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낙심케 말라
不要使儿女丧气
녹취자 : 오희열
가족관계의 회복에 대한 시리즈 여덟 번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고민 중에 하나가 있다면 부모님과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도 참 어렵겠지만 자녀와의 관계는 정말 어렵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혹은 아이들이 청년기에 접어들어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때, 부모와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부모와 대화의 상대를 하지 않으려는 경우에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이들이 아예 빗나가버리거나 할 경우에는 부모로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일단 나무를 심어 놓은 후에는 그 나무를 어떻게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 자녀들을 낳아서 어린 아이일 때, 그때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갖고 충분한 사랑을 받고 부모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관계를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병이 들고 나면 수평추의 기울기가 기울어져 버립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평소에 우리 몸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질병 상태에 들어가지 않도록 건강과 위생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오늘 즐거운 마음으로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我们来到了关于家庭关系恢复系列的第八课。各位,当今各位最苦恼的问题中,除了与父母的关系,与丈夫的关系,这些虽然都真难,但与子女的关系真的很难。特别孩子在青春期时,或者孩子在青春期不愿意接受信仰时,不是不能和父母对话,特别是自一开始就完全不想与父母对话的时候,极其艰难。不见如此。当孩子离家出走时,父母便经历到那种无限的无力感。所以,重要的是,一旦种下了树,以后如何改变那树是不容易的。最初,子女出生后,在子女尚幼小时,便使他建立与父母正确的关系,从父母那里领受充分的爱,从父母那里学习,建立正确的关系是极其重要的。可以说与我们的身体相似。我们的身体患病后,身体便失去了平衡。要恢复它是不容易的。最重要的是,在平时留意保持我们身体的平衡,不至于进入疾病的状态。今天,我们尽量以欢喜的心情,来思考与子女的关系。
오늘의 주제는 “자녀를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 사랑을 가지고 부모의 관계, 자녀의 관계, 모든 것에 다 적용됩니다. 심지어 자연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도 선의를 갖는데, 그 선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창조하신 세계를 잘 지키려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今天的主题是“不要使儿女丧气”。爱当然是与上帝的关系,以那爱也可以适用于与父母的关系,子女的关系,以及所有的关系中。甚至,对一切万物也都带有善意,那善意是因为爱上帝的缘故,而要妥善管理被造界,当从我们自己的心里中油然而生。
그림을 보시면, 교회 안에 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혼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교회의 한 사람이 불신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하기에 이르렀다면, 그가 신앙을 갖게 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정리를 합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의 일원들이 모여서 교회의 한 부분이 됩니다. 교회와 가정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공로와 사랑을 믿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습니다.
看这张画,在教会里有有一一家人。从基督徒的立场来看,结婚是相信认识上帝之人所行之事。 虽然不希望发生此种事,假若一个教会里的人爱上了不信者而要结婚的话,需要决心直等到他信了之后再结婚。总之,基督徒的家庭是作为教会的一员聚在一起,成为教会的一部分。教会和家庭都是由相信我们主耶稣基督为救赎自己的百姓在十字架上的牺牲之功劳和大爱,并因此爱上帝之人形成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조각조각 돌아다니던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삶의 시작과 끝이 보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一个人相信耶稣基督便得救。那时才将所有零碎的思绪整理出来,才看见关于我为何出生,我为何活着的人生的始末,才明白从始至终主管我人生的上帝的计划,是与上帝创造这世界的计划相关联的。
적합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일개 사단의 병력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적군과 싸웁니다. 거기에 1만 5천 명의 군인들의 지휘관은 별이 두 개입니다. 그 지휘관 밑으로 별 하나도 있고 대령, 중령들이 있을 것이고, 그 밑에는 소대장도 있고, 2주 전에 입대한 병사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같이 움직입니다. 군인은 이 국토를 안전하게 지키려고 쳐들어오고 있는 적군을 어떻게 하든 공격해서 저들이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표를 고정했습니다. 그럼 그 부대가 가진 모든 전력들을 동원해서 합리적으로 사용하면서 싸워 나갑니다. 그 안에는 직접 1만 5천 명의 군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도 있겠지만 2주 전에 입대한 이등병도 있고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우는 사람도 있고 군인들이 나가서 전쟁을 잘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탱크나 트럭에 기름 치고 볼트를 조이며 정비하는 사람도 있고 밥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일들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 부대가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 전투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举一个可能有点不太恰当的例子。 在进行战争的时候,投入了一个师的兵力。竭尽全力与敌军进行战斗。在那里有两位指挥一万五千名的士兵的军官。在那军官手下还另外有一位大校和一位中校,在中校下面还有排长,还有两周前入伍的士兵。这些人都是一同行进。军人为了守卫国土的安全,不论侵入的敌军如何进攻,都要再次将他们击退。他们只有一个目的,整个部队齐心合力,动用一切力量与敌军战斗。其中虽有直接指挥一万五千名军人的军官,也有两周前才入伍的二等兵,有拿着枪出战的人,也有为了军人更好地出战而修路的人,还有给坦克或卡车加油的,也有拧螺丝的,还有做饭的人。那众多的人虽然各自从事不同的事务,但那部队在那里存在的理由就是为了进行战斗。
이처럼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나’라는 인간을 만드신 목적, 나에게 가족을 주신 목적,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들과 모두 단절되어 있습니다. 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거기에 무슨 목적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연관 관계를 다 제해버리고 나면 기껏해야 자기 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이 꼭 남을 짓밟고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됩니다. 기껏해야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 정도로 말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은 창조되고 가족이라는 제도를 하나님께서 우리게 주셨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인생의 궁금증이라는 것은 풀리지 않습니다.
