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 않는 주체로 인생 살기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25-33)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앞둔 상태였습니다. 모세와 회중들이 열두 지파의 정탐꾼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장면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의 10명은 절망감 때문에 거짓으로 보고했습니다. 아낙자손의 신장과 요새, 무기들을 보면서 세상말로 쫄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정당한 현실을 부정하고 패배를 택하여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쫄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쫄다’라는 말은 표준어가 아니고 속어입니다. 요즘은 표준어처럼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어떤 대상에 대해서 위압감이나 위축감을 느끼면서 겁을 먹는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의 주체성이 없을 때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남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될 때 쫄게 됩니다. 이러한 쫄림의 심리는 현대인에게서 다양한 방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II. 쫄며 사는 우리 인생
A. 소비와 자기과시
첫 번째, 소비와 자기과시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이 힘들게 돈을 벌어서 백화점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살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명품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화점과 구멍가게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십시오. 구멍가게에 가면 자기가 물건을 다 골라야 하고 더 작은 가게에 가면 자기가 손수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백화점에 가면 들어갈 때부터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격려를 하며 문을 열어줍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 무언가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히 비싼 값인 줄 알면서도 왠지 백화점에서 구입하면 사람 대접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6일 동안의 억눌리고 느꼈던 열등한 감정을 소비하는 행위로 ‘카타르시스(katharsis)’를 합니다. 그 순간만큼이라도 자신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고 내 밑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맛보기 위해서 값이 비싼 줄을 알면서도 그런 백화점을 찾고 명품을 찾습니다. 백화점에 가고 싶지만 깜냥이 안 되는 사람들은 7층으로 뛰어올라가거나 지하로 내려가서 상설할인매장으로 갑니다. 백화점은 누리고 싶지만 실력이 안 될 때 할 수 없이 세일코너를 뒤져서 소비를 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에 자신을 매몰하는 동안에 인생의 본질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 날에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엄청난 수입을 올리지 않기 때문에, 또 젊은 시절에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운이 좋아 부자 아버지를 만나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절대 젊었을 때는 소비의 낙에 너무 눈뜨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날에 소비의 즐거움에 빠지면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개를 꺾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빈티 나게 쭈그러진 채로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설령 엄마나 아빠, 삼촌이나 누군가가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그 장점을 깊이 집착하면서 탐닉해서 그 이하의 물건은 못 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여기에 눈을 뜨게 되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정신이나 날개들이 확 꺾여버립니다. 더구나 그런 욕구가 한창 부채질 되어서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을 때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여러분이 이상하게 여기는 급전을 내어서 백화점에 가서 명품을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젊어서부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에너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에너지를 조금 낭비해도 됩니다. 조금 불편한 곳에서 자도 괜찮고, 화장품도 프리미엄 화장품을 20대 때에는 바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부 자체에 생생한 재생력이 있기 때문에 그냥 10대, 20대 초반에는 이니스프리만 발라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20대가 넘어서 30대 후반에 접어들게 되면 피부의 재생력이 완연히 떨어집니다. 그러면 조금 더 좋은 화장품을 써야하고 좀 더 나이가 들면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써야하고, 더 나이가 들어서 피부를 팽팽하게 하고 싶으면 갈아엎어야 합니다. 젊어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자신에게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해하지 않고 살아야만 잠시 후에 말하려고 하는 그 방향으로 젊음의 에너지를 쓸 수 있습니다. 소비에 눈을 떠서 낙에 빠지는 젊은 사람들이 되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인생의 날개가 꺾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있겠지만 한 가지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정신은 우리에게 TV광고부터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백화점이나 명품관으로 내몹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쓰레기 취급을 하게 합니다. 그런 것을 못하니까 쫄며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쫄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면서 그 비율로는 상대도 안 되는 지출을 합니다. 카드로 빚을 지며 살아가는 젊음은 진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 시절은 인생의 본질과 씨름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할 시기입니다.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중년에 방황하다가 노년에는 파산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우리 나이 때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방황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내 중심은 항상 확고하게, ‘인생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내 삶의 기반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밖에 살지 못합니다. 만약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쪽박을 찼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있으나 사실은 파산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말하기도 지저분한 이야기지만 40대, 50대, 60대 된 사람들의 ‘묻지마 관광’부터 시작해서 타락한 모든 상황은 그 나이 때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같은 20대 30대에 치열하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을 위해 고민하지 않은 대가를 그 중년, 노년에 치루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B. 중독과 향락주의
두 번째로 중독과 향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쫄면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 앞에 설 때마다 항상 ‘메뚜기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아낙 자속의 큰 키 앞에서 메뚜기 같은 느낌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럽을 가면 게르만족이나 노르만족들을 만납니다. 네덜란드를 가면 신장이 보통 185cm가 단신이고 190cm 이상인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니콜 키드먼의 실제 키가 186cm입니다. 한국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10cm되는 킬힐을 신고 왔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인의 키가 196cm이라서 우리를 밑으로 내려다봅니다. 한국 남자들은 175cm정도만 되어도 큰 키입니다. 그런데 키가 167cm쯤 되는 사람은 30cm아래에서 올려다봅니다. 한국 유학생들이 화란에 갔는데 자존심이 정말 상했다고 합니다.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소변기 앞에서 아무리 까치발을 서도 일을 볼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이처럼 키 큰 사람 앞에 설 때 당연히 위축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키높이 구두 장사들이 먹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제 키보다 6cm, 7cm까지 올려줍니다. 저도 요새 좀 올려서 운동화를 신고 다닙니다. 기왕이면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쫄았다는 느낌은 우리도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장에서만 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쫍니다. 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를 합니다. 어디로 도피를 하겠습니까?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활동한 다음에는 쾅! 하고 박혀서 빠져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중독과 향락입니다. 컴퓨터 게임, 오락, 스마트폰, 그리고 태만함을 일상으로 삼으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말은 안 하지만 PC방에 빠져 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모바일 게임을 갖고 다니면서 리니지에 수입을 올려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헐떡거리면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새로운 게임을 찾아서, 온통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세상을 향해 쫄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쪼는 것입니다. 그 쪼는 심리가 현실에 대한 회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현실과 멀어지게 됩니다. 현실은 억지로 살기도 싫은데 간신히 참여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담장을 쌓고 가상의 현실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상현실에 극단적으로 빠지게 되면 중독됩니다. 