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목회자 세미나 개회예배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7)
녹취자 : 김미현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목회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과 아마 유사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본질이 아닙니다. 자신들은 본질이라고 얘기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저는 한 20여 년 전 성경을 읽다가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성경 구절에서 발견했습니다. 즉, 목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그대로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성경의 유용성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원에 이르게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즉, 사람 됨됨이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함이라 이렇게 크게 분류하면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더 깊은 설명을 요구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성경 구절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의 유용성은 불신자에게 믿음을 주어 구원 받게 하고 신자에게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선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인격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삶의 온전함,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마치 성경 구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아직 디모데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성경에는 소위 명백성의 교리라는 것이 있어서 누구든지 진지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만 하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과 인간이 죄를 지어서 타락한 것과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위해 오신 것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 역사에도 보면 성경을 읽다가 스스로 회심하고 교인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화) 초대교회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야사인지 정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사실은 선교를 못하고 결국은 죽습니다. 그가 조선에 남긴 물건이 성경이었습니다. 그 성경을 남기고 죽었는데 이 성경이 결국은 중국에서 번역한 한문 성경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당연히 말하자면 양놈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지체 높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만 해도 그렇게 좋은 종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이 이것을 찢어서 바름벽에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양반이 이렇게 드러누워 잠을 자는데 모로 잠을 자는데 사람이 이렇게 자다 돌아눕는데 벽에 돌아누울 때 마다 놓여 있는 것이 요한복음을 뜯어서 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도대체 도가 무엇인지 일평생을 연구를 해도 도가 비상도라고 해서 ‘도가 도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를 깨닫는 순간 이것이 도라고 말하는 순간 그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이렇게 배웠는데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내가 도다.”라고 하는가 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스로 성경을 체험하고 중생했습니다. 성경은 그런 놀라운 명료성이 있어서 구원을 줍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나오는 구원의 개념이 그런 일회적인 중생으로서의 구원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편지 받고 있는 수신자는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목회자 디모데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중생으로 대표되는 일회적인 구원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는 일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여정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자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하나 나옵니다.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단어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한번 얻은 구원에서 온전한 성화와 영화에까지 이르는 이 모든 구원의 여정을 지속해 가는데 있어서 절실하게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식 들으셨겠지만 최근 신천지 때문에 한국교회가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한번 거기에 빠진 사람은 이야기가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많은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설명하느냐하면 미혹하게 하는 영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탁월한 사회적으로는 지성인들이 거기에 가서 껌벅 죽고 매혹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다면 성령에 붙잡혔을 때 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랍게 작용하여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계속 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에 입각한 설교와 가르침을 교회에서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믿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아주 중요한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을 삼중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믿음입니다. 두 번째 조금 넓은 의미에서는 주님이 선물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는 복음의 진리, 혹은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행동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니 가만히 있으면 내가 준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믿음이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함께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 그래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가장 넓은 의미의 믿음은 이렇게 주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믿음, 내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정신의 행동, 이것이 삶으로 외현을 확장해 뻗어나가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믿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할 때에 이것은 그런 세 가지 지평을 최대한도로 확장한 그래서 믿음은 구원 얻는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생을 살아가면서 그 믿음의 지평을 뻗쳐나가는 행동으로서의 그 믿음을 포괄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목회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목회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에서 전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전도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또 똑같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레오10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황이여, 선행과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순서가 중요합니다. 사랑과 선행은 절대로 믿음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동반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고자 하는 성향과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은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있을 것인데”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의 목회 사역의 본질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보고 회개하고 믿게 만들고, 신자들에게는 믿음이 계속 새로운 믿음을 갖도록 만들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게 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게 두 번째 이제 온전하게 하는 사역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그랬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고 하는 것은 perfect하다는 뜻이 아니라 telos, ‘다 자란, 이제 성숙한, 어른이 다 된 성장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온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온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맨 처음 창조된 사람이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죄 때문에 잃어버린 것,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셔서 그를 성화시켜서 회복하게 하시고 싶은 것이 두 개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칼빈의 저작에 보면 wholeness, 온전함, whole과 holy가 동일한 어원인 것은 아실 것입니다. 이것을 전일성이라고 얘기합니다. 순전성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성질로 꽉 차있는 상태, 그럼 사람이 사람의 성질로 차있지 무엇으로 차있습니까? 타락한 다음에 인간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야수성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 받은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결국 마지막으로 참으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는 것, 하나님이 맨 처음에 만드신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마귀의 자식 된 상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인간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인간을 그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돌이켜 구원 받고 성화의 길을 걸어서 마지막에 주님이 목표로 하시는 것이 그런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본래의 온전함과 그 다음에 순전함을 회복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렇게 되면 무엇이 될까요?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사람입니다. 그 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일까 하는 그 모본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에게는 인간을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모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어거스틴적인 휴머니즘을 발견하게 됩니다. 파커 같은 사람은 ‘기독교야말로 최고의 휴머니즘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왜입니까? 우리 인간은 늘 가면을 쓰고 사는 존재들이고 그리고 억압받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주시지 않은 엄청난 짐을 지고 그리고 자유를 잃어 버린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시대의 도덕이나 관습, 그리고 잘못된 세계관과 편견, 그런 모든 것에 의해서 우리에게 얼마든지 그릇되게 강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그 모든 것을 벗겨주는 것입니다.
