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함과 인격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1:80)
녹취자: 박지성
저는 어제 신학함과 신앙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신학함과 인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 순간 불꽃같은 생애를 살았던 세례요한이지만 광야에서 30년 가까운 세월들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회자가 속히 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속성으로 하지 마십시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일한 아름다운 업적은 결코 그 사람의 시간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길게 살아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비록 짧은 생애를 사역했어도 지울 수 없도록 훌륭하게 사역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3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연단을 받고 몇 편의 설교만을 남기고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서 사라져갑니다. 세례요한이 선지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은 빈들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선지자의 소명기사를 전형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 소명기사는 히브리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였다 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소통 차원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함께 그에게 주어지시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그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완전히 변화된 가운데에 하나님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도록 이 선지자의 가슴 속에 이입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 그 시대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하는 것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의 선포와 꼭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같은 시대의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똑같은 말씀을 주셨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준비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냥 내버려두셨다가 사역을 시작할 때 확 부어주시면 사역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린 아이 적부터 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자라게 하셨고 거기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 주님의 선지자역할을 할 만한 사람으로 심령이 강하여져 갔다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요한을 헤롯은 정적으로 여기고 제거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거룩한 인격에 큰 두려움을 느끼며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의 거룩한 인격적인 특징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 말씀에 붙들려 살고자 할 때에 서서히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대부분 목회자로 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목회자로 세우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일 먼저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목회의 원리는 성육신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의 그 유명한 기독론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장황한 기독론이 나오게 되었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예수의 마음을 품어서 그 일을 하라고 타이르다가 예수님의 성육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절정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듣는 사랑이고 그저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랑이었는데 친히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한 자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모든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방법으로 나타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이런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서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는 흔히 목사가 되면 무슨 커다란 지위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요즘도 목사 안수식에 가보면 이것은 거의 차마 그 광경을 성직을 받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꽃다발을 들고 사람들이 모이고 심지어는 손에 부조금봉투까지 들고 와서 새카맣게 예배당에 들어와서 사진을 찍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말 아닙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을 목회자로 세우셔서 자기의 양떼를 돌보게 하는 것은 그 진리가 무엇이며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목회자를 통하여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의미에서 성육신이 되셨지만 목회자는 불완전한 의미에서 성육신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따라서 살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들리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목회자의 인격과 삶을 보면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샘플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게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지 않고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셔서 교회를 돌보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철저하게 복음, 진리와 관련된 사람입니다. 오늘날 목회의 주제가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예수 없이 세상에서 성공하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교회에 와서 예수 때문에 성공하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식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눈을 똑바로 뜨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 시대의 정신을 따라 흘러가는 것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가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지 그렇지 않으면 많은 양떼들을 데리고 엄한 데로 가서 많은 영혼들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평신도 시절에는 자기 혼자 잘못 믿으면 혼자 망하지만 교역자가 되어 사람들을 인도할 때는 자기가 올바로 믿지 못하면 많은 사람을 함께 데리고 불구덩이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인들에게 보여 주기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깊은 책임감과 두려움을 느껴야합니다. 그러니까 목회를 잘한다는 것은 곧 그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형상과 모양은 거의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인데 이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불완전하지만 인간에게도 주셔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뜻을 품을 수 있게 하는 그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지성과 의지를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유한 의미에서 불신자들은 그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죽어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지 못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타락하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모든 정신과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마음의 기능에까지 죄가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기 때문에 칼빈주의에서는 이것을 전적인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 자신의 본래의 고향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희미하게 알지만 그 하나님을 정확히 찾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영혼의 영원한 세계에 대한 갈망을 여러 방식으로 표현한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에 종교로 나타나고 자기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나 학문, 심지어는 쾌락으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스터턴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갈망을 그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이 세상 육체의 더러운 욕망에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종교를 만들어 내고 극단적인 쾌락에 자신을 매몰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구원해 거듭나게 하실 때 제일 먼저 이 하나님의 형상을 중생 안에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잘못 망가졌을 때에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타락한 인간을 통해 보았다면 이 형상이 하나님 앞에 순수하게 남았을 때에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누가 보여주셨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중적인 지식을 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본질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그 참된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성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또 우리들이 구원을 통해서 참으로 도달하여야 할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참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형상”, “이마고 크리스티”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을 소유해야하는가 보다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가를 생각해야하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팔복에 관하여 설교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를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쭉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자기가 무엇을 한 사람이 아니라 된 사람입니다. to do 혹은 to have의 사람이 아니라 to be 어떤 존재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버트 메레이 맥체인이라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 속에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닳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목회자였고 그가 기도실에서 기도한 후 강단에 올라서서 설교를 시작하면 설교가 아직 전개되기도 전에 성도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났고 저 사람이 저렇게 얼굴이 빛난다면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분이고 자신들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하고 생각하며 흐느껴 울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에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찬양)
널 보는 이 마다 주님 생각하리
그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아!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인격을 갖추어야합니다.
