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년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2018.7.29.-8.14)
만물의 회복과 화목
김남준
열린교회
목 차__청년부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골 1:20) 2018.7.29. 청년부수련회 저녁 1
2.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골 1:20) 2018.7.30. 청년부수련회 저녁 14
3. 우리를 화목케 하심(골 1:20) 2018.7.31. 청년부수련회 저녁 29
만물의 회복과 화목1 18. 7. 29 여름수련회 첫째날 저녁집회
< 하나님의 기쁜 뜻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I. 본문해설
- 세계와 관련해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를 보여줌.
a. 모든 충만(pleroma)을 예수 안에 두심.
b.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
- apokatallassa “화해시키다”
- apo(~부터)+kata(~아래로,~대해)+allassa(바꾸다)
- “화평을 이루사…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 거의 동의어를 반복함으로 그 뜻을 분명하게 보임.
a. “화평을 이루사”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b. “화목하게 되기를…” 중보사역의 결과.
II. 창조와 타락 : 만물의 상태
A. 창조의 상태
-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심.
- 창조시의 만물은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 향해 있음.
- 창조하시 세계는 선하였고 아름다웠음.
- 선함과 아름다움 : 사물의 존재 원리.
- 그것을 인식하는 자의 의식에서 빛남(영광)
- 그것을 인식할 때 기쁨이 솟아나게 됨.
a. 사물 자체가 좋음 : 구성요소들의 관계와 작용.
b. 사물의 관계가 좋음 : 다른 사물과의 관계와 작용.
- 사물의 선함과 아름다움은 질서에 대한 평가 : 목적(善)+기쁨(美).
- 모든 만물이 빛남으로 창조주를 높이게 했음.
B. 타락의 상태
- 인간의 범죄로 모든 피조물들의 상태가 변함.
a.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변화.
b. 자연 만물의 변화.
- 인간 자신과 사회, 만물의 갈등이 보편화됨.
- 창조의 아름다운 광휘의 상당 부분의 사라짐.
- but, 여전히 창조주의 선과 아름다움의 흔적 있음.
- 하나님을 아는 만큼 선과 아름다움이 보임.
III. 화목 : 하나님의 기쁜 뜻
A. 우주적 화목
-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화목하게”
- ta panta “그 모든 것들을”
- eis auton “하나님 자신 속으로”
- “화평을 이루사” 샬롬(shalom)을 이루심.
- 인간, 천사, 천지만물과의 화목을 의미함. (엡1:10-11)
- “땅에 있는 것”은 인간과 자연만물.
- “하늘에 있는 것”은 천사를 가리킴.
- 왜 하늘의 천사들과 화목 필요한가?
a. 타락할 수 있기에(J. Calvin)
b. 인간과 불화하기에(Augustine)
B. 인생과 하나님의 경륜
- 만물이 본래적 선(善)함을 우주적으로 회복함.
- 하나님 안에서 인간과 만물이 조화를 이룸.
- 천지의 창조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심.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만물의 화목이다.
-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당신과 화목하게 하셨다.
- 만물의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를 회복하고자 하신다.
- 구원은 만물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휘함이다.
- 우리의 인생은 이 화목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
만물의 회복과 화목2 18. 7. 30 여름수련회 둘째날 저녁집회
<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I. 본문해설
-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짐.
- 이로써 인간과 만물 사이의 평화도 깨어짐.
-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
- 인간과 만물을 돌이켜 당신과 화목하게 하심.
- 그 안에서 인간과 만물이 쉼과 행복을 누림.
- 하늘의 정사, 권세들까지 악을 제거해 완전케 하심.
- 온 우주에 당신을 거스르는 악이 없게 하심.
II.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
- “화평을 이루사…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
- 선한 상태/죄의 반역/속죄의 용서/화목케 됨.
- “화평” eirenopoieo를 통해 “화목” apokatallaso.
- 화평 : 그리스도의 중보 통한 샬롬, 화목 : 화평의 결과, 상태.
A. 화목의 중보 : 예수 그리스도
- kai di' autou “또한 예수 통하여”
- 만물 창조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됨.
-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관계를 맺고 유지됨.
-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상태를 회복함.
- 인간의 구속과 만물의 상태의 밀접한 관계.
- 만물의 시작과 끝이 그리스도께 의지함.
- 타락으로 인간과 만물에 결함 생김.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7-18)
- 그 결함은 자연세계와도 도덕세계에 반영됨.
a. 자연세계 : 자연 사물의 불완전함.
b. 도덕세계 : 인간 사회의 불완전함.
- 만물의 화목 상실 원인의 씨앗은 인간의 범죄.
- 이후로 망가진 영혼으로 화목이 깨진 삶을 지속함.
-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심.
- 타락 후 만물이 고통 속에 탄식함.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 만물의 고통은 본래의 화목한 질서 상실했기 때문임.
- 인간의 영혼도 고통 속에서 탄식함 : 쾌락, 학문, 종교, 예술.
- 신자의 영혼도 자신과 세계의 완성 바라며 탄식함.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중심성과 인류 역사.
B. 화목의 방법 : 십자가의 피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20)
- “피”는 생명. 그 흘림은 죽음을 의미.
- 화목이 깨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가 필요했음.
-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 필요했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 죄 없기 위해서 하나님, 죽기 위해선 인간이 되심.
-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시키심.
- 십자가와 죄인을 위한 형벌적 죽음.
- 불멸의 존재였던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심.
- 그의 피에 대한 설명.
a. 구약이 제사에서 예표됨.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b. 예수에게서 그것이 성취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c. 그 피의 공로를 의지해 나아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d. 믿음 안에서 예수 죽음이 상기됨.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5-26)
-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으로 만물의 조화를 회복하심.
- 모든 만물의 선한 상태와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회복함.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으로 나타났다.
- 인간 행복은 자신, 인간, 만물과의 화목에 있다.
- 인간은 화목을 회복할 수 없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화목케 하기 위해서였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주셨다.
- 이로써 사람, 만물과 화목을 회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그것들이 가능하다.
만물의 회복과 화목3 18. 7. 31 여름수련회 셋째날 저녁집회
< 우리를 화목케 하심 >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골 2:21-22)
I. 본문해설
- 우리의 옛 모습.
a. 악한 행실.
b. 하나님과 원수 됨.
- 구원을 통해 화목케 하심.
-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
II. 화목하게 하는 삶
A. 영혼의 구원
B. 사랑의 정의
1. 교정적 정의
2. 보충적 정의
III. 적용과 결론
만물의 회복과 화목(2018.7.29 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집회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Ⅰ.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세계와 관련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충만을 예수 안에 두셨다고 말할 때 ‘충만’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과 모든 속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 세계에 찬란히 드러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충만을 예수 안에 두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이 때 ‘화해시키다’라는 뜻의 ‘아포카탈라사’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는 말씀은 적대적인 관계가 친화적인 관계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평을 이루사”,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시니라”, 이렇게 같은 말씀을 반복함으로 그 뜻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화평을 이루신다’라는 뜻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뜻하는 것이고 ‘화목하게 된다’라는 뜻은 중보 사역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Ⅱ. 창조와 타락: 만물의 상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만물을 화목케 하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 만물을 화해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 깨어진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타락 후의 만물의 상태입니다.
A. 창조의 상태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조 시 만물은 성자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성령 안에서 창조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의도하신 대로 모든 사물들이 창조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만물을 지으시기 전에 먼저 논리적으로 하나님 안에 창조에 대한 관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것을 창조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보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있어야 하는 모든 사물들을 완벽하게 하셨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당신의 의도대로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완전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계획에 추호도 어긋남 없이 당신의 구상과 창조를 통해 생겨난 모든 만물들의 상태가 일직선상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은 선함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물의 존재의 원리였습니다. ‘선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된 것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기쁨과 관계됩니다. ‘미(美)’라는 한자는 두 가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양(羊)’이라는 글자와 ‘크다’라는 뜻의 ‘대(大)’자가 결합 된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양(羊)이 큰 것을 뜻합니다. 큰 양이 어떻게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을까요? 양이 크면 기름지고 고기가 맛있습니다.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선(善)’이라는 글자에도 ‘양(羊)’이 들어갑니다. 중국 사람들의 사유 속에는 ‘좋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관념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선하지 않은 것이 아름다울 수가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선할 수가 없습니다. 선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인식의 오류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지정하시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것을 보면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인식의 오류입니다. 여러분이 회개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옳지 않은 생각이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의하면, 무지한 상태에서 했거나 누군가에게 강요를 당했다면 그것은 비고의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알고 행했다면 그것은 핑계할 수 없이 여러분이 행한 행동입니다. 일주일도 안 되어서 후회하고 눈물 흘릴 일을 왜 하셨습니까?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선과 미의 불일치에서 생겨납니다.
어느 의사가 하는 말이, 아침은 밥이고 점심은 식사고 저녁은 사료이고 야식은 똥이라고 합니다. 야식이 그만큼 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밤중에 치킨을 먹습니까?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는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이 지정한 것 이외에서 기쁨을 찾으려는데 있습니다. 거기서 기쁨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 예쁘기 때문입니다. 선에 대해 정확한 지식과 미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을 때 선한 것이 아름다움과 일치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안전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의 가장 큰 숙제는 선하지 않은 것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 그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어떤 행위의 자유로운 상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게 될 결과도 포함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선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아름답게 여겨서 의무감이 아니라 그것이 기쁨이 된 사람입니다. 신자의 성화라는 것은 선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악한 것을 추하게 여기는 것이 몸에 배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선과 아름다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맞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기쁨을 발견하게끔 창조하신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했습니다. 한 사물이 천지창조의 목적을 모두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물 한 사물을 서로 연결시켜서 모든 만물의 질서 있는 결합을 통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약 20km정도 되는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깔로 찬란하게 뜬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이 뛰누나.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무지개를 보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색깔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서로 다르게 다양하게 창조하셔서 그것들을 모두 하나의 목적으로 연결하셨습니다. 맑은 날에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밝기와 크기가 다르고 거리가 달라서 빛의 색깔이 각각 상이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압도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 하나하나를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시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지어서 찬란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모든 만물 중에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가장 심오하게 드러내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도 하나의 구성요소로 되어 있는 사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물질들은 그보다 더 작은 어떤 사물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다양한 구성요소들로 이루게 하셨고 인간의 존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은 서로 다른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어떠한 구성요소의 결합이 없는 완전히 단순한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당신 이외의 모든 만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성요소를 가진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둘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한다면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들을 창조하실 때 다양한 구성요소를 결합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떠한 구성요소도 전체를 이루지 못하게 하시고 모든 구성요소의 결합과 결속을 당신이 붙들고 계심으로써 모든 세계가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만물들의 존재 원리는 선함과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선함과 아름다움은 인식하는 주체 안에서 찬란하게 빛납니다. 모든 만물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에서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때 그것은 의식 속에서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는 사물의 선함과 아름다움입니다. 맨 처음 죄짓기 전 인류가 눈앞에 펼쳐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았을 때 그들은 아름다움과 찬란함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 다른 모든 사물들보다 훨씬 더 잘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며 감탄을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셔서 완전한 사물들이 사람들 마음속에 빛나게 되었을 때 그 영광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B. 타락의 상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계를 찬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합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반영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모든 물질세계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원래 있었던 사물의 완전한 아름다움과 선함이 상당 부분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모두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선과 아름다움의 일부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을 때 만물들을 보는 느낌은 하나님을 모를 때 보았던 느낌과 완전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그것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이 안에 모든 사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그것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남아있는 창조세계의 선과 아름다움을 모르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가 먼저 있고 구속이 그 뒤를 따라왔으나 우리가 창조주의 영광을 인식할 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지식은 하강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그분의 질서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모든 피조세계는 아주 찬란한 빛깔로 인식하는 자의 마음 안에서 빛나게 됩니다.
인간에 의해 이 세상이 망가졌으나 여전히 인간이 찬탄할만한 아름다움이 자연 세계 속에 남아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본래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고 그 형상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도덕적으로는 죄를 짓고 악을 행하여 그 형상이 악하게 되었으나 자연적으로는 그 형상이 여전히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은혜를 받으면 선교를 하게 되고 악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러한 모든 자연 만물 속에 찬란한 선과 아름다움을 남겨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 다시 보이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한 자매가 쓴 글을 열린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그 자매가 간증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와서 기도해야 하나님이 느껴졌는데 요즘은 길거리에 자라나는 풀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구속의 은혜에 의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모든 만물을 회복시키려 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 모든 만물은 여전히 소중하고 아름답고 선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에 의해 망가졌지만 그분은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본래의 찬란한 영광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구속 사건으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운명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사물에 부여하셨던 찬란한 선과 아름다움의 상당 부분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다시 본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감탄하고 아름다워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 인류가 인식했던 본래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매우 작은 크기입니다.
Ⅲ. 화목: 하나님의 기쁜 뜻
A. 우주적 화목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함과 아름다움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세계를 본래의 영광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모든 만물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서 보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자신 속으로 화목시킨다는 뜻입니다.
‘화평을 이루신다’는 것은 ‘샬롬’을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샬롬’은 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신약은 구약에서 바라던 완전한 샬롬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 성취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샬롬’은 히브리어에서 ‘홀’, 혹은 ‘홀랩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찌그러지거나 모자라는 것 없이 완전한 것을 가리켜서 ‘샬롬’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샬롬’이 구약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구약의 역사가 실제로 인간이 타락한 다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모든 세계와 함께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에 있어야 했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선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불화하고 한발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하나하나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인간의 선함과 아름다움도 복원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고 인간과 운명을 같이한 땅에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모든 세계를 회복하는 방식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불화한 인간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 일을 완성하시는 날에 모든 만물들이 다시 창조의 영광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모든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회복시키실 때는 제일 처음 깨졌던 관계부터 회복시키시면서 나머지를 치유해가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샬롬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천지만물, 하늘에 있는 천사들까지 모두 화목을 회복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은 계속해서 전파되며 사람들 속에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땅에 있는 것들’은 당연히 인간과 자연만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것들’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어떤 사람은 이것을 유대인이라고 해석하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주석가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천사입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화목이 왜 필요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명확한 이해를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두 가지 견해로 설명되는데 천사들도 타락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했다는 존 칼빈의 설명인데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늘의 천사들이 인간과 불화하기 때문에 화목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마 천사가 인간과 불화하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인간에게 악을 행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의 근본적인 뜻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받음으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인간과 함께 본래적인 선과 아름다움을 우주적으로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시 하나님의 통치를 떠났던 모든 사물들이 완전함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 인생과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은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에 악이 들어오는 것을 보셨고, 자연의 세계에는 자연의 악이 들어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치료하심으로써 모든 세계의 창조주로서 완전함과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고 자연 만물들은 인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본래의 선과 아름다움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망가진 세계를 회복시키시고 당신과 불화하게 된 인간들을 다시 화목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선과 아름다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망가진 사물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고치시는 능력으로 당신의 찬란한 성품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계획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목적을 성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분을 ‘머리’라고 부릅니다. 머리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되고 지배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통해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머리 되심을 회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정입니다.
에베소서 1장 9절과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통일되게 한다’라는 말의 희랍어는 ‘아나케팔라우’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머리가 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만물을 다시 당신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그것들을 회복해가는 것이 구속의 전개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모든 세계의 통치자가 되어 하나님께 거스르는 것이나 악한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하시고 다시 세계와 인간을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바로 그 일을 첫 번째로 이루신 것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머리이신 그분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이 그와 결합된 모든 교회의 지체들에게 전달되게 하셨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그분의 생명을 공급받으며 삽니다. 그 생명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나면 삶의 의욕이 생겨납니다. 물론 삶의 의욕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하는 것들이 우리 눈앞에 있을 때 힘이 놀랍게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이외에 다른 것으로도 우리는 새 힘을 얻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 주어집니다. 충만한 생명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날 때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대상이 있을 때 그 사랑은 실현됩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생명은 그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삶의 의욕도 일반은총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삶의 의욕이 있는 사람들은 매사에 적극적입니다. 배우는 것도 부지런히 목표를 세우고, 의미가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도 확실합니다. 해야 할 일과 안 해야 할 일을 구분하고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욕을 사용해서 힘차게 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이 떨어지면 매사에 의욕이 없고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데 사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떻게 됩니까? 의욕이 솟아납니다. 유사 생명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안에 솟아나도 삶을 바꾸어 놓는데 영적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솟아날 때는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조금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삶에 희망을 느끼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에 의해서 그 일이 가능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입니다. 그런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즐거움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입니다. 치열하게 산 사람들이 은혜를 달라고 하는 기도가 놀다 온 사람들이 하는 기도보다 훨씬 더 힘차고 능력이 있고 응답도 잘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여기에 왔습니다. 오늘부터 길어야 2박 3일입니다. 여러분이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에 이끌려서 왔을 수도 있고 목사님이 괴롭게 하니까 한번은 얼굴을 비쳐야 할 것 같아서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집회에 참석할지는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오늘 갔다가 내일 올지 말지도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양강좌도 아니고 시설이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식사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메뉴가 아닙니다. 거저 온 것 아니라 회비를 내고 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교회에서 보태주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와있는 것입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오지 않습니다. 모든 은혜는 믿음과 이해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수련회에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번 수련회에서 구원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었으면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어떤 삶을 살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지만 모든 사람의 공통된 소망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희미하게나마 성경의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항상 무엇을 하지 말라는 양심의 가책밖에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중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을 따라가자니 하나님의 말씀이 걸리고, 말씀대로 살자니 세상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못 믿으면 안 믿은 사람보다 더 곤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을 주님께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 외에는 없다고 믿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의 은혜를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수련회를 하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은혜를 받지 못하고 돌아갔을 때의 허전함과 하나님을 향한 소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열쇠를 꽂으십니다. 열쇠가 꽂히는 지점이 바로 인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오늘 설교한 것처럼 여러분은 전 세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희귀개체입니다. 여러분이 죽음으로 영원히 소멸하면 그 개체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에 긍지와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야 합니다. 수없이 설교를 했지만 가슴에 찔리지 않습니까? 살아보니 내 인생 같기도 하고 남의 인생 같기도 하고, 내가 사는 것도 아니고 강요된 것도 아니고, 살고 싶기도 하고 죽고 싶기도 하고,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은혜의 세계를 알고 싶기도 하고 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면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산다는 것, Living은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겨우 생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생존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도 힘들고 가난한 시절을 지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요함을 알게 하는 놀라운 방법이 됩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정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연약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며 건강을 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은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빛나게 할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살지 않으면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부패하고, 재능이 있으면 재능 때문에 교만하게 됩니다. 건강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건강을 잃어버리면 절망하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향해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것들도 좋은 것이 되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는 사람에게는 나쁜 것은 물론이거니와 좋은 것도 나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입니다.
