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3)
녹취자: 조경훈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가 처음 접한 것은 로이드존스 목사님한테 설명을 듣고 베르노프트루트판을 제가 손에 넣었습니다. 그 땐 제 관심사가 부흥이었고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사도 부흥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의 에드워즈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책을 손에 넣자마자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엄청난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목회를 열심히 하면서 한 동안 에드워즈가 좀 뜸했습니다. 오히려 존 오웬에 심취하게 됐습니다. 존 오웬이 6-700페이지 되는 책을 전집에서 16권을 썼는데 10여 년 동안에 거의 읽은 것 같습니다. 설교집 한두 권을 빼놓고는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에드워즈를 본격적으로 읽게 됐습니다. 에드워즈를 읽을 때에 제가 어거스틴에 깊이 심취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남긴 작품은 사람에 따라서 판단하는 게 다른데 400여 편 되는 설교집을 한 권으로 친다면 119권 정도를 저술했고 분류 방법에 따라서 200권에서 400권 까지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어쨌든 방대한 저작을 남깁니다. 이 시간에 다 다룰 수는 없는데 어거스틴에 깊은 사랑에 빠지면서 어거스틴을 통해서 철학에 눈을 뜨게 됐고 어거스틴을 이해하려니까 플라톤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플라톤을 일 년 간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했습니다.
공부하면서 철학에 눈을 떠다가 에드워즈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에드워즈가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됐었는데 너무 이해가 잘 되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적인 내용이 에드워즈의 작품 속에 많이 있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에드워즈에 대해서 찬사만 많이 들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모두 첫 번째고 모두 인류 최초고 모두 신학에서 최초이고 철학에서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설명을 들었는데 철학을 공부하고 특히 어거스틴에 대해서 일가견을 갖고 난 다음에 에드워즈를 보니까 에드워즈의 저작 중에서 두 세 페이지가 거의 어거스틴의 일정 내용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습니다. 베껴서 썼다 라기 보다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 말로 했는데 그것 자체가 어거스틴화 된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칼빈이나 존 오웬 같은 걸출한 사람들이 다 어거스틴의 사상적 제자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특히 어거스틴의 우주에 관한 것, 미학에 관한 것, 철학에 관한 것들은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그 시대의 독특한 철학과 씨름한 흔적은 세대가 1,300년 이상 차이가 나니까 어거스틴에게서 발견하기 어렵지만 기본적인 큰 틀에서 어거스틴주의자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놓고 위대한 스승들인 어거스틴, 존 오웬, 칼빈을 겪고 나서 에드워즈를 보니까 예전에 에드워즈만 봤을 때 너무 독창적이라고 사람들이 칭송하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과장된 면이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역사신학에서 리챠드 멀러 교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Never say never. never say first. 뭔가 역사적인 사실을 읽을 때 예전에는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이게 최초인데!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렇지 뒤져 보면 해 아래 새것이 없고 누군가는 다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사에서도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들어왔다고 하면 데카르트가 처음이라고 그러는데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되게 많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했지만 훨씬 전에도 상대성원리를 말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전화기도 벨이 제일 먼저 등록해서 그 사람 것이 됐지 다른 사람이 발명했고 전기도 에디슨 말고 여러 사람이 발명했는데 그것을 쓸모 있게 등록해서 상표권을 얻은 사람이 에디슨입니다. 결국은 처음인 것 같아도 뒤져보면 다 어딘가에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떤 위대한 신학자를 공부할 때는 얼마나 많이 그 사람 아닌 사람을 알고 있느냐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결정된다. 에드워즈만을 공부하고 에드워즈 속에만 갇혀있는 사람들이 하는 에드워즈에 대한 칭송은 다 믿지 말라.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부분적으로는 그 사람은 자기 세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훨씬 더 넓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성은 스페셜리티가 좌우하지만 사실은 제너럴리티가 학문에 있어서 더 필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려면 제너럴리스트가 되야 지만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너럴시스트가 안 된 상태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되면 깊을 박의 박사가 아니라 얇을 박의 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논문을 써서 요렇게 내려간 것 이외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책들을 읽으면서 학문적인 영역을 넓혀가야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에드워즈를 약간 늦게 읽은 것이 에드워즈의 사상 전체를 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해하기 힘들었을 에드워즈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계몽주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유럽은 어떠했을까요? 데카르트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못 드리는 것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유럽은 데카르트 이후에 대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명제 자체가 꼬기또 에르고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존재하는 것 아니고는 생각을 할 수 없는데 이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얘기하니까 결국 존재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는 자기 안에 있다는 사상이 횃불을 들면서 이 후의 근대 철학들이 그런 사고를 계속 따라갑니다. 