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이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로 말미암아 의의 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9-11)
녹취자 : 오희열
이때 사도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때 자신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에 알려주기 위해 말하는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평소 사도바울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목양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원래 이 목양은 목회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목회자 혼자 목양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많은 성도들이 함께 말씀의 종이 되어 연약한 성도들을 목양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원래 이 “목양한다”는 말은 목자가 양을 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양들이 꼴을 잘 먹고 잘 자라고 위험에 빠지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똑같이, 목양을 한다는 것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 자매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여 잘 돌보고 사랑하여 성장한 신자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모두 사람입니까? 사람다운 사람이 있고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신자가 모두 신자입니까? 신자다운 신자가 있고 신자 비슷하지도 않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돌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목양의 사명을 목회자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열심있는 여전도회 회원들이니 교회에서 모두 구역장이나 혹은 순장이나 등등 안 해보신 분이 없을 것입니다. 일평생을 교회와 함께 성도들을 돌보며 사셨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 목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목양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양입니다. 훌륭한 목회를 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많이 길러낸 목회자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고 화려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얼마나 순수한가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통해서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또는 하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잘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고 목양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한 사람이 계속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아니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그래서 이 목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다시 만나셨습니다. 일체 책망하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교회를 일으키실 것이고 성령이 강림하시면 첫 번째 교회인 이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로 베드로를 지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불쌍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도 아니고 오직 한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이것이 목양을 하는 사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 왜? 그렇게 영혼들을 돌보는 일 이외에는 마음 쓰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전심으로 영혼을 위해 헌신하던 사람들이 목양의 사명에서 이탈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어려워서 입니까? 힘든 일이 많아서 입니까? 언제는 어려운 일이 없고 언제는 힘든 일이 없었습니까? 세상사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들어보면 눈물겨운 사연이 있고 고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가장 보람있는 일은 영혼을 전도하고 전도한 영혼을 목양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 이외에 더 이상 기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람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은 예배당을 짓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의 마음이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 위로 목회자로부터 저 아래로 유치부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의 지체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게 되는 것, 이것이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얼마나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은 영혼을 위해 수고함으로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일을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중 교회가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 목회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만 교회가 목양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냉담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 교인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그냥 인간들끼리 나누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헤 아가페”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교인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이 심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예수를 믿었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어진 첫 번째 경험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처음 믿은 그 순간이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죄를 짓고 못된 삶을 살아도 이 사랑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쇠약해질 수는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고 순종하고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목양을 받으면서 교회를 섬기면 이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은 점점 식어서 꺼지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아주 희미한, 재 속에 남아 있는 불꽃처럼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수시로 이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해지도록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하나님과 함께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질 수 있는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는 “지식”, 두 번째는 “모든 총명”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있는데 그 타오르는 불길 바로 아래 두 개의 장작이 놓여있습니다. 거기에 불이 점점 더 활활 타오릅니다. 하나의 장작은 지식이고 또 하나의 장작은 총명입니다. 하나님을 괜히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몰랐던 것을 깨달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몰랐던 말씀을 깨달음으로,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성경에 “에피그노시스”라고 되어 있는데 “에피”라는 전치사에 “그노시스”가 붙은 것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눈을 뜨면 삼라만상 많은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세상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에게 돈이 많고 신앙이 없을 때 돈을 벌면 돈이 보였습니다. 그때 돈을 보는 것과, 예수를 믿고 회심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후에 돈을 보는 것, 똑같이 그 돈이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은 사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먼저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들을 올바로 보기만 한다면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이 어두워졌고 그것으로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수많은 이방의 사상들과 이교와 우상숭배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이세상 지식에서도 얻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가장 충만하게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전한 지식, 특히 하나님과 만물을 아는 지식을 온전히 갖게 되면 갖게 될수록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하는 지식, 인간을 아는 지식, 세계를 아는 지식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나를 알고, 나를 아는 것만큼 다른 사람을 알 수 있으니 그 지식이 우리의 마음에 주어질 때 우리의 작은 사랑은 다시 불타오르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마음 한복판에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간절히 찾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사명입니다.
