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혼의 회복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 오희열
시인은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목자이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3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먼저 눈을 끄는 단어가 있습니다. “내 영혼을”입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교회 다녔지만 “영혼”이란 무엇입니까? 아마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가장 배워본 적이 없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혼”일 것입니다. 그 “영혼”은 무엇입니까? 답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외관을 볼 수 있고, 배를 가르면 간, 창자, 심장, 등등 장기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만큼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영혼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하겠습니까?
어떤 물건이 몇 개의 부품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물건을 조립하는 공장으로 가 보는 것입니다. 그 공장의 부품 세 개가 합쳐져서 하나의 물건이 되었으면 그 물건은 세 개의 부속품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맨 처음 만드신 그 지점으로 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기 위해 먼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흙”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파르”인데 사실은 흙이 아니라 “먼지, 티끌”입니다. 그 먼지를 빚어서 사람의 몸을 삼으십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의 몸은 흙으로부터 취하고 거기에서 티끌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하찮은 사물의 대명사입니다. 인간의 몸이 땅에서 취하여지고, 그것은 가장 하찮은 티끌로 이루어진 육체의 재료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이것은 영혼을 창조하시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후~”하는 동작으로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육체는 “먼지”라는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셨지만 영혼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창조하셔서 그 영혼이 육체와 만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 창조의 과정을 보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영, 혼, 육”이라는 세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영”과 “혼”은 같은 뜻으로 교차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둘이 결합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영혼이 몸을 떠나면, 몸은 땅으로부터 취한 바 되었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고 그것은 원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불멸하도록 지정된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한 번 창조된 그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영혼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영혼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많이 말하고 있지만 영혼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선도 베푸시고 정의도 베푸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지만, 하나님 자체가 무슨 존재인지는 하나님이 거의 말씀 하지 않으십니다. 딱 두 군데에서 말씀하시는데,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렇게 딱 두 구절에서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인간과 관계를 가지고 일하시는지에 대해서만 설명합니다. 똑같이, 인간의 영혼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많이 말하지만 그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이런 종처럼 모양이 있고 색깔, 크기, 부피, 무게를 가지고 있는 사물입니다. 이것은 한정된 장소 안에만 존재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어려운 말로 “한정적 사물”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이런 사물들입니다. 그에 비해서 제한적인 사물이 있습니다. 영혼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영혼은 나에게 있고 너의 영혼은 네 안에 있습니다. 내 영혼이 출장 가서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습니다. 내 몸무게가 40kg이었는데 밥을 많이 먹고 운동을 하지 않았더니 80kg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 안에는 내 영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영혼의 크기가 커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집의 크기에 상관없이 내 영혼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뚱뚱해질 수도 있고 새로운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무언가를 배워서 새로운 재능을 가질 수도 있지만 나의 고유한 영혼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충만한 사물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 안에 계신 것은 아니지만 모든 세계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어떤 물건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지만 어떤 물건이나 인간도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영혼으로 돌아가서, 영혼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연히 육체에서 떠나면 하늘나라로 가게 되고 거기서 기다렸다가 우리 몸의 부활이 일어날 때 우리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어 또 다른 영원한 부활체로서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영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혼에는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감각하고 배고픔을 느끼는 등의 모든 것들은 영혼의 하등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고, 느끼고 자신이 결정하는 기능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아주 높은 기능에 속합니다. 그런데 하등한 기능은 고등한 기능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은 인간일 수 있습니다. 내가 너무 배가 고픕니다. 인간의 하등한 영혼의 기능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의 먹을 것을 빼앗아 먹습니다. 이것은 고등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것이다. 그것을 빼앗는 것은 범죄이다.”라는 인식이 자기를 지배하면서 하등한 기능을 통제해야 하는데 이것이 잘 안 될 때 인간은 망가진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에서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하등한 기능은 언제나 우리에게 살아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 그 일을 다시 하고 싶어집니다. 성적인 욕망을 느끼고, 추우면 추위를 피하고 싶고, 배부르면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지는 등, 인간의 욕망은 하등한 영혼의 기능과 결합하면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영혼에 대한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이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여기서 “소생시킨다”는 뜻은 히브리어로 “하야”인데 “살아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나의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내 목자로 섬기며 살아갑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만약 이 시인의 영혼을 확 살아나게 했다면 언젠가는 이 시인의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는 “살아나게 하시며”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어려워집니다. “영혼”이라는 말도 어려운데,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사뭇 다릅니다. 육체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의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일치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심정지가 됩니다. 모든 육체의 기능이 멎었습니다. 그런데 쇼크를 주면 다시 움직입니다. 죽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뇌사상태가 된 것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뇌사상태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완벽한 것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한 사람은 20세 때 완전히 의식을 잃고 코마상태에 들어갔다가 20년 후에 깨어났습니다. 20년 동안 누가 찾아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를 거의 기억합니다. 육체도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쓰러져서 죽었고 그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며칠 지났더니 시체에서 썩은 물이 나오고 냄새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해도 대답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은 그런 식으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면 인간으로서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주어가 될 경우,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는 육체가 주어가 되어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와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개가 죽었다”고 하는 것과, “성질 다 죽었네”의 “죽었다”는 의미는 다른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영혼으로서의 제구실을 잘 못한다고 할 때 그것을 죽은 영혼이라고 하고, 활기찬 생명이 별로 없는, 다시 말해 영혼이 죽어있지는 않지만 생생한 기운이 사라졌을 때, 그때 우리는 그것을 죽었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의 영혼이 정말 없었는가? 