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길로 걸어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녹취자 : 오희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총론적인 고백을 한 후에 2절부터 5절까지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실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신 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새벽에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단어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입니다. 여기서 “소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살아나게 한다.”, 혹은 “살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즉,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런 고백이 됩니다. 2절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알게 되었다면 3절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영혼의 소생”, “영혼을 소생케 하며”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것은 무엇인가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어떤 생명의 기운을 확 불어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육체로만 만들어지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영혼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동물들은 그냥 육체로 지어져서 하나님이 생존에 필요한 기능을 주셔서 물체를 분별하고 감각하고 배고픔을 느끼고 배부름을 느끼고 위험을 감지하는 정도의 감각만을 주셨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감각을 훨씬 뛰어넘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에 있는 의미를 묻고 심지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여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영혼과 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도 보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어떤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공장에 가 보면 그 물건이 무슨 부품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그를 빚으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티끌”이라고 나옵니다. 먼지 같은 것으로 빚으셔서 그것으로서 육체를 삼으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된 육체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이것은 숨 자체가 인간의 영혼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입니다. 그런 동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 안에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 영혼과 육체를 결합시키심으로 참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육체는 땅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육체와 헤어지고 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물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또렷하고 생생한 정신으로 나와서 말씀을 듣고 있지만 아마 한 20일씩 굶겨 놓으면 혼수상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몇 분은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들이 금식기도하면 우습게 보여도 자기가 한 번 해보면 왜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모릅니다. 일주일을 작정했는데 아주 오래 참았는데 겨우 이틀밖에 안 지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는 처음부터 땅에 있는 물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추울 때는 따뜻한 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그렇게 해 주어야만 육체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어려서부터 육체가 점점 성장을 하다가 스물, 서른 살쯤, 여자들의 노화가 스물셋 부터 시작된다고 하고 남자는 스물다섯에 최고조에 달한다고 합니다. 생명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곤한 것을 모릅니다. 이 육체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육체에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고 생명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머리카락도 빠집니다. 눈도 침침해져서 잘 안 보이고 뭘 자꾸 흘리고 허리도 아파서 쩔쩔 맵니다. 그만큼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오고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갑니다. 또한 젊어서는 아무것이나 막 먹다가 나이가 들면 소화가 잘 안 됩니다. 그리고 많이 먹지를 못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영양가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 차에 타서 한 시간이든 한 시간 반이든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앉을 자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젊었을 때는 뛰어다니고 자전거 타고 다니다가 나이가 들면 택시를 타고 싶어 하고 조금 더 좋은 차를 타고 싶어 합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매우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됨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육체의 힘을 오래 쓰도록 낭비하지 않고 보관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죄는 이것과 인간의 허영이 결합되면서 그러한 육체의 연약한 상태를 욕망으로 극대화해서 팽창시키면서 죄를 짓게 됩니다. 탐심을 갖게 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그런 것들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는 밥도 따뜻한 것을 드리고 앉는 자리에 방석이라도 하나 더 놔 드리는 것이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인류가 쭉 내려오면서 자원이 고갈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원을 조금이라도 덜 낭비하게 하려고 돌봐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로사상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는 좋은 물건, 맛있는 음식, 편한 것, 그런 것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목표가 왜곡됩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아무데서나 자고 한 3천 원짜리 우동이라도 맛있게 먹으면서 젊은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되랴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높은 목표를 찾아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조금씩 조금씩 자기 몸에서 빠져나가는 육체의 기운들을 보충할 수 있도록 저축도 좀 하고 안정된 삶을 살도록 젊어서 노력을 해야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육체가 이 세상으로부터 왔고,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우리 육체의 기력을 유지하고 육체의 생명을 지탱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생을 살면서 모든 아픈 것은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담임목사하면서도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부교역자들이 아프다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왜 그렇게 아프냐?” 하면서 어찌 보면 가혹했습니다. 항상 꾀병처럼 보였습니다. 틀림없이 아프지 않을 텐데 저렇게 아픈 척을 하나? 하며 이해를 못했습니다. 저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힘이 솟아났습니다. 한 15년 전까지 그랬습니다. 저의 체력을 감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련회 와서 교역자회의를 3시까지 하고 7시에 일어나서 다시 기도회를 했습니다. 