如此,上帝创造世界的目的也与创造“我”的目的,赐我家庭的目的,这一切都存在着相互的关联。然而,人们与这一切的关系都断绝了。为什么呢? 因为没有知识的缘故,而一无所知。 然而,还思想自己的人生目标,能找到什么目标呢?扣除像这样一切的关系,充其量是自己幸福地活着而已。幸福不是一定要践踏别人,使其不幸也行。充其量是使我们家庭而已。人是被创远远有一个比那更伟大的目的,我们要瞩目上帝赐给我们家庭的制度。若不如此,我们便解决不了我们人生的疑问。
남녀가 구원을 받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가정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떻게 가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류 사회가 원래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계획을 따라서 움직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런 큰 구도 속에서 가정을 봐야하고 자녀들과의 관계를 봐야 합니다.
男女得救后,结婚组建家庭。并且,那家庭是在教会里面。如此,一个人通过十字架明白了救恩的目的为何,明白了如何与他人一起生活。所以,上帝使创造的一切人类社会,按着上帝原本创造的时所计划的而行。这便上帝的护理。要在在如此伟大的构图里面看待家庭,看待与子女的关系。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은 그 가정에서 태어난 인간을 참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어떤 여성분들은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은 남성의 우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먼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지으셨다는 것이고,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남자의 일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남자에게 종속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몸’, ‘하나의 몸’ 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上帝赐予家庭的经纶是为了让从家庭中出生的人成为真正的人。在创世纪中,记载着上帝用男子的肋骨创造了女人。(可能某些女性会因此而伤自尊,是完全没有必要。)拿肋骨造女人,并不是为了显示男人的优越性,乃是为了显示两个事实。第一,圣经告诉我们,上帝首先创造了男人,这是无可否认的事实。其次,因为用男人的一部分造了女人,并非要显示要从属于男人,乃是显示“一体”, “一个身体”是最重要的事实。
웃기는 이야기지만 갈비는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비뼈를 떼어내실 때 살점은 칼로 싹 도려내고 완전한 뼈다귀만 취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어떻게 말합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고 말합니다. 인류 최초로 돌아가 보면 아담이 하와를 향해서 말했던 때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저 여자가 아픈 것은 내가 아픈 것이고, 저 여자가 고통 받는 것도 내가 고통 받는 것이다. 저 여자가 너무 행복한 것도 내가 행복한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면 되는 일입니다. 경험이 없으십니까?
虽是个笑话,肋骨是由骨头和肉构成的。 上帝在取肋骨时,并未用刀刮去所有的肉片,只剩下一块骨头。所以,亚当怎么说的呢?“这是我骨中的骨,肉中的肉。” 若回顾人类最初,亚当向夏娃告白时,回顾他的心情,“这女子的疼,就是我的疼,此女子的痛苦,也是我的痛苦。此女子的幸福,就是我的幸福。此乃只要爱就可以的事。没有这样的经历吗?”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굉장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냈습니다. 사실 저는 스물일곱에 만났으니까 그 사람의 열두 살 시절과 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가만히 있는데 그 남자의 열두 살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와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 그림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는 지금 서른 살입니다. 제가 몰랐던 18년이라는 공백이 있는데 그 18년을 뛰어넘어서 열두 살 때 그 남자가 느꼈을 쓰라림과 고통이 오늘 나에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남자에게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아닌데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영원의 특성’입니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我听说的传闻)有一个人遇见了自己心爱的人。然而,他度过了一个极其处境艰难的童年。实际上,我是在他二十七时遇见他的,他十二岁时节与我毫不相关。然而,回到家里,就那么待着的时候,那人的十二岁时节浮现在我心里。与他说了很多话,就像画面一样浮现在我心里。他如今是三十岁。有我不知道的18年的空白期,好像越过18年的时光,我感受到了那男子曾经感受过的痛苦和困苦。并且,我也不是造成他不幸之原因的人,不自然地流出了泪水。 这是爱所具有的“永远的特性”。 永远超越时间。爱具有那样的能力。
저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지방에서 사업을 하셔서 저는 할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어제도 차를 타고 오는데 할머니가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할머니가 보고 싶도록 만든 힘이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천국에 가면 어거스틴과 할머니 이외에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 계신 아버님도 물론 보고 싶지만 가슴이 저릴 정도로 보고 싶은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할머니께서는 3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죽는 순간까지 할머니가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를 매일매일 생각하는데 딱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랑’. 사랑입니다.
