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주체로 인생살기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녹취자 : 오희열
저는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는 않으셨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정확하게 제가 태어난 지 14년 2개월 되던 겨울, 주일이었고 교회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제가 서울 외곽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시골길 같은 길을 한 20-30분 걸어야만 교회를 갈 수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14년 2개월 된 아이의 마음에 인생의 자각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가난했지만 가난하거나 무엇인가 모자란 것이 있어서 그렇게 통곡을 하고 운 것이 아니라 질문들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을 교회 다니면서 몇 사람에게 해 본적도 있지만 아무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고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유치부, 1학년, 2학년, 3학년, 중학교까지 거쳤는데 기억에 나는 선생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느낀 선생님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진지하게 “너는 정말 구원을 받았니?”하고 물어본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분 정도 약간 비슷한 분이 계셨고 나머지는 교사로서 전혀 추호의 애정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추운 2월의 겨울, 세상에 태어난 지 14년 2개월 된 아이가 한참을 그 논둑에 엎드려 통곡을 하다가 두 손으로 눈물을 씻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했습니다. 무신론자가 살다가 죽기로, 그리고 하나님은 없고 있다고 한들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는 내 길을 간다. 제가 교회를 떠난 날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너무너무 무서운 것은, 오늘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치를 떠는 무서움과 두려움의 근원,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제가 철이 들고 신학을 공부하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니까 자신의 인생의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한 없이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강의안을 만들어서 가지고 왔는데, 가지고 계십시오. 어차피 강의는 나중에 정리하는 뜻에서 집에 차타고 가시면서 쭉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강의한 것이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제가 이 간증을 했더니 저희 교회 집사님과 권사님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이야 워낙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니까 열네 살 때 그런 생각을 하셨겠지만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컴퓨터 게임하고 핸드폰에 코 박고 살아요.” 합니다. 그게 바로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말로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 아이는 답을 찾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말입니다. 그 아이들 속에 이미 그런 질문이 있는데 뭉게구름처럼 있어서 그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끌어 주는 것이 “에튜케아레”, 교육, education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아이들이 오늘날 스마트폰이나 쾌락, 특히 성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엄청 빠지는데 아이들이 영상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해서 그것을 떼어 놓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회피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제일 못하는 것이 혼자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핸드폰 다 뺏고 조용한 공간에 혼자 놔둔다거나 숲속을 혼자 걷게 해 보십시오. 아이들에게 그것은 거의 공포입니다. 영어의 표현 가운데, “I want to collect myself.”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도 정신이 산만하며 “나는 내 자신을 좀 수습해야겠어.”라는 뜻입니다. collect myself 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통 관심사가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고 바깥으로 마구 뻗어나가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항상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인생의 많은 삶의 사태들이 자신에게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대신 살아주시지 않습니다. 나는 서머 힐의 이야기 같은 교육방식이나 몬테소리 같은 교육방식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것에서 배울 것도 많지만 그것이 참된 교육에 이르는 방법으로서는 모순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무엇을 교육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교육받을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이상주의자들에 의해서 윤곽이 짜여 지고 그 아이들이 마치 플라톤이 폴리테이아에서, 이상국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단계별로 지식의 등급을 정해서 공급하면서 그 아이들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자신과 사회와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성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집도 가난해서 등록금도 제대로 못 내고 학교를 갔는데도 결석으로 처리한 것은 물론이고 가방에 책을 가지고 다녀도 관심사가 공부일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대학을 가서 뭘 해먹고 살 것인지가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있는데 그게 더 중요하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내 인생의 실수라고 한다면 너무 이른 나이에 인생에 대한 자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때에는 그래도 지금보다 비교적 자각이 빨랐습니다. 우리는 동네에 TV가 있는 집도 거의 없었고, 라디오는 특권층이나 듣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글로 쓰인 것이면 감지덕지하고 읽는 시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열네 살 된 나이에 걸어가면서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담장 밑에 피어난 풀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것들은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그냥 굴러다니면 되고 거기서 자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매일매일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방식이 책 읽기였습니다. 문학책부터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추운 겨울에 교회를 가다가 논둑길에 엎드러져 펑펑 울며 울부짖었던 고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친구들도 별로 없었지만 친구들과 얘기해봐야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보면 나를 무시했는데 알고 보니까 무시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도 모르니까 대답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린나이에도 교회 가서 보면 어른들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열네 살 된 나보다 인생에 대해서 훨씬 나은 견해에 도달했다고 하는 믿음을 저에게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이 나만 유별나게 하는 고민이 아니라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가들의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질문은 많이 던지지만 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들어갔습니다. 