사망했는가? 영혼이 사망했으면 우리 육체도 살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은 둘이 만나야만 살아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할 때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력이 현저하게 없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답게 살지 못했던 우리의 영혼의 생명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렇게 죽은 상태가 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와서 매일 좁니다. 봉사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고 눈물 흘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무엇보다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죽은 영혼의 특징입니다. 육체가 죽었을 때는 조용한데 영혼이 죽으면 시끄럽습니다. 그 죽은 영혼으로 교회에서 온갖 싸움질을 하고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것이 영혼이 죽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두 번째로 하게 됩니다. 다윗과 같은 고매한 인물이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었을 때가 있었을까?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 때문에 영혼은 죽은 것처럼 되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앞선 질문에 대해서는 시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하시고” 했으니, 언젠가 이 시인의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영혼은 죽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까? 시편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입니다. 그렇지만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의 영혼이 죽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통이 계속될 때,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없을 때 영혼은 그 고통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영혼의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두 번째는 무지입니다. 지식이 현저히 모자라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영혼은 죽음의 상태를 면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시편 73편 아삽의 시에서 시인은 깊은 영혼의 침체 속으로 들어갑니다. 영혼이 거의 죽은 자처럼 되는 침체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된 것을 가리켜 영혼의 침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지 때문에 생겨납니다.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야단을 치십니다. “너, 이렇게 살면 되겠니?”, “너, 이런 잘못을 했지?” 하며 혼이 납니다. 괴롭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회개합니다. 어느 날 생각을 했습니다. “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말고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하고 바깥세상을 돌아보았습니다. 시인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나에게도 하나님은 아침마다 혼내시는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혼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 사람들이 아주 잘 지내는 것입니다.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죽을 때도 웃으면서 아주 편안하게 죽고 꽃상여에 둘러싸여 호사스러운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시인은 깊은 낙담에 빠집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고 탄식하며 고백하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세상 사람들처럼 막 살아버릴 것을...” 하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실제로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사람이 아는 지식의 수준이 거기까지인 것입니다. 그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에 깊은 침체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이 어디서 나는지 아십니까? 시인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소에 들어서는데 번개 같은 깨달음이 이 시인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습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고 나면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악인들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그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진 도자기처럼 던져내어져 박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시인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단 한 번에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시편 중에서도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렇게 시편 73편이 마치게 됩니다. 무지로 말미암는 영혼의 깊은 침체는 새로운 지식의 빛,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들어오는 빛인데 그런 새로운 빛이 그에게 들어오기 전까지는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보다도 훨씬 보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 죄가 영혼의 침체를 가져오는 가장 크고 일반적인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죄?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나는 사기를 치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누구의 돈을 빼앗거나 폭행을 하거나 신문에 날 만한 어떤 잘못도 한 적이 없고 태어나서 경찰서를 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내 영혼이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도 안 되고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의 감격도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군인들이 개울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상관이 군인 세 명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각자 흩어져서 돌멩이를 50kg씩 이 자루에 담아온다.”하며 자루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 번째 군인은 50kg짜리 돌멩이 하나를 찾아서 자루에 넣어 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30kg과 20kg짜리 돌멩이를 찾아서 담아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주 영리했습니다. “이 자루를 매고 어디론가 이동할 수도 있는데 한 개나 두 개의 돌덩어리를 짊어지면 어깨가 얼마나 아프겠는가?”하고 공깃돌처럼 작은 돌멩이 1천개를 주워 모아 50kg을 채웠습니다. 모두 모인 후에 상관이 황당한 명령을 합니다. “가지고 온 돌멩이를 제 자리에 다시 갖다 놓는다. 실시!” 한 개를 가져온 사람은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즉시 제 자리에 갖다 두었습니다. 두 개를 가져온 사람도 약간 헛갈리긴 했지만 돌멩이를 빼낸 땅의 흔적을 보고 원래 있던 자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천개의 공깃돌을 모아온 사람은 그 중에 단 한 개도 제 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대학의 실험실에서 접시처럼 납작한 비이커에 냉수를 부어넣고 실험을 했습니다. 살아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가져다가 그 물 속에 넣고 아래에 알콜 램프를 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아주 천천히 온도가 올라가도록 조절했습니다. 1초에 0.2도 정도 올라가도록 조절했습니다. 한 시간 반쯤 지난 후에 보니 개구리가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살아있는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넣으면 펄쩍 뛰쳐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는 찬물 속에 있었고 천천히 온도가 올라가니까 마지막에는 삶아진 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집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못 할 수가 없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또렷하게 자기의 지은 죄가 기억납니다. 양심의 법정에 세우고 율법의 판사는 판결을 내리고 인간의 정신은 벌벌 떱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면 어디서 회개해야 하는지가 너무나 분명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잘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살림하시다가 깨끗하게 집안을 청소했는데 비가 오는 날에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 놀다가 집으로 뛰어 들어와서 거실에 흙탕물을 묻히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그것은 걸레질 한 번만 하면 금방 닦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싱크대 뒤에, 혹은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침대를 치우고 그 뒤에 쌓여있는 때는 5년, 7년 10년 씩 쌓인 때입니다. 그것은 락스와 하이타이를 붓고 박박 닦아도 잘 안 닦입니다.