중독되면 자기 자신이 중독된 상태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주체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중독은 무조건 끊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끊지 못하면 약물이나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끊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중국은 한국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 폐인이 양산됩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을 군복을 입혀서 군대 조직에 집어넣고 때리면서 그 중독을 끊어내려고 합니다. 80%정도는 치료가 되어서 나간다고 하지만 문제는 재발률이 어느 정도 되느냐 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중독에 빠져 있다면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반드시 파산하고 맙니다. 중독은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선하고 경건한 일, 그것조차도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참된 주체성을 가지고 사는 모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경건이나 좋은 것도 내가 안 하면 안 할 수 있어야 중독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의지로 기도를 선택하고 예배를 선택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중독이 아니라 하나의 성향이 되어서 자연스러운 의지의 행사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중독에 빠지면 인생을 완전히 마귀의 손에 반납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체성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중독된 것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일에 몰입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게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게임을 맛보기로 조금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이 자신의 절제력을 넘어선다고 생각되면 아예 문을 탁 닫고 부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주체성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극단적으로 마약을 탐닉하는 경우입니다. 마약은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마약이 가지고 있는 현실도피의 효과는 게임의 100배가 넘습니다. 완벽하게 현실에서 이탈시켜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자발적인 즐거움과 쾌락을 줍니다. 거기까지 좀 가지 못한 것이 프로포폴 같은 약품을 맞는 것입니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희열을 느끼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온갖 약물 중독이 나오게 됩니다. LSD를 비롯해서 코카인 등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목사님, 그것은 우리와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 아닙니까?” 하실 텐데, 아닙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마약에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단지 적절한 자극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빠지지 않은 것입니다. 마약을 다섯 번만 맞으면 중독이 된다고 합니다. 마약뿐만 아닙니다. 현실도피의 훌륭한 창구로 박차고 뛰어나가는데 성에 탐닉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주체성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쫄지 않으려면 반드시 자기 주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해결하는 길은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지만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것을 적절하게 해소하면서 살 수 있어야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벌써 20년 전쯤의 일인데 토론토 무브먼트가 파워운동이라고 해서 극단적인 성령운동이 미대륙을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존 윔버(John Wimber)라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엄청난 운동들이 벌어졌습니다. 저도 현장까지 다녀온 적이 있는데 저는 잘못된 성령론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존 윔버 목사 아래에 제2인자가 있었습니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성령운동의 불을 지피는 기수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을 인터뷰했습니다. “내 남편은 포르노 광입니다.”라고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해 버렸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보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에 의해서 누군지 결정됩니다.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은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니까 어느 한 순간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쏟아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트레스 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풀 때 ‘재생’이 없는 ‘만족’쪽을 택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풀이식의 놀이에 빠지거나 반드시 중독과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 직장인들이 룸살롱에 가서 스트레스를 확 푸는 이유는 진짜로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룸살롱에서 벌어집니다. 우리는 룸살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재생’이 없는 ‘만족’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푼다.’라고 할 때의 긍정적인 의미는, 그렇게 풀어냄으로써 다시 생산 활동이 가능하도록 복원시키는 힘이 있을 때, 그것이 건설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재생할 수 없는 일시적인 만족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할 때는 그 자체가 다시 일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트레스를 풀 때 재생이 없는 소비적인 만족이 아니라 그야말로 recreation, 다시 재생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긴 사연을 보냈습니다. 편지의 결론은 성 중독에 빠진 이야기였습니다. 정신과 치료부터 받고 약 먹고 정신을 차리라고 편지를 진중하게 써서 주고 숙제까지 내주었습니다. 열심히 해 보겠다고 즉시 답장이 왔습니다. 석 달 후에 다시 편지가 왔는데 자기는 숙제하기 싫고, 이렇게 하다가 죽어서 겨우 천당에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걱정하지 말라고 천국은 당신이 갈 곳이 아니라고 해주었습니다. “당신은 즐거움을 찾을 곳이 그것밖에 없습니까? 왜 그렇게 알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약이나 성 중독에 꽂히게 되면 그것밖에는 탈출구가 안 보입니다. 특히 도박, 주식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하나밖에는 인생에 대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정하게 인생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도박에 미친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모든 것을 다 털어 넣으면서 끝까지 갈 때까지 갑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에 대해서 쫄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세상을 지탱하기는커녕 자신도 지탱할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면서 오늘날 눈앞에 펼쳐진 향락주의가 나옵니다. 이처럼 인생에 대해서 쪼는 사람들의 심리가 향락으로 나타납니다.
C. 폭력과 무모함
세 번째는 폭력과 무모함입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폭력성입니다. 이것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음식점에 가서 버럭 화를 내는 사람들을 잘 압니다. 조그만 일을 하다가 성질을 확 내버리고 다 엎어버릴 것처럼 하는 사람들, 자동차가 살짝 부딪쳤는데 필요이상으로 일어나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보험회사를 불러서 처리하고 조용히 가면 될 것을 말입니다. 거기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길길이 뛰고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평소에 늘 쫄고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점화가 되면 분노로 폭발하게 됩니다. 쫄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습니다. 얼굴 예쁘게 생긴 자매들은 형제들이 못 생겼다고 놀려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능력 있는 형제들은 ‘능력도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해도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까? ‘허허!’ 웃고 넘겨버립니다. 왜? 쫄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에게 못생겼다고 해도, 네가 나에게 능력 없다고 해도 난 너보다 객관적으로 능력이 많아. 그리고 네가 열 명 있어도 나를 따라오지 못해.” 이런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쫄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쫄지 않는 사람들은 버럭 화를 낼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생에 대해서 쫄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눌렸던 어떤 것들을 약자에게 확 터뜨려 버립니다. 약자에게 터뜨리면 좀 낫지만 사람도 못 알아보고 강자에게 확 터뜨려서 회사에서는 잘리고 인간관계는 절단 나고 연애에서는 바람을 맞습니다. 끊어집니다.
이것이 모두 쫄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를 무시해버립니다. 충동이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일어나는 분노의 충동들이 쫄림 속에서 오랫동안 쌓였다가 어떤 행위가 있고 결과가 있을 때 둘 사이에 정당한 관계를 유추하지 못하도록 정신작용을 방해합니다. 일상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금이 과하게 나와서 관공서에 가서 부당하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관공서에서 해결해주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은 법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변호사를 고용하고 법적으로 투쟁을 해서 이익을 찾으면 될 텐데, 몇 번 항의를 하다가 안 되니까 농약 살포하는 비행기에 휘발유를 가득 채워서 자기에게 세금을 때린 세무서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들이받고 사망해버렸습니다. 이러한 행위로 나타날 결과를 추론하는 연결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씻지 못할 과오를 저지르고 감옥 속에서 살고 있거나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정정당당하게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향해서 누가 버럭버럭 하고 있다면 그가 엄청나게 쫄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대결할 상대가 안 됩니다. 이런 일들은 여러분도 자주하는 일입니다. 거짓된 자유가 올무가 되어버립니다.
