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어디서 오는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23:2-3)
녹취자: 백지영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 성경 본문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막의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약시대의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었고 중앙에 있는 성전의 성막부분은 12평짜리의 방과 6평짜리의 방으로 구획 지어져 있었습니다. 작은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고 큰 방을 성소라고 불렀습니다. 텐트 형태로 되어 있는 그 부분은 물 돼지가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바깥에서 어떠한 빛도 성막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막에서 이 등잔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그 불빛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교회가 무엇에 의해서 운영되어 지는가”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빛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불빛으로써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분별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규례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라고 하는 것이 매우 전문적이고 특수한 사역이며 더욱이 한 시대의 문화 속에 펼쳐지는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학만 공부할 것이 아니요, 어떻게 목회를 해야 진리의 빛이 효과적으로 교회 안에서 보존되며 성도들이 어떻게 훈련되고 목양되어야지만 교회 안에서 배운 진리를 따라서 이 세상에서 올곧게 살게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치열하게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철없던 시절에 교회를 개척하고 20년 가까이 목회해오면서 느끼는 것은, 어떤 목회자들의 교회를 바라볼 때 ‘저것은 아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만이 아니라 목회가 아니라 장사를 해도 저렇게 해서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지혜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목회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고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테니스 선수가 우아하게 서브를 넣기 위해서, 그 아름다운 폼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3만 번의 연습이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목회의 기술이 충분히 습득되지 않은 상태로 실험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회의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시대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18년 전 교회를 개척하던 시대와 지금이 어떠하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완전히 다른 세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공부할 것이 아니요, 이 시대의 정신이 무엇인가도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과 이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시대의 정신이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을 대적하게 만들고 진리를 거절하게 만드는지를 탐구해야 합니다. 제가 데이비드 웰스 교수 같은 분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개혁신학을 했으면서도 사회를 분석하는 탁월한 안목으로, 개혁교회가 왜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기독교가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지를 기가 막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개혁주의 목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외면하지 말아야 할 현실인 것입니다. 왜 아바타 같은 영화가 이렇게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어떠한 암시를 받고 있는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우는 탈근대 사조가 우리 속에 스며들어오면서 문학, 예술, 사회, 정치, 경제, 심지어는 건축, 조경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브라우보의 수학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전통적인 기준점들을 허물고 해체주의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우리가 그러한 사고방식에 얼마나 쉽게 오염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치 교회가 기업을 경영하는 것 같은 논리에 의해서 성장한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이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모든 목회에 대한 학습 - 시대에 대한 연구, 교회경영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들 - 이 모든 것들은 한 가지가 있을 때에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목회자는 이 진리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는 구도자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캄캄하게 빛도 들어오지 않는 성막에서 등잔불을 밝히고 그 등잔불의 불빛을 받으며 주님을 섬겼던 제사장들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등잔불은 바로 계시의 빛, 진리의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분은 이 계시의 빛이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왜곡되게 전파되어서 잘못 해석되었으며, 그로써 어떠한 삶들을 야기했는지를 고민하면서 기독교 신학자이면서도 이교(異敎)들을 공부했습니다. 심지어는 사서오경까지 모두 독파하면서 중국 철학에서 이 계시가 어떻게 굽었는지, 메시아사상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창조주 사상이 어떻게 그들의 세계관에 의해서 굽어졌는지를 해명하였습니다. 인류역사 전체의 유산들을 통해서 참 하나님에 대한 증거들을 찾고 구속의 사실들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중요한 출발은 바로 교회 안에서 이 등잔불로써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는 뛰어난 행정가일 수도 있고, 경영가일 수도 있고, 은사 충만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학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리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한번 오늘 우리 조국 교회의 형편을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 과연 이 세상 사람들이 목회자라고 할 때 떠오르는 첫 번째 인상이 ‘구도자’라는 생각일까요? 정말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는 ‘진리를 찾아가는 공동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요? 