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TS 특강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막 6:18-20)
녹취자 : 허혜숙
신학공부는 참 어렵습니다. 모든 공부가 그러하겠지만 그저 안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할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신학공부이고 제대로 하려고 하면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습니다. 더욱이 이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 어떤 태도로 훈련을 받는가에 따라서 목회는 아주 현저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의 신학적 입장이 교회의 신학적 입장이 되고 목회자의 인격이나 태도가 교회의 모든 형태를 결정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학과정에서 연단을 받고 공부를 하는 것은 지도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어렵고 고통이 많은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지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도자는 공부도 잘해야 하겠지요. 무지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지도자가 되는 것은 그의 지적인 능력이나 육체의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크기는 그의 정신의 크기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남다른 정신의 세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정신의 크기는 그리고 방향은 그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격은 그의 정신의 나타남이고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결국 인격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그 정신의 크기를 키워가는 과정입니다. 지도자는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똑같은 준비의 길을 걸어서는 결코 지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어떻게 신학훈련을 받고 신학의 길을 걸어가느냐 이것에 의해서 미래에 그의 사역의 모습과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례요한에 대한 기록들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상당부분을 할애해서 세례요한의 인격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 악한 헤롯도 이 세례요한을 두려워하였는데 그 사람의 인격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으로 세례요한과 정적의 관계에 있었지만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세례요한의 인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형성된 인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연단을 받은 것처럼 우리 자신도 이런 연단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는 인격으로 성숙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앞으로 지도자가 될 터인데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일을 할 것이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신학의 도상에서 여러분들이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가지 않으면 앞으로 여러분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목회를 할 때 좋은 지도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우리들이 제일 먼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목회자로서의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이끄는 기술이나 혹은 형태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 역시 그 사람이 누구냐에 많이 달려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리더십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을 보면 리더십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한 가지는 소인배와 같은 리더십입니다. 그런가 하면 군자와 같은 리더십이 있습니다. 소인배와 같은 지도자들은 우두머리가 되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공동체가 가진 목표를 따라 가치를 정하는 대신 자신이 만족을 누리는 대로 공동체를 이끄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인배 형 리더십입니다. 이런 리더는 항상 사람들을 통합하기 보다는 편을 가르고 사람들 사이에 차이점을 부각시켜 해를 만듭니다. 그래서 분열이 그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대의를 위한 분열 같지만 대부분 자신의 이기심과 자기사랑에서 비롯되는 분열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군자 형 지도자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통합하고 연합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통합하고 연합하는 일에 힘쓰게 됩니다. 그래서 소인배는 일하고 나면 사람들이 나뉘고 찢어지지만 군자는 일을 하고 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보람을 느끼고 협력하며 더 큰 일을 위한 비전을 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한 사람의 정신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라고 하는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섀클턴은 영국의 탐험가였습니다. 1800년대에 북극을 탐험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조난을 당했습니다.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그 혹한의 바다를 1200km나 항해하여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그 때 죽음의 항해가 될 그 구조요청의 길을 섀클턴은 대원들을 안전한 곳에 남겨두고 자신이 직접 가기로 하였고 작은 배를 타고 항해를 떠날 때 남아있는 대원들 중 문제를 일으키는 대원들을 모두 데리고 그 죽음의 항해를 자청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더라도 남아있는 대원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풍랑과 사투하며 1200km의 항해에 성공했고 몇 달 뒤 구조대원과 함께 섀클턴 일행은 안전하게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책이 몇 달 전에 발간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며 미국과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한 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기를 버릴 줄 아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신학생 시절부터 아주 몸에 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뼈 사이에 노예의 유전자가 배여 있어서 무엇을 하든지 남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때 그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크고 위대한 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헤아리고 그들을 위해서 준비하는 태도, 그것은 사소해 보이지만 반복되는 그러한 섬김은 앞으로 그가 어떤 정신으로 목회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도 남을 배려하고 그리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용기와 결단은 세심함과 사랑을 겸비할 때 빛나는 것입니다. 섬세함과 사랑의 배려가 없는 지도자의 용기와 결단을 그를 따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리더십과 함께 두 번째 생각해야 될 것은 예절입니다. 예절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를 존중하고 높여주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노회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양회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죠? 그렇게 교회가 있는데 그 중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전도사 한 사람을 채용을 했습니다. 여전도사였습니다. 그런데 별로 사역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영혼을 사랑하고 사역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여전도사는 항상 목사님과 함께 심방을 갑니다. 그러면 심방이 끝나고 나면 교인들이 음식을 차려서 대접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목회자들을 일반적으로 존경합니다. 목사님이 자주 심방을 오시는 것도 아니니까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을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음식에는 특별하게 좋은 음식이 있을 것입니다. 중국요리도 그럴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일단 어른이 제일 먼저 수저를 들어야지만 다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특히 아주 중요한 요리에는 어른이 손을 대기 전까지는 아랫사람들이 손을 대지 않은 것이 한국에서는 예절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 이었습니다. 항상 심방을 갈 때마다 사역은 잘 못하면서 먹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생선 요리 같은 것을 아주 예쁘게 꾸밉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목사님은 시작도 안했는데 제일먼저 생선요리를 공격을 해서 확 허물어버립니다. 그것을 목사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런 일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여러분도 잘 기억을 하십시오. 심방을 가면 항상 목회자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막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심방하는 목회자와 심방을 받는 교인이 대화를 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심방에 동행한 사람들의 예절입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이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 이렇게 묻고 싶은데 이 여전도사가 다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소외가 됩니다. 이런 것들은 질서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 집이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60년 전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고 있던 다른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저도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안 믿는 가족들이 교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이 오셔서 예수를 믿으라고 조금만 잘 이야기를 해 주면 모든 사람이 교회에 갈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비록 불신자 집안이었지만 열심히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김치도 담그고 고기도 사오고 그래서 정말 맛있게 점심을 차렸습니다. 심방이 끝나고 점심을 내 왔습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아주 은혜로웠습니다. 그리고 밥상이 나왔습니다. 화기애애하게 둘러 앉아 모두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밥을 먹고 배가 부른 목사님은 이제 벽에 기대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젓가락을 집어서 이빨을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은 아주 최악의 예절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계속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가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다 다리를 쫙 벌리고 가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토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복음화가 20년 연기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차라리 심방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훨씬 더 빨리 우리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목사들의 수준이 저렇게 저급 하구나 라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우리 가족이 그 때 예수 믿을 뻔하다 20년이나 예수를 안 믿게 된 이유를 자기의 그 예의 없는 태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목사님을 따라온 운전기사였다면 그 사람 때문에 예수를 안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버릇없는 운전기사가 따라다니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교역자들에게 항상 이야기합니다. 양적이고 특별한 가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가치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능력 있고 신령한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일반적으로 교양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커다란 호텔 커피숍에서 목사님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목사님이 대화를 하다가 말고 갑자기 하얀 냅킨에다가 커피 프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커피 프림으로 자기 구두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카펫트에 프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커피 프림으로 구두를 닦으면 윤이 잘 나고 가죽도 오래 쓸 수 있어’ 아주 야비한 태도입니다. 너무 예의 바르지 못한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교회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인이 신앙생활을 잘 못하기에 상담을 하는데 그 사람은 교회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 할수록 그 사람은 더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 목회자는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했더니 이 사람이 경청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잘 듣는 줄 알았는데 한참 듣고 있던 교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좀 떨어져서 이야기 해 주실래요?’ ‘왜요?’ ‘입에서 냄새가 너무 나거든요?’ 제가 전 세계 어디에 가든지 필수 휴대품입니다. 저는 누구를 만나든지 가글을 하지 않고 만나는 법이 없습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아름다운 교훈을 준다고 하더라도 입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그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항상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화려하고 사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정결하고 어느 사회에 내어다 놓든지 존중받는 시민으로서 신사와 숙녀가 되어야 합니다.