육체의 힘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 힘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인데, 앞으로 우리의 미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없고 물질이 없으면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아 놓은 돈이 없이 나이가 들면 구루마 끌면서 박스 주우러 다녀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돈만 있으면 되는구나!, 인생의 모든 문제는 물질의 문제구나!’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져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이런 얘기를 하더랍니다. “엄마.”, “왜?”, “우리 친구들은 자기네 집이 가난하다고 부끄러워하고 자기 아빠가 돈 많이 못 번다고 불행한 처지에 있다고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달라.”, 엄마가 대견하게 생각해서 “그래, 넌 무슨 생각을 하는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뭐가 부끄러워? 돈 없는 집에서 태어난 게 뭐가 불행이야? 못 생기게 태어난 게 불행이지.” 이와 같은 생각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농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불행은 못 생기게 태어난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육체의 자원이 있습니다. 그것이면 인생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뭐라고 합니까? “내 영혼을 하나님이 살려주셨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이 내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습니다. 육체의 양식은 이 땅에 있는 지상의 자원입니다. 밥이든 야채든 과일이든 고기든 과자든 뭔가를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 속에서 잘게 분해시키고 그것이 에너지를 주어서 육체의 힘을 유지하며 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런 것을 양식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양식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였습니다. 그는 고민을 했습니다. 풍년이 들어서 엄청나게 많은 곡식을 거둬들였는데 곡간에 그것을 다 집어넣을 수가 없어서 고민을 하다가 곡간을 크게 만들어서 보관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먹고 즐거워하자고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 이렇게 많은 곡식과 재물들이 쌓였으니 매일매일 잔치를 한들 내 재산이 떨어질 리가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나온 어리석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양식은 이 세상에 있는 육체의 양식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먹을 것을 통해서 힘을 공급받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나라로부터 오는 자원을 사용하면서 영혼은 영혼다운 기능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불신자들은 영혼이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람이 칼에 맞거나 창에 찔려서 죽은, 숨을 쉬지 않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숨이 끊어지면 죽고 두세 시간이면 부패하기 시작해서 사라져가지만 영혼은 처음부터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은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 것처럼 그렇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혼이 죽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도 가고 천국에도 갑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 고 할 때의 그 의미는 “사라졌다.”, “멸실되어 버렸다.” 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영혼다운 올바른 기능을 못할 때, 잘못할 때 그때 우리는 그 영혼을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래 영혼을 주셨을 때 의도하셨던 영혼의 제대로 된 기능을 못하고 잘못 작용할 때 그 영혼을 죽은 영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우리 모두 살아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달리기를 한다고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100발자국 가서 주저앉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한 10km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기는 다 살아있는데 힘이 각각 다른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의 영혼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그 상태의 힘이 각각 다릅니다. 그렇게 영혼의 힘이 사라진 상태, 그것을 영적인 침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의도는 육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인간의 활동을 하며 살아가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들을 영혼이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 이것이 나중에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와 같이 판단하고 올바로 느끼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도록 정신에 힘을 주는 것이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매일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영혼에는 그런 양식을 충분히 공급해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힘을 얻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련과 난관들을 극복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는 그런 시간, 그런 노력, 그런 은혜가 있습니까? 영혼의 가장 탁월한 기능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지성과 사랑이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래서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 모든 지식을 탐구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점점 더 고상한 견해를 갖고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더 깊이 있는 지식을 갖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아감으로써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올바로 분별해서 실제로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이 힘 ( 때문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혼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또 책을 읽고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하고 위로를 받음으로써 날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채워집니다. 마치 육체가 건강하고 양식을 잘 먹고 힘이 나면 일을 할 수 있듯이 영혼이 그렇게 하늘의 자원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영혼은 하늘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 두 가지가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갖추어질 때 균형 잡힌 인간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최근에 롯데그룹의 중요한 지위에 있던 분이 자살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그분도 교회의 장로님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분이 그렇게 나쁜 짓을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듯하게 살아오신 분이 검찰의 조사를 앞두고 양평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 때문에 수사를 받다가 그 사람도 자살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은) 재산을 1조 원을 남겨두고 자살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감옥 가서 몇 년 살다가 오고 그 1조 원을 다 정리해서 통장에 넣어 두면 1년에 몇 백억씩 나올 텐데 그걸로 먹고 살면 되지.’ 할 텐데, 그것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옛날에, 한 30년 전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빚에 몰려서 자살을 했습니다. 