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다 고하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녹취자 : 박나리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찬송가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온 것은 19세기였습니다. 19세기 말 나폴레옹의 전쟁으로부터 시작해서 미국과 영국의 반목, 크림전쟁,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프랑스 등 전쟁이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많은 찬송가들이 작곡되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울려 퍼졌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이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5편은 널리 알려진 다윗의 탄원 시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은혜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한 절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주께 다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시는 아마도 사울로부터 정치적인 박해를 받을 때 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왕이 된 후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을 떠난 시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필이면 '여호와여'라는 명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본명입니다. 너무 거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써놓고 부르지 못하던 바로 그 존함이었습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 성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 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깊은 영혼의 위기 속에서 여호와를 부른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호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언약 자손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 드린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린 시간은 '아침'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시간을 유난히 특정합니다. 언제나 안 계실 때가 없으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특정한 때가 있다는 것이 조금 우습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침은 특별한 희망과 기적의 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보케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우리처럼 아침 시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시간대, 즉 새벽 미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완전한 낮이 되기 전까지 넓은 시간대를 모두 포함하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 성경에 '새벽에'라고 나온 것은 히브리어로는 다 '보케르'입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 홍해가 갈라진 것도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가나안 정복에서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사건도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맛본 적이 없는 기적의 양식 만나가 내린 시간도 바로 이때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시간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들은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슬픔에 잠겼을지라도 아침에는 은총이 깃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30편 5절에서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또 한 가지 살펴볼 사실은 ‘나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콜리'라고 하는 단어는 엄밀한 의미로는 속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울리며 발화하는 음성입니다. 이는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정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이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기도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한 탄식의 부르짖음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특별한 열심을 차마 억제할 수 없어서 결국 간절히 부르짖게 된 기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을 존경하지만, 그 말씀에 대해서는 현대 문맥에서 100%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당시에 신비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기도의 관습에 대항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소리를 내지 않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예외가 있는데 대표 기도를 할 때와 도저히 자신을 억제할 수 없을 때만 소리를 내라고 했습니다. '나의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하는 것은 그저 평범한 묵상의 기도가 아니라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평범한 시기에도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위기와 어려움의 시기에는 그 이상의 기도가 필요한데 지금이 바로 그렇게 기도해야 할 시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상황을 주신 것은 특별히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음은 기도가 솟아나는 샘이니, 샘인 마음에 은혜의 물이 고여있지 않으면 기도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은혜가 마음에 고여있으면 기도만큼 즐겁고 기쁜 일이 없습니다. 은혜는 사랑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그 정서는 수많은 언어를 솟아나게 합니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문학가가 되고 열받으면 이 속에서 대상도 없는데 수많은 언어가 쏟아져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정동이 주는 언어의 솟아남입니다. 시련 속에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때 기도는 말이 되어서 터져 나왔습니다.
시인은 악인과 자기를 미워하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시인은 비록 어제 저녁에는 커다란 슬픔 속에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은총 안에서 눈뜨리라고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세상과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서 소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운명처럼 지속되는 절망의 밤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절망하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결코 희망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희망의 아침을 주십니다. 우리의 절망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는 우리 마음에서 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힘껏 헌금을 해서 노회의 상가교회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3배의 헌금이 나왔습니다. 1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한 개척교회 목사님의 영상이 온 교인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도저히 상가 월세를 낼 수가 없어서 어느 날 기도를 했답니다. "제가 이제 이 교회를 접어야겠습니다. 도저히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명단을 적어놓고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세어보니 12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 생각에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성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12명의 교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거기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그 영상을 보고 앞에 있던 장년 남성 한 분이 어깨를 들썩이면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넘치도록 헌금을 해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절망이라고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을 갖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들으시리니'하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티시마', 당신은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샤마'라는 단어는 아주 의미가 깊은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샤마'를 안 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hearing'이 아닙니다.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기울여서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하며 듣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 이 시인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믿음입니다. 의미를 파악하고 그대로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동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편 50편 7절, 이사야 7장 13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지엄한 명령은 '너희는 들을지어다'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선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사랑하는 엄마가 질병으로 아파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기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 애정 어린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자세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봉사를 많이 한 사람들은 자기가 평생을 봉사하며 살았다는 자기 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없음으로 오늘날 영적 생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최고의 애정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경외심의 표현이고, 하나님이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것은 비할 데 없는 애정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돌아보면 힘들었던 때가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형편을 알아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내 마음속에서 끊어질 때 지옥과 같은 목회의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저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해오면서 이런 때를 수없이 지났습니다. '목사님, 그 불같은 시련의 때를 어떻게 지나셨어요?'하고 묻습니다. 나는 실제로 그때만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의 눈물 밖에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도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당신이 내가 저의 기도를 듣고 있노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상처가 없습니다. 시인은 이런 시련 속에서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죽을 것 같은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갖는 목회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음은 '주께 다 털어놓았다'라는 것입니다. 우선 시편 5편 3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침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아침에' 자신도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라고 말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개인 기도의 중요성을 읽어내고 싶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기도와 관련할 때 시종일관 1인칭을 사용합니다. 1절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2절에서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또 오늘 이 본문에서는 '내가 기도하리이다'라고 1인칭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개인 기도의 중요성과 공동체 기도의 중요성을 함께 나란히 강조합니다. 기도하지 않던 각 개인이 수없이 모여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살아있는 공동체의 기도가 될 수 없고,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에 각 회원이 개인적으로는 열렬히 기도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개인 기도라는 벽돌 한 장, 한 장이 쌓아 올려지지 않고는 결코 공동체적인 기도라는 집이 건축되지 않습니다.
