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에 있어서 보편성과 개별성
녹취자: 이배훈
제가 오늘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신학공부에 있어서 보편성과 개별성 문제입니다.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신학에는 여러 분과들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닐 때 의문이 있었습니다. 첫 시간에 모든 교수님들이 오셔서 자신의 과목을 공부하지 않으면 신학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저 분들도 하나밖에 공부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다 공부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어떤 한 성도가 로마서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 목사님을 찾아가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 목회자는 알기 어렵고 교수님을 찾아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 교수님은 조직신학자라서 성경은 잘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분을 찾아갔더니 구약학자라서 신약은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약학자를 찾아갔더니 공관복음서 전공이라서 서신서와 관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신서를 전공하는 분을 찾아갔더니 요한서신서 전공이라서 사도 바울 서신을 전공하는 분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또 찾아서 갔더니 그 분은 데살로니가전서 전공이라고 하셔서 로마서를 전공하는 분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로마서 9장에 대해서 물었더니 그 분은 로마서 8장이 전공이라서 9장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제가 외국에서 학자를 만났을 때 전공에 가까운 질문을 하였는데도 딱 잘라서 자기가 얘기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답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학문의 아우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죽하면 9장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단호하게 얘기할까요? 9장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것이 8장에 대한 그의 연구가 심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목회를 해보니까 그런 식의 신학교육을 목회 현장에서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순서가 목회를 잘 하는 순서가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도 목회를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목회를 잘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식의 신학 교육에서는 오히려 공부를 잘 할수록 목회 현장에서는 부적응할 수 있기 때문에 신학교 3학년 쯤 되면 선배들이 이런 것이 다 소용없고 다시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합니다. 저도 전공이 있었고 8년 동안 교수 생활을 했지만 저의 실제 공부는 교직을 그만 두고 목회에 전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 오면서 어느 한 순간에 깨닫게 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I. 서론: 역사적으로 분류된 신학의 분과들
역사적으로 신학의 분과들이 나뉘어져 왔습니다. 교부, 중세, 종교개혁 이후까지는 이론과 실천, 교회와 신학, 성경과 하위 일반 학문들은 단일화하고 통합된 학문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계몽주의가 들어오고 나서 신학이 전문적인 학문 영역으로 인식됨에 따라서 학제간의 높은 벽이 생기고, 독립적이고 다양한 분과들을 만들어서 세분화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반 학문에서도 다양한 분과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현재에 와서 단일화 되는 것이 너무 어려우니까 consilience 문제가 나왔습니다. 교부, 중세, 종교개혁 시대에는 신학과 목회가 분리될 수 없었고 하위 학문들은 성경과 신학의 체계화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성경 석의, 교의 신학이 단일 분야로 공부되었고 그 외의 분야는 모두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조직신학 전개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일곱 개의 제목은 칼빈이 기본적인 골격을 만든 것이고 그 이전까지는 논제 방식이었습니다. 영혼에 대해서 혹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와 같이 논제가 정해지고 그 논제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교리를 추출하는 것과 교리를 삶에 적용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같은 사람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결과물을 사람들에게 줘서 경건을 촉진하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력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신학 교육의 목표였습니다. 그런 지식을 가져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교부시대를 보면 목회는 기본적으로 크리스천 사상가thinker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그 세계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과 윤리는 분리되지 않고 사상의 토대 위에 윤리가 서는 것입니다. 윤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사상에서 나온 삶의 방식(the way of living)입니다. 사상은 지성에 관계된 것이고 윤리는 의지에 관계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이교도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상과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과 윤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보여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개의 기둥이 기독교의 힘인데 이 두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은 체험이나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삶, 그리고 내적인 변화 등 모든 것들이 통합된 것이었습니다.