인간의 영혼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수도권에는 잘 되어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변을 보면 그것을 건물 안에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관을 타고 따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얼마나 흘러 들어갔는지 나오고 그에 따라서 분뇨처리비가 부과됩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고 건물을 지으면서 아래에 똥통을 파야 했습니다. 예전에 우리도 교회를 지을 때 그것을 확실하게 파지 않으면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700명이 사용할 수 있는 똥통을 팠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많이 오니까 1년에 한 번 퍼야 하는 것이 넉 달이나 다섯 달 정도 되면 꽉 찹니다. 구청에 전화하면 분뇨 수거 차량이 옵니다. 재밌는 것은 그 차는 항상 새벽에 옵니다. 낮에는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두울 때는 안 되고 어둠이 걷히자마자 새벽 6시쯤 됐을 때, 새벽기도 시간쯤 옵니다. 올 때는 항상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옵니다. 베토벤이 들으면 얼마나 짜증 나겠습니까? 사람들은 평소에 이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으면 기분이 좋은데 새벽에 듣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워합니다. 차가 오면 인부들이 큰 파이프를 분뇨통에 넣고 빨아들입니다. 더러운 찌꺼기들이 빨려 들어가면서 통의 수위가 높아집니다. 그것으로 양을 계산해서 영수증을 끊어주면 가서 납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유쾌한 예는 아니지만 이것보다 정확한 예가 없어서 드는 것입니다. 분뇨차가 가는 것을 보면 출렁출렁하면서 그 눈금이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합니다. 요즘은 그런 차가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불쾌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 분뇨차에서 한 국자를 떠냈다고 합시다. 그것을 물에 잘 풀고 믹서기에 갈고 여러 차례를 거즈에 걸렀습니다. 그러고 나니 노란 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은으로 만든 스프레이에 담고 빨간 카페트가 깔린 궁전에서 허공에 뿌렸습니다. 노란 액체의 비말들이 퍼집니다. 그것은 별로 더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흩어지는 비말이나 건더기가 출렁대며 가는 똥차의 그것이나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입니다.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 때문에 영혼은 죽는 것입니다. 영혼의 고등한 기능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이 죄가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면 마음 자체가 영혼의 한 기능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고, 그 기능 속에서 영향을 미치면서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감을 갖도록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약물이나 알콜에 중독되면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죄는 그렇게 사람을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이 영혼이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불신자에게만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는 불신자의 영혼만 죽었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신자의 영혼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너희가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 영으로 육체를 죽이면 살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죽는다”, “산다”는 것은 영혼이 주어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구원해 낸 신자들의 영혼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불신자의 영혼은 많이 죽어있는 것, 거의 완전히 죽어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영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고,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 않고 죄를 계속 지으면 신자의 영혼은 생명의 기운을 계속 잃어버리고 넓은 의미에서의 영혼의 죽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못된 짓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시는데, 아무 상관없습니다. 일단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죄에 사로잡혀 살면 불신자보다 더 나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다윗은 정말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존 오웬은 다윗에 관해 말하기를,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무엘하 11장까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우리 중에는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었을 그런 죄를 짓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간음죄, 그 간음죄도 보통 사람과의 간음이 아니라 이미 혼인 관계에 자신도 있으면서 또 다른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간음죄를 짓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까지 살해합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는데, 다윗처럼 그렇게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도 성경에 흔치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사실 죄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굉장히 길지만 이 정도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다윗은 넓은 의미에서 여러 가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죄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죄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인구조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인구조사는 순수한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들의 수와 그 물자를 헤아리기 위한 조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들이 그런 식으로 조사해서 “이 나라에 군인이 몇 명이고 말이 몇 필이고 전차가 몇 대이고 하니 우리는 이만큼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셨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그래서 형벌이 내리고 온역으로 7만여 명의 백성이 죽어나가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영혼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원래 죽어있는 영혼으로 살던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던 고매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혹에 져서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범죄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큰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더 큰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다윗이 무서워했는지,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십시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얼핏 읽으면 그냥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 왕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그것이 죄를 지었을 때 떠나가는데 그 때는 항상 비극적인 결과가 뒤따랐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울, 즉 다윗 자신의 전임자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불순종하고 스스로 교만해져서 제사장의 일을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둬가셨습니다. 그 즉시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미치광이가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울의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정신을 달래주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뮤직 테라피인 것입니다. 음악치료였습니다.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그의 생애가 끝납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그렇게 정리하시고 왕으로 세우신 사람이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워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 큰 문제는 구원의 기쁨이 싹 사라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시종일관 찬송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전쟁에서, 국가적인 위기에서, 개인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대단한 작곡가였고 시인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증언이 나오지 않지만 대단한 음악적인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몸 자체가 명품 악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죄를 짓고 난 후에는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바뀐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었고, 비빈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다윗이 더 원했더라면 더 주었을 것이라고도 하실 정도로 많은 여자들을 거느렸습니다. 뭐든지 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구원의 즐거움에 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다윗은 사실 삶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고통을 받아서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기도하다가 자신의 몸을 이불 속에서 만져보는데 그것이 누구 몸인가 할 정도로 온 몸에 뼈만 남았습니다. 몸이 수척해졌습니다. 밥을 먹을 수가 없고 너무 괴로웠습니다. 다윗도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회개했고 그때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소생시켜주셨습니다.
