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9 P국 선교사 수련회 1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과 삶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김경애, 조원정
150개의 시편 가운데 어릴 적부터 가장 많이 알고 있었던 시편이 23편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도 시편 23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우리가 시편 150편중에서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완벽하게 외우는 시편이 몇 개 안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23편일 것입니다. 지금부터 55년 전에 제가 주일학교 학생일 때 이 시편 23편으로 여러 종류의 찬송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23편의 내용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22년 전에 저는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전에는 내가 시편 23편을 거의 몰랐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세계를 보면서 열린 교회를 세워놓고 24년 동안 저는 여러 번 시편 23편을 설교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시간은 한절에 3시간씩 18시간을 시편 23편을 설교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시간의 길이라는 것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저에게 다행히 4번밖에 설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18시간씩 설교하던 때는 제가 40대였고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절히 시간을 조절해서 저의 컨디션과 여러분들의 집중력에 따라서 오늘 설교를 8시 45분 정도에 마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쓴 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다윗이 언제쯤 썼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초기 저작 설을 이야기합니다. 이 시는 다윗의 생애에 아주 이른 시기에 쓰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여기에 보면 아주 목가적인 내용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의 생애에 후기, 저는 말기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목가적인 내용 속에 아주 의미심장한 시인의 인생의 여정이 실려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시 23:5) 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원수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쪼레라이’ 라는 복수인데 ‘자기를 괴롭게 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다윗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수많은 대적들을 경험한 인생의 경험을 어렸을 때의 목가적인 그림에다 접목을 시켜서 이 아름다운 시를 탄생하게 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토막은 1절입니다. 그것은 총론적인 제목을 담고 있는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목자가 되시는가 하는 것을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마지막 3번째 토막인 6절에서는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은 1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말입니다. 이 위대한 시편 23편을 시작하면서 시인은 시선을 하늘로 돌립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시의 시작을 왜 하나님이라고 시작하지 않고 여호와라고 시작했습니까? 이 질문은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3개의 존함이 나오는데 ‘여호와’, ‘하나님’, ‘주’ 물론 다른 것도 나오지만 이 세 개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존함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존함은 그 단어가 각각 의미하고 있는 바가 다릅니다. 우선 주 ‘아도나이’ 라는 이 단어는 ‘아도나이’라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그냥 ‘주인’입니다. 종이 주인을 부를 때도 ‘아도나이’라고 불렀고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도 ‘아도나이’라고 부르고 종들이 상전을 부를 때도 똑같이 호칭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전체에서는 하나님 ‘아도나이’라고 하는 이 존함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더 흥미 있는 것은 ‘야훼’라는 4글자 소위 ‘페트로나툼’ 이라는 4글자로 된 하나님의 성함은 워낙 거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여러분들은 배우셨을지 모르지만 ‘께레’와 ‘패티브’라고 해서 하나님의 성함을 4글자 ‘야훼’라고 하고 ‘요드해 요드해’ 이렇게 쓰고 밑의 모음을 아도나이의 모음을 찍어서 ‘여호와’라고 기록하고 읽을 때는 ‘주님’이라고 읽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본명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거룩함 때문에 도저히 그 본명을 읽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하나님의 십계명에 위반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야훼’라고 쓰인 단어가 ‘아도나이’ 라고 읽혀지면서 하나님의 세 존함 중에 아도나이는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 뜻은 뭐냐 하면 소유관계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즉 그분을 ‘아도나이’라고 부를 때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나님을 덕 입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강조할 때 ‘주’ ‘아도나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더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정도로 넘어갑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라는 존함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엘로힘’입니다. 이것이 ‘엘’이라는 단어의 복수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거의 없는데 이 ‘엘’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학자들의 의견이 많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명사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고 하나는 동사에서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학자는 엘로힘이 ‘알라흐’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논증합니다. 히브리말로 ‘알라흐’는 ‘두려워서 벌벌 떤다’라는 뜻입니다. 이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엘이라는 말이 ‘울’이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울’이라는 단어는 도토리나무입니다. 왜 그것이 관계가 있느냐하면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단을 쌓을 때 상수리나무하고 밀접한 관계가 되어서 나타납니다. 