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8주차
녹취자: 김명진
역사적으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나, 이것의 이치를 설명하는 세 가지의 모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모델이 승리자 그리스도의 모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 들어본 내용입니다. 들으면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저도 설교시간에 그런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이 인간이 타락함으로 죄에 물들게 되었고 그것은 곧 사단을 머리로 하는 죄인들의 반란이었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분인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고 평정하기 위해서 오신 사령관입니다. 그분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더럽힌 악들을 멸하고 그 궁극적인 원인인 사단을 파멸 시켜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데 그런 구원전개의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승리자 그리스도의 모델, 이것으로 구원을 설명합니다.
또 다른 모델은 속상 모델입니다. 속상이라는 것은 대신 속해주고 보상을 해준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의 친구가 있는데 친구가 고통을 받습니다. 여러 해 전에 교리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자매가 있는데 남편이 학교 선생님이고 자매는 집에서 살림을 했습니다. 못사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선생님이 엄청난 부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편이 “여보, 30만원만 줘.”, “뭐하는데 30만원이나 필요해”, “내 친구가 이번에 이혼을 하는데 위자료를 줘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친구들이 30만원씩 걷어서 보태주기로 했어.” 그 자매가 “그렇게 안 된 일이 있나. 얼른 보태줘야지?”라고 했겠습니까? 같은 여자 입장에서 여자를 버리고 이혼 한다고 하는 것도 보기 싫은데, 여자들이 300원 콩나물 값을 아끼려고 가게를 바꾸고 단골을 바꾸는데 30만원을 달라는데 그것도 또. 그래서 아내가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왜 그런 친구를 사귀어서 할 일 되게 없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교리반 숙제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속상을 해주시고, 그런데 자매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하셨구나. 그러면서 구원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가 하며 은혜를 받고 남편에게 30만원을 줬습니다. 잘 했다고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속상입니다. 속상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팔린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속전으로 주고 사단에게 팔린 것을 다시 사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나옵니다. 이 설명이 바로 속상 모델입니다. 어려운 점이 좀 있습니다. 과연 사단이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대가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하나님과의 동등한 거래 선상에 있는 존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속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도 속전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노예 시장에서 나오는 그림을 가지고, 이런 설명이 성경 속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속상 모델입니다.
세 번째는 감화 모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게 하시니까 죄인이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모델입니다. 그 이후에도 치유 모델 같은 것이 있는데 대표적인 이론은 세 모델입니다. 승리자 모델은 구원에 있어서 중심축이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속상이론은 사탄을 주목하고, 도덕적 감화 모델은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돌아가는 인간을 주목합니다. 승리자 모델은 하나님, 속상모델은 사탄, 감화모델은 인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교회의 교부들이나 초대교회의 위대한 기독교 신앙의 스승들을 가리켜서 교부라고 부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을 교부라고 부르고, 아우구스티누스가 5세기 경 사람인데 거기에서 끝나고 초대 교회의 위대한 스승을 교부라고 불렀고, 아무나 교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학문이 깊고 경건이 깊어서 목회와 신학에 모두 능해서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준 사람을 교부라고 부르고, 어거스틴시대 까지를 초대교회 시대이고 어거스틴 이후의 중세교회 시대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은 중세의 신학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가 13세기까지이고, 그 다음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종교개혁 시대로 넘어갑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역할은 초대교회에는 교부들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사도들이 있고, 그 다음에 속사도, 사도들의 직제자, 이런 사람을 속사도교부들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초대교회 교부들, 중세교회 신학자들, 그 다음에 종교개혁자들, 그것이 16세기이고 다음 17세기에 들어와서는 개혁파정토주의 신학자들, 18세기 근대에 들어와서는 칼빈주의자들, 개혁주의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교회의 신학적인...이런 교회의 교부들이 아직 기독교의 교리들이 세밀하게 발전되지 않고 발전기에 있었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구원의 논리를 설명할 때 어느 한 모델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모델을 섞어서 설명하면서 구원의 어떤 측면들을 각각 강조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죄가 너무 컸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런 은총적 사실을 강조할 때는 세 가지 모델 중 어느 것에 가깝겠습니까? 두 번째 속상모델이 적합합니다. 그에 비해서 사단은 인간을 타락하게 했으나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가장 위대한 영적인 권세를 갖고 와서 반란이 일어난 이 세상을 토벌하고 하나님의 원래의 뜻으로 이 세계를 돌이키셨다. 일방성 같은 것을 강조하려면, 능력이나 주권을 강조하려면 무엇을 강조해야 합니까? 1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지만 구원에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의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야기 할 때는 항상 감동을 받은 인간, 십자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의 죄를 참회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설명하려면 첫 번째나 두 번째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 번째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 책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도 이 세 가지 의미를 다 사용해서 구원의 의미를 풍성하게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고, 여러분도 구원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할 때 이 세 가지 측면을 다 생각을 하면서 구원의 개념을 설명하고 적용할 때 구원의 의미가 풍성하게 다가옵니다. 