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복음주의 동향
Ⅰ. 들어가는 말
지난 여름수련회 때에 현대복음주의의 흐름에 대해서 강의를 했고 지난번에도 굉장히 부지런히 해서 마지막 끝까지 가려고 했는데 해보니까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은 여름수련회 때에 간 데까지 가고 끝냈어요. 엄격히 말하면 여기가 현대복음주의의 흐름Ⅲ가 아니고 사실은 Ⅱ에요. 오늘은 앞의 부분은 반복하지 않고 이머징교회의 일부를 조금 다루었는데 이머징교회부터 시작해서 지난번에 다루지 못했던 부분들 신비주의, 그 다음에 Richard Foster와 Renovare운동, 이머징교회, Peter Drucker, Rick Warren, 레놀드 스위트, 신사도운동, Peter Wagner, John Wimber, 제3의물결, Kenneth Hagin, 알파코스, Benny hinn과 기타 은사주의 운동, 이렇게 해서 뒷부분을 다 훑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를 하면 거의 아주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운동까지 여러분들이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 살펴보게 되면 결국은 오늘날의 이 기독교가 얼마나 철저하게 거짓된 가르침과 심하게는 사교의 영역에서 속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리고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여러분들이 왜 우리교회에서 이렇게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시키고 신학교도 아닌데 이렇게 과중한 공부를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거룩한 성도로서 불러내어 이처럼 영혼들을 섬기는 일군들로서 이 부르심을 감당하도록 저희들을 택해주셨는데 오늘 배우는 이 모든 내용들이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영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훌륭한 지침이 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제가 이 현대복음주의의 흐름 두 번째 시간을 통해서 다루어보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이머징교회, 신비주의, Richard Foster와 레노바레운동, Peter Drucker와 이머징처치, 릭 웨렌과 레놀드 스위트, 그리고 알파코스를 비롯해서 레노바레운동, 프라미스 키퍼스, G12, 빈야드, 이머징교회, 신사도운동, 그리고 이러한 최근에 조엘 오스틴의 긍정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한국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러한 그릇된 사상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Ⅱ. 본론
1. Emerging Church 와 신비주의 교회
그러면 제일 먼저 이머징교회와 신비주의 교회를 첫 번째로 먼저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신비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특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종교성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종교성은 인간 자신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종교성을 얻기 위해서 결국은 종교를 신실하게 믿으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참된 종교는 반드시 종교성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기준과 원칙도 제시하고 그에 따르는 삶도 강요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모든 기준과 삶의 방향이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거기에 합치해서 사는데 이것은 사실은 상당히 이성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선악의 기준이나 판단의 기준점 같은 것들은 이성의 사고에 의해서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성격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말이죠.
예를 들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따르면 결국은 복을 받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입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성적으로 그 힘든 기독교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 때 어떤 종류의 복을 언제 받는다고 이성적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지요. 그러면 그것을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부여하는 그러한 모든 계명과 그 계명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선악의 기준점을 자기가 받아들이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이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결국은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누구도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삶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자기가 왜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어떻게 변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러나 왜 변했다는 것을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신비적인 경향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이런 것들이 결국은 계몽주의의 들어서면서 철저하게 이런 종교성들이 배척되어요. 신비적인 성격의 모든 것들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척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다보니까 결국은 철저하게 이성주의에 입각해서 보이는 것만 믿고 그 다음에 이치적으로 올바르고 논리적인 것들만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그 논리와 보는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하고 보이는 모든 감각들을 기초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만 존재하느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도 존재하거든요. 그러한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 이어지다 보니까 모든 것들을 인간이 이해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판단했지만 그러나 한쪽으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종교성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죠. 그것이 신비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여러분 가만히 보면 현대 특별히 산업사회 이후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이 굉장히 신앙적이지는 않으면서 종교적이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요가, 명상, 심신수련, 이런 것들에 대한 것들이 굉장히 강조되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게 되고 그래서 무신론자, 종교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Temple Stay를 하고 명상의 집에 들어가고 기 수련을 하는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모두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러한 일반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욕구들이 교회 속에 스며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들이 이야기했지만 결국 계몽주의는 인간이 계시 아래, 은총 아래에 있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최고의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주장하면서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결국은 자기가 그 모든 우주의 중심이고 사물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가치의 기준이라는 극단적인 자아중심주의로 떨어지게 되었어요. 이런 극단적인 자아 중심주의와 신비주의가 만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러한 극단적인 자아 중심주의는 또한 구라파에서 계몽주의 이후로 일어난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개인주의라는 것이죠. Individualism이라는 이 개인주의는 초기와 후기로 나뉘게 되는데 초기에서의 이 개인주의는 뭐냐 하면 철저하게 자기가 사회에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역할만 자기가 다하고 나머지 모든 것에 있어서는 자기의 권리를 철저하게 요구한다는 그런 종류의 시민사회적인 개인주의였어요. 그런데 이제 후기에 넘어오게 되면 그런 많은 사람들 속에 각자 각자가 개인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극단적으로 개인주의를 확대해서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사고와 판단, 이 모든 것들이 가치의 중심이고 궁극적인 기준점이 된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종교 심리적인 개인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가 기독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잘 보세요. 교회에 교인들이 나오지만 그 사람들이 다 세상 사람들이에요. 결코 교회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 나오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이 절대로 교회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오늘도 여러분들이 흩어지면 전부 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데……. 그러니까 결국은 세상에서 이런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분위기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것을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빠져들고 스며들어서 그들이 자기 속에 깊이 침투되는 것이죠. 그것을 막을 수 있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그것들을 같은 평면 위에서가 아니라 높은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그것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구도에서 나와서 어디를 거쳐서 어느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미리 아는 지식적인 것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그것들이 마음속에 스며들어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그것보다 더 강한 어떤 경험이 내 안에 현존하고 있을 때 그것을 꺾고 이길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여러 가지로 많이 이야기를 해도 다 소용이 없고 한가지로 집약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경건이에요. 경건…….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내가 지금 장황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사경회 때 했던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를 다시 듣고, 들을 수 없으면 설교정리본이라도 보고 이해하면 되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그 죄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십자가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될 그 때에 우리 안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게 뭐냐 하면 죽은 영혼을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 죽은 영혼이 살아난 것이 의식 세계 속에서 발아가 되어서 거기서 하나님을 향해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한번 시작하면 이 경건은 사라지지 않아요. 약해지고 강해지는 차이는 있지만 신자 속에서 이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리처드 십스 라는 청교도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혹은 기도할 때에 그 하나님의 어떤 성품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물처럼 녹아내리는 그것은 반드시 중생하고 회심한 자들만의 초자연적인 특성이라고 못 박았어요. 그것은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는 것이죠. 또 제가 저는 비교적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집요하게 파고든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현대의 정동이론이나 아니면 인식론을 가지고 지금 여러분들이 들은 것보다 10배나 더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내가 하루에 한 시간씩 일 년 내내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설명일 뿐이지 그것을 내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여러분 내가 겨울날에 여러분에게 차가운 사과……. 너무 맛있잖아요? 요새는 보관을 잘해서 속에 투명하게 꿀이 박힌 것 있잖아요. 사람들이 손을 대지 않아서 껍데기가지도 아삭아삭한 거 있잖아요? 그것을 잘 씻어서 나두었다가 추운 겨울날 따뜻한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한입 꽉 깨물어 먹을 때 입에 확 번지는 그것을 아주 정교하게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것을 들을 때에 침이 빙글 도는 이유는 뭐냐 하면 옛날에 그것을 먹어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여러분들이 사과라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면 그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에요. 똑같은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한번 영혼의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감각이 있어요.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잠들었던 영혼들이 깨어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이 미끄러졌다.’ ‘은혜에서 멀어졌다.’ 그러는데 상관없어요. 다시 한 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금방 일으켜 세우셔요. 그런데 그것을 안 해요.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에는 그러한 신비한 주님을 향한 경건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발동 안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신비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설명이 안 되니까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과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했다고 하더라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 제삼자가 듣기에는 전자의 사람들에 호소되는 것이 아니라 후자의 사람들에 의해서 설득이 되고 호소되는 것이에요. 왜? 전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그런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이 있어야지만 전달되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도 본성적인 이성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참된 경건을 아는 사람과 이성주의자가 논쟁을 하게 되면 후자가 다수의 지지자들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속에서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죄라는 것 자체가 결국은 자기를 끊임없이 주체화하고 확장시키는 원리거든요. 그런 것들이 안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깨뜨려져야하는데 그 깨뜨려지는 것이 경건의 신비에요. 그것을 알면 그 경건의 신비가 너무나 위대하고 커요.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은 또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은 또 삼위일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죠. 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셨으니까 그러니까 그 신비라는 것은 무한할 것 아니에요? 그런 무한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실 다른 것들은 신비하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런 경건의 신비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와 깨뜨려지지 않은 극단적인 자아 중심주의가 만나게 되는 것이에요. 만나게 될 때에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특성이 이 두 가지를 만나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너는 신이라고 불러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부르느냐는 종교마다 또 같은 종교라도 시대마다 훨씬 다른 것이죠.