근대 합리주의에 와서는 신학은 교회의 목회와 실천적인 요소와 구별되는 전문적인 학문이 됩니다. 그래서 교의학과 성경 석의가 별개의 분야로 분리되고 신학은 성경, 조직, 역사, 실천신학이라는 전통적인 4학제로 서로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 교리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 역사, 실천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근대 과학 정신이 지배하는 대학에서 환원주의(reductionism)가 생깁니다. 환원주의란 복잡한 입체를 평면으로 바꾸어 인과관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현상을 입체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하나의 직선적인 이유를 기계주의 환원처럼 만듭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인문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에 적용합니다. 이것이 신학에까지 침투합니다. 이러면서 많은 분야들이 세분화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신학이 종교학 속으로 들어오게 되어 종교학 중의 한 분야가 됩니다. 신학은 기본적으로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은 근대 이성주의에 의하면 학문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이성으로 출발해서 이성으로 결론을 내려야하기 때문에 이성이 아닌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것은 학문의 구조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학문은 순수하게 자기에서 시작하는 학문이 있고 상위 학문에서부터 지식을 받아서 출발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음악은 수학을 기초로 해서 나오고 광학은 기하학을 기초로 나오고, 광학은 기하학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학문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음의 질서의 아름다움이 수학적이라고 생각하여 수학을 모르면 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음이 지나갈 때 가운데 있는 것이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과 어울리는데 그것이 정확하게 수학적인 공식에 의해 이어집니다. 이것이 대위법입니다. 악기들이 많이 있고 각각의 악보들이 있는데 한 번에 음이 울릴 때 그 음이 서로 어울립니다. 그것이 화성법입니다. 대위법과 화성법은 결국은 수학적인 질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합성시켜서 엄격한 수열에 의해서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그 당시에 음악가들은 어떤 수의 배열이 아름다운 정동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성적인 배열로 될 수도 있고 감각적으로 느낀 것을 풀어보니 이성적인 수로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학을 토대로 음악이 이루어졌다는 것에는 지금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이후에 포스트모더니즘 음악이 나오고 무음조 음악이 나오는데 들어보면 공포영화의 배경음악 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명제들을 신학으로 받아들여 배경으로 삼는 것이 학문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기하학만 학문이고 광학은 학문이 아니다 혹은 수학은 학문이고 음악은 학문이 아니다 라고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II. 보편신학과 개별신학
1. 신학의 보편성과 개별성
신학에는 보편성과 개별성이 있습니다.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를 무 자르듯이 자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지상의 보편교회가 한 권의 표준 교과서를 가지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많은 신학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결교회에서 신학을 시작하고 감리교, 천주교에서 시작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신학을 시작하기 전에 장로교의 교인이었습니다. 왜 거기서 시작하였는지를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장로교를 들어갈 때 모든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어느 신학이 가장 성경적인지를 판단하고 예수 믿기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들어가서 거기에 동의를 하고 신앙적인 체험도 쌓이니까 감리교인이 되고 장로교인이 됩니다. 그 신학은 이미 결정체로서 우리에게 있지만 그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칼빈 한 사람이 우리에게 묶어서 준 것도 아니고 그대로 가지고 있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흘러오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보편신학은 이렇게 정통신학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비치고 있는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유산들을 가리킵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의 계시로부터 시작되겠지만 가깝게 가면 사도 시대 이후 속사도 교부들이 있고 초대교회 교부들이 있고 중세 신학자들이 있고 종교개혁자들이 있고 이후에 개별신학자들이 나옵니다. 보편신학이 있고 그리고 개별신학이 나서 우리는 그 어느 하나에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을 20여년 공부하고 나서 생각해본 결과는 청교도라고 들었으나 청교도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존 오웬의 깊이는 칼빈의 깊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견인 같은 논제에 있어서도 두꺼운 책을 읽다보면 심오한 깊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비브리칼 씨올로지(Biblical Theology, 성서신학)에서는 수많은 이방의 문헌들, 특히 그리스 로마의 신화의 문헌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존 오웬 전공자인 칼 트루먼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웬은 신학적인 통합성을 드러내는 사려 깊은 신학을 생산해내려고 많은 양의 교부와 중세의 문헌을 읽고 인용하며 담론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신학 역사에 관한 훈련을 잘 받은 자였다. 신학적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성경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진리를 표현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과거의 위대한 문헌을 면밀하게 조사하는 작업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래서 오웬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개혁파 보편교회주의자(Reformed catholics)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웬은 문화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맥락 안에서 지성적 능력과 학식을 사용할 줄 아는 르네상스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같이 오웬의 작품에는 폭넓은 독서량과 문화적인 연계들을 볼 수 있는 점들이 많이 들어있다.” 종교개혁 학자들의 사상을 투철하게 계승하면서도 보편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항상 새롭게 해석되는 성경으로써 개혁교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 사람이었습니다. 