D. 포기와 자살충동
네 번째는 포기와 자살의 충동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쪼는 사람들은 잘 포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생망’, ‘이번 생에서는 망했다’와 같은 용어를 만듭니다. 또 어떤 용어가 있습니까?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많은 용어들이 양산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쫄딱 망했다.’, ‘이 세상은 소용없다.’ 젊은이들의 53% 이상이 결혼하지 않을 의사를 보인다고 합니다. 정말 결혼하기 싫은 측면도 있겠지만 또 하나는 결혼이라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쫄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인간을 만나고 예상하지 못했던 지출을 하고 자유로운 인생을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매여 살지도 모른다고 하는 다가오지 않은 현실에 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보면 고달프고 힘들고 괴로운 십자가 같은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인생에 그렇게 함께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낙도 있고 즐거움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이기에 그것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쪼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들이 자꾸 포기를 양산하게 됩니다. 포기하면 일단은 도전하는 고통이 줄어드니까 편안합니다. 권투선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 라운드를 뛰고 미친 듯이 치고받는데 땡하고 종이 울리면 1분 쉬지 않습니까? 그런 감정입니다. 이러한 포기가 반복되면 인생에 있어서 도전정신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흐르는 물결 같은 상황에 자신을 던져버리게 됩니다. 살아가는데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니게 됩니다. 억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늘 내가 남 같게 느껴집니다. 한 번도 자기를 제대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네 소원이 무엇이니?’ 물으면 답을 못합니다.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전은 주체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갖습니다. 그냥 배 나온 사람이 ‘날씬했으면 좋겠다.’하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비전은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자기의 소망을 가지고 찾습니다. 비전이 있으면 비전의 현실성과 크기만큼 주체성을 가지고 확신 속에 살아갑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손을 얹고 물어보십시오. ‘비전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뭘 원하는지 물어보는데, ‘나는 구찌 핸드백!’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비전이 안 된다는 것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지 않습니까? ‘비전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말을 못 한다는 것은 자기가 진정으로 바라는 자아의 상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10년 후에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서 어떤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비전이 없다는 것은 지금 삶의 주체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10년 후에 난 시집가서 있을 거야.’, ‘10년 후에 난 부장이 되고 싶어.’, ‘10년 후에 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 이런 것은 비전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구찌 핸드백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약간 현실성이 있지만 그것도 궁극적인 비전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껍질이지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과 대화를 해보십시오. 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바보들이 꿈이 없는 것을 세상 탓으로 돌립니다. 왜? 시집, 장가가는데 돈도 안 대주고, 집값은 하늘로 치솟고 월급은 쥐꼬리만큼 작고, 현실은 부대끼면서 일해야 하고, 사람들은 점점 까다로워서 자기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과 맞추며 살 수 없고, 이렇게 자기 바깥으로 모든 핑계를 쏟아냅니다.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꿈은 무엇이냐?’ 물으면 답이 없습니다. 자기 주체성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언제쯤 되면 그런 것들이 모두 갖추어지겠습니까?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결혼만 하면 사우디아라비아처럼 2억 원을 준다고 가정하고, 집을 산다고 하면 10억을 준다고 하고, 차를 산다고 하면 5천만 원을 준다고 해 봅시다.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비전이 생기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신문을 배달하고 리어카를 끌고 다녀도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자식새끼들은 대학까지 제대로 가르쳐야겠다.’ 라든지, ‘나는 최소한 양심적으로 살아서 이 세상에서 욕을 먹지는 말아야겠다.’ 할 수는 있습니다.
평촌 한림대 맞은편에 부대찌개 집이 있습니다. 먹거리 X 파일에 나온 집인데 사장 아주머니가 인터뷰 내용을 듣고 일부러 그 집을 한 번 찾아갔습니다. 방송국에 나왔다는 것을 감추고 비법을 알아내려고 하고 어떻게 만드는지 보려고 하니까 아주머니가 경계를 하는 눈초리였습니다. 나중에는 먹거리 X 파일에서 나왔다고 공개를 하고 취재를 했는데 정말 양심적으로 소시지와 햄을 만들어서 부대찌개를 끓입니다. 아주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 제 가슴을 쿵하고 울렸습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을 치면 3대가 망한다고 합니다. 우리 자식들을 망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훌륭한 비전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요식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만 비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이 인생의 비전과 완전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식업을 하는데 주체성이 있으니까 먹거리에 대한 비전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간다고 할 때 자기 주체성이 없으니까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보들이 이러한 주체성이 없는 자신은 추호도 반성을 하지 않고 맨날 ‘이생망’이라고 하고 정치나 욕하면서 삽니다. 그러면 언제쯤 그런 것이 완벽하게 개선되어서 비전이 있는 삶을 살겠습니까? 그 사람은 그런 나라에 갖다 놓아도 또 비전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6천불입니다. 맥도널드에서 4시간씩 알바를 하면 한 달에 450만원 월급이 나옵니다. 물론 세금으로 220만 원 정도를 가져갑니다. 절반정도를 세금으로 가져갑니다. 18억을 벌면 14억 정도를 세금으로 떼어갑니다. 엄청난 세금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돈을 모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며 삽니다. 그렇게 소득이 많으면 그 사람들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갑니까? 동성애가 가장 번성한 곳이 북유럽입니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합니다. 주체성은 그런 환경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포기를 경험하게 되면 마지막에 자살의 충동을 느낍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예 기가 꺾인 사람들은 자살도 못 합니다. 그냥 떠밀려가듯이 부표처럼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다가 만만한 사람 만나면 밟아보고 강한 사람 만나면 괴롭게 밟히며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환경은 도저히 자기가 원하는 환경이 아닌데 삶에 대한 기대가 안 꺾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택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자살은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싶은 간절한 소원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은 치열하게 살고 싶어서 자살합니다. 자살이 얼마나 편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순간에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면서 모든 괴로움들과 단절됩니다. 자살이 주는 큰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살 동호회를 만들어서 실제로 자살을 감행합니다. 자살의 심리는 비존재에 대한 갈망입니다.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은 있는데 욕구만 지나쳤지 삶의 주체성은 없는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합니다.
