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1부
녹취자 : 김세나
[진행자] 안녕하세요. 성경을 기초로 한 명서 읽기 프로젝트 서재의 재발견의 아나운서 박아영입니다. 1956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이 아오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창과 도끼로 무참히 살해를 당하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유명 일간지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글쎄요. 세상이 말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6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죽음이 헛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복음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의 저자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의 선택을 두고 안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를 그 작품 속으로 안내해줄 메인 스피커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겠습니다.
녹화 전에 목사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서 저희가 주님을 더 찾게 되는 강의가 되기 바란다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강의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은 많은 분들께 책을 많이 읽으시고, 또 많이 쓰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책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셨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책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좋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진행자] 그래도 책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그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가 있겠습니다.
[진행자] 네. 그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를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시고, 많이 읽으시고, 많이 쓰시는데, 책이 가지는 힘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남준 목사님] 책은 자기를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자기가 늘 보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자기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에 있어서는 책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어떻게 보면 책이 한정적인 세계관과 시각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제가 모든 사람의 삶은 다 살 수 없으니까, 책을 통해서 나와 달리 살았던 삶, 나 아닌 다른 입장에서 나를 보는 삶, 이러한 것과 함께 소통하면서 자기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행자] 네. 그러한 의미에서 책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팡세」을 읽는데 목사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필요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어려운 책이지만, 목사님께서 쉽게 풀어 주시면 훨씬 재밌게 읽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함께 읽어가면 좋을 만한 책들을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책인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시간이 많지 않아서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먼저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파스칼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 중 하나가 몽테뉴입니다. 실제로 파스칼이 몽테뉴의 「수상록」의 많은 구절을 「팡세」에서 인용합니다. 인간을 심도 깊게 보았던 면에 있어서는 파스칼과 몽테뉴가 매우 닮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내리는 결론은 매우 다릅니다. 몽테뉴는 ‘인간은 유한하고 비참하고 무지에 쌓여 있다. 그러나 계속 알아가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인간은 이렇게 비참하기 때문에 아무리 알아가 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이성으로 찾아갈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찾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책은 파스칼의 책에 나오는 기도만을 모아놓은 「파스칼의 기도」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 책도 살짝 끼워 넣었습니다. 「염려에 관하여」입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실존, 고독, 존엄,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팡세」와 상당히 많이 결을 같이 한다고 생각해서 추천서로 올려놓았습니다.
[진행자] 이렇게 세 권의 책을 함께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 책들을 함께 읽으면서 「팡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오늘 소개해 주실 책은 어떤 책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진행자] 본격적으로 「팡세」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인간은 갈대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이 이야기는 누가 이야기하였겠습니까? 파스칼입니다. 여러분이 「팡세」를 완독하지 못했더라도, ‘아 그 이야기가 파스칼이 한 이야기구나!’라고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팡세」를 안 읽은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팡세」는 어떤 조사에 의하면 17세기에 나온 책 중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팡세」(Pensées)는 ‘생각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디어’입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신앙이 매우 약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신앙심이 뜨거웠던 파스칼이 호교(護敎)의 목적으로 이 책을 씁니다. 당시 ‘교’(敎)는 기독교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쇠퇴해 가고,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그들에게 기독교의 진리가 얼마나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답을 주는지, 기독교를 변증하는 목적으로 이 책을 썼던 것입니다. 이 책은 900여 개의 짧은 단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모아 거대한 작품을 쓰려고 했습니다. 만약 완성되었더라면 신학대전과는 또 다른 방대한 저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39세 젊은 나이로 죽어서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이것들이 발견되어 1669년 포르루아얄 판으로 제1판이 나오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이 「팡세」를 몇 페이지 읽다가 덮습니다. 그 이유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은 내용이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평소 생각을 촉구하는 책을 잘 안 읽다가 갑자기 이런 책을 대하니까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평소 죽 같은 것을 먹다가 갑자기 딱딱한 힘줄이 들어가 있는 갈비 씹는 것 같은 느낌이 날 뿐이지, 그렇게 어려운 내용의 책은 아닙니다.
[진행자] 소화하기 조금 버거울 뿐이지, 어려운 책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오히려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의 형식에 있습니다. 이 책의 형식을 보면 체계가 없습니다. 한 줄도 안 되는 문장부터 짤막 짤막한 글, 10페이지, 12페이지 되는 글까지 이러한 것들이 다 섞여 있습니다. 물론 파스칼 본인이 순서를 나누어 놓은 것도 있지만 안 나눠 놓은 것도 많습니다. 지금의 「팡세」는 후대 사람들이 오랜 연구 과정을 통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그렇게 산발적인 것들을 읽어나가려니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팡세」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청중] 기억나는 문구가 있습니다. “천사처럼 행하려고 하는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이다.”