(예화) 몇 해 전에 강구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는 외과의사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의사중의 의사는 외과의사라고 강조하면서 외과의사가 될 자격을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독수리의 눈, 둘째는 사자의 심장, 셋째는 여인의 손길. 이 세 가지가 외과의사가 되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첫째 독수리의 눈은 탁월한 지식, 지성입니다. 사람의 배를 갈라놓았는데 염통이 어디에 있는지 창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면 수술이 되겠습니까? 어느 의사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의사가 얼마나 아는 것이 적은지를 여러분이 안다면 병원에 오기가 무서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탁월한 인간 몸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올바르게 그 환자의 몸을 다룰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사가 되는 것도 치열하게 공부해야합니다. “에이, 목사님 이 나이에 들어왔는데….”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나이에 들어왔으니까 젊은 사람이 8시간 자면 나이 드신 분들은 6시간 자야 되고 젊은 사람들이 6시간 자면 나이든 사람들은 4시간 자야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사자의 심장으로 담력입니다. 어느 병원의 복도에서 들으니까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2㎝만 찢으면 됩니다. 그까짓 맹장수술은 별 것 아닙니다. 너무 떨지 마세요.” 그럽니다. 문을 열어보니까 환자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간호사가 의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의사 못합니다. 의사는 정확하게 진찰하고 필요하면 머리를 박박 깎고 쇠톱으로 머리 뚜껑을 확 열어 버릴 수 있어야합니다. 뜯어내고 순두부를 만질 수 있어야합니다. 필요하면 톱을 들어서 쌩하고 뼈를 잘라내고 그럴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 담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지성이 없다면 확 갈라놨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여자의 손길입니다. 외과 의사들은 바느질 같은 것을 잘 해야 합니다. 못하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의 차이는 천지차이입니다. 기술입니다. 이것이 목회에 그대로 적용되는데 첫째는 지성으로 성경과 학문, 그 다음은 사자의 심장 곧 담대함과 영력, 마지막 여자의 손길은 목회의 기술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기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터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 배워서 어떻게 목회를 해야 되는지를 아주 몸에 익숙하게 익혀야합니다.
인격적으로 준비가 되어야 되는데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우선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리더십입니다.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목사가 되고나면 많은 사람들을 거느려야합니다. 그런데 그 거느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의해 거느림을 받는 교인들이 특성을 띄게 됩니다. 그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어떤 목사가 지도자로서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퀴즈를 내보겠습니다.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천 마리의 사슴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한 마리의 사슴이 이끄는 천 마리의 사자가 무섭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전자입니다. 한 마리의 사자가 천 마리의 사슴을 이끌고 그 사슴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통솔할 수 있을 때 이것은 천 마리의 사자가 오합지졸처럼 뛰어다니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깊고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목사가 한번 말하는 것을 이 세상의 대통령이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 따위로 신앙생활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면 펑펑 웁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의 소리를 개소리같이 듣습니다.
(예화) 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보니까 어떤 교회의 목사님에게 결혼 주례를 서 달라고 교인이 부탁을 했는데 그 교인이 혼전 임신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조용히 불러놓고 혼전에 임신을 했으니 교회에서 주례를 서줄 수 없다고 하면 좋았을 텐데 광고시간에 얘기를 했습니다. 아무개가 주례를 서달라고 하는데 애기를 가졌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용인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주례를 서줄 수 없다고 공지를 한 것입니다. 그 자매가 열이 받아서 소송을 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했고 그 목사님에게 명예 훼손 죄로 200만원의 벌금이 나왔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목사가 무슨 권한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여기가 회사 같으면 누가 까불고 그러면 “너 나가!” 그러면 끝이지 않습니까? 아니면 “너 월급 깎을 거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인이 아주 무식하고 신앙도 없어서 목사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면 아무 힘도 없습니다.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에 장년교인이 3,200명 정도 출석을 합니다. 나는 32,000명이 다니는 회사를 하라고 하면 놀면서 할 것입니다. 3,2000명 직원이 딸린 회사를 경영하라고 하면 목회하는 것보다 3분의 1의 힘만 들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가 힘듭니까? 자르면 되지 않습니까? 너는 퇴직. 너는 잘하는구나. 승진.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얼마나 충성하겠습니까? 교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예화) 존 오웬 목사님이 크롬웰시대의 학자고 목사인데 크롬웰이 그 유명한 영국의 청교도 혁명으로 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그 때에 옥스퍼드의 총장이 없이 부총장을 역임을 합니다. 크롬웰이 총장이 됐지만 바쁘니까 존 오웬 목사님을 두었습니다. 학교가 다 무너져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모금을 해서 대학의 빚을 갚고 재정을 확충하고 훌륭한 교수님을 모으고 면학분의기를 조성했습니다. 끝까지 공부 안하고 까부는 놈들을 전부다 학교 지하 감옥에 가뒀습니다. 여기서 공부 안하는 사람은 지하 감옥에 가둬야합니다.
소인배형 리더십이 있고 성자형 리더십이 있습니다. 소인배형 리더십은 뭘 하든지 자기가 조금 권력을 쥐면 똘마니들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딸랑딸랑하고 아부하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리더십이 아닙니다. 성자형 리더십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보람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소인배는 뭔가 일을 하나 시키면 사람들을 다 찢어 놓고 성자형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일을 하나 하고나면 많은 일꾼들이 세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시는 원리입니다.
(예화) 여러분은 혹시 몇 해 전에 서점가를 휩쓸었던 유명한 책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를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500페이지 되는 두꺼운 책으로 그는 영국의 탐험가이자 모험가로 남극을 정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난을 당했습니다. 거기서 그 사람들이 탈출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도움을 청해야했는데 그것이 바닷길로 1200㎞였습니다. 그런데 배는 발동선도 아니고 작은 돛단배였습니다. 그 때에 이 섀클턴이 구조대를 조직합니다. 조직할 때 자기가 일시키기 좋은 사람들을 데려간 것이 아니라 남겨두면 문제를 일으킬 사람들을 다 데려갑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남은 사람들이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개월 이상을 항해해서 1200㎞를 지나고 폭풍을 뚫고 결국은 구조요청에 성공을 합니다.