니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계몽주의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 이전까지는 서양에서 삼학(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사과(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를 통해서 인문학과 자연학을 공부하고 그 위에 신학을 공부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가르쳐주는 학문이 신학이었습니다. 그게 이미 계몽주의를 맞으면서 이미 유럽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데카르트가 기여한 것은 물질문명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사실이 있어도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을 데카르트, 뉴턴을 거치면서 객관적인 사실들 속에서 법칙을 만들어내니까 현상이 없어도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공식이 성립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 현상을 분석하면서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정신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뉴턴이 자연현상 모든 것을 수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수식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은 정신적인 것들이 아니라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것들입니다. 이게 발전하면서 정신과 영혼들에 대한 깊은 사유는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는 법칙 때문에 가능해지는 물질적인 생산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19세기에 들어와서 소위 얘기하는 과학실증주의가 생겨나면서 심지어 인간의 심리까지도 계량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싹트게 되면서 그 후에 유럽의 모든 학문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에드몬드 후서 같은 사람이 유럽 학문에 심각한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계량화되고 인간의 심리까지도 과학적으로, 물질적으로 설명되고 계량화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 전제 위에서 세운 학문은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고 자신이 이것을 새로운 학설로서 이 기반을 허물어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제시함으로써 유럽 전체를 다시 희망적으로 살려내겠다고 야심차게 만든 학문의 체계가 현상학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런 것들이 다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예전까지는 모든 학문들을 장악하는 학문이 철학이었고 ‘안칠라’ 라고 하는 철학이 시녀가 되어서 여왕을 떠받들고 있었는데 그 여왕이 신학이었습니다. 문제는 철학이 학문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해석들이 나오고 철학적인 주장을 하지만 사람 자체의 관심사가 형이상학, 실재, 존재하는 것들 너머에 뭐가 있을까? 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물질에 생각이 경도되기 시작합니다.
15세기 부터 시작됐던 대륙의 국가들의 해양시대가 열립니다. 17세기가 지리 발견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대항해시대로 지리 발견의 시대가 열립니다. 영국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 17세기에 이미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공장재 공업들이 이루어집니다. 예전에는 요런 거는 김씨네 입은 이것만 만들고 이씨네 집은 이것만 만들어서 물물교환을 하다가 농한기에 시골에서 농업만 가지고 해결이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와서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대량물자를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이미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7세기 후반기에 폭발적으로 공업이 성장을 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증기기관이 발명이 되고 풍력이나 수력만 겨우 이용했는데 어디서든지 돌려서 운동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시설들이 생겨납니다. 증기기관차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이 뉴턴 이후로 그런 것을 뒷받침 해 주는 것입니다. 과학법칙을 발견한 후 생산으로 바로바로 연결이 되면서 폭발적으로 물질문명이 발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학문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니까 학문의 수요가 그 쪽으로 확 쏠리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요즘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짱짱하게 있었던 철학과가 다 없어집니다. 그렇게 물질문명으로 가고 그것만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장악할 수 있는 학문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철학이 통제를 하면서 심리학, 물리학 이런 모든 학문에 정신을 불어넣으면서 통합을 했는데 이 기능 자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산발적으로 파편화된 풍조가 이미 미국으로 쓰나미 처럼 밀려오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점에서 18세기에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던 유럽의 사조, 뉴잉글랜드의 지성계를 강타하고 있었던 현대사조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그 이전의 사람처럼 공부하는 방식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에드워즈가 뒤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신학 그 자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지혜의 학문이라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학문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학문이 있을 수 없다고 봤습니다. 모든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니까 창조된 모든 것들이 창조하신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지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고 학문의 의무는 그 연관관계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신학자의 임무는 신학만 하는 사람은 신학자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능력이 됐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었던 것일 것입니다. 