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녹취자: 조경훈
[진행자] 아침에 책 한 권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책을 읽고 책 소개를 받으며 우리가 정말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책을 통해서 발견하는 시간 아침에 책 한 권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월요일이지만 여러분께 이렇게 책 소개를 하게 되는데요. 코로나 이후 우리들의 예배가 감격이 있는지 한 번 스스로 질문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온전한 예배일 지 예배는 우리가 매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데 더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궁금하신 분들 계시죠? 오늘 그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함께 해 주실 분은 열린교회를 담임하시는 김남준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
[목사님] 네. 반갑습니다.
[진행자] 반갑습니다. 목사님.
[진행자2] 목사님 저도 책 너무 감사히 잘 읽고 방송가족 여러분들한테 인사 말씀 한 번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사님] 극동방송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입니다. 오늘은 제가 안개를 뚫고 직접 내려와서 생방송으로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좋은 교제가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들이 극동방송을 통해서 신앙에 더 큰 힘을 얻고 이 땅을 복음화 하는데 기여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진행자] 어서 오십시오. 목사님. 반갑습니다. 열린교회를 담임하고 계시고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님으로 섬기고 계시고 전분 극동방송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 6시 30분에 목사님의 설교가 방송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아침에 책 한 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던 ‘다시 게으름’ 이 책도 전화로 그 때는 연결했었는데 오늘은 직접 뵙게 되어서 더 반갑고 좋습니다. 목사님께서 많은 책을 출간하셨는데 아침에 책 한 권 시간에 어떤 책을 오늘은 소개해 주실지 궁금합니다.
[목사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미 25년 전에 나온 책인데 요번에 다시 새로운 판본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쁜 장정으로 현대적인 문체로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예배가 무엇이고 예배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지 우리의 예배 생활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아주 실제적인 이야기들로 다루고 있습니다.
[진행자2]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현실이라고 하는 게 코로나 이후로 상황이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라고 하는 이 책이 지금 다시 필요하게 된 이유를 조금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우리는 전대미문의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었습니다. 한 동안 논쟁이 된 것이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 모여야 되느냐?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 못 나오고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는 것이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상 상황이기 때문에 교회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일을 겪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나가고 아니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되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자유와 태만 사이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경계를 설정할 것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교회를 나가는 모든 여건이 되는데도 가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서 혹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핸드폰을 들고 교회의 예배를 시청하는 것은 예배를 구경하는 것이지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거꾸로 생각합니다. 교인들 속에서 팬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교회의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교회에 다시 나오고 싶은 욕구들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25년 전에 이 책이 쓰여 질 때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고 독자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상황하고 조금도 세대 차이가 나지 않는 똑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때 책에서 비판했던 내용들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이 책은 호소력을 가지고 있고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들을 25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지금도 역시 시의적절한 문제이고 더욱이 우리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현재적인 경험을 재현되기 위해서 이 책은 여전히 호소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목사님. 목사님 저도 이 책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사실 25년 전에는 이 책을 몰랐습니다. 25년 전에 출간된 책 그것도 현재까지 80쇄가 되면서 기념으로 책을 쓰신 건데요. 이 책을 처음 쓰실 때는 어떤 마음으로 왜 이 책을 쓰시게 되신 것입니까?