이 세상에 누구든지 마음에 맞는 사람하고 일하려고 하겠지 마음에 안 들고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하고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자형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 속에 있는 장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잘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괴로움과 고통은 자기가 짊어지고 편안하고 좋은 것은 성도들에게 돌리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자신은 잊혀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새겨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그런 리더십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본보기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회의만 하면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0년 후에 당회 때도 꼭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신학교 다닐 때도 같이 라면을 먹으러 매점에 내려가면 한 번도 돈 안내는 사람은 30년 후에도 그러고 삽니다. 그래서 주위에도 보면 누구도 점심을 얻어먹었다는 사람이 없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이타적인 리더십, 자신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을 세우려는 리더십을 가져야합니다.
(예화) 토요일 아침은 교역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대게 아침을 못 먹고 오지 않습니까? 어느 날 보니까 너무 딱합니다. 나도 배가 고프고. 그래서 빵집에 들러서 항상 빵을 한 30개 따끈따끈한 것을 사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한잔 타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4번쯤 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는 모양입니다. 담임 목사님이 만날 빵을 사들고 오니까 자기들끼리 조를 짜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목사의 가슴 속에는 하나의 DNA가 더 들어있어야 합니다. 노예의 DNA. 그래서 이렇게 회의를 하기위해서 모인다고 하면 제일 먼저 와서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이 사람들이 오면 뭘 마시고 싶은지를 생각해서 끓이고 준비하고 내가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 유익을 얻게 해주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유전자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예화)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건전하지 못한 구독자가 목회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책 받아보고 돈 떼어 먹고 전화 걸어서 무례하게 목사니까 싸게 해줘라. 아니면 공짜로 주면 안 되냐. 그런다고 합니다. 나는 정말 같은 목사로서 창피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전도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이 세상 어디에다 내다놔도 아주 세련된 신사가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숙녀가 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세련된 예의범절과 이 모든 것들은 교육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 속에 흐르는 인격적인 교통의 수단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여러분을 무시하고 거만하게 구는 사람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혹은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품격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교역자를 쓸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신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신사 같다고 해서 모두 교역자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기본입니다. 신사인가? 예절 바르고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고 절도가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20년 전에 열린교회를 7명의 성도들과 지하실에서 개척했습니다. 그리고서 지금은 잘 안 다니지만 그때는 사명감을 가지고 전국에 부흥회를 다녔습니다. 새 차를 사서 1년을 집회를 다녔더니 5만㎞를 뛰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설교테이프가 팔렸습니다. 한 해에 설교테이프를 1억 원어치를 팔았습니다. 교회 예산은 8000만원인데 테이프를 1억 원어치를 팔고 부서를 조직해서 교회에 돈을 보탰습니다. 그런데 그 테이프를 받아보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끝까지 돈 안내고 떼어먹는 사람들이 목사입니다.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웃으면서 넘기지만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할 것은 어디에 가든지 목회자는 자신의 인격 속에서 겸손함이 깃든 예의 바른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혹시 여러분, 개념 없음이라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제가 쓴 책인데. 개념 없는 사람들을 고쳐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개념 없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특히 목회자들 가운데 이 개념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탁월한 소명, 영성, 헌신, 선교의 열정 이런 것들은 이런 특수한 가치는 인간사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가치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력 있는 목사, 영적인 설교자가 되기 전에 남자는 먼저 신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 내다놔도 구김이 없는 사람. 양복이야 고급 양복을 못 입었지만 풍기는 풍모나 모든 예의범절에서 누구에게 깎이지 않는 우아함을 지녀야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목회를 해보면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을 해서 하루 품 팔아서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노동자들까지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폭넓은 사람들 누구에게도 다 받아들여지는 호소력을 가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예의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 예의입니다.
(예화) 저는 모태신앙은 아닙니다. 부모님들은 끝까지 예수를 안 믿으시다가 제가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려서부터 고모들을 따라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고모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저, 부모님은 시골에서 사업을 하셨고 같이 살았는데 우리 식구들은 교회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목사님이 심방을 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집에 예수 안 믿는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목사님이 오신다니까 목사님이 오셔서 조금만 잘 권면해주시면 모두 예수를 믿을 분위기였습니다. 목사님이 오신다니까 우리는 깜짝 놀라서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며칠 전부터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준비하고 해서 정성껏 상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오셔서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고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큰 상에 반찬을 차리고 목사님의 기도와 함께 흰밥을 즐겁게 교제를 나누면서 먹었습니다. 밥상을 물리고 과일과 차가 나왔습니다. 그때 눈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목사님이 그때 연세가 40쯤 되어 보였는데 밥을 먹은 것 까지는 좋은데 심방 계속 다니셨으니 피곤하셨겠지요? 벽에 등을 기대시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다리를 쫙 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젓가락으로 이를 쑤시는데 집요하게 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로 양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 가정의 복음화가 20년 후퇴했습니다. 그때 우리 식구들이 목사에 대해서 질려버렸습니다.