모든 학문들과 역사들을 가지고 학문을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존 오웬같은 경우도 소위 biblical theology 라고 하는 언약신학의 책을 보면 이게 과연 개혁주의의 최고봉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그리스 고전의 문헌들, 심지어 신화 이야기들이 500여권 이상이 레퍼런스로 등장을 합니다. 거의 그것들을 다 꾀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관심사는 결국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과 학문 사이의 연관관계가 깨질 수 가 없고 깨지면 그 자체가 제대로 된 학문일 수 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물질적으로는 미친 듯이 연구를 합니다. 과학계 안에서도 문제는 자기가 하는 것만 합니다. 옆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제일 먼저 소개하려는 네 권으로 돼 있는 책이 미셀러니입니다. 꽤 두껍습니다. 여기 보면 엔트리노쓰 해 놓고 알파벳의 순서대로 나오는데 자기가 기호를 부여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에 대해서 나의 눈을 열어준 것이 네 권으로 된 미셀러니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미셀러니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묵상록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데 에드워즈가 직접 노트에 기록한 미셀러니입니다. 말 타고 다니면서 한 게 아니라 앉아서 막 쓴 것인데 그 때 쓴 노트입니다. 에드워즈의 아들이 아버지의 노트를 생명처럼 간직했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아버지의 자료만 가지고 씨름을 해서 목회가 위기에 처할 정도로 아버지 문집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보관을 했기 때문에 이것들이 아직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과 비교하는 사람이 테르툴리아누스입니다. 이 사람은 정통 가톨릭에서는 갈라져 나와서 몬타누스파로서 일생을 마치기는 했는데 이 사람의 작품을 읽어보면 굉장히 깊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 유명한 말이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냐?’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신학을 철학화 하지 말라고 얘기했던 사람인데 사실은 굉장히 많은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들을 이 사람이 다 세웁니다. 어떤 학자들은 거의 200여개 정도가 되는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들을 수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게 아니라 20개 정도가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단어 중에 하나가 트리니타스라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이 사람이 만듭니다. 이 사람 자신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뭔 상관이 있냐? 라고 얘기해놓고 자기는 굉장히 철학적으로 글을 씁니다.
대표적인 게 기독교 호교론, 말키운에 대한 논박이 나옵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잉크통이 있는데 어떤 책을 보니까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팡이 위가 열리게 되있는 데 거기에 잉크와 펜이 있었다고 합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뭔가 생각이 나면 바로 메모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듯이 에드워즈도 옷에 다가 다 꽂고 다녔을 정도로 메모광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신학 묵상을 쓰는데 토대가 되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머릿속이 성경만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라 철학, 역사, 문학, 하바드 클래식 라이브러리에 나오는 상당수의 그리스 로마 고전들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어려서부터 사유를 키워갔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나오면, 예를 들어 활짝 핀 꽃으로 시작해서 신학, 철학 같은 것들이 막 오고가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5-6페이지가 계속 되기도 하고 1-2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미셀러니가 섞여서 700페이지 정도 되는 4권의 책에 섞여있습니다. 다 읽지는 못해도 영어로 된 책을 펼쳐 보시면 어떤 식으로 이 사람이 사유를 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학문의 세계를 진정으로 보게 해 주는 것이 미셀러니였습니다. 진짜 깊이 있는 내용이 미셀러니에 많습니다. 에드워즈에 대해서 논문을 쓸 때 제일 덜 인용이 되는 것이 미셀러니입니다. 상세하게 읽고 적합한 것들을 찾아내서 논증 자료로 쓰기까지는 상당한 독서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관심사가 많아서 우리나라에서 에드워즈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났습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눴는데 최근에는 모르지만 10년 전까지는 10명 정도 되는 사람을 만났는데 아무도 에드워즈의 전집 27권을 모두 읽은 사람은 못 만났습니다. 그것을 읽는 것 자체가 영어를 아주 잘 한다고 쳐도 최소 3년은 읽어야 되는 분량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 읽고 에드워즈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에 ‘구속사’ 는 유명한 책입니다. History of work of redemption 구속 사역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연속되는 설교시리즈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서른 개의 설교로 엮어진 구속사와 비슷한 게 또 하나가 있는데 구속사 저술을 위한 노트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설교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사라고 다루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구속사를 다룹니다. 이 사람은 자기 직전의 시대까지를 다룹니다. 그것을 가지고 학자들이 시비를 많이 겁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 역사를 펼치면서 어떻게 악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싸웠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 역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셨는지? 를 자기 직전의 시대까지 언급을 합니다. 어떤 학자들 눈에는 그것이 너무 자의적이고 자기가 보고 싶은 데로 역사를 해석한 것이라고 했지만 에드워즈의 관심은 하나님의 구속사는 성경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속의 대드라마는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역사로서 자기 이전의 시대와 자기 직전의 시대까지를 모두 설명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지는 지를 밝히는 것이 역사가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장엄한 역사를 전개해 나갑니다.
