다. 이게 아베르지오라면 이것은 컨베르지오, 전향(轉向)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기독교에서 부르는 회심(回心)입니다. 그렇게 놓고 이제 아까 배향하던 사람이 돌아서서 전향을 하고 이것이 전도라면, 전향한 사람이 정향(正向, 定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혹은 정향의 삶을 살게 돕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배향하던 사람을 돌이켜 전향하게 하는 것은 복음 그 자체를 설교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전도에 있어서 놀라운 역사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전향한 사람, 하나님을 향해서 회심하고 돌아선 이 사람이 그 정향의 삶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어거스틴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있습니다. 이게 지성이고 이게 감성입니다. 그리고 이게 의지입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에 부어질 때 그 부어진 생명 자체가 지성에 그 빛을 준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이성(理性)과 오성(悟性)입니다. 오성은 데카르트 이후에 이야기하는 그 오성이 아니라, 칸트 이후에 오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오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과 오성을 가진 존재는, 이렇게 지성에 빛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지성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뭔가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찾아가게 되는 것 자체가 생명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은, 인간이 영혼이 죽어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향해 흔적을 남겨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미친 듯이 세상에 취해서 살면서도 간간히 진리의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목말라하고 그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스카트 올리핀트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자각성은 인간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사람에게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이 그 영혼 안에 역사하게 될 때 진리의 빛과 함께 들어오게 되고, 생명은 이 지적인 탐구를 촉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생명이 죽어 있을 때 놀라운 특징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게 없는 것입니다. 지적 무기력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것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저는 이런 하나님의 생명이 지성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생명은 감성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아름다움을 느꼈던 사람이 영혼이 거듭나고 변화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한 심미(審美)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인간의 마음속에 생명이 끊임없는 정동(情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만든 단어인데 인간의 마음이, 정(情)이 어떤 사실의 인식에 의해서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좋은 것을 인식했으면 사랑으로 출렁거리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발견하면 미움의 감정으로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미와 추의 기준이 정확하게 맞느냐 안 맞느냐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감동을 준 그것이 사람에게 감성을 출렁거리게 만드는데,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에 주어지게 되면 그러면 이 사람은 이렇게 지성적으로는 진리의 탐구에 눈을 뜨게 되고, 이 지성의 탐구를 통해서 참된 것을 발견하면 이 참된 것은 곧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참된 것, 선한 것은 aspect입니다. 국면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하나를 철학적인 쪽에서 보면 진리이지만, 그러나 미학 쪽에서 보면 아름다운 것이고, 윤리학 쪽에서 보면 선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면의 차이일 뿐이지 그 세 개는 결코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모든 접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냅다 지식을 때려 넣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조건 사회봉사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신비주의자가 되라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사랑이 역사하고, 그 다음에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생명은 인간의 의지에 역사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생명과 사랑은 서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뭔지 보십시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제 분명히 세상에서 돌이켜 섰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사람 마음 안에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아무리 밖에 있어도 내가 그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한 나는 세속에 물들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이 밖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서 무인도의 어두운 밤을 홀로 지내도 그는 세속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이 없는데, 죄 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속에서 세속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까? 자기 안에 있는 세상 때문에 세속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설명을 하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코스모스라고 할 때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우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질서를 뜻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영어 단어 cosmetics, 화장품이 나옵니다. 그래서 화장품을 여자들한테 얼굴에 바르는 것은 이미 얼굴에 질서가 없기 때문에 화장품을 발라서 질서를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화장의 정의입니다. 그러면 이런 세상은 성경에서 두 가지로 묘사를 합니다. 그냥 아무 뜻 없이 객관적으로 세상을 뜻하기도 하고, 또 하나는 죄로 물든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럴 때는 그 세상은 그냥 1번의 의미의 세상입니다. “너희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할 때에 그 말씀은 2번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마음속에 세상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중생과 함께 혁명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죄의 원리가 파괴됩니다. 