나는 우리나라 교육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서 대학을 붙고 못 들어가고 떨어지고 하는 많은 사연이 있지만, 그러다가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한 7년 정도 하다가 야간대학을 다니고 신학대학원을 갔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엄청난 학습지진아라고 믿었습니다. 12년 동안 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말썽이나 부리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지만 싫었습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들도 몇 사람 빼 놓고는 좋지 않았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학교라는 환경 자체가 나에게는 싫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꿈을 꾸면서 군대 가는 꿈을 꾼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불길하면 학교 다시 가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나는 이 교육사회에서 완전히 낙오자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학교 교육을 벗어나고 내가 스스로 공부를 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이 학교의 규율적인 통제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우수성을 입증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지금은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지금은 그런 열등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내린 결론은 “이 나라의 교육은 정말 나에게 맞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나처럼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밖에 안 되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나라의 교육이 죽어도 길들이지 못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나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튼 답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철학이나 사상 쪽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답을 주었습니다. 열광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평화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고 거기서 답을 찾았다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책을 읽었을까?”할 정도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뜻도 모르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21살 때 나에게 전도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회심하고 스스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몇 사람이 도움을 주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레오 톨스토이였습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읽으면서, 그의 “참회록”, “인생론”, “부활”, 이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발로 걸어가서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회심을 경험하고 그 후에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되고 이렇게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문제는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주체가 되어서 살기를 요청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주체”는 소위 말하는 “주체사상”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씩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자기이지만 문제는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면 자신은 누구이고 자신의 인생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하는 규정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디로부터 오는 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다시 말하면 세계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심지어는 내 앞에 펼쳐진 이런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가 나와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는 데카르트같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cogito, ergo sum” 모든 관련된 것을 끊고 자기에게 집중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그 관계망 안에서만 자기가 누구인지를 직관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모르니까, 제가 열네 살 때에 울면서 고통스러워했던 질문이 여러 개이지만 사실은 하나였습니다. 세계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은 존재하는가? 이 네 개의 질문이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류의 수가 1천억쯤 된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다 다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으로 내가 독특하게, 이전에도 없고 현재도 없고 그리고 다시 있지도 않을 그런 독특한 개별성을 가진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공통된 것도 있지만 나로서 여기 존재해야 할 어떤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세계와 인간과 자연의 세계와 내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전까지 인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쓴 유명한 “고백록”이 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십시오. 매우 어려운 책이지만 꼭 읽어보십시오. 이것은 나는 중학교 학생들에게 추천도서로 한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47세에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완전히 완숙한 나이에 쓴 것입니다. 그래서 저 책을 읽으면서 무슨 뜻인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저는 저 책을 120번 정도 읽었습니다. 어쨌든 그 첫 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내 마음에 쉼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끊임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을 설명할 때, “앙스트”, 불안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리차드 로티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다 조합된 것이다. 진리, 윤리, 도덕, 모든 것들은 조합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용기 있는 사람은 그것을 깨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는 학생들을, 단순하게 청소년들이 타락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타락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정신적인 근거와 사조들을 이 시대가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부도덕하고 타락한 생활 그 뒤에는 사람의 정신을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조류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바닷물 같은 것들이 저항할 수 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전 면적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조류의 흐름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지금 내가 어느 자리에 서 있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주관 있게, 확고히 주관성 있는 그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그것에 휩쓸려서 자기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의 주체도 되어보지 못한 채 매몰되어버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자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하겠습니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라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얘기를 말로만 이렇게 얘기합니다.