언제까지 그런 삶을 살아야 할까요? 지금까지 20년, 30년, 40년…. 긴 세월을 살면서 소중한 많은 시간들 가운데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았던 적이 없는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한번 거울 앞에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릴 적 앨범을 펴놓고 묵상해보십시오. 수십 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내 인생의 주체가 되었다는 의식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도 되풀이할 수 없는 나만의 인생을 살기 위한 의욕이 있다는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삶’입니다. 지금 불만족하고 기쁨이 없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1년, 2년 후에는 나아질까요? 무엇이 그 마음을 나아지게 만들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이 여러분을 기쁘게 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쁨을 당신 안에서 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느끼고 만족하며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1,000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집회를 했습니다. 사역자들과 이야기 하는데 아이들이 화장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 아이들이 화장을 하고 싶다면 하고 다니면 됩니다. 다만 화장품을 사용하면 피부가 망가진다는 정도의 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초화장품을 충분히 쓰라고 교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아이들을 속박하고 “화장을 하라, 마라. 치마길이를 올려라, 내려라.” 이야기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까짓것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머리에 빨간색을 들이든 회색을 들이든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는 본질적이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걸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으십시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십시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십시오. 능력이 닿아서 예쁜 옷을 사고 싶으면 사 입으십시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기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도 안 먹고, 무엇도 싫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매우 불행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인생의 본질에 충실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매 순간 사라지는 존재로서 사라질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궁극의 기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감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나머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에 치중하기에 방해될 정도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으면 드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산을 올라가다가 가끔 쉬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다가 목마르니까 산모퉁이 좌판에서 파는 냉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즐겁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항상 고행의 길은 아닙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오르는 것 자체를 즐깁니다.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등산을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완전한 만족이고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심으로 당신은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알게 된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와 생명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보면서 ‘왜 그렇게 우울할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생기발랄하고 아직 젊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많이 남았습니다. 여러분, 중학교 때 생각납니까? 낙엽이 굴러가도 깔깔거리고 웃던 기억이 납니까?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웃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섭섭하게 해주면 노여워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건하냐 하면 경건하지도 않습니다. 땅에서의 타락한 기쁨도 없고 하늘에서의 신령한 기쁨도 없고 일반은총의 기쁨도 별로 없고 특별은총의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무미건조한 삶입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안에 여러분의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별들이 빛나는 하늘이라면 우리는 무수하게 빛나는 별들 중 하나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이 있어서 우리가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일부분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전부인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우주에 대한 계획 속에 우리의 인생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받고 싶은 사람은 있지만 누구의 추종자도 되지 않고, 박수를 쳐주고 싶은 사람은 있지만 누구한테도 주눅이 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치할 수 없는 자리에 두셔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빛나게 하십니다. 나이가 들어서 젊음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는 젊음으로 빛났고, 이제는 원숙함으로 빛나고, 늙어감으로 빛나고, 소멸하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에 그것을 서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들에 개의하지 않고 그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으며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오늘 하루를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의욕에 찬 기쁨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티끌만큼이라도 좋은 세상이 되게 하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쁨과 삶의 의미를 전달해주기 위해서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살아야 하는 삶인데 그렇게 우울하고 침체 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몰랐기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명료하고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모호하고 명료하지 않아서 애매한 태도로 사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그릇된 사랑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살 수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 사는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선택의 길이 놓여있지만 다른 모든 것은 올바른 선택일 수 없고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서 힘차고 자유롭게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모든 만물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생의 무게가 무겁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나쁜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무게가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야 할 여러분의 영혼이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날개를 부러질 듯이 힘차게 차면서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는데 발에 아령이 묶여있는 새를 생각해 보십시오. 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모호한 태도로 인생을 살면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인생을 그분께 맡겼으니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며 은혜 안에서 살겠다고 결단하지 않고 살 때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늘 어두운 길이 될 것이고, 불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가끔 기쁨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20대에서 30대를 혼돈 속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30대에 자기를 정립하지 못해서 혼란 속에서 시집가고 장가가게 될 것이고, 40대에는 또 다른 혼란을 경험하면서 늙어가게 될 것입니다. 겨우 그런 삶을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었을까요? 겨우 그런 삶을 살려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산 것입니까? 삶의 태도가 확고하지 않고 신념이 없는데 긴 설교, 많은 교리, 많은 성경공부, 많은 봉사활동,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섭취한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그런 식으로 알게 된 교리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영혼은 상당히 안전한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경험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부를 맡았을 때 수련회를 시작하기 60일 전에 기도표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금식을 합니다. 절대로 시킨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주님을 만납니다. 여러분에게는 정말 간절함이 있습니까? 왜 그렇게 우울합니까? 활짝 웃어보십시오. 그 웃음이 영혼 속에서 묻어나오는 웃음이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를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양단간에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가장 최근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기도해본 적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의 영혼을 살려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생명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사람의 특징은 간절한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몸부림을 읽을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우리를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특별하고 어마어마한 일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만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방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모으십시오. 하나님이 없이 혹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나의 삶도 아니고 남의 삶도 아닌 것처럼 살아갔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해보십시오. 마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으로 나를 만나달라고 내게 은혜를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려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를 감상하는 것처럼 듣고, 좋은 책을 영화 보듯 읽는 것만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방향 자체를 돌이켜야 합니다. 불만족스러운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것을 엎어야 합니다.
평일 깊은 밤 조용히 예배당을 찾아보십시오. 어디에선가 흐느끼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보다 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 뼈를 깎는 아픔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은 그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증거는 단정하게 설교를 듣는 것으로도 나타나지만 가장 확실한 표현은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가장 확실한 표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생각만 해도 나를 겸손하게 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천국과 지옥도 몰랐고 우리 마음대로 인생을 살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모든 고통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진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전도였고, 그것이 양육이었고, 지체들을 붙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가슴이 뜁니까?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신약성경은 세 가지 지평에서 화목을 말합니다. 첫째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성경의 일차적인 관심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이 화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 이것은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화목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서로를 향한 갈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계와 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판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희랍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희랍인들은 유대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화목을 회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미워하고 화목을 깨뜨리는 것을 사소한 일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넘치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 모든 사람들과 화목을 유지하며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나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내가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나의 것을 주어서 다른 사람을 풍요하게 하는 데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불친절, 사랑 없음으로 상처를 받고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그런 것이라고 하는데 일은 되었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기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화목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입니다. 예전에는 서로 부딪혔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서로 섬기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고 이 세상에 다시없을 유일한 사람으로 여기며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그들이 자유롭게 주체적인 인생을 사는 일에 우리가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사소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쳐서 기도를 해도 늘 막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허공중에 흩어집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내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왜 뉘우치지 않습니까? 그것이 작은 일입니까?
세 번째로는 모든 만물과의 화목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세 번째 범주입니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사도 바울의 신학이 가장 원숙하게 된 시기에 나온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만물을 자기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지평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계획을 따라 살도록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인생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른 인생을 살아보았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인생을 살다가 죽을 것 같아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세계를 맛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정말 행복하십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의 보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창조하고 구속하신 계획으로 돌아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물의 회복과 화목(2018.7.30. 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집회2)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Ⅰ.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만물이 창조 시에 가졌던 선함과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 사이에 평화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이 성경 구절 속에서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에 인간과 모든 만물이 창조시의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에서 멀어졌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과 만물의 고통하는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과 다시 화목하게 하심으로써 원상태로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러한 화목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Ⅱ.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
A. 화목의 중보: 예수 그리스도
첫 번째로 화목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로 말미암아”라고 했는데 ‘그’는 바로 앞 절에 나오는 ‘예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어떤 관계들을 회복시켰을까요?
제일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했던 관계를 다시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를 하셨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로운 주체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맨 처음 창조된 인간은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 앞에 올곧고 지성은 빛나고 있었으며 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복종되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한없는 자유를 누리며 자유로운 주체로서 생각하며 행동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짓자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게 지낸 처음 조상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처지가 되었고,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에 죄가 들어와서 인간 안에 있는 복합적인 기능들이 다 깨진 존재를 하나님과 화목 시켰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깨어짐은 육체로 나타나서 불멸할 존재가 필멸의 존재가 되었고 영혼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상태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성에는 어두움이 끼어 하나님이 주신 진리들을 올바로 분간 할 수 없었고 자신이 왜 창조되었는지 심지어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까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눈먼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해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불화한 담장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생명이 단절되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심으로 다시 생명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고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제일 먼저 우리와 하나님의 불화한 상태에서 다시 화목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려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사소한 개인사나 혹은 인간이 어떻게 육체적으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에 대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것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화목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마도 처음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을 때에 그 돈을 취하고자 하는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사업의 동업자들이나 혹은 친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술집 여자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먼 나라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를 치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고 흉년이 들어 도저히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어보려고 찾았지만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처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부터의 소외와 고독, 물질적인 결핍, 자기를 좋아하던 사람들로부터의 단절 등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의 근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모든 문제에 직면하게 돼 버렸습니다. 만약에 탕자가 돼지의 쥐엄 열매라도 먹고 배가 부르고 쉴 수 있었다면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지 않았거나 혹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기간이 더 늦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지점에서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생각했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굶주림이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굶어 죽는데 아버지의 집에서는 일꾼으로 살면서도 배고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단초에 불과했고 결국 그가 마지막에 도달했던 문제는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났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자신의 이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품꾼으로나마 아버지의 집에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처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문제를 적어보라고 하면 아마 A4용지 10장을 가지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고 줄을 그었다고 칩시다. 몇 달 후에는 A4용지가 다시 몇 장 필요하게 될 것인데 언제까지 그 일을 하고 있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개선하는 일은 예수 믿기 전에도 여러분들이 열심히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이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예수를 믿는 순간에는 깨달았는데, 믿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분들은 다시 옛날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의 인생은 이상하게 예수를 믿었는데도 구원받은 사람인지 구원 못 받은 사람인지, 행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청 불행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애매모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무엇을 하러 여기에 오셨습니까? 매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은 내 인생의 모든 다양한 문제가 더듬어 올라가면 하나의 뿌리로 닿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의 깨어진 화목을 다시 회복시키는 중보사역을 첫 번째로 하셨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데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 치유책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이미 여러분들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답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중보자로서 하신 첫 번째 일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진 인간을 구원하여 죽었던 영혼을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이 복음의 본질로 여러분들은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신앙을 위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 여러분이 걱정이 됩니다. 여러분들의 선배들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세상 공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이 세계는 왜 창조되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나?’ ‘이 구원은 어떻게 왔는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교회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지식들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핸드폰에 코 박고 있는 시간 중에 10분에 1만 할애해서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서 공부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여러분들은 행복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해 전에 약 11만원 정도하는 ESV 스터디 바이블을 우리 교회 마당에서 팔았는데 거의 1억 원 어치가 팔렸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책을 사서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장에 꽂아놓고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읽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 거기에 담겨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읽어 나가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학교입니다. 그런데 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돌아가는 일이나 맛집이나 패션이나 장신구나 요즘 공연이나 이런 것들을 검색하는 시간에 단 10분의 1도 기독교 신앙의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공과 공부를 완전하게 예습을 하고 오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만 가도 구역장이 미안할 정도로 완벽하게 새까맣게 공부를 하고 와서 공과를 했습니다. 공과를 하면 항상 얻어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고 감각적인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쉽게, 쉽게 믿으려는 사람에게 기독교의 진리는 그 사람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 많습니까? 2종 보통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 공부하는 시간이 많습니까?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운전면허시험도 안 되는 양을 공부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세례를 받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셔서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 여러분들 인생의 문제의 본질인 하나님과 깨진 화목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면 부지런히 그 화목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숙고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이 마음에 차기보다는 하나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이 여러분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깨진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하신 일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기 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부딪치면서 관계가 깨져도 아무 상관없이 나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는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마음속에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담이 무너지고 그 둘이 하나의 사랑으로 교회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 주님께로부터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을 것인데 그 생명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깨진 화목을 회복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일입니다.
우리 딸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의 일입니다. 하교해서 집에 들어오는데 나를 만났습니다. “아빠!” 달려와서 뜨겁게 포옹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빠. 나 너무 행복해.” “우리 딸이 오늘 왜 그렇게 행복한데?” “오랫동안 불화하던 친구와 오늘 완전히 화해했어.” 아빠를 끌어안고 ‘나 너무 행복해.’ 라고 이야기할 정도면 반대로 그 친구와 화목이 깨진 가운데 살았을 때에 마음의 짐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하며 살 관계를 주셨습니다. 혈육으로는 우리의 부모와 자식,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가족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특별한 관계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여러분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고 그 생명을 받아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예전에는 사랑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다시 사랑하며 화목을 이루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한 중보가 되셨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의 가족에게 한정해서 생각해 보자면,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족들과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고통을 받는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 이놈의 집구석 지겨워.’ ‘내가 빨리 시집을 가면 해결이 되겠지.’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 자매와 결혼해서 분가하면 이제 이 꼴 안 보겠지.’ 그런 마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이 실질적으로 깨진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화목을 얻게 된 여러분들이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가족들 관계에서 깨진 사람이 가족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려고 여러분들을 위한 중보의 사역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족 안에서 그러한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좋은 아들이 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면 그날 밤에 폭력을 행사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가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이 못난 애비를 용서해다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이고 못된 동생, 개념 없는 누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있기 때문에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눈물로 기도하면 한 사람 한 사람씩 주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설령 그 일이 마지막까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의 화목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원대로 돼서 쉽게 결혼을 하고 훌쩍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자매가 시집을 가서 살아가는 삶이 가족들의 삶과 크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훌쩍 날아가 버린 그 형제가 과연 자신이 살아온 가정과는 완전히 다른 가정을 거기에서 떠났다는 이유 때문에 꾸려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나의 가족들을 비롯해서 모든 이웃들을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야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야 할지를 교회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교회는 서로를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할 첫 번째 공동체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특별한 뜻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직장생활을 8년이나 했습니다. 교수로 있었던 것은 직장이 아니었으니까 제외하고 순수하게 8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직장에서 이런 정신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게다가 버르장머리도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개념도 없습니다. 그렇게 최악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내가 양보하면 양보할수록 저 사람들은 미안해하는 대신에 신나하면서 나를 먹습니다. 나는 끊임없는 피해자가 됩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를 주셨습니다. 상태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나는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지 못하는데 놀랍게 희생하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그 혜택을 누립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런 것이구나.’ ‘내가 이 일에 있어서는 이러한 지체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진 빚을 갚으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게 비교적 용이한 환경이 교회입니다. 물론 이것은 상태가 좋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져서 무지가 판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면 그 모습은 세상과 추호도 다를 바가 없는 무서운 집단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가족들이 나 하나가 예수 믿었다고 서로 화목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순에 가서 조금씩 조금씩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권면하고 수련회 같은데 데리고 와서 은혜를 받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교회에서는 그 일이 비교적 쉽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놀랍게도 불신자인 가족들보다도 교회에 있는 지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런 이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담을 넘어서 더 큰 사랑과 생명을 가지고 가족들과 사회에서 자기가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화목을 이루며 살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를 서로 화목하게 살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그 화목의 본질은 외적인 평화로운 상태, 즉 싸우지 않고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깊이 연결되어서 서로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여기는 사회를 만들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오늘 라오스 단기 선교팀과 같이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라오스에서 무너진 댐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사를 했던 00회사 그럴 줄 알았다.’ ‘진짜 그 회사는 정말 틀려먹었다.’ 종종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저녁을 같이 먹은 형제자매들은 그것을 자기 일처럼 염려하는 것입니다. 댐이 무너지고 몇 명이 죽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6천 명이나 되는 이재민들이 나오고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물에 가득 차 있는 강 위에 지붕 꼭대기에 앉아 있는 상황을 걱정합니다. 라오스를 갔다 온 지체들은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물론 그들이 절대적으로 우리보다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 할 수 없겠지만 가서 봤으니까 더 마음이 갑니다. 그리고 특별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그들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에 더 큰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온 인류를 향하여 갖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 화목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중보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을 화목하게 하신 그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오직 그 일을 위하여 모두 사용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소외되었던 여자, 아이들, 병든 자들, 그리고 실제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친구처럼 여기고 가족처럼 여기며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고 모든 사람들과의 화목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께 구원을 받은 순간부터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 속에서 이 화목을 이루며 살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일마다 주시는 은혜와 매일매일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는 이런 화목을 이루며 살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자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매일 매일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중에 10분 이상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기뻐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자신에게 실질적인 손해를 끼치고 악을 행하는 사람과 화목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화목하기를 원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불화한 관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함인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충성을 입증합니다. 그들은 배신해도 나는 신실합니다. 그들은 나를 미워해서 힘이 들기는 하지만 어떡하던지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자 애씁니다. 마음을 다해서 그들이 한 사랑과 평화 안으로 돌아오기를 꿈꿉니다.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게 악을 행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복을 빌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모습, 존재가 그렇게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이 됩니다. 물론 그 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온 인류를 완전히 화목 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화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는 존재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생각나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목을 위한 중보자로 죽으셨습니다.
세 번째는 만물과의 화목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이기심으로 충만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저주 아래 두신 이유도 피조물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들과 연결되어있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에게 불복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재난이 항상 일어나고 모든 만물을 왕처럼 다스려야 할 인간은 자연에게 삼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늘 일어납니다. 인간의 팽창하는 이기심은 어마어마한 소비를 가져왔고 그것은 환경에 대한 심각한 파괴로 나타났습니다.
