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가족 수련회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경건한 그리움에 병들다(아2:3-5) 2008.8.11 온가족 수련회 1
2. 사랑의 동산에서 잔치하다(아5:1) 2008.8.12 온가족 수련회 8
1.경건한 그리움에 병들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아 2:3~5)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신앙의 자리가 우리의 삶에서 어디일까 여러 생각들을 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앙의 근본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이런 사람들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도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엄격하게 도덕의 기준을 따라서 사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우리의 지성에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남이 알지 못 하는 올바른 지식들을 제대로 소유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의 근본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에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런 의지도 아니고 또 지식도 아니고 체험에다 두었어요. 그래서 무엇인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깊고 비밀스러운 그런 종교의 체험을 하는 것이 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독특성이며 본질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그 주의주의 그 다음에 주지주의 그리고 주정주의 이렇게 해서 각각 시대마다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서 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들을 해 온 거에요.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혼란스럽게 이러한 세 가지 것들이 어느 한 시대에 하나만 유행하는 게 아니라 각각 이 사람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저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에요. 그러나 사실은 참된 기독교 신앙의 자리는 지식이나 의지나 그리고 체험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마음 안에 있어서 이 세 가지가 마음 안에서 모두 통합되어서 일어나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개념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교리적으로 볼 때 신앙의 자리는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에요. 이 마음은 이 마음은 비유를 하자면 이 마음은 인간의 모든 지식과 그 다음에 감정, 의지 이런 모든 것들이 만나는 중심 자리와 같은 것이에요.
(예화)우리 인체를 보면 허리가 잘못되고 망가지게 되면은 건강 전체가 나빠져요. 왜 그런가 그랬더니 이 등 뒤의 척추 있는 부분에 신경의 다발들이 모두 모여 있어요. 그것이 온 몸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 신호를 따라서 위에서는 위액의 분비액을 그리고 장에서는 장에 필요한 소화액을 모두 내는데 뼈가 틀어져서 이 신경 다발이 꺾이니까 이런 조절 기능이 깨뜨려져서 온 몸의 균형이 상실되는 거에요.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모든 것이 만나는 거야. 그래서 인간이 밖의 세계와 접촉하는 가운데 깨달은 어떤 지식들이 이 지성을 통해서 들어와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만나 그것을 그런 지식을 만나게 될 때 내 안에 있던 많은 생각들과 융합이 되면서 감정이 생겨나. 그 감정도 마음 안에서 만나. 그런 감정과 지식이 복잡하게 작용을 하면서 무엇인가 자기가 원하는 의지적인 결단을 하게 돼. 이것도 역시 마음 안에서 만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술을 택해. 그런데 그 좋아하는 성향도 마음 안에서 만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마음은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서 들어오는 지점이고 이 모든 것들이 흘러나가는 원천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의지적으로나 아니면 지식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찾아보려고 하려고 할지라도 마음 자체가 하나님에 의하여 정복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천이 잘린 것과 같아서 결국은 온전히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그러한 경건이 되지를 못 하는 거에요. 이 경건의 자리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야.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죄의 자리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깃드는 자리이기도 한다는거죠.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다음에 인간의 죄도 이 세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물들의 표상도 우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지혜자는 말하기를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켜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복잡하고 다른 개념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안에서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을 지성으로는 알아보고 감정으로는 그 하나님을 좋아하고 의지로는 그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그것이 구원이에요. 그런 구원은 자연적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기적과 같은 변화이기 때문에 성경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쳤던 것이에요. 그 후로부터 이제 우리는 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에요. 이것은 중생과 함께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변화가 주어지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몰랐던 인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고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화는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없었는데 구원 받고 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새로운 감각을 하나님이 주신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눈과 코와 입과 살갗과 귀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외부의 세계와 접촉하고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처럼 영적으로도 새로운 감각이 중생과 함께 생겨나서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 보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보고 들리는 주님의 음성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또 코로 냄새를 맡고 또 살갗으로 느끼며 입으로 맛 보며 사물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죠. 그러데 이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약해질 때도 있고 강해질 때도 있지만 결코 이 사랑이 중생한 사람들에게는 사라지는 법이 없는 것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내가 사랑하였으므로 병이 났다 이 술람미 여인의 고백이거든요. 이런 병을 가리켜서 뭐라고 그러죠? 그렇지. 상사병이라고 그러죠. 상사병은 뭐냐하면은 너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곁에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마음의 병인데 그 마음의 병이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끔 병들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상사병의 상태라고 말하는 거죠. 그것이죠. 누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지체들 이렇게 만나보면은 목사님 설교는 유난히 사랑에 대한 설교가 많은데 하다 못해 연애라도 하고 온 청년들은 목사님 설교를 이해를 잘 합니다. 그것도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는 거죠. 혹시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보고 싶어본 적이 있으세요? 뭐 있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고 또 없다고 하자니 너무 또 창피하고 그렇겠죠. 사람이 누군가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으면은 가장 아픈 곳이 가슴이에요. 그 너무 그립고 보고 싶으면은 마치 이 가슴을 도끼로 갈비뼈를 중심을 꽉 누르는 것 처럼 그런 통증이 오게 되는 거에요.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그리고 아무 의욕이 없이 그렇게 보고 싶어지는 것이 그게 그리움이에요. 보고 싶은 거에요. 아이가 엄마를 보고 싶어해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의 짝을 그리워할 때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는 급기야 그 통증 속에서 눈물이 확 쏟아지는 거죠. 그것이 바로 보고 싶은 거에요. 보고 싶은 강도는 사랑의 깊이에 정확히 비례해요. 그러니까 헤어져서 곁에 없어져 버릴 때 까지는 그 사람이 진정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거에요.