그것도 하나의 논쟁거리이기는 한데 그때에 울이라는 도토리나무가 당시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에는 힘세다고 하는 것의 대명사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토리나무는 기본적으로 뿌리가 깊고 그리고 바람이 와서 큰 바람이 불어도 대부분의 나무들이 다 꺾어지고 쓰러질 때 뿌리가 깊어서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있는데 이것이 도토리나무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를 하나님의 강함,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하나님의 힘, 이런 것을 지칭하는데서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구약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엘로힘이라는 이 단어는 엘의 복수임은 틀림없는데 그것은 물리적인 복수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복수입니다. 예를 들자면 물이 복수인데 아주 신비하기 때문에 복수로 쓰여 있고 히브리어로 얼굴을 ‘파님’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파나’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이것도 복수입니다. 그것은 얼굴이 여러 개로 되어있기 때문에 복수가 아니라 신비의 복수라고해서 신비한 것들은 복수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엘로힘이라는 이 단어는 아마도 하나님의 장엄함을 신비스럽게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복수로 썼을 것이라고 구약학자들이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엘로힘이라는 이 단어는 그래서 하나님의 큰 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에게까지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강하고 위대한 신은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3개의 하나님 존함 중 하나가 남습니다. 그것이 ‘야훼’라는 단어입니다. 이 ‘야훼’라는 단어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이 게시된 것은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출애굽기 6장에서 모세에게 계시됩니다. 그러면 그전에 나오는 여호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나중에 그 여호와라는 단어를 그 앞에 환치시켜 놓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계시된 것이 출애굽기 6장에서의 일이고 이때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야훼’라고 부르는 이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로 말하자면 선교사로 살면서 이 나라에서는 이런 이름으로 저런 이름으로 보안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본국에 가서 호적등본을 떼어보면 이름이 나올 때 그것이 본명이듯이 하나님의 여러 존함 중 ‘야훼’ 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본명이기 때문에 모든 이름 중에서 가장 거룩한 이름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교육을 위해서 1년에 한차례씩 이 이름을 부르고 다른 시간에는 이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필사하는 사람들이 필사를 하다가 이 4글자가 나오면 무릎을 꿇고 어떤 사람은 목욕을 하고 어떤 사람은 붓을 씻어서 다시 적을 정도로 이 네 글자에 대한 하나님의 이름으로서의 존엄성은 아주 탁월한 것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이 야훼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선택된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를 하나님의 호칭 속에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이방인에게 계시된 이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약백성들에게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이고 이 야훼라는 하나님의 본명을 아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시인이 자신의 목자가 되시는 높고 위대하신 그분을 지칭할 때 이 위대한 시편의 첫머리에서 그분을 야훼라고 부른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즉 시인이 그 하나님이 자신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이며 자신은 그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들 중 한사람으로서 이 시를 하나님 앞에 올리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야훼’라고 불리는 그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어느 정도로 위대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모두스 이그지스턴디(Modus Existencia)’라는 존재의 양상이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분의 존재의 양상과 유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는 안 계신 곳이 없이 계시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유라는 것은 존재의 반영입니다. 특히 경험한 존재의 반영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입니다. 유사한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명심해야할 바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특별하신 분이십니까? 우리는 이제 유적지를 방문하고 또 위대한 도시를 방문하게 됩니다.
제가 실제로 한 20년 전에 우리 집사람이 하도 졸라서 나는 정말 싫어했는데 할 수 없이 한달 휴가를 받아서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같이 여행 갔던 사람들이 우리 집사람이 나에게 하도 눈치를 보면서 쩔쩔매니까 ‘도대체 저분은 누구신데 저렇게...’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했을 때 제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때부터 정신없이 로마를 구경하면서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역사적인 지식을 더듬으면서 로마를 보고 폼페이를 보면서 저는 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서 서양사를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방문하고 그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중에 제가 충격을 받았던 한 장면은 주전 2세기경에 만들어졌다는 판테온신전입니다. 그때가 한국으로 말하면 위만조선시대입니다. 고조선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고조선시대에 기둥 없이 세워진 건물 속에 약 2500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원형건물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2500명이 꽉 들어가면 구멍이 뻥 뚫렸는데 비가 절대로 그 건물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500명의 열기가 한데 모아져서 그 위로 솟구치면서 비를 비켜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폼페이 도시를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전 약 200년 전에 택시가 있었다는 사실과 신호등이 있었다는 사실, 공중수도가 있었다는 사실, 아파트에서 쓰레기를 버리면 밑으로 떨어지는데 이미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우나, 심지어 사우나를 하고 난 다음에 술을 마시는 펍(pub), 그리고 심지어는 유곽까지 있었다는 것, 심지어 2000년 전에 선거를 하면서 ‘어떤 사람은 다 썩었으니 갈아 치자.’라는 포스터, 한쪽에서는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포스터들이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고 저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이미 2000여 년 전에 다 사라져버렸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건물과 유적들이 그들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를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에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이 세상에 무엇을 만들어놓으셨습니까? 