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8-11)
녹취자 : 오희열
시간이 좀 흘렀지만 저는 어느날 이 본문을 읽으면서, 특히 희랍어 성경으로 이 본문을 살피면서 일평생 잊혀지지 않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로서 성경을 읽지만 그 성경이 우리 내면의 깊은 세계를 강타하는 일이 매일매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우리 모두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 깨달음 중 지극히 작은 한 일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 감히 “목회란 무엇인가?”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어려운 이유는 목회란 무엇인지를 본질적으로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의 실제의 삶이 그 본질과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란 무엇인가 할 때 오늘 성경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단 하나로 요약됩니다.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위대한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한 언급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어려운 본성을 가진 죄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성화요, 영화는 아무런 방해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영화이고 우리가 누릴 천국은 그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온전히 성취된 곳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목회는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이르게 됩니다. 저는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한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여기까지 온 것은, 여러분 모두와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의 본질은 큰 교회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교회를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목회의 껍질에 불과합니다. 목회의 본질은 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돌보는 양떼들이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만약 목회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사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만약 목회자가 자신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성장하지 않으면서 양떼들만 주님을 사랑하게 가르치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고, 또 성공한다고 하면 그것은 위선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자기의 책 속에서 교회의 가치는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가 큰 교회든지 작은 교회든지 목회자는 자기가 돌보고 있는 그 영혼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려고 목회를 하는 것이지, 만일 그 돌보고 있는 양떼의 수가 적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리고 그의 목회 아래에서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랑은 점점 더 퍼져나갈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헤 아가페” 아무 사랑이 아니라 그들 안에 두신 그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신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이 모든 세계를 그 사랑 안에 두시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드는 우주적이고 하나님의 자기 회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기원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원으로 하는 단 하나의 사랑을 성도들의 마음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목회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몸으로서 이 편지들 속에서 감옥 속에서도 쉴 수 없는 자기의 애절한 기도를 표명한 것입니다. 그 감옥 속에서 갇혀서도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의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점점 더” 라는 희랍어의 표현은 무엇인가 거기에 장해같은 것이 가해져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점점 더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정도의 증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보면 우리는 소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성령 안에서 신자를 만들고 그렇게 신자가 된 사람들 중 하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을 목회해서 불같이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 불길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이것이 목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작은 교회에서 끊임없이 큰 교회의 목회자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위축감을 느끼고 한편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나를 왜 저렇게 쓰지 않으실까?” 하고 생각하거나 혹은 불평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일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각자 우리로, 나는 그냥 나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부족한 것은 끊임없이 배울 것이고 모자란 것은 보충할 것이고 잘못된 것은 고칠 것이며 없는 것은 어디에서 빌려서라도 우리는 목회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비교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예뻐서 나를 이 세상에 만드신 것입니다. 찬양집회를 하면 모두,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 교회처럼 되겠습니까? 성령운동을 하면 조용기 목사님의 순복음교회가 됩니까? 제자훈련을 하면 모두 사랑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배우며 오직 우리의 생애 전체를 불태워 오직 한 가지 목표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의 목회를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그 “헤 아가페”가 풍성해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지식과 모든 총명 안에서”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지식”이라는 것은 “에피스테메”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지식 중에서 어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앎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에피”라는 말은 “전체에 대해서, 포괄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이런 지식의 이론에서 우리는 희랍철학에서 논의되었던 지식의 두 개념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독사”라고 하는 지식입니다. 코이네 그릭에서는 이것이 “영광”으로 나오지만 원래의 클래식 그릭에서는 “독사”즉 “의견”으로 나옵니다. 이 “의견”은 어떤 진리에 근거한 객관적 진실성의 의견이 아니라 개인의 사견입니다. 언제든지 또 다른 견해가 나오면 뒤집힐 수 있는 견해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억견”, “억지로 만든 견해”라고도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또 하나의 지식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피스테메”입니다. 이 지식은 사견이 아니라 진짜 사실과 근거에 기초한 확실한 견해로서의 지식입니다. “에피스테메”와 유사한 단어는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 본문에 쓰인 단어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하나님이 목회자로서 우리를 불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도록 목회사역으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이 목회사역의 불이 점점 더 풍성하게 타오르게 하기위해 이 아래에 두 개의 장작이 필요한데 그 장작 중 하나가 “에피그노시스” 곧,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총명”입니다.