예를 들자면 도교에서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래서 이 모든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적인 자연, 그것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는 하늘의 원리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고 그러면서 네가 바로 그 거대한 자연속의 일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죠. 또 오늘날의 신사도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영지주의 쪽으로 기울어져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너희 속에 예수가 계시다.’ 우리는 예수가 계시다는 말을 우리들이 의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너는 예수의 일부다.’ 그것과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끌고 간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주체성이 유지되는 가운데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를 움직여 가시는 것이죠. 이런 것을 무시해버리고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너는 오류에 빠질 수 없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이죠. 그러면 스피노자 같은 사람도 결국은 인간 안에 있는 자연적인 본성이라는 것은 밖에 있는 자연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를 거대한 신으로 충만한 이 세계 안에서 그 신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각각 다른 모양을 가지고 여기에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양태의 차이일 뿐이고 우리는 하나의 신에 의해서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로 묶여져있고 신화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인간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은 깨어져야할 필요도 없고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계몽주의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철저하게 추방했던 종교를 뒷문으로 다시 받아들일 때에는 이제 앞에서 추방된 종교는 우리에게 객관적인 것들을 강요하는 종교인데 이것을 추방해버리고 뒤로 받아들이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우리 됨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신비주의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그런 자기 개인종교화의 과정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이렇게 자아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극단화시키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원래의 우리 자아라는 것은 전통적 사회에서 보면 인간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아갔어요. 그리고 그것이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자기를 확인하는 방법이에요. 성경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질서에 대한 사랑이 없이 자기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놓여있는 모든 질서, 신적인 질서 그 자체를 사랑으로 받아들여서 사랑하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이미 그 안에서 자지가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전통적인 것들은 모두 나와 다른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 이런 모든 것들을 규정해주는 빛들은 결국은 자기 자신 안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비치는 객관적인 것이거든요. 객관적으로 비치는 어떤 사상과 진리의 빛에 의해서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이고 너와 너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고 그 사이에서 나는 누구이다. 그 다음에 너와 너는 누구이고 너와 너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고 나는 너에 대해서 어떤 의무가 있고 너는 나에 대해서 이런 권리가 있다. 이런 등등을 좌우상하로 다 연결 지으면서 나 개인에 대한 인식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모든 관계 속에서 함께 이해되는 것이에요. 이게 고전적인 자기 인식의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그 자기 이외에 모든 세계들이 자기와 어떤 관련을 맺어주는 것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상에 따라서 그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지요. 세계관이 다르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아예 무시되는 것이죠. 그런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자기 하나만 남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사실은 산업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요. 처음에는 산업화 이전에는 수공업단계잖아요. 그래서 수공업으로 해요. 그러면 자기 안에 있는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자기의 손일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작물을 재배하든지 물건을 만들든지 그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자기가 하는 것들이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자기의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자기의 삶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서 결국은 그런 모든 일들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잖아요. 그러니까 옛날 사회에서는 놀이문화와 일 문화가 두개가 함께 엮여져 있는 것이에요. 노는 시간이 따로 있고 일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게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에요. 그래서 보면 어느 나라든지 일할 때에 놀이가 거기에 함께 들어와요. 그래서 여러분 모를 심을 때도 죽어라하고 50분을 하고 10분을 쉬는 것이 아니라 노래 부르면서 막 춤을 추면서 모를 내는 것이에요. 일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아이 그냥 총알같이 해버리고 끝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노는 것 자체가 곡식을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보다는 물론 그 목적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어울려 모여서 살아가는 그것을 그 노동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주 즐겁게 일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 그 결과들을 모두 함께 나누고 함께 축제하고 그러면서 공동의 결속을 다지고 그러는 것이죠. 그것이 대량생산 시대에 접어들면서 다 단절되어 버리는 것이죠. 단추를 끼는 사람은 인형 눈깔만 밤새도록 박는 것이죠. 이런 속에서 어떤 성취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에요. 눈만 계속 박는데 마지막으로 인형이 어떤 형태로 나오는지도 모르고 눈만 계속 박는 것이에요. 단추만 계속 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의미가 없는 것이죠. 고속도로 휴게실에 보면 여러분 분명히 사람이 유화로 그린 것인데 3000원 6000원밖에 안하잖아요. ‘그림 값도 안 나올 텐데 어떻게 하느냐?’ 그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공장처럼 대량생산을 해낸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하느냐하면 수십 개의 유화를 붙여놓고 여기서 한 댓 사람이 서서 지나가는 것이에요. 줄을 긋는 사람은 계속 줄만 긋고 지나가는 것이에요. 저기에는 풀만 그리면서 계속 지나가요. 그 다음에 풀밭은 이 사람이 색칠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하면 쫙 지나가면 저쪽부터 하나씩 생산되는 것이에요. 기계로 찍어내는 것과 똑같이 생산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전체적인 작품과는 상관없어요. 나는 이것만 하면 되니까. 그 속에서 그것은 단지 돈 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이런 어떤 성취욕을 못 느끼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외가 있어요. 예외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경영자들이에요. 그래서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여러 가지 사업의 요소들을 비벼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자기실현의 욕구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에요. 그것도 공동체적이지 않은 면이 굉장히 많아요. 일을 위해서 만나는 것이죠. 그래서 전에는 사람을 위해서 일이 존재하는데 그게 아니라 이제는 일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너는 적합하지 않아.’ 그러면서 12월에 딱 잘라버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든지 우리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관없어요. 일만 잘해내면 되는 것이에요. 요즘은 출퇴근 같은 것도 없다고 그래요. 성실성을 이야기하면 웃기는 것이래요. 성실한 것이 밥 먹여 주느냐는 것이죠. 매일 안 나와도 상관없대요. 나와서 일만 잘해서 목표만 만들면 된다.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를 얻는 것이에요. 철저하게 이해관계가 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이 결국은 소속감이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번호들을 여러 개 가지고 있지요? 학교에 간 번호. 그래도 우리 교회는 번호가 없지요? 번호로 다 분류되는 것이에요. 그런 번호 속에서 갇혀서 결국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 관계들이 다 깨뜨려져요. 가족들이 있지만 그러나 가족들은 이렇게 분화된 사회 속에서 각자가 생존해남기 위해서는 가족들을 위해서 옛날처럼 헌신해서는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에요. 학생이 그러면 공부를 거의 못하는 것이죠. ‘집에서 ‘해지기 전에 들어오너라.’ ‘해 뜨고 나가라.’ 언제 공부하고 언제 무엇을 하겠어요? ‘엄마를 열심히 도와라’, ‘동생을 돌봐라.’ 아빠 들어오시면 ‘발 씻을 물을 가져와라.’ 완전히 파출부 Internship도 아니고 뭐에요? 그런 관계들이 다 해체되었어요.
그러면 그럴 때에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이 남아요. 자기만 남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에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니까 결국은 자기에 대한 생각을 부정적으로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유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자기 자신인데 ‘타락한 죄인이다.’ 아니면 ‘희망이 없는 인간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현대 코드하고 너무 안 맞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 시대에 기가 막히게 지금 20년 사이에 한국교회 안에 너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어요. 두 번째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그 안에 숨 쉬고 살아가면서 그 안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감지 못하는 것이죠. 그게 뭐냐 하면 완벽하게, 아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회개의 메시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에요. 여러분들에게 전통적인 회개로 일관된 어떤 설교를 찾아내는 것에 대해서 상품을 걸라면 걸 용의가 있을 정도로 그렇게 회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에요. 그 회개가 사라지는 것들이 결국 뭐냐 하면 이렇게 현대인들은 고개를 거꾸로 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존재인데 그 자아를 그런 식으로 부각시키면 이 사람은 완전히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하면 중립적인 존재로 봐요. 그러니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런 중립적인 존재이고 무죄한 존재라고 본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이런 자아운동들의 특성은 뭐냐 하면 전통적으로 보자면 이렇게 인간이 있고 인간이 먼저 자아를 초월해서 종교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러면 만난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세계를 내려다보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보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일반적인 세계에 대한 설명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안보고 자기 자신이 자아를 들여다봄으로써 신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어떻데 다르냐하면 전자의 설명은 신을 만나고 그 신이 말하자면 객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신의 시각에서 인간과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도 그중의 일부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제 자기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교정되거나 변형되어야할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으로 상승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에요. 그게 결국은 극단적인 자아운동의 모습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우리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기준들 즉 율법, 복음, 그것에 의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존재의 규정, 인간의 의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이런 것들은 다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자기 자신을 이렇게 들여다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라는 자아라는 존재가 사실은 하나님만큼 설명할 수 없는 존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실은 막연한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렇게 하게 될 때에 객관적으로 그 속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에 거기에 남는 것은 어떤 감정의 움직임과 경험, 그것만이 우리에게 감지되는 것이죠.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잖아요. 설명할 수 없는 미궁 속에 빠져 들게 되는 것이죠.
지금 보면 오늘날에도 심리학이 굉장히 잘 나가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이 심리학을 공부하거나 이것을 적용해서 먹고사는 모든 직업들은 놀랍게 성공할 것이에요. 예를 들면 음악치료, 원예치료, 운동치료, 웃음치료, 그림치료, 명상치료, 전부 다 온갖 것들을 다해서 치료라는 소리가 들어가면서 그것들을 전부 다 엮어내는 것이죠.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인간이 무엇인가 망가지기는 했는데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든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보지 않고 단지 인간의 중심성을 흔들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손상된 것들을 고치면 인간이 행복해 질수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상처를 통해서 억압받고 있는 자아를 온전히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면 왜 예전에는 눈을 뜨지 않았던 음악, 미술, 원예, 등등의 수많은 치료의 기법들이 여기에 동원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결국은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들을 보면 다 있는데 말씀치료는 없어요. 사실은 Logo Therapy가 그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정통적인 치료의 방법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은 없어요. 사상치료 같은 것도 없어요. 대부분 치료자 앞에 붙는 모든 것들이 다 감각적인 것들이에요. 절대적인 기준과 그것들에 대한 논리들을 다 버렸기 때문에 이제 내게 부딪히는 어떤 감정이 주(主)인데 그것을 외부와의 접촉 속에서 불러일으켜서 그래서 그것을 자아 속으로 침투시켜서 자기를 고쳐보려고 하는 그런 시도들이라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앞으로 굉장히 돈을 어마어마하게 버는 산업이 될 거예요. 그래서 IT, BT, NT, ET 그러면서 나오잖아요. 이것은 사실 PT에요. Psychological Technology에요. 나는 그런 PT의 시대를 예고해요. 어마어마한 산업으로 발전을 할 것이고 지금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겠구나!’ 하고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런 의미가 아니죠.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이에요.
