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 특강 3-2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매일 두 마리씩 상번제로 드리되 어린 양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어린 양 한 마리는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빻아 낸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시내 산에서 정한 상번제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며 또 그 전제는 어린 양 한 마리에 사분의 일 힌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 드릴 것이며”(민 28:3-7)
제가 2005년도 1월 13일 저기 먼 곳의 조용한 곳에서 이제 사경회를 앞두고 성경을 읽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는데 아주 놀라운 깨달음이 있어서 두 시간 동안을 이 본문과 씨름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너무 감격해서 이것이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는지 메모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 메모가 밤 9시 24분에 끝났어요. 이게 그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이중의 1/3분량이 230p의 책으로 나왔어요. 나머지 1/3은 아직까지도 대부분 발표가 안 된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17년이 되었어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출타중인 경우를 제외하고 너무 아파서 기동하지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 그리고 금요기도 설교를 제외하고는 17년 동안 거의 제가 직접 다 했어요. 그래서 새벽기도 설교를 빼고 약 4,000편의 설교를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일 년에 4번을 사경회를 합니다. 부흥사경회지요. 그래서 1월에 새해가 시작될 때에 새벽에 5번, 밤에 5번, 어떤 때는 아침에 5번을 해서 15번을 모이고 고난주간에 10번 모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여름 수련회 때에 한 3일 정도 숙박을 하면서 모이고 가을에는 다시 새벽에 5번, 밤에 5번을 모입니다. 그러니까 설교하는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잖아요. 그런데 한 번도 아니라면 거짓말이지만 무엇을 설교할까를 가지고 방황한 적은 거의 없어요. 그냥 항상 설교해야 될 내용이 설교할 기회보다는 많았어요. 그래서 초창기의 열정이 과도했을 때에는 주일 낮 설교에 설교만 100분을 했어요. 그리고 기록이 5시간 15분 동안 쉬지 않고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뭐냐 하면 지금도 여러분 보았지만 원고 없이 계속 강의를 이끌어 왔잖아요? 설교도 똑같이 가장 기본적인 골격만 메모해가지고 가서 그러니까 회중들을 친근하게 쳐다보면서 성경을 풀어가면서 자기 자신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전달해주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항상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피는 적은 거의 없어야하고 자기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내가 인격 속에서 녹여서 성도들에게 전달한다면 그러면 이 속에서 설교자 자신이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성경의 기능인 모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그러한 성경의 작용을 자기가 레치오디비나 속에서 풍부하게 경험하게 되면 마음이 변화되고 인격이 바뀌고 삶이 변화되지 않겠어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독트리나크리스티아나’에서 기독교 교양론이라는 것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모드스디벤디…….’ 직역을 하면 ‘삶의 방식, 가르침의 풍부함’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그 모드스디벤디…….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삶의 방식은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모드스디벤디 자체가 변화가 되지 않으면 설교의 변화라는 것은 끊임없이 분칠하고 색칠하고 똑같이 못생긴 사람이 한복을 입었다가 양복을 입었다가 비키니를 입었다가……. 계속 옷만 갈아입는 것이지 뭐 호박에다가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어요? 본질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그 모드스디벤디라는 것은 어떤 모드스디벤디를 의미하느냐하면 하나님과 매일 매일 만나서 말씀에 의해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은 사람은 그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다이내믹하게 변화되는 것이죠. 그렇게 삶이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삶으로 이 삶의 방식들이 말하자면 구현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자체가 이 사람 속에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에 그런 삶 속에서 꼬비아디벤디 가르침의 풍부함을 갖게 된다는 것이에요. 두 가지 면에서 사실은 꼬비아디벤디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한사람이 설교를 할 때만 설교하는 것은 아니에요. 기도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피를 튀기듯이 설교를 하는 것만 설교가 아니라 모든 교인이 돌아갔을 때 목사 한사람이 흐느끼면서 기도하는 그 모드스디벤디 자체가 설교에요. 설교를 안 하는 사람은 목사의 흐느끼는 기도를 들으면서 ‘나는 참 기도를 안 하는 인간이구나!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라는 것을 느끼겠어요? 안 느끼겠어요? 느끼죠! 그게 바로 꼬비아디벤디에요.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는 기도하라는 설교를 할 때 가장 Familiarity가 있고 설교와 자신 사이에 분리가 안 되고 일치되고 힘이 있게 된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자신이 그것을 마음을 기울여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외치기 때문이죠. 그러면 목사는 무엇을 전공으로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어요? 어떤 삶 중에 한, 두 가지만 외치는 사람이 목사에요? 아니면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성결과 온전함을 외쳐야 되는 사람이에요? 왜 대답을 못해요? 모든 삶 전체를 기울여서 외쳐야 될 사람이에요. ‘내 특기는 찬양 쪽입니다.’ 그러면서 목회를 하면 안 돼요.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에요. ‘나는 성경연구는 잘하지만 기도하고 전도는 우리 권사님하고 전도사님 몫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노출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찔림을 받든지 채찍을 받든지 아니면 감동을 받든지 어느 방면의 삶이든지 간에 복종을 하면서 그 삶으로 모드스디벤디가 이루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강단에 서서 성도들의 삶 전체를 아우르면서 설교를 할 수 있어서 말씀을 공부 안하는 사람을 꾸짖기도 하고 정직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시련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에요.