죄가 신자의 영혼에 죽음을 가져오는 원인이라면 그 죄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일한 처방은 회개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라는 2세기의 교부는 자신의 책에서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요즘 얼마나 웃기는 시대인지 아십니까? 교회에서 회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눈물로 하는 회개를 본 적은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저는 청소년 때 스스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6년 후에 아주 비참한 마음으로 교회에 돌아와서 기독교에 귀의했습니다.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녔는데 그때의 기억이 아주 생생합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 다 남아있습니다. 특히 3, 4, 5학년 때의 기억인데, 우리 집은 서울의 약간 변두리에 있었는데 동네 어떤 교회를 가던지 항상 예배드릴 때는 눈물바다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회를 지을 때 이렇게 시설을 잘 갖추고 예배드리는 교회는 아주 큰 교회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은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신발을 들고 옆에 놓고 거기 앉아서 예배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 어린 마음에 들으면서도 그 설교가 조리 있다든지 재밌다든지 하는 생각은 하나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나면 어떤 교회든지 온 교인이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악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생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풍금이 있는 교회는 부자교회였습니다. 그냥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모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초등학교 2, 3, 4, 5학년 때 머릿속에 들어온 교회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교회에 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더욱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나의 죄가 생각나서,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해서 눈물 흘린 것이 언제였습니까? 신앙의 연조? 연조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고목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연조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살아있을 때, 그것은 거목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국립공원을 갔는데 태어나서 그런 나무는 처음 봤습니다. 어른 아홉 명이 손을 잡아야만 나무를 둘러 쌀 수 있었습니다. 높이는 120m, 계산해보니까 나무를 잘라놓고 잘린 나무 밑동에 30명이 모여 앉아서 수건돌리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나이는 3200살. 놀라운 것이, 그 나무가 3000년 정도 되면 서서히 죽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거목입니다. 나무가 쓰러지면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것을 움직일 수 있는 기계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 나무 밑동을 파서 굴을 뚫고 차가 다니는 것도 봤습니다. 그런 정도입니다. 그것이 거목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연조가 깊어져 갈 때 거목이 되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가 수많은 나무들이 함께 있는 숲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고목이 되고 싶습니까? 거목이 되고 싶습니까? 고목입니까, 거목입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크게 말씀하십시오. 네, 거목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수이신 어떤 장로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회개를 하지 않는 우리 평신도도 문제지만, 교회에서 죄를 지적하면서 회개해야 한다며 피를 토하며 설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들어본 것이 30년 전이었습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모두의 합작품입니다. 이 죄를 해결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이 죄가 단 번에 죽습니다. 오랫동안 지은 죄인데도 깊이 회개하고 나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갑자기 나의 마음이 너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지고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이 마음에서 불끈 솟아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역할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회개를 통해서만 죽을 수 있고 그때 우리의 영혼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생명이 충만하게 다시 살아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죄를 죽이고 죄는 은혜를 죽입니다. 우리의 마음 그 자체는 죄와 은혜의 치열한 싸움터입니다. 죄는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아서 은혜를 죽이려고 하고 은혜는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아서 죄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 결정권은 자신의 마음이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다가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금요예배라고 하지만 우리 어릴 때는 오일 예배라고 했습니다. 주일예배, 삼일예배, 오일예배. 그리고 다시 주일예배. 또 구역예배를 드리고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왜? 그렇게 연약한 것이 인간이니까, 회개할 기회를 많이 갖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러는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그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생명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으로 보면 생명이고, 이것을 관계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정도로?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고 그렇습니까?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은 어둠이고 너희는 빛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낮에 불꽃놀이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폭죽이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한 시간을 쏴 대면 몇 억 원 어치를 쏴야 합니다. 6억인가 7억이 들어갑니다. 그것을 대낮에 쏘면 불꽃놀이가 되겠습니까? 다들 기다립니다. 한강이 캄캄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세상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이 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다른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핑계를 대며 타협하는 것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죄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것이 죄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나만 그것을 행하고 인류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나의 영혼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양심의 구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하신 일을 내가 하면 인류 모두가 그 일에 동의하고 죄를 짓는다고 해도 내 영혼에는 똑같은 침체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 기준은 세상이 어떤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행동, 이 마음에 대해서 뭐라고 규정하시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영혼의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어떤 가정이든지 문제는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자녀들이 속을 썩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썽을 불릴 수 있는지 끊임없이 부모에게 고통을 줍니다. 남편은 아내를 힘들게 하고 아내는 남편을 힘들게 하면서 어느 날 가족 관계가 다 부서져버리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이혼하고 아이들을 뿔뿔이 흩어지고, 살아서 성인이 된 아이는 너무 상처를 받아서 그 부모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부모는 아이들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끼는 사람 없이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문제가 있어도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는 엄마 아빠가 눈물로 기도하고, 아내가 문제가 있을 때는 남편이 사랑으로 참으면서 아내를 돌봐줍니다. 남편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당장 가정을 깰 수 있는데도 아내가 눈물로 기도하면서 참습니다. 결국 그 시련을 극복하고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 됩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가족들의 마음속에 번갈아가면서라도 역사하면 이 영혼이 가진 생명의 힘으로 사랑하며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이 사라지고나면 이길 수 가 없습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영혼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보약을 먹고 병원의 치료를 받고 끊임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안티에이징을 추구하면서 늙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생명을 더 충만하게 유지하는 것인데 거기에 어마어마하게 의료기술자들이 투자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많이 늘어났습니다. 1940년대에 우리나라 남자들의 평균 연령이 41세밖에 안 됐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이 늘어났습니다. 영국 청교도 시대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34세, 35세 밖에 안 됐습니다. 그래서 일찍 대학을 공부하고 열 몇 살에 박사가 되고 일찍 결혼하고 일찍 자녀를 낳았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더 짧습니다. 남자의 수명이 30대 안쪽으로 들어옵니다. 전쟁과 질병으로 끊임없이 죽어 나갑니다. 생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일찍 죽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육체의 생명만 연장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은 그런 식을 연장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가 제 때 밥을 안 먹고 운동을 안 하고 영양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방탕하게 살면 우리의 육체는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저주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집니다. 영혼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을 먹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서 딱딱한 마음으로 어둠 가운데서 살아가면 영혼은 저절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거의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교회에서 재밌는 것은, 회개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죄가 별로 없거나 매우 적은 사람들입니다. 진짜 죄가 많은 사람들은 절대 회개하지 않습니다. 정말 부족한 것이 별로 없는 훌륭한 사람들은 매일 자신이 스스로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하게 부족한 사람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족한지 모르고 죄인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생활은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추루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심령은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심령이 북어처럼 됩니다. 북어는 딱딱하게 말라서, 그리스어로 “스켈레로스”라고 하는데, “강퍅한”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마슈브”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skeleton”,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두드리면 부서져버릴지언정 꺾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북어를 굽힐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옛날에 할머니가 북어로 요리하실 때는, 내일 아침에 요리할 북어를 오늘 저녁 때 물에 젖은 베 보자기에 싸 놓고 주무십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북어가 말랑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찢어서 요리합니다.
