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염려하지 말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녹취자: 이 솔
시편 23편이 세 토막으로 구분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첫 번째 토막은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왜 여호와가 시인에게 목자가 되어 주셨는지 그 증거를 이제 2절부터 5절까지 대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2) 이것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그리고 두 번째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제일 먼저 푸른 풀밭에 누인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이건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람에게 풀밭은 그냥 걸어 다니기에 좋고 아니면 골프 치는 사람에게는 그린이고 그리고 또 막상 그 풀밭을 끝없이 이어진 풀밭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상쾌한 일입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그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갈 꼴이 나오는 곳이 바로 풀밭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이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양떼들을 칠 때에는 이렇게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무슨 뉴질랜드나 캐나다처럼 가는 곳 마다 풀밭이 끊임없이 그 우거져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원주민들은 많은 양떼들을 데리고 유목을 하며 그 목축을 했어요. 유목을 하는 이유는 결국 한 곳에 1년 내내 짐승들이 먹을 풀이 있으면 돌아다닐 필요가 없죠. 그게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이겠어요.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제 목자들이 양떼를 이끌고 이제 목초지를 찾아서 거기에 텐트를 치고 그리고 그 양떼들로 하여금 풀을 뜯게 합니다. 그러면 양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가면 그러면 거기에는 맛있는 식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양을 보면 종일 먹습니다. 그게 뭐 영양가가 없으니까 하루 종일 자지 않으면 눈 떠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고개를 땅에 쳐 박고 풀을 뜯으면서 그렇게 먹습니다. 그렇게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동안에 목자는 이제 양과 함께 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음 목적지가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며 높은 산에 올라서 어디에 목초지가 좋은가 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가장 안전하게 이 아이들을 먹일 수 있는 곳이 어딘가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면 양떼들은 풀밭에서 풀을 뜯으면서 꼴을 먹으며 다음은 어디로 가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자기의 하루 먹고 쓸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 것이죠. 여기서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할 때 이것은 휴식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아무 염려가 없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으며 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고단한 유목의 길을 걷던 양떼들이 그렇게 넓은 풀밭을 만나서 맛있게 꼴을 먹으며 이렇게 누워서 쉬고 있는 모습이 이 시인 목동에게는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끊임없는 염려에요.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스스로 괴롭히며 우리의 일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새벽 기도도 열심히 나오시는 분인데 꿈을 꾸셨어요. 그 꿈 얘기를 이제 돌아와서 목사님에게 하는 거예요. 어디 그 끝도 없이 이어진 이렇게 꼬불꼬불한 구름길을 가는데 자기가 추레한 옷을 입고 넝마 담는 커다란 이 망태를 메고 그리고 가더라는 거예요. 이 손에는 집게를 들고. 그 앞에 시커먼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마귀겠지요. 끊임없이 시커먼 그 보따리를 작은 보따리들을 크고 작은 보따리들을 계속 버리더래요. 그걸 자기는 집개로 집어서 이제 망태에다가 계속 집어넣는데 이게 얼마쯤 나오고는 없어질 줄 알았더니 계속 계속해서 버리는 거예요. 나중에는 너무 많이 담아가지고 이 망태가 그 시커먼 보따리들로 가득 차가지고 도저히 무거워서 걸을 수가 없는데 그래도 계속 그 마귀는 보따리를 던지고 도망을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권사님이 되다 못해서 하다 못해서 그 망태를 질질 끌고 가면서 그 보따리들을 하나씩 둘씩 주어 담다가 그만 쓰러졌어요. 쓰러지고 그 위에 망태도 같이 쓰러졌어요.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권사님이 이 망태에 깔렸어요. 그래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허걱 대다가 비명을 지르다가 잠이 깼어요. 깨고 보니까 꿈이었어요.
그게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기가 막히게 해석을 해주셨어요. 권사님 그 놈은 마귀고 마귀는 끊임없이 검정 보따리를 던져주는데 그게 걱정 보따리입니다. 그것을 권사님은 다 끌어안고 살아가고 그래서 힘든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주 은혜롭게 해석을 해줬어요. 권사님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집에 돌아갔죠. 이른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시작해서 밤까지 끊임없는 걱정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에요. 누군들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 걱정 없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걱정이 대부분 어떡하면 내가 좋은 하나님의 성도가 될 수 있을까? 어떡하면 내가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떡하면 내가 이 교회에서 마음과 뜻을 다 바쳐서 하나님 앞에 잘 충성해서 계속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떡하면 내가 성도들을 사랑으로 잘 돌봐서 길 잃은 목사와 같은 양떼들을 믿음 생활 잘 하는 구역장이 되게 할까? 이런 근심이 아니에요.