[김남준 목사님] 굉장히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팡세」가 굉장히 호소력 있는 점이 바로 그러한 점입니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집니다. 1부에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 정확하게 말하면 미천함에 대해 말합니다. 인간이 아주 미미(微微)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유명한 이야기를 남깁니다.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무섭게 한다.” 단순히 겁나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2부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2부는 썩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지만, 1부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니체가 - 그 사람은 무신론자입니다. 철저히 기독교에 대해서 반대했고「적그리스도」라는 책도 썼습니다 - 인간론에 대해서 극찬한 책이 바로 「팡세」입니다. 그가 「팡세」에 대해서 “저 파스칼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기독교는 루터나 칼빈, 여러 소위 종교개혁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상스러운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행자] 우리가 위대한 종교개혁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
[김남준 목사님] 니체는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이성을 말살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의 「팡세」는 그런 상스럽고 우악스러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끊임없이 인간 속에 파고 들어가서 실존주의자들이 후에 고민하게 된 인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을 다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두 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양면성입니다. 이것은 아까 이야기 하였듯이 천사 같은 존재이면서 악마 같은 존재, 우주의 영광이면서 쓰레기, 온 우주를 심판할 심판자이면서 동시에 괴물. 이 양면성을 인간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위대성, 그 관점에서 보면 실존주의 이후에 나오는 모든 작품에 대한 눈이 확 열리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팡세」의 2부를 대신해서 읽을 책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1부를 대신해서 읽을 책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1부를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간단하게 블레즈 파스칼에 대해서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대개 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가진 사람은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모든 방면에서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천재성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어느 한두 부분에만 발현되는데, 그의 천재성은 모든 방면에서 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영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12살에 유클리티 기하학 32번 명제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원추곡선론의 정리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수학에 파스칼의 정리라는 공식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수학자, 기하학자로서의 면모라면 이 사람은 물리학자이기도 합니다. 파스칼의 원리를 만들어 냅니다. 2-3톤이 되는 자동차를 기계 하나로 올리지 않습니까? 파스칼의 원리에 의해서 기계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세무법원장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일부러 부정을 행했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세금이 공정하게 부가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괴로워서 6개월 동안 2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수학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아버지에게 계산기를 만들어 줍니다. 숫자판이 있고 다이얼이 돌아가면서 연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산기가 다이얼 식으로 되어 있어서 어떤 사람은 그것이 컴퓨터의 원조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까지는 아니고 오늘날의 전자계산기의 원조 정도는 되겠습니다. 심지어 그는 확률에 있어서도 굉장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면 지하철이 옵니다. 내가 지하철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누가 탈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지하철이 오고 나는 그 때에 맞춰 지하철을 탑니다. 그 시스템을 파리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 낸 사람이 파스칼입니다. 그전에는 어디에 가고 싶으면 말을 가지고 오거나 빌렸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마차 운행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언제 어디를 지나갈 테니 탈 사람은 모여라.’ 그렇게 교통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다방면으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인물의 사상이나, 그 사람이 업적을 생각하려면 우리 시대에서 그를 보아야 하겠습니까? 먼저 그 사람의 시대에서 보아야 하겠습니까?
[진행자] 먼저 그 사람이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렇습니다. 먼저 그 사람의 시대에서 그를 정확하게 읽어낸 다음 시대가 바뀌어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들을 꺼내어 ‘우리 시대에 그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그의 사상과 태도는 나와 어떻게 달랐는가’ 생각해봅니다. 과거의 사람을 통해 수백 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고전을 읽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파스칼이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대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누지만, 기독교 국가였다는 배경을 고려했을 때 ‘고대’, ‘교부들의 시대’,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중세로 들어가는 길목에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거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가 허물어지면서 ‘르네상스’가 옵니다.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르네상스를 공부해보면 아주 흥미진진하고 우리의 인생을 살찌우는 학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앞에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르네상스가 흔히 ‘모던’(modern)이라고 하는 ‘근대’로 이어집니다. ‘모던하다’는 ‘새거다’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현대’(contemporary)입니다.
파스칼은 르네상스와 근대 사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전에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역사의 변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의 생각, 사고방식, 생활양식, 이 모든 것들이 변화된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가져온 변화를 ‘옛길’과 ‘새길’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옛길은 라틴어로 비아 안티쿠아(via antiqua)입니다. 비아는 길입니다. 여기에서 길은 사람 다니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 학문의 방식, 생활방식, 그리고 특별히 인간이 사물을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옛 관점과 새 관점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관점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 관점은 실재론과 형이상학 중심이었습니다. 지상의 세계가 있고, 천상의 세계가 있고, 거기에는 실재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있습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최 아무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실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실재의 아래 계층으로 개별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등학교 다닐 때 개별자와 보편자라는 개념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둔스 스코투스(1266-1308)와 윌리엄 오컴(1285-1347)입니다.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컴은 13세기 사람입니다. 이후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라든가 브레드 워딘 같은 사람들이 14세기, 15세기, 16세기 계속 나타납니다. 그들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들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윌리엄 오컴에게는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닙니다. 면도날이 무엇입니까? 통나무를 자를 때 면도날로 자르지 않습니다. 몇 분의 몇 밀리미터까지 정밀하게 잘라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끼로 반 토막만 내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눈종이 같은 것을 정확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때는 부엌칼이나 전기톱 같은 것으로 안 됩니다. 면도날과 같이 세밀한 날로 잘라야 합니다.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별명의 뜻은 어떤 사물을 말할 때, 아직 입증되지 않은 너무 많은 가정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입니다. 신문에 ‘승용차 전복되어 전원 사망’이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다른 신문에는 ‘승용차가 앞에 있는 차를 피하려다가 뒤집어지고 미끄러져서 사람이 죽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기사가 났습니다. 그런데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아닐 개연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승용차가 앞차를 피했는지 안 피했는지 이것은 또 다른 판단입니다. 사실을 조사해 봐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문기사는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 작성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죽었다.’라고 이야기해야지,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안 밝혀졌는데 괴로워했던 것을 보니까 자살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윌리엄 오컴은 ‘자동차가 전복되어 전원 사망’이 가장 믿을 만하고, 가정이 따라붙을수록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으므로 다 잘라 낸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 나왔을까요? 중세 시대에는 이성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신을 이성으로 증명해볼 수 있다는 생각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증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가설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에 따라 모두가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컴은 기고만장한 이성의 시대를 좀 접고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의 구분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인데 무모하게 이성을 사용해서 수많은 가정을 만들어 입증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 한 시대를 장식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나왔던 어마어마한 중세의 신학책들이 졸지에 어떤 의미에서 가치를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다양한 책이 있습니다. ‘옛 길’의 방식에서는 빨간 책, 노란 책, 파란 책이 있을 때 ‘책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합니다. 그 고민에서 출발하여 내려와야지만 정상적인 사고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 길’의 방식에서는 ‘이 책’에서부터 시작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책’이라는 추상명사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상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거꾸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형이상학보다는 인간의 경험과 감수성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기운들이 르네상스에서 폭발하듯이 뛰쳐나오면서 한 시대를 이루어가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질문해 보겠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여태까지 생각해오던 틀을 깨뜨려서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격동하는 시대였는지 보여드리려고 표를 만들었습니다. 사상사적으로 이미 옛것이 무너졌습니다. 마치 처참하게 폭격을 맞아 부수어진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새것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지만, 새것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는 천동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교황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100-200년 후에 갈릴레이가 나타나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맞다고 증명해냈습니다. 교황청에서 핍박받자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키아벨리하면 뭐가 떠오릅니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정치학에서는 마키아벨리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집니다. 마키아벨리 이전까지는 ‘정치’라고 할 때 비록 따라가지 못해도 항상 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정의와 선을 따라서 나라를 운영해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대의’를 갖출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것을 쓰레기통에나 던져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통치자라면 그때그때 국가의 이익을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서라도 국가를 존속시키고 부강하게 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훌륭한 통치자라고 보았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나타났습니다.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됩니다.