죄가 원리가 되어서 우리를 다스렸는데 원리가 파괴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원리가 심겨집니다. 그게 성령과 법입니다. 법은 원리입니다. 그 원리가 심겨지는데 그것은 곧 성령님입니다. 그러니까 원리가 있고 성령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명과 성령의 원리가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데 여전히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목회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단번에 완성되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런 속에서 어떤 원리에 의해서, 잔존하는 죄는 커서 우세해 져서 dominant해 지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약화되어서 거의 없는 것 같아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안에서 줄다리기가 일어나면서 온갖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때는 진실하고 탁월하던 사람이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걸레 같던 사람이 변해서 성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것은 외적인 이 사람의 젊음과 늙음의 문제가 아니라, A라는 환경에 있느냐 B라는 환경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했던 이유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고백이 바로 이런 고백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이냐 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성도들을 이런 정향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 일에 효과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데 이 속에서 우리는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하고, 이 사람은 개별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고 하는 집단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현존은 자신의 본성의 산물이기도 하고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의사 결정, 의지의 결정의 산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엄청난 크기의 지식과 그리고 통찰을 목회자에게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횡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두 다 녹여내서 자신만의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해서 결국은 성경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이탈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런 정향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목회지에 가서 한 3년 동안 신선한 설교를 하거나 한 1년 동안 충격적인 설교를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 한 30년쯤 목회했는데 여전히 충격적인 설교를 듣는 것, 그리고 미답(未踏)의 땅을 밟는 것처럼 내가 몰랐던 세계와 현실과 나 자신과 영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지식의 세계를 밟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자 자신이 자기의 지성과, 주님의 표현에 의하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 걸고 전존재적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따라가고자 하는 그 구도의 삶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이 비밀을 알고 터득하는데 자신을 소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노동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이 세 개는 오전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뒤에 나오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면, 우리를 징검다리로 하나님께 가게 하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 그분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그게 목회인 것입니다.
요즘은 그냥 스마트폰으로 찍지만 옛날에 기억하십니까? 사진 한번 찍으려면 큰맘을 먹어야 합니다. 사진장이를 불러야합니다. 사진장이는 기다란 카메라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막 핸들을 돌리면 이게 앞으로 뻗어나가고 까만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그리고 그 다음에 여기다가 필름을 간 다음에 플래시를 터트립니다. 번쩍하고 펑 하고 터지면서 사진이 찍혀 나오고 현상을 합니다. 사진 찍은 모든 사람들은 사진을 찍던 순간과 출력된 인화된 사진은 기억하지만 번쩍거릴 때 자기를 찍은 사진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번쩍하고 비춰 줄 뿐이고 마지막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그 사진, 그것과 가까운 사람들이 되도록 역할을 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영광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워낙 눈부셔서 그것을 전한 사람 따위는 기억에 남지 않고,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이 워낙 눈부셔서 그것을 전하게 했던 그 사람의 지적인 능력이나 영적인 특성 같은 것들은 기억에 남지 않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그게 목회자의 영광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해 태어났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잊혀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 모든 변화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이 성도에게 따로 있고 목회자에게 답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단 하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렇게 자신은 없고 사람 속에 예수만 살아남게 하고, 또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였기 때문에 그 목회자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황금의 입을 가졌다고 하는 크리소스톰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성신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회자들은 이 땅에 거하면서 하늘의 일을 행하며 살라고 위임받았다. 천사나 천사장에 부여하지 않은 권위를 받았다. 무엇이든지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천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땅을 통치하는 자들은 실제로 맬 수 있는 권세를 소유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육을 맬 수 있는 권세뿐이다. 목회자는 인간의 영혼을 맬 수 있는 권세를 지녔으며 이것은 하늘로 관통한다.” 그게 목회자의 한 긍지이기도 한 것입니다. 미약하지만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도움이나 도구 없이 행할 수 있고 천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룰 수 있다. -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사람을 사용하기를 선택하셨다. 첫째 당신의 겸손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사람을 사용해 당신의 비밀의 뜻의 해설자가 되도록, 당신을 나타내도록 이 세상에서 대사의 역할을 행하게 하신다.” 