주체성은 자신의 삶에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자동차를 운전한다고 하면 동일한 상황만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뒤에 앉아있는 사람은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졸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가면 됩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그 모든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가야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 운전석에 앉아야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주체성은 그냥 어떻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아닙니다. 인간의 주체성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자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우리 인생의 주인이 접니까? 주님이시지요.’ 이렇게 논리적으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더 심오한 경지에 들어간 후의 이야기이고 일단 여러분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된 지체에 휘둘리지 않고 참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나를 버리고 예수님 되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주체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수많은 일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일을 만나면서 인간은 소위 말하는 ‘변양’을 경험합니다. ‘modification(변화, 변모)’을 경험합니다. modification은 현실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mode’는 냉방모드, 절전모드 할 때의 mode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살아가면서 삶의 각양 상황을 만나면서 그 상황에 맞춰서 우리 자신이 변모되어 가야 합니다. 세상에 의해서 조각되듯이 변모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사유하고 판단하면서 변모되어 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은 어떻게 살려고 하는 욕구는 강한데 주체성이 결핍된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선택입니다. 기대는 꺾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힘이 없을 때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데 한 번에 자살로 풍덩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우울증과 조울증 같은 것을 겪습니다. 그리고 자살의 전조가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드물게는 한 순간에 충동적으로 확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전조와 예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돌봄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III. 쫄지 않는 주체로 산다
지금까지 우리의 쫄며 사는 인생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쫄지 않는 주체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저는 네 가지로 문제를 제시했고, 이제 네 가지의 답을 내리려고 합니다.
A. 삶의 의미와 신념
첫째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집중해서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인생의 괴로움의 근본은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 사이에 있는 간극에서 나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고민은 존재한다는 현 사실과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의 현실에서 오는 격차입니다. 이 철학적인 말을 나의 설교용어로 풀자면, “살아있는 한 살아가 한다.”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 사실입니다. 철학에서는 ‘현 사실’, ‘현재에 있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며 똥, 오줌을 싸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떤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는 것인데 삶의 의미를 뜻합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는 두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큽니다. 존재한다는 현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현실, 매일매일 눈앞에 현실이 전개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엄중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아직 갖춰지지 않습니다. 지성적으로 미약하고, 능숙하게 인생을 사는 훈련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정신의 근력을 강화하고 사유를 해서 이것을 극복해야할 사람들이 소비와 향락에 빠져버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을 망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그렇게 살면 절대 안 됩니다. 중년에 방황하고 노년에 파산하게 됩니다.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간격을 누구나 느끼지만 이 간격의 갈등은 점점 커지는데 명확히 설명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존재와 세계에 대해서 근거가 없는 앙심을 품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존재한다는 현 사실과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의 현실에 대해서 갈등이 너무 깊어지는데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고 극복할 힘이 없을 때 인간은 막연하게 존재와 세계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됩니다. 올바른 자아상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한 맺힌 사람처럼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격파탄자처럼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항상 자신의 주체성과 환경이라는 객체성의 접면 속에서 인간성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합니다. 인간성은 자기의 주체성이라는 한 면과 세계의 객체성이라는 것의 접면, 접촉하는 면의 사이에서 개발됩니다. 그런 갈등이 너무 심하면 존재와 세계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됩니다. 일단 인간이 그런 막연하고 근거가 없는 앙심을 품고 자신의 존재와 세계를 대하게 되면 올바른 자아의 주체성이 설 수 없게 됩니다. 근거 없이 쏟아지는 분노와 앙심을 품지 않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면서 볼 수 있는 평정을 키워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내버려두면서 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존재의 사실과 살아가야할 당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의 해결방안을 찾습니다. 첫째는 감성적이고 즉물적인 해결을 선택합니다. 자기감정에 맡겨버립니다. “뭐가 어떻게 굴러가든지 나는 그 상황이 괜찮아.”, “왜?”, “왠지는 모르지만 나는 괜찮아.” 합니다. 혹은 “이것은 안 돼.”, “왜 안 돼?”,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상황에 들어가면 기분이 나빠.” 이것이 감성적이고 즉물적인 접근입니다. 둘째, 편하고 게으른 해결을 선택합니다. “세상을 뭘 그리 복잡하게 살아?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서로 양보하고 대충대충 살아.”합니다. 그러면 삶에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일관성 있는 삶은 주체성을 바로 찾게 만들어주고 참된 주체성은 일관된 삶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일관되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주체성이 있을 수 가 없습니다. 어느 한 지점에서는 목숨을 내놓고도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직업을 바꾸고 내가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나는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자기의 주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초상식적이고 비상식적인 주견이어서는 안 되지만 “5천 원짜리 이상의 밥을 먹는 인간과는 얼굴도 마주 대하지 않을 것이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닌 한 자신만의 또렷한 주견이 있어서 “그것은 나는 아니다.” 라고 선을 그을 수 있는 일관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면서 1공하고 나면 거기서 해먹고 살고 2공하고 나면 거기서 빌어먹고 살고 일본에 붙어먹고 살다가 미군에 붙어먹고 살고 자유당 정권에 붙어먹고 살다가 3공화국으로 다시 넘어오고, 끊임없이 변모하고 진보에서 밥 벌어먹다가 보수로 넘어오고 보수가 깡통 차니까 다시 진보로 넘어오고, 이 짓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삶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셋째, 정치와 제도에 자신을 맡겨버립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정치에서 오는 것이고 제도가 개떡 같아서 그런 것이다. 미국이 왜 좋은가? 완벽하고 퍼펙트 한 사회제도 때문이 아닌가?” 이런 논리를 내세웁니다. 물론 인간의 삶은 공공의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의 제도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우리의 주체성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런 갈등과 모순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좋게 갖추어진 환경 속에서도 주체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Me before You, (2016)> 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성경도 안 보고 영화도 안 보십니까? 돈 많은 부잣집 아들인데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잘생긴 청년이 주인공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하반신 전체가 마비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친절하게 돌볼 수 있는 간병인을 면접으로 찾았는데 정말 명랑하고 좋은 아가씨가 뽑혔습니다. 지성을 다해서 이 남자를 간호하고 보필해주어서 여행도 다닙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남자주인공이 스위스로 가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유산의 일부를 간병인 아가씨에게 남깁니다. 그리고 안락사를 하러 갑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제도와 정치에 자신의 행복을 모두 맡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이 자신에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주체적으로 판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 가지 태도들, 감성적이고 즉물적인 해결, 편의적이고 게으른 해결, 정치와 제도에 맡기는 방식, 젊었을 때부터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좋은 정치가 이 세상에 심겨지기 위해서 노력해야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어떤 당에 헌금을 할 수도 있고 그 당을 위해서 자원봉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마치 우리의 인생을 모두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망상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모두 하면서도 마지막에 치열하게 사유하면서 집요한 게 인생의 의미를 물어가려는 노력들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근육이 부쩍 성숙하는 시기가 지금 젊음의 시기입니다.
