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 조원정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아름다움입니다. 아마 신학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전체로 보면 성도의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 첫 번째 문답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중에 하나가 그를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인데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원문에 보면 ‘enjoy’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에서 즐겁다는 말이 'enjoy', 'please', 'happy'인데 모두 다릅니다. 각각 의미와 층차가 좀 다릅니다. 그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것이 ‘pleasure’, 다음에 ‘happiness’ 다음에 ‘enjoy’입니다. ‘enjoy’는 굉장히 정신적이고 영적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인데 왜 즐거워합니까? 즐거워할 이유가 있어야지 즐거워하지 즐거워할 이유가 없는데 즐거워하면 제 7병동에서 탈출한 사람입니다. 뭔가 즐거워할 이유가 있어야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매일매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 기자들의 고백이고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신학을 좀 더 넓게 보라.’입니다. 넓게 보라는 얘기는 신학 안에 갇혀서만 신학을 보지 말고 모든 학문들의 배경을 가지고 신학을 볼 때 그 신학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 학문인가를 여러분들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목사로서 소명을 받았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럴 때 저 사람이 한국 교회를 말아 먹으려고 목사가 되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 뒤돌아보면 자기 나름대로의 소명 체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명을 유지하는 것도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체험의 문제이지만 이것은 성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순간적인 영적체험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화가 필요합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지만 실제로 사용한 주체는 솔로몬 자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소명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해서 노력하고 분투하지 않고도 그 소명을 유지하게 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경쟁 상대는 여기에 있는 학우들이 아닙니다. 저는 신대원 때는 어학공부 하느라고 다른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학교 공부하고 제 원칙은 월화수목금요일까지 화요일부터 학교를 가는데 토요일까지 모든 숙제를 다 해놓습니다. 월요일은 시간을 내어서 제 공부를 합니다. 방학 때는 학교 공부를 안 하니까 제 공부를 하고 학기가 끝나는 것과 함께 학과에 대한 공부는 끝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책 읽을 시간이 너무 없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나서 책을 읽었는데 전기를 읽은 것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전기를 거의 다 읽었습니다. 전기를 읽으면서 제가 누구를 보고 따라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만큼 기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개하고 그 사람만큼 치열하게 공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개하고 그 사람처럼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하실지 모르겠지만 나의 양심선언에는 살아오면서 어떤 동역자도 나의 경쟁상대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그런 꿈을 가지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한쪽 구석을 파고 있지만 말고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굽이치며 흘러왔는지 나는 영적인 수준과 학문이 교회 역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큰 시야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를 가르쳐 주셨던 김희보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제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부하고 휴식의 차이가 뭐냐고 물어 보시면서 ‘공부는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다.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처럼 휴식 시간에 그런 책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를) 릴렉스를 하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같은 경우에는 산 책만 여섯 권인가 일곱 권을 샀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면서 자신의 영적 생활에 대해서 비춰보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학 함이란 무엇인가? 지식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웃기는 것입니다. 신앙과 관련해서 신학에서 다루는 지식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지식이 사랑에서 이탈할 때에 그것은 지식이 아니고 그 사랑이 지식에서 이탈할 때는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신비주의자로 알고 있는 끌레르보 베르나르두스라는 사람을 압니다. 그렇게 아는 척 좀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끌레르보의 베르나로두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식은 곧 사랑이다.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올바른 지식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면 이 말처럼 명언이 없습니다. 참 사랑은 지식이다. 두 개가 오늘날 우리처럼 이런 식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굉장히 강조됩니다. 호세아서 4장 6절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그때에 그 지식이 히브리말로 ‘다트’()입니다. 다트 뒤에는 엘로힘()이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지식이라는 것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지식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고유하게 이스라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정신과 영혼 속에 역사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결국 성경적으로 보면 한 인간에 훌륭함은 어디에 달려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신자가 얼마나 그 지식에 붙들려서 사는가? 입니다. 그것을 누가 깨달았나하면 사도 바울입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그럴 때 달려가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세계선교, 총회장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빌딩,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그것이 바로 희랍어에서 얘기하는 ‘그노시스즘(Gnosticism)’, 이것을 히브리말로 옮긴 말이 ‘다트’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교리반에서 교인들을 가르칠 때 하는 말이 ‘스튜데오 에르고 숨’(studeo ergo sum), 무슨 뜻입니까?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사람의 가치를 좌우합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그가 가진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 (이 고백은)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앞에 부분은 제가 한 말이고 뒤에 부분은 어거스틴이 한 말입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게 소중합니다. 어떤 인간은 덜 중요하고 어떤 인간은 더 소중합니다. 명백하게, 그것은 선한의지의 크기입니다. 그것을 좌우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그럴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첫 번째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두 번째는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입니다. 이것 이외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존재에 관한 질문은 이미 유신론과 무신론을 가르는 질문이고 다음에는 두 가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본질을 묻는 것입니다. 성경이 많이 이야기합니다. 기껏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내가 있는바 그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그것은 성경이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을 해도 우리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 정도에 만족을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자존자이시다. 스스로 자충족적인 존재로 영원부터 영원무궁토록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고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시지 않는다.