눈을 들어서 한번 하늘을 보십시오. 아주 맑은 밤하늘 그리고 독일이나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 곳의 구름이 없는데서 보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가 6000개쯤 된다고 합니다. 그 별들 중에 아무리 빨라도 몇 백 광년에서 온 것이고 심지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어떤 별빛은 수천만 년 전에 출발해서 지금 도착하는 별빛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우주가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얼마나 넓은 우주입니까? 과학자들은 우주의 이 끝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150억 광년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960억 광년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 우주 이 끝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가 150억 광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측정 가능한 거리가 150억 광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가봐야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매초마다 우주는 폭발을 일으키면서 2,000㎞씩 확장 되어가고 있고 그것은 실제로 천문학적인 증거로 나타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별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만약에 우주의 끝인 지점이 있다면 그 밖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겨우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까지만 체험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학에서 수학을 배울 때 4차원이 넘는 5차원, 6차원, 7차원의 방정식도 풀었습니다. 그런데 식으로는 풀리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어떤 공간일지 그것이 무엇일지는 우리 중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이 지구라는 별은 항성이 아니라 위성입니다. 즉 태양이 항성이고 항성 주위를 돌고 있는 말하자면 그 가족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8개의 별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데 그중의 작은 별 하나가 지구입니다. 지구 주위는 달이 돌고 있습니다. 똑같이 8개의 별 주위를 여러 가지 새끼 위성들이 또 돌고 있는데 모두 합쳐서 260개쯤 됩니다. 칼 세이건 이라는 미국의 아주 저명한 천문학자는 코스모스라는 시리즈, 오바마 대통령이 모든 미국인들이 보도록 적극 추천했던 다큐멘터리의 저자였는데 그는 죽었습니다. 그 사람의 저서 코스모스에 보면 이 태양계 안에 있는 모든 별들의 수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 태양이 속한 은하계를 ‘우리 은하계’라고 부릅니다. 우리 은하계는 바람개비처럼 약간 타원형으로 생긴 모양으로 별들이 모여 있고 이 끝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20만 광년이고 옆에서 보면 비행접시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가운데 툭 튀어나온 부분은 약 700광년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별들인데 별들의 수가 항성이 약 2,000억 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별들의 주위를 도는 별들까지 합해서 어림잡아서 계산할 때 칼 세이건(Carl Sagan)은 우리 은하계 안에 있는 별의 수가 4조개쯤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은하계인데 이 은하계가 모여서 은하단이 되고 은하단이 모인 곳이 우주인데 측정한 범위 내에서 과학자들이 추정하기를 우리 은하계는 우주 안에 있는 은하계중 그리 큰 은하계가 아닌데 이런 은하계가 약 2,000억 개쯤 모여 있는 곳이 우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를 떠나서 인간이 가장 멀리 가본 곳이 빛이 1.2초에 도달할 수 있는 달까지 겨우 갔다 왔습니다. 이 우주는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그 별 중의 하나, 그것을 돌고 있는 8개의 작은 별 중 하나, 그중에 어느 한 지역에 우리들이 살고 대부분의 사람은 세계 전부를 다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그 지역에서 태어나서 반경 100㎞안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살고 있는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에 비하면 그 별들은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몇 달 전에 동해안에서 거북 한 마리가 생포되었는데 학자들의 감정결과 1300년쯤 된 것으로 감정했습니다. 미국에서 동부해안 쪽으로 랍스터가 많이 잡히는데 큰 것은 20㎏씩 나갑니다. 100년 된 것입니다. 그것은 깨지지 않기 때문에 망치로 두드려 깨야합니다. 그러면 그 거북이 한 마리, 최근에선 상어 한 마리가 포획되었는데 530살일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정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존재이고 이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루살이하고 파리하고 놀다가 헤어지면서 파리가 하루살이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매미하고 파리하고 놀다가 매미가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자.” 웃깁니다. 그렇게 드넓은 어마어마한 우주를 누가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어떻게? “있어라.” 말씀 한마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주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내가 좋아하는 당나라의 시인이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前不見古人 (전불견고인) 앞에는 이전 옛 사람을 볼 수 없고 後不見來者(후불견래자) 뒤로도 오는 사람 만날 수 없다 念天地之悠悠(염천지지유유)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노니 獨愴然而涕下(독창연이체하) 내 홀로 슬퍼져 눈물 흘리노라”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저는 불신자 때 이 시를 읽었습니다. 한순간 가슴에 확 밀려오는데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살면 이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옛사람을 볼 수 없고’ 당연합니다. 먼저 왔으니까 옛날 사람들은 만날 수 없습니다. ‘뒤로도 오는 사람 만날 수 없다’ ‘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노니’ 그랬더니 ‘내 홀로 슬퍼져 눈물 흘리노라’ 무엇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습니까? 이 외로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근원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인간의 소외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익셉션(exception)’입니다. 소외에서 오는 외로움입니다. 근원을 알지 못하는 소외에서 오는 무서운 외로움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모든 세계와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웃집아저씨 이름을 부르듯이 거들먹거리며 그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그 격차를 성경이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그 거룩함은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입니다. 