총명은 “아이스테시스”인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지혜, 혹은 판단력 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지식과 총명, 혹은 판단력, 실천적인 지혜를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를 연료로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 총명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재료라면 그 재료가 저절로 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 필요한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약하자면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불길을 일으키시는데 이 일을 위해서 목회자는 끊임없는 지식과 총명을 제공함으로써 성령은 그것을 사용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사랑을 불일듯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과 총명의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이 지식과 총명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참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 특별히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올바로 전달하고 모든 총명을 가르쳐줄 때 성령이 역사하사 성도들의 마음 속에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는 철저하게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 모르는 성경에 관한 지식들을 전달해주어야 하고 성도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지혜와 총명을 성도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성도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지식을 멸시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어떤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설교, 인생의 지혜를 전달하는 수준으로서의 설교는 더더욱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7년, 최소한 4년, 아니면 9년, 혹은 12년 이상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정직하게 기독교 지성인으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조국교회의 많은 설교들이 정말 기독교 지성을 진작하는데 도움을 주는 설교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에서 지식도 빠지고 목회의 중심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는 일이 더 이상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불길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독교적 활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 속에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사회단체와 교회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11세기의 신학자 끌레르보 베르나두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모르 입세 노띠띠아 에스트”, “사랑 그 자체가 곧 지식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반드시 그 안에 지식을 내포하고 있으며 지식이 참된 것일 때에는 반드시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와 인간,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지식이 올바르기만 하면 거기에는 그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필연적으로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한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약 25년을 설교했고 그냥 목회자로는 35년 이상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저에게 너무 어려운 것은 설교입니다. “어떻게 내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똑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주일에 외치는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 헬무트 틸리케가 증언한 바와 같이 그 목회자가 일주일 동안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붙들고 피나는 투쟁 속에 살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인할만한 근거가 없이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위대한 신학자의 말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일주일동안 분투하며 살았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것은 저절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이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 그 지식의 요체인 성경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우리의 신앙, 그 신앙의 본질, 그리고 그 신앙과 마주하고 있는 세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 그 앞에 서 있는 나, 이런 것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그가 전하는 설교는 매주일 메모 쪼가리처럼 성도들의 머릿속에 돌아다닐 것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을 이루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모든 진리의 가장 아름다운 핵심이 되는 책이고 여기에서 올바르게 흘러나온 모든 신학들은 바로 성경과 활발한 교류를 이루며 성경의 해석을 풍성하게 하고 올바르게 하고 거짓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중심으로 놓고 그 주변의 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선교학, 그 주변에 다시 확장이 되어서 역사, 문학, 철학, 과학, 법학, 의학, 모든 학문들이 서로 아주 그림같은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자기의 리폼드 도그메틱스에서 이러한 학문이 가능한 근거를 그 모든 사물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함으로 로고스 실재론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얼마나 더 탁월한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연배도 계시고 후배도 계시고 저보다 더 선배인 분들도 계시지만 우리 자신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과연 지식의 발전이 있습니까? 목회를 시작할 때보다 내 신학이 깊어졌고 성경에 대해 보다 확고한 이해에 도달하고 있으며 예전에 설교한 나를 불러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지식의 발전을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너무 많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총명”, “아이스데시스”라는 이 단어는 “아이스다노마이”라는 “깨닫다”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현대의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노에시스”라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노에시스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신”, “누스”에서 온 말입니다. 어떤 인식의 지혜가 판단력과 관련될 때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총명”이라고 부릅니다. 지식의 크기와 총명의 크기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지식이 전혀 없이는 총명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식이 총명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소위 “공부를 많이 한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식의 총량은 크지만 지혜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지식의 총량은 그렇게 탁월하지 않지만 판단력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이런 사람은 비록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비록 그 지식의 총량은 크지 않지만 올바른 총명을 목회를 통해 깨닫고 이 세상을 슬기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총명입니다.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논의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목회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을 점점 더 풍성히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풍성함은 두 개의 연료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것은 바로 지식과 모든 총명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목회자가 성도에 비해 우월하지 않다면 그는 목회자의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본업은 전심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아감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가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그가 전에 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갔던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려하여”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이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경제잡지로부터 모든 세상의 잡다한 지식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학문들을 이용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소위 “그노시스 크리스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자신을 채찍질함으로써 지식의 목회, 총명의 목회가 가능해지고 이 위에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성도들은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소결론입니다.