존 볼트는 한 책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신학 공부의 교재가 오직 성경뿐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solar Scriptura 정신은 모든 진리에 대한 판단과 하나님 앞에 바람직한 삶의 교훈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기준이 오직 성경이라는 뜻이지 성경이 모든 신학 공부의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많은 비평가들에게서 비평을 받는 세네카나 키케로의 인용문을 인용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궁금합니다. 신학이 아름다운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에 신학이 아름답습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두 가지에 대한 지식인데,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 방식,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그 성품이 어떤 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서 발현되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기 때문에 신학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학이 계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역사 속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신학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2. 포물선적 신학공부
신학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포물선적 신학공부입니다. 보편신학이 있고 신학이 흘러오면서 한 부분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의 신학의 입각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장로교인이라면 장로교가 무엇을 믿는지를 철저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자기의 입장을 확고하게 갖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교리적인 유산이나 신학적인 입장이 확정되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칼빈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중생 개념이 없었습니다. 이후에 알미니우스주의자와 논쟁이 생기면서 중생의 문제를 보다 더 세분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도르트회의 이후에 생겨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추적해봐야 합니다. 출발이 여기라면 같이 공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맨 처음 사도들의 신앙은 성경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 다음 속사도교부들의 설교나 흔적 등 그들의 생각들을 공부합니다. 그 다음은 2세기 변증가들,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등 유수한 신학자와 정통교회에 영향을 준 사람들, 어거스틴과 같은 큰 산을 공부합니다. 어거스틴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순수하고 우리가 계승할 만한 신학이었고 어거스틴 사후에 신학이 변질되었지만 접촉해서는 안 될 정도로 변질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세 신학에 발견되는 많은 오류들은 그 이전의 어거스틴이나 어거스틴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갖고 있던 좋은 교리들도 어떤 것들은 중세에 뿌리를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오류와 진리가 항상 섞이는 가운데 역사가 진전되어 왔습니다. 아까 강의에서 들은 것처럼 중세 시대에 오류가 많이 들어오게 된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 여기서 신학을 이렇게 시작하고 나서 저쪽으로 넘어가고 어느 하나에 빠지지 말고 속사도교부부터 차근차근 중요한 책들을 읽어가면서, 교리가 엉성했던 기독교가 어떻게 이렇게 촘촘한 교리로 발전해오게 되었는가 하는 발전사의 개념으로 보편신학을 읽어 와야 합니다. 여기서 시작된 신학적 관심사와 저기서 읽어오면서 시작된 신학적 관심사가 함께 만나는 포물선적인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여기서 발견된 좋은 점이 있어도 저기 지식의 빛으로 오류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면서 읽어야 하고, 여기서 나쁜 것이 발견되더라도 여기서 참되다고 고백하는 신앙의 요소들이 초창기에는 어떤 모습으로 시작되었는가를 읽어내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나는 어떤 부분에서 양보할 수 없는 분명한 개혁교리이고 어떤 부분들이 어떤 오류를 거쳐서 여기에 왔고 내가 이런 토론에 있어서 양보할 때의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입장이 뚜렷하면서도 사고의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리겐(오리게네스)이 쓴 책이 ‘원리에 관하여’ (De Principiis)인데 차마 읽어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의 아류이지 기독교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온갖 상상적 이야기들과 기괴한 담론이 들어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은혜를 받으면 명백한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읽지 않고 오리겐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그 당시 오리겐이 말했던 것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압도적으로 그리스철학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 사람들의 세계관, 인생관, 그리고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알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했는가를 참고로 보게 됩니다. 그것을 고정된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어거스틴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교리사 시간에 정통신앙을 파수한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인 아타다시우스가 쓴 유명한 작품이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입니다. 하지만 이 책도 읽어보면 차마 읽어볼 수가 없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엄청난 금욕주의자이고 평생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말씀 전할 기회가 있으면 잠깐 내려왔다가 다시 빨리 올라가서 수도원의 아무도 없는 높은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회심으로 가는 문으로 갔던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타나시우스가 정통신앙을 파수한 사람이니까 그가 쓴 모든 책이 다 정통적이라는 보증인을 치고, 아타니시우스가 존경했던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라야겠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정통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체의 욕심을 버리고 극단적인 수도자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런 책은 참고로 읽어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왜 미친 듯이 금욕을 추구했을까 하는 공부를 하면 됩니다. 프란치스카 수도의 사람 중 아시시에 프란시스는 음식이 나오면 먼저 재를 모든 음식에 뿌렸습니다. 이것은 혀로 음식 맛을 느끼는 것이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본을 따라야 하나요? 