우리 심령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라깽이가 돼버려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도 마음은 딱딱한 땅이 되어서 말씀의 씨를 토해냅니다. 안 받아들입니다. 자라질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 예배에는 감격이 없고, 기도는 깊지 않고, 사랑은 진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적이 없습니다. 아주 무미건조한 교인이 됩니다. 교회에 와보면 모든 사람들이 화가 난 듯 보입니다.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단박에 그 영혼들을 살려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깊은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일이 많아서 제 방 옆에 비서실이 있고 두 명의 직원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자매의 딸이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사경회를 하는데 아래층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사경회가 끝나서 딸아이를 차에 태우고 집에 가야 하는데 이 아이가 나오질 않습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전화를 받자마자 툭 끊어버립니다. 두 번째 걸었는데도 툭 끊어버립니다. 왜 이러나 싶어서 가보려고 하는데 문자가 왔습니다. “엄마, 어린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왜 은혜를 방해하세요?”, 두 번째 문자가 왔는데 더 화가 난 모양이었습니다. “나만 방해하는 게 아니라 전화벨이 울리니까 여기 기도하는 모든 어린이들을 방해하고 있잖아요. 전화하지 마세요.” 했답니다.
어린아이, 어른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이 비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은혜를 받게 되면 진실한 회개가 나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눈물이 흐릅니다. 돌덩이 같았던 자신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신이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영예로울 때는 상을 받을 때가 아닙니다. 상은 무슨 상을 받겠습니까? 장관상을 두 번이나 받긴 했습니다. 교수 시절에 한 번 받고, 공무원 시절에 한 번 받았는데 그 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광이 아닙니다. 가다가 자꾸 서는 시계를 상품을 줍니다. 짜증납니다. 주려면 자 가는 시계를 줘야 하는데 안 가는 시계를 줍니다. 영광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영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때 가장 영광과 보람을 느낍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때 교인들이 눈을 뜹니다. 죄와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여태 살아왔던 삶의 자리가 돼지우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의 깨끗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면서 세 가지 죽었던 감각이 확 살아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에 대한 감각이 살아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에 대해 눈이 뜨입니다. 세 번째는 용서에 대한 감각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이제껏 사라졌던 새로운 신천지, 저기 장막성전 신천지가 아니라 신앙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때 느끼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은 연애의 기쁨에 비교할 수 없고, 퇴계 이황의 표현에 의하면 “학문의 즐거움은 돼지고기의 맛있음에 비할 데가 없다.”고 한 것처럼 모든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능가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은 노르웨이의 프롬폭포보다 위대하고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렇게 무한한 감동을 줍니다. 그 속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이 행복은 멍하니 있고, 돈에 욕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행복이 아닙니다. 영혼의 진정한 만족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중간 결론을 내리자면, 시인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죽었던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셨기 때문입니다. 2절보다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이제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경회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최고 긴급동의와 같은 기도 제목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옵소서!”, “내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해주시옵소서!”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그 외아들이 시름시름 병이 들었습니다. 온갖 약도 소용없고 병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로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매일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면서 간호합니다. 어느 날 이 아이가 “응..”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뜨고 호흡기를 떼고 “엄마!”하고 벌떡 일어나서 품에 안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기쁨이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그것을 무한대로 연장시키면, 그것이 여러분의 살아나는 영혼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가능성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는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 대단히 힘듭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십니까? 얼굴이 예쁜 사람? 키가 훤칠한 사람?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아닙니다. 누굽니까?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 하나님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이상적인 신앙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연애하는 지성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정신으로서는 하나님을 또렷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침체된 영혼에게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이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소생된 영혼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토막입니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문장 구조로 볼 때, 중간에 수식어를 다 빼면 이렇게 간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은 의의 길로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정리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의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거야 올바른 길 아닙니까?”, 그러면 올바른 길은 무엇입니까?, 의의 길입니다. 계속 순환됩니다. 이 “의”는 무엇입니까? “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이 의를 이야기하면 당신의 거룩함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하는 행동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면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지를 사람들 속에 심어주시는 생생한 실연식 교육인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당신의 거룩함을 침범하는 인간들에 대해 당신을 보호하시는 행동입니다.
이것을 인간으로 가져와서, 본문의 “의의 길”은 인간이 그 의의 길을 걸어간다는 뜻이니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상태, 그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상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다면 구주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의의 길을 걸어가려면 그것 말고 또 다른 “의”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은총에 덕 입은 의”라고 합니다. 율법에 합당한 상태가 “율법적인 의”라면, 하나님의 은총에 덕 입은 의는 “복음적인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의롭지 않은데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희는 의롭다”라고 인정해주십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의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시고 죽어있는 우리의 영혼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것도 똑같이, 이 세상이 불의한 것은 우리가 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훌륭하고 고마운 기회가 됩니다.