이제 두 번째입니다. 이러한 목회의 본질적인 일들을 성취하는 것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청교도이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였던 존 오웬은 자신의 책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묻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대답은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이지만 고유한 의미에서는 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이것은 크게 세 가지를 위해여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첫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죽을 수 없는 무한한 생명이시니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는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실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었고 인간은 땅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시고 말씀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고 싶으셨던 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자신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유익을 얻고 있으니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더라면 복음서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고 복음서가 없었다면 사도행전이 없었을 것이고 두 가지가 없었다면 서신서들이 없었을 것이니 우리는 신약을 통해 명료하게 전달되어 오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에 관한 계시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가 올바르게 되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평생의 과제이고 이것이 목회에 있어서 지식의 가장 중요한, 총명의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세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 대해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셨고 사람이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람에 관해 가르쳐주셨는데 그냥 사람은 사람을 가르쳐줄 뿐이지만 이분은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인간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사람이지만 원래 하나님이 있게 하고 싶으셨던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래 있게 하시고 싶으셨던 사람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으로 있고 예수를 믿은 우리는 원래 죄가 없었더라면 있게 될 그 사람으로부터 아직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는 성화가 필요 없으셨습니다. 비록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춘 것이고 케노틱의 이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당신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사람으로, 인격으로, 그러한 존재로서 살아가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주셨는데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세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셋 모두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I am the way.” 이것은 인류 역사상 종교가 찾던 주제였습니다. 참 인간이 따라야 할 “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는데 그 모든 것들은 다 “the way” 가 아니라 “a way”였습니다. 그리고 진리, “truth”는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지적으로 깨어난 이후 모든 철학이 찾던 주제가 바로 “무엇인 진리인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철학사에서는 끊임없이 이미 있는 진리에 대한 견해를 부수고 자기 파괴적인 형태로 그 다음 것들이 나오고 그것이 파괴되고 그 다음 것들이 나오고 세월이 흘러가면 결국 예전에 있던 것들이 반복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동북아 철학에서는 이것이 그 위에 토대를 놓고 토대를 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완벽하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항상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에 가까울 정도로 앞에 있는 사상을 비판하고 다음 사상이 나오고 또 나오면서 발전을 이루어 갔는데 역시 세월이 많이 흐르고 보면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듯이 이전에 있던 것들이 반복되고 때로는 역사 속에서 이 동양과 서양의 문명과 철학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만나면서 융합작용을 하여 이곳에서 있는 것이 저곳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저곳에서 있는 사상이 이곳의 사상과 흡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또다른 사상의 아침이 동트면 예전에 있는 것들은 사라지는, 그야말로 “a truth”, “하나의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I am the way, the trurh.”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종교도, 철학도, 학문도, 아무도 가보지 못한 영역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도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도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도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이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저는 기어다닐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으셨지만 다른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녔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는 동안 누구 한 사람도 나에게 “너는 구원을 받았니?”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4년 2개월, 제 인생을 살았던 어느날, 주일에 교회를 가던 어느 논둑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가난의 문제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제가 월요일에 심방을 했는데 심방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 계시던 40대 자매 한 분이, “목사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던 그날 저는 집에 가서 밤에 한없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느끼신 똑같은 것을 저는 열세 살때 느꼈습니다.” 했습니다. 정신이 뛰어나거나 총명해서 느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렇게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이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로 하여금 지식을 요구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주어진 지식이 진리인지를 입증해야 하고 예수를 믿고 나면 나는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울다가 일어나서 눈물을 씻고 일어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무신론자가 되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문학과 철학, 사상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자살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없이 이것이 길이요, 진리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오늘 하루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생명이 필요한데 오늘 예수님은 “I am the life.” 그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회는 바로 이것을 성도들의 마음 속에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목회의 본질을 성취함으로써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 목회의 세 목표가 10절에 등장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여기 세 가지 목표가 나오는데, 이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타오르도록 만들어줌으로써 그것들을 가지고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를 하는 목표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되어 있지만 “지극히 선한 것”이라는 것이 희랍어 성경에는 “다른 것”, “디아페론타”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디아페로”, “다르다”는 상태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것들을 분별하고”입니다. 