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리반
1. 질문과 답
질문 :
아담과 하와는 완전하게 지어진 사람인데 하나님과 같이 명철해 지려는 이기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로 인해 이기심을 갖게 된 건가요, 아니면 이기심의 속성이 불현듯 생기거나 자라나게 된 것인가요?
답 :
단순히 무엇을 아는데 있어서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눈이 밝아지리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같이“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아는 것만 하나님처럼 알고 자기의 존재는 하나님 밑에 겸손이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우위에 있게 되는데 그 때 특성이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이기심이라고 했는데,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최초의 죄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질서를 정해놓으시고, 도덕적 만물들의 질서도 정해놓으십니다. 자연적인 만물들은 영혼이 없는 것 곧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들입니다. 무생물은 식물을 위해 이바지하고 식물은 동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인간 존재에 이바지합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에 속하고 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영혼적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과 천사, 마귀들을 도덕적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언인가 하나님 닮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동물들의 사고는 인간과 다릅니다. 동물들의 행동은 본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아담의 마음에 있었던 죄는 그러한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어서, 또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어한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우주의 가장 뛰어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죄들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뿌리를 교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가장 위고 그 다음에 인간과 천사들이고 피조물들이라고 존재의 질서를 정해주셨는데, 인간은 그것을 싫다고 저지른 죄가 인간의 첫째 죄입니다.
이기심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세운 잘못된 질서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구를 죽여서라도 돈을 소유해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런 질서를 세워놓고 집착하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창조한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범죄한 건인가, 그것이 자유의지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때, 만약에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이러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도록 결함 있는 존재로 창조했더라면, 하나님의 창조에 문제가 있는 것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했다면 인간이 어떻게 악을 행할 수 있었는가, 성경은 그것을 뱀이 유혹하는 장면에서 말씀하고 계신데, 그렇다면 결국 뱀의 책임이지 인간의 책임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이 선택 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했지만 그가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었습니다. 악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창조가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에게 부패성이 없습니다. 부패성이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힘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이런 부패성이 없는데도 어디서 그렇게 강한 힘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이 자유의지 선택 안에 있었고 그것이 욕망이었다고 봅니다. 이 욕망은 우리들의 경우에는 모두 부패한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패성 없는 상태에서의 악을 지향하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경험해 본적이 없지만, 그러나 아담의 경우에 부패성이 없으면서도 자유의지의 선택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했던 강한 욕망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인간이 범죄한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총명하게 볼 수 있는 비전을 주시고, 감정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변적으로 주시고, 의지적으로는 선하게 하나님을 쫒을 수 있는 의지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악한 욕망을 가지면서 흐려지기 시작하고 악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지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보고, 감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복하는 상태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인간이 욕망이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토설하고 은혜를 구했더라면 하나님이 은혜를 즉각적으로 주셔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충만하게 지배하는 상태를 상실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결함인이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풀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는 2500년 철학사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최근에 와서 도전을 받지만, 신정론에 있어서 “옳으신 하나님이 왜 죄를 허락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1600년동안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견뎌온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이 문제를 풀어냅니다.
결함인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선행을 할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작용하므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은혜가 이 사람을 능동적으로 움직이
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작용인이라고 부릅니다. 주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그걸 상실했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상처는 몸의 변형이지 상처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하면 새살이 돋고 상처가 없어집니다. 상처가 어디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캄캄합니다. 어둠을 몰아낸 다음에 빛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추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빛의 제거가 어둠입니다. 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선의 제거가 악입니다. 증거는 선한 행동을 하며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노력할 필요없이 생긴 대로 살면 죄를 짓게 됩니다. 싫증을 안 느끼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해야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싫증을 느끼는 지름길은 은혜 안 받고 퍼질러 있으면 몇 일 안가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결함인이라고 말하고 작용인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설교 시리즈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지성을 사용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강조하심)
여러분 지성의 근육을 연마하십시오, 지성의 근육을 연마하는 것은 모든 그릇된 사상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보며 걸어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선하게 판단하고 복잡한 사상 속에서도 참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언인지 알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2. 질문과 답
질문 :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하나요? 예수님께는 현재만 있으니까요.