(예화) 어느 날 편지를 받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신학대학원 학생이 간절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목사님 존경합니다. 책을 읽고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모 신학대학원 졸업한 학생들입니다. 목사님을 찾아뵙고 꼭 인사를 드리고 신학적인 조언도 듣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면 우리 친구들 10명과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나도 굉장히 바쁜데 경상도에서 올라온다고 하니까 그러면 올라오라고 제가 3시간 정도 시간을 내겠다고 하고 점심도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10명 중에 두 사람이 지금도 이해가 안 갑니다만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화를 꺾어 신고 온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존경한다면서 배우고 싶다면서 그러면 넥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넥타이를 매고 기다렸습니다. 넥타이까지는 몰라도 겨울이니까 그저 양복을 입고 코트를 입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트레이닝복도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습니다. 순간 이렇게 보면서 이 학생들은 내가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밖에 생각이 미치지 못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성도들에게 심방을 갈 때 그렇게 심방을 가면 성도들이 용납을 해 주겠습니까? 정말 너무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깊이 문제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사람 교육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 목사님이 같은 노회의 목사인 나에게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있는 여전도사를 내 보내야할 텐데 정말 고민입니다.” “왜요?”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왜요? 사역을 잘 못합니까?” “사역만 못하면 안 내보내겠습니다.” 그럽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럼 뭘 잘못하기에 내보냅니까?” “이건 뭐 사역도 못하지만….” “뭐가 그럽니까?” 말하기도 창피하다고합니다. “뭔데요? 말해보세요.” 그랬더니 이 여전도사의 취미는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면 그렇게 먹는 것을 좋아해서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다고 담임 목사님 심방이니까 교인들이 상을 차릴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 가지 반찬들을 놓으면 기다리고 있다가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면 먹어야하는데 잠깐 한 10초 정도밖에 더 되겠습니까? “목사님, 먼저 드시지요” 그러면 어른이 먼저 숟갈을 뜨고 그러면 식사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른이 먼저 메인음식 중에 메인이 있으면 같이 숟갈을 들었어도 어른이 건드리기 전에 건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그 교인이 목사님이 오신다니까 생선을 찜을 해서 알록달록하게 잘해놓은 것입니다. 제일 먼저 공격해서 파괴해버리고 그러니까 하도 속이 상해서 한번 불러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심방 받는 사람은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런데도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젓가락질 잘못하다가 잘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제 지금도 일부 경험하겠지만 목회의 길은 인내와 견딤의 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심방가방을 들고 시골길을 가다가 고목나무를 봤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구멍이 뻥 뚫려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나무를 어루만지시면서 그럽니다. “나무야, 너는 목회도 안했는데 왜 이렇게 구멍이 뚫어졌니?”
(예화) 가난한 것을 참는 일도 참 힘듭니다. 제가 신대원에 다닐 때 얼마나 가난했는지 모릅니다. 신대원 들어가기 전에는 야간신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을 다녀서 생활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신대원에 다니고 나니까 너무 가난했습니다. 한 학기에 등록금이 45만원인데 교회에서 주는 사례금이 한 달에 7만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먹고 6개월을 모으면 등록금에서 3만원이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교회에서는 단 한번이라도 “전도사님 등록금 어떻게 하셨어요?”하고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있으면서 나는 이런 목회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너무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신대원에 다닐 때 제일 부러운 사람이 아침에 일찍 학교에 와서 컵라면에 김밥을 사서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에 들어갔는데 사찰이 어디로 갔으니 사찰 대신 잠깐만 와 있으라고 하고서 3년을 거기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소를 잘 하고 좋아합니다. 여섯 개의 석탄 난로를 연기 한 방울 없이 10분 안에 불을 다 붙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기술을 가져봐야 발휘할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성도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아침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오니까 까만 봉지가 놓여있었습니다. 보니까 고기입니다. 우리 집 사람은 일체 고기를 안 먹어서 혼자 부엌에서 고추장을 발라서 한 근을 다 먹었습니다. 누가 가져다 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한 성도분이 “전도사님 고기 드셨어요?” 그래서 “아, 제가 고추장을 발라서 정말 맛있게 볶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그 한우를 왜?” 돼지고기하고 소고기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잃은 것입니다. 그 정도였습니다. 내가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너무 너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도 참기 굉장히 힘들지 않습니까? 이때에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신학생인데 날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와주지 않으면 신앙이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연단을 더 받아야합니다. 아직 사람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저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치열한 경제적인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예화) 제가 맏이인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진작 수술을 했어야했는데 우리 집사람이 병원에 들어가서 수술을 하면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24시간을 진통을 했고 결국은 못 낳아서 수술을 했습니다. 너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연단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들도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고 하나님의 연단에서 합격하면 더 이상 그것으로 연단을 안 하십니다. 그 다음부터는 개척교회를 했는데 제가 제일 부자였습니다. 교수였기 때문에 교수 사례금을 충분히 받았고 교수를 그만두고서는 책을 막 쓰기 시작해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책을 썼는데 1년 동안에 들어오는 수입이 교수 월급보다 많았습니다. 내가 제일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심방 갈 때는 봉투를 다 챙겨서 가방에 넣고 다니며 나눠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초창기에 그렇게 개척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니까 교인들이 음식점에 가도 나만 쳐다봤습니다. 하나님이 진하게 주셨습니다.