그 하나님이 너무 높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자기 같은 존재는 하나님 앞에 없는 것과 같다는 수학적으로 우리가 만약에 분수에 여기에 무한대를 놓으면 여기에 무슨 수를 올려놓아도 ‘0’으로 수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워낙 존재론적으로 너무 탁월하고 뛰어나시기 때문에 자기는 거의 Nothing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는 시간에 매여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라는 인식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있는 것이 인간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모였을 때 즐거워하고 사회가 선하게 되면 기쁘지만 악하게 될 때에는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가 제일 의로운 줄 알고 그리고 나만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러다가 그보다 완전한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은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선교의 시작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격차를 인간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앙의 첫발로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그 하나님은 너무 높으시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고 그분은 완전하고 자신은 아주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 그 두려움만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에게 무한히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기에는 하나님이 너무 무섭고 도망치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서 그 사랑이 놀라운 흡인력이 있는 그래서 그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지시를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그것을 기뻐하며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Lordship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면 겨우 이 정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내 홀로 슬퍼져 눈물 흘리노라’ 이 정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깨끗이 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면 겨우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선교이고 그 두려움과 사랑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이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두려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 두려움과 하나님을 마음껏 표출하면서 사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때는 그런 것이 하나도 안 부러웠는데 이렇게 나이가 드니까 겸비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나 선교나 자기 혼자 모든 것을 한다는 그런 교만은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는 것처럼 그렇게 우월감에 들떠서 살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23년을 보냈는데 젊은 시절에는 안자고, 안 놀고, 안 쉬고, 23만에 처음으로 작년에 처음 6개월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닷가재는 100년을 사는데 자기는 100년도 살지 못하고 가고, 100년도 못살고 가는, 나고 스러지는 잡초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 되고 궁극적인 기쁨의 이유가 되는 그것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많이 갔지만 이어서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했을 때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실제로 어린 시절에 목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방식이 내가 어린 시절에 양떼를 인도했던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시인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이 짧은 표현 안에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합니다. 우선 여호와와 나라는 존재의 대비입니다. 지금 설명 드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이 소유격으로 연결됩니다. 어떻게?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들풀만도 못한 존재가 영원하고 무한하고 완전하신 그 하나님을 자신의 소유격으로 부를 수 있을까 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 하나님이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이 소유격의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탁월하신 하나님이신데 자신은 하잘 것 없는 존재인데 그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뛰어넘어서 그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는 무한대의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 관해서 아주 일부분밖에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과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시간 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공간에 매여 있는 존재가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현해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세계적인 사건과만 관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하찮은 존재가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고 이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낼까? 사립학교에 보낼까?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어디에 살까? 사역지를 어디로 옮길까? 같은 아주 작은 일에도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들까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동행하시는 것을 경험하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충만한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곳에도 안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이 매순간 그리고 매일 그리고 모든 곳에서 그 하나님을 느끼며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비유로 잘 알려진 장입니다. 그중에서 잃어버린 비유가 드라크마, 양, 탕자가 나오는데 드라크마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잃어버린바 된 것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 찾아야지만 찾아지는 존재입니다. 이에 비해서 탕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타락해서 아버지를 잃어버린바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의지를 가지고 회개하고 돌아옴으로써 다시 아버지와 만나는 그림을 보여준다면 중간에 있는 잃은 양의 비유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결국은 잃어버려진 그 양을 어떻게 목자가 찾아오는지를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난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바라보시는가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린바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의지를 가지고 회개를 하고 돌아옴으로써 다시 아버지와 만나는 그림을 보여준다면 중간에 있는 잃은 양의 비유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잃어버려진 그 양을 어떻게 목자가 찾아오는지를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난 인간들을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목동이 집에 돌아와서 모든 양들을 우리 안에 넣고 머리수를 세어 봤습니다. 