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23편 강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3-4)
녹취자: 박지성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크게 감격하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3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경험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소생을 경험했다는 것은 침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침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면 그 영혼의 침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첫째는 죄, 두 번째는 무지, 세 번째는 고통이고 각각에 대한 처방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 무지로부터는 깨어남, 고통으로부터는 끌어안거나 극복하는 것. 이런 문제들을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값없이 주신 은혜다. 에베소서 2장 8절도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누가 그럽니다. “믿었잖아요. 믿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고 참, 되게 웃긴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시는 것을 받는 손입니다.
앞에 앉은 분 일어나서 나와 보십시오. 설교를 듣다가 목이 마르면 이 시원한 물을 마시십시오. 자, 보십시오. 이렇게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자매에게 줬더니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된 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저 자매보고 저 자매가 저 물을 얻게 된 것은 손을 내미는 수고를 지불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넌 좋겠다. 우리는 정수기의 필터를 언제 갈았는지도 모르는 물을 먹는데 넌 슈퍼에서 파는 그 물을 그것도 한통씩이나. 먹던 것도 아니고 새것을 입대고 먹던 것도 아닌 새것을 목사님이 네게 주다니. 참 은혜를 입었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느 집회를 갔는데 사람들이 앞자리에는 죽어도 안 앉습니다. 앞자리에 앉으면 내가 책 한권씩 주겠다고 했더니 와~ 하고 달려와서 앞자리에 쫙 앉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줬습니다.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안합니다. 그런데 누가 앞자리에 앉은 것을 생각하겠느냐 말입니다. 혜택이 주어졌다. 앞자리에 앉기 위해서 무슨 희생을 지불했습니까? 물을 이렇게 줬지 않습니까? 손을 내밀었습니다. 거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믿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 우리가 내민 것이냐 할 때는 교리적인 문제가 나옵니다.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면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만 거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도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셔야 할 책임이 있습니까? 죄에 빠진 것이 하나님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지가운데 있는 것이 하나님 때문입니까? 자기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무엇을 들었는지 설교도 기억을 못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니까 무지가 쌓여서 결국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시고 건져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복된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모두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런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영적인 소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런 소생의 은혜든지 구원의 은혜든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거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거저 주신다고해서 계획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획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어느 집에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녀석이 학교를 가면서 엄마보고 “엄마! 화장대위에다 내가 엄마한테 편지 썼거든 나 학교가면 봐.” 그러면서 휙 갔습니다. 엄마는 ‘참 기특하다. 얘가 벌써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만날 만나는 엄마한테 편지를 쓰나.’ 그래서 이렇게 화장대에 가서 보니까
<청구서>
엄마에게 아래와 같이 청구하니 속히 지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 아빠 구두 닦은 것. 300원×2=600원
2. 엄마 없을 때 동생 봐준 것. 1000원×1=1000원
3. 엄마 심부름하기 위해서 슈퍼 3번 갔다 온 것. 900원
그렇게 쭉 써서 얼마 얼마를 청구하오니 속히 지불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날 이 녀석이 학교를 가서 점심시간에 밥을 먹느라고 도시락을 꺼냈는데 거기에 편지가 하나 탁 나왔습니다. 엄마의 편지입니다. 탁 펼쳐보니까
<청구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네놈 배속에 집어넣고 10달 동안 지낸 것=공짜
아플 때 업고 병원으로 뛴 것=공짜
유치원 2년 보내고 피아노학원 7년 보낸 것=공짜
마지막에 합계=공짜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건너편에서 그 집을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그렇게 사랑한다는 아들을 개 패듯 패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편지에 쓴 공짜, 공짜 사랑한단다. 그 말이 거짓이었습니까? 위선이었습니까? 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개 패듯 팹니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개 패듯이 패냐 말입니다. 몽둥이로 막 패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아이가 일기를 썼는데 학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아, 난 요즘 괴롭다. 엄마가 나를 자꾸 때린다. 어저께도 망치로 세게 머리를 세 번이나 얻어맞았다.” 선생님이 ‘이상하다. 애가 뭘 과장했겠지.’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날 일기를 또 썼는데 “오늘도 엄마한테 맞았다. 야구방망이로 머리며 가슴이며 두들겨 맞았다.” 이 선생님이 아주 의협심이 넘쳤습니다. ‘세상에 무식한 여자 같으니 내가 수틀리면 경찰에 고발해 버려야지’ 그러면서 가정 방문을 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가정방문을 갔습니다. 그래서 애를 어떻게 했기에 이런 일기를 써옵니까? 했더니 걔 엄마가 뱃살을 잡고 웃으면서 하는 말이 걔네 엄마가 부업을 하는데 고무망치 요만한 것이 있더랍니다. 이것으로 톡톡 때렸는데 쇳덩어리 망치로 골통을 부순 것처럼 그렇게 일기를 쓴 것입니다. 야구방망이는 뭐냐고 해서 플라스틱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툭툭 때렸는데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엄마도 망치로 머리통을 때리지는 않았지만 개 패듯 패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모든 것이 공짜다. 그러게 사랑한다. 그러면서 그 오전에 도시락편지와 몇 시간 후에 개 패듯 패는 그 장면이 어떻게 조회를 이룰 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연구과제입니다.