그 다음 교회는 옛날의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두 개의 세계, 개신교와 천주교의 세계로 양분되었습니다.
예전의 절대적인 것들이 모두 무너지면서 새 것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관성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식인들은 모든 것이 깨져 버리고, 예전대로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근대’라는 시대를 철학적으로 기가 막히게 정리해서 디자인했던 사람이 르네 데카르트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그를 무지하게 싫어했습니다. 둘 다 프랑스 태생이었고, 수학자였고, 천재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어떤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청중] 아이폰 사용하고 있습니다. … 갤럭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러분이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데카르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데카르트가 없었다라면 여러분이 그러한 핸드폰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는 철저한 이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아까 보다시피, 떠받들고 믿었던 진리의 기둥들,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다 무너지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새것이 세워져야 할 텐데,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세우는가?” “천사들이 내려와서 세워 줄 것이다.” “그것 아니다.” “그러면 누가 세워 줄 것인가.”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세계가 움직인다고 믿었는데,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콩알만 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까지도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절대적인 것들이 다 상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중심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에게서 인간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선에서 상대적인 선으로 이행이 됩니다. 그 중심에 데카르트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새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보여준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커다란 능력은 두 가지입니다. 지성과 감성입니다. 지성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이고, 감성은 느끼고, 경험하고, 몸에 익숙해지는 것들입니다. 데카르트는 철저하게 이성을 믿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지성 중에서도 이성. 고전철학에서 지성은 이성과 오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성은 1+1=2입니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 결과가 있으니까 원인,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오성은 단번에 탁 깨닫는 것입니다. ‘나 그 사람 보자마자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 이러한 식으로 한순간에 탁 깨우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연역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연역적 사고는 위에서부터 생각하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저서 「방법서설」에 보면 인간이 오류에 빠지지 않는 법칙이 있습니다. 의심할 수 있을 때까지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데카르트를 잘 몰라도 그 말은 압니다. ‘생각하는 갈대’만큼 유명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생각하다’의 말은 라틴어로 cogito(코기토)입니다. 이것은 원래 ‘생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심하다’, ‘회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생각을 하는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도 데카르트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그 형식 자체가 이미 어거스틴이 한 말이었습니다. “스이 뽈리오르 에르고숨-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데카르트가 패러디한 것입니다. 데카르트도 패러디하지 않았느냐는 집요한 질문에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되겠습니다. 생각하니까 모든 것을 다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의심해도 도저히 의심이 안 되는 마지막 지점이 있습니다.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우선 정리를 하자면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반대하지 않았고,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메르센에게 보내는 데카르트의 서신에 보면 ‘신이 영원 전에 진리를 창조했다.’고 밝힙니다. 그 진리가 자연적인 진리가 되어서 우주와 모든 것들이 돌아가는 것이고, 도덕적인 진리가 되어서 인간의 양심을 비추면서 움직이는 하나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특별한 신앙의 경험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사유하는 실체’라고 보았습니다. 생각의 기능을 가진 실체. 그래서 생각의 기능 중 가장 우월한 것이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이성적으로 따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의심하라고 합니다. ‘명석판명’, 더 이상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자명하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오류에서 벗어날 것이고, 당연히 중세 때처럼 끔찍한 신앙의 미명하에 인간에게 폭력을 행하고 이성을 자살시켜야 하는 어리석은 상황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질문해 보겠습니다. 파스칼은 데카르트와 같았겠습니까, 달랐겠습니까?
[진행자] 아까 목사님께서 ‘달랐다’라고 힌트를 주셨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파스칼은 팡세에서 데카르트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매우 해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단언했습니다. 사실 데카르트는 파스칼을 좋아했습니다. 데카르트는 파스칼보다 23살 위입니다. 23살에서 27살 차이가 날 것으로 봅니다. 파스칼은 18살에 중병에 걸린 후 항상 골골하면서 살았습니다. 파스칼이 아파서 파리에 누워 있을 때, 데카르트가 문병을 와서 이틀 동안 머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정도로 데카르트는 파스칼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와 파스칼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선 데카르트는 연역적이고 이론적 사고인 데 비해서 파스칼은 실험적이었습니다. 파스칼은 확률을 주사위 놀이하는 데에 대입합니다. ‘신을 믿어야 할 것이가, 말 것인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이야기할 때도 확률 이론을 동원해서 내기 이론을 제기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 다음에 교통체계를 만들고, 수학기를 만들어서 전자계산기를 만듭니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볼 때, 데카르트는 정신은 지면 위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생활방식은 항상 하늘에서 노는 사람이었고, 파스칼은 정신은 하늘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삶은 항상 땅을 디디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진행자] 실용적인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성에도 논리가 있고 인간의 마음에도 논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르꿰흐’, 인간의 마음-심정이라고 번역되고, 하나는 ‘라 레종’, 이성입니다. 두 개가 논리가 다른데 이 논리로 저 논리를 재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에도 논리가 있습니다. 심정에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해를 해봤습니까? 만났을 때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꼈습니까?