한 마리가 부족합니다. 목동은 금세 그 양이 어떤 양인지를 알았습니다. 그 양을 찾아서 길을 나섭니다. 시간이 저녁때 쯤 되었을 것입니다. 길을 나섰는데 사실은 여기서 양 한 마리가 얼마 합니까? 한 마리에 100달러 아니면 200달러 합니까? 200달러 정도 합니다. 물론 양 크기에 따라서 질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목동이 저녁이 되는 시간에 양을 찾으러 갔다가 넘어져서 발목이 부러진다든지 강도를 만난다든지 악한 짐승을 만나서 목숨을 잃는다든지 그런 것 생각하면 그냥 99퍼센트가 들어 왔으니까 한 마리에 이십 만 원정도 밖에 안 되니까 20만원 술 먹은 거로 치자. 하고 안 가도 되는데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것은 20만원을 생각하고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제가 교수 생활 할 때 정확하게 1992년도의 일이었습니다. 거기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인데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데 겨울에 예쁜 여자 아이 둘이서 전봇대에다 포스터를 붙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봤더니 강아지였습니다. 이 강아지를 찾아주시는 사람에게는 70만원을 드리겠습니다. 그때는 70만원이 굉장히 큰 돈 이었습니다. 그때 교수 월급이 170만원 밖에 안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교수들이 600만 원정도 받는다고 치면 250정도 되니까 작은 돈이 아닙니다. 강아지가 얼마 정도 됩니까? 70만원을 주고도 남으려면 최소한 강아지가 백만 원 정도 돼야 합니다. 보니까 부잣집 아이들입니다. 중고등학생 정도도 되어 보입니다.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그만 리본 달린 강아지를 안고 같이 먹고 뽀뽀하고 침대에서 뒹굴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개가 누구 물었을까?’ ‘차에 치였을까?’ 아니면 ‘보신탕 장수가 잡아 갔을까?’ 별 생각을 다하고 애들이 며칠 동안 울다가 용돈을 다 긁어모으니까 70만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그 개가 똥개이든지 잡종이든지 유기 견을 데리고 왔는지 그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애들이 개를 기르게 해 달라고 어려서부터 해 달라고 하는데 최근까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개를 너무 좋아하는데 어린 나이에 서울서 혼자 유학을 하면서 엄마 아빠 떠나서, 개가 늘 친구였습니다. 그 개가 모두 제 명에 죽은 개는 하나도 없습니다. 쥐약을 먹고 죽든지 할머니가 개장수에게 팔아 버립니다. 그런 것을 너무 봤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트라우마(trauma)가 되어서 ‘내가 이제껏 목회하면서 가슴앓이 하면서 산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그 개하고 또 인연을 맺어서, 어차피 그 개가 나보다 먼저 죽을 건데 일반적으로 본다면, 내가 왜 그 짓을 하겠어.’ 해서 절대 반대했습니다. 중국에 집회 나간 사이 우리 딸아이가 강아지를 덜컥 사와 버렸습니다. 자기 돈으로 엄마를 꼬셔가지고 사와 버렸습니다.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정 드는데 일주일도 안 걸렸습니다. 지금은 너무너무 귀엽습니다. 아파트에서 삑삑 하고 누르면 미친 듯이 달려 나와서 긁는 것입니다. 좋아서 안기면서 얼굴을 핥고 난리가 납니다. 말티즈 요만합니다. 태어나서 우리 가족 중에서 내가 집에 왔을 때 그렇게 반가워하는 것은 개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여러분 보십시오. 젊었을 때 아들 하나 태어나서 그것도 결혼한 지 7년 만에, 지금은 목사 안수 받고 총신 나와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결혼해서 아이 둘 낳고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다음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너무 너무 예쁜 것입니다. 엄마는 다 필요 없고 자기는 아빠하고 결혼해서 살 거랍니다. 만날 집회 나가고 하느라 집을 늘 비우는데도 돌아오면 짝사랑합니다. 미친 듯이 좋아합니다. 젊은 나이에 딸이 아빠를 좋아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습니다. 사춘기가 옵니다. 아빠는 찬밥입니다. 그때보다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고 하는데 너무 귀여운 것입니다. 졸업하고 대학도 한 번에 붙고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도 한 번에 들어간 것입니다. 너무너무 귀엽습니다. 그런데 짝사랑입니다. 백화점 가서 기다리면서 무슨 선물을 살까 하는데 이미 딸은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장가를 가서 손녀를 낳았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연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여운지, 내 아이들은 그렇게 귀여운지 몰랐습니다. 제가 한번 새벽기도 때 나오면 밤이 될 때까지 안 들어갑니다. 저녁 먹을 때 쯤 들어가는데 낮에 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얘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같이 살았는데 들어갑니다. 얘도 너무 나를 좋아합니다. 백화점 가서 딸 선물 살 거 생각하다가 이제는 유아용품 다니면서 그럽니다. 얘가 세 살 쯤 되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기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는 완전히 돌변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애견센터에 가서 선물을 고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런 것을 서글퍼 하면 미성숙한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것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합니다. 어느 날 남편이 지갑을 두고 나간 것입니다. 아내는 지갑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뭐가 보고 싶습니까? ‘나 몰래 비상금을 얼마나 가지고 있나?’ 지갑을 열자마자 젊은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자기 젊었을 때 사진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사진을 품고 다니는 것입니다. 감동이 됩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지갑을 두고 갔다고 하니 남편이 일찍 들어온다고 합니다. 아내가 너무 감동을 받고 밥상을 잘 차려 놓고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내 사진 가지고 다녀?” “그럼.” “언제부터?” “결혼하고 2년 뒤부터 당신 사진을 품고 다녀.” “가끔 봐?” “하루에도 몇 번씩 보지.” 여자는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구나.’하고 감동을 받는데 거기서 끝났어야 하는데 질문을 합니다. “그래. 여보. 내 사진 보면서 언제 내 사진보고 무슨 생각해?” “사업을 하다가 위기를 만나면 거래처에서 수금을 못하면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당신 사진을 봐.” “무슨 생각해?” “내가 이 인간도 데리고 살았는데 뭘 못하랴.” 사랑 하는 것은 내 의지로 하지만 받는 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것은 사랑을 안 받아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대학에 전임 교수로 있는데 강의를 나가서 어린 학생들에게 꼭 얘기를 합니다. “얘들아, 일평생 따르면 손해 보지 않는 중요한 팁을 너희들에게 주마. 너희들이 좀 더 있으면 혹은 연애를 할 텐데 이런 사람하고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나 목숨 걸고 당신을 사랑해. 난 너 없으면 죽어 버릴 거야.’ 이런 남자들을 만나는 것이 여자의 로망인데 여학생들한테 “절대 그런 놈하고는 결혼하지 마라. 그런 놈은 그런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해왔다. 앞으로도 계속 해간다. 오히려 이런 남자하고 결혼하라.” ‘네가 좋다고 나도 네가 나쁘지 않아. 