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소명
녹취자: 조경훈
저는 오늘 학술적인 강의 성격도 있겠지만 강의를 듣고 나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의 만남, 십자가 부활사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아가페와 까리따스 등등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의 소명은 평신도의 소명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세계의 소명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평신도와 목회자의 소명은 완전히 종류가 다른 영역에서의 소명이 아니라 신자로서의 소명을 토대로 목회자로서의 소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목회의 소명은 신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영혼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데도 목회의 소명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선가 평신도로서 영혼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로서의 소명과 목회자로서의 소명은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정도와 수준의 문제라고 정리할 수 가 있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말하자면 첫 번째 담임 목사직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만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하신 것이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이었습니다. 목회자는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평신도는 세상을 사랑해도 되는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도와 수준의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필요로 하고 모든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회를 하도록 한 사람을 움직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 있겠지만 한 사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목회를 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아무리 현란한 신학을 이야기를 하는 누구라도 그 모든 것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경험 없이는 누구도 신자가 될 수도 없고 더군다나 그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 소명 체험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이것을 좀 더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한 그림을 그려서 하늘에 있는 사도바울이 짜증을 좀 낼지 모르겠지만 사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세 가지 방면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Judaism)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Hellenism])의 세계 속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당대에 아주 높은 지성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사상과 철학과 심지어 사도행전에 보면 로마의 문학에 대해서 상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사울로서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강한 동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편견이었습니다.
하나의 편견은 심리적인 편견으로서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최고의 민족이고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때에 유대인들은 오직 유대인만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방 백성들은 지옥에 땔감으로나 쓰는 사람들인데 혹시 이방인 중에 아주 탁월하게 선한 사람이 있으면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몸종노릇을 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역사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본 것입니다.
또 하나의 편견은 역사적인 예수는 결코 메시야일수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야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이들은 이야기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생각으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이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고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유대인들은 ‘사형에 처하소서.’ 라고 요청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요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이냐 하는 사형방법이 이 사람들에게는 너무 중요했던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사주하기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사정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종교지도자들의 신학적인 구도(plot)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태를 보아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정도로 잘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령 죽인다고 하더라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허망한 풍설은 퍼질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생각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사형을 시켜야 될 정도로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아니다 라는 동정론이 유대인들 속에서 퍼지게 될 때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형집행 방법을 고집하고 이 플롯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명기서 말씀에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니라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죽음으로 귀결된 것을 보면서 모든 유대인들이 ‘이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못 박혔구나.’ 라는 것을 가슴에 딱 새기면서 그 다음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종교지도자들의 플롯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신학적인 플롯에 딱 걸린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들은 이야기이면 부정할 수 있겠는데 자기가 직접 현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뵙고 대화도 나눈 것입니다. 여기에서 커다란 혼란이 그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살아난 것 아닙니까? 구약의 전통에서 보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은 오직 누구만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지만 주류 유대인들은 모세가 부활해서 승천했다고 믿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았던 에녹, 병거타고 올라간 엘리야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사도 바울이 이제껏 안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자기가 눈으로 보고 만나고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느끼는 혼란은 이것이었습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셨을 리가 없고 부활에까지 이르게 하셨을 리가 없고, 부활시키실 정도로 인정해 주실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저주하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다가 벼락이 맞는 것 같은 커다란 지성의 충격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이 어두운 사도바울의 지성을 찢고 벼락이 치듯이 지성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대속의 교리입니다.