我至今还是那么想。我父母因为在地方经商,我和奶奶一起生活。昨天还坐车来了呢,我这的很想念奶奶。我曾想,到底产生想念奶奶的能力是什么? 若去了天国我除了奥古斯丁和奶奶没有什么想见的人。虽然也想念在那里的父亲,但心脏麻痹程度地想念的人只有两人。也并没那么想见使徒保罗。奶奶30年前去世的,我甚至直到死的那一刻也会想念奶奶。每天思想使我这样的力量究竟是什么,毅然浮现的只有一个单词,就是“爱”
아무튼 남자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잘 들으십시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똑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연애의 감정이 가져온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만 있는 배타적인 고백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고백입니다. 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납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정확하게 자신의 살과 뼈처럼 사랑했을 것이고 또 그 아이도 엄마 아빠를 뼈와 살처럼 사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사랑하게 하십니다. 혹시 제외할지 모르니까, “원수도 사랑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가 그렇게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사랑 속에서 참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것입니다. 바르게 알게 하시고 참되게 살게 하시려고 가정을 만드신 것입니다.
总之,从男人的身体取了肋骨造了女人这件事,是显示男人和女人是一体。请留意听,惊人的是耶稣以不同的话方式表达了同样的事情。“爱邻舍如同自己(的身体)”是多么奇妙啊?当亚当说“你是我骨中的骨,肉中的肉。”时,那不是恋爱的感情所带来的仅在亚当和夏娃的关系中排他性的告白,而是向全人类发出的告白。从他们中间出生了子女。如果最没有进入世界,将会正确地像自己的肉和骨一样爱,而且他们的子女也像骨和肉一样爱爸爸妈妈。耶稣如此说。上帝所创造这世界就是那样的世界。耶稣来了就是为了赐给不能那样相爱的人力量,使他们能够那样相爱。使人能够相爱。不晓得是不是意外地说:“也要爱你们的仇敌”。耶稣愿全人类那样彼此相爱。要使人在那样的爱里成为真人,上帝建立了家庭。要使人正确地认识,真实地活而建立了家庭 。
그러면 여기에서 부딪치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가 바르지도 않고 참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양보해서 부모도 참된 사람이 되고 싶고 바르게 살고 싶은데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기 힘든 자식을 기르면서 참사람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르게 알아가고 참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모가 바르게 알게 하려고 가정 안에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알게 하시려고 가정 안에 자녀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부모가 하나님도 모르고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세계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고, 아이도 별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에 아이는 황무지에서 자라나는 어린 순 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살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그런 선한 결심도 가지지 못한 아이일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우리 마음이 저려오지 않습니까?
那么,这里存在着一个冲突的问题。父母也不正确,也不真实。并且,若稍微谦让一点,父母也想成为真正的人,但还差得很远。一面抚养着那么难爱的儿女,一面经历向着真人而活的过程。所以,上帝为了让父母正确地明白,将子女赐给家庭。为了让人明白上帝和人以及世界的关系,将儿女赐给家庭。父母及不认识上帝,对人也不了解,对世界也不怎么关心,也不怎么爱儿女。那样,儿女就像在荒野成长的嫩芽一样。多么虚无的人生啊?并且,那孩子若无法具有美好的决心那该如何是好呢?仅仅想一想我们的心不会刺痛吗?
하나님께서 가정에 자녀들을 주신 것은, 그 자녀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려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이것을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모들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上帝赐给家庭儿女,是因为希望儿女能向着上帝而活。上帝创造人是要使所有人通过基督,在圣灵里,向着上帝而活。父母蒙召是要在家庭中教导这些。所以,我们要多为父母的信仰祷告。
로마의 저명한 사상가 마르코스 톨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가, 웅변가, 철학자였고 수사학의 대가입니다. 이 사람이 쓴 라틴어 문체는 명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틴어를 외우는 사람은 이 사람의 『우정론』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다른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문입니다. 그는 명연설가였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모두 연설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연설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잘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을 지극히 이롭게 하는 원천도 지극히 해롭게 하는 원천도 사람임이 분명하다.” 자연적인 적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갑자기 산사태가 난다거나 할 수는 있겠지만 산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덮치고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그 일을 합니다.
罗马有一位著名的思想家叫西塞罗(Marcus Tullius Cicero)。是政治家,演讲家,哲学家,及数学大师。此人所写的拉丁语文体,成了美文。背诵拉丁语的人一般是先开始阅读他的《友情论》。是其他作品无可媲美的美文。他是著名的演讲家。善于写作的人不一定都是善于演讲。然而,善于演讲的人,大部分是善于写作。此人曾经说过这样的话,“人分明是及其美丽的源泉,同时也是极其有害的源泉。” 自然的敌人对我们做不了什么。当然,会突然发生山崩,山是不会等着人过去之后再突然来攻击。然而,人是有意识地行事。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 덕의 특별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자신의 유익”이라고 했는데, ‘자신의 유익’ 은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좋은 관계 속에서 살면 제일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저 사람이 불쌍해서 가서 도와주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선한 사람으로서의 성품 속에서 기쁨이 솟아나면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 없는 사물과 동물을 부리고 사용하여 인간의 삶을 이용하는 것은 기술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기술, 현대의 기술은 사물을 사용해서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덕은 자기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물을 사용하는 기술의 유익은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를 만들어서 교육시키는 것에 참 좋다고 하지만 사람이 만든 콘텐츠가 그 안에 들어가야 그러한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이것을 ‘덕’이라고 합니다. ‘덕’ 그 자체는 관계적인 용어이고 다른 사람과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이것이 ‘덕’입니다.