[목사님] 한 마디로 화가 나서 썼습니다. 화가 난 게 뭐냐 하면 제가 34살에 교수가 되고 35살 때 주님을 깊이 만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다가왔던 화나는 사건은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위대하고 정말 놀라운 분이신데 우리는 예배를 이렇게 드릴까? 왜냐하면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가 있었는데 정말 열심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거의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시면 노트까지 마련하고 정성껏 예배를 드리며 목사님 설교를 다 적었는데 예배의 감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기도 많이 하면서 살았지만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 백, 수 천 명이 모이는 교회를 갔을 때 왜 우리는 예배를 이렇게 밖에 못 드릴까? 이 고민이 뭐가 문제인가? 라고 하면서 그 때부터 예배에 대해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80쇄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게 한 번 찍을 때 적게 찍으면 1,000권 많이 찍을 때는 2,000권 정도를 찍습니다. 이 책이 거의 제가 기억하는 게 14-15만권 정도 나왔는데 책의 수명이 몇 년 팔리다가 잊혀 집니다. 그런데 이 책은 옛날 장정인데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그 얘기는 내가 이 책을 쓸 때 가졌던 왜 예배를 이렇게 밖에 못 드리나? 라고 고민하던 생각이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독자들도 똑같은 질문이 있기 때문에 절판되지 않고 계속 팔리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행자2] 25년 전의 필요가 여전히 유효하고 코로나 상황에서 그런 필요가 더 절실해졌다는 목사님의 설명이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책 초반부에 보니까 옛날 목사님들은 일주일에 두 시간 예배드리는 걸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냐? 이렇게 하셨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한 시간 예배드리는 걸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냐? 이런 설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시간의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질적인 예배를 어떻게 채워가느냐를 우리 교회가 고민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질적인 것을 늘리기 위해서 목사님은 어떤 고민을 이 책에 담으려고 하셨습니까?
[목사님] 근본적으로 예배가 무엇인가?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2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25년 전에 이 책이 나올 때 찬양 집회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지금은 다 끝났는데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서 찬양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생각했던 그 방식도 예배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거라고 저는 봅니다. 기존에 전통적으로 순서를 따라서 드리는 예배에서 뭔가 영적인 것들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 그 당시에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면서 엄청난 악기들을 동원하는 찬양으로 했고 그것이 그 시대의 정신에 상당히 맞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반응을 얻으면서 전국적으로 어떻게 보면 전 세계적으로 찬양의 시대가 유행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예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줬느냐? 하면 사실 아닙니다. 그 후에는 알다시피 이 책을 쓸 때 아마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3,000불에서 15,000불에 머물렀는데 지금은 35,000불이 넘었습니다. 진짜 경제학자 갈 브레스가 이야기하는 고도대중 소비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엄청나게 나라가 잘 살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이 선교적으로 하나님 앞에 갈급한 마음들을 굉장히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속에서 예배도 함께 중요성들이 과소평가되고 사람들의 교회생활이 25년 동안에 훨씬 더 형식화되었다고 보고 기독교인 수도 엄청나게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진행자] 김남준 목사님과 함께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책을 가지고 여러분과 하께 하고 있습니다. 25년 전에 생각했던 위기 상황하고 현재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실 이 책이 80쇄까지 계속 출간이 된 이유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예배의 감격에 빠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계속 선택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봅니다.
[목사님] 저는 두 가지로 봅니다. 첫 번째는 예배의 감격에 빠지고 싶은 이유도 있고, 두 번째는 도대체 우리들의 예배가 왜 이렇게 밖에 안 될까?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이 책을 읽히게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목사님. 보실 때 코로나 시대에 예배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목사님] 제일 큰 문제는 우선 설교자들이 문제입니다. 예배는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목표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 목표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설교 자체에 목회자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모든 사역의 포커스가 설교에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헬무트 틸리케 라는 독일 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일주일 동안 살아갈 때 삶의 목표가 설교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설교한 다음에는 설교한 것을 자신이 살아내는 삶과 설교의 순환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설교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기념식에서 훈화하는 정도이고, 예배의 한 순서로 넘어가는 정도입니다. 설교의 길이가 계속 짧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두 시간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만 드린다고 교인인줄 아느냐고 목사님이 야단을 쳤습니다. 나중에 한 시간 반 지금은 두 시간 그러면 한 시간 안에 예배가 다 끝나니까 사람들이 현실성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설교시간이 20분 대로 다 내려오는 겁니다. 설교자들이 별로 기대하는 게 없고 교인들도 기도하는 게 없는 게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교인들이 이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야겠다고 하는 사모하는 마음과 갈급함이 없이 교회에 나옵니다. 세 번째는 실제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예배 속에 있느냐? 라고 하는 것들이 오늘날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2] 말씀을 들으니까 코로나 상황을 다시 생각을 안 해 볼 수가 없는데 코로나 상황에서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이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와 너무나 다른 설교의 태도와 방식 등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나눴던 것처럼 성도님들도 말씀하신 것처럼 간절함을 가지고 예배에 나와야되는데 너무나 쉽게 미디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볼 수 있고 내가 원하지 않는 부분은 너무 쉽게 스킵이 되 버리는 것입니다. 찬양만 듣고 싶으면 찬양만으로도 예배가 가능한 것처럼 생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장소가 정말 중요할 것 같은데 목사님이 생각하는 장소적인 측면들 그리고 어떤 태도가 이 시대에 더 중요시 돼야 될 지 짧게 말씀해주십시오.