최근에 플라스틱 빨대를 쓰지 말자는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언제 꽂혔는지 아무도 모르는 빨대가 거북이 코에 끼어서 오랜 세월을 고통하며 살다가 그것을 뺄 때에 거북이가 고통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 세계에서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 중에 가장 청정지역이라고 하는 나라라면 뉴질랜드를 따라갈 나라가 없습니다. 뉴질랜드 사람이 사는 육지로부터 3,00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수질을 조사하고 거기서 자라는 물고기들을 조사한 결과에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청정식품이라는 것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지구의 북극이나 남극 쪽으로 가면 빙하가 쌓여있는데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빙하는 100미터의 눈이 압착되어서 7센티미터의 빙하가 된다고 합니다. 빙하가 수백 미터라면 그것은 셀 수 없이 어마어마한 세월의 흔적입니다. 빙하의 오염도를 측정한 결과 이전의 100년 동안 누적된 오염을 모두 합해도 최근 불과 30년 동안의 오염을 따라갈 수 가 없고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오염의 속도는 점점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루를 생활하면서 버린 쓰레기들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재앙에 가까울 정도의 발견물인 플라스틱이 편리하긴 하지만 버려집니다. 작년 한해에 종이컵을 우리나라에서만 245억 개를 소비했습니다. 종이컵 안에는 예외 없이 비닐이 코팅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펄펄 끓는 물을 부으면 비닐 성분들이 환경호르몬을 분비하면서 우리 몸에 어떤 무슨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결혼하는 많은 남녀들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한 중요한 단서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파괴된 환경은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폐해를 가져옵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지면서 자연과 인간은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투쟁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악순환의 종결자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에 자연 만물 속에 깃들여있는 재앙적인 모든 비참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까요? 우리는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피조 만물보다 우월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의 육체로는 모든 피조 만물과 똑같이 물질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탐욕에 가까운 소비의 성향, 그리고 지나치게 편리함을 추구하는 소비생활들이 이러한 만물의 상태를 점점 더 나쁘게 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는 지구 여러 나라에서 떠내려 온 플라스틱들이 한반도 넓이 몇 배나 되는 크기로, 물 위에 떠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가라않지도 않은 상태에서 수백 년에 걸쳐서 분해가 됩니다. 분해가 된 것들을 플랑크톤이나 미생물들이 먹고, 그 미생물을 작은 고기들이 먹고, 더 큰 고기들이 잡아먹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먹으면서 인체 유해물질은 우리에게 사라지지 않고 축척됩니다. 결국 부메랑처럼 환경의 파괴가 우리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놀라운 것은 기독교인들 속에 이런 환경 문제에 대한 지식이 너무 희박한 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이런 환경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영혼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모든 세계가 우리의 탐욕과 그리고 우리의 폭압적인 지배로 신음하고 고통 하는 것을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이루신 중보사역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깨어진 화목을 회복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사람의 화목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다시 화목을 이루기 위해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그들을 화목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을 선의로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화목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까이 있는 동물과 식물, 환경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덜 고통당하는 혜택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에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돌보고 가꾸며 가급적 그것들이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동물들을 비참하게 학대하고 어차피 먹어야할 음식들이지만 잔인한 방법으로 동물들을 살육하고 학대하는 방법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그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무지막지한 동물들에 대한 학대와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파괴, 방사능의 오염 등으로 지구는 죽어가고 있고, 그것은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그렇게 인간과 만물, 하나님과 만물사이에 화목이 깨졌기 때문에 그렇게 약탈당하는 이 자연을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자연의 모든 만물들이 선의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커피숍 같은데 가보면 무슨 인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 가면 그런 인증표시 받은 커피숍이 많이 있습니다. 그 표시는 직물 같은 옷이 절대로 노동을 착취하고 동물들을 학대해서 만들지 않는다는 인증이며, 커피는 커피재배 농장에서 근로기준을 지키지 않고 혹사하는 환경 속에서 제품이 생산되지 않았다는 인증을 나타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사십시오. 특히 양탄자를 만들 때, 서남아시아에서 나오는 양탄자는 10살 미만의 아이들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7세에서 12세정도 된 아이들이 학교도 안가고 한 올 한 올씩 짭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하루 종일 일해도 1달러조차 받지 못합니다. 때로는 주인으로부터 무서운 폭력을 당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만든 양탄자를 우리는 아무리 예쁘고 싸도 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 한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무엇이 변하겠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효과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양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면서 제조된 제품, 동의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노동의 조건에서 생산된 제품을 거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입니다.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마음과 그 물건이 꼭 필요하면 30%의 돈을 더 주고라도 납득할 수 있는 환경에서 생산된 제품을 살 선택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제품이 생산되는 환경을 다 파악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많이 먹으면 햄버거를 1년에 2개를 먹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세계적인 햄버거 회사에서 닭을 산채로 털을 뽑는다는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닭장 속에 있는 닭과 개들을 운반하는 모습을 보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인간의 양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 사람들은 시장 경쟁의 가격을 맞추기 위해 비인간적인 행위를 합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닭가슴살의 주요 고객인데, 여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은 가슴만 커지는 닭을 만드는 종자의 조작입니다. 닭이 보통 75일을 키워야 조리가 가능한데, 45일 만에 그 크기로 만들고, 다른 부위는 인기가 없으니, 가슴만 커지게 합니다. 이 과정이 정말 비참합니다. 닭이 일정 크기로 성장하면 가슴이 너무 무거워 앞으로 고꾸라지고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생산된 닭가슴살을 먹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모른다면 묻지 않고 소비하지만, 어느 업체가 그런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소비를 거절해야 합니다. 전에도 먹지 않았지만, 그제 먹었습니다. 동네에 있는 수제 햄버거였습니다. 이런 제품을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양심까지 거론할 문제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문 속에서 환경은 날로 심하게 파괴되고 동물들은 복지를 잃어버린 채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죽어갑니다.
지금 중국 쪽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제가 직접 물건을 보았고, 우리나라에서 한번 했다가 철퇴를 맞았습니다. 엄청나게 귀중한 한약재인 웅담(곰쓸개)에 대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곰의 배를 뚫어서 쓸개에 주사기를 꽂아놓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쓸개 액을 빼냅니다. 곰은 마치 링거를 맞은 것처럼 쇠줄에 매달려 자유가 없이 사료를 먹습니다. 그리고 주사기를 통해 쓸개 액이 빠져나갑니다. 인간이 보약도 좋지만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유사한 일이 인간에 대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허무는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공정한 판단을 하고, 대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국가가 거대한 권력을 동원해서 이 일을 자행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감히 그 권력과 맞서야 합니다. 반드시 그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중보자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이 모든 만물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종합을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중보자가 되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회복하므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하는 사회가 되고, 비록 모든 피조물과 인간, 자연만물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갈등이 종식되는 것은 이 세상의 끝날로 유보되었지만, 우리는 그 정신을 가지고 선량한 관리자로 돌아가 이 세상의 만물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돌아가도록 도와야 할 의무를 일깨우려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의 중보자가 되신 목적입니다.
B. 화목의 방법: 십자가의 피
그러면 이 화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경은 화목의 방법이 “그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기 때문에 화목한 상태가 된다고 말합니다. ‘피’는 구약에서 ‘생명’을 의미하고, ‘피가 흘렀다’라는 것은 ‘생명의 빠져나옴’,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화목을 가져다줄까요?
첫 번째는 요한일서 1장 7절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았을 때 우리의 삶은 바로 이러한 죄를 지은 죄인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 그 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죄를 오래 기억하고 그가 아무리 변화된 사람이 되어도 낙인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홍보다 더 붉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그 누구보다도 순결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불신자일 경우에는 그 근원적인 화목이 깨진 상태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화목이 깨졌다면 그것은 실제적인 화목이 깨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성령 충만해도 하나님의 자녀고, 은혜생활을 게을리 해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신문에 날 정도로 죄를 지어도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놓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한 번 붙든 구원의 손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원래 없는 사람도 있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미 원리적으로 화목하게 되었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곤고하게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훌륭했던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렸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하던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낮선 분이 되고 피하고 싶은 분이 되었을까요? 달콤하고 아름답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지겹게 되고 두려운 말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죄 때문입니다. 죄 이외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의 무능력함이나 실수, 출생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깨뜨리는 유일한 원인은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더러움입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피는 그것을 깨끗케 해줍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느끼는 무거운 무게는 사실 여러분들이 순전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하는 무게가 대부분입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회개하였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깃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인생의 무게가 그때도 없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무게를 이기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주는 유익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의 마음이 불결해지면서 이러한 사랑의 가벼움이 사라졌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도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속의 기도를 허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이 느슨해지면서 기도할 상황에서도 우리는 잠든 영혼에 대해 좀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까? 결국은 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바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따라서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길은 죄를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피로 우리를 다시 깨끗하게 하십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충만한 사랑 속에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혹은 티끌만한 죄도 없이 오직 순결하게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회개의 필요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이렇게 깨끗하게 하시기에 오늘 성경은 그의 십자가 피로 화목을 이루신다고 말합니다. 최초의 화목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두 번째 화목도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 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원리적으로 원수가 된 우리 사이의 불화를 깨뜨리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짓는 크고 작은 죄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때, 그 불화를 회복시키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결하게 하는 힘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바로 그 정결함을 회복하여야 할 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 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줍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과 20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성소’는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위로부터 휘장이 찢어지면서 성소와 지성소의 구별이 철폐되었습니다.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들만, 성소는 제사장들만 들어가던 곳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지성소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하나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인간의 중보도 필요 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써 이루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불화했던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는 그분을 뵙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찢으신 휘장을 지나서 우리의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피로 보좌에 이르는 붉은 길을 우리가 맨발로 걸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의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온 세계를 만드신 분이고, 이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그 분에게는 없는 것이 없으시고, 있는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앞에 나아와 그의 필요한 것을 간청할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그것을 주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신 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모임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하나님이 그 예배 속에서 그 기도 속에서 그 찬양 속에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며,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적이 얼마나 드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내가 티끌처럼 보이고, 주님의 엄위가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엄위 앞에 떨고, 하나님이 너무 사랑이시기 때문에 내 추한 사랑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그러한 임재의 감격을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습니까? 신앙에 있어서 아무리 많이 교육을 받고 아무리 많이 훈련을 받아도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어린아이입니다. 아기라서 유치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면 비로소 성경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21살에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25살에 다시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렇게 4년 만에 주님을 다시 깊이 만난 후 일어났던 제일 놀라운 변화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의 품에 있는 것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주신 것은 우리를 교회 다니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안다니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를 우리를 위해 쏟으신 것은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정신적으로 믿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임재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삶을 살 때,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효과를 실제적인 삶에서 못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사랑은 보이는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사귀는 형제, 자매와 곧 결혼을 한다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결혼하시겠습니까? 아직 이해가 안 되십니까? 여러분에게 곧 결혼할 형제가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사랑하는지 결혼일이 다가올수록 확신이 안 됩니다. 이 사람에게 내가 유일한 여자인지도 의심이 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결혼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혼자 살지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지 않습니다. 죽고 못 살아서 결혼을 해도 살지 말진데, 어떻게 결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 그 형제가 자매인 여러분들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둘 사이에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행복과 기쁨, 소중히 여김 같은 것이 여러분의 관계 안에 있겠습니까?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팡세』를 쓴 작가 파스칼은 기독교변증을 위한 대작을 쓰기로 하고 메모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다 못쓰고 죽은 메모를 모아서 출판한 책이 『팡세』입니다. 그의 유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속에 붙이고 다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뜨거운 불’, 그 유품을 두고 한쪽에서는 마지막에 그가 정신적으로 이상해졌다고 보며, 다른 한쪽에서는 진짜 성령을 깊이 경험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느낀 다음에 그것을 더 쓸 수 없는 신앙의 깊은 임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고 해석합니다. 똑같은 케이스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발견됩니다. 『신학대전』을 완성하지 않고 죽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이유입니다. 살고도 싶고 결혼을 하고도 싶고 말고도 싶고, 다른 여자가 생기면 얼마든지 갈 수도 있고, 더 좋은 조건이면 얼마든지 갈아탈 수도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이 없다면 결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남자를 원하십니까? 나 같으면 그런 사람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한쪽만 얘기하면 불공평하니, 형제에게 자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닙니다. 결혼할 것인지를 물으니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근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보다 돈 많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얼마든지 갈아탈 것 같은 눈빛이고, 실제적으로 동시에 나 말고도 다른 남자를 함께 만나면서 이것저것 재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예수 사랑이 그 여자의 사랑하고 같지 않은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매순간 목숨을 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형제를 만났습니다. 얼굴도 멋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만약 능력이 없고 외모가 출중하다면 후에 여자들은 얼굴만 멀쩡하다, 허우대가 아깝다고 합니다. 근데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너무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얼굴도 멋있고 돈도 많고, 신앙이 너무 좋습니다. 신앙이 좋으면 집안이 별로인 경우가 많지만, 이 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남자보다 아버지가 돈이 더 많고, 할아버지는 더 많습니다. 집안의 질서가 잘 서있습니다. 매일 나올 때마다 다른 외제차를 타고 나옵니다. 대개 그런 사람은 예의가 없지만 그는 예의가 바르고 나를 너무 아껴줍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공부를 못 하는데, 그 사람은 주눅이 들 정도로 역사, 철학, 경제, 사회, 문화를 잘 압니다. 그런데다가 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친절하고 여성을 향한 지극한 배려와 존중심이 있습니다. 나는 가문도 별 볼일이 없고, 돈도 없고, 미모가 어마어마하지 않은데도 나를 예뻐합니다. 여러분을 이런 남자와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딱 한사람이 더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감격하는 여자가 또 있습니다. 결혼하시겠습니까? 사랑은 나눌 수 없기에 결혼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매순간 거기에 목숨이 달려있습니다. 매순간 거기에 죽음이 함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유치하게 하는 말로 “사랑해?” 라는 질문에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해”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어도 사랑해” 라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그런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변화된 모습으로 만나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그분을 특별히 대면하는 것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그분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그를 위해 버리고 그를 위해 잃고 모든 것을 상실해도 기꺼이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얼마나 지식을 축적하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랑이 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나면 하나님을 위해서 내 생명을 내놓는 그런 사랑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지식을 많이 획득하면 습득하면 ‘그리스도 없이 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느니, 예수와 함께 불길 가운데를 지나가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상적인 한 여자가 남자를 목숨 바쳐서 사랑할 정도면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 속에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내면의 교류가 일어나고, 아무도 들어가 보지 않은 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갔고, 그 속에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결별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났기에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오래도록 지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닙니다. 별로 나쁜 짓도 안합니다. 가끔 나쁜 짓을 하지만 여러분이 완전히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삶이 행복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들을 먼데서 바라보게 하신 보혈이 아니라 그 분의 품에 뜨겁게 안기게 하려고 흘리신 보혈입니다. 어떠한 감격도 없이 그분을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그 거룩한 임재 속에 들어가게 하려고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는 당신의 임재 속으로 데려갑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임재 속에서 발견해야 할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능가하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깊은 인격적인 경험,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만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그런 것들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일을 경험 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정말 희귀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그런 하나님과의 특별한 임재의 경험, 그런 하나님과의 초월적인 사랑의 경험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불꽃이 되어 타들어가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집니다.