2. Richard Foster와 Renovare 운동
그래서 이제 이런 인간의 요구가 있으니까 종교도 역시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창출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런 수요를 타고 공급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교회 안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이머징교회와 각종 신비주의적인 이단들의 모습이에요. 첫 번째 여기에서 다룰 것은 리처드 포스터와 레노바레 운동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리처드 포스터는 비교적 경건한 복음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이분이 쓴 책 가운데 유명한 책이 있지요. 돈, 섹스, 권력 이라는 책도 있고 한국에서 17만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라는 책이 있지요. 17만부가 팔렸으니까 한국의 기독교시장에서는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팔린 것이지요. 한때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가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적이 있어요. 그런 책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부담 없이 쉽게 읽혀요. 이야기를 풀어가듯이 읽히는 것이죠. 그 다음에 헨리 나우엔의 영성에 관한 책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게 같은 계열의 책들인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내가 여기에서 사람 이름이나 교회운동 같은 것들을 거론하면 ‘야! 이게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와 악의 덩어리구나!’ 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참된 것과 거짓된 것들이 막 섞여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때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그것을 구분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섞여있고 또 잘못된 것은 감추고 대중적으로 자기네들이 믿는 확신들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보편화시켜야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들을 앞에 세우고 그리고 그 다음에 핵심적인 것들은 감추는 경우가 대부분의 경우에요. 그래서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사실 그것만을 보고는 무엇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힘들 정도로 그렇게 미묘한 경우가 사실 대부분이라는 경우죠.
그러면 리처드 포스터는 미국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복음주의자이고 그리고 상당한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기독교운동가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주창하고 있는 Renovare 라는 것이 뭐냐 하면 라틴어로 ‘개선하다. 쇄신하다.’ 영어의 Renovation의 의미에요. 레노바레 성경도 나왔잖아요. 그런 운동들이 일어나는데 안타까운 것이 뭐냐 하면 한국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 신학적으로 그것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들어가서 살핀 다음에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한두 번 세미나를 듣거나 보고 '아 신선하다.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되겠다.' 그러면 한국지부부터 먼저 결성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어쨌든 이분이 주창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영성 신학자에요. 그런데 미국에 있는 영성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사실 종교다원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왜냐하면 정통주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해요. 왜 영성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하는지를 이미 경건의 비밀에서 설명했잖아요. 그래서 쓰지 않아요. 그리고 그럴 필요를 별로 못 느끼는 것이죠. 왜? 경건 그 속에서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 때문에 그런데 영성이라는 것은 결국은 종교다원주의를 물고 들어오는데 어쨌든 이 사람의 모토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아주 오래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시리즈를 설교한 것을 기억할 것이에요. 청교도와 개혁신학자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존 오웬 목사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을 두 가지로 설명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 그 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열망, 이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5일 동안 설명했잖아요? 책도 나왔으니까 가서 읽어보세요. 그런데 여기에서 리처드 포스터 같은 일군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의미는 그런 개혁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의미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하고는 달라요. 그것은 뭐냐 하면 영성적 측면을 강조한 주관주의적이고 체험적이고 신비주의적이고 신인합일주의적인 그러한 종교다원주의적인 영성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6가지 영성훈련의 방법을 제시하는데 묵상, 성경, 성령, 사회정의, 복음전도, 성육신 이렇게 6가지를 레노바레운동의 핵심적인 훈련으로 제시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지금 현재 아주자퍼시픽이라는 LA에 있는 대학에 영성신학교수로 있어요. 아직까지도 거기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사람의 배경은 놀랍게도 청교도에요. 청교도이면서 또 하나의 특성을 이 사람의 사상적인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퀘이커교도에요. 퀘이커교도는 경건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운동인데 quake가 원래 ‘지진을 일으키다’ 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진동파라고도 그래요. 불 받았다고 덜덜 떠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퀘이커교도라고 불려요. 이 사람들의 특징은 객관적인 계시보다는 하나님과 직통적인 교통,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말씀, 그 다음에 번쩍하고 비치는 내적인 광명, 그런 것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능가하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런 광명을 많이 경험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이 사람의 신앙배경이 그런 양쪽의 물을 함께 먹게 되요. 그래서 이 사람의 책을 읽어보면 어떤 때는 우리와 거의 똑같아요. 그리고 굉장히 은혜로워요. 그런데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런 신비주의적인 것을 한쪽으로 함께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러한 배경들을 잘 드러내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아마 Eugene Peterson 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에요. 리젠트 칼리지의 영성신학자입니다. 그분은 목회5경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책들을 꽤 많이 우리나라에 쏟고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집어서 들어서 읽어라.’ 라는 책이 있어요. Take and Read 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그 사람이 필독도서로 꼽는 책들이 있어요. 그 목록을 보면 이 사람의 사상이 이러한 영성을 이야기하지만 이게 종교 개혁가들의 이런 순수한 영성과는 다른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결국 이 사람은 종교 통합적 영성을 지향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그분의 기도에 관한 교훈이나 많은 것들을 보면 우리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영지주의의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그래서 요가, 명상, 선, 침묵, 가톨릭의 선교사 이그나티오스 로열라, 동방종교,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크리소스톰 소사이어티라고하는 뉴에이지 운동가인데 이런 마델라인 렝그리, 카렌 마인 이런 사람들과 친분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공동사역의 전선들을 펼치고 있어요. 그런 것을 보면 그들이 누구와 교제를 하는가 보면 대충 알게 되고 그런 계보들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제 이 리처드 포스터가 참 애매한 사람인데 여기서 이분을 거론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분이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과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리처드 포스터는 자기의 책속에서 John Wimber, 지금은 한물간 운동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상당한 영향력을 그 후계자들에 의해서 끼치고 있어요. 알파코스 같은 것도 이런 존 윔버의 영향을 받은 신사도운동의 분파들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빈야드 운동이 한참 퍼졌는데 그런 빈야드 운동의 모태가 되었던 존 윔버 같은 사람이 쓴 능력시리즈인 능력치유, 능력전도, 등등 나오잖아요? 그런 능력시리즈에 대해서 아주 말하자면 극찬을 합니다. 이렇게 하고 또 존 윔버는 리처드 포스터의 레노바레운동을 지지하게 되요. 그래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리처드 포스터가 존 윔버를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신사도운동과 관련이 되요.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리처드 포스터는 존 윔버를 하나님의 성소에서 나온 사람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소인 Divine Center라는 것은 동방신비주의의 용어로써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는 신적 보편의식을 가리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완전함으로 인도하는 길을 제시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윔버 자신의 견해들을 받아들이면서 레노바레운동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 레노바레는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새롭게 하느냐하면 교회를 새롭게 하는 운동이에요. 그것을 위해서 개인의 영성을 새롭게 하는 운동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기도, 거룩함, 성령, 정의, 성경읽기, 생활실천 등등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리처드 포스터 외에 댈러스 윌라드 이런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한국에도 LA에 있는 큰 교회를 목회하던 목회자들, 한국에 이름을 내놓으면 잘 아는 유명한 분들이 이 레노바레 운동에 지지자들이 되어요. 그런데 이것도 재미있는 것이 나는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왜 이런 운동에 들어갔을까 생각하고 어떤 때는 좀 의아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게 또 이런 측면도 있어요. 그분들이 몇 가지의 유형인데 우선 첫째는 그것을 깊이 알고 자기가 그것을 신학적으로 전적으로 동의해서 그 주창자의 일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다들 큰 교회를 목회하느라고 바쁘니까 미국에 갔다가 어느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너무 신선하다고 생각하면 한국지부를 만드는 것이죠. 그러면 모금하려면 유명한 사람을 머리에 세워야지만 돈이 걷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의 이름을 빌려요. 또 한국교회 목사들은 감투 쓰기를 과히 나빠하지 않으니까 좌장으로 턱턱 앉는 것이에요.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그 운동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 놀라울 정도로 몰라요. 그리고 세 번째 경우가 나도 그런 경우를 당했는데 우리 이런, 이런 단체가 있는데 우리 단체의 이사장으로 와주십시오. 나는 당연히 안 간다고 그러지요. 이사를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니까 나는 완곡하게 거절하지요. ‘나는 목회가 너무 바빠서 그런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절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아무아무개 단체 이사 열린 교회 김남준’ 이렇게 나는 것이에요. 신문에 가끔 볼 때에 내가 동의해주지 않는 단체에 나요. 그런데 아는 사람들인데 그것을 빼라고 얘기하는데 안 빼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고소할 수는 없잖아요. 이단이라면 고소도 불사하겠지만 그래도 복음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는데……. 그런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더라고요. 분명히 서면으로까지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신문에 딱 내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고 그러면 만나서 씩 웃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소용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름이 거론되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거론된다고 해서 ‘저 목사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다 이단으로 뭉쳐진 사람이구나!’ 또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측면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어쨌든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죠. 그래서 한국에 그런 레노바레 운동이 일어나요. 기독교신문을 보면 ‘레노바레’ 그러면서 사람들의 얼굴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그런 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이 레노바레운동은 결국 어디서 오느냐하면 이게 가톨릭을 모방해서 생겨난 것이에요. 뭐냐 하면 레노바레 운동의 기본적인 구도가 내면으로의 여행이에요. 어쨌든 여러분들은 ‘내면으로의 어쩌고저쩌고…….’ 하고 붙은 것들은 다 가지 말아요. 