그럼 한번 우리가 맞는지 한번 사귀어 볼까?’ 사귀어 본 다음 한번 살아 볼까? 열심히 노력하면 기본은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남자하고 결혼해야 합니다. “너하고 결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사람하고 해라.” 왜냐하면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 의지로 하는데 사랑 받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상처를 받게 됩니다. 항상 아침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사랑을 하면서 사는 것,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선교지에서 목회할 때 내가 이렇게 헌신하는데 알아주는 놈도 없고, 그런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의 양떼들에게 선교지에 목회지에 나 자신을 쏟아 붓고 사랑하는 것이 특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랑은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이 목자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로 치면 이백 달러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양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 다음에 생깁니다.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복수로 나옵니다. 이렇게 짐짝처럼 매고 온 것이 아니라 아이를 부둥켜 안 듯이 양쪽에 맨 것입니다. 왜? 그것이 양에게 편합니다. 현대 버전으로 말하자면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사는데 “동네야.” 하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왜?” 하면 “저녁 먹었어?” “아니. 조금 있다가 모두 우리 집으로 내려 와.” “왜?” “잔치를 할 거야.” “왜?” “잃어버린 이 양을 다시 찾았거든.” 설마 그 양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서 바비큐를 하겠습니까? 양 한 마리에 이백 불 밖에 안 하는데 동네 사람 50명이 내려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양을 다시 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소를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시인은 살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당신에게 얼마나 효용 가치가 있냐를 따지지 않고 당신을 사랑하신 것을 시인이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자신이 양떼를 목숨 걸고 지키고 맹수들과 싸우면서까지 양떼를 지켰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사랑했던 사실을 시인이 깊이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24년을 열린교회를 목회하면서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가 참 컸습니다. 제일 큰 은혜는 하나님이 나의 목회에 복을 주셨고 감사한 것은 목회를 하면서 저는 계속 공부를 쉬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한 목회자가 선교사의 삶은 사업가나 혹은 경영자가 아닙니다. 요즘은 그렇게 접근하는 면이 아주 많습니다. 더욱이 선교 사역을 크게 하시거나 목회의 조애가 커지게 되면 목회자나 선교사직을 이해하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실제로 일이 끊임없고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목회자와 선교사의 삶은 성도들의 그것과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카톨릭적인 사고를 많이 지배하고 있어서 목회자의 소명이나 선교사의 소명은 평신도들이 도저히 올 수 없는 완전히 제 3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얘기했듯이 그것은 수준과 정도의 차이이지 방향과 질의 차이는 아니다. 그런 것들이 함께 성도들의 삶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한 선교사와 목회자의 가슴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행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32살에 교수가 되고 만 38세가 되는 생일 그날에 7명의 성도와 함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 순식간에 지나가고 저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기 때문에 자지 않고 놀지 않고 해야 한다 생각하면 무제한 힘이 나 자신 속에서 올라 왔습니다. 제가 쓴 70여권 80권 그 정도 된다는데 그중에서 절반은 12시에서 새벽 4시 사이에 쓴 것입니다. 거의 특별히 책을 써야 되는 시간에 아내를 조용히 재워 놓고 내방에 와서 문 잠그고 다섯 시까지 쓰고 새벽기도 가고 한 시간 기도하고 돌아와서 두 시간 자고 하루를 시작하고 한 달이 흐르면 한권씩 책을 썼습니다. 그래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갑니다. 건강도 잃고 모든 것을 잃고 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사는 나머지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성도들의 눈물 방울위에 떠 있는 지푸라기와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기쁜 이유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일 속에서 자신과 관계를 맺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는 매일 매일의 새로운 지식, 새로운 사랑의 경험, 그것이 우리들이 참으로 즐거워해야 하는 근원인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자기와 함께 해 주시던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면서 살아 왔는데 그 하나님은 정말 인격적인 하나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악이 많고 악인들이 여전히 번성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신가 보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엘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라는 미국의 유명한 분석 철학자가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왜 ‘이 세상이 선해야만 한다. 나쁘니까 신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가? 세계가 원래 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어차피 선도 없고 하나님도 없으면 엉망이 되어도 그것이 이상하지 말아야 되는데 반드시 세상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때로는 하나님이 악에 대해서는 즉각 진노하시고 선에 대해서는 즉각 상을 주시고 그러셔야 될 거 같은데 안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는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증거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시인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절실하게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 있었던 인류의 수가 일천 억 명 정도 된답니다. 일천 억 명 되는 사람이 모두 같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고 모든 사람 중에 완벽하게 성격을 일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다 다른 성격을 갖고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한 인간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다르다는 이유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입니다. 우리가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다르게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만나도 딱 맞는 사람이 결혼하면 안 됩니다. 금방 위험합니다. 안 맞습니다. 