유세비우스가 그리스 신학자이지만 기독교 역사를 기독교 바깥에서 그대로 썼습니다. 예수님의 용모에 대한 기록까지 나오는데 굉장히 미남이었다고 묘사가 됩니다. 상세한 것을 기록을 합니다.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특히 ‘엔티퀴티’ 라고 하는 책은 중요한 책입니다. 이 사람이 교회사를 썼는데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입니다.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신국론’ 이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최초에 어떤 사람은 인류역사 최초의 역사철학사 라고 합니다. 역사를 어떤 일관된 시선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안에만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바깥에 까지 보여주었고 이 후의 역사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부터 나왔다고 봅니다. 역사철학이 근대에 와서 전개되는데 예외 없이 신국론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칼빈이 나오는데 그 다음에 존 오웬이 구속사하고 비슷한 책을 씁니다. 비블리컬 씨알러지(biblical theology) 라는 800페이지 이상이 되는 아주 두꺼운 책입니다. 원래 여섯 권으로 돼있는 책인데 이것이 하나로 돼 있습니다. 원래 존 오웬이 이 책을 쓸 때 라틴어로 쓴 것을 나중에 영어로 번역이 된 것이 우리한테 남아있습니다. 존 오웬은 라틴어도 명문이었고 히브리어 랍비들의 글들을 거의 영어처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랍비 문학에도 정통하고 젊었을 때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공부를 했습니다. 천재성도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비블리컬 씨알러지에도 이야기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를 해석하면서 마니교, 펠라기우스주의, 도나투스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참 된 기독교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대의 관심사였는 극단적 이성론자들인 소키누스주의자들, 그 다음에 아리우스주의자들, 아르메니우스주의자들, 특히 그 시대를 강타하고 있었던 이신론과 같은 시대정신과 맞서서 이 일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구속사를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과 비교해서 읽으면 아주 좋은 유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면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은 같은 역사를 다루고 있는 데로 밀림 한 가운데로 흐르고 있는 아마존 강 같은 데를 비행기를 날라 가는 것처럼 조망했다면, 에드워즈의 경우에는 강 위에 배를 타고 지나가는 느낌을 줍니다. 광활한 면에 있어서는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이 훨씬 더 탁월하지만 성경과 관련하여 친숙하게 설명한 것에 대해서는 에드워즈를 훨씬 높이 평가해 줄만 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에드워즈가 쓴 책 중에서 필라소피 오브 사이언스(philosophy of science) 라는 말이 있습니다. 18세기에는 필라소피라는 말이 사이언스라는 말과 유사하게 쓰였습니다. 우리말로는 과학 철학인데 사실은 지금 이야기하는 과학 철학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과학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과학을 해석하는 관점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는 지금 과학 철학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과학 철학의 한 모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과학 철학 책이 뉴턴주의에 대한 해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책에서 에드워즈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연의 모든 역사 중에 천둥과 번개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나는 천둥을 몹시 무서워하던 사람이었고 뇌우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그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나는 뇌우, 즉 벼락이 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느낀다. 그래서 어떤 때는 구름에 시선을 고정하고 번개의 연주를 보면서 장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천둥 음성을 듣는 기회를 가지곤 한다. 그것은 종종 나를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달콤한 묵상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즐거움이 된다. 그래서 그것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하는데 이는 묵상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을 독백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언제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전에는 번개가 치고 벼락이 때리면 두려워서 벌벌 떨었는데 이제는 울려 퍼지는 것을 보면서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에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하면서 미학적으로 관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이 사이언티픽 앤드 필로소피컬 라이팅스(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입니다. 사실은 여기서 과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스파이더 페이퍼, 거미에 대한 관찰에 대해 쓴 것이 나오고 자연신학, the mind 인간의 마음, 그 다음에 쇼터 싸이언스 앤 필로소피컬 페이퍼스 이렇게 다 합쳐져서 과학 철학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잃어 볼 기회는 없으시겠지만 도서관에 가서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한 번 펼쳐서 읽어보면 저의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에드워즈 8권에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이 ‘천지창조의 목적’ 입니다. 원래 제목이 나오는데 dissertations 논문이 나오고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 the worlds.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관하여’ 가 나오고 The nature of true virtue ‘참된 덕의 본질’입니다. 