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녹취자 : 오희열
신앙생활에서 연습이 되지 않는 생활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도 생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도 뒤로 물러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 생활은 언제든지 뒤로 물러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뚜렷한 표는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기도에 힘쓰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기도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 문맥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의 기도 생활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에서는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시고 “기도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과 대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너는 기도할 때 골방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집에서 골방은 일상적으로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사용하는 방이 아닙니다. 방은 방이지만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 지은 방이라기보다는 그저 무엇인가 물건을 두거나 혹시 사람이 쓴다고 하더라도 잠깐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방입니다. 그래서 골방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입니다. 거기로 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일체 의식하지 말고 “나 하나님 한 분과만 교제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기도의 교훈이 그 다음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두 개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아라. 이방인들은 기도를 많이 하여야 상달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언부언은, 정확하게 말하면 “헛된 반복”입니다. 말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반복”입니다. 그 말이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하더라도 헛되게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반복이 헛된 반복입니까? 그것은 마음이 실리지 않은 모든 말의 반복이 헛된 반복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서 의도하셨던 성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뜻으로 우리가 기도하도록 하셨겠습니까? 그 뒤에 보면, “하나님은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나옵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아시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왜 굳이 하나님께 그것을 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가장 큰 요점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실까 하는 육적인 생활의 필요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주기도문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은 아주 놀라운 의미를 가진 기도입니다. 아주 쉽게 요점을 이야기하면 신구약 성경은 신약의 빛으로 보아야 하고 신약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보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주기도문의 렌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스마트폰 같은 매체의 사용을 현저히 줄이고 책을 읽으십시오.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 2012년쯤에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450페이지 정도 되는데 그 책을 앉아서 천천히 집중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신자는 주기도문이 자신의 기도가 될 때 그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셨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염두에 두셨던 것은 기도하는 것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하는 기도였고 그 기도는 말이 굉장히 많은, 헛된 반복들이 많은 기도였고 그 기도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진정한 영적 생활에서 어떻게 해를 끼치는지를 교정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외식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한 분만을 보면서 기도하라. 의미 없는 반복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이 아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진정으로 기도해야 할 내용이 따로 있다.”고 하시면서 그 기도의 질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즉석에서 가르쳐 주신 기도지만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시던 기도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예수님이 꿈꾸고 있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도의 실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당신을 믿고 제자가 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제자도가 이 주기도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주기도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순간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 우리의 영혼을 크게 각성시키십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를 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통절하게 회개하고 나면 그 후에 놀랍게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5분도 기도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 속에서 회개하고 난 후에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 기도는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입니다. 회개가 기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회개를 통해서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니까 우리가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깊은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제일 먼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제일 먼저 지성적으로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자신이 죄를 알 수 있어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알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내가 행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과 그 사람의 생활이나 마음이 어긋났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 회개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위기 때문에, 정서가 움직여서 서러운 마음이 들 수 있지만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내가 죄를 지었고 피할 수 없이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늘 회개의 생활이 있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입니다. 집중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잘 전달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때 그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빛이 비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몰골이 형편없는데 다행히 날이 어둡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잠깐 어떤 공공장소의 화장실에 들어가니까 환한 불빛이 있고 거울이 있는데 자신의 옷차림이 매우 망가진 것, 머리에도 뭐가 묻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본 다음에는 그것을 고치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비출 때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이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살고 마음먹고 있는지를 비춰주어도 회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생각이 헌신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나 드라마나 게임에는 두 시간, 세 시간씩 몰입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 그렇게 몰입하지 못합니다.