몇 해 전 지방에 있는 어느 신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를 꼭 만나고 싶다는 학생들이 서울로 올라 갈 테니 목사님을 뵈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간곡한 페이퍼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서가 안 된다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쁜데도 시간을 내 주었습니다. 50km나 되는 먼 길을 차를 타고 김 목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중국에서는 별로 유명하지가 않지만 한국에서는 유명합니다. 그래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자매는 결혼한 자매인데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막 떨었습니다. 왜 떠느냐고 했더니 꿈꾸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학생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 한 마디만 해도 전부 다 노트를 꺼내서 열심히 적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아주 공부 잘하고 똑똑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고 여기에 오신 교수님들도 대부분이 그런 학교입니다. 총신, 고신 모두 다 공부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는 저 지방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학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항상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항상 유지합니다. 그래서 같이 대화도 하고 다과도 나누고 질문도 받고 서재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보고 싶고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는데 그 중에 한 학생이 추리닝을 입고 왔습니다. 그것은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예의 없음입니다. 어른을 만날 때에는 항상 정장을 하고 혹은 정장 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정한 복장으로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는 운동화를 신고 온 것입니다. 제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참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신학생 때에도 저렇게 예의가 없는데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목사님 예의가 없으시군요.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신사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목회자와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더 걱정이 되지요. 지적해서 혼을 내주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처럼 예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나는 교인들은 아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도 있지만 혹은 아주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는 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교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검소한 것은 흠이 아니지만 예의 없고 야비하고 그리고 촌스러운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런 것에 늘 신경을 써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우리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패션에 대해서도 가르쳐줍니다. 목회자의 헤어스타일은 어떤 것이 좋을까? 그리고 옷차림새는 어떤 것이 좋을까? 그리고 어떤 사람을 불러내서 세우고 왜 이런 옷차림은 잘못되어 있는지 색깔과 모양의 조화 이런 것들도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교회의 목회자의 아내가 20명쯤 있는데 그 자매들이 늘 공동으로 모입니다. 그 때에 항상 빼어놓지 않는 특강이 사모의 차림새에 대해서입니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경험들을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처음 열린 교회 사모로 오면 저 시골사람 같다가 6개월쯤 되면 도시 사람으로 바뀝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비싼 옷을 사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행하는 모양과 색깔 이런 것들과 머리모양 같은 것들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많은 배려와 그리고 준비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입사를 했습니다. 입사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차림새가 그게 뭔가?’ 그랬더니 이 청년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대답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랬더니 면접관이 대답했습니다. ‘너희 하나님은 중심만 보시지만 우리 회사는 외모도 본다,’ 교인들이 깊은 신앙심으로 우리의 중심만을 보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런 강의가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교인들은 중심도 보지만 외모도 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로서의 인격은 오랜 세월동안 인내를 통하여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고린도전서 13장을 기억할 것입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은 사랑의 속성을 말했습니다. 가장 반복해서 말한 유사한 사랑의 속성은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 충동적이고 폭력적이고 독선적이던 젊은이 사도바울이 사랑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속성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말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사랑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혹은 그것을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이 없을 때에는 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사랑이 생기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견디기 힘든 것을 참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는 그것을 참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밥을 열심히 먹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참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퍼지도록 잠을 자는 것을 가리켜서 잠자기를 참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참고 싶은데 까지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참음은 참기 싫고 참을 수 없는 시점에서부터 겨우 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목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회란 마음에 눈물이 가득한 것’ 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에게 뒤따르는 끊임없는 인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통이 무엇일까요? 고통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거기는 고통이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엄청난 인내심을 갖지 않으면 결코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 교회로 옮기고 나서 인간도 못 되었는데 목회 지를 옮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뚜기처럼 늘 사역 지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 좀 더 쉽고 조건이 좋은 곳으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목회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할 말이 많아도 그것을 참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약점도 있지만 때로는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때 변명하고 오해를 해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억울하게 오해받는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그런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받는 오해를 해소하여야 하겠는데 때로는 오해하게끔 내버려둡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오해를 충분히 해명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을 밝혀서 몇 사람을 나쁜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내가 오해를 받으면 나 하나만 참으면 끝나는데 내 오해를 풀기위해서는 이 사람이 잘못 말했다는 것, 이 사람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서 나를 비난하던 사람이 저 사람의 잘못을 보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이 나는 존경하고 사랑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피해보고 끝날 일이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의 피해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존경하고 인정받고 싶지 오해받고 무시 받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체를 생각하며 참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크지도 않고 교인 백여 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결혼하지 않은 자매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자매가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점점 배가 불러온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것입니다. 그 정도 되면 웬만하면 교회를 떠날 텐데 그녀는 왜 그런지 씩씩하게 교회에 나왔습니다. 나중에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커지니까 교회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구냐? 우리교회 청년인데 왜 결혼도 안했는데 아이가 생겼느냐? 그래서 결국은 교회에서 재직 회에서 그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아이가 누구 아이냐?’그랬더니 아 자매가 목사님 아이라고 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래 전에 부인이 돌아가시고 혼자 기거하시면서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이 자매가 가끔 교회에 가서 목사님 빨래도 해 드리고 밥도 해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온 교인들이 믿어버린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목사님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쫓겨났습니다. 그 자매는 출산을 했고 낳은 그 아이를 목사님께 줘버리고 목사님은 퇴직금도 없이 그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월이 5년 정도 흘렀습니다. 무슨 일인지 그 자매는 그 후에도 계속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가 부흥회 때 은혜를 받고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때 그 아이는 목사님 아이가 아니라 목사님을 내 쫓으려고 그렇게 괴롭히던 어느 유부남 집사의 아이였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온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집사님들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전국에 수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강원도에 있는 어느 탄광에서 5년 동안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광부 일을 해서 이 아이를 기른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마 한국 같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명예 훼손죄로 고소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소 고발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정도 되면 누가 참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결국은 그 목사님은 오해가 풀렸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서 크게 사죄를 하고 마침 그 교회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기 때문에 다시 자신의 교회에 부임을 하여 평생 존경을 받으며 목회를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내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오해,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당하는 괴로움을 이길 때도 있지만 어디 그 뿐입니까? 