그렇게 가난하다고 해서 한이 맺히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그것을 신앙으로 잘 인내하면서 그런 고난을 통해서 내가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이들이 아픈데 약값이 없어서 병원에를 못 가고 그럴 때에는 부모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전도사 당장 그만두고 어디 가서 돈 벌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예화) 그리고 가난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뭔지 하십니까?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나를 험담하거나 평판을 깎아 내릴 때에는 정말 목회하기 싫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교인이 한 100여명 정도 밖에 안 되는 규모의 교회였습니다. 온 교인들이 가족처럼 그렇게 서로 알고 잘 지냈는데 갑자기 청년부의 자매 하나가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숨길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직회에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했더니 이 자매가 계속 말을 안 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아이냐고 재차 물으니 목사님 아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사모님을 일찍 떠나보내시고 교회에 딸린 사택에서 혼자 사시니까 너무 안 되어서 이 자매가 가서 밥도 해드리고 빨래도 빨아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자 이제 목사님께 어떻게 된 것이냐고 난리를 쳤는데 목사님은 본인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확신을 하고 믿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가 결국은 출산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까지 목사님에게 떠맡겨서 퇴직금 한 푼을 안 주고 내쫒았고 노회에서도 면직이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때는 유전자 검사도 없었으니 쫓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러고도 그 자매는 교회에 계속 나왔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이 자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흥회 마지막 날 고백을 했는데 그때 그 아이는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목사님을 그렇게 괴롭히던 안수집사의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수집사는 당연히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장로들이 큰일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전국에 목사님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 강원도 탄광에서 광부로 5년 동안 지내면서 이 아이를 홀로 기른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나 같으면 5년 동안 그러고 있겠습니까? 당장 법원에 가서 명예훼손이나 무고죄로 고소를 하든지 아니면 조폭을 돈 좀 주고 사서 박살을 내든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5년 동안을 광부로 일하면서 이 아이를 홀로 양육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후임으로 온 목사님도 교회를 떠나게 되어서 그 목사님을 다시 청빙하고 온 제직들이 가서 석고대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거기서 돌아가실 때까지 성자처럼 존경을 받으면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인격 아니겠습니까? 저는 비교적 교회에서 평탄한 목회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죄인들하고 20년을 같이 사는데 무슨 일인들 안 겪어 봤겠습니까? 억울하고 생각할 때마다 그 목사님의 일화를 생각합니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예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할 때 볼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이단교리를 전파하던 사람이었는데 칼빈을 헐뜯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뭐라고까지 이야기 했냐면 칼빈은 어떤 여자든지 건드리지 못해서 안달하는 색광이고 여자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미친 사람이고 정신병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대적하면서 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악을 악으로 대적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악인을 대적하는 가운데 자신도 그 악인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누군가가 이웃에게 악을 행한다면 악을 당한 사람보다 더 나쁜 악이 이웃을 괴롭힌 그 사람 안에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종종 오해를 받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하고 화가 나니까 해명을 합니다. 그런데 해명을 하는 것은 정당한 과정일지 모르지만 이 해명을 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혀서 누군가를 비난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회자로서 정말 싫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쁜 것이 있으면 내가 당하고 참으면 나로서 끝나는데 여기서 튕겨서 누군가를 지목해서 그게 아니고 저놈이라고 하면 또다시 튕기면서 교회를 돌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예화) 우리교회에 있다가 다른 교회로 간 어느 여전도사가 겪은 일인데 그 교회는 얼마나 교역자들끼리 싸우는지 교회가 조폭집단도 아닌데 싸우다가 전도사의 팔이 부러졌답니다. 그리고 제가 전도사가 되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제직회를 하고 있는데 교육전도사 한 사람이 교회의 문을 발길로 뻥 차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 앞에서 “당신들 내가 전부 다 명예훼손으로 감옥에 집에 넣을 거야.”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했더니 교역자가 수련회를 가서 수영복을 입고 있는 자매들의 어깨를 끌어안고 찍은 사진들이 교회에 막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수련회에 가서 왜 수영을 했는지. 그리고 그냥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교회의 여 집사님들이 가만 안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직회에서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지 토론을 하니까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다 감옥에 넣어버릴 거라고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교수가 되어서 한창 강의를 많이 할 때는 제 수강생이 한 400여명 되었습니다. 리포트를 받는데 수없이 많은 리포트가 들어옵니다. 리포트를 쭉 보는데 이상하게 많이 읽어본 내용입니다. 그래서보니까 한 학생이 타이프를 쳐서 다른 학생은 명조체 또 다른 학생은 샘물체 또 다른 학생은 필기체로 낸 것입니다. 또 어떤 리포트를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것이네 하면 짜깁기를 한 것입니다. 또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출석을 부릅니다. 똑같은 사람이 다른 목소리로 여러 번 대답을 합니다. 그렇게 살아서 나중에 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결석했으면 정당하게 결석으로 처리를 하고 불이익을 받아야합니다.