그래서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진흙같이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기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그 질그릇 속에 담겨진 보화를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둘째로,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과 비슷한 혹은 열등할 것 같은 사람들이 설교할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습관을 지니게 하시는데 이것이 목회자들에게는 겸손을 교육하는 탁월하고 유용한 훈련이 된다.” 학식으로는 이 세상의 지식으로는 비교될 수 없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전할 때 그들의 지식의 다대(多大)함에 떨지 않고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이 바로 비밀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나 목회를 받는 사람에게나 결국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셔서 목회를 하게 하시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와 꼭 같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격과 생활의 지향점을 그분에게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道)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고, 목회는 바로 도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정(情)에서 우러나오는 섬김입니다. 그래서 이 정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정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입니다.
신농이라는 이 인물은 중국의 신화 속에서 나오는 인물입니다. 주전 28세기 사람이라고 하니까 진짜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중국의 의학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약학을 설립했느냐? 이런 것입니다. 벌레를 잡아다가 물려보는 것입니다. 막 퉁퉁 붓고 열이 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온갖 약재를 갖다가 발라보는 것입니다. 부작용과 순 작용을 모두 기록을 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다음 어떤 약재가 이 상처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자신의 몸을 실험실 삼아서 임상을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환자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결국 목회자는 신농과 같은 정신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교리를 확립함에 있어서 엄정하게 거쳤던 눈에 띄는 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 교리가 성경의 증언에 의해 혹은 신학적인 증거에 의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논증되었다 할지라도 청교도들은 그것을 곧바로 교리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일단 자기가 수립한 그 교리를 자신의 경건과 삶 속에 적용해서 실천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 논리가 지향하고 있는 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실험한 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거기에서 경건의 열매가 맺힌다고 입증이 되었을 때 그것을 독트린으로 채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력한 청교도들, 특히 존 오웬이 쓴 성경에 대한 해설의 작품들에는 항상 ‘practical commentary on’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어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부분에 대한 실천적인 주석이라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주석이 아니라 실천적인 주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것을 신농처럼 자신의 몸속에서 녹여내어 이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영광과 자신의 선한 행복을 촉진한다고 입증되었을 때 그것을 독트린으로서 accept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평생 이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The Way가 무엇인지 Truth가 무엇인지 Life가 무엇인지를 실험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은 안 됩니다. 뻔 한 답,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이게 전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매주일 되풀이 합니다. 그는 착하고 충성스런 종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한 착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없는 영혼들에 대한 연민이 넘쳐야 하고, 그 다음에 충성스럽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일체의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계, 교회,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탐구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 하였다’라는 칭찬을 받아야 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효과적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결과를 산출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 고난을 본받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고, 그는 이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 도(道)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설교, 새로운 목회에 대한 깨달음, 새로운 진리의 빛, 이 모든 것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도열(道悅)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도(道)는 공맹사상이나 노장사상에서 이야기하는 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열(悅), 극도의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삶이고, 이것은 때문에 진리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삶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이 마땅히 어떻게 살도록 창조되었다고 하는 당위의 관점이 없었더라면, 아니 유리하는 게 왜 그렇게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십니까? 고생 좀 하면 안 됩니까? 인간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난도질 하는 것처럼 아프게 만들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고 마땅히 인간 존재는 어떻게 행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준대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보면서 슬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목회는 넘치는 기쁨과 가슴 찢어지는 아픔 사이를 출렁거리는 게 목회입니다. 기쁜 적도 없고 가슴이 아픈 적도 없는 목회는 목회자가 마음이 그 목회에 있는 게 아니라 딴 데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이 가슴이 이렇게 기쁨과 슬픔으로 출렁거리는지를 찾아보았는데 그게 목회라는 A가 아니라 다른 것 B라면 그 사람은 마음은 여기에 두고 지금 몸은 여기 목회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A건 B건 C건 D건 아무 것도 그런 게 없다, 성경에 표현에 의하면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입니다.
