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설교 2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녹취자: 백지영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배에 있어서 두 개의 중요한 기둥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는 진리이고 또 하나는 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깊이 만날 것이냐에 대해서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은 이 예배시간에 목회자들이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깊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지 않으면 사실상 목양이 불가능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로서 이 예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 예배는 상당부분이 목회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하면서 지난 강의를 마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뭔가 영광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분께 뭔가 보태드려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예배시간에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과 장소가 하나님 앞에 정말 구별된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를 위해서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려고 오는 간절한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예배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준비하고 성도들을 하나님 만나게 해 주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만남을 축복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을 가진 성도, 말씀을 잘 준비한 설교자, 그리고 그들을 복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 이 셋이 합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에 맞춰서 목회자가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예배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한번만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성도들 마음 깊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합당하게 드리지 않은 예배를 깊이 뉘우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 예배의 준비가 주일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청교도들은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토요일부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주일을 생각하면서 토요일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육체적으로도 충분한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이고, 또 이 주일에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의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충분히 가르치고 성도들이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관해서 설교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나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렇게 뜨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예배에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깊이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좀처럼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함부로 드린 이 예배에 대해서 회개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종류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를 잘 모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교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예배시간이 얼마나 거룩하고 구별된 시간인가 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예배시간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지적해야 할 것은 예배인도자의 준비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렸던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함부로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은 제사를 집행하기 전 먼저 자신이 죄를 정결케 하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시간에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인도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깨끗케 하여야 합니다. 한 주일 동안 그의 삶이 예배자의 삶이 될 때 그 주일날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인도하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최고로 고양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배가 마치 자신의 생애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때우고 넘어가는 일상적인 직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을 이렇게 정결하게 준비하며 스스로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예배를 인도할 때 그것은 그냥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한 사람의 예배자로 드리는 것입니다. 양떼들만이 주님을 만나야 될 필요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도 주님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예배에서 정말 주님을 만나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성경은 예배를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로 나눕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바로 일주일에 한번, 두 번, 혹은 세 번, 특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공적인 예배와 사적인 예배로 나뉩니다. 사적인 예배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거나 가족들 혹은 동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공적인 예배는 교회에서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당연히 모든 예배가 똑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공적인 예배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그렇지만 모든 삶을 전부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는 함께 교통합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예배를 잘 드린 사람들이 좁은 의미의 예배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넓은 의미의 예배를 잘 못하던 사람들도 회개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받은 그 은혜를 넓은 의미의 삶 속에서 온전히 구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헌제자가 제사를 드리러 나왔을 때 그는 이제껏 자기가 살았던 모든 삶을 끌어안고 제물과 함께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살았던 삶 이상의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를 드린 것만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게에 더 잘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목회자가 한 사람의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의 삶을 살다가 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렇게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의 불행, 그들을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 인도하여야 할 사명, 이런 것에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단순히 예배인도자로 준비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철저한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 준비된 말씀이어야 합니다. 양떼를 사랑하고 진실한 신앙을 갖는 것은 설교자를 위해서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만 하면 아무 말씀이라도 전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전문적인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학 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종종 은사와 사명을 혼돈합니다. 