호세아 4장에서는 호세아 선지자가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한탄하기를 “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이들을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갖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단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매일매일 연구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맛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들려주어야 하고 성도들은 그것을 이 세상의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게 받아들일 때 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람의 사랑은 점점 더 불타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이 총명은, 번역을 이렇게 해놓았지만 매우 어려운 단어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판단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판단이 떨어지는 사람을 가리켜서 총명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이 총명은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력, 판단하는 지식,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것이 우리 마음속에 확 다가오는 것, 이것이 총명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총명과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 데도 없다, 왜냐하면 눈에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있는 것은 반드시 보이는 것입니까? 우리 중에 양심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있는 것입니까? 외과의사가 사람의 배를 가르고, 고무장갑을 끼고 오장육부를 헤쳐 본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양심이라는 장기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장기가 있는 것처럼 확실히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이런 물질이 있는 것처럼 계시지 않을 뿐이지 오히려 하나님은 더 확실하게 계신 분입니다. 그것들을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의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논리가 있습니다. 1더하기 1이 2인줄 아는 것은 이성의 논리에 의해서 알고, 날이 추우면 따뜻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도 이성의 논리에 의해서 알지만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다, 하는 것들은 마음의 논리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결국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잘 믿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섬겨보면 믿음이 충만한 사람과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위험해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훌륭한 목양이라는 것은 첫째로는 하나님에 대해 잘 가르쳐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을 섬겨서 그들에게 믿음이 생기도록 돕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시지만 영혼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니, 이렇게 믿음과 지식이 점점 더 충만해질 때 불길은 점점 더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이쑤시개 두 개를 놓고 불을 지른들 얼마나 불이 타오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당만큼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른다면 아마 그 불길은 대전시 아무데서나 다 보이는 불길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사람들 속에 역사할 때 그 때 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교회의 평판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걱정합니다. 그렇지만 백번 걱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걱정할 시간에 한 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한 사람이라도 더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내게 티끌만한 믿음이라도 더 생기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믿음을 갖게 만들어줄 때, 그 일을 위해 성령님이 역사해달라고 기도할 때 오히려 사람들은 훨씬 더 놀라운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지저분해보여도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형편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진짜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일일이 살피셔서 훗날 그들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목양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풍성하다는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로 양동이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 물을 꽉 채우고 꽉 찼는데도 계속 부으면 물이 바깥으로 넘칩니다. 그런 동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차서 넘칩니다. 물이 넘치듯이, 우물에 물이 꽉 차서 흘러 넘치는 광경을 뜻합니다.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사랑이 그렇게 풍성해지는 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교회를 원하시겠습니까? 이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풍성해진 사랑,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1902년도에서 1904년도 경에 인도 카시라는 지방에서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이방의 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지역을 존스턴이라는 미국선교사가 이런 간증을 남겼습니다. 자기가 거기 가보니까 동네에 어른들이 없습니다. 아이 몇 명씩, 예닐곱씩, 열 명씩 모여앉아 있었습니다. 울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아이들에게 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너희 동네 어른들은 다 어디 갔니?”, “우리 엄마 아빠는 다 부흥회 갔어요.”, “너희들은 왜 여기서 울고 있니?”, “우리는 우는 게 아니라 기도회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니?”, “예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 사랑한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너무 슬퍼서 우리 모두 울고 있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사랑을 가지고 그의 삶과 인격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첫 번째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며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하며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풍성해지고 나면 첫째, 분별력이 있게 됩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분별력은, 겉으로 볼 때 모두 좋아 보이는데 그 중에서 최고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해낼 수 있는 분별력입니다. 이 분별력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도키마조”인데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것을 보면 옛날 같았으면 영락없이 유리로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유리와 똑같이 보이는 아크릴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유리와 너무 비슷해서 유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아서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이 끝을 칼로 긁어보면 압니다. 유리는 흠집이 나지 않지만 아크릴은 금방 흠집이 생깁니다. 그렇게 검사해보는 행위를 가리켜서 “도키마조”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좋아 보입니다. 살인을 하고 악을 저지르는 사람도 그들 보기에는 그것이 좋아보여서 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일이 어떤 때는 쉬운 것 같지만 어떤 때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던 훌륭한 사람들도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이유는 분별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식과 믿음으로 충만해질 때 분별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러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분별력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뚜렷한 분별력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삶에 있어서 판단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개 판단이 흐려지는 이유는 마음의 정이 옳지 않은 데 가 있기 때문에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지식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지면 분별력 있는 삶을 살게 되니 이런 분별력 있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목양이라는 것은 사람을 기술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진실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진실하여”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엘리크리네스”인데 “판단하다”라는 “크리네스”와 “에일리”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에일리”는 첫째로 “햇빛”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돈이나 그림, 증서가 있는데 진짜와 똑같아 보이는 그것을 햇빛에 비춰봅니다. 그러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채”라는 뜻이 있습니다. 밀가루가 있는데 그 밀가루로 맛있게 요리하기 위해서는 채에 밀가루를 칩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정교하게 곡물을 갈지 못하고 맷돌 같은 것으로 갈았기 때문에 그대로 음식을 하면 거칠어집니다. 그것을 고운 채에 치면 고운 가루는 빠져나오고 굵은 것은 거기 남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짜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이 단어가 가진 의미입니다.