“所以,我认为我取得人心,并为了自己的益处而留住他们,是德的特别功能。” 请不要误会,这里所说“为了自己的益处而取的人心。” 的“自己的益处”并不是指物质和私心的益处。在爱他人的关系中而活着的时候,最先得恩惠的人是谁呢? 就是他自己。 那人很可怜,去帮助他的话,比得到他人帮助的人先得恩典的就是帮助人的人。在那人心里,喜乐从其良善的品格里涌流,得以享有满足。从这种意义上来说,可以称之为“德”。“因此,操纵没有生命的事物和动物,使用人生是需要技术的。” 简单地说,技术,现代技术利是用事物使人受益。然而,德是使用自己让他人获益。使用事物的益处无法直接对人的精神带来好的影响。虽然,制造了电脑去教育真的很好,但只有人所制作的内容安装在里面才能发挥那样的功能。然而,人使自己成为他人的益处,这称为“德”。“德”其自身是关系用语,是与他人缔结正确关系的灵魂的能力。这就是“德”。
자녀들과 덕이 있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기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덕 있는 관계의 토대는 사랑입니다. 당연히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서 솟아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에서 자라서 두 개의 가지로 뻗습니다. 하나는 자녀를 낙심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플러스적인 요인이고 이것은 마이너스적인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뭔가를 하지 마라.”, 그리고 “뭔가를 해라.” 이 두 가지가 자녀교육에 있어서 필요한 것인데 사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먼저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자녀를 낙심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아프게 해서 낙심하게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为了与子女建立有德的关系,要爱儿女是很分明的。任何时候,它都是基础。圣经就是如此说的。有德的关系是基于爱。当然,那爱是因着基督的十字架和上帝的缘故。并非出自于我自身的私心。这爱可以延伸为两点。第一,是要使儿女丧气,第二,就是要以主的教导和训诫来养育。这可以称之为正面的要因,也可称之为负面的要因。“不要~” 和 “要~”在子女教育过程中是都需要的,实际上圣经中首先谈到这些。其理由是,比起养育子女更容易在日常中发生的事情就是使儿女丧气。就是使儿女受伤后丧气。
기차가 있습니다. 기차는 생활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예를 들자면, 직장생활을 하고 친구들과 관계를 맺고 자기 꿈을 펼치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등등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회인으로서 힘차게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끄는 것은 맨 앞에 있는 기관차입니다. 기관차가 이끄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열정’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낙심하게 하면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정 자체가, 그 엔진이 약해지거나 꺼져버리는 것입니다. 자녀를 낙심하는 요인은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화가 나면 자녀들의 삶의 엔진이 꺼져버리는 것입니다. 엔진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철로의 방향이 다른 방향이라서 기차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价值是存在的,它就像生活一样。与许多人的有关系的。例如,在单位与朋友缔结的关系,一边展开着自己的梦想,一边过着自己的兴趣等等。所以, 作为社会性的存在,人在一起共同生活。 牵引这一切的是在最前面的机车。机车是什么呢? 就是“热情”。然而, 父母若是儿女丧气的话,作为人要活着的那人情本身,那发动机便会减弱或着关机。使儿女丧气的主要原因是使他们脑会。儿女若生气的话,儿女生活的发动机便会关掉。即便发动机在运作,由于轨道的方向不同,火车便会驶向了别的方向。
대표적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의 생애를 읽어보면,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여섯 살 때는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면서 교회에서 생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첫사랑에 빠집니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녀가 일하는 공장의 주인은 유대인이었습니다. 히틀러가 공장 주인이 무참하게 그 여자를 유린했다는 이야기를 다 듣게 된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적으로 생긴 것이 그때였고 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입니다. 삶의 열정이 꺼져버린 것이 아니라 열정은 남아 있는데, 그 열정이 중대한 방향의 전환을 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살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상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줍니다.
代表性的人物便是希特勒。 若分析他的生平,虽然不晓得他儿时过了多少的信仰生活,但是在五六岁时,曾参加唱诗班在教会生活的人。当他十六岁那年,他坠入了初恋。他所爱的女子是工厂的工人。那女子的工厂老板是位犹太人。他听到了那老板惨无人道地蹂躏了那女子的传闻。他就是自那时起对犹太的突然产生了憎恶之心,后来他杀害了600万名的犹太人。并不是抹杀了生活的热情,虽然人情依旧存在,但热情的方向发生了重大的转变。以至于导致超乎寻常的屠杀。显示出人的伤痕是多么可怕。
따라서 자녀를 노엽게 하면 삶을 움직이는 엔진을 꺼지게 하는 것입니다. ‘에듀모씬’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동사가 변화한 단어입니다. ‘에’ 는 ‘없다’ 라는 뜻이고 ‘듀모씬’ 은 ‘열정을 갖다’ 입니다. 그래서 ‘열정을 갖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 중요한 것은 삶에 열정을 갖도록 아이를 격려해주고, 그 열정이 올바른 곳을 향해 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입니다.
