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 강좌
녹취자:이병두
오늘은 시간을 각론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책에 보면 존 오웬의 ‘신학의 중요성’이라는 항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제가 넘어가고 첫 시간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책을 준다고 했는데 강의 끝나고 줄 것입니다. 이제 첫 강의에 대한 결론을 증명하는 점에서 오웬의 이러한 신학을 통해서 ‘오웬의 신학과 신학함’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다섯 가지 정도로 꼽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신학함에 있어서 철저한 경건입니다. 모든 청교도들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 자체를 신학의 목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에게 있어서 신학자로서의 최고의 준비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학의 결과가 아니라 신학의 준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앞에 올바른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신학을 했던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함에 있어서 철저한 학문의 탐구입니다. 만약에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을 위한 진료라고 한다면, 학문은 그 지식과 방법론을 습득함으로서 진료를 아름답게 빚어내는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떡을 빚는 기가 막힌 기술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반죽을 조금 밖에 안줍니다. 그러면 딱 한 개 밖에 못 만드는데 그 기술을 발휘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떡 덩어리가 이만큼 있는데 그것을 빚을 수 있는 기술이 없습니다. 만들어 놓으면 놓을수록 굉장히 보기 험악한 떡들이 각양각색으로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이 경험이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레토리카’라고 하는 것이 수사학입니다. ‘로기카’는 논리라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고, 만난 그런 놀라운 경험이 신약의 진료 같은 것입니다. 이 진료를 사람들에게 표출해내는 방법이 레토리카적인 방법이 있고, 로기카적인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레토리카적인 방법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주님은 크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분의 사랑 얼마나 놀랍습니까?’ 시편의 고백들은 대부분 레토리카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표출함에 있어서 충분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로기카가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같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로기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레토리카 안에 로기카가 전혀 없느냐? 그럴 수 없고, 로기카 안에 레토리카가 전혀 없느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 두 개가 어떻게 한 사람의 신학자의 인격 안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내어서 신학적으로 물려줄 가치가 있는 학문의 형태가 되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존 오웬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의 진료도 풍부하고, 레토리카와 로기카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그런 신학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철저한 장엄함과 아주 섬세한 신학의 정치한 국면들은 이 사람이 풍부한 하나님을 만난 경험, 이것이 일차적인 질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잘한 신학자들은 남이 쓴 논문 공부하면서 만들어지지만, 뛰어난 신학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남으로서 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고 해서 모두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레토리카와 로기카들을 토해 낼 수 있는 학문의 틀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점에서 존 오웬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아주 철저한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 그리고 이렇게 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투철하고 뚜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툭 치면 부러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반 학문의 토양을 단단히 세우는 가운데 여기에 이렇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점에 있어서 학문의 전체적인 통합을 이루는 훈련들이 너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과 같은 명제에 동의하십니까? ‘신학 공부를 깊이해서 탁월한 박사 논문을 쓴 사람의 설교는 언제나 탁월하다’ 동의합니까? 안합니까? 그러면 ‘공부 안하고 기도 많이 한 사람은 언제나 설교가 탁월하다.’에 동의합니까? 안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굉장히 이상한 것입니다. 어느 분야의 공부를 많이 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어는 학문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워진 학문의 틀이 이런 식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잘 몰라서 박사한테 물어봤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질문이 있는데요? 로마서 9장에...” 그러니까, “아! 전 구약을 전공해서 신약을 잘 몰라요.” 그래서 이제 신학으로 박사학위 받은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저 로마서 9장이요..” 그러니까, “목사님 저는 복음서 전공이라서 로마서 바울 신학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바울 신학 전공한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저 로마서 9장이요..” 그러니까, “ 저는 바울 중에서 데살로니가를 전공해서 로마서 잘 몰라요” 그래서 그 다음에 로마서 전공한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저 로마서 9장이요..” 그러니까, “아 저는 8장을 전공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상당히 전문가적인 겸손으로 받아들이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 학문, 신약과 신약 안에서의 전체적인 연결, 신약과 구약의 연결, 그 다음에 성서학과 조직신학의 연결, 조직신학과 철학의 연결, 신학과 관련된 분야와 다른 학문들과의 연계, 이런 것들에 대한 전체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통합을 못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통합은 단순히 여러 학문의 지식을 많이 습득한다고 해서 그 학문이 통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과의 어떤 특별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존 오웬이 누차 강조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의 통일성, 그리고 학문에 대한 통일성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학문을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했을 때, 뚜렷하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학문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중심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학문이라면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면 우리들이 책이나 혹은 강의 같은 것을 볼 때에 굉장히 방대한 지식을 가졌지만 정리가 안 되고,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존 오웬의 경우에는 개혁신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의 장서 목록을 보면 대부분 전세대의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의 당대에 있는 사람들의 책이었습니다. 