재미있습니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것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신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공부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는 신학자체가 아니라 신학하는 활동의 일부입니다. 알아도 살지 않을 수 있지만 모르면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공부는 삶 자체가 신학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죽는 날까지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아침에 퇴계 이황의 글을 읽다가 왔는데 퇴계 이황이 맹자의 말을 인용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리의 맛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씹는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맛있는 맛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너무 먹어서 걱정이지만 그 당시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음식이었습니다. 우리 집이 어렸을 때는 못 살지는 않았는데 제가 돈이 많이 필요할 때는 저희 아버지께서 쫄딱 망해서 헤매고 불우한 시절을 겪었지만 시골에서 가끔 가보면 시골에 친척집에 가보면 “내가 오늘 저녁에 닭국 끓여줄게.” 시골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을 때면서 무를 넣고 된장국처럼 끓이고 닭도 딱 한 마리밖에 넣지 않습니다. 그래서 닭이 익으면 꺼내서 아녀자들이 앉아서 그것을 이쑤시개처럼 찢는 것입니다. 웃기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정을 이야기 합니다. 이쑤시개처럼 찢어서 멀건 국물을 떠서 그것을 뿌려서 맛있다고 닭국이라고 먹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소고기, 돼지고기를 씹으면서 육즙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었겠습니다. 그것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을 알지, 진리의 맛은 그것보다는 더 대단하다.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참석해도 마치 젖이 나오지 않는 공갈 젖꼭지를 빠는 것입니다. 입술만 부르트지 아무것도 입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백번을 물어도 공기나 들어오지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갖 태어나서 엄마젖을 먹을 때 하루에 20g씩 늘어납니다. 100일만 지나면 2kg이 늘어납니다. 아이들이 점점 쭉쭉 큽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먹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는 놀지 말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똑 같은 사람이 되니까 놀아주고, 나는 싫지만 저 사람이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을 만나야 유익을 얻으니까 놀아주십시오. 그리고 항상 자극을 주면서 공부하고 계속하면서 말씀을 계속 들으십시오.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얼마나 좋습니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듣고 보면서, 이러면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항상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사랑이 항상 공존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퇴계 이황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깨달음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어두워지기 쉽고, 실천이 있으나 깨달음이 없으면 위태로우니라.” 그래서 계속해서 배우고, 배운 것을 그대로 삶에 적용하려고 하면서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은 그것이 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영혼에 싫증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육체의 게으름이 들어오면 신앙생활 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면 불순종하게 되는데, 그러면 신앙생활 하는데 한쪽이 무너지고 결국은 자기를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설이 길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속죄의 원인은 마치 그것이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동정에 있는 것 같이 자주 묘사되는 때가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면 죄인의 멸망에 골똘하신 분이시지만, 사랑의 그리스도께서는 그 중간에 서시어 죄인을 구원하신다고 말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영광을 받으나 성부께서는 그의 명예를 훼손당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속죄가 그 원인을 하나님의 참된 기쁨 속에서 찾는다고 가르쳐 준다. 따라서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사랑은 죄인들에게 피할 길을 제공해 주었고, 공의는 율법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어떤 학자들은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은 어떤 만족을 얻음이 없이도(만족이라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께 손해를 끼쳤는데 그것에 대한 어떤 보상이 없이도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할 수 없으시므로 이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신다고 가르친다.
속죄의 성질, 1. 속죄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었다. 이것 세 가지 굉장히 중요합니다. 속죄의 만족, 속죄의 대리적, 속죄의 능동과 피동, 여러분 혹시 구내 서점에 가면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오디오북이 있습니다. 거기에 MP3와 책이 같이 들어있습니다. 도서관에도 있을 것입니다. 사기 싫으면 빌려 봐도 되니까, 5000원 밖에 안 되니까 하나 사든지 하십시오. 사면 예쁜 오디오 북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집중적으로 쓴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속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다 듣고 읽으면 속죄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리가 될 것이고 구원의 감격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한번 들어보시고 사기 싫으면 서점에서 빌려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셋이서 1500원씩 모아서 사서, 불법이긴 하지만 복사해서 나누어 가지면 될 것입니다.