(예화) 몇 해 전에 이란 선교에 깊이 개입하던 목사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동창목사님 이셨는데 이분 이야기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란에 지하교회가 3200개가 있다고 합니다. 잡히면 사형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목숨을 걸고 믿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 마호메트교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가페입니다. 그런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저는 어디까지 진실로 들어야 하는가 했는데 우리 교회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어떻게 경험했느냐하면 아프가니스탄에 사고 났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갔습니다. 불과 그 사고가 한 시간 반 차이로 난 것입니다. 우리가 오고 한 시간 반 있다 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 우리가 선교를 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가서 일주일 내내 우리로 말하자면 시립 탁아소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잘 차려서 동네 사람 먹여주고 마지막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밤을 가졌습니다. 고전무용도 하고 부채춤도 추고 사물놀이도 하고 그랬습니다. 부시장이 우리 떠나는 날 우리 지체들을 위해서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시장이 하는 이야기가 여자인데 “정말 이상합니다. 우리나라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피부색깔도 다른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일주일 동안 와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있어 주었는데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이 사랑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우리에게는 없는 이 사랑이 한국에서 온 이 사람들에게는 있는데 이 사랑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날 밤에 숙소에 들어가 있는데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 청년 두 명이 우리 교회 지체들 있는 숙소에 와서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나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사형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찾아와서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모슬렘이 어마어마하게 열렬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한국 교회의 위선적인 신앙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양만 있지 속에는 완전히 공허해서 젊은이들은 형식만 남아있지 이 속에는 우리가 말하면 고백은 있는데 경건이 없는 것입니다. 모슬렘적인 경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그러면서도 그렇게 미친 듯이 예수를 믿고 중국은 하루에 20만 명씩 회심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20만 명이라고 합니다. 요즘 아니고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매일 20만 명입니다. 그러면 300일이면 6000만 명입니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회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말도 안 되는 속박, 여자가 운전한다고 린치를 가하고 그 다음에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 안한다고 코를 잘라버리고 폭력에 못 견뎌서 가출했다고 귀를 잘라버리는 그런 야만적인 곳에서 그 사람들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중국은 기독교를 엄청나게 무서워합니다. 시진핑이 들어서고 나서 엄청난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안 믿어지실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3개월마다 한 번씩 비자를 갱신해야 합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개방을 하고나서 어떤 지도자도 강택민도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후진타오도 그렇게 안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얼굴은 웃으면서 어마어마하게 기독교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기독교에는 인간을 성경이 아닌 것들이 인간을 얽어매고 있는 것을 끌러 버리려고 하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하다못해 아파트가 모여도 투표해서 동 대표 뽑고 그 다음 학교가면 1학년 때부터 선거해서 뽑습니다. 어디에서 배웠습니까? 교회에서 배운 것입니다. 선교사들을 통해서 교회에서 배운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제국주의에서 민주주의로 한 번에 넘어오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배웠던 그리고 회심했던 이승만 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파괴적인 한국에 있는 좋은 제도를 비롯해서 양반이 되면 축첩이 기본이었습니다. 전부다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 누구의 힘입니까? 기독교의 힘입니다. 이렇게 칼 한 자루 안가지고도 사회를 다 뒤집어엎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런 것들이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 못되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회가 하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 선한 분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절대적인 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확신 있게 가치를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베라렐라기온이라는 책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최고선이 동기가 되지 않은 선행은 참으로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주는지 모른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그러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 사상만이 이웃이 무엇을 해야지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경의 기능을 계승하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 역할을 실질적으로 계승하여 사람들 속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느냐를 네 가지를 제시하는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입니다.