(예화) 이제 엄마가 애가 이제 학교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군대 갈 날을 기다려. 근데 군대 갈 날을 기다리는데 그리고 뭐 학교도 안 다니고 하니까 이제 뭐 밤 늦게까지 컴퓨터 하고 싸돌아다니다가 뭐 그냥 아침 늦게까지 자고 이러니까 방도 안 치우고 하니까 엄마 볼 때 그 아들이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에이 저 놈의 자식 빨리 군대나 가라 그래서 이제 맨날 요즘 나라는 군대는 저런 것도 안 잡아가고 뭘 잡아가나 그래서 일단 군대를 가요. 가면은 그 엄마들은 100명이면 100명 다 울어. 눈물을..그래서 한 일주일 쯤 돼서 잊어버릴만 하면 또 한 번 울려. 그게 뭐에요. 소포가 날라오는 거에요. 그 옷이. 그것 좀 보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두 번 괴롭혀. 날라와요. 그걸 보고 또 한 번 우는 거에요. 이게 같이 살 때에는 귀찮고 얼른 군대나 끌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니까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에요. 딸도 마찬가지. 어우 저거 얼른 시집이나 깨물려 가지 왜 아직까지도 안 가고 있어서 아주 꼴도 보기 싫다 근데 시집 가고 나면은 예외 없이 울어요.
그게 바로 사랑의 효과에요. 그러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둘 중 하나 아니겠어요? 주님의 사랑을 충만히 누리면서 그 안에서 행복하든지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면은 그 사랑을 그리워하고 가슴 아파하든지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친밀한 이런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면서도 그렇게 사랑하는 애인이나 사랑하는 자식이나 부모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그렇게 가슴 아파하고 아려하고 그러지를 않아요.
(예화) 지난 한 주간에 내가 어렸을 때 자란 고향에 가서 설교 준비도 하고 그랬다고 그랬는데 거기만 가면 나는 그렇게 가슴이 아파요. 왜냐면 부모님이 거기 사시고 나는 이 쪽에 와서 초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면서 1년에 꼭 두 번 밖에 못 가. 겨울방학 하고 여름 방학하고 가는 거에요. 그래봐야 그 땐 중학교 시험이 있었으니까 그저 가 봐야 장날 딱 이틀. 두 파스라고 그러는데 5일 5일 해서 10일 있으면 끌려 올라와서 공부해야 돼요. 그래봐야 공부도 뭐 제대로 못 했지만은 . 근까 하튼 제일 괴로운 거는 올 때에요 올 때. 올 때 그렇게 울었어요. 그리고 와 가지고는 서울 생활에 적응하는데 한 1주일 내지 2주일은 걸린 거에요. 그렇게 집이 그리워요. 그런데 진짜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보고 싶으면은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거구나 라는 거를 어렸을 때 깨달았어요. 근까 나는 어렸을 때 인생의 의미를 훨씬 그 어렸을 때 8살 9살 때 이미 벌써 깨우쳤어요. 근데 진짜 여기 갈비뼈 사이가 아파요. 그래봐야 그렇게 무슨 뭐 대단한 사람도 안 됐구만 그게 뭐 서울이라고 해서 뭐 뛰어나게 교육을 한다고 그렇게 해서 갖다놓고 그렇게 했을까 그래서 나는 요즘 그런 식으로 사는 부모들에게 바보라고 그러는거죠. 그렇게 지식 나부랭이 몇 개 넣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린 나이에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그 안에서 부모와 함께 선한 것 악한 것 아름다운 것 추한 것을 이해하면서 그 안에서 참다운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그 지식 나부랭이를 넣어주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거에요.