굳이 여기에 true라고 붙인 것은 당시에 인본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18세기에 경건의 기류들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혹은 하나님을 인정하되 하나의 법칙처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선이라고 포장을 해서 윤리적으로 교육을 시키는데 인간의 희망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19세기에 태어나게 될 자유주의에서 추구하는 윤리적 사회에 대한 에티컬 비전(ethical vision)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비평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천지창조의 목적’ 에서 철학적으로 논증을 합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이 2부로 나뉘는데 하나는 성경을 가지고 천지창조의 목적을 설명하고 또 하나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썼는데 성경을 사용하지 않고 이성만을 가지고 천지창조의 목적을 논증합니다. 두 번째 것이 머리를 쥐어짜야 될 정도로 훨씬 어렵습니다. 1권을 잘 읽고 이해하고 나면 2권을 읽는 것도 어느 정도 빛이 들어옵니다. 어려운 책은 틀림이 없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각자 선이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이 선이 결국은 두 가지 외관적인 선이냐? 진짜 선이냐?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외관적으로는 선으로 보이지만 실제적인 선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목적 자체가 당신의 선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선의 이상이었는데 사람마다 각자 자기가 좋은 데로 선을 정하다보니까 아무리 선한 사회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계속해서 확장되어 간다면 어느 지점에선가 반드시 부딪히는 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국수주의자를 예로 들어보면 우리나라를 위해서 애국을 하게 될 경우에는 때로는 중국이나 일본을 원수로 여겨야 되지만 애국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참된 선이 무엇이겠는가? 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 집단의 이득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것이 조그맣게 존재할 때는 문제를 안 일으키는데 그 원리를 계속 확장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부딪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쪽에서 보면 선이 되지만 저 쪽에서 보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선을 추구하게 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선에 대한 최종적인 기준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을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찾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세계 안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데 영광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대로 정돈이 되고 그 안에서 선이 확장되어갈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는 선의 확장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그 안에 흡수되면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인간은 행복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훈련이 조금 잘 되어있으면 어려운 책이 아닌데 훈련이 안되어 있어도 뇌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룹 스터디로 모여서 공부하면서 뇌 근육이 튼튼해지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삼겹살 보다 훨씬 맛있고 돼지갈비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 과 ‘참된 미덕의 본질’ 이 두 개는 쌍둥이 책이라고 불려서 둘을 떼어놓고 읽을 수가 없습니다. 1번을 안 읽으면 2번이 이해가 안 되고, 2번을 염두 해 두어야지만 1번이 이해가 되는 책입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이것이 윗돌이고 이게 밑돌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참된 미덕이 무엇인가? 가 판결이 되고 그 본질이 규정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미덕의 본질이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외모 비하 그런 것이 아니라 가장 쉽게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누가 예쁜 사람입니까? 예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뭐가 예쁜 것을 결정합니까? 그것은 두 가지 조건입니다. 눈썹은 눈썹 데로 예쁘고, 눈은 눈 데로 예쁘고, 코는 코 데로 예뻐야 됩니다. 전 세계에서 최고로 예쁜 눈, 눈썹, 코, 입, 귀가 예쁜 사람을 모아다가 아무렇게나 붙여 놓으면 그 사람은 미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리에 가 있어야 됩니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나오는 유명한 얘기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테니까 당연히 이집트 역사도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로마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아름답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야기 하는 미덕 virtue 라는 것이 뭐냐? 그러면 그 미덕이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의 질서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어느 날 돈 다발을 하나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그러니까 네가 나의 연인으로서 가난한 집에서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이 돈 가지고 명품 구두도 사고 백도 사고 해. 그런데 보니까 손에 핏자국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뺏은 것입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질서가 그런 식으로 부를 누리는 것이 내가 원하는 질서가 아닌 경우에는 그 선물이 나에게 선물이 될 수가 없고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외관적인 선과 실질적인 선의 차이입니다. 참 된 미덕의 본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참 된 미덕의 본질이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함이 있지 않으면 덕처럼 보이는 것들은 계속해서 확장할 때 결국은 충돌하게 되고 그 덕의 힘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설명 해 주는 것입니다.
