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 김경애
조나단 에드워즈를 정해진 하나의 주제가 아닌 강의를 90분에 듣는다는 것은 에드워즈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에 제가 호주에 있는 호프신학교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이틀을 강의했는데 다 못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신학은 이처럼 방대하고 일주일 정도를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면 에드워즈에 대해서 조금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이 시대에 에드워즈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쳐보시고 그리고 특별히 외국 사이트에 들어가셔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쳐보시면 여러분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칼빈보다도 더 왕성한 연구모임들이 미국부터 시작해서 러시아, 아프리카, 루마니아 이런 나라들까지 광범위하게 에드워즈의 연구 붐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활발하지 않습니다. 외국은 굉장히 활발합니다. 자, 그러면 왜 18세기에 살다가 간 에드워즈가 하필이면 지금 엄청난 붐을 일으키면서 세계적인 학계에 다시 주목을 받으며 1970년대 이후로 에드워즈 신학에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면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20세기의 위대한 칼빈주의자 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그리고 벤저민 워필드 이런 사람들의 명성은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 세 사람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지 않습니다. 물론 헤르만 바빙크의 경우에는 최근에 4권의 개혁교의학이 나왔고 필라델피아에서도 그 책을 교의학 교과서로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상당히 많은 헤르만 바빙크의 책들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학이 너무 사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들이 개혁주의에 너무 많은 사변주의를 도입한 것이 아니냐는 염려 때문에 사실은 카이퍼를 멀리하고 있는데 나는 그 비판도 정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벤저민 워필드는 이미 그의 저작 전집이 나와 있지만 사실 그 책을 지금 탐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위대한 세 사람도 잊히고 있는 이때에 그것도 17세기도 아니고 18세기에 살았던 17세기는 개혁파정통주의 시대의 대 부흥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때의 어느 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그 사람도 아닌 18세기의 사람이고 그것도 유럽의 학자가 아닌 조나단 에드워즈가 박사학위가 6개인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금에 와서 이렇게 엄청난 환영을 받고 연구의 붐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과학의 적실성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벤저민 워필드를 공부하면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준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지만 에드워즈를 공부하면 그 안에서 치료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에 대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문제에 대한 적응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에드워즈뿐이겠습니까? 다른 많은 사람들도 지금 얼마든지 그런 적응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권과 Reformed를 아우르면서 심지어 자유주의자들까지 가세를 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해서 현대와의 적실성을 찾고 현대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내놓고자 할 수 있는 소스를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팔로워는 5대 Reformed 뿐만 아니라 에반제리카, 그리고 심지어는 성공회, 심지어는 러시아, 심지어는 자유주의자들까지도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조나단 에드워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적으로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사실은 근대를 도입한 획기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게 최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에드워즈가 역사적 비중성에 있어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와 유사한 영향력을 그 다양한 계파의 사람들에게 끼쳤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Reformed 서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두고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중요한 논쟁이 무엇이냐 하면 ‘과연 조나단 에드워즈가 Reformed냐? 아니냐? 아니면 에반젤리칼이냐?’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떻게 보면 이쪽으로부터는 너무 개혁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또 개혁주의 쪽으로 부터는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서는 Reformed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가지고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학자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조지 마스틴 박사에 의하면 미국이 배출한 최고의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이 저녁에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하면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20년 가까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판본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판본은 Banner of Truth Trust 에서 나오는 판본이 아니라 예일대학에서 나온 판본으로써 예일대학에서 모든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75권으로 찍었습니다. 75권으로 찍었는데 27권이 출판되었고 책 권수로는 27권인데 Volume으로는 26입니다. 24권이 두 권으로 되어있습니다. Volume A, volume B 이렇게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26Volume의 27권의 책으로 되어있고 28권부터 75권까지는 예일대학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센터에 링크되어 있어서 거기에 Text들이 기록되어있는데 연락해보니까 그것은 앞으로도 책으로 낼 계획이 없답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면 Manuscript에서 Transcription해서 옮겼는데 잡다한 자료들입니다. 그래서 책으로 만들고 해제를 달고 비평본을 만들기에는 내용이 빈약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지 75권 정도의 분량이 되고 아마도 그것이 모두는 아니고 지금 예일대학의 바이네커 Library에 거기에 Manuscript로 되어있는 희귀본보관소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직접 쓴 것들로 아직까지도 상당히 많은 보따리들이 활자화되지 않은 것들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일대학에서 나온 26Volume의 27권 한권의 두께가 보통 600페이지에서 800페이지인데 그 책을 제가 보기에는 송두리째 다 읽지는 못했는데 4권 정도는 덜 읽은 것 같은데 나머지는 제가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한 20년간인데 집중적으로 천착한 것은 한 10년 정도 집중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었고 그래서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어느 한두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집 전체의 맥락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을 볼 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사실은 맨 처음에 신학자나 목회자들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 아니라 철학 쪽에서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론을 번역한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기준으로 할 때 1975년에 번역된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도 번역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철학계통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론의 문제라든지, 자연과학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그 다음에 도덕철학 문제라든지, 그 다음에 특별히 엘리저스어픽션에 나오는 소위 이야기하는 정독이론이라든지 도덕심리이론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소수이기는 했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를 철학자로서 접근해서 먼저 논문과 이런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기독교계통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이 알려진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자기가 젊었을 때 영국의 어느 헌 책방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봤는데 그것이 아마 두 권으로 된 것 같은데 다 낡은 그것을 보면서 그가 만난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고 자기가 만난 하나님은 너무 초라했다. 그래서 자기가 티끌 같은 것을 느꼈다고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극찬을 했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뭐라고까지 이야기를 했느냐하면 만약에 퓨리턴들이 히말라야라면 종교개혁자들은 알프스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했는데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극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은 서문 강 목사님이 최고의 공헌자였습니다. 