인생의 가는 길들을 결정해 주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한 때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았던 그런 과거들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실제 오늘날 우리 삶에서 보면 그 때처럼 그런 충만한 은혜와 기쁨을 못 누리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다 만족스럽지 않거든? 그런데 신기한 건 뭐냐하면 병이 안 나. 그게 문제에요. 여기에서 사람들이 혼란이 생기는 거야. 내가 이렇게 이렇게 기도 속에서 나를 만나주시던 하나님의 그 큰 은혜 말씀 속에서 나를 만나주시고 내게 베풀어주시던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이런 것 없이 많은 시간들이 지났는데 내가 정말 내 안에 그런 간절한 목마름 주님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 하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이 목마른 애달픔이나 그리움 이런 게 왜 없을까 그렇게 궁금하게 여기거든요. 그리고 급기야 어떻게 생각하냐면은 예전에 내가 하나님을 만난 그 충만한 은혜의 경험이 혹시 비정상적인 경험은 아니었을까 사실은 사랑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내가 그냥 독단적으로 많이 느끼고 착각한 감정의 경험만은 아니었나 이런 반성을 하게 돼요. 오늘 정리를 하세요. 그렇지가 않아요. 그렇지가 않아요. 그게 뭐냐면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 하고 떨어져 있어야 될 때에는 그냥 그 사람만 그리워하면서 방에 누워 있을 때에는 병이 점점 깊어져요. 그래서 어떻하죠? 부지런히 일을 하고 정신을 딴 데 분산시킬 때에 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보고픔이 주는 마음의 통증이 경감되는 거야. 경감되는 거야.
(예화) 옛날에 교회 개척할 때 초기에는 가끔 시련당한 자매들이 가끔 상담을 했거든요 그러면 사랑을 아주 깊게 하고 난 다음에 시련을 당하게 되면 그것도 뭐 어쩔 수 없이 헤어진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저 편한 말로 하면 발로 차인 거죠 그리고 혼자 덜렁 떨어지고 나면은 막 죽을 정도로 괴로워하죠. 그래서 그렇게 탁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마음의 사랑도 접혀버리면 괜찮은데 그게 안 될 때 그 쪽이 인제 피해자가 되는 거에요. 근까 막 견딜 수 없이 괴로워요. 그 때마다 내가 늘 해 주는 말이 있어요. 뭐냐면은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혼자 있지 마라 큰 병이 된다 그래서 급기야는 우울증 같은 걸로 발전이 되기도 하는 거에요. 그래서 부지런히 생활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교회 와서 봉사도 많 하고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에는 반드시 기도하고. 그렇게 하면서 극복을 하라고 가르쳐 줘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려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의 친밀함 그 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건져주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던 그 탁월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고도 여러분들이 능히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예전에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의 경험의 진실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의 관심사와 초점이 많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마음에 주님을 그리워하는 갈급함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럴 때는 필요한게 뭐냐면은 정반대에요. 이럴 때는 홀로 조용히 있어요. 사람들이 그리운 상사병은 우리를 계속 파괴시킬 뿐이지만은 그러나 주님을 향한 그리움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만들고 주님의 은혜에 목마르도록 만드는 기능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렇게 안 하고 온갖 세상 것들과 감각적인 것들의 정신이 모두 흩어져서 집중이 안 되니까 자기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느끼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은 자기의 마음으로 충분히 의식하지 못 하는 것이에요,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형형색깔의 사물들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기억과 저 밑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아주 오래된 마음의 기억 그리고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구어 내는 상상에 이르기까지 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상들이 마음 안에서 만나요 근데 이것이 다른 것들에 의해서 너무나 많이 외부적인 것들에 의해서 분주해질 경우에는 이 속에서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목마름이라던지 마음 안에 있는 깊은 그리움 같은 것들을 제대로 길어내어서 마음에 그것이 부딪히게 하여 사모하지 못 하게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 사람이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게 되면은 홀로 있는 시간을 많이 갖지만 그 은혜에서 멀어지게 될 때에 말씀을 고요히 대면하고 은혜를 받는 것 그 다음에 기도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이 은혜의 기쁨과 행복 이런 것으로부터 현저히 멀어진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오래도록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는데도 상사병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에요. 조용히 외부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와 감각들로부터 피해서 홀로 고요히 있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게 꼭 깊은 산 속이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교회당에 와서 조용히 마음을 접고 그리고 자기의 마음 깊은 속으로 향해 보세요. 그리고 그 마음에 머무르지 말고 그 마음 안에서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쭉 바라봐요. 