그 대속의 교리는 이미 구약이 제사를 통해서 풍부하게 보여줍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 아주 익숙해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저작을 바울의 저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히브리서에 대한 저작이 바울이라고 상정하고 본다면 그 정도로 제사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 틀림이 없는데 저주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저주의 이유가 자신이었다면 두 사실이 모순이 되는데 이 저주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대신적 죽음이었다.’ 라는 사실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저주가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인정을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로마서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경험하게 되면서 사도바울은 구약의 제사제도가 바라보며 달려온 것이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케리그마(kerygma)와 그의 많은 교훈들 이후에 일어난 부활, 부활 이후에 일어난 성령 강림의 사건 이런 모든 것들이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보여주는 핵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묘사하는 것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이미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김 목사님의 얘기에 이의를 제기할게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역사와 철학, 문학, 종교 이런 것들에 대한 풍부한 사상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찬란한 복음의 벼락이 이 사람의 지성위에 딱 떨어지는 순간 파편처럼 돌아다니면서 역사, 철학, 문학, 종교에서의 이런 고민들이 쪼가리 쪼가리로 돌아다녔고 그나마 유대교주의라고하는 구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어설프게 엮어 놓았었는데 이 벼락이 떨어지면서 이것들이 다 해체가 되면서 다시 헤쳐 모여를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얘기합니다. 그 지혜인 소피아(sophia)는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의 총합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사상적인 면에서 보면 철학적인 개안입니다. 또한 신학적인 눈이 떠지는 개안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뻗어져 나오는 찬란한 광채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모든 역사를 모두 연결시키는 결절점(結節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종교가 달려온 역사적인 발전과 전개의 꼭짓점에 더 이상의 성취는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볍씨 같은 씨앗을 심으면 쌀눈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죽고 쌀눈은 삽니다. 살지 않으면 싹이 날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씨앗이었는데 자랍니다. 쌀보다 나무를 예로 들면 작은 씨앗 하나가 떨어져서 나무가 자랍니다. 미국에 가서 자이언트 세콰이어를 한번 봤습니다. 아홉 명의 남자가 손을 잡아야지만 나무를 감쌀 수 있었습니다. 높이가 120미터쯤 되고 수령이 3,800년 됐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둘레를 재면서 계산을 했더니 나무 밑동을 잘랐을 때 어린이 30명이 앉아서 수건돌리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이 구약에서 떨어져서 자라고 신약에서 꽃이 피는데 그 꽃이 마지막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바로 그 씨앗의 화려한 개화입니다. 이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다 묘사를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제 책을 보시면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은 에베소서, 특히 골로새서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신약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최고의 걸작은 골로새서입니다. 사도바울의 사상이 완전히 무르익었을 꼭짓점에서 마지막 글을 쓰고 순교를 하게 됩니다.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주적인 기독론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에게 무슨 영향을 끼쳤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사도바울에게 신적인 강제력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것은 소위 ‘아난케(Ananke)’ 라고 하는 숙명입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하는 하나님의 강요하는 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게 무슨 힘입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받을 사람을 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대속적인 죽음을 죽게 만든 신적인 동기(motif)가 무엇입니까?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간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저주받게 하시면서 까지 그 인류를 구원하고 싶으셨습니다. 이 신적인 강제력에 사로잡혔는데 두 개의 편견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편견은 예수는 메시야일수 없다는 편견인데, 이것이 깨졌습니다. 또 다른 깨진 편견은 유대인만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사랑은 우주적 사랑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이었고 죄인 중에 괴수인 핍박자요 포행자인 자기 같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피어린 열망이 자기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이 사랑이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사람을 감화하니까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인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소명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가 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자기를 살게 했던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그 사랑이 시키는대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로드십(lordship)’에 대한 인정이고 목회에 대한 소명의 ‘핵심(core)’입니다. 신학공부를 하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는 예수를 깊이 만난 사람이어야 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18세기에 요한 웨슬레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전설적인 설교자였습니다. 소위 얘기하는 옥스퍼드의 홀리클럽(Holy Club)의 멤버들이 영국의 역사를 바꿔 놓습니다. 