그것은 98%가 잘못된 가능성이 아주 많아요. ‘당신의 내면의 어쩌고저쩌고,’ 내면에 통곡하고 있는 내가 있다고 하고 아니면 내 내면에 있는 내가 어떻다는 둥, 이런 책들은 거의 신비주의 계통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가톨릭의 관상기도, 관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면서 기도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 관상기도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 관상기도 가운데 Lectio Divina 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렉티오라는 것은 라틴어로 ‘있다’ 그런 뜻이고 디비나는 ‘거룩하다’는 뜻이에요. 그게 천주교에서 오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잘 들어봐요. 이게 참 헷갈려요. 이게 성경을 묵상하는 훈련이에요. 어떻게 하느냐하면 4단계로 나뉘어요. 첫 번째는 렉티오 단계에요. 성경이 펼쳐져 있으면 성경을 읽는 것이에요. Text를 읽고 그 다음에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메디타티오로 들어가요. 이것은 묵상이에요. 우리가 하는 것과 비슷하잖아요. 쭉 묵상에 들어가요. 성경이 주는 개인적인 의미나 도덕적인 의미를 쭉 생각하면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바로 묵상의 단계에요. 그 다음에는 오라치오 기도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요. 기도는 거기에서 깨달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 달라요? 그렇게 안 해서 걱정이지……. 그런데 진수는 네 번째에요. 관상의 단계에요. 관상의 단계는 뭐냐 하면 렉티오하고 메디타티오, 오라치오 즉 읽기, 묵상,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끝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여기에서 관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관상 속에서 뭐냐 하면 첫 번째 읽기 단계에서는 지적인 것들이 활동하고 두 번째 묵상의 단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정서 속으로 들어가요. 그래서 제가 묵상은 뭐라고 그랬어요? 머리의 지식을 가슴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무엇과 같다고 그랬어요? 네, 깔때기와 같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것들이 말하자면 정동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정확한 인식이 있고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오라치오는 여기서 일어난 정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거기에서 끝내고 열심히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것의 진수가 말하자면 관상의 단계 즉 콘텐플라치오 라고 그래요. 그 관상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요. 그 관상의 단계는 뭐냐 하면 이제 이런 지적인 렉티오, 그 다음에 정서적인 메디타티오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오라치오를 넘어서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하나님과의 합일 속으로 들어가는 말하자면 정신의 집중이에요. 그래서 지적인 것, 그리고 정신적인 것, 정서적인 것, 기도 이런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그래서 그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그 하나님과의 합일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이 내가 되는 혼연일체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은 말하자면 어떤 밀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관상기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제동을 거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식의 일치를 도모하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잘 들으세요. 성경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우리에게 가르쳐요. 그런데 그 일치의 양식이 어제 밤에 설교한 것처럼 이제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주님을 위해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져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들의 삶속에서 현재화 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2000년 전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우리 속에 스며들어오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옛 자아가 깨어지고 그 다음에 죄 된 성품이 정결해지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묵상과 하나님을 향한 관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중재를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모든 얽어매는 그런 표현을 많이 보았지요? ‘당신을 묶고 있는 많은 무거운 것들, 근심과 염려, 정욕과 모든 것들을 다 버리십시오. 당신의 영혼이 떠오르면서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런 신비주의의 표현들이 깔고 있는 사상이 플라톤 때부터 있었던 영혼상승사상이에요. 그래서 영혼은 신의 일부로서 이 세상에 왔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물질의 갇혀서 무게가 있기 때문에 이 속에 각자 따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 무거운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나면 상승해서 그래서 결국은 일자이신 하나님 속으로 귀환해서 일자도 내가 되고 나도 일자가 되는 합일로 들어간다는 사상이에요. 그런 식의 관상을 강조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헷갈리는 것은 묵상하고 무슨 차이냐고 생각되잖아요? 우리가 고전적으로 이 개혁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이 묵상은 상상력, 지성, 이성의 판단 이런 등등으로 묵상하는 주체가 인간이에요. 그런데 관상은 묵상하고 있는 자기 자체까지도 망각하는 것이 관상의 목표에요. 그것이 불교의 참선과 아주 유사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구도에서 보면 불교나 다른 많은 종교들 속에서 함께 끌어들여서 함께 공통적으로 연합을 시킬만한 요소들이 굉장히 많이 발견되는 것이죠. 그것이지요. 이제 차이를 발견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인간이 이렇게 있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의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단순히 그냥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떠나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중심에는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철저한 자아중심적인 성향을 가진 자아가 있다고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진실한 참회와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 깨뜨려지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질서의 자리로 돌아가서 나는 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각별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성령 안에서 교통함으로 사랑을 받는 그것이 바로 정통적인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그러한 진정한 의미의 묵상이고 하나님과의 합일이에요. 그게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에요. 나는 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에요. 이 둘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그러한 심리적인 작용을 도입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왜 그렇게 열렬하게 환영을 받느냐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이 지금은 외부로부터 모든 것들이 단절되어서 자기 자신이 고독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너는 너고 하나님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분과 영적인 교통을 나눌 수 있고 네가 이러이러한 삶을 살면 이 교통이 자꾸 방해받고 끊어지고 기도가 막히고 그리고 너는 하나님 앞에 싫어버린바 되고……. 이런 등등의 것들이 너무 싫은 것이죠. 자기 자신을 누군가가 와서 완성해주고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어서 자기를 극대화시켜주는 것은 자기 자신의 확장이기 때문에 용인할 수 있지만 내 자아를 여기에 있는 것이 틀렸기 때문에 이리 내려다 놔야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틈새를 깨고 이런 관상기도 같은 것들이 강조될 때에 그 때에 사람들에게 놀라운 흡인력을 보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실제적인 내면이 평화로워지는 경험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지요. 이런 데에 와서 한 3일만 만나는 사람이 없이 밖에 나가지 말고 기도원 밥을 먹으면서 말을 안 하고 그저 경건한 찬송가나 들으면서 성경을 안 읽어도, 아니 찬송가도 듣지 말고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안 읽어도 조용히 앉아서 그냥 ‘아 참 좋다!’ 이러고만 3일을 있어도 평화가 와요. 만날 와서 사업 때문에 싸우고 지지고 볶는 것보다 좋지요. 미운사람도 없어진다고요. 그리고 피부도 고와지고요.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얼굴의 근육도 풀어지고요. 그래서 절 같은 산사에서 사는 스님들을 만나면 얼굴이 아주 곱잖아요. 고기도 안 먹을 텐데……. 기독교에서 은혜 떨어진 사람보다도 더 얼굴이 고와요. 욕심 없이 살면 정말 곱고 예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실제로 자기에게 느껴지는데 자기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니까 그런 것들이 좋다고 그러는 것이에요.
3. Emerging Church 와 Peter Drucker
⑴ Emerging Church
그런데 이러한 이머징교회의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머징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Emerging 즉 ‘떠오른다.’ 혹은 Emergent Church 에요. 그런데 이게 결국 Postmodernism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운동이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의 이름은 들어도 모르는 사람들이고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브라이언 맥글라렌, 더긋 페지, 덴 킨버, 토니 존스, 마크 드리스콜, 그중에 덴 킨버, 마크 드리스콜의 책은 보셨을 거예요. 이런 다섯 명이 표면화시킨 것이 이머징처치에요. 그래서 특히 마크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은 사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개혁주의의 리더인 존 파이퍼 목사님, 카슨, 이런 사람들과도 상당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고 브라이언 맥글라렌은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문을 보면 한국의 강사로 자주 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 이외에 리처드 포스터, 댈러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레리 클렉, 특히 요새 국민일보에 멋있게 수염 기른 사람이 계속 나와요. 레너드 스위트이에요. 두루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이 운동을 지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이머징교회는 아주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비한 교회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은 예전의 마케팅교회와 심리주의 치유를 표방하는 교회의 혼합이라고 보면 되요. 마케팅교회의 접근방법은 편리성이었거든요. 어떻게 하면 고객이 원하는 위치에,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고객이 원하는 가격에, 고객이 원하는 때에, 적시적소에 공급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그런 것들을 겨냥했다면 그래서 사실은 상당히 많이 성장하게 되지요. 그런데 지금은 이제 이미 벌써 점점 그런 운동들이 식어가고 있거든요. 그 때에 이 이머징처치는 이런 것이에요. 교회를 경영함에 있어서 다양한 need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networking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단순한 편리성에 입각한 편리성과 효율성을 표방하는 경직화된 마케팅교회가 아니라 그런 다양한 교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자원들을 networking화하는 경영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케팅이 경영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구조의 경영학 지향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끊임없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고독에 빠지는 심리적으로 외로운 인간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것이죠. 얘기하면 굉장히 긴 이야기인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에요. 예배를 드리는데 전통적으로는 어떻게 하죠? 전통적인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때에 사람들은 아주 단순한 예배당에서(청교도들이 그랬거든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없어야 되요. 가끔 보면 청교도들이 설교했던 예배당이 굉장히 화려하고 복잡한데 그곳은 청교도들이 지은 예배당이 아니라 기존이 있었던 가톨릭의 예배당이나 성공회 예배당이에요. 그게 아니라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들의 예배당은 아주 단순해요. 치장이 없어요. 단순하게 하고 어떤 교묘한 구도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서 사람들의 시각이 분산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 그런 단순한 예배당을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지성적인 운동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지성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사상이 전달되고 그것들을 통해서 사상의 체계가 세워지고 이해되는 것,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자기 자신이 변화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사람들이 순종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하는 것을 기준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기준이 되었었는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끌지 못할 때 마케팅교회는 소비자가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소비자가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 팔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면 상품을 소비자에 맞게끔 바꾸어야 되요. 