영국은 물론 대륙에 있는 신학자들의 책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했고, 아주 예리한 신학 논증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갖는 연관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아주 탁월했던 것입니다. 존 오웬이 높이 평가한 아우구스티누가 있습니다. 저에게 누가 존 오웬이냐 아우구스티스냐 그러면 저는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높이 평가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였느냐 하면 아닙니다. 그럼 칼뱅의 추정자냐 하면 아닙니다. 그는 아무의 추종자도 아니었습니다. 이전과 이후에 많은 신학자들의 물을 마셨고, 그 샘에서 물은 길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성경의 계시들을 아주 찬란하게 풀어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두 가지 원천, 당대의 종교개혁과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또 하나의 원천은 고대의 교부들 이 교부들에 대한 충만한 두 원천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만약에 그가 개혁신학에 참착하지 않았다면 굉장히 엉뚱한 반격으로 신학을 토해 놓았을 것입니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최소한 이 두 가지 원천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공부를 했어야 됩니다. 그 두 원천이 바로 개혁파 정통주의의 유산들과 고대 교부들의 유산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교부들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이 에드워즈의 신학을 대했을 때에 무릎을 치면서 ‘어쩌면 이렇게 인간이 이렇게 탁월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하고 아주 높이 평가했던 것이 교부들에게 들어가 보면, 다 교부들이 한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그 사람보고 인용 했다고 써 놓아야지, 사람을 이렇게 혼돈 시키는 것에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위즈 작품 가운데 머리가 터진다고 하는 ‘프리덤 오브 윌’ 같은 이런 논리 같은 것들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보헤티우스라든지 두이투스코스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거의 다 우려먹은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들을 다시 끌여 들여서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펼치는데 틀로 사용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그렇지, 원천 없이 어디서 나오겠느냐? 들어간 것이 없는데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서 제가 여러분 대부분 목회하시는 분들이나 신학생들인데 요즘에 나오는 그저 반짝반짝하는 그런 책들이나 읽고, ‘긍정의 힘’ 이런 것에 빠지고 그러면, 미래의 성도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해야 됩니다.
네 번째는 이 사람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큰 칼이었다면 이 사람은 그 큰 칼의 날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네 번째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자신의 모든 신학의 결과물들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정리되도록 배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존 오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온 삼중적 중심성을 존 오웬 신학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온 우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두 번째는 구속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세 번째가 신지식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그 모든 구속사역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데 구속사역 있어서만 중보이실 뿐만 아니라 창조와 이후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행하는 신자의 모든 성화와 선에 있어서도 중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웬의 관점에서 보면 이 그리스도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의 영광을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자기의 모든 소원과 존재의 가치와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합치시켜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신 목적과 자신을 인식하면서 사는 자기의 존재의 목표가 일치를 이루는 그것이 신자의 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묘사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머리를 주신 것이 무슨 이유겠느냐? 존 오웬이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은 아닌데 각색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주신 이유는 세 가지 이유인데 물리학적 이유와 미학적 이유와 지성적 이유가 있습니다. 물리학적 이유는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미학적 이유는 디자인입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목적을 충족시키지 않는 사람은 그냥 그 머리로 몸의 중심을 잡고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성적인 이유는 하나님 생각하라고 머리를 주셨다 이것입니다. 하나님 생각안하는 것은 머리 준 목적과 대치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 생각하느냐 하면, 예배드릴 때, 아닙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분을 생각하는 것이 네 의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치열한 고난 속에서 산 삶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열세명인가 열한 명을 낳았는데 거의 다 죽습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2년에 한번 꼴로 죽었다고 합니다. 부인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극도의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상황을 이길 수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그분께로 부터 오는 위로를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사상입니다. 저는 한때 20대 후반에 상담학에 깊이 빠졌었습니다. 그래서 책도 좀 보고, 길이 주어진다면 상담학을 좀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좀 했었습니다. 특히 제이 아담스에 깊이 감동을 받고, 여러 가지 책들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존 오웬을 공부하면서 상담학이 가르쳐주는 인간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볼품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자부합니다. 복음으로 올바르게 알면, 더듬어 묘사해낸 상담학에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비교될 수 없는 아주 탁월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관심이 되는 것은 중심이 영혼이지 않습니까? 육체는 영혼에 대해서 수동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결국 영혼이 주된 관심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의 통합적인 관계 안에서 외부와의 관계, 그리고 또 다른 외부인 하나님과의 관계, 이 삼자의 관계 속에서 영혼과 육체는 움직이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영혼이 핵심이 되어서 움직이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기능과 앎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세상에서는 그 영혼을 닮은 것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에게서 그것이 발견이 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한 앎은 반드시 영혼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그스티누스가 일평생 두 가지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트라메 수푸라메’, ‘누구든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자신에게로 돌아와라. 