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강의
녹취자: 김경애
공유적 속성을 할 차례입니다. 교리반을 하는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용어를 익혀두는 것입니다. 지난시간에도 잠깐 설명한 것 같은데 용어를 처음 접할 때에는 굉장히 어렵고 힘든 것 같지만 그것이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길게 복잡하게 해도 전달이 안 되는 말을 용어로 이해를 하게끔 해주기 때문에 한번만 해놓으면 그것으로 계속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이 사유의 폭을 넓히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할 때 그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하면 일평생을 탐구하고 사유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서약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서약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목사님은 평생의 목회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이런 말들은 써놓으십시오. 어느 청교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내 기억이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기에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나는 기억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기억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으로 하는 것은 삶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 사냐고 물을 때에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지식의 근거를 이야기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았으면 그것을 삶으로 표출하는 그런 인생을 사는 것 이것이 삶과 지식의 조화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리반을 공부하고나면 기본적인 구도가 잡히는데 집으로 말하자면 얼개를 짜놓은 것이고 골조를 지어놓은 집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정도입니다. 그 다음에 H빔으로 집을 짓는 것 보셨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교리반에서 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책을 읽고 공부하고 다른 교육과정에 들어가서 계속 공부를 하면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속성이라는 말은 조금 어려운 말인데 Attribute입니다. 라틴어로 ‘꼬발리따스’입니다. 우리말로는 속성이라고 그러는데 속성이라는 것은 부분이지만 그것 없이는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을 속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배운 것은 독립적 속성, 혹은 비공유적 속성 혹은 불유통적 속성이라고 그러는데 같은 말입니다. 독립적 속성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에서 독립적 속성이라고 그러고 비유통적 속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유통한다는 말은 Share 한다는 말인데 공유한다는 말인데 인간과 함께 공유하는 그런 성격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불유통적 속성, 혹은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것은 공유적 속성입니다. 유통적 속성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절대적 속성이라고 그러는데 인간에게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명심해야할 것은 인간에게 있는 속성은 유한하며 (모두 줄치십시오) 무한하고 완전한 속성에 비할 때에는 불완전한 속성이다.
지식, 정의할 수 있다.(이것은 모두 외워야합니다.) 지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아시며 가능성 있는 일과 실재하고 있는 일을 다 아시는 그의 완전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외부로부터 지식을 받아들이거나 배워서 지식이 증가하는 분은 아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지식은 항상 현존하고 과거, 미래, 현재와 관계없이 총 포괄적으로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말할 때 전지 즉 모든 것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지혜는(줄 치세요.) 최고의 가치 있는 목적을 설정하고 그 실현을 위해 방법을 택하심으로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시는 그의 덕행이다. 그 지혜와 지식은 다릅니다. 제가 잘 드는 비유가 지식이 만약에 구슬이라면 지혜는 그것을 줄에다가 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하나의 개별적인 지식들을 사용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전혀 없는데 지혜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혜도 역시 어떤 지식들과 접촉을 하면서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식은 지혜와 구별됩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으면서도 지혜는 없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오늘날 지식의 몰지혜화 현상이라고 그럽니다. 지식의 몰지혜화입니다. 공부를 잘하시니까 다 아실 것입니다. 지식의 몰지혜화 현상입니다. 지식은 있는데 지혜는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쓰레기 같은 지식들이 넘쳐납니다. 인간이 현재 생산해낸 정보가 CD에 담아놓고 차곡차곡 쌓으면 달나라까지 간다고 그럽니다. 그 정보는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정보가 생산되는데 사실 대부분의 정보는 필요 없는 정보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책을 안 읽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야하는데 책을 안 읽고 인터넷에서 보고 하는데 인터넷에 올리는 글이 우리나라는 초딩들이 주로 올립니다. 그것을 너무 믿으면 큰일 납니다. 그런데 브리태니커나 미국의 위키피디아나 이런 데에는 그 올린 것을 감수하는 팀이 있습니다. 상당히 신뢰할만합니다. 그러나 지금 네이버나 이런 데에 올라오는 것은 초딩들이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해야 합니다. 물론 교수님이나 이런 분들이 하시는 것도 있지만 그런 지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책을 잘 안 읽으니까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지 말고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보긴 보는데 안보면 못 견딜 그런 프로그램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언제든지 3자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방치하면 안 되는 입장에서 TV를 보는 정도여야지 몇 시안에 들어가야지 그러면서 드라마 하나에 미쳐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교회에 와서 안 흘리는 눈물을 흘리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가끔 보는데 꼭 필요한 것만 보고 절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일에 몰두해야합니다. 엄마 아빠가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이 자식들의 책을 안 읽히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은 자기처럼 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주 간절합니다. 이런 부모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대개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만 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회복해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식들이 어려서부터 책 읽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자랑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책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TV를 없애자고 그러는데 그것도 한 방법일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문화니까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도저히 상대가 안 되면 안 되니까 그러지 말고 TV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더 뜻있고 재미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 수 있게끔 그렇게 하면서 책을 읽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임이나 오락에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지금 심각한 중독에 걸리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망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멀리해야하는 것입니다. 아이 폰이나 아이패드에 게임을 잔뜩 받아서 돌아다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것 하지 말고 그냥 열린 교회 어플 정도 하나 받아놓고 들어가서 교리반 숙제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지혜와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그런 선이 아닙니다. 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 곧 타자에 대한 선행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선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줄치세요) 하나님의 선이란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취급하도록 자극하시는 신적 완전성을 가리킨다. 사실 열린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려면 선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하는데 선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셨습니까? 선에 대해 잘 정리된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크게 3개 정도만 꼽자면 우선 선에 대해서 상세히 잘 정리된 것이 어디냐 하면 아니 4개 정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시편 23편 강해 중에서 뒷부분 마지막에 6절에 나오는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할 때 그 선을 상세하게 설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언제였느냐 하면 시편 23편을 20년 동안에 한번, 두 번, 세 번인가 네 번을 설교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한 것이 2006년도인가 한 것 같은데 그때 그 설교를 들어가서 다 들으면 좋지만 시간이 없으면 그것만 다운받아서 들으시면 어차피 그 선은 계속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보시고 두 번째 자료는 어려운 책이기는 한데 ‘도덕적 통치’의 3장에 보면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항목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세 번째 자료는 세미나에 들어가면 총신 대학 일반대학원 신학개강세미나가 있고 천지창조의 목적이 나옵니다. 그것을 들어가서 전편을 다 들으시면 그리고 도덕적 통치를 읽으시면 확실하게 정리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에서 나오는 사랑 장에서 선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것은 정신 차리고 들어서 선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시 뚜껑을 열면 이 선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도를 나가지 못하니까 그냥하고 그 다음에 그래도 그 정도 가지고는 채워지지 않고 공부할 열정이 더 타오른다면 철학인문서 중에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아닌데 이정우 교수의 ‘개념뿌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1권과 2권이 있는데 그중에서 1권인 것 같은데 출판사는 철학아카데미에서 나온 것 같은데 거기에 들어가면 선과 악이 나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할 것은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사유하고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명을 통해서 듣는 것이 가장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에너지가 넘쳐서 더 보고 싶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제8권을 읽으시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만 되도 한 6개월 정도 읽어야할 분량입니다.