가난도 견뎌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같이 신학대학원 시절에 정말 가난했습니다. 먹고 살만한 직장을 두고 신학교에 가니까 너무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 많은 인내를 배웠습니다. 교회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교회 청소도 하고 하면서 관리인처럼 살았습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교회당 옆에 다 쓰러져가는 집이 있었는데 비가 오면 집에 물에 세었습니다. 빗물을 받을 그릇을 아홉 개를 놓아야 했습니다. 띵, 띵, 띵…….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항상 조갈이 나서 물을 떠놓고 아내와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정말 결혼한 지 1년 밖에 안 되던 때였습니다. 그 때 제 아내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제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그 때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물을 먹으려고 했는데 눈을 감고 분명히 사발을 들었는데 물이 안 나와서 눈을 떠서 보니까 사발의 물이 꽁꽁 얼었습니다. 옆을 보니까 아내가 이불을 덮고 자는데 너무 추워서 코가 새빨갛고 콧김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도자로 쓰기 위해서 치열한 인내 속에서 다듬으시고 연단하셔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들이 지금에 와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아주 훌륭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번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 마당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가는데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까 댓돌 위에 봉지가 하나 있어서 열어보니까 고기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에 고기가 아주 귀했습니다. 그 때는 80년대 초였는데 지금보다 훨씬 못 살았고 나라도 가난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교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제가 고기 댓돌 위에 얹어 놨는데 드셨어요?’ ‘네, 제가 그 고기를 고추장에 묻혀서 맛있게 먹었습니다.’그랬더니 그 교인이 ‘아니, 전도사님 그 좋은 소고기를 왜 고추장에 묻혀서 볶아서 드셨어요?’ ‘아, 그것이 소고기였습니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어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고생을 해서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넉넉함 대신 고난을 주셔서 연단을 받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레도 평생 살면서 누구에게 '내가 이렇게 어려우니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한 번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사례비는 주는데 그 당시에 월급이 350위안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에 한 번씩 내는 신학교 등록금은 1251위안쯤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먹고 6개월을 모아도 학비가 안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그렇게 대우를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으면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도우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고생을 했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괴로웠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그 월급으로는 학교를 다닐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장학금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명예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지독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항상 3일씩 앓아누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전교 수석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생활이 안 되니까 매 학기 최선을 다하다보니까 수석을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신학대학교 4년 뿐 아니라 신학대학원 3년도 그렇게 어렵게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는 사람도 많이 나타난다는데 우리는 돕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인격, 그리고 훌륭한 태도를 가지고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되기를 바라시겠죠? 그렇지만 고난은 싫죠? 참는 것은 괴롭죠? 그러나 참고 고난을 당하는 것 없이 그렇게 예수 향기가 나는 사람으로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목회를 하게 되면 결혼을 해야지 목회를 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신에게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사모의 인격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의 아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목회를 못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는 수시로 교회를 옮깁니다. 교회를 옮길 때마다 항상 돈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모님이 돈을 잘 빌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투자를 합니다. 잘 되면 이익이 남고 안 되면 교인들의 돈을 떼어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교회에서도 교인들의 돈을 거두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투자를 했다가 경제가 나빠지면서 원금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교회는 내 돈 돌려달라고 아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런 것들도 모두 목회자와 목회자 아내의 인격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사치하는 목회자 아내의 생활, 다른 사람과 다투고 헐뜯기를 좋아하는 태도, 그리고 교인들은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데 한없이 게으른 목회자 아내의 생활의 태도, 이런 것들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도 좋은 인격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과장과 거짓말, 허위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들입니다. 신학교 교수로 있었던 일입니다. 학생들이 리포트를 냅니다. 이상하게 이 리포트가 어디서 본 듯한 리포트입니다. 그래서 바닥에 놓고 다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똑같은 리포트인데 이 사람은 이런 글자체, 저 사람은 저런 글자체 이렇게 글자체만 바꿔서 제출을 한 것입니다. 신학생이 그래서 되겠습니까? 저는 최근에 미국에 갔다가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1년 뒤에 박사 논문 중 한 문장이 다른 논문과 완벽하게 똑같다는 이유 때문에 박사학위가 취소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지적인 도둑질입니다. 다른 사람이 발견한 것을 마치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쓰는 것입니다. 중국에도 그런 것이 있나요? 그것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악입니다. 미국에는 박사논문을 쓰면 그 파일을 컴퓨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이 논문이 어느 것이 남의 것을 인용 한 것인지 한 번에 프로그램에 다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매우 비겁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학문을 하는 사람의 태도일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 한 상동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었는데 이 분이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들어오는 본과가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다니는 예과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예과를 다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그런데 시험 시간입니다. 영어 시험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시험은 잘 모르면 설교라도 쓰고 나오겠는데 그러면 설마 빵 점은 주겠어요? 그런데 영어시험인데 ‘I am a boy'가 입력이 안 되는데 출력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한 숨을 쉬면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여, 주여’ 그런데 옆에 있는 학생이 시험지를 자꾸 보내는 것입니다. 이 한상동 전도사는 왜 그러나 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를 불쌍해서 보고 쓰라고 옆에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지를 덮고 산에 올라가서 회개를 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평소에 어떤 태도로 살았기에 나를 잘 아는 학우가 시험지를 보여주면 내가 시험지 답안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세월이 흐른 후 영어를 잘 해서 답안지를 보여 준 학생 이름은 잊혀 졌지만 백지를 내고 나간 그 목사님은 후에 그 학교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방법입니다. 항상 진실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옛날에 어느 임금님이 살았답니다. 임금님에게는 항상 예쁜 외동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사위를 얻고 싶은데 이 사위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 광고를 냈습니다. ‘나에게 외동딸이 있는데 이 딸을 시집보내고 싶다, 왕의 사위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다 모여라’ 했더니 성 앞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인 것입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꽃씨를 나누어 줄 텐데 그 꽃씨가 종류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꽃씨가 뒤섞인 것입니다. 그것을 이만큼 쌓아놓고 몇 알씩 주면서 이 꽃씨고 가장 예쁜 꽃을 피워가지고 온 사람에게 내 딸을 주고 사위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다음에 사람들이 손에 화분을 들고 모였습니다. 신기하게 멋있는 꽃이 별 것이 다 있었습니다. 왕이 아무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한 청년에 화분을 들고 왔는데 꽃은 없고 흙만 담아왔습니다. ‘이것이 뭐냐?’ 했더니 ‘폐하 제가 이 꽃씨를 심고 물도 주고 햇볕도 쪼이고 온 힘을 다해서 6개월 동안 길렀지만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사람에게 왕이 공주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꽃씨를 나누어주기 전에 푹 푹 삶았습니다. 그렇게 꽃씨를 다 죽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동화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정직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짓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가난하고 힘들지만 그러나 목회자가 되고 교인들이 목회자를 잘 섬기면 가난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 때가 되어도 가난하던 시절을 잊어버리지 않고 검소하고 절제 있게 사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고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탐욕을 버리며 그렇게 정직하게 살 수 있을 때 그 설교는 빛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번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이다음에 크게 교회를 목회할 때 어떤 목회자의 삶이 도움이 될까요?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아온 목회자가 목회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살아온 사람이 목회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난하게 산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어떤 목회자들은 넉넉하게 되었을 때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일단 넉넉하게 되면 자신이 가난해지게 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물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넉넉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도움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로 살아온 사람들은 원래 쓰던 가락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된 다음에도 그렇게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정답은 무엇일까요? 