로마서강해부터 시작해서 번역을 해내시면서 확 퍼지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알려지게 되었고 그 다음에 공헌을 한 사람이 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 책이 200만권 정도 깔렸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 번도 인용하지 않은 책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직접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굉장히 높고 대단히 위대한 사람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저의 의문은 과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집을 모두 읽으셨을까 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뭐라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전체적인 글의 맥락으로 볼 때 절대로 다 읽으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소개될 때도 대개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부흥에 관한 소고, 균형 잡힌 부흥론, 원래 원제목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 다음에 Religious of Assertion 신앙 감정론, 성령의 역사로 분별하는 표지들 이런 등등의 대부분의 그의 부흥과 각성에 나오는 이야기, 백금산 목사가 쓴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있을까?’ 그의 결심론과 일기들을 모은 것에 대한 이야기,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읽혔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상이 무엇이냐 하면 ‘불을 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 이라는 설교사에 길이 남는 엔필드의 설교, 그런 엄청난 부흥사 그 다음에 말씀에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부흥운동가, 설교가, 목회자로 알려졌는데 목회자는 아니었고 설교자인 부흥운동가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에드워즈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설교와 그리고 부흥운동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매우 중요한 초석인데 그러나 그것보다는 훨씬 다변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18세기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알려지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가로 많이 알려져 있고 특히 철학자로 많이 알려져 있고 그리고 역사서술가, 그리고 문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학생들도 영문학을 하는 학생들에 있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들을 읽는 것이 필독일 정도로 문학사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가 활동한 것이 18세기인데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7세기 말부터 문예 사변적으로 낭만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리고 낭만주의 운동은 결국 영국의 경험주의를 기반으로 두고 그것들이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소위 이야기하는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니아’ 라고 해서 신 아우구스티누스학 운동의 대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네오플라토니즘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부흥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면서 이제 경험주의에 영향을 받으면서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 인간의 도덕행동이 어떻게 결정되고 그래서 인간이 의지적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게 되는가? 에 대한 심도 높은 논의들이 일어나는데 이런 논의들이 일어나게 되는 사상사적인 배경이 그 당시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데카르트가 17세기 사람이니까 17세기의 데카르트가 소위 이야기하는 꼬깃도 에루구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던지면서 이전까지 있었던 존재론적 중심의 사고방식을 인식론 중심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런 지각의 변동은 사실은 데카르트 때에 획기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이미 커다란 격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계몽주의입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종교개혁이고 종교개혁 이전에 14세기 르네상스가 있고 13세기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기본 자체를 예전에는 14세기의 이태리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소위 이야기하는 레만츠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레드리코 2세와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 아는 다시스의 프란세스 이 두 사람이 르네상스 최초의 인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사고를 훨씬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까 그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러면서 사고의 중심이 이제는 우리 밖에 있는 우주의 체계와 신의 존재 이것만 중시하던 데서 돌이켜서 그 신과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주어지게 되면서 그러면서 말하자면 인간의 철학적 사유의 중심이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과감하게 옮겨지게 된 것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말이 꼬깃도 에루구숨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그냥 멍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회의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의식하고 있는 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계몽주의의 시작이라기보다는 거기에서 하나의 표지석을 세우면서 과감한 방향전환을 공식화하면서 거기에서 말하자면 신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본격적인 인본주의로 구체화되고 그 사상들이 지금까지 뻗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마저도 끊어져버리고 나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모더니즘의 구체적인 기초석이 기둥이 데카르트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가슴이 벅찬 이유는 뭐냐 하면 살아있는 신학자라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죽어있는 신학자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실에서만 살아있고 예배실에서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향해 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향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마음대로 가라 나는 개혁신학을 간다. 그러고 나서 구석에 모여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개혁신학에 감탄하면서 자기네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올 4월에 보스턴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느냐하면 데이비드 웰즈 박사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만나서 한참 달콤하게 대화를 하는데 이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지금 이메일 안에 누군가가 추천서를 써달라고 보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는데 그 내용을 대충 보니까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데이비드 웰즈 박사는 금세기의 매우 소중한 개혁신학자입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개혁신학만 하는데 이분은 미국 역사와 유럽 역사를 공부하면서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교회의 번영과 쇠퇴가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님은 진짜 보석이니까 잘 보고 배우라고 그랬습니다.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분의 책들이 그래도 부흥과 개혁사의 노력으로 다는 아니지만 꽤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안 읽습니다. 그리고 자기 책을 미국에서도 잘 안 읽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이런 이야기는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음으로 세상이 변화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옆에서 누가 들으면 이것이 과연 개혁주의 신학자와 그래도 개혁주의를 한다는 목사와의 대화인가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설명이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순수한 복음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어떤 영향을 주고 성결한 삶을 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럴 수 있겠지만 이 세상 자체를 그 복음으로 변화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까 강의를 잠깐 들었습니다. 