자 그래서 선은 선인데 사실은 이것은 선하다고 할 때 반대는 악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기준할것인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이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유괴범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어려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쨌든 이 어린이를 내가 유혹을 했습니다. ‘얘, 이리와.’ ‘왜요? 아저씨.’ ‘아저씨가 너를 유괴해서 네 엄마에게 돈은 달라고 할 거야.’ 유괴범이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리와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러면서 데리고 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납치하려고 ‘이 차를 타라.’ 그러면 ‘아저씨 집에 가야해요. 안탈래요.’ ‘저기 가서 더 맛있는 거 사줄게 타라.’ ‘정말이죠? 아저씨.’ 그러면서 탑니다. ‘아! 참 착하다.’ 그럴 때 착한 것이 선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참 좋다. 잘됐다. 또 예를 들면 도둑이 훔치러갔는데 ‘야, 잘됐다.’ 이게 선입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하면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중요합니다. 이 기준을 누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둑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잘 보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돈을 훔칠 수 있습니다. ‘아 잘됐다!’ 이것은 진짜 선입니까? 아닙니까? 여러분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탐관오리의 집이고 ‘아 잘됐다.’ 했던 사람은 홍길동입니다. 그러면 진짜 잘된 것입니까? 안된 것입니까? 왜 왔다 갔다 합니까? 그러면 탐관오리가 계속해서 백성들을 후려쳐서 돈을 빼앗아서 백성들이 굶고 있는데 홍길동이 나타나서 그것을 꺼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곯은 배를 면하게 해서 죽을 사람들을 살리는데 그것이 나쁜 것입니까? 어쨌든 느낌이 아까 ‘아, 잘됐다.’ 했을 때 저런 나쁜 놈 그런 마음과는 다른 마음일 것입니다. 진짜 잘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홍길동이 아니라 홍길동과 똑같이 변장해서 짝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또 이쪽으로 갑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하면 나도 재미있는데 시간이 계속 갑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마이클 샐던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강의로 시작합니다. 자, 기차가 여기서 지나가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쪽으로 가야하는 기차인데 여기가 A방향이고 저기가 B방향입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망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예고 없이 여기에 갑자기 다섯 사람이 선로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치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두 사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지금 기관사는 A고 가게 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고 없이 이쪽으로 확 틀어서 B쪽으로 가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정대로 A로 가면 된다.’ 손들어보십시오. 없네요. ‘돌릴 수 없다면 B로 돌려서 희생자 수를 줄일 수 있어야한다.’ A에 동의하는 분 손들어보십시오. 높이 들어보십시오. 꽤 됩니다. 저분들이 기관사를 안 하시고 여기에 있기를 다행입니다. B로 가는 것이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보십시오. 아무것도 안 드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무것도 안 들면 자폭한다는 것입니다. 높이 손을 들어보십시오. 대부분이 B를 들었습니다. 왜 B를 드셨습니까? 당연히 어느 쪽으로 둘 중의 한쪽으로 가야한다면 A로 가기로 예정되어있지만 다섯 명이나 죽여야 하니까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물론 멈출 수 있으면 가장 좋으나 그것이 안 되니까 희생자를 줄여서 B로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은 이것이 더 선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공리주의가 작용한 것입니다. Utilitarianism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여기는 두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기차의 선로가 지나가는 여기에 육교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뚱뚱한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서 커다란 햄버거를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여기에 근무를 합니다. 이쪽으로 가서 세 명의 희생을 줄이자고 하는데 이런 안은 어떻습니까? 여기에 뚱뚱한 사람이 있는데 왕창 뚱뚱한 사람이 있습니다. 쓰러지면 기찻길을 충분히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뚱뚱합니다. 이 사람은 딱 여기 바로 위에 있는데 확 밀어버리면 햄버거를 먹는 이 친구를 밀어버리면 바로 여기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차가 이 사람을 치어서 죽이겠지만 기차는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뚱뚱해서 기차가 못 넘어갑니다. 이것이 세 번째 방법입니다. 세 번째 방법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보십시오. 두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에서 이쪽으로 갈 때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왜? 다섯이었다가 두 명이니까 그런데 여기 둘에서 하나로 줄인다는데 왜 두 분밖에 손을 들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뭐냐 하면 A에서 B방법으로 갈 때에는 어떤 것이 더 이득을 많이 보는지 공리주의가 작용되었는데 B번이냐 C번이냐를 물을 때는 이것은 공리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왜 그런지 이 사람들은 철도의 일을 하니까 달려가는 기차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이 사람은 mP3을 들으면서 한참 큰 햄버거를 먹으면서 덜덜 다리를 떨고 있는데 이 사람을 육교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은 이것은 왠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것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 그 자체가 도덕적이냐 도덕적이 아니냐는 판단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판단하게 하는 것들이 단순한 인간간의 이익이 아니라 무엇인가 초월적인 어떤 기준이 있어서 우리의 양심 속에 그것은 된다, 안 된다고 말해주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 사회가 복잡하게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데도 기본적인 질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에 대한 관념입니다. 그래서 결론까지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면 한 시간으로 부족하니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이 선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세상창조의 목적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도는 전체적인 것이 있고 이 전체는 다시 개별적인 것들을 구성해갈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의도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런 전체적인 하나님의 의도 자체를 선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선이라고 부르고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지신은 당신의 의도를 가지고 당신의 창조목적에 대해서 합당하도록 행동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모순된 행동을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잘 모르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인데도 자기를 불행으로 이끌어 가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선이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피조물들을 움직여서 당신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에 모순된 행동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선인데 ‘선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선이시기 때문에 선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라틴어로 ‘보니따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기위해서 이 피조물들을 선하게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적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합당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항상 계시기 때문에 행복한 것을 느끼고 거슬리면서 살려고 할 때에는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신 증거가 됩니다. 내가 떠내려간다는 것은 물이 흘러가는 증거입니다. 거슬러 올라갈 때 힘을 받는다는 것은 물이 내려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선으로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할 때 합치시키게 만들어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합치시키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게 선함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사랑입니다. 이 속성은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속성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완전성보다 더 중심적인 속성으로 간주해야할지는 의문이다. 다른 완전성보다 더 대표적이고 중심적인 속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속성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모든 것들과 같은 속성이지만 그 속성 중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하시는 방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아주 대표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속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면 이상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세 가지 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있으면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이아몬드 모양이 다르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는데 그것이 세 방향에서 고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은혜입니다. 죄를 용서하심으로 나타내시는 과분한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른다. 자비, 긍휼, (줄치세요.) 죄의 비참을 제거하려는 사랑을 하나님의 자비 혹은 긍휼이라고 부른다. 오래 참으심-죄인들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래 참으심 또는 관용이라고 칭한다.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하면서 30번을 설교했는데 30번이니까 한 8개월 정도를 했습니다. 사랑에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오래 참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오래 참음이 그 유사한 것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데 이 오래 참음이 사랑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성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사랑은 그 자체가 관계를 새롭게 맺거나 지속하고자하는 성향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지금으로 보면 관계를 계속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 저 사람이 나의 사랑의 의도에 부합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어려운데 내가 그 사람과 관계를 새롭게 맺거나 지속하는 것이 너무나 원하는 바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어려움들을 계속 참으면서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서 중심성이라는 것입니다. 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울 때에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 13장을 계획을 세우셔서 일주일에 세 개씩 들을 각오를 하고 이틀에 하나씩 해서 10주 정도, 두 달 정도에 깨끗이 메모까지 하면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들으시면 성경을 보는 눈이 확 열리리라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인데 녹취한 원고를 가지고 정리를 한번 해볼까하고 일 년째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데 전부 책으로 나오면 천 페이지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상당히 많은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탐구를 해나가기를 바랍니다.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거룩성입니다. 