서른네 살에 대학 교수가 됐는데 한 대학에서 4년을 지내고 그 다음에 다른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아서 기도하고 그 대학으로 갔습니다. 학교에서 저의 주거환경이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2층에 방 두 개에서 아이 하나 데리고 세 식구가 전세 살고 있다고 했더니 평수를 물어봅니다. 요렇게 자그마한 것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런데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준비를 하겠습니까?”하며 거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습니다. 10년 동안 되는 대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방배동에 있는 빌라에 전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2평이었는데 태어나서 살아본 제일 큰 집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렇게 살다가 꽤 세월이 흘렀는데 앞집에 어떤 분이 우리 집에 올라와서, “목사님, 제가 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집을 목사님께 팔라고 하셨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중요한 말씀이 있으면 살 사람에게 먼저 말씀하셔야지 왜 팔 사람에게만 말씀하시고 나한테는 말씀이 없으셨을까 했습니다. 어쨌든 집안일이라 아내에게 맡겼고 아내는 우리에게 돈이 없어서 못 산다고 했더니 돈은 되는 대로 주시고 자기 집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이상하게 그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한 번도 집을 산 적이 없어서 세금 낸 적이 없었는데 그 빌라 하나를 사는데 세금이 꽤 비쌌습니다. 아내가 세무사에 가서 세금이 얼만지 알아보니까 너무 비싸서 깜짝 놀랐습니다. 세무사 직원이, “비싸요 아줌마?”, “비싸지요, 이렇게 조그만 집이...”, “그러면 반만 내세요.”하는 것입니다. “무슨 그런 세금이 있습니까?” 했더니 설명을 해주는데, 주인과 만나서 집값을 3분의 2정도로 낮춰서 가짜 계약서를 써오면 세금을 절반 정도로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집에 와서 어떻게 할지를 물어보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 목사와 집사가 둘이 앉아서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겠구나? 로마서 16장을 봐라.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국세를 바칠 자에게 국세를’이라고 했는데 그게 양심에 올바른 태도겠느냐? 다 갖다 내라.”고 했습니다. 진짜 세금 낼 돈이 없어서 아들 벙어리저금통까지 뜯어 간신히 돈을 맞춰서 냈습니다. 직원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존경스러운 국민이십니다.” 했겠습니까? 아니면 속으로 “에이, 병신들...” 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걸 왜 냅니까? 안 내는 방법을 다 가르쳐줬는데 되게 잘난 척 하시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 해가 흘러갔습니다.
우리가 93년도에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일곱 명이 시작했는데 한 3년 반 만에 250명 정도 모였습니다. 도저히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고, 예배를 드리다가 하도 설교가 기니까 사람들이 자꾸 기절했습니다. 진짜입니다. 산소결핍증으로, 특히 연로하신 분들, 아기 가진 엄마들이 툭툭 쓰러졌습니다. 보통 주일에 쉬지 않고 100분 정도 설교했습니다. 이것보다 훨씬 더 빨리 말입니다.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거기서 나와서 마침 교회당 건물이 하나 있어서 사글세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3년 반 만에 1천 명의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건물 주인이 새로 건물을 지으려고 하니 비워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IMF 때라서 빌려줬는데 이제는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을 테니 나가라는 것입니다. 아이들까지 해서 교인이 1300명이 되니까 2층으로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어딘가 건물을 사야겠는데 교회에 돈이라고는 1500만 원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정말 싫었는데 안양까지 가서 집사님들이 돌아다니며 땅을 봤는데 마침 좋은 공장이 하나 나와서 거기를 한 번 보려고 했더니, 부동산에서 소용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 주인인 할아버지가 땅을 팔려고 내놓았다가 변심해서 도로 집어넣었고 안 판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좋으니 찾아가 보겠다고 하며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찾아가서 “사장님, 이 땅을 우리에게 파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팝니다.”, “제발 다시 좀 생각해 주십시오.”, “아니, 내 땅을 내가 안 팔겠다는데 왜 자꾸 와서 귀찮게 합니까? 빨리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계속 졸랐더니, “내가 이 땅을 팔면 당신들은 뭘 하려고 합니까?”, “교회를 지으려고 합니다.”, “교회요?”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일주일 동안 생각해보고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낌새가 이상하고 뭔가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열렬히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갔더니 그분이 평생 거기에서 사업을 하고, 60년대 말에 공장을 세워서 여태까지 오신 것입니다. 이분이 스물여섯 살에 장로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80대 노인이셨는데 이 분에게 장로를 주신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셨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60년대 말에 자신의 가발공장에 직원이 아주 많을 때 일년 반 동안 매주 목요일에 오셔서 성경공부를 가르쳐주셨다고 합니다. 이 사업을 다 정리하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할 때 마음 한 구석에 내 평생 하던 이 공장에 교회가 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땅을 가져가시오. 교회에 팔겠습니다.” 하셨습니다.