빚이 20억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은 40억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40억 정리해서 20억 갚고 나머지 20억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1조를 남겼다, 내가 감옥에 간다, 안 간다, 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자존심이 확 구겨지면서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도 정말 살기 싫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신앙생활을 해 봐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나는 왜 이렇게 다 산산이 찢어진 가정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고통을 받을까? 그러니 얼른 시집이나 가 버리고 이 집안과 멀리 떨어져서 나 혼자 살아야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별 사람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훌훌 털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면 거기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집에서 엄마 아빠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시집을 가니까 그 엄마 아빠보다 훨씬 강적인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만납니다. 거기에 줄줄이 시동생까지 껴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항상 인생의 모든 일들이 잘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상당히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기가 열심히 믿으면 하나님을 리모컨처럼 조종해서 자기를 위해 봉사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됩니다. 왜? 인생은 (원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영혼의 “생명”과 “사랑”입니다.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지면, 그렇게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서 고통을 받으며 살면서도 이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뜻을 이루시려고 나를 이런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혹은 이런 교회에 나를 두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전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참 좋으신 하나님이 반드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내 인생을 인도하실 것이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변함없이 그분을 섬기면 내게 일어난 이 불행해 보이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낙심한 사람들을 붙들어주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것은 생명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런 충만한 생명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날 때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예수 믿어도 안 될 때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도 “꿈을 가져! 이루어질 거야! 하나님을 잘 믿으면 네 길을 고속도로야!” (라고 말하지만)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어려서 부터 안 되는 일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그렇게 교육시키도록 강조합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으앙!” 하고 울고 세 살 때부터 숟가락 집어던지며 고집을 부리는데 해 주지 말라고 합니다. 그게 아니라 입술이 새파래지고 발을 데굴데굴 구르고 난리를 쳐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분들, 딸이 귀엽다고 해서 벌렁 드러누워서 버둥거리면 모든 것을 다 해주는데 그러면 그게 시집가서도 그렇게 되는 줄 압니다. 자기 엄마나 받아주지 누가 그것을 받아줍니까? 자기 발만 아픈 것입니다. 신랑이 받아줄 것 같습니까? 눈에 콩깍지가 씌웠을 때, 몇 달 동안은 받아주지만 누가 그런 인간을 데리고 삽니까? 더구나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시어머니, 시아버지 앞에서 드러누워서 다리를 버둥거려보십시오. 웬 장애인이 들어왔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아, 안 되는 것이 참 많구나!” 그런데 그 안 되는 모든 과정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 되는 (상황) 가운데(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분의 손 안에 나의 인생의 계획이 있고 그분이 이끄시는 동안에 나는 살아간다!” 는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 아이에게는 모든 걸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줘야지.” (이러한 생각이) 그 아이를 너무너무 불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터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뭐가 될 때에는 가슴이 벅찹니다. “이야! 이것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고 생각) 합니다. 감사할 일이 훨씬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뭐가 잘 안 됩니다. 때로는 교회에서도 뭐가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원래 (인생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원래 안 되는 것인데 여태까지 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였고 이제 본전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살다 보면) 매일매일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들을 만나게 되는데, 만약 매일매일 만나는 현실마다 우리 마음대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저절로 모든 것들이 순풍에 돛 단 것처럼 하나님이 한 3년만 그렇게 해 주시면 그 가운데 새벽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 오늘 묵상하는 가운데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려서 자라면서 부터 열네 살 때 논둑에 엎드려 펑펑 울며 무신론자가 되기로 하는 자각이 생겨난 이후로 이제까지 진짜 형통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행복을 느꼈던 시간들은 제 인생에 가르쳐 준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모든 보석과 같이 소중한 진리들은 그 피나는 시련과 연단, 고난, 역경,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이전에 제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어떤 때에는 물질로 치열한 연단을 받게 하시고 (그 다음에) 그 연단을 합격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물질로 괴롭히지 않으십니다. (또) 인간관계의 연단을 받으면 사람들과 연단이 되어서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은 또 다른 것, 또 다른 것, 또 다른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지금도 목사님은 그런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는데) 당연히 있습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제가 즐겨 인용하던 말인데, “아픈 사람은 모두 다 정신이 모자란 사람이다. 이차돈을 봐라. 목이 잘리고도 5, 6m 를 걸어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 정신이 있어야지 왜 그렇게 아프냐?”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맨날 아픕니다. 주여. 이제는 이해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힘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5월이 되면 가정의 달인데, 이렇게 하면 오늘 11시에도 못 끝날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넘어가야겠습니다.
(따라서) 영혼이 소생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은 영혼이 죽은 것과 같았던 때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영적인 침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희미해지고 그분께로부터 영혼에 부어지는 생명과 힘의 충만함이 흐려질 때, 그때 그것을 “영혼의 침체”라고 부릅니다.