所以,使儿女恼火会使推动人生的发动机停机。有这样一个词,叫“爱丢莫心”。是动词变化型的词。“爱”是“没有”的意思,“丢莫心”是“具有热情的意思”。所以这词就是“具有的热情消失了”的意思。儿女便成了那样。在教育子女的时候,重要的是要激励他们对生活抱有热情。那热情使人向着正确的地方前进。那是父母为了孩子要持有的重要的态度。
흔히 성경과 우리 환경 속에서 가정의 폭력과 폭언을 봅니다. 가정 폭력과 폭언은 충분한 사랑이 없어서 이뤄집니다. 사랑이 있어도 폭력과 폭언이 이루어지면 안 됩니다. 충분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폭력과 폭언이 행해지면 아이가 노여워지고, 아이가 노여워지면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거나 삶의 열정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전환됩니다.
常在圣经和我们的环境中见到家庭的暴力和语言暴力生活的。家庭暴力和暴言是由于没有足够的爱而产生的。虽然,有爱也不能有暴力和暴言。 在没有足够的爱的状态下暴力或暴言的话,孩子会变得恼怒,孩子若变得恼怒,便会失去生活的热情,或者生活热情的方向发生转变。
그 다음은 아이를 거의 방치하는 것입니다.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부모가 함께 살아가도 거의 무관심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녀 교육에 대해서 아빠나 엄마가 거의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집안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녀를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은 아이들에게 귀찮지 않으니까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게 뭐지? 왜 부모가 나에게 이렇게 하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另外,就是几乎放任,对孩子毫不关心。即便是与父母一起生活,也是对孩子毫不关心。从某一方面来看,父母已经几乎放弃了子女教育。像这样的家庭格外的多。就那样任凭孩子。虽然眼前不烦孩子看似挺好,但以后随着时间的流逝,孩子会想“这是啥呀?为什么父母对我这样?”
제가 아는 어떤 한 사람은, 어렸을 때 공부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부모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자식을 못 이긴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게 전개되니까 힘겹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돈을 벌고 직업을 갖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도 자신이 그런 것에 현저하게 교육을 못 받았을 경우에는 말도 잘 못 알아듣게 됩니다.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철이 들고 나면 부모를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 부모가 왜 그랬을까?’ 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어린 나이였는데 내가 뭘 알았을까? 나를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켰어야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그 어린 나이에 다 설득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방치와 무관심 속에 아이를 내버려 두는 경우에는 당장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 자체가 엄청난 상처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我所认识的一个人,小的时候曾经非常讨厌学习。未能好好地学习。虽然父母也做了许多的努力,却未能胜过子女。人生如此地展开,便过着艰辛的生活。也影响到赚钱和就业问题,在与他人的关系上,自己很明显未受过教育时,连也听不懂。完全可能会那样。 那时董事之后,一定会抱怨父母的。会想 “我父母为什么那样呢?” “我那么小懂什么呢? 就算打我也要让我接受教育我呀!” 孩子在其年幼之际,不都是听话的。加上,放任或毫不关心孩子的话,当下可能给予孩子一些自由,但其本身会带来极大的伤害。
그 다음은 과도한 기대입니다. 자녀를 향해서 큰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준비하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공부를 잘했습니다. 둘 다 일류대학을 다닙니다. 그 중에 한 아들이 서울대를 나왔는데 이 분이 너무 속상해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했더니, 그렇게 최고의 학부를 졸업했는데 세상에 좋은 직장도 있고 더 공부할 수도 있는 무수한 길이 있는데 다 때려치우고 만화를 그린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분도 목사님이셨습니다.
此外,还有就是过度的期待。就是对子女保有极大的期待。我在准备这课程的过程中想起来了。我所认识的一个人有两个孩子,两个学习都很好。两个都上了一流大学。其中一个毕业于首尔大学,他很伤心。因为,他毕业于最好的大学,世上既有好的工作,也有无数更好的学习机会,但他全都抛弃选择了画漫画。当听到那个消息他说非常的失望。虽然,不是我直接听到的内容,他说非常失望。他也是位牧师。
그 당시로 보면 나도 우리 아들이 그랬다면 실망을 안 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하면, 20년 전이었으니까 인생을 좀 더 살아 보면서 지난번 설교할 때 이야기했듯이 할머니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냥 놔둬라. 하고 싶다고 하잖니.” 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금 만약 내 아들이 최고의 학부를 나오고 만화를 그리겠다고 한다면 저는 기쁘게 허락을 할 것 같습니다.