자꾸 옛날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열린교회에서 여름수련회를 갈 때가 되면, 그렇게 오래가지 않고 한 1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여러 사람이 금식하면서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엄청난 숙제를 가지고 수련회에 왔습니다. 무엇인가 내게 없던 지식을 한두 가지 얻어듣고 은혜로운 찬송이나 부르다가 밤중에 간식이나 먹고, 지체들과 따뜻한 교제나 나누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그런 사랑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장담하건데 행복한 날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를 원한다면, 맨 처음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던, 처음 사랑의 기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간절히 주님과의 특별한 사랑의 만남을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은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그것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그것이 믿어지는 그곳에는 언제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랫동안 도저히 끊을 수 없던 자신의 죄와 결별하도록 만들어주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은 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피의 능력입니다. 내가 아무리 은혜를 구하여도,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말씀을 깨달아도, 일생동안 그것을 극복해 보려했지만 내가 이미 오랜 세월동안 안된다고 수도 없이 입증 됐는데,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그 사람에게 성령은 큰 능력으로 임하여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것을 끊어지게 만듭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난, 죄인이었던 그 여자도 아마도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 용서를 받았을 때, 이 여자의 사랑은 급하게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옮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못할 것이 없는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모든 힘으로 독립적으로 사는 삶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주체로 살지만 그 주체로서의 진정한 자유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피의 능력으로 말미암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여러분들은 지금도 신앙적으로 많은 난제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절대로 옳지 않은데…’, 수많은 세월동안 실험을 해보고 극복하려 해봤지만, 도저히 넘을 수도 극복 할 수도 없는 벽이 있습니다. 환경과의 싸움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믿음을 비웃는 거대한 여리고 성벽과 같은 현실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뤄지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의 피가 큰 능력과 확신으로 우리에게 임한 것처럼 우리에게 바로 그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예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처음 사랑을 누렸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잊어보려고 망각에 빠졌지만, 그때에도 똑같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현실 속에서 느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러분은 변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왔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재물과 영광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때 이루어졌던 일이 지금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히 동일한데, 왜 그때 일어났던 일이 오늘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으리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믿음을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그 곳에 보혈은 이처럼 큰 능력으로 임하여 여러분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현실을 극복하게 만들고 여러분 자신도 알 수 없는 여러분 자신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무 공로 없고 나는 아무런 장점과 특징도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을 때 이런 위대한 능력이 내게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예전에 내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삶이었고, 인생의 문제를 이런 놀라운 방법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무기력하고 헌신되지 않는 사랑, 어떠한 죽음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사랑, 그리고 언제든지 주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희미하고 애매모호한 사랑, 그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메말라가고, 우리의 삶은 뒤엉키고,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도 행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산지가 5년, 10년, 20년이 지났습니다. 내버려두면 언제쯤 그런 삶이 변혁될 수 있을지 여러분이 얘기해 보십시오. 어떤 환경이 되면 변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늘어나는 인간의 욕망으로 끊임없이 갖고 싶은 것들은 생겨나고 되고 싶은 것들은 끊임없이 늘어나는데, 현실이 그 욕망의 속도를 채우지 못합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하다가 죽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겨우 그 따위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까? 겨우 그런 정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무력감, 해야 할 것들은 하고 싶지 않는 진리의 회피, 이런 것들이 누룩처럼 번져서, 여러분들을 살았으나 사실 죽은 자처럼 이끌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를 흘려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능력이 없는 자에게 능력을 주어 이미 하나님이 주신 화목을 기쁨으로 누리며 그 화목을 사람 속에 실현하고 인간의 죄 때문에 신음하고 고통 하는 이 세상의 자연 만물을 선의로 대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구속의 핍니다. 이 복음으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물의 회복과 화목(2018.7.31 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집회3)
우리를 화목케 하심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Ⅰ. 본문해설
하나님은 만물이 회복하고 화목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만물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고 자연 만물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Ⅱ. 화목하게 하는 삶
A. 영혼의 구원
오늘 마지막 시간으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대답은 바로 우리의 일생이 화목케 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과의 화목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우리가 제일 힘써야 할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과 세계가 무엇인지, 인간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여름에도 국내와 해외로 복음을 전하러 떠났습니다. 이것보다 더 급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도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지 않아서 무지했을 때 인생에서 어려움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또 많은 고통, 욕망과 씨름하면서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몰랐습니다. 복음의 빛이 비치기 전까지는 현상은 알고 있었지만 뿌리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이런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복음이 아니면 깨어날 수 없고 눈을 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음을 준비시킨 사람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니, 우리는 전심으로 이 복음을 전해서 누가 추수하도록 익은 곡식인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인생의 많은 곤고한 문제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린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오늘도 누구든지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 피의 능력으로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명이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기 때문에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에 빚진 것이고 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니, 우리는 그 부채의식 속에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그리고 단 한 사람의 인생을 한 번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서 자유롭게 살아보도록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고 남이 갖지 못한 영적생명을 우리가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한때는 그렇게 인생의 어두움 속에서 쓸모없는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열등감 속에서 그렇게 진정으로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부자유하게 속박을 받으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화목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기적인 사랑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영혼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정말 곤고하게 살고 힘들게 살아가는데도 그 사람들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그 사람의 마음에 있을 때는 사랑하게 되고 비로소 고통 하는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진실하게 전해주면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의 피로 놀라운 자유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그 화목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며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최근 1년 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새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계를 한 번 내보았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도된 사람들 가운데 70%가 교회에 와서 등록한지 1년 미만의 사람들이 전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솟아나는 은혜의 감격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오랫동안 전도 훈련받은 사람들이 전도를 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훈련은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지, 훈련이 우리를 전도하도록 동기부여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진정으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 코 박고 불쌍히 여기면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 체중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겹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전도의 횟수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가 끝나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친구들과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그중에서 정말 곤고하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따뜻하게 관심을 갖고 대해 주고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있는 많은 곤고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삶의 의욕이 떨어져서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침체된 영혼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서 수많은 영혼들이 얽매인 것이 풀리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돕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화목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라면 살맛나지 않는 이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곤고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침체돼서 자신의 영혼을 간수할 힘도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면 놀랍게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오랫동안 내려놓지 않고 순장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런 비밀들이 있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버거우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내 영혼을 은혜 안에 지탱시키시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영혼들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화목하게 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곤고하고 불쌍한 친구들을 만나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조금 전 점심시간에는 무교회지역 강원도 정선 산골짜기로 전도를 다녀온 형제, 자매들과 만났습니다. 시골에 내려가 보면 전부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있습니다. 할아버지도 별로 없습니다.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들만 많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들에게는 자식들도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대원들이 가면, 처음에는 욕을 하며 싫어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친구가 되어줍니다. 처음에 다가가서 “예수 믿으세요.” 하면 부지깽이를 집어 던지고 빗자루를 집어던집니다. 또 우리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무조건 집에 가서 마루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머니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줍니다. “놔라! 귀찮다!” 하시다가 조금만 지나면, “아래, 응, 그 아래.” 하십니다. 시원하니까 가라는 말씀을 못하십니다. 그것도 한 15분하고 나면 손이 아픕니다. 주물러드리는 것도 한두 집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아이디어가 침을 놓으며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침을 놓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가서 “할머니, 어디가 아프세요?” 하면 싫다고 하다가도, “이분이 의사입니다.” 하면, “그래요?” 하며 태도가 달라지며 드러누우십니다. 할머니께 침을 놓아드리고 “30분 동안 절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하고 둘러앉아서 하고 싶은 전도를 다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링거전도법이 생겼습니다. 간호사와 함께 가서 링거를 놔드립니다. 저도 아팠을 때를 대비해서 한 박스씩 사 놓고 맞았는데 비싸지도 않습니다. 그 시절에 한 병에 9천 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링거를 맞으시면 두 시간동안 움직이지 못하십니다. 더 있고 싶으면 조금씩 나오도록 조절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놓고 앉아서 할머니의 일대기를 들어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전화를 드리면 정말 기뻐하십니다. 우리교회 집사님들이 정말 착합니다. 가을이면 내복을 사서 할머니께 보내드립니다. 겨울이 되면 집에 한 번 방문해서 보일러는 잘 들어오는지, 무슨 문제는 없는지 한 번 봐 드립니다. 자식들이 그런 것을 하겠습니까? 물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잘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집사님들이 가서 “이제 제가 어머니라고 부르겠습니다.” 하면 할머니들이 좋아하십니다. “어머니, 방은 따뜻하세요?” 라고 자주 묻는 것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안부를 묻는데도 감격하십니다. 왜? 너무 외롭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전라도로 전도를 갔을 때 청년들이 복음을 전하며 예수를 믿으면 이러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전하니까 어떤 할머니께서 “너희들은 진짜 나쁜 애들이구나.” 하시니까 청년들이 놀라서, “할머니, 왜 우리가 나쁜 애들입니까?” 물으니, “예수가 그렇게 좋다며?”, “그럼요!”, “그런데 왜 이제 왔니? 조금 더 일찍 전해주지 않고 왜 이제 왔니?” 하셨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가 빗자루를 집어던진 할머니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으니까 소외감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정선 이야기를 쭉 들으면서 제가 말했습니다. “기도 많이 하면서 너희들 중에 누가 거기에 가서 교회를 세우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생활비를 보내고 말이다.” 열다섯 명만 힘을 합하면 하고도 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소외되고 비참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할머니들은 그렇게만 해드리면, “어머니, 어제 교회 다녀오셨어요?”, “그럼 다녀왔지.” 하십니다. 가을철이 되면 고구마, 호박, 이런 것을 한 보따리 사서 보내주시는데 그분 아들 집에도 그렇게 보내주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7년 전에 저도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470가정이 있는 마을에 열네 명의 청년과 장년들이 갔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단출하게 가서 470가정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은 그곳에 6년을 있으면서도 470가정을 다 방문하지 못했는데 일주일이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하지 않았다면서 회개를 하셨습니다. 제가 가서 설교할 때 노인 분들이 80명 정도 모였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그 다음 주일에 100명이 나왔습니다. 그 전에는 열다섯 명밖에 모이지 않아서 목사님이 목회를 계속 할지 말지 고민하시던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첫 주니까 100명이 나왔겠지요.” 아닙니다. 그 후로 오랜 세월동안, 약 15년 되는 세월 동안 목사님이 거기에서 목회를 하셨고 그 목사님께서 암으로 돌아가실 때에도 80명이 출석했습니다. 사모님과 둘이서 봉고차 두 대를 사서 돌아다니면서 노인을 불러다가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은 “어머니, 어머니” 하며, 겨울에 찾아뵙고, 아웃리치 할 때 찾아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도시에 있는 여러분의 친구는 그 할머니들보다 덜 외로울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불신자일 때 경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하루 종일 친구도 없이 지내고 혹은 친구가 있어도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술집으로, 오락실로, 영화관으로 돌아다니다가 터덜터덜 여러분의 집으로 돌아올 때, 그 골목은 왜 그리 쓸쓸했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그 할머니들보다 불쌍한 친구들이 여러분 주위에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자살한 친구들도 만났을 것이고 삶을 비관하고 있는 친구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에게 화목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과 화목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사랑의 정의
두 번째는 사랑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랑의 사회를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어떤 사회입니까? 서로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선하게 대해 주면 끝까지 우리를 이용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서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대해 주면 그 사랑에 감사해하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주위 사람의 따뜻한 호의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하게 해 주신 분명한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각각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생명과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 남들에게는 없는 천상의 자원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고 살아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진실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사랑도 알지 못하거니와, 사람들 속에서도 그런 따뜻한 사랑을 받을 줄도 모릅니다.
이번에 에스와티니를 다녀온 선교팀과 함께 어제 식사를 하면서 저도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에스와티니 어린 아이들은 이야기할 때 누구의 눈을 마주치지 못합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서 입니다.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전 인구의 40%가 에이즈 감염자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선교사가 팔레스타인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뛰놀게 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린아이까지 거기에 와서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유롭게 뛰노는 광경이 너무 신기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프가니스탄로 단기선교를 갔을 때, 그곳의 아이들을 한없이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는데, 우리교회에서 하는 성경학교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의 부시장이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예뻐하고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어디로부터 온 사랑인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어느 때나 원하는 때에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책임지고 비자를 내어주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그런 충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사람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것쯤은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넘치는 사랑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좋은 남편과 아내를 만나서 정말 넘치는 사랑을 받았더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놀랍게 치료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사회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상은 하나님과의 샬롬, 즉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본래 지정해주신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이상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정의’를 죄지은 사람을 반 죽여 버리고, 혹은 사형시켜버리고 범법자들을 중대하게 처벌해서 응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정의’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의가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소년범들의 범죄가 점점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5학년 되는 아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죄들을 짓습니다. 스스로 촉법소년이라는 것을 알아서 흉악한 죄를 더욱 저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법을 강화해서 촉법소년이라도 예외 조항을 두지 말고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에 반대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떤 범죄에 대한 형량이 조금 늘어난다고 해서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판단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형벌로만 다스릴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가 그런 아이들이 되게 한 것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고 그 아이들도 책임져야 하는데 그것을 단순히 중형의 방식으로만 다스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이 현실 속에서 완성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의의 개념을 사회에 적용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법을 따라서 정의를 실현하도록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1. 교정적정의
정의는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정적인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분배적인 정의’입니다.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공동체에 나쁜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샬롬의 상태를 파괴합니다. 파괴한 사람에 대해서 개인일 경우 용서해줘야 하지만, 사회일 경우 다른 사람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이면 교정적인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적절하게 응징해서 같은 일을 행하려는 사람에게 경고를 주고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합니다. 교정적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법, 입법, 행정, 이런 것들이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차도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마실 일이 없습니다. 대법원장은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을 공정하게,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공정하게 재판함으로써 법을 보여주고 사회를 교정하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사법부 농단 같은 사건은 실제로 죄를 짓지 않아서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사회 정의 체계 자체를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 대해 관대한 태도는 이 사회가 교정될 수 없게 하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샬롬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지만 또 한편으로 세상이라는 질서에 속해있고, 사회와 나라라는 질서에 속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화목을 깨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엄중하게 교정되도록 해야 합니다. 때로는 국가가 국민이 위탁한 권력을 괴물처럼 사용해서 사람들을 고통에 몰아넣고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못하게 해야 하는데 백성들이 관대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관심합니다. 많은 세월을 겪고 똑같이 불행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교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하나님 창조하신 본래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권력이나 세상 사회의 힘만으로는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사회, 국가, 세계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도록 그렇게 지정된 하나의 껍질입니다. 그래서 껍질이 잘못되어 있으면 마치 용기 모양에 따라 담긴 것의 모양이 다르듯이 사회의 구조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집니다.
여러분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잠비아라는 나라와 감비아라는 나라는 서로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비아는 땅 덩어리가 크고 감비아는 작습니다. 감비아에서 온 선교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감비아는 영연방국가 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거형이 된 이유는 탈퇴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18만밖에 안 된다는 작은 나라이고, 국민소득이 1000불이 될까 말까한데 왜 영연방에서 탈퇴하였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영연방에 있는 것이 나쁘냐고 물었더니 영연방에 있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탈퇴한 이유는 집권자들이 무슬림에게 엄청난 돈을 받는 조건으로 무슬림 국가가 되어서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무슬림으로부터 큰돈을 받아서 벼락부자가 된 대신에 그 나라의 구조는 한순간에 무슬림 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영연방국가에 있었다면 민주와 자유에 대한 의식이 생길 텐데 거기서 멀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국가, 사회라는 껍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의 번영과 정의에 의해서 대치될 수 없음을 믿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주체성과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으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를 감시하고 그것들을 우리가 교정해가야 합니다. 이렇게 화목을 깨뜨리는 사람들을 징벌하는 것이 교정적인 정의입니다. 당연히 법은 민의를 대변하기 위해서 만들어져야 하고 공정무사하게 집행되어야 하고 이것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는 징벌이 주어져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도 들어갈 수 없는 좋은 직장을, 전화 한 통으로 취업하고 뇌물이 오고가는 세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런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렇게 자유를 잃어버리고 때로는 인간의 주체성을 박탈당하면서 살도록 강요되었으니 이제는 다음 세대에 이런 나라를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타계적인 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기 전에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사회에 관심이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보혈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바로 주님이 주신 천상의 은혜와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주신 여러분의 소명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모든 속에서 나타나서, 만약 그것이 정말 교정 없이는 이 사회의 공정이 깨어지고 심각하게 하나님의 공평이 위협받고 다른 법과 질서들이 무너진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교정해야 합니다. 물론 마지막 최후 심판대에 있을 심판을 대신하기 위해 우리가 칼을 잡고 범법하고 교정이 필요한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려 죽이는 일이 우리 손에 위탁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렇게 교정적인 정의를 이루어가지 않는다면 이런 하나님과의 샬롬이 이 세상에 실현되는 데에 심각한 방해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모순과 갈등이 있는 이 세상이 완전하게 치료되어서 창조시의 그 찬란한 영광이 다시 드러나게 되는 일은 마지막 종말에나 성취될 것이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써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려고 했던 샬롬이 우리를 통해서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이것이 바로 이 땅에 교회를 두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2. 분배적정의
다음은 분배적, 혹은 배분적 정의입니다. 교정적정의가 하나님의 화목을 깨뜨린 사람들을 징벌함으로써 고쳐주는 것이라면 분배적 정의는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했던 샬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들을 보충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선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려서 당장 심각한 통증을 느끼거나 피가 흐른다면, 혹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무엇이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즉시 우리의 몸을 수술해야 합니다. 즉시 수술을 해서 도려내고 고통스럽더라도 꿰매어 우리 몸의 회복을 꾀합니다. 이것을 교정적 정의라고 합니다. 또한 영양가 있는 균형 잡힌 식사를 하면 우리가 건강해집니다. 과하게 먹으면 건강을 해치고 너무 안 먹어도 건강을 해칩니다. 이렇게 질 좋은 음식을 먹고 영양제를 먹고 운동을 해서 우리 몸의 원기를 북돋우는 것을 분배적 정의라고 합니다.
합법적으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었고, 경쟁사회에서 승자가 되었습니다.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부, 더 많은 기회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흠잡을 데 없이 법 안에서 이룬 성공이고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법적으로 자기를 방어하고 피해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법을 아무리 공정하게 세워도 이 법을 가지고 재판을 하고 피해가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경제적인 약자는 법적으로도 약자가 되기 십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매번 재산과 인맥을 다 동원해야만 자신의 권리를 겨우 보호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법은 약자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우리가 자유를 보호받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 재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특히 법관은 절대로 아무나 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속에 진정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법관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회는 저렇게 굴러가고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단 한 번도 대한민국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내 사랑 대한민국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대한민국 사람인 것이 부끄러웠던 적은 너무 많았습니다. 최근에 부끄러웠던 적이 양승태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나라의 사람이었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배적인 정의는 비록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행복한 상태를 골고루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를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모범적으로 실현하고 헌신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서 공부하고 기술을 익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남을 섬기기 위해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 큰 뜻을 가지고 분배적인 정의를 위해 헌신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경쟁사회에서 커다란 승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바꿔놓을 세상은 실로 놀라울 것입니다.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이 획득한 물질이나 권력,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긴다고 해서 그 자체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 영혼과 육체, 이 사회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의도대로 회복하고자 하시는 계획에 이바지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마음 깊이 헌신하며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업하되 열심히 사업해서 부를 축적하고 그런다고 해서 야비하게 돈을 벌어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지 정당한 경쟁에서 탁월한 아이디어와 사업수단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그것들을 사심 없이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를 향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교회를 향해 요구하시는 것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나라가 정치지도자들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비록 하나님을 모두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일반은총의 원리를 따라서 그들이 양심적이고 올바르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통 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많을 때 하나님은 일반은총 차원에서 그 사회에 복을 주십니다.