그래서 자기 자신을 보라.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말고, 자기 자신을 초월하시는 그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다.’ 라고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면에서 볼 때 인간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에 부흥과 개혁사에서 지금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는데, 빠르면 11월 그렇지 않으면 12월 쯤 책이 나올 것 같은데, 그 6권에 보면 ‘Indwelling Sin’이라고 하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 관한 논문이 나옵니다. 세편이 실렸는데 그 세편 해설을 이번에 제가 쓴 책속에 실었습니다. 거기에 아주 탁월한 작품이 있습니다. 죄에 관한 아주 탁월한 작품인데, 그 책을 읽는 동안에 저는 온몸에 비늘이 돗는 것 같은 전율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오웬의 책을 읽은 어떤 사람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파카였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존 오웬의 책을 읽고 났을 때 고백이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뭘 행동할지 이미 오웬에게 들켰습니다.” 정확하게 묘사해 내는 것입니다. 설명해도 잘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봐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존 오웬과 당대의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신학을 함에 굳게 붙들고 있었던 세 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찬란한 성경의 계시, 그 성경의 계시를 알도록 역사하시는 불같은 성령의 역사,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진리로써 이성을 가지고 조직화한 신학의 결과물. 이 세 개가 신학을 세우고 신앙을 일으켜 세우는 세 개의 기둥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존 오웬은 세 기둥을 세우는 신학함의 원천의 훌륭한 모본을 보여 주었던 인물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아주 놀라운 독특한 사상의 체계들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정말 칼날같이 예리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의 성화에 대한 작품들을 읽으면서 정죄 받는 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심으로 정죄하고자 함이 아니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끌어드리기를 원하시는 그런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주옥과 같은 작품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빛을 던져줍니다. 그런데 시급히 읽어야 될 것이 6권과 7권입니다. 6권, 7권이라도 빨리 읽어야 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죄 죽임의 교리’,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유혹’ ‘배교’ ‘시편 130편 강해’에서 ‘forgiveness,, 용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을 속히 읽어야 됩니다. 읽지 않고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여기서 1부는 끝내고, 2부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 것까지 마무리입니다. 이런 위대한 분의 내용을 이렇게 2시간에 다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것이 여러분이 사실은 읽고 와서 강의를 들어야지만 생생한데 어쩔 수 없이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분의 작품 가운데 ‘Indwelling Sin in Believers’ 라는 작품이 6권에 실려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신자 안에 있는 내재하는 죄에 관하여’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이 인간론은 철저하게 개혁신학의 토대위에 서 있습니다. 개혁신학에서의 인간관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원죄와 자범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원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구성이 됩니다. 죄책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은 첫 인간 아담의 죄의 대한 사법적인 책임입니다. 그리고 오염은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결과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 전적인 무능, 이런 것들이 여기에 나오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거듭나게 됩니다. 중생하게 됩니다. 중생하게 되면 인간의 영혼 안에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은 하나님의 반복적인 사역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오너라’ 하셨을 때에 나사로가 자기가 벌떡 일어나서 나오는 일을 위하여 아무것도 이바지 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사람을 당신의 주권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영혼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사실은 존 오웬의 영혼과 육체 인간에 대한 것들을 좀 상세하게 다루어야 됩니다. 이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만 사실은 몇 시간을 다루면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 소위 이야기 하는 영혼만의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어서 그 지식이 토대가 된 위에 구원과 중생, 성화 이 문제가 거론이 되어야 됩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나머지는 여러분이 공부를 하기로 하고, 일단 안다고 하고 전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인간이 중생할 때에 이 중생은 인간의 영혼이 완전히 죽어있는 상태에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게 될 때에,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그의 죄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믿음을 통해서 용서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요구들이 작용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진정한 거듭남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에 세 가지인데 공로적 원인, 도구적 원인, 작용적 원인 이렇게 세 요인에 의해서 인간이 구속의 적용 받아서 중생의 상태로 재창조되게 되는 것입니다.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대속이고, 도구적 원인은 믿음입니다. 작용적 원인은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기초를 해서 믿음을 도구로 하여 성령의 작용을 원인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회심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회심과 중생으로 인해서 인간이 새롭게 될 때에 그 때에 죄에 대한 사법적인 책임은 면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책의 문제가 칭의로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 남은 것이 오염의 문제입니다. 오염은 하나님이 단번에 해결을 안 하시고 그를 중생하게 하실 때에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 존 오웬은 이 법을 둘로 나눠서 설명을 합니다.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법과 주관적 힘으로서의 법을 나눠서 설명을 합니다. 지금 설명하는 것들이 말하자면 아퀴나스적인 요소입니다. 