(예화) 총신에서의 일인데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커닝입니다. 그런데 나이든 학생들은 막 보고 씁니다. 히브리어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난 여러분의 인격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저는 속으로 ‘아! 큰일 났구나 믿으면 안 되는데….’ 그러나 믿어버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보고 쓰는 것입니다. 학생 하나가 화가 나서 “우리 그러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똑바로 합시다. 보고 쓰지 맙시다.”하니까 저 뒤에서 어느 학생이 “그런 소리 하지 맙시다.” 그러면서 다 보고 씁니다. 그리고 제가 육군사관학교에서 근무를 했는데 한 학생이 커닝을 하면 반 학생들이 고발합니다. 무감독 시험입니다. 고발해버리고 고발이 되면 더블 백을 매고 전방으로 가야합니다. 육군 소위계급장이 목사계급장보다 위대합니까? 너무 창피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화) 여러분, 제 얘기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34살에 교수가 되어서 갔는데 애들이 커닝을 너무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아라하고 감독을 들어갔습니다. 그때 제가 감독을 들어가면 장학생의 분포도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선 책상에 지저분하게 쓴 것은 다 빼고 깨끗한 책상을 놓고 시험을 봅니다. 그런데 두 학생이 보고 쓰다가 걸렸습니다. 졸업시험인데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영점이고 전 과목 F이며 졸업을 못한다고 했더니 이 녀석들 두 명이 3일 동안 교수실에 와서 한번만 봐달라고 아침 9시에 와서 6시까지 안 나가는 것입니다. 한번 봐달라는 것이 겸손하게 회개하며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귀찮게 개기면 어떻게 되겠지 그래서 안 된다 안 된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한 녀석이 승질을 팍 내면서 “교수님은 신학교 다닐 때 그럼 한 번도 커닝한 적 없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여러분도 누가 그렇게 물어보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런데 내가 한 번이라도 봤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없다.” “교수님 의로우십니까?” “나는 한 번도 내가 의롭다고 말한 적 없다. 그러나 커닝을 한 적은 없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한권 읽고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면 첫 페이지부터 한 5페이지 읽고 붕 띄어서 뒤에 페이지로 갑니다. 책을 읽지도 않고 리포트를 씁니다. 다 거짓입니다. 그렇게 해서 뭐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목사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신학생들입니다. 이건 아예 신학교 다닐 때부터 잘 길들여집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평생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할 지침을 드립니다. 구원 이외의 모든 공짜는 나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화) 어느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인데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학생들이 막 불평을 합니다. 그 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있는데 그 교수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학여행을 가서 학생회 임원을 따라다니면서 “야, 나 이거 하나만 사줘. 이것도 하나만 사줘.”했답니다. 아니. 자기 돈으로 사지 왜 그 학생들에게 그럽니까? 학교의 돈이 물론 있었겠지만 교수 사주라는 돈입니까? 학생들이 질려했습니다.
난 20년을 목회했지만 한 번도 교인들에게 분명한 이유가 없이 밥을 얻어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돈을 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면 안 갑니다. 물론 특별히 계획이 있는 자리면 모르지만 왜 남에게 신세를 집니까? 그래서 어떤 생활을 하냐면 무조건 공짜는 나쁜 것이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전도사로서 가난한 시절부터 또렷하게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가난하다고 성도들이 “전도사님, 이것 좀 쓰세요.”하고 돈 5만원이라도 넣어주지 않습니까? 그래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이런 것 교역자가 받게 안 되어있습니다.”하고 두세 번만 거절하면 성도들이 여러분을 다른 사람으로 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습관입니다. 저는 남이 나에게 뭘 사주면 굉장히 마음이 불편하고 힘이 듭니다. 오랜 습관에 의해서 젖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공짜를 싫어합니다.
(예화)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와 같은 시찰회의 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이 심방만 가면 “아!, 이 안경이 테가 왜 이렇지? 갈아야할 텐데….” 이것을 심방가실 때 약간 여유가 있는 특정한 집에 가서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보다 못해서 그 집사님이 “목사님, 그럼 저랑 같이 가시죠. 제가 안경테 하나 해 드릴게요.” 그러고 갔습니다. 그 시절에 안경테를 저는 만 원 정도 주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가서 이것 저것 써보다가 “이게 제일 맘에 드는군.”하고 턱 집은 것이 15만 원짜리였습니다. 그때 제 사례비가 8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쓰디쓴 마음으로 돈을 대신 내면서 이 목사에 대해서 교인은 정이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갖고 싶으면 자기가 돈을 모아서 사지 왜 그렇게 합니까? 어느 교회에서는 300원 때문에 목사님이 사임을 했습니다. 재정부로 청구가 올라왔는데 사택에서 온 청구서입니다. “개줄 300원.” 개줄을 사는데 300원을 썼으니 교회에서 달라는 것입니다. 재정부에서 목사님의 사택이지만 개줄을 사는 것까지 재정에서 나가야 하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성질이 파르르해서 “내가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3시쯤 사표를 내겠다고 했는데 5시쯤 당회가 모여서 수리를 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밥을 못 먹고도 냉수를 먹고도 이를 쑤시면서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은 별로 실감이 안 나겠지만 좀 살아보십시오.