(예화) 요즘은 좀 덜합니다. 차가 하도 많으니까. 그런데 옛날에는 하여튼 새 차만 사면 좌불안석입니다. 누가 와서 못으로 자꾸 긁는 것입니다. 옛날에 저도 제가 살던 빌라에 앞집에 있는 아저씨가 에스페로가 새로 나와서 신차를 하나 뽑아서 가져다 놨습니다. 얼마나 애지중지하겠습니까? 반짝반짝한 것을. 그것도 신차 나오자마자 사왔는데 사다 놓고 신난다고 다음날 아침에 휘파람을 불면서 차를 타려는데 못으로 누가 열 번쯤 빙빙 돌려놨습니다. 못을 대고 차를 10바퀴를 돌았습니다. 혼자서 “잡히면 죽여 버린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잡히겠습니까? 그것은 수리도 못합니다. 수리하려면 전부 다 벗겨내고 다시 칠해야하는데. 그래도 원래 있던 차 그 칠하는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그냥 페인트로 칠이나 해야 하는데 아마 150만원은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냥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신차 뽑아가지고 그러게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비유를 해보면 그게 만약에 내차라고 해봅시다. 내차인데 옆집 애가 와서 드르륵 드르륵 긁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주 소리 안 지릅니다. 긁게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조용히 가서 “네가 긁었니?”, “네”, “너희 집 어디니?”, “여긴데요.”, “그래. 같이 가자.”하는 겁니다. 화낼 것 없습니다. 왜 화를 냅니까? “같이 가자.” 같이 가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주머니, 얘가 아주머니네 애가 맞습니까?”, “예, 그런데요.” 뭐 욕하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150만원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 아들이 봤습니다. ‘야, 역시 우리 아빠 인격은 참 대단하다. 다른 집 아빠 같았으면 길길이 뛰었을 텐데.’ 다 긁고 나서 그래 긁었니? 가자. 그래서 150만원 주고 싹 수리를 해다가 놨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내려와서 ‘그래도 내가 우리 아버지 아들인데….’ 그러면서 자기도 한번 긁어 봤습니다. ‘남의 아들가지고도 그랬니? 같이 가자. 착하지? 그랬는데 내가 우리 아버지 아들인데 아버지 차가 내 차고 내차가 내차지.’하고 쫙 긁었습니다. 그럼 내가 내려가서 긁었니? 너 네 집 어디니? 누가한테 가서 150만원이라고 그래? 누구한테 가서? 데리고 가면 우리 집인데. 그것이 아니라 네가 긁었니? 그게 아니라 빨리 올라와! 그러겠지요. 올라오면 네가 긁었냐고 뭘 물어보겠습니까? 봤는데.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개 패듯이 패는 것입니다. 애가 생각을 하며 혼란에 빠집니다. ‘야, 도대체 우리 아빠는 나보다 동네 애를 더 사랑하나봐.’ 그런데 아들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개 패듯이 패는데 150만원 얘기는 절대 안하는 것입니다. 왜? 지금 차를 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두들겨 패는 아빠의 마음에 안타까움은 뭐입니까? 왜 인간이 그따위 밖에 안 되느냐 입니다. 왜 그따위밖에 안되냐. 그렇게 분별력이 없는가? 태어난 지가 벌써 5년이나 됐는데. 그렇게 분별력이 없는가? 그것이 서럽고 안타까워서 때리는 것입니다. 150만원이 들어갈까 봐 눈이 뒤집혀서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저는 절대 우리 애들 공부 못한다고 야단 안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육의 방침을 바꾼 것이 얼마 안 됩니다. 뭔가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야단 안 칩니다. 그 대신 이제 문제로 삼는 것은 뭐냐면 성실성입니다. 그것이 그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그것은 다릅니다. 성과를 놓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혼의 회복을 주셨다면 그럼 뭔가 거기에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영혼의 회복이 굉장히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더더욱 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틀림없는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들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항상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면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계획이 무엇인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아, 나는 이제 천국에 가는구나.’ 그러면서 들떠있는 것은 동물적인 반응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 왜 오늘도 나를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게 하실까? 그런 계획을 생각하고 그 계획에 맞게끔 인생을 살아가야지만 회복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계속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의 방향과 목표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끔 선회해야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것이 먼저 주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냐. 성경을 보고 생각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신 계획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게하시려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심은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럼 이 의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독특한 성품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의와 자비입니다. 의와 자비. 하나는 아가페의 사랑이고 하나는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서 여기처럼 의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아가페가 의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그 의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보십시오. 의로운 길을 걸어간다. 그것이 뭐냐. 먼저 이것을 대답하기 전에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백성들이 의로운 길을 걸어가기를 기뻐하실까? 이 대답은 이렇게 됩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셨을 때에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의 상태였습니다. 죄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았고 따로 예배를 드리거나 따로 기도하거나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죄 상태에서 완벽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 있고 그 피조물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인간의 인식이 깨트려지고 또 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도 저주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해와 달을 보면서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지를 못하고 해, 달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해서 자기를 알리실 표지판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리고 그것이 한 가정을 이루고 가정이 한 국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에서 진전된 신약의 열매가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선포를 통해서 또 하나는 존재를 통해서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선포도 존재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눠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것이 신통치 않으면 이렇게 아주 분명하고 선명한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가 누구고 복음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것을 못했습니다. 말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정직한 복음이 아니라 이상한 복음.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해요. 성령충만 하고 운수대통하세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곡된 복음. 그런 것들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과 선포는 거의 같이 갑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사람들이 선포를 통해서 물론 그들이 무엇을 믿고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게 되지만 선포가 들리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먼저 보이는 것입니다. 오디오가 먼저입니까? 비디오가 먼저입니까? 어느 것이 먼저 나왔느냐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중에 감각이 어느 것에 먼저 갑니까? 보이는 것이 먼저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딱 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양태를 보면서 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말로 전파하는 이 전파가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실제로 전도하러 나가보면 죽어라고 복음 안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신자거나 교회에 한 번도 안 나온 사람들이거나 이단 같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냐면 교회에 나갔다가 예수 믿는 사람한테 데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안 들어갑니다. 아예 마음을 딱 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님이 오시고 그런 얘기를 아무리 해봐야 그 사람들은 ‘누가 오시래?’ 그럽니다. 자기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그들의 존재가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에 “The presence is best proclamation.” 존재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선포다.