성경의 많은 관심은 (하나님의) 속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다양한 형태로 있는데 그 속성이 인간의 상태에 따라서 접하면서 무지개 빛처럼 찬란한 빛깔로 분광이 되어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자면 비참한 자에게는 긍휼히 여기는 분으로 나타나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는 인자한 분으로 나타나고, 불안하고 요동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피조물의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서 아주 눈부신 빛깔을 드러냅니다. 눈부신 빛깔들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해놓은 것이 바로 성경이고 그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비춰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때문입니다. 구원역사가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배워 나갑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어떤 사람에게 여러분 마음으로 많은 죄와 상처를 입고 이제 의지할 모든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주님께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속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속성과 시행방식을 아는 지식의 깊이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지만 순서대로 줄을 세워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다 깊이가 다릅니다. 그것이 신앙의 순서입니다.
신학을 위한 지성의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것입니다. 얼굴이 예쁜 자매는 눈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상황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믿음과 성경입니다. 믿음과 성경으로 그것을 해석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일어난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가능하게 만드는 원천적인 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신학을 하게하는 동기이고 신학을 하는 목적입니다. 동시에 그 신학을 올바르게 감당하게 만들어주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그는 그것을 좋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미적인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심미가 무엇입니까? 아름다움을 심사하는 것입니다. 쭉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한 인간이 눈부신 하나님을 뵈면서 그분의 속성이 어떤지를 경험하면서 두 가지를 느끼는데 첫 번째는 나와 당신 사이가 한없이 멀다는 무한한 격차, 절대자에 대한 지극히 높은 엄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학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복하는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을 주의 영광을 주의 영광을 온 세계위에
그 위대한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구나.’ 제가 36살 때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40장을 읽다가 감동을 받고 6개월을 울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그것만 있으면 무섭습니다. 두 번째 느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 뭔가 내 마음을 잡아끄는 흡입력,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두 개가 함께 엮어진 것이 경외입니다.
존 칼빈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뭘 이야기했는가 하면 신학의 가장 중요한 모토가 “pietas et scientia”, 경건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에 대해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모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동기여야 된다고 합니다. 경건과 학문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을 모두 완독한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이게 개혁 신학교의 실상입니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대부분이 최종판입니다. 고영민씨가 번역한 세권으로 된 책입니다. 손들어 보십시오. 칼빈 신학교 가서 물어보니까 거기도 읽은 사람이 대부분 없습니다. 이름이 칼빈인데 말입니다. 제가 다음 책에서도 이야기하는데 기독교 강요는 대단한 책은 아닙니다. 기독교 강요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엄청난 의의가 있는 중요한 책이지만 당대에 엄청난 신학적인 천재들이 있던 신학에 별들의 시대에 기독교 강요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책입니다. 그것을 마치 성경 다음에 모든 신학이 충분히 들어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칼빈도) 수백 명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 책(기독교 강요)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 정도의 책이라고 보면 됩니다. 입문서도 안 읽었으니 어떡합니까?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주여 내 마음을 당신께 바칩니다. 기꺼이 진심으로.’ 제네바의 문서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손바닥 위에 심장이 올라가 있습니다.
화란으로는 ‘히스베르투스 휘치우스’이고 라틴어로는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라는 인물입니다. 그 사람은 위트레흐트 대학의 교수였고 이 사람이 영국으로 가면서 청교도의 영향을 받습니다. 네덜란드에 제 2의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의 기치를 들게 됩니다. 뭘 주장하느냐 하면 엄격주의(precisionism)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가) 엄정주의를 만듭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엄정한, 엄격한' 만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인간의 행동에 정확한 혹은 완전함이다. 하나님의 율법,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교훈에 일치하고 신실한 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열망되는 엄정함이다. 이 이야기를 그의 책『논쟁선집』(Selectarum Disputationum Theologicarum)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엄정성에 대한 근거는 첫 번째로‘하나님이 엄정성을 요구하신다. 온전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말씀의 기준이 단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뭔가를 얼버무리고 건너뛰려고 하면 마치 제대로 맞물려지지 않으면서 건축물이 올라가는 것처럼 결국은 신앙이 와해되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철저한 신학교육을 학생들에게 시켰고 당시에 가톨릭에 대해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마어마한 신학적 깊이가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을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17, 18세기 철학사조에 대한 사전입니다.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철학자로 등장을 합니다. 왜 등장을 하는가 하면 이 사람 때에 소위 이야기하는 데카르트주의(Cartesianism)가 등장을 하면서 유럽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카르테시안 논쟁이 교회 안에서도 꽤 길게 이어집니다. 데카르트 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를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상충이 되어 나중에 알고 보면 그런 게 아닌데 오해를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때 강력한 논조로 데카르트 철학의 잘못된 사상적 기초를 논박하던 인물들 중의 하나입니다. 