양자된 사람의 싸움은 시스템과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시스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 없는 가치체계와의 싸움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상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상 자체가 그냥 하나의 개인의 불신자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이 감동만 주면 갑자기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섬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지에 대한 확고한 사상과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2012년에 죽은 앤서니 플루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인터넷에 엔서니 플루 라고 쳐보십시오. Flew입니다. 도망가다 와 비슷합니다. 이 사람은 무엇이냐 하면 20세기 무신론계의 거두입니다. 아버지가 영국 감리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무신론자로 30여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의 어마어마한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무신론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2010년에 세계 철학계가 깜짝 놀랄 선언을 한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 책 이름이 ‘There is God.’ 하나님은 존재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은 있다. 책을 써서 유신론으로 회귀를 한 것입니다.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유신론으로 돌아선 것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감격한 이유는 알겠는데 그러나 내가 예수쟁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자기가 그렇게 유신론으로 돌아섰다고 하니까 자기 딸이 ‘아빠 그럼 오늘부터 기도하는 거야?’ 그러니까 ‘아니 신은 존재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에서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믿는 그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의 책이 30여권이 넘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철학책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장대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은 의식 없이 이 세상의 정신을 따라가지만 세상이라는 그 자체는 하나의 장대한 체계를 가지고 우리에게 어떤 사상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천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사상에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대의 정신을 예수를 믿으면 천당을 간다는 복음 하나로 그런 시대정신과 싸워서 그 사상을 굴복시킬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야기가 되느냐하면 그럼 사상이면 모든 것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되긴 뭐가 됩니다. 화란에 한번 가보십시오. 아마 개혁주의의 유산이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계속 문을 닫고 있고 비어가고 있습니다. 비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와보면 너무 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유산들, 그리고 거기에는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개혁신학을 주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이너리티도 아니고 Marginality 입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개혁주의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입니까? 결국 개혁주의가 진정으로 한 시대에 영향을 끼치고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같이 가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단순하고 진실하게 복음을 선포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 앞에 중생하고 회심하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 이런 경건의 역사와 함께 그런 사람들을 장엄한 개혁신앙의 체계를 세워서 그 사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 없는 사상을 논파하고 그것보다는 이것이 훨씬 위대하고 놀라운 사상이라는 것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것들을 천착하며 살 수 있는 사상가로 만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한다고 그러고 개혁주의를 한다고 그러면서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목회가 어디 있습니까?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와서 개혁교회를 한다고 그래놓고 다른 교회를 빙빙 돌면서 시험 든 사람들이나 불러다가 속닥거리면서 저런 교회는 나쁜 교회라는 식으로 가르치면서 끌어안고 그러는데 그것이 목회의 윤리적으로도 양심적인 목회입니까? 개혁주의 목사를 하려면 그러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신학의 내용으로 충만하게 하고 그리고는 전도지를 들고나가서 전도를 해서 열심히 눈물로 기도를 해서 한사람이라도 자기 설교를 듣고 자기의 기도를 받고 그것도 안 되면 자기의 기도응답으로라도 그 사람이 회심하고 변화가 돼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되는 일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를 하라고 가르쳐주었더니 개혁주의에 속해있는 중요한 진리에 대해서는 올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작년 9월에 제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개강예배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 이야기를 하니까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개혁주의를 열심히 가르치니까 큰 칼을 가지고 가서 제일 먼저 목을 치는 것이 누구냐 하면 복음주의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아니 복음주의도 잘못된 것이 있으니까 고쳐줘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복음주의라는 것이 사실은 복음주의가 아닌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속주의, 무신론, 하나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이런 것들은 쉽게 이야기하면 복음주의가 개혁주의에게 비협조자라면 그러면 무신론이나 세속주의나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 리볼리즘 이것은 반역도들입니다. 그러면 큰칼을 가지고 가서 휘둘러서 그런 세상과 논쟁하고 무신론을 부수고 오늘날의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영지주의적인 같은 사고에 도전해서 그것을 꺾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칼만 들어서 옆방에 가서 복음주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주의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역이 균형을 이루어야하는데 왜 그럽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어느 하나에 있어서는 개혁주의는 무엇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 그림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사상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깊이 존경하는 이유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식의 폭넓은 가슴으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당시가 18세기였으니까 어떤 상황이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계몽주의가 유럽에서 이미 17세기에 일어나서 강탈을 하고 17세기가 어마어마하게 출렁거리는 노을이었다면 18세기는 쓰나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확 쓸고 가버린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화란에 있는 신학자들을 만났을 때 당신네 선조들이 이렇게 대단한 신학을 17세기에 구축했는데 18세기에 왜 그렇게 망조가 들었느냐고 물어보니까 딱 한마디 합니다. 계몽주의 때문에 그렇답니다. 심지어 어느 학자가 말하기를 한국이 이렇게 계속 기독교가 번영하는 것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말입니다. 계몽주의는 언제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에 계몽주의라는 사상도 문제지만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에 확 쓸려 가버린 것입니다. 어쨌든지 밀려들어오는 것이 계몽주의입니다. 계몽주의의 사조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을 최고의 가치기준으로 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을 가치기준으로 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조들이 계몽주의의 핵심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꼬깃도 에루구숨과 함께 과학기술과 문명이 엄청나게 폭발적인 속도로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17세기의 사람인데 18세기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줄지어 일어납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일어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들을 다 끊어버리고 물질세계 속으로 인간의 정신이 이동하고 이성으로 원인과 결과를 캘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다 신화처럼 취급해서 그것은 있다 없다 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각자의 주관의 문제라고 밀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체가 학문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통적으로 이 신학의 공부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신학이 망조가 들기 시작한 것이 18세기부터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상심하지는 마십시오. 정말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면 아주 탄탄하게 인문학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바로 그것이 준비된 사람입니다. 제가 최근에 책을 한권 쓰고 있는데 ‘신학, 누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는 학문인가?’ 