결국 목회자는 진리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신학자가 조지 마스던이라고 하는 신학자였습니다. 결국은 설교를 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가르칠 때 보면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흥미를 못 끈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자기가 전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실천적인 경험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지금으로부터 한 30년 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죽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한 1년간. 그래서 저녁때면 여기다가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을 면도날로 아주 사시미 뜨듯이 베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의사를 만나고 이야기를 해도 신경성이라는 정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의사가 진맥을 하더니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 처방전을 가지고 한번 그 집에서 지어먹고 그 다음에는 경동시장에를 갔습니다. 그랬더니 약값의 3분의일밖에 안 됐습니다. 완전히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한 10여 년 동안 그 약의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두통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그 약을 통해 건져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잘 못 찾겠다고 해서 제가 그 바쁜데 데리고 갔습니다. 그게 어떤 요소입니까? 자신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본 경험입니다. 제가 내가 이런 집을 안다 그것을 과시하고 싶었겠습니까? 자신의 경험이 동일한 고통을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적극성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눈을 수술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목사가 입으로 설교하는데 눈을 못 보니까 주일날 설교를 못하게 됐습니다. 25년 동안 거의 주일 날 설교를 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안식년도 별로 간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멀쩡한 목사가 한쪽 눈이 안 보인다고 병원에 있을 필요는 없어서 주일 예배를 외출신청서를 쓰고 간 것입니다. 병원에 있는 교회에 가서 주일오전 예배를 드리고 옆에 있는 교회에 가서 주일 저녁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단은 얘기 안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단은 아닙니다. 한 교단은 침례교교단이고 하나는 장로교교단이었습니다. 거기까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장로교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아주 유명한 교단 중의 하나입니다. 설교를 계속 듣는데 너무 황당한 것입니다. 설교 A부터 마지막 Z까지 "주의 종에게 잘해야 복을 받는다."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들을 무수하게 대는 것입니다. 뒤에서 화가 났던 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저렇게 설교를 할까? 그리고 그분이 할아버지면 내가 이해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40대 중반내지 오십대 초반밖에 안 돼 보이는 젊은 목회자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설교내용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침례교회로 갔습니다. 오후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그래도 평생 설교를 하면서 살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살았는데 내가 앉아서 40분을 설교를 듣는데 무슨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심오하다는 뜻이 아니라 뭘 말하려고 하는지를 모르겠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었는데 그 다음에는 말갈 데 소가면서 45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오전 예배 설교는 핵심이라도 있었습니다. "주의 종에게 잘하라." 핵심은 시종일관 똑같았습니다. 여기는 없습니다. 그게. 돌아오는데 너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이 수백 명이 모였다는 것은 사람이 노력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은 좀 더 오래 전 일인데, 목을 수술을 했습니다. 일주일 설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목에 수술한 게 뜯어져 버렸습니다. 피가 쏟아져서 2주를 설교 못했는데, 강원도였습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그리고 시골에 있는 약간 반듯해 보이는 교회에 갔습니다. 거기는 그 교회가 성결교였습니다. 늦게 들어가서 뒤에 앉았습니다. 이분이 여호수아서를 읽더니 제법 설교가 진행되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서부터는 완전히 방향을 이탈해서 어디로 설교가 갈 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끝나고 나서 빨리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쫓아오면서 인사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아니십니까? 목사님을 알아보는 순간 제 설교는 갈 길을 잃었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그 설교자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설교자를 움직인, 일본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골대(骨大), 큰 중심의 뼈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동의할 수 없는 그런 주제의 설교가 나오거나 아니면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이 오고가서 듣는 사람이 성경본문을 조용히 읽을 때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설교를 듣고 나면 마치 잘 써놓은 잉크위에 물을 부은 것처럼 번져서 오히려 그 뜻을 더 알 수 없게끔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설교자 자신이 이러한 진리 때문에 그것을 알고 기뻐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아파하는 그것이 실제로 없을 때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왜 그럴까요? 한 사람이 이렇게 사람을 비롯해서 수많은 대상들과 관계를 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이렇게 사랑하고 느끼고 좋아하고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자기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기 모순을 가진 사람이어서 자기의 행위에 일관성이 없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왜 좋아하던 것들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던 것들을 좋아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런 모든 요동치는 변덕스러움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많이 쓰는 얘기가 ‘그냥’, ‘괜히’, ‘왠지 모르게’ 이런 표현들을 우리가 쓰는 것 자체가 인간 안에는 자신이 알 수 없는 수많은 contradiction, 모순율들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은 결국 자신을 내신 분이고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당신 안에서 두신 질서대로 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 사랑하게 됨으로써 모든 것들은 다시 그 질서 속에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존재의 위치와 그 다음에 존재에 대한 사랑은 이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윤리학적으로 더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위치에 합당한 사랑이 아니라 그보다 못한 것을 그 위치에 부여하거나 아니면 거기다 그렇게까지 부여할 이유가 없는데 더 많은 사랑을 그 위치에 있는 것들에게 부여하게 될 때 그것은 dirty입니다.