지식, 지혜, 선, 사랑, 거룩하심, 이런 것들이 인간에게도 있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완전하고 우리 인간 것은 거기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 거룩하심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워낙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하심에 대해서 여러분이 설명을 아마 신앙생활을 하면서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대개 어떤 설명을 들었느냐하면 ‘거룩함이란 구별됨이다.’ 라고 들었을 텐데 오늘 이 시간에 5분 동안에 제가 일평생 잊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정리 해드릴 테니 가슴에 딱 담으십시오. 그러나 이것이 거룩함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초보적인 수준에서는 대개 기본적인 이야기는 다 나왔다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히브리 성경에 카도쉬라고 나옵니다. 카도쉬는 카다쉬에서 나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도 이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쓰기도 합니다. 구별되었다. 잘라졌다는 뜻입니다. 희랍어에서는 ‘하기우스’ 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이라는 것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거룩함은 크게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하는데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인데 거룩함의 고유한 주체는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라고 할 때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존재적 초월성을 가리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세계에는 많은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크기, 형체, 모양, 빛, 딱딱함과 무름, 차가움과 따뜻함, 이런 우연적 성질을 가진 사물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자연적 만물들이 있습니다. 자연 만물들이 있는데 이런 많은 것들이 있고 또 무엇이 있느냐하면 영적인 존재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라든지 천사라든지 이런 영적인 존재들이 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하나님은 이것들과는 다른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이분은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느냐하면 전적인 타자라고 부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연적인 사물이나 혹은 영적인 사물들과는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설명하기를 한정적, 제한적, 충만적이라고 배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안정적 사물, 제한적 사물, 충만적 사물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님은 충만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존재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적인 타자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높은 산을 보면 산에 올라가서 보면 자연의 위대함에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데서 느끼는 어떤 위대함이라는 것이 어디서 느껴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흔적들이 묻어있기 때문에 그런 높은 산이나 위대한 대자연을 볼 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왜소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존재적인 초월성입니다. 인간이 여기에 대한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알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주 미미하고 아주 천박한 존재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사랑을 하시고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나님도 선하시고 우리도 약간은 선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나님 앞에 나도 이런 저런 일을 합니다. 라고 그렇게 교만하다가 내 사랑을 비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가하고 비교해보니까 이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탁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우리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존재적인 초월성, 그 다음에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성의 완전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각하고 나면 인간에게 반응이 오는데 자기는 미천하다는 겸비함이 생겨나게 되고 그 다음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함을 인식한 효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면 이 뒤엣것을 종합하면 인간의 거룩함이라는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마음과 정신, 행동의 상태가 인간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행동 인격의 모든 상태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있는 상태를 우리들이 인간의 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거룩함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그 지식위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거룩함이라고 하니까 ‘거룩’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법상으로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십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거룩을 증진시키자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형용사니까 사실은 이 거룩함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고 거룩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거룩생활이라면 그것이 거룩한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입에 익어서 그런 말을 쓰지 않아서 그럽니다. 이 거룩이 명사형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해서 국어까지 정리해드렸습니다.
그 다음, 넘어갑니다. A번 B번 다 줄치셔야합니다.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6번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성에 도전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시는 신적인 완성이 아니라 완전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에 의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해가시며 적당한 법을 인간에게 부과시킴으로 순종하는 자를 보상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신다. 상을 주시는 공의와 벌을 주시는 공의로 둘로 나눠집니다.
그 다음에 진실성인데 우리들이 진실하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줄치세요. 하나님의 진실성이란 하나님이 그의 내적 존재하심에 있어서 참되시며 계시에 있어서 참되시며 백성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참되심을 나타내는 신적 완전성이다. 3개의 범주가 포함되는데 첫째는 내적존재에 있어서 참되시며, 인간은 내적존재에 있어서 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짓되고 불순한 것들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계시에 있어서 참되십니다.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속에 꽁한 마음을 품고 있는데도 활짝 웃으면서 마치 그 사람을 향해 아주 커다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해서 착각에 빠지게 하고 뒤통수를 칩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거짓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유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관계에 있어서 진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실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할 때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진실을 밝혀라.’ 그것은 사실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이 여태까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랬더니 저는 정말 부족한 사람입니다. 제가 똑바로 살려고 무지하게 애를 썼는데 너무 살아가는 인생이 힘들어서 제가 탈법도 하고 탈선도 하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살아왔습니다. 3년 전에는 이런 일을 했고 2년 전에는 이런 일을 했고 1년 전에는 이런 일을 해서 저도 제가 왜 그렇게 했는지 생각할 때 너무 안타깝고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대개 진실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나, 내가 못 밝힐 것도 없지 그러면서 3년 전에는 내가 이런 짓을 했고 2년 전에는 이런 짓을 했고 1년 전에는 이런 짓을 해서 남에게 좀 힘들게 했지만 내 자신의 이익을 챙겼지! 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어? 더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나는 이런 사람이야! 어쩔래?’ 분명히 두 사람 다 Fact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진실한 사람입니까? 두 사람 다 숨김없이 사실을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진실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전자만 진실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후자가 진실한 사람입니까? 둘 다 진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 우리 교리반은 왜 그럽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솔직하기만 하면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사실은 Fact지만 진실이라는 이 속에는 이미 여기에 주관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여기에 무엇이 있느냐하면 진리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Truth 라고 합니다.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무시하든 깔보든 동의하는 것과 상관없이 진리는 항상 진리입니다. 도로에 중앙선이 그어져있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나 보지 않은 사람이나 상관없이 항상 그어져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관적인 것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이 진리를 먼저 인식하고 이 진리에 가치를 느낀 다음 자기의 마음과 행동을 이 진리에 부합하게 하려고 애를 쓸 때 진실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진리를 알고 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이 진리에 자기의 행동을 부합시킨 상태, 진리와 부합된 상태를 가리켜서 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베룸입니다. 그것은 우리말로는 참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학교에 가면 각 반마다 붙어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참되자’ 스승의 노래에도 나옵니다. ‘참되어라 바르거라’ 그런데 요새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쳐줍니까? 그런 것은 잘 안 가르쳐줍니다. 우리 딸이 지금 대학교 3학년인데 고등학교 졸업 때 처음으로 그 학교에 가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급훈이 무엇이냐 하면 급훈이라 하면 우리는 대개 정직, 청결, 근면, 참되자, 바르자, 씩씩하자, 아니면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그런 식이었는데 무엇이냐 하면 ‘경쟁은 엄연히 존재한다. 살아남자.’ 이것이 급훈입니다. 왜 이렇게 참되어라, 바르거나 이런 말들이 오늘날 다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용어 자체를 사용할 근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우리들이 설날에 세뱃돈을 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단지 돈을 많이 벌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거기에는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것이 포함될지 모르지만 명예, 가치, 긍지, 타자를 위한 유익, 이런 개념들이 훌륭하다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최근에 여러분 보고 누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훌륭하라고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참되어라, 바르거라는 교회에서도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열린 교회에 오면 잘 듣지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입니다. 그것이 특별히 하나님이 인간과 약속하신 것에 관련하여 진실을 이야기할 때는 신실이라고 합니다. 언약과 관련해서는 신실이라고 합니다. 믿을만한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Faithful 이라고 합니다.