최소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14세부터 30세 되기 전까지, 근육이 튼튼하게 자라는 시기입니다. 이때 근육이 자라나지 않으면 평생 중풍병자처럼 살게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정신을 차리지 않고 삽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병적 증상이 심합니다. 세상에는 생각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미친 듯이 실험을 하면서 그 답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모범답안을 교회에서 가지고 있는데 그 답이 자기 답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14살 2개월 되던 때에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교회 다니던 사람들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똑같았습니다. 14살 2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30살 먹은 어른들이 나만큼 인생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한 순간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그 시기입니다. 집요하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답을 찾아가야 하고 그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일치를 이룰 때 이 신앙에 불꽃이 튑니다. 그런데 사유의 줄을 내려놓습니다. 그런 상태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는데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 엄마, 아빠의 신앙일 뿐입니다. 자기의 신앙이 아닙니다. 좋은 설교를 들으면 뭐합니까? 치열하게 자기의 인생을 거기에 결부시켜서 사유를 하지 않는데, 그리고 근거도 없이 감상적인 기분에 던져버리거나 정치적인 것에 기대를 걸어버리거나 혹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줏대도 없이 인생을 살거나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주체성이 생기지도 않거니와 그나마 조금 있던 주체성도 그런 삶의 방식에서 다 용해되어 없어집니다. 저는 기독교 젊은이들을 보면 피를 토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고뇌하지 않고 인생을 살 수 있는가?’, “저는 괴로워합니다. 무지무지 괴로워합니다. 교회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워합니다.”하는 분도 계실 텐데, 그 괴로움은 고뇌가 아닙니다. 고뇌는 무엇인가 목표를 찾아가고 의미를 찾아가면서 겪는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것은 그냥 괴로움입니다. 그런 괴로움은 본질을 찾기 위해서 당하는 괴로움이 아니라 그냥 욕망이 좌절되고 자기만족이 안 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형편이 열리고 환경이 좋아지면 시시덕거리면서 하나님을 떠납니다. 어려움이 오면 어렵다고 절망으로 치닫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냥 남들이 믿는 신앙에서 더덜더덜 따라가는 것이지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말씀이 뼛속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방황과 고뇌가 구도의 흔적 속에 묻어있어야 합니다.
쫄지 않는 인생을 살기위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자기 주관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주관이 없으면 쫄지 않고 인생을 살수가 없고 쫄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자기가 붙들며 살 수 있는 주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 주관이 확실할 때 “네가 나보다 아무리 성공해도 나는 부럽지 않다. 네가 나보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나는 그런 식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싫다. 나의 이 고고함을 버리고 그런 식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는 주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가나안 땅을 주시니까 그 백성들의 온갖 생각이 ‘젖과 꿀’에만 꽂혔습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고 하시니까 ‘젖과 꿀’밖에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가 공터인줄 알고 뛰어 들어갔고 가보니까 메뚜기 컴플렉스를 느끼게 하는 아낙자손들이 있고 성은 어마어마하고 철기문화는 자신들이 본적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번에 확 쭈그러들었습니다. 왜? 세상을 향한 욕망은 비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욕망만 있으니까, 가나안의 번영에만 관심이 있고 ‘젖과 꿀’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이 그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유할 준비가 안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까지는 이후에 그들이 쫄딱 망하고 40년의 세월을 요구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벼락 맞는 것처럼 “땡!”하고 인생의 본질을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루 만에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생의 방향을 탁 잡는 회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체화되어서 자기의 것이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사랑과 고뇌 속에서 치열하게 사유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깨달아집니다. 이것은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몸부림과 함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어느 한 순간에 누가 만들어 놓은 답안지를 탁 찍어서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라는 이 물음은 개인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물을 때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나.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1990 몇 년도에 서울의 어디에서 태어나고 아무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와서 지금 무슨 직장에 다니고 있는, 누구누구씨의 3남2녀 중에 막내딸, 아들 아무개.” 라고 하는 개인의 인생의 의미와 함께 도대체 그것 말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면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야 합니다. 제가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어렸을 때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면 인생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게 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일반인생,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사람들이 고뇌하면서 살아가며 찾아가는지 알게 되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그 지도 위에 자기 인생의 의미를 묻는 물음표를 놓을 때, 문제는 훨씬 더 쉽게 풀립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 자체를 인간 스스로 질문의 의미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Who?’라는 것은 또 다른 ‘Who’가 옆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Who are you?’라고 물을 때는 ‘Who’는 너 말고 또 다른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가 인생의 의미를 좌우하는 답안이고, 인생의 의미 자체가 관계적임을 보여줍니다. 자신과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 그것이 이웃이든지 친구이든지간에 인생의 의미는 행복처럼 주관과 객관 사이에 걸쳐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이냐?’를 규정하려면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에서도 이것의 근거를 댈 수가 없습니다. 동북아철학에서 주역이나 역의 철학에서 보면, 만물이 생성하고 관계를 맺고 소멸하는 가운데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의미의 세계들이 마치 고리처럼 돌아간다고 봅니다. 그래도 그것이 ‘인간 존재의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해, 제가 한 번 책을 읽다가 엄청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국에 급히 주문을 해서 3-4일 만에 책을 받아서 읽었습니다. 키케로의 “선과 악의 목적에 관하여”라는 라틴어와 영어 대조역으로 된 책이었습니다. 한 이틀 만에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헐~”했습니다. 키케로라는 그 대단한 사람이 마지막에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논구해가면서 도달한 것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것은 악이고 인간 본성에 맞는 것은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인간본성”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수영을 하는 사람은 물을 겁내지 않습니다. 수영을 못 하는 사람은 발이 땅에 닿는 동안에는 재밌지만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갔을 때 밀려오는 무지무지한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사람은 발이 땅에 닿지 않는데도 공포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대로 익사합니다. 그때,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는데도 원래 닿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그런 견해는 선택할 수 없고 인생의 최종적인 신념의 뿌리를 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젊은이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고 합니다. 