(찬양)
너를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이게 presence를 통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삶은 개떡 같고 인격도 개차반 같으면서 꽥꽥 거리고 소리 지르며 예수 믿으라고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이렇게 요란법석을 떨고 엄청난 사람들을 집결해서 세를 과시하려고하는 이런 것들은 다분히 이교적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어떤 영적 종교의 특성들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갖추어져야하는 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의의 길이라는 것이 뭐냐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얘기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살아가는 공의로운 길입니다. 공의로운 길. 그래서 가치관이 충돌을 일으킬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사람을 기쁘게 할까? 하는 충돌을 일으킬 때 아주 선명하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는 그런 것. 그런 것들이 선행되어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야합을 잘합니다. 야합하는 것이 쉬우니까.
(예화) 언제 한번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전도사님하고 같이 차를 타고 심방을 가는데 건널목이 있고 우리 차는 유턴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끝 차선에 섰습니다. 일 차선에 딱 붙어서 쭉 가서 섰습니다. 빨간 불이 켜졌고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턴 하려면 하얗게 톡 톡 톡 그어진 구획에서 돌아야합니다. 그런데 이쪽 차선은 유턴하는 차들이 서는 차선인데 직진할 차들이 꽉 막고 서서 안 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사고의 위험이 없고 앞에 차들이 불법으로 남의 차선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저기쯤 더 가야지만 하얀 선인데 여기서 이렇게 돌았습니다. 우리나라 경찰은 필요할 때는 안보이고 필요 없을 때는 총알같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싹 돌았는데 보이지도 않던 경찰이 지하도에서 톡 튀어 올라왔습니다. 그러더니 경례를 탁 붙이더니 뭐 선생님은 몇 조 몇 항에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했더니 불법 유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상세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봐라. 이 선이 유턴차선이 아니냐? 그러니까 맞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차들이 유턴할 차가 아닌데 여기에 다 서있지 않느냐. 그리고 파란 불이 있어서 사람들이 건너다니고 오는 차도 없고 가는 차도 없고 누구의 주행도 내가 방해하지 않았는데 요 몇 미터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내가 돌면 안 되느냐. 그랬더니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다. 그럼, 끊어라. 면허증을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내가 너무 순순히 나오니까 이 사람이 날 이렇게 쳐다보더니 “걱정 마세요.”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딱지를 떼게 됐는데 이 사람아 어떻게 걱정이 안 되나.’ “싼 것으로 끊어드릴게요. 별점 없는 것으로.”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원래 이렇게 돌면 벌점 10점에 6만원인데 그냥 2만 원짜리 별점 없는 것으로 끊어드릴게요.” 그러면서 스티커를 막 씁니다. 그래서 내가 하지 마. 안 돼. 그 사람에게 네가 그렇게 깎아 줄 권한이 있느냐. 나는 이게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내가 너에게 물어봤다. 그럼 너는 이것이 불법이라고 판단했으면 떼어야지. 네가 뭔데 깎아주고 점수 더해주고 빼주고 하냐. 법대로 해라. 법대로.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열이 받겠습니까? 생전 의무경찰을 하다가 처음 당했다고 했을 것입니다. 막 볼펜이 빨라집니다. 6만원을 확 끊었습니다. 죽 찢어서 줍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랬냐면 그 스티커 발부 받는 것 기분 되게 나쁩니다. 돈도 아깝지만 기분도 되게 나쁩니다. 그런데 왜 그랬냐. 제가 원칙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할 수 있으면 교통법규를 지키자. 그런데 못 지키다가 만약에 적발이 됐다. 그러면 법대로 하자.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제가 요즘은 덜 하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에 집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지방에 차를 몰고가다보니까 비행기타고 가는데 같으면 시간의 문제가 없는데 도로는 사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떨 때는 시간을 꽤 많이 남기고 지방에 내려갔는데 지도에서 볼 때보다 훨씬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거나 체증이 있어서 집회시간에 바특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도로교통법을 어기고서라도 거기에 제시간에 도착을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할 수 없이 밟습니다. 제가 속도를 좀 좋아합니다. 부웅 하고 밟는데 전에는 교통경찰들이 이렇게 총을 겨누고 있다가 스피드 건을 탁하고 쏩니다. 쭉 가면 저기서 총을 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다 옛날예기입니다. 요즘은 위험해서 그렇게 안합니다. 안 보이는데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밟고 지나갔는데 고개를 싹 넘는데 딱 보니까 저기 경찰이 서있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탁 낮추면서 천천히 60㎞로 갔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탁 손을 들고 세우는 것입니다. 난 당당하니까 창문을 열고 “수고하십니다.”, “면허증 좀 보여주십시오.” 합니다. 그래서 “아니 왜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속도위반하셨습니다.” “아니 60㎞로 왔는데….”, “여기서 말고 산 너머에서요.”, “산 너머에서 뭐가요?”, “산 너머에서 속도위반했다고 무전기가 왔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 내가 사실 대학 선생인데 저 아래 있는 동네의 학교에서 나를 강연해달라고 불러서 빨리 가다보니까 이렇게 됐는데 한번만 봐주십시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선생님, 우리도 적발을 했는데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고 싼 것으로 해드릴게요.” 그럽니다. 