어느 예방 의학자를 만났습니다. 그분이 쓴 책을 천천히 읽어보면서 감동을 받았어요. 이게 뭐냐 하면 확실히 염려는 걱정하는 거는 염려하는 거는 우리 몸에 나빠요. 염려를 하면 식욕도 없고 염려를 많이 하면 살아갈 의욕도 없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어요. 심지어 걱정이 깊으면 먹고 싶은 것도 없어요. 이게 우울증의 전조예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가고 싶은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갖고 싶은 물건도 먹고 싶은 음식도 보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그게 우울증의 전조예요. 확실히 걱정은 나쁜 거죠. 근데 그 의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를 알아차린대요. 그래서 우리가 만약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치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것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이러한 신령한 것들을 위해서 걱정을 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 생명을 촉진시키고 우리의 몸에 활기가 돌게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 하는 근심은 대부분 먹고 입고 마시고 쓰는 것들에 대한 염려에요. 그 염려가 얼마나 깊은지 결국 우리 인간은 그 염려를 내려놓지를 못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염려 육신에 대해 염려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돈에 집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죠. 돈이 가지고 있는 위력은 대단해요. 그래서 돈이 많으면 돈이 없는 사람보다 걱정하는 많은 문제들을 돈으로 해결을 할 수 있게 되요. 그래서 오늘 먹고 마시고 입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정도에 멈추지 않고 먼 후일에도 마음껏 그렇게 누리면서 살고 그런 경제력이 자기 자식들에게도 물려지기를 원하는 욕심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돈을 벌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다윗은 극단에서 극단에까지 살아봤던 사람이에요. 한편으로는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를 만들었으니까 그는 온갖 영화를 다 누렸을 거예요. 너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사실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고 하지만은 그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모든 물자들은 다윗 대에 모두 수집이 끝났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모아놓은 그것을 가지고 이제 성전을 만든 거예요. 저는 직접 해보지 않았는데 어느 목사님이 1981년도를 기준으로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 바친 금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계산을 했는데 그때 금 한 돈에 5만 원이었어요. 근데 그 당시에 자기 계산으로 80조가 나오더래요. 금만. 지금 금 한 돈에 20만 원 정도 가니까 그러면은 다섯 배가 네 배가 오른 건데 금만 약 300 우리 지금 시세로 한 320조 원 되는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렸던 사람이니까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렇게 엄청난 능력자였어요. 그렇게 하면서 살던 때가 있었나 하면 사울에 쫓겨서 도망을 다니던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 섬기는 증설병을 먹어야 될 정도로 그렇게 가난한 시절도 지내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 이렇게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라고 이야기할 때는 그 애잔한 감정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들어오는 거죠.
가난해 보셨어요? 정말 저는 가난해 봤습니다. 얼마나 가난한지 내 생각도 하기 싫어요. 특히 전도사 할 때 제가 직장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공직에서 우체국장까지 하다가 이제 사직을 하고 신학에만 전념을 하려고 그리고 이제 사표를 냈는데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라 그래요. 그거 신학교 야간 신학교 들어갔으니까 감사한 거죠. 그런데 교회를 조그맣게 수리를 해서 지어서 교인은 한 150명 모이는데 사찰이 없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너희 집은 그냥 빼고 그리고 사찰 구할 때까지 여기 와서 몇 달만 교회 안에 살면서 사찰 일도 좀 도와줘라 그래요. 석 달이면 된다는 것이 3년 반이 걸렸어요. 3년 반 동안 교회 안에 살면서 하는 거죠. 그때는 서른 살 그때쯤 서른 살 약간 안 됐을 텐데 스물아홉에 제가 우체국장을 그만뒀으니까 딱 그때였죠.