그 때에 자기의 참 모습이 보이는 거에요. 오늘 하루의 일과를 따라서 이 일 저 일에 고개를 내밀고 바쁘게 살고 이렇게 이 일 저 일 상관하고 가치도 별로 없는 일에 몰두하고 마음을 빼앗기고 막 휩쓸려서 살고 저녁 때 자리에 누우면은 내가 도대체 뭘 하면서 하루를 살았나 하는 공허감이 밀려오는 것은 여러분들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이 막 쓰레기 더미에 이 샘이 묻히듯이 막 묻히는 거에요. 그거를 다 이렇게 걷어내면 그 속에서 단 하나의 갈망을 발견하게 돼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에요. 삶의 체계 전체를 아우르는 그것이 경건이라고 하지만 그 지식과 그 하나님을 향한 정서가 만나는 것이 경건이라고 하지만 그 핵심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집약이 되는 거죠. 오늘 이 술람미 여인이 노래하는 그가 왼팔로 나의 머리에 베개를 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아주는도다 그게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게 결국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이 영적인 연합의 체험이거든요. 그리스도와 신자인 우리와의 이 영적인 연합이 실제로 우리의 마음 속에서 경험되는 거에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자기의 사람을 왼손으로 베개하고 그리고 오른손으로 그를 안아줄 때 그 때에 그 사람들에게서는 시간도 멎고 공간도 멈추잖아요? 자기 자신을 모두 바쳐서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서 그래서 그 품에서 그 사랑의 품에서 거기에서 안식을 찾고 마음은 정착지를 발견하고 그리고 다른 모든 이 세계에서의 일어나는 일들과는 상관이 없이 배타적인 그 사랑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에요. 그게 남녀의 사랑이잖아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둘이만 있어야지 같이 있는 것이지 수많은 사람 속에서 섞여 있는 것은 같이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이런 주님의 아주 뜨거운 안아주심 그런 때에 대한 기억을 많이 회상해 보세요 그러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생겨나요. 예전보다 아는 것은 늘어났고 예전보다 행하는 것은 늘어났을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내 마음에 있는 참다운 사랑 행복 이 진정한 만족은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는 그런 깊은 사랑의 교제 속에서 생겨나는 거죠. 이렇게 신랑이 신부를 자기의 왼팔에 누이고 오른손으로 그를 꼭 부듬어 안고 침상에 누워있는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 허락되고 또 허락하는 것이에요. 모든 순종하는 삶 모든 아름다운 경건의 생활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이러한 우리의 영혼의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의 배타적인 사랑 그 경험 속에 있는 것이에요.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 알 사람이 없도다
이번에 한 주간을 지나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저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이렇게 주님과의 아주 뜨거운 그런 사랑의 경험이 있었던 때와 그렇지 못 하던 때가 있어요. 그리고 한 번 주님의 품에서 그 향취를 느끼고 그 참스러운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그 사랑이 마음 안에 남아 있어서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역경을 당하고 못 먹고 못 입고 고생을 많이 해도 그것이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마음 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주님의 큰 은혜와 사랑이 마음 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유혹도 이기게 되는 것이에요. 신앙의 정절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깡다구로 어떤 의무를 행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앙의 정절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런 정절은 의미가 별로 없어요. 신앙의 정절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 있어서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고난과 유혹을 이기게 하는 거에요. 그것이에요. 우리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에 대한 목마름과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어떤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거. 그래서 열심히 일하면 주님을 만날까 아니면은 뭐 열심히 봉사하면 주님을 만날까 아니면 성경을 그냥 공부하면 주님을 만날까 .그렇지 않아요. 그 모든 것들은 수단일 뿐이에요. 하나님은 자기를 향한 목마름 속에 오시는거죠.
(예화)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옛날에 제가 좀 법을 공부할 때는 그렇게 배웠어요. 이 산이나 집을 팔게 되면 계약상으로 원래는 이 집에 심겨진 나무 같은 것들은 별도의 계약을 달지 않으면은 집이 팔렸어도 그 나무의 소유권도 같이 넘어가는 건 아니에요. 주인이 가져갈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 계약을 반드시 부기를 표기해야 되는 거에요. 산도 마찬가지에요. 산이 있으면 그 산의 가치는 단순히 땅의 넓이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산에서 얼마나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지 .민둥산 10만평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선 산 10만평의 가격의 차이는 비교가 안 될 것이에요. 더욱이 그 산에서 아주 희귀한 약초가 자라나고 있다면 그래서 산삼 같은 것들이 많이 묻혀 있다면 가격은 또 틀려지는거죠. 그 많은 나무 그리고 아름다운 화초 그 다음에 그 아름다운 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탐내고 좋아하는 진귀한 약재 이런 것들이 아름답게 뒤엉켜서 누구에 의해서도 범접되지 않도록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그 동산에는 반드시 샘이 있어요. 물이 있는 곳에서만 그런 일들이 가능하지 물이 없는 곳에서는 불가능한 거에요.
