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관한 Q & A
녹취자: 이재호
Q. 1) 최근 들어 삶을 위한 노동, 직장, 사업 등이 믿음생활에서 가장 걸림돌로 느껴집니다.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더라도 주어진 일을 하면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지, 생계가 어려워지더라도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 섬김에 전념하는 것이 옳은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순간순간 하나님, 예수님 생각하고 거의 온 정신이 일에 빠져 있습니다. 하는 일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보니까 저녁시간 조차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먹고 새벽기도를 나오지 않고서는 주일이 아니고서는 거의 잊고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한다면 생계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배고픈 신앙생활이 옳은지, 배부른 인간의 삶이 옳은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A) 신앙을 어떤 시간을 드리고 의무를 행하는 것을 가지고 동격이라고 놓는다면 기도하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하고, 교회 와서 봉사하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하고, 성경공부를 하려고 해도 시간을 내야지 성공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거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한 생활일 뿐이지 그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도님이 아내와 깊이 사랑에 빠져서 연애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아내를 위해서 편지도 쓰고, 식사준비도 하고, 여행계획도 세운다고 합시다. 그런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사랑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과 사랑의 표현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을 표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사랑인 것은 아닙니다. 성도님이 저를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예의를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의를 갖추었다고 해서 성도님이 저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주 깔보면서도 표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문제는 두개가 서로 충돌을 하고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신앙은 모든 것 속에 녹아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바빠도 사랑을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너무 바쁘면 3번을 만나는 그녀를 2번 밖에 못 만날 수 있고, 너무 사랑하지만 멀리 여행은 못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걸 그만 둘 수는 없잖습니까? 정리를 하면 성도님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맘에 있는가?’ 그것이 오히려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사업도 접고 시간이 많으면 충분히 놀거나 TV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이 주어지고 여유가 주어지면 그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입니다.
결론은 그런 고민은 자신의 진짜 신앙과 삶이 충돌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님이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 신앙이 내 안에서 불러 일으켜질 수 있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기도 못한다고 하지만, 기도할 마음만 있으면 전철을 타고 가면서 기도할 수 있고 차를 타고 가면서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고 설교를 들으면서 차로 갈 수 있고 마르고 닳도록 시리즈 하나를 거의 암송할 때까지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에서 신앙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양상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다시 신앙을 갖도록 도와 달라,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 그렇게 기도해야 될 필요로 보여집니다.
Q. 2) 조금만 조직을 맞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하여 생명이 있어 주변 동료들에게도 나누고 싶은데 저의 그릇은 너무 작은 거 같습니다. 목사님은 그동안 목회를 해오시면서 어떻게 다른 분들을 포용하고 뭉치게 만드셨는데 궁금합니다.
A) 참 어렵습니다. 결국은 우리를 많이 괴롭히는 것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다른 목표, 무엇인가 우리와 다를 때 매우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도 내 이야기에 계속 딴지를 거는 사람하고는 일정기간은 만나주지만 계속해서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것을 고집하니까 그것은 보통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거는 너무 즐겁습니다. 취미도 맞고 신앙생활도 맞고 할 때에는 매우 에너지가 덜 들어가고 오히려 그 모임을 통해서 에너지를 갖게 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을 이해하는 크기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다른다움입니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김태희가 아무리 예쁘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이천 명 쯤 길거리를 걸어간다고 한다면 예쁘겠습니까? 좀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남자가 진짜 예쁜 여자하고 결혼해서 딸이 태어났는데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안 닮은 것입니다. 그래서 명절에 처가 집에 가서 앨범을 봤는데 전혀 모르던 여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형수술하기 전의 아내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딸하고 똑같이 닮았다고 합니다. 결국은 우리 안에 사랑의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많으면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지식을 습득하기 어려운데 그 지식을 쉽게 습득하는 방법은 그 지식의 대상을 사랑할 때 그 지식의 습득은 매우 쉬워집니다. 리니지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매뉴얼 몇 백 페이지를 읽어내는 것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다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사람하고 부딪치지 않으면 자기가 그릇이 작은 지도 잘 모릅니다. 특히 교회에서나 작은 조직을 맡아서 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람이 자기 생각을 다 자유롭게 말하고 자유롭게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합해서 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은 오랜 기도와 많은 헌신을 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암에 많이 걸리는데 주된 원인 중 하나가 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는 암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확 풀어내지 못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밖으로 확 쏟아내는 운동을 한다든지 이러면 오히려 나은데 그런 감정적인 처리를 못할 때 스트레스가 쌓여서 몸의 질병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개울에 가 보면 네모난 돌멩이는 없고 모두 동글동글 합니다. 