첫 번째, 교훈은 티칭입니다. 중립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풍부한 지식을 전해주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고 그 지식을 통해서 지혜를 얻게 하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줍니다. 최악의 지도자는 아는 것이 없는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가르칠 것이 풍부해서 ‘일생을 설교해도 결국은 다 못하고 죽는구나.’라고 할 정도로의 풍부한 기독교의 가르침의 내용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자료는 당연히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한 12년 전에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성도 한분이 등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굳이 담임목사님하고 밥을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랐습니다. 하나는 이 분은 목사님이셨습니다. 두 번째는 한국방송공사 KBS의 고위직 임원이었습니다. 세 번째 놀란 것은 이 사람이 목회를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교회가 안 되어서 문을 닫고 고민하고 방황하다 열린 교회 설교를 듣고 목회를 접고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해야 겠다 생각하고 목사인데 우리 교회에 등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보십시오. 성경을 3000절을 암송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300절 암송하시는 분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100독을 했다고 합니다. 100독을 그때까지 100독을 한 것이 아니라 100독을 하고 목회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성경 100독에다가 3000절을 암송했으니 저한테 시범을 보였습니다. 입을 딱 떼만 죽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성경으로 목회한다.’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 사람은 목회에서 대박이 터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다 하다가 교인 3명으로 목회를 접었습니다. 교인들 다 설득해서 가라고 하였습니다. 먹고 살 돈은 있었습니다. 왜 성경을 100독을 하고 3000절을 암송했는데 목회가 풍부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경영능력이 부족하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분이 공사에서 고위직 임원까지 하신 똑똑한 분인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밭입니다. 그리고 신학은 쟁기입니다. 쟁기로 밭을 잘 갈 때 쟁기가 밭을 논으로 만들 수는 없고 씨 뿌리지 않은 땅을 갈아엎었다고 해서 싹이 나게 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은 없지만 그러나 그것을 딱딱한 땅에다가 씨를 던져놓고 간 사람과 쟁기로 그것을 갈아엎어서 밭을 고르게 한 다음에 씨를 뿌린 사람하고의 수확을 생각해 보십시오.
풍부한 가르침의 내용은 두 가지에서 오는데 하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일평생을 공부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가르침의 풍성함은 지식의 수집한 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삶에 달려 있습니다. 교인들이 여러분 설교 듣고 집에 가면서 “오늘 설교 너무 풍성했어.” 그 이야기는 정보가 깨알처럼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꽉 채웠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교양론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모두스 비벤디 꼬삐아 도켄디, 모두스는 방식이고 비벤디는 삶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꼬삐아 도켄디, 가르쳐야 할 양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면서 눈물 흘리며 산 사람들은 어디 펴던지 전도 설교하라고 하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한 사람은 기도, 말씀을 따라서 목회자가 살려고 할 때 꼬삐아 도켄디, 가르침의 양은 풍부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책망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설교에 책망이 있을까요? rebuke라고 하는데 강력하게 꾸짖어서 양심의 칼날 앞에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책망입니다. 칼빈은 유명한 책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예화)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하겠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뺀질뺀질하고 회심을 안 하던 자매였습니다. 그러다가 직장 다니는 핑계를 대고 교회도 잘 안 나왔는데 직장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구역에서 한번만 나오라고 하니까 자매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구역예배를 안 나오니까 이 사람들이 나를 신앙이 없다고 보겠지? 이 교회가 칼빈을 좋아한다며? 내가 구역예배에 가서 본 떼를 보여주어야지.’하고 도서관에 온 것입니다. 칼빈 책 빌려 달라고 해서 미가서 설교, 예레미야 설교를 읽었습니다. 미가서 설교를 읽는데 읽다가 이 자매가 펑펑 울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예전에는 ‘김남준 목사님은 왜 자기돈 들고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저렇게 관리를 할까? 저렇게 심하게 야단을 칠까?’그랬는데 칼빈을 설교집을 읽고 나서 ‘우리 목사님은 정말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다.’ 칼빈은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잡아먹을 듯이 야단을 칩니다. 이것이 칼빈의 목회의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유구한 의미를 다 해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강력하게 책망했을 때 교회에 그런 부흥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일 아침 우리도 한번 따라해 보면, 교회 가서 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세 번째 바르게 함, 잘못된 것을 올바른 위치에 놓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의로 교육함,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 율법에 맞게끔 살아가도록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이런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그 목적을 우리의 목회 사역을 통해 계승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피곤하실 것 같아서 이것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만 여기에는 우리의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눈뜨게 하는 엄청난 진리들이 책 한권을 써도 다 쓸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분량이 들어있습니다. 많이 묵상하시면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목회 사역이 주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계승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십시다. 함께 고민하며 나아가십시다. 우리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