실제로 윌리엄 렉키(William E.H. Lecky)같은 역사가들은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나락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그의 일기 478쪽에서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는 교회자의 독(venom)이라고 합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그냥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독이라는 것입니다. 회심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 모두는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혼자서는 인생을 도저히 살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된 삶을 포기하고 예수를 붙든 사람입니다. 나의 이 말이 낯설게 느껴지면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부터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살면서 내 상태에 내가 만족하지 않으면 그 상태를 바꿔 보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을 안 하지만 소위 이것은 구원을 향한 열망입니다. 철학에서 찾아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인가? 도대체 행복은 뭐고 행복을 느끼는 ‘나’라는 인간 존재는 무엇인가? 질문을 합니다. 문학에서 내가 못 살아본 삶을 살았던 사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인생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속에 뭔가 행복한 인생을 사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건너뛰어서 예술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술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플라톤도 아카데미에서 수학과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술은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 하는 딴따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기 고급문화인 클래식 음악에서부터 저 밑에 젊은이들이 술에 취해서 뒤흔들 때 쏟아져 나오는 랩이나 레게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예술은 영혼에 대한 인간의 갈망의 투영입니다. 논리는 모르지만 감각으로 구원을 찾아가 보려고 하는 열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게 일상의 쾌락에 자신을 내어던져 버리게 됩니다. 순간순간의 즐거움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마치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의 코나투스(Conatus) 이론에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매순간 코나투스(번역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기분 좋음 그런 것입니다) 속에서 매순간 사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만족이 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예수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것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복음을 듣게 되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길에 대해서 포기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린 십자가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저는 어머니 아버지가 예수를 믿지는 않으셨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14살 2개월 되는 해였습니다. 3학년이 되기 직전인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2월 달 이었습니다. 15살이 아직 안됐을 때였는데 주일날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논둑길을 걸어서 한참 가야지만 교회가 나왔습니다. 갑자기 말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들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자지러지게 울게 만든 질문은 나는 누군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계는 나에게 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것 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후 단 한주라도 회심하기 전까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날이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교회를 끊었습니다. 이유는 내가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집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숨이 조여 오는 죽을 것 같은 질문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무서운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락이나 잡기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모니카나 기타에 좀 미쳐본 적이 있고 야구도 좋아하고 축구도 좋아 했지만 그것들은 나의 구원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의 수많은 설교는 아무 도움이 안 됐습니다. 내가 보기에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뇌가 없는 무뇌자들 같았습니다. 내 나이 14살 2개월 되었을 때에 거기에 있는 어른들과 대화도 해 보고 눈치도 보았지만 인생에 대해서 나만큼도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결적정인 것은 그렇게 피가 마를 것처럼 고뇌하는데 기어 다닐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니는 동안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와서 ‘남준아! 너 정말 구원받았니? 내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줄까?’ 이렇게 질문하는 한 명의 교사도 없었습니다. 비슷하게 다가온 남자 집사님이 잠깐 계셨던 것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린 내 마음에 그 사람들은 나의 영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기 교사하시고 계신 분들은 정말 조심하십시오.
그 당시 중학교 2학년이 영국 청교도의 존 번연(John Bunyan)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때에 내 마음은 아무 생각이 없는 길가에 난 풀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걸어가면서 ‘넌 얼마나 좋겠냐?’ 발아래에서 구르는 돌멩이를 보면서 ‘내가 저 돌멩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책을 찾아보니까 존 번연이 회심하던 전야에 베드포드 강가에서 예수를 믿지도 못하고 안 믿지도 못하는 극도의 고통을 받으면서 강가에 떠다니던 오리들을 저녁때 보면서 부러워했습니다. 저와 똑같이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존 번연도 오리를 보면서 ‘오리야. 너는 참 좋겠다. 생각 없이 태어나서’ 라고 하면서 부러워했습니다. 그 내용이 『죄인에게 넘치는 은혜』 라는 그의 유명한 간증집에 실려 있습니다.
