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족에 관하여
녹취자 : 오희열
안녕하세요, 저는 3교구 김수진입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이고 지금 나이는 마흔네 살이 됐는데 저는 마흔이 저에게는 오지 않을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마흔이 넘어있었습니다.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마흔 넘은 엄마로서 고민이 정말 많은데 귀한 시간이 돼서 우리 삶에 필요한 좋은 것들을 많이 얻어가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2교구 남예은 집사라고 합니다. 세 아들과 남편이 있고, 신앙에서의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과 제 남편이 아직 믿지를 않습니다. 신앙 안에 들어오지 않아서 가정 안에서 저의 모습과 제 안에서 갈망하는 신앙적인 모습 사이에서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잘하고 싶은데 늘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서 그런지 이런 싸움들이 끊임없는 것 같습니다. 마침 목사님의 추천으로 오게 됐는데 그런 지혜를 배워서 삶과 가정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지혜롭게 잘 행동해서 신앙 안으로 들어오는 목표를 삼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3교구의 신준영 집사입니다. 저는 2014년에 열린교회에 왔고 여기 와서 둘째, 셋째 아이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보니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같이 말씀을 들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신앙적으로 성숙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자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 4국에서 순장을 맡고 있는 한수연 자매입니다. 저는 순모임에서 순원들과 40이 넘어 생기는 여러 가지 고민들, 답 없는 것들을 나누게 되는데 담임목사님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권면했는데 매번 참여해야 한다고 해서 제가 첫 번째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참여하면서 제가 저희 순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 줄지 고민을 해 보기도 했지만 제 가족 관계 안에서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 마음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고 성경적으로 제 삶을 어떻게 일치시키고 이런 것들을 찾아가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잘 해결된 것들을 내일 순원들과 나눌 것에 대해서도 기대가 되고 좋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 4국 김은영 집사입니다. 저는 40대가 되면 생각할 것도 많고 고민해야 할 것도 많은데 혼자 생각하다 보면 너무 많은 시간을 헤매는 것 같아서 이런 자리를 통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줄이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줄여 지혜롭게 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 4국 최은희이라고 합니다. 열린교회 온 지 4년 차 됐는데 교회 오기 전에 담임목사님의 책 중에 처음을 읽은 책이 “서른통”이었습니다. 그때는 30대였습니다. 이번에 목사님께서 마흔통 주제로 이런 시간을 갖는다고 하시고 순장님께서 권면하셔서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 4국의 정영희라고 합니다. 저도 목사님의 서른통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고 “마흔통”에서도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 4국 박현영이라고 합니다. 지금 순장으로 섬기고 있고 40대를 지나고 있고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렇게 나왔는데 살아오면서 순간순간 정리를 하고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막상 40대를 지나면서 많은 혼란들과 여러 가지 아직까지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그런 부분들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시간이 있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 이제 줌으로 들어오신 분들까지 다 인사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현장에 오신 분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런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40대에 대한 도입 강의를 짤막하게 제가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문제 풀이에 들어가겠습니다. 문제 풀이를 하는 동안 열네 개가 선정됐는데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를 풀다 보면 여러 가지가 함께 연결되면서 40대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갖게 될 것입니다. 단순한 사례에 대한 멘트가 아니라,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방식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체에 대한 전망이 생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잠깐 기도하고 도입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40대가 나누는 이 대화 위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저희들의 대화 속에 그동안에 있던 저희의 많은 고민과 염려들이 오늘 이 시간 잘 풀리고 저희가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새 힘을 얻는 시간이 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예수를 믿어도 진리는 늦게 깨달아지는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는 애석하게도 지나가 버린 후입니다. 예를 들어, 40대가 되면 20대가 그림으로 싹 다가옵니다. “아, 20대가 이런 것이었구나. 그때는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했지?”, “그때는 내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했지?”, “그때는 내가 전혀 방황할 문제가 아니었어.” 라고 답을 내리는데 나는 40대에 와 있는 것입니다. 40대에 20대를 깨달았으니 60대에 가야 40대가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인생은 원래 이런 것입니다. 비극이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나이에서 이런 모든 판단력과 경험치 중에서 좋은 것만 지혜를 가지고 20대로 날아간다면 잘 살 것입니다. 사실 20대 때는 그것밖에 못 합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것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성경도 어떻게 보면 남의 이야기 아닙니까? 남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속에서 내가 파악하지 못했던, 내가 서 보지 못한 각도에 서서 인생을 바라보고, 또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내 인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는 순간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을 한계입니다. 요즘 “100세를 살아보니”, “80세를 넘고 보니” 이런 책들이 나오는데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부분에 진리라는 것들이 머리에 있어서 이해력도 문제지만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서 밥그릇 수가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로 못 깨닫는 진리들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깨달음은 우리의 현실을 뒤따릅니다. 그래서 40대가 되어야 20대가 눈에 들어오고, 30대도 아직은 눈에 안 들어옵니다. 40대가 됐는데 30대 후반이 눈에 들어온다? 거짓말입니다. 40대가 되어야 20대가 눈에 들어오고, 당연히 50대가 되어야 30대가 눈에 들어오고 60대가 되어야 40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건 계속 후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나이보다 많이 먹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과거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추종하고 따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자기의 선입관과 아집들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여태까지 서 있던 stand point, 입각점은 내가 항상 똑같이 서 있었으니까 보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각점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겸손하게 나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 인생을, 20대든 40대든, 그 본 것을 참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잘 들으면서 옥석을 가려내야 합니다. 어떤 것들은 신앙의 원리에 어긋나고, 어떤 것들은 신앙의 원리에 맞는다, 어떤 것들은 신앙의 원리에는 맞지만 너무 비현실적이고, 어떤 것들은 현실적이지만 신앙의 원리에는 맞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옥석을 가려내어 좋은 것만을 가지고 다시 한번 배열해야 합니다. 그것을 자신 속에 잘 받아들이고 소화해서 자기가 여태까지 인생을 바라본 입각점을 완전히 옮기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각도를 어느 정도 바꿔서 인생을 볼 수 있을 때, 한 각도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던 문제가 각도를 바꾸고 나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각도에서는 절대로 풀리지 않던 문제가 다른 각도에서 보니까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인생을 생각하고 살아갈 때 지혜가 계속 쌓여갑니다.
삶에 있어서 지혜라는 것은 혼자 생각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어딘가 외부로부터 자극이 들어오거나 충격을 주고, 때로는 고통을 받으며 반작용이 생기면서,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인생의 다른 면, 그것이 이면이든 측면이든 상관없는데 그 다른 면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 인생에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혼자서 고민을 해도 결국은 답을 못 찾거나 엄청나게 많은 희생이 뒤따라서 깨닫고 났을 때는 이미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립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이것이 아이들이 시집 장가갈 때쯤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후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간을 나누는 것도 그런 각도에서 우리의 인생을 한번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질문들에 제가 답하는 것을 보면 어떤 것에서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그거야 우리도 다 아는 건데...” 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와! 인생을 저렇게 볼 수 있겠구나!, 저렇게 본다면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고민할 문제가 아니구나.” 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갖는 모임의 목표입니다.
기혼자들과 미혼자들이 적절하게 3 대 1 정도로 섞여 있으니까 어느 한쪽을 치우쳐서 다루지 않고 공통적인 것도 있지만 비혼자들을 위한 40대의 이야기와 기혼자들을 위한 40대의 이야기를 적절한 비율로 다루고, 오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줌으로 들어오신 분들을 포함해서 오늘 내용과 관련해서 즉석에서 질문을 받고 좀 더 심화된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하겠습니다.
같이 문제를 보겠습니다.
문제 1번, 신앙의 차이가 나는 부분을 어떻게 격려하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부부의 신앙(믿음)의 차이가 클 경우에 충돌하거나 싸우게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예:헌금, 십일조, 주일성수, 자녀교육, 섬김 등) 대화로 설득해보려 하지만 상당히 어려움이 많습니다. 한마음으로 신앙생활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들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목사님 :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온 질문의 내용은 신앙의 차이가 나서 충돌과 싸움을 가져오게 된다, 두 번째, 부부의 신앙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가끔 싸우고 다투게 된다, 그 문제는 헌금, 십일조, 성수주일, 자녀교육, 섬김, 그런 것이다, 세 번째, 대화로 설득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신앙의 차이가 난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두 번째, 신앙의 차이 때문에 충돌하거나 싸우게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은 100% 신앙의 문제 때문에 싸우는 것이라는 데에는 저는 좀 갸우뚱합니다. 우선 질문하신 분을 다 밝히지는 않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문제들을 생각할 때 싸잡아서 대충 넘어가지 말고 이것이 정말 정확한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돌아가 보면, 부부관계가 있는데 신앙의 차이가 나면 확실히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나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를 것이라 점은 우리가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간혹 잘못하면 서로 의견충돌이나 다툼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충돌과 다툼이 모두 신앙의 차이 때문에 일어나느냐? 쉽게 말해서 이 질문을 주신 분이 아내라면 남편이 믿음이 없어서 헌금도 못 하게 하고, 주일에 가정을 팽개치고 교회에 가느냐고 하고, 아이들을 돌봐야지 금요일에는 구역예배 드린다고 어딜 가느냐, 왜 그렇게 많이 가느냐? 하며 잔소리를 했을 것이고, 반대로 이 질문을 하신 분이 남자라면, 왜 당신은 주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가족들과 같이 있지 않느냐고 아내가 잔소리를 했을 것입니다. 자녀교육은 나만 시키는 거냐, 당신은 일주일 내내 회사에 바쁘다가 주말에 잠깐 시간이 있는데 토요일에는 구역예배 모인다고 가고 주일에는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가는데 그게 잘하는 것이냐? 더구나 요즘 같은 때에 10%를 더 벌어와도 살까 말까 하는데 10%를 떼어서 헌금한다고 하면 어떤 아내가 동의를 하겠느냐? 하는 이런 종류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부부 사이의 소통과 신뢰 관계가 되어 있는지 먼저 점검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부부 사이에 소통이 잘 되고, 신뢰가 있고, 서로 충분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부부로서의 교감이 이루어져도 절대 이해 못 할 사항과, 그렇게 되면 해소될 사항을 구별해서 다뤄보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습니다.