천재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런 엄정주의는 그 후에 메소디스트(Methodist) 운동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영어에 Methodist라는 말은 우리들이 감리교도라고 번역을 합니다. 원래 맨 처음에 옥스퍼드의 홀리 클럽(Holyc club)에서 나왔던 메스디스트 운동은 그런 감리교 운동이 아니라 'The Method of Life'입니다. 라틴어로 말하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입니다.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삶의 방식이 매우 엄격한 사람들이라는 별명에서 약간 경멸하는 듯한 데서 메소드스(methods)라는 말이 나오고 이 중에서 아주 탁월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존 웨슬레(John Wesley)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감리교도의 되는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영국의 전설적인 설교자였습니다. 미국의 18세기에 있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제 1차 대각성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전설적인 설교자입니다. 이 사람의 전기는 많습니다. 대개 얇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두꺼운 것까지 많습니다. 아무거나 골라 잡아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델리모아의 휘필드를 읽어 보십시오, 아마 그러면 왜 제가 이 사람을 한때 좋아했는지 여러분들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입니다. 굉장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대서양을 건너와서 이 사람 설교를 한번 듣고는 한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다시 대서양을 건널 수 있겠다고 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여행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설교를 듣고 깊이 감화한 사람이 벤자민 프랭클린이고, 이 사람이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베니아를 설립했고 피뢰침을 발견했던 과학자인 동시에 인쇄업자였던 사람입니다. 휘필드가 그 사람의 돈을 많이 헌금 받았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휘필드가 또 왔다는데 또 돈을 거두러 왔겠지. 나는 결심했다. 절대로 이번에는 돈을 안 낼거야. 설교가 계속 되었다.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은화만 내고 가야지. 설교가 끝났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 채 헌금 통에 넣었다.’ 그런 사람 있으면 돈 걱정은 안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헌금을 하러 왔다가 여러분의 설교를 듣고 다시 가지고 가고 싶으면 안 됩니다.
웨슬레가 나옵니다. (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Arminian)였는데 신학적으로 약간 혼란스러운 사람입니다. 에드워즈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약간 신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지만 탁월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내가 몰리 골드호크 바제일이라는 사람인데 그 거룩한 설교자가 부흥 집회를 갔다 오면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남편을 때려서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뽑고 그랬답니다. 그렇게 아내에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60년 동안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답니다.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지식과 사랑이 결합된 것입니다. 학문적인 지성과 목회적인 실천이 어우르면서 그 어떤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형체로 남을 수 있고 본보기, 삶의 모본으로 남을 수도 있고 감화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남겨 주어서 계승하면서 가는 것이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입니다. 칼 들고 뭔가 틀린 사람 있으면 잡아 죽이려는 것이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뭐가 문제인가 하면 신학이 설교와 상관이 없고 설교는 신학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설교를 10편정도 들으면 저 사람은 무슨 사상을 가진 사람인가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정직하게 삽시다. 정직하게 살자는 얘기도 요즘 별로 안합니다. 기도합시다. 꿈을 가집시다. 꿈을 꾸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게 무슨 설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오히려 이단들의 설교가 신학적입니다. 이단들의 설교는 확실하게 신학적입니다. 이단들이 판치는 이유가 신학적인 설교를 못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신학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웅장한 신학을 구체적인 삶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이 존재의 울림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한편의 설교는 한 사발의 피 입니다. 한 사람이 짧은 시간에 설교를 해서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기 위해서는 그 설교를 하기 전까지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그 진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되면서 몸부림쳐 온 삶의 경력을 이야기합니다. 연륜이라는 것도 치열하게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연륜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런 것 없이 세월이 흐르면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노르탱탱해집니다. 여러분이 1학년일 때는 순수합니다. 3학년 졸업할 때에는 순수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어느 교회에서 돈을 좀 더 주나? 집이 어느 곳하고 더 가까운가? 두 번 안 갈아타고 안 가는 데가 어디인가? 사택은 주는가?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되나? 목사님이 충분히 늙었나? 젊었나?’점점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설교는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사상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해 볼만한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슬람계의 지도자인데 페트라 굴렌.com하고 들어가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자료들은 그 사람이 기독교에서 배운 것입니다. 보케이션(vocation)을 이야기합니다. ‘이슬람으로서 여기에 살아 있는 자체가 신과 사회를 향해, 자기 자신을 향해 부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간에 그렇게 이슬람의 사상을 따라서 온 인류를 사랑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코란이 진리인 것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삶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바로 기독교인의 인상이 그런 것입니다. 사상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에 매여서 살아가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게 바로 존재의 울림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아우라(Aura)라는 말을 아십니까? 많이 씁니다. 이게 일본말이 아니고 영어입니다. 라틴어로 아우라(Aura)입니다. 풍취, 향기, 정취, 영적인 기운, 그런 의미입니다. 아무 말 안하고 있는데 아우라를 느낍니다. 내가 막 이야기하는데 저 사람이 빙긋이 웃고 있는 것, 저 사람이 내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는 어떤 체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 사상가(Christian Thinker)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사상가가 설교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자격입니다.