[청중] 네.
[김남준 목사님] 그러면 모든 사람이 동의하게끔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청중]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렇습니다. 이 학생이 홀딱 반한 여자 친구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줬습니다. 친구들이 그 여자친구와 대화해본 후에 학생에게 “너 왜 그런 여자랑 사귀냐?”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싫다고 하는데, 학생은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라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성의 논리로 ‘내가 이 여자가 참 좋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을 이론으로 설명하면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논리는 이성의 논리와 다른 것입니다.
아주 옛날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40살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갔습니다. 그런데 돈도 많고 증권회사 다니고,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한 자매가 그 친구에게 계속 접근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먼저 하늘나라에 간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제가 그랬습니다. “너 볼 게 뭐가 있냐. 네가 좋은 대학을 나왔냐. 공무원 직장 튼튼한 거 가지고 있다는 것 제외하고 연봉이 많냐.” 게다가 그 친구 키도 작았습니다. 그 친구가 “그런데,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라고 했습니다. 이성적으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마음에 사랑이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논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파스칼이 간파한 것입니다.
파스칼은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둘 다 정규교육을 잘 못 받았던 천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둘이 통하는 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스칼은 데카르트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당신 말에 의하면 영혼이 실체인데 생각하는 실체다. 그것이 영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런데 영혼이 하는 일이 사유하는 것밖에 없겠어?’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은 단지 이성으로 사유하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만물에 대해서 느끼는 실체다. 그리고 느끼는 것과 지식을 얻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느끼는 것이 제대로 안 되면 이성으로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말은 그럴듯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오류에 너무 빠져서 유럽 전체가 불행을 겪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신교와 구교가 갈라져서 30년 동안 전쟁을 했는데, 데카르트도 그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가 전쟁에 대한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 ‘이게 도대체 뭔 미친 짓인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겠죠. 군주들이 신앙의 확신과 상관 없이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신교, 구교 편을 나눠 놓고 민중들을 동원해서 전쟁을 벌여 30년 동안 독일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 전쟁에 참여할 정도로 끔찍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남의 이야기 듣고 부화뇌동해서 이런 일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네가 판단하는 것이다. 네가 끝까지 의심할 수 있는 끝까지 의심하고, 그것을 믿고 따르지 않아야지만 이러한 불행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맞긴 맞습니다. 맞는데 현실은 너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버스를 버스정류장에서 타지 않습니까? 그런데 데카르트에 의하면 그것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버스정류장이 버스정류장인지, 다른 사람이 몰래 가져다가 정류장이라고 속이려고 세운 것은 아닌지, 오늘 파업은 없는지, 그리고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현실에서는 우리 집사람이 “오늘 저녁에 눈이 온 대.”라고 하면 내가 위성지도를 봐야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여보, 오늘 밤에 눈이 온 대. 차 가지고 갈 때 조심해.”라고 하면 “응, 알았어.”라고 답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밤 대관령을 넘을 때 눈이 많이 쏟아진다고 할 때, ‘아, 그렇구나.’라고 체인을 가져가야지, 위성사진을 놓고 봐야지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위성사진도 본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판독하는 것도 몇 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위성사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데카르트가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주장을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유명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자기를 사랑합니까?
[진행자] 의심해 봐야 할 것 같지만, 네! 사랑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원수를 사랑합니까?
[진행자] 아, 노력은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주 정연한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논리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본인의 어디가 그렇게 사랑스럽습니까? 많은 사람이 내가 싫다고 하는데 나는 내가 어디가 그렇게 예쁩니까? 공정하려면 예쁠 때도 있고 미울 때도 있고, 또한 어느 정도껏 예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온 천하를 주고도 자기를 사고 싶을 만큼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의 실존 자체가 그러한 논리를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움직이는 게 무엇인가? 마음입니다. 심정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데카르트를 비판하면서 인간은 너무 비참한 존재다, 우주를 한 번 봐라! 캄캄한 밤하늘을 서서 봅니다.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까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코스모스의 저자에 의하면 우리 은하계 안에 4조 개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양처럼 빛을 발하는 항성만 2천 억개입니다. 그리고 이 은하계는 우주 전체에 얼마나 있을지 아무도 모롭니다. 측정할 수 있는 범위가 160억 광년 정도 됩니다. 그 안에 약 2천 억개의 은하계가 있지 않을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4조 곱하기 2천 억을 계산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우리 은하계는 은하계 중에서 절대로 큰 은하계가 아닙니다. 지구의 천 배가 목성이고, 목성의 천 배가 태양, 태양의 백만 배라고 합니다. 최근에 태양이 수천억 개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별이 발견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우주계의 넓이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거기에 내가 우주를 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별들의 나이는 수백 억 년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들어오는 저 멀리서 오는 불빛 하나가 1억 광년을 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갔습니까? 그러니 인간이 우주를 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네가 우주를 보고 있으면 너는 미친다. 네가 안 미칠 수도 있다. 그건 네가 미쳤기 때문에 안 미친 거다.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안 미칠 수가 없다. 미쳐야 하는데, 안 미치는 것이 바로 네가 미쳤다는 증거다. 결국 네 정신이 똑바르더라도 미친 것이고, 정신 이상이 어도 미치는 것이다.’ 그 상태가 결국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타다닥 타다닥 타다닥, 모닥불이 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요만한 불꽃 알갱이가 연기를 타고 올라갑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게 1초도 안 됩니다.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팡세 2부
녹취자 : 김세나
[김남준 목사님] 우주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미천합니다. ‘미천하다’는 것은 존재론적 상태입니다. 모기 하나 잡아서 우리가 손으로 문지르면 생명이 끝나듯이 우리가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 밑에 뭐라고 적었습니까? “온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서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수증기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 그게 인간의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미천함입니다. 그런데 미천하기만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살겠는데,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비참함은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도덕적으로 인간은 비참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순식간에 죽으면 모두 다 끝이 나서 쓸모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사실 비참하기 때문에 위대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면적입니다. 불행과 비참에서 위대함과 행복으로 연결해주는 고리가 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끝없이 의심하는 식으로는 신을 인식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도 아예 자기의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립니다. 데카르트에게는 어떻게 이성과 조화를 이루며 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심 밖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이성과 감성으로 느끼는 심정을 가진 존재로서 이 두 개가 유기적으로 활동하면서 인간이라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생각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러분에게 단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그 어떤 괴수인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저능한 벌레, 진리의 수탁자이자 불확실성의 오류이자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자 쓰레기.” 팡세를 시작하면서 파스칼이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기 전에 비참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뒤집어서 ‘비참’만 말해 버리면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이야기를 하고, 비참을 이야기하라.’ 그러면 그 위대함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한번 퀴즈를 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두 평짜리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침대 하나와 밥통 하나, 변기 하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수감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노숙자인데, 소매치기범으로 수감되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정권의 최정상에 있어서 천 억짜리 집에 살다가 떵떵거리던 사람인데, 부정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서 투옥되었습니다. 누가 더 고통스럽겠습니까?