저는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씻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무신론자로 산다. 대답이 없는 신을 찾아가기보다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간다.’ 무신론자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반신론자(antitheist)였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도 쥐뿔도 없었지만 어쨌든 내 인생을 살아가야 되니까 문학작품을 읽었습니다. 친구들한테 뭔 얘기를 해도 내 얘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그 나이에 그것을 공감해 주겠습니까? 문학작품을 읽어보니까 나와 비슷한 사람이 모두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문학책을 읽으면서 ‘나는 외롭지 않구나. 나 같은 고민을 안 하는 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고 나는 정말 정상적인 길을 걸어가는구나.’ 생각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했습니다. 그러한 일을 몇 년 동안 반복했는데 매번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무슨 작품을 읽든지 비슷한 이야기였습니다. 때론 사랑 때문에, 돈 때문에 꼬이고, 꼬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불행해지고 행복해지고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인생에 대한 물음표는 많이 재기하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그때가 고등학교 때인데 저의 관심이 사상과 철학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미친 듯이 호기만만하게 책을 읽어 갔습니다. 한참 문학에 빠졌을 때 깊이 심취하던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헤르만 헤세입니다. 제 나이 스무 살에 전 세계에서 헤르만 헤세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다섯 명 중에 한 명일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깊이 감동도 받았지만 당신의 소설은 내 추측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게 스무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어쨌든 그때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원래 신학교를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아주 비인간적인 신학교의 교육방식을 보고 부르짖으면서 고발한 문학이 『수레바퀴 밑에서』입니다. 『지성과 사랑』, 『데미안』, 『싯다르타』 다 그의 주옥같은 책들입니다.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자살에 대한 희망을 나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론은 간단합니다. 『황야의 이리』에서 “자살을 이상한 걸로 생각하지 마라. 걸어가다 불이 나면 비상구를 열지? 인생은 그런 것이고 인간 모두는 그 비상구를 열 권리가 있다”.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니 나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높은 이상과 기대 사이를 헤매고 엄청난 지적인 갈증은 있는데 정답은 없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저는 사상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사르트르의 책 한 줄을 어디 가서 이야기를 못하면 여학생들하고 이야기를 못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한 번도 여학생들하고 미팅한 적 없습니다. 내 젊은 날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런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얘기를 안 하면 안됐습니다. 지금보다는 그때 애들이 훨씬 더 고상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 나오면서 세상이 좀 어수선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 하이데거, 칸트도 내가 좋아하던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고 프리드리히 니체, 카프카 같은 소위 실존주의 계열의 문학가들도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사상에 심취해서 “아!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면 신이 납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수영 못하는 사람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놀다가 섰는데 발이 땅에 안 닿을 때의 공포는 수영 못해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물속에서는 10cm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그 깊이는 상관이 없습니다. 100미터 물위에 떠있는 거나 똑같은 공포를 가져 다 주는 것입니다. ‘아! 이거는 아니구나.’ 또 이동하고 또 이동하는데 대답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회심을 했습니다.
저는 새벽마다 밤을 새우면서 공부했었습니다. 새벽마다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면서 교회를 나갔습니다. 제가 회심에 이르도록 도와준 책이 있었습니다. 지금 읽으면 ‘내가 참 아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소설을 읽었는데 기쁨을 주는 소설은 있지만 마음에 평화를 주는 소설은 없었습니다. 딱 한권 톨스토이의 『부활』 을 다 읽는 순간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뭔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은 것은 톨스토이의 『인생론』이었습니다. 그 책을 여러 권 샀고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게 내 인생에 길을 열어줬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철학을 문학을 종교를 하나님으로 삼지만 그게 진정한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삶을 지탱해주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 중에 한 사람인 어거스틴(Augustine)입니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 내가 죽고 나면 천국에 갔을 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두 사람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할머니하고 어거스틴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이야 우리가 가면 우리 선택과는 상관없이 배울 수 있는 분입니다. 어거스틴은 제 인생을 바꿔 놓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거스틴의 『고백록』(Confessions, 告白錄)을 120독을 했습니다. 한창 때에는 눈을 감고 외우면서 걸어 다녔습니다. 제가 굉장히 바쁜데 120독을 할 정도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 소리 하지 말고 읽으라.’라고 자주 말합니다. 그가 고백록 1권 5장 5절에서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때렸습니다.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저는 당신에게 나 자체로 무엇이기에 저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까? 그리고 내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진노하셔서 끔찍한 비참을 내리실 것처럼 경고하시기 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여기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아야 할 필요가 하나님 자신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못 받으면 불만족스러우시고 우리가 사랑을 많이 해주면 행복하신 분이라면 그 분은 완전한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완전히 만족하신 분입니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보고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겠습니까?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만약에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징벌을 내리겠다.” 라고 하면서까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고 하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거스틴은 그 답을 찾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서 진정으로 충분한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때문에 하나님은 “너는 나만 사랑해야 된다.” 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3개의 보편 속에 한 부속품처럼 생각을 합니다. 라이프니츠(Leibniz, Gottfried Wilhelm) 같은 사람의 단자론(Monadologie)에서는 인간 존재를 ‘무창의 단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창문이 없는 모나드(Monad)입니다. 인간은 서로 소통할 수 없는데 신에 의한 예정조화에 의해서 인간은 소통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존 철학자들은 인간이 근거가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고 모든 것에 단절돼서 어느 하나도 필연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사르트르가 얘기한 것처럼 잉여의 존재로 이 우주 공간속에 던져진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필연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존귀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인간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위해 미친 듯이 쾌락에 빠집니다. 그것이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더 철저히 자신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외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가 막힌 하나님의 통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나만 사랑해야 된다.’ 라고 강력하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 사랑 안에서만 인간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밀려오면서 나는 지금도 어거스틴 때문에 행복한 시간들을 보냅니다. 꼭 읽어보십시오.