올바른 신학 함이란 지식과 경건과 목회가 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이 시대가 왜 이렇게 복잡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복음주의의 뿌리가 개혁주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맞습니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는 개혁주의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개혁주의라는 말이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 가장 넓은 카테고리로 사용을 하면 천주교를 반대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합니다. 당시의 모든 기독교적 종교를 개혁주의라고 합니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이단을 제외한 정통주의의 기본 교리를 준수하는 교파들이 사용합니다. 더 줄어들면 제네바의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주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대개 세 번째 용도룰 사용합니다. 그게 복음주의로 옵니다. 그건 어디서 왔습니까?
총신에서 중세신학을 공부를 안 합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중세신학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황당해합니다. 중세신학이 어디에서 잘못 나갔는가 하는 것들을 이해를 가지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신학 공부에 있어서 'particularity'와 'universality'의 문제입니다. 'particularity'는 여러분들이 지금 신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어느 교파에 속해 있습니다. 여기 신천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신천지 손들어 보십시오. 있을 것입니다. 여기도 침투시켰을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들어옵니다. 여기서부터 신학을 시작합니다. 이게 신학의 ‘particularity'입니다. 개별성입니다. 그것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신학을 시작하는데 아무 입장이 없다.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고 내가 결정하겠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공부를 해 나갑니다. 장로교다. 뿌리가 뭘까? 고신이구나? 한상동 목사님이 누구이고 쭉 추적해 나가다가 장로교단이 어떻고 나가다가 웨스터민스터 신학이 어떻고 화란 신학이 어떻고 나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universality'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개별성이라고 번역이 되고 보편성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이 보편성은 반대로 포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저는 포물선의 공식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는 이쪽에서 포물선을 그리고 하나는 이쪽에서 포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교파가 있기 전에 맨 처음에 기독교가 어떻게 잉태되었는가? 어디에 들어가야 합니까? 구약부터 들어가야 합니다. 족장들 그 이전부터 시작을 해서 아브라함, 선지자들로 이어서 내려오고 그리스도, 사도들, 속사도 교부, 초대교회 교부, 중요한 사람들, 오리겐,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등등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분수령이 나옵니다. 어거스틴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중세로 넘어갑니다. 중세에 교부들 중에서도 동방교부, 서방교부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뭔 주장을 했는지 다 조금씩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최근에 쓴 알리스터 맥그레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심심하기는 하지만 신학이 뭘 공부해야 되는지를 전체적인 지도를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신학은) 공부할 양이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 공부를) 시작을 해서 어떻게 내가 믿는 교파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것을 양쪽에서 포물선을 같이 그리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안하고 여기에서 칼빈 하나만 딱 집어가지고 칼빈을 막 부르짖고 있습니다. 실제로 까뒤집어 놓으면 기독교 강요도 안 읽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도 안 읽는데 주석을 읽었겠습니까? 주석을 안 읽는데 논문을 읽었겠습니까? 그것도 안 읽는데 편지를 읽었겠습니까? 사천 통이 넘는 편지를 씁니다.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논문이 나옵니다. 칼빈주의 해도 그의 작품 전체가 영어로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이 정도 수준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어 공부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합니다. 잘해야 합니다. 우선 급한 것이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우물쭈물하면 안 됩니다. 지식의 세계가 한국말은 좁습니다. 하나의 언어를 펼치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납니다. 두 번째 언어를 펼치면 전혀 가보지 못한 완전히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영어와 라틴어는 죽어도 해야 합니다. 난 50세 넘어 과외를 하면서 라틴어를 시작했습니다. 늦었습니다. 까막눈이야 면했지만 여러분들은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 치열하게 공부해서 경험자들에 의하면 분해하면서 이천페이지만 읽으면 된답니다. 여기 학우가운데 옥스퍼드에서 라틴어 하고 온 학우가 있습니다. 모아놓고 여기서 가르쳐달라 하십시오. 공부를 해서 라틴어를 쓰지는 못해도 읽을 수는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엉뚱한 이야기는 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틴어를 공부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자료가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것이 펼쳐집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히브리어는 아주 잘해야 합니다. 다음에 어거스틴 교부를 공부해야하면 불어를 공부해야 하고 필수입니다. 개혁신학을 공부하려 해도 중세 불어자료를 읽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될 것이 수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밤을 새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가야 합니다. 총신에서 제가 ‘공부’에 대해 수련회를 두 번 했습니다. 2008년, 2012년에 진짜 학생들이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이 은혜롭지 않습니다. (실려간 학생들이) ‘이런 삶은 김 목사님은 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하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 하더랍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맥락에서 개혁주의를 공부해야 합니다. 실려 가면 입원비 내가 내어 준다고 했는데 여러 명이 실려 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래 안갑니다. 한 학기 정도 갔습니다. 그것도 대단합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코피를 씻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코피를 떨어트려서 글씨를 쓰면서 혈서를 쓰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놀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풀빵 굽는 사람한테 가보십시오. 피눈물이 나는 과거의 역사가 있습니다. 몸뚱아리 자체가 몸부림치며 살아온 역사의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 자기가 원하는 어떤 목표에 도달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죽는 것을 장엄한 순교 무슨 일제시대처럼 목 잘려 죽고 총에 맞아 죽는 것 생각하지 말고 책에다 얼굴을 묻고 죽는다고 생각하십시오. 학교에서 죽으니까 순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오만 잡탕이 다 섞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복음주의는 또 하나의 물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흥주의입니다. 부흥과 부흥주의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아십니까? 'revival'이란 것은 좋은 뜻의 부흥입니다. 'revivalism'이란 어떤 조건을 맞추면 부흥이 일어난다는 인위적인 부흥입니다. 이 부흥주의가 (한국에) 들어 왔습니다. 한국에 들어왔던 초창기 선교사들이 이런 개혁주의로 온전히 먹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도 바탕에 있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 부흥주의 물을 먹고 들어 왔습니다. 이 뿌리가 어디인가 하면 딱 그 뿌리를 찾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미국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국하고 별 상관없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와서 전해 주었지만 실질적인 신학적인 영향은 없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영향을 우리에게 미쳤습니다.