그 친구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철학을 논거해 가다가 모르는 것이 나왔는데 비트겐슈타인을 만나면서 뛸 듯이 기뻤다고 합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찾았구나, 이 모든 것이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였다고 하며 뛸 듯이 기뻤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여전히 자신의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는 말합니다. “찾아봐라. 그 발이 땅에 닿는지.”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철학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가도 그 발이 땅이 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학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물을 때에는 그것을 규정하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누가’, ‘무엇이’ 근거가 될 수 있느냐, 입니다.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찾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관계에서 근거를 찾는데 실존철학에서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실존철학에서는 근본적으로 당연시 되어 왔던 관계와 단절을 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그들 자신이 고백하듯이 실존주의가 가르치는 것은 운명적인 소외와 고독입니다. 그 고독이 너의 현실이니까 운명으로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런 구호 하나만을 가지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만 삶의 의미와 신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값지고 기름지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실 때에 정복의 의미를 마땅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놓쳐버리자 자신들이 죽을 것 같은 위압감을 느낄 때 한꺼번에 쫄아버린, 일본말로 ‘히야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얼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목숨만 살 수 있다면 비전이든 뭐든, 아예 처음부터 비전이 없었지만, 아예 모든 것을 내 버릴 준비가 된 비겁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한 순간을, 신념을 따라 얼마나 멋있게 죽느냐, 그 순간을 장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곡을 연주하면서 일생을 삽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합니다. 처음부터 주체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체성이 없고 비전이 없기 때문에 쫄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의미로 알 뿐만 아니라 자기화 된 신념으로 그것을 붙들 때 우리 인생에 실제적으로 작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삶의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것이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시고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대우를 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고 거기가 나의 발이 닿는 부분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마땅치 않으면 다시 돌아가서 기초부터 다시 고민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살길을 찾았다면 여러분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죽을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마지막에 답에 도달하지 못하고 저처럼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B. 지혜와 지식의 빛
두 번째는 지혜와 지식의 빛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근본의미를 앎으로써 삶의 방향은 결정이 됩니다. 그 방향을 안다는 사실 자체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도 쫄면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령충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세계와 인간의 구조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자기는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판별력, 쉽게 말하면 세계와 자신에 대한 지혜와 지식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지혜는 방의 구조이고 지식은 그 방을 꾸미는 장신구입니다. 또한 지혜는 길을 넓게 비춰주는 빛이고 지식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 놓게 만드는 등불입니다. 인생의 지혜와 지식은 함께 성장하며 함께 공조합니다. 일정량의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는 결코 지혜로워질 수 없고 지혜를 한 순간 받았다고 해도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지 않으면 그 지혜는 금방 빛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치열하게 사유하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신념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유를 하지 않는 이유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사유할 자극을 받지 못해서 입니다. 설교라도 정신 차리고 들으면 사유할 자극을 받을 텐데 그것도 정신 차려서 듣지 않고 마치 비벼주는 밥을 먹듯이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정신을 위해서 한없이 게으릅니다. 그러고는 반짝거리는 스마트폰과 대중매체 기기에만 빠져 삽니다. 이것은 나방의 눈에 들어오는 불빛과 같습니다. 이것은 사유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물론 특출한 사람은 그런 매스 미디어를 보면서도 거기서 안광의 지배를 철하듯이 뚫고 들어가며 사유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매일 켜져 있는 매스 미디어 속에 살면서 그렇게 사유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길들여집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보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유입니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자극이 주어져야만 사유를 합니다. 그런데 리니지 게임이나 배틀게임들이 사유를 요구합니까? 무슨 사유입니까? 그냥 쏘고 죽이고 목 자르고 하는 것 아닙니까? 사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근력을 어떻게 키워주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지적인 자극을 받도록 책을 읽지 않습니다. 대화를 해도 뭔가 돌아갈 때면 인생에 대해서 뭔가 고뇌하게 하는 대화가 별로 없습니다. 오늘날 나타나는 자기 과시는 인터넷에 무슨 식당에 가서 먹고 온 이야기들을 그냥 한 없이 올립니다. 그 사람들 모두 쫄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맨날 쫄면서 살다가 신라호텔에 한 번 갔다 왔으니까 화장실 변기까지 찍어서 인터넷에 올립니다. 내가 거기서 똥 한 번 싸 봤다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허해서 그런 것입니다. 허기가 져서 그런 것입니다. 사유라는 것은 그런 삶 속에서 싹트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진짜 읽기 싫으면 유튜브에서 유능한 강사의 강의라도 들으면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에는 자연적인 지혜와 신령한 지혜가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이 누구이고 그리스도 구원의 길, 참 성도가 되는 길,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가고 인류 사회를 사랑의 사회로 만드는 길, 이런 것들에 대한 지혜입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지혜’는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 지도자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성경도 잘 압니다. 진실합니다. 희생적입니다. 착합니다. 그리고 헌신적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재미가 없어서 입니다. 멀리서 지도자로 바라보는 것은 좋은데 그 사람과 같이 있기는 싫은 것입니다. 너무 고리타분하고 짜증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직장에 그리스도인인 아랫사람이 있습니다. 성실합니다. 꾀를 피우지 않습니다. 부정을 하지 않습니다. 정직합니다. 착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는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눈치가 없습니다. 눈치가 없으면 저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니 미워하지는 않지만 가까이 엮이기는 싫어합니다. 무슨 덤터기를 씌울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제가 부탁하는데, 처세술 책을 읽으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대하면서 처세술의 기본서라도 읽었으면 하는 필요를 수없이 만납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못지않게 그것도 중요합니다. 장년이나 청년들을 보면서 처세술 책 세 권만 읽어도 저런 개념 없는 행동은 하지 않을 텐데,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눈치도 채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맨날 하는 말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만 미워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양심에 흠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눈치가 없는 것이 가장 큰 흠집입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적응해주지 않는다고 앙심을 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다른 누구에게 적응해 본 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냉혹하게 버립니다.