가난하게 살았느냐? 부하게 살았느냐? 그 사실이 목회를 잘하게 하거나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았었는데 말씀으로 변화가 되었다면 가난한 시절을 생각하며 가난한 교인들을 배려하고 자기의 처지에 안근지족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유하게 살았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다면 그 또한 그렇게 부유하게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물질에 욕망을 내지 않고 초연한 삶을 살 수 있겠지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가지고 있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자연스런 그 본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무엇보다도 안근지족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히포의 대주교가 된 이후에 특히 많은 교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분에 넘치는 선물들을 교인들이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아주 훌륭한 의복도 있었고 아주 고급스러운 물건들도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그것을 모두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팔았습니다. 돈으로 바꾸어서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런 태도가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때에 동역 자들을 물질로 돕고 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로서 자신을 빚어가는 방식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수님이 영국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너무 돈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데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 노트를 펴보니까 노트 속에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들어있었습니다. 누가 주었는지 편지 한 장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고 눈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학생이 결심을 했답니다. ‘나도 영국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 주어야지’ 열린 교회에서 한국과 해외에 있는 학생들에게 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교 섬김의 날입니다. 그래서 국내에 있는 신학교 10개를 매년 한 번씩 방문을 합니다. 물론 제가 갑니다. 그리고 가서 점심을 한 끼 아주 잘 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내 책을 한 권씩 거저주고 한 번씩 설교를 하고 장학금도 주고 그 일을 매년 10개의 학교에 합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도 시작을 했습니다.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학대학원 다니던 시절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식당에를 갔더니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습니다. 식판을 가지고 갔더니 그 고기를 이만큼을 주고 상추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줌마, 이것이 뭐예요? 왜 이렇게 싼 가격에 좋은 반찬을 줘요?’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20년 전에 졸업한 선배들이 오늘 방문하는 날인데 그 선배들이 돈을 모아서 여러분들에게 이 고기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돈이 없지만 이다음에 내가 목회를 해서 교회가 커지면 꼭 와서 우리 후배들에게 이렇게 대접하리라’ 총신 학생이 천 팔백 명입니다. 점심 한 끼를 대접하는데 5만 위안이 듭니다. 그런데 매년 하고 있습니다. 7년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학금도 계속 지급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받은 대로 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도자가 되어서 어떻게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종노릇을 하는지 그렇게 배워가고 실천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사역자의 모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송)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 한국에는 가시고기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아주 조그만 고기입니다. 여러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가시고기의 일생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눈물이 울컥하고 났습니다. 가시고기는 다른 물고기들이 그렇듯이 알을 낳습니다. 암컷이 알을 낳고 수컷이 거기에다가 수정을 시키면 물고기가 나옵니다. 대개 모든 물고기들이 어미가 그 새끼들을 돌봅니다. 그런데 이 가시고기는 어미는 알만 낳고 도망을 갑니다. 저기 구석진 곳에 알을 낳습니다. 흘러가는 곳은 알이 떠내려가거나 다른 고기들이 먹어버리니까요. 그런데 구석진 곳은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물이 흐르지 않으니까 산소가 결핍되니까 물이 썩습니다. 그러면 암컷이 알을 낳고 간 다음에 이 가시고기 아빠가 지느러미 두 개로 물질을 계속 합니다. 그러면서 물을 계속 갈아주는 것입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23일 동안 이것을 합니다. 그리고 나면 새끼들이 조그마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자기는 비쩍 말라서 가시만 남고 이 지느러미는 너덜너덜해 집니다. 물에 상하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양분이 계속 공급되어야지만 이것이 생생할 텐데 그리고 쉬어야 되는데 23일 동안 계속 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것이 너덜너덜해 집니다. 그래도 계속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물고기들이 못 들어오게 막아주고 새 물을 집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물고기들이 와서 알을 먹으려고 하면 사납게 덤벼들면서 알을 보호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새끼 물고기들을 못 나가게 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산소를 머금으면서 새끼들이 자랍니다. 막 물질을 합니다. 너무 지쳐서 점점 이것을 잘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죽습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먹는 첫 번째 음식이 아빠의 살입니다. 그것을 뜯어먹으면서 거기에서 며칠을 더 머뭅니다. 그래서 새끼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뼈만 남기고 다 먹습니다. 그러고 나면 새끼들이 꽤 커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가서 가시고기의 일생이 시작됩니다. 목회자의 일생은 바로 그런 가시고기의 일생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 목회자는 그렇게 살다가 교회와 예수를 닮은 교인들을 남겨놓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큰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젊어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꿈에 부풀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서른아홉 살 때 열린 교회를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지하에서 개척했습니다. 교회를 세웠지만 두 개의 교회가 망하고 나간 그 지하실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엊그제 같습니다. 그 뒤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잠간입니다. 그래서 잘 준비되어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 불꽃처럼 그렇게 주님을 위해 살고 마지막에 죽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일생입니다. 세상의 영광이나 이 세상의 물질, 그런 것들을 바랐더라면 이 길로 들어서지 말았어야 됩니다. 그래서 목회의 길은 자기죽음의 길이고 가시고기와 같은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두 번째 강의)
이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경험한 일을 비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지난 시간에 들었던 불의한 재판관과 억울한 과부의 교훈과 연속선상에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의한 재판관과 억울한 과부의 비유가 하나님 앞에 쉬지 않는 열렬한 기도생활을 다룬 것이라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 비유는 어떻게 우리들이 그러한 기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기도의 외적인 행위와 연결이 되는 기도자의 어떠함을 오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등장합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비유는 ‘또’ 라고 하는 말이 들어감으로서 이 비유가 앞의 비유와 끊어진 또 다른 비유가 아니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기도의 교훈과 한 문맥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에 있어서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를 실천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것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도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교훈이 분명한데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드시면서 당신이 비유를 들어야할 독자들이, 청취자들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한정하셨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즉 기도에 있어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것,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해서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깔보는 마음, 이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열렬한 기도를 지속해 나가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내적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사도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사실을 일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자신의 책에서 무엇보다도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의 삶 속에서 많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도가 응답 된 것이 간증이지 응답되지 않은 것이 간증이 되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늘 하나님과의 풍부한 교제 속에서 기도 응답을 받으면서 산다면 기도응답 된 것보다는 응답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간증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많이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기도와 관련해 얼마나 많이 강조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믿고 간구한 것은 받은 줄로 아나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믿고 간구한 모든 사람에게 응답해 주신 것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믿어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엄연한 경험일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기도라고 하는 것이 매우 신비로운 작용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행위 그 자체가 기도와 관련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도의 행위를 하는 사람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열렬히 기도해야 될 것을 지난주에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도의 열렬함을 유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참 궁금합니다. 기도의 열렬함은 일시적인 열렬함이 있고 지속적인 열렬함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열렬함은 자기 결심이나 정신의 힘, 정서의 작용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거의 기도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에 열렬하게 기도해 본 경험이 여러분들에게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결심이나 정신의 힘만으로도 가능한 열렬함입니다. 