엊그제 유튜브에서 한 동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화입니다. 외고를 다니는 여학생인데 성적표가 나왔습니다. 전교에서 15등을 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엄마가 성적표를 내 놓으라고 합니다. 보더니 일장훈시를 하는 것입니다. “네가 정신이 있는 년이냐! 그 학교에서 15등을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겠느냐? 다음번에는 반드시 5등 안에 들도록 해라.”그때 귀가 시간이 2시였는데 그 목표가 떨어지고 나서 귀가 시간이 새벽 3시가 되었습니다. 모든 학원을 어떻게 수강할 것인가를 엄마가 계획을 다 짰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서 3등을 했습니다. 너무 힘드니까 학원 하나만 줄여달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엄마가 하는 말이, “주제를 알아라, 네가 3등을 했다고 기고만장해서 그러는데 그거 진짜 똑똑한 애들이 몰리는 대학에서는 이것은 점수도 아니다.”그러고 나서 다음 학기에 이 아이가 1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방에 성적표를 놓고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그 성적표 위에 마지막 유서가 있었습니다. “엄마, 이제 됐어?” 그게 마지막 이 아이가 남긴 유서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짜, 정말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진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룹에 취업하고 돈을 잘 버는 거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가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했지만 이 세계를 설명할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런 위대한 지성인도 마지막에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마니교에서 방황하다가, “내가 당신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마음에 쉼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은 “인간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 거대한 소비문화, 향락문화의 문제는 이런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는 계속 먹는데 정신은 유아상태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가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마어마한 메스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광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두통하면 게보린” 하고 저절로 찍힙니다. 그리고 수많은 소비재에 대한 광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것을 소비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불행할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자아입니다. 그러면 그 자아가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자아는 지각감각과 도덕에 대한 공통적인 감각, 그리고 이성, 이런 것들로 구성이 됩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것이 전부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끊임없이 우리는 이 세상의 사태들을 헤치면서 살아가야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삶의 사태는 우리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도 있고 슬프고 불행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고 계속 즐겁기만 하도록 내 인생의 줄을 그으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들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환경에 자신의 행복을 모두 맡기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내동댕이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래도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여섯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넷이서 만납니다. 두 명은 그 사이에 죽었습니다. 하나는 20대에 죽고 하나는 40대에 죽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삶의 수많은 사태들을 만납니다. up and down 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저러한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안 겪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늙고 죽고 병들고 시련과 고난을 만나는 일들이 왜 없겠습니까? 여러분도 여기 앉아계시지만 죽도록 괴로운 시련 속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는 존재 자체가 너무 무거우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일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아내서 그 삶의 사태들을 겪지만 이것이 내 인생을 마음과 모든 정신까지 뒤흔들어 놓도록 내가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끈을 놓아버리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들이 그렇게 고상하게 생각하는 사랑도 마찬가집니다. 사랑도 미친듯이 누구를 좋아해서 그가 죽거나 그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인생 자체가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은 행복한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너질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생각하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처럼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인간의 가치와 존재에 대한 규정을 해 보려고 애를 많이 쓴 것입니다.