그래서 난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모르고 “어쨌든 잘못했으니 끊으시기는 끊으시는데 빨리만 해주세요. 나 가야돼요.”, “알았어요.”하면서 막 쓰더니 부욱 뜯어줬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구겨서 위에다가 집어넣고 갔습니다. 갔다 와서 차를 이렇게 정리를 하다가 ‘이것 참, 벌금을 내야지 돈도 없는데 몇 만원 내야겠구나.’ 그러면서 은행에 갔습니다. 그런데 내려고 이렇게 보니까 너무 쌉니다. 6,000원인가 그럽니다. 아니 생전 태어나서 이렇게 싼 것도 있나하고 일단 돈을 꺼내서 내고 이렇게 도장을 찍어줄 때 이렇게 보니까 막 글자를 갈겨써서 뭔지 잘 안 보이는데 벌금 6,000원, 기일 내에 안내면 7,200원 이렇게 써놓고 위반사항을 보니까 금연구역에서 흡연. 교인들이 그것을 보면 얼마나 실족을 했겠습니까? 참 황당무계한 일입니다. 그것을 내가 냈으니 망정이지 읽어보지도 않고 “아이야. 이거 가져다 벌금 좀 내고와라.” 그랬으면 아니 세상에 목사가 어디 가서 담배 피다가 걸려가지고. 그것도 경찰도 진짜 돌팔이입니다. 위반사항에다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흡연구역에서 흡연. 흡연구역에서 흡연한 것이 왜 벌금을 뭅니까? 금연구역을 잘못 쓴 것입니다. 그때에 그 고지서를 책상에 놓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그 다음부터 원칙을 딱 세웠습니다. 내가 솔직히 말해서 고속도로 가다가 120㎞를 몇 번 달렸다고 경찰서에 가서 신고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발되면 정확하게 페널티를 받자. 될 수 있으면 지키자. 그러나 하여튼 패널티를 받는데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까지 그렇게 살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내가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는 지체들에게 얘기합니다. “야, 너는 돈 벌어먹으려고 가는 게 아니라 의의 길 걸으려고 가는 것이다. 가서 회사가 너에게 부당한 것을 강요하거든 고쳐라. 그리고 그것이 도저히 내 분량이 아니라고 생각되거든 시원하게 사표를 내고 하나님 앞에 다른 직장을 구해라. 기껏 말씀에 은혜 받고 신앙생활하다 가서 탈세하려고 가짜 장부나 만들고 있고….” 그렇게 해가지고 그렇게까지 먹고 살아서 무슨 영광을 그렇게 보겠습니까? 그렇게 먹고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여러분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학생들에게 구약개론을 가르치는데 제일 먼저 창조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신학교 교수니까 창조론을 가르치고 왔는데 자연과학개론 교수가 와가지고 진화론을 가르치고 갔습니다. 내가 천지창조의 기원에 대해서 묻는 시험문제를 내니까 창조론에 대해서 쓰고 자연과학개론 교수의 시험시간에는 진화론을 씁니다. 그래서 내가 나쁜 놈들이라고 했습니다. 벨도 없다.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전 포괄적으로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데 그 자연과학개론 F맞는 것이 무서워서 거기다가 진화론을 씁니까? 신앙양심에 반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안지 그것 하나 점수 얻기 위해서.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이중적인 자신들의 태도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는 학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자연과학개론 기말고사에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것으로 고민하는 인간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학교에 다니면서 커닝을 하는 것 여러분은 심각하게 죄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커닝하면 예수 다시 오시는 날에 문제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다 깔깔대고 웃습니다. 그리고 남의 리포트 좀 베껴서 내면 어떻습니까?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다들. 그런데 제 얘기는 그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더 재미있는 얘기해줄까요?
(예화) 결혼한 지 6년만인가 15년만인가 서울에 작은 빌라를 하나 샀습니다. 서울에서 집을 처음 가져보는 것이었는데 학교교수로 있을 때 학교에서 돈을 좀 빌려줬습니다. 이자 없이 좀 편안한 환경에서 연구도하고 하라고 빌려줬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는데 세금이 그렇게 비싼지 몰랐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는데 600~700만원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가서 “어휴, 이거 웬 세금이 이렇게 비싸요?”하니까 법무사에 있는 여직원이 하는 말이 “아줌마, 그럼 반만 내세요.”, 아니 무슨 세금이 그런 세금이 있냐고 했더니 하는 말이 계약서를 다시 한 장 써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그랬더니 예를 들면 2억을 주고 집을 샀으면 그건 진짜 2억이고 그것 말고 주인과 합의를 해서 정부공공기관에 제출하는 매매문서를 1억쯤으로 낮춰서 써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금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불법 아니냐고 했더니 다 그렇게 한답니다. 그것을 듣고 우리 집사람이 나한테 왔습니다. “여보,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런 것을 가지고 뭘 고민을 해. 로마서 13장을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집사고 내는 세금이 국세도 아니고 공세도 아니고 지방세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자. 그러고 이제 집을 사고 나서 세금을 6~700만원을 아들 저금통장까지 다 털어서 그래서 갔다가 줬습니다. “어떻게 계약서 써가지고 왔어요?”, “아니요.”, “어떻게 하려고요?”, “그냥 다 내려고요.” 그 직원이 어떻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쩜, 이 사무실에서 몇 년을 근무했지만 저런 애국적인 분은 처음 만나.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뭐라고 그랬을지 아십니까? 속으로? ‘병신. 그 돈 있으면 나나 주지.’ 그때 300만원이면 석 달 치 생활비였습니다. 의의 길을 걸어간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300만원 더 내고 기껏 무슨 소리를 들었냐면 “에이, 병신.” 이게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리포트를 깨끗이 썼는데 예수 믿는 친구가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때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얘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되겠니?” 그럼 친구가 무릎을 꿇고 흑흑흑 울면서 “그래. 너야말로 나에게 신앙의 진실을 가르쳐 주었어.” 그러겠습니까? ‘병신. 잘난 척하고 앉았네.’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의의 길입니다. 그런데 너무 힘듭니다.