그래서 들어온 게 뭐냐 하면 Entertainment요소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고전적으로 이런 예배 속에서 전통적으로 엄격하게 지성이 깨어있으면서 설교를 통해 이해라고 하는 예배를 드리는 이런 것들을 지양해버리고 그렇게 지성을 집중하지 않아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다량의 악기들이 들어오고 드라마나 화려한 영상, 음향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들어오게 된 것을 이머징교회는 개선을 하는 것이에요. 거기에 무엇을 추가하느냐하면 자기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다수의 수많은 사람이 모인 이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미국을 기준으로 볼 때는 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랑이 아니에요. 저는 잘 모르는 세계지만 저도 얘기를 들었는데 프랑스나 이태리가 명품을 생산하잖아요? 그렇죠?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있어요. 스위스도 명품이 많이 나오잖아요? 이제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데 어쨌든 그런 명품들이 굉장히 많이 퍼졌어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명품들을 사려고 하잖아요. 하다가 안 되면 짝퉁이라도……. 짝퉁도 A, B, C, 등급이 있대요. A등급을 들고 있는 사람은 C등급을 들고 있는 사람을 무시한다고 해요. 어쨌든 그런 명품들을 만드는데 진짜 프랑스에서 intelligentsia들 그리고 이태리에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 명품을 안 쓴답니다. 왜냐하면 명품은 너무 대중적인 것이에요. 너나 내나 다 가지고 있으니까, 개나 소나 다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는 싫은 거죠.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장인에게 가방 하나를 사더라도 예를 들면 좋은 가방이 무엇이죠? 페라가모가 있다고 치죠. 가방 하나에 육백만원이에요. 그런데 페라가모를 만드는 장인에게 가서 내 것만 따로 만들어 달라고 하고 삼천만원에 주문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만들어주는데 그것은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에요. 똑같은 형태의 가방은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고 가져오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에요. 옛날에 마케팅교회는 명품을 가짐으로써 즉 비싼 것을 가짐으로써 나도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교회의 모델이었다면 이머징처치는 그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들이 안다니는 교회에 다닌다.’ ‘거기가 어딘데?’ ‘싫어. 안 가르쳐줘.’ 그렇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머징처치에서는 막 전도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다가 빨리 교회를 짓고 우리가 오백 명 모였으니까 빨리 오천 명을 모으자 그런 캐치프레이즈는 안 내거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교회하고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그 사람들이 하나의 동아리를 구성하는 것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그런데 여기에서 도입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은 것들이 말하자면 마케팅교회가 추구하는 규모의 대형화, 효율화, 단추 하나를 누르면 수천 명의 좌석이 싹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나는 그런 것들은 돈이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아니라 이제 교회당에 들어왔을 때에 후각, 시각, 청각, 이 모든 감각으로 종교를 호소하는 그것에 접하게끔 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비와 경건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경건은 사실은 그렇게 해서 획득되는 경건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성당에 가면 높은 곳에 들어가 봐요. 막 거룩하게 느껴지잖아요. 그게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요즘같이 난방이 발달해도 난방을 하면 더운 공기는 위에부터 차오거든요. 그 옛날에 아래에서 얼마나 추웠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수십 미터 높이로 하는 이유는 뭐에요? 이유는 하나에요. 인간이 들어왔을 때 자기를 초라해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에요. 딱 들어왔을 때 어마어마한 것을 보면서 자기가 왜소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에요. 초막에 있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가 왜소하게 보여야지 빨간 벽돌 앞에서 자기가 왜소하게 보이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렇게 해서 예배당의 설교단을 계속 높여서 저 위에 있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이에요. 우리는 강대가 딱 하나잖아요. 어느 교회에 갔더니 강대가 네 개더라고요. 4층이에요. 여기는 뭐냐고 그러니까 평신도가 사회를 보는 곳이래요. 그 다음에는 뭐냐고 하니까 목회자가 사회를 보는 곳이래요. 그 위에는 뭐냐고 그러니까 부목사님들이 설교하고 담임목사가 주일 오후에 설교하는 곳이래요. 제일 꼭대기는 뭐냐고 그러니까 담임목사님이 오전 예배 설교하는 곳이래요. 거기는 아무도 못 올라가요. 신성불가침이에요. 제일 높은 꼭대기에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가운은 철철이 다른 가운을 뒤집어쓰고……. 다 속임수에요. 속임수……. 그런 것들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그것을 오관을 다 파고들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줌으로써 자신이 신적인 존재이고 신과 매우 가깝게 있다고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모델케이스를 중세의 수도원, 중세의 신비주의 예배방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얗게 칠해진 수도원과 같은 벽에 그리고 이런 것들은 치워지고 촛불이 켜지고 그리고 그다음에 거기에 무엇까지 키느냐하면 향까지 피우는 것이에요. 천주교에서 보면 이렇게 향을 피우잖아요. 그리고 예배당을 높게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한 삼백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을 예쁘게 만들고 이머징처치에서는 인테리어를 무지하게 강조해요. 우리가 강조하는 것하고는 다른 의미에서 강조를 해요. 그렇게 해놓고 거룩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어떻게 하느냐하면 자 보이죠? 그래서 비주얼한 것이 들어오죠. 악기 같은 것들이 동원되면서 들리죠. 코로는 향내가 나지요. 그렇게 하면서 아주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아까 이야기한 4단계들이 도입되는 것이죠.
⑵ Peter Drucker
그러니까 이게 결국은 이런 운동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느냐하면 이머징처치가 1990년대에 생겨나게 되요. 그런데 이게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머징처치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굉장히 영향을 준 사람이 놀랍게도 경영학의 구로라고 불리는 피터 드러커에요. 그럼 경영학을 한 사람하고 이머징처치하고 무슨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것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초창기에 Postmodernism 사회에서 마케팅 교회나 전통적인 은사중심적인 이런 교회를 가지고는 미래에 후기 근대주의를 사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그리고 이것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이에요. 전환하고 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능의 네트워크가 필요해요. 이때에 피터 드러커라는 사람이 1900년대 초에 태어난 사람이거든요. 지금 돌아가셨어요. 그 사람이 경영학에 있어서 거의 신적인 존재였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 그룹에 조언을 해달라고 그래요. 경영학자인 이 사람이 모임에 와서 경영학 쪽으로 조언을 해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사람 자신이 크리스천이었어요. 이 사람이 리더십 네트워크를 가르쳐주면서 같이 대화를 해보니까 이 사람이 아주 놀라운 현대인들을 읽어내는(경영학을 하는 사람이니까 당연하지 않겠어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이 누구냐 하면 쉐안 키에르 케고르라는 덴마크의 철학자에요.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데 우리들이 역사 속에서 배웠잖아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에요. 이 사람에게 아주 깊이 심취해서 심지어는 번역되지 않은 이 사람의 책을 덴마크어로 읽기 위해서 덴마크어를 독학해요. 그럴 정도로 이 사람에게 깊이 매료됩니다. 이 키에르 케고르라는 사람은 또 어디로 넘어가느냐하면 이 사람은 키에르 케고르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두 사람인데 에크하르트라는 중세후기의 수도사이고 십자가요한이라는 신비주의자에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중세 신비주의자라는 것이에요. 이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피터 드러커에요. 피터 드러커가 이머징처치를 구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요. 이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면서 결국은 이런 것들에 감동을 받게 되요.
그래서 결국은 여기를 추종하고 있는 콜린스, 레이 이런 사람들은 결국은 배경을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은 종교다원주의적인 특성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책을 읽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지두 크리스티 나무르’라는 사람이에요. 인도종교에 심취한 신비주의자에요.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에요. 오히려 힌두교의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 다음에 스와니 산타 난타, 이런 사람들이 말하자면 사상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죠. 자 이렇게 해서 이제 결국은 교회가 아주 급속하게 이머징처치로 돌아가면서 이머징처치는 기본적으로 마케팅교회도 그랬지만 마케팅교회보다도 훨씬 더 종교다원주의적인 강력한 성향을 띄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이런 이머징교회 운동이 한국에도 이미 상륙합니다. 그래서 이미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이머징교회를 하려는 움직임들이 구체화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 교회는 전도지를 수없이 찍어서 가가호호 방문하는 것을 안 해요. 그리고 자신들이 예쁘게 교회를 지어놓고 그 안에서 말하자면 이런 어떤 신비적인 경험들을 즐기고 개인의 내면의 세계를 깊이 성찰하는 것들을 교회가 잘할 수 있도록 계속 도와주는 것이죠.
4. Rick Warren 과 레놀드 스위트
그렇게 되는데 이런 Peter Drucker의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릭 워렌, 빌 하이벌스, 이런 사람들이 전부다 연결되어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벌스같은 사람들은 사실 존경할만한 점들이 많이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초창기에 빌 하이벌스가 교회를 개척한 수기를 읽어보면 참 이렇게 진실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이 들어요. 부인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신학적으로는 굉장히 부주의해요. 그래서 개혁신학이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이 시대에 교회의 참모습을 가꿀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인본주의적인 방식을 과감하게 도입하게 되고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신학적인 입장이 뚜렷하지 않은 교회에서는 다양한 많은 기독교의 분파 운동 같은 것들이 긍정적으로 수납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되니까 그 안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이 생겨나게 되고 사상이 통일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레너드 스위트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사상이 뉴에이지적 성격을 띠고 있는 영성가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새로운 빛들 사상, 그리고 양자론적 영성,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주장들을 펼치느냐하면 이런 것이죠.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스위트가 매튜 폭스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는데 이 사람에게 감동한다는 것은 스위트의 영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매튜 폭스는 성공회의 신부인데 뉴에이지 영성운동을 오래도록 지지해온 사람이다. 그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오심 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영적 동기에 기초한 새 출생의 르네상스를 미리 본다. 이 새 출생은 모든 문화와 종교를 뚫고 들어가 깊은 통합이라고 부르는 세계적인 종교적 각성을 일으키는 가운데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의 주된 공통점이 되는 지혜들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위트의 이런 사상들이 결국은 뉴에이지 운동과 연관되어 있고 뉴에이지운동은 철저하게 동방종교와 서양의 신비주의에 혼합이에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뉴에이지적인 영성운동을 받아들여서 그것들을 혼합을 이룰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은 국민일보에 실리는 이 사람의 글을 보면 어떤 때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사상을 알 수 없어요. ‘항상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빛 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누가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깊이 캐어 들어가면 결국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것이죠. 이제 이러한 사상들을 릭 워렌, 덴 킴버, 등이 지향하고 있는 이머징처치들에서 많이 받아들여요. 그러면서 이 사람들을 통해서 특별히 오래도록 개혁주의 책들을 널리 전파하던 미국의 존 더반이라는 출판사가 있는데 이 출판사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요.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정통신학을 전파하던 출판사에서 이런 사상들을 지지하는 많은 책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혼란을 더 가중시키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되지요.