이유는 물에 바위가 깎이는 것입니다. 깎이는 방식이 그냥 바위만 놓고 물을 흘려보내면 그렇게 맨들 맨들한 돌멩이가 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포구가 나서 산이 허물어져서 바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립니다. 그래서 상류에서 쏟아져 내렸는데 격류를 타고 흘러내려서 약간 개울 아래쪽에 왔을 때에는 모든 돌멩이가 동그랗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울에 가서 바위들을 볼 때 그 바위가 동글동글한 것이 100% 물에 의해서 깎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람과 부딪치면서 관계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결함이 많고 힘든 존재인가를 모릅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깨달으면서 배려하고 양보하고 이해하고 그를 끌어안고 하는 그런 것들을 우리가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적인 관점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인배는 계속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고 편을 가르고 군자는 사람들을 계속 뭉치게 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소인배는 어떤 일을 같이하고 나면 수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찢어지고 편파가 생겨납니다. 군자는 한 가지 큰 일을 하고 나면 소수에 지나지 않던 사람들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로 바뀌면서 그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겨 나가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역자 한 사람이 어느 날 우울합니다. 아내하고 다퉜던 것입니다. 아내하고 다툴 때, 마음에 안 들고 힘든 일이 생길 때,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까지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Q. 3) 어떻게 하면 좀 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성경 읽는 방법과 기도의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A) 우선 말씀을 깊이 깨달으려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어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조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례 교육보다는 운전 면허에 더 많은 시간을 받쳤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말씀을 배우는 일에 절대적인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말씀을 깨닫아 가야 하는데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한 장도 읽을 수 없이 산다던지 설교를 한 편도 제대로 들을 수 없이 산다던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깊이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새가족 교육, 교리반 교육, 성경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등을 차근차근 공부해 가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성경 읽는 방법과 기도의 방법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성경을 매일 통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매일매일 꾸준히 읽어서 신약2번, 구약 1번 읽는 프로그램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그것과 함께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성경 정독입니다. 성경 한 구절을 놓고 천천히 읽어 가면서 깨달음이 주어지면 다시 반복해서 읽고 반복해서 읽고 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교리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시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 속에서 깨달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 말씀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으려면 이상 4가지를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없이 설교를 계속 듣거나 성경을 계속 듣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밥이라면 설교나 경건서적은 반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밥맛이 없어도 반찬이 맛있으면 밥을 먹기 시작하듯이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또한 경건서적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설교가 나오는데 그 중에 여러분들의 관심사가 있는 시리즈를 선택해서 차례대로 들어가면서 이것을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공부방에서 듣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어려우면 운전하면서 전철을 타고 가면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말씀에 집중해서 은혜를 받는다면 설교를 잘 듣고 은혜를 받고 나면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마음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격을 읽고 나면 성경을 잘 해석한 내용을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설교, 청취, 책을 읽는 것, 성경을 읽는 것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여러분들 속에서 움직일 때 그 때에 은혜의 생활에 매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기도를 놓지 말고 성경 읽기를 놓지 말고 설교를 계속 듣고 때때로 읽는 경건 서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가까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이 더러운 욕심을 물리치고 불신앙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Q. 4) 개인의 문화생활을 어디까지 어느 정도까지 허용가능한가요? 아내와 함께 집안일을 마치고 컴퓨터로 영화나 만화를 보게 되는데 금요일 저녁 같은 경우는 새벽까지 보게 되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저는 게임이나 오락같은 것이 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는 없었습니다. 딱 한번 교수시절에, 1991년 정도에 친척집에 갔었는데 그 집에 게임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도시건축 프로젝트인데 세금이 얼마 모이고, 그것을 가지고 도로를 놓고 이러면 사람들이 많이 오고 돈이 떨어지면 세금을 올리면 이주를 하는 복잡한 게임입니다. 그것을 꼬박 앉아서 6시간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일체 게임에 손대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저런 것이 문제 삼을 습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정도가 빈번해져서 낮 생활이 영향을 받게 된다던지 우리의 사고를 그런 잔상들이 지배하게 되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책을 잘 안 읽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때에는 세계문학전집은 중고등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미팅에 나갈 때에는 커닝페이퍼 같은 데에다가 유명한 소설가 주인공 이름을 다 써서 외우고 나갔습니다. 문화 자체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인데 지금은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감각문화 때문입니다. 아이들 어릴 때부터 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교육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왜 감각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는가 하면 눈으로 화려하게 들어와서 판단을 안 거치고 우리가 느끼게 만들어줘서 거기에 반응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매우 야한 영화를 보게 되었고 습관이 되었습니다. 