[목사님] 신약도 마찬가지지만 구약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요소가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의 체험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였는데 노예살이를 하니까 하나님을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들이 이미 다 금지되었을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삼지사방으로 찢어져있는 사람들이 모세를 중심으로 약속의 땅으로 가자. 라고 결집되어서 2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결집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결집되게 만들어 준 가장 중요한 것이 애굽의 10대 재앙이었습니다. 열 번의 재앙을 겪으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만나면서 우리는 하나다. 라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예배가 정상화되고 예배 속에서 함께 누리지 않으면 교회의 지체의식이 와해됩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진행자] 설교를 준비하시는 목사님들에 대한 말씀도 해주셨고 성도들에 대한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예배는 목회자만의 성도만의 어떤 자세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전심으로 준비하고 사모하고 드려져야 되는 예배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당연합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있었을 때 제일 먼저 한 게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목회자 혼자 하면 안 되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함께 고민하면서 그것을 해결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진행자]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 책은 어떤 분들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목사님] 좋은 예배자는 이 책을 읽으면 자기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격려를 받을 것이고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좋은 예배자가 아닌 사람은 돌이켜서 좋은 예배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둘 중에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애청자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애청자 여러분. 어제 예배 드리셨지요?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어제 들으신 설교가 성경 어디였습니까?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 오늘 아침에 어제 들은 설교 내용을 붙들고 그렇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까?
통계가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있었던 일인데 몇 개의 교회에서 교단을 망라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을 바깥에서 조사를 했는데 95퍼센트가 방금 끝난 예배에서 목사님이 무슨 설교 본문을 설교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조사를 해 봐도 똑같습니다. 월요일 교사 세미나 같은 것을 할 때 20명을 다 일으켜 세워서 어제 주일 예배에서 목사님이 설교한 성경 본문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20명 중에서 2명 내지 3명만 대답을 합니다. 그 중에 절반은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했으니까 말씀을 붙들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기도를 하겠습니까?
[진행자] 이 시간 방송을 들으면서 찔리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진행자2] 그런 분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오늘 회심하고 돌이켜서야 되겠습니다.
(41:04-1:37:37)
[진행자] 김남준 목사님의 특강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여러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 어느 날 어린 아이가 엄마 아빠 손을 붙들고 교회에 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아빠 오늘 예배 시간에 졸지 마. 나는 교회가면 엄마 아빠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 엄마가 ‘이놈의 자식!’ 그러고 어쨌든 예배에 갔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배는 시작되었고 성가대의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이는 가운데였고 엄마는 왼쪽에 아빠는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드디어 설교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마부터 끄떡끄떡 졸기 시작합니다. 아빠는 몸이 좌우로 흔들거리더니 털썩 하고 성경을 떨어트렸습니다. 이 아이가 짜증내면서 말합니다.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내고 집에 가자’ 아이는 헌금이 요금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이게 진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맞는가? 할 정도로 회의를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 다기 보다는 예배는 목사가 드리고 드리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견기는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 가더라도 15분 전에 가서 표를 끊고 팝콘도 사고 기다렸다고 순서대로 줄서서 들어가고 아마 영화를 시작하고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예배는 영화관만도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고 지각한 예배는 시작이 됩니다.