실제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세 번째, 헌금, 십일조, 주일성수, 자녀교육, 섬김,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런 것들이 부부가 다투는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부 사이에 어떤 정신적 연합들이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쌓인 감정적인 불만들이 이런 것을 매개체로 해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아내든 남편이든 상대방의 말에 순종해서 절대 십일조를 안 하고, 헌금도 안 하고, 주일에 예배만 딱 드리고 와서 무조건 집에 붙어있고, 자녀들과 같이 있어 주고, 교회에서 어떤 섬김도 하지 않아서 가정에서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다고 해서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헌금 이야기가 나오는데, 교회를 건축한다고 할 때는 부부가 충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1천만 원을 헌금한다고 하면 아내 모르게 비자금을 1천만 원이나 가지고 있는 남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몇천만 원일 때는 부부가 의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헌금 내는 정도야 부부가 의논할 문제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십일조 문제는, 아내의 경우로 돌아가서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안 믿어도 아내한테 돈을 갖다주고 그 돈을 다 쓸어서 교회에 갖다 바치지 않는 한 신앙의 자유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도록 넘기는 스타일이 있고, 남편이 굉장히 완고해서 눈에 불을 켜고 취조하듯이 남편이 돈 관리자처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십일조 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그래도 자기가 교회에서 집사이고, 심지어 권사가 되었는데도 십일조 안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께는 제가 이런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 당신이 능히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인지, 남편이 워낙 심하게 반대해서 못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다 아신다.” 만약 남편이 계속 십일조 하는 아내에게 이혼하겠다고 협박한다면 십일조 하지 말아라. 그 대신 당신이 받는 생활비, 그것은 아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남편이 5백만 원 월급을 받아와서 2백만 원은 통장에 넣고 3백만 원은 아내에게 줄 테니 이걸로 한 달 동안 의식주 해결하면서 가정 살림을 꾸려가라고 하면, 아내는 거기서 십일조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너무 잘못 이용하면 안 되겠지만, 첫 번째 전제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타협점을 찾아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집사나 권사 임직할 때 십일조를 내는 것은 모르지만 그 금액으로 문제를 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중심을 보시니까 정직한지 그렇지 않은지 아십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하면 됩니다.
주일성수, 섬김은 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일날 남편이나 혹은 아내가 아침에 일찍 예배드리러 가서, 지금은 코로나 시기라서 예배 마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만 주일학교부터 시작해서 섬김도 있고, 열심 있는 사람들은 9시, 10시 전에 예배를 드리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교회에 있다가 들어갑니다.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꾸려져 나가기도 합니다. 이 조화를 잘 찾아야 합니다. 주일에 와서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서 주일학교 교사라도 하고, 우리 교회에는 없지만 성가대라도 하고, 교회 봉사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평일에 남편, 아이들, 가족들에게 그들이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충분히 엄마를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주중에는 가족을 만족시키고 주일에는 교회를 만족시킬 수 있느냐? 그래서 예수 믿는 것에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질문을 하신 분이 남자분인지 여자분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성일 가능성이 60% 이상일 것이라고 봅니다. 여성이라고 본다면, 평소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아내나 엄마를 충분히 못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평일에는 핑계를 댈 게 없으니 꼬투리를 잡는 것이 헌금과 주일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어차피 아내나 엄마를 충분히 누리기를 원하니까, 아마 이 질문을 하신 분은 집안에서 신앙이 가장 좋은 분일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많이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마음을 더 깊이 쏟으면서 일주일 동안 아이들은 엄마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면 주일날 좀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자기가 지금 있는 지점에서 어디까지 내가 외연을 펼칠 수 있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재서 거기서 적합한 지점을 찾고 그것만큼 원을 그리면서 섬기고, 형편이 나아지면 조금씩 조금씩 그 섬김의 영역들을 확장해 가야 가족들도 마음이 열리고 예수를 믿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일들을 행할 때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보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라고 나옵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삶으로 대답을 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직장생활하느라 힘든데, 주일에도 봉사하느라 힘든데 어떻게 가족까지 다 맞춰줄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1번은 이 정도로 넘어가고 2번 보시겠습니다.
2번, 믿지 않는 배우자를 어떻게 사랑하면서 전도할 수 있을까요?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곤 하지만 지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라고 했는데, 질문하신 분이 남성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고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남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남자는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좀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아내는 교회 나가는 것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겨우 끌려 나오듯이 하는 분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는, 아내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남편이, 특히 이 40대가 남자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바쁜 때입니다. 30대도 바쁘겠지만 30대는 비교적 책임이 적습니다. 서른 살쯤 돼서 입사했다면 40대 정도 되면, 큰 회사에서는 과장 정도 될 것이고, 빨리 승진한 사람은 부장 정도 될 것입니다. 거기에 따르는 책임감과 일에 대한 보람을 가장 많이 찾는, 남자로서의 직장과 비즈니스에서의 일반적인 황금기가 40대입니다. 가장 열정적으로 일할 때입니다. 40대에 대개 이후의 직장생활에 분기점이 생깁니다. 계속 뻗어나갈 사람과 도태될 사람이 30대까지는 아직 뚜렷하지는 않지만 40대에는 확연하게 갈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를 많이 쏟는 때이기 때문에 50대나 60대에 비해서 신앙생활에 몰입하기에 썩 좋은 상황은 아닌 것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를 전도하고 싶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하면서 전도하고 싶은데 사랑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럴 때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곤 하지만 지칠 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사실 여기 질문 열네 가지를 관통하는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 대답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최악의 교육은, 엄마 아빠에게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아이들의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집에서 강아지를 기르는데 종류에 따라서 선천적으로 똑똑한 유전자를 가진 강아지가 있고 멍청한 강아지가 있습니다. 우리 집의 말티즈는 중간 정도에서 약간 떨어지는 종류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티즈여도 그 안에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지능에 한계가 있지만 자기 스스로 아이큐가 400이 넘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신뢰할 수는 없고, 정상적인 사람은 80~300 사이일 것입니다. 강아지도 마찬가지일 텐데, 같은 개라도 주인과 눈을 마주하고 알아듣지 못해도 많은 이야기를 해 주는 강아지는 같은 종류의 개 중에서도 말을 빨리빨리 알아듣고 굉장히 똑똑한 개가 됩니다. 그런데 밥시간 돼서 밥 주고, 주인은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고, 강아지가 반갑다고 해도 귀찮다고 하고 밥이나 주고 가서 자라고 하면 사람과 같이 교감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려서 지능이 계속 떨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똑같이 가족들과 함께 그렇게 서로 교감하고 교통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생명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직업을 다 때려치우고, 요즘 나오는 파이어족처럼 일찍 직장을 그만두고 들판에서 뛰어놀면서 아이들을 기르니까 너무 좋다고 하는데 그것은 가치관 나름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참 무엇인가를 사회 속에서 구현해 갈 나이, 30대 중반밖에 안 됐는데 돈은 좀 벌어놨을지 모르지만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을 정리해서 시골로 내려가서 아이들과 고추잠자리나 잡으러 다니고 개울로 뛰어다닌다고 하면서 그게 인생이라고 한다면 개인 문제니까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무엇인가 사회에 이바지하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이 세상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데 어느 정도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그렇게 빨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각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문제는 이 시기에 너무 바빠서, 그리고 40대 때의 남자들의 관심사는 밖으로 뻗어나가는 시기라서 회의를 느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50대가 되어서 서서히 직장에서 눈치 주고 나갈 때가 된 것 같을 때 회의가 드는 것이지 이때는 항상 인정받고 미친 듯이 돌진하고 있을 때는 눈에도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때 아내들이 가끔 불평하는 것이, 가정이 무슨 하숙집인 줄 아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아이들이나 아내와도 마찬가지인데, 한 사람이 안 믿는 경우에는 여러분이 전도해봐서 아시겠지만 간, 쓸개 다 빼놓고 전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참 전도하다가 “내가 가족에는 이렇게 한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가족 중에 아내나 남편이 전도 대상자인데 그렇게 못 하는 것입니다. 한 서너 번 잘하다가 한 번 열 받아서 확 뚜껑 열려서 쏟아버리고 나면 서너 번 잘 해가지고는 복구가 안 됩니다. 서너 번 잘하다가 한 번에 다 쏟아버리고 한 두 번 하다가 다 쏟아버리고 나중에는 스스로 포기해버립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명의 문제, 에너지의 문제입니다.