1700년대에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 때 1차 대각성 운동, 찰스 피니 시대 때 2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찰스 피니는 신학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있는 사람입니다. 원죄, 성령의 역사 이런 것 다 부인합니다. 이런 것들이 부흥주의가 들어오게 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고결한 인품과 높은 학문, 포괄적인 사상, 이런 것들이 요구되는 것이 18세기 이전의 교회까지의 일반적인 풍조였습니다. (당시에)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아무나 자기가 의료 선교에 열심히 있다고 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특별한 사람들만 되는 것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무너지고 부흥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목회자직에 대한 반지성주의가 꽃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받으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 다음에 기독교 신앙의 지성적인 전통을 무너뜨립니다. 긍정적으로는 신앙에 대한 갈망, 근대 선교 운동에 이바지하고 어느 정도는 사회개혁에 이바지합니다. 여기에 보면 18세기 말에 있었던 켄터키 지방의 부흥운동이 나옵니다. 화면이 희미하긴 하지만 좀 이상합니다. 여기에 (그림 속에) 모닥불이 펴있고 사람들이 돌면서 춤추고 있고 (한쪽에서) 설교하고 은혜 받았다고 손을 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말하자면 성령 운동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자신은 신학과 성령의 체험 사이에 놀라운 균형을 이루었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만한 인물이 아니고 많이 변질이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성령을 체험하고 ‘놀라운 자유’(Wonderful Freedom)라는 것을 주장을 해서 옛 시대였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고 코스를 밟아서 목회자가 되었지만 이제는 성령이 부르시면 누구나 될 수 있다는 사상이 들어오면서 기독교의 유장한 지성적 전통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성직의 질서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안 머리(Iain H. Murray)라는 사람이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중요한 저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더 나아가 기적의 시대가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설교자를 따로 구분해 두는 것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유창한 사람들이 발언할 기회를 훨씬 더 많이 얻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소명에 대해서 극적인 체험만 있으면 목회직의 부르심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교육에 있어서 지성적 자격을 아주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 교단 신문에다 12번씩 연재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신학생이 될 자격이 안 되면 교회의 수요와는 상관없이 뽑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미래의 교회를 보호하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300명을 뽑을 예정이었는데 300명을 다 채우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봤는데 학생들이 형편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150명만 줄을 긋고 뽑아야 합니다. ‘너희들은 여기에 올 자격이 안 된다.’ 그래도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신학교가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유학하겠다는 사람이 입증되면 보내줘야 합니다. ‘돈 걱정 하지 마라. 네가 신실하게 열심히 신학을 공부해라. 돈은 여기서 대준다.’ 그럴 수 있을 정도의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졸업을 하고 목회자가 되면 진짜 진리를 말하는 사람, 물론 그 사람도 깊이와 능력은 모두 다르겠지만 어디다 갔다 놔도 허튼 소리 안하고 진리를 따라 말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런 전통들을 이 부흥주의가 허물어뜨려 버립니다. 그 사람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받아들일까? 고민을 해야 합니다.
드와이트 무디(Dwight I. Moody) 같은 사람은 이런데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성보다는 감정, 학문보다는 열정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이런 무디운동의 부흥주의가 20세기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로 번지게 됩니다. 기독교의 지적인 전통들이 무시되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멀리 갈 필요도 없고 내 서재에 와서 우리 개혁주의의 유산들을 보면 정말 위대한 조상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늦었습니다.