그 물이 바로 경건의 샘이고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샘이에요. 거기에서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솟아나는 통로가 있을 때 우리의 섬김, 삶,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마음 모든 곳에 스며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면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우리 신앙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면은 이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렇게 그 품에 안겨서 그렇게 사랑을 흠뻑 받는 그 사랑의 결합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진 곳에서도 그를 그리워하고 목말라하고 사모하며 그렇게 정절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에요. 한 번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에게 정말 그리운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가치 없는 많은 것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묻혀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충만하게 샘솟지 못 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황폐하고 우리의 삶은 거칠고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우리가 사모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주님의 그 은혜의 발자취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오늘 새벽 이 시간에 한 번 우리 자신을 침묵 속에서 돌아볼 수 있어야 돼요. 정말 이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것의 우리의 마음을 닫고 오히려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에 묻혀있는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듭난 자의 마음 우리의 심령을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나에게도 이런 주님과의 절실한 사랑의 때 그래서 나를 다시 한 번 안아주시도록 그 품안에서 주님의 은혜와 향취를 흠뻑 느끼며 주님을 만나지 못해 가슴이 아프도록 그리워하고 목말라 하는 나의 영혼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곡히 부르짖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 여러분들의 영혼 안에 마음 안에 묻혀있던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갈망들이 깨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우리가 주님을 깊이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것처럼 주님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당신의 품에 안으실 때까지는 만족이 없으신 거에요.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과 나 사이를 그렇게 아름답던 사랑의 관계를 박탈해버린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과 나를 가로막고 있는 이 모든 죄와 불순종을 치우시고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온전히 안아주시도록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예전에 보이셨던 그 큰 사랑과 친밀함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사랑의 동산에서 잔치하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 5:1)
I. 본문해설
그 어느 왕이든지 왕은 항상 자신만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산책할 수 있는 정원을 갖고 있었어요. 이 세상의 어느 왕이든지 항상 그것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보면 비원이라고 하는 곳도 바로 왕이 그렇게 은밀하게 혼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산책하며 거닐 수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래서 어느 궁전에든지 가보면 반드시 거기는 왕이 거니는 동산, 왕이 거니는 정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도 솔로몬 왕이었으니까 그런 왕 혼자 거니는 비원이 있었어요. 그것을 여기에서 이 시인은 잠근 동산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러니까 왕이 거니는 거기에는 왕만 접근할 수 있도록 정원이 있고 굳게 잠겨져 있었어요. 왕을 향하여만 열어주는 정원, 그리고 그 정원을 깊숙이 들어가면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게 우물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우물은 속에서 샘이 솟아나는 그런 종류의 야트막한 우물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동산에서 샘이 솟아서 그것이 우물을 가득 채우고 흐르는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고 그것이 왕의 동산을 휘돌아 흐르면서 그러면서 그 물을 공급을 받아 그 동산이 그렇게 아름다운 동산이 되었던 것이죠. 거기에서는 각양 아름다운 꽃과 그리고 풀들이 자라고 그리고 병든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각양 약재들인 그 풀들, 약초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생태계를 이루면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해 놓은 덕분이었어요.
그래서 우리의 경건 생활의 제 1번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에요. 이 경건은 공동체적인 생활과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생활 두 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이 두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야 하는데 항상 한쪽으로만 하려는 거죠. 그래서 예배에도 참석하고 기도회에도 참석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거의 그런 시간을 갖지 않아요. 그러면 그것이 온전한 개인 경건이 되기가 힘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보면 예배에 빠지지 않고 주일도 잘 지키고, 금요 기도회도 나오고, 구역예배도 드리지만 기도생활 거의 안하고 말씀에 깊은 은혜 없이 의무처럼 그것을 행하던 시절들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죠. 그러니까 그 자체도 보면 이거 하나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들은 반대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큐티도 한다, 기도도 한다, 책도 읽는다 그러는데 이 공동체의 예배나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을 찾는 것에 있어서는 거의 무관심해요.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무조건 교회 빠지고 기도원으로 보따리 싸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것도 온전한 경건을 기대하기가 힘든 거예요. 그래서 항상 자신은 한 편으로는 공동체에 속해서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를 이루고 있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홀로 있고, 이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공동체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지체들과 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그리고 물러선 때에는 홀로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해야 되는데 그 기본이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그러면 온전한 경건의 삶을 위해서 얼마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 되겠느냐? 그것은 각각 개인의 영적인 상태와 이런 공동체의 상태 이런 것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고 생각을 해요.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예배와 은혜의 추구가 워낙 열렬하고 간절해서 그래서 자기가 그곳에 가기만 하면 아주 놀라운 은혜의 회복이 있다면 그러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가 적어질 수 있겠지만 반대의 경우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성은 훨씬 더 많아지고, 또 비록 조금 은혜에서 멀어졌어도 아주 깊은 침체에 빠지지 않아서 뛰어난 순발력이 있다면 그 시간의 필요는 줄어들겠지만 아주 깊은 침체에 빠져서 순발력이 없다면 장시간 성경을 읽어도 깨닫는 바가 작을 것이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엎드려 있어도 실지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은 극히 일부일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이 혼자 있어야 할 필요가 증가되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해서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기에서 솔로몬의 동산이 잠근 동산, 봉한 우물과 같이 되었을 때에 은밀한 가운데서 그 물을 먹고 모든 화초들이 아름답게 생태계를 이루며 성장해서 왕이 찾아가서 약초도 따고 향기로운 꽃의 내음도 맞고 그 동산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그런 결실하는 그런 생태계가 된 것처럼 신자의 삶에도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시간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홀로 있기를 원하는 소원함, 홀로 있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의 바램은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의 깊이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죠. 물론 침체에 빠지고 성격이 어두워지면 매사가 귀찮고 잠을 자든 공상을 하든 혼자 있어서 시름에 잠기고 싶어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살아있으면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를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든지 산책을 하든지 뭘 하든지, 홀로 하나님과 은밀하게 말씀드리고 말씀을 듣고 그러고 싶은 갈망을 갖는다.