모든 에너지는 정돈된 삶에서 나옵니다. 현실적으로 내가 너무 힘이 없다, 아이들 둘, 셋 먹여 살리기도 힘들다, 이런 식으로 돌아오지도 않는 메아리 같은,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는 하지 말고, 현실을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았는데, 살림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데, 나는 일이 많은데 어떻게 하랴? 하면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내가 갖지 않는다면 가정도 망가지고 아이들도 망가지고 자신도 망가집니다. 거기서 신앙이 요구되는 것 아닙니까?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때마다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남편과의 관계를 극복하고 나가도록 만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배우자가 예수 믿게 되기까지는, 그리고 같은 신앙의 단계에 올라오기까지는, 모든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십시오. 누군가는 죽은 적이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서 예수 믿게 하고 집사로 세우고 장로로 세운 사람들, 믿지 않던 아내를 전도해서 예수 믿게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과정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야겠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이다.” 이것을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계산을 하면서 내가 있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지하며 간절히 사는 사람에게는 아주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지 않습니까? 그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입니다. 3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3번, 생각과 행동에 서로의 부족함이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잔소리와 지적 혹은 방관을 넘나들게 되는데, 배우자의 부족함이나 잘못된 점을 발견할 때 어떻게 사랑을 대처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먼저 처음 기본질문부터 하고 가야 합니다. 내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선택지는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살 것이냐? 아니면 헤어질 것이냐? 이렇게 크게 두 가지지만 헤어질 수 없으니 산다고 하면, 사는 게 다 똑같은 것 같지만 정 없이 남남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서로 어떻게 하든지 이해하면서 사랑하며 살 것인지,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답을 내 보십시오. 너무나 심각한 귀책 사유가 있어서 도저히 이 사람과는 살지 못하고 헤어져야겠다면 저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야겠다고 하면 어떻게 사는 것을 원하시는지 제가 묻는 것입니다. 그 상이 먼저 자신에게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부부가 자기들 말로는 성격 차이라고 하는데 성격 차이가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통하기를 아예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통을 포기하고 나면 어차피 자기 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소외시킨 채로 자기 나름대로 일에 빠져 사는 세계를 구축하든지, 이건 오히려 좀 낫습니다. 심지어 오락 같은 것에 미쳐서 빠져 살든지, 아니면 외도하든지, 크게 서너 가지밖에 대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오락에 빠지고 심지어 노름에 빠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조금 고상하게 보는 것은 자기 취미 생활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락과 취미 생활은 다른 것입니다. 피시방에 가서 밤을 새우는 피시방 폐인이 되는 것은 아닌데 낚시 같은 것에 빠져서 가족들 다 팽개치고 거기에 골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생활이 안 됩니다. 나중에 그런 사람들은 아내에게도 버림받고 아이들에게도 버림받는 고독한 노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지금 여러분의 40대가 인생의 씨를 뿌리는 시기입니다. 20대, 30대에 뿌리는 씨와는 다릅니다. 요즘은 만혼이라서 33세쯤 결혼해서 35세쯤 아이를 낳았다면 아이들이 한 살, 두 살 어릴 때는 영향을 덜 받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유치원, 초등학교 가면서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하고 더 자라면서 사춘기 때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따라서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형성됩니다. 부모 노릇을 제대로 안 하면 여러분의 인생의 노년에 직장도 그만두고 다 그만두게 될 때 자식들이 “저런 인간은 나에게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제외시켜버립니다. 지금 40대 때는 그런 것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어디 가든지 내가 인싸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승진했고, 경제적인 여유도 20대 후반이나 30대 때 보다 안정되어 있고, 아직 노화현상은 심각하게 오지 않아서 건강의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니고,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40대는 비교적 건강합니다. 그런데다가 정욕 같은 것은 왕성합니다. 호기심도 마찬가집니다. 굉장히 빗나가기 쉬운 세대가 40대입니다. 가정에 소속감을 갖지 못할 때, 자신은 아이들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자녀들에게 무관심하게 되고 아내에 대해서 데면데면하게 되고, 관계를 위해 씨를 뿌리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이 50대가 되면 은퇴하게 됩니다. 웬만한 직업은 50대, 55세 정도면 은퇴하게 됩니다. 학교 선생이나 교수 같은 경우는 더 가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은퇴하게 되면 나중에 가족들을 의지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겠지만 거둘 것이 없어집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 결론을 내리자면, 저는 이 질문을 하신 분에게 먼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남편과의 관계, 아내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며 살고 싶은지, 헤어질 것인지, 살 것인지, 산다면 너는 너, 나는 나, 대충 접고 연합을 하지 못한 채 그냥그냥 헤어지지 못해서 살아가는 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보기 드문 그런 사랑은 아니더라도 부부가 애틋하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먼저 대답을 해야 합니다. 헤어진다고 답하면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필요 없고 애들 스무 살 될 때까지만 대충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대답은 신앙이 할 답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선택지는 세 개가 주어졌지만 실제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 차이점도 많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많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불완전하지만 연합을 이루면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잔소리 문제가 나오는데 잔소리와 큰소리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면 선택해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교회 일을 해 가는데, 교회의 관리자급 행정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담임목사가 뭘 하라고 지시하는데 너는 둘 중에 어떤 것을 택하고 싶으냐? 평소에 내가 지시하는 작은 내용들에 자꾸 토를 달고 반대하다가 매우 중요한 일을 할 때 너를 소외시키고 나 혼자 결정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평소에 아주 작은 것들을 지시할 때 잘 따르고 시키는 대로 하다가 결정적일 때에 매우 중요한 일을 너와 의논하면서 네 이야기를 참고하면서 결정하는 관계가 되고 싶으냐?”라고 물었습니다. 둘 다는 안 되고 둘 중에 하나만 된다고 했습니다.
잔소리와 큰소리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여기에 남편과 아내가 있는데 둘의 신앙이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으로서 자기가 무엇인가 아내에게 양보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큰소리입니다. 자신이 양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소한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는 자신이 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중요한 일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에게 잔소리로 들리지 않고, 늘 양보만 하던 아내가 이 지점에서 이야기하니까 남편이 안 들어주면 관계가 깨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집니다. 뭘 가지고 잔소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잔소리는 남자도 하고 여자도 하는데, 그것은 이해심과 배려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남자들의 경우에 대해서 아내들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집에 남편이 들어오면 들어온 순간부터 남편이 집에 있는 것이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남자들은 무슨 소린지 모르실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는 즉시 눈을 들어서 사면을 보면서 정리해야 할 것, 치울 것을 생각하면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지금 있는 상태보다 나아져서 아내가 덜 움직이게 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집에 있는 동안에는 살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청소기 한 번이라도 돌려주고, 책장 선반에 물휴지로 한 번 닦든지, 화장실 청소를 하든지, 아내가 보기에 남편이 있으니까 도움이 된다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지 말고 큰소리, 굵은 소리를 해야 합니다. 굵직한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평소 일주일을 아내가 모든 것을 남편에게 맞춰주면서, “주일은 당신이 교회 가야 한다, 내가 간곡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니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 당신이 신앙이 없으면 가정 평화를 위해서라도 교회에 가야 한다. 왜? 아내인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일주일 동안 충분히 섬겨야 합니다. 그것을 남편도 인정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감정이 나빠진다면 충돌하지 말고, 충분히 대화를 통해서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부부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해주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무도 못 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이해할 때, “말하지 않으면 저 인간은 절대로 모른다.”고 이해하는 것이 상처를 덜 받습니다.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남편이 보기에는 아내 자신도 곰탱이입니다. 그렇게 알아서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못 하는 것을 남에게 덮어씌웁니다. 그러니 기대치만 높아지고 실망만 더 많이 하게 되니까 관계가 더 꼬이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함께 집에 있을 때, 서로에게 자기가 없는 것보다도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아내는 남편을 대하고 남편은 아내를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잔소리가 줄어들게 됩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이, 배우자의 부족함이나 잘못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는데, 처음에 하나님이 남녀를 창조하시고 결혼하게 하셨을 때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라고 하셨는데 히브리어에는 한 단어로 나옵니다. “에제르” 즉, “도움”인데, 이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다시 말해서 남편과 아내를 만나게 하실 때 서로 모자라는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겠지만,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씀씀이, 경제생활에 대해서 잘 못 할까 생각이 된다면 그 사람에게 그런 결함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아내로서 자신의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남편 앞에서 느끼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느껴야 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아내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스트레스를 안 받았는데 남자들이 받는 스트레스 중의 하나가 아내가 집 안 정리를 안 해서 스트레스받는 남편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걸 보고, “왜 우리 아내는 정리를 잘 못 할까” 하면서 몰고 가지 말고, “저 여자는 정리가 안 되는 여자니까 하나님이 정리 잘하는 나를 붙여주셨구나.” 생각하면서 아내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일평생 아내는 어지르고 남편이 청소만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되 기본적인 마인드는 서로를 보충하기 위해서 만났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4번입니다.
4번, 부부 사이의 잠자리에 있어 성경적인 방침이나 기준이 있을까요? 그리고 임신에 대한 부담감과 자녀계획 때문에 정관수술을 고민 중인데, 성경적인 기준이 있을까요?
목사님 : 우선 뒤부터 답변하자면, 정관 수술하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이미 로마시대에도 피임법이 다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산하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 있을 수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배란일을 피해서 부부관계 하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임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부부의 성생활을 완전히 자녀 생산에만 국한시키고 있는가? 어거스틴 같은 경우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자녀 생산을 주로 보았고 그런 점에서는 금욕주의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지만 부부의 정신적인 연합을 위해서라는 항목도 함께 보았습니다. 잠시 같이 산 적은 있었지만 평생을 거의 독신처럼 살았던 사람치고는 굉장히 너그러운 견해를 가졌습니다. 기독교적으로 성경적으로 본다면 성적인 결합을 자녀 생산만이라고 보지 않았고, 심지어 청교도들의 경우에도 그들은 굉장히 엄격한 사람들이었지만 한 사람이 성적인 불능자로 판명되면 교회에서 이혼을 허락해줬습니다. 더 큰 범죄를 막기 위해서 교회에서 이혼을 허락해 준 것입니다. 물론 양날의 검 같아서, 결혼을 했는데도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 방식으로 푸는 것에만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정욕의 총량을 줄여야 합니다. 자극받지 않고 그것을 적절히, 우리가 사는 동안 항상 나그네와 행인처럼, 우리의 정욕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살아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성적인 즐거움 그 자체를 성경에서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까? “에드나”에서 왔습니다. “에드나”는 성적 즐거움입니다.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들어가면 가임기를 피해서 부부관계를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문제 삼지 않으려면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또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이런 많은 점들을 우리는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관수술 하는 것 자체를 성경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에 질문에 잠자리에 대해서 성경적인 방침이나 기준이 있느냐고 했는데,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점은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4절에 의하면, “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가 하나니”라고 했는데 이것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상대방의 성적인 요구에 언제나 응할 의무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 도에 지나친 것 같고 이런 정도의 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잠자리를 계속 거부함으로 상대 중 한 사람이 정욕을 주체할 수 없거나, 삶이 어느 부분에 망가지는 부분이 있게 되면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꼴 보기 싫으면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남자들의 경우에는 애정과 성생활이 분리될 수 있는 남자들이 많겠지만 여자들의 경우에는 그 확률이 훨씬 적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사고가 바뀌어서 좀 다르겠지만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것도 역시 단순한 잠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의 정신적인 연합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대화를 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런 문제로 서로를 고문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심리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impotence라고 하는데 성적 불감증입니다. 이 성적 불감증은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원인이 되어서 성적 불감증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또 다른 심리 치료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인간은 아주 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 번의 어떤 충격 때문에 아내 혹은 남편에 대해서 영원히 impotence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대개 정직하게 이야기하거나 상담하지 않습니다. 보통 밑에 묻혀 있다가 나중에 주체하지 못해서 남편이 외도하게 되거나 아내가 외도하게 되는 것으로 번지게 되면 비극적이 됩니다. 대화를 많이 하면서 전문가의 도움도 받으며 조화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문제입니다.