스펄전 목사가 태븐아클쳐치에서 설교를 했을 때, 그 둥근 지붕을 보면서 사람들이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불신자들까지도 “거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울려 퍼지는 곳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설교를 세상에서 가져올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성막에서 진리의 불빛을 탐구함으로써 여기에서 진리를 캐고 탐구하고, 그래서 진리를 터득하고, 이 진리 속에서 설교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의 빛을 얻기 위해 갈망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목회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는 크기에 있거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나라처럼 오는 것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할 것이 아니라 애굽이나 로마, 중국을 선택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경륜하심에 있어서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두 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스라엘로 충분하였습니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강하게, 더 높이 이것은 바벨론의 가치입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진리의 공동체로서 어두운 세상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가야 할 길과 믿어야 할 바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놓으신 섭리인 것이고 계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간절하게 씨름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교를 위한 씨름이 아니요, 자신이 먼저 진리의 사람이 되기 위한 씨름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늘 성경을 펼치고 맞닥뜨려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여러분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그 진리도 과거에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하는 그 진리 중 한 조각일 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는 역사를 탐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했던 시대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 누렸던 선조들의 신학의 발자취를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탐구해야 합니다. 개혁신학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는 것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목회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개혁자들뿐만 아니라 개혁자들 이후에 개신교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개혁파정통주의를 공부하셔야 합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들이 가능했던 중세의 철학은 왜 빼놓을 수 있겠으며, 그 모든 교회를 세우는 터전을 놓았던 초대 교구의 사유(思惟)는 왜 제외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진정한 개혁주의자는 에고이스트로서의 개혁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의 장구한 유산들을 섭렵하고 이해하는 폭넓은 지적인 기반을 가진 개혁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개혁신학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도그마를 깊이 경계해야만 합니다. 개혁주의 안에 있는 그 유장(悠長)함과 다양한 스펙트럼들을 함께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부합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진리에 대한 확신은 갖되 아집으로 부터는 자유로운 유순한 지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빛이 주님의 교회 안에 가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짐승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고 세상에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이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목회자는 일주일에 한 번 인도하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 세상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진리들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로부터 어긋났던 삶을 참회하고 회개 속에서 그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기능들을 교회가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터득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온 신명을 바쳐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마음은 탁월한 지성이나 놀라운 지능이 아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장 훌륭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길,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을 향하는 마음이니, 영원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영원한 진리를 이해하고 터득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인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 시기, 다툼, 끊임없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이런 것들로 마음이 얼룩져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찾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진리를 탐구하여 진리로 가득 찬 교회를 이루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 불빛은 등잔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름이 들어갔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기름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는 단순한 지식의 목회가 아니라 성령의 목회여야 합니다. 성령의 목회라고 하는 것은 단지 성령의 커다란 능력이나 은사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서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기름통에 기름이 가득 채워졌고, 그 기름은 심지에 불붙여 그 불꽃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데 자신을 소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밝은 빛으로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은 진리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성령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구할 것이 아니요,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놀라운 성령의 더 큰 은혜를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강의와 다릅니다. 강의는 지적인 설득을 목적으로 하지만 설교는 그 사람 자신을 바꾸어 놓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무엇인가 그 사람 안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하고 이것은 초월적인 힘의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권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진리의 말씀에 불붙여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할 때에도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지만 진리를 제대로 탐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신학을 한 사람들의 황폐함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성(理性)을 좇아가고 신앙을 버리게 만드는 모든 사변(思辨)적인 설교도 결국은 거기에서 온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아무리 단순하게 복음을 선포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어떠한 사변적인 설교보다 어려운 설교가 될 것이고, 아무리 사변적인 설교라고 할지라도 위에서 성령이 함께 하셔서 진리의 올바른 국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헌신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설교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탁월한 성령의 은혜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가운데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설교자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여 내면의 세계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진실한 자기 체험 속에서 모든 설교에 필요한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몇몇 있습니다.