예배를 견디기에 가장 극치는 설교시간입니다. 설교 시간에 예전에는 설교가 한 시간 가량이 됐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어서 웬만한 교회에서는 25분 정도는 되고 10분대로 내려온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사람들이 설교를 견디는 것도 다양합니다. 주보를 꺼내서 빨간 펜으로 이미 인쇄된 주보를 교정을 보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수면파, 그 다음에 설교는 아예 성경을 읽고 있는 성경 강독파, 옆에 사람하고 쪽지를 주고받는 파, 목사님이 예화를 들면 그 예화가 맞는지 네이버에서 검색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전화가 오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을 들고 교회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사람부터 해서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말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려봐야 하나님 안 계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면 저는 빨리 딴 데로 가시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뭐 하러 당신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당신을 무시하면서 드리는 예배에 와 계셔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무시하면서 대한다면 그 자리에 있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기본이 안 돼 있는 것입니다. 쉽게 예기하면 중고등학교 때 가방을 다 싸 놓았는데 학교선생님이 종례식을 합니다. 종례시간에 이미 애들은 학교에서 떠났습니다. 선생님이 아주 지루하게 잔소리 같은 종례를 하는 겁니다. 애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가방만 만지작거리고 있죠? 그거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조회시간에 운동장에 쭉 서서 교장 선생님이 나오셔서 원고를 읽으면서 일장의 잔소리를 합니다. 그 때 애들이 땅만 쳐다보고 운동화로 땅을 차면서 조회를 하는 것 같은 것입니다. 더 좋은 비유는 민방위 교육받으러 가서 강사가 떠들면 일간스포츠 덮고 자는데 과장을 하면 우리의 예배가 그 정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한 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를 왜 드리는가? 생각을 해 보십시오. 성경적으로 볼 때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 때문에 내가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격차를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 그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표가 실행이 돼야 합니다. 그 목표는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일까요? 애청자 여러분 함께 고민해보십시다.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드린 예배 중에 잊지 못할 예배가 언제 있었습니까? 예배를 드리는데 정말 이 예배 시간에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구나! 아니면 최소한 오늘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보신 것처럼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구나! 예배가 끝났더니 예배당에서 일어나서 집에 갈 마음이 별로 없고 엎드려서 많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싶었다. 그런 적이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그 때 여러분들을 사로잡았던 말씀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문제는 이런 질문을 우리가 거의 안하고 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왜 예배생활이 이렇게 척박할까? 주님을 만나는 예배생활이 왜 안 될까? 이런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애청자 여러분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날 그 때에 이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구나. 여기서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셨구나. 그 감격이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늘 부르는 찬송에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면서 거기서 힘을 얻는 것 아닙니까? 그런 예배 생활이 없다면 묻고 싶은 게 무슨 힘으로 우리가 이 세상과 싸워서 죄를 이기고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깊은 감격이 없으면 예배에 대해 기대를 안하 게 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주일날 왜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교회에 올까요? 주일날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빨리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게 목표입니다. 라고 탄식할 정도로 벌써 그 시대의 사람들 속에서 예배에 대한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서부터 인류는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에게서도 분명합니다. 숨었습니다.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싫은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런 본성들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예배를 와서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마음보다는 빨리 끝내고 가야되겠다. 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 속에서 자신의 진심을 드리는 예배 행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도 없는 것입니다.