개인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 개인 기도에 약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으셨답니다. 설교와 기도가 어떻게 다른지 물어봤습니다. 이미 전성기를 지났고 노련해진 분이니까 이런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대해서 쓴 박사 논문을 가지고 사모님에게 헌정을 했습니다. 사모님이 다 읽고 나서 나중에 논문 제출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목사님, 세상 사람들은 우리 남편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My husband was a man of prayer, 내 남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의 개인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기도회를 인도하고, 예배 시간에 목회 기도를 하고, 금요기도회이기 때문에 기도회를 이끌어야 하는 것 말고 홀로 주님을 고요히 대면하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 시간의 깊이, 넓이, 길이는 어떻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보다 가치 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은 분산되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의 어명입니다. 왕의 명령 중에는 큰 명령과 작은 명령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왕이 명을 내리면 그것은 한 고을에 해당하는 것이든지 국가의 중차 대안이든지 모두 그 이름이 어명입니다. 그 어명을 거역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이런 어명과 같은 것이 바로 '너희는 기도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명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일에 있어서 목회자들은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어떻게 개인적으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목회자를 통해서 목회를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이고, 주님을 의지한다는 고백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나는 사실상 당신의 자녀가 아니며 나는 나 자신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무언의 고백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마음은 집에서 가출했다는 뜻입니다. 더이상 그분을 의지하고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사람을 원망하지 맙시다.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위기의 순간에 너무 소란을 피우지 말고 조용히 무릎을 꿇읍시다. 우리의 생사를 주님의 손에 맡깁시다. 주님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읍시다. 기도의 의무는 아무도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달라고 온 교인에게 수없이 강요하고 스스로는 별로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기도에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중보의 기도가 본인의 간절한 기도와 만날 때, 벼락이 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오늘날 우리는 이 기도의 영이 죽어가고 있는 교회의 영적 침묵의 상황에 대해서 피 끓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누구였습니까. 그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고난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긴 사람들이었고, 그 기도는 그들의 고통 속에 있을 때 가장 큰 하나님의 신실한 위로였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에서 한 일이 기도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사실 이 짧은 시편 5편 3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도하고'라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에라크레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기도하고'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나는 당신께 모두 털어놓을 것입니다'라는 것이 제일 원문에 가까운 번역입니다. '레카'는 2인칭 남성의 'to'가 붙은 것입니다. '당신에게', '당신께'라고 하고 '에라크'는 '아라크'라는 동사의 1인칭입니다. 1인칭 미완결형입니다. '아라크'라는 동사가 사실 군대에서 많이 쓰는 용어였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한 오를 지어서 흩어졌던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렬하는 것을 '아라크'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많은 무질서한 물건을 정돈해서 놓는 것을 '아라크'라고 불렀습니다. 보따리 같은 데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꺼내어 하나씩 올려놓는 것을 '아라크'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가 시편 23편 5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워서 밥을 먹던 '슐한'이라고 하는 낮은 응접 탁자같은 식탁입니다. 그 동사가 '아라크'입니다. 저는 그 구절을 20여 전에 만나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원수들이 보는 면전에서 하나님이 시인에게 밥상을 베푸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밥상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가족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밥상이 반찬 한두 가지가 올라온 밥상이 아니라, '아라크'의 밥상입니다. 왕궁에서나 받을 수 있는 진수성찬으로 끝이 보이지 않게 배열된 그런 식탁이었습니다. 이것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위기를 만나서 나는 당신 앞에 나의 모든 사정을 털어놓을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엄마 품에서 고자질하듯이 자기 심경에 있는 모든 말들을 주님 앞에다가 털어놓고 있는 심경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사연들을 누구 앞에 진정으로 쏟아놓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음속에 쌓인 사연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연이 있었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기에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사연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사람에게 말하는 대신 하나님께 하나씩 하나씩 모두 쏟아놓을 기도의 뜻을 세웠던 것입니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 인간의 마음은 사연을 갖게 됩니다. 이때 심장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엄습할 때 주님 앞에 상세히 호소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 아닙니까. 이때 사람의 위로를 구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귀에 대고 여러분의 모든 사연을 기도로 고하십시오.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많은 말에 싫증을 냅니다. 