동산이 그렇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수시로 열리고 그래서 이 세상의 외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짓밟히고 더럽혀졌더라면 그 동산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열매가 맺고 꽃 피고 그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주님 홀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누리시게 하고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굳게 닫아둘 때 그때에 우리의 맘에 있었던 상처들은 치유되고 죄로 말미암아 무너졌던 거룩한 삶에는 새 살이 돋아나고 변화가 오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이 정말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실제 삶에 있어서 보면 이른 아침에서부터 밤늦게까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간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끌고 가고 나는 거기에 끌려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 거예요.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들이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거예요. 그 시간의 길이가 어떠하든지 간에 비록 한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밤늦게까지 여러 가지 많은 일을 수행하면서 장시간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지만 이 경건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거죠. 사도 시대 때에 성령이 임하시고 사도들이 쉼 없이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하루에 3000명이나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교회로 유입되어 들어오던 때에도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바쁜 것도 물론 있겠지만 우선순위의 문제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홀로 있는 개인의 시간이 거의 없이 그냥 여러분들이 살아가면 보통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는 그 경건의 불길이 여러분 마음속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거죠. 우선 홀로 있지 아니 하니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정사의 삶이 불가능한 거예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꼼꼼히 살피면서 자기를 남 보듯이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시간이 없는 거죠.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의 시간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빠르게 신령하고 거룩한 것들에 대해 싫증내고,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들에 대한 친밀함을 단번에 회복하고 그것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피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에요.
비록 그가 신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이 경건한 은혜의 생활의 이 습관들은 빨리 생기는 게 아니라 천천히 생겨요. 하여튼 교회를 제일 처음 개척을 하고 제일 힘든 게 새벽기도였어요. 그 전에도 새벽기도를 안 한 적은 한 번도 없죠. 그러나 교회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차타고 뭐 40~50분 가야되니까 새벽기도 갈 생각을 못하고 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침에 한 6시쯤 일어나서 내 방에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래서 짧으면 한 1시간, 길면 2시간 내지 2시간 반, 아주 길면 3시간 이렇게 기도하면 그러면 8시 반이나 그때예요. 그럼 그때 씻고, 교수니까 그러니까 출근시간 특별히 있는 거 아니니까 강의 시간 맞춰서 학교 나가서 일 보고, 그리고 돌아오죠. 그 대신 밤에는 아무래도 야간 강의 마치고 그러고 돌아오면 11시 반, 씻고 책 좀 보고 정리하고 하면 12시 반, 1시 돼야 잠이 들죠.
그러다가 덜컥 교회를 개척한 거죠. 이건 들어오는 시간은 똑같은데 새벽 5시에 새벽기도예요. 4시 반에는 일어나야 되잖아요. 그래서 맨 처음에 그냥 그랬어요. 아이 개척 시작했는데 새벽기도를 누가 오랴, 그래서 뭐 그렇게 생각을 하고 12월 12일 날 교회를 개척을 하고, 그러고 나서 개척을 했으니 신경을 얼마나 많이 썼겠어요. 그래도 꼴에 개척이라고 했지만 행사하고 뭐하고 그러고 그날도 밤늦게 자고 새벽에 4시 반이 되었는데 죽을 맛이에요. 그래가지고 ‘아휴, 가봐야 아무도 안 왔을 텐데, 그냥 한숨 잘까’ 그러다가 갑자기 ‘너는 담임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정신이 번쩍 나요. 그래서 교회에 성도가 아무리 없어도 가서 나 혼자 기도해야지, 그리고 지하실에 내려갔어요. 당연히 문이 잠겨 있으려니 하고 들어가서 열쇠로 열려고 하니까 문이 열려있어. 휙 열고 들어가 보니까 8명이 새벽기도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안 갔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에요, 첫날. 그래 가가지고 충격이었어요. 그래 만약에 성도들이 아무도 안 왔으면 다행이지만 그 와 가지고 그 8명이 와 가지고 거기서 새벽기도를 기다리는데 누가 그러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 다음서부터는 악을 쓰면서 나갔어요. 근데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운동화 끈을 매달다가 토할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건 아닌 거 같다, 그래서 조금만 있다가 전도사 한 사람 쓰면 전도사한테 맡겨야지, 그런데 해 보니까 그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매일 새벽기도에 이거는 운명이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몸이 즉시 적응을 할 것 같죠. 아니에요. 지금도 새벽기도 가는 것보다는 그냥 퍼질러 자는 게 편해요. 솔직히.