찔리는 얘기 또 해 볼까요? 애청자 여러분들이 어제 예배를 드리셨는데 본문이 어디냐고 기억하냐고 했더니 댓글에도 그 질문을 받고 찔렸다고 그러는데 하나 더 찔리는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주일 예배를 위해서, 설교자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 진짜 내가 간절히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나온 예배입니까? 이런 질문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우리의 예배가 그만큼 형식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어떤 것이어야 되는 것을 가장 훌륭하게 가르쳐주는 장면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여인과 더불어 대화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잠깐 쉬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원래 역사적으로 이방인들과 잡혼이 이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더러운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크게 세 토막으로 되어있는데 맨 아래 쪽이 유대 지방이고 사마리아가 있고 그 위에 갈릴리가 있었습니다. 갈릴리로 갈 때에는 사마리아로 지나지 않고 돌아서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거기를 가셔서 수가 성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선교적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이 여자는 한 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주석가들은 해석하기를 이 여자는 동네 사람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 길러 오는 시간을 피해서 사람이 없는 시간에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옛날 생각을 해 보면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역할을 빨래터와 우물가에서 다 했고 온 동네의 소문들이 거기서부터 퍼 날라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소였습니다. 이 여자는 알다시피 남편이 다섯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닌 우여곡절이 많은 나쁘게 생각하면 문란한 삶을 살았던 여자였습니다. 우물가 페이스북이나 빨래터 인스타그램에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물 길러 왔는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물 한잔 다오. 했더니 당신은 유대인인데 나 같은 천한 사마리아인을 상종을 안 하는데 보니까 랍비 같은 분인데 점잔은 분이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네가 주는 우물물은 목마르는 물이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 그랬더니 여인은 물로 알아들었고 그런 우물이 있다면 내가 힘들게 여기 오지 않아도 좋을 텐데. 그런 우물물이 있으면 나도 좀 달라고 그랬더니.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여자의 삶의 정곡을 찌르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를 삶에서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네가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고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까 네가 그럴 만 하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배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그 당시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단절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리심 산을 따로 정해서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고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는 구약시대의 전통이 내려오면서 그 사람들에게는 성경도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원래 있었던 구약성경을 재해석한 토착화된 성경을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사마리아인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한 곳을 정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신다고 한 곳이 예루살렘인데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하는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원래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사마리아 조상들은 예루살렘에 어차피 못 가니까 그리심 산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장소의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를 얘기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당신을 예배하시는 사람들을 찾으시는데 그 새로운 방식은 영과 진리 안에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경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시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라고 잘못 번역을 해서 예배는 세속적이지 않고 신령하게 가짜가 아니라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고 해석을 해서 성경을 많이 곡해했는데 이번에 번역이 훨씬 잘 됐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으니까 그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찾으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마치 민방위 교육을 받는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에 한 의무를 때우고자 하는 예배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천둥과 벼락처럼 다가와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없다면 일주일의 삶이 어떻게 될까요? 예배가 졸면서 혹은 낙서하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예배가 끝납니다. 올 때는 사람들이 느릿느릿하게 오던 사람들이 끝나면 빨리 나가려고 합니다. 천천히 나가고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감동이 있기 때문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한참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은 음악인인데 음악회에서 음악이 끝났는데도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으면서 음악회를 떠나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남의 악기 연주를 듣고도 감동이 되면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다면 어떻게 일시에 와르르 나와서 사람들이 계단을 걸어서 내려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알록달록한 구슬들이 떨어지는 것처럼 몰려옵니다. 앞 다퉈서 밀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중요한 일이 있느냐 하면 대부분 밥 먹으러 가거나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 부지런히 집에 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배 자체가 정말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예배인가? 하나님이 찾으실만한 간절함으로 드리는 예배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회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기도자는 기도자대로 성가대원은 성가대원대로 예배자는 예배자대로 각자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깊은 반성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것에 대해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교회 전체가 예배를 다시 세우는 그 일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런 예배를 평생 드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사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상관없다. 크게 불편하지 않다. 나는 불편한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예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지 않는다면 어디서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예배가 크게 두 가지가 나옵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주일날 11시에 와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공적인 예배입니다. 물론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구역에서 구역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공적인 예배의 가장 큰 중심은 주일날 드리는 예배입니다. 