옛날 일이지만 1천 평짜리 그 땅값이 36억이었습니다. 교회 통장에는 1500만원이 전부이고 월세 보증금 5억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계약금으로 3억을 가져오라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교회를 위해서 땅을 내놓으셨는데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아까의 데자뷰입니다. 36억에 거래하지만 30억으로 가짜 계약서를 쓰고 6억은 현찰로 뒷돈으로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안 되지 않느냐, 학습이 된 것입니다. 장로와 목사가 같이 앉아서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겠구나, 세무서를 속이려고.. 그것은 안 된다. 평생 신실하신 장로님이 왜 그러시는 것이냐, 토지를 워낙 싸게 사서 초토세가 엄청나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행에 진 빚까지 정리해야 하는데 세금까지 그렇게 내고 나면 자기 돈 1억을 넣어야 그 돈이 청산된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땅값이 올라가는데 그 땅을 교회에 그냥 주는 것이면 몰라도 당신 돈까지 보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억에 비자금 6억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건축위원들이 모였는데 80% 이상이 그렇게 해도 문제없고 대기업들도 그렇게 거래하는 일반적인 일이라고 했습니다. 장관 청문회 할 때 요즘 문제가 되는 다운계약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회의한 것으로는 마음이 안 놓여서 회계사를 불러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솔직하게 조언을 해달라고 했더니,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말입니다. 한 가지는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거래를 하시려면 가짜 장부, 이중장부를 쓰셔야 합니다.”, “왜 이중장부냐?”, “하나는 교회가 실제 회계 처리하는 장부이고 다른 하나는 세무감사가 오면 보여줄 장부입니다.” 그때는 장로가 없어서 집사였지만, 목사, 집사들이 그 가짜 회계장부를 써서 하나는 저 밑에 감추고 하나는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딱 정리를 했습니다. “안 된다. 그렇게 못 팔겠다고 하면 관두자. 우리가 월세방을 전전하고 학교에서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내가 평생 교인들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해놓고 가짜장부를 만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 싫다.” 할아버지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세금이 얼맙니까?”, “3억입니다.”, “그러면 39억을 드리겠습니다.” 땅 주인은 36억을 달라고 했는데 우리가 39억을 자진해서 드리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그때 제가 경험한 것은, 여기서 교인들을 향해 “참되게 삽시다!” 설교하는 것은 입술에 침 한 번 바르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정말 참되게 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앙케이트를 했습니다. 가톨릭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정의로움이고, 불교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착하다는 것이고,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라고 했답니다. 그 중에 무엇이 큰 역할을 했는지 아십니까? 개신교만큼 구제를 많이 하는 종교가 많지 않습니다. 사회봉사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지 아십니까?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개신교인들을 그렇게 본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한때 미국에서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멕시코를 차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멕시코가 자꾸 국경을 넘어와서 귀찮게 하니까 말입니다. 정치인들 사이에 멕시코 정복 전쟁을 벌이자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때 분연히 일어난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일어나서 “그것은 안 된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정복을 위한 전쟁을 허락하신 적이 없다. 평화롭게 사는 나라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침범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운동이 일어나면서 부르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온 교회가 궐기하여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 뜻을 꺾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정신입니다. 조선시대 때에는 선비가 되면 붓과 칼, 두 가지를 항상 같이 놓고 자신의 인생을 다짐했습니다. “이 붓으로는 항상 옳은 말만 쓰며, 불의를 강요받을 때는 이 칼로 자결한다.” 이것이 조선시대를 이어온 선비의 정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도”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왕이 세자를 자르고 싶었습니다. 측근에게 물었습니다. “저 세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거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하는, “폐하, 그것은 사람이 도리가 아닙니다.”하고 집에 돌아가서 자결합니다. 그 다음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세자를 정리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은 인간의 할 짓이 아닙니다.”하고 또 자결합니다. 그것이 조선시대 선비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 죽는 곳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멸시 천대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용기가 없습니다. 기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바로 그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길을 걸어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온 교인이 깊은 감동을 받고 사업하는 사람들이 세금 제대로 내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얼마나 우스운지 아십니까? 의사 선생님 몇 분이 계셨는데 정직하게 세금을 다 냈습니다. 세무사는 조금만 내라고 하는데 “아니다, 우리 목사님이 정직하게 내라고 했다. 당신은 세금을 깎으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낼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라.”하고 세금을 냈습니다. 이렇게 내고 나니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두 배를 세금을 냈습니다. 나는 세무서장이 표창해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무사에서 감사가 나왔습니다. 병원을 탈탈 털면서 뒤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더럽게 잘난 척하네. 병신...” 똑같은 규모의 병원들은 5천만 원씩 세금을 냅니다. 그런데 이 병원만 열린교회 다닌다고 1억을 낸 것입니다. 위에서 볼 때, 병원 크기도 똑같고 수입도 똑같은데 이 병원은 1억을 자진해서 내고 다른 병원들은 5천만 원을 냈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꼭 잘난 척하면서 튄다는 겁니다. 싹싹 뒤지며 세무감사를 받았습니다. 뭐가 나왔겠습니까? 하루 종일, 이틀인가를 와서 조사를 하고 나더니 20만원이 차이가 난다고 했답니다. 그 20만원이 문제가 되느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뭘 보여줍니까? 세상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그게 누굽니까? 여러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라고, 썩어가는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라고, 맛 잃은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소생된 영혼을 가지고 박수를 치면서 불을 받고 아침에 출근해서 가짜 회계서류를 쓰고 되지도 않는 거짓 문서에 서명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여지없는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이 교회에 큰 상처를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쓰레기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의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설교자 로이든 존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One man with God, He is majority.”, “사람들이 많이 찬성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사람이 다수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아도 나는 “아닙니다.”하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 길을 걸어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영혼이 소생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그 힘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마음껏 불꽃놀이 하며 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임하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주소서