[답변자] 아마 정상에 서 있던 사람일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그렇습니다. 본인이 그 사람이 되어서 감옥에 갇힌 느낌을 말해 보십시오.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답변자] 아주 비참할 것 같습니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죽고 싶을 정도일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정확합니다. ‘아, 내가 이런 상황을 견디느니 죽어야 겠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앞에 자매님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대가 되어 보십시오. 그대가 노숙자였습니다. 박스를 깔고 신문을 덮고 자야 하는 처지였는데, 구속되었습니다. ‘난 이제 죽 노동이나 하나 보다’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난방이 다 되고, 수세식 변기가 있고, 깨끗하게 정리된 모포도 있고, 편안하게 전기도 들어옵니다.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답변자] 나가기 싫을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야, 죄짓기 잘했다! 내가 죄를 안 지었으면 어떻게 할 뻔하였을까?’ 그러면서 편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만약 교도관이 “너, 내일 가석방 시켜 줄게.” 했으면 싫어했을 것입니다. 파스칼이 이렇게 비교합니다. 인간은 폐위되어서 노예가 된 사람과 같은 처지라고 합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원래 자기의 신분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처지려니, 운명이려니 생각하려고 하는데 누가 너의 원래 신분은 그러한 신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분은 왕인데 상태는 노예입니다.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사람 안에 함께 있습니다. 정신은 진리를 찾아가는데, 육욕은 오류를 찾아갑니다. 우주의 영광이면서도 동시에 지구가 빨리 제거되어야지만 지구가 정화될 그러한 존재입니다. 이 극단적인 모순 속에서 파스칼이 울부짖는 이야기는 마치 이것입니다. “Oh miserable man that I am.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렇게 울부짖었던 사도바울의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여러분이 읽으며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잘 한번 곱씹어 보십시오.
“현상의 이유는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낸다.” 여기서 현상은 지금 있는 세상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세상이 개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죄인들도 많고, 나쁜 짓도 많이 하고, 사상이나 이러한 것들이 망가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입니다. “사욕에서 사악한 욕심을 가지고도 그러한 훌륭한 질서를 만들어 내다니!” 그러니까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서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개는 아무리 개같이 살아도 개입니다. 개를 보고는 개만도 못한 자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로도 못 올라가고 아래로도 못 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만도 못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인간이 인간이어야 하는데, 개처럼 되었을까? 그것에 포인트를 맞춘 것입니다. 왜 개처럼 되었는가 하면, 그것을 자신이 도덕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파스칼은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1부에서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함, 그리고 2부에서 신안에 있는 인간의 행복으로 넘어가는데 그것을 세 개로 전개할 수 있습니다. 1부 맨 앞부분에 보면 우주를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인식합니다. 인간이 우주를 똑바로 쳐다보면 미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 그리고 안 미쳐도 결국 미쳤기 때문에 안 미친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칠 수도 없고 안 미칠 수도 없는, 미쳐도 미친 것이고, 안 미쳐도 미친 것인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철학자들에게로 이야기가 옮겨 갑니다. 이러한 것을 느꼈던 수많은 선각자들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였는가 찾아보면서 최고의 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실패했다고 봅니다. 만약 그것이 성공했다면 신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세 번째 그림입니다. 이성으로는 이렇게 상승해서 신에게 겨냥하고 갑니다. 그런데 결국은 안 됩니다. 꺾여집니다. 그런데 심정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깊은 속을 꿰뚫어 보면서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신에게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상승되었던 심정적 인식이 다시 그 사랑을 가지고 아래로 하강하면서 모든 인간과 세계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미천함과 비참함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 단장을 보겠습니다. “자연은 그것이 신의 그림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이 신의 그림자일 뿐임을 나타내기 위해 결함을 가지고 있다.”
(찬양)
저 푸른 하늘에 수많은 별들도 주 하나님의 사랑을 늘 속삭이지요.
주일학교 때 많이 불렀던 찬송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거스틴이 쓴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후자가 맞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다.” 그래서 온 천하 만물에는 놀라운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측 가능하고 완전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보면 결국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그림자를 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알듯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주를 봅니다. 별들이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충돌하는 법도 없고 질서정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어머니가 방금 돌아가셔서 통곡하고 탄식하는 내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연에는 결함이 있습니다. ‘좋은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쓰나미를 일으키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자연이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신이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와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무질서 사이에서 이 두 개를 통합하는 무언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단장 283을 보겠습니다. “세 정욕이 세 학파를 만들었다. 철학자들은 단지 이 세 정욕 가운데 하나를 따랐을 뿐이다.”