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미학적으로도 추함은 위치이탈입니다. 그 위치는 그냥 아무 거나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 속에서 자리를 갖추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이탈되는 것입니다. 그게 더러운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있게끔 만드는 것은 여러 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인간의 베아티튜도 지복(至福), 모든 복들 위에 가장 높은 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이것은 그 지복의 핵심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 아들의 형상이라고 나오는데 다 똑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독생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독생자가 하나님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죄와 타락 때문에 파괴되고,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고유한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실 때 그 진리에 대해 반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히브리어로 첼렘과 데무트입니다. 이 두 가지는 거의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레나이우스 같은 사람에 의해서 이런 형상 이론들이 발전을 하게 됩니다. 변증가들에 의해서. 그런데 이레나이우스는 이 이마고데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갖느냐 하면, 형상이란 합리성과 같은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어떤 것들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추론해 내는 합리성 같은 인간의 본성이고, 모양은 아담에게 주신 거룩한 옷이라고 형상과 모양을 대조시킵니다. 그래서 중세 스콜라주의자 때까지 형상과 모양은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에게 와서는 모양은 하나님이 입힌 원의(原義)를 구성하는 초자연적인 은사이고, 형상은 이성, 자유 같은 지적 능력을 포함한 자연적 은사라고 봅니다. 타락에 의해서 이것(모양)은 날아가 버렸지만 이것(형상)은 아주 훌륭하게 건재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신학에 대한 여지를 열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타락은 이 형상과 모양 중에서 모양을 상실하는 것이고 구속은 이 모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지 않는데, 굉장히 지성주의적인 입장에서 이 형상을 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의 단계는 인간의 본성적 자질,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 완전하게 영화된 단계, 그 위에 초자연적 은혜의 선물로서 붙여진 은사의 개념을 더함으로써 이것을 이마고데이라고 보았습니다. 타락으로 초자연적 은사를 상실했고 구속은 이 은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루터파는 원의의 개념으로 보고 본래 주어졌는데 타락과 함께 완전히 상실해 버렸고 구속을 통해 회복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형상의 개념을 관계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의 형상을 짓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관계를. 그 영적인 관계가 타락에 의해 끊어졌으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럴 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면 인간은 타락하고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모든 동물과 똑같이 취급되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에서는 이것을 관계론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을 함께 해석을 해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창조 시에 부여받은 인간으로서의 순전함인데 이게 전인적, 영혼과 아울러 육체까지도 확장이 됩니다. 그래서 상실되었으나 흔적이 남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이 되고 성화를 통해 닮아가고 이것의 본질은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중세 스콜라주의는 존재론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루터파는 관계적인 특성을 강조했지만 개혁파에서는 이 두 개를 함께 본 것입니다.
그림에 나오는 이 인물은 한때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장을 지냈던 칼빈 사후에 한 80년 정도 흘렀을 후에 후학(後學)입니다. 그리고 걸출한, 아마 이 사람보다 더 당시의 가톨릭에 대해서 잘 알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의 탁월한 신학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고 보았고 그 형상은 영혼 안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게 이제 후에 개혁파들 속에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에 까지 확장이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인간의 육체에 대한 학대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학대다 이렇게 보아서 인간의 존엄성의 영역을 육체에 까지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본질적으로는 영혼이 지성과 의지 안에 있고 형상적으로는 올곧음이고 순전함 원의이고 결과적으로는 통치함 그리고 불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상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의지를 자연세계 속에 사회 속에 구현하면서 하나님의 의지를 인류사회와 그 다음에 자연세계 속에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멸성이 주를 이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성은 이성과 오성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지성은 영혼의 가장 고귀한 기능이고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이성이 만약에 추론의 기능을 담당한다면 이것은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추론해 내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라티아피나치아라고 합니다. 이런가하면 오성은 직관을 통해 사물들을 논리를 초월해서 인식하는 기능인데, 이것(이성)은 추론의 기능을 이것(오성)은 변증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뗄리겐띠아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종종 총명으로 번역이 되어있고 믿음도 이 오성의 기능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누림은 인간으로서 최상의 활동을 하는데 있는데 이 즐거움은 궁극적인 행복이다. 