좋은 승용차 없고, 멋진 구두 없고, 큰 아파트 없어도, 검정 고무신 신고 다니고, 무명옷을 입고 다녀도 그리스도인은 정의로운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강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한 40분 더 해야 하는데 마치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방학 때 책을 실컷 읽어보고 싶어서 덕적도라는 섬으로 공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문학책을 싸들고 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친척집에 묵으면서 책을 읽었는데 돌아올 때가 돼서 인천으로 오는 배를 탔습니다. 한 달 동안 바닷가에 살다 보니 바다에 풍랑이 심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얀 거품이 일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아저씨, 배가 안 오겠지요?”, “그러게, 이 정도면 못 올 거 같은데?”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배가 오고 있었습니다. 심하게 흔들리면서 왔습니다. 주의보가 뜨지 않으면 배는 계획대로 출발합니다. 인천으로 간다고 해서 그 배를 탔습니다. 가는 중에 풍랑이 더 심해졌습니다. 파도가 배의 이쪽 머리를 때리니까 포물선을 그리면서 저쪽을 떨어졌습니다. 그 배는 250톤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배였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 정도 배면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를 가는데 파도와 싸우느라 보통 때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인천과 덕적도 중간쯤 갔는데 날이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냥 빨리 가면 될 거 같은데 주의보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인천으로 오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천으로 가는 길이나 돌아가는 길이나 거의 비슷한데 상부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보통 그렇게 불합리합니다. 선장이 생각하기에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할 수 없이 배를 돌렸습니다. 진짜 문제가 거기서 생겼습니다. 풍랑이 더 거세져서 배가 뒤집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아래층에 내려가서 구명조끼를 입고 배가 난파될 상황을 대비했습니다. 그때 처음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배 이쪽 끝에서 사람들이 굴러서 저쪽 끝으로 갔습니다. 저쪽에서는 사람들이 토하고 말입니다. “어린 나이에, 태어나서 장가도 못 가보고 무신론자로 이렇게 죽는구나...” 죽고 싶은 때도 많긴 했지만 막상 죽을 거 같은 상황이 되니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을 상황이 되니까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밤 10시가 됐는데 천신만고 끝에 덕적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바다였습니다. 하늘도 새까맣고 비는 안 쏟아졌지만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요만한 불빛 하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등대였습니다. 축전지로 불을 밝히는, 그 항구에서 유일한 등대였습니다. 그 불빛 하나를 보고 수십 척의 배들이 피난했습니다. 어떻게? 안전하게. 아무것도 안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불빛 하나만 있으면 그것을 따라 항로를 삼고 가서 포구로 쑥 들어갑니다. 그러면 파도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배를 부두에 정박하니까 사람들은 “살았구나!” 하며 걸어 나갑니다.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생각이 납니다. 굳이 캄캄한 폭우 속에서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하려면 수천 발의 조명탄을 쏴서 항구를 대낮처럼 밝혀야만 피난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불빛 하나, 그 깜빡이는 불빛 하나를 보고 모든 배들이 항구를 찾아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깨끗하고 의롭게 산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조명탄이 될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건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고 위선적인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빛을 비춰주지 않아서 폭풍 속에서 항구로 대피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등대 불빛 하나가 없어서 그 항구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내 신념대로 산다.”고 할 때 그 사람인 하나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불빛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저런 삶이 인간이 사는 도리구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정의로운 생활과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의 관계는 머리통과 뇌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뇌는 뚜껑을 따 놓으면 숟가락으로 퍼 낼 수 있는 순두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순두부를 여기에 넣으시고 뚜껑을 닫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뚜껑이 보통 단단한 게 아닙니다. 가다가 잘못해서 벽에 쾅 부딪혀서 이만큼 혹이 생깁니다. 피가 줄줄 흐릅니다. 그러나 순두부는 안전합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싸여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회개하고 내일 세상에 나가서 부정직하게 삽니다. 거짓말합니다. 불의한 일에 동참합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은혜를 주실 때의 목적 자체가 정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목적대로 은혜를 사용하면 은혜가 보호되지만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버넬러브” 하게 됩니다. 금방 뭐가 침투해 들어와서 뇌를 손상시키듯이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은혜, 소생된 영혼을 손상시킵니다. 비유하자면, 정의롭게 살려는 마음이 아예 없는 그리스도인은 뚜껑을 열고 골을 집에 두고 걸어 다니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저 위에 2층에서 이쑤시개 하나만 던져서 여기 떨어지면 그냥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명제입니다.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 온전한 사랑이 마지막으로 가는 종착역이 정의입니다. 정의가 사람들 속에 나타난 것이 사랑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경영하는 이 음식점은 절대로 속이지 않는다. 예수 믿는 이 공장은 물건을 못 팔지언정 가짜 물건은 절대 만들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운영하는 병원은 정확하게 진단하고 깨끗하게 병을 고친다. 못 고치는 병은, “제 실력이 안 됩니다.” 깨끗이 인정하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명성이 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사실상 첫 번째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헌신 때문에 이 세상에서 높아지옵시며”라는 뜻입니다. 라틴어로 “생티피케토르”입니다. 그렇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도덕 생활에 변화가 없이 은혜 생활을 계속 하려고 하는 것은 뜬 물에 생수를 붓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소생된 영혼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의롭게 산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정당하게 사용하며 의로운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천국의 상이 훨씬 클 것이라고 믿고 기꺼이 박해를 받겠습니다.”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순결한 남성이라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입맞춤하다가 온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겠습니까? 순결한 사람을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때는 당신이 우리의 독점적인 사랑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스펄젼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겨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 피 묻은 가슴에 있던 사람이 세상의 품에 안기겠습니까? 주님께 입을 맞춘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입을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 끝까지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내가 살다가는 이 삶의 현장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삶인지 보여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희생을 할 각오를 하고 살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을 주시고 권한을 주시고 재능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살려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깊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다시 살려주신 것은 그에게 의로운 길을 걷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로운 길을 걸어가며 인간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그들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되게 하시려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서문교회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땅에서 그렇게 살다가 숨을 거두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