若果当时我儿子也那样的话,我也不敢保证不会失望。但如今再思想的话,因为是20年前嘛,人生越活便,像上次我讲道时所说的一样,思想着奶奶的话,“就那么任凭他吧”。如今,如果我儿子毕业于最好的大学,说要画漫画的话,我可能会很喜乐地同意。
2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웹툰이라는 문화가 어마어마하게 펼쳐졌습니다. 웹툰 문화 속에서는 반기독교적이고 세속적인 조류의 영향을 받은 가치관이 깔려있습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반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싸우면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서 성공하면 어떨까? 하는 꿈을 품고, 만약 그 길로 가서 승자가 된다면 웹툰계 자체를 중요하게 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웹툰 시장이 상상할 수 없이 어마어마합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성공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대접과 수익을 올립니다. 그랬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되지도 않는 엄청난 기대를 가지면 안 됩니다. 자녀가 스스로 기뻐하는 길을 가도록,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동기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过了20年的时间,网络漫画文化超乎想象地蔓延。在网络漫画中,隐藏着反基督教的,受世俗潮流影响的价值观。大部分是如此。那么,在漫画中与那种反基督教文化的价值观争战的同时,创作出优秀的作品而成功的话该如何呢? 带着这样的梦想,如果走上那条路成了胜利者的话,在漫画界岂不起着很重要的进化作用吗? 现在网络漫画市场难以想象的庞大。那些人虽不都那样,但按照自己的方式成功地赚钱的人,受到了无可无视的待遇和收入。并非因为如此,而认为可以的。我不认为我仅仅那样悲观地看待此问题、。我们要使孩子走自己喜乐的路,但是要使他们不论在什么情况下,也都能以爱和依靠上帝的动机来生活。
또 하나는 부모의 그릇된 모본입니다. 부모가 잘못된 모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침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부모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자녀는 속으로 ‘자기는…….’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还一有点,父母的错误的模范。父母表现出错误的模范。那样的话,是不可能很好地教育子女的。父母若说要如何如何的话,子女心里会想“自己都...” 这样的话,最终破坏了父母和子女间的关系。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를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미 사회인으로서 자기의 주체성을 가지고 충분히 살아갈 나이가 된 다음에는 양육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일평생 그 자식을 사랑하며 살아가야겠지만 양육하라는 이야기는 아직 그것들이 확실하게 성립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因此,父母要以爱来养育孩子。已经作为成人的具有自己主体意识完全可以独自生活之后,养育又如何可能呢?然而,一生都要爱子女而活,但关乎养育,是在他们还尚未明确成熟的年少的时期。
이런 상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될까?’ ‘어떻게 살아갈까?’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까? 이것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통로가 사랑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계를 보고 이웃을 보고 자연만물을 보지만, 그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관심이 없고, 물론 보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세계를 보면 여행이나 하고 싶고 사람을 만나면 그저 ‘너는 너, 나는 나’라고 생각하고, 자연을 보면 한우고기나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면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주신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试想一下,“要成为什么样的人呢?” “该如何活着呢?” ,还有要与上帝缔结怎样的关系而活呢? 那么,教导这些最卓越的途径便是爱。从前,虽然听了对上帝故事,观看世界,邻舍,和自然万物,但却不知道那有什么意义。那么,该如何是好呢? 对上帝毫无关心,当然也无法看见。看见这个世界想要旅行,遇见人就想“你是你,我是我”, 看见自然只是想要吃韩牛肉而已。 然而,通过父母明白了上帝的话语的话,便会开启看见一切的眼睛。“啊,原来如此!”瞬间由问号变为感叹号。就是为要我们那样,上帝才赐给我们子女。父母最重要的资格是要是敬畏上帝的人。
분재가 있습니다. 가지 사이를 다 철사로 감아놓았습니다. 세상에 어떤 나무가 이렇게 자라겠습니까? 그렇다고 나무를 방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마당의 나무도 정기적으로 가지치기해주는 것을 봅니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전문가가 와서 합니다. 그래서 저렇게 예쁜 형태로 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재처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휘게 하고 싶어서 철사로 감아놓고 줄로 잡아당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을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게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자녀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자유로운 주체로 살게 해야 합니다. 그 아이가 인생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최고의 보험은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와도 그 시련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有一个盆栽。枝子间都用铁丝缠着。这世界上的哪有这样长的树呢? 这不是说任凭树成长的意思。我们院子里的树也定期地剪枝。不是随意乱弄,而是请专业人士来修剪。所以才长出形态那么美丽的树。然而,并不是像这盆栽一样,乱用铁丝缠拉着。要给予子女自由,他们若有想做的事就让他们去做。我们不晓得那孩子在他的人生中会遇到什么事情。然而,最好的保险便是让他们拥有信仰,成为爱上帝的人。那么,无论何事临到,也能在那试炼中发现意义活着。使其找到人生的意义。
오늘의 배운 내용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정 안에서 참사람으로 자라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습니다. 바르게 알게 하고 참되게 살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자녀 양육의 가장 기본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무언가를 자녀에게 더 주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사랑과 교훈으로 자녀를 양육하십시오.
让我们整理一下今天所学的内容。上帝为了让我们在家庭中成长为真正的人而赐给了我们家庭。是要我们正确地认识,真正地活着。要与子女最基本的就是“爱”。在爱里不要使儿女丧气,不是要给儿女更多的什么,而是告诉他们什么事是不该做的。所以,请不要使儿女失去生活的热情。最后,请以爱和主的教训养育子女!