속성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주체로서 책임을 지시고 행동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체, 그런 주권성을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가 의지적으로 결단을 하고 그럴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기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줄치세요. 주권적 의지입니다. 주권적 의지는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어진 의지와 계시된 의지가 있다. 감추어진 의지는 살아봐야 알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의 의지이며 결과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의지에 비해서 (계속 줄치세요) 계시된 의지란 율법과 복음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이다. 피조물에 관계된 하나님의 의지는 무엇에도 속박 받지 않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작용이다. 인간의 죄 된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작용에 달려있다. 이것은 조심해야하는 것이 하나님이 죄의 저자라고 말하면 안 되고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짓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런 죄를 짓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허용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죄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아 그러면 죄인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이바지했으니까 상을 받을 수 있구나!’ 그러면 안 됩니다. 동기가 그런 동기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전능입니다. 이것은 주권적 능력이라고해서 이것은 의지를 집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계속 줄치세요) 전능하시다함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거짓말, 죄, 부인, 이런 것들은 하실 수 없다. (이런 것은 꼬불꼬불 줄치세요.) 하나님께서 성취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면 수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원하면 그 이상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네모난 삼각형을 만드실 수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실 수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명제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래서 과학의 역사에 보면 삼각형 내각의 합이 얼마입니까? 180⁰입니다. 그런데 과학의 역사에서 보면 그게 성립하지 않는다고 증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 절대로 삼각형 세 각의 합이 180⁰가 될 수 없습니다. 증명해보겠습니다. 충격 받으실 것입니다. 지구입니다. 여기에 그림자가 졌습니다. 삼각형을 그려보십시오. 이렇게 됩니다. 180⁰가 되겠습니까? 당구공 위에 이렇게 삼각형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펼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각형이 안 되고 이것은 지구표면이 둥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삼각형이 나옵니다. 이것은 절대로 180⁰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허공에다가 개념위에다 그렸을 때에 180⁰가 나온다는 것이지 지면위에 그리면 땅위에 그리면 180⁰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특별히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물론 이것은 수학에서 이런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삼각형이라고 할 때 마음속에 있는 삼각형의 정의 자체가 네 개의 각을 가지면 이미 삼각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악을 행하실 수 있느냐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못 하신다고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이 훼손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겁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술을 안 먹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예 못 먹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안 먹는 사람이 훌륭합니까? 너무 먹고 싶은데 먹으면 아무래도 교회에서 장로가 잘릴 것 같아서 못 먹는 사람과 처음부터 그런 술에는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때 누가 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아직도 전자입니까? 그렇게 이해가 안 됩니까?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다르게 대답을 해서 굉장히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시간부터는 조금 상태가 안 좋은 학생들이 모인 것 같습니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가 더 훌륭한 것입니다. 제가 가끔 예를 들지만 제가 담배를 하루에 한 갑반씩 피웠습니다. 스물다섯 살까지 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끊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버스를 탔습니다. 앞에 담배를 피우는 것입니다. 앞에서 담배를 뿜는데 나도 모르게 훅하고 숨을 쉬었습니다. 그것이 담배를 끊은 지 3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담배를 끊는 것에는 담배를 끊지만 이 담배를 좋아하는 습성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떠냐하면 지금은 음식점에 들어갔다가 담배 냄새가 나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토할 것 같고 어지럽고 싫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면 흡연에 대해서 겉으로는 안 피고 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이마시는 내가 더 도덕적입니까? 물론 담배 이것 하나 가지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죄 된 욕망과 관련시키면 아니면 그것을 내가 참는 것이 더 도덕적이냐? 아니면 지금처럼 아예 누가 나를 유혹해도 그것으로는 내가 유혹받을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싫어하는 일로 유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리와’ ‘가기 싫어’ ‘아이 왜?’ ‘내가 때려줄게’ 그게 유혹입니까? ‘따라와’ ‘싫어’ ‘따라와’ ‘왜?’ ‘맛있는 거 사줄게’ 이것은 유혹이 되지만 싫다는 것 ‘반 죽여줄게’ 이런 것은 유혹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 지금 담배가 비싼 것은 한 개비에 천 달러짜리가 있습니다. 110만원입니다. 몰랐습니까? 담배를 안 피는 나보다 모릅니까? 그게 뭐냐 하면 쿠바산 최고급 시가의 값이 한 대에 천 달러짜리가 있습니다. 만약 그때 유혹했으면 유혹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따라와.’ ‘힘든데 거기까지 왜 따라가?’ ‘쿠바산 시가 천 달러짜리를 내가 줄게.’ 아마 따라갔을 것입니다. 담배를 워낙 좋아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유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혹을 안 받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우리는 은혜를 받고 겨우 죄를 짓지 않는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를 못 짓는 분으로 오셨으니까 그러면 오히려 예수님은 칭찬받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훌륭하고 뛰어난 완전성에 가까운 것입니다. 유혹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술도 좀 먹긴 먹었었는데 많이 안 먹었습니다. 포도주 한 병정도 먹으면 그저 횡설수설하는 정도였으니까 별로였습니다. 세상에 싫은 것은 소주였습니다. 48⁰ 정도 되는 중국술 같은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것도 많이 먹지는 않고 이만한 것 반병정도입니다. 아니 반병이라는 것이 큰 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먹만 한 요만한 병이 있습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칵테일 한잔에 932만 원짜리를 영국에서 만들었습니다. 1773년산 샴페인으로 만들었다는데 932만원입니다. 그런 것에 전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건축을 하려고 하는데 한잔을 먹는데 10억쯤 준다면 10잔을 먹고 교회를 지어볼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만 그 외에는 유혹받을 일이 없습니다. 나는 그런 면에서 훨씬 더 안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할 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전능을 이야기할 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쪽 교리 반에서는 안 가르쳐주었는데 여기만 특별히 가르쳐주겠습니다. 