딱, 그런 영화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우리의 몸이 음란한 쪽으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성의 판단과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감각하고 바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삶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이 들어오면 그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이성으로 판단하고 무엇이 옳은가 이것이 가져올 결과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을 해서 행동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데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은 이 판단 절차가 모두 빠지게 됩니다. 탁 들어오면서 ‘먹고 싶다. 먹으러 가자.’ ‘야 좋다. 보러 가자.’ ‘야 좋다. 우리도 쾌락을 즐기자’ 하고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에 노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술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이유 때문에 먹기 시작합니다. 반복하는 동안에 술에 취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음락, 오락, 낚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가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지 마셨으면 합니다. 영화 같은 것들은 우리들이 현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도 재미있으려고 보지는 말고 현실비판과 사고력을 기른다는 교육적인 견제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북 콘서트를 할 예정입니다. 82년생 김지영이 올라갑니다. 공감하는 자매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저는 영화는 안 보고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 책을 다 읽고 화가 났습니다. 왜 화가 났었냐면 ‘여자들을 이렇게 우습게 보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거기에 사회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런 것들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여자를 이렇게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존재로 보는 것은 여성들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감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어느 것을 공감해야 하고 어떤 것을 공감해서는 안 되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영화를 보러 가려고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그 자체를 재미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재미가 없으면 전혀 보지 않겠지만은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쓰셔야 합니다. 혼자서 영화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보는 것은 괜찮은데 매일 저녁 안보면 어떻게 안 될 것 같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빠져야 합니다. ‘내일은 주일이야 오늘은 이만 봐야지’ 할 때에 그것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들어간 것은 너무 많이 간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기 싫으면 자기가 하지 말아야지 하면 그만 둘 수 있을 정도까지 좋아해야지 미치도록 빠져 들어가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강의 때문에 최근에 본 것은 공각기동대입니다. 만화는 만화대로 독특한 그런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빠져 들어가기 보다는 우리의 영혼을 비옥하게 하는 그런 책들을 읽는 것이 더욱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바마가 8년 동안 임기를 마치면서 자기가 이 힘든 대통령을 백안관에서 지낸 것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게 힘든 시간을 자기가 이기게 해 주었던 것은 잠자기 전에 한 시간씩 책을 읽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건져주는 시간들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았으면 합니다.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보면서 덮고 나면 내 마음에 양식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Q. 5) 개인적으로 과학사 철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과학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시는지, 왜 종교개혁자들은 과학혁명에 무지했으며 지금도 진화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궁금합니다.
A) 지금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12세기 사람입니다. 12세기 때에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어떻게 보면 교회역사에서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해서 기독교의 많은 사상들을 집대성해서 체계화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그런 일을 하던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퀴나스는 자기의 저작전집을 완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멈추게 됩니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 이야기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해석하는데 개신교에서는 인생의 이력에 대해서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을 깊이 만나는 성령의 체험을 했다고 보고 그리고 나서 고백하기를 자기가 이제까지 지은 책들이 지푸라기와 같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바뀐 생각을 가지고 글을 더 많이 썼더라면 유익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스콜라’ 라는 것은 원래 그리스어 ‘스콜레’에서 오는데 그 뜻은 ‘한가한’ 입니다. 한가한 사람들이 모여서 스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학교라는 말이 한가하다는 뜻에서 옵니다. 왜냐하면 귀족부인들이 시간이 많이 남으니까 살롱에 모여서 한담을 나눕니다. 그런데 그것도 지겨워서 교양강좌를 듣기 시작하는데서 스쿨이라는 것이 시작됩니다. 스콜라 철한은 기본적으로 한가한 사람이 하는 것으로 보았으니까 아주 엄밀한 분석과 논증, 재반박과 재재반박 등으로 이루어지는 아주 정밀한 논리의 체계 속에서 전개되는 철학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어디서 배웠나하면 기독교 역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적으로 몰립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다 플라톤 주의자가 되든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가 된다’. 플라톤 주의자는 하향식 사고입니다. 여기서 인간으로서 절대자를 만다고 그 모든 사물을 절대자의 시각에서 내려오면서 설명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플라톤적인 세계관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세계관입니다. 