5번, 주일 말씀에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공감해주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배우자의 아픔이나 고통을 전혀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의 이런 모습에 놀라곤 합니다. 더 많은 사랑과 공감을 갖기를 바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목사님 : 모든 집이 지어질 때, 다 지어놓은 집을 헬리콥터로 싣고 와서 그대로 내려놓는 형태의 집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초기 단계지만 미국에서는 32평 정도 되는 집인데 아예 길거리에 펼쳐 놓고 팝니다. 가서 들여다보고 그 집이 마음에 들면 크레인으로 커다란 트레일러에 싣고 가서 설치까지 해 줍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집에 올라가도 문제가 없도록 터를 닦는 공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게와 하중을 다 생각해서 콘크리트로 말뚝 같은 것을 박아놓고 화장실에 쓸 오수시설도 해 놓고 연결합니다. 결국 기초공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기초공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질문하신 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에는 부부의 이런 결합 자체가 옛날보다 더 힘든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이 함께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이런 어려움은 더 배가 됩니다. 자기가 관심을 갖고 몰입하는 영역이 부부가 서로 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서로를 위해서 시간을 내어주고 마음을 써 주고 하는 것들이 잘 되는 사람들은 잘 되지만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해서 정신적인 결합이 더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편과 아내가 전혀 상대방의 고통이나 어려움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공감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혼하고 여태 살아온 시간 속에서 인격과 삶을 잘 나누고 있지 못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바운더리가 있어서 그 안에서 각자 생활하고 거기는 터치 받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움직이고, 일정 부분만 공유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굳이 24시간을 같이 있는다고 해서 결합이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부부의 생활, 함께 시간을 갖고, 선물을 주고받고 그가, 혹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서 감동을 주고, 원만한 성생활을 가지며,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나와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설교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가족이 누구냐고 할 때 특별한 타인이라고 했습니다. 나 외에는 다 타인입니다. 특별한 타인입니다. 아내는 더 특별한 타인, 남편은 더 특별한 타인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타인입니다. 그런 관계가 잘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일방적으로 자기 혼자 착각하지 말고, 아내와 혹은 남편과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든 뭐든 다 그냥 두고 둘이서 1박 2일이라도 여행을 떠나서 허심탄회하게, 거기서 설전을 벌일 생각을 하지 말고 뭐든지 들어준다고 하고 아내의 소원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내가 어떻게 좀 고쳐지면 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자, 아내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그렇게 해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여행이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는 경우에 요구사항을 막 쏟아 놓으면 마음에 반감부터 생깁니다. “자기는 나한테 그렇게 해 줬나?”합니다. 그러면 서로 대화가 안 됩니다. 일단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아내의 시각에서 가정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섭섭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뭐든지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노력하겠다.”하면서 마음을 열고 수용하는 자세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보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을 위해서 그런 시간을 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고 힘들지 모르지만 조금씩 나아질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날들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 안 되면 6개월에 한 번이라도 시간을 정해놓고 꼭 이맘때쯤에는 1박 2일 여행을 떠나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결국은 다급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이지, 정말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못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정이 깨어져서 위태로운 위기가 올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본인은 가정을 세우는 데에 거의 이바지하지 않으면서 잘 굴러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 시간을 들어 충고하고 싶은 것은, 남편이 거기 있다고 해서 마음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내가 변함없이 거기 있다고 해서 아내의 마음도 거기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는 제목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아내와 남편이 차를 타고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이 운전을 하면서 투덜거렸습니다. “아니, 우리 목사님 말이지, 주일 설교가 그게 뭐야?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니,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그런 설교를 그렇게 길게 하는 거야?” 하면서 짜증 내지 반항을 했습니다. 아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나 생각 많이 했어.” 남자들은 그렇게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네에게 주는 이야기인데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남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영원한 아기입니다. 그다음 문제입니다.
6번, 장애를 가진 자녀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장애로 인한 가족들 간의 상처를 어떻게 위로하며 회복해 갈 수 있을까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병 고침의 기적들을 붙들고 기도하는데, 장애의 회복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의 바른 태도일까요? 아니면 현재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일까요?
목사님 : 저는 먼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들의 경우는 둘입니다. 장애 때문에 비장애인인 가족들이 정신적으로 장애가 되어버리는 경우, 반대로 아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적인 장애를 딛고 건강한 비장애인으로 변화되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결국 은혜가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니까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고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은 이 아이가 기적적으로 비장애인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내가 산다.”라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현실에 장애인인 자기 자녀와 살아가는 이 삶은 언제나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삶을 그렇게 놓고 보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불행할 것입니다. 끝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결국 살았던 모든 날들은 즐거움은 없이 장애에서 벗어날 날만 기다리면서 살아온 기다림의 시간일 텐데 그게 어떻게 행복이 되겠습니까? 그런 가능성을 믿으면서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현재적으로 주시는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안에서의 기쁨, 감사를 찾아가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책에서도 썼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장애아를 둔 자매인데 자기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아이를 낳았느냐고 하나님 앞에 고쳐 달라고 했는데 안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열린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현실을 받아들여라.”라는 말씀이 자기를 깨지게 만들었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이 아이가 그 집안에 근심의 통로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놀랍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질문했는데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장애인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지를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는 장애아들에게 비장애인과 똑같은 경험을 대입시켜서 그것이 아니면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회심자로 분류될 수 없습니다. 이국에서 그런 사례들을 가지고 어떻게 회심했는지를 구분하는가에 대해서 연구해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그런 기준으로 성경적으로 문답을 하고 확인을 하고 세례를 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택하신 영혼은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고 그 영혼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믿고, 이 아이가 믿는 집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언약이 있다고 생각하면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모습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는 얼마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비장애인과 똑같은 반응을 기대하지는 말아라. 그 아이의 영혼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두 번째는 이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자꾸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이 봄날에 벚꽃 만발한 공원에서 뛰어놀지 못할까를 생각하면 계속 우울해집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이 아이와 함께 누릴 수 있는 것, 이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현실을 극복해 나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다음 문제입니다.
7번. 신앙교육과 학습을 따로 분리하고 싶지 않은데 사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 부딪힙니다. 어느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하나는 곡 소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한국에서의 교육시스템(공/사교육)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신앙교육은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충만하나 세상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아 학습에 매진하면 어느새 신앙교육은 뒷전으로 밀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훌쩍 커 있는 아이들이 보여 두렵습니다. 아이가 좋은 신앙인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과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부모로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목사님 :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신 학부모의 질문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감동적이지만 질문자의 심리 분석을 해봐야 합니다. 첫째는, “신앙교육과 학교공부를 따로 분리하고 싶지 않은데”라고 했는데 누가 분리하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 부딪힙니다”했는데 굉장히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영적으로 변화를 받고 은혜 충만한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못해야 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절대 그런 은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획일적으로 구분을 해야 하는데, 사실 중고등부 사역에 들어가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언급하시는데 한국에서의 교육시스템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주로 부지런히 암기하는 방식인데, 자기가 성장한 대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미국은 상당히 그런 것이 잘 되어 있지만 우리는 학교가 원하는 제도의 틀에 맞춰서 다듬어지지 않으면 거기를 통과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파이프 같은 것을 놓고 거기를 통과하라고 하는데 배 나온 사람은 통과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시스템을 따르다 보니 어느새 신앙교육은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살다 보니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아이들을 키워주는 서구식 교육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서울대, 연대, 고대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 공부 못하는 아이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 모두 SKY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라는 것이 대학입시 하나를 놓고 나머지는 공부가 아니라고 가정하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모든 것을 공부로 놓고 본다면 못하는 아이들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재석 씨가 그렇게 공부를 못했다고 합니다. 꼴찌 가까이 했다고 합니다. 공부 못 한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는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예인이 되기를 위한 공부는 너무 잘한 것입니다. 심리 분석을 조금 더 해 보겠습니다.
세 번째로 “믿음은 충만하나 세상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했는데, 믿음이 충만하면 세상에 설 자리가 없는가?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충만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설 자리를 많이 얻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 국민일보에 나오는 간증들을 보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시킨다”고 했는데 그럼 공부를 열심히 시키면 항상 세상에서 설 자리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이것은 확률의 문제이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신앙교육은 뒷전으로 밀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훌쩍 커 있는 아이들이 보여 두렵습니다” 뭐가 두려운 것입니까? 아이들이 훌쩍 큰 것이 두렵습니까? 아이들은 컸는데, 스스로 아이들이 주체성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이 있고 없고도 중요하지만 주체적인 것은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체성이 없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엄마 아빠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고 문화의 영향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주체화라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씩 문제를 풀어가겠습니다.
우선, 그 편견부터 깨야 합니다. 신앙교육과 학교 공부를 병행할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제 경험을 하나 이야기하면, 제가 88년도에 교수가 되었을 때 첫 번째로 들어온 자매 조교가 있었습니다. 목포에서 공부를 하다가 올라와서 신학대에 왔습니다. 2학년 때 제 조교가 됐는데 하루는 상담할 게 있다고 해서 물어보니, 자기 동생이 공부를 너무 잘하는데 신학대학을 간다고 했답니다. 가장 괜찮은 신학대학을 찾아보니 연대였답니다. 연대는 자유주의 신학이었습니다. 거기를 가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 들어보니 그 당시에는 본고사가 있던 시절이었는데 서울대 영문과는 힘들어도 동문과 정도는 들어갈 성적이었습니다. 상당히 괜찮은 공부 잘하는 그룹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너무 평범했고 평범 보다 약간 아래였다고 합니다. 60명이면 40등 정도 하는 아이였답니다. 그러다가 겨울 수련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공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답니다. 물론 은혜받은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된다고 기대하지는 마시고, 또 그렇게 안 한다고 해서 그 은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능력이 안 되는 애들은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 유전자를 받고 태어났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목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학력 경시대회에서 10위 안에 들 정도로 잘했답니다.