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옆에 “2%가 부족한 사람” 이라는 책을 끼고 다녀도 내가 전혀 흉보지 않을 테니 양자 균형을 이루면서 사람 사는 세상이 어떤지를 보십시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제발 읽어보십시오. 제발. 그러면서 본성적인 지혜와 신령한 지혜를 갖추어 가야하고 지식도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지식과 신령한 지식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자기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자연과 신령함,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처세술만 잘하면 내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오직 기도만 하면 된다거나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영웅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평가를 하나님이 직접 하시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삶은 둘이 양립할 수 없다면 둘이 하나님을 택하지만 좋은 경우라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함께 사랑스러워가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처세술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만 읽어도 그렇게 개념 없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최고와 지식의 보고는 성경말씀입니다. 이 지혜와 지식을 받기 위해서는 그 지식과 지혜를 터득하고 싶어 하는 반짝이는 눈이 필요합니다. 병든 마음은 고칠 수 있으나 병든 눈으로는 이 지혜와 지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에서 말씀과 성경을 가까이 하고 삶의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서들과 사상서들, 특히 기독교 신앙에 의해서 정제된 사상서들을 읽고 경건서적을 읽으면서 성경으로 나아가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C. 살아갈 힘
세 번째는 살아갈 힘입니다. 이것은 이런 인생에 대한 지혜와 지식을 가져도 항상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와 지식이 저절로 항상 살아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렇게 살아갈 마음과 정신의 에너지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은혜’, ‘Grace’라고 부릅니다.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할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은혜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인간은 원래 자기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를 행할 때 즐거움을 느끼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이것이 어그러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회상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가 주먹을 휘두르고 몽둥이로 때린 것도 아닌데 어느 날인가 공부가 재밌어집니다. 도서관에 파묻혀서 밤늦게까지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밤 11시가 되어서 도서관을 나옵니다. 가을 밤바람이 확 불어옵니다. 어두운 밤길 보도 위에는 낙엽이 구릅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러 갑니다. 그때 그 가슴 벅찬 기쁨이 생각나십니까?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없겠지만 대부분은 조금씩 있지 않습니까? 저도 요새는 병원 다니고 골골 하느라 공부도 조금밖에 못 하지만 옛날에 열심히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밤 12시까지 화장실도 안 가고 참아가면서 공부했습니다. 12시쯤 되어서 직원들은 이미 퇴근했고 공부하던 것을 내려놓고 불을 탁탁탁 끄고 백팩을 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옵니다. 신작로가 쫙 펼쳐지고 차에 시동을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뭔가 어제보다 내가 한 뼘쯤 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1년 전의 나 자신이 인생과 신앙의 하수 같은 느낌이 들어서 뭔가 가르쳐주고 싶은 느낌이 듭니다.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에게 잘 해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까, 괴롭히는 것이 의무입니까? 사랑을 안 해봤어도 그 정도는 답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까, 괴롭히는 것이 의무입니까? 당연히 잘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내가 희생을 하고 노력을 해서 상대방을 너무 기쁘게 해주고 밤늦게 돌아오거나 혹은 많은 것들을 들여서 그를 즐겁게 해 주고 홀로 돌아오는 길에 가슴에 벅차오르는 유열과 기쁨은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원래 의무는 우리의 정신상태가 올바르기만 하면 그 의무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것을 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공부하기 싫은 학생은 공부가 지긋지긋하고, 사귀기 싫은 여자에게 선물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됩니다. 그리고 만나기 싫은 남자 앞에 앉아서 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역 중에 고역이 됩니다. 따라서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탈하게 되면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지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은혜’라는 개념으로 풉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에게 의무를 행할 기쁜 마음과 힘을 주십니다. 참 신자답게, 참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쁨이 됩니다. 내가 내 죄를 회개하고 가슴아파하며 교회에서 기도했는데 돌아갈 때는 그렇게 기쁘고, 그것이 의무처럼 느껴지지 않고 말할 수 없는 특권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나의 부족한 것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내가 고백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힘으로 느껴집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역사하는데 이것이 성령의 감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의 작용은 신앙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연애를 하고 사랑에 불이 붙거나, 혹은 내가 꿈꾸던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한 2년 동안은 황홀한 기분이 들고, 행복합니다. 별로 좋아하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승진을 합니다. 그러면 또 3년 동안은 신나게 다닙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사랑의 힘인데, 이 사랑의 힘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진정한 생명이 아니라 유사생명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지는 못합니다. 회사가 좋으면 그것 하나만 가지고는 그 회사의 목적에 맞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 판보다 훨씬 큰 판에서 우리의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성공한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업에서 winner가 된 사람이 인생 자체에서 winner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판보다 훨씬 큰 판에서 봐야 하는데 이것은 보다 더 넓은 broad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방면에 적용될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 기독교에서는 Grace(Gratia)로 풉니다. 우리가 매일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없이는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힘으로 충만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서 쫄지 않고 당당하게 삽니다.
한 사람이 타인에게서 온전히 사랑을 받을 때 자존감은 굉장히 높아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것을 의식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남자가,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 없는 남자가, 혹은 여자가 자기편이 되어서 지지해주고 지지해주는 것만을 가지고도 그렇게 자신감이 넘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후원 속에 살아간다는 확신 속에 붙잡혀서 실제적인 생명의 힘을 공급받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더 쫄지 않고 이 세상을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이것을 Gratia, Grace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런 단어 하나에 어마어마한 인생의 의미의 추구에 대한 층차와 담론들이 섞여서 그것들이 엄청난 힘으로 우리에게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사유를 하지 않으니까 자기와는 상관없이 선생님에 의해서 주어진 정답이 됩니다. 수학을 푸는데, 원리를 아는 학생들은 변형된 문제가 나와도 풀어냅니다. 그런데 그 공식을 외우고 선생님으로부터 그것만 배운 학생들은 문제를 조금만 변형해도 풀지 못합니다. 원리를 모르고 정답만 암기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원리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 정답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정답에서 조금만 변형된 문제를 만나게 되면 답을 내지 못합니다. 결국 사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신앙의 힘과 함께 사유의 힘입니다. 치열하게 사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태도입니다.