질문 1) 사회인으로서 자기 주체성을 가진 청년입니다. 어렸을 때는 스스로 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깨끗이 치워주고 깨끗이 치워주다 보니까 이렇게 청년이 되어서도 치우는 것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다방면으로 만족을 하는데 치우는 것에 대해서 본인은 삶에 있어서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지저분해도 상관이 없다?) 네, 지저분해도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알아서 다 찾아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연령이 되다 보니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때로는 참다 참다 제가 치워줍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问题1)作为社会的一员是具有自己主体意识的青年。在儿时独自作什么似乎很难,都给他整理的干干净净,结果到了青年自己也整理不好。其他方面都挺满意,但在整理方面,却说自己在生活上的完全没有障碍。(邋遢也无关?)他说,是的,邋遢也无妨。自己看着都能找到。然而,到了结婚年龄,这孩子该怎么办哪....有时忍不住就帮他整理。我们苦恼该如何是好。
답변 1) 이것은 제가 진짜 많이 고민하던 문제입니다. 저는 지저분한 것을 못 봅니다. 교회를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유리창도 매달 닦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 번 닦는데 200만 원입니다. 못 합니다. 그런데 음식점에 가서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유리창이 투명한지를 봅니다. 일단 음식점이 깨끗하면 맛이 없어도 용서를 해줍니다. 다음에 다시 오지는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데 정돈이 안 되어 있는 식당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분식집에서 비빔밥 하나를 만들어 줘도 주인의 성품이 정갈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저분한 것을 못 보는 주인의 식당은 깨끗합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방이 공개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回答1) 这也是我很苦恼的问题。我也容忍不了邋遢。看教会便可以知道。窗户也想每月都擦一遍。然而,才一次需要200万韩币(约1万多人民币)。不行啊。 可是,去食堂的时候,首先看窗户玻璃是否干净。首先饭店干净,即便不好吃也可以接受。顶多下次不会再来而已。然而,连基本的卫生都不行的饭店,连去都不想去。即便是在路边小摊卖一碗拌饭,也有干净利索的老板。容忍不了邋遢的主人的饭店也很干净。不必担心,厨房不公开也没关系。
그런데 남의 이야기를 하면 뭐하겠습니까? 제가 우리 아들과 제일 힘들었던 것이 그것입니다. 정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나와 똑같았던 분이 손길원 목사님입니다. 가정 사역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아내가 너무 정리를 못하니까 이혼지경까지 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당신의 옷을 개키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리를 할 줄 모르느냐?”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해주지 마십시오. 너무 괴로우실 것 같은데 아들이 출근하면 문을 잠가버리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거기서 살라고 하십시오. 잔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그 잔소리를 계속 하면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어렸을 때 저에게 매를 맞았던 것이 있는데 아마 합쳐보면 열 번 정도 때렸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 열 번 중에서 공부를 못해서 맞은 것은 세 번밖에 안 되고 정리를 안 해서 일곱 번을 맞은 것입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이 아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혹시 아드님이 결혼을 했습니까? 아직 안 했습니까? 결혼했는데 같은 성격의 자매를 만나면 다행입니다. 집에는 정신이 없어도 그들은 아무 불편이 없이 삽니다. 그런데 자매가 정말 깔끔을 떠는 자매라면 그때는 힘듭니다. 그때는 자기가 필요를 느낄 것입니다.
然而,若以别人的事为例,该说些什么呢?我和我儿子最难的是,不会整理。与我一样严重不得了的人是孙基元牧师,他是一位重视家庭的人。他说自己妻子实在不会整理,甚至快因此离婚。他说:“耶稣复活之后,最先做的事便是整理他自己的衣服。然而,不知该怎么整理吗?” 我想说,不用整理。似乎太孤单,儿子上班的话,请锁上门。然后回到家,让他在那里生活吧。请唠叨,若总唠叨会破坏关系的。我儿子在小的时候,曾被我揍过,我想加一起总共大概打了十次。那十次中,因着不好好学习也就不到三次,因为不整理大约七次。后来明白过来,这儿子不行啊。所以,某一天突然有这样的想法。“那有什么大不了的?” 或许 儿子结婚了吗? 还未结婚吗?结婚了,若是与一样性格的姐妹结婚的话是很庆幸的。即便屋里乱糟糟,他们也没有什么不舒服的。然而,若果姐妹是很干净的人,就辛苦了。那时,自己会感受到那种整理的必要。
정리 정돈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습니다. 보내시면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거기를 다녀온 사모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떠나셨는데 남편과 맨날 부딪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 사모는 그래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놀랍게 변화했습니다.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차피 다시 덮을 이불인데 그냥 놔두고 가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내 양말이 책상에 있든 어디에 있든, 입은 옷을 다시 서랍 속에 넣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가 입을 텐데…….’ 그냥 놔두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관계를 깨뜨릴 정도까지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有专门教如何整理收拾的培训班。送他去培训班就好。我们教会也有一位去在那里学过的师母。现在虽然离开了,曾经整天和丈夫冲突。受了很大的精神压力。但是那师母因为有想顺从上帝的心,于是去了培训班。因此,发生了惊人的变化。不再放在眼里了。“反正还要在盖的被子,就那么放着就行呗,有什么问题? 我的袜子无论是在桌子上还是哪里,穿衣服再放进抽屉有什么关系呢? 反正也是我要穿的....”就那么放吧。我就那么想的。就是说那并不那么重要。我认为没有必要说到关系破裂的程度。