윤리주의에서 추구하는 덕의 세계와 참된 경건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두 개의 선분이 처음에 출발을 하는데 처음에 각도가 1도 밖에 안 될 때 1센티 갈 때에는 거의 두 개가 갈라지지 않습니다. 10센티 가도 갈라지지 않는데 이게 10미터, 100미터를 가면 도저히 만날 수 없게끔 둘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듯이 똑같이 윤리와 덕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해야 되냐? 하면 이미 그 당시에 인본주의적인 선과 덕의 개념이 들어와서 기독교와 짬뽕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신론자들이 볼 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하고 참 된 사랑 같은 것들이 교회가 침체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미 신앙의 세계에서 저평가되거나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사람을 판단할 때 이 세상은 정의롭고 공평하고 좋은 세상이 되어야 되는데 너는 뭘 기여하고 있느냐? 를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든 아니든 상관없고 도덕적으로 문제없고 참하고 착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면 어떻게 됐든지 간에 좋은 것이고 못하면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관심 자체가 인간 사회가 어울려 사는 도덕이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밑바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덕주의가 참된 경건을 몰아내는 시대의 조류를 보면서, 예를 들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도 못했고 경건하지도 않은데도 착한 세상을 만들려고 하면 착하게 사는 사람, 선하게 사는 사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남에게 폐를 안 끼치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밖으로 나오는 행동들은 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네 자신이 존재 자체가 변해서 변화된 마음을 갖고 속으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마지막에 네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도덕이 거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 도덕의 열매를 가져오게 될 때 그 열매는 천지창조의 목적에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깨지고 나면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마지막에 가서는 거대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과 배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엄격하게 칼날 위에 세워서 그 동기가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가? 하는 것을 집요하게 물어야 하는데 세상의 도덕과 철학은 그 사람을 하나님 사랑하게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손가락질을 해서 내가 도덕적 올바른 사람이 됐다고 하더라도. 죽은 시체에다 화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덕의 본질이 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규명 해 나갑니다.
마지막 결론은 참된 미적의 본질은 세상의 칭찬이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관습을 준수하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천지창조의 목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외의 마음속에 참된 미덕의 본질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도 에드워즈가 쓰는 표현인 소위 얘기하는 사회에서 통용되게끔 착하게 사는 것을 secondary good ‘이차적 선’ 이라고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착하게 사는 것을 primary good ‘일차적 선’ 으로 봅니다. 그런 식으로 선을 나눴다는 것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바빙크의 시대만 해도 교인들이 철학적인 수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번역이 된 바빙크의 신학서론인 ‘마그날리아 데이’ 아시죠? 바빙크 당시에 농부들이 밭 갈다가 새참 먹을 때 읽는 책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신대원 학생들도 그것을 못 읽지 않습니까? 마차에 농기구 싣고 가서 하나 가져가서 밭 갈고 새참을 먹는 시간에 그늘아래 앉아서 읽던 책의 수준이 그 정도였습니다. 지금 같은 때에는 그것을 쉽게 쉽게 풀어놓은 책 조차도 못 읽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는 더더욱 이런 견해가 너무너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바람은 이것들을 아주 쉽게 풀어서 평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교를 하든지 설교가 자신이 없으면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클래스를 만들어서 에드워즈의 책을 들이밀지 말고 그것을 잘 풀어서 쉽게 예화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해서 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선하다는 기준 데로 사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줘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썰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니코마코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쳐줬다는 설도 있다 다른 여러 가지 학설도 있는데 이 책의 전체적인 것은 하나의 주제입니다. ‘좋음’ 이게 도대체 뭐냐? ‘좋음’과 ‘탁월함’ 이게 도대체 뭐냐? 그것을 논증해가는 과정입니다. 꼭 읽어보십시오.
17세기에는 신학자가 될 때 신학자로서 그 사람의 무게를 달아볼 때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Commentary on nicomacan ethics를 쓰는 게 신학에 입문하는 신학자로서의 중량을 재보는 시도였습니다.