라는 책을 쓰고 있는데 900페이지짜리 책입니다. 800페이지 정도 썼습니다. 그런데 책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무엇을 입수했느냐하면 16세기에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의 Curriculum을 입수했습니다.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최연소 입학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6세 7세입니다. 그래서 초등반이 6세 7세에 입학해서 16살에 끝나고, 고등반이 그 다음에 6년 내지 7년 공부를 합니다. 과목이 거의 2/3이상이 그리스 고전과 철학, 천문학 심지어 고등 반에서는 법률과 교의학까지 가르쳤습니다. 신학과 함께 말입니다. 그 Curriculum이 칼빈 생전에 짜진 것이고 그 후 100년이 넘도록 그 Curriculum이 바뀌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그 얼마나 적실성이 있는 신학교육이었습니까? 그리고 강조되었던 것은 어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목에 보니까 유대주석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약성경주석학을 히브리어 원전으로 공부합니다. 그러니까 개혁신학은 공부를 잘해야 개혁신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신학을 욕하는 이유가 그것을 제대로 하려고 들어가다 보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혁사상이라는 그 자체가 의미하는 바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개혁신학은 절대로 특별은총의 영역과 일반은총의 영역을 구분은 하지만 그러나 일반은총의 영역을 도외시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소위 이야기하는 영역주권설을 모두가 다 누리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그것은 너무 많이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반은총의 영역을 지나치게 확장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틴 루터의 To Kingdom Theory 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양쪽 입장에서부터 결국 스펙트럼은 이게 이렇게 오가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가면 극단적인 카이퍼리안이 되는 것이고 이쪽으로 가면 극단적인 이원론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방향은 이쯤 어딘가 자리를 잡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극단으로 가지 않더라도 분명한 것 하나는 두 왕국이 구별되면서도 사실은 일반은총의 영역과 특별은총의 영역이 구별되면서도 메르디디카 킹덤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것은 획일하게 울타리를 치고 두 영역이 구별된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두 가지가 한꺼번에 뭉개져버리는 완전한 일원론이 아니라 이것이 일원론인데 이 일원론이 평면적 이원론이 아니라 원뿔형 이원론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그래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사이에 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하나의 통으로 흐르는 것이지만 이 둘 사이에 높낮이까지도 부인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제의와 예배, 종교 이런 것들이 우위에 있고 그리고 하위에 일반은총이 있지만 그것들은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평면위에 원뿔을 세운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수의적으로는 구별이 있지만 평면적으로는 구분이 없는 그런 일원론을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사상의 체계를 구축할 때에 목표 자체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이미 쓰나미처럼 계몽주의가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에드워즈가 살던 시절에 사실 미국은 유럽에 명함을 내밀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고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가 쓴 글에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겸손하자 그리고 대륙에서 글을 발표할 때에는 먼저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본 다음에 보내도록 하자.’ 그럴 정도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 유럽은 꿈의 무대였던 것입니다. 박지성으로 말하자면 거기는 프리미어 리그이고 여기는 코리안 리그입니다. 그럴 정도의 격차를 가진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상이 형성되느냐하면 ‘그래도 구라파 사람들이 우리보다는 낫겠지! 그 똑똑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잖아!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한다잖아!’ 그러면서 사상이 밀려나고 우리가 6.25 난 이후에 미제를 막 수입하듯이 막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급급하고 있을 때였는데 사상적으로 그때가 누구의 시대였느냐 하면 뉴턴의 시대였습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결국은 뉴턴이 위대한 점이 무엇이냐 하면 뉴턴이 최초로 이 세계 안에 일어나는 모든 물질들의 운동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엄밀한 규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운동과 변화가 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프린키피아는 유명한 책인데 그 원리라는 프린키피아는 자연원리 안에 존재하는 수학적 법칙들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18세기에 미국에서 최근에 생산된 그 엄청난 뉴턴주의 물리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10명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여러분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 중에서 제가 권수를 깜박깜박하는데 제 13권인가에 보면 The Scientific Philosophic Writings 라는 제목이 달린 책이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완독했는데 그런데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물리학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삼각형도 수없이 나오고 운동도 나오고 추가 왔다 갔다 하고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면 이슬방울이 어떻고 다 나옵니다. 그것을 읽는데 무지무지하게 지루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결국은 엉덩이가 스티로폼 같아서는 안 됩니다. 바윗덩어리 같아서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이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털썩 주저앉아서 남들이 보면 헛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미친 듯이 그것을 공부해서 무엇인가를 뚫어야합니다. 한 700페이지정도 되는 책인데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것은 이상하고, 어떤 것은 황당하고, 어떤 것은 이치가 닿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는 물리학을 잘 모르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 깊이 감동을 받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자연법칙들을 다 설명하면서 거기서 그 법칙이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읽고 그리고 ‘아! 이러면 법칙만 있고 하나님은 없는 것이구나!’ 그것이 사실은 그 후로부터 확고하게 굳어진 사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강력하게 태동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그 수학적 법칙을 생물학에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토대로 ‘아! 이제 결국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를 해서 비를 내려주시는 줄 알았는데 수증기가 올라가서 내려오는 것이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때마침 물방울이 다 모여서 무거워서 떨어진 것이네! 에이 하나님이 없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감동이었습니다. 커다란 감동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확고하게 이 자연과학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목사의 삶이 얼마나 바쁘고 고달픕니까? 여기서 그런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눈이 아프고 뻑뻑하고 힘들면 그때 가끔 보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제가 Quantum Physics 양자역학에 대해서 몇 달 공부를 했는데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래서 18세기부터 있었던 양자역학의 발전사를 쭉 공부하면서 ‘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게 살아 계신가!’ 그리고 그것을 의미도 모르는 과학자들이 입증해내고 있는데 그들은 과학적인 사실을 발견만 할뿐이지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무 벅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교회에서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회심한 아이들에게 두 권의 책을 들려주자. 오른손에는 성경을 왼손에는 과학책을!’ 그래서 이 과학지식으로 거듭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화론 때문에, 뉴턴 때문에 어릴 때 배운 성경이 의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재해석해서 그들도 몰랐던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자는 그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점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그렇게 온몸을 던져서 쓰나 미처럼 밀려오는 계몽주의 사상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변증입니다. 온몸을 던져서 해낸 인물은 에드워즈뿐입니다.