신대원에 다닐 때 언어가 재미있어서 히브리어 열심히 공부했고 신대원 3학년 때는 우가릿어(Ugaritic)를 공부했는데, 사이러스 고든(Cyrus Gordon)의 『우가릿어 텍스트』(Ugaritic Text) 600페이지를 완독하고 토판에 읽었습니다. 저는 지금 다시 돌아가면 라틴어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공부한 것은 후회가 안 되는데 신대원을 다니면서 학과 공부를 다 하고 사역을 다하면서 3분의 2권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공부 한 것은 후회가 안 됩니다. 라틴어 입학시험 볼 때 미친 듯이 공부해가지고 하루에 200개씩 단어를 외웠습니다. 왜 이걸 공부해야 하는지를 절를 설들을 못 시켰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여기 000전도사한테 방학 때 80시간이면 됩니다. 80시간이면 아침 여섯 시에 와서 밤 12시에 가는 프로그램을 해 가지고 그래 봐야 18시간 밖에 안 됩니다. 여러분 샌드위치 먹으면서 80시간 해가지고 한번에 하고 다음에 갈리아 여행기부터 시작을 해서 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년만 미치고 나면 신학 책 좀 뛰엄 뛰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도사님 가능합니까? 가능하답니다. 공부하십시오. 담임 목회하면 공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나 같은 경우는 예외지만 난 담임 목회하면서 공부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 대신 못한 것도 많습니다. 여행도 없었고 휴가도 별로 없었고 안식년도 없었고 월요일 날 쉬는 것도 없었습니다. 공부했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친구들하고 놀지도 마십시오. 나쁜 사람들입니다. 물듭니다.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에드워즈가 주관적인 충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과라고 비판을 합니다. 이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고 생각을 달리 하게 됩니다. 마스턴이라고 하는 마스턴의 책 몇 권 읽어 봤습니까? 보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평전은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번역이 되었습니다. “휘필드가 영적인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 에드워즈가 정확히 꾸짖었을 때에 그는 잘못이라는 확신하지 못했다. 두 복음 전도자는 협력자로 남았지만 함께 하기에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구속사역에 녹아 있고 왜냐하면 창조하고 창조한 죄인을 구원하시고 구원한 죄인들을 완성시키시는 구원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다양한 당신의 속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더라. 야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 우리도 한번 진도 앞바다를 건너볼까?” 그런 생각을 하라고 기적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어떻게 물이 갈라졌을까?’ 그런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속성이 무엇인지 궁금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신학 공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만 무시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사색’입니다. 라틴어로 말하자면 콘시더라티오(consideratio), 혹은 메디타치오(meditatio), 영어로는 considerationm 곧 ‘묵상’입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사색에 가까운 그런 사색을 통해서 내면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힘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큐티도 청교도들도 합니다. 그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성품과 속성, 그 속성을 묵상하면서 핍박과 고난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경이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에센스, 정수라고 보는 것입니다. 엑기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고 구속사의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책이고, 복음은 그 정수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속사역이 있는데 역사는 눈에 보이게끔 출렁거리며 전개가 되는데 전개되는 것에 사건 그 자체에 심취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은 무엇의 원인입니까? 대답을 못합니까? 여기에 원우회 수첩 있습니까? 총신에는 최근까지 있었습니다. 총신 학생들은 그것을 묵상집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묵상하면서 자매들을 찾습니다. 이상하게 모든 자매들이 공통적으로 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예쁘게 실린 순서대로 대시를 받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똑같은 여성인데 왜 어떤 사람에게만 계정휴업상태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곱 여덟 열 명이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면서 대시를 할까?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까지 부를 것은 없고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이 사랑의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볼 때 깊이 안 봅니다. 외모를 딱 봅니다. 예쁘고 아름답다는 인식이 생기면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면서 가슴이 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음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한 여성에게 그 많은 사람이 다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최소한 한 놈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보는 것입니다. 구속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결과가 사랑입니다.