이제 마틴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 실존주의 철학자는 인간을 “의미 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왜 인간이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그런 필연성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그냥 남는 존재이다.”라고 했습니다. 없어도 되지만 그냥 있게 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내가 누구이고, 본질이 누구이고, 신은 있는가, 없는가, 이런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살아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실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헤게 같은 사람은 인간을 전체의 보편을 위한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들 중에 어떤 것도 인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하고 결국은 내가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올바른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것의 근거를 다 부정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다. 그런데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이다.” 나는 그런 청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렇다고 제가 청소년기에 극단적인 타락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10대 아이들이 거침없이 상상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속에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하겠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지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인간이 “내일 죽을 테니까 오늘은 먹고 마시자!”하는 공통된 심경인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구토”라는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나는 이제껏 사회적으로 진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떨어뜨리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며 살아왔다. 왜? 이것 자체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인간이 그렇게 찾아가서 완전히 자유롭겠습니까? 여러분이 현대 미국사 같은 것을 보면 실제로 올더스 헉슬리 같은 사람들이 LSD를 권합니다. 그런 사상가들이 미국의 마약을 확대시키는 데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런 마약 같은 것을 복용하고 황홀경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참된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도달하는 기독교적인 결론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에게 인간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뭔가 모자라는 분입니다. 그런데 필요하지도 않은데 만들었다면 그것도 모자라는 분입니다. 쓸데없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여기에서 깊은 고민을 하다가 마지막에 충격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인간은 진정한 휴머니즘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을 향한 웅장한 요구이고 하나님에게는 무엇도 부족한 것이 없지만 그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안에서 인간도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과 인간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결국은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거스틴이 발견해내면서 지금 하고 있는 이 감동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앞에 내가 무엇이기에 날더러 당신을 사랑하라 명령하시고 그렇게 아니하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꾸짖으시기 하면서 나에게 그것을 명령하십니까?” 여기에서 최고의 휴머니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삶으로써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설정이 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존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판사가 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철학으로 전향을 한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가 한 이야기가 인상 깊습니다. “법을 집행하면서, 항상 재판을 하면서 인간을 존엄한 존재라고 배웠는데 법은 왜 인간이 존엄한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인간이 존귀한 존재인지 우리에게 명료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유일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무생물이나 일,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향해서는 원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규정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복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이 불행해지는 원인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세계와 이웃, 사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함께 변하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지구도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뭔가 변화가 올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은 20억년 후면 우리 은하계와 안드로메다 은하계가 만나면서 융합이 되고 밀코메다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젠가는 결국 폭발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도 변합니다. 이러한 세계와 인간과 자연도 변하고 자신도 변해갑니다. 있는 것들은 모두 소멸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영원을 향해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간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영원 세계와 연결시키는 데에서 인간은 확고한 자기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 헤어질 줄을 알고 죽을 때에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강을 건널 때에도 보내줄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간들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그림이 나오는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배향”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왜 등집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행복하도록 창조된 존재인데 그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기 위해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따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향”을 합니다. “conversio” 우리말로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회심을 합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등지고 살며 행복을 찾아갔던 시간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중학교 2학년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외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보면 중학생이 어렵습니다. 저도 모든 부서를 다 해봤지만 중학교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때도 그랬으니 지금은 더 할 것입니다. 놀랍게도 토요일이면 중등부 학생들이 생기발랄하게 단정한 차림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교육관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지금 어디 가는 거니?”하고 묻습니다. 너무 커서 청년 같기도 합니다. “너희들 청년이니?” 하면, “아니에요, 목사님. 중학생이에요.”, “어디 가니?”, “오늘 기도회가 있어서 기도하러 모였어요.”, “그래?”, “목사님, 우리가 성도다운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주세요.”합니다. 누구입니까? 회심한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장 중요한 심지는 아이들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아주 확고하게 그 믿음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잘 양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끄러지기 때문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그리고 바로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지은 바 되었다는 것,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나는 어떤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된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그리고 이 세계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불완전한 세계를 온전하게 하고 그 온전하게 하는 모든 삶의 과정이 나 자신으로 하여금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과정이 되게 하시려고 나를 사람으로 만드셨다고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그 아이들을 위한 보험입니다. 다릅니다. 정말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들은 다릅니다.