또 자극을 받아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열렬함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감화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열렬히 기도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 기도에 적합한 사람으로 그를 바꾸어 놓을 때에 이러한 열렬한 기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가 기도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기도 그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기도 자를 바꾸어 놓으시는 것이니 기도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의해서 기도의 어떠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하면 기도도 그럴 것이요, 사람이 부주의하고 경솔하면 기도도 그럴 것이고, 사람이 열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에 범사 간구함에 있어서도 그런 정신들은 계속 유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이 기도가 하나의 법칙이 되어서 하나님을 바꾸어 놓는 것 같은 힘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와 헌 제자가 있을 때 제사도 소중하지만 그 제사를 어떤 사람이 드리느냐에 의해서 그 제사의 의미는 현저히 달라졌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면 진심이 없이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 올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똑같이 이 기도와 기도 자는 그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에 합당한 기도 자가 되는 것, 이것이 기도 그 자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니 이것은 마치 설교와 설교자의 관계와 아주 흡사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누군가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 참 좋다, 참 은혜가 된다, 그런데 당신수준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어디에서 베꼈을까?’ 사람의 손에 들려진 원고가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그것은 하나의 연기인 것처럼 ‘설교를 어디서 베꼈을까?’ 이런 느낌을 받아 보신 적이 없습니까? 한 사람의 잘 준비된 설교 원고는 그 사람이 설교 할 수 있도록 사람 됨됨이가 준비된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교하기에 적합하도록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손에 들려진 원고가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그것은 하나의 연기인 것처럼 기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그 기도가 정교하고 내용이 훌륭할수록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어떤 의미에서 조롱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도 강조하지만 기도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전도는 얼마나 소중한 행위입니까? 이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복음을 듣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회심합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전도하는 것보다도 더 기쁘고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행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전도하는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도하는 그 사람이 전도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뿐 아니라 쓰시되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쓰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복음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물건을 권할 때 써보지 않고 권하는 방법이 있고 자신이 유익을 누리고 사람들에게 물건을 권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물건을 사는 방법이 후자를 따를 필요가 없겠지요. 만약에 그렇게 하려면 백화점 주인은 수없는 물건을 사용해 봐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을 비롯한 은혜의 수단들은 항상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흘러 나와서는 안 되고 그 사람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해도 자신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그런 상품과 같은 설교를 한다면 혹시 다른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변화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다른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복음과는 상관이 없이 심부름만 하는 그 사람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수없이 물을 흘려보낸 파이프가 수도가 끊겨버리고 나면 물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기도자의 변화가 기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선자의 거룩한 기도는 거룩할수록 주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기도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영광을 구하는 기도,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기를 비는 기도, 얼마나 반복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몇 번 기도하고 나면 제풀에 지쳐서 그 기도를 접어버릴 것입니다. 기도의 뿌리는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고 그 기도가 지속적이고 열렬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비는 바 기도가 자신의 마음에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거룩해 지기 위해 매일매일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이 땅에 편만한 죄악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일어나 거룩한 백성들이 교회에 형성되기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에 단지 의무감으로 기도하지만 어떤 사람은 뜨거운 눈물을 쏟을 수 있는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눈물과 아픔이 있을 것이고 이러한 실제적인 삶이 없는 사람들은 냉랭한 기도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에 싫증과 게으름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결국은 삶인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만나는 열렬한 예배의 생활을 꿈꾸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먼저 그렇게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삶이 예배에 합당하도록 마음을 다듬어 준비했다면 여러분들은 이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될 것이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과 기도사이에 나뉠 수 없는 연관 관계는 결국 삶이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에게서는 악한 삶이, 선한 자에게서는 선한 삶이 흘러나옵니다. 기도의 열렬함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인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뜨거움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기도 자는 나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와 기도 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기도의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의 내용으로 기도할 수 없는 상태요, 또 그런 사람일 경우에는 우리들은 그 기도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에 있어서 차별의 경험을 통해서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사랑과 개별적인 사랑으로 사람들을 다루십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가르쳐줍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그냥 피조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보시고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또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사랑하십니다. 차별이 없이 악인이나 선인이나 그 분이 사랑하시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수록 이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뜨겁게 사랑하시고 심지어는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이방종교 가운데 있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이 뜨거운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느끼기를, 경험하기를 바라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바로 이런 사랑의 가능성 아래 있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 덕을 힘입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하지만 우리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뜨거운 사랑으로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이 세상의 인간들을 사랑하신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같은 정도로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별적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각자 각자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의해서 그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 속에 혹은 적게 혹은 크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일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낄 때도 있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것 같은 사랑의 결핍 속에서 살아 갈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여러분들이었는데 사랑의 경험은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랑은 층 차가 다르게 여러분들에게 현실화 되었던 것입니다. 깨어있다고 하는 것, 주님의 은혜 안에 산다고 하는 것, 매일매일 성화되고 죄와 더불어 싸운다는 것, 이 마지막이 요구하는 목표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그 충만한 하나님과의 화해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현실적으로 역사하고 그리고 우리를 움직이는 삶의 동인이 될 때에 우리는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그리고 커다란 궁핍과 시련 앞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들을 옮겨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열심히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모든 신앙의 능력의 원천도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사랑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냥 하나님 앞에 무엇이 필요해서 요청하는 청구행위가 아니라 인격적 사귐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인격적 사귐이 먼저입니까? 기도가 먼저입니까? 인격적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말 이전에 그 사람과의 친교의 상태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열수 없는 사람, 진실한 동기가 의심 되는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접근할 때 여러분들은 그의 말만 믿고 마음을 활짝 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무슨 동기로 그가 접근해 오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물건을 뺏거나 사기를 치기 위해서 혹은 여러분들에게 어떤 해를 입히기 위해서 다가오는 술책인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부탁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오늘 방금 만난 사람에게 보증 서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는 사람도 없고 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에게 10억만 빌려주면 고맙겠다고, 갚을 지 안 갚을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부탁과 청구의 크기는 스스로 경험하고 있는 인격적인 사귐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잘 해주면 하나님도 잘 해주시는 그런 거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분히 세속적인, 이방적인 신관인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는 주님과의 사귐, 인격적인 사귐의 열매이고 그 인격적인 사귐이라는 관계에 뿌리를 내릴 때 기도는 아주 쉬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함께 이야기 하고 대화할 때 시간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고 순간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을 정도로 달콤합니까? 