그래서 제가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정말 살다가 힘들고 이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죽을 것 같을 때는 목회자를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목회자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너의 사연을 듣고 기도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웬만하면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인생이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면 열 사람 중에 아홉 명은 무시하고 한 명은 고소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줍니다. 백 명에게 이야기해도 그 사연을 듣고 울어주는 사람은 한두 명도 안 됩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목회를 할 때도 사람을 붙들고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구차해지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오히려 시험이 깊어집니다. 입 다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이 길어지면 싫증을 내지만 주님은 오히려 불쌍히 여겨서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언제 기도가 너무 길다고 지겨워하신 적이 있습니까. 같은 사연을 똑같이 수없이 구해도 언제나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마음이 곤고한 사람일수록 사연이 많습니다. 정신에서 소화되지 않은 사연은 마음을 미끄러지게 하거나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 사연을 모두 털어놓는 사람들은 응답을 받습니다. 근심으로 굳은 마음이 녹을 때까지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백했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나의 말을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사 부르짖는 나의 소리 들으소서'라고 주님 앞에서만 탄식했습니다. 다윗을 우리가 윤리라는 기준으로 놓고 보면 쓰레기입니다. 이스라엘 수 많은 백성들 중 인구조사는 일반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내놓는다고 할지라도, 다윗 만한 간음죄, 살인죄는 이스라엘 백성 천 명에 한 명도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 명에 한 명이 그런 죄를 지었으면 이스라엘은 이미 정상적인 사회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인간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수준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벤자민 블래킨리지 워필드가 51편을 강해하면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워필드인가 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아주 아름다운 필체로 다윗의 죄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깨닫게 했는지를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은 웬만하면 단언하지 않는 분인데 단언했습니다.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도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두 가지 명제, 인간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윤리적 수준을 가진 사람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두 명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 해답을 우리는 여기에서 만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은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 앞에 주저앉아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점에 있어서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가혹하리만치 길고 험난한 영혼의 침체 속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분의 품 이외에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는 사람임을 그는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심지어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품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라리이다'라는 말로 끝을 냅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라리이다'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대부분 '바타흐'라는 동사를 쓰는데 여기에서는 다르게 '아차페'라는 동사를 씁니다. 직역을 하면 '그리고 나는 밖을 쳐다볼 것입니다' 입니다. 이렇게 번역해봐야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할테니까 그냥 퉁 쳐서 '바라리이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희망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사방이 막혀있는 상황에서 자신은 현실 너머의 창밖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환경이 가져다주는 풍경은 그렇게 할 수 없는데, 믿음의 눈으로 현실 바깥을 본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을 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다'고 이사야 53장 6절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그분께만 기대어 희망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살아있을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냈을 때나, 혹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넓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없다가 생겨나고, 있다가 자라고, 어른이 되고, 힘차게 살고, 병들고 늙고 죽고, 거기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바로 현실 바깥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낭떠러지로 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리고말하십니다. '자, 너의 마지막 희망이다. 내 손을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힘겹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디에서 밝은 소망을 찾겠습니까. 흔들리는 가시에 찔린 백합화는 그 때문에 더 많은 향기를 바람에 보냅니다. 밤에는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며 잠들었을지라도 아침에는 희망의 햇살에 눈뜨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던지 고요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합시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사람에 관해서 하나님께 말하는 일은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 현실에 묶이지 말고 소망의 창밖에 있는 제3의 현실을 바라보며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도록 주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