답 :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영원히 현재만 있으시다고 말한바있습니다. 결국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에 모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모르고, 현재만 아는데 현재는 셀 수 없는 방막의 시간의 시점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무한대 분의 일로 수령하는 시간의 길이입니다. 없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못박혀 죽으셨어도 하나님은 지금처럼 느끼실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을 때에도 예수님은 미래가 없으신 분이니까 이미 태초에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중적 보물을 갖고 계십니다. 첫 째는 시간을 초월해서도 보실 수 있고, 둘 째는 시간 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미 다 알고 계신데 왜 새삼스레 좋으신가? 이 말은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해서 보실 수 있고 시간 안에서도 보실 수 있는데, 시간안에 보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3. 질문과 답
질문 : 안들림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미리아심의 충돌에 관한 질문 같음)
답 :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일어나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새롭게 느끼시는 것이 우리에게 전달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가다가 누군가는 죄를 지을 것이고 누군가는 착한 일을 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만세전에 착한 일을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시들먹하시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만세전에 다 알고 있으시기 때문에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선을 행하겠으며 누가 악을 행하면서 경고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도덕적 통치에 보면 각주에 안셀무스의 글이 라틴어로 인용되면서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서 정동되는 분은 아니시지만 정동의 효과는 인간에게 느껴지시는 분이십니다”라는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4. 질문과 답
질문 : 안들림 (3번 질문과 동일한 질문인 것 같음 -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미리아심의 충돌에 관한 질문 같음)
답:
다시말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이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만 이것이 시간 속에서 전개가 될 때에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사용하셔서 정해놓은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인데, 두 개의 문제가 양립할 수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합쳐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보면 정해진 것이며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시간 안에서는 우연적인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꿈이 맞을때가 있잖아요. 반가울 사람을 만날꿈이야. 그래서 반가운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거야. 그런데 어두운 밤길에 20년전에 알았던 친구를 만났어요. 꿈이 맞는거죠.
결정에 놓으셨다는 것과 인간이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니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책임이 면제가 되지 않고 하나님에게는 의외에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5.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 :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선한 의지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 단일성과 포괄성이 있는데, 포괄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
선한 의지라고 하는 것은 의지의 성향이 선을 쫒는 것입니다. '의지의 성향 자체가 선하다'라는 것인데, 그럴 때 우리가 그 사람에게 '선한 의지가 많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 자체가 이런 선한 의지를 불러 일으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입니다. 이런 선한 의지가 어떤 성향을 갖게 되는데 사건 하나하나, '내가 무슨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할 때는 개별성이고 하나하나 개별적인 사건은 생기지 않았지만 무슨 사건이 생기면 항상 선한 쪽으로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의 크기를 선한의지라고 말합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나누는데, “Will”이라는 단어와 “Volition”이라는 단어로 나눕니다. “Will"은 그냥 의지입니다. ”Volition“은 의지의 행사입니다. will이 단일성이고 Volition이 포괄성입니다.
사람이 선하면 생각하는 것도 선하고 느끼는 것도 선하고 의지하는 것도 선합니다. 생각은 선하고 의지는 박하고 감정은 중간일 수 없습니다.
단순성
“하나님의 단순성이란 하나님께서는 영과 육으로 형성된 것 처럼 여러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므로, 나누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p 45.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모든 사물은 단일성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모두 두 가지 이상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사물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여도 구성 요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구성 요소들은 A, B, C 라고 한다면 A, B, C 는 서로 의존합니다. 그러면 결국 A, B, C 는 서로를 의존하게 되니까 어느 하나도 스스로 독립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들은 서로를 의존하는 구조로 모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구성 요소를 가지고 계시다면 그 구성 요소는 다른 구성 요소를 의존하게 하고 다른 구성 요소는 그것 때문에 다른 요소를 의존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안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구성 요소가 없으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단순성, 단일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일성이라고 한다면 그 단일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것은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돌멩이를 보면 여기 인간이 돌멩이를 보면서 이 속에서 생각을 많이 할거 아니에요. 이건 곤충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파일이 움직이면서 딱딱하고 던지면 피터치고 생각하면서 이것은 돌이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과 맘먹는 상태의 개념들이 떠오르는데 이런 거들은 전부 물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패러다임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을 재려고 할 때 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없다’라고 이야기해버립니다. 근데 “있다”라는 말도 웃깁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 돌이 있다” 그럴 때 있다는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그러나 “공기가 있다”라는 것은 설명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있다”라고 하면 또 달라집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라고 하면 또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성 요소로 나뉘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 성부, 성자, 성령은 어떻게 되는 건가? 피자 조각 내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역시 물질을 구성하는 형태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본질 속에 삼위께서 구획된 형태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본질을 가진 삼위의 존재의 양태가 한 하나님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이 하나님이 있다, 없다하는 것들을 이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재려고 할 때, 그때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게 만드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믿는 믿음, 성령의 조명,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초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격이 단순성입니다.