시편이 영혼의 침체에 대해서 몇 가지를 제시하지만 영혼의 침체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죄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언제 신문에 나온 적이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더 나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주일을 지켰고 가정을 지켰고 열심히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 십일조를 내며 살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대부분) 우리가 “죄” 라고 하면 살인하고 간음하고 감옥에 드나들 정도의 죄들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라는 것은 본질 그 자체가 하나님을 자신의 행복에 대한 적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의(opposition) 입니다. 적의가 무엇입니까? (적의란) 저 사람과 나는 원수라는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마음을 품었습니까?” 하고 물을 텐데 물론 노골적으로 “하나님 나와 보십시오! 나하고 한 판 해 봅시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은근히 배척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죄는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의 본질을 똑같습니다. 요즘은 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기도 그렇고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오물을 생산해내서 쏟아내면 다른 관으로 통해서 나가고 사용료를 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치우는 차가 왔습니다. 사람들이 그 차를 싫어하니까 대개 새벽에 (차가) 옵니다. 미리 전화를 하면 새벽 5시 반이나 6시쯤에 커다란 똥차가 옵니다. 그런데 그 차가 올 때는 항상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옵니다. 베토벤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똥차가 자기 노래를 틀면서 옵니다. 그러고는 커다란 파이프를 놓고 빨아들이면 게이지가 올라갑니다. 한참 많이 할 때는 6개월에 한 번씩, 심지어는 4개월에 한 번씩 퍼야 합니다. 그 차가 지나가면 출렁출렁하면서 지나갑니다. 우리는 그걸 보며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오면서 그 노래만 들리면 생각이 나서 그 노래도 싫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똥물인데 그것을 여러 번 채에 거르고 필터 종이에 여러 번 걸러서 노르스름하고 맑은 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스프레이에 넣고 공중에 뿌렸습니다. 작은 알갱이들이 막 떠다닙니다. 그것과 출렁거리는 똥차에 실려서 찌꺼기를 흘리면서 달리는 것은 크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본질은 똑같은 똥물입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접시처럼 넙적한 비커에 찬 물과 함께 넣고 가열을 했습니다. 1초에 섭씨 0.02도 씩 올라가도록 불꽃을 조절했습니다. 처음에 차가운 물에 개구리를 넣었는데 한 시간 20분쯤 지난 후에 개구리가 푹 삶아져 있었습니다. 만약에 따뜻한 물에 살아있는 개구리를 집어넣었다면 개구리가 사우나 하듯이 쑥 담그면서 “아, 시원하다~” 했겠습니까? (개구리는) 미친듯이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구리가) 차가운 물에 들어가서 천천히, 천천히 따뜻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비가 되어서 거기서 곰탕이 되어버렸습니다.
군인들이 개울에서 돌멩이를 줍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자루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명령을 했습니다. “너희들을 가서 이 자루에 50kg씩 돌멩이를 담아온다. 실시!” 그중에 한 병사는 어디 가서 무식하게 50kg 짜리 돌덩어리 한 개를 담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30kg, 20kg 두 개를 넣어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 사람들 참 바보다. 저걸 지고 어디까지 가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큰 걸 가져왔지? 작은 공깃돌 같은 게 좋지.’ 하며 자잘한 공깃돌을 모아서 담아왔습니다. 저울에 달아보니까 모두 50kg 씩 이었습니다. 그 다음 명령은 사람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지금부터 이 돌멩이를 가져온 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한 개를 갖고 온 사람은 확실하게,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 힘들게 빼 왔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았습니다. 두 개 가져온 사람도 조금 헷갈리는 듯 하다가 여기 하나 놓고 여기 하나 놓으니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천 개를 갖고 온 사람은 한 개도 갖다 놓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인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기 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말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영혼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드리는 진실한 삶이 없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하고 대견해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바로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셨던 외식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진실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1년 내내 예배당에 나와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감격, 은혜의 크기, 이런 것들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슴 벅차는 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아서 영혼을 통해 들어오는 그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의 영혼이 아주 핍절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영혼이 그런 상태가 되고 나면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은혜 받은 영혼, 진리의 빛을 받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주체가 되어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주체가 되어버립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대영교회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감각이 주체가 된 사람들은) TV의 홈쇼핑만 보면 미치도록 사고 싶어 합니다. 더구나 거기서 “아! 다 떨어져 갑니다. 매진되어 갑니다! 어떡하죠? 곧 매진될 것 같습니다!” 하면 뭐에 홀린 사람처럼 전화기를 들고 누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안 떨어졌습니다. 창고에 많습니다. “아, 다 떨어졌습니다. 매진입니다.” 해도 전화하면 다 줍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없으니까 자기의 감각적으로 좋은 대로 그냥 삽니다. 하고 싶은 것 하고 가고 싶은데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삽니다.