(예화) 잘 들어보십시오. 8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실화입니다. 어느 한 교회에 전화가 왔습니다. 따르릉! 하고 전화가 왔는데 목사님이 전화를 받으니까 묘령의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누구십니까?” “저는 아무개 교회에 다니는 아무개 집사인데요.” “그런데요?” “목사님, 한 달에 한 번씩 기독교 방송에 새벽설교 내보내시죠? 제가 그 설교를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모릅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니까 “사실 저는 여행사를 하고 있는 사장인데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셔서 큰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이 제가 복을 많이 받았으니 우리나라 목사님들에게 성지순례를 거저 시켜드리라고 하셔서 목사님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났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30명의 목사님을 모시고 성지순례를 시켜드리려고 하며 모든 경비는 저희가 주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진짜 편지가 오고가고 하더니 때가 되어서 짐을 싸가지고 30명이 공항에 모였는데 그 중에 아는 목사도 있고 모르는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집트부터 시작해서 11박 12일로 여행을 하는데 그것이 80년대 중반 때에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가는데 사장이 얼마나 바쁠 텐데 12일 동안 다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드는 것입니다. 최고급 호텔에 제일 좋은 음식으로 대접을 하고 가는 곳마다 따라와서 심부름을 하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렇게 너무 흡족하게 대접을 받았는데 30명 중에 그 여자가 어느 교회에 다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밤에 숙소에서 자려고 들어갔는데 마지막 모임이 있으니 회의실로 모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쉬다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그때 한창 치열하게 투쟁하던 이단의 깃발이 있었습니다. “목사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주님이 대주는 비용으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사진도 남았고 증거도 남겼습니다. 자 이제 우리에게 협조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국교회에 가서 고발을 당하시겠습니까?” 그중에 어떤 사람을 돌아와서 면직을 당했고 어떤 사람은 징계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양심적으로 신고를 했고 어떤 사람은 거기에 협조를 했습니다. 실화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소유개념에는 차이가 있는데 미국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니면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국 사람은 주인이 없으면 자기 것이라고 생각을 한답니다. 미국에 갔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로수를 사과나무로 심어서 사과가 떨어지니까 사과를 모아서 나무 아래에다 놓고 가더랍니다. 왜 가져가지 거기에 두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아저씨 이것 우리 것 아니에요.” 소유관념이 정말 없는 사람들 중에 없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최근에도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교회의 재산을 자기 이름으로 등록을 하고 은퇴를 했는데 교회에 안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물질에 있어서 가난하게 살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너무 호사스럽게 살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이 뭐냐면 물질에 대해서 깨끗하게 살아야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보면 어떻게 하든지 교회에서 돈을 타내서 쓰려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별로 교역을 잘 못합니다. 그런 것에 초연해야합니다.
(예화) 저희 교회의 1년 예산이 80억이 좀 넘습니다. 저희 교회 교인이 4500명 정도 모입니다. 여러분이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제가 그 교회 담임목사인데도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은 없습니다. 요즘도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면 소위 얘기하는 판공비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목사님은 사석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이 3000만원이다. 썼으면 영수증이 필요하고 영수증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지출이면 교회의 돈으로 쓰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목회자 자신이 처음 목회 시작할 때부터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세금 때문에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들에 몇 억 세금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금을 내야합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교역자들이 전부 세금을 냅니다. 세금 내는 액수가 일 년에 6000만원입니다. 그것을 왜 합니까? 교회도 이 세상 나라에 속해있으니까 법을 따라야합니다. 제가 무슨 문제를 느꼈냐면 부목사님들은 생활에 부족하지 않게 드리는데 세무서에 무직자로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카드도 안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세금을 낸 적이 없으니까 영세민 취급을 해서 아빠가 수입이 0입니다. 그러니 유치원을 공짜로 받아줍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날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 너희들이 어떻게 영세민이냐. 당신들 때문에 더 가난한 아이들이 못 들어가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금을 냈더니 온갖 불이익이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복음자리 주택도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습니다. 보험료를 내니까 카드를 만들어 주고 문자로 3000만원~5000만원까지 대출도 해준다고 연락이 수시로 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어느 날 목회자가 된 다음에 까만 가운 탁 걸칠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태도를 분명이하고 살아가야합니다.
(예화) 제가 있던 교회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교역자실의 분위기가 나쁘고 사람들이 자꾸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했더니 봄 심방 때 받는 팁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가지고 싸웁니다. 왜 그러냐면 부잣집 구역을 맡은 교역자는 봉투가 많이 생기고 달동네는 별로 안 생겨서 달동네 교역자들이 항의를 한 것입니다. 똑같이 고생하는 교역자인데 너희만 봉투를 많이 받고 우리는 적게 받아야 되겠느냐. 그래서 우리도 호텔처럼 하자. 다 모아서 똑같이 나누자. 그러니까 한쪽에서 우리는 원래 옛날부터 하던 것인데 왜 우리 것을 빼앗아가려하느냐고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교회가 무슨 호텔이나 음식점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태도는 어느 날 목사가 된 다음에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견해가 확고해져서 그렇게 원칙을 따라서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자연스러워야합니다.