그리고 사회가 구조적인 악들이 가득할 때에는 이것이 더 힘든 것입니다. 너무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살면 세상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하면 신문에서 온통 떠들고 난리를 칩니다. 사실 뭐 로비사건이 한두 번 있었습니까? 옷 몇 벌 주고받은 것 가지고 그렇게 펄펄뛰고 난리입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그렇게 공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들 끼리 주고받았으면 받았지 거기에서 기도원을 갔니, 수양관을 갔니, 교회에…. 그런 이야기를 왜 합니까? 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 많이 욕합니다. 뭐 조금만 잘못하면 욕합니다. 난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면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장로, 이것이 무슨 지위입니까? 목사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목사 그 자체가 세상에서 보면 직업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직업. 이것을 해서 먹고산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이 일 이외에는 다른 직업을 안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직업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보면 직업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직업입니다. 그런데 장로나 집사는 직업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문에 왜 그것을 냅니까? 누가 누가 사기를 쳤다. 가로 열고 장로. 그것은 세상에서 볼 때 명예직입니다. 신당동사는 김 아무개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가로열고 신당동 조기축구회장 이렇게 내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뭐냐면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까지 그렇게 살면 세상은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얕잡아 보고 ‘너네라고 별 수 있냐? 다 그놈이 그놈이더라.’ 그렇게 살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탁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아직도 이 세상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구나. 그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예화) 제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간증을 하는데 자기가 열심히 성경을 가르쳐서 제자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토지를 감정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감정을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서 은행대출이니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결정적인 자료가 됩니다. 그런데 딱 가니까 새 돈, 현찰로 묶어서 1500만원 열다섯 다발을 가져다 놓고 “선생님, 한번 봐주십시오.”합니다. 그 누가 거절을 하겠습니까? 1500만원이면 6개월 치 월급은 될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싹 밀어두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했다고 합니다. 이말 한 마디가 그 사람들에게 천둥소리 같이 들리는 것입니다. ‘아! 아직도 뇌물로 매수할 수 없는 이 사회의 소수의 사람들이 있구나.’ 그것이 누구입니까? ‘크리스천이구나.’ 그것 아닙니까? 모두들 시험 때면 보고 쓰느라고…. 하여튼 우리나라 대학 진짜 저질입니다. 대학의 강의실에 들어가 보면 의자에 새카맣게 커닝 페이퍼가 써져 있습니다. 그것을 왜 그냥 두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대로 그냥 단칼에 잘라버려야 합니다. 퇴학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대학시험도 못 보게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지도자를 한다고 합니까? 그 중에 4분의 1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우리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과 완전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의로운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제가 이 방면에 있어서 여러분을 자신 있게 비난하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여러분에게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만 항상 이것 잘못했지 무릎을 꿇고 내가 그것을 잘못했다 그렇게 살면 안 되고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것이다. 불의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이렇게 모든 합의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과 아무런 원칙도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 되는 것이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정직성에 있어서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니까 야바위꾼들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쓰레기들이 지도자가 되어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그러니까 맨 정치판에 나가면 똘마니들이나 만들고 돈 벌면 나쁜 짓이나 하고 못된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회가 이 모양 아닙니까? 무슨 이 사회 속에 정화기능이 있습니까? 누가 이 혼탁한 어항 같은 세상에서 바이오돌 같은 역할을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법을 만들고 난리를 친다고 하지만 법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여러분이 알지 않습니까? 사람의 본질을 고치는데 법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들이 될까봐 두렵다고 합니다. 왜? 왜 그런 식으로 삽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옛말로 말하자면 신앙을 떠나서 선비입니다. 그런 딸깍발이 정신이 있어야합니다. 군자가 고개를 기웃거리고 등치는 커가지고 작은 여학생의 것을 보고 쓰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뭐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모든 방면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요새는 많이 나아졌다고 합니다만 성수대교가 무너졌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삼풍백화점도 무너졌지 않습니까? 무너질 때 제가 그 옆 골목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것을 가지고 일본 사람하고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내가 얼굴이 뜨거워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백화점이 무너졌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으니까? 일본인이 하는 말이 사람이 사는 대형 건물이 무너졌다는 것은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다리가 무너졌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상상도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결국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다 부정직과 비리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비율로 따지면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고 거기에 개입을 했을 것입니다. 