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 인도자, 진실한 설교 청취자였던 적이 없는 설교자, 당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장, 열렬한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기도 인도자, 이런 사람들이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가르쳐야 할 좋은 것들은 자기 안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이지 자기 바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자는 그가 인도하는 기도 모임을 가장 성령이 함께 하시는 모임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은 언젠가 신학생들에게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참 강의를 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저는 오늘 성령에 의해 불붙여진 기도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에게 강의하였는데 우리 모두 1층으로 내려가셔서 오늘 강의의 내용을 체험하십시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내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유명한 설교자들을 몇 분 만났습니다만 그분들 중에 집중된 좋은 설교 청취자는 의외로 소수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열렬한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데 담임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열렬하게 기도회를 인도해야 하고, 좋은 설교 청취자였던 적은 없지만 설교자가 되었기 때문에 열렬하게 설교해야 하고, 진실한 예배자였던 적은 없으나 예배인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인도하는 예배는 어느 예배보다도 신령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시작된 목회가 아닌 것입니다. 저 영원의 지성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울리는 영혼의 고고한 외침이 있는 저 성소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을 탐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직업행위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설교하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칠 그 무엇을 찾는 것은 너무나 직업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속으로 들어가 자기 안에서 먼저 역사를 일으켜 자신 속에서 토해져 나오는 신앙의 고백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오늘은 ‘나의 복음’이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마치 자신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말씀인 것처럼 증거하는, 칼빈이 이야기했던 바 설교와 설교자 사이에 있는 ‘패밀리에르티’(familiarity)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에 대한 친숙성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될 때, 그가 전하는 진리는 삼인칭의 진리가 아니라 일인칭의 진리가 되고 남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한 번 물어봅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오늘 나의 설교를 들은 사람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성경 속에 얼굴을 묻고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한 마지막 묵상의 기억은 언제입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극대화 될 때, 우리의 사역 속에서 끊임없는 위선과 허위와 거짓을 낳는 것입니다. 어떤 영의 능력보다도 위대한 것은 진리의 능력이고 진실함의 힘인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모든 것이 자기의 깊은 내면의 세계 속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눌해도 괜찮습니다. 유려한 수사(修辭)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 속에서 느낀 것을 표현하지 못해서 가슴을 치고 답답해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진실함이라는 덕목을 타고 성도들에게 가슴 속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체화(體化)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 성령의 감화 없이는 누구도 설교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 진실한 성령의 기름 탱크로 가득 찬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드릴 말씀은 많지만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름을 조달한 방법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해 네게로 가져오게 하라.” 여기에서 감람은 올리브를 가리키는 것이고, ‘찧어낸’이라는 이 단어는 히랍어로 ‘까띠뜨’라는 단어인데, ‘까따뜨’라는 동사에서 왔고, ‘까따뜨’라는 동사는 ‘비트’(beat), ‘히트’(hit), ‘크래쉬’(crash)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직역을 하자면, ‘깨뜨려낸 기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리브유를 착유(窄油)하는 당시의 풍습에 대해서 조금 언급을 해야 합니다. 올리브유를 조달하는 보다 일반적인 방법은 압착기에다 놓고 짜는 것입니다. 연자 맺돌 같은 데다 놓고 소나 말로 돌려서 올리브열매를 다 짓이긴 다음에, 그것을 프레스에다 놓고 세게 눌러서 압착을 하는 방식으로 기름을 짜낼 때 가장 많은 기름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성막에 등잔을 밝히도록 명령하시면서 기름을 제조하도록 가르쳐 주신 방법은 그런 일반적인 기름 제조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까띠뜨’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이것을 증명하는 바, 절구 같은 데 놓고 공이로 올리브 열매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깨뜨려지면서 기름이 흘러나오는데 그 기름을 일일이 채집하는 것입니다. 프레스에 눌러서 짜면 기름은 많이 얻을 수 있지만 기름과 함께 불순물들도 따라서 나옵니다. 그래서 불을 붙일 때 불이 밝지를 않고 순결한 기름이 아니기 때문에 검댕 그을음이 계속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름은 하나님의 성소를 밝히기에는 적합한 기름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일반 민가에서는 모두 이런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음식을 해먹고 상처에 바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쓰여 지는 기름은 열매를 깨뜨려 거기에서 채집한 기름을 모아서, 그래서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퓨어한(pure) 오일로써 불을 붙여서 성소를 밝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자, 이러한 설명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가 설교자의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로 들어오기도 전에 교인들을 변화시키고 남을 바꾸어 놓는데 이바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치 여기에서 물건을 받아다가 저기에서 물건을 파는 것처럼 그렇게 성경에서 진리를 따오고 그리고 그 진리를 채집하는 순간마다 계속해서 어떤 교인들을 생각합니다. 