우리 집사람 하고 이제껏 38년을 살았는데 마지막으로 언제, 우리가 싸운다고 해도 목사가 바가지 집어 던지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리소리 지르고 한 적도 별로 없고 내가 뭘 하는 이런 정도의 언쟁입니다. 22년 전에 마지막으로 언쟁을 했습니다. 싸울 일이 없습니다.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하느냐? 어떤 점은 아직도 우리 집사람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굳이 이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태어났고 그런 사람입니다. 나는 다 이해를 못해도 이해를 못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가 안 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해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해를 못해도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인은 그런 인격적인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때인데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전도사를 했습니다. 제가 안수를 늦게 받았습니다. 제가 신학교의 교수를 하면서 전도사를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내가 당연히 안수를 받은 줄 알고 교수로 채용했는데 채플 때마다 축도를 안 하니까 나중에 물어 봅니다. 당신 왜 축도 안하느냐고, 안수를 받아야 축도를 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 그랬는데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 교회는 유난히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애들이 서울에 올라온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공부를 유난히 잘해서 인물이기 때문에 거기 썩힐 수가 없어서 부모가 허리띠 졸라매고 서울에 보낸 애들이거나 두 번째는 아빠가 대개 부자거나 그런 경우입니다. 진짜 공부 잘 하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중등부를 담당했었는데 절반 이상이 서울대, 연대, 고대 다니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중에 서울대 교수가 되어 있는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굉장히 겸손하고 열심이었습니다. 하루는 저 뒤에서 자모하고 긴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뭔 얘기냐고 했더니 “전도사님. 무엇이겠어요?” 자기 아들 공부 안 한다고 속상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 한다고 합니다. 나보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전도사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특별히 안 하려고 노력을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공부를 못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나는 공부 못 하는 것이 너무 이해가 잘 됩니다.
(예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 3까지 하루도 학교 가는 날이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불량 학생은 아니었는데 저는 재미 하나도 없었고 저는 엄청난 열등생인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나라의 교육이 나한테 안 맞았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끝나고 야간 신학대 들어가니까 공부를 잘 했고 수석으로 졸업했고 신대원에 가니까 공부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고 박사 과정하고 모든 것 다 끝내고 혼자 공부하니까 더 재미있었고 두루두루 학문의 세계를 섭렵하면서 살 수 있었고 지금도 외국에 가면 학자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10년에 걸쳐서 쓴 박사논문에 한 나보다 더 낫지만 전반에 관해서는 누구를 만나든 세 시간 동안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부하면서 모은 책이 6만권입니다. 6만 권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공부 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그렇게 많은 책을 샀겠습니까? 어쨌든 자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여태까지 운전면허 포함해서 시험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때 마음이 어떤지를 자기는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속으로 ‘잘났다.’하고 헤어졌는데 두 달쯤 지났는데 아주 안 좋은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전도사님. 인생 살 맛 안 납니다.” “왜?” 공부만 하니 너무 몸이 약해져서 테니스를 배웠답니다. 학교 앞에 가서 테니스를 하는데,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합니다. 자기는 고 3때 8시간 잤고 학원은 근처도 안 갔고 그래도 자기는 서울대 들어 온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더니 왜 그럴 수 없냐고 합니다. 책에 다 나왔고 모르는 것은 선생님께 물어보면 다 가르쳐 주는데 자기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한 어떻게 공부를 못 할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테니스를 일주일 정도 배웠는데 코치가 오더니 짜증을 내더랍니다. 세상에 여기서 7년 동안 코치 노릇 했는데 당신처럼 못 하는 사람 처음이라고 왜 이렇게 못하느냐고 여기 책에 다 있고 모르는 것 내가 가르쳐 주는데 왜 못하느냐고,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공부 못하는 애들 너무 이해 잘 하고 자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나는 우리 아들 1년에 한두 번씩 퍼렇게 멍이 들도록 회초리로 맞았습니다. 어느 순간 자녀 교육에 대해서 깊이 회심하고 이렇게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킨 후에 애가 중학교 들어가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성적표를 보자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우리 아들이, 우리 아빠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누가 1.2등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3등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냐고, 그런 욕심을 안 가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 가서 공부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깊이 유념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안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이 성경에 보면 엄마 얘기는 거의 안 나옵니다. 아빠 얘기가 나오는데 아빠는 다윗을 자식으로 치지도 않은 아버지입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서 기름 부을 자가 있다고 갔더니 큰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다 그놈인줄 알고 기름을 부으려고 했더니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러십니다.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그 집에 보냈는데 “네 아들 이게 다냐?” “아. 하나 또 있습니다.”하고 데려온 게 다윗입니다. 형들을 다윗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깔아 뭉갰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지만 그 아내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를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만납니다. 불행히도 그 여자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입니다.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 동안 영혼의 침체 속에서 보냅니다. 