수요예배 금요예배 많이 있지만 반드시 나가야 하는 심각한 의무는 아닙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수요예배도 나가고 금요예배도 나가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주일예배는 자기가 편리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성수주일의 계명과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성수주일의 계명이 주어진 이유는 그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온전히 마음을 쏟기 위해서 계명이 주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격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요예배가 나옵니까? 금요예배가 나옵니까? 수련회가 나옵니까? 그러나 주의 날에 하나님을 예배한 것은 성경에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자기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성도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의무로 부여하면서 이렇게 강조할 때는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다시 질문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일예배를 어떻게 드리십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에 활력을 공급해주고 예배의 감격에 빠지는 예배입니까? 매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열 번 예배를 드리면 그 중에 두세 번 정도는 감격이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예배드린 자리가 눈물로 흠뻑 젖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영국에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있습니다. 아주 순순한 열정으로 수많은 복음을 전했고 길거리 설교를 창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굉장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열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든지 마이크가 없던 시절에 그 사람의 부르짖는 설교 소리를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측정을 했다고 합니다. 1.6킬로를 갔다고 합니다. 그 때는 설교자들이 모두 거성이어야 했습니다. 예배당에서 하더라도 거성이어야 했습니다. 조근 조근하게 설교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웅변식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 사람이 엄청난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도 말씀을 전하며 사역을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질 때가 있었다. 그 때에 자기는 자기가 회심했던 교회당을 찾아가서 자기가 앉아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됐던 의자에 입을 맞추면서 주님 앞에 드렸던 예배를 회상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입맞춤할 의자가 있습니까? 내가 이 자리에서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입맞춤 할 의자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가 끝나고 그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했던 마지막 예배가 언제입니까? 그런 예배의 경험이 없다면 없는 채로 죽을 때 까지 살더라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서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긴급동의는 회의를 하다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모든 것보다도 앞서서 처리를 한 후에 회의를 하는 안건을 긴급동의라고 하는데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부모가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란 세대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기대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열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라고 두 가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영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즉시 무엇을 생각하게 되냐 하면 세 가지 사실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가장 확실한 성경 구절이 두 개가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약의 말씀과 신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결론. 두 번째는 우리가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서 변화됨으로써 우리들이 새로운 삶을 사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해 주시는 중재자가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경험 하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서 아직 청년부 전도사를 하면서 교수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 청년 하나가 자기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그 친구는 불교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불교 집안에서 계속 자라왔고 교회를 한 번도 안 나가봤던 친구입니다. 친구가 밥이나 한 번 먹자고 불러서 같이 교회 근처에서 밥을 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랑 같이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자. 해서 얼떨결에 끌려온 친구였습니다. 맨 앞줄에 나란히 둘이 앉았습니다.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잊혀 지지도 않는데 청년부가 60명 정도가 모여 있었고 주기도문을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설교하고 있었는데 화장을 예쁘게 진하게 하고 왔습니다. 나는 그런 사연도 몰랐고 못 보던 자매 한명이 앞자리에 앉았다고 생각됐는데 설교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 짜기 한없이 울어서 얼굴의 화장이 다 지워질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하기에 이 자매는 평소에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태어나서 교회를 처음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때 일이 92년도에 일이니까 30년이 지났는데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답을 해 주는 것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였기 때문에 그가 비록 기독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거의 없고 어떤 의미에서 용어도 잘 못 알아듣는 것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초월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성령이 역사하시는 놀라운 예배의 광경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 시점을 계기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가져다주는 놀라운 변화이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동안에 설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을 만남으로써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참된 그리스도인이시라면 언젠가는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만났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배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 전도를 들으면서도 그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아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지 설득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도 청소년 회심집회가 있었습니다. 강사가 수요일 날 집회가 시작됐는데 월요일 날 확진판정을 받아서 강사가 공중에 붕 뜨게 된 것입니다. 결국 나한테로 공이 넘어왔습니다. 애들이 모두 모여서 예배드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아이들은 두려우니까 못 나와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깊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할 때의 일인데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유치부 때부터 그 교회를 다녔고 부모님들이 다 예수 믿는 신실하신 분들이었는데 하루는 신앙상담을 하면서 털어놓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요즘 와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안 믿어지냐고 물으니까 자기가 왜 믿어져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공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수련회를 가게 됐습니다. 