뻔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수천 명이 드나드는 그 엄청난 건물의 골조에 2층 연립 주택용 골조를 집어넣었답니다. 미쳤습니다.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한국을 잘 아는 일본 사람이 하는 말이 뭐냐면 한국에서의 건축현장은 현행범의 현장이고 범죄의 현장이라고 합니다. 요즘 많이 나아졌는데 그때 집 한창 지을 때 신문에 뭐라고 했냐면 동네 골목에 가다가 보면 연립주택 같은 것 막 짓지 않습니까? 그 현장 감독의 판공비가 한 달에 1,000만원이랍니다. 아니 그 감독이 무엇을 하는데 자기 월급도 몇 백밖에 안될 텐데 어떻게 1,000만원이 되느냐.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 1,000만원을 가지고 관공서 사람들하고 고스톱을 치면서 잃어주고 술 사주고 룸살롱에 데려가고 그러면서 쓰는 유흥성교제비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가 어떻게 드러났냐면 IMF가 빵하고 터지고 나니까 강남에 있는 유명한 음식점이 순식간에 두 달 안에 다 도산해버렸습니다. 뭘 먹고 살았다는 것입니까? 공금을 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썩어빠진 나라이지 이것이 정상적인 나라입니까? 그렇게 지으니까 그따위가 됩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법대로 한 푼도 뇌물을 안주고 건설을 하는 기업이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안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있답니다. 그런 기업이 많지는 않은데 몇 개 있습니다. 그 기업에서 건물을 지은 건물주하고 내가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주일은 칼같이 쉰답니다. 예수 믿는 기업이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법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데 맡기는 것보다 건축비가 더 들어간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면 30%가 더 들어가도 뇌물이 안 들어가니까 그것이 그대로 건축에 반영되니까 오히려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뇌물도 안주고 허가를 따내느냐 하니까 허가를 잘 안내준답니다. 안내주는데 그 대신 법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두껍게 해라 그러면 돈 더 들여서 그만큼 두껍게 합니다. 철근을 이런 것을 집어넣어라 그러면 그런 것을 집어넣고 이것이 좀 과한 것 같은데 그래도 법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지어놓고 가서 중공검사를 받아야하는데 안 해줍니다. 직원을 매일 구청에 보냅니다. “가서 허가내주세요.”, “뭐, 바빠서….” 그러면 매일 출근을 합니다.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한 달이고 말해라. 왜 허가를 안 내주느냐. 잘못 지었으면 다 부수고 너네 시키는 대로 다시 짓겠다. 얘기해라 뭐가 잘못 되었는지 얘기해라. 이런 사람들이 저쪽 민원실 문을 열고 걸어들어 올 때 거기 앉아 있는 공무원들을 간담이 서늘합니다. 물론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봉투라도 뒤로 들고 오면 벌떡 일어나서 “아이 김사장님, 어서 오세요.” 하지만 저쪽에서 딱 들어오면 ‘저 사람들은 차 한 잔도 안 사준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야야. 조심해 쟤네들 온다.” 이게 정화기능입니다.
(예화) 짐바브웨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인데 그렇게 부정부패가 심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정부패가 심한지 특히 남미 쪽에 가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뇌물을 주면 거슬러준다는 나라니까 아무튼 심각합니다. 그런데 아주 충격적인 편지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개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소식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등초본 하나 떼어도 돈을 줘야하고 하다못해 자동차면허 갱신을 할 때도 돈을 줘야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뇌물을 받지 않는 관공서의 창구를 소개합니다. 강남구청 1번 창구 담당 아무개, 이사담당 2번, 무슨 세무서 누구, 부가가치세 담당 누구” 그것을 딱 보면 그 창구들은 돈을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같이 먹고사는데 자기는 뇌물을 받는데 이 사람은 절대 안 받습니다. 줘도 안 받고 안줘도 안 받고 하여튼 전혀 안 받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직장에서 가만 내버려두겠습니까?
(예화) 제가 아는 집사님 한분이 한국의 유명한 기업체의 좋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뭐하는 자리였냐면 물건을 구매하는 담당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가니까 그 자리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탐내는 자리인데 그 양반이 갔습니다. 이렇게 가보니까 너무 정신없는 자리였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서랍을 열어보면 봉투가 몇 개씩 들어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공공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대학에 다녀봐서 알 것입니다. 총학생회에서 1억을 썼으면 1,000만원을 챙깁니다. 리베이트가 10%입니다. 어른들이 다 하는 것을 애들이 좀 배운 것인데 뭘 그럽니까? 다 합니다. 어른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런 것들을 다 배웁니다.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가보니까 그렇게 돈을 싸들고 옵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말고 우리 안줘도 되니까 가격을 낮춰라. 그리고 왜 너 혼자 납품하느냐. 너 이제 끝났다. 경쟁해라. 그렇게 하니까 물건의 평균 구매가격이 10%정도 낮춰지고 심한 것은 30%까지 차이가 나더랍니다. 그렇게 원자제가 싸게 들어오면 제품의 원가가 떨어지고 경쟁력이 높아질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승진을 초고속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사에서 잘렸습니다. 누가 잘랐습니까? 그 자리를 거쳐 간 선배들이 작당을 해서 잘라버린 것입니다. 왜? 자기들이 걸어온 모든 길이 다 드러났는데.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이런 부패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데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오늘 저 뒤에 보니까 한상동목사님을 비롯해서 출옥한 성도들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그것을 어제 보면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는데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제는 우리에게 저런 식으로 투옥당할 기회는 안 옵니다. 누가 우리한테 신사참배, 강요 안합니다. 하면 우리도 한번 투옥당할 텐데. 그런데 안 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저런 정신을 가지고 이 디지털 시대, 말하자면 정보화 시대에 그리고 이렇게 부패와 향락으로 가득 찬 벌레 먹은 세상에서 어떻게 그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가? 그런 간증이 이시대의 교회의 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 산이라도 삼킬 것처럼 화염병을 들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쓰고 난리를 치는데 그 인간들이 몇 년 지나면 똑같이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 사회가 나아진 것이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이번에도 광주 내려가서 룸살롱이 어쩌고저쩌고 그럽니다. 변명들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인간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다 그렇게 한자리씩 하게 됐는데 그런 투쟁정신을 왜 가지고 살아야하느냐고 합니다. 이제 투쟁할 사람도 없습니다. 투쟁을 당해야하는 처지이지. 