있는 사물 그 자체를 개별적인 사물들을 통해서 그 위의 보편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이면서도 둘 사이는 사뭇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이라고 하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면 손가락을 위로 들고 있는 사람이 플라톤이고 손가락을 땅을 가리키는 사람이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기독교에서 모두 불태웁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으면 심각한 처벌을 받을 정도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슬람권으로 넘어갑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기독교권에서 희랍어를 잘하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번역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들이 사라센의 문명을 일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종교의 자유를 주면서 얼마나 번역자를 후하게 대우했는지 저런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것을 번역해오면 양피지의 무게와 동등한 금을 달아서 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렇게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콜라 철학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화의 문명이 엄청난 과학의 발전을 이룹니다. 서구권에서는 대학의 시초가 11세기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지만 이슬람권은 이미 10세기 중반 이전에 대학을 세우게 됩니다. 대학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이는 그때까지 학문이 체계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체계화가 되지 않으면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대학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콜라 철학은 그렇게 아랍 철학자들에 의해서 기독교권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 계기가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된 것들이 스콜라 철학인데 스콜라적인 세밀하게 쪼개면서 논쟁하는 방식을 신학에 적용해서 스콜라주의 신학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금자탑을 이룬 사람이 아퀴나스입니다. 아퀴나스는 스콜라철학의 전성기에서 막 하강하는 시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개신교에서 스콜라는 학문의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퀴나스는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는 우리 교회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사상적인 기반이 됩니다.
그 당시에 과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까지도 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과학의 본격적인 발전과 개발들이 일어난 게 14세기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부터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고 많은 도시들 가운데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확신하는데 종교적으로 발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과학의 눈을 뜨는 것에 대해서 매우 반대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무지가 판을 쳤고 휴머니즘이 일어나고 인문주의 운동이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부터 과학의 중요성이 대두가 된 것입니다. 예전까지는 신에 의해서 종속된 인간, 신을 노예처럼 계속 떠받드는 인간, 이 세상은 인간에 의해서 지배되도록 신에게 허락받은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사고방식의 엄청난 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길게는 12세기부터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게 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부터 이미 서서히 시작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이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달고 움직이는 존재로 보지 않고 굉장히 통이 커서 인간을 만들어서 주고 ‘내가 미리 정한 것은 없다. 네 마음껏 네가 준 능력 안에서 이 세상 속에서 의미를 찾고 이 세상을 가꾸면서 살아보거라’ 라고 던져진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관심사는 ‘어떻게 그 신 앞에서 내가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점점 더 완성된 사람이 될 것인가’ 이고, 두 번째 관심사는 ‘모든 사람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 이고, 세 번째 관심사는 ‘우리에게 준 이 모든 만물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살아갈 것인가’ 입니다.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과학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항상 유보적입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무엇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유보적이게 되었고 얼마든지 종교적인 신념에 의해서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는데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부터 ‘인간이 하나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객관적으로 발견하게 한 그것도 하나님의 한 진리의 한 부분이다’ 이런 생각까지 승격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데카로트에 와서 그 사상들이 꽃을 활짝 피게 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생각한다는 말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의심을 품는 것, 아무리 세계에 대해 의심을 품어도 의심을 품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면서 인간의 사회의 중요성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미 14세기에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인문주의 운동이 모든 유럽의 전역에 확산되지는 않았습니다. 14세기 때에 피렌체나 왈도와 베네치아 자유도시 중심으로 이런 사회의 운동들이 일어나고 과학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과학 혁명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볼 때에는 무지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이 평균 이하 였다고 보면 안 되고 과학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육도 발전하고 커뮤니케이션도 발전되었기 때문에 어떤 과학적인 사실이 발견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알려지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발전된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랬고 저 과학의 발전도 더 많이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18세기에 이르면서 산업혁명으로 활짝 꽃피면서 폭발적인 기술 발전으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관심사도 문제인 것이 종교개혁자들은 처한 컨텍스트 자체가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라들 중에서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를 가려내는 것, 교황제가 왜 잘못되었는지,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가로 막는지가 논쟁이 되는 컨텍스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이 무지 해서라기보다는 관심사가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인 지식이나 과학에 대한 생각들이 충분히 표명될 무대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무지한 정도는 아니었고 컨텍스트 자체가 다른 논제들이 훨씬 더 많이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고 봅니다.