고등부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긴 자매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연히 남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어떤 남학생 하나가 집요하게 구애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답장이 왔는데 이렇게 두툼한 편지가 왔습니다. 남학생이 감동을 받고 ‘드디어 나한테 넘어왔구나!’ 생각했습니다. 편지를 뜯어보니까 열 장이 넘는 편지가 빽빽하게 써서 온 것입니다. ‘얼마나 나를 좋아했으면 이 많은 사연을 썼을까!’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웅장한 설교를 썼습니다. 네가 어떻게 해서 이 교회에 왔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그리고 하나님이 너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그런데 지금 네가 얼마나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길을 가고 있는지, 마지막에는 “정신 차려라!” 라고 한 것입니다. 보험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돈의 유혹을 받고 명예의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는 10대 때에 그런 유혹을 받지 않았습니다. 순수합니다. 아이들이 막 사는 것 같아도 어른보다 훨씬 순수합니다. 그래서 해결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전향을 한 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똑바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향의 삶”입니다. 매일매일 이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사고들을 접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밝은 진리의 빛을 접하면서 그것에 미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찬양)
이젠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제가 고등부에서 목회를 하면서 진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열렬했습니다. 주일마다 세 시간을 설교했습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졸고 딴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석고상을 깎아서 놓은 것 같았습니다. 똑바로 앉아서 듣다가 끝나면 마치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오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사상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30, 40, 50에 비전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를 움직였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10대 때에 확고하게 자신의 인생의 가야할 길을 정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을 해 보니까 세상 다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대학 졸업할 때쯤 되어서, 아니면 대학 졸업하고 사회 물 좀 먹다가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데 늦었습니다. 목사가 될 사람들은 중학교 때쯤 결심을 하고 인문학을 접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사상과 철학들을 공부해 가면서 학문의 세계를 섭렵하고 마지막에 신학으로 그 모든 빛들을 비추면서, 인생에 대한 어느 정도 달관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육화된 메시지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합니다. 진리가 자유를 좇는 방식이 두 개인데, 지성적으로는 진리, 질서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것입니다. 진리가 주는 최고의 유익은 진리가 확 비춤으로써 무질서했던 것들이 가지런해지는 것입니다. 질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리의 최고의 유익은 서로 연관이 없고 무질서하던 것들에 쫙 비추면서 질서가 딱 세워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그 진리를 받음으로써 질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 있게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다 행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불구의 상태였던 우리의 의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 그것을 극복하고 이기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 안에 끊임없이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갈 때, 교회와 이세상과 완전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야 하겠는데 못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우리가 완전히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선한 마음이 우월하지만 여전히 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날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악이 선을 이기거나 선이 악을 이기거나 어느 한 쪽이 기울어질 때 삶도 악으로, 선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인데도 매우 심각한 문제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학교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구원받은 다음에 잘 돌봄을 받으면서 은혜 안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모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워합니다. 그것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질 때 인간의 마음은 그만큼 악이 들어오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한 것이고 악을 행했을 때에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악을 선택한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 은혜 안에 살아야만 우리가 계속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은, 은혜라는 것이 성경에는 크게 두 가지 표현으로 나오는데 하나는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분에 넘치는 호의이고 주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너 은혜가 떨어졌구나.”할때는 후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할 의무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명료한 자기 인생의 목표가 주어집니다. 어린 나이 때부터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은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공부할 이유도 발견하고 자기가 그렇게 살아가야 할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다음에 그 아이들을 은혜 안에서 살도록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참된 주체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으로서 그 선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생겨났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것만큼 인간은 참된 주체성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거짓 주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주체성을 갖게 된 고백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입니다. 그 고백이 참된 주체의 진수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한 인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하나님 앞에 찾으며 일체의 이기심을 버리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거짓 주체는 타락했고 그래서 선함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과 불화하고 욕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그것은 참된 주체가 아니고 거짓된 주체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의 노예가 된 삶”이라고 이야기하지 “자유로운 삶”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통적인 사랑을 “까리따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인간이 아가페의 사랑을 알고 나면 그 다음에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 아이들이 교육에 헌신하고 정치에 헌신하고 혹은 사회에, 기업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저 화살표를 보시면 절반쯤은 노란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지만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랑이 순수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합니다. 라틴어를 써서 죄송합니다. “Modus vivendi, Copia dicendi”,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사느냐가 피교육자에게 가르칠 가르침의 양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온전히 살아보려고 애쓴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풍부한 간증이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직한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정직하게 기업을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한다든지 등등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방식입니다. 