어느 신학교에서 신학생 모집 광고를 냈어요. 광고에 XXX라는 유명한 잡지가 있는데 뭐냐 하면 아주 나는 옛날의 목사들이 앉는 의자가 나왔어요. 딱 그것만 나오고 밑에 자기 신학교 이름을 쓰고 위에다가 타이틀을 붙였어요. ‘It is not easy chair.’ 이것은 쉬운 의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길을 목사의 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소명을 받은 것이 절대로 아니에요. 그럼 목표가 무엇입니까? 목회의 목표라는 것이 오늘날 보면 너무 영적인 것들을 계량하잖아요. 몇 명이 모이느냐? 돈이 도대체 얼마나 모이느냐? 유명한 사람이 거기에 얼마나 있느냐? 아니면 교인들로부터 얼마나 대접을 받느냐? 등등 다 계량화 되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가 명백히 산업자본주의가 교회 속에 침투하는 물량주의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그것은 옳지 않아요. 목사로서의 진정한 가치는 진리의 사람으로서 혼자 인식하며 살수 없는 그 진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진리의 사람이고 그 진리를 외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가까이 불러서 ‘내가 살아갈 테니까 나를 보면서 배우라.’ 고 하면서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목회에요. 삶의 전 방면을 가르치고 부모가 자식들의 손을 이끌면서 ‘저 하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달과 별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고, 저 꽃들은 하나님이 피어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하며 살고 순종해야 된다.’ 고 가르치듯이 영적으로 어린 교인들을 그렇게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존 오웬이라는 신학자가 목회자를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목사를 목회자로 그 교회에 세우신 것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전범(典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운 것이에요. 그런데 목회자가 뽕구라에요. 머리 자체가 활동을 안 해요. 공부도 안 해요. 까막눈이에요. 성경을 읽으면서 감동도 안 받아요. 마음으로 기도도 안 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성공과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어요. 그러면 사실은 그 사람이 성도들 눈앞에 보이는 것 자체가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이에요. 존재 그 자체가 방해가 되는 것이에요. 왜? 왜곡된 신앙을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토니 사전트라는 사람을 기억할지 모르겠어요. 설교자로서의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평전이 아주 여러 권이 나와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러 권의 박사논문집을 살펴보았지만 토니 사전트의 책이 결정판이에요. 그분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 밑에서 오랜 세월 동안 부목사 생활을 했고 5,000편 이상의 설교를 들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 가장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그가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에서 말하는 로이드 존스의 결론이 뭐냐 하면 설교자는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XXX Holy. 한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결론이에요. 그런 영향을 하나님의 성경말씀으로부터 깊이 받고 자기가 날마다 새로워지고 그런 경험 속에서 주님과의 친교를 누리며 갈수록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그 모습 자체가 성도들을 위해서 주님이 설교자로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이에요. 그래서 삶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설교가 되어야 해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자신도 깨뜨려져 변화되어가는 그런 역동적인 과정 속에 신학이 있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되어야 해요.