그러나 이런 인격적인 사귐이 없을 때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는 얼마나 어색합니까? 값진 음식은 오히려 가슴에 얹히는 재료가 되고 화려한 공간은 어색함을 더해주는 분위기가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귐의 관계에서 나오는 기도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을 때에 그 기도는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믿고 나중에 믿고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 시대에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년에 기자가 찾아왔을 때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쉬운데 기도는 항상 어렵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설교는 쉬운데 기도는 어렵다’ 이 기도는 누구도 달관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모든 지체들을 위해 뛰어난 기도의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도 내일이면 그 기도가 막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기도를 거의 못한 사람도 내일은 기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성경의 지식은 어느 정도 고정성이 있어서 성경을 많이 배운 사람이 은혜가 떨어졌다고 해서 백지로 머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는 그것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 대해 조금밖에 몰라도 열렬한 기도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면서도 거의 기도하지 못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수단을 은혜로, 은혜의 수단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 속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는 그 모든 행복이 하나님의 은혜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이런 지혜로운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그 자신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더 많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잘 사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 앞에 더더욱 주님을 많이 의지하고 겸손하도록 기도의 세계를 만들어 두셨던 것입니다. 기도가 이런 인격적인 사귐의 열매이기 때문에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 분에게 합당한 생활을 하려고 하는 삶 전체의 생활의 개선이 없이는 기도의 개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기도관은 우리의 기도관 과는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 ‘중언부언’ 이라고 하는 말은 본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늘 반복되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똑 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한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방인들의 기도의 태도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기도를 반복합니다. 자기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 같은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기도하면 이 기도 자체에 어떤 법칙이 있고 힘이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자기의 신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복적으로 기도를 그렇게 올렸던 것입니다. 이런 신관을 오늘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마다 터줏대감에게 고사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이 그 터줏대감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터줏대감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터줏대감이 자기 안에 자기가 터줏대감 안에 있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의 관계, 연합의 관계를 꿈꾸는 적이 있습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인생의 미래를 알려주는 점쟁이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마 여러분들도 회심하기 전에 그런 집을 한 두 번씩 찾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지나온 인생의 길을 또렷하게 지적해 줄 때 여러분들은 깜짝 놀라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합니까? 사랑합니까? 언제나 그를 섬기고 싶습니까? 옆에서 그를 도와서 그가 하는 일이 일취월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접하고 있는 신들이 그들과 사귐의 관계를 가질만한 신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관과 기도 관을 가지고 당신에게 접근해 오면 하나님을 믿는 참된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이방인의 종교와 뒤섞여버릴 것을 아셨기 때문에 뚜렷하게 우리를 구분지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에 접근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쌔게 기도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반복해서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 이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여러 번 반복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신 못 차리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쌔게 기도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기도가 무슨 하나님의 팔 꺾기처럼 믿게 되어서 더 세게 기도할수록 팔이 꺾어지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마치 레슬링 선수들이 엎드려서 항복하는 것처럼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됐다, 이제는 내가졌다 하시는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방적인 방법으로 기도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기도가 응답된다면 그것은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 섭리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진 일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간증을 제가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늘 살려고 했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참 많이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이상하게 그 일이 꼭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굉장히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자신의 이제까지의 생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나의 기도생활에 대한 ‘왜 그럴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시는데 당신은 안 주시더라’
여러분, 성경에는 이렇게 기도에는 응답해 주시지만 당신 자신은 안 주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들어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었습니다. 한참 먹다보니까 진력이 나서 ‘에이, 이까짓 만나 맨 날 이거야’그러면서 자기 설움에 복받쳐서 고기 좀 먹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배가 터지도록 먹도록 고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이에 고기가 끼이면서까지 아주 신나게 먹었습니다. 먹으면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꼈습니까? 고기는 주셨지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말합니다. ‘저희의 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해 주셨도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기도생활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설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사람됨을 넘어서지 못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릇된 동기에서 기도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야 되겠다는 욕망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 하는 기도, 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다른 사람이 보아 줄 것이라고 하는, 그래서 자신의 평판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외식의 기도,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요청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람됨을 넘어서지 못하는 기도, 그것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엔 바운즈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을 때의 그 사람됨이다’ 라고 말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떤 사람은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진 고위직의 사람일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면 가서 청소하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벌어먹고 사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떤 사람은 학문에 능한 사람일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한글도 겨우 깨우치는 그러한 지식이 모자란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이 하나님 앞에 사람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 여성들이 꾸미고 나타나면 얼마나 예쁩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안 꾸미고 한 번 모여 앉아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웃깁니까? 여러 해 전에 간사들이 수련회를 갔습니다. 자매들과 형제들이 섞여서 수련회를 갔는데 새벽예배시간에 자매들이 시간이 없으니까 세수만 하고 모두 앞자리에 앉고 형제들은 이쪽에 앉았습니다. 그 중에 한 형제가 이렇게 자매들을 쳐다보면서 저에게 귓속말로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 아줌마가 누구예요?’ 자매도 화장을 거두니까 아줌마처럼 보이고 아줌마도 화장을 하니까 처녀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먹지만 말고 좀 바르고 가꾸고 다니십시오. 머리도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다니지 말고 가꾸십시오. 경견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전도 나갈 때는 고상하게 하고 다녀야지 폭탄 맞은 것처럼 거리에 들고 나오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단정하게 호감을 주게 하고 다녀야 합니다. 저는 여자가 꾸미지 않고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다니면 경건하다고 생각되지를 않고 게으르게 생각이 됩니다. 화장품 살 돈이 없으면 민간요법으로라도 하고 쌀뜨물로 목욕이라도 해서 깨끗하게 하고 다니십시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바꿔놓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랬답니다. 어느 회사에서 면접을 하면서 ‘당신은 면접을 하는데 차림새가 왜 그 모양입니까?’ 그러니까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면접관이 ‘나도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그러더랍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외모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면접관이 ‘하나님은 중심만 보시지만 나는 외모도 보네’ 그러더랍니다.