이렇듯이 그 두 가지가 그렇게 따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실제로 중고등부를 하면서 아이들이 방황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변화를 받은 후에 정신이 맑아지면서 공부에 몰입하는 아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당시에 우리 담임목사님은, 공부라는 것은 지성의 활동인데 신앙이 나쁘다, 신앙이 별로 없다는 것은 지성이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가 잘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설명에 대해서 저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지만,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지성이 맑아집니다. 맑아지고 나면 놀라운 집중력이 생깁니다. 물론 이것도 머리가 되는 아이들만 가능한 것입니다. 머리가 안 되는 아이들은 아무리 정신이 맑아져도 집중이 안 됩니다. 공기 좋은 곳에서 먹는 모든 삼겹살이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맛있는 것입니다. 공기 좋은 곳에서 먹는 삼겹살은 맛이 다른 것 아십니까? 산소 포화도가 달라져서 그것이 미각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대표적인 것이 소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집사님? 공기 좋은 곳에서 마시면 많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끝까지 대답을 안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공부, 공부는 억지로 안 됩니다. 공부를 안 하려는 애들, 혹은 능력이 안 되는 애들에게 어거지로 공부를 시키려고 하면 부모와 깨진 관계가 남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마지막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관계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이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명백하게 아닌 것을 해도,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도, 물론 그것이 어마어마한 죄를 짓는 일이라면 칼을 들고라도 막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공부를 안 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도 어느 정도는 잔소리를 받아들입니다. 그게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습니다. 딸이 공부하기 전에 엄마가 간식을 만들어서 방으로 가져가는데 문을 조금 열다가 딸이 열중하고 있는 통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미친년이 있잖아....”하는데 친구와 통화하는데 그 “미친년”이 엄마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엄마를 두고 그 욕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관계 자체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청소년기에는 자아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자아가 아직 확정이 안 돼서 그 안에서 혼돈이 일어납니다. 나라로 말하자면 나라의 정권이 서지 않은 것입니다. 나쁜 통치자가 나와서라도 정권을 잡고 나를 평정하면 나라가 좀 편안한데 동네마다 왕이 나와서 서로 물고 뜯고 하니까 내면의 세계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아이는 이런 상황에서 속으로 싸우는데 거기에 에너지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엄마가 뭘 물어볼 때, “응”, “아니” 라고 대답만 해 줘도 고마워하라는 이야기는, 그걸 대답할 수 있는 에너지조차도 없을 정도로 그 아이의 내면세계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자꾸 시비를 걸면 아이는 “옳다구나!”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결판도 나지 않는 싸움을 하면서 괴로워하기보다는 미워할 수 있는 대상 하나를 만나서 거기에 퍼붓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쉬우니까 방향을 확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면, 자녀와의 관계가 깨어지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자녀의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 모습이 뭔지를 항상 현실보다는 약간 더 비관적으로 생각하면서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부모가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다음은 대답이 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충만하다고 해서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에게 공부도 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장승수라는 사람 기억하십니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를 쓴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 너무 공부를 못하고 지겨워서 가스통 매고 배달도 하고 했답니다. 살아보니까 현실이 만만한 게 아니라 너무 고달팠답니다. 하루는 생각하다가 아무리 공부가 어렵다고 해도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그 사람은 머리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무리 고달프게 알바해도 안 되는 애들이 있습니다.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인문사회과학대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법대를 나와서 지금은 변호사를 합니다. 지금 중학교 때 공부를 못 한다고 해서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할 것이다?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 한다고 해서 대학교 가서 공부를 못할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교 입학할 때 공부 못했는데 졸업할 때도 공부 못 할 거다? 아닙니다. 대학 들어갈 때 정말 별 볼일 없는 대학에 입학했는데 나중에 머리가 트여서 아주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기도 합니다. 편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편입할 수 있는 사람은 재수하면 더 좋은 대학 갈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건 모르는 것입니다. 아이가 공부를 좀 못한다고 해도 너무 낙심하지 말고, 이 아이가 공부할 아이라면 언젠가는 눈이 뜨이고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아들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데,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Ph.D. 를 받았습니다. 는 박사논문을 쓸 수 있는 모든 과정을 수료했다는 것으로 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독일어, 영어, 불어 시험을 다 통과했습니다. 저는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 유학가지 말아라.”, “왜요?”, “너는 공부머리가 아니다. 아빠가 보증하는데 너는 공부머리가 아니니까, 여기 남아서 열심히 설교하고 전도하고 목회하면서 배우다가 한국에서 길을 찾아라.” 했습니다. 그래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유학 가도 몇억을 쓸 텐데 나 같으면 그 돈을 가지고 책 사서 혼자 공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학교에 가서 교수님께 전했더니 그 교수님이 “아빠는 혼자 하셔도 되는데 너는 유학을 가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가고도 마음에 안 내켜서 또 이야기했습니다. “가는 것은 좋다. 네가 결심한 것이니까 나는 인격적인 아빠니까 존중한다. 가서 딱 2년 있어 보고 그게 아니라고 생각되면 멈칫거리지 말고 빨리 돌아와라. 그래야 다만 몇천만 원이라도 절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70%는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석사과정에서 공부를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총장이 그 학교에 추천서를 써 주면서 하는 말이, “김영래, 내가 지금 추천서를 써서 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 이 추천서를 본다면 너를 웬만하면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추천서를 써 준 것입니다. 그렇게 2년 만에 석사를 마치고 가서 거기서 지금 논문을 쓰고 있는데 그다음은 모릅니다. 기도하기는 내년 5월에 학위를 받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두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딱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 것입니다. 보통 6년 이상 걸리는데 그것은 굉장히 빠른 것입니다. 아빠인 나도 이 아이가 그렇게 잘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은 두고 봐야 아는 것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중간밖에 못 했습니다. 이유는 한국 교육과 미국 교육이 다르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공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 못한 아이는 반드시 대학에서도 공부를 못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너무 일희일비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있으면 됩니다.
또 하나는 꼭 공부를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면 확률적으로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면 아시겠지만 공부 잘하고 사회성 모자라는 애들에게는 사회에 첫발은 들여놓을 수 있는데 커나갈 수 있는 환경이 뚝 떨어집니다. 오히려 공부는 웬만했는데 회사 들어가서 영업활동도 너무 잘하고 그러면 길이 막 열리면서 애가 날개를 단 듯이 사회적으로도 출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신앙 안에서 밝은 인격을 가지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인 적응성, 창발성, 이런 것들을 성장시켜주면 어디엔가 가서 먹고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일류기업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중에서 임원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수백 명 중의 한 명 될까 말까 할 것입니다. 많이 뽑을 때 몇천 명, 몇만 명씩 뽑는데 그중에서 임원이 몇 명이나 나오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40대 중반, 50대 중반 되면 퇴직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면 확률의 싸움일 뿐이지 아이들을 위한 완전한 장치는 아닐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저를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 안 하겠다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공부시켜서는 안 됩니다. 할 아이는 합니다. 아이를 오히려 자유롭게 자라도록 놔두면 언젠가 깨닫고 공부할 때도 오고 바르게 살아갈 때도 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은 갖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아이가 공부 못 한다고 고민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섣불리 단정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가 공부 잘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공부가 반드시 SKY 가는 공부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중에도 보면 한국에서 거의 버린 아이들이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가서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 책도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교육시스템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못 찾아냅니다. 선진교육이 좋은 이유는 마음껏 해 보도록 놔두면서 그 속에서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을 시키면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좀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다음입니다.
8번, 사춘기의 시기를 지나가는 과정에서 아이들과의 의견충돌이 간혹 발생을 합니다. 중요한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인격과 신앙 성장을 위해서 현명하게 대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떠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리면서 이끌어 가야 할까요?
목사님 : 제가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이들에게 “안 돼”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 “안 돼”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절대 피시방 가지마. 안 돼”라고 하면 몇 명이 그 말을 듣겠습니까? “너 절대 스마트폰 보지 말아.” 하면 그걸 한 시간은 안 볼 수 있겠지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지키지도 못할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타협을 하십시오. 아이들이 폰을 하면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교육을 잘 시켜서 아이가 스스로 폰을 내려놓게 하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엄마, 나 이제 이 폰의 폐해를 알았어. 나 인터넷 안 되는 할아버지 폰 사줘. 나 이 폰 필요 없어.”한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무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지킬 수 있는 선에서 타협을 보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는 희로애락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서로 지킬 수 있는 선에서 타협하면서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아이들과 대결 구도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들을 논리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특히 사춘기 아이들은 절대로 논리대로 좇아가지 않습니다. 자신들도 안에 논리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를 들이받아 버립니다. 그렇게 하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다고 이해해줘야 합니다. 초등학교 4, 5학년 되면 사춘기에 들어서는데 좀 참아줘야 합니다. 얼마나 이 아이가 괴로운지 이해하면서 오히려 이 아이의 요구에 맞춰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부모는 항구입니다. 배가 항구를 떠납니다. 돌아다니다가 다시 육지로 돌아오려면 항구에 접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항구가 없어지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보니까 엄마, 아빠는 항상 거기 있더라,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는 부모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자식을 길러보면 엄마 아빠처럼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 엄마 아빠가 참 존경스러워집니다. 여러분이 아이들의 미래에 그런 엄마 아빠로 남는 것, 그것이 그 아이들이 돌아올 항구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9번,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제 컨디션에 따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혐오감이 들기도 하고 회개하며 다짐하기도 하지만 걱정이 되곤 합니다. 먼저 어른답게 감정을 다스리고 참으면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사랑하는 잔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인내보다는 적적한 수준의 훈육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 자녀를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 할 때와 엄격히 매로 훈육을 해야 할 때의 성경적 구분 기준이 궁금합니다.
목사님 :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잠언에 보면 자녀에게 초달을 못하면 아이를 망친다고 되어서(잠 13:24) spares the rod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바뀌어진 정신이나 사회의 모든 것을 볼 때, 조화점을 찾아야 합니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별로 좋지 않지만 아이를 훈육, 벌을 주어서 아이를 고치는 것은 그 벌을 무서워할 때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령이 자꾸 낮아집니다. 예전에는 중학교 다닐 때도 서서 회초리를 맞았는데 지금 그런 아이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매를 두려워하는 나이까지만 그게 통하는 것입니다. 때리지 않고 성공하는 교육은 성공하는 교육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질문자가 자매인 것 같은데, 솔직하게 고백을 한 것 같습니다. 양육을 하면서 제 컨디션에 따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혐오감이 들기도 하고 회개하며 다짐하기도 하지만 걱정이 된다고 했는데, 제가 볼 때는 이 자매님은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만약 자신이 up and down의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되면 정신과 진단을 받아보십시오. 분노조절장애처럼 조절이 안 돼서 아이들에게 심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건강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영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감정적으로 다스리지 못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신의 건강에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십시오.