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본적인 자세는 부동자세입니다. 똑바로 앉아서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니라 뇌가 활발히 움직이면서 저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고 또 한편으로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계속 추리하면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가 그렇게 깨닫고 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살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마음과 다르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는 정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나 사랑해?”, “사랑해.”, “정말?”, “자꾸 귀찮게구네. 사랑한다니까.” 사랑은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생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내려와서 출렁거리는 “정동, Affection” 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하면 출렁거리면서 일어납니다. 그리워집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떨어져 있어 보면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너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속에서 사랑의 정동(affection)이 출렁거리면서 일어나야 합니다. 볼 때뿐만 아니라 안 볼 때도 이 사랑의 정동이 출렁거리면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상상(Imagination)의 작용이 감정에 미치는 것은 실물이 미치는 것과 거의 유사할 정도로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에 자기가 잘못한 일, 잘못 가졌던 마음, 죄, 죄는 행동과 마음으로 짓는데 그것에 대해서 변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되돌려 놓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실제로 되돌려 놓는 것은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 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 나의 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에 대해서 배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러한 회개를 할 때 내 마음 속에서 기도가 용솟음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풍부한 기도의 교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회개입니다. 인간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자연스럽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멀어지고 삶으로써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라는 초대교회의 교부는 말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얼마나 회개하는 생활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풍부한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 중언부언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할 정도로 깊은 우리의 심령의 대양에 충격을 주는 기도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원어적으로는 “헛된 반복”인데 사실 방점은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헛된”에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주기도문은 오늘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실 때, 이것을 그대로 문자적으로 외우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의 패턴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십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자기를 다 바치는 절체절명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세 번 반복하십니다. 반복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문을 보더라도 반복되는 기도문이 너무 많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헛되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헛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도를 만드신 경륜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이 기도는 하나님께 통보하고 알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세상에 대해서 배우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기도는 아주 신비스러운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슨(Christopher Hitchens)이라는 반신론자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작가인데 굉장히 영향력 있는 작가입니다. 결국 식도암으로 죽었고 그것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조롱했는데 자신의 책에서 묵묵히 답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 하나님은 당신들보다 아이큐가 떨어지는 분일 것이다. 왜? 당신들이 알게 해야만 겨우 아는 분이니까.” 그런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실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를 함으로써 그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빛들의 아버지께로만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 간절히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감격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셨구나! 하나님이 응답하셨구나! 자신이 하나님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보신다는 것, 자신은 앞으로도 하나님의 이 선하신 돌보심을 받으며 살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확신까지 이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혹시 그것을 하나님이 주셔도 자신은 운이 좋아서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하나님에 대해서 감격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배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물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셔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인 줄로 믿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변화됩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기도가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진작가 하나가 있습니다. 이 사진작가에게는 모든 피사체 중에서 높은 산이 가장 강력한 매력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높이 올라가지 않고는 산의 진짜 아름다운 모습을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주 좋은 사진을 남기고자 하는 의욕으로 끊임없이 산을 오릅니다. 한 폭이라도 더 아름다운 광경을 담고자 함입니다. 그의 생각은 사진을 찍기 위해 쓰고 올라가는 모자에 온갖 산의 배지를 달아서 꽉 채우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배지는 사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무수한 산을 오릅니다. 그는 산길이나 산맥 전체, 산의 위치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까짓 것이야 구글 지도를 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한 컷의 그림 같은 풍경을, 그것도 산에 올라간 사람들이 찍을 수 있는 그 풍경을 얻기 위해서 그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전국의 산을 오릅니다. 그렇게 하여 수없는 사진작품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기검진에 가보니 자신의 나이는 50대 중반인데 모든 신체의 지수가 30대 초반이라고 나왔습니다. 