아닙니다. 포물선적 신학공부라는 것은 자기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출발해서 자기의 믿는 바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이쪽을 평가하고 재고하면서 확고한 자신의 입장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이 누가 말을 잘 하는가가 아니라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적으로 펼치지 않고 동일한 시간 안에서 범위를 가지고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신학이 출발합니다. 이 중심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연을 날릴 때 가오리연, 방패연, 세모연 등 여러 가지 연이 있지만, 모든 연은 얼레에 연결되어 얼레를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언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을 잘 읽을 수 있게 되어 번역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없는 번역 단어 하나를 가지고 설교의 대지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사필한 것입니다. 한글 성경이 최종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웃지 못할 결과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는데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에서 부음을 부고장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나바는 권위자’라고 할 때 그 권위자를 authority로 설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원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에 있어서는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선진국일지 모르지만 서구에 비하면 우리나라 신학의 역사는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뛰어넘으면 어마어마한 정보의 세계가 열립니다. 오늘 내가 성경을 펼치고 해석하고 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리처드 먼로 교수가 역사신학을 하는 학생들에게 항상 충고합니다. “Never say first. 예전에 전혀 없었던 새로운 발견이라고 말하지 말고 이것이 처음이라고도 말하지 말라. 언젠가 누군가가 다 이야기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라틴어와 히랍어를 읽을 수 있다면 서방교부와 동방교부로 펼쳐집니다. 이제부터는 능력껏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서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지와 오류에 쌓여있기 때문에 다 알 수 없습니다. 성경으로 인해 우리에게 비치는 빛은 아주 밝은 빛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지만 처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이 세계의 창조가 먼저일까요, 창조하기 전의 하나님 안의 관념이 먼저일까요? 관념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에는 하나님 안에 관념이 있어서 창조된 세계가 생각한 것에 근접되었다고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창조되기 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지성 안에서 사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물 하나하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물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서 변화된 개체들이 어떤 연결을 갖는지, 심지어 인간관계에 있어서 도덕적인 연결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모든 진리는 원래 하나님의 사유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어둡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개별 사물에 대한 지식도 완벽하게 찾아낼 수 없고 사물 간의 연결 관계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려주신다고 해도 인간의 용량에는 다 담겨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기에는 성경이면 충분합니다. 성경은 찬란하게 빛납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지식을 제공해줍니다. 그것은 무엇을 믿어야할 지에 대한 규칙과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한 삶의 교훈입니다. 하나는 무엇을 믿어야할 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람으로 태어나서 나머지 것들을 다 몰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행복하게 살기에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이 제일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인 하나님 속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폭발하듯이 뛰쳐나와서 모든 것들이 다 퍼진 것이고 이것이 수렴되면 하나님 관념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하나의 통합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면 기본적으로 기독교신앙을 갖게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의 인류 역사 이래 집요하게 계속 되어온 이 질문들에 답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기독교신앙이 제대로 되어 있어서 그 문제들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고난을 받을 수 있지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학은 일반학문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펼쳐나갈 때 자기 능력에 따라서 시작을 해서 갈 수 있는 만큼 가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이 언제나 중심에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과 함께 울고 성경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III. 바람직한 신학공부
목회를 하면 알게 되겠지만 목회가 요구하는 지식은 통합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금고에 들어있는 보물이라면 그 금고의 열쇠는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문을 열면 하나님의 경륜의 지식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신학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공부에 재능이 있어서 어느 한 신학자에 빠져 논문을 쓰고 그 사람을 계승하는 학문을 하겠다고 유학도 하면서 한 가지에 주제에 한 십년을 파면 잘하면 강의를 하는 교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자잘한 신학자는 신학책이나 논문을 읽으면서 학자가 되었지만 큰 사상가는 성경을 읽다가 나옵니다. 성경을 읽은 모든 사람이 칼빈이나 루터같은 사상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디는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기독교 사상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사상가의 공통점은 예수를 깊이 만났고 주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학문적인 세계에 깊은 뿌리를 내린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 진리를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에는 성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성경이 흠뻑 젖도록 우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치열하게 학문을 탐구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쪼개진 신학공부를 하지 말고 기본적인 교리 교과서를 철저하게 읽고 칼빈을 읽어야 합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만 읽지 말고 주석, 논문, 설교를 읽어야 합니다. 