왜 이 책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많은 비중을 갖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여태까지 나온 인간의 윤리학적 책 가운데 근본적인 개념의 문제를 이렇게 완벽한 문제로 철저하게 파헤친 책이 없었습니다. 다 산발적이었는데 여기서는 오직 좋음, 탁월함 이 한 가지를 가지고 집요하게 물고 널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윤리학의 기초를 가르치기에 너무 좋은 책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평하라는 뜻은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경건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런 경건이 아닙니다. 이것을 비평해서 대체할 수 있는 기독교 윤리학의 기준이 뭐냐? 그 근거가 뭐냐? 라고 하는 것을 진술하게 함으로써 그의 철학적인 중량감을 재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개인에게 있어서 선이냐? 악이냐? 하는 문제가 윤리의 문제이지만 집단으로 확장되면 정치학이 되는 것입니다. 정치학이 출발하는 게 개인의 윤리학에서부터 출발해서 원을 크게 그리면서 정치학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는 개인이 나의 지성, 감정, 의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작용을 조절하고 무엇을 목표로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의 선한 삶을 증진하고 악한 삶을 억제해서 한 인간으로서 완성된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정치학은 한 두 명이 기준이 아니라 폴리스를 기준으로 하면 만 명, 십만 명 혹은 오늘날 국가로 말하면 몇 천 명, 몇 억의 국민들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배열이 되어서 각자가 질서를 잡으면서 그 질서가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는 악을 끼치지 않는 최선의 형태가 되어서 사회의 행복을 집단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정치학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윤리학과 정치학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학은 윤리학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정치학의 입문으로도 쓰이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다루는 문제의식을 에드워즈는 천지창조의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18세기에 맞는 방식으로 녹여내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진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6개월을 공부해서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순간에 여러분들이 눈이 떠지는 것 같은 놀라운 개안을 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설교에 대한 아주 분명한 철학을 갖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옛날 같았으면 가르쳐 줄 테니까 모이라고 할 텐데 요새는 힘이 없는데 예전에 다 가르쳤었고 강의 자료가 다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을 씁니다. 21권입니다.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을 쓰는데 분량이 아주 작습니다. 칼빈이 삼위일체를 안 씁니다. 칼빈만 안 쓴 게 아니라 초창기 1, 2세대의 종교개혁자들이 삼위일체를 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에 대해 별로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교회 보편성에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가톨릭에서 하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말고 우리 나름대로 다시 체계를 가지고 진술해 보자고 하면서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이 나옵니다. 대의에 있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나뉘어지기 전까지의 삼위일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후의 많은 이단들이 나타나면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들이 일어났습니다. 에드워즈도 전통적으로 있었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깊이 동의하고 있었고 다만 자기가 덧붙이고 싶었던 이야기들만을 모아서 만듭니다. 사람들이 볼 때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두툼한 책을 써서 삼위일체를 A부터 Z까지 진술했나보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쓸모없는 작품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삼위일체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은 이런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접근할 때 일에서 다로 접근한 게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이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나온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이 얘기하는 알레고리의 대가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사실 어거스틴도 한 몫을 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 이야기도 어거스틴을 직접 읽어보니까 과장이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 말을 함부로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은 신학교수가 들어와서 해석사를 이야기하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예로 들면서 알레고리가 많았기 때문에 거의 쓸모없는 거다. 라고 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동전 두 개가 신약이고 구약이다. 이런 식으로 했는데 조용기 목사님이 그것을 많이 설교하셨는데 그게 조용기 목사님이 원판이 아니라 옛날 교부들이 다 해석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거스틴을 그런 해석들로 뒤범벅이 됐기 때문에 설교가 가치가 없다. 다만 그 사람의 교리학적인 저술들이 여전히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설교를 할 때는 그렇게 했어도 교리를 세울 때는 그런 해석을 안 따랐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을 가지고 탐구된 자료만을 가지고 교리의 뼈대를 놓는데 썼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의 교리적인 책들은 믿을 만 하다. 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절반은 맞는 얘기고 절반은 틀린 얘기입니다. 후자는 맞는데. 그래서 어거스틴의 설교집을 읽어봤습니다. 그것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주 일부이고 내가 보기엔 읽어서 염려가 아니라 안 읽어서 염려입니다. 너무 웅장하고 아름다운 명문들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어거스틴은 신구약 성경을 거의 다 암기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어디를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삼위일체를 읽어보면 이런 구절까지 어떻게 이렇게 빼내서 자유자재로 사용할까? 그 당시 검색기능도 없고 한 권으로 뭉쳐진 성경책도 찾을 수 없었던 때인데 거의 암기하는 것이 그 당시 신학자들로서 기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전통이 거의 17세기까지 내려옵니다. 존 오웬도 성경을 거의 외우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가 삼위일체에서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그것을 동방교회적으로 접근을 한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나뉘는데 내재적 삼위일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합니다. 원을 크게 그려놓고 원 세 개를 다시 안에 그리면서 한 하나님이신데 세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인격은 단일체를 만드는 인격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인격이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단일체를 갖는 인격이라고 설명을 하면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한 하나님이라는 말이 성립을 안 합니다. 