진리를 따라서 그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그 길로 살아갈고 할 때 풍부한 것들을 체험하면서 그것들이 가슴속에서 언어가 되어서 가르치는 사람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라, 그리고 이런 사람이 되어라, 이런 존재가 되어라.”고 말할 수 있는 피 묻은 가르침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스승이고 스승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진수입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의 참된 변화,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회심,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의 진리와 접하게 할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인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장 화려하게 묻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사건입니다. 이 무지개처럼 펼쳐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들은 바로 그 밑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그렇게 구원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고,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고, 그들을 거듭나게 하고, 새 사람 되게 하시는 구원역사가 세계역사를 사용해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 세상에 성취해 가는 데에 무엇인가 의미있는 기여를 하면서 사는 그 속에서 인생의 진정한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역사는 위대한 사람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펄전은 알지만 스펄전을 회심시킨 사람이 누군지는 아십니까? 모릅니다. 존 오웬이라는 17세기의 위대한 영국의 신학자가 있었는데 당시 켈럽 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예배당에 갔습니다. 이 분은 출타해서 없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서 유명한 청교도가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알지만 그 사람을 회심시킨 사람은 모릅니다. 보십시오. 역사는 위대한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들을 길러낼 때, 그 사람이 직접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인간의 참된 행복과 기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서 있는 그 자체가 존재의 울림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아우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 확신, 그리고 담대하게 내딛는 그 인생의 발걸음,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좋은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시니까 여러분은 아마 저같이 그렇게 방황하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면서 소진한 그 에너지를 한 번 어떤 뜻있는 일에 썼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40, 50이 되어도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불행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그러면 그 밑에서 자라는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그 십대 때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는 것입니다.
몇 번 그리스 로마를 여행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권사님들이나 이런 사람들과 오는 게 아니라 고등학교, 또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이나 2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그 르네상스의 뿌리인 로마 문명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한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고민을 했는지, 그리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지를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면 그 아이들의 인생이 정말 바뀌겠다고 확신했습니다.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설명을 해주느냐 입니다. 피렌체 광장에서 보니까 혼자 여행 온 젊은이들이 피렌체를 돌아다닙니다. 혼자 저 구석에 앉아서 한 없이 우는 것입니다. 아마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시련당해서 울 수도 있고 차비가 떨어져서 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면서 르네상스의 문명을 보니까 뭔가 인생에 대해서 근본적인 고민과 그 위대한 해결의 힘이 피렌체에서 폭발하지 않습니까? 전 지구상에 존재하는 도시 중에서 피렌체만큼 위대한 도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열네 살 때에 내가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고민들 속에서 비로소 자기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내공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흔들릴 수 없도록 그것을 예수 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교육입니다. 그게 교육입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십시오. 그리고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때로는 그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 없고 가난하다고 하는데 더 가난한 사람도 삽니다. 시련 당했다고 하는데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시련당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아닙니다.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저항력을 상실할 때 인간은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꽃다운 나이에 확고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내 인생에 나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신 그 하나님의 나를 향한 대우는 얼마나 놀라운가! 나의 모든 존귀함과 아르다움, 인생에 대한 모든 고상한 생각들이 그분 안에 있고 나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얼마나 호사스러운 삶을 사는 것인가를 세상의 사조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지만,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강의한 것입니다. 첫 시간에 강의했습니다. “핸드폰을 발바닥에 놓고 오늘 구두로 밟아라. 인생이 바뀔 것이다.” 나는 지금도 8년, 9년 된 폰을 씁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 했습니다. 그 핸드폰으로 책을 다섯 권이나 썼습니다. 2G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필요한 것 같은 모든 것들이 사실은 없이 살아보면 하나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소설도 아닌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상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호흡이 조금만 길어도 책을 읽지를 못합니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세 페이지를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사색과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힘들이 점점 상실됩니다. 불안하게 됩니다. 더욱 더 그런 향락주의에 빠져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가르쳐주면서 인간이 스스로 사색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게 된 이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한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이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것인가, 이 한 순간 한 순간이 우리에게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산 김광섭 씨처럼 “때로는 울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웃기도 하려니와 하지만 젊은 자의 꿈은 항상 나는 데에 있나니”, 그러면서 자신이 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무한히 감사하고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양태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서 그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한 걸음을 내딛고 손짓 하나 하는 모든 것 까지도 그 안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의미를 가진 삶의 연속이 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아이들의 삶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더 할 얘기는 많지만 피곤하실 테니까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