오늘날의 시대는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올바른 신학함의 정통, 소위 이야기하는 Theology Itself 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Doing the Theology 가 필요한 것이에요. 모드스디벤디가 필요한 것이에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광대하고 위대하심을 성령계시를 통해서 접하고 경험하고 그 아름다움을 깊이 경험하는 가운데 신학활동을 위한 질료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 질료들을 올바르고 제대로 된 신앙의 틀 속에서 소화하고 찍어내 낼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아주 아름다운 하나님에 관한 증언이 되고 그들의 신앙의 결과물들을 접할 때 무릎을 꿇고 자기가 성경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과 그리고 이 사람의 신학적인 결과물들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애착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내가 그렇게 신학을 한 모든 것들은 도구일 뿐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 이것들을 위해서 나의 모든 지식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단지 성경 계시에 대한 지식이 중심이지만 이 성경계시를 계시답게 이해하기 위해서 문학, 철학, 사회학, 물리학, 천체학, 영혼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심리학, 심리철학, 광학, 그리고 해양학, 기상학, 법학, 법철학, 법의학, 의학, 생리학, 식물학, 동물학, 미시세계에 있어서 원자학 등 이런 모든 것들의 지식들이 아주 놀라운 조화를 이루면서 성경 계시 그 자체를 찬란한 빛으로 우리의 지성 속에 떠오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내가 어떤 학문에 있어서 어느 한 분야에 있어서 관찰한 것을 가지고 그 분야에 있는 학자들하고 논쟁을 해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관심사가 아니에요.
저는 항상 이야기를 해요. 외국의 신학자들을 만났을 때 ‘I am a holy pastor of the local church.’ 그것도 서울도 아니고 Village의 목회자이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부지런히 탐구해요. 그것이 자신이 생명이 있는 동안에 호흡활동처럼 느껴져서 그 진리를 향한 사랑으로 학문을 공부하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빛 아래 자기를 복종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학을 하는 삶이에요. 온 몸으로 그 확신을 구현하고 그 확신대로 살기 위해서 올바른 판단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목회자, 신학자로서의 일생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가고 그래서 진리 그 자체가 설교자 속에 최고의 관심사이고 이 자체 속에 가득 차 있어서 그에게 어디를 찌르든 지간에 쏟아져 나오는 피조차도 진리를 외치는 그런 증언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야하는 것이죠.
(찬양)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괴테가 마지막에 죽을 때 남긴 유언이 무엇인지 아세요? ‘저 창문을 열어 더 많은 광명을 나에게…….’ 그러면서 죽었어요. 그게 우리의 유언이 되어야 해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천년동안 이 세상에 황제로 살기보다는 진리를 깨닫고 단 1년을 노예로서 살기를 원하는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우리의 목회사역이라는 것은 성령의 효용성을 목회사역을 통해서 구현하는 그것이 바로 목회에요.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에 행함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사람으로 부름 받은 소명이라는 것이에요.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한 영혼과 그 영혼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았던 영혼들 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좋은 학교 교수가 되었다는 것, 유명한 학술지에 여러분의 논문이 발표되어서 금으로 도금한 메달 하나를 목에 매다는 것, 그런 것은 하나도 안 남아요. 다 세상의 영광이에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에요. 치열하게 공부하고 그리고 그것을 치열하게 자기의 양떼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교인들에게 카테키누스를 만들었어요.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스투데오 에루구숨 =나는 공부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합니다.’ 그렇게 교인들이 대답을 해요. ‘당신들은 무엇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곧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3대상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주셨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존재하는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적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여러분들은 신학을 모두 마치고 목회를 모두 끝낸 후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아름다운 그런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쉬운 대로 강의가 끝났는데 제가 사실은 집회가 있어서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두 분 정도만 꼭 질문할 것으로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한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제가 댈러스에서 한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성도님들께 자기죽음과 자기 부정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담임목사님께서 그 다음에 언짢아하시더라고요.