집을 몇 채 팔아서 교회를 짓고 수없이 이력을 이야기해도 그것보다도 엎드렸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 주시느냐 그것이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기도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우리 기도생활의 모든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안타까운 제목이 있어서 안타깝지 않아도 하나님이 도저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길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기도하면서 잠시 시간을 흘러보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 앞에서 나를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그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져도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도 제목이 있어서 나갔는데 그 다음에는 기도제목 중에 제일 큰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경험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던 때에 우리의 기도생활을 보면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의 시간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을 바꿔놓기 위해, 때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바뀌어야 되시는 분이 아니고 환경이 고쳐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변화되어야 할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경험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우리자신이 지금 어떤 사람들인지를 재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주기도문은 끊임없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뜨겁고 간절한 기도가 될 때에 우리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기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서로 용서하기를, 모든 인류가 양식을 해결하기를, 악에게 빠지지 말고 다만 죄에서 구원받기를, 그리고 우리 모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를 꿈꾸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사람됨이 기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실제적인 실천이 없이는 여러분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하나님 앞에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기를 여러분들이 기도제목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몰라주신다고 원망하지 말고 그 하나님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십시오. 지식의 빛을 사모하십시오. 그 말씀의 빛으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충만하게 비춰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깨달으십시오. 이 때 여러분들의 정직한 모습이 거짓 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 때 여러분들은 기도자로서 이 기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해야 될 지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오늘 이 세리를 보십시오. 그의 기도는 어설펐고 기도의 제목도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말로 하자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훨씬 더 길고 능란했고 기도의 예를 보더라도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 당시의 통상적인 예를 따르는 그런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가슴을 두드리고 고개를 떨어뜨리는 이 기도는 하나님이 그 당시의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으로 하는 기도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파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저 사람보다 더 낫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바리새인이 이 세리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에게는 세리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정직한 관찰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필요한 끔찍한 죄인이라는 분명한 자기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를 호소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지만 자기의가 전혀 없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이 죄인 세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혀 주심으로 그를 의롭다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겸비한 영, 그런 겸손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춰보는 엄격한 반성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기도에 자신을 더 적합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간절함이 없을 때 그 때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가 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의 행위가 없는 종교생활은 결국은 자신 밖으로 그 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예배시간에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것, 신자로서 의무를 등한시 하는 것,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에 충성을 하지 않는 나태함, 그리고 작게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크게 쌓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이 모든 마음의 행위들은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되는 인격의 결핍이 현실화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우리자신이 열렬하게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이런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지 정직하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잘못을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도 고칠 수 없는 자기를 주님만이 고칠 수 있다고 믿고 그 분의 은혜만이 나를 변화시켜 냉담한 사람을 열렬한 사람으로, 나태한 사람을 부지런한 사람으로, 그리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리는 그야말로 죄악덩어리의 인간이었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자기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심에 호소했습니다. 나는 멸망 받아야 마땅하고 이 기도의 시간을 당신이 외면 하셔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주신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다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질문)
1. 아주 제한된 정보이기 때문에 제가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무슨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또 교회의 질서문제와 관련이 되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사실은 열렬한 기도모임이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어떤 감격과 그런 은혜가 있으면 그런 곳에 빠질 위험성이 적은데 교회가 그것을 채워주지 못할 때 그런 곳에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조심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기도모임이 간절하고 열렬하고 영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그런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그렇게 하고 많은 술집들이 많이 문을 닫았습니다. 많은 술집 주인들도 회개하고 조나단 에드워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시대가 다르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이고 내가 이야기 한 것은 19세기 이야기니까.
3. 요령이나 이런 것들도 중요하겠지만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원리는 마치 모닥불을 피우는 원리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불이 확 타오르기 전에 작은 나뭇가지들로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좀 더 큰 나무를 놓아서 불을 일으키듯이 그렇게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 자신이 그렇게 간절한 기도의 영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때에 그 기도가 커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제가 교수생활 하면서 교회를 아직 개척하기 전이었는데 그 때 고등학생들을 지도하는 전도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기도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평일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해야 하니까 정신없이 바쁘고 토요일 날이면 9시쯤에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서 약 18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방이었는데 그 방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그 다음에 강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나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들이 한 사람씩 학생들이 한 사람씩 이렇게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약 30명씩 모여서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영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그 기도의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기도 모임 속에 많은 간증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 자가 될 때 그 때 비로소 좋은 기도인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니까 신학교에서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교양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신이 자신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반성을 하면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다, 그러니까 자기반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사실은 교회를 맨 처음에 개척을 하고 사람들이 아주 개념이 없는 사람들, 개념이 없다 그러면 판단력이나 눈치, 도리 그런 것들이 잘 없는 사람들,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중국에도 그런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하면서 다루어야 될 삶의 영역이 단순한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괄합니다. 그런 것들을 다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그런 도리를 터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목회를 하는데 교인이 시어머니와 관계가 안 좋아서 힘듭니다. 그런 관계를 다루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그 시어머니와 관계에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아, 이런 것들이 올바른 삶의 위치구나 하는 것들을 자신이 신앙적으로 깨닫고 극복한 경험이 있어야지만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될 사람들인데 자신의 삶에 공을 들여야 됩니다. 자기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해결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로 살라고 그렇게 가르쳐주는 것은 옳지 않죠. 그런 것들이 힘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많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5.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의가 먼저 필요한데 사실 설교에서 율법이 빠지면 설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말하는 것이 설교에서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것이 율법과 복음입니다. 당연히 이것이 성경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통해서 공로를 쌓거나 혹은 이것 대문에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이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을 보면서 아, 이것은 잘못됐구나, 이것은 맞았구나, 이것은 조금 잘못 되었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율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발견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옵니다. 여러분들도 회개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런 지점은 아, 이런 것이구나. 