객관적 법이라고 하는 것은 로고스입니다. 돌 판에 새겨진 율법 같은 것은 자기 밖에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습성이 있어서 항상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게 될 때 이것을 법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러이런 한 사람들은 언제까지 자진해서 출두하시오’. 이것은 객관적인 법입니다. 그런데 내가 술을 계속 먹다보니까 술에 인 박혔습니다. 그래서 저녁때가 되면 술을 안 먹고는 못 배겨서 술로 끌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적인 법이라 이야기입니다. 실효적인 힘으로서의 법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은 인간 안에 죄를 향한 실효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한 하나의 principle,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사망과 죄와 사망의 풍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중생과 함께 부러뜨리시고 새로운 원리를 확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여기에서 이 법은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실효적 힘으로서의 내적인 법입니다. 그것을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본성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수처럼 작용을 해서 여기에서 끊임없는 은혜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의해야 될 점은 이렇게 중생의 원리가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심겨졌지만, 여기에서 끊임없이 은혜가 나와서 역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홀로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스스로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드신 규범이 아니라, 성령이 현재적으로 그것과 끊임없이 역사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죄와 사망의 법이 깨뜨려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세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 영혼 안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어떤 요인에 의해서 함께 뭉치면서 힘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강력한 힘을 형성해서 이 사람의 삶 속에서 신자로서의 독특성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도록 다 앗아가 버리는 상태까지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도미니온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니’라는 말씀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도미니온입니다. 도미니온이라는 것은 지배이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우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를 이긴 사람이지만 완전히 죄를 전멸시킨 사람은 아닙니다. 죄를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주 놀라운 섭리 속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 첫째,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하느냐?라고 하는 인간의 의지, 이 사람의 의지와 함께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느냐? 라고 하는 하나님 편의 은혜의 참여, 이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이 죄는 현저하게 괴멸되어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처럼 되기도 하고 이것들이 함께 뭉치고 역사해서 죄밖에는 거의 없는 것 같은 죄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다룬 책이 바로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그래서 내재하는 죄는 내재적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죄를 다루었다면, 죄와 은혜의 지배는 이것이 발전하고 힘을 규합하게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와 목표를 향한 죄의 활발한 작용과 은혜의 작용을 묘사한 것이 ‘죄와 은혜의 지배’인데 두개는 같이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Mortificatoon, ‘죄 죽임의 교리’, 이러한 ‘죄 죽임에 관하여’는 이러한 죄에 대한 처방책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세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같이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꼼꼼히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후루룩 읽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꼼꼼히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신학 책들도 그냥 화장실에서 읽어야 되는 책들도 있고, 다른 책 읽다가 피곤하면 쉴 때 읽는 책이 있고, 진짜 책상에 똑바로 앉아서 노트 펴놓고 공부해야 될 책이 있는데, 이 세권의 책은 세 번째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후루룩 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읽고 나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오웬의 책들은 엄청난 생략과 축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한행 한행 사이에 엄청난 신학적인 담론, 때로는 철학적인 담론들을 담은 책, 그것들을 축약해서 그를 진전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에 대한 예비적인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 책들이 읽혀지지 그 예비적인 지식 없이 책을 읽으면 아주 딱딱하고 건조하고 논리가 힘겹게 느껴지는 책입니다. 그래서 사실 존 오웬의 책은 절대 친절한 책이 아닙니다. 제목도 제대로 잘 안 붙어 있고, 그냥 통자로 베 짜듯이 확 짜서 휙 던져준 책입니다. 존 오웬의 책에는 조그만 제목들 많이 붙어있습니다. 그것은 존 오웬이 붙인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열심히 붙였는데,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제목입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하는 참고일 뿐이지, 읽을 때는 그것이 없다 생각하고 자기가 독자적으로 읽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20세기 간략한 요약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 커다란 난관입니다. 그래서 어째든지 덕분에 많은 사람이 읽지를 못해서 그렇게라도 읽은 사람들이 희소성의 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오웬의 성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론의 맥락에서 나옵니다. 오웬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 제1권 그리스도로기야라고 기독론에서 다룹니다. 특이한 것은 창조론이 기독론 안에서 다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존 오웬이 인간을 하나님이 왜 창조하셨을까에 대해서는 모든 개혁신학자들과 똑같은 어조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별 특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독특성입니다. 인간만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자연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정신구조를 스스로 반성함으로서, 되돌아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흔적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하고 난 다음에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선 인간이 바라보는 이 모든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됩니다.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본래의 찬란한 광채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본래의 찬란한 광채를 잃어버리게 되니까 인간이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어두움이 들어오게 됩니다. 