오늘 아침에 서울에 올라가서 강의를 하고 바로 내려오는 길입니다. 거기 젊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제일 불쌍한 애들이, 인터넷에 들어가면 자기가 이런 음식점에 다녀왔다고 사진 올리는 사람들이다.” 6천 원 주고 소박하게 칼국수를 하나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고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이 가지도 못하는 으리으리한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마지막에는 카드로 긁은 영수증까지 찍어서 올립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지금보다 말도 안 되게 어려웠지만 (그 때에도) 그런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라고 보았습니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많은데 겨우 그 먹고 온 이야기, 예쁜 호텔에서 자고 온 이야기, 그래봐야 그 집이 자기 집입니까? 하루 저녁 자고 온 것인데 말입니다. 더 불쌍한 사람은 그걸 보고 너무 부러워서 자살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왜 이렇게 살까 하면서 비관하며 자살합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그게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내 인생의 주인노릇을 못 하니까 감각이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를 하나 하고 싶으면 미치도록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고 싶고 갖고 싶고, 그러다보니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고 미친 듯이 해도 잘 안되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고 하고, 그러다가 감옥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온갖 악들이 그렇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6:10)”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하나님과의 생생한 그 은혜의 감격, 사랑, 이런 것을 잃어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놔두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다시 소생해야 하겠습니까? 그 길이 무엇입니까?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회개가 없이는 누구도 그렇게 영혼의 침체를 가져온 죄에서 벗어나서 다시 하나님 앞에 살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인생 말년에 이 시편 23편을 썼다고 믿어지는데 다윗도 죄를 지었습니다. 대표적인 두 죄가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세계의 왕들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죄도 아니었습니다. 왕은 원래 죄가 없습니다. 왕은 그 나라의 법 자체가 왕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왕은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인구조사를 했기로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고 남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가 동침한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런 정도 나쁜 왕은 옛날에 많았습니다. 심지어 당나라의 고종 같은 사람은 측천무후를 그 아내로 맞이하는데 아버지와 평생을 살던 그 궁녀를 자기의 부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럽니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에게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져서 구원의 기쁨을 모두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때 그의 영혼을 다시 살린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맨 처음에 다윗은 많은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 해결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회개 없이는 그런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침체에 빠졌을 때 몇 가지 징후가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예배를 드려도,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읽어도, 그리고 자꾸 진리를 가르쳐주는 환경을 싫어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드라마보다 성경이 훨씬 재밌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가 잘 안 됩니다. 막 뜨겁게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방황하는 이 영혼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고통 받는 성도들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하는 주님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용납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표가 불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감각적인 삶에 이끌리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태) 속에서 해결의 길은 하나님 앞에 깊이,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자신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실천하는 삶이 좋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생생한 신앙의 양심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자신의 죄가 생각이 나고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신이 미워지는, 그리고 자신과 자신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서 (스스로) 자신을 꾸짖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했니? 그렇게 하면 안 돼! 왜 그렇게 했어!” 하나의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아이고 또 하나의 자기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아입니다. (즉,) 그것(자기 욕심)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면 안 돼!” 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성경은 “자기부인” 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부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회개는 죄를 짓는 과정과 역순입니다. 똑같이 역순입니다. 죄를 지을 때, 예를 들면 내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이 물건을 보니까 평소에 너무 갖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저거, 굉장히 값나가는 물건인데?’ 하며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저걸 가질 수 있을까?’ 마음이 이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감정”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잠깐 나간 사이에 이것을 집어넣고 가지고 집에 갑니다. “의지”가 실행을 한 것입니다. 회개할 때는 정반대로, 어느 날 생각을 합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이거 목사님 물건인데?’ “생각”이 깨어납니다. ‘내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하며 슬퍼집니다. “감정”입니다. ‘지금이라도 자수해서 광명을 찾자!’ 하고 그것을 가져와서 “목사님, 제가 잘못을 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를 하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나를 객관적으로 비추어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다윗이 그런 똑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니다. 얼마나 회개를 했는지 눈물로 자신의 침상을 띄웠다고 했습니다. 몸은 뼈만 앙상히 남을 정도로 그렇게 쇠약해져서 연약해지기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회개 할 때 그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갈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서 주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시도록, 그래서 다시 자기를 사랑해주시도록 눈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그냥 한 마리의 어린 양에 불과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 첫째는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하나님이 깨끗이 용서해 주십니다. 어떻게? 기억도 하지 않으실 정도로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다르게) 인간들은 그렇게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한 번 잘못하면 죽을 때까지 꼬리표를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심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얼마큼? 무한히,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두 번째는 죄와 악을 이길 수 있는 무한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에 가득차서, 마음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가득 차게 되면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고는 얻을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빼앗겨도 괜찮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용기가 없어서 그렇지 용기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우는 사자가 으르렁 거리며 소리를 질러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님의 손을 잡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매일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살다가 보면 도저히 더 이상은 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도 건져주십니다.