과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모든 과학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그것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전체가 연결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 모두를 알고 난다면 모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모순을 갖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생각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안에는 이 사물 하나하나의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과 함께 사물의 두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관계 까지도 하나님 안에는 모르는 것없이 모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깥 세계로 폭발하듯이 나타나서 이 세계와 만물들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이 이 세계의 만물을 존재하게 만들었고 만물을 더듬어서 그 근원을 따라 내려가면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관념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들은 모두 다함께 아주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다만 우리들이 모든 차원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옥스퍼트 대학에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똑똑한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 이야기가 무엇이나하면 과학자들이 서로 논의하는 차원이 20차원까지 간다고 합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20차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를 보았을 텐데 ‘인테르’는 ‘중간에’, ‘스텔라’는 그리스어로 ‘별’입니다. 그래서 성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해가 안된다고 하는데 차원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차원은 점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입체, 4차원은 시간, 5차원은 x5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공간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계산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시간과 공간이 엮어서 펼쳐졌을 때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보는 차원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들이 차원을 달리하면 아주 다르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 우리의 차원에서는 신비스럽게 보이는 일들도 그 차원으로 들어가면 당연한 연결로 이루어져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런 점에서 과학이 궁극적으로 올바르게 과학을 한다면 성경과 모순되지 않고 성경과 일치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학공부에서도 과학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6) 지구의 나이를 짧은 나이로 보십니까? 긴 나이로 보십니까?
A) 저는 젊은 지구론에 대해서 상당한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증거도 안 맞다고 봅니다. 유물론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물질도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고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속에 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유물론은 당연히 우리 기독교 사상과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다윈이 설명한 방식으로는 믿지 않고 믿을 수 없습니다. 전 전문가는 아니지만 항상 든 의문은 이것입니다.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변했다고 하면 원숭이로 고정된 시간, 사람으로 고정된 시간 보다는 변이하는 시간이 비교될 수 없이 길었을 텐데 중간의 화석이 거의 안 나오는 것입니다. 중간의 화석이 압도적으로 발견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그 종류를 따라 창조하셨다’라고 할 때 이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 종류간의 진화가 아니라 종류는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종류된 것 안에서 라마르크 용불용설이나 최적의 선택설에 의해서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그 종 안에서 부리가 발달한다던지 눈이 발달한다던지 키위새처럼 날개를 사용하지 않아서 날개다 퇴화하고 발이 발달한다던지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종 자체를 바꾸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Q. 6) 신학적인 설명을 잘 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으면 기독교의 역사가 좋았을 것이라 생각도 되고, 과학혁명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그 당시에 갈릴레이나 캐플러, 뉴턴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과학과 기독교와의 합쳐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매우 논쟁도 많이 하고 프랑스 베이컨 같은 사람이 경험론을 내세우면서 하는 것을 기독교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신학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계몽주의로 넘어갈 때는 오히려 기독교적인 답도 무너지고 그런 과학적인 방법론만 남아서 나중에 신학이 많이 위축되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A) 기독교권에서 새로운 과학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을 순수하게 과학자체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안 되고 나름대로의 문맥이 있습니다. 그들이 경계했던 것은 기계적 세계관입니다. 어떤 과학들을 엄밀하게 발견해서 계속 그것들을 수용할 때 사람들의 생각에 이 세계는 모두 법칙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신념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매우 도전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 점에 대해서 매우 주저했고 특히 가톨릭 치하에서는 교황이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그런 과학을 용인하는 것이 체제에 중대한 위험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무오하게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마지막 권한을 교황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용납할 때 사람들은 신앙 의존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과학 의존적인 사람이 된다고 보았고 그때에 신앙은 급속하게 약화될 것이다 교황과 교회에 대한 의존도가 심각하게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이후에 종교개혁자들과 이런 사람들은 사람마다 편차는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과학에 대해서 매우 너그러운 생각을 가지고 용인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개신교 쪽이 훨씬 더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지금에서야 과학적인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 신구교의 차이가 없지만 그 때는 그랬습니다.