우리가 죄를 희랍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그것은 “miss the mark”, “과녁을 빗나간 것”입니다. 하려고 하다가 빗나가기도 하지만 다른 것을 쏜 것입니다. 군대에서 사격테스트를 하는데 영점조정을 하고 사격을 했는데 표적에 한 발도 안 맞았습니다. 옆의 친구의 표적에는 열두 발이 맞았습니다. 엉뚱한 표적을 겨냥하고 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마르티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 과녁이 빗나갔습니까? 결국 분별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것인데 그것이 다른 것인 줄 모르고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miss the mark”, “하마르티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마음 속에 지식을 전달하고 총명을 주어서 성령의 역사로 이 불을 타오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타는 가슴과 지식과 총명을 가지고 같아 보이는 것들을 또렷하게 분별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성공은 속도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꿈꾸어서는 안 될 것, 꿈꿀 가치가 없는 것에 가슴이 불타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큰 죄입니다. 그러면 목회는 결국 이렇게 사람들에게 올바른 분별력이 있는 성도들을 길러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신문을 읽었습니다. 제가 상상도 못했던 특집 기사가 났습니다. 잇몸을 잘못 관리하면 심장병의 결정적인 원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살면서 이빨을 관리하는 것이 심장병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잇몸에서 피가 납니다. 그 피의 성분은 피가 아니라 대부분 고름입니다. 이미 염증이 생겨서 피고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게 되면 이것을 삼키게 되고 그것이 몸에 흡수되고 심장으로 들어가고 콩팥으로 들어가고 멤브레인 역할을 하여 피를 걸러주는 막에 엄청난 손상을 주어서 결국 신장의 기능을 파괴하고 심장마비로 죽게 하고 염증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치과로 달려갔습니다. 내가 이런 기사를 읽고 왔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치과의사가 하는 말이, “목사님, 그것은 의사들에게 상식입니다.” 의사들에게는 상식인데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인을 기를 때 무지를 미워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길러야 합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무지는 자신이 스스로 알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고 청교도들은 “Ignorance is almost evil.”, 혹은 “Ignorance is very evil.”, “무지는 거의 악이거나 혹은 무지 그 자체가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분별력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분별력과 윤리적인 분별력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이고 그릇된 것인지를 가르치고 윤리적으로 하나님의 윤리에서 어떤 것들이 세계에서는 널리 용납되고 있으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이며 많은 사회에서 금지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이 아무 상관없는 것임을 가르쳐주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절제와 자유를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첫 번째의 목표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목회가 이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여 살게 하려는 두 번째 목표는 진실입니다. 이 진실은 진리와 관련이 됩니다.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의 정신세계가 있고 육체의 세계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의 세계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진리는 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습니다. 이 진리가 이 사람과 상관이 없이 바깥에 있는 한 그것이 진리인 것은 이 사람과 아무 연결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진리로 있을 뿐이지 이 사람과는 무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 이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된 진리라고 하기 위해서는 이 진리가 이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또 한 이 사람 안에서 주관적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때 이 진리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이 진리가 객관적인 도를 가리킨다면 이 진실은 여기 이 사람의 마음과 삶이 합치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 우리가 “진실”이라고 합니다. “룸”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벨로서티”입니다. 그래서 “진실하다”는 것은 진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진실은 솔직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와 관계없는 솔직함인 경우에는 차라리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훌륭합니다. “내가 너를 죽이고 돈을 빼앗고 싶어.” 이렇게 솔직히 말했는데 진리와 관계가 없는 행동이기에 그것은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사실은 너를 죽이고 돈을 뺏고 싶었는데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어. 내가 행동으로 옮지기 않았지만 친구인 너에게 이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용서해다오.” 하고 눈물을 흘린다면 이것을 우리는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의 행동이 가치있는 진리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이 진실은 곧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기 때문이고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 그 마음의 상태에서 나온 행동의 총체가 진실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도 그 중심에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그 진리 때문에 자기를 거기에 합치시는 것입니다. 눈 앞에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이익이 있는데 괴로워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 행위자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당연히 지식과 총명의 소산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진실한 목회자입니까? 큰 교회? 남다른 재능?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존경과 인기, 그런 것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 갈 날이 가까울수록 더더욱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진실함입니다. 물론 우리는 목회에 야망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능력이 좀 모자라지만 진실한 부교역자를 볼 때, 잘할 때는 대견스럽고 잘 못할 때는 가엾은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많이 기도하는데, 저렇게 진실하게 애쓰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우리보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지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에 알고 보면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치가로서 명성을 날렸다고 하더라고 그 이름이 잊혀지는 것은 그 직분을 그만두고 10년도 걸리지 않습니다. 한때 신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어도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사라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회를 잘해도 은퇴를 하고 나면 충분히 빨리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잊혀집니다. 