근데 밤이면 이렇게 조갈을 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그래서 물을 대접에다 물을 떠서 이제 머리 밑에다 놓고 자는 거예요. 너무 새벽에 목이 말라요. 그래서 이제 손을 뻗어서 눈을 감은 채 그 그릇을 들고 물을 마시는 데 물이 안 나와요. 이게 글쎄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떠서 이렇게 보니까 물이 꽝꽝 얼었어요. 옆에 아내가 자는데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자는데 하얀 김이 입에서 계속 나와요. 여름이면 그릇을 9개씩 놓아야만 될 정도로 지붕이 뜯어져서 계속 비가 쏟아졌어요. 그러면 구석 한 구석에 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어요. 근데 하나도 서럽지 않았어요. 왜?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다고 생각하니까 그것도 하나님 앞에 경험이라 하고 생각하면서 이겨낼 수 있었어요. 오히려 지금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흘러요. 아 그때 그 젊은 날에 정말 고생했구나. 가엾은 생각이 들어요.
오늘 보십시오. 우리들이 많은 염려를 합니다. 근심을 합니다. 근데 사실은 그게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근심이냐?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인생의 묘미는 오늘을 사는데 있는데 우린 대부분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염려해요.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너무 괴롭게 염려하고 고민하는 미래의 근심거리 중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10개 중 하나밖에 안 된대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가지고 걱정하고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의 일을 가지고 걱정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거죠. 시인은 그런 많은 가난하고 힘겨운 세월을 지내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를 배웠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쁜 신뢰요.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걸 깊이 깨닫는 게 신앙이에요. ‘살아도 내가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는 신앙을 가지고 그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돼요. 그리고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어야 돼요. 흘러가는 과거는 미련을 버리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근심을 그치고 지금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살아가게 하시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며 사는 거죠.
근데 사람들이 이 근심과 염려를 버리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는 개인적인 그 관계가 부실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꼭 주님이 자기를 선택하고 구원하시기만 했을 뿐 인도하고 보호하지는 않으실 것 같은 배반의 느낌을 갖는 거죠. 근데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셔요. 그래서 살아온 우리의 인생길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도저히 우리가 갈 길이 없다고 생각되던 그 마지막 절망적인 지점에서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면서 우리의 인생을 여태껏 인도해 오셨으니 우리와 우리의 염려와 근심이 내 인생을 지탱하게 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가 우리를 인도해 온 거예요.
잘 모르겠다고요. 이유는 간단해요.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도와주셨어도 그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 거라는 느낌이 안 드는 거예요. 기도 안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면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요? “아 정말 운이 좋았어. 진짜 재수가 정말 좋은 날이었어” 이렇게 얘기해요. 근데 기도를 많이 하던 사람은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주님의 은혜가 놀라워. 어쩜 이렇게 나의 기도를 들으시면서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줄 몰라 살아계신 하나님 찬송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그러면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거죠. 그게 그것이 바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더더욱 신뢰하며 살게 하는 요인이 되는 거예요. 그 교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두렵지 않아요. 그리고 언제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요.
교인 중에 한 분이 되게 가난해요. 그래서 매일매일 파출부를 다니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될 그렇게 집이 가난해요. 근데 이 자매가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눈물로 기도를 해요. 무슨 기도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가장 오래까지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요. 이게 되게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들이 한 일 년 나오면 또 안 나오거든요. 또 변함없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와서 별로 기도 안 해요. 와서 도장 찍고 그냥 중얼중얼 하다가 가거든요. 이분들은 기도는 잘 못해도 새벽기도가 이렇게 몸에 밴 거예요. 그래서 그 시간이면 눈이 떠지고 그냥 자동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거죠. 근데 이 제일 좋은 거는 그 새벽기도 습관만 있을 뿐 아니라 와서 마음을 다 쏟으며 열렬히 기도하고 가야 되거든요. 그때 하나님이 나의 이 욕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는 빠져나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가득 채워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거죠. 근데 그 자매가 그랬어요.