Q. 7) 인문학이나 과학이라는 부분이 저희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고 했을 때 어디까지나 인문학과 신학, 과학이 인간이 개척해 나가는 분야고 만들어가는 분야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한계적인 부분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에서 종교개혁 시대로 넘어갈 때 라파엘로가 그린 바티칸 궁전의 그려진 아테네 학당과 또 하나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을 그림을 그릴 때에는 일설에 의하면 이것이 종교개혁에 의한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림을 그려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과 이원론과 관련된 손가락 표시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플라톤주의 부분이 좀 더 궁금해서 기존 플라톤주의에서 신플라톤주의가 그 당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편자를 한 단어로 은총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던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A) 라파엘로가 그렸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라파엘로가 활동하던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특히 로렌조 메디치가 플라톤 철학을 매우 좋아했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재산을 기울여서 세우고 그 당시 전 세계로 필사자들을 보내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도서관을 만드는 일도 하는데 그의 사상을 움직였던 중요한 인물이 플라톤이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이후에 플로티누스 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엔네아데스라는 책을 쓰면서 그의 플라톤적인 관점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플라톤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플라톤 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신플라톤주의 라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된 하나의 사조를 세우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고 14세기를 지나고 17세기에 와서 다시 한 번 부흥을 경험하고 하면서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의 체계나 이런 것들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됩니다. 오리겐 같은 사람은 플로티누스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 기독교 교리를 건전하게도 했지만 오염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옥석을 가지면서 그 영향에 대해서 좋음과 나쁨을 함께 판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Q. 8)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성화의 길은 자신의 욕망을 꺾고 자기를 부인하는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를 저항해서 만족하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A) 성화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성화의 길을 갈려면 끊임없이 채찍에 맞고 칼에 찔리는 길입니다. 진짜 고통과 한 맺힌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저 길이 그런 길이 아니라 아주 즐거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조금 더 닮았구나!’ 그런데서 오는 기쁨, 그리고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하나님은 성화된 크기만큼 우리 속에 그 사랑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런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해서 우리 안에 가득 찰 때 첫 번째 혜택은 우리가 먼저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된 삶을 살던지 막된 삶을 살던지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짐승처럼 사는 것은 우리에게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살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성화의 길이 자신의 욕망을 꺾는다고 했는데 좋은 욕망을 꺾는 것이 아니라 나쁜 욕망을 꺾는 것입니다. 나쁜 욕망을 꺾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으면 이춘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욕망에 복종하고 살아갈 때 인간이 마지막으로 어떤 모습이 되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길은 욕망을 꺾는 것인데 욕망은 어차피 꺾여야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지 자기 안에 키우고 있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부인하지 않으며 사는 결과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꺾고 부인하는 것이 한없는 고통밖에는 남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꺾고 더욱 더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꺾을 때 인간은 오히려 욕망이 주는 만족보다는 훨씬 더 높은 그리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게 되고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욕망을 계속 꺾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노예가 되는 삶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에는 자신에게는 고통으로 돌아옵니다.
Q. 9) 목사님께서는 교회를 떠나고 싶을 정도로 목회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영적침체를 경험한 적이 있으시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어느 집 아들이 엄마가 아침에 대화를 하면 “교회를 가자” 합니다. “엄마 나 우리 교회 다니기 싫어” “아! 나 진짜 가기 싫어” “야 네가 담임목사인데 네가 안가면 누가 설교하냐?”
힘들 때는 물론 있습니다. 화 낌에 그만두는 건 소명이 아닌 것입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적은 없는데 ‘정말 이 일이 너무 힘들구나. 내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서는구나’ 그런 때는 있었습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하늘나라에서 눈뜨고 싶을 정도로 그런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영적으로 침체됐기 때문이다’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니까 영적으로 충만할 때가 있다고 해서 어떠한 고통도 안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고통대로 느끼면서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 내어 자신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자원으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땅에다 거름을 오염된 것들을 집어넣으면 땅은 이것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어서 땅을 기름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땅의 능력에 비해서 쓰레기의 양이 과도하게 많을 때에는 땅이 이것을 분해해서 거름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은혜 충만해도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당연히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아도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영적으로 은혜를 충만하지 않을 때는 고통을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그것을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영적으로 은혜생활을 잘 해서 이것들을 소화해 낼 수 있다면 큰 어려움이 와도 이것들을 소화해 내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인간은 사회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데 작은 일을 가지고 분노하고 폭발하게 됩니다. 인생은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영문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인생이 꼬여서 여기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꼬여서 잘못된 게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내 인생을 꼬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저는 꼬일수록 보다 더 멋지게 전개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차피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력과 마음의 크기들을 키워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