그게 뭐냐 하면, 스토아주의, 허무주의입니다. 그 다음에 피로니즘은 회의주의입니다. 불가지론입니다. 피론이라는 사람에 의해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이 두 개는 인간의 비참에만 매달린 것입니다. 반면에 무신론은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함 하나에만 매달린 것입니다. 결국 어느 쪽 한쪽을 포기하고 치우칠 때, 인간은 진리로부터는 멀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자]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제가 신학생 시절 밤중에 전철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그러면 신을 본 적이 있어?” 제가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습니까? 만약에 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너도 못 본 것을 우리에게 전하는가 했을 것이고, 봤다고 하면 보여 달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봤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못 봤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답변자] 못 봤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못 봤다고 말하면 너도 못 본 것을 왜 전하느냐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봤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양심이 있다고 조금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과 의사가 증명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엎어 놓고 톱으로 내장을 갈랐습니다. 마지막에 고무장갑에 빨간 피를 묻히고 나서 “거짓말이네. 어디 양심이 있어? 창자, 콩팥, 이런 것은 다 있는데 양심은 없잖아.” 그게 바로 이성의 한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해부학적으로 있는 핏줄과 살을 가진 장기가 아니라 정신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콩팥이 왼쪽에 있는가, 오른쪽에 있는가, 아니면 간이 왼쪽에 있는가, 오른쪽에 있는가’처럼 양심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장기는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 위치가 바뀔 수 있어도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만큼은 우리가 부인은 못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 과학적인 이성의 논리로만 신의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양심을 찾겠다고 수술실에 사람을 넣고 배를 가르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게 제 마음을 때렸던 문장입니다.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심정은 자기가 열중하는 데에 따라서 보편적 존재를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을 때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는데,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자동차를 탑니다. 정면충돌을 할 때 운전사가 죽을 확률이 높겠습니까? 아니면 조수석에 탄 사람이 죽을 확률이 높겠습니까?
[진행자]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죽을 확률이 높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예를 들어서 둘이 사랑을 합니다. “생명도 널 위해 줄 수 있어.” 그런데 정면 충돌하는 순간에는 운전대를 자기 쪽으로 본능적으로 꺾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 생각할 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꺾습니다. 결국 조수석에 탄 사람은 죽습니다. 꼭 죽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회의한다면 내가 존재한 것만큼 굉장히 명료한 명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논리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너는 어디 있는가?” 나는 어디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 있습니까? 신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그러면 너는 어디 있는가? ‘아, 나는 열린 교회 있지. 그것 말고!’ 그런 대답이 아닌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 않습니까? ‘너’라는 자아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 안에. 그러면 공간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논리가 있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논리가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을 사랑하든지 결국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스칼은 둘 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매 순간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도덕적인 결정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현실적인 적용의 문제가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성경으로 보면 어디에서 만들어집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디에서 만드십니까? 무슨 재료를 가지고 만드십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흙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파르’라고 나옵니다. ‘아파르’ 이것은 티끌입니다. 먼지. 이런 벽돌 만드는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먼지. 먼지가 함유하는 것은 ‘의미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습니다. 결국 모든 것들은 없는 것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결국 없는 것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자, 집에서 자기 방을 쓰고 있습니까? 청소를 얼마에 한 번씩 합니까?
[답변자] 저는 하루에 한 번씩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굉장히 깔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레질을 합니까?
[답변자] 네.
[김남준 목사님] 특히 책장 같은 곳에 걸레질을 합니까?
[답변자] 잘 안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짙은 색의 걸레로 청소를 하다 보면 먼지가 나옵니다. 먼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털’입니까? 사물이 부서진 것입니다. 피부가 부서진 것일 수도 있고, 책이 부서진 것일 수 있고, 플라스틱이 부서진 것일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입니다. 그러면 극단적으로 확장해봅시다. 만약에 수만 년을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지가 뽀얗게 쌓이면서 모든 물건들은 먼지로 환원이 될 것입니다. 먼지를 더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지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결국 없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에 화학 기호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매가 지금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 손톱 중 어떤 원소는 수 만 년 전에 코끼리 콧등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솜털이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한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시하면 인간이 너무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욕망론을 이러한 식으로 해석합니다. 인간이 무지무지하게 경쟁해서 돈을 벌려고 합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는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허무로부터 와서 무한으로 갑니다. 또한 우주를 쳐다보면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데, 미쳐서 안 미치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것을 똑바로 보면서 인간은 살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별로 없는데 ‘기분전환’ ‘기분돌림’ 그 다음에 ‘마음돌림’ ‘오락’ ‘다른데 정신 팔기’ 이런 뜻입니다. 저는 그것을 ‘회피’라고 봅니다. 그것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회피를 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높고 지위가 높으면 많이 회피할 수 있습니다. 회피하려면 다 돈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의 끝나고 가다가 ‘오늘 만난 것도 인연인데, 피시방 가서 한 게임하고 갈까’한다면 이것도 돈이 필요합니다. 당구장에서 당구를 친다 해도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안 됩니다. ‘디베르티스망’하기 위해서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지위와 재물들을 말입니다. 그렇게 정신을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을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바늘구멍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결국 이 회피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에 전혀 흔들리지 않으면서 똑바로 인간의 비참과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기독교로 말하면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고, 다른 종교로 말하자면 득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해탈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십만 명 중 한두 명이 갈까 말까 한 길입니다. 그래서 단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위로가 필요하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맨정신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우주를 보면서 ‘아, 순식간에 사라질 존재인데….’라고 생각해본 적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중고등학생 때 예쁜 사진 탁 놓고, 나를 한번 거울에 비춰보면 ‘아, 세월이 흘렀구나.’ 느끼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위로를 받지 않고서 맨정신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위로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너 자신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위로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겠습니까? 반대로 너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네가 생각지도 않았던 데로부터 위로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그것을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행자] 진정한 위로가 신앙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말하자면 그쪽으로 이야기를 돌리는 것입니다. 위로는 너 자신으로는 안 된다. 팡세를 읽으면서 현대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죽은 자들의 방 청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직업이 시체 치워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고독사 하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언제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가보니까 이미 죽고 시체에 다 구더기가 든 상태입니다. 그런데 외롭게 죽은 사람의 책꽂이에는 예외 없이 위로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너무 외로우니까 “괜찮아. 그 모습 그대로 살아. 너는 희망이 있어.”라는 메시지의 책들을 읽으면서 고립사 되어 갑니다. 울컥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은 결국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방식으로 위로가 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시각에서 오늘날 우리의 도서계를 보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갑니다. 빨리 수술대에 눕히고 얼른 빨리 떼어 낼 것을 떼어내고 봉합을 해서 약을 발라줘야 이 사람이 살 텐데 마취제와 마약을 계속 주면서 몽롱한 상태로 들어가게 합니다.