몇 달 전에 화란에 갔을 때 신학자 몇 사람을 만났는데 너희 유럽 사람들이 우리 동북아로부터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지 아느냐고 이야기하는데 깜짝 놀랍니다. 미국의 상하 양원제도 그리고 데이비드 슘 그리고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중국의 공자, 맹자 사상 그리고 특별히 주역으로부터 통찰을 얻어서 닐스 보어가 1927년에 양자역학에 관한 이론에서 고전이론을 지지하던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을 꺾고 현재 양자역학의 금자탑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누어준 주기도문 책에 약간 실었습니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식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르짖는 모든 사상들을 향해서 확고한 개혁신학을 토대로 도대체 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인간들의 사고구조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믿는 것이 얼마나 허위인가 하는 것들을 다 찾아내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시경, 역경, 논어, 예기, 춘추, 중용을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에 보면 중국철학서에 대한 비평이 있습니다. 그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중보자의 그림자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순수한 동북아의 사고를 의지해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었던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비평론에 나옵니다. 그의 독서의 범위라는 것은 어마어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시 현대사상과 맞섰던 것입니다. 확고한 Reformed 의 사상을 가지고 맞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책들은 지금 현재 나온 것이 27책인데 사실은 26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책들이 여러 가지 책들이 있지만 그 책들을 여기서 다 설명한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지만 무슨 책을 읽으면 정말 좋을까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제일 좋은 것은 그냥 27권을 다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여태까지 제가 일평생 공부해오면서 제가 느낀 소회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충고를 하자면 이사람, 저사람 집적거리면서 읽지 말고 하나를 완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를 완전히 읽어서 그것이 중심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을 읽지 말고 충분한 검증이 된 위대한 신학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람 것을 다 읽기 전까지는 내가 성경 이외에 아무것도 읽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탐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통일된 자기 사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들은 읽기가 친절하지 않습니다. 우선 영어가 18세기의 영어이기 때문이고 이 사람은 라틴어에 굉장히 소양이 깊었기 때문에 라틴어를 머릿속에 굴리면서 영어를 쓴 것입니다. 문장 하나가 5줄, 10줄이고 의미도 알 수 없는 ‘That’ 가 Comma 로 수없이 연결되는 난점이 있습니다. 영문학을 한 사람들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18세기 문법책을 뒤적이면서 옛날 사전들을 가지고 부지런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우선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된 책도 꽤 있으니까 그것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번역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1권이 뭐냐 하면 Freedom of Will입니다. 의지의 자유입니다. 제가 이 책을 두 번 읽었습니다.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이 책을 놓고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그러면서 집어던졌다고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권은 해석에 대해서 논쟁들이 많으니까 제쳐놓는다고 하고 그리고 나머지 책들을 분류하면 많은 책들이 있는데 우선 여러분들에게 나누어드린 목차를 한번 보십시오. 목차에 보면 에드워즈와의 사랑이라고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Miscellany가 3권으로 되어있습니다. 구속사, 과학철학, 윤리학 이 D번을 동그라미 쳐보십시오. 이 D번이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제 8권으로 알고 있는데 이 윤리학 속에 들어있는 유명한 책이 ‘챌트 앤 익스포츠’ 라고 고린도전서 13장의 강의가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미덕의 본질’, ‘천지창조의 목적’ 이렇게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윤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을 내리게 해주는 중요한 철학적 작품들입니다. 특별히 천지창조의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이 두 권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삼위일체론이 있고 삼위일체론에서는 삼위일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신앙, 은혜 이렇게 다룹니다. 그 다음에 신앙정독론입니다. 신앙 감정론이라고 번역되었는데 Religious of Affection입니다. 그 다음에 자유의지론, 원죄론, 설교집이 있는데 설교집이 꽤 여러 권이 됩니다.
자 그러면 제일 먼저 본문으로 들어가서 18페이지를 보십시오. Miscellany입니다. Miscellany는 작문록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Miscellany는 사실은 완성본이 아니고 에드워즈가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신앙묵상집이라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고 신학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학, 철학, 미학, 윤리학, 심지어 과학, 문학, 역사가 다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에드워즈가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상들을 정리해놓은 것인데 어떤 것은 매우 짧지만 어떤 것은 대여섯 페이지가 될 정도로 아주 방대하게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뭐라고 보시면 되냐 하면 파스칼이 어떤 일생의 계획을 세우느냐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유장하게 증명하고자하는 프로젝트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상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모아서 나중에 그것들을 독서카드처럼 펼쳐놓고 정리를 하려고 했는데 못하고 죽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모아놓은 것이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이 미셀러니가 바로 에드워즈의 팡세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파스칼의 팡세는 다분히 순수하게 명상적이고 묵상적이지만 이것은 훨씬 더 조직적이고 학문적이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어떤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계속 요약을 해서 몇 페이지씩 끌고 가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에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그래서 에드워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문집이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모르겠는데 저의 경우에는 이 Miscellany였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 전공자들도 이 미셀러니를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셀러니가 주제가 다양하고 아주 난해합니다. 그래서 철학적인 사색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사상을 파편적으로 되어있어서 한눈으로 파악하기는 힘든데 다른 책을 읽으면서 미셀러니에서 나오는 에드워즈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다른 에드워즈의 저작들을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번역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일대학의 에드워즈 전집을 먼저 사시면 좋겠습니다. 복사판은 절대 사시지 마십시오. 복사판을 사는 것은 개혁주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그 복사판을 팔러 내 방에 왔다가 실컷 혼나고 갔습니다. 개혁주의 책을 그렇게 도둑질해서 무슨 개혁주의를 하겠습니까! 그런 것을 사면 안 되고 정본을 사야합니다.