교회는 바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고 예수 믿어 하나님과 끊어진 화목을 회복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또한 그 사람들이 한 시민으로서 그렇게 분배적인 정의에 헌신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고 지식의 혜택을 갖게 하고, 그 권력의 행사로 모든 사람들이 공정하게 대우를 받도록 만들어주는 일에 시민으로 헌신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 믿으며 사업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분배적인 정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재산이 많아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탕진하듯이 소비하고 한 쪽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이런 사회의 현실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그런 훈련을 받지 못했어도 교회에 와서 서로 유무상통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헌금을 통해서 사람들을 선교적으로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들을 함으로써 이 사회 전체의 샬롬을 이루는 데 이바지합니다. 거기에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물질적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 한 번 보십시오. 사회 체제 중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거의 입증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정이 이루어지면서 수정자본주의도 들어오고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모순들을 사회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생각으로 치료하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 이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보완을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을 해야 하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교육을 받을 때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경쟁으로 내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경쟁을 교육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는 경쟁해야 하겠지만 경쟁자가 될 사람들이기 전에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협력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앞으로 나아가 그렇게 교육을 시켜도 사회 현실 속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려서부터 그런 경쟁구도로 내몰립니다. 결국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분배 자체가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화목을 이루도록 하신 모습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그런 분배적 정의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권력, 물질을 통해서 그것을 흘려보내면서 그렇게 찌그러지고 망가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의 존재는 유난히 빛이 납니다. 왜일까요? 모두 자기만 위하는 정신으로 이기심 속에 살아가니까 그런 사람을 볼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피로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은혜 가운데 지키고, 그 화목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서로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면서 화목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에게 선의를 베풀어서 이 자연도 쉼을 얻고, 우리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마음속의 감격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생생한 감동으로 우리가 지금 말씀드린 이 모든 삶의 전 포괄적인 영역 속에 스며들어서 우리로 그런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을 가진 당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담장 안에만 갇혀있는 신앙이 아니라 ‘나의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한 주체로 살겠노라.’ 하는,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항상 잘할 수만은 없습니다. 잘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일어나는 어떤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진정한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면 변상을 하고 진정한 사과가 필요한 것이면 내가 깨끗이 나의 잘못에 대해서 당신에게 용서를 빌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치사하게, 잘못해놓고, 남의 차를 살짝 쿵 받아놓고 도망이나 가고, 이것이 자유인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깨끗하게, 설령 나에게 돈이 없어서 현금카드로 돈을 찾아서 물어주더라도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깨끗하게 내가 잘못했다고 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화목이 깨어지는 제일 큰 이유도 그것이 아닙니까? 조금만, 누구 한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친구야, 내가 정말 잘못했다.” 하는데 괄호 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너도 잘못한 것이 있다.’ 이런 것은 빼고,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내가 잘못한 것만 생각하고 “내가 정말 잘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깨끗하게 이야기하면 화목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회를 우리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양심과 함께 살아가니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깨끗이 용서를 빌겠고 주님께 회개를 하겠고 그 일에 대해서 필요하다면 내가 보상을 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에는 쓰러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주체성 있는 삶입니다. 우리가 한 번 잘못했다고 해서 우리 주체성을 반납하고 살 수는 없고, 한 번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서 자유를 영원히 박탈당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긴 인생을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 태도를 하나님을 향해 분명하게 갖는 것처럼 사람을 향해서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이 계속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오래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끄러졌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런 환경, 저런 환경 모든 것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실행한 것은 내 책임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할 때, 그 사람이 모두는 아니라도 회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굳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처음부터 생각하려고 들지도 않고, “은혜를 주십시오, 은혜를 주십시오.” 하는데 은혜가 옵니까? 은혜는 달라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진심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끔찍한 죄라도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자유를 되찾게 만들어 주십니다. 다시 자신의 인생의 성스러운 주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당신과 화목하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어느 날 대통령이 도장을 찍어서 관보에 발표한 사면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 한마디로 “너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이제 나와의 화목이 복구되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그의 십자가의 피로 예수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화목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언제든지 우리의 죄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그 죄에 매여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종 된 삶을 살지 말라고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깨끗이, 주님께 잘못한 것을 고백하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이 죄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겠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것에서 돌이킬 수가 없으니 주님께서 나를 여기에서 떼 내어주십시오.” 라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해주십니다. 용서받는 그 과정은 오히려 여러분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삶도 아니고 남의 삶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지리멸렬하고, 수치스러운 삶이 언제까지 계속 되겠으며 이런 인생에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구경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망가진 채로 좋은 사람은 만나서 결혼하면 우리에게 새 삶이 시작되겠습니까? 새 삶은 새 사람이 사는 것이지 옛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인생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것은 남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역시 주체성을 가지고 창조된 여러분 자신이 결정하고 하나님 앞에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자유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주체성 없이 살았던 삶에 대해서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을 죽어도 계속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삶이 행복하십니까? 강단 위에 올라가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보입니다. 기쁨이 하나도 없이, 예배가 시작하면 겨우 들어와서 앞자리에 앉지 않고 뒤에 어디쯤 가서 앉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간간이 핸드폰이나 만지다가 축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광고 하나 보고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묻고 싶습니다. 행복합니까? 행복하면 계속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예배드릴 때 우울하게 들어왔던 사람이 예배드리는 중에도 우울하고 끝났는데도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정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당신을 못 박으면 서까지라도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삶, 그것이 겨우 그것인가 말입니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 말하고 싶습니다. 태도를 분명하게 하십시오. 예수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정말 주님이 없는 것 같으면 세상으로 가십시오. 가서 자유인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런데 그럴 용기는 없습니다. 왜? 옛날에 이미 해봤습니다. 살만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뭘 또 꿈을 꾸십니까? 왜 신앙의 태도가 애매모호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가보십시오. 주체성 있게 가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보십시오. 못 갑니다. 이 설교를 실제로 듣고 어떤 사람이 교회를 뛰쳐나갔습니다. 1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때 가라는 이야기가 가라는 뜻이 아니라 ‘정신차리라’라는 뜻이었구나!” 문학을 그렇게 못 알아듣습니까? 가서 1년 동안 무슨 좋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 떠날 때는 교회에 가기 싫다고 했을 것입니다. 교회만 가면 목사님이 쥐 잡듯이 야단을 치는데, 자기가 태어나서 부모에게도 그렇게 야단맞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요즘은 제가 좀 덜합니다. 15년 전에 열린교회 다니던 교인이 왔으면 ‘정말 목사님도 변하셨구나!’ 할 것입니다.
무엇을 머뭇거리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못 나가지 않습니까? 다 해봤기 때문에 결과가 어떨지도 이미 다 압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이 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지켜주시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게 있습니까? 뭐가 그렇게 겁나는 게 있습니까? 왜 그렇게 인생을 쫄면서 삽니까? 뭐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잃어버릴 것이 그렇게 많습니까?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한순간을 살고, 단 1년을 살다가 죽어도 참 우리의 인생에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주님과의 화목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주셨던 화목, 불순종과 죄, 은혜에서 멀어진 부패 때문에 잃어버렸던 실제적인 화목을 다시 화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사람처럼 살아봅시다. 정말 기쁨으로 가득차서 매일매일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종의, 단 하나밖에 없는 개체로서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그 삶을, 그것도 10년, 20년, 30년, 길어봐야 50년 후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넉넉잡고 60년, 70년 후에는 나도 없고 여러분도 대부분 없고 지금 들어온 새내기들 중에 장수하는 노인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를 회고할 것입니다. “이 터가 옛날에 수련회 터였느니라.” 그렇게 인생은 흘러갑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읽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제 마음을 쿵! 하고 울렸습니다. 설교시간에 인용했지만 다시 한 번 인용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길게 인용하겠습니다. “얼마나 자주 신께서 주신 기회를 받았는지 너는 기억해보라. 그러나 그대는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제 그대는 마침내 자신이 우주의 일부분임을 알고 자신의 존재가 우주를 주재하는 그분에게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시간의 유한함이 그대 위에 운명 지어져 있다. 만일 그대가 정신의 구름을 걷어내는 데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가면 그대도 갈 것이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집에 가서 초등학교 때 찍었던 사진을 한 번 보십시오. 오늘 밥을 먹었는데 어떤 자매 하나가 열린교회에 여섯 살 때 나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학생입니다. 열린신문을 넘기다 보니까 목사가 되고 아빠가 된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쓴 간증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 여러분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허무 속에서 흘려보내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아깝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실제적인 화목을 회복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목 차__장년부
1. 화목을 기뻐하심(골 1:19-20) 2018.8.12. 장년부수련회 저녁 47
2. 십자가의 피로 화목을 이루심(골 1:19-20) 2018.8.13. 장년부수련회 저녁 59
3. 사랑으로 화목함(살전 5:12-13) 2018.8.14. 장년부수련회 저녁 70
만물의 회복과 화목1 18. 8. 12 여름수련회 첫째날 저녁집회
< 화목을 기뻐하심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I. 본문해설
- 세계와 관련해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를 보여줌.
a. 모든 충만(pleroma)을 예수 안에 두심.
b.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
- “화평을 이루사…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 거의 동의어를 반복함으로 그 뜻을 분명하게 보임.
II. 만물의 상태
A. 창조의 상태
-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심.
- 만물은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 향해 있음.
-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였고 아름다웠음.
- 사물의 선함과 아름다움은 질서에 대한 평가 : 목적(善)+기쁨(美)
- 그것을 인식하는 자의 의식에서 빛남(영광)
- 만물은 하나의 목적 연관 아래 질서를 이루었음.
- 인간의 영혼과 육체도 완전하고 아름다웠음.
- 인간의 지성의 명료함과 의지의 올곧음.
B. 타락의 상태
- 인간의 범죄와 피조세계의 불행.
- 창조의 아름다운 광휘의 상당 부분이 사라짐.
- but, 여전히 창조주의 선과 아름다움의 흔적 있음.
- 하나님을 아는 만큼 선과 아름다움이 보임.
- 인간 육체와 영혼 자연만물의 변화.
- 인간 자신과 사회, 만물의 갈등이 보편화됨.
III. 화목을 기뻐하신 하나님
- “화평을 이루사…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
- 화평 : 그리스도의 중보 샬롬, 화목 : 화평의 결과, 상태.
- kai di' autou “또한 예수 통하여”
A. 인간-만물
- 타락 후 만물이 고통 속에 탄식함.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 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 만물의 고통은 화목의 질서를 상실했기 때문임.
- 인간의 영혼도 고통 속에서 탄식함 : 쾌락, 학문, 종교, 예술.
- 신자의 영혼도 자신과 세계의 완성 바라며 탄식함.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 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 그때까지 함께 창조된 자연만물을 선의로 돌봄.
B. 인간-인간
- 만물의 화목 상실 원인의 씨앗은 인간의 범죄.
- 이후로 망가진 영혼으로 화목이 깨진 삶을 지속함.
-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인 인간을 미워하게 됨.
-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심.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 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 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 하나님→그리스도→인간 : 서로 사랑함으로 함께 계심.
C. 하나님-인간
- 하나님과 원수된 것,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무심.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 죄와 비참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이를 화목하게 하심.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 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 인간 비참의 궁극적 원인 : 하나님과의 불화.
-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상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 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은 인간과 만물이 화목하길 기뻐하신다.
- 완전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회복되길 원하신다.
-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다.
-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며 살자!
만물의 회복과 화목2 18. 8. 13 여름수련회 둘째날 저녁집회
< 십자가의 피로 화목을 이루심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I. 본문해설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20)
- “피”는 생명. 그 흘림은 죽음을 의미.
- 화목이 깨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가 필요했음.
-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 필요했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5)
- 죄 없기 위해서 하나님, 죽기 위해선 인간이 되심.
-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시키심.
- 십자가와 죄인을 위한 형벌적 죽음.
- 불멸의 존재였던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심.
II. 피로 화목을 이루심
A. 깨끗게 하심
-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심.
- 죄를 지어 불결하게 되었으나 깨끗하게 하지 못함.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 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 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음.
- 그의 피, 곧 죽음을 믿을 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심.
B. 만나게 하심
- 십자가의 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됨.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감.
-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는 믿음이 필요함.
- 양심의 송사를 물리치며 십자가의 피를 바라봄.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험하라!
C. 능력을 주심
- 십자가의 피는 그것을 믿는 자에게 능력을 줌.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 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 십자가의 복음은 이론의 변증 아닌 성령의 능력임.
- 신자, 전도와 자신의 그 능력의 증거.
-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 화목을 이루며 살게 하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III. 적용과 결론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화목케 하기 위해서였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주셨다.
- 그 피로써 사람, 만물과 화목을 회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그것들이 가능하다.
만물의 회복과 화목3 18. 8. 14 여름수련회 셋째날 저녁집회
< 사랑으로 화목함 >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 5:12-13)
I. 본문해설
- 하나님은 인간과 만물의 화목한 상태를 원하심.
- 인간은 이 화목을 깨뜨렸으나 회복할 수 없음.
- 고통의 근본적 원인을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감.
- 십자가의 피는 인간 비참의 궁극적 원인을 보여줌.
- 교회는 그 사랑을 알고 화목하게 된 사람들의 연합임.
II. 사랑으로 화목함
- 십자가의 피가 말하는 것 : 죄의 심각성 + 은총의 절대성.
- 신자의 자기 인식은 “용서 받은 죄인” “사랑 받는 자녀”임.
- 구원 받은 자로서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A. 사랑함
- 구원 받은 신자의 삶은 사랑의 삶이다!
- 십자가의 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됨.
- 하나님이 세상 온 인류를 사랑하심을 알게 됨.
- 하나의 사랑 안에 모든 인류를 돌아오게 하심.
- 미움과 원망은 죄 가운데 살던 옛 사람의 행실.
- 교회 속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배우게 하심.
B. 귀히 여김
- 구원 받기 전에는 자신 밖에 모름 : 자기 중심성 + 사랑.
- 십자가의 피에 의해 모든 인간의 존귀함을 깨달음.
- 인간이 “귀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세속적 가치 때문이 아님.
-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을 귀히 보게 함.
-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것이 사랑의 특성임.
- 연약한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의 형상임.
-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대우하지 말라!
C. 목양 받음
-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들은 누구인가?
- “수고하고…다스리며…권하는 자들”(12)
- 교회의 지도자(장로, 목사)들을 가리킴.
- 특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목양하는 자들을 일컬음.
- 나이가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점 : 지도자를 경히 여김.
- 죽은 자들의 부활 문제, 현실과 동떨어져 구제 바람.
- 재림시의 신자들의 소망과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함.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목양 받지 않음에서 비롯됨.
- 목양과 인격적 신앙, 거기서 유익을 받아야 함.
III. 적용과 결론
- 화목을 위하여 구원하심 : 하나님 + 사람 + 만물.
- 교회는 종말에 이루어질 화목을 보여주어야 함.
- 서로 사랑하며, 귀히 여기며, 자라가라.
화목을 기뻐하심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만물의 회복과 화목(2018.8.12 장년부여름수련회 저녁집회1)
Ⅰ. 본문해설
하나님은 세계와 관련해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성경에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두 가지 뜻이 나타납니다. 첫째,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입니다. ‘충만’은 헬라어 ‘플레로마(πλήρωμα)’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영광을 가리키지만, 또한 종말이 되기 전까지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 충만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고 어떤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인지를 우리에게 찬란하게 보여주십니다. 둘째,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당신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화평을 이루사…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는 구절에서 ‘화평’과 ‘화목’은 거의 동의어입니다. 굳이 구별해서 말하자면 ‘화평’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이고, ‘화목’은 ‘그 결과로 우리들이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물의 상태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Ⅱ. 만물의 상태
A. 창조의 상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제일 먼저 창조의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 같은 마음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된 모든 만물을 통해서 당신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새롭게 획득되는 지식이야 없겠지만, 하나님은 창조한 모든 만물위에 인간을 지으시고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부족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충만한 완전성 때문에 창조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열등해서가 아니라 뛰어나기 때문에 마치 예술가들이 넘치는 예술혼으로 예술작품을 만든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완전하며 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만물은 제자리에 있었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솜씨를 질서 있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연히 인간도 모든 피조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인간은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고, 감정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올곧은 관계 속에서 자기의 의지를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었겠습니까?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 즉 아름다운 자연 세계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자와 같았고, 인간은 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혼의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세계는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B. 타락의 상태
창조의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 타락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해도 만물 속에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도시에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휴가를 가거나 여행을 떠나면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 하얀 백사장과 아름다운 소나무들을 봅니다. 그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이루는 조화와 질서를 보며 감탄합니다. 우리가 어떤 곳에는 감탄이 나오지 않지만, 어떤 곳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탄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인간의 타락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어도 여전히 그 선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아름답고 선한 것을 자연 세계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선함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죄로 인한 심각한 변화는 자연세계에 일어났습니다. 본래 자연의 모든 만물들이 인간의 다스림에 순복하였지만, 이제는 인간이 그것과 더불어 싸우고 투쟁해야 하는 시기에 도달하게 됨으로써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도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변화는 인간 안에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 이 세계에 부패성들이 침투하게 되었고,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기운과 가까이 하며 서서히 소멸되어가는 존재로 살게 되었으니, 인간의 육체의 아름다움이 젊은 시절에 잠깐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일은 마음과 정신 속에 일어났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영혼과 육체로 창조되었습니다. 각 사람마다 동일한 영혼이지만 각기 그 영혼을 다르게 창조하셨고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반영이 됩니다. 그리고 육체는 그 마음과 접합니다. 그 마음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의 상태와 육체의 상태가 함께 교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피곤하다가도 기쁜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활기 찬 정신이 듭니다. 또한 슬픈 소식을 들으면 몸에 갑자기 힘이 없어지고 때론 질병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 마음, 육체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것들 사이에 아름다운 조화가 깨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생각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정신은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마음이 뛰고 감동을 받았지만 추하고 더러운 것에 자극받고 가슴이 뛰는 이상한 존재로 변했습니다. 또한 올바른 지성과 감정으로 인도받지 못하는 의지는 잘못 행사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런 많은 고통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인간은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위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고, 옆으로는 사람과의 관계, 자연만물과의 관계가 깨지고, 자신 안에 있는 정신과 영혼, 육체 사이의 아름다운 화목도 깨진 것입니다.