“삼위란 하나님의 본체가 여러 부분의 본질로 구성되어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는 각 위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속성이 하나이요,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시며,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 p 45
속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속성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빼면 완전할 수 없는 것을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부분이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존재인데, 이 분 자신을 직접 보아서는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에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의 변화된 차이, 효과를 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은 알 수 없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죄인이 회개할 때 용서해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시는 성품이 보이고, 악한 자를 벌하시는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간이 안다”라고 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 두 가지를 합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알 수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실 때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는 것이고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경책입니다. 성경책을 보면서 자신의 실제적인 삶,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 세상의 역사를 보면서 공부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2003년도 수련회 설교 “하나님을 아는 지식” 참조)
A. 보편적 속성 (공유적 속성)
보편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특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발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있는 속성은 다만 유한하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속성에 비할 때 불안전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p 46.
하나님도 사랑이 있으시고,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방향이 잘못되고 조잡합니다. 결국 하나님 모를 때는 우리가 꽤 많은 사랑을 가진 줄 알다가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면, 우리의 사랑은 감히 있다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불안전하고 누추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고백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눈을 뜨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아시며, 가능성 있는 일과 실재하고 있는 일을 다 아시는 그의 완전성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p 46.
하나님은 공부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고,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밖으로부터 지식을 섭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데 창세기 22장의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으니”라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화법입니다. 하나님이 시험해보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시험하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식은 총포괄적이므로 전지라고 칭한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아시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적인 모든 것까지도 아신다.” p 46.
2) 하나님의 지혜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혜는 지식을 엮어서 사용하는 하나의 원리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구슬을 꾀어서 목걸이를 만드는 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식이 모자라도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지식의 독특한 한 국면이다. 하나남의 지혜는 최고의 가치 있는 목적을 설정하시고,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택하시므로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시는 그의 덕행이다.“ p 46.
3) 하나님의 선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이시다....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곧 타자에 대한 선행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선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이란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취급하도록 자극시키시는 신적 완전성을 말한다.” p 47.
하나님은 가장 이기적이실 때 가장 이타적이실 수 있고, 인간은 가장 이기적일 때 이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것이 그 속에 인간이 들어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됩니다. 고전 13장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에게 시작하여 온 우주와 인간을 휘돌아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자기 회귀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은 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피조 세계를 향한 사랑은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기적일 때 인간에게 가장 이타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는데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이타적인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목표는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서 그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지체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들의 행복과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가 나의 관심사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 가득히 차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4)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 자비와 긍휼, 오래 참으심등으로 나뉩니다.
(1) 은혜
죄를 용서함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말합니다.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2) 자비, 긍휼
죄의 결과를 짊어진 자들의 비참을 제거하려는 사랑을 하나남의 자비 또는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비와 긍휼은 죄 때문에 인간이 비참하게 되었어도 논리적인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도달해 있는 비참한 상태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아파하시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예를들어, 담벼락에서 놀다가 떨어져서 피가납니다. “올라갈때부터 알아봤어. 그러게 왜 올라갔냐” 다른 사람은 “아니 저 피좀봐 어떻게” 그러면서 달려가 끌어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과정이 아닌 결과를 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비는 슬픔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너무 사랑하면 항상 슬픔이 동반됩니다. 눈부시도록 사랑이 느껴지는 날에는 눈물이 나게 됩니다. 그것을 장엄미, 비장미, 비장한 것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 속에서 슬픔을 느낍니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설교 시간에 은혜를 받으면 왜 눈물이 납니까? 진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눈부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3) 오래 참으심
이것은 사랑의 아주 으뜸가는 특성입니다. 왜 사랑이 오래 참음이라는 특성을 갖게 될까요? 가족이나 친구가 미운 행동을 하고 피해를 주어도 참게 되는 것은 그 관계를 끊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특성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맺은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싶어하고, 관계를 풍성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맺은 관계를 소멸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만약에 은혜를 못 받아 사랑이 없어 관계를 끊고자하면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에도 의절이 가능해집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놓고 싶지 않으셨으면,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면서 마지막에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겠습니까.