5월, 6월이면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항상 가정 설교를 합니다. 여러해 전이었는데 가정설교를 하다가 보니까 교회 안에도 이혼하려는 사람도 많고 이혼한 사람도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정 설교 끝에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교회에 나왔는데 남편과 너무 사이가 안 좋아서 헤어지려고 결심을 하고 이혼 소송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내가 맨날 사인하라고 남편에게 요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인이 그 친구가 너무 불쌍하니까 주일에 불러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교회 근처로 불러서 맛있는 밥을 사주고 교회가 가까우니까 예배드리고 가자고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생전 처음 교회에 왔는데 설교 제목을 보니까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설교를 듣고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만나고 집으로 갔습니다. “여보.” 하고 남편을 불렀습니다. 이혼하려는데 사이가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남편은 ‘또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는구나.’하며 왔습니다. 둘이 마주 섰습니다. 부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어. 정말 미안해.” 그러면 남편이 “이제 알았냐? 나도 너하고 사느라 되게 힘들었다!” 그랬겠습니까? 남편도 무릎을 꿇으면서 “아니야 여보, 내가 당신의 마음을 너무 고통스럽게 했어. 실망시켜서 미안해.” 그렇게 부부가 화합을 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영혼의 힘이 없으니까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올림픽에서 리듬체조 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가서 손연재처럼 흉내를 내 보십시오. 허리가 부러지든지 고개가 부러지든지 할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그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내가 충만히 누리면서 살 때 그 불쌍한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어서 어디서도 용납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나한테 용납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람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흐르는 강물 같은 인생이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나지 않는, 수천 년 동안 사막이었던 땅에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가 그랬습니다. (사막에) 물이 흐르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하루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틀, 3일, 4일, 한 달, 두 달 흐릅니다. 어디서 왔는지 거기에 풀꽃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사막에 심지도 않았는데 풀꽃이 자랍니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물고기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새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들짐승들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벌레가 모입니다. 그것을 먹기 위해 새들이 모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사람이 이주해서 살만한 생태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무엇이 그렇게 합니까? 물만 흘러갔을 뿐인데 수많은 생물들이 아름답게 깃들면서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엄마 아빠가 너무 인격적이고 신앙도 너무 아름답고 거기에 돈도 아주 많고 집도 크고 마음도 너무 너그러워서 그 재산의 대부분을 나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생각하시고, 그런 부모들에게서 태어났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못 했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실수는 엄마 아빠의 딸로 아들로 태어난 거야.”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야속할 정도로 정말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산은 그만두고 빚이나 남기지 말고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사막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 생명과 사랑을 받으면서 그 가족들을 가엾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가족의 한 복판을 흘러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던 사람이 나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물을 먹으며 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깃들며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당신의 자녀들이 겨우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려서 이 소생된 영혼으로, 생명이 확 불러일으켜진 힘 있는 영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주시고 목회자를 세워 말씀을 가르치시고 교제를 통해 은혜를 주시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동을 받게 하시고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섭취하게 하시고 감동을 받게 하시고, 이렇게 하시며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을 침체의 상태에 있지 않고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영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소생된 영혼으로 살아라, 은혜 받은 영혼의 사람이 되어라, 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성도가 되거라.” 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는 공짜입니다. 우리의 대가를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로부터 흘러나오는 무료, 공짜입니다. 그런데 그 공짜는 공짜이기는 하지만 계획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이가 어느 날 학교를 가면서 엄마에게 편지를 주고 갔습니다. 편지를 열어보니까 “엄마에게 보내는 청구서. 엄마 없을 때 동생을 이틀 동안 봐 준 것 1200원, 아빠 구두 3일 동안 닦아준 것 900원, 엄마대신 심부름하고 온 것 1000원, 합계 3100원을 청구합니다.” 그 다음날 엄마가 학교 가는 아이에게 도시락을 싸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으려고 풀어보니까 편지가 나왔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네 놈 배속에 넣고 9달 반 동안 있었던 것 공짜, 네가 아파서 너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 간 것 공짜, 이제까지 젖먹이고 밥 먹이고 길러준 것 공짜, 합계 공짜, 아들아, 엄마는 너를 너무 사랑한단다. 엄마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없어. 너는 엄마의 기쁨이다.” 그날 저녁에 숙제 안하고 까불다가 되게 맞았습니다. 엄마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그 아이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해 주지만 계획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떠한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또렷한 계획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자기의 모든 생명까지도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지만 그 기대에 어긋나는 삶을 살 때는 때려서라도 고치고 싶어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침체되었을 때,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셔서 회개하기만 하면 그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다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냥 그 은혜를 받고 즐거운 삶을 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 계획은 “의로운 삶”입니다.
“의로운 삶”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불의한 삶의 반대입니다. 그럼 불의한 삶, 의로운 삶은 무엇에 의해 결정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교훈이 주어졌습니다. 그 삶의 교훈을 따라서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고 그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은 성경에서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는 물리적인 빛입니다. 그냥 비치는 빛입니다. 여기서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인 빛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왜? 내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신학적인 빛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신학적 지식에 대한) 은혜를 많이 주셔서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로운 삶입니다. 그 의로운 삶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의로운 삶을 고집하다가는 외톨이가 될 수도 있고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조차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하고, 그 길을 걷게 하시려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하늘의 신령한 자원을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요새 제가 사실 집회하러 우리나라를 그렇게 많이 다니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부흥회를 오는 경우도 아마 거의 없습니다. 한 2년에 한 번 가면 많이 가는 것입니다. 저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수 생활을 하면서도 많이 다녔습니다. 오죽하면 차를 산지가 얼마 안 되었는데 너무 킬로 수가 많으니까 카센터 아저씨가 저보고 “아저씨 영업하세요?” 했습니다. 1년에 5만 km를 탔습니다. 그때는 운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운전하고 다니면서 저녁에는 충청도에서 설교하고 새벽에는 양평에서 설교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의 일입니다.