영혼에 대한 어두움은 존 오웬의 생각에는 영혼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어두움은 몇 가지 영혼의 기능에 심각한 지장을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지성의 눈 멈입니다. ‘blindness of interactive’입니다. 그래서 지성의 눈 멈을 도입합니다. 더욱이 인간의 행동을 낳게 하는 이 정서에는 혼란을 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외부의 세계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희미해지고 인간 자신도 타락하게 되어 바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는 징벌이 있어서 핑계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정도의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변명할 수 없으리만치 분명하게 보여주지만, 구속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이 자연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이성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자신의 책 속에서 철학자들의 허무함에 대해서 아주 심하고 통렬하게 꼬집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우리들의 차이는 우리는 그냥 비난하고, 그 사람은 알면서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그러니까 같이 따라하는 것이고 그런 차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해내고 이 세상 속에 그것을 발견화 시키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재미있는 것이 존 오웬이 신자에게 주는 최고의 비전은 'true christian'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신자가 참된 신자가 되느냐? 물으면 존 오웬은 ‘그 길 만이 참 인간이 되는 길이다. 따라서 신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표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짜증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간이 아니란 뜻인가? 오웬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인간은 오직 신자가 참된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에 의해서 점점 더 참된 신자가 되어 가는데, 그 참된 신자가 마지막 합치되는 지점이 주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인간이 되는 것, 그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 인간이 되면, 그는 온전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지성과 의지를 이해하는 가운데 그 지성과 의지에 자기를 온전한 사랑으로 합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완벽한 모본을 보여주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타락을 통해서 인간은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이 되어버렸고, 존 오웬이 그려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상은 칼뱅이 그려내고 있는 타락한 인간 못지않게 절망적인 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혼은 철저한 어두움에, 지성은 눈 멈에, 정서는 죄악된 충동에, 의지는 완고함에 복종되어 있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외부로 부터 어떤 구원의 도움이 아니면 어떠한 개선된 상태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이 중생을 하게 됩니다. 이 중생이라고 하는 것과 회심의 관계는 회심은 중생을 통해 살아난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입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은 인간의 의지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중생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회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죽은 상태에서 살려내실 때 살려난 그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이 회심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이를 낳지 않습니까? 아이를 낳으면 낳자마자 그 아이가 뭐라고 합니까? ‘으아’하고 울지 않습니까? 그 ‘으아’하고 우는 것이 기도로 갑자기 공기가 처음 들어가면서 태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래서 확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아이를 낳는 것을 중생이라고 한다면,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 ‘으악’하고 우는 것이 영혼의 최초의 움직이고 그것을 회심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라스트리히트라고 하는 신학자가 이 두 문제를 생생하게 묘사를 했는데, 존 오웬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생하게 되면 그의 영혼에는 두 가지 놀라운 변화가 도입됩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변화이고, 또 하나는 인식론적이 변화입니다. 존재론적인 변화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결국 존재라고 하는 것은 성향입니다. 물은 이렇게 위에서 부으면 아래로 이렇게 부어지는 성향이 있지 않습니까? 이 자체가 물의 하나의 본질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것이 아무리 쏟아도 쏟아지지 않는 어떤 딱딱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투명해도 플라스틱을 녹인 것이나 유리를 녹인 것을 가득채운 셈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 자신이 몸은 그대로라도 중생하기 전에 없던 성향을 중생이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 성향이 사랑의 성향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의 성향을 도입했다기 보다는 사랑의 성향의 방향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존재를 중생을 통해서 사랑의 주체인 영혼 자체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와서 뒤집어 버려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존재로 하나님이 바꿔놓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인식론적인 변화는 인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생명의 특징이 있는데 자기 조절의 작용 즉 메타볼리즘입니다. 자기조절 작용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적응시키는 작용입니다. 외부의 영향을 받고 또 외부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이러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생명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있을 때에 외부세계와 접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외부세계를 아는 것은 육체의 감각에 의해서만 아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그런데 눈으로 보니까 없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니까 안 만져지고, 냄새를 맡아도 안 나고, 혓바닥을 내밀어 아무리 핥아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뭐라고 판단을 합니까? 찾는 물건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합니다. 정확하지 않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관에 의해서 감지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연학적으로 보더라도 광선 중에서 인간이 볼 수 있는 대역은 아주 좁습니다. 청력도 청력의 대역이 많은데 그 중에서 전파, 초음파 이런 것들은 우리 귀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주 적은 대역만이 인간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정한 온도보다 워낙 올라가면 피부에 갖다 대도 그것을 뜨겁다고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정한 대역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인간의 감각이라면, 만약에 우리가 감지해야 되는 대상이 되는 존재가 영적이 것이라면, 이 육체의 감각을 가지고 그것을 찾아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보 같은 짓 아닙니까? 