그 자매가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8시부터 8시 45분까지 설교를 하고 기도회를 했는데 1시가 돼서도 안 끝났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자매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내 마음에 와 계십니다. 저는 주님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회심의 역사입니다. 이런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령 충만한 가운데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해야 되고 예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성령의 은혜를 예배시간에 부어주시기를 예배시간에 갈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모였을 때 성령이 충만히 은혜를 부어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예배의 순서를 맡은 사람 뿐 만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주일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삶이 바뀔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바뀌지 않는지 여러분들이 증인입니다. 생각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조금씩 바뀔 수 있지만 성령을 받지 않으면 삶이 바뀔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예배의 당위성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의 예배 현실을 보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고 있는가? 설교자들은 그 예배가 진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예배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하는 깊은 간절함,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마음이 있는가? 그것을 되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당시에 문맥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사슴이 굉장히 많은데 가을이 되면 사슴의 교미 철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사슴이 다 암컷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자비한 뿔로 투쟁이 일어나고 거기서 승리한 자만이 암컷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발정기가 되어서 암컷을 찾기 위해서 수사슴이 벌판으로 나오는데 그 때 특징이 타는 듯 한 목마름입니다. 짝을 찾아 나섰는데 물이 없는 곳이라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사슴의 눈에 헛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아시스가 보이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광야를 가로지면서 달려가 보면 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물을 얻지 못해서 땅에 쓰러지는데 쓰러질 때는 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눈꺼풀이 뒤집힌 채로 물을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슴들을 어린 시절에 시인이 자라오면서 다 본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는데 다윗이 쓴 사람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고라의 자손이 쓴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이 썼다고 보는 사람은 다윗이 쓰고 고라의 자손이 보관만 했을 것이라고 보는데 문체는 다윗하고 너무 비슷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망명길을 떠났을 때 같이 갔던 사람에 의해서 쓰여 진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가 얼마나 만나고 싶어 하는지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계시다면 너는 왜 나라를 다 잃어버리고 여기에 쫓겨 왔느냐는 비웃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너무나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 갈망이 너무 간절한데 표현하려고 보니까 눈을 부릅뜨고 물 한 모금을 못 먹어 죽어가던 사슴의 시체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볼 수 있는 최고의 극단적인 묘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어가는 사슴에게는 한 모금의 물은 사실 생명입니다. 한 모금을 마셨으면 안 죽는데 못 마셨기 때문에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가 어디든지 와는 상관없이 여러분들이 목숨을 걸고 주일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한다면 예배는 반드시 바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를 일어날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통탄해야 할 문제는 예배자들이 가난한 마음이 없습니다. 이 예배에서 주님을 못 만나면 나는 어떻게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을까? 정말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는 모든 것을 양보하고라도 이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야 된다. 라고 하는 갈망이 너무 흐려져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엄마 아빠는 교회를 안 다니셨는데 고모들이 교회를 다녀서 그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초등학교 때는 기억이 납니다. 기억을 해보면 너무나 가난해서 동네에 제대로 지어진 교회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은 천막을 치거나 허름한 곳에서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공통적으로 어린 마음에 뚜렷하게 남는 것은 굉장히 열렬했습니다. 사모했습니다. 나라도 가난하고 먹고 살기도 힘드니까 그 설움을 주님의 교회에 와서 다 쏟아놓는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지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갈망이 굉장히 컸고 눈물이 없이 예배드리는 교회를 거의 못 봤습니다. 제가 만난 설교자들은 천막에서 설교를 하고 허름한 곳에서 설교를 해도 지금처럼 조용히 설교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모두 부르짖으면서 설교를 했고 어린 마음에 내용은 잘 몰라도 저 분이 저렇게 간절히 외치는 것을 보면 저 분 안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 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시면서 고함을 치시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열렬함과 간절함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없이 예배 자체가 문화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예배 시간에 무엇을 기대해야 될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할 때 아침 문안 인사드리는 것 같은 식의 순서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지만 그 왕이 입헌군주국의 왕입니다. 실권은 없고 얼굴마담으로 가끔 나와서 외국 사절이나 만나는 형식적인 왕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 예배를 드려도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전반부를 마무리해야 되겠습니다. 중간결론을 내리자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는 예배 인도자와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예배자들, 그리고 둘의 만남을 축복해주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때 비로소 그 예배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이때 우리는 대지 위에 살고 있지만 성령 안에서 만남으로써 하늘의 가치를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느끼면서 신앙의 가치를 따라서 하늘의 의미를 따라서 살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예배 속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라고 하는 큰 집에 두 기둥 중에 하나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마지막에 기둥이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 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에서 보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 인데 의심할 정도가 없이 드러나 있다. 