그때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부부가 진심으로 사랑하면 아이들을 다 시집, 장가보내고 나면 신혼살림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계가 안 좋으면 다 끝나고 나서 별거를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마지막에 모두 사라집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나와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진리이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내가 그분을 본받고 싶고 그분이 내게 가르쳐주신 진리에 합치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되고 싶을수록 나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것을 동북아 철학에서는 진리를 인식하면 그 진리는 인식으로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인식하며 이 인식은 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 육체 속에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것대로 살지 못했을 경우에는 두려움과 가책을 느끼게 하고 살았을 때는 평안과 기쁨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진리가 인식 속에 들어와서 주관적으로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그 진리에 대해 자신을 합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이 도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진리에 합치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가리켜 “덕”이라고 합니다. “아레떼”라는 희랍어 단어는 “영혼의 힘”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이런 아레떼의 위대한 힘이 사랑에 의해 어떤 형식으로 발현되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덕”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도”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짝처럼 같이 다닙니다. 따로 다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덕없는 도는 없고 도는 있을 수 있지만 그 도가 사람에게 인식될 때는 항상 덕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진리는 성경에서도 아주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오늘 성경에, “다른 것들을 분별해내며 진실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진실하게 되어가는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또 다른 수준에서의 지식과 총명의 장작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알았던 것들을 새롭게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지식을 가르쳐주어서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부드러운 음식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나아가”, 부드러운 음식만으로는 공급받을 수 없었던 영양분들을 단단한 음식을 통해서 공급받듯이, 그런 낮은 수준의 지식으로는 깨달아 알 수없었던 자신의 마음과 세계, 하나님과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을 보다 더 높은 지식을 통해 깨닫고 높은 총명을 통해서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어때야 합니까? 그 지식과 총명이 계속 진보를 보이는 사람이 아니면, 이미 들었던 내용, 혹은 내용은 달라도 똑같은 수준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진보를 이루었던 사람들을 계속 새로운 진보로 나아가게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부단히 이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면 위패가 있습니다. 제패가 있습니다. 이상했던 것이, 우리 집안이 고려시대의 호적이 없고 조선시대에는 진짜 별 볼일 없는 가문이었습니다. 조상의 이름을 써놓고 “학생부군신위”라고 적어 놓습니다. 궁금했는데 어떤 어른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학생은 벼슬이 없었던 모든 사람에게 썼던 것입니다. 조상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에 대해서 깨닫고 그분을 더 사랑하고 그렇게 타오르는 기쁨 속에 있을 때 목회자는 다른 기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라져갈 때 목회자는 목회의 기쁨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됩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자신이 진실하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진실한 교인을 볼 때 보람을 느끼고 신실하려고 하는 사람을 볼 때 마음에 아픔을 느끼는 법입니다.
세 번째는 “허물없이”라고 했는데 허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프로코포스”라는 단어인데, “아”는 “없다”이고 “프로코포스”는 “결점, 흠집”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신학적인 흠집과 윤리적인 흠집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면에 있어서 흠집이 없고 윤리면에서 흠집이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의 실제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두 기둥에서 나옵니다. 하나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힘은 윤리입니다. 이 두 가지를 서로 연관맺어 사상이 윤리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지식이고 이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과 사랑 사이에 총명이라는 판단이 존재합니다.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한 지식과 사상의 기둥이 되고 사랑을 통해 열매로 나타나는 윤리가 열매가 되는데 이 두 가지는 부러져서 서로 따로 추구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고 이것을 추구하게 될 때 그때 극단적인 지식주의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극단적으로 이것을 폐지하고 저쪽으로 갈 때 기껏해야 인도주의나 박애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수레바퀴처럼 함께 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목회는 이 전체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활동입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이 허물은 첫째로 신학적인 허물입니다. 오늘날은 신학적인 관용주의에 빠져있습니다. 한 교회의 설교를 들어서는 더 이상 이것이 어떤 교파의 설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특성을 드러내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뿌리들을 붙들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도덕적인 허물입니다. 더이상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도덕적인 허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목회의 기본적인 지식을 전달하고 총명을 전달하고 그 지식과 전달된 총명이 설교자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도자로서 그것을 섭취해서 지식을 얻고 지식을 소화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녹여내고 거기에서 삶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이 나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의존하며 전달할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고 이때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지성적으로 분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진리에 합치한 사람이 되고 마지막에는 윤리적으로도 어둠의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해석가 중에 현재 살아있는 큰 산과 같은 분이 계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평전을 쓰신 분입니다. 그분과 함께 만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에 대해서 두 시간 가량 토론했습니다. 토론이라기보다는 제가 학생으로서 질문을 하고 그분이 대답을 하거나 제가 공격을 하고 방어를 하시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로 목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에드워즈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에드워즈의 어떤 사상에 대해서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열독자로서 그가 생각하는 목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었다고 이야기하자 아주 기쁘게 동의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에드워즈야말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신학자였다고 말했습니다.