그는 건강을 단련하기 위해서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아주 환상적인 아름다운 사진을 얻기 위해서 산을 올랐는데 온 몸에 건강을 얻게 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기도에 담겨진 하나님의 경륜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가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뭔가 새롭게 아시는 것처럼 당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을 신학으로 말하면 Accomodation 입니다. 라틴어로 “아콤모다치오”. 아이들의 수준이 우리와 맞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의 눈높이로 내려와서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패하기 쉬운 본성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있는 경건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지를 격려할 수 있을까를 가지고 우리에게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성경은 때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내려 본 것도 보도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의 각도에서 그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에게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불길과 같은 시험을 이기기도 하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많은 적군을 물리치기도 하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큰 환란을 이기기도 하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죽을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새 생명을 얻기도 하는 일들을 하나님이 수시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실제 들음으로써 사람들이 기도하도록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여름에 음식을 맛있게 해놓았는데 저녁에 조금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밤 시간 내내 내버려 두고 그냥 잠이 들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먹으려고 보니까 벌써 쉰내가 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거 끓여 놓아라.” 다 익은 음식인데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보글보글 끓입니다. 그리고 뚜껑을 열지 않고 렌지를 끕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열어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죄에 오염됩니다. 이미 죄가 있기 때문에 안에서 죄가 자랍니다.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동기가 있고 이유가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은 동기와 목적이란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게 된 데에는 무슨 뚜렷한 계기가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던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된 것은 계기가 뚜렷합니다. 여름 수련회 새벽시간에 은혜를 받았다느니,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깨웠다느니, 양심에 깊은 가책이 들었다느니, 나의 죄에 대해서 뉘우치게 되었다 등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분명한 계기가 있기 때문에 하지 않던 기도가 터지면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부패가 일어나게 됩니다. 음식을 상하게 만들려면 그냥 놔두면 됩니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하지 않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신 것은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쇄신시켜서 죄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의 은혜가 자라나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내가, 그리고 종종 기도하도록 자극을 받아도 기도할 수 없는 내가 이렇게 죄를 회개하고 다시 마음속에서 열렬한 기도의 열정이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의 교통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중언부언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게 가능해집니다. 중언부언은 제가 설명 드린 바에 의하면 의미가 없는 말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하는데 그게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언어적으로 의미가 없는 말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언어는 당연히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리 반복되어도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고 자신의 마음에 의미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제일 나쁜 습관은 마음에 감동이 없이 입술에 익었기 때문에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티끌만큼도 하나님을 거룩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장로님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거룩하신 하나님” 하며 반복하는 것입니다. 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쉽게 말해서 “의미 없는 반복”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반복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핵심은 기도를 드리는 말이 반드시 언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아닌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다 드리기 때문에 나의 생각하는 것도 주님께 받쳐졌고 찬송도 주님께 드려졌고 나의 삶도 하나님께 헌납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시적으로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표현방식은 아닙니다. 모든 기도는 언어를 가지고 있는 기도여야 합니다.
가톨릭에 가보면 공동기도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도 따라하는 곳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주보지에 기도문이 나오는데 그것을 온 성도들이 따라서 읽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 개신교의 정신에서는 잘 맞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 가톨릭에서 온 전통들입니다. 그것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매일 틀에 박힌 이야기들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마음이 그 기도의 내용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실 때도 예배를 마칠 때 그것을 낭독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첫째로 기도가 언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만 한 30분 부르다가 집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아까 말씀드린 기도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쇄신시키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쇄신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명상하는 어떤 내용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출렁거려서 우리의 마음을 쇄신시키는 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도가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언어가 그냥 언어가 아니라 마음이 묻어나는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정말 위험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내버려 두기에는 나에게 너무 소중합니다. 그런데 잘 만나주지도 않는 그 친구를 간신히 만났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너 그렇게 계속해서 술에 빠지고 마약에 손을 대고 심지어 사기까지 저지른다면 마지막에 가는 곳은 감옥이다. 이 젊은 나이에 네가 감옥을 갔다 온다면 네 인생은 끝이다.” 이런 충고를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마음에 길어올려진 언어입니다. 