파스칼은 용감하게 똑바로 보라고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미천하고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오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나의 도움이 내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오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단장이 나옵니다. 이것도 명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바 되지 않았다면 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신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면 왜 그토록 자기를 행복하게 할 신을 거역하는가?” 인간이 그렇게 역설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국 불행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 있고, 행복은 자기를 찾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찾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부터 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 찾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무리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파스칼의 유명한 ‘불의 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단장에 나오는 그대로를 인용한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쓴 것입니다. “1654년 11월 31일 밤..”
이것은 그가 31살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철학자들과 식자들의 신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 복종.” 등등이 나옵니다. 이 단장은 없었습니다. 파스칼이 39살에 죽었는데, 그의 시신 수습하다가 외투 안에서 뭔가가 발견되었습니다. 뜯어보니까 양피지를 옷 속에다가 꿰매 놓았습니다. 거기에 이것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654년 11월 31일 밤..” 그 날 이후로 그는 더더욱 자기 자신을 온전히 헌신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추구하고 살겠노라는, 말하자면 엄청난 전환을 맞이합니다. 늙을수록, 나이가 들고 죽음이 가까울수록 하나님께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 열렬해졌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인생을 우주론적으로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만약 파스칼이 살아있을 때 팡세가 작품으로 나왔다고 하면 엄청난 우주론적인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그는 과학자이고, 수학자이고, 기하학자고, 천문학에 대한 지식도 있습니다. 이미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니까 종합적인 학문을 사용해서 글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그러한 파스칼이 마음으로 깊이 흠모하고 공감했던 기독교의 위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성 어거스틴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파스칼은 유산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다 사용했습니다. 자신이 돈을 버는 이유는 오직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번다. 그래서 돈을 벌면 그것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지막에 자기가 죽어갈 때도 위탁할 곳이 없는 아동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았습니다. 돈이 다 떨어져가자 자신의 책들까지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팔지 않았던 책이 있었습니다. 성경과 어거스틴의 책, 그리고 성경주석이었습니다. 성경과 성경주석을 하나로 본다면 사실 사람이 쓴 책 중에 끝까지 안 팔고 죽을 때까지 간직했던 책이 바로 어거스틴의 책이었습니다. ‘또르 르와야리’라고 하는 수도원과 이 사람의 관계도 있는데, 그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첫 번째, 인간은 비참한 동시에 위대한 존재입니다. 두 번째, 인간의 위대함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에 있으면 그냥 먼지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일 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이야기해봐야 2m에 150㎏밖에 더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벌레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공간이 아니라 사유함에 있습니다. 우주는 나보다 더 크지만, 생각 속에서는 우주는 나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삶으로 삶을 비춰 보지 말고 죽음으로 삶을 비춰봐라. 그리고 가짜 행복이 아니라 참 행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강의를 다음 단장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단장 751번입니다. “너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나와 비교하거라.”
여기에서 ‘나’는 파스칼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진행자] 아, 주님이요?
[김남준 목사님] 자기가 하나님 앞에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못 찾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쟤는 금수저 물고 태어났는데….’ ‘쟤는 결혼할 때 아빠가 밀어줘서 집도 사서 간다는데….’ ‘쟤는 머리가 좋아서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옛날에는 나와 똑같았었는데 아니 결혼하고 7년 만에 만났더니 나는 할머니를 향해 가는 아줌마가 되어 있고, 쟤는 10대를 향해 가는 아가씨가 되었어! 어떻게 할까?’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그것이 인간의 고뇌와 슬픔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과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정의롭게 살려고 애를 썼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런데 이 안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너는 나와 비교하라.”라는 이야기는 ‘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너 자신과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다른 형제를 보면서 자존심 상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 부잣집에서 태어나거나 모든 면에서 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갈 사람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위축되고 좌절하는 것을 느낀 적 있습니까?
[답변자] 열등감 비슷한 것이 생깁니다.
[김남준 목사님] 어떤 때 그런 것이 생겨납니까?
[답변자] 제가 꾸준하게 해 왔고, 제가 잘해 왔다고 생각한 부분에 있어서 저보다 더 월등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러한 것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렇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라는 영화 보았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이야기입니다. 살리에리는 어쨌든 열심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엄청나게 노력해서 만든 작곡을 모짜르트에게 보여줍니다. 모차르트가 그것을 보더니 “그래요? 이거 어때요?” 쳤는데 살리에리가 그렇게 오래 작곡한 것은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기억엔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이 남습니다. 마지막에 외치는 살리에리의 전류에 가까운 비명 있지 않습니까? “신이여! 당신을 섬기게 했으면 재능도 주셔야지 왜 나에게는 재능은 안 주셨습니까?” 하면서 “I am the Champion of ordinary man.” “나는 모든 평범한 사람의 챔피언이다.” 그러면서 절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영화를 볼 때, 살리에리의 심정이 이해가 되면 보통 사람이고 모차르트의 심정이 이해되면 천재입니다.