속죄는 주로 죄인을 감화하여 그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키므로 죄인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공헌했다고 흔히 말한다. 이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돌아간 사람의 공로가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그렇게 설명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구원의 은총의 측면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범죄자에게가 아니라 해를 당한 편이 보상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속죄의 제1차적 목적이 죄인을 하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을 향하여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인간을 받아주시도록 화해시키는 것이고,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가는 결과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속죄는 대리적 속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개인적 속죄를 요구하셨지만, 죄인들은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죄의 크기가 무한히 큽니다. 그 이야기는 황제의 의자에 앉는 것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죄의 크기가 무한히 크면 희생도 무한히 커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 때문에 죽는 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어서 죽는 것뿐이지 자기가 지은 죄의 크기에 비해서 자기가 형벌을 받는 죄의 처벌은 너무 작아서 탕감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설령 인간이 죽는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죄 없는 순결한 인간이어야 하는데 인간 중에서는 그렇게 순결하고 죄 없는 인간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만족시키셨습니다. 인류가 지은 죄의 크기는 무한한데 예수님은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신 희생은 무한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만족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대리적인 속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리자로 세워 사람을 대신해야 한다고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리자로서 죄의 형벌을 짊어지시고 인간을 위해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 속죄를 대리적 속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범죄를 당한 편에서 속죄를 위한 준비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위에 놓였으면 그가 죄를 짊어지셨고, 죄인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은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었고, 인간의 죄로 인해 입으신 손해에 대해 만족을 드릴 수 있었고 두 번째, 인간이 죄를 지었으니까 당사자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인간은 처벌을 받고 죽는 다고 할 지라도 그 죄의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대리적인 것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속죄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피동적인 순종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이중적 순종으로 구별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능동적 순종은 그가 영생을 얻게 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는데 있습니다. 피동적 순종은 그가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그의 백성의 빚을 탕감함으로써 고난을 당하신데 있습니다. 능동적 순종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목적으로 율법아래 태어나서 그 율법에 모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이나 그 율법에 순종하여야 하지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능동적 순종이고 수동적 순종은 예수님을 죽여서 희생 제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수동적 순종을 이루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둘로 구별하긴 하지만 이들을 결코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당하심에 있어서도 능동적이셨고, 율법을 복종하심에 있어서도 피동적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죄인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공을 세워 놓으셨던 것입니다.
속죄의 범위,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모든 교파 중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와 알미니우스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우주적이면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합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모든 인류를 위해서 값을 치르고 죽으셨는데 실제로 구원을 얻는 사람은 믿은 사람들 뿐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위에서 죽으셨을 때에 당신은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죄 값을 치르셨는데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효과를 보았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에서는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고 성경이 말하지만 그 모두는 실효적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작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속죄였다는 것이 개혁 주의의 견해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에 누구를 제외 하셨냐는 것은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어 봐야 압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효력이 없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어도 우리가 믿지 않는 한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고 무효가 된다는 것은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이 갖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런 식의 해석을 거부합니다.