인간 속에 있는 부패성들이 끊임없이 그것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것은 두 가지를 같이 접근해야합니다. 우선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명한 삶에 대해서 결단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디트리히 본 훼퍼라는 신학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와 함께 죽자”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위한 경건생활이고 무엇을 위한 영성입니까? 무엇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입니까? 여기서 은혜 듬뿍 받아서 뭐할 것입니까? “너 은혜 받아서 뭐할래? 왜 그렇게 은혜 받으려하니?”하고 물어보니까 “어휴 은혜 받으면 좋지요.”, “좋아서 뭐 하려고?” 언제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잘 기억하십시오. 치열한 삶의 현장과 동떨어진 기독교의 영성은 거짓입니다. 순간순간 결단하는 삶 속에서 처절하게 그 신앙을 온몸으로 고백하며 살 사람들이 필요하지 기회주의자가 되어서 틈만 나면 야합을 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여 있을 때에는 궐기대회를 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합시다. 그러면서 “와! 와! 할렐루야. 아멘!” 하는데 문제는 항상 우리들이 이렇게 떼로 몰려다니면서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수련회가 끝나고 나면 다 자기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 아닙니까? 이중에 단 10명도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 흩어져서 삽니다. 혼자.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냐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탁 볼 때에 사람들이 접근하여 보면서 느끼게 해야 합니다.
(예화) 예수 믿고 변화 받은 다음에 직장생활을 할 때 제일 힘든 것이 뭐냐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자꾸 술을 먹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아, 이 사람아 한잔해. 이게 뭐 성경에도 술 먹지 말라는 말은 없다면서. 한잔 먹어. 괜찮아. 이 사람아. 사람이 말이지 이렇게 옹졸하고 꽉 막혀가지고 무엇에다 쓰겠어? 한잔 먹어 이 사람아. 사람이 좀 화통하고 좀 그래봐. 먹어. 괜찮아 이 사람아. 나도 옛날에 다 교회 다녔어. 먹어 봐. 이 사람아.” 이제 앞으로 직장생활을 할 테니까 잘 들으십시오. 한칼에 그런 요청을 날려버립니다. 그러면 직장에 딱 입사해서 그런 문제에 있어서 한 달만 선을 분명하게 그어버리면 퇴사할 때까지 편안하게 직장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끌려 다녀야 합니다. “아니 지난번에는 먹던데. 왜 안 먹어?” 뭐라고 해야 합니까? “그동안 수련회가서 주님 만났어요.”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럼 안 됩니다. 칼같이 단칼에 날려야합니다. 그런데 “먹어 이 사람이 괜찮아. 아이 이 사람. 저 친구는 말이지. 예수 믿는다고 술도 안 먹고 밥맛없어. 저리가 이 사람아.” 이래도 그것을 참아야지. 그 술자리에서는 “아이, 밥맛없어. 저리가 이 사람아 왜 따라 왔어 술도 안 먹을 거. 이런 녀석들 때문에 분위기 망쳐.” 이래도 자기들끼리 모였을 때는 “야, 저거 진짜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긴 내가 너무 옹졸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되지. 나는 적어도 종교에 매이지 않는 그런 교인이 되고 싶어. 영성이라는 것은 내면에 깃드는 것이지 이것을 먹고 안 먹고는 문제가 아니잖아? 거시적인 안목에서 봐야지.’ 그러면서 한잔 쫙 먹습니다. 취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습니다. 일단 입에 딱 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칩니다. “역시 이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화통해.”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저 자식 나이롱 신자야. 순 나이롱 신자.” 딱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직장생활의 경험이 있어서 압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다 그런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유부단하면 안 되고 정확하게 선을 긋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예면 예 아니오면 아니오. 그렇게 말하면서 살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런 삶이.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말했습니다. 일생을 진리를 따라 사는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환영을 안 합니다. 막 할퀴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만날 은혜 받고나면 주님,
(찬송)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일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그런데 아니 십자가 질 기회가 있습니까? 야합을 하지 말아야지 십자가를 지지 피해 가는데 “너 정말 예수 믿을 거야?”, “아니에요.” 그렇게 피해 가는데 핍박을 왜 받겠습니까? “진짜 안 먹을 거야?”, “먹어야지요.” 어떻게 구원의 십자가를 지느냐 말입니다. 무슨 십자가. 십자가를 지려면 사람들은 다 싫어하는데 자기는 가야하는 길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려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싫어하는데 나는 그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때문에 가야할 길이 있어야지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 성질머리가 못돼서 사람들에게 욕먹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착각도 유만부득 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막 뭐라고 욕을 하면 자기가 예수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하도 너절해서 그런 것이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예수 믿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도 안 씁니다. 문제 삼는 것은 그놈의 성질머리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의 고통을 이렇게 승화시키려는 허영이 있습니다. 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슨 고난을 당할 겨를이 있느냐 입니다. 계속해서 피해 가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럼 피해 가느냐. 그것이 너무 힘드니까. 한번 여러분.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보십시오. 얼마나 힘든가. 그러니 이 세상이 편하게 편법으로 흘러가고 거짓, 사기, 그리고 편의주의 이런 식으로 세상이 흘러갑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적이 있습니까? 그럼 무슨 십자가를 지었습니까? 수련회에 가서 밥 남기면 안 된다고 그래서 억지로 먹은 것? 십자가 아닙니다. 날마다 9시에 일어나는데 6시에 찬송가로 고문 받으면서 깨어나는 것? 십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 뜻 없이 무릎을 꿇지 않습니까? 쉽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얻었으면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하는 것 아닙니까?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 신앙, 우리의 경건한 생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삶,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야 할 간절한 마음의 요청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삶으로 집약되어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 많은 희생, 고통 그런 것을 어떻게 지고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살 수 있습니다. 