Ⅲ. 만물의 상태
하나님은 만물의 아름다운 화목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람들, 자신, 모든 자연만물과의 관계가 깨져서 단절되고 고립되어있는 인간을 다시 모든 사물과 화목하게 하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떠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전한 하나님의 복음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과 구약의 말씀의 종들을 통해서 면면히 전해 내려오던 하나님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신으로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으로 깨달으려면 정신을 사용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감각적인데 많이 쏠려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은 하늘에서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혀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정신으로 많이 일깨워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거나 만지면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인격과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섬기는 모습을 통해서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 알게 하셨고 믿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전에는 하나님이 어른의 언어로 말씀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은 유아의 언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우리 가운데 내려오셔서 당신의 말씀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화목한 삶이 무엇인지 일생동안 전파하셨고 자기희생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성경은 “또한 그를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를 통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 때문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화목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려는 관계는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화목이고, 둘째는 사람들과의 화목이며, 마지막으로는 사람과 모든 자연 만물과의 화목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구속사역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과의 화목’, ‘사람과의 화목’, ‘자연만물과의 화목’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A. 인간-만물
편의상 저는 ‘인간과 만물의 화목’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자연만물은 인간 때문에 본래의 행복하고 평안한 상태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보십시오. 말을 못하는 모든 피조물도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끊어져서 자신들의 본래의 선하고 아름다웠던 상태가 망가진 것을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자연만물이 탄식하고 고통하는 것의 원인은 오직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만물의 탄식과 고통에 귀를 기울이며 좀 더 가까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다가가야 합니다. 만물의 고통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모든 자연 속에 있는 질서를 상실함으로써 비롯됩니다. 인간의 영혼도 고통 속에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의 영혼도 자신과 세계의 완성을 바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때문에 자연 만물은 고통 받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은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렇다면 인간과 만물의 불화한 상태가 어느 정도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자연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번지고 있는 ‘플라스틱 덜 쓰기 운동’에 대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각성을 아는 분들은 여러분들 가운데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사례 2가지를 먼저 소개하고 큰 그림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월에 스페인에서 향유고래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래는 약 10t정도 두툼한 몸집을 가진 아주 큰 물고기인데, 엄밀하게 말해 동물입니다. 최근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향유고래는 너무 삐쩍 말랐습니다. 이것을 기이하게 여긴 학자들이 고래를 해부했습니다. 고래의 뱃속에서 플라스틱 제품이 약 29㎏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각종 플라스틱과 비닐종이와 우산까지 들어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고래가 플라스틱이 먹이인 줄 알고 마구 삼켰다가 소화 장애를 일으켜서 결국 점점 피골이 맞닿도록 말라서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거북이 한 마리의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깊이 박혀있어서 동물 구호단체가 그것을 꺼낼 때, 거북이가 몸부림치면서 피를 흥건하게 쏟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지엽적인 일들이고, 사태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20세기에 플라스틱이 만들어졌습니다. ‘플라스틱’은 희랍어 ‘플라스티코스’(Plasticos)에서 유래했으며, ‘마음대로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플라스틱은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변형시킬 수 있어서 플라스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온 지구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북극에까지 비닐봉지가 흘러 들어가서 북극곰들이 먹고 있고, 실제로 곰의 몸 속에 플라스틱 성분이 발견된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것도 아닙니다. 매년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이 생산되는지 상상할 수 없지만, 10년 전 통계로 바닷가에서 떠밀려서 수거되는 쓰레기만 1,600만t에서 1,850만t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플라스틱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것은 장기간 쓰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한 번 쓰고 버리거나 몇 번 쓰고 버리는 쓰레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쓰레기들이 물을 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항구에 와서 쓰레기 처리비용을 내기 싫으니까 바다에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버리는데 얼마나 많은 양이 투하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제는 청정해역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쓰레기들은 대부분 물길을 타고 바다로 흘러들어서 조류(潮流)를 타고 흘러 다니게 됩니다. 쓰레기의 양이 2009년을 기준으로 플라스틱 쓰레기만 6억 5천만t으로 추정되는데,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18년에는 그 양이 훨씬 늘어났을 것입니다. 6억 5천만t이 어느 정도나 될지 계산해보니, 플라스틱을 압축시켜 눌러 담았을 때의 높이가 아슬아슬한 정도인데, 8t이 되는 양을 남북한 모든 국민들에게 한 트럭씩 주고도 남을 분량입니다. 이 정도의 양이 바다에 있고 그 양은 매년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플라스틱이 분해되어 5㎜ 미만의 크기가 되었을 때, 조류와 모든 바다생물에게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거북이는 바다에 떠다니는 비닐봉지를 해파리로 오해하여 그렇게 좋아한 나머지 거북이의 배에서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어떤 새는 자기 몸의 몇 분의 일이나 되는 크기의 먹이를 삼켜 소화할 수 있는데 소화되지 않는 것은 토해내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가 라이터를 먹으면 도저히 토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들이 쓰레기를 먹으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최근 청정지역이라고 하는 뉴질랜드에서 약 2,000㎞ 떨어진 육지가 없는 바다에서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태는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학자들은 이 상태에 제동을 걸지 않는 한, 2050년도에는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의 무게와 플라스틱의 무게가 같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이미 밥상에 올라오는 수많은 생선들 속에 이미 흡수되어 우리 몸에 내분비계를 교란하고 각종 암을 비롯한 질병을 유발하고 불임을 만듭니다. 이것이 어떠한 정도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섭취한 것이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우리의 인류에게 어떤 비극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근데 멈추지 않고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생산해내고 있고,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250억 개의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5천만의 인구로 볼 때 이 정도인데 진짜 플라스틱 양산국가로 꼽히는 중국과 베트남, 태국에서 생산되는 양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저는 겨우 플라스틱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극도의 가난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와 많은 서남아시아의 난민들과 수많은 굶주린 사람들을 보십시오. 고기 1kg을 얻기 위해서 약 9kg의 곡물이 소요되어야 합니다. 미국이 생산하는 곡물의 70%가 사람 입이 아닌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1kg의 고기를 만드는데 9kg의 곡물이 소요되는데, 섭취한 곡물 가운데 약 6%만이 단백질이 되고 나머지는 그냥 사라집니다. 그 사라진 양이 40년 전에 약 20조원에 이른다고 하니 지금은 어느 정도의 금액이 될지 누구도 환산할 수 없습니다. 40년 전을 기준으로 할 때, 그 금액은 전 인류가 매일 한 컵씩 곡식을 받을 수 있고, 살 수 있는 액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엄청난 소비를 생각해보십시오. 좀 더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비만이 되어 온갖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 곡물을 섭취 못해서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뇌에 이상이 생긴 아이들이 자라서 결국 그 부담을 전 인류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상태는 결국 자연과 인간 사이의 불화, 자연 속에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깨진 것을 보여줍니다. 올 여름 폭염으로 시달리면서 자연과 인간이 불화한 것을 정말 몸소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여름이 6개월이 되는 시절이 온다고 합니다. 온난지대에 살고 있고 4계절이 뚜렷한 것이 우리나라 특징이라는 사회교과서의 서술은 이제 바뀌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탐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아마존 밀림들이 파괴되고 수많은 동물들이 서식지를 잃고 민가를 급습하는 일은 이제 새로운 뉴스가 아닙니다.
자, 이런 상황의 결과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과 이 모든 세계를 자신이 다스리고 돌보기 위해 창조된 인간이라고 하는 자신의 근본적인 존재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 때문에 잃어버린 영광의 자리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이 깨져서 자연 만물위에 잃어버린 화목한 상태를 심각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심각하게 파괴한 모든 인류의 책임을 공감하고 자연을 화목한 상태로 바꾸기 위해서 어떠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똑같이 자연에 대한 책임의식도 없이 자신의 욕망과 탐욕으로 짓밟고 파괴하고 살아가면 결국, 하나님이 잘못을 책망하시기전에 자연에 입힌 심각한 손해의 결과가 우리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환경문제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멸시받고 짓밟히고 뜯기고 착취당하던 이 모든 세계를 다시 보듬고 치료하고 본래의 행복한 상태로 돌아가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인가 이바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탐욕을 억제하고 절제의 정신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더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도록 깊이 주의를 기울이고, 나의 작은 만족 때문에 피조물들이 많이 고통 받는 현실을 보면서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지만 환경특강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선량한 임금의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듯이 세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뛰어난 존재라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고, 비록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릴 통치의 권한을 우리에게 주셨으나, 선량한 관리자로서 이 모든 세계를 쉼이 있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텀블러를 판 이유가 그것입니다. 컵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는 목적에서 입니다. ‘종이컵을 사용하지 말자.’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3개월 이상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러게 우리들이 환경문제를 생각하면서 고삐 풀린 인간의 욕망 때문에 자연세계를 얼마나 파괴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B. 인간-인간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의 화목입니다. 만물의 화목이 상실된 씨앗은 인간의 범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을 때, 인간은 망가진 존재가 되었고, 화목이 깨진 채로 계속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코 누구와도 평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서로를 여기며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며 살도록 인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류가 서로를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타락을 통해서 다 깨져버렸습니다. 성경을 펴자마자 인간의 타락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조에 뒤이어 나오는 타락은 살육과 전쟁, 그리고 모든 갈등으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죽는 무시무시한 일들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이어져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교훈을 하나로 집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놀랍게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만들어낸 새로운 교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처음 인류를 창조하실 때,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여기면서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본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황금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을 돈처럼 사랑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잃어버린 인간 사이에 있는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예수가 오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여기며 서로 하나인 것처럼 사랑의 삶을 살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랑은 이기심을 종식시키는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자녀를 위해서 자신이 예전에 좋아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임신한 사실을 아는 순간 술을 끊을 것이고, 심지어 커피도 잘 마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이기적인 것을 즐겁게 끊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아이들이 게임을 좋아할 때, 아이들은 공부하는 것도 잊고 밥도 안 먹고, 가고 싶은 곳도 없이 게임에만 몰두합니다. 사랑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집중하게 만들고 다른 많은 것들에게 대한 사랑을 사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진리의 참 맛을 알고 나면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나의 이웃을 위해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자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기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건설하려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할 남편과 아내, 혹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화목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할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깨진 화목의 관계가 많으니 굳이 사랑해야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것은 우리가 말로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기심이 가득한 가운데 그렇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와 사랑보다는 이기심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자신이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이런 현실을 가져왔습니다. 결국 인간과 인간은 서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리게끔 되어있습니다.
우리 모두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저는 행복이란 단어를 알고 난 다음에는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행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나이에 진정으로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어린 시절의 즐거움이 얼마나 큽니까? 친구들과 어울리고 함께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부모에게 한없는 돌봄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때의 행복한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아마 이 세상에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도 인간이고,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도 사람일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참 행복해지도록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모든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행복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하나님이 원천이십니다. 그 사랑의 힘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온전히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호가 함께 만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외로움 때문에 그 욕망이 극도에 달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다른 사람과 함께 희생하고 존중하고 서로를 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의 관계를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했다가 금방 헤어져 버리고, 잠시 기대에 부풀어 사랑을 했다가 금방 그 사랑에 실망하고 혼자가 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더욱더 증폭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일생을 건 운명처럼 숙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집니다. 그리고 금방 상처받고, 금방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곳곳마다 사람들이 사랑받기를 원하며 목말라하며 울부짖지만 사실 그런 사랑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무한하게 모든 것을 용납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모든 것을 퍼부을 정도로 그렇게 사랑해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도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사랑을 누구에게 준 적이 없는데, 자기는 그런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독립투사나 무제한의 인류애를 가진 사회봉사자 같은 사람을 원하는데 왜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사랑을 나누겠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더 고매한 사랑에 빠져서 진리나 추상적인 대상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저라면 그랬을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매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랑이라는 밧줄에 매여서 울고 웃고 죽고 살고 하는 그런 허접한 일들에 몸부림을 치겠습니까? 인간자체가 이미 서로 화목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영혼의 기능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원수처럼 살아야 할 사람과 감격적인 화해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들은 보통사람에게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있었다면 아직도 화목하십니까? 이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던지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를 자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과 화목할 수 없도록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우리가 특별히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나 좋은 대로 살아가면 관계가 다 깨지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서로가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자기희생, 양보 긍휼이 필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 보다 인간이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함이고 또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이 이 사회를 창조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사회와 떨어져서는 자신을 완성해 갈 수 없고, 사람과 떨어져서는 사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사람들이 있는 ‘이곳’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고, 그 화목한 관계 속에서 자기를 완성해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올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다시 있지도 않았던 한 존재로 태어나서 내가 죽을 때에는 이 사회에 티끌만큼이라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티끌만큼이라도 진리에 빛에 가까이 다가가고, 선에 가까이 다가가고, 아름다움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어주는 ‘그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보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가족관계에서 만나게 됩니다. ‘엄마가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 ‘아빠가 있어서 내 인생은 정말 빛났어.’ ‘나는 정말 엄마 아빠의 아들로 딸로 태어난 것이 너무 고맙습니다.’ ‘내 인생에 두 분이 울타리가 되어줘서 행복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보람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족들 관계에서만 그렇겠습니까? 좋은 이웃은 한순간에 우리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좋게도 바꿔놓고 나쁘게도 바꿔놓습니다. 불행해진 모든 사람은 만나서는 안 됐을 것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 원인이며 결국 인생의 불행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를 연구하는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합니다. “인간의 모든 범죄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만남이 범죄에서만 시작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허공중에 있다가 진리를 만나셨습니까?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죄, 악, 선, 진리, 영광을 발견하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6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제가 외국에 어느 집회를 갔을 때, 어떤 분이 제게 와서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이웃을 만나서 몸과 마음이 억수로 고생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더 훌륭하게 만드실 때 힘든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웃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공감한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더 훌륭한 사람 안 만드셔도 좋으니 쉬운 사람을 붙여주시고 그런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말길 바란다는 의미입니까? 여러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누구에게 매우 힘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합니다. 30년 전의 나와 내가 만났더라면 절대 나와 화목하게 못 지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독선적이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냐? 그렇게 배려심이 없어서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겠냐? 정말 내가 살면서 너 같은 사람 못 봤다.’ 30년 전의 나에게 그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나인데도 내가 그렇게 싫을 것 같다면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사기꾼 장의사를 만나서 죽는 순간에 오동나무로 주문한 관이 소나무 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안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실제로 저의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그렇게 속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오동나무관이라고 해서 돈을 줬는데, 보자기에 싸가지고 가니 뭔지 알 수 있습니까? 땅에 묻을 때 뜯어보니 소나무 송판이었습니다. 어차피 거기서 부숴버리는데 오동나무면 어떻고 소나무면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빨리 썩는 게 제일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방에 따라서 관과 함께 묻는 곳도 있지만, 탈관이라고 해서 깊은 웅덩이에 넣고 관을 다 벗겨버리는 장례방식이 있고, 수의에 쌓인 사람만 넣고 흙을 넣고 밟으면서 다시 흙을 쌓아올리는 방식도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에도 오동나무 관을 주문하고 죽었는데, 소나무 관으로 바가지를 쓰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인생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사람을 못 믿고 사람을 의심하는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그러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라고 한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어려운 기재로 우리 안에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도 어쩔 수 없고, 저렇게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자신을 개선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만은 참 우리가 보기에 우스운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인간 모두를 사랑으로 연결해서 화목한 관계가 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는 깨어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 하는 여러분들의 영혼, 정신, 상황을 한번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고민과 고통, 은혜를 받으면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지만, 은혜를 못 받으면 기도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많은 근심 중에 사람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에베레스트산의 얼음이 점점 녹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여러분 중 누가 있겠습니까? 북극곰이 비닐봉지 몇 개를 먹었다고 가위에 눌리는 사람이 여러분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대부분의 고민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도 관계없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해야 할 내 남편이 원수가 되고, 내가 정말 존경해야할 나의 어머니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고통이 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파야 할 나의 자식의 내 발을 묶는 차꼬가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현실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결국 이런 현실 속에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런 모든 환경 속에 인간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분명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관계가 깨졌을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이 돌아오는가를 보면서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보여줍니다.
2000년대는 행복의 연구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행복에 관한 어마어마한 연구가 행해졌고, 어마어마한 책이 쏟아졌습니다. 근데 홍수처럼 쏟아진 책 중 가치가 없는 것들은 버리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려서 모두 종합해보면, 모든 책들은 행복에 관한 방식도 다르고 분석도 다르지만, 어느 책도 빼놓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사람들과 평화로운 삶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려고 예수님이 오셨으니 이 예수 믿고 화목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하나님-인간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화목입니다. 결국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이 모든 만물과 평화가 깨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져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인간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고, 사람과의 화목, 만물과의 화목도 회복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4절을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하나님과 원수 된 사이를 화목하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이 화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셨으니 에베소서 2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원수가 되었던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유대인과 헬라인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며 미워하던 상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비참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불화에서 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현실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는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사람과의 관계에 자신 있다고 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쉬운 사람들만 만나서 그렇지 진짜 여러분과 같이 센 사람들을 만나보십시오. 그들도 겸손해 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는 센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얻는데, 스스로는 도저히 그런 관계를 화목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삶 속에서 그런 사람들을 수시로 만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원래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이 특별하거나 남편이 매우 유별나거나, 아내가 매우 특별하거나 너무 심하게 하는 사람, 더러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공정한 평가가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다가 가뭄에 콩 나듯, 정말 인자하고 자비롭고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많은 음식점을 드나들지만, 저는 ‘정말 이 집 직원들 친절하다. 맛을 별로지만 다시 오고 싶다.’라고 느낀 적은 10집 중 경험상 한집도 안 됩니다. 갖다 놓으면 되는데 왜 던집니까? 플라스틱 그릇이니 깨지지 않겠지만,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그냥 입이 이렇게 부어서 막 갖다 던집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아내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나한테 시집을 오고, 그런 남자 중 한 명이 우리 남편이 된 것입니다. 왜 우리만 특별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남들이 그런 사람을 만난 것을 부러워하고 내가 그런 사람을 못 만난 것이 불행이고, 내 인생이 꼬인 것이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나의 인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사람과 만났을 때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 인생의 주체로서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나는 담벼락처럼 바람이 오면 맞고, 애들이 공차면 얻어맞고, 아들이 낙서하면 더럽혀지는 대로 가만히 서있는 존재입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인생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인데, 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남 탓하고, 환경을 탓 하면서 살아간다면, 일평생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살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지금 상황은 내가 만난 현실입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을 계속 만나는 것 같지만, 대부분 좋은 사람을 만난 이야기만 하지, 정떨어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안 합니다. 우리도 모든 이야기를 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 자존심 상하고 내 인생에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내가 내 발로 걸어가는 것이 인생인데, 내가 그 사람을 만난 것도 내 인생이고, 선한 사람을 만나서 유익을 누리는 것도 내 인생이지만, 나쁜 사람을 만나서 고통을 받는 것도 내 인생의 일부입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그런 사람을 절대적으로 얼마나 많이 만나고 적게 만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어떻게 내 인생이 침범당하지 않고, 꺾이지 않고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센 사람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힘이 강해지면 되지 않습니까?” 힘이 세지면 깨집니다. 큰 소리로 말한다고 나도 더 큰소리를 하면 바가지가 날아오고, 바가지를 던지면 더 큰 것이 날아옵니다. 뺨을 때리면 여러분은 발로 차입니다. 누군가는 중상을 입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그들의 강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다른 종류의 강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살았기에 저 사람은 곤고할까?’ ‘저렇게 가시가 돋친 채 못 되게 굴까?’라고 생각하고, 저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을 가엽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래. 너 나를 만났지. 그래 진정한 쉼을 한번 누려봐라. 느껴봐라. 내가 네 못된 것에 대해 사랑으로 복수하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삽니다. 여러분의 일상적인 삶을 이야기하는데 왜 웃습니까? 남편이 못되게 굴면 ‘너는 나를 미워하고 찔렀지만, 나는 사랑으로 너의 배를 가르리라. 너는 짧은 칼로 찔렀지만, 나는 대검으로 찌르리라.’ 남자들이 거기에다 아멘을 합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너무 낙심돼서 잠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면 어디서 솟는지도 모르는 기쁨이 확 솟아납니다. 낙망하고 주저앉고 싶었는데, 잠깐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화목한 관계를 주시고 하나님이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Ⅳ. 적용과 결론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도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화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 속에서, 죄 속에서 은혜생활을 게을리 하며 하나님과 화목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전에 이기던 상황을 이제는 이길 수가 없게 되었고, 만물과의 화목은 물론 사람과의 화목도 깨졌고, 우리가 정말 사람으로 태어나서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하여야 할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결국엔 하나님과 화목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화목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8.12.온가족수련회 저녁집회1
2016
십자가의 피로 화목을 이루심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만물의 회복과 화목(2018.8.13. 장년부여름수련회 저녁집회2)
Ⅰ. 본문해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창조의 목적을 떠난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만물사이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어떻게 그런 위대한 화목을 다시 이루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라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뜻합니다. 화목이 깨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는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죄가 없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5절은 말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 사람과의 화목, 자연과의 화목이 깨뜨려 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 죄를 짊어지시고 화목제물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당신의 의로서 구원해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중생의 씻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에 정결케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의로우시며 그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의로 구원해주셨다는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Ⅱ. 피로 화목을 이루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바로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형벌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이 십자가의 피로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화목을 이루셨을까요?