결국 이런 이머징처치들은 결국은 앞으로도 계속 뻗어나갈 제3의 교회운동이 될 것이라고 보는데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보느냐하면 마케팅교회들이 저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에 자기의 형태를 고수하면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빠른 속도로 변신을 해서 이머징교회화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한곳에 수만 명을 모아놓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 찢어서 나누어주고 그렇게 해서 재빠르게 이 이머징교회가 추구하는 바들을 찾아서 변화된 현대인의 입맛에 맞추어서 마케팅교회로부터 이머징처치로 변신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가능하다고 보죠. 왜냐하면 어차피 어떤 진리에 의해서 고정된 철학을 가지고 만든 교회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수요자들의 욕구가 달라지면 언제든지 변모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자 그렇게 되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쭉 넘어가면 이미 우리들이 이머징처치에서 보는 것은 뭐냐 하면 벌써 이미 많은 통합들이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개신교, 경건주의, 천주교, 성공회, 동방의 신비주의, 중세주의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연합을 이루면서 통합되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렇게 이루어진 교회는 종교 다원주의 일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타종교를 향해서도 상당히 많이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이미 유럽의 신학계의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이에요. 굉장히 많은 내용들이 있는데 그 다음에 제가 신사도운동과 은사주의인 마지막으로 넘어가겠습니다.
5. 신사도 운동과 은사주의
이 신사도운동이라는 것은 피터 와그너라는 사람이에요. 1930년에 태어나서 아직까지 살고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등의 직분이 나오잖아요? 이 직분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직분중의 핵심은 사도와 선지자에요. 그렇게 하고 이것이 신사도 개혁운동의 전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21세기에 하나님이 특별히 섭리하시는 기독교의 현상이 The Second Apostolic Age 제2의 사도시대가 열렸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그전까지 없었던 사도시대가 갑자기 열리느냐? 그것은 뭐냐 하면 21세기에 현상으로써 제2의 사도시대는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써 사도의 은사를 재개하셨다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의 영향이 한국, 중국, 그리고 심지어는 아프리카, 남미까지 광범위하게 번져가요. 누구라고 얘기는 못하겠지만 한국에 있는 어느 목사는 여러 해 전에 비행기를 타고가면서 ‘너 이다음에 뭐가 되고 싶으냐?’ ‘장로가 되고 싶습니다.’ ‘무릎을 꿇어라. 내가 너를 장로로 임명하노니…….’ 그런 발상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교회의 질서 속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보다는 자기 자신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교회의 질서 속에서 세울 일군들을 초질서적으로 초법적으로 세울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이러한 신사도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성은 뭐냐 하면 사도시대가 끝나고 나서 교회는 성경과 교회의 법에 따라서 질서가 이루어지게 되요. 그리고 주님이 그 성경에 기초한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그것이 표준적인 것이라고 우리들이 다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신사도운동과 함께 그런 것들이 의미도 없이 유아기적 시절에 일어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 완전히 중심이 돼서 주님께로부터 전권을 이양 받아서 행사하는 그런 형태의 교회가 말하자면 21세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주시는 축복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런 운동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이 지금 중국이에요. 중국에서는 아예 12명 정도 되는 사람이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제2의 사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성경을 거의 다시 쓸 수 있을 정도의 거의 오류가 없는 그런 영적 권세를 가진 사람들로 지금 등장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이런 사람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자, 이 사람은 인도네시아 선교를 하다가 다년간 플로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수가 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느냐하면 존 윔버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1997년에 죽어요. 빈야드 운동의 기수였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영향을 아주 강력하게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들은 결국 183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 되요. 영국의 에드워드 어빙과 지도자들에 의해서 똑같이 1835년 7월 14일 런던에서 12명이 주님에 의해서 직접 사도로 세워졌다고 선포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사역을 위해서 엄숙하게 안수를 받고 사도로서 행세를 하게 됩니다. 1900년대에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독립교회 운동에서 이런 일들이 있게 되었고 그 다음에 중국의 가정교회에서는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끝나던 1975년부터 이제 이 12사도의 사도적 교회정치시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1980년경에 라틴 아메리카의 풀뿌리 운동에서도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의 이론적인 기초들을 전부다 가지고 피터 와그너가 이런 것들을 지지해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신사도개혁운동의 신학적인 기도는 뭐냐 하면 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런 무거운 짐을 교회에 지어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신학을 함으로써 신학자들이 신학을 너무나 복잡하게 만들어주고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초대교회의 그 생생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의 권위는 주님이 세우신 질서에 의해서 유지되고 실현되는데 그렇게 되던 전통적인 교회의 것들을 다 거부하고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이 이것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12사도들이 항상 모여서 당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돌아다니면서 다른 교회를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은 각자 서로를 사도로 존중하고 그리고 교회의 기초를 다시 놓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교회가 이렇게 오랫동안 억압되어있던 중국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오면 진짜 영웅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추앙들이 사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제껏 까지의 목회자는 피고용인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사실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고용사장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당회는 이사회이고 사장은 고용목사이고 회장은 원로목사님이고 이런 것들이 이제는 잘못된 것이라고 쓸어버리고 그리고 개개인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까 마치 이단들의 공통된 특징처럼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는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개인의 카리스마, 말씀에 입각하지 않은 사람자체를 우상화하는 그런 카리스마가 이단의 특징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교회를 통치하고 지배하게 되지요.
그런데 신사도개혁운동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직통계시사상이에요. 지금도 하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 말씀은 성경을 능가하는 것이에요. 말로는 그렇게 안하지만 사실은 뭐 자기가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지금 오셔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굉장히 자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이 개혁주의에서는 사실 기본적인 입장이 은사 중단론이거든요. 은사 중단론은 뭐냐 하면 사도시대 때에 주어졌던 그 은사들이 지금은 중단되었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사도시대 때에 주어졌던 은사,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이 은사의 연결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의 입장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절대중지론이 있어요.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절대중지론자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강력한 부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은사 절대중지론을 외쳤다는 것은 굉장히 특이하지요? 그런데 절대중지론자에요. 그분은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진 이 땅에도 그 땅에서도 그런 종류의 은사는 재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면 그분이 그렇게 강력한 부흥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 각양 신비적인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도 그것들이 주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최고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은혜라고 보는 것이에요. 이 은혜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하고 신실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은사가 아니라 이런 은혜로 말미암는 사랑이 아주 충만하게 된 상태가 그것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유수한 종교개혁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이 은사중지론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은사계속주의자들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에 있었던 이런 모든 은사들이 지금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은사들이 계속 있으니까 당연히 사도들도 있고 선지자들도 있어야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도로 부르신 것 그 자체가 은사의 일종이거든요. 그리고 사도가 사도 된 것은 그 특별한 은사를 한꺼번에 받은 사람들이 바로 사도된 것이지 학벌이나 예수님 따라다니는 경력을 가지고 사도가 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은사주의와 신사도운동은 떼어놓을 수 없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중립에 서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중립에 서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사도시대의 은사가 있고 오늘날의 은사가 있는 그 중간에 고린도교회에서 보여주었던 12장의 은사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은사계속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고 이단적인 주장이에요. 우리는 이것을 거부해요.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남느냐하면 그러면 은사가 완전히 중지되었느냐? 아니면 남아 있느냐? 의 문제지요. 그중에서도 제일 애매모호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방언의 은사에요. 그러면 이것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중립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개혁주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 되요. 어떻게 정리되느냐 하면 ‘방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그 방언의 은사는 초창기 사도들이 성령 강림했을 때에 받은 그 방언의 은사와는 질적으로, 수준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들의 그 방언이 말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을 하는데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알아듣는 그런 종류의 방언이고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사람들이 말을 하는 방언이 되는 것이에요. 이 방언은 고린도교회에서 은사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그 은사와는 훨씬 다른 것이고 또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의 은사는 사도시대가 아니라 성령감림에 있었던 그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고린도교회하고 같거나 고린도교회만도 못한 그런 종류의 방언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 예로 우리들의 방언을 보면 그것을 언어라고 하려면 이게 상당한 양의 어휘가 동원되어야 하는데 방언을 받은 사람들의 경험을 미루어보면 불과 몇 십 개의 단어들 심지어는 개인에 따라서는 몇 개의 단어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죠. 이것을 의사를 전달하는 어떤 언어로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아주 극단적인 입장에 서있는 사람은 이것을 보편적인 종교현상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아요. 어쨌든 그렇게 하고 그래서 이제 병 고치는 은사 같은 것은 복수로 나와요. 그것이 사도 시대처럼 누군가에게 병을 고치는 권세를 주셔서 그것을 전적으로 상당한 오랜 기간 동안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의 은사가 머물러서 손을 대는 사람마다 사람들을 고쳐주는 그런 종류의 은사는 이미 고린도교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은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줄 때 하나님이 그때그때 은사를 주셔서 어떤 사람은 그 시간에 은사를 주셔서 낫게 해주시고 어떤 사람은 그 은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 낫고 이렇게 되는 다양성을 복수가 보여준다고 보는 것이에요.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는 너무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여러분들이 철저중지론자의 견해를 택해도 개혁주의적인 전통이고 그것보다 약간 양보된 입장을 취해도 개혁주의적이에요. 그러나 단, 두 번째 입장을 취할 때에는 두 가지를 명백하게 해야 돼요. 첫째는 뭐냐 하면 어떤 종류의 은사든 사도 시대처럼 항구적으로 한사람 개인에게 계속 머무르면서 그 일을 어떤 식으로든지 계속 성취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은사는 없다. 그것은 사도 시대로써 끝났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면 그때그때 주어질 수 있겠지요. 또 하나는 방언이든지 통역이든지 무엇이든지 거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계시 전달의 기능이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것 두 가지만 엄격하게 인정하면 그러면 절대중지론에서 약간 후퇴를 해서 은사를 수용해도 그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죠. 지금 여기 신사도개혁운동에서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고 직통으로 나는 그분과 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커다란 일들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새 신사도운동을 따르고 있는 뭐 ‘기도운동’ ‘안녕하세요! 성령님!’ 그런 것을 비롯해서 기도에 관한 것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그런 책들에서는 이렇게 기도하는데 혹은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너는 거기 가라, 가지마라,’ 그 다음에 ‘누구를 만나라, 만나지마라,’ 이런 등등의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것들에 하나님이 끊임없이 정보를 보내시고 지시를 보내시는 그런 장면들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안 가져오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이런 신사도운동의 사고의 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결국 개혁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죠.