기도에 관한 진리들을 채집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을 생각하고 교회의 질서에 대한 진리들을 채집하면서 말 안 듣는 교인들을 생각합니다. 성결한 삶에 관한 진리를 채집하면서 불결한 교인들을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조제된 설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토해 놓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라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잠잠할 수가 없게 하는 어떤 증언이 뼈 사이에서 골수로부터 우러나왔던 것이 선지자의 경험이었고 사도들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자신의 복음’이라고 담대하게 말했고, ‘나의 복음’이라고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어떤 이견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신의 피 속에서 용해되어 골수에까지 사무쳤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속에서 먼저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바꾸고,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게 하고, 자기 안에 있는 거룩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뼈까지 사무치게 하고, 이것이 새로운 유전자가 되어서 자신을 통해 바깥으로 토해 내치되 잠잠할 수 없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이것이 바로 설교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설교자가 짧은 한 두 마디의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심오하게 움직여 저렇게 믿고 저렇게 살게 되도록 할 정도의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입으로 흘러나오기 전 잔인하리만치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그 말씀에 의해서 설교자가 깨뜨려지고, 거기에서 자아가 깨뜨려지고, 자기가 처벌되고, 심판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영적인 변혁들의 고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진리의 말씀을 위탁받은 사람으로서의 증언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설교자인 우리의 삶과 얼마나 먼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는 쉽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그 설교에 합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매주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그 말씀에 의해서 먼저 자신이 감람나무 열매가 깨뜨려지듯이 ‘까띠뜨’된 설교자로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특별히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가르침의 풍부함은 바로 그의 사람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그의 사람됨은 어떤 방식의 삶을 살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트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의 방식은 가르침의 양을 결정한다.” 삶의 방식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뜨려져 걸어가야 할 삶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풍부한 삶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4, 5학년 된 주일학교 학생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심을 하고 난 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십자가를 설교하실 때도, 전도사님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였다고 설교를 하실 때에도, 나는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생님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가르치시며 눈물을 흘리실 때, 그 복음은 제 마음 속에 믿어졌습니다.”
그것입니다. 능란한 설교와 현란한 수사 그리고 사람들의 이성을 거의 실신시킬 정도의 정교한 논리에 의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초월적인 역사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은혜와 영적인 감화는 인간의 이성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인격 위에 부어지고 듣는 사람의 인격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객관적인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완벽한 친밀성을 가진 진리의 말씀으로 증거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그 진리의 말씀 앞에 깨뜨려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테루툴리아누스는 “나는 이 세상에 회개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에 누룩처럼 번지고 있는 윤리적인 타락과 들려오는 수많은 추문들, 교회가 교회의 본분에 헌신하지 못하는 이 일그러진 모습들은 제도와 방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회개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있는 설교자, 자기가 깨뜨려지는 교인들, 그리고 자기가 깨뜨려질 때에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그 친밀한 사랑과 은혜에 대한 경험,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목회 속에 흘러넘치게 된다면 아마 우리 교회의 모습은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 시대의 설교자로 부르셨고 부족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을 불러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겸비한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공을 꿈꾸지 말고, 큰 교회를 꿈꾸지 말고, 유명해 지는 사람을 꿈꾸지 말고, 저명인사가 되기를 사모하지 말고, 무명이라도 좋으니 진리에 의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 한마디의 설교를 남기고 죽어도 정말 자기 깨어짐 속에서 흘러나온 그 진리의 말씀을 유언처럼 외칠 수 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역자의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삶의 족적은 그의 수명의 길이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남긴 수많은 설교의 편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그 설교가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또 다른 영혼을 깨우치는 외침이었는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은 세상 끝날 까지 진리를 말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설교하는 요령을 배우기 전에 먼저 진리의 사람이 되어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바로 그런 진리를 찾아가는 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므로 개혁주의의 유산을 사랑하되 개혁주의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개혁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친 풍부한 진리의 삶과 진리의 증언들을 사모하여 이것들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풍성하게 하고 교회를 풍성하게 함으로써 어두운 시대를 진리의 빛으로 비추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깊이, 이 올리브나무의 열매처럼 주 앞에 깨드려져 기름을 내는 주의 사람들, 그 기름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이 더욱 풍성하게 타오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