그래서 미셀러니를 쭉 읽으면서 너무 감동 받았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지만 겨우 사랑의 하나님, 위대한 하나님이구나! 그리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구나!’ 를 느끼는데 한참 에드워즈에 깊이 빠져있을 때에는 금요일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에드워즈만 읽었는데 그렇게 읽어봐야 누구와도 나눌 사람이 없지만 혼자서 가슴 벅차서 밤중에 기도원에서 별이 가득한 것을 보면서 하늘에 에드워즈가 가득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Beauty의 반영입니다. 아름다움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나에게 ‘목사님 목회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말로, 글로, 가르침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예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다.’ 그리고 설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개혁주의의 대의를 핏대를 올리면서 외치는 것이 설교가 아니다. 개혁주의가 소중한 이유는 개혁주의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2년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 마스틴 박사를 같이 만나서 식사했습니다. 그분이 통탄을 하십니다. 오늘날 미국교회의 피상성에 대해서 통탄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로 돌아가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렇게 깊이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집 27권 가운데 아무데를 읽어도 했던 이야기를 하는 데가 없습니다. 어디를 읽어도 은혜가 안 되는 데는 있을지 모르지만 깊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어디를 펼쳐 읽어도 한 이야기를 또 하는 데가 없습니다. 어디를 펼쳐도 어려워서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은혜가 안 되는 데는 있지만 쉽고 만만하게 보이는 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상의 깊이입니다. 그래서 대화를 하면서 그랬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에드워즈를 보고 설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에드워즈가 살았으면 틀림없이 ‘설교는 먼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설교자가 그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사람들에게 전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위대하신 분인지 우리가 그분께 복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말했을 것입니다. 라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에드워즈의 사람입니다. 미셀러니를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과 자연의 세계 속에 인간의 본성, 심지어는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오늘 피었다가 지는 들풀 하나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깃든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희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뭉쳐있는 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속사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구속사가 매우 중요한 책이 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성경인데 성경이 하나님의 Beauty의 엑기스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사랑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 구속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주는 최고의 통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셀러니의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오늘날 각광을 받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의 삼위일체론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삼위일체를 진술함에 있어서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랐던 에드워드의 접근방식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서방신학자들의 전통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학계에서의 논의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동방교회의 전통과 서방교회의 전통이 삼위일체를 탐구함에 있어서 어떻게 다른지 아실 것입니다. 서방교회는 oneness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런데 어떻게 셋일 수 있는가를 설명해가고 동방교회는 셋에서 시작합니다. 셋에서 시작해서 그러면 셋인데 어떻게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을 수 있느냐를 쿼리시스 교리를 가지고 설명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 접근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보면 서방교회의 전통은 이상하게 플라톤을 많이 생각나게 만들고 동방교회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많이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동방교회의 전통들이 오늘날 삼위일체 연구에 있어서 각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게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빛들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2000년대 이후로 신학계는 지금 새로운 커다란 핫팟 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론 연구입니다. 그래서 21세기는 지금 신론의 부흥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이 돌아가서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몇 사람을 쳐보십시오. 예를 들자면 지지올라스, 라꾸냐, 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최근에 주목을 받는 예일대학의 작가 중의 한사람인 미로슬라브 볼프를 쳐서 포용과 배제 그리고 삼위일체와 교회 이렇게 검색해보십시오. 상도 많이 받은 책이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야기를 하면 또 많은 시간이 지나지만 어쨌든 대단한 사람입니다. 뭐냐 하면 이제는 이 신론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50년대에는 성경해석학의 부흥이 일어나면서 50년대에는 언약과 고대근동에 관해서 그 다음에 60년대는 실존주의에 관해서 그 다음에는 70년대 80년대에는 해방신학과 사회학적 성경해석학, 그 다음에 성령론, 교회론 이런 것들, 90년대에 가서는 문외적 해석학을 각광을 받다가 지금 신론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 결국은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내지만 인간들 속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이 답은 결국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스튜드 바커 같은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 같은 동방교회전통의 접근이 아니라 서방교회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평균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랐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동방교회의 전통에서의 삼위의 개별성을 먼저 인정하고 그러면 이것들이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과 생명 상호작용에 관한 모든 미덕에 관한 논의들이 결국은 다원성의 사회 속에 사는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수많은 빛들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랑이 무엇이냐고 정의할 때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타자와 관계를 맺는 신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타자와 선한 관계를 맺고 이미 맺은 관계를 심화해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해석합니다. 저는 에드워즈의 고린도전서 13장의 그 책을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 고린도전서 13장을 쓰고 있습니다. 1,000페이지 정도를 쓰려는데 제가 에드워즈를 읽으면 압도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쓰고 에드워즈 것을 읽어보자고 아직 읽지 않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요지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 은사보다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데 그런데 그 사랑은 어디에서 오느냐하면 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은혜의 결과물입니다. 은혜는 신령한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평생 신학의 화두는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은혜의 경험, 신령한 사랑의 경험도 해석이 매우 관계적인 설명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열렬히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딸아 걱정마라, 아들아 걱정마라. 내가 도와줄게.’ 그래서 내가 은혜를 받은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런 식의 생각은 근거가 매우 희박한 사고방식이고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아도 이것이 교회 전체적으로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하나님은 원래 요한 일서에 나오는 것처럼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고 성부의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고 부어진 그것은 곧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성부의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고, 아들에게 부어진 그 사랑은 아들의 신부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부어진 그 사랑에 신자들이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서 그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은혜를 받고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 받는다고 그래도 이 자체가 공동체적입니다. 절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교회 때문에 내게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그것을 받을 수 있어서 그 사랑 자체가 하나님께로 나와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그의 신부인 교회로,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들에게 들어가서 그것들이 다시 휘돌아서 우주적인 회귀의 사랑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를 타자와의 관계인 사랑으로 묶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여러분들이 들어보시면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의 설교와 비교하면 안 되고 교회역사에서 청교도들, 청교도 중에서 몇 사람은 제외하고 토마스 리즐리, 존 오웬, 윌리엄 퍼킨스, 이런 혁혁한 사람들은 제외하고 나머지 자잘한 청교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 진짜 가슴을 찌르는구나!’ 하면서 그 사람들의 설교를 읽다가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으면 그 사람들의 설교는 오막살이에 있는 느낌이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는 웅장한 성당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성당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 비유가 기분 나쁘면 설교를 읽고 ‘와, 청교도들의 설교가 은혜롭다.’ ‘와’ 때 50미터 동산에서 팔을 벌린 것이라면 이 에드워즈의 설교를 듣고 나면 한 2,744미터인 백두산에서 손을 뻗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웅장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사상의 힘입니다. 