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셨기 때문에 자기 부정이나 자기 죽음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좀 혼동이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목사님의 명쾌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이 영성의 핵심이 바로 self denial의 삶이에요. 자기 부정인데 나는 거기서 자기 부정에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자기 정죄, 자기 부정, 자기 확신, 자기 처벌까지 이야기하는데 반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적인 부정을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이에요. 거기에서 목사님이 가서 찾아보세요. 꼼보르나치오의 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꼼보르나치오는 영어의 Conformation 이에요. Conform 은 함께 형성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콘포나치오는 무엇이냐 하면 ‘닮은, 일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매일 매일 자기 부정 속에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처벌을 당하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죽으신 그 죽음의 실재가 영적으로 자기 삶속에 들어와서 오늘 육신에 속한 자기의 옛 성품을 죽이는 것이에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관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에요.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받았다는 점에서 이 사람은 완성된 사람이에요.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의 사람이지만 아직은 이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주실 그 의에 완전히 합해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의 원죄의 문제가 소위 이야기하는 Corruption과 Guilt의 문제로 나뉘잖아요. Guilt는 Justification에 의해서 해결되고 그 다음에 Corruption의 문제는 Justification에 의해서 해결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Satisfaction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자기 처벌과 자기 부정, 자기 죽음은 Satisfaction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할 때 그것이 ‘에스타오로 마이’ 인 것을 아세요? 완료형이에요. 옛날에 못 보았던 것이 아니라 have been XXX을 지금까지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목사님은 인터넷을 두드려서 ‘자기 깨어짐’ = De Paenitentia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제가 쓴 책이거든요. 그 책을 구해서 읽으시면 만족할만한 대답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2)
전도서 12장 12절에 보면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나오잖아요. 그것은…….
(답변)
목사님이세요? 목사님은 지금 일어나서 질문하실 때에도 그렇게 피곤하게 하는 책을 들고 질문을 하셨고 그리고 또 책을 연구해서 입학시험을 공부하고 지금도 공부하고 계시죠?
(질문자-그런데 공부하는데 너무 피곤해요…….)
그러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오늘 돌아가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전도서에서 이야기하는 그 부분은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잘 정리된 조직신학 책을 보고 심지어는 성경을 읽는 것도 피곤하게 되는 길이 있는가 하면 성경과 가장 거리가 먼 책을 읽으면서도 피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활기차게 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책을 읽고 쓰고 하는 것들이 피곤하게 할뿐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는 것이 사람의 지혜인데 그 지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연관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지식의 수많은 유희들은 인간의 정신을 피곤하게 하고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아까 내가 말씀드린 대로 신학 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 사람 자신이 정말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해서 발견하고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그에게 있어서는 그 자체가 행복의 과정이에요. 그 자체가 행복의 과정이에요.
어떤 사람이 고래에 대해서 연구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그 사람은 젊어서부터 일평생을 고래만 따라다녔어요. 고래 가까이에 가서 고래에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어요. Tag를 붙이는데 어떤 때는 만난 고래를 또 만난답니다. 그 일을 하는데 그 일 자체가 얼마나 위험하겠어요? 큰 고래는 꼬리만 1톤이에요. 꼬리가 물에서 철렁할 때 그게 1톤이라고요. 그런 고래가 심지어는 20,000㎏나 되는 고래가 뒤움칠 때 얼마나 위험하겠어요. 그러나 그 자체가 너무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절대적인 지식의 문제와 모든 책에 적용하면 안 되고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신학 책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다 피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질문3)
저희는 최근에 교회 성도들하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XXXX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궁한 사랑이…….