근데 하루는 교회에서 잠깐 만났는데 “목사님 저는 요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너무 감사해요.” “왜 그러냐?” 파출부를 가면 하루만 일하는 집도 있지만은 이 자매는 그런 집보다는 계속 가야 되는 집을 골라서 가요. 그러면 한 보름씩 한 달씩 어떤 집은 매일 가서 뭐 한 6개월씩 그렇게 있어야 되는 집도 있더라 이거죠. 뭐 사정이 있으니까 아프든지 뭐 아이가 있든지. 그러면 파출부를 부를 정도 되니까 그 집은 자기보다 훨씬 잘 사는 집이야. 가면 뭐 집도 엄청 크고 부유한데 뭔가 집안의 분위기가 어두워요. 그리고 근심 걱정에 쌓여있거나 병들어 있어요. 그럼 가서 열심히 청소해주고 가사를 거들어주면서 이제 말문을 트기 시작해요. 처음에는 뭐 파출부 주제에 이랬다가 이야기를 나오면서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저도 그렇게 아픈 적이 있었어요. 우리 아들도 그렇게 속을 썩인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야기를 하면서 관계가 좋아져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이분이 정신적인 선생님이 돼요. 그 자신의 집안에 많은 문제들을 쏟아 놓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괴로운지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도 그런 인생을 살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바뀌게 되었는지를 얘기해 주는 그렇게 해서 일은 하인처럼 일을 하는데 정신적으로는 선생님이 되어서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는 거죠.
그게 바로 염려와 근심을 벗어나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에요. 염려하지 마세요.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검게 물들이고 결국은 내 방법대로 하나님 앞에 살아보려고 세상 일 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 염려를 모두 주께 맡기고 ‘내 인생이 주님 앞에 주님의 손에 있으니 내가 주님을 의지하며 삽니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염려를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세요. 그리고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 그것을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내 마음에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오늘 이 시간부터 그것을 던져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붙들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나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살고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면서 사는 것. 그러면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인생길을 헤치면서 지나가게 되어 여러분들도 그렇게 믿음으로 살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걱정과 근심했을 마음을 하나님 위해 교회 위에 이웃 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는데 이제 ‘쉴만한 물가’라고 하는 이 번역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메메오노트’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이런 뜻이에요. ‘움직이지 않는 물’이에요. 자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 있을까 지난 시간에 저는 양이 엄청난 물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래서 이제 꼴을 먹으면 그 속에 이제 그 물론 당연히 수분이 있지만 그래도 물을 먹어야 돼요. 그러면 그렇게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데 그 많은 양떼에게 먹일 물을 뭐 바가지에 퍼가지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양이 이제 목말라서 물을 목말라서 물을 먹을 때가 되면 지리를 잘 하는 이 목자는 양을 이끌고 이렇게 물 가장자리로 데려가요. 근데 그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이 물이 이렇게 바람에 흔들리고 이렇게 빛나면서 물이 움직이잖아요. 양떼들이 물을 못 먹어요. 그러면 목동은 돌멩이 그리고 풀뿌리, 흙 이런 것들을 갖다가 이만큼을 막아요. 댐처럼 그러면 물이 이렇게 흐르던 물이 거기에 막혀서 멈추겠죠. 멈추면 더 이상 흘러가지 않겠죠. 그렇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물이 됩니다. 그때의 양떼들은 안심하고 이제 물 가장자리에 와서 물을 먹는 거예요. 목동은 아니 말도 여기 와서 잘 먹고 소도 먹는데 왜 너는 못 먹냐고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물가에서 씨름을 하진 않아요. 양이 그런 물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를 그냥 이해를 하고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그 물을 먹고 그 목마른 자신의 마음이 몸을 물로 이렇게 채우게 만들어주는군요. 그게 바로 목자예요.
그러면 이 장에서 보는 이 절에서 보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할 때 크게 세 가지가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거요. 첫째는 ‘먹을 것’ 두 번째는 ‘쉼’ 그리고 마지막에는 ‘약점을 알면서 인도하시는 것’ 이 세 가지가 가슴에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시인이 일생을 그 부모도 없이 그렇게 떠돌이로 외롭게 살고 자기가 언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하나님이 시킨 것인데 그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사울에게 그렇게 미움을 당하고 그리고 자객을 풀어서 자기를 죽여 버리고자 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관계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어야 했어요.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지나며 배곯는 굶주림의 시간도 겪고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보냈는데 그 모든 험한 인생길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어요.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기 자기도 알 수 없는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때를 맞춰서 공급해 주시고 그리고 때에 따라서 먹여주시고 쉬게 하시고 다윗의 약점을 모두 기억하시면서 다윗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인생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죽음의 위협에서도 건져주셔서 결국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해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그때 주님이 자기의 손을 붙들고 인도해 주시는 것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자기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기를 인도해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힘으로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 은혜의 힘으로 극복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 그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라. 그리하면 충분히 공급하시고 쉬게 하시고 너를 인도하실 것이라. 이 말씀을 믿고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