[진행자] 저는 보통 사람입니다. 목사님은 어느 쪽이셨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저는 말 안 하겠습니다. 결국 인간의 인생의 참된 의미는 끊임없이 예전의 자신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예전의 자기보다 나아졌으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감사하고, 부족했으면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보다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이 세상에 두고, 버리고 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상상치도 못하였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마감하고 죽음이라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여러분에게 이 강의를 마치려 합니다. 두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팡세에서 이런 비유를 듭니다. 지금 도박(오락,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뒤에 죽기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지 안 죽는지 빨리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박이나 놀이, 놀음을 계속 합니다. 한 시간 뒤에 자기가 안 죽을 수도 있지만 혹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놀던 것을 다 때려 치고 ‘야, 나 죽어 안 죽어?’ 그것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아보고 안 죽게 되면 다행인 것입니다. ‘아, 그랬구나.’ 하면서 하던 것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죽는다고 하면 빨리 조치를 취해서 안 죽는 것으로 해 놓고 돌아와 도박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한 시간 안에 죽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 와서 이것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확률이론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파스칼도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불신자들, 회의론자들이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서 깊이 동정합니다. “그럴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정상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묻는다.” 둘 중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죽은 다음에 신이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차피 너가 가본 것도 아니고 경험해 본 것도 아니니까. 결국 당신이 아무리 없다고 해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을 믿어서 너가 무슨 손해를 보는가, 이 이야기입니다. ‘무슨 손해를 보는가?’ 네가 신을 믿고 죽었다.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을 믿고 살면 너는 여기에서 우리말로 참하게 살 것이고, 착하게 살 것이고, 나쁜 놈 소리 안 들을 것이고, 죽어서 그 사람을 칭찬할 것이고, 어쩌면 도덕 교과서에 나올지 모른다. 우리말로 표현을 하면 말입니다. 손해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신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태까지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서 네가 남은 것이 있다고 치자. 쾌락을 즐겼고, 양심의 가책도 덜했고…. 등등했다고 치자. 그런데 죽어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을 다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뭐가 너에게 이로운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확률론을 동원해서 신앙을 가지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몽테뉴는 “삶으로 삶을 비춰봐라.”고 말한다면, 파스칼은 “삶을 삶으로 비춰보면 삶의 색깔을 알 수 없다. 죽음의 빛으로 삶을 비춰봐라. 그러면 삶의 색깔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가짜 행복을 바라다가 멸망하지 말고 참 행복을 찾아서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라.” 이상 마치겠습니다.
[진행자] 일단 박수를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긴 시간 동안 파스칼의 「팡세」를 풀었습니다. 너무나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희가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다방면에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자, 과학자였습니다. 신앙, 신에 대한 탐구 때문에 그 부분을 소홀히 여겨서 안타깝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참 재미있는 것이 「팡세」를 잘 읽어 보면 실존주의 작품들, 문학이나 철학서들을 이해하는 데에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파스칼에게 빚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주 섬세하게 인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파스칼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의 비참함, 그것만을 딱 따다가 인간이 이렇게 비참한 존재다, 그리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꼭 필요한 존재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니까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을 선행한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것을 따오는 것입니다. 니체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니체는 파스칼이 너무 천재성이 있고, 인간에 대해서 기가 막히게 자기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했다고 보았습니다. 파스칼이 인간을 그렇게 고민하면서 신이 없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렀으면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을 텐데, 혹은 아예 그쪽으로 안 가고 과학 쪽으로 갔어도 어마어마한 더욱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을 텐데 결국 하나님을 믿어 버린 것이 니체로서는 파스칼의 대실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그의 수학자로서의 어마어마한 재능을, 있지도 않은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정말 애석한 일이다. 천재의 낭비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진행자] 꼭 그렇게 보지 않는 관점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당연합니다. 그렇게 보지 않는 관점이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과학자로서의 파스칼보다는 사상가로서의 파스칼을 통해서 오히려 인생에 대한 해답을 더욱 얻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진행자] 좋습니다. 자, 그러면 파스칼의 「팡세」. 저희가 지금 2021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남준 목사님] 한 문장으로 말하겠습니다. 너무 힘든 세상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하지 말고 가볍게 살라고 합니다. 파스칼의 「팡세」를 종합해서 마지막 저의 말로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생각이 가벼우면 대신 인생이 무겁다.” 너무너무 가벼운 생각으로 살면 결국 압사당하고 말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행자] 이 시대에 생각이 너무 가벼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아까 저희가 ‘디베르티스망’-회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잘 보십시오. 웬 방이 그렇게도 많습니다. 먹방, 노래방, 갈방, 벗방, 수많은 방들이 있지 않습니까? 요새 트로트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소비문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회피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그러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정신은 계속 분산되어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갖지 않습니다. 근원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인생의 무게에 눌려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이나 SNS에 가짜로 자기가 이러한 호텔에 다녀왔다는 등, 이렇게 허황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여러분 자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의 가벼움에서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행자] 김남준 목사님께는 「팡세」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팡세」는 정확하게 말하면, ‘나라는 목적지로 가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정확한 내비게이션입니다. 남이 그려주는 약도 같은 것으로 나를 찾아갔는데, 대부분의 약도가 가짜입니다. ‘저거 찾아가지마. 가면 있지 칙칙하고 골치 아프고 기분 나쁜 것만 있어. 그러니까 다른 데로 가.’ 그래서 가보니까 신기루입니다. ‘성공을 향해 가.’해서 가보면 또 신기루입니다. 파스칼의 팡세는 정확하게 내가 참으로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안내하는 정확한 내비게이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오늘 저희가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고 파스칼의 「팡세」를 살펴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나라는 목적지로 가는 내비게이션’이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많은 독자 여러분께도 그런 내비게이션을 찾게 되는 시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팡세」를 통해서 ‘나’라는 목적지로, 옳은 길로 가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여기에서 이만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신 김남준 목사님께 다시 한번 박수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블레이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걸어라. 만일 이긴다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지만 진다 해도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 말고 신을 믿어라.” 이토록 강력한 선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그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를 찾아와주신 하나님, 진리를 발견한 후 그가 한 선택, 그 선택이 낳은 「팡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읽힐 전도서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의 서재에서도 「팡세」가 재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희는 이만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