중세에 이런 논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절대적 능력, 규정된 능력, 그래서 이것은 ‘뽀뗀띠아 압솔루타’ 라고 합니다. 영화의 압솔루트 프랑스의 압솔리라는 뜻입니다. ‘뽀뗀띠아 오르디나타’ 라고 합니다. 이것은 ‘질서 지어진’의 분사입니다. 이것은 형용사로 ‘절대적인’ 이라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능력, 규정된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절대적 능력이라면 악이고 선이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규정된 능력은 뭐냐 하면 하실 수는 있는데 당신자신의 성품에 스스로 모순되지 않기 위해서 질서 지워진 능력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뉘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변적인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런 것을 하나님이 악을 행하실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능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행하실 수 있으면 하나님의 자기모순입니다. 칼빈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나누는 것 자체에 대해서 아주 혹평을 가하면서 신성모독적인 발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우리들이 이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속성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놓고 이 속성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 자신이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7과를 안 가르쳐도 된다는 부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이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장난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숙제 속에 다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에서 최소한 3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에서 문제가 나오지 않으면 그 시험문제는 무효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여러분들이 꼼꼼하게 특강을 정성껏 듣고 교재를 즐치면서 듣고 기본적으로 줄거리를 잡고 오셔야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만 한 학기를 공부해야하는 양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500페이지를 써놓고 제가 2년 동안 스톱하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진도를 못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책도 계속 나오는 바람에 말입니다. 700페이지 정도 될 것으로 끝날 것 같은데 완성되면 삼위일체 반을 만들어서 한 학기 동안 삼위일체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때는 머리가 굉장히 반짝반짝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저처럼 늙으면 머리도 다 빠집니다. 여성들도 다 빠집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가발하고 다니시는지 저는 다 압니다. 머리가 아무리 빠져도 하얘져도 용서할 수 있는데 머리에 든 것이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삼위일체를 잘 배워서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주고 하십시오. 시중에 나와 있는 평신도들이 공부하도록 되어있는 교재들 중 한두 권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잘못된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배우려고 하지마시고 여러분들이 삼위일체를 잘 정리를 하셔야합니다.
그 다음에 8과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은 7과까지 다 끝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딱 세 가지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작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어떻게 하십니까? 작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어떻게 이해해야하느냐 하면 평생 잊지 않도록 머리에 넣어드리겠습니다. 우선 무엇을 하려면 먼저 결정부터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작정입니다. 두 번째 창조하셨으니까 우리도 애를 낳아놓으면 책임을 져야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만 하시고 내버려두면 얼마나 개판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면 그 다음에는 만물들을 당신이 원하시는 창조의 계획대로 질서가 잡혀지도록 하나님이 돌보실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돌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섭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는 다 배웠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작정, 창조, 섭리 이렇게 입니다.
그러면 다시 4과로 넘어가보십시오. 4과를 펴보십시오. 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4과부터 10과까지 4, 5, 6, 7, 8 ,9, 10 7과를 다루었는데 그 중에서 4, 5, 6, 7 4장을 1부에 할애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서입니다. 처음에 배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 순수한 영이고 인격적이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라고 배웠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성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신약에 이런 명칭들이 나타난다. 명칭은 하나님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 어떤 방식인가 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나타내주는 의미들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로 배운 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 보편적 속성으로 나누어서 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단일성. 그리고 보편성은 지식, 지혜, 선, 사랑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이 속성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특별히 피조세계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실 때에 이 관계를 통해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들을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는 무엇이냐 하면 속성이 발현되어 나오기 전에 이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가를 내부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인데 어려운 말로 이것을 내재적이라고 부르고 바깥쪽은 외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재적으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외재적으로는 속성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떤 관계가 있고 그 다음에 그 위격과 본질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이 부분이 삼위일체 Trinity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제 과제 속에서 꼼꼼하게 듣고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 오셔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삼위일체는 교재가 산상세미나에 가서 특강한 얇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서점에서 구입해서 서점에 있습니까? 절판되었답니다. 지금 여기 교리반 카페에는 아무나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안 되고 ID를 부여하고 거기다가 하나만 카피를 떠서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캔해서 하고 그리고 이번 직원예배가 끝나고 나서 상세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ID를 걸고 들어가서 거기에 정돈을 잘해줄 것입니다. 들어가서 이 과에는 무슨 설교를 들어라 하고 필요한 자료들을 거기다가 여러분만 쓸 수 있도록 계속 올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교리 반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뭔가 혜택을 주어야합니다. 교리 반에 들어오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혜택을 주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리반에 소속된 사람들만 거기에서 그것을 누리도록 다운도 받고 카피도 할 수 있도록 자료를 올려 줄 테니까 여러분들이 충실하게 활용을 하도록 하십시오. 직원예배시간에 나한테 꼭 물어보십시오.