철학자들은 행복이 성향이 아니라 활동에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최상의 활동은 높은 수준의 능력, 고귀한 대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지성의 활동에 있다.” 이게 피터 롬바르드의 센텐티아룸의 주석에 아퀴나스가 밝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지성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랑하고 그러면 이 사람에게 생명의 힘이 생기고 이것은 사랑의 힘인데,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 삶이 결국은 선한 삶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영혼의 힘이고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서 이것을 설명하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하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이 모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덕입니다. 기술은 사람이 사물을 사용해서 인간의 육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덕은 자기를 사용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덕입니다. 자기를 사용해서 남을 이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덕이고 물질을 사용해서 육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그런데 기술은 인간을 완전한 행복으로 데려가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인간이 선과 악을 발견하는 순간 그때에 즉시 자신의 삶과 존재가 그 선악의 기준에 일치하는지를 사유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결국은 인간 안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능력을 그 정도로까지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노력으로는 항상 이 선악의 기준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죄의 영향이 이 모든 인간의 본성의 어느 한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분명한 것은 영원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학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인간은 종교의 씨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감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는 구원받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형상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갈망이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할 때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게 되고 그리고 인간은 그릇된 곳에서 만족을 얻고 쾌락에 탐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두 가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이성과 신앙입니다. 이성은 타락한 후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죄에 물들게 되고, 신앙은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게끔 망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고 설교자는 설교의 결과가 아니라 설교를 진리답게 선포하기까지의 모든 삶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중심에 있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덕스러운 삶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말씀에 의해서 다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circulation이 계속 되는 것이 목회자의 삶이고, 이러한 순환을 통해서 자기가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에 대한 깨달음들이 여기서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수많은 문제에 둘러 쌓여있고 목회는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과 형상의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어거스틴의 Soliloquia라는 작품이 있는데 독백록이라고도 불립니다. 회심 직후에 쓴 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때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영혼의 응시는 최종적인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의 바로 그 봄을 따르게 된다. 더는 응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응시해야 할 더 이상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완전한 덕이며 이성이 그 목적에 도달한 후에야 복된 삶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봄 자체는 영혼 안에 있는 총명이며 이해하는 것과 이해된 것에 의해 성장하게 된다.” 즉 인간이 이성으로서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인 진리들을 이해해 나가려고 할 때 그때 하나님은 그 바라봄을 통해서 총명을 증진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이바지해야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창조 목적을 따라가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형상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즉 진리와 성령의 은혜로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인간이 이 문제가 많은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진지하게 그것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을 본받아 그는 자신을 삶 전체를 통해 사람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고 자기를 사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들이 삶 전체를 움직이게 되는데, 구약에서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이중 지식을 이야기하는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맨 처음 인간의 구원자ㅑ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시작을 씨로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알고 난 후 그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상승된 지식은 다시 하강하면서 이 세계와 모든 만물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29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작은 예수라고 불리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양향을 끼쳤는데, 그는 말하기를 가장 큰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의 목적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업가가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가 본받고 이웃을 구원에 이르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이고, 신학이라는 학문은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밟고 올라가는 사닥다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형상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전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설교는 부산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