이 심오한 어거스틴의 인용문을 해석하자면 하나님께 인간은 필요하지 않지만 인간을 위해서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가페와 ‘까리따스’의 문제가 나옵니다. 라틴어에서 까리따스라고 하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영어의 ‘채리티(charity)’가 옵니다. 어느 영어 번역에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charitiy’라고 번역합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 까리따스의 사랑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아가페토스’(ἀγαπητός), 사랑을 받은 사람, 영어로 ‘the beloved’입니다. 진정한 목회자로서의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그들의 타락을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을 위해 뭔가 해줘야 되겠다는 열망,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줘야 되겠다는 열망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소명의 진수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목회에 부름을 받았는지 목회에 대한 소명을 확인해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괴로워서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문학도 찾아보고 철학도 찾아보고 종교도 찝쩍거려보고 예술도 건드려보는데 답이 안 나옵니다. 그때 이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21살 때 제가 회심을 했는데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 살자고 예수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때 자지러지듯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보니까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내 인생에 나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형벌과 같으면서도 동시에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게 그 명제입니다. ‘내 인생에 나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주체성을 확 빼버리고 예수를 집어넣어 버린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체성을 그런 식으로 멸절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그것은 로봇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참된 주체성을 주셨습니다. 참된 주체성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안에서 주체성이 최대한 아름답게 꽃 피는 것입니다. 그 주체성이 최고로 아름답게 꽃핀 상태의 고백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입니다.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이기도 하고 ‘자기애적인 사랑’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에로스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신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원인은 대부분 ‘아름다움’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좀 너무 이상하다고 그러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자매들이 성비가 안 맞아서 자기들이 시집을 못 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많은 자매들이 형제들에게 한 번도 프러포즈를 못 받아 봤습니다. 얼굴이 예쁘게 생긴 자매들은 한 20명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격도 별로 좋지 않은데 왜 그럽니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설령 저 사람의 성격이 못됐다고 하더라도 이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니까 사랑이 자꾸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그 성향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너는 나 예수를 믿었으니 너는 나를 위해 살아라.’ 라고 하는 것은 대가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네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한 사람이 아가페의 사랑에 감화를 받고 나니까 이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랑이 생겨납니다.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랑인 라틴어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말씀과 함께 까리따스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여기 ‘정동(affection, 情動)’이라는 단어는 내가 만든 단어입니다. 물론 사전을 찾아보면 있는데 내가 쓰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정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은혜의 정동이 일어납니다. 어떤 진리를 발견할 때 마음이 흔들리면서 사랑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애정의 정동입니다. 애정의 정동이 일어나면서 사랑이 생기는데 이런 사랑이 뿌리를 내리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지식과 사랑의 성장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아마레대움(목적격)’,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아마레데오’(탈격)를 포함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가족을, 교회의 지체를, 이교도들을, 불신자들을 나에게 원수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의 사랑이 우주적이기 때문에 이 사랑에 감화를 받은 사람의 사랑도 우주적이 되게끔 만드십니다. 이렇게 해서 온 인류가 이 사랑 속에 있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목회의 소명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 속에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 소명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 보면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De civitate Dei, 神國論)입니다. 『신국론』은 최초의 기독교 역사철학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두 왕국 이론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반원이 있고 이렇게 하나의 반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나라가 공존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세상의 나라’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위에 떠오르는 것은 세속의 역사이고 이것은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공부하면 알 수 있는 역사이지만 여기 밑에 나오는 것은 믿음을 가져야지만 보이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 종말로 가고 세상의 나라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세속역사를 타고 종말로 갑니다. 신자는 여기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이 세상 나라와 맞대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목회자는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결국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사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의 동기와 시작이 나에게서 시작합니다. 내가 사랑해서 내가 좋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사적인 사랑은 단절입니다. 사랑을 끊어 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사랑이라고 하는데 교통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모든 인류가 교통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목회의 목표입니다.