개혁주의적인 입장은 어떻게 보느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하나님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신다는 것은 인정해요. 인정은 하는데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신다고 보는 것이죠. 이럴 수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신자든지 불신자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실 수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을 때 대제사장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예수를 죽이지 말자. 명절에는 하지말자.’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러면서도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예수를 죽이는데 그 한사람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는 것이 낫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자기도 자기의 하는 말을 잘 몰랐다.’ 그러면 예를 들면 바로가 요셉을 히브리인 포로를 국무총리로 만든 사건들은 바로의 개인적인 판단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움직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렇지요? 고레스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바벨론의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잖아요. 이런 것들은 결국 하나님이 영향을 미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보려면 특히 신자들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의 사고기능에 매순간 개입해서 인간의 가치판단과는 상관없이 이끌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마치 인간을 이렇게 줄에 달아놓고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만드는 것이에요.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나를 행동하게 하시는 그 시간에도 나는 절대로 부자유함이나 누군가에 의해서 내 사고가 조작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이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종교 개혁가들과 정통파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에요. 다만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선한 일을 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인격을 가진 내가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데 올바르게 반응할 때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나에게 주셔서 나도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렇게 은혜의 영향력으로 내 의지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게끔 이렇게 움직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끔 이끌어 가시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깨뜨리는 것이에요. 깨뜨려서 결국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직통으로 계시를 받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늘 성령 안에서 살기 때문에 시장 볼 때도 늘 성령님께 물어본대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잡채를 만드는데 남편이 그 얘기를 듣고 하도 화가 나니까 장바구니를 확 쏟으면서 ‘너희 하나님은 잡채에 간장 들어가는 것도 모르느냐?’ ‘간장은 왜 안 사왔느냐?’ 그랬대요.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허무한 인간의 사상들을 만들어내요. 그들이 경건하고 열렬히 기도하는 것과는 상관없어요. 올바르지 않은 지식에 기초한 영성은 항상 그런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피터 와그너라는 사람이 얼마나 경솔한 사람이냐 하면 결국은 나중에는 이 사람이 칼빈주의를 완전히 버리고 열린 신학으로 넘어갑니다. 이 열린 신학은 지금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게 과정신학, 과정철학과 관련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로 맡겨놓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엇이 이루어질지 다 아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로 맡겨주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모르신다고 보는 것이죠. 자, 이 강의가 끝나고 밥을 먹게 되겠지요? 그러면 내가 많이 먹을 것이냐? 적게 먹을 것이냐? 그것은 내 마음이잖아요? 고기를 구워준다는데 그것을 내가 먹을 것이냐? 고기를 사양할 것이냐? 그것은 내 마음이잖아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몰라요. 내가 해봐야지만 하나님이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논쟁이 지금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10세기 11세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 유명한 중간지식 즉 middle knowledge 논쟁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인간이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그럴 때 인간이 중간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선택지가 실제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발생할지는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죠. 왜?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모르시기로 작정하셨다고 보는 것이죠. 왜? 그래야지만 인간에게 준 자유가 의미가 있지 하나님이 이미 정하셨다면 그게 어떻게 자유가 있느냐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도 끊임없이 학습을 하셔야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배우심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떤 선을 행하고 할 때에는 굉장히 감동적일 수 있지요. ‘네가 그런 것도 할 줄 아느냐? 네가 구역장을 한다고? 야, 진짜 삼위일체가 놀랄 일이다. 충격이다.’ ‘네가 8년 동안 했으니까 올해도 하겠지? 내 예상대로구나!’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알아 가신다고 보는 것이죠.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열린 신론이에요. 이게 지금 지성인들 사이에 미국과 구라파에서 엄청난 각광을 받고 있어요. 너무너무 재미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내가 이것을 들까요? 말까요?’ ‘모르시죠?’ ‘아이고 그거도 모르고…….’ ‘내가 가르쳐줄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신학이 왜 유행할까요? 인간 자신의 중요성을 높이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하는데 이바지하는 신학이기 때문에 각광을 받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데 이 피터 와그너 신학의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양태론이에요. 양태론은 이미 기독교 초기시대부터 있었던 것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에요. 일신론이죠. 단일신론이라고 그래요. 삼위가 아니라 하나의 위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성자는 성부의 또 다른 양상이고 성령은 성부의 또 다른 양상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렇게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어서 돌아가는……. 삼위일체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나가니까 결국은 이런 신사도개혁운동의 문제는 뭐냐 하면 기독교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냈던 중요한 교리들 삼위일체, 예정, 인간의 자유, 그리스도의 속죄, 완전성, 교회,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주 사소하게 취급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지요? 많은 다른 사상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놀랍게 막 성령을 외칠 때는 선명하게 복음이 외쳐지는 것 같은데 저쪽 뒤에서는 그것들을 지탱해주는 세밀한 신학이 없기 때문에 아예 그 다음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엉뚱하게 종교 간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연합을 이루면서 말하자면 Ecumenicalism으로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종교다원주의를 통해서 가니까 다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결국은 소위 이야기하는 은사운동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강력한 복음 선포를 통해서 주어지는 그러한 성경적인 은사가 아닌 또 다른 양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한국에도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되요. 한국에 있는 어느 목사가 이것들을 지지하는 센터를 세웁니다. 그리고 지금도 거기에서 학생들을 모집해서 이러한 신사도운동을 펼쳐요. 그렇게 하고 소위 이야기하는 impartation 이라고 하잖아요? 내가 기름부음을 받았으면 기름은 무슨 기름을 그렇게 받았는지 모르는데 이것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안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면 나에게 준 이것이 impartation 된다고 보는 것이죠. 전수된다고 보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계보들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에요. 사실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름부음, 세례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들인데 황당해요. 한국교회에서 얼마나 잘못 가르쳤는지 교회를 개척하고 몇 년 되었을 때인데 다른 교회에서 온 안수집사가 하나 있었어요. 교회에 왔는데 지금은 제가 조정을 해서 안수집사가 오면 무임 안수집사로 하는데 우리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된 사람이 아니니까 집사 란에 넣었어요. 결국은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났는데 나에게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자기가 안수집사인데 어떻게 여기 서리집사들과 똑같이 사진을 붙여놓을 수가 있느냐고 해서 그게 뭐 그리 큰 문제가 되느냐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면 안수집사가 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이분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기름부음을 받은 종인데 자기를 어떻게 이렇게 대접할 수 있겠느냐?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얼마나 띄워놨으면 그래요? 그런데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 왜 만날 술만 먹어요? 황당하더라고요.