(답변)
이런 이야기들이 어려운 대목들이에요. 아까도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신적 작정 안에서 이루어진 아나케(필연)가 그것이 어떻게 전개될 때에는 우연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시죠? 신적 작정이 전개된다고 할 때 이것이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면 믿으려고 안달을 하는데도 막 안 믿어지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막 반항을 하면서 몸부림을 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잖아요. 그런 질문은 사실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에요. 왜냐하면 그 뒤에 사실은 그 문제는 사실은 쉽게 이야기하면 신의 비피동성 문제부터 시작해서 신의 완전성과 초월성의 문제와 내재성의 문제, 필연성과 우연성의 문제, 영원과 시간의 문제 이 모든 것들을 물고 들어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항상 성도들은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성도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저런 질문에 대해서 두 Sentence 정도로 명쾌하게 자신에게 답을 주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제가 아주 많은 지성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그런 질문들을 해결해내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해결해내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지성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의 기반이 없고 흔들리는 성도들의 믿음을 그것을 변증을 안 해주면 끊임없이 흔들려요. 그런데 그것을 올바르게 설명해주기 위해서는 성도들 자신의 지적인 수준이 상당히 향상되어야 해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는 죽과 같은 말씀의 지식이 있고, 단단한 음식과 같은 지식이 있거든요. 그것은 아주 단단한 것 중에서 가장 단단한 것에 속한 것이에요. 그런데 성도들은 아직까지도 이빨도 안 났어요. 그런데 그것을 먹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교인들을 우리들이 흔히 양육해서 성숙시킨다고 그러는데 나는 무엇을 성숙시키느냐고 묻고 싶어요. 무엇이 성숙이에요? 담임 목사의 목회방침에 잘 순종하는 사람들로 군단을 만드는 것이 그것이 성숙일까요? 아니면 그냥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꾹 누르고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무식한 목회자에 대한 중대한 실례라고 생각하고 그냥 접으면서 그런가보다 하고 하는 것이 성숙이에요? 사상의 성숙이 없이는 나머지는 아무것도 성숙이 아닌 것이에요. 다시 말할게요. 사상의 성숙이 아니면 나머지 성숙은 성숙이 아니에요. 사상의 성숙이 밑바탕이 되고 거기에서 삶의 성숙, 인격의 성숙, 모든 것들에 대한 성숙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답할 수 있어요. 두 시간만 주세요. 제가 답을 할게요. 아마 설복될 것이에요. 그런데 나는 지금 가야 되요. 그래서 그 부분은 힌트만 드릴게요. 그 부분은 어디에 들어가서 연구를 해야하느냐하면 ‘PRRD’ 라는 책이 있어요. ‘Post Reformation and Reformation Dogmatics’ 라는 칼빈 신학교의 교수 리처드 먼로 교수가 쓴 책이에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 태어나서 그런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복이에요. 어마어마한 책이에요. 그 책 중에서 제 3권을 읽어서 무엇을 보시느냐하면 아꿈마바치오 부분을 읽으세요. 아꿈마레이션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이라데이’라고 나와요. ‘하나님의 분노’에요. 그러면 개혁파 정통주의의 수십 명의 지금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나와요. 그러나 명심해야 될 것은 상당한 시간을 두고 접해야지 1,20분 읽으면서 그 안에 답을 찾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엄청난 철학적인 담론들을 밑에 깔고 있는 말하자면 담론의 출처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설명하고 있어요. 기독교 신학은 그것을 설명해냈어요. 만족할만하게 설명해냈어요. 저도 두 시간만 주면 만족할만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질문4)
(답변) 그래서 저는 1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아빠 공부방이 사택 바로 밑에 층에 있게끔 그래서 밤에는 잠옷 바람으로도 밑에 내려가서 공부를 하고 아이들도 왔다 갔다 할 수 있게끔 했어요. 그리고 10년 동안 교회에서 지냈어요. 작년에 비로소 교회에서 아파트를 하나 얻어주어서 나는 정말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 집사람이 하도 원해서 나갔어요. 그리고 아이들은 주님을 만나서 회심하고 아주 예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그리고 다른 아빠처럼 아주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할애하지 못해요. 그때마다 우리 집사람이 저를 위로해줍니다. 이델리어트와 칼빈이 결혼생활을 딛고 칼빈이 엄청난 교회의 격무에 시달렸고 그 사람 역시 저 같은 사람하고는 비교될 수 없이 학문에 몰입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할 때마다 이 지혜로운 이델리어트는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다른 아빠들처럼 많은 시간을 내어서 우리와 함께 있어주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을 외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우리 가족에게는 최고의 위로이고 아이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교육교재입니다.’ 그랬어요. 너무 위안을 삼으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위안을 삼으세요. 그래도 우리 딸, 아들이 아주 나를 좋아해요. 특히 우리 딸은 지금 대학교 1학년인데 안 믿어지겠지만 주일날이면 수천 명의 성도들이 왔다 갔다 하는 교회 마당에서 뜨겁게 포옹하고 아이가 지금 19살인데 아직도 Real kiss를 합니다. 썰렁해요? 그래서 아주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지요. 지금도 보고 싶네요.
자 이것으로써 저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과의 만남이 반가웠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