그 다음에 작정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입니다. 정의가 나오니까 또 외워야할 것입니다. 줄을 치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작정은 여러 가지 특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단일한 작정이지만 우리는 가끔 이것을 복수형으로 말하기도 한다. 영어로 Decree 라는 단어를 쓰는데 오늘날의 법령이라고 쓰는데 하나님의 작정을 Decree 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조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포함하며 인간의 죄 된 행위를 제외한 모든 행위를 내포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죄가 세상에 들어옴을 명백히 드러내주지만 하나님을 범죄의 책임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적인 작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동그라미 치십시오,)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이라고 물어보면 허용적인 작정이라고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줄 치세요.) 그 기초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이 언제나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이 항상 이해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 전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영원적이다. ① 영원적. ② 반드시 발생하는 효과적 그런데 그 작정은 한번 결정되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③불변적.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이 작정을 하셨는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해서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되는데 방해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 작정은 ④무조건적이다. 그 다음 다섯 번째는 ⑤ 총 포괄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에서는 인류역사가 바뀌는 큰 사건뿐만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떨어지는 것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작정교리의 반대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작정교리를 믿지 못하는데 1.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셨으면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정하셔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책임질 일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율과 자유, 자유와 필연의 문제가 나오는데 그런데 이것은 다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의 신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신학교 1학년 때 교수들과 학생들이 싸우고 얼굴 붉히며 싸우는 대목입니다. 신앙이 없으니까 그러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하시기는 정하시는데 그 정하신 일들을 이루실 때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거나 배제하면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루고 싶으신 일이 있으면 그 사람들의 인간의 의지를 사용해서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지를 하나님이 악한 의지를 창조하거나 악한 의지를 북돋아서 그 일을 하게하시는 것은 아니고 그 점에 있어서는 허용적이고 선한 의지는 하나님이 저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데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는 나는 저 사람에게 이 가난한 사람에게 이것을 도와주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강권하셔서 자기도 모르게 팔이 뻗쳐서 ‘저 나쁜 놈, 죽일 놈, 죽어버려라’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는 다르게 이 물을 먹고 목마름을 면하라고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우리들이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할 때 이런 것을 높이 들었는데 놓습니다. 그러면 100% 땅에 떨어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물리법칙 자체가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떨어진 원인은 내가 이것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물리적인 법칙은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당구를 치는 것처럼 이렇게 당구를 치면 당구공이 저 공을 때려서 반작용에 의해서 저 공을 맞게 되는 이런 것들은 수학적인 정확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셔서 당신의 뜻인 작정을 이루실 때에는 당구공을 때리는 그런 방식으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혼을 가진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물리적으로 위에서 놓으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법칙으로 우리를 움직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된다면 우리는 책임질 일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이시는데 우리 자신이 선이건 악이건 행하신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실 수 있도록 우리를 거기에 참여시키시면서 일을 하시는데 하나님이 하시고자하는 그 일이 작정에 거슬리는 우리의 시도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그르쳐지지는 않게끔 당신의 뜻은 이루어가면서도 아주 달콤한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지성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는데 협력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작정이 필연이라고 해도 우연적인 우리의 의지행사와 모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겠는데 하도 비유를 들 만한 것이 없으니까 이런 비유를 가끔 듭니다. 꿈을 꿉니다. 꿈을 꾸는데 오늘 틀림없이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꿈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었는데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런 꿈은 뜻밖의 사람을 만날 꿈이라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저녁때 정말 오래간만에 길거리에서 뜻밖에 동창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오늘 내가 누군가를 만나기로 되어있는 그런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은 결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강제력을 느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딱 만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정하셨어도 예를 들어 친구를 만나야하기 때문에 이쪽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옮겨놓았는데 이상하게 발이 자꾸 뒤로 가서 저기로 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상하게 전철을 타려고 그랬는데 막 뛰어갔는데 가버려서 그 다음 차가 와서 문을 열었는데 그 차에 동창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가운데 결정이 되었는데도 내가 어떤 일반적인 정신작용과는 어긋나는 방식으로 내가 강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행동했는데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가끔 간증하라고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뻥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는 절대로 그렇게 끝까지 하려고하지 않았는데 강권적으로 그랬다고 그러는데 대부분 뻥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니까 움직일 때 강권적이라는 말이 상식적으로는 자기가 그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수 없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강권적으로 움직이셨다고 하는데 자기도 하나님의 강권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감화를 많이 받아서 자기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이지 자기의 마음은 저리로 가고 있었는데 확 움직인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지 죽어라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작용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철학에 있어서도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것은 내가 설교 속에서 깊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한없이 캐고 들어가야 하는데 목회하면서 한 3년 정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굉장히 복잡합니다. 들어가면 역사 속에서 논쟁되어 왔던 것들이 치열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그것을 강의할까하다가 머리에서 쥐난다고 할까봐 삼위일체를 하고나서 할까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의지의 작용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기계를 움직이듯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도 있고 물론 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기는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으니까 문제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B번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구원받기로 작정되어있었다면 여기에서 놀아도 구원을 받을 것이고 구원받기로 작정되어있지 않다면 아무리 믿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안 되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뒤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에 관해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의 최종적 운명을 결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현되어가는 방법까지도 작정하신 것이다. 목적이란 지정된 방법의 결과로써만 작정되어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을 낙망케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려시켜준다. 그렇지 않습니까? 작정하신 사람은 저절로 구원받지 않으니까 작정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복음을 전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정이라는 말을 쉽게 이야기하는데 이 예정은 우리들에게 교훈적인 형태로 주어질 경우에는 전망적인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회고적인 용도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정교리를 세운 목표 자체가 전도하려고 갔는데 되게 힘듭니다. 산 넘고 물 건너고 그리고 돈도 많이 들고 핍박을 받아서 자기가 고통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동네에 지금 전도하려고 가는데 작정한 사람이 없으면 전도하러가서 고생만 실컷 하고 결국은 열매가 없을 것 아닙니까? 가르쳐주십시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한 용도로써 활용하는 교리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자기가 ‘구원받았을까? 가봐야 알지’ 이러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주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내가 당신을 믿어준 것을 너무 고맙게 생각해서 보상으로 구원해주신 것처럼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까 지금은 그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구원이 취소된 것이 아닐까 하는 방황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맨 처음에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자기를 사도로 만드시려고 한 것이 다메섹에서 회개할 때 예수님이 자기를 불러주셨다고 믿었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은 아주 엄격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렇게 종교지도자의 길을 걷게 하시고 영향력을 확대하게 하신 다음에 구약에 대해서 잘 알게 하신 다음에 예수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하고 나를 사도로 불러주신 것이 다메섹에서의 일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하나님은 계획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태로부터’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어머니가 나를 낳은 것도 결국은 알고 보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작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것이 실현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만세전에 영원 전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한 번에 모든 것을 작정하고 계획하시고 이것들을 역사 속에서 펼쳐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기 때문인데 그것은 모태에서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나라는 인간의 구원도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큰 경륜 속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사적인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구가 얼마쯤 되는지 아십니까? 일천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확률이 적고 여러분들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것이 가능성이 거의 0로 수렴하는 확률입니다. 거기서 만나서 여러분들이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헤아릴 수 없는 경쟁을 뚫고 그리고 만나서 태어납니다. 태어나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많습니다. 아프리카 흑인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키가 큰 미국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우리가 요즘 별로 안 좋아하는 일본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또 태어나서도 한 오백 년 전에 태어났으면 절대 같이 만날 수가 없는데 우리가 동일한 시기에 태어나서 만나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회고하면서 그러므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습니다. 