그 많은 자식들 중에 한 새끼도 아버지의 신앙을 닮은 놈이 없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강간당했다고 울면서 들어왔는데 강간범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놈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쫓겨 나고 자기와 함께 잠자리를 갖던 자기의 아내 뻘 되는 사람들과 백주에 그 아들놈이 간음을 하고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는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의 생애 한두 가지만 일어나도 감당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오늘 뭐라고 합니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모자라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다 버리고 나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풍요함이 그런 사사로운 모든 욕심을 거두고 나니까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중 꽃길만 걸어갔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꽃길만 걷고 카펫 길만 걷던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쓰시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길만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난의 길을 시련의 길을 걸어가면서 땀과 눈물과 피로 신학을 공부하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눈물 속에서 피 속에서 땀 속에서, 드디어 23장에 가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나이다.” 이 위대한 고백을 시인이 말년에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다 이해됩니다.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선교지 언젠가는 여러분이 떠나야 합니다. 목회지 언젠가 떠납니다. 안 떠나고 매달리려고 하면 버림을 받습니다. 모든 것은 떠나갑니다. 아내, 남편, 혹은 동시에 죽게 해 달라는 사람 있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끔찍한 사고를 제외하고는 응답 될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같은 날 죽습니까? 그렇게 되지도 않는 기도를 왜 합니까? 주님이 오셔서 하늘로 들려 올라지면 그건 죽음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떠나보냅니다. 그것으로 이 세상에서 부부의 인연은 영원히 끝나는 것입니다. 왜?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결혼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흘러가는 것이고, 아 그것이 흘러가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흘러가서 존재에서 비존재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양상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부부가 언제 위기가 오는가 하면 중년의 위기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선교 사역을 하고 목회 사역을 하고 남편도 선교 사역에 신경을 쓰고 아내도 선교 사역에 신경을 쓰고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는데 어느 날 끝납니다. 은퇴하랍니다. 그만 하랍니다. 그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와서 할 거 아닙니까? 그만 둡니다. 애들하고 같이 살다가 한 놈 시집가고 한 놈 장가가고 다 가고 둘이만 남습니다. 그게 새로운 신혼의 시작일 수도 있고 한없이 낯선 무대에 들어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가 일평생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살면 그런 부부들이 주위에 좀 있는데 새로운 신혼을 사는 것 같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필수인데 은퇴하고 나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설교하러 오라고 하면 싫다고 안 가도 됩니다. 내가 목회에 매여 있으면 주일날 내가 아무리 깊은 영적인 침체의 고통을 받아도 주일날은 충만한 것처럼 나타나야 합니다. 선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선교를 못하겠다. 너희들끼리 스스로 선교하라.’ 아니지 않습니까? 둘이서 깊이 사랑하면 비로소 둘이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떠납니다. 마지막에는 아내까지 보내고 남편까지 보내고 혼자 남는데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정말 고마운 선물이 있다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큰 거 두 가지는 가족들을 빼고 이야기하는데 두 가지는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나를 격려해주셨다는 것, 생전에 만나지 못했던 위대한 신학적인 스승들을 책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생의 시기마다 아주 훌륭한 선생님들을 몇 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큰 은혜였습니다. 선생님 중 한분이 총신 총장을 하셨다가 은퇴를 하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살아 계셨다면 백세가 좀 넘으셨을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 또래입니다. 실제로 사돈입니다. 이상근 교수님입니다. 신약 주석을 쓰신 분하고 동명이인입니다. 이분은 1930년대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존 머레이(John Murray) 교수님 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부산에 있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집이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물려받은 유산을 하나씩 하나씩 학교에 다 기증하고 어느 날은 채플실에 가보니까 학장이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하고 있기에 뭔 기도를 하나 엿들어 보았더니 “하나님. 종이 매우 불비하여 직원과 교수님들의 월급을 못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 교수님이 집에 가서 집문서 하나 가지고 와서 “학장님, 이거 가지고 팔아서 월급을 좀 주십시오.” 그러면서 자기 재산을 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납하였습니다. 은퇴하시고 미국으로 돌아가셨는데 사모님이 늘 아프셨습니다. 그분 밑에서 제가 2년을 조교를 했습니다. LA집회가 있어서 갔을 때 어디 좋은 데가 있어서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나는 다 필요 없고 이 분 존함을 드리면서 좀 찾아 달라고 했더니 찾았습니다. 찾아가 뵈었습니다. 그때 94세인데 92세까지 운전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94세가 되어서 다리가 안 좋아서 운전을 못 하는데 그때 꽃다발하고 과일 바구니하고 제가 쓴 책 한권하고 가지고 가서 큰 절을 올렸습니다. 책을 보시면서 “김 목사가 조직 신학 책을 한권 썼구나.” 하고 옛날이야기를 하십니다. 24평 아파트에 혼자 사십니다. 사모님은 7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님 외로우십니까?” 했더니, “뭐가? 뭐가 외로워? 내가 이제 나 혼자니까? 우리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데.” 하시면서 “침대에 누워 책도 보고, 기도도 하고 하면 하루가 지나가지.”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혼자서 몸이 불편하셔서 보조기를 차고 다니시면 복지사가 와서 돌아보고 딸도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보고 그렇게 다니면서 음식 같은 것 갖다 주면 먹고 사는데 얼굴은 편안하셨습니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이것이 신앙입니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마지막에 주님 한분과의 관계는 남는 것입니다. 신자의 성도의 진정한 행복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