그런데 한 5년 정도 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정해진 그 시간이면 탁 깨는 거예요. 지금도 미국에 가면 시차가 다 바뀌잖아요. 근데 낮잠을 자다가도 탁 깨는 시간이 있어, 한국 시계로 보면 그때가 새벽기도 시간이에요. 그렇게 장구한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어디가든지 하나님께, 그러나 그게 형성되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만 그것들이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좋고 경건한 습관은 아주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려서 형성이 되요. 그때까지 물러서지 말고 계속 자기를 복종시키며 실행을 해야지만 생겨나요.
그러나 나쁜 습관 그리고 경건하고 좋은 습관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요. 아주 빨리 생겨나게 되요.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최소한 두 가지, 홀로 조용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 그리고 홀로 조용히 하나님 앞에 개인 기도하는 시간, 이 두 가지가 시간이 언제든지 길이가 얼마이든지 혹은 어떤 상황이든지는 상관이 없이 그게 절대적으로 경건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왕이 들어와 보니까 거기에는 모략과 향 재료와 꿀 송이와 꿀과 포도주와 이런 것들이 아주 많이 열었어요. 잠근 동산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끊임없이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 받지 않으니까 그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몰약과 향 재료와 꿀 송이와 그 다음에 꿀, 포도주 이런 것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된 거예요. 그게 열리게 된 거예요.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그 삶과 그리고 경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참된 경건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삶이예요. 그래서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의무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주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 의무를 이행하는 동기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애정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의무의 껍질이 있되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두려움은 의무를 생각나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해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은 그 의무를 감사함으로 행하게 만들어 주어서 그래서 그 의무를 즐거워하고 기뻐하게끔 만들어 준다는 말이죠. 거기에서 삶의 모든 부분들이 온전해지게 될 때 하나님을 향해 두렵고 떨리면서도 이끌리는 사랑의 마음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그 삶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삶 전체를 아우르는 일단의 체계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예요.
그러한 경건으로 삶이 하나가 될 때에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주님을 향한 새로운 두려움, 떨림, 그리고 주님을 향한 더 새로운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삶에 모든 부분들이 보다 더 온전해지고 거룩해 지는 거죠. 그래서 마음 안에서의 경건도 성장하고 삶도 더 많이 온전해지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영광스러운 교회의 번영을 위한 꿈을 주시는 거죠. 그런 속에서 자아 안에 갇혀 있을 때에는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그 사명들을 자기 바깥의 세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거죠.
어저께도 우리 장로님들하고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여튼 여름에 우리들이 굉장히 힘들고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 농어촌 교회에 가서 하는 우리 아웃리치 사역을 하나님이 엄청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고백이에요. 하나님이 그 일을 너무너무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간 모든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고백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과 그리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번영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자신의 행복밖에 모른다면 그런 사명을 발견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성경적인 경건은 이 외형이 자기에게 갇히게 되면 그건 성경적인 참다운 경건이 아니야, 그래서 이 경건에는 절대로 자기만족이 없는 거죠. 자기만족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자기만족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거죠. 그래서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의 핵심이기 때문에 참된 경건은 결코 자기만족적인 상태에 그칠 수가 없어요.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외부와 단절하는 경향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바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자기 사랑은 사적인 사랑은 단절하는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뭐든지 자기를 위해 투자하고 싶어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흘러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기를 보면 왕 이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잖아요. 만약에 누구든지 들어오게 되면 그는 처벌받겠죠. 왜냐하면 그는 자빈이니까.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 동산, 이 샘 이게 누구냐면 신부거든요. 그래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봉한 우물이라 그랬거든요. 너에게서 각양 모든 향초와 화초와 향 재료와 약제와 이 모든 것이 난다고 바로 그 앞에 4장에서 노래했거든요.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 노래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다 이렇게 가두어 놨는데 왕이 들어와서 문을 열었더니, 왕이 들어와서 그 동산에서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꿀 송이와 그리고 꿀을 먹고 포도주와 이 많은 것들을 누린 후에 뭐라고 했냐면 ‘나의 친구들아 들어와라 나의 친구들아 들어와라 ’ 그리고 왕이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그 동산에서 함께 많이 먹고 마시게 하는 이건 뭘 보여 주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이 술람미 여인은 여인과 그 다음에 솔로몬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러한 묘사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참으로 열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닫혀진 교회가 되어야 되요. 