인격이 셋이 모여 있으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고 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위격의 개념은 단일체 하나에 단일 인격이 구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인격과 인격이 구분되지만 인격 하나 하나가 단일체를 구성하는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세 위격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한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유비를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할 때 모든 것을 유비관계로 생각하는데 그 유비가 없는 것입니다. 그 유비를 찾아낸 것이 정신, 의지, 생각 하면서 몇 가지 유형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 이런 식으로 생각, 지성, 의지 이런 식으로 삼위일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의 내용의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것을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 하나님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삼각형이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이런 식으로 찢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성부가 계신 곳에 성자와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계신 곳에 성부와 성자가 배제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역사하느냐 하면 삼각형이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건이 창조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성부가 구속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성자가 구속의 적용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성령이 그리고 여기에는 자영, 영부, 부자 이런 식으로 함께 계시면서도 어느 위가 우선적으로 그 사건과 관련을 맺느냐에 따라서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것 속에 나타났다고 보는데 그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설명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삼위일체가 성령은 삼위일체 중 한 위일 뿐 아니라 삼위가 모두 소통하게 하는 그 소통 자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면 더 복잡한데 그런 것들이 여기서 눈길을 끕니다. 한 번 쯤은 읽어볼만 합니다. 은혜와 믿음도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들이 아우구스티누스나 피터 롬바르더스 같은 사람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삼위일체론을 진술해 나갑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강의안의 22쪽을 보겠습니다. 두 번째 단락입니다. “삼위일체에 접근하는 방식은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하나에서 세 위격을, 동방전통을 따라 세 위격에서 페리코레시스의 이론을 통해 하나의 신적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동방 해석의 모델을 따랐다고 한다.” 스튜드 베이커 같은 학자들의 주장은 에드워즈를 세 위 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상호 사랑의 삼위일체론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저도 이런 논문을 읽었습니다.
에드워즈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오해받을 만한 용어들을 좀 사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삼중성 같은 용어를 사용했는데 전혀 삼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사랑, 질서, 관계를 중시하는 특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그는 동방교회 접근에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접근방식은 달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위격들 간의 관계에서 보고 그 안에서 본질의 통일성 뿐 아니라 사랑을 추론하려고 했었던 것은 단지 동방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이기도 하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하나임 보다는 셋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모형으로 설명함에 있어서 유리한 입각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관계 중심적 삼위일체론은 위격의 관계를 설명할 뿐 아니라 피조세계와 맺으시는 관계, 피조물과 피조물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를 설명하는 기초가 된다. 이처럼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언어다. 마치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이 언어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들이 피조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런 삼위일체론에 입각해서 우주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인간과 인간, 자연사물까지 함께 연관을 이루는 질서를 제시했다. 그래서 세 위격의 교통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도표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와 사랑입니다. 어떻게 설명을 하냐하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내 보이시기 전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천지가 창조되고 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게 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을 때 조차도 하나님은 사랑이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데 사랑이실 수 가 있나? 사랑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있기 전에도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교통하시고 교통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성자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성자의 신성이 삼위일체에서 이탈해서 내려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거기가 비우게 되니까 그것이 케노시스 이단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데 당연히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고 오시는데 그 아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신랑인 성자에게 부어진 그 사랑은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졌고 신부에게 부어진 그 사랑에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삼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설명이 너무 감동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론에 있어서 탄탄한 삼위일체적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그 사랑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받은 사랑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이다. 교회에 대해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은 교회가 따로 떨어져있어서 부어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부어지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어지는 사랑이다. 라고 하면 공동체를 배제하고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유는 지금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를 통해서 나에게 왔다. 이런 식으로만 설명을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개인적인 사랑은 교회와 상관없이 내가 예수님과 접붙여 지는 것과 상관없이 내게 온 사랑이 아니라 내가 공동체의 한 지체로써 예수께 접붙여 졌기 때문에 왔다.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소위 얘기하는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인 교회적 관념을 가지고 이것을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이 제 마음을 굉장히 크게 흔들어놓았고 저의 교회론을 읽을 때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같은 책을 읽을 때 이런 배경들을 확고하게 가지고 설명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개인적으로 받는 사랑과 함께 공동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장 관념적인 삼위일체론이 가장 실제적인 사랑의 이론과 만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