깔끔을 떠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것으로 괴롭히는 것은 견디겠는데 지저분한 것을 보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향이 그것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물어볼 테니 대답해보십시오. 자매님이 돈 계산에 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기쁘게 빌려줬습니다. 큰돈도 아닙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갚는다고 했는데 갚지를 않습니다. 한 번 이야기했는데도 갚지 않습니다. 그때 열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쫙 뻗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믿어야 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도 안 들을 때 열이 뻗칩니까, 안 뻗칩니까? 안 뻗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는 것은 내게 그다지 큰 감정을 안 가져다주는데 자기 인생관과 충돌하는 사람을 만나면 열이 확 솟구칩니다. “이런 인간과는 상종도 말아야지!” 하는 단계까지 갑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아끼는 사람은 낭비하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은 못 지키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고 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정돈을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도 열등한 삶이 아니고 나름대로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교육에서도 성과가 나왔습니다. 정돈을 깔끔하게 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사는 학생들의 창의성이 높다고 나왔습니다. “우리 아들은 저 나이를 먹도록 창의성이 계속 자라고 있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干净利索的人有这样的特征。就是无法容忍。就是别的折磨都能忍受,就是受不了邋遢。那是因为对此敏感的缘故。在那里有一个陷阱。问大家的话请作出回答啊。有一位姐妹对钱很敏感的人。然而,有一朋友要借他的钱,很高兴地就借个她了。也不是什么大钱。可是,那人虽说到时候一定还,但就是不还。和她说了一次,也不还。那时开始上火了。不上火吗?一下子爆炸了。不爆炸吗? 不爆炸。 简单地说,不遵守上帝的话,并不能对我产生什么感情上的刺激,但当遇到与自己的人生观相冲的人时,火气一下子就冲出来了。马上就会到了说“不是说了不要和那种人交往的嘛!”的程度。价值观颠倒了。所以,用钱仔细的人要理解浪费的人,遵守时间的人要理解不遵守时间的人,善于收拾的人要理解不怎么会收拾的人的生活也不是低级的生活。要承认可以按照各自的习惯那样生活。在教育上也是也出现成果。就是不干净利索邋遢的学生的创意性很高。“喔,原来我们的孩子随着年龄的成熟他的创意性也在增长啊!”一边这样想, 要放低自己的心态。
질문 2) 성격이 특별난 사람입니다. (매우 유별한 사람이군요.) 백 명 중에 한 명 있을 만한 사람이면 그런 사람을 계속 포용하기에는 힘이든(에너지가 엄청 많이 듭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그 벽을 넘으려고 하지만 때로는 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물질적인 부분이나 정신적인 부분, 모든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함께 해야 할지 여쭙니다.
问题2) 有性格特别的人。(非常与众不同的人哦)就是百里挑一的那种人,不断包容很辛苦(耗费极大的精力)。爱他,虽然爱他想努力越过那隔阂,但有时常无法逾越。那样的时候,无论是物质方面,还是精神方面,是否要在所有的关系上继续不断地在一起吗?
답변 2) 물질적인 관계는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도와주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보통 사람 열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 더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심지어는 교인들도 그런 교인을 만나면 목회자가 한 30명을 돌볼 수 있는 에너지를 한 사람이 다 뺏어갑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운동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깁스를 합니다. 그러면 그 다리 때문에 온몸이 신경을 쓰면서 목발도 사야하고 휠체어도 사야하고 신경을 쓰듯이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을 돌볼 때에는 균형감각을 잘 가지고 그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매몰되어서 자기 생활이 정상적으로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균형을 갖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도 그 사람이 거부를 당하면 그 사람은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는 굉장히 열심히 나옵니다. 절대 안 떠납니다. 곁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 능력이 모자라니까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은혜를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다행히 우리는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나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돌보고 하다보면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변화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끝까지 다른 사람의 복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도와주랴?”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 무능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在物质的关系中,自己照着自己的力量帮助,若果有那样的人,一般比和十个人相交都更费精力。甚至遇到有的信徒,牧会者要付出照顾三十名信徒的精力都被消耗在这一人身上。像死一样。可是,这样想,我们今天在运动时,腿骨折了。上了石膏绷带。那么,因着那腿的缘故,整个身体留意,还要买拐杖,也要买轮椅,像这样费神一样,在照顾那样人的时候,要保持平衡,不能因为那一个人将所有的都倾注而使自己无法正常生活。保持那样的平衡是第一,第二,那人是没办法的,若这里都拒绝那人的话,他就无处可去了。那种人非常热心来教会。绝不会离开的。在旁边总是不断地折磨人。要忍耐。因为那能力不足,所以每天要在神面前寻求恩典而活。到何时为止?就是那么活着。怎么办? 庆幸的是,我们虽然不是那种程度,但不知道谁会感觉我们是那样的。那人该去哪里呢?虽然也有照顾他至终不改变的人,但大部分都改变了。并且在我们社会也有至终要接受别人的福祉才能活的人。“要帮助到何时呢?” 不能这样问的。自己不具备活下去能力的人,是因为没有能力的缘故。像那样,在我们周边也有那样的人。拥抱那种人而活,反倒不更能彰显出上帝的爱吗? 谢谢大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