왜? 어저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안희숙 여사의 수기를 읽었는데 거기에 보면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에는 그 고통만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문을 받고도 일단 딱 다시 감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 그 육체의 고통을 잊게 해주시는 영적인 강한 기쁨과 힘주심이 공급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도대로 삶을 살 때에 그런 지불해야 할 희생이 굉장히 큰데도 그 희생보다 훨씬 더 커다란 기쁨 속에서 주님 섬기면서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는 이 커다란 목적과 구도를 따라서 살 때에 회복된 영혼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은혜를 많이 받고도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살면 순식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가난한 여러분의 영혼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젖은 다음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신앙으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순종하려고 애를 쓸 때에 은혜의 불길들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 보십시오.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에 이 격렬한 은사주의적인 운동들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단점이 뭐냐면 역사의 지평에 대한 인식이 너무 없습니다. 한 시대의 교회에 영성은 철저하게 천당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이 역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교회의 전체적이 삶의 모습이 영성을 통해서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변화된 교회의 모습을 역사 속에서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거룩한 백성들이 있습니다.
(찬송)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주의 그 큰 이름 선포합니다.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리라
우리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진짜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다. 진짜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진짜 너무 소수다.’ 그러면서 절망합니다. 그런데 그것처럼 바보 같은 짓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어느 시대에든지 빛이 된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곧 다수입니다. One man with God is a majority. 하나님이 함께하는 한 사람은 다수입니다.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가루가 많습니까? 누룩이 많습니까? 가루가 서 말쯤 되고 누룩은 한 줌. 한 줌이 순도 높은 누룩이니까 뿌리고 반죽을 하니까 그 다음날 전부다 누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제가 덕적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오다가 밤에 폭풍을 만나서 다시 돌아오는데 캄캄했습니다. 금음에다가 먹구름까지 잔뜩 껴서 1m 앞이 안 보였습니다. 배들이 막 움직였습니다. 불까지 다 나갔습니다. 캄캄했습니다. 오직하나. 등대 하나. 그것 하나 때문에 수십 척의 배들이 폭풍을 만났는데 안전하게 항구로 피했습니다. 물론 그 항구가 조명탄 수천 발을 터뜨려서 환하게 대낮같이 비추면 좋겠지만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다 불꽃처럼 살아서 정오에 대낮 같이 환하게 밝으면 좋지만 안 사는데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안사니까 우리라도 그렇게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이 민족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이제 존경하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 백성이 누구를 존경합니까? 누구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누구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그 지도자의 품에서 안식하려고 합니까? 누구냐 말입니다. 어느 정치가를 그렇게 흠모합니까? 어느 돈 많은 재벌을 그렇게 존경합니까? 어느 학자를 그렇게 사랑합니까? 누구입니까? 나는 가끔씩 목이 메입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진짜 우리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와서 이 한이 많고 불쌍한 민족을 한품에 넓게 끌어안기를 바랍니다. 뭔가 하나님이 우리민족을 사용하시려고 그러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한 역사의 장을 열 지도자가 없는가? 꼭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찬송)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여러분이 좀 지도자가 되어주십시오. 민족을 품는 지도자, 아파하는 모든 백성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 같은 지도자. 여러분은 나는 며칠에 한 번씩 지도를 놓고 이 조국의 역사를 생각할 때에 이 동포들이 모여 사는 이 겨레가 모여 사는 이 조국이 주먹만 하게 느껴집니다. 한품에 안고. 역사라는 것은 한 시대의 교회에 맡겨준 분깃입니다. 한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았느냐는 얼마나 교회를 많이 짓고 얼마나 교회에 열렬히 헌금하고 봉사하는 교인들을 많이 만들어 냈는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북치고 잔치하는데 무슨 복음이 그러하냐 말입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한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충성스럽게 살았느냐는 그 시대의 사회를 봄으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책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령한 영향력이 있어야하는데 그 영향력은, 교회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결국 신자의 영향력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만나고 새 사람이 되어서 한 시류를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연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북태평양까지 돌아서 다시 모천으로 회귀합니다. 낚시꾼들의 미끼 밥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 유혹을 피하면서 폭포가 내리치면 온 몸을 바윗덩어리에 부딪치면서 폭포위로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모천으로 회귀합니다. 미친 듯이 오직 그 본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가다가 죽습니다. 그런 거스름이 필요합니다. 아닌 것은 언제든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런 의를 위해서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을 기쁨으로 하는 삶. 그래서 나의 삶의 길을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증거가 되기를 소원하는 의의 길을 걷는 마음, 이런 삶을 살아서 당신이 누구인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시고 싶으셔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회복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은혜 속에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