그 속에서 마지막 목회의 열매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수단은 지식과 총명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바는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그 신앙의 정절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얼마나 힘든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만약 세상에서 다른 일을 이렇게 30년 가까이 했다면 지금쯤 익숙해졌을 텐데 하나도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매일매일 제가 목회자인 것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제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에게 설교는 언제나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내가 매일매일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가 얼마나 크고 높은지를 안다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 사람들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목적이 나옵니다. 목표는 목적보다 하위에 있는 것입니다. 목표는 다름이 아닌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의”의 개념은 율법을 지키고 율법에 합치된 것이었지만 신약에 와서 그 개념은 그리스도와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 “의”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그 “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에 합치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 속에 구체적인 열매로 나타난 것이 의의 열매입니다. 더 많은 신학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겠지만 건너뛰어 한마디로 하자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목회를 통해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하기 위함인데, 그 의의 열매가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영광”이라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 “독사”라고 나옵니다. “영광과 찬송이 함께 있어지이다”할 때 “독사”입니다. 이것은 희랍어로 “카보드”라고 합니다.”카보드”는 “카베드”, “무겁다”라는 상태동사에서 오고 “무게가 나가는, 가치가 있는, 비중이 높은” 이라는 뜻입니다. “독사”는 그야말로 “영광”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서 “독사”라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영광입니다. 본체적인 영광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나서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 이것이 영광입니다. “너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할 때는 바로 이 두 번째의 효과적인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는 발산적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한 곳에 특별히 나타나서 하나님이 그 장소에 계신 것 같은 효과를 발산합니다. 이것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할 때는 대부분 2번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1번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3번의 의미도 사용되지만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은 2번의 용례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는,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분량 밖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런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죄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하심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제 이 강의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우리는 무엇으로서 이런 방식의 목회를 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마지막으로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8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내가 기도하노라.” 결국 바울은 자신의 목회의 비전을 하나님께 그 비전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기도하기 어려운 감옥에서 그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소원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옥 속에서도 교인들을 위해서 이런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데 그렇게 하게 했던 동력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재밌는 것은, “심장”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심장”이면 희랍어로 “카르디아”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스프랑크니스데”입니다. “스프랑크”가 마태복음에 오면 “스프랑크니스데”가 됩니다. “스프랑크”는 놀랍게도 “장, 창자”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창자로 너희 무리를 위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 에서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자리가 “스프랑크니스드”, 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가장 은밀한 코어, 핵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혀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이중의 도형으로 설명되는데 계속해서 발전하면서 성화와 깨달음의 과정, 그리고 연단의 과정을 겪으며 발전한 것입니다. 그 처음 종자씨가 된 시작은 다메섹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제가 후배 목회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진짜 목회를 하고 싶으면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라. 다른 사람과 비교될 수 없게 깊이 만나라.”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발전해오면서 결국 그리스도의 심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창자가 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창자를 가지고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할 때 그 단어가 “에스프랑크니스데”입니다. “창자에까지 떨리도록, 창자가 떨리도록 감동을 받은 상태”입니다. 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애간장이 찢어지는, 녹는듯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심정으로 사도바울이 목회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그 불길이 타오르게 하는 것이고, 지식과 총명의 장작으로, 목표는 그들이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어져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도록, 이 모든 일을 예수 사랑에 사로잡혀서 불붙는 마음으로 하는 것, 그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으로 죽어가는 것, 젊은 사람으로 늙어가는 것, 있는 사람으로 없어져 가는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