그래서 세속주의와 이 세상의 가치관 이런 것에 대해서는 모두 공동체적으로 닫히고, 그리고 세상의 유혹과 세상사람, 육체의 자랑 이런 것에 대해서는 성도들 개개인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그리고 주님과 홀로 대면하는 가운데 자기가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고 진리의 말씀을 섭취함으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떨림 속에서도 그 사랑 속에서 이끌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런 두려움과 떨림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 앞에 드릴 향기로운 열매가 되기까지 온전히 살아가려고 할 때에 그때 개인의 마음과 삶에도 이 물이 흘러 넘쳐서, 은혜의 물이 흘러 넘쳐서 황폐하던 그의 삶속에 아주 놀라운 이 변화가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공동체 안에도 이 열어놓은 상태에서 밖으로 뛰어나가 봐야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거예요. 뛰어 나간다고 해서만 되는 게 아니에요. 이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그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샘에서 그래서 아름다운 은혜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히게 될 때 그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은혜와 거룩함, 이 경건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 세상을 향해 필연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 마치 신자의 참다운 마음과 영혼의 변화가 있으면 이것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 이치란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의 경건은 우리의 개인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이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는 시간을 통해서 주님의 진리의 말씀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히 들어오고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한 충분한 마음을 기경하는 그러한 절실한 기도의 교제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은혜의 세계의 비밀스러운 교통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충만히 맛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충만한 은혜와 사랑, 그 자비와 아름다운 깊은 이 경건 속에서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더 많은 진리의 빛과 더 많이 자신의 마음을 쏟는 헌신적인 기도의 생활 속에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공급될 때 우리의 삶은 교회의 담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거예요.
어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뭐냐면 우리 450명인가 올해 갔는데 그거 보통일이겠어요? 휴가도 거기가고 여기 오면 휴가 갈 시간도 없잖아, 돈도 두 번씩 내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맘에는 한 1000명 정도씩 매년 여름에 전국에 흩어져서 그렇게 영혼을 붙들고 땀을 흘리면 하나님께서 죽어가던 많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그런 증거가 아주 현격하게 나타나잖아요. 그러잖아요. 그렇게 그런 영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간절하고 절실한 이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거겠어요? 경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예요. 예배생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절대로 만족하지 말고 홀로 하나님 앞에 말씀을 섭취하고 기도에 자신의 마음을 쏟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경건한 말씀에 탐구들을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경건이 계속 쌓여갈 때 그런 것들이 계속 쌓여갈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주 강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는 경건과 능력이라는 것이 항상 같이 짝이 되어서 나옵니다, 경건과 능력.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는 아주 신령한 은혜의 빛, 진리의 빛,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강하게 사로잡는 그런 경건의 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집중되고 절실한 추구 속에서 그래서 얻어지는 것이에요. 그런 시간이 우리 개개인에게도 필요하고, 그리고 우리 모든 목회자들에게도 필요하고, 교회 전체에도 필요하고 그런 속에서 주님의 은밀한 그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이렇게 공동체적으로 함께 생활할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옳지 않고 이런 것들이 묻히기가 참 쉬워요.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올바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우리들이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아주 뚜렷하게 거절감이 오잖아요. 그죠? 그렇기 때문에 침체에 빠질수록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들이 침체에 빠질수록 홀로 있는 시간을 갖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라요. 설령 우리가 침체에 빠져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잘 안되고 거절감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아주 선명하게 자기 안에 자기의 삶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고민하게 되는 거죠. 어느 날 다른 사람이 와서 ‘너 그따위로 살면 되겠어’ 이렇게 할 때에는 반발심이 생겨도 그렇게 해서 내가 기도하려고 엎드렸는데 하나님이 나를 차갑게 외면하시는 현실을 보면서 그러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자기를 반성하게 되는 거죠. 그럴 때 자기를 깨우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떨어질 때 그때에 받아들일 가능성이 아주 많아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됐던지 간에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너무나 기도가 안 되고 그리고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아서 괴로울 때에는 우리들이 꼭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 찬양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덮이는 거예요. 그리고 경건한 책을 읽든지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 거스르고 대들고 하던 우리 마음의 완고함이 꺾이면서 그러면서 저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탄식이 담긴 기도의 제목들이 자연스럽게 마치 뜨거운 열을 가하면 그 바위 속에서 녹아있는 광석의 물질들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속에서 흘러나오는 거죠.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은 꼭 필요한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한번 잃어버린 경건을 회복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경건의 모든 비밀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렇게 지혜롭게 다시 그 아름다운 경건의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온가족 수련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