소명의식과 신학공부입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가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만난 파이크라는 주교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불가지론을 벗어나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졸업 후 남은 것은 돌멩이 한 움큼이었다.”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 위기』 라는 책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분은 성경주석으로 유명하신 박윤선 박사입니다. 이 분이 제자에게 쓴 편지에서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의 시간을 많이 쓰십시오. 학문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 신학자는 자유주의자로 떨어지는데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해를 끼칩니다. 기도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신학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파리가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주시는 계시가 없이는 신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고 자체가 계시의존적인 사색을 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해야 됩니다. 신학은 이성을 요청하는 신앙, 신앙에 복종하는 이성으로서 신학공부가 됩니다. 신학의 원리는 오직 신앙입니다. 신앙과 성경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원리’라고 말하고 이것은 ‘내적인 원리’라고 말합니다. 이성이 수단이 돼서 공부를 합니다. 믿은 바들을 확실하게 하는 일에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머리좋은 사람들이 신학을 잘합니다. 안셀무스(Anselmus)라는 사람이 『프로스로기온(Proslogion)』 라는 자신의 유명한 책에서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높으심을 깨뜨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의 지성과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믿기 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믿습니다.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저의 정의입니다. 100% 나의 것만은 아니고 선배들이 이미 이야기 한 것이지만 내가 그것을 재진술 해봤습니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이다.” 신학은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살리려고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학의 과정은 성령 안에서,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신학교 강의실에서 교수님들이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의 신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학생들을 위한 권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깊이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똑같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우리도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둘도 없는 친구와 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라.
두 번째로 “목숨을 걸고 공부하라.” 목회자는 세 가지 점에 있어서 교인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지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공학 박사를 하는 평신도보다 공학에 대해서 내가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공부했으니까. 그러나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관한한 항상 우위에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일이였습니다. 만 32세에 피 끓는 나이에 교수가 됐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내 가르침을 따라오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친구가 얘기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에게 배운지 2년이 됐습니다. 교수님이 우리에게 꼭 읽으라고 소개해 줬는데 그것이 한 학기에 평균 한 키였습니다.” 책을 세워서 한 키가 아니라 눕혀서 한 키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2년 동안 한 권도 남김없이 모두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은 서울대 나온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저 그렇게 들어온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주님을 사랑하고 공부에 매진하니까 리포트 써내고 시험보고 교회봉사 다 하고도 한 학기에 한 키를 읽어서 2년 동안에 네 키를 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읽은 책 중에 만화책, 웹툰 같은 것 빼놓고 책을 지금 신대원에 와서 3년 되는 동안에 커버 투 커버 까지 읽은 책을 몇 키 쯤 되나 쌓아 놓아보십시오. 설교를 쏟아 놓아도 교인들이 건질게 없는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우위에 있어야 됩니다. 세 번째는 도덕적인 우위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도 평신도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하십시오. 어느 정도로 공부해야 될까요? 질문하는데 미친 듯이 공부해서 최소한 5년 정도, 그렇지 않으면 7년 내지 10년 정도를 공부해야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보다 공부 못 한 사람도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음식점을 봐도 다 밥하지만 다 장사가 잘 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공부해야 되냐 하면 3년 다니는 동안에 그래도 2~3번은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다가 쓰러졌다더라.’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 과하게 공부를 해서 119가 와서 실어 갔다더라.’ 정신병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내과정도 갈 정도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열렬하게 기도하라.” 학부 때 저렇게 기도 열심히 하는데 신대원와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인정할건 인정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신실하라.” 신실한 사람들만이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교회를 사랑하라.” 어느 한 교회에 소속되어서 거기서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라. 신학생들이 월급 받고 전도사를 하든지 놀던지 모 아니면 도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신학생이 몰려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신학교 다닐 때 웬만하면 사역하지 말고 한 2학년 때 까지만 공부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3학년 때쯤 가면 좋겠습니다. 물론 내 아들도 나의 이 부탁을 따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온전히 공부에 올인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그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면 나중에 한 번 더 부르십시오. 이상으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