(예화) 외국에 선교적인 일로 출장을 가는데 어느 집사가 따라왔습니다. 굳이 공항에서 나를 잡아끌고 면세점에 가자고 합니다. 명품 백을 하나 사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짝퉁인데 가방만 명품하면 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됐다고 해도 자꾸 잡아당깁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대로 “널 보는 자 마다 주 생각하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살았던 이태리 사람 가운데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악기 제조공이었습니다.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하프 등등 약 1100개 정도의 악기를 만들었는데 지금 현재 남아있어 연주에 사용되는 것은 5~60개 정도라고 합니다. 특별히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유명합니다. 저도 그것을 봤는데 45억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악기가 탄생하는 줄 아십니까? 악기제조공의 탁월한 재능도 있지만 나무의 문제입니다. 나무가 아주 가파른 곳에서 바람을 많이 맞으면서 간신히 자랍니다. 이렇게 옹지고 차지게 자란 나무를 사다가 깎고 말리고 소금물에 집어넣고 말리고 해서 터지는 것을 다 버리고 변형 안 되는 것들을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바로 그렇게 우리들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과 똑 같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훨씬 나을지 모르지만 정말 많은 교회에서 전도사들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합니다. 그런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는데 어떤 교회에서는 전도사를 사람 취급도 안 하고 거의 일꾼취급을 합니다. 우리 때에는 정말 더 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 년에 한 번씩 돈 더 주는 교회로 메뚜기처럼 옮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고생을 많이 하면서 반응하는 방법이 둘 있는데 하나는 한에 맺히는 것입니다. 은혜로 이것을 소화하지 못할 때 그 때에 한에 맺히게 됩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아주 굽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시어머니한테 지독하게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서 며느리를 받아들이면 며느리를 잘 이해합니까? 아니면 시집살이를 더 시킵니까?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당했던 것을 그대로 자기 부교역자들에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오래 참으면서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큰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마음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목회하면서 참 감사한 것이 제가 7년을 여러분 같이 야간 신학교 4년, 신대원 3년을 공부했는데 그동안에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특히 신대원 3년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입학시켜주셔도 그 이상은 더 잘할 수 없게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7년 동안에 감사했던 것은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난과 시련, 고통 속에서 기도는 나의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신대원 졸업반이었을 때에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 가득한 때였습니다. 학교는 기약 없는 휴강에 들어갔고 저는 인생의 가장 쓰라린 고난의 때를 맞았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8년 동안 사역을 했는데 사임을 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학교근처로 이사를 왔습니다. 오래전에 하나님이 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저에게 소명을 주셨는데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이상하게 교역자들이 몇 명 있는데도 나한테만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 4개의 구역, 토요성경공부, 주일성경공부 그리고 교회 청소까지.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감당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월급은 빠듯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가 계셨는데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해서 퇴직금을 가지고 전세를 얻었는데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도망가고 매일 빚쟁이가 와서 이 집을 내가 경납 받았으니 빨리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숭실대와 총신대 쪽에서 최루탄이 터지면서 우리 아들이 100일쯤 되었는데 그것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의료보험의 혜택도 없이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가야하는데 한 번 가면 15,000원이 들었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3학년 때부터 시간강사로 히브리어를 가르쳤는데 월급이 15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방학 때는 안주니 그 15만원이 전부였는데 모아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하루에 15시간씩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하고 책상에서 일어나다가 몇 번을 쓰러졌습니다. 그때 그것이 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아무데도 기댈 곳도 없고 희망도 없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학생들은 휴강이라 다 흩어지고 남은 학생들은 한가롭게 배드민턴도 치고 족구도 하고 뭘 먹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하는데 나는 공부하다가 오후 4시나 5시쯤 되면 5층 신관에 있는 채플실로 걸어올라 갔습니다. 언제나 조용했습니다. 거기에서 마음을 쏟으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 이외에 아무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소리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는 성격이 아닌데 워낙 갈급하니까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세 시간씩 매일 기도했습니다. 6월~8월 그때였는데 더운 여름철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티셔츠와 속옷, 바지가 전부다 땀으로 다 젖어버립니다. 짜면 한 컵씩 물이 될 것처럼 그렇게 비같이 땀이 쏟아졌습니다. 기도해도 무엇인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5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시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주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목회의 길을 걸어가라고 그러셨는데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리고 주님도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도 믿음으로 이 고난을 이겨야지 그러고 5층에서 걸어 내려옵니다.
(찬양)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다시 계단에 주저앉아서 울고 또 울고 내려오다가 또 울고 그렇게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그때에 제가 애독하던 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6권을 샀는데 4권은 한글이고 2권은 영어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6번을 읽었습니다. 이 사람은 21살에 회심을 하고 24살에 선교사로 헌신해서 28살에 꽃다운 나이로 죽었습니다. 아주 소수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생애와 일기를 영국에서 출판했을 때 이 책이 헨리 마틴, 짐 엘리엇 같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서 선교지를 향하여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생일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도하기로 결심하였다. 기도하러 숲속에 들어갈 때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숲속에서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땀과 눈물을 쏟아 부으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열렬히 기도했다. 기도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의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눈 덮인 언덕에 엎드려서 잃어버린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했고 그가 기도하다가 일어난 자리에는 폐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각혈한 붉은 피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자신의 살 한 점, 피 한 방울까지도 쏟아서 주님을 섬기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젊음의 날들을 나태와 허비, 그리고 위선과 가식 속에서 보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같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의 자식으로서 나는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치열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사역하는 교회 자체가 별로 기도하지 않는 곳이 많지만 예전에는 전도사를 뽑을 때도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말씀을 얼마나 열렬히 전하는지 이런 것들을 봤는데 요새는 봉고 면허를 본답니다. 인생은 속히 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열심히 잘 준비되어서 딱 한번 확 타오르고 죽는 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죄도 없으시고 능력도 한없이 많으신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실 때 고난을 당하셨다면 우리가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상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간절히 당부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본문이고 설교자의 삶은 각주입니다. 각주를 잘 쓰면 설교가 어려워도 그것을 읽으면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의 삶이 설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설교는 훌륭할수록 위선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린 나이이고 아직은 안수 받지 않은 사람들임에도 아주 분명하게 선이 서서 교육자로서의 인격적인 품위와 경건, 거룩함,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거룩한 당당함 이것을 가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오늘 마음을 쏟아 부어서 간절히 기도하고 공부해야합니다. 그렇게 보내지 않는 오늘 하루는 어제의 죽어가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고 여러분에게는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치열하게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여러분 자신이 인격적으로 준비가 될 때 그 때에 정말 존재 그 자체가 아름다운 사람이 될 때 정말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그 자체가 선포입니다. 정말 치열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신학교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