사상이 그런 것들을 번쩍 들어주는 것입니다. 미셀러니에서 그런 놀라운 그림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속사는 쉽습니다. 쉽게 쭉쭉 읽을 수 있습니다.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대개 구속사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의 종료와 함께 끝나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시대까지 끌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실 비판도 많이 받습니다. 너무 자의적이 아니냐며 동서방교회의 분리라든지 그리스도 교회의 핍박이라든지 이슬람의 승리, 이런 것들을 전부 다 해석해내는 것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어차피 다 못하니까 집에 가서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두어 시간 읽으시면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이런 이야기를 백번 들어봐야 소용없습니다. 다 내려놓고 또 원판으로 보십시오. 붙들고 무슨 소설처럼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처음부터 그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첫 페이지를 펼치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간증집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곡괭이를 들고 광산에 가는 마음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는 것입니다. 한 3년 읽기 전까지는 어디 가서 읽었다고 이야기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놀러 다닐 때 그 곡괭이질을 하면서 한권만 정신 차려서 읽고 이해가 가지 않으면 줄을 쳐서 두 번 읽고 안 되면 공부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아 이것이구나!’ 하고 은혜를 받고나면 자기가 이렇게 Upgrade 되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뜨거워지는 것과 Upgrade 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 앉아있는 사람들이 설교가 뭔가 웅장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언변술이 아니라 신학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를 한다고 하는데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주의 목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일평생 학생이어야 합니다. 탐구해야합니다. 부지런히 공부해야합니다. 그것도 만날 베껴서 올라가서 내일 써먹을 수 있는 설교집이나 읽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두툼한 신학 책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며 사상적으로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책을 읽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읽고 나면 느낌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정말 무식하구나!’ ‘왜?’ ‘나는 성경하고 신학밖에 모릅니다. 신학 중에서도 우리가 읽은 신학 책이 아마 눕혀놓으면 몇 권쯤 되겠습니까?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때 읽었던 만화책만큼의 분량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개혁신학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칼투만의 설명에 의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고 칼빈주의자냐고 묻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칼빈은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칼빈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눈에는 따라야할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수십 명의 앞서간 선배 신학자들 중의 한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에 강의하러 오기 전에 어느 정도로 열심을 품었느냐하면 에드워즈의 전집 27권을 책을 다 뜯어서 사람을 고용해서 다 스캔 카피를 했습니다. 오자를 6개월 동안 고쳤습니다. 그래서 파일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팔면 불법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이 몇 번나오는지 쳐봤는데 11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11번이 나오는데 마지막 11번은 칼빈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책의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저작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책으로 내놓은 저작이 18,000페이지 정도 되는데 그중에서 칼빈의 이름이 11번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냥 칼빈은 자신을 포함해서 함께 흘러가는 훌륭한 신학자중 한사람이지 자기가 목숨을 걸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인물은 아닙니다. 존 오웬에게 있어서도 칼빈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는 칼빈을 평가절하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모두 보편교회의 신학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일분만 설명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 우니베르따스 즉 보편성과 스빼끼니따스 즉 개별성이라는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니베르따스는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이후에 개혁파, 루터파, 재세례파, 등등 수없이 나눠지게 되었고 자유주의, 복음주의 등으로 나눠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긴 것이고 원래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를 장로교신학자냐? 아니면 성결교 신학자냐고 묻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그 보편성들의 신학을 함께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제대로 된 개혁신학을 하려면 속사도 교부부터 시작해서 초대교부시대, 2세기의 변증자들, 중세 등 수천 명의 신학자들을 어떻게 다 공부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신학자들을 공부하면서 넘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의 개별성은 무엇이냐 하면 많은 교파들이 있고 신학적 입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Reformed입니다. Reformed 중에서도 칼빈주의입니다. 아니면 재세례파야, 아니면 장로교야, 아니면 칼빈주의자 뱁티스야 그러면 자기 신학적 입장에서 자기들이 믿는 전통이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균형을 이루어서 이렇게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개혁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1)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시기 전과 후의 설교의 변화와 .....
답변1)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20년을 읽었다고 했지만 20년 동안 1년에 한권씩 꾸준히 한 것은 아니고 목회라는 것이 우연성이 있으니까 어떤 때는 한동안 읽지 못하기도 했는데 집중적으로 읽은 것이 한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저도 맨 처음에 읽을 때는 부흥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읽었는데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생각하면 큰 XXX 같은 설교자의 인상만 가지고 있었는데 에드워즈를 절반이상 읽을 때쯤 되어서의 2/3정도를 읽을 때쯤은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내 목회에 어떤 변화가 왔느냐하면 예전에는 그냥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만들어서 충성스럽게 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청교도를 읽으면서도 사실은 희미했는데 그런데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느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진정한 Spirituality 즉 Christian spirituality는 하나님이 손을 대신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두 가지가 있어야하는데 첫째는 Spiritual Sensibility 영적인 민감성인데 이것은 은혜와 관련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Knowledge 즉 지식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영화 아바타 같은 것을 보면 재미있어서 속편이 언제 나오느냐고 그러지만 Post Modernism, 스피노자의 사상, 영지주의, 오늘날 번져가는 New age 사상 같은 것을 읽고 아바타를 보면 어떤 때는 분노하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만큼 그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것이 과연 진짜 이 세상과 씨름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변증할 위대한 성도를 만들 수 있는 틀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의도적으로 설교시간보다도 강의시간에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도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청교도를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에드워즈를 공부할 때 더 확고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회심에 목회를 걸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몇 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에드워즈가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설교를 한 여러 편의 중요한 설교 중에서 교회 안에 있는 사실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설교를 들었는데 논문이 아닌 설교였는데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샅샅이 파헤쳐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으로 하여금 핑계를 댈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설교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설교를 잘 읽고 소화해서 설교를 했는데 한 3년에 평균 한 번씩은 이 교인 전체를 불신자로 보고 그럴 리는 없지만 여기 앞에 있는 장로님도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고 전체가 불신자라고 보고 설교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때는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것이 한 5년쯤 되었는데 한 4주 동안에 150명 정도의 회심 자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교구교역자들에 의해서 150명에서 200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 것에 있어서 아주 확고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는 나 개인의 경건의 생활에 너무 좋았습니다. 비록 성경이 없어도 밤에 조용히 둑을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아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엔조이 하는 것입니다. Pleasure, Happiness, Joy 이 세 단어가 비슷합니다. Pleasure는 감각입니다. 감각적인 것입니다. Happiness는 정신적인 기분 좋은 것이고 Joy는 깨달음과 함께 오는 만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한없이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위로받지 않아도 교회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고 고통을 받으면 주님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고 감격하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도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입니다.