마치 그것은 잠자리채를 가지고 연기를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이것으로 걸러지지 않는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철저한 무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그의 영혼에 이미 죽어있고 작동하지 않던 감각을 새롭게 창조하여 살아나게 해서, 예전에 없었던 영혼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각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감각하게 만들고 하는 그런 작용들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식의 툴의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되지 않고는 자신의 죄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 자체가 죄 된 행동이야 가시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성령, 죄, 은혜, 사랑, 이런 모든 것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런 오관을 통해서 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웬이 강조하는 것은 ‘죄를 죽이고 죄를 멸하는 이것이 신자의 의무이긴 하지만, 그러나 절대로 중생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시키지 마라. 왜냐하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급한 것이 중생하는 것이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죽일 수도 없거니와 혹시 죽이는 것과 같은 비슷한 효과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죄를 억제하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하지 못한 신자의 내면의 세계는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만약에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일시적으로 생겼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동기가 일어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향한 동기에서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웬이 생각할 때 이 성화는 우리의 죄가 우리의 성품 안에 있게 되는데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죄라는 것이 있는데 이 죄를 삼중적인 차원에서 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영혼의 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음의 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행동의 차원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아주 밀접한 영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이 죄는 영혼 이 자체가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해석인데 영혼의 본질의 자체를 이 사람은 power, habit 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힘과 하나의 경향 혹은 성향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타당치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영혼 안에서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향성인데 이 영혼 안에 있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경향성들은 영혼과 마음이 별도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영혼과 육체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에 security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기능 중에 하나가 마음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영혼이 있고, 여기에 육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영혼과 육체의 움직임이 하나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신자의 육체는 영혼을 직접 감지한다기 보다는 영혼의 상태가 마음에 투영되어서 나타나는 이 힘의 작용을 통해서 이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이 마음을 통해서 육체는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이해하는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보십시오. 특히 도덕적인 판단의 경우에는 영혼이 마음을 통해서 이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힘들이 형성이 된다고 하면 이 힘들은 예외 없이 그대로 마음 안에 반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마음에 반은 가져 옵니다. 이것이 habit입니다. 이것이 성향입니다. 마음의 성향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성향에는 원래 하나님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사람에게는 미에 대한 뚜렷한 감각, 음에 대한 뚜렷한 감각, 색깔에 대한 감각 이런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도 도덕적인 판단과 관련한 성향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에 죄의 경향이 어떤 힘을 가지고 존재하게 되면, 이것은 마음 안에 투영이 되어 성향을 만듭니다. 마음은 모든 행동의 산출하는 공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렇게 다시 투영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혼 안에 있는 어떤 질서로서의 힘이 마음에 투영되고, 마음 안에서 이것이 작용해서 행동을 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 오웬이 보는 구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인간의 어떤 행동이 영혼의 변화를 가져 온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이미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당시의 교황과 그 논쟁을 하면서 개진했던 내용들입니다. 인간의 선행이 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느냐하면, 인간의 행동은 영혼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웬에게 있어서나 루터에게 있어서나 칼뱅에게 있어서나 믿음은 단지 심리적인 작용이 아니라 영혼의 활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혼의 중대한 변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순종도 내포하고 의지하는 것도 내포하고 신뢰하는 것도 내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얼개 속에서 접근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의 영혼과 마음이 연결이 되고, 인간의 행동과 마음이 연결이 됩니다. 그것들은 인간에 의해서 자기반성 작용, 혹은 자기 회고 작용에 의해서 인식이 되는 부분들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마음에 다는 모르지만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인식이 이런 인식을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바로 이 부분이 결국은 성령께서 역사해서 여기에 영향을 미쳐서 이 위로 가서 영혼에 이런 힘들의 질서를 변화시키고 급기야는 이 행동도 변화시키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오려고 하는 시작점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 인간의 마음 안에 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죄 된 본성이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으로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영적인 선을 행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연결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고귀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인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지성이 주를 이루지만 하나님을 닮은 영혼의 기능이고 중생과 함께 이 영혼은 구속되어서 하나님이 형상이 회복되었지만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남아있는 죄의 영향으로 부터 완전하게 구속을 받은 그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는데, 다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일정하게 허락된 범위 안에서 성화의 진전에 따라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이 형상이 많이 회복되기도 하고 덜 회복되기도 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주체를 성령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당시에 청교도들처럼 신자의 의무에 대한 기다란 담론을 서슴지 않습니다. 