아이들이 부모의 뜻대로만 해 준다면 아이가 아닙니다. 인내한다고 했는데 그것보다도 사실은 인내 이상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엄마에게 항상 에너지가 넘쳐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어렵습니다. 나 하나 지탱하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오은영 박사의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을 보시면, 힘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 프로그램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개를 나쁜 개로 만들어버리는 것인데, 사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자기 자신의 정신 상태가 건강한지를 먼저 체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지혜와 사랑, 두 가지를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사춘기라서 미치겠다고만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아이는 더 미치는 것입니다. 미치고 싶은 엄마 밑에는 미친 아이가 있습니다. 그걸 미치겠다고만 하지 말고 도대체 왜 미치겠는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세탁기 하나를 돌려도 설명서를 읽어야 하는데 자식 사용 설명서를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금 유튜브 같은 데서도 많이 나오니까 이런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넘치는 에너지가 있어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목사님, 미치겠어요. 저 하나도 가눌 수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하는데, 그래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매주 은혜받아야 한다고 제가 눈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은혜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힘들 때마다, “우리 엄마도 나 키울 때 이렇게 힘들었겠지...”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으며 아이를 길러야 합니다. 절대로 감정에 싸여서 아이들에게 화풀이하듯이 신경질 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남편이나 부모님이 그렇게 신경질 낼 때 엄청나게 많이 상처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그렇게 상처받으면 되겠습니까? 저는 웬만하면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두자는 주의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철이 들게 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답을 찾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부모가 옆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뭘 특별히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가장 소중한 존재, 눈물 나는 존재로 그 아이를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부모가 두 번 낳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몸으로 태어나고 두 번째는 가슴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다음입니다.
10번, 노후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신 시댁/친정 부모님의 부양 요구를 부부가 서로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까요?
목사님 : 참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 자기들도 살기 힘든데, 노후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시댁 부모님이, 친정 부모님이 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기대는 경우인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깔끔한 팁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부모님을 얼마나 도와드릴 수 있는지 냉정하게 계산하십시오. 거기에 줄을 그으시고 그 이상은 못 한다고 하십시오. 아주 분명하게 밝히십시오. 그 대신 여유가 있는데도 안 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또 하나는, 자기도 계속해서 대출을 받고 부채에 허덕이며 근근이 생활해 가는데 계속 빚을 지면서 부모를 돕지는 마십시오. 나중에 가정이 더 불행해집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님이 저렇게 하는데 안 도울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절약하면서 잘하면 여기까지 도울 수 있겠다, 여기까지가 한계선이다, 거기에 줄을 딱 그어야 합니다. 좀 괴로워도 그 선 이상은 안 된다고 정리해야 합니다. 거기까지는 기쁘게 도와드리시고 그 이상은 못 한다고 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의 독립성을 지키면서 자기 갈 길을 가야 합니다. 부모님은 정 안 되면 국가에서 도움을 받든지 건강하시면 저녁때 폐지라도 주워야 합니다. 그것이 생활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두 가정이 함께 엮여 들어가서 마치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 구하자고 뛰어들면 같이 빠지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단순한 효도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와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충분히 의논하고 도울 수 있는 최대치가 어딘지, 양가에 매달 50만 원씩은 도와줄 수 있겠다, 우리도 굉장히 힘들겠지만 여기까지는 감내하자 하고 양쪽 부모님께 50만 원까지는 도와드릴 수 있다, 뜻하지 않는 수입이 덜컥 생기지 않는 한 말입니다. 갑자기 사업이 잘돼서 금년에 1억을 벌었다면 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한 이것이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니까 그 이상은 기대하지 마시라고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다음 11번입니다.
11번, 양가 부모님들이 과도한 간섭과 본인들의 생각을 강요하는 경우(잔소리 포함), 나중에는 부부싸움으로까지 종종 이어지기도 하는데, 양가 부모님들을 지혜롭게 대하면서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 : 이것은 단호합니다. 부부가 먼저 의논해야 합니다. 부부만 내버려두어도 소통하면서 둘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 모두 인정할 것입니다. 열 쌍의 부부가 살면 교회에서조차도 “어쩜 저렇게 화목할까, 정말 예쁘다!”하는 부부는 한두 가정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조차도 말입니다.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하는 부부는 더 많을 것입니다. 곧 헤어지겠다고 하는 부부도 있습니다. 그렇게 부부가 둘이 소통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옆에서 양가 부모가 계속 흔들어대면 이 두 사람이 아주 견고하게 잘 엮어졌던 사람들도 방해를 받습니다. 이러면 마치 불을 꺼야 하는데 부채질하고 선풍기를 들이대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 둘이 의논해서 어떻게 할지, 우리 둘이 소통하면서 우리 가정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끌고 갈 것인지, 아니면 계속 흔들리게 놔둘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고 아내와 남편 둘 사이에 합의를 봐야 합니다. 죽을 쓰든 메주를 쓰든 우리의 일이니까 우리가 해결하는 게 낫겠다는 합의를 얻어야 합니다. 통보를 하십시오. 양가에 “더 이상 우리 가정의 일에 관여하지 마시십시오,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게 생겼습니다. 살든지 못 살든지 우리가 해결할 테니 이제는 신경끄십시오.” 두 번, 세 번 경고해도 안 들으면 “의절하겠습니다.”고 까지 경고하십시오. “더 이상 간섭해서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면 나는 아내와는 살아도 이런 상태로 살 수는 없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시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일시적으로 단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는 강수를 두더라도 가정은 보호되어야 합니다. 살든지 못 살든지 부부가 둘이 해결해야 합니다. 양가 부모님들을 지혜롭게 대한다고 했는데 한 번쯤은 지혜롭게가 아니라 경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시면 안 보겠다고 하는 충격요법까지 말입니다. 요즘 얼마나 웃기는지 아십니까? 예전에는 애들이 살다가 힘들어서 헤어진다고 하면 양가 부모가 나가서 딸에게는 친정집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 아들은 시집에서 타일렀습니다.
요즘은 둘이 좀 살아보려고 하는데 양쪽에서 나와서 “에이, 때려쳐라, 때려쳐!”합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권사, 집사, 장로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부부를 그렇게 조종하는 것을 봤습니다. 믿음의 집안인데도 나한테까지 와서 얘네들은 헤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이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못 하겠다면 못 삽니다. 이미 이런 정도가 되면 부부싸움으로 이어지는 상황까지 되었는데 놔두면 점점 상황이 나빠집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둘이 딴 얘기하지 마시고 먼저 합의를 보십시오. “우리 둘이 해결하는 것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계속 불나는 집에 선풍기 켜는 것이니 선풍기부터 끄고 이야기하자.” 하고 확실하게 합의한 후에 양가에 통고해야 합니다.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합니다.” 부모님이 상처받을 수도 있고 처음에 욕할 수도 있지만, 부부가 해결할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딱 자르는데 부모가 생활비를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기대는 것도 아닌데 부부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그래도 계속 부모가 그렇게 나오면 의절하겠다고 하십시오. 진짜로 의절하라는 것이 아니라 협박이라도 하고 실제로 연락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너무 분명한 것이라서 이것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12번.
12번, 어렸을 때 부모님께 학대를 당했습니다. (신체적, 정서적 폭력) 성인이 되어서야 이것이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미안하다고 하실 때도 있지만, 다 나를 위해서 그런 거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아직 제 몸과 마음에는 그 학대의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용서받았음에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에 믿음이 부족하다는 생각과,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에 한없이 무력감을 느낍니다.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 어떻게든 이것을 심판하여 주시기를 울며 호소하기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은혜를 더 받아야 할까요? 정신과치료나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할까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가 않고, 잊어먹은 듯하면 다시 분노와 상처가 올라옵니다.
목사님 : 저도 두 번이나 읽어봤는데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일단 흘러간 과거는 우리 힘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질문하신 분에게 제가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속 살아가면 결국 부모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갈등을 계속 느끼며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은 인생은 불행할 것입니다. 잘 모르겠지만 지금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것 같은데 언젠가는 곧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 후에는 미워할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죽은 사람을 미워할 것입니다. 망가지는 것은 당신 자신의 인생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런 삶은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은 고칠 수 없으니까 체념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신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분명히 신앙적으로 생각해보면 얻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그래서 잃어버린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실 예수 믿고 나서 가장 실감 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안 좋은 단어인 “아버지”가 결합되었을까? 아버지가 감동이 안 되니까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 마치 “존경하는 선생님 사기꾼”처럼 들렸습니다. 그게 한계였습니다. 나중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깨닫게 되는데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좋은 해석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해석? 니체에 의하면 자기가 활기차게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엄마를 그런 사람을 만나서 상처도 많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해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만나지 않았으면 주님의 품으로 달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부모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뭔가 좋은 것을 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점점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와 화해하라.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고등부에서 아빠의 폭력과 폭언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아이가 있었는데 수련회 때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아버지가 용서가 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가엾다고 매일 울면서 기도하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극복하게 합니다. 영적인 변화를 받으라. 세 번째는 그것과 함께 빠른 시일 내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십시오. 정신과 치료와 영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 두 가지를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13번.