운명처럼 만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정을 가르쳐준 사도 바울의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힘을 안들이기 위해서 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작정이 되었는지 묻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죄의 제작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정은 하나님을 장본인인 도덕적 존재자들의 창조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죄가 작정가운데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직접행위에 의해 죄를 산출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죄와 관련된 문제 역시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신비가 남아있다. 그 다음 예정을 메모를 해보면 도덕적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피조물을 향한 작정을 예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예정 속에는 선인과 악인 즉 모든 인류, 천사와 마귀, 그리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선택과 유기가 나옵니다. 선택은 맨 밑 단락에 그러므로 선택이란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유기라는 말은 버리시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 중 일부만을 구원하기로 목적하셨다는 말은 자연히 나머지는 구원하지 않기로 목적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치세요.) 유기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작용 속에서 어떤 사람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 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유기에는 이중적 목적이 있으니 은총을 베푸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시고 즉 넘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따라 벌하려하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은 적극적인 교리지만 유기는 소극적인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선택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러면 당연히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다 선택받은 것이면 유기교리가 필요 없을 것이고 그러나 만약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시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조금 무책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이 의도하셨다고 해야 하는데 그러면 과연 선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버리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이해됩니다. 제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은 당신에게 악을 행하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실 의무와 책임을 누구에게 부여받으셔야하는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인간이 범죄했을 때 모두 멸망시키셔서 인간은 일체 하등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니까 사실은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형벌 받아 마땅한 자기를 구원해주셨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종종 드는 비유인데 홍수가 나서 집도 다 물에 잠기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다 죽을 것 같은데 헬기가 와서 밧줄을 내려주어서 특공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 한사람씩 건져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자마자 구조대원의 따귀를 때리면서 나만 구원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에 빠진 저 사람도 구원해야하지 않겠느냐며 구원하려면 다 구원하고 말려면 다 말아야지 왜 치사하게 나만 살렸느냐고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적합한 비유는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조종사는 모두 구원하고 싶은데 능력이 안 되니까 못 구하는데 하나님은 그러시지는 않으시니까 말입니다. 요즘에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인가 ‘사랑이 이긴다.’ 인가 아무튼 I love wins. 인데 작년에 미국에서 나와서 우리나라에도 양자물리학에서부터 시작해서 디자인까지 머리가 반짝반짝하는 사람이 글을 써서 지옥에 대한 교리는 폐기되어야한다고 하는 하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맹공을 펼쳤습니다. 그 사람이 처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늘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느냐 할 때는 우리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정론에 대한 반대설입니다. 이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그 다음에 9과입니다. 창조도 복잡한데 그래도 조금 해야 하겠습니다. 작정의 시행은 창조사역부터 시작된다. 이 창조사역은 모든 계시의 시작이요 기초이며 종교생활의 근원이다. 창조라는 말은 성경에서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엄밀한 의미로 정의하자면 줄치세요. 창조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치 않고 창조하시며 한편으로는 본질상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라고 나오는데 사용된 동사가 히브리말로 ‘바라’라는 단어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 바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만 나타난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는 않고 재료가 언급되지 않았을 때에도 바라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당연히 무에서 창조하셨습니다. 그 무의 개념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무에서 창조하셨다고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셨으니까 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있다, 없다는 것도 지난시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유, 무의 개념이 유, 무의 주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각각 달라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유, 무의 개념을 놓고 보면 하나님이 무에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무의 개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그게 물질의 개념에서 볼 때 없는 것이지 하나님이 자신이 있으신데 어떻게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천지를 구성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무엇을 사용하셔서 처음 창조하신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어떻게 보느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질료를 창조하시고 그 질료를 가지고 창조세계를 하나씩 하나씩 빚어가는 모습이 창세기 1장 2절 이하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정의는 그것이고요 우리는 범신론과는 반대로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행위임을 주장한다. 플라톤 같은 사람은 세계창조를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면 커다란 하나님의 신성이 있는데 그 신성이 가득차서 감당할 수 없게끔 흘러넘친 것이 이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거기서 상징하는 신 자체가 인격체가 아니기는 하지만 무의식적인 유출을 통해서 세계가 생겨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러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창조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셔서 만드신 것을 가리킵니다. 또 우리는 자연신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으로 세상이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해야한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연신론 혹은 이신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시기는 만드셨는데 만든 다음에는 법칙 속에서만 돌아가게 하셨지 하나님은 철수하셔서 이 세계에는 안 계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도 그럴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인간은 그러하다. 사실상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 속에서 개입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어떤 도덕적인 교훈을 찾아낸다든지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이신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이것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좋은 정보를 만들고 법을 만들어서 너희끼리 잘 살아라. 잘 살면 너희들이 잘해서 잘사는 것이고 못살면 다 그렇게 살게 해주었는데도 너희들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까 그 책임은 너희들 스스로 짊어지면서 사는 것이 이것이 세상이다. 이신론 속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굉장히 유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시대는 지났다.’ 구약에는 내가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디트리티보네프 같은 사람들은 성숙한 세계라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이 목사이면서도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레지스탕스였는데 이런 신학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질문하는 것이 미치광이가 버스를 운전하는데 승객이 가득 찼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미치광이를 죽여서라도 미치광이를 운전대에서 끌어내리고 승객을 살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미치광이가 바로 히틀러다.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가담하여 독일항복을 눈앞에 두고 사형당합니다. 그런 것들이 이신론이라는 신학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신학이라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날은 점점 이신론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요즘은 옛날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암암리에 이런 세상의 정신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시기라고 그랬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즉 물질세계의 시작을 가르쳐준다. 태초 전에는 끝없는 영원이 존재한다. 창조사역의 첫 부분은 무에서의 창조이며 기존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창조였다. 무에서의 창조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외경의 한곳에 기록되어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다음의 성구에 잘 나타나있다. 그래서 누가 그랬는데 어느 과학자가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이 흙에서 사람을 만드셨죠? 드디어 우리도 당신의 세계에 도전했습니다. 당신이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우리도 무에서 창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죠? 드디어 우리도 인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만들어봐라.’ 그러니까 인간이 흙을 가지고 사람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현대과학을 접목시켜서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공학적으로 하나님께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흙을 갖다가 빚으니까 하나님이 ‘내 흙으로 하지 말고 네 흙으로 해라.’ 그랬답니다. 흙이 있어야 하지 말입니다. 우리 것은 오직 무엇밖에 없습니까? 많이 찔리셨나봅니다.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흙도 하나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창조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서 찾으려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신에게 충족감을 가지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피조물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에 벌여놓은 하나의 허황한 구경거리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의 안녕을 촉진시키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고 이끌어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천지창조의 목적은 어차피 공부를 하셔야하니까 천지창조의 목적 8개를 다 들으시면 제일 좋고 그것이 너무 힘들면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특강을 듣고 도덕적 통치에서 제 3장을 꼼꼼하게 각주까지 읽으시면 머릿속에 정리될 것입니다. 그것은 열린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동안에는 어차피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설교가 귀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와 관련시켜서 말할 때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Self Sufficient 자충족성입니다. 