또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전혀 그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변호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할 때, 여러분은 많은 증거들을 수집할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항변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든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더 기분 좋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녀가 서로 깊이 사랑합니다. 사랑을 깊이 느끼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대화를 나눕니다. 마음에 없는 말이 그 순간에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와서 상대방이 그 말을 듣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면 그는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호흡이 가빠지고 죽음의 순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족들에게 마지막 남길 말씀이 없는지 의사가 물어봅니다. 호흡기를 단 채 힘겹게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엄마, 미안해. 정말 사랑해. 아빠, 걱정만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아빠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이런 말을 가족들에게 한 마디 한 마디씩 남기면서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됩니다. 그 언어는 어느 하나도 그의 마음과 완벽하게 일치되지 않은 말을 없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그렇게 하지 않는 모든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기도를 해보면 기도하는 시간이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전부를 기도할 때도 있지만 사실 그 한 시간을 하기 위해서 그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한 시간이 넘게 씨름을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만한 은혜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유익은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너무 많은 교훈이 있지만 오늘은 하나만 이야기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기적을 바라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는 기도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우선 첫째는, 기도할 때 글자를 만드십시오. 절대 침묵하며 기도하지 마십시오. 아,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해도 괜찮은데 이 속에서 언어가 없는 기도는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기도해도 좋으니 글자를 찾고 단어를 찾고 문장을 만들고 문맥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곤고합니다.” 주어와 동사가 다 나옵니다. “제가 오늘 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나의 기도가 다시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문장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정 어려우면 밤에 종이를 펴놓고 천천히 천천히 진심으로 기도할 내용을 써보십시오. 어차피 그것은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고 한 번 읽고 파쇄기에 버릴 것이니까 쓰십시오. 아침에,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펼쳐놓고 천천히 천천히 읽으십시오.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은 언어를 마음속에서 만드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 언어가 만들어져야 하겠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여름에 날씨가 아주 가뭅니다. 산과 들이 모두 메마르기 시작하고 하천에 흐르는 물이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당연히 지표면에 있던 지표수들이 땅 속으로 계속 내려가게 됩니다. 그것이 우물까지 영향을 미쳐서 우물물의 깊이가 3m 씩 차 있던 물이 1m까지 쭉 내려가게 됩니다. 두레박을 던집니다. 전에는 던지자마자 “풍덩!”했는데 이제는 “탕! 탕” 하고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납니다. 간신히 물을 찾았습니다. 길어 올립니다. 물이 필요하니까 많이 길어야 합니다. 두레박을 쓰러뜨려서 물속으로 들어가게 만든 후에 길어올립니다. 그것을 다시 떨어뜨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득 물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천천히 길어 올립니다. 두레박은 여러분의 언어활동이고 그 물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을 들어 올리는 것은 여러분의 의지입니다. 그것을 들어 올립니다. 그 뜨거운 여름날에 시원한 물이 두레박에 담겨 올라옵니다. 그것을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합니다.
둘째로, 기도하지 못한다고만 하지 말고 해보라는 것입니다. 안 되면 오늘 낮에 쉬는 시간이든 오늘 아침에라도 하나님께 편지를 써보십시오. 그리고 오후 시간에 시간 날 때 내려와서 읽으십시오. 그러면 어느 시간에 자기가 만든 언어가 자기를 감동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가 나오게 만듭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끊임없이 죄는 여러분의 기도를 공격합니다. 여러분의 겉모습은 마귀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름을 가지고 교회를 들락거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이 참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정말 이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고 거룩하게 살고 이 불의한 세상을 바꿔놓겠다는 실제적인 용기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결국 기도생활을 공격해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기도할 시간조차 나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스마트폰을 보는 시간이 3시간 40분입니다. 그 바쁜 일을 하면서 3시간 40분을 보려고 하니 무슨 시간이 나겠습니까? 밥을 먹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먹습니다. 심지어 친구들을 만나러 가도 그 모임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싶을 정도로 각자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혼자서 잘 놉니다. 그러니 기도할 시간이 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미디어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기도생활 가운데 하나는 금식기도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살을 빼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식단관리를 해야 하는데 이게 도저히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합숙 단식도 합니다. 거기에 간 사람이 하는 얘기가, “하아~ 단식원은 공기도 맛있구나!”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기가 쉽게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극복할 수 없을 때 깊이 결단하고 금식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하고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금식을 합니다. 금식을 하면 세 끼를 먹지 않으니까 상당한 시간이 절약됩니다. 금식을 하면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 죄지을 기력도 없습니다. 힘이 있어야 뭘 할 텐데 한 이틀 굶은 사람에게 영화관을 가자고 하면 가겠습니까? 어떻게 보겠습니까? 한 이틀을 굶으면 게임도 못하고 드라마도 재미가 없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찬양)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일주일씩 하면 너무 좋지만 그렇게 안 된다면 하루, “오늘은 내 영혼을 회복시키는 날이다.”이라고 하면 해보십시오. 아니면 매일 저녁 금식을 하고 교회에 들러서 한 시간씩 금식을 하겠다고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언어를 길어내기를 마치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길어내야 합니다. 모든 기도의 사람들은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에 지금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만 약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약합니다. 그런 용기를 얻고 하나님 앞에 언어로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며 기도해서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