자명하다는 뜻에서 왔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해주는 불변의 법칙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그 예배가 진리가 중심이 되는 예배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말씀을 깨닫는 것이 예배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이 되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었는데 애원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모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얼굴에 광체가 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피를 뿌리면서 서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되 죽기까지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과 자신이 무슨 관계에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잘 듣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예를 종종 드는데 여러분들이 중국의 황제인데 신하나 백성이 여러분한테 와서 머리를 조아립니다. 여러분이 그에게 뭔가를 말해 주는데 딴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황제가 말을 하고 있는데 딴청을 하고 있는 것은 황제 모독죄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느 안전에 있느냐? 라고 하는 의식을 안 한 것입니다. 황제에 대한 무시입니다. 그것은 황제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설교시간에 딴청을 부리고 있다면 설교가 교장 선생님의 훈화라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고 친구의 말이라면 우정에 어긋나겠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설교 시간에 딴청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깔보는 예배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나 예배자 김남준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라는 이 정신이 가장 잘 투영되는 시간이 예배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내 안에 꽉 차있으면 진심으로 찬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찬양도 소리를 내야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길길이 뛰던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는 왜 다 죽어갑니까? 반주 소리만 크게 나지 목소리가 안 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찬송하기 싫은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의무에 의해서 끌려 나와서 부르기도 싫은 노래를 간신히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찔렀습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적이 언제였습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꽉 차 있으면 기도 시간에 기도를 못합니까? 다 같이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소리를 내던지 안 내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일단 마음은 하나님 앞에 계속 빨려 올라가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대표 기도는 왜 그렇게 오래합니까? 대표기도 오래하는 사람일수록 혼자 있을 때 기도를 거의 안하시는 것 아십니까? 그게 뭡니까?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면 설교시간에는 집중해서 그 설교를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이해는 믿음을 창출하는 것은 아닌데 이해하려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주실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설교를 이해하려고 해야 되는데 설교 시간이 시작되면 생각의 스위치를 탈칵 하고 끕니다. 그리고 멍하니 공간을 처다 보고 있거나 시계를 보고 있습니다. 설교에 나오는 예화나 기억하면서 웃다가는 다시 시무룩하게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것은 자기의 지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제일 큰 계명에 대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고 했습니다. 마음 다음에 뜻 이라고 하는 단어가 그리스어로 지성입니다. 마음을 바치고 특히 자기의 지성을 바쳐서 성품과 목숨을 바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간절히 알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설교시간에 설교를 잘 들어서 이해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회상을 해 보십시오. 확실한 공통점이 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마다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설교자에게 적용을 해 보면 설교자는 자신의 신념을 바쳐서 설교해야 됩니다. 예배에서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갈망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설교자에게도 깊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과연 성도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을 정도인가? 라는 생각을 깊이 하면서 설교에 혼신의 힘을 다 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설교한 결과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설교를 준비하고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설교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하나의 기둥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고 하나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우리의 예배 생활을 반성해봅시다. 성령의 은혜를 갈망했습니까? 예배 시간에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우리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깊이 회개하고 이것부터 먼저 회복해야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면 헌금 하라는 교육을 안 해도 힘에 넘치도록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주일이 기다려집니다. 이것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예화 하나를 말씀드리고 이 강의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18세기에 미국에 있었던 위대한 설교자이고 부흥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 라고 하는 대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의 설교는 설교 원고를 추측해서 미루어 볼 때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설교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될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설교였습니다. P. B. 바틀렛 이라고 하는 48개월 정도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묻는 것입니다. 엄마. 주일이 언제야? 어제 교회를 갔다 왔으니까 아직도 여섯 밤을 자야지. 왜? 주일에 교회에 가면 좋은 일이 있니? 그랬더니 아니. 나는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 다섯 살 밖에 안 된 아이의 마음속에 유장한 조나단 에드워즌의 어려운 설교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목사님 설교에 영향을 받았는지 매일 특정한 시간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엄마가 너무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헛간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엄마가 애가 잘못된 줄 알고 헛간으로 뛰어갔더니 헛간에서 기도하다가 애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어휘가 별로 없으니까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세요. 내게 구원의 은혜를 주세요. 주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되풀이하다가 성령을 체험한 것입니다. 슬피 울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게 불과 다섯 살 밖에 안 된 아이에게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가 예배를 드리며 회심한 것에 대한 기록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런 삶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자녀들은 예배를 통해서 기대하는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의 가족이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머지 내용들은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어보시면서 더 많이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