이런 걸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머 어머한 깊이로 밀려들어옵니다. 내가 죽고 나서도 연구할거라고 믿어지는 시리즈가 있다면 고전 13장입니다. 고전 13장을 진지하게 탐구해나가면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배우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운수대통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찬양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 사랑이 밀려오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통적, 즉 교통적 사랑입니다. 사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은 단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오지랖이 넓어집니다. 누가 가난하든지 내버려두면 되는데 쌀 사들고 뛰어가고, 아프다 그러면 데리고 병원가고, 춥다 그러면 자기 겉옷을 벗어 덮어 주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랑을 흘려보내면서 그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되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이 교회 안에서 먼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바라십니다.
나 같은 인간이 감히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다니, 개미가 인간에 대해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지성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지성의 근육을 올바르게 사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게으름만이 죄악이 아니라, 정신의 게으름은 더 커다란 죄악입니다. 평생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고3과 같은 마음으로 살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섭취하면서 공부해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절대로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그렇게 살기만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을 통해서 빛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니”라는 의미입니다.
5)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거룩성이란, 첫 째 모든 피조물들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시며, 무한한 존엄으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신적 완전성이라 말할 수 있다..” p 48.
헤겔에 의하면, 미개한 시대일수록 인간을 떠받들게 됩니다. 인간에게 합당한 존중을 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것은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마땅히 합당한 존경을 표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엄의 질서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들을 근거로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아부도, 인간숭배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것이 아닌, 단지 자신이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짓밟고 거기에 합당한 존경이상의 것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창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민정신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런 합당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 권위입니다.
“둘 째 하나님은 모든 도덕적 불순종이나 죄로부터 구별되시므로 도덕적으로 완전하심을 의미한다.” p 48.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우리말에 거룩이라는 말은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거룩을 이야기하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거룩함이라고 사용되어야합니다. “Holyness of God" 하나님의 거룩하심, 혹은 하나님의 거룩함, 거룩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둘로 이루어집니다. 첫 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Ontological Transcendence) 두 번째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무엇이냐 라고하면 존재적 초월성, 도덕적 완전성으로 외우시면 됩니다. 존재적 초월성이란, 다른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으시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이것들과 하나일 수 없다라고 하는 모든 당신이 만든 존재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갖으시는 타자성(Otherness)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온 우주를 만드셨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일부 수도 없고, 인간이 하나님의 일부 일수도 없고, 만드신 이 세계가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든지 일체일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위대한 타자입니다. 인간은 그 앞에 아주 볼품없는 존재라는 존재의 차별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에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부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완전성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공유적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인간도 사랑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격차가 너무 커서 인간의 사랑은 불결할 정도가 되는 것이고, 이런 도덕적인 격차를 가리켜서 도덕적 완전성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거룩함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비천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전함에 대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이 생활을 가리켜서 성화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6)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성에 위배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보존하시는 신적 완정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에 의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해 가시며 적당한 법을 인간에게 부과시키시므로 순종하는 자를 보상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신다.” p 48.
(1) 상주시는 공의
“보상을 줌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
(2) 벌 주시는 공의
“벌을 내리심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
“상 주시는 공의는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벌 주 시는 공의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함이다.” p 48.
7) 하나님의 진실성
“하나님의 진실성이란 하나님이 그의 내적 존재하심에 있어서 참되시며, 그의 계시에 있어서 참되시며,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참되심을 나타내시는 신적 완전성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다른 참 신이시며, 존재하는 사물의 실상 그대로를 아시며, 그의 약속을 이행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시다 이 속성을 약속 이행면에서 볼 때, 이를 하나님의 신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p 49.
신실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약속과 관련해서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신실성이라고 부릅니다.
8)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두 가지 견지에서 고찰되어 질 수 있다."