스스로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어야지 누가 좀 필요하고 모자란다고 생각되시면 그분의 완전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런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그것에 시원하게 답변을 주는 책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아주 훌륭한 예를 하나 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만드는 어떤 것은 인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자면 친구를 자꾸 사귀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군가를 의지하고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예를 들어서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데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조그만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 뒤에 있는 사람까지 안 들립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의 기계는 부족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전기를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을 끄면 아무도 안보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둠속에서 볼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자를 이렇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이렇게 계속 앉아있을 수는 없는 존재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십 분이야 하겠지만 나중에 다리가 저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놓고 앉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핸드폰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이것을 보고 자꾸 웃으시는데 제가 이번에 이것도 너무 최신형이라서 다운 그레이드를 하려고 지금 전화기를 하나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멀리 있는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때에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는 인간의 격지적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여기에 삼다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물을 마시지 않고는 강의를 계속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인간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음악가 중에서 바흐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바흐가 예를 들면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흐의 평균율이 400여곡이 있는데 그중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나오는 평균율의 음악을 보면 바흐가 그것을 만들었을 때에는 우리 같은 사람은 만들지 못했는데 여러분들 중에 작곡가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했겠지만 집안에서나 불렀지 이렇게 세계적으로 명곡이 된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바흐가 우리보다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작곡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는데 바흐는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이렇게 설명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정말입니다. 어느 책을 보아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기가 막힌 예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완전성에서 넘쳐나는 창조입니다.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바흐가 평균율이나 혹은 G선상의 아리아 같은 것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명곡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런 것 없이도 잘사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놓고 계속 틀어야지만 겨우 살 수 있었나? 아주 하찮은 인간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 사람이 예술에 있어서 우리보다는 훨씬 탁월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 거기서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미술이나 이런 모든 것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책을 썼습니다. 요새 빛으로 산다는 것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까? 끝났습니까? 공부하고 무엇을 느꼈습니까? 나와 보십시오. 앞에 앉는 사람에게 혜택을 주어야하는데 이렇게 귀찮게 해서는 안 되는데 그 책을 공부하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어쨌든 그 책을 썼습니다. 정확히 2주 만에 그 책을 썼는데 나중에 대조를 하고 각주를 달고 그러는 것은 시간이 좀 걸렸지만 기본적으로 초고를 쓰는데 한꺼번에 2주 만에 썼는데 2주 동안 기도원에 들어가서 쓴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삶을 다 살면서 2주 만에 쓴 것입니다. 새벽기도 나오고 주일에 설교하고, 수요일에 설교하고 틈틈이 2주 만에 썼는데 제일 많이 쓴 것이 하루에 원고지 300매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내가 그 책 없이 살 수 없어서 그 책을 썼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 책이 있어야 잘 살 것 같아서 쓴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내가 그 책을 썼다는 이유가 그런 책을 쓰지 않는 사람보다 내가 못난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잘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못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을 보고 아이 쪼잔 하게 하나님이 혼자서 살기가 너무 외로우니까 이런 장난을 하시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이 기이한 천재성과 탁월성을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주 아름답고 탁월한 예술작품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다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정신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뭔가 모자라서 창조하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시작해서 기독교에서는 이 세계 자체를 하나님의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을 자꾸 훼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잘못된 사상, 진리가 아닌 철학, 이런 것들이 자꾸 훼손하니까 이런 것들로부터 창조세계를 창조의 원래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말하자면 사명입니다. 세계를 그렇게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술작품처럼 창조하시고 그래서 당신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들을 두 개의 세계 속에 투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천상의 세계, 하나는 지상의 세계입니다. 천상의 세계에는 영적인 세계, 이 지상의 세계에는 물질과 영적인 세계가 맞닿은 독특한 세계 속에서 인간을 통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들을 나타내는데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누가 그럽니다. 내가 책을 한권 써서 주니까 타이프를 쳐서 리포트를 출력할 때 기분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썼구나 하고 깨끗하게 출력을 해서 호치켓으로 찍을 때 기분이 좋은데 목사님은 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으시냐고 그러는데 물론 좋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나름대로의 아주 독특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있는데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지만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 속에서 어떤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것은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다기보다는 뭔가 넘치기 때문에 그런다고 보아야합니다. 그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을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헨델이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쓸 때에 일주일 동안을 다락방에서 이사야 53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3일 만에 그 대작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막 연주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에 할렐루야가 나올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너무 가슴이 벅차니까 사람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오라토리오 메시아 마지막에 할렐루야가 나오면 불신자들도 다 일어나는 것이 전통인데 그때에 헨델이 했던 말이 ‘오호 하나님! 이 곡을 참으로 제가 작곡을 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예술적 완전성을 드러내 보이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계의 창조를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완전하시니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자라셨다면 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어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세계도 없이 하나님은 심심하셨을 텐데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세상이 없던 때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느냐고 할 때의 때 자체가 시간입니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산까지 제일 빨리 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KTX, 비행기, 그 뒤에는 생각으로 갑니까? 여러분 중간고사는 생각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진짜 오셔서 보셔야합니다.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부산까지 제일 빨리 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나보다도 더 구닥다리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거기서 KTX가 거침없이 나오고 비행기가 나오고 그럽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제일 빨리 갑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하니까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슨 공간이 상대적이냐? 그것이 말이 되냐? 아인슈타인은 천재였습니다. 이 사람이 천재였고 온갖 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부인도 사실은 영광을 누리는데 많이 동참했습니다. 어디서든지 거의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바람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바람기가 자기도 모르게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때 나왔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아니 공간이 상대적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내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바위 50㎏를 당신 무릎위에 올려놓은 것과 예쁜 애인을 무릎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무게가 똑같겠습니까?’ 똑같습니까? 똑같지 않겠습니까? 남자에게 물어보겠습니다. 50㎏짜리 애인을 만나면 큰일 납니다. 똑같습니까? 똑같지 않습니까? 다를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50㎏인데 똑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절대 하나님이 뭔가 미달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에 작렬하듯이 퍼져가는 이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그 아름다운 세계를 보면서 우리들은 한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래전에 1800년대에 망원경이 나와서 보았는데 왕별들이 하늘에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왕별이 무엇입니까? 별들이 되게 큽니다. 나중에 그별이 되게 큰 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별이 은하였습니다. 그 은하는 무엇이냐 하면 최소한 수천 억 개의 별들이 뭉쳐져 있는 직경 100,000광년 200,000광년이 되는 별들의 덩어리들이 너무 멀리 있어서 하나로 뭉쳐진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 속에 있을 때 우리 인간은 이 우주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세계를 하나님이 ‘Be there! 거기 있어라.’ 하는 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뭔가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만물이 창조되면서 시간이 들어온 것이지 피조물이 없이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 그 이전 때에는 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창조하셨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는 속에서 시간이 개입되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시간과 공간이 함께 엮어져서 그래서 시간을 움직이고 시간이 그 공간에 의해서 휘기도하고 구부러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아주 놀라운 신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세계를 하나님이 당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와서 박수치고 찬송이나 불러야지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했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수증기 한 방울이라도 이 전 인류를 파멸하기에 충분하다. 인간이 무한한 우주 속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유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면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혼나지 않는 길이 없을까? 좀 약간 까불면서도 야단맞지 않는 길이 없을까? 그러면서 살면 신앙생활 하는 모든 삶이 다 모순처럼 뒤엉켜서 고달픈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남들은 모르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세계 모든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지식 속에서 확신하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매일매일 걸어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고 여러분들이 기독교 안에서 그것을 하나님이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소보다 조금 길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 대신 다음시간에 조금 일찍 끝내겠습니다. 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