분명히 우리들에게는 학문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고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은사나 사명이 적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설교를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어떤 사람은 전도에 놀라운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사명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 한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남의 설교를 한 번에 베껴서 똑같이 설교하는 것은 정직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충분히 소회해서 자기의 설교로 만들어 설교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용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설교를 단지 자기 스스로 준비했다는 것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열매 맺지 못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려고 할 때에는 먼저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설교하기 위해서 그때 비로소 성경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요령을 실제로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성경을 먼저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이 읽기 위한 목표가 아닙니다. 깊이 읽기 위한 목표입니다. 성경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든지는 여러분 자유입니다. 그러나 너무 설교하기 어려운 성경 말고 비교적 쉬운 성경을 택하는 것이 처음에는 좋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특별히 깨달아지는 것이 없으면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어떤 깨달음이 옵니다. 그러면 거기서 성경읽기를 멈춥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읽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혹은 열 번이나 백 번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뭔가 깨닫게 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더 집중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만약에 옆에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이 있어서 번역이 정확한지를 대조하면서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신뢰할 만한 주석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하나나 두 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을 읽어옵니다. 그리고 마음이 찔립니다. 어떤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흠뻑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자기가 받은 그 메시지를 요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골격을 짜는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은 이렇게 하고, 성경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하고, 여기서 가르침을 찾아내고, 그 가르침의 각각을 적용하고, 그리고 어떻게 살기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상세히 기록을 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도 또 성경을 읽고 그 다음날도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들이나 개혁자들이 성경을 읽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때에 이 사람이 신학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경을 읽는 깊이는 훨씬 더 깊어지게 됩니다. 성경을 여러 번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성경 속에서 어떻게 메시지를 찾아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설교를 해야 될 때가옵니다. 기도하다가 이런 설교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 때도 있고 또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이런 것을 가르쳐 주어야 되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설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렇게 이미 묵상해 놓은 것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잘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더 많은 책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원고를 작성한 다음 설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에 대해서 묻습니다. “원고를 준비해서 설교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안 하고 설교하는 것이 좋습니까?” 한 5년 내지 10년 정도는 성실하게 설교 원고를 준비해서 설교를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고서 한 5년 정도까지 철저하게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설교해야 할 모든 말을 일단 글로 완벽하게 써보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수사학이나 혹은 문법 그리고 문장에 대한 훈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에는 그것을 계속 보고 읽고 하는 그런 설교가 되지 않도록 잘 암기해서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주일 예배 설교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설교를 꾸준히 해서 5년 내지 10년 정도 원고가 쌓이면 그동안 여러분은 굉장히 좋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글은 말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화법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작곡도 하고 노래도 하고 악기도 다룰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연예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작곡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작곡하고 노래는 하지만 악기는 다른 사람들이 연주해 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작곡은 하고 연주는 하지만 노래는 다른 사람 시킵니다. 또 춤추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스스로 어떤 사람들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중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러면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는 연예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됩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그런 모든 재능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읽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설교에 활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남의 설교를 자신의 설교인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하면 이 설교는 누구의 설교를 참고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똑같이 설교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을 먼저 충분히 소화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신앙으로 다시 설교를 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는 설교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다시 토해내는 설교는 그 사람의 설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좋은 설교를 성도들에게 전하고 그래서 그 성도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으로 끝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자신의 설교가 준비되었다고 해서 충분히 다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갈멜산에 장작을 쌓은 것은 사람들이었지만 불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아무리 훌륭하게 준비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설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확신하며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녹아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맡긴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설교를 꼼꼼하게 잘 준비했다는 것이 예배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준비했어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자신의 설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설교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계속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설교하기 