13번, 믿지 않는 가족 혹은 자녀가 어려서 섬김의 제약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며 섬김을 미루고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에 있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이제는 그것에 익숙한 채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남편이 이해해줄 날이 올까요?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요? 섬김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목사님 : 여기서 심리 분석을 해 보면, 이분은 가정생활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대립 관계에 놓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살림하고 남편을 섬기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가정생활하는 것은 세상일이고, 혹은 개인적인 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대립 구도 자체를 벗어나기 바랍니다. 물론 교회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집에만 있다면 교회가 굴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와서 봉사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매우 특수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 자녀, 남편, 이렇게 있을 때는 덕을 끼쳐야 합니다. 그런 것을 함께 고려한다면 뭔가 조화점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가정 속에서 가족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과 교회를 섬기는 것, 이 두 가지에서 하나를 포기하거나 희생하지 않으면 다른 하나를 못 할 것이라고 획일적인 대립 관계에 놓지 말고 양립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인데 매 주일 일정한 시간을 내서 교회에 가서 6시간, 7시간씩 봉사할 수는 없지만 집에서 봉사할 수는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지금 지원자들이 넘치기는 하지만 녹취를 한다면 교회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있는 곳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녹취하면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새가족들에게 편지쓰기 같은 것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섬길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더욱이 다니엘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고위 관직을 지내며 일했는데 사자 굴 속에 갇혔을 때 다리오 왕이,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라고 부릅니다. 왕이 잘못 명령을 내리고 밤새 고민하다가 새벽에 사자굴 앞으로 달려와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능히 구원하셨느냐?” 묻습니다. 이 왕이 볼 때, 다니엘이 몸으로는 자기 신하로서 봉사하고 있지만 이미 마음으로는 자기의 신하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리오 왕에게 새겨진 다니엘의 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집에서 남편을 잘 섬기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부모들을 잘 공경하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참된 기쁨과 덕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거기서 하나님 앞에 자녀들 위해 기도하고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부모님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응답받는 모든 것을 보면서 거기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훌륭한 섬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가족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내가 섬길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이 허락하는 만큼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평상시에 남편이나 아내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은 그렇게 엄마나 아내를, 아빠나 남편을 교회의 섬김에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납니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너그럽고 폭넓게 살아가시고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셔야 합니다. 14번 마지막 질문입니다.
14번, 주위에 보면 엄마는 독실한 신자인데 자신은 결코 기독교 신앙은 갖지 않겠다는 청년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유인즉,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가정은 내팽개치고 교회에 빠져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로서는 그런 엄마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엄마가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 것 같은데 사실 어떠한 규정이나 매뉴얼이 없으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또한 은혜받은 자가 어찌 주일 예배로 만족하며 신앙생활 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을 돌보는 것과 교회에서의 섬김, 이 둘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목사님 : 이것은 지혜와 사랑의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 청년의 엄마는 신앙이 독실한데 청년은 결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겠다, 왜냐, 엄마가 어렸을 때 가정은 팽개치고 교회에 빠져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에 대해서도 100%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엄마와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어린 나이에 서울로 공부하러 와서, 혹은 중고등학교 때 엄마는 지방에 있고 본인은 서울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대학교 다닐 때는 더 부모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엄마와 아빠와 애틋하게 지내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리의 문제도 아니고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문제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벌써 관계가 좋게 형성된 것입니다.
이 질문하신 분은 뭔가 하나님을 안 믿는 자신의 불신앙의 화살을 이런 식으로 부모에게 돌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엄마는 일종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교회에 빠져 사는데도 아이들이 회심하고 그런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기 있는 이 자매님도,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고, 이 사람이 안 믿는 것이 엄마가 가정을 내팽개친 것으로 생각할 게 아니고, 또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가정을 내팽개쳤다? 말이 됩니까? 그것은 해석의 문제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가정을 내팽개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녀의 입장에서 보는 빗나간 시각입니다. 엄마 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언젠가 회심하면 엄마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중심을 잡는 것, 균형을 이루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부부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부모가 잘해준다고 해서 반드시 아이들도 부모에게 잘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런 이유로 그렇게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평한 벽에 공을 던지면 정확한 각도로 튀어나옵니다. 스쿼시는 벽과 바닥이 판판해서 공에 스핀을 주지 않고 치면 정확하게 돌아옵니다. 그런데 비유하자면, 아이들은 울퉁불퉁한 벽에 울퉁불퉁한 바닥입니다. 아무리 공을 때려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튑니다. 그것이 아이들입니다. 아이 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모가 노력한 것에 대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그 대신 우리 부부가 깊이 동의하는 것은, 자녀들이 엄마, 아빠가 싫어서 떠날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항구가 배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면 떠나는 것이지 항구가 어떻게 배를 따라갑니까? 그러나 항구는 언제나 거기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싫다고 떠날 때에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말릴 수가 없지만 아이들이 돌아와 보면 언제나 항구처럼 엄마, 아빠가 제 자리에 있고 언제든지 자기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뢰감을 주는 것, 이것은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를 충분히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향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떠날 때에는 육지가 지겨워서 “에이씨!”하면서 떠나지만 풍랑 만나고 온갖 고생을 하고 나면 인간은 땅에서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바다에 오래 있으면 육지로 돌아오고 싶어집니다. 돌아왔을 때 푸근함을 언제든지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 거기에서 부모의 권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들이 다 고백하지 않아도 부모에 대해서 너무 고마워하고 고향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부모 자체가 흔들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인생관 자체가 폭풍쳐서 정신없이 흔들리고, 정욕에 빠져서 바람이나 피우고 요동치면 항구의 제방이 무너진 것이 됩니다. 아이들이 돌아와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나중에 노년을 맞이할 때 너무 비참하고 쓸쓸하게 됩니다. 부부가 살다가 이혼하거나 관계가 깨어져서 서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도 하는데, 제가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할 때 지금 그렇게 사는 것이 에너지가 적게 들어가는 것 같지만 그렇게 살면 아이들이 당신들을 소외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예전에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이혼을 하고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그때 나이가 마흔 정도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마음 아픈 것이, 그렇게 의식을 안 하려고 하는데 가끔 그 자매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에 없습니다. 기이하게 느껴졌던 것이, 남편과 헤어졌으면 보통 엄마들은 아이들을 본인이 키우려고 하는데, 제가 옆에서 볼 때는 아이들을 쿨하게 남편에게 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남자를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재혼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아이들이 서른한두 살 정도 되었을 겁니다. 성인이 된 그 아이들에게 엄마와의 관계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우리의 젊음은 곧 지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노년이 너무 쓸쓸하고 황폐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60대니까 좀 괜찮을지 모릅니다.
항상 지금만 생각하지 말고, 10년, 20년 후에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를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에 아끼는 사람 없이 쓸쓸히 살다가 죽고 싶으면 아무거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 있거나, 혹은 아내가 먼저 죽어도 아이들이 옆에 있어서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애틋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이 관계는 보통 정신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버리면서 참된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끊임없이 자녀를 사랑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지금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마음속에서 다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젊었을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시집, 장가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면 엄마가 혼자 살아간 것이 무엇인가, 자기를 버린 것이 무엇인가, 아빠가 폭력을 행한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런 것이 모두 생각나면서 그 아이들에게 없는 사랑을 창조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까지 모두 생각하면서 자기 인생은 자기 홀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가족들과의 모든 행복이 섞여 있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가 주체적인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클로징 멘트를 하고 싶습니다. 우선 40대를 지나는 여러분이 충분히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음을 인정하고,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때이고 부부와의 결합이 어려운 때도 40대일 확률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런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이 되고 신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들고 어려운 것을 중앙에 놓고 그거 하나만 생각하면 사람의 정신이 터질 것 같아서 살 수가 없어집니다. 10대부터 시작해서 인생을 쭉 펼쳐 놓고 80대쯤 인생을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40대의 토막에서 앞뒤 연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40대가 너무 중요한 시기인 이유는 자녀들과의 관계를 잘 형성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입니다. 서른쯤 시집, 장가가서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40대 될 때는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거나, 요즘 만혼으로 좀 늦는다고 하면 조금 어리고, 빨리 결혼한 사람들의 아이들은 대학생이기도 하지만 보통 중고등학교일 것입니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할 수 있고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로서 한껏 봉사할 수 있는, 부모와의 정신적인 결합을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때 잘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마시고 확고하게 살아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은 성패가 결정 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드리고 싶은 말씀은, 비혼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자발적인 비혼이든지 비자발적인 비혼이든지, 비혼 상태에서 40대에 이르게 되면 많은 좌절감이 찾아오는 시기가 됩니다. 빠르면 갱년기가 이미 시작되고 갱년기가 시작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20에서 30으로 넘어갈 때의 몸의 변화, 40에서 50으로 넘어가는 몸의 변화보다 30에서 40으로 넘어갈 때 느끼는 몸의 변화가 가장 큽니다. 우리가 흔히 “사추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춘기는 일차성징이 나타나면서 자기 몸에 대해서 자각하게 되는데40대에는 그 반대로 자신의 이런저런 것들이 쇠퇴하게 되는 것을 뚜렷하게 느낍니다. 그것이 심리에 주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이번에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겠지만, 우리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그런 사상을 우리 전통적인 기독교가 충분히 가르쳐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영혼에 기울어진 신앙을 가르쳐왔습니다. 몸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증거를 대보겠습니다.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신없이 살다가 비혼 상태에 거울을 봅니다. 얼굴이 현저하게 변해가는 것이 느껴질 때, 사람들이 나를 제 나이로 봐줄 때, 한번 알아 맞춰보라고 하는데 너무나 섭섭하게 정확하게 알아 맞춥니다. “마흔다섯!” 그때 받는 심리적인 충격, 그리고 몸이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일 때 느끼는 좌절감, 그리고 몸매를 잃어버립니다. 특정한 부위에 살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으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몸으로 하는 접근과 정신으로 하는 접근을 함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로 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정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신부터 해결하는 것은 늙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주위의 목사님들을 보면, “나는 염색하는 것은 인위적이어서 하지 않는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눈썹까지 하얗게 됩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귓속의 털까지도 안 깎습니다. 여성분들은 여기에 솜털 나는 것 아실 것입니다. 그것 다 왁싱으로 뜯어내야 하는데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나는 늙는 것에 있어서 당당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당당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추레해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머리가 하얗고 모든 것이 늙어가도 그 사람이 품위 있어지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늙음을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해결을 해야 합니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속 태우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몸이 옛날 같지 않지만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나이가 40대 넘어가고 50대로 넘어가는데 20대의 젊음을 놀랍게 유지하고 있다면 괴기스럽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면 사람의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늙으면서 많은 경솔함들을 버리게 됩니다. 행동거지도 그렇습니다. 어른스러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적으로 늙음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 시리즈에 늙음이란 무엇인지 나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거기에 맞는 처세법도 익혀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몸에 대해서 절대 반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건 내 몸이 아니야.”하시면 안 됩니다. 자기 몸입니다. 그것이 결국 소멸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멋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상대방이라고 한다면, 사랑한다고 해서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젊었을 때 쪽쪽 빨아먹고 늙었다고 팽개쳐버리면 그게 참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좋아서 정신적으로 결혼했다면 육체의 늙음 정도는 포용해줄 수 있어야 진정한 자기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엮어져 있겠지만 비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 독립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부모님이 엄청난 유산을 가지고 있어서 기다리고 있으면 경제의 문제가 해결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받을 수 있으면 받겠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감은 누구에게도 내 인생이 의존해 있지 않을 때 자존감이 가장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경제적으로나 어떤 면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해 있고 저 사람이 변심하면 내 인생이 절뚝하며 무너질 것 같은 상태가 되면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당연히 젊었을 때 경제계획을 잘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어서 나중에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낭비한 것도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살았지만 여러분은 삶에서 어떤 예외적인 상황이 닥쳐와도 경제적으로 누구를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로는 가지 않는다, 그것이 내 인생에 마지막 남은 자존감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죽어서 나를 장례하고 정리할 때조차도 누군가에게 신세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경제적으로 다부지게 살아야 합니다.