플라톤 같은 사람이 고민한 것이 그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선한 것에 마음이 안 끌리고 예쁜 것에 마음이 끌릴까? 신학생이 오늘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까? 구르미 그린 달빛 같은 드라마 보는 것이 옳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런데 후자로, 리모컨에 손이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게 더 예쁘다고 생각하니까 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쁜 것에 대해 예쁘다고 느끼는 자체가 신학의 훈련입니다. 이해됩니까?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어와 인격과 삶으로 성경의 진리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그 유명한 조지 마스던 교수였습니다. 4년 전쯤입니다. 마침 이분이 노트르담 대학을 은퇴하고 연구 교수로 그랜드 래피즈에 와 계셨습니다. 만났습니다. 두 시간 동안 강변에서 식사를 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을 읽고 -되게 어려운 책입니다- 의지에 대해 무지하게 고민할 때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소위 이야기하는 결정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논조를 가지고 이분에게 집요하게 공격을 하고 물었는데 웬만하면 화냈을 텐데 너그럽게 받아 넘기면서 이해를 해주셨습니다. 시골할아버지 같은 분이었는데 대가 같은 풍미를 느꼈습니다. 저하고 헤어지고 난 다음에 커리큐럼을 짜셨는데 의지(will)에 대해 강의하겠다고 강의안이 올라 왔습니다. 그분하고 이야기하면서 에드워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에드워즈가 생각하는 목회가 무엇이었을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목회라고 본 것입니다.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서 마지막에는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사랑, 깊이 동의를 해 주셨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D. Martin Lloyd-Jones)는 설교를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는 불붙은 논리다.”, “감동시키는 추론이다.” 즉, 설교란 신학을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단에 오를 때, 나는 이 사상을 설교하고 싶다는 불타는 무엇이, 필연성이, necessity가 자신 안에 있어야 합니다. 설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 내가 이 설교를 하지 않으면 내 가슴이 불붙는 것 같다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의 유지는 거룩한 의무에 마음을 묶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은혜로서 소명을 이루어가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진리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살아가고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있고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려면 성경, 성경에 나오는 구속사,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자신의 개인적인 삶속에서 우러나오는 한 시대를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때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정동’이라고 내가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정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이 되면서 사랑의 성향이 됩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할 때 그건 단순한 감정이 아니고 성향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좋아했는데 사라지고 나니까 생각이 안 나더라, 이건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느끼고 영향을 미치게 하는 그런 것이 사랑입니다. 자매들이 여기에 몇 분 계시는데 이런 남자하고 절대 결혼하지 마십시오. ‘너 아니면 나는 죽어 버릴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쿨하게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 이외에 그 무엇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내 삶을 지탱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상을 세워야 합니다.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거룩하심이고 무한한 위대함과 완전함입니다. 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느냐?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어야 합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입니다.
(예화) 제 나이 열네 살 2개월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 다녔습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습니다. 주일날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운 이유는 가난해서? 물론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운 것은 아닙니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나를 울게 만든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난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는 나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열네 살 2개월 된 아이가 엎드려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난 다음 눈을 씻고 일었을 때에 결심했습니다. 일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말입니다. 그날이 교회에 마지막으로 간 날입니다. 그리고 6년 동안 지독한 방황을 했습니다. 죽는 것은 그 어린 나이에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무서운 것은 사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를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어떻게 살아야 인간으로 사는 것인가? 문학작품을 읽고 사상서들을 읽고 철학서들을 읽고 그렇지만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내 인생을 붙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새벽마다 댕그렁댕그렁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전도하는 사람 없이 홀로 교회에 나가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성도들은, 여러분의 관심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고 목회자로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는 양떼들과 미래의 양떼들은 바로 나 같은 고민을 가진 자들입니다. 한편의 설교와 가르침이 그런 질문에 대해서 어두움을 가르는 한줄기 불빛처럼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은 혼돈스러운 사람에게 설교가 한줄기의 빛이 되는 것, 짤막한 가르침이 한줄기의 낙뢰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철저하게 공부하고 목회자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사람답게 사는가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으로 피에 젖은 신학공부를 해야 합니다. 거기서 삶의 지혜의 인간에 대한 통일성에 대한 판단이 가능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과도 통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순자의 권학(勸學)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기기일약(騏驥一躍) 불능십보(不能十步) 노마십가(駑馬十駕) 즉역급지(則亦及之) 공재불사(功在不舍)’ 여기에서 ‘기기’라고 하는 것은 ‘천리마’입니다.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한번 크게 뛴다고 해서 열 걸음을 나아갈 수는 없다.’ 빨리 갈 뿐이지 한 번에 열배를 뛰지는 못합니다. ‘노마’는 무엇입니까? ‘우둔한 말’입니다. ‘우둔한 말이라 할지라도 열흘을 달리면 거기에 미칠 수가 있다.’ 즉, 일에 성과는 그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데 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는 태어나서 교만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 책의 저자는 천재라고 느낀 것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칼빈도, 제가 그렇게 존경하는 오웬 목사님도, 탁월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천재라고는 생각 안했습니다. 일반 서적은 다 읽지 못했지만 신학 책입니다. 다른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단 한사람, 어거스틴의 책을 읽었습니다. 어려서도 읽었고 신대원에 다닐 때도 읽었는데 제가 40대 중반에 고백록을 새롭게 읽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책 두 권을 읽으면서 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참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6개월을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어거스틴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입니까? 어떻게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천재성을 주시고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겨우 알아듣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까? 나에게도 그런 천재성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음성으로 들려주신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응답 같은 느낌이 온 것이 “네 은혜가 족하다. 어거스틴은 너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여러분 혹시 이중에 읽은 사람 있을지 모르겠는데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는 책을 2년 전에 썼습니다. 10년의 내공으로 썼습니다. 쓰는 것은 4주 만에 썼습니다. 그 어거스틴을 읽으면서 내가 하는 신학이 얼마나 왜소한 신학인 것을 생각하면서 어거스틴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십이 다 되어 갈 때였는데 오십이 되기 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어거스틴을 통해서 그 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말 심취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예수님은 저절로 만나지만 천국에 가면 할머니하고 어거스틴 외에는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청교도 좋아한다는 사람 별로 싫어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만나면 정말 할 얘기가 많습니다. 형제라는 것을 느낍니다.