A. 깨끗게 하심
첫째는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하시기 때문에 불결한 인간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로 말미암는 불결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도덕적인 실천으로 그것을 깨끗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는 화목제물이 되시고 누구든지 그 피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불결하나 우리를 깨끗케 그 피로 씻어 우리를 흠 없이 정결하게 하셔서 우리를 당신과 교제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모든 죄와 불결로 부터의 깨끗함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셔서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깨끗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깨끗케 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순전하게 보시고 다시 그들을 사랑해주시고 교통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는 그 구원을 취소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구원은 일수불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 놓고 죄를 짓고 내 욕심을 따라 살아가자 이런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지어도 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지만 곤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다시 불결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충만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은 우리가 이미 깨끗케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들을 회개함으로써 본래의 깨끗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자기의 백성들을 깨끗케 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수없이 나옵니다.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을 깨끗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믿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깨끗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성품이 털털해서 그냥 아무 환경에나 잘 적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불결과 관련해서 지저분한 음식점에 들어가서 정말 불결한데도 그냥 아무런 신경 안 쓰고 잘 먹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뭐든지 맛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음식의 맛이 떨어지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왜냐하면 실력이 그것 밖에 안 되니까 그렇지만 불결한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차라리 슈퍼에서 두유 하나를 사 먹고 말지 불결한 음식점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깨끗하면 용서가 됩니다. 물론 맛이 없으면 다시 오지 않겠지만 일단 깨끗하면 용서가 됩니다. 그리고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유리창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깨끗한 집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셨고 우리가 또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런 사랑을 충만히 느끼면서 살아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죄의 불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곤고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자녀인데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아침에 일어나서 몇 시간 활동한 다음에 손을 씻어보면 깜짝 놀랍니다. 어쩌면 그렇게 까만 비누거품이 쏟아져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시로 손을 닦습니다. 하루에도 보통 열 번씩 열다섯 번씩 손을 닦습니다. 저를 기준으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저는 수없이 손을 닦습니다. 저녁 먹은 후 잠자기 전까지 최소한 다섯 번 정도 손을 닦습니다. 그렇게 닦아야만 마음이 편안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면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때를 묻히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몇 시간 만에 손을 닦으면서 비누거품이 새까맣게 나오는 것을 조금도 이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손으로 수없는 것을 먹고 그 손가락을 빤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숨 쉬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많은 것들이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모든 삶이 죄라는 뜻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죄와 접촉하고 살아갑니다. 다행히 우리 안에 영혼이 아주 견실하고, 건강하면 죄가 날아와도 이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 면역력이 되어서 늘 병균과 접촉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부다 질병에 단번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죄들이 와도 죄가 마음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도록 쳐냅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고 마음이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를 아주 쑥쑥 빨아들입니다. 일단 들어온 죄는 우리 안에서 쉽게 나가지 않고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고 싶어 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십만 개 정도까지는 암세포가 있어도 문제가 안 된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우리의 몸에서 어느 한곳에 모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번식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자리를 잡게 되면 그담에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십만 가지의 생각이 인간의 뇌 속을 스쳐지나간답니다. 그중에서 100개를 생각할 때 선한 것을 생각하고 한 개만 이상하고 나쁜 생각을 한다고 해도 십만 개면 약 천개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천개 중에서 99퍼센트는 사라지고 10개만 실행에 옮긴다고 하더라도 10번의 행위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할 때 사람들을 만나서 속임을 당하고 상처를 받고 이러는 일들은 마지막에 관 뚜껑에 들어갈 때까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이 가짜로 납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면 여러분들이 들어있는 무슨 죽을 때 무엇을 준다고 하는 상조회사의 보험이나 이런 것들이 가짜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 죽기 전에 파산했다고 하고, 오리발 내밀고 아무것도 안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늘 당면해야하는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현실은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으로 볼 때 우리도 똑같이 이런 세상에 죄가 있는데 죄가 없고 정말 착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그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도 없거니와 혹시 그런 사람이 모여 있다면 여러분이 들어가는 순간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불결한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가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집니다. 그러면 이 녀석들이 그 빗속에서 좋다고 물장구를 치고 다니는데 예전에는 보도블록이 깔린 마당보다는 흙이 많았습니다. 흙탕물에서 뒹굴고 개판을 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옵니다. 그러면 엄마가 못 들어오게 합니다. 그리고 현관에서 옷을 다 벗깁니다. 그리고 욕실에 데리고 가서 깨끗이 씻깁니다. 한 시간 전의 그 아이와 깨끗이 씻고 드라이 까지 하고 새 옷을 입힌 그 아이와의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깨끗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회복이 될 때 놀랍게 우리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는데 뭐냐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서로 싸움질을 하면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찢어지면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사람들은 성질만 남는데 그 성질머리를 가지고는 자기도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수많은 모순율(contradiction)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신의 행위와 마음의 상태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되어서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게 되면 찢어졌던 것들이 놀랍게 질서 있게 정돈이 되면서 내가 나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됩니다. 그게 주체성입니다. 나 아닌 것들이 이상하게 내 속에서 나와서 찢어지고 지들끼리 싸움질을 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거의 분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데 뭐에 이끌려서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슨 주체성이 있겠습니까? 자유가 없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첫 번째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수련회에 나와서 다른 것 모두 못해도 단 한 가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자신의 더러운 죄의 때가 씻겨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면 찢어졌던 여러분들의 자아는 다시 하나로 모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는 찬양이 어제의 그 찬양이 아니고 듣는 말씀이 어제의 그 말씀이 아니고 올리는 기도가 어제의 그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요? 깨끗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깨끗케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B. 만나게 하심
두 번째는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게 하실까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네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그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큰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분의 자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자비는 하나님 앞에 깨닫고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자비가 경험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면 아멘이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까? 아멘! 그럼 지금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지금만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알기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아온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나를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셨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전서부터 여러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찬양)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주 나를 사랑 했네
주 크신 사랑 나타나 날 구원 하셨네
오래전 내가 주님을 알기 전부터 주님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인자하게 여러분들을 대해주셨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렇게 나에게 인자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내가 그분을 믿고 회개한 이후에 깨달아진 것입니다. 죄의 불결이 우리를 더럽게 하면 이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만큼 죄에 가깝게 되고 죄에 가깝게 되면 신자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게 되고 마음의 감동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가슴깊이 터져 오르는 찬양이 사라지게 됩니다. 열렬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열렬히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노래를 부를 때에 고음이 안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음에 대해서만큼은 대리만족을 합니다. 음악을 틀어놓고 쫙 올라가는 사람을 보면서 ‘야, 정말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음악을 전공한 사람의 설명을 들으니까 그것도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밤길을 걸어가다가 치한이 뒤에 와서 탁하고 자기를 헤칠 때 여자들이 ‘까악!’ 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런데 그 음이 얼마나 고음인지 대중가요 가수들 가운데는 머라이어 캐리가 가장 높이 올라가는 것을 뛰어 넘거나 거기에 맞먹을 정도의 높이랍니다. 그런데 그것이 잠재되어 있는데 긴장하고 훈련이 안 되어있고 이렇기 때문에 그 소리를 못 낸답니다. 그 울림의 소리는 승모근과 턱을 감싸고 있는 근육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여러 가지 생각들 때문에 이 근육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움직이면 그렇게 누구나 높은 고음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모든 사람이 아름다우냐. 그것은 별개의문제입니다.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 올릴 수 있고요 그리고 누구도 하나님을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절실하고 간절하게 부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너무나 많아서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부터 벌써 한 40년 전에 일이지만 저는 주일학교 아이들의 여름성경학교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1학년 2학년 3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총각집사의 설교를 듣고 기도회를 하자고 그러면 한번 기도회를 하고나면 비닐 장판이 흠뻑 질척질척해져서 도저히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눈물과 콧물을 쏟아냅니다. 물론 거기에는 땀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이가 많거나 오래 예수를 믿었거나 심지어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어떨 때 입니까? 정결케 되고 정말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찢어졌던 자아가 온전히 하나가 되면서 예수가 내 안에 살아 계신 것이 느껴지면서 마음속에서 간절한 기도가 터치면서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이룬 도덕적인 깨끗함이나 혹은 우리자신의 양심이 우리를 거기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에서 우리가 그 피로 정결케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은 장소에 국한된 분이 아니시니 어디서든지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시고 또 공동체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같은 예배 속에서 다른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생애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 하찮게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은 어두워져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찬란하신 분임을 영광스러우신 분임을 경험합니다. 그 영광의 빛 아래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불결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미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통해 그분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문제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비록 하나님 앞에 오랜 세월동안 불순종하며 살았지만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나를 다시 깨끗케 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 내가 나의 죄를 진심으로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고 의로 우사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던 모든 의지하던 마음과 자기를 내세우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버리고 그리고 오직 보혈의 공로만을 믿는 것.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 드리기 전에도 주님을 만나고자하는 간절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러 나오는 태도가 극장 구경 가는 태도보다도 더 못합니다. 그러니까 덧없이 교회 와서 지루한 예배시간을 견디고 옆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지루한 예배를 견디면서 한 시간을 보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 은혜 때문에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그 분의 보혈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 살았던 삶도 내 세울 수가 없고 못 살았던 모든 삶에 대해서는 자기의 탓으로 돌리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 피를 의지하는 사람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있습니다. 그 피로 자신이 깨끗케 되었다고 하는 그 분명한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관심사는 너무 자기중심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힘든 세상을 좀 위로를 많이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사람 없는데 옛날에는 가끔 목사님이 우리에게 좀 위로가 되는 설교를 해 달라고 나한테 와서는 직접 말을 못하니까 아내한테 돌려서 요청을 합니다. 그런 이야기에 제가 귀를 기울였겠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못 되었었으니까 오히려 그 다음주일에는 더 반대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가만히 보면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에도 우리 어렸을 때 그리고 우리가 젊었을 때 신앙생활 할 때 정말 많이 불렀던 찬송이 바로 보혈의 능력에 대한 찬송이었습니다.
(찬양)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이런 찬송을 뜨겁게 부르면서 예수의 피만이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 만나게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신앙을 보실 때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여러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지식에 있어서 열악하고 그리고 교회에서 제공해주는 교육 프로그램도 별로 없었는데 거친 들에서 자라나는 야생화처럼 그냥 목이 터져라 그 보혈의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거친 들판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예배시간에 개인적인 묵상의 시간에 이 보혈의 찬송을 많이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책을 좀 많이 읽고 설교를 듣고 묵상을 많이 해야 됩니다. 왜 그 위대한 학식과 그리고 그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있던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로 들어왔을 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그렇게 심각한 생애적인 결단을 내리게 만들어 주셨던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 것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예수의 피에 젖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예수의 피 가 없으면 그것은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의 피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분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보혈이 오늘 나에게 믿어지고 그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흘리기 위해 당한 그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때에 나는 모든 약점과 죄에도 불구하고 불결에도 불구하고 그 보혈을 지나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의 임재를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우리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무엇이고 나 한 인간이 이 어두운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 만나게 해 주시니 이 피를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피를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모으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든지 성경을 읽든지 특별히 날짜를 정해놓고 내가 매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관한 구절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잘 안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은 후에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성경에 있는 진리들이 자신의 머리에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된 것들이 묵상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으로 내려와서 이 가슴의 엔진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그 비밀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을 해야 합니다.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책과 대화를 하면서 책을 읽어야 됩니다.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시간 말고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묵상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피, 그리고 그 피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향하여 길이 있고 자신의 의에 신발을 버리고 그 보좌의 핏 길을 밟으면서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는 수많은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세들이 있지만 그러나
(찬양)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러면서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능력을 주심
마지막 세 번째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는 다만 죄를 깨끗케 해줄 뿐만 아니라 더럽고 불결한 우리를 씻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게 해줍니다. 그 피는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피 자체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문제는 피 중심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 중심적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고 예수의 피를 중심으로 하고 그래서 그 피를 통해서 받는 능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큰 능력을 줍니다. 죄와 싸울 수 있는 능력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무명한자 같으나 연약한자 같으나 힘이 없는 자 같으나 고난을 당하는 자 같으나 그것은 모두 그 사람의 껍질일 뿐이고 사실은 그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이겨 큰 능력과 성령 안에서 담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연약한자 같으나 강한자요 무명한 자 같으나 사실은 유명한 자요 짓밟힌 자 같으나 사실은 일어선 자로 살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말로만 전한 복음이 아니라 그 큰 능력으로 주어진 피의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한 번도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것을 생각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이미 이 피의 능력을 경험 했습니다.예수를 믿는 순간 금시발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고난 길에서 예수 믿은 사람은 오랫동안 그 고난 길을 걸었고 가난해서 예수 믿은 사람은 나중에는 부유해졌을지 모르지만 한동안은 여전히 예수 믿으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알량한 위로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피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럼 그 피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역사했을까요?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 그곳에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누구도 2000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2000년 전에 일어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을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오늘 우리의 영혼에 마음에 적용시켜주고 그래서 그 시간과 공간에 얽매임이 없이 이 천 년 전에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오늘 내 마음속에서 재연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미 모두 끝난 십자가의 사건인데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치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런 큰 고난을 나를 위해 당하셨고 그 때문에 내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되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나에게 무엇이 두려운 것이 있으랴? 내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붙들고 계실 것이라!’라는 담대한 확신이 생겨납니다. 솔직히 말해서 물론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잘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매일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여러분들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좀 나아지기를 바라고 힘겹게 부부 관계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은 좀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고 사업을 해서 힘든 사람은 돈을 좀 벌기를 바랍니다.” 그게 목회자의 매일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래도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는데 그게 뜻대로 잘 안되면 여러분은 예수 안 믿을 것입니까? 남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 인간이 끝까지 변화가 안 되면 여러분들은 신앙을 포기할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어때야 되는지 보십시오. 그런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언젠가는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슬픈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 세상의 조건에 의해서 출렁거리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지만 그러나 다시 한 번 확 뛰어넘어서 나를 살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눈을 떠야 됩니다.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흘려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을 믿을 때 큰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게 되었고 그 능력은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니까 그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탕발림에 익숙해진 신앙생활 하지 말아야 됩니다. 오히려 그냥 정직하게 ‘현실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나의 현실은 평범한 사람들이 닥친 현실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의 현실이다.’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 한복판에 서 있는 것도 나인데 누구하고도 이 자리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왕 그 인생을 살아갈 때 내가 여기 서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삶의 여건에 끌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현실은 지금 현실이고 그 현실을 먼저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그리고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따른 누구의 현실이 내 현실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것은 깨끗이 밀쳐버리고 그리고 나의 이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믿는 것은 이 현실이 지금은 내게 쓰고 고통스럽고 아픈 현실이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나에게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내려서 그래서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시련 속에서 기쁨의 삶을 살아갔던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피의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쁨과는 종류와 질이 다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세상에 있는 기쁨과 슬픔은 두 개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하나가 하나를 몰아내 버립니다. 슬픈 사람은 기쁘지 않고 기쁜 사람은 슬프지 않습니다. 슬플 수 있음은 기쁜 것이 아니고 기쁘면 슬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속에는 이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그런데 이 슬픔이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고 비참하게 여기는데서 오는 그런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보혈의 은혜를 입은 나로서 내가 이렇게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 데서 오는 경건한 슬픔입니다. 그 슬픔은 느끼는 것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인격적인 교제의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의 마음속에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애들이 똑같이 못된 짓해도 엄마가 수요예배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왔을 때에는 애들에 대해서 너그러워집니다. 제일 재수 없는 죄수가 판사가 아침에 부부싸움하고 나온 오전 재판이랍니다.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하고 왔는데 죄수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너그러움만 있어도 자녀들을 대하는 게 다른데 만약에 그 보혈의 능력이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으로 역사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복음은 이론의 변증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입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도 그 능력이 없는 사람보다는 설명할 수 없어도 그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를 훨씬 잘 보여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전도는 그 자신이 얼마나 큰 그 피의 능력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랑과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구원 받지 못한 불신자였을 때는 물론 이런 능력이 없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도 이런 능력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이라는 연못에 담깁니다.