직전에 설교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언젠가 한번 목회자들이 모인 세미나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회자가 자기 옆에 있는 목회자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항상 설교하기 전에 설교단 위에서 목사님 책을 읽고 설교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아니 성경을 읽다가 설교를 해야지 왜 내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설교는 잘 준비는 했는데 자신의 마음이 뜨거워져야지만 설교를 열렬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중에서 특별히 감동을 크게 받았던 부분을 표시를 해 두었다가 그것을 설교하기 직전에 한 3페이지 4페이지 읽으면서 감동을 다시 불러일으킨 다음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좋은 방법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래전에 그렇게 마음을 뜨겁게 데우는데 사용하던 몇 권의 책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책이 바로 이엠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 혹은 기도시리즈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고 은혜가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설교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설교자에 관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빵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빵을 만들려면 먼저 밀가루가 아주 좋아야 합니다. 요새는 한국에 동네 빵집에 대한 유행이 굉장히 번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커다란 메이커 파리바게트 같은 그런 빵집의 빵들을 사람들이 점점 싫어하고 동네에서 주인이 직접 만든 그런 빵들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맛있습니다. 비교가 안 됩니다. 아침에 여덟시, 아홉시쯤 되어서 빵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한시나 두시 되면 하루 빵이 다 팔려버립니다. 그래서 오후에 가면 빵이 없습니다. 저도 몇 번을 갔는데 빵을 못 사고 왔습니다. 아침 일찍 가야 합니다. 비싼데도 잘 팔립니다. 왜냐하면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선 밀가루가 프랑스에서 직접 가져온 밀가루입니다. 그 사람들에 의하면 중국이나 한국에서 나오는 밀가루는 국수를 하기에 적합한 밀가루이지 빵을 하기에 적합한 밀가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프랑스에서 가져 온 밀가루로 만든 빵은 맛이 완전히 다릅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제가 한 개씩 사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우리가 얼마나 별로 맛이 없는 빵을 먹으면서 살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 좋은 설교가 맛있는 빵이라면 첫 번째 조건은 좋은 밀가루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좋은 밀가루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중요한 자기가 깊이 은혜를 받은 어떤 성경 말씀에 대한 깨달음, 이것이 밀가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물도 아무것이나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진짜 그 맛을 내기 위해서는 물도 프랑스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주도에서 나오는 이 물이 화산 암반지대에서 나오는 물이기 때문에 프랑스의 알프스에서 나오는 물 못지않게 아주 좋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유럽에 있는 물은 좋지가 않습니다. 석회석이 많이 섞여 있어서 물을 끓이면 아래에 찌꺼기 같은 것들이 가라앉습니다. 그 물을 평생 먹으니까 여자들이 다리가 퉁퉁 붓고 그런 체형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물이 훨씬 좋습니다. 밀가루에다가 물을 넣습니다.
그리고 이제 빚어야 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다음에 그것을 다 부수어서 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 소고기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서 그냥 소를 끌어다가 남편에게 줄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이 어떻게 소를 먹겠습니까? 부인이 요리를 해주어야 먹습니다. 나도 여기서 은혜를 받았으니 이것을 너희는 먹으라고 하는 것은 마치 소를 끌어다주고 먹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깨달은 말씀 앞에 자신이 잘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깨어짐과 학문의 탐구로서 그 말씀을 아주 잘게 잘 부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눈물을 물 삼아서 거기다가 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빚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형체를 만듭니다.
그 다음에 뜨거운 불이 있는 오븐에 집어넣습니다. 만약에 불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밀가루와 반죽이 있다고 할지라도 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굽다가 만 빵, 반은 반죽덩어리가 되어 있는 그런 빵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충분히 익기 위해서는 뜨거운 불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눈물로 반죽을 했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빵을 훌륭하게 구어서 성도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짜 맛있는 빵은 배가 부른대도 보면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배탈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야기를 해서 좀 미안한데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월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차 속에다 넣어놓고 한 3년 동안 모르고 그냥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3년 후에도 전혀 상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게 같은 데서 파는 싸구려 빵들은 갖다가 집에 놓아도 일주일이 되도 썩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방부제를 넣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빵집은 그날 팔고 남은 빵을 저녁 때 다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날 아침이면 곰팡이가 다 슬기 때문입니다. 냉장고에 넣지 않는 한 하루를 놓아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좋은 빵집에서 먹는 빵은 먹어도 배탈이 잘 안 납니다. 나쁜 성분이 안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좋은 설교는 그것을 먹었을 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기쁘게 받아먹은 사람들은 이 속에서 말하자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은혜로운 작용이 일어나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먹을 때는 정말 맛있습니다. 들어가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진리를 대적하게 만들고, 가정을 깨트리게 만들고, 선한 양심을 더럽히고, 그리고 악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단의 열매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그렇게 설교를 마지막에 맛있는 빵이 되게끔 익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를 준비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포할 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설교를 듣는 그 순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죄인은 회개합니다. 의인은 격려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던 사람들은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은혜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고난 받고 역경에 처했던 사람들은 용기를 갖게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담대해 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설교를 해도 허공을 치는 것처럼 어떠한 반응도 없다면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설교가 아닙니다. 물론 매순간마다 모슨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 진리에 반응하고 뉘우치는 사람들이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성령의 은혜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설교와 기도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설교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설교는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설교입니다. 생명이 없는 콘크리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