충청북도의 어느 대학에서 저에게 강연을 해 달라고 불렀습니다. 일찌감치 차를 몰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무슨 사고가 났는지 차가 꽉 막혔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왔을 때는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차가 하나도 없어서 좀 밟았습니다. 르망을 타고 다녔는데 한 100킬로 넘게 밟았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파란 옷을 입을 경찰이 서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보고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갔습니다. 그런데 제 차를 딱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면허증을 보여주십시오.”, “왜요?”, “과속하셨습니다.”, “아니, 제가 무슨 과속을 했습니까? 이렇게 천천히 왔는데요?”, “여기서는 천천히 왔는데 저 산 너머에서 과속을 했습니다.”, “산 너머에서 과속을 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거기 제 동료가 있는데 과속했다고 스피든 건으로 찍고 저한테 무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까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뭐하시는 분이십니까?”, “저는 대학의 선생인데 이 앞의 대학에 강연하려고 가다가 시간이 없어서 조금 과속을 했습니다.”, “아, 교수님이시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몰랐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딱지를 받아서 앞에 꽂아 두고 빨리 가서 간신히 제 시간에 도착해서 말씀을 전하고 밤중에 차를 몰고 올라왔습니다. 그때 개척교회를 막 시작했을 때인데 교회에 직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벌금딱지 받은 것이 생각나서 그 직원에게 은행에 내고 오라고 시키려다가 은행 일도 볼 겸 내가 그냥 천천히 걸어가서 내야겠다고 하고 은행에 갔습니다. 가서 딱지를 꺼내서 펴 보니까 과태료가 너무 싸게 나온 것입니다. 6천 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쌀 수가 있나?’ 그 당시에도 과속을 하면 한 2만 원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99년도의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까 틀림없이 6천 원이었습니다. 아래에 보니까 “범칙 사실, 금연장소에서 담배 피웠음”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만약에 교회 직원에게 시켰으면 교회에 시험이 들 뻔 했을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어디 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서….’ 했을 것입니다. 그 경찰도 이상한 게, “흡연 구역에서 담배 피우다가 걸렸음”, 금역구역이라고 써야 하는데 흡연구역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때 딱 생각난 게 그 경찰이 “교수님이시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싼 걸로 끊어드릴게요.”했던 게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내 삶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아, 이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까지 이렇게 산다면 희망이 없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위반을 하지 않도록 노력도 하지만 적발이 되었을 때는 절대로 봐 달라는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
한 번은 차를 타고 내가 운전을 하고 연세 많으신 여전도사님과 심방을 가는데 이분이 운전을 못하시니까 내가 모시고 다녀야 했습니다. 유턴을 해야 하는데 유턴 차선을 가로막고 있어서 뒤에 있다가 노란 중앙선을 밟고 유턴을 하니까 경찰이 지하도에서 보고 뛰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치사하게 그것을 숨어서 적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면허증을 주십시오.”, “왜요?”, “도로교통법 몇 조, 유턴 위반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기 직진하는 차들이 여기 서서 가로막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유턴한 것 아닙니까? 이게 위반한 것입니까?”, “위반한 것입니다.”, “도로교통법 1조를 보면 이 법은 교통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위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위반입니다.” 합니다. 그러더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싼 걸로 끊어 드릴게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불렀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당신에게 싼 걸로 끊어줄 권리가 있느냐? 그것은 법원에서 하는 것이지, 난 싫다. 법대로 해라.” 했더니 경찰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더니, “알았어요, 끊어주면 될 것 아닙니까?” 하며 벌점 10점에 과태료 얼마를 해서 휙 던져줬습니다. 그 사람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싼 걸로 끊어준다는데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법대로 하라고 했을까?’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교회를 개척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교수가 되었는데 그 학교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하길래 2천 5백만 원짜리 전세에 산다고 했더니 그런 나쁜 환경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겠느냐고 하면서 5천만 원을 무이자로 빌려주었습니다. 거의 그냥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0년 뒤에 갚으라고 하면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졸지에 7천만 원짜리 빌라에 전세로 들어갔습니다. 한 40평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화장실이 두 개라고 동네방네 다니며 자랑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앞집 사람이 집사님이었는데 우리 집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 가운데 응답하셨는데요, 목사님께 이 집을 팔라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도 이상하시지, 그 집을 팔려면 나한테 얘기를 하시지 왜 그 사람한테 이야기를 하십니까? 어쨌든 그 집을 힘들게 사게 되었습니다. 샀는데 세금이 문제였습니다. 나는 집을 가져보지 않아서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습니다. 집사람이 가서 세금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4백만 원인가 얼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조그마한 집 하나가 뭐 그리 비싸냐고 물으니까 법무사의 아가씨가 하는 말이, “비싸요? 그럼 반만 내세요.”하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그런 법이 있냐고 하니까, 집 파는 주인과 사는 사람이 진짜 계약서는 따로 쓰고 가짜 계약서를 다운 계약서로 써서 오면 절반만 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집사람이 와서 어떻게 하냐고 하길래, “여보, 집 파는 사람은 집사이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앉아서 가짜 계약서를 쓰면 하나님이 진짜 기뻐하시겠다! 