오웬의 전집을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특이한 단어가 duty입니다. 의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잠시 후에 제가 왜 이 의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이것이 개혁에 대해서 던져주는 반성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존 오웬은 성화의 주체가 성령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인간을 거룩하게 해 나가시는데 중생은 성령이 홀로 사역하시지만, 성화는 인간과 함께 사역하시면서 역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의 논리를 가지고 본다면 인간의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만큼 인간은 참된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의 인간론에 대한 접근 그 자체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코 인간을 행동, 마음, 영혼, 육체, 이런 식으로 나누는 다분할적인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통합적인 인간으로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열매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니’라고 한 예수님의 통합적인 인간관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보수 신학자로서 우리나라 신학의 토대를 놓았던 박윤선 박사님의 공관복음 주석을 보면, 산상수훈을 해설하면서 이 목사님이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을 그 어떤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보게 되면 ,공로로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암시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보고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어떻게 하든지 조화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시는데, 사실은 이러한 인간 자체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영혼과 마음 행동 이것들에 대한 통합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오웬의 신학의 틀에서 보면, 공관복음에 나오는 행위조건적인 구원의 모든 조건들이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이런 행동을 하는 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그러면 그것은 마음으로 회귀되고 마음은 영혼의 문제로 회귀되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임을 그 사람의 행위와 삶을 통해서 입증해 보여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고민할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잠시라도 마음과 영혼 행동 이것 사이에 이런 연속성이 궤멸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있는데 외식이나 가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이 속지 하나님은 속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화의 주체가 성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하고 고전적인 커다란 담론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화가 협력적인 작용인데, 그러면 인간의 의지는 존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성화와 관련하여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존 오웬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의 위치는 다른 개혁주의자들 못지않게 상당히 중요하게 부각이 됩니다. 그런데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 인간의 의지를 부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논리의 뒤편에 언약 신학이 있는 것입니다. federal theology 라고 하는데 이미 그 이전에도 이런 신학이 있었지만은 종교개혁시대의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에 와서는 버미들리 그리고 특별히 코케이우스에 의해서 종합을 이루게 됩니다. 코케이우스에 의해서 소위 이야기 하는 federal theology, 연합신학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 과연 개혁파에 어울리는 신학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아주 뜨거운 담론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 언약신학이 개혁파의 사상을 대변한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그동안 이루어놓은 칼뱅이후로 베자 그리고 멜라니톤 등등으로 이어지는 신학적인 보편논제의 틀 안에서 어느 부분에 이것을 놓아야 될 것인가 하는 아주 치열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연합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설명을 하면 좀 깁니다.
이 언약신학이라는 것이 아주 핵심적으로 이야기하면 존 오웬이 자신의 신학을 자신이 신학을 나누었습니다. 크게 둘로 나누었는데 원형신학과 모형신학입니다. 원형 신학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아는 신학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알 수 없는 신학입니다. 그리고 모형신학은 지성적인 피조물들이 교통이 가능한 하나님의 대해서 아는 참된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 모형신학이 다시 셋으로 나눠지게 되는데, 각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주체에 따른 구분입니다. 첫째는 중보자의 모형신학입니다. 이것을 연합신학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천사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천사들의 모형신학이라고 부르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인간들의 모형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는 신학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불렀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영화 이후에 알게 되는 지식을 지복자들의 신학, 혹은 정착자의 신학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다시 순례자의 신학은 둘로 나뉘는데 타락전의 신학과 타락후의 신학으로 구분이 됩니다. 어째든 이런 복잡한 구분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범주와 한계를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방식을 각각 구분해내고자 철저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오웬의 독특한 방식은 아닙니다. 이미 화란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구분법들이 이어져 내려오지만 레이든 대학의 알미니우스의 스승이었던 유니우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 신학의 구분들이 도입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연합신학이라는 것은 중보자의 모형신학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이라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두 본성이 있는데 인성과 신성입니다. 