인간은 이런 사랑의 힘으로 인해 쫄지 않게 되는데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는 흐트러진 마음으로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모아진 마음의 최고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이것은 소리를 지르는 기도 같은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기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시절에 돋보기로 장난을 하듯이,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면서 남이 가르쳐준 의미 없는 수많은 말보다 자기의 마음을 찢고 나오는 한 마디의 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기도 할 때 Grace가 주어집니다. 그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D. 일상의 즐거움
마지막 네 번째는 ‘일상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미래에만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죽어라 고생하고 미래의 천국에서만 행복하게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소망입니다. 전도서 9장 4절에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얼마나 명언입니까? 죽은 사자보다는 오늘 살아서 오늘을 누리고 있는 개가 훨씬 더 행복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오늘’은 단맛만 있는 사람도 없고 쓴맛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쓴맛과 단맛이 섞여서 매일매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쓴맛 때문에 현재의 단맛을 느낄 줄 모르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단맛에서 엄혹함을 이길 힘이 나오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자의 기쁨은 거룩함의 기쁨입니다. 은혜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신령한 사랑의 감화에서 오는 기쁨을 현재적인 일상의 삶 속에 녹여낼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일상의 비범화이며 비범한 은혜의 일상화이다.” 비범함과 평범함 사이, 비범함과 일상 사이를 오가면 휘도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spirituality(영성)입니다. 현재적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가운데 이것은 세상의 기쁨이요, 잠시 있다가 갈 것들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기쁨들을 비범한 은혜로 연결시켜서 그 작은 것들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위대한 만남은 다시 일상으로 내려와서 내 친구들에게 잘 해주고 우리 가족들과 이웃에게 친절하게 하고 우리 강아지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작은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가 없는 사람에게 일상은 일상이고 은혜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갔을 때에는 일상에 발을 딛고 산 것을 후회하고 일상의 세계 속에 살 때에는 은혜의 세계 속에 발 들여놓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어느 땅도 자기의 땅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낯선 타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주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있다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자기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의 깊이는, 경건의 깊이는 일상화의 비범화, 그리고 비범한 은혜가 일상화 되어서 작은 것들 속에서도 신령한 하나님을 느끼고 신령한 세계를 보고난 다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온전해지는 삶이, 그래서 이것이 하나의 고리가 되어서 움직이는 삶인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비범한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한 일상과 담 쌓은 경건은 금방 지쳐서 부패에 떨어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일했던 수십 명의 직원들이 거쳐 갔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특공대 같은 사람들을 좋았습니다. ‘돌격!’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그 일을 위해서 돌진하는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정말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러한 일들의 집적들이 오늘날 교회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특히 자료 정리는 정말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그렇게 ‘돌격!’ 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쏟아 붓던 사람들은 내 옆에 별로 없습니다. 한 3년이 만기입니다. 3년쯤 되면 일본말로 ‘엥꼬(えんこ)’가 되어서 나가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견고히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이 웬만하면 침범되지 않는 일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돌격정신은 부족한 것 같아도 오래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직장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이, 요새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도 성경적으로 공감할 내용이 많습니다. 세상은 직원들을 쥐어 짜 내면서 진액까지다 짜낸 후에 1회용처럼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해서는 이제는 성공할 수 없고, 일하는 것과 자신의 인생이 양립되게 해 주는 고용주가 지혜로운 고용주입니다. 제가 꿈꾸는 회사는 이런 회사입니다. 어쨌든 충분히 직원들을 쉬게 해 줍니다. 휴가를 많이 주고 쉼과 여유를 줍니다. 그 대신 비상하게 에너지를 모아야 할 때는 그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확 쏟아 부어서 그 일을 끝내는, 이게 단순히 주 36시간 근무 이런 문제가 아니라 말입니다. 일주일에 5일이 아니라 4일 근무를 하고 공휴일을 좀 더 주어서 일 년에 몇 번씩 일주일씩 쉬게 해 준다고 할지라도 꼭 회사가 필요할 때는 온 힘을 다 쏟아서 그 일을 끝낼 수 있는 그런 직장이 제가 꿈꾸는 직장입니다. 그리고 그런 애정은 자기만의 세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애정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워라밸’을 아예 하지 못하고 ‘워라밸’을 빌미 삼아서 아주 ‘라밸’에 치우쳐버리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지만 중요한 고용심가 여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비범한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상과 담 쌓은 경건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먹고 보고 여행하고 즐거워하는 것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아가서 이것들을 자신의 아주 커다란 인생의 의미와 연결하는 기술을 가져야 합니다. 타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소비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소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과도한 자기 사랑으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고 특히 젊어서는 소비의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되고 노는 것에 눈을 뜨게 되면 사유의 힘이 단절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결국 빈털터리 인생을 살게 되고 기껏해야 남의 답안만을 베끼며 살아가야 하는데 마지막에 그것은 답이 아닙니다. 남이 쥐어준 답으로는 절대로 그 사람의 인생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주체성이 있는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주체성은 아무 인간에게나 함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치열하게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고뇌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에 맺힙니다.
자연산 진주가 진짜 진주입니다. 중국에서는 담수를 합니다. 소주(Suzhou, 蘇州)에 진주 시장이 있습니다. 됫박으로 진주를 파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진주를 주지 않고, 고춧가루 빻는 기계에 넣어서 갈아서 줍니다. “아니, 이 아까운 진주를 왜 갈아서 줍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갈아서 세수할 때 쓰면 미백이 됩니다.” ‘진주가 얼마나 싸기에 이럴까?’ 하고 물어봤더니 끝없이 펼쳐진 논에 다발로 진주조개가 자란다고 합니다. 조개껍질을 하나씩 열어서 주사를 놓습니다. 이물질을 넣는 것입니다. 그 물질 때문에 조개는 가슴앓이를 합니다. 그러면서 체액을 분비해서 그 이물질, 불순물로부터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름시름 앓다가 진주가 됩니다.
이와 같이 주체성은 그런 치열한 인생에 대한 사유의 아픔 속에서 맺히는 보석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른다섯 쯤 되었는데 삶의 주관이 또렷하게 서서 신앙과 자기 철학 사이의 조화를 찾으면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는 젊은 날 무수한 시절을 고뇌와 사유 속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녁기도, 새벽기도, 수요예배 나오면서 은혜를 받고 그것을 자기의 사유 속에 녹여내면서 그 결과가 40대에 안정감이고 50대에 자신감이고 60대에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가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집안을 보면 상처를 가지고 있는 자녀들이 있을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해서 자식들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여러분이 미워서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자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체성이 없어서였습니다. 젊었을 때 소중한 세월을 먹고 살고 자기의 생각대로 살다가 사유를 하지 못했습니다. 신앙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중년에 방황을 하고 노년에 파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것이 이상할 것도 없고 여러분도 자칫하면 엄마 아빠의 살았던 삶을 그대로 흉내 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치열하게 사유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신앙이 없으면 누구도 피할 수없는 그 길을 가게 됩니다. 더구나 그 사람이 유혹에 노출되고 욕망에 노출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유와 절제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내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을 일상의 즐거움으로 삼는 삶, 그리고 누려도 후회 없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고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자신의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즐거움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계시도록 하십시오.
IV. 적용과 결론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없는 아름다운 주연입니다.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공이 바로 나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습니다. 양보하면 내가 이 드라마를 찍는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나는 아름다운 주연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복해지는 소수의 사람도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인생의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주인공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합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삶은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나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만족이나 지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그러한 의미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본질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쫄지 않고 인생을 살려면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라, 지혜와 지식을 얻으라, 인생을 살아갈 힘을 받으라, 일상의 즐거움을 누려라. 우리의 인생은 잘 살기에는 너무 길고 막 살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기회가 두 번이 있다면 연습을 해 볼 수 있을 텐데 딱 한 번 밖에 없습니다. 한 번밖에 없고 주연으로 부름 받은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를 주연 노릇을 한 번도 못 해보고 쫄면서 살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것들을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장난이 아니고 피 없이 얻을 수 없는 인생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의무는 우리가 자기 인생의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아있는 이 자체가 자신에게는 한 없이 영예로운 것이며 내가 내 인생의 무대 위에서 주인공으로서 이 극을 훌륭하게 연출해 가야 한다는 자각의식을 가지고 책임 있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따라해 봅시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라.”, “지혜와 지식을 얻으라.”, “인생을 살아갈 힘을 받으라.”, “일상의 즐거움을 누려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