질문2)
답변2) 조나단 에드워즈의 독서는 자기 서재에만 의존하지 말고 제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항상 한사람의 목회자가 죽으면 그 서재의 목록을 작성해서 옥션에 붙이기도 하고 그러는데 에드워즈 목사가 죽었을 때 그 서재의 목록 속에는 Institute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 혼자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마 작년에 왔던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자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가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에드워즈가 Institute를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촌을 통해서 Harvard Library의 책을 수시로 빌려보았기 때문에 그랬고 거기는 하도 시골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강요 같이 소중한 책을 구할 수 있었겠느냐는 생각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에드워즈가 누구와 Connection이 있었느냐하면 스코틀랜드의 목회자들과 강력한 Connection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노스햄턴을 사인했을 때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교회에서 청빙이 왔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거기에 가서 그 사람들하고 어떻게 함께 생활하면서 적응해가며 목회할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지 않고 스토크리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부지런히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사명감을 가지고 에드워즈에게 책을 공수해주었습니다. 그중의 한사람이 질레스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드워즈가 기독교강요라고 편지만 썼으면 득달같이 옵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가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칼빈의 책을 못 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에드워즈는 스스로 칼빈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합니다.
질문3)
답변3) 이제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이것만 대답하고 마치겠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는데 우선 첫째로 말씀드리는 것은 사실 기독교강요는 신학서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쓸 때 칼빈이 염두에 두었던 학력이 우리로 말하자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그 책을 썼답니다. 학습지로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순수한 경건을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는 성경을 읽기 위한 지침서가 말하자면 칼빈의 기독교강요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칼빈의 기독교강요 하나가 마치 칼빈의 신학 전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그 당시의 분위기와는 현저히 달랐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 최근에 이레나 바쿠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스위스에 있는 여성신학자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인데 여러분 혹시 칼빈의 볼쉐 논쟁이라고 아십니까? 볼쉐 논쟁이라고 하는데 볼쉐라는 사람이 칼빈의 전기를 씁니다. 칼빈의 살아있을 시절입니다. 그 전기에서 칼빈의 성적추행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동성애자였다고 고발합니다. 그리고 성지에서 쫓겨날 때도 결국은 그것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레나 바쿠스는 이 점에 대해서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자기는 판단하지 않고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헤르만 셀더스 교수하고 일치하는 의견은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칼빈에 대한 험담은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약 200년 동안 사람들이 칼빈을 읽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언제냐 하면 1560년경이니까 200년 동안이면 1660년 1760년경입니다. 그렇게 보면 서문 강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보고 두 번째로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누구의 책을 읽어야하느냐 하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칼트루먼 교수가 아직은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John Owen, Renaissance Man Of Catholic Church’ 라는 부제가 붙은 두껍지 않은 책을 씁니다. 얇은 까만 책인데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요지가 무엇이냐 하면 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특정 계파의 신학자가 아니라 저 멀리 속사도 교부부터 시작해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쭉 읽고 중세에 대해서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졸업식에도 라틴어로 연설을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읽은 것 중에 어느 자료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집중적으로 라틴문서를 읽은 것이 4년 정도라고 그럽니다. 그 문서가 어떤 문서냐 하면 턴홀티라는 독일의 출판사인데 거기서 지금 교부 시리즈를 라틴교부 시리즈와 희랍교부 시리즈를 한꺼번에 계속 편집을 해서 비평론을 내고 있는데 지금 현재 나온 책이 530권쯤 나왔습니다. 그 한 set의 가격이 일억이 조금 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이것을 전체 가지고 있는 학교가 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실린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그 천재가 한 번에 읽으면서 유장한 설교들을 소화해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도 사실은 그런 위대한 신학자들로부터 원천을 받아서 그것을 해석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칼빈을 The Student of Father 라는 분위기입니다. 교부들의 학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똑같은 입장에서 교부들의 신학을 공부하고 그 교부들의 신학을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의 사상, 그 다음에 18세기의 현대 자유주의 사상까지도 공부해서 기독교의 진리는 이것이라고 해냈기 때문에 사실은 설령 칼빈이 지금처럼 많이 알려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칼빈을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신학자중 한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읽고 글을 썼을 것이지 그 사람 하나에게 온전히 기대서 그런 추종자가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서문 강 목사님이 말씀하신 칼빈니즘의 부흥은 사실은 아브라함 카이퍼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칼빈의 사상을 재해석해서 새로운 카이퍼리아니즘을 이룩하면서부터 사실은 칼빈주의라는 것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20세기에 회자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에드워즈는 카이퍼보다는 훨씬 더 전시대 사람이었으니까 칼빈이 지금처럼 Favorite 한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 문집 전체에서 보면 11번이나 인용되었다는 것은 결코 작은 횟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저작 전체에서 수백 명의 신학자들이 나오는데 11번 이상 인용된 것을 찾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