기독교 강요 하나만 읽으면 해석이 어렵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상들을 트레젝토리(trajectory)를 추적하면서 읽어야 하고 생애 연대별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던 어거스틴을 거의 외울 정도로 읽어야 합니다. 로잔의 회담에서의 토론은 유명합니다. 종교개혁이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말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수도사로 있을 때 몸담았던 곳이 에르푸르트 수도원인데 어거스틴 수도회였습니다. 칼빈이 극찬했던 교부도 어거스틴이었습니다. 하지만 칼빈이 어거스틴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칼빈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몇 가지 점에서 달랐기 때문에 이신칭의가 없다고 배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그 시대의 문맥에서 읽어내면서 그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면서 값진 개혁교리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치열하게 모든 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 언어, 기본적인 신학, 헬라 교부들, 철학, 역사 등을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네 번째는 열렬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이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을 붙들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면서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 교회는 월급은 적고 일은 많아 공부에 방해된다고 때려치우고 한량한 전도사 자리를 찾아 간다면 결국에는 망가진 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겪으며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워가면서 온전한 교회가 되어 가는 것과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함께 경험하면서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2학년까지는 공부만 하면 좋겠습니다만 한 번도 쉬지 않아야 하는 것은 영혼을 돌보는 일입니다. 3학년부터는 교역전도사를 하면서 저녁에는 목회로 괴로워서 울고 아침에는 지성적 무능으로 울면서 눈물 젖은 신학을 하는 것이 좋은 목회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여섯 번째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언행일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에 대한 경륜을 가지고 있는데 이 경륜의 성취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경륜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 완성은 종지적 완성이 아니라 타락과 죄로 망가진 세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한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신비한 일입니다.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두 번째 사람은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시고 세 번째 사람은 두 사람의 결합으로 나옵니다. 네 번째 이후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둘이 부부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사회입니다. 그 사회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만 그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인 가인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온 인류가 죄로부터 다 해방이 되어서 서로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사회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 나라는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의 나라입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나라를 불완전하지만 맛보기로 먼저 주신 사회가 바로 교회입니다. 신학은 교회라고 하는 요람에서 탄생하고 자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교회의 온전한 지체가 되어가는 수단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의 의미는 개개인이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종말에 맛보게 하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완성된 사랑의 사회의 맛보기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참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인간이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모순과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자마자 그리스도 몸에 접붙여져 태어납니다. 이것은 시간 속에서 모년 모월 모시에 예수를 믿고 그 몸에 접붙여졌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속에서는 이미 하나님이 선택해놓으신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의 전개 속에서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교회의 운명이고 교회의 운명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회에서 완성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한 줄기 빛처럼 살아가는 공동체를 보면서 인간의 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런 다른 삶의 방식 이면에 다른 사상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의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다 묶고 싶어 하셨습니다. 마지막 나라에는 끝까지 이 사랑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쳐내고 남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다 묶어서 한 사랑 안에서 질서를 이루면서 그들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꿈꾸면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비전이고 모든 인류의 비전입니다.
IV. 결론
신학은 특정 교파의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가 반드시 돌아와야 할 지식이요 사상입니다. 마스트리히트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일부 빌려서 신학을 정의하자면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 신학을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모든 이웃을 행복하게 합니다. 저는 한 편의 설교가 수십 년의 교육도 바꿔놓지 못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