이 본질적인 속성들을 유지하기에 교통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것이 아니라 연합을 이루지 않습니까? 이런 독특한 연합은 그리스도의 도성인신 안에서만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학을 가리켜서 연합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연합신학이 후일 언약신학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신학의 구도 하에서 인간의 성화를 향한 협력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웬 자신이 만들어낸 매우 중요한 오웬의 성화론 전체를 요약할 수 있는 명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He, 여기서 이 He는 Holy Ghost 성령을 가리킵니다. 'He works in us and with us not without us and against us' 이것은 오웬의 성화론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머리를 떠나지 말아야 할 오웬의 자신만의 독특한 명제입니다. 성령은 역사하시는데 인간 안에서 인간과 함께 역사하시지, 인간 없이 인간을 거슬러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 인간은 인간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다란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전개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치열한 교회사적인 담론들을 거의 섭렵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뚜렷하게 자신의 이 은혜와 의지에 대한 관계를 개혁신학의 정추하면서 특별히 코케이우스의 언약신학에 정추 시킵니다. 그런데 이 코케이우스의 언약의 신학이 대륙에서도 발전을 하고 배를 타고 건너와 영국에서도 발전을 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이 언약은 대륙 쪽에서 발전하는 양상과 잉글랜드 안에서 발전하는 양상이 각기 다른 양상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원래 고대 근동에서 봉신조약에 체결된 의식 속에서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왕이 큰 나라를 차지하고 있는데, 다 다스릴 수가 없으니까 이 만큼을 떼어서 영주에게 주면서 그 중에 한 사람을 택하는 것입니다. “너 신촌 지역 다 떼어서 인구가 25만 명인데, 너 가져라! 그 대신 거기에서 세금도 거두고 재판도 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려라. 그런데 잊지 말아라. 그 나라는 내 나라고 내가 너한테 맡기는 것이다. 그 대신 너는 나만을 사랑하고 충성하고 전쟁이 나면 군인을 동원해서 돕고, 세금을 내고,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된다.‘라고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을 잡아놓고 피 흘린 짐승 둘 사이를 함께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지나가면서 언약을 어긴 한쪽 당사자에게 신들이 이렇게 벌을 내리리라고 하는 상징으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이 계약은 일방성과 쌍방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약하자고 제시하는 사람이 워낙 높은 왕이요, 황제라는 점에서 보면 일방성을 가지고 있지만, 계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영광적인 지위를 얻게는 되지만, 의무를 지게 된다는 점에서는 이를 쌍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륙 쪽에서는 언약신학을 이용해서 일방성을 강조해 하나님의 주권을 드높이는 쪽으로 가고, 이쪽에 와서는 그 일방성을 토대로 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대륙에서 상당히 많이 간과했던 언약에 있어서 당사자로서의 인간의 의무와 지위에 관한 성찰에 이 성화의 있어서의 인간의 의지의 문제를 정추시키는 것입니다. 아주 정교한 신학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지 않으면, 왜 영국 청교도들이 전부다 알미니안주의가 아니냐 라고 느낄 정도의 인간의 의지에 대한 비상한 강조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중요하고 이 시간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좀 더 전개를 해보면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언약의 쌍무적인 성격을 그렇게 강조해서 인간의 의무로 불러내는 이러한 논리에 성화론을 정추 시키면서도 개혁신학상 안에 내려오는 이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적인 주권사상, 그리고 일관성 사상을 손상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해석상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오웬이 언약신학에 대한 상당히 깊이 있는 해석들을 전개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서 그 언약신학을 성화의 긴장을 도입하는 아주 익사이팅한 소재로 삼는 것입니다. 당신은 신자다. 그러면 네가 신자니까 네 안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성향도 심으셨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는 성향도 심겨주셨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졌다. 그런데도 네가 불순종해서 죄가 융성한다. 자 이제는 싸워라! 이제는 너의 죄가 결코 너를 이길 수 없는 약속이 은혜언약 안에서 주어졌으니까 너는 이제 싸워라. 싸워서 네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죽이시는 분은 성령이지만 성령님이 그 죄를 죽이고자 할 때 너는 거기에 협력해야 된다. 온 마음을 다하고 협력하고 순종해서 반드시 그 죄를 이기도록 네가 온 마음을 다해 의무에 충실하게 싸워라. 그런데 네가 그렇게 안할 수도 있다. 결국은 끝까지 안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것은 너의 자유로운 의지로 행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결국 네가 그렇게 자유롭게 하고 말았다는 것이 사실은 네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적으로 딱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의 성화론에서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죄와의 싸움을 쉬지 마라. 그 마지막 상기시키는 이유가 죄에 충분히 지면서도 네가 분투하고 있지 않다면, 인간이 분투하고 있지 않다면, 누구도 그의 중생의 여부에 대해서 보증해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네가 계속 성화되기 위해서 투쟁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중생하고 안하고는 이미 하나님께서 해주신 사람은 해주신 것이고, 안된 사람은 안 된 사람이지, 성화를 통해서 중생의 진실함을 입증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긴장관계 속에서 불러들이는 것이 바로 코케니우스의 언약 신학을 정추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정하게 볼 때 존 오웬의 이러한 언약신학적인 구도 안에서의 인간의 의무에 대한 촉구는 언약의 일방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은혜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훼손했느냐 그러면 절대 훼손하지 않았다. 그것이 객관적인 저의 판단입니다. 절대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대륙 쪽에서 발전했던 은혜언약의 일방성의 논리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이 허울뿐인 언약, 그래서 언약이 주어졌고 우리는 의무가 있지만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당사자로서의 은혜라기보다는 주님이 추동하시면 수동적으로 겨우 하나님 앞에 의무를 행하게 되는 그렇게 그려낸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성화에 있어서의 신자의 상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쪽의 부분에 대해서 아직 충분하게 연구가 덜 됐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이야기한 명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성화론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이 은혜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서 역사하지 않는 것은 죄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서 역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리 좀 나와 보십시오. 그냥 올라오십시오. 제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