깨닫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충실해야 되겠구나, 그러면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이 복음을 통해서 소망을 주고, 그 다음에 위로를 주고, 하는 것이 설교의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못됐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된다, 그런 설교를 다 율법주의라고 보고 그런 것은 설교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은 잘못된 이론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맨 처음에는 율법을 제시받으면서 자기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서 그것을 복음으로 설명해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회개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입니다. 이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는 이 두 개가 완전히 나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다른 측면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율법적 회개에 그치면 이것은 진정한 회개일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차이는 율법적 회개는 율법 때문에 회개를 하는 것인데 죄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망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죄를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형벌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적 회개입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자기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고 이렇게 된 것을 공로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이런 것들이 회개입니다. 그 다음에 복음적 회개는 율법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깨닫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 특별히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자기의 죄가 ‘신 더 아이’를 배반한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진정한 통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자기의 힘이 아니라 은혜의 힘으로 자신을 고치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멜로마이 메타’ 두 단어가 있습니다. 메타는 모두 혹은 again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멜로마이’에서 영어 단어 ‘멜랑콜리’가 옵니다. 이것은 ‘후회하다’입니다. 이것은 think 생각하다입니다. 여기에서 희랍어 ‘누스’가 발견되게 됩니다. 희랍어 ‘누스’는 ‘지성’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다입니다. 회개의 가장 확실한 결과는 지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정서적으로는 죄에 대해서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는 이것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런 전인적인 회개를 메타노야라고 부르고 메타멜론아이는 후회입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것을 후회했을 때 사용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히브리어에서도 나타납니다. 여러분들은 시편에서 ‘마음이 상한 자’ 라는 묘사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한 자에게 들으신다. 에서 이것은 ‘레브’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레브’는 마음입니다. 마음도 있고 지성이라는 뜻도 되고 의지라는 뜻도 되고 심령이라는 뜻도 됩니다. 어쨌든 이런 많은 뜻이 히브리어 ‘레브’에 들어있습니다. ‘닥가’라는 단어가 있고 ‘니쉬바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니쉬바르’는 ‘샤바르’에서 옵니다. 이것이 무슨 형태 같습니까? 이것은 ‘니팔’ 그 다음에 분사 그 다음에 남성단수입니다. 그래서 ‘샤바르 니 쉬바르’가 됩니다. ‘샤바르’는 ‘깨다’파 입니다. ‘니 쉬바르’는 깨진 것, 그릇 같은 것들이 금이 간 것이 ‘니쉬바르’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닥가’는 뼈가 들어간 고기 같은 것들을 짓이겨서 물렁물렁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은 사실 한국에서도 잘 안 먹는데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사람들이 많이 먹던 음식이 있었는데 닥 대가리를 자릅니다. 그것을 오징어포 만드는 기계에 넣습니다. 모두 으깨지면 밀가루를 씌워서 기름에 튀기는 것입니다. 맛있습니다. 그 때 다 으깨어진 상태를 닥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울면서 기도해도 그것이 다 회개가 아니고 또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아도 진심으로 하는 회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6. 교회 일꾼들을 세우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잘 못 세우면 너무 많은 영혼들이 해를 입으니까 절대로 경솔히 세우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 교회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주 많기 때문에 거기에서 고르면 됩니다. 교역자를 한 사람 뽑겠다고 광고를 내면 60대 1쯤 됩니다. 그런데도 못 뽑을 때가 많습니다. 제일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내용이 없는 사람들은 양떼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의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목회를 위해서 소명 되었는가? 그리고 양떼를 위해서 희생할 사람인가? 그런 것들을 봅니다. 그리고 성품도 봅니다. 너무 독선적이고 예의 바르지 못하거나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서 사람들과 충돌을 자주 일으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제외가 됩니다. 그리고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이야기 한 것 같은데 내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실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 인도자, 자신이 간절한 기도 자였던 적이 없는 기도 인도자, 진지한 설교 청취자였던 적이 없는 설교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모든 목회에 필요한 것들은 신앙의 원리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는가 그것을 보고 목회자의 자격유무를 판단합니다. 조금 부족해도 그것이 훌륭하면 교역자로 쓸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를 하면서 계속 성장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교역자가 되는 과정을 설명을 하면 둘 중의 한 명입니다. 열린 교회 회중 중의 한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회 교역자이든지 둘 중 한 명인데 이 사람들이 선발이 되어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인턴 십 입니다. 대개 신학대학원 1학년에서 3학년 사이입니다. 여기에서 한 학기 동안 4개월 내지 9개월 정도 인턴 십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와서 훈련을 받았던 것처럼 비슷한 훈련을 매주 월요일 날 4개월 내지 5개월 동안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네 시 정도가지 배웁니다. 여기에 내가 매주 강의를 합니다. 오전에는 강의와 성경공부, 오후에는 사역에 대해서 그러면서 4~5개월을 배웁니다. 여기에는 대개 15명 내지 16명 정도 됩니다. 이 사람들 중에서 교역자로서 썼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은 레지던트 십으로 들어옵니다. 이때까지는 이 사람들은 우리교회에 다니고 있고 이 사람들은 교회를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레지던트 십부터는 모두 교회를 열린 교회로 옮겨야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대개 임명한 경우에는 한 명에서 세 명 정도, 1년에 혹은 0.5년에 우리교회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그렇게 하고 들어옵니다. 이 사람들에게 1년 간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본인이 적성에 맞는 부서로 갑니다. 어린이 부서라든지, 선교라든지, 아니면 청소년이든지, 장년이든지 그래서 1년 동안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평가를 합니다. 다면 평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사역을 위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모두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합격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교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파트타임 교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교육전도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임명이 되면 2년의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이때에 한 부서를 담당하게 됩니다.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어서 실행을 합니다. 2년 후에 다시 평가를 합니다. 평가가 안 좋으면 여기에서 종료된 것처럼 종료를 합니다. 평가가 좋게 나오면 다시 3년의 기회를 줍니다. 여기까지 합격을 하면 자기가 싫다고 할 때까지 계속 있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전임전도사가 됩니다. 이 사이에서 학교도 졸업을 하고 교역자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생활을 보장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역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이렇게 훈련을 받아서 한 10년 정도 훈련을 받으면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계속 설교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신학이 쌓여가고 그러는 가운데 최소한 10년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설교, 행정, 상담, 리더십, 기도 이런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한 번 들어오면 안 나갑니다. 그래서 자리가 잘 안 납니다. 그러면 옛 사람이 안 나가도 또 다른 부서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대신 부목사들은 45세가 되면 다른 곳에 청빙되어서 나가기도 하고 교회를 개척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네 교회 정도 개척해 주었습니다. 혹은 선교사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성은 한국에서 교육전도사, 전임전도사, 강도사 그 다음에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부목사, 담임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성은 교육전도사, 전도사 그것이 끝입니다. 남성에 비해서 항상 뒤처집니다. 그래서 저는 남성과 여성을 평등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등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전도사를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전임전도사, 강도사 대우 전임전도사, 부목사 대우 전임전도사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하고 서열을 맞춥니다. 그래서 생활비도 똑같이 주고, 지위도 똑같이 주고, 권한도 똑같이 주어서 남성에 의해서 무시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7.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은사와 사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 질문을 해 봅시다. 전도의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러면 은사 받은 사람은 전도해야 하고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전도에 은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래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리고 은사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사명을 감당해봐야 확인이 됩니다. 제가 말을 잘 하는 것 같습니까? 그러면 또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만약에 제 앞에 10만 명쯤 모아 놓으면 그리고 저에게 설교하라고 한다면 제가 떨 것 같습니까? 안 떨 것 같습니까? 백만 명을 모아 놓아도 저는 떨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은사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특히 중학교 다닐 때 세 명만 모이면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못했습니다. 오락회시간에 노래를 하라고 하면 이렇게 돌아서서 노래를 했습니다. 특히 여학생들인 경우에는 호흡이 가빴습니다. 그 때에 나는 이런 은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 해보면 그 때 비로소 은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다 묻어두었습니다. 그 달란트에서 텔런트가 온 것은 아시지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달란트는 그냥 하나밖에 더 불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충성하는 사람에게 이런 은사를 주십니다. 교회에 와 보셨죠? 그 교회 디자인을 전부 다 제가 한 것 아십니까? 3년 동안 프랑스와 미국에서 디자인에 관한 잡지를 매달 구입해서 공부했습니다. 해 보기 전까지는 그런 은사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 내게는 그런 은사가 없어, 대부분 은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해 본 사람들입니다.
8. 그렇지 않고 율법적 회개는 율법적 회개이고 복음적 회개는 복음적 회개입니다. 율법적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율법에 비춰 후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