교회에서 오는 길에 몇 개의 저수지를 봤습니다. 보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비가 안 오니까 바닥을 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짙은 녹색의 녹조들이 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보혈의 능력이 사라지고 나면 결국은 은혜의 물이 사라지면서 그 인간성의 밑바닥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은혜 떨어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보면 옛날에 어떤 성질로 살아가던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물로 우리의 마음이 충만하게 젖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 피로 그 분에 의해서 우리가 창조되었고 그 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그 피로 생명을 받았고 지금 우리가 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올 여름에도 많은 아이들이 성경학교와 여름수련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토요일이면 교육관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아이들이 기타통을 매고 쭉 올라갑니다. “너희 몇 학년이니?” 하고 물었더니 “우리는 중학생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외계인들이 엘리베이터에 가득 탔습니다. 걔네들은 외계인인데 하나의 별에서 온 아이들이 아닙니다. 다 각기 다른 별에서 온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너 토요일 날 여기 왜 왔니?” 하니까 “아 목사님 우리는 기도 모임 하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걔네는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의 횡성에서 하나님의 별로 이주한 애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잊히지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하던 아이들이었습니다. “뭘 위해 기도해줄까?” 하니까 “우리가 성도로 살아갈 수 기도해주세요.” 합니다. 여학생이었습니다. 중학교 한 2학년정도 된 학생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꿔놓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이들을 바꿔놓습니다. 예수의 피를 만나는 곳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제 이틀째 날입니다. 여러분 한번 결단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영화 한편 감상하고 돌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이 모든 것을 듣고 알고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피의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없다면 여러분들은 결단코 다른 삶을 살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지한 상태에서 인생을 사는 것이 양심의 가책은 덜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아는데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지금도 여러분 믿고 있지만 정말 여러분들의 관심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입니까?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피가 여러분들에게 관심사이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언제였습니까? 그 사랑이 나에게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내 인생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흘린 보혈의 피를 기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한 적이 언제입니까? 주님께서는 이 피를 마시고 이 살을 먹는 사람들 그가 곧 자기의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의 피, 그의 살 그것은 그분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의 피의 능력이 움직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가 내안에 사시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힘겹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인생을 힘겹게 살아갑니다. 어렵습니다. 지금 어려움이 비교적 없는 사람도 여러분 평탄한길을 걸어갈 때 쓴물을 머금으면서 걸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럼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좀 낫게 덜하게 더 많이 조금 이건 또 사람마다 바뀌기도 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세상은 이렇게 늘 요동치면 변하는 것이니 이 세상에다가 너무 많은 희망을 두지 말고 예수의 피에 희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 피의 능력으로 이 현실들을 내가 비껴가지 않고 맞닥뜨리며 그 피의 능력으로 이 현실들을 이기면서 나아가 우리의 현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찬란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드린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바로 이런 화목을 위하여 오신 것이니 여러분들이 이 주님을 믿고 화목한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으로 화목함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 5:12-13)
Ⅰ. 본문해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온 세계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위는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은 우리들이 이해를 하겠는데 하늘에 있는 것들까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 그 화목 때문에 인간과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구절은 해석이 두 가지로 크게 엇갈립니다. 칼빈 같은 사람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그 천사들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화목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 같은 해석가는 이 천사들이 인간과 대치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도 화목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것들 사이에 대적과 갈등이 소멸되고 이제 완전한 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만물이 창조의 영광을 증진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것이 좌절되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찬란한 빛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충만한 성품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인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화목의 계획을 따라 그 경륜 속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왜 태어났는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극적으로 이 세계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경륜과 인류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려는지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Ⅱ. 사랑으로 화목함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위대한 화목의 계획안에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있지만 이 화목은 깨질 수 없는 화목이지만 수시로 우리들이 불순종 때문에 죄를 짓고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집니다.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불결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주님의 보좌 앞에서 그분을 만나게 해주시고 그 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아주 오래 걸리는 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시험과 고난이 있고 혹은 죄가 있다 할지라도 잠시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진심을 쏟아 놓으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루가지고 안되면 이틀 아니면 삼일, 혹은 일주일, 혹은 사십일이면 어떻습니까? 마음의 무거운 짐이 있을 때에 환경의 무거운 눌림이 있을 때 사십일 씩 날짜를 정하고 저녁마다 나아와서 기도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피의 능력입니다. 이 피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데살로니가 전서는 삶의 무대를 교회를 삶의 무대인 교회로 여러분들을 초청합니다. 그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 주신 피의 능력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목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끼리 화목 하라.’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그 하나님의 자녀들의 화목은 교회를 넘어 가정을 넘어 온 세계로 펼쳐져야 할 화목이지만 먼저 그 화목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을 받은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속에서 그 화목을 이루어 가라는 것이 오늘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가장 화목의 가르침을 명료하게 받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 화목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피의 능력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주적인 화목이 주는 실제적인 도전입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와 세계를 당신과 화목하고 인간과 인간이 화목하고 인간과 만물이 화목하게 되는 그러한 전망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그런 위대한 전망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내 사랑하는 지체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안에서 먼저 화목을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화목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과 우리의 구원의 계획을 알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끼리 먼저 화목을 이루며 살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에게 상처를 주거나 마음에 깊은 고통을 안겨주면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묘사했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나쁜 일을 하시리가 없지만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나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돌아와서 자신을 찌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 받은 교회로 연합시키셔서 하나님은 이 교회가 하나님의 경륜과 가르침을 따라서 사랑으로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저기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가 있구나. 정말 행복한 사회가 저 속에 있구나.’
오늘날 우리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으로 나뉩니다. 구라파에서는 이미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문제가 위협되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들이 논리적으로도 철학적으로 비판하고 논증해서 기독교의 가치가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들을 위해서 우리들은 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실천적으로 이만큼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성애자로 사는 것이 충분히 행복하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우리의 믿음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하고 행복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대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고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히 다 보였는데 매우 잘못된 일에 연루되어서 기독교의 평판을 땅에 떨어트립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 하든지 교회가 지금보다 훨씬 좋은 상태가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례를 보고 우리도 저런 잘못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경계하면서 각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런 것들 때문에 교회를 향해서 교인들이 돌멩이를 던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도 모든 잘못에 책임이 있고 참여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런 교회의 병든 부분들을 고치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보혈의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사랑으로’ 화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주님께 받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 죄의 크기와 심각성입니다. 즉,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저렇게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을까?’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죄 없으신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은 얼마나 위대한가?’ 이 두 가지를 함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 아래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신뢰를 접고 우리를 불신하게 되고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나를 주인 삼은 삶으로 마지막에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이제는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듦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피의 공로를 의지해서 누구든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혜택을 주십니다. 그 피로 우리의 불결한 것을 깨끗케 씻으십니다. 그 피로 죄인인 우리가 용서를 받아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그 피가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어서 이전에 살아갈 수 없었던 영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화목하게 살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좋은 조명기구들이 있지만 전기와 연결되지 않은 조명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과 연결된 가운데 그분께로 오는 모든 좋은 은혜를 받을 때에 비로소 화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는 현실을 꿈꿉니다. 하지만 자기 부모하고도 잘 못 지내고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형제자매하고도 잘 못 지내는 사람이 이제 만난 지 한 2년 밖에 안 된 사람과 만나서 24시간을 매일 같이 살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게 그렇게 쉬웁니까? 서로 사랑하고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효과가 있지만 얼마나 유효기간이 길겠습니까? 사람의 맨 얼굴을 보기 시작하고, 감추어 졌던 모습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부모하고도 잘 못 지내고 형제들하고도 못 지내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잘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배속으로 낳아주고 부모가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인데도 올바른 관계를 맺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래도 평생에 너 하나뿐이라고 사랑을 맹세하고 무릎을 꿇고 장미꽃을 받친 다음에도 그렇게 잘 못 하는데 다른 사람은 나한테 무릎 꿇은 적도 없고 나한테 ‘나는 너뿐이다.’ 고백도 한 적도 없는데 우리가 누구와 어울려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나는 여러분을 실망시키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깎지 말고 보태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인식할 때 우리들이 인생의 헛다리를 짚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아내와 남편이 부딪히고 아이들과 소통이 어렵고 직장에서 사람들과 삐걱거립니다. 물론 개중에는 정말 입에 넣은 사탕처럼 달콤한 사람도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입속에 들어간 사탕처럼 기분을 좋게 합니까? 누구입니까?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누가 입속에 들어간 사탕처럼 나를 좋아합니까? 두 명쯤 되면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립니까? 사기를 꺾자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받아서 평범한 모든 사람이 불화하고 상처를 주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를 사랑하고 화해하고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관계가 깨졌지만 다시 잇고, 망가지지만 다시 고쳐지면서 살아가는 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빛남이 있습니다. 별로 마음에 안 듭니까? 아멘을 하다가 맙니까? 다시 말하겠습니다. 인간은 원래 불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잠깐은 기분 좋을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입속에 들어간 사탕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관계는 거의 없고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너 때문에 화목이 안 돼. 내가 너하고만 엮이지 않았어도 다른 가족들은 행복하게 살 텐데. 네가 문제야.’ 손가락질 하면서 긴 세월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에게 그 큰 십자가의 은혜를 주셔서 그 피로 깨끗케 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능력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현실을 고치며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나를 예수 믿게 했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죄는 자꾸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나 자신의 행복으로 이동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으니까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고자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나 자신이 만족하는 지점에 말뚝을 박고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이 말뚝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불행히도 이 사람에게 아주 놀라운 권력이 있습니다. 그 권력을 사용해서 자신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굴복시킵니다. 굴복한 사람들이 마음까지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굴복시키는 진정한 힘은 오직 사랑 이외에는 없습니다. 아무 것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누가 굴복합니까? 잠시 두려워서 꺾을 수는 있지만 절대로 마음 깊은 곳에서 순복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사랑 이외에는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런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한 사회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너희끼리 화목 하라.’ 이 말은 다른 사람과 불화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그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 화목을 이루어 가야 할 첫 번째 삶의 현장입니다. 물론 이 안에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 은혜 받은 나 때문에 남편이 혹은 아내가 이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가족들이 그런 삶이 오래 지속될 때 가족들이 ‘저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기에 예전에 없던 온유함, 사랑, 긍휼,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끼리 화목 하라.’ 하고 딱 잘라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주어진 명제입니다. 우리는 화목자로서 살아야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과 그들을 화목케 하고 사람들 속에서 서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함으로써 사람들과 화목하게 살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수양관에 딱 들어오면서 나갈 때까지 플라스틱과 종이컵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과일을 먹으라고 플라스틱 포크를 가지고 왔습니다. 생각했습니다. ‘이 포크를 한번 사용하면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절대로 닦아서 누구 다시 주진 않을 텐데….’ 종이를 돌돌 말아서 그것으로 과일을 찔러 먹었습니다. 이런 노력이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작은 실천이 세계 전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의 신념을 따라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유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만물들이 나 때문에 혜택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갈 때 무슨 보상이 주어질까?’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당연히 하늘나라의 안식과 영원한 상급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있겠지만 오늘 살아가는 하루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오늘도 내가 그 피로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사는구나.’ 하는 즐거움과 안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타이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싸매며 화목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꺾고 화목해 본 열매가 무엇인지를 내가 이미 먹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연 만물이 우리 때문에 쉼을 누릴 수 있도록 돕자고 이야기 할 때 우리 마음속에서 그 살아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애정이 선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는 것까지 그만 둘 수가 없다고 칩시다. 그래도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인간의 몸에도 유익한 고기를 남기고 죽을 수 있는 그런 구조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어마어마한 희생이 필요하면 힘든 일이지만 조금만 절제하고 조금만 우리자신이 덜 만족을 누리려고 하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 것들을 소비하는 삶이 편리하고, 안하면 우리의 삶이 조금 불편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환경을 아끼는 삶도 정말 멋있는 삶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모든 만물들이 쉼을 얻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런 삶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덩치만 커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화목의 삶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피의 능력이 주어질 때 존재하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사회가 됩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A. 사랑함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 하라”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사랑하라” 입니다. 사랑 안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누구를 향한 사랑입니까? 일반적으로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문맥에서 보면 이 사랑은 특별히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르치고 권면하고 자신들을 영적으로 다스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그 사람에게 매이는 인간적인 종류의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이단에서 교주들에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온 우주와 세계를 화목케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넓은 우주적인 사랑 안에서 사랑을 가리킵니다.
왜 그들을 사랑하느냐? 성경이 두 차원으로 이야기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함께 구속을 받은 형제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이고 우리를 다스리는 그런 지도자들이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똑같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구원을 받은 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니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도자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교회의 담을 넘어 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고 급기야는 문화가 다른 나라에게까지 뻗어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기대이고 선교의 동기입니다.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 이것의 원래 원어의 뜻은 ‘그들의 사역을 위하여’, ‘for there works shake’, ‘그들의 사역 그것을 위하여 사랑 안에서 그들을 대하라’ 이런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화목의 계획을 실행해서 더 많은 사람이 화목의 혜택을 누리게 하는 사역입니다. 그 일을 거두는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은 인격이 더 탁월한 사람이 있고 덜 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지식에 있어 매우 탁월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지도력에 있어 특출 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는 일에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으니 너희가 이마 받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인격적인 맹종이나 혹은 추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언제 한번 설교 시간에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나로서 살다가 갔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추종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유인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모든 관계를 아름답게 해야 하지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가족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자신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목양하는 목회자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고 있는 사역의 독특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화목을 교회 안에서 실현하고 교회 밖에서 실현하도록 하나님이 지도자들을 세우셨으니 그들과 한 사랑 안에서 화목한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사랑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고 그 사랑이 온 인류를 향하고 있으며 이 일을 위해 교회가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무질서하게 세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이 위대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에 친히 생명이 되어 주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고, 교회의 질서를 세우셔서 그 질서 속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이 담긴 위대한 사역을 하게 합니다. 이러한 속에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사랑하면서 실제적인 화목을 교회 속에서 이 세상 속에서 구현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B. 귀히 여김
두 번째 가르침은 ‘귀히 여기라.’입니다. “너희 가운데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가장 귀하게 여기며…”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독특성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때로는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모두가 모두에게 소중하게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해서 질서를 세우시고 그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화목케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바로 그런 화목의 사역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독특성 때문에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사람을 아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가장 소중한 투자입니다. 훌륭한 지도자 한사람이 태어나면 그 지도자 때문에 위기에 처할 나라가 구원을 받고 고통을 받을 수많은 백성들이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후손을 위한 가장 훌륭한 선물은 아주 고귀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배출되는 것입니다. 특히 시대가 아무리 악하게 바뀌고 변해도 꿋꿋이 진리의 말씀으로 굳게 서서 그리스도 피의 능력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목양할 수 있는 훌륭한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미래를 향한 확실한 투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 그리스도 교회에서 작은 섬김이라도 수종을 들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화목에 관한 위대한 비밀들을 다루고 있는 목회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 길러내고 현재 하는 사람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고유한 사역에 헌신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격려하고 그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며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이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람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유익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어둠 속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의 화목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일에 수종 들고 있는 하나님의 크고 작은 일꾼들, 목회자들, 지도자들,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사람 자신 때문에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독특성, 우리는 감히 해내지 못하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화목을 이 땅에서 실현해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C. 목양 받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목양을 받아라.’입니다.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권하는 사람들은 목회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 나이가 어린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될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도 죽어 버렸으니 이제 미래에 아무 소망이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임을 소망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릇된 종말론에 사로잡혀서 도무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구제나 의지하고 살려고 했던 교회입니다.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경하게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서 따끔한 가르침을 주면서 재림 시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소망을 전해주는 것과 동시에 게으르지 말고 매일 매일 자기의 일용할 것을 위해 일하라고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목양을 받지 않는 생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화목의 계획 속에서 구원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그들이 지혜의 말씀으로 영혼들을 목양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갑니다.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을 오합지졸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폭압적인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인 질서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이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질서이니 이 말씀을 깨닫고 자신에 화목을 주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이 질서를 받아들이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 앞에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말씀으로 목양을 받고 진리의 말씀으로 감화를 받음으로써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새롭게 화목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힘겹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고 사람들과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함으로 그것들과도 화목한 사회로 만들게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이 일들을 하시고 그 말씀으로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이 진실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화목을 위한 도구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인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위대한 화목의 진전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명한 자나 사실은 유명한 자요, 연약하나 사실은 강한 자요, 매일 흐느껴 우나 가슴 벅차게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고 사랑하는 교회를 가지고 있고 사랑하는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는 아직까지도 이런 하나님의 위대한 화목의 계획을 모르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렇게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가슴이 찢어지게 전해도 그 진리의 말씀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그냥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의 비밀을 알고 그 피의 능력을 안 사람들이 눈물로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 줘도 또 그런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나와서 그나마 지나가는 바람처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섬길 수 있고 그런 사랑과 긍휼로써 그들을 봉사하여 그들에게 이 화목을 알릴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Ⅲ.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위대한 화목을 교회 안에서 너희들끼리 실현하라.’입니다. 이 화목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질서들을 존중하고 화목을 위한 소명을 받고 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 이 화목을 교회 안에서 실현하고 교회의 담장을 넘어서 온 세상에 실현하기 위해서 주님께 부름을 받고 애쓰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또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치된 사랑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화목을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양을 받고 그 은혜로 새로워져서 우리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 있는 것이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티끌만큼이라도 실현하는데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어서 잠시 살아 있으나 영혼에 잇대어 살고 소멸하는 존재이지만 불멸의 존재인 것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미움과 원망 속에 살았을 사람들, 남이나 비난하며 살았을 것 같은 사람을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시고 불결한 자를 깨끗케, 주님 멀리 떠난 자를 주님 만나게, 무능한 자를 그 보혈의 피의 능력으로 새롭게 해주셨으니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두려운 것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불순종하고 주님을 멀리 떠났다면 돌아가면 됩니다. 돌아갈 수 없다면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됩니다.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그 피로 씻어 깨끗케 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을 믿고 일평생 주님과의 화목을 실현하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