2년만 어거스틴에 깊이 심취해서 어거스틴 외에는 아무 것도 읽지 않으면서 살아 보십시오.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대한 우리 학교 다닐 때 배운 말할 수 없는 비난 같은 것들은 일부는 사실이지만 일부는 검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기독교에 대한 관계는 서구 철학사에 대한 플라톤의 관계와 같은 플라톤 없이 서구 철학을 이해할 수 없듯이 어거스틴을 통해서 서구 사상으로 나아가는 바다의 수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 그 책을 여러분들이 한번 읽으시면서 막 읽힌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상당한 철학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들이 어거스틴의 사상적인 유산이 우리 기독교 속에 녹아들어왔는가? 녹아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제가 2년 사이에 건강이 매우 안 좋아져서 수술을 두 번씩 하고 18키로 정도 체중이 줄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제일 서러운 것이 체력이 너무 떨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때까지 체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픈 모든 것은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공부 할 때만 해도 체력이 넘쳤습니다. 주일날 밤늦게까지 설교하고 월요일 날은 새벽 7시에 나와서 7시부터 9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형이상학』(Metaphysics)을 가르치고 10시부터 12시까지 프란시스 튜레틴을 강의하고 2시부터 4시까지 중세철학사 강의하고 6시부터 9시까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강의하고 한 70명의 학생이 월요일 마다 내 연구실에 와서 공부를 했습니다. 다 시험보고 들어 왔습니다. 너무 기쁘니까 다 감당을 했습니다. 몸이 무너졌습니다. 주일날 설교 한편 하고 들어와서 링겔 맞고 드러누웠습니다. 월요일 날 다시 공부하러 나가는데 우리 집사람이 가지 말라고 나를 붙듭니다. “나 공부해야 한다.” “가지마세요. 당신 쉬어야 합니다.” “공부 안하면 나는 무엇을 가르치나?” “여태까지 배운 것만 해도 나는 가르칠 수 있으니까 가지마라.” 그때 내가 한 얘기가 “나는 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 막장으로 내려가 그날 쓸 땔감을 캐다가 가족들을 위해 불을 피워 살게 하는 광부다.” 자기가 무엇인가 상당히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로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매일 매일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거룩한 진리의 아름다움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학이 예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영원에 대한 감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지만 육체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마다 자기가 얼마나 추로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고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킴으로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 공부를 할 때 최고의 유익은 자기 자신입니다.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는 이 책이 요새 우리 교인들이 하는 공과 공부 책입니다. 구역장들이 이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을 가르칠 수 있는 구역장들이 오백 명쯤 됩니다. 어떻게 훈련을 받는가? 입니다.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의 지성적인 개안을 했습니다. 30대 중반은 신학에 많은 분과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런 혼란을 안 겪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겪은 혼란은 이 신학의 분과가 다른 것하고 어떤 관계가 있고 여러 가지 분과들이 어떻게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는가? 그게 너무 궁금했습니다. 잘 몰랐습니다. 교수님에게 질문도 여러 번 했는데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신학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라.” 두 번의 지성적 개안이 있을 때 두 번 다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30대 중반에 깊이 부흥을 경험하면서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5장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신학이 얼마나 아름다운학문인지를 경험하면서 많은 신학의 분과들이 어떻게 하나로 조화를 이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로 제가 여러 가지 학문들을 더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기본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역사 공부를 하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영미철학, 이런 거 못했습니다. 고전철학, 심리학, 사회학, 생물학, 다음에 천문학, 천문학은 과외 선생님한테 1년 동안 배웠습니다. 신학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아주 중요한 이슈들을 천문학을 통해서 해결되는 감격적인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게 사십대 후반 오십대 가까이 되었을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이 어떻게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가 되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는 웅장한 하모니가 되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신학이 지휘자라면 콘트라베이스는 과학이고 트럼펫은 생물학이고 비유를 한다면 수많은 학문들이 어우러지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모순이 없이 참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능성, 이런 것들을 보면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혼자서 감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어떤 개념이 떠오르면 확하고 어떤 설교들이라고 그럴까? 그런 가르침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쓴 책 중에는 삼일 내지 사일에 쓴 책들이 여러 권 있습니다. 삼일 동안 썼다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이틀 삼일에 쓴 책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얘기했듯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가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엮어서 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신학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삶을 거기에 부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르는데 어찌 사랑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성경뿐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음악, 예술 등의 공부를 하고 창조세계 안에 있는 신적 질서들을 인식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시 연관을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이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아멘”.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학은 정말 사랑스러운 학문이니 하나님께서 참으로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다. 신학 공부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의지의 크기에 있다. 신학공부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공부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세상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것이 신학의 목적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