진실한 것은 솔직한 것이긴 하지만 그냥 솔직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 진리와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네가 그랬지?”, “그래, 내가 죽였다. 내가 뺏었다. 어쩔래?” 하는 것은 솔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라는 판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행위를 판단하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막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우리는 진실해집니다. 야단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내 비밀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내 삶이 순전하지 않다고 꾸짖었습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순전하지 않다고 꾸짖었고 내 마음에 순결이 없다고, 내가 나의 생각과 욕망이 더럽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지식이 생기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이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후회하며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그 진리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온갖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도 더 원하는 것이 진리에 합치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함입니다. 목양을 했는데 그 사람들이 짐승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목양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을 위해 많은 일을 해도 그들을 이단으로 이끄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목양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목양, 참답게 목양하는 사람의 가장 큰 자산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시로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비해서 자신은 얼마나 멀리 있는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책망한 사람도 없고 야단친 사람도 없는데 그는 고요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삶 속에 감추어져 있던 더러운 욕망들, 삶을 위한 순전하지 않은 동기, 그리고 그릇된 욕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교만, 명예욕 같은 것들을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 아무도 그의 잘못을 하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은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지만 이 사람은 마음에 깊은 가책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채찍을 맞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리고 온전히 회개할 때 그때 그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됩니다. 이 진리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많은 카드를 내 놓으십니다. 부귀, 영화, 명예, 권세, 장수, 미모 등등의 카드를 내미실 때 여러분이 제일 먼저 붙들어야 할 카드는 진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다윗이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은 인간쓰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간음도 하고 살인도 한 사람이 몇 명 쯤 되겠습니까? 백성 열 명중에서 서너 명이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그랬으면 그것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만큼 사랑해준 사람이 없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신학자 존 오웬 목사님은 “구약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 쓰레기 같은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다윗보다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 못된 사울도 간음을 하거나 살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큰 죄를 지은 다윗을 왜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는 진실했습니다. 고무줄을 잡아당겨보십시오. 손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내 손에 있지만 놓기만 하면 자기 자리로 튀어갑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고백하고 자신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으니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자기를 다시 사랑해달라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 가지고 잇는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처럼 이렇게 거짓이 가득 찬 시대에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부자가 되어서 돈 몇 푼 사회에 내놓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치 현실이나 사회 현실을 보면서 좌절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정직이 사라졌습니다. 공평이 없습니다.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직해지거나 공평을 어기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진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음입니다. 여기서 “허물”은 흠입니다. 과일 중에서도 백화점에 가보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싸게 팔리는 과일들이 있습니다. 굴비도 그렇게 비싼 것이 있는 줄 알지도 못했습니다. 어디서 보니까 상류층 사람들이 먹는 굴비는 열 마리에 오백만원에서 육백만 원짜리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법성포에 내려갔는데 굴비 엮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물어보니까 그런 굴비는 조기를 열 짝, 스무 짝, 어떤 때는 서른 짝을 잡으면 한 마리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모았다가 오동나무 박스에 넣어서 특별상품으로, 수조기는 안 되고 알까지 배어있는 암조기로 만드는데 수백 짝 중에서 골라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고깃집에서 자기 집에서 파는 고기가 얼마나 놀라운 소고기인지를 설명하면서 사천 마리를 잡아야만 한 마리 나오는 고급품질의 고기라고 합니다. 아무리 큰 과일이라도 최상품은 될 수 없습니다. 여기 흠이 없다는 말은 과오와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설명을 다 빼고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이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빼 놓고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하나님 빼고는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힘쓰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순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순정이 없으면 그것은 걸레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누구든지 모두 순정의 사람이 됩니다. 최고의 사랑을 그에게 바치고 싶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누구든지 결국은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려고 그렇게 머릿속에 그리면서 사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백지를 놓고 원을 그려보라고 하면 콤파스 없이 어떻게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려봐야 완벽한 동그라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항상 완벽한 동그라미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도 허물없이 살 수는 없지만 그것을 핑계삼지 말고 허물없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정직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눈치없이 남에게 누를 끼치는 삶을 살지 않기로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고 난 후에 “난 정말 잘 살았어!”하고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은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는 마음의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허물없이 살아야겠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누구에도 누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존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게 만드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살아야 합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목양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 사랑은 지식과 믿음이 주어짐으로써 풍성하게 된다는 것, 그 사랑이 충만해질 때 분별력을 가지고 살게 된다, 그리고 진실하게 된다. 그리고 허물없이 살게 된다. 결국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무엇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해져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런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해주신 열매가 무엇인지 충만하게 드러나고 결국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곳은 인간의 마음속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분별력있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그의 삶을 통해 보여줍니다.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여러분은 교회에서, 사회에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