(1)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어진 의지와 계시된 의지, 둘로 구별 되어 있다. 감추어진 의지란 하나님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의 의지이며, 결과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의지인데 반하여, 계시된 의지란 율법과 복음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이다. 피조물들에 관계된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시다. 인간의 죄된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작용에 달려 있다." p 49.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결함인으로서 죄를 짓게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데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원한다고 할 때도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만약 신자가 신앙 생활을 안하면 하나님은 미끄러지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그 신자가 미끄러졌을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영적인 손해를 보는가를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는 유익을 얻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복잡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모든 것이 엮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섭리하십니다.
(2) 전능
“전능이란 하나님의 의를 집행하시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 함은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즉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며,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자신을 부인하실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취하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의 뜻을 따라 수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원하시면 그 이상으로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 50.
하나님이 이런 문제 푸실 수 있을까요? 각 없는 삼각형 만들기? 각이 없으면 삼각형이 안되는데...하나님은 못하시는 것도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십니다. 그것을 무능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내가 술을 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취하도록 먹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저는 그것을 안합니다. 안한다는 것이 하고 싶은데 억지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의 방향이 워낙 달라서 그것을 하여야할 욕구도 못느끼고 오히려 한다고 할 때 성향이 달라서 고통스럽게 느껴질때 우리는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술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합니다. 그걸 못하는 것이 오히려 나의 놀라운 덕을 표현하고 완전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세 시대 때에 그 문제를 아벨라르더스 같은 교부가 두 가지 용어를 가지고 풀어냅니다. "Potentia Absoluta“ ”Potentia Ordinata“ 영어로 "Ordered"입니다. ‘명령된’이 아니라 ‘질서 잡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규정된‘이라는 의미입니다. ”Absoluta“는 절대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하실려고만 하면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나의 경우에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왜 못하겠습니까, 예전에도 하던 가락이 있는데 말입니다. 술 먹고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가지신 탁월한 어떤 덕 때문에 그렇게 안하시는 것, 그것을 안하시고 나아가서는 못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부족하고 모자란 분이 아니라 탁월하고 두드러진 분이 되십니다.
우리 아들이 거의 거짓말을 안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부부가 다 압니다. 그렇게 무언인가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무능하고 못하는 그것이 그 사람의 덕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질문 : 하나님의 뜻이 숨겨진 것과 나타난 것이 모순은 없는가?
- 답 : 모순은 없지만 모순된 것 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는 모순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모순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모두 지식의 부족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온전히 더 배우고 더 믿게 되면, 혹은 더 잘 추론하게 되면 그 모순은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질문 : 안들림
- 답 : 하나님이 인간과 관련 맺을 때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효과가 하나님이 태양이나 달, 별과 맺으시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효과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 허블 만원경이 수리를 끝냈다는 기사를 보았다. 막 수리를 마친 허블 만원경으로 찍은 사진은 굉장히 선명하며 티 없이 맑았다. 지구로부터 7천 5백광년 떨어진 곳에 카리온이라는 성운이 있는데 허블 만원경에 의해 선명하게 스타더스트(우주먼지)가 보인다. 우주에는 사실 에이치밖에 없다. 이 에이치들이 어떤 작용으로 폭발을 일으켜 핵융합을 하게 되면 거기서 다양한 원소들이 발생한다. 그런 것들이 어떤 이유로 인해 한 곳에 모여들게 된다. 한 곳에 모여서 그것들이 먼저처럼 형성된다. 다시 어떤 계기로 인해 중력으로 뭉쳐져 핵반응이 일어나 점점 불덩이가 되어 어느 한순간 폭발을 일으켜 가스덩어리에서 하나의 별이 떨어져나오는데, 이것이 별의 탄생이다. 그런데 이 거리가 지구에서 7천 5백 광년이다. 성운 끝에서 성운 끝까지의 거리가 3광년이다. 여기에 수많은 별들이 벌집처럼 생겨나게 된다. 너무 멋지다.
찬양 -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자랄 수 있어요
이 찬송가가 질문에 대한 답이다. 태양과 별들이 빛나는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배하게 된다. 그런 차원의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영혼과 관련이 될 때에는 훨씬 더 찬란한 아름다움을 해, 달, 별과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뿜어내신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간을 구원하신 역사들이 주제를 이루지, 해, 달, 별 돌리신 이야기가 주제를 이루지 않는다.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셔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 만드시는지를 보면서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