로마서 13장을 봐라. 조세를 바칠 자에게는 조세를 권세를 받을 자에게는 권세를 바치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진짜 돈이 없어서 우리 아들 어린이 통장까지 털어서 맞추어 돈을 가져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법무사에 가서 “세금 내러 왔습니다.”, “가짜 계약서 따로 써 오셨어요?”, “아니오.”,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냥 세금 다 내려구요.”, 그때 그 카운터에 앉아있는 직원이 “어머, 너무 존경스러우셔요. 이런 애국자들이 있으셨군요. 제가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랬겠습니까? “병신, 가르쳐줘도 못 먹어. 가난한 것들이 저렇게 잘난 척을 해요.” 속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교회를 이쪽 교회에서 세 들어서 살다가 3년 만에 교인이 200명에서 1000명이 되었습니다. 옮겨야 했습니다. 교회자리를 알아보고 하나 샀습니다. 산 것이 아니라 통장에 돈이 1500만 원밖에 없으니까, 얼마냐고 했더니 36억이라고 합니다. 진짜 1500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36억짜리를 사려고 했더니 복덕방에서 안 판답니다. 주인이 팔려고 잠깐 내 놨다가 다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인이 어디 사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고 찾아갔습니다. 나는 안 가고 집사님들이 갔습니다. 팔라고 했더니 안 판다고 합니다. 그래도 좀 팔라고 하니까 왜 이리 귀찮게 하냐고 안 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팔라고 했더니 그 땅을 사서 뭐를 할거냐고 하길래 교회를 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짓는다고? 일주일만 생각을 좀 해 봅시다.” 합니다. 일주일 후에 그 할아버지를 만났더니, “내가 평생 이 공장을 하면서 마음속에 기도하던 바가 있었는데, 여기에 교회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소. 이걸 가져가시오.”합니다. 그래서 교인 한 사람에게 3억을 꾸어서 계약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중도금부터는 아무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인감증명과 등기부등본을 다 넘겨주면서 “교회가 무슨 돈이 있겠소. 명의 이전부터 해서 대출을 받아서 잔금을 가져오시오.”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갔던 사람들이 저에게 왔습니다. “얼마라고 합니까?”, “목사님 36억이라고 합니다.”, “계약하자고 하십시오.”, “그런데 목사님, 그 땅 주인이 장로님인데 30억짜리 계약서를 쓰자고 합니다.”, “6억은 어떻게 하고?”, “그건 그냥 비자금으로 달랍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왜 그런 답니까?” 물으니, 땅을 워낙 싸게 사서 그것을 은행에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았는데 36억을 받으면 세금을 내고 돈이 2억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 땅을 교회에 넘겨줄 수는 있지만 놔두면 값이 올라가는 땅에 내 돈을 보태서 넘겨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 입니다. 그러니 30억만 하고 6억을 그냥 주면 세금이 절약이 되어서 한 1억 정도 남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못 지으면 못 지었지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건 이 다음에 우리 자손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가짜 계약서를 주고 산 땅에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세금이 얼마냐고 물으니 3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36억을 달라고 했는데 그냥 39억을 주고 샀습니다. 재직들을 모아놓고 얘기를 했더니 절반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고 절반은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교통정리를 하면서 내 말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다음 세대의 자손들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36억을 그대로 계약서를 쓰고 그 계약서를 쓰는 대가로 3억을 더 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부터는 교회를 운영하는 세금과 모든 것을 정직하게, 그렇게 해서 교회를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날 복을 주십니까? 내가 항상 올바로 살면 기적적으로 길이 열려서 손해를 보지 않도록 만들어주십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36억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9억을 빚내서 주었습니다. 주고 오는 길에 3억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빚을 오래도록 두고 고통 속에서 갚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그런 생명과 은혜를 우리에게 충만히 부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돌아오는 대가가 아무것도 없어도 혹은 오히려 더 손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때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토를 많이 빼앗았습니다. 그 전쟁을 하려고 할 때 교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때 불렀던 찬송이 이것입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그리고 (그 교인들은) 똑바로 그 길을 걸어갑니다. 손해가 나면 그냥 손해를 보면서,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손해를 봅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혹시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좋은 것들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그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올바른 길을 걸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아, 우리가 잘못 살고 있구나! 저렇게 정의롭게, 올바르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구나!’하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영향력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은 다음에 그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보여드려야 할 삶이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올바른 삶입니다. 죽을지라도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눈앞에 있는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삶은 그 은혜를 누리고 즐거워하는 삶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부어주시면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아, 정말 하나님의 백성은 올바르구나! 의롭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백성들이구나!”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그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누리시면서 이런 의의 열매를 맺어서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