그런 impartation 운동이 성령을 그런 식으로 전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여기에 이제 영향을 받은 단체들, 세계 추수선교회, 이런 것들이 나오고 최근에 이단으로 정죄된 변승우 목사의 큰믿음교회가 있다고 그래요. 나는 가보지 않았는데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이 사람이 쓴 책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이 사람도 똑같이 오늘날에 사도들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사도들이 누구냐 하면 로렌 커닝햄, 빌 해먼스, 신디 제이콥스, 더치 쉬즈, 마티 듀폰, 체안, 심지어 후안까를로스 오르띠즈(제자입니까? 쓴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오늘날의 평신도 장로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고맙습니다! 성령님’, ‘기도운동’ 이런 것들이 이런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이에요. 그리고 특별히 여기에 데니 힌이라는 사람은 순 엉터리입니다. John Arnott 이 사람은 Toronto Airport교회를 하는 사람이고 제가 이 교회를 직접 갔었는데 황당합니다. John Wimber,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 이런 사람들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오순절운동 중에서 Kenneth Hagin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케네스 해긴의 동영상을 보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동영상)
저게 지금 끝에 보면 막 웃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잖아요. 그것은 짐승소리에요. 그래서 이 패턴이 최근에 나온 것인데 제가 95년도에 캐나다에서 빈야드 운동이 일어났다고 해서 진짜 빈야드운동이라고 그래서 진짜 부흥이라고 그래서(그때는 학교에서 부흥을 가르쳤거든요.) 그 현장을 보리라 생각하고 그것 하나 때문에 일부러 갔어요. 그런데 여러 번 볼 필요도 없고 딱 두 시간을 보면서 이것은 순 가짜구나 진짜 부흥이면 내가 부흥을 경험하고 오려고 갔는데 순 거짓말이에요. 뭐냐 하면 사람들이 저거보다는 훨씬 더 건전했어요. 그런데 웃어요. Holly laughter 라고 그래요. 막 웃어요. 그런데 여러분 웃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요. 복근이 막 당긴다고요. 사람들이 눈물이 나와요. 그런데 그 눈물이 난 참회의 눈물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너무 힘들어서 나오는 것이에요. 우리도 너무 웃으면 제발 웃기지 말라고 애원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1, 2분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 시간씩 계속 되요. 막 계속 되요. 그러다가 나오라고 그래요. 그러면 막 웃으면서 나와요. 그리고는 하나씩 둘씩 쓰러지는 것이에요. 쓰러져서도 계속 웃어요. 어떤 사람이 눈물이 나요. 그것은 뭐냐 하면 참회의 눈물이 아니에요. 그러다가 사람이 모두 일시에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깨어나요. 깨어난 다음에는 뭐 같으냐하면 개가 낮잠을 자다가 딱 깨어났을 때 멍한 것 있잖아요. 그래요. 아무의식도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게 회개가 없어요. 그래서 John Arnott 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드를 연구해요. 뭐냐 하면 자기네의 이 부흥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과 놀라운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질문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참된 회개가 있었잖느냐? 고것만 좀 문제가 된다고 그래요. 그것만 이상하게 자기네한테 없다는 것이에요. 사실은 다 가짜에요. 그러고 나서 조금 있다가는 소위 Holly laughter라고 그러거든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하면 짐승 울음소리로 변하는 것이에요. 은혜를 받았다고 그러면서 주저앉아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호랑이소리, 돼지소리, 개소리, 말소리, 등을 사람마다 각자 내면서 온 집회장을 기어 다니는 것이에요. 그런데 20분 동안 하는 그것을 참여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사람들이 와요. 일본에서 오신 분, 와, 남아프리카에서 오신 분, 와, 스위스에서 오신 분, 와, 수없이 그렇게 몰려다니는 것이에요. 한동안 항공사가 특수를 만났어요. 매일 비행기가 꽉 차서 오니까요. 그때 한국에서 오신 분 할 때 나는 안 일어났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다 형제라고 그러면서 박수를 쳐주어요.
여기에서 케네스 헤긴은 또 다른 새로운 것이 나와요. Drunkenness 에요. 술 취하는 것으로 나와요. 그래서 이 집회를 하면 남자들이 이렇게 웃다가 술 취한 상태가 되는 것이에요. 비틀거리니까 부축을 해주어야되요. 그러다가 벌렁 나자빠지는데 남자는 나자빠져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여자들은 좀 문제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치마를 덮어주는 사람들이 안내위원처럼 따라다녀요. 그래서 벌렁 자빠져서 볼썽사나우면 이불 같은 것으로 덮어준다는 말이에요. 넘어진데 또 넘어지기도 하고 술 취한 남자들은 넘어진 여자들 위에 잘 넘어진대요. 그런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단체를 결성하고 한국지부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쪽에서 나오는 책들은 저런 실상을 다 안 알려줘요. 그러니까 ‘말씀이 중요한 거래!’ ‘잘 믿어야 된대!’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어요? 나도 그 책을 보는데 아주 예리하게 보아야지만 문제점이 파악이 되지 그저 평범한 평신도들은 교리를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도 읽으면 모르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 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읽지 말라는 것이에요. 큰일 난다는 것이에요. 아무거나 먹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에요. 케네스 헤긴은 교리도 있는데 얘기 안할게요. 이것은 더 해봐야 시간낭비에요. 시간이 없지요? 더 해야 하는데……. 그러면 조금만 하고 마무리 할게요.
6. 알파코스
여러분 알파코스라는 것을 들어보셨지요? 결론만 이야기할게요. 알파코스도 결국은 뭐냐 하면 신사도운동의 갈래에요. 그것을 성경공부화 시켜서 만든 것이에요. 그것도 한국에 들어온 것들은 각국에 갈 때마다 토착화작업을 거쳐요. 그래서 알파코스를 먼저 제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들으면서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다 조정을 해요. 그래서 입맛에 맞게 포장을 하는데 결국 그 밑에 깔린 것은 이런 신사도운동, 성령운동 이런 것들이 제시 되요. 알파코스의 모델이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것인데 뜨레스띠아스라고 들어보았지요? 뜨레스띠아스라는 것은 뭐냐 하면 스페인어로 ‘3일’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3일간 영성수련회를 갖는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에요. 이 운동이 결국은 천주교에서 일어난 영성운동이에요. 그래서 2차 대전이 있은 후에 전후 부상자, 고아, 과부, 이런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많은 상처들을 입잖아요. 이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사람들을 모아서 3일 동안 영성수련회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뜨레스띠아스가 되는 것이에요. 이게 1949년에 처음 하다가 스페인에 마조르까하르바 라는 곳에 있는 성 야고보의 무덤에서 순례객과 안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3일 동안 합숙하면서 이런 뜨레스띠아스 운동 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많이 치유되는 것을 보면서 1966년에 교황 바오로 4세가 격찬을 하고 천주교에 범세계적 운동으로 지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1967년 5월에 필리핀에 있는 가톨릭 신부가 한국에 와서 이 뜨레스띠아스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런 뜨레스띠아스 운동이 우리나라에 두 개의 계열이 있는데 특히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이 뜨레스띠아스 수련회에 가는 것이 교회의 아주 중요한 훈련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런 데에 성도들을 보낸 교회 중에는 버젓이 합동 측에 속한 교회들은 물론이고 내노라 하면 이름이 있는 많은 교회들이 보내준 것이죠. 그래서 뷔페식으로 교회의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진지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목회자들에게 없어요. 그러면 건전한 신학을 한 사람들의 자문을 받아서라도 판단을 하면 되는데 그런 것들을 판단하면 이것저것을 다 떼어내면 할 것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교회 성장의 일환으로써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죠. 같다오면 굉장히 마음이 맑아졌느니……. 시어머니를 지겹게 미워했는데 이젠 많이 완화되었다느니…….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뜨레스띠아스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뜨레스띠아스의 뿌리가 무엇이냐고 할 때 L. A남가주 신문에 저자 김상석씨의 ‘악령들의 불꽃놀이’ 라는 책이 나왔어요. 여기에서 이 사람은 주장하기를 뜨레스띠아스 운동의 그 뿌리가 남미에서 한때 유행하던 섹스교의 의식을 따와서 기독교화 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가 됩니다. 거기에 보면 사랑의 인사법이 있대요. 나도 경험은 못해봤는데 사랑의 인사법이 무엇이냐 하면 육체로 끌어안는 3단계의 인사법이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나도 실습을 안 해봐서 모르겠어요. 그렇게 한대요. 이런 방식들로 이루어져요. 우리들이 지금 신문지상에서 볼 수 있는 알파코스 같은 것들은 상당히 많은 조정을 거친 것이기는 해요. 그러나 그래도 그 바탕에는 이러한 사상들이 깔려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외에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대개 이정도면 알파코스까지 거의 했어요.
7. 기타 은사주의 운동
그리고 기타 은사주의 운동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사람이 있는데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도 복음적인 교회에서 많이 받아들여서 한때 하고 했는데 사실 뿌리로 내려가면 은사주의 형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 우리가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꼭 보고 넘어가야할 사람이 베니 힌이라는 엉터리에요. 이 Benny Hinn의 영상을 보겠습니다.
(동영상)
케네스 헤긴과 다른 장면은 우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진실한 회개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모든 종교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집단적인 최면의 효과들이 충분히 동원되고 있는 것이에요. 아까 나오는 웃음 같은 것, 그리고 요새는 웃음치료 한다고 굉장히 거액의 돈을 내고 웃는 것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할 일 되게 없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죠.
Ⅲ. 결론
이 모든 것들을 다 싸잡아서 한마디로 요약을 하고 끝내겠습니다. 결국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왕의 기도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명령하는 투의 기도들을 가르치잖아요. 사실 그런 것들도 이런 신비주의와 신사도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기도는 능력이 없고 믿음이 없는 기도고 그러면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병아 나아라.’ 그러면 되고 교회가 부흥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없는 것이죠. ‘교회야 부흥할지어다.’ 교인들이 잘살아서 헌금하게 해주십시오. ‘못살아도 돈이 있을지어다.’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명령하지요. 그런 기도들이 마치 믿음이 있는 기도인 것처럼 그렇게 강조하고 극단화시켜서 거기에서 무슨 실제적인 체험들을 강조하는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경건을 멀리 떠난 것들이라고 보는 것이죠. 끊임없는 진리의 빛 아래서 성령의 은혜아래서 자기가 깨뜨려져서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존재,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연약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는 그런 존재, 이 구도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지고 걸어가는 이것들을 허물어뜨리는 운동이에요. 이 모든 것들이 그런 운동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가장 불만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것, 성경을 통해야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것, 거대하고 복잡한 교리의 체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 진리들이 조직되어야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싫은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이것을 밀쳐내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안에서 생명력을 누려보고자 할 때 결국 마지막에 나타나는 현상이 이런 변종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런 때에 우리들은 시대를 바르게 알고 이런 모든 것들은 거품과 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단적인 사조들이에요. 여기에 현혹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경건의 신비 속으로 또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체계적인 교리를 배우고 그 교리의 빛 아래서 철저한 삶을 살아가는 이러한 정돈된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이 된다면 이러한 사상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