비혼자들에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신앙과 친구, 둘밖에 없습니다. 좋은 신앙을 가지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좋은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와 은혜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을 돌보고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고,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친구들이 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물론 그것도 언젠가는 은퇴하겠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에는 이 일이 비영리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현직에서 물러나고 나면 단순히 수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자신을 준비하며 사는 것, 이렇게 주님 앞에서 살면 아주 아름다운 비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부담이 적습니다. 자녀들을 낳고 기르고 시집 장가가서 또 아이를 낳고 손자들을 키우고 지켜보는 기쁨도 있지만 부담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과 영혼 쪽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몸과 감정 쪽으로 오면, 늙음을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만 할 뿐 아무것도 안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멀리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예뻐서 쪽쪽 빨고 그러는데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오지 마. 냄새나” 합니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실제로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젊었을 때는 향수가 필요 없지만 나이가 들면 필요해집니다. 젊었을 때는 가꿀 필요가 없습니다. 10대는 치장, 20대는 단장, 30대는 화장, 40대는 변장, 50대는 위장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몸을 잘 가꿔야 합니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옵니다.
형제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결혼의 기회를 얻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자기 외모에 대해서 많이 가꾸는 형제들입니다.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 눈물겹습니다. 피부과에 정기적으로 가서 스케일링도 하고 헤어부터 옷 입는 것까지 해서 노력하는 형제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기회가 주어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자매들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현빈과 손예진이 결혼했는데 둘 다 마흔한두 살인데 얼마든지 젊은 사람이 있는데도 둘이 결혼하지 않습니까? 매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정신적인 매력은 한 번에 파악이 안 됩니다. 관계를 한참 가지고 나서야 파악이 됩니다. 몸을 가꿔야 합니다. 늙음을 받아들이되 정신적인 성숙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그 나이에서는 참 곱게 나이가 먹어간다고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자기 자신을 가꿔 나가려는 노력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에서도 설명이 됩니다.
어떤 학자가 책에서 썼는데, 여자들은 남자가 깔끔하면 일단 마이너스 점수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런 남자와 맺어지면 건강한 자손을 출산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괜찮게 생겼어도 지저분하면 싫은 것입니다. 청결하고 자기 자신을 가꾸면서 몸을 돌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노력을 들이지 않고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과도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힘닿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육체를 돌보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운동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을 돌봅니까? TV에 보면 기가 막힌 몸매로 등장하는 남자, 여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20대라고 해도 그것은 자연적인 몸매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그런 몸매가 될 수 없습니다. 피나는 운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건강을 위해서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늙고 죽고 소멸하게 되어 있지만 anti-aging을 할 수는 있습니다.
50세부터 많은 질병이 와서 행동에 많은 부자연스러운 제약을 느끼고 60세에 요양원에 들어가서 남이 떠 먹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80까지 사는 인생의 질과, 죽기 1년 전 까지 내 힘으로 움직이면서 친구들을 만나며 살 수 있는 삶의 질은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길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길이 있는데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흔히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어떻게 사느냐고 하는데 미용에 신경 안 쓰면 얼굴이 무너져 가는 것을 감당해야 하고, 건강에 신경 안 쓰면 언젠가 덜컥하고 병에 걸릴 것을 각오해야 하고, 먹는 것에 신경을 안 쓰면 자기 몸매가 무너지는 것을 감당해야 하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자기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몸을 위한 노력은 절대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두 가지가 같이 조화를 이루면서 나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온몸이 너무 아프고 웬만하면 회사에 못 나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눈을 뜰 때 들어오는 삼라만상이 여러분의 마음에 주는 인상과,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는 것은 처음이네?” 하며 맞이하는 아침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 인생에 불행하다고 여기는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몸에 의해서 상당히 많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은 돌보지 않는 사람이 영혼은 아주 잘 돌보느냐? 그런 사람은 상상 속에서나 있지 없습니다. 몸을 정성껏 돌보는 모든 사람들이 영혼을 미친 듯이 돌보는 것도 아니지만 두 가지는 상관없이 각각 갑니다. 몸을 내버려 두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살찌니까 당뇨 오고 고혈압 오고 고지혈증이 오니까 치료받고 주사 맞고 탈모 오고 깊이 골이 패어가면서 왜 이렇게 늙었냐는 소리를 들으며 삽니다. 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그렇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과도하지는 않지만 적절하게 몸과 영혼에 대해서 신경 쓰면서, 목표 자체가 안 늙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곱게 늙어가는 것입니다. 보기 좋게 늙어가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입니다. 추하게 늙어가지 않고 곱게. 사람들이 볼 때, “저렇게 착하고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참 좋겠다”하는 마음을 갖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언젠가 끝나고 늙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죽는 것도 사고로 죽든지 자연사를 하든지 병사를 하든지 우리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을 제외하고는 우리 맘대로 선택할 수 없으니 그것은 주님께 맡기고 주어진 날 동안을 우리가 성실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곧 죽을 인생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를 우울하게 살지 않게 하고, 언젠가 불행한 일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비관적으로 살지 않게 하는, 그렇게 삶의 명랑함을 회복하면서 즐거움과 가치를 창조해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고 나면 “정말 인생은 참 아름답구나, 살만하구나” 느끼게 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오늘이 여러분 인생에서 제일 젊은 날이고 제일 힘이 많은 날입니다. 운동을 많이 하면 또 변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 찬송하며 사는 사십 대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예상대로 시간이 많이 흘러갔는데 추가적인 질문이 있으면 줌 시청자를 포함해서 두 가지만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목사님 : 박수 부탁드립니다. 저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하나님을 훨씬 늦게 찾았거나 안 찾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신앙에 대해서 하나도 가르쳐준 것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그 당시에 예수를 안 믿으셨고 나중에 믿으셨고, 아버지는 우리가 전도해서 믿으셨지만 그것은 확실합니다. 나는 굉장히 염세적이고 시대에 반항적인사상으로 갔을 가능성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제 마음을 녹이신 것이었습니다.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주 또렷하게 제 마음에 들린 것이, “너도 나를 못 만났으면 네 아버지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됐을 수 있고, 네 아버지가 너만 한 나이에 나를 만났으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른 아버지가 됐을 수 있다.” 우리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이 지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 살아계실 때, “여보, 여보, 저 애비 좀 봐. 어버이날 설교할 때마다 저렇게 울잖아.”, 우리 아버지는 ... 나는 확신합니다. 마지막까지 우리 아버지는 뭘 잘못하셨는지 모르고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아버님은 너무 귀여우시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티끌만 한 그림자 없이 화해하고 효도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자유하게 사십시오. 그때 내가 위로받은 말씀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였습니다. 나중에는 저 때문에 너무 행복해하며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한 분 더 질문받겠습니다. 줌에 계신 분도 질문하십시오. 남미연 집사님, 질문하십시오.
저는 오늘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대립”이라는 단어가 제일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제 가치관을 봐도 이것 아니면 저것이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하면서 한국 교회 안에서 그렇게 가르쳤던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 아니면 교회, 세상보다는 교회,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이렇게 신앙생활 해 왔던 것 같습니다. 늘 그런 관점에서 아이들을 대하고 가정을 대하고 남편을 대했던 제 모습들을 보게 돼서 참 감사했고, 앞으로 이런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의 틀을 바꿔야 하는데, 목사님께 여쭙고 싶은 것은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나 혹은 설교 시리즈가 무엇인지, 이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많이 힘든 것 같고 여태 40년을 살아왔는데 또 다른 40년을 살기 위해서, 20년이든 10년이든 하루라도 지금의 이런 방식이나 생각이 아닌 정말 조화롭게 통찰력을 가지고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도움이 될지 여쭙고 싶습니다.
목사님 : 답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설교부터 모두 들으십시오. 분량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가족 시리즈 중에서는 매년 중복되는 것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책이 기대한 것만큼 많이 팔리지는 않았는데 “가족, 가슴 시리도록 그립다 가족”, 그 책을 읽으면서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저는 황당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썼습니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서 책을 읽으며 정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고, 지금은 책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좋은 책도 많이 있고, 제가 쓴 책 뒤에 보면 참고도서 목록에 보면 있는데, 지금은 유튜브에서도 좋은 강의들이 많지만 오류가 있는 강의들도 많으니 옥석을 구분해서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가장 큰 위력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사랑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 대립관계로 보지 말고 남편이 정말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분명히 남편의 입장에서 나를 보면 다른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겸허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남편의 입장에서 본 가정과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능하면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이 본 엄마, 그 모습이 내가 보여주려고 했던 모습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 것을 듣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찾아가시고, 아이들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너무 모릅니다. 깜짝 놀라는 것은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아내를 너무 모른다고 하지만 아내들도 남편을 너무 모릅니다. 오래 살기는 했지만 너무 모릅니다. 자기네는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너무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남편과 아내의 위치, 자녀들의 위치에서 자신의 가정을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시각을 가져서 종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녀들에 대해서 오은영 박사님도 크리스찬이라고 하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이 교육과 신앙이 어느 정도 조화될 것이고 그중에 어떤 내용은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입니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그런 내용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것을 꾸준히 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로 적용해보고, 거기서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삶이 충분히 절망적이지만은 않고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싶습니다. 자녀들과의 관계가 아무리 어려워도 항상 기억하십시오. 나는 엄마다. 나는 아빠다. 나는 항구다, 자식은 배다. 배는 항구를 떠나도 항구가 배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항구는 떠나지 않고 항상 제 자리에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장시간 동안 애 많이 쓰셨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간절히 기도하고 모든 순서를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