한편, 개혁파교회는 제한 속죄를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받은 자만을 구원할 목적으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으며, 그 목적은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버려 주신 모든 자 하나 하나를 실제로 구원하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생명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즉, 그의 양무리와 교회 곧 선택받은 자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은 가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또는 모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가 세상 모든 민족(유대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의 백성을 위하여, 또는 모든 종류와 모든 계급(특수 계급이 아니라 어떤 계급의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강조)의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18과 구원론입니다. 구원론은 18과에서는 성령의 일반적 작용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구원론은 성령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성령님이기 때문에 구원론을 성령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작용에는 일반적 작용과 특별 작용이 있습니다. 일반작용은 일반은총에 속하는 작용이고, 특별작용은 특별 은총에 해당하는 작용입니다. 일반은총은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모든 것에 자연적인 질서를 주관하셔서 인간을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역사, 양심, 도덕, 법, 국가, 사회 제도 속에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나라는 도덕심이 엉망입니다. 무서워서 밖에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가니까 호텔 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두울 때 밖에서 돌아다니시면 총 맞을 수도 있습니다.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사회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반적으로 그 사람들을 다스리는 작용이 인간의 악이나 범법행위에 심각하게 저항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면, 동남아나 사회제도가 불안전한 곳에 가면 음식을 먹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이 속에 뭐가 들어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선진국에 가면 마음이 놓입니다. 법과 질서가 잘 되었기 때문에 편안합니다. 지난번에 중국에서 하수도에 있는 기름을 건져서 깨끗이 정화해서 봉지에 넣어서 그것을 팔았습니다. 그것을 기름에 튀겨서 음식을 튀기고 볶고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신문기자가 신문에 썼습니다. 그래서 발칵 뒤집혀 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그 기자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하는데 못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종교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엉망이었습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 초본 같은 것을 떼어 달라고 하면 봉투나 담배를 사줘야 써주고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저 밑에 넣어 두고 담배를 사 주면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써 주었습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풍조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미개하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잘 된 나라도 그것이 성령의 특별 작용이 아니라 일반적 작용에 의해서 잘 유지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작용은 구원과 관련되고 성경계시를 이해하는 것, 믿는 것, 영적인 변화와 관련이 되고, 나머지는 이것과 관련이 없습니다. 두 개가 다 잘 되어야 합니다. 은혜 받으면 엄마, 아빠, 목사님의 말을 잘 듣는데 은혜가 떨어지면 도덕이고 무엇이고 아무것도 없어서 개판을 치는 아이가 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 개가 다 성령의 작용을 받으면서 두 방면에 균형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주 반듯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법을 잘 지키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소리를 지른다. 이것은 특별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대개 전자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 학생들이 스스로 몇 시간을 했다고 적습니다. 항상 더 많이 적는 학생들은 한국학생들입니다. 두 시간 일하고 네 시간이라고 적고 세 시간 일하고 여섯 시간이라고 적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아이들은 두 시간이면 될 일을 너희 한국 학생들은 왜 네 시간이 걸리느냐?”, “그렇게 걸립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는 한국학생들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다른 나라 아이들은 새벽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아침에 가서 아르바이트할 때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밤에 가서 회개하고 아침에 또 하고, 그게 뭡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새벽기도가서 기도하고 가서 기차표 살 때 새치기 하고, 찬송 부르면서 뇌물 받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첫째, 일반은총이란 마음을 갱신시키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제재하고, 사회생활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시민의 의를 증진시켜 주므로 도덕적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일반적 작용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믿고 살 수 있고, 양심적인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일반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선하게 보여지는 분량대로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나누어 주시는 일반적 축복이다. 알미니우스파와는 반대로 일반 은총이 죄인으로 하여금 영적 선을 행하게 하거나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갖는다. 여기에서 영적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도덕적 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우러나오는 선을 말합니다. 일반은총은 인간에 의해 거절될 수 있으며 항상 다소 거절되는데, 기껏해야 사회적, 시민적, 도덕적, 종교적인 생활의 외면에만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가 택함 받은 자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와 유기된 자를 포함한 전 인류는 그의 죽음에서 큰 유익을 얻는다. 왜냐하면 ‘저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보면 ‘착하게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의 축복은 그리스도 사역의 간접적인 결과로 간주 될 수 있다. 일반은총의 방법, 일반계시의 빛, 정치, 여론, 신적 형벌과 보상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계시의 빛,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빛이다. 이 일반계시의 빛을 떠나서는 모든 다른 방법은 불가능하며 헛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비취면 자연인의 양심을 지도한다. 그래서 어느 화장실에 가니까 대개 금연, 담배피지 말라고 쓰여 있는데 거기에는 “99세 이상 노인에 한하여 흡연이 가능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뭔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어서 자기의 본분을 이행하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양심에 호소합니다. 브에노스아이레스에 사람들이 소매치기하고 술 먹고 여자들 희롱하는 일을 많이 하니까 한 복판에 예수님 상을 크게 세워두니까 범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는 현의 현감이 선거를 하는데 공약을 하는데 자기가 현감이 되면 가로등을 두 배로 늘린다고 했습니다. 두 배로 늘려주니까 정확하게 야간 범죄가 50%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서점에 책이 자꾸 없어집니다. 항상 개혁주의와 청교도 책, 두꺼운 책이 자꾸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CCTV 카메라를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청년이 가방을 가지고 오더니 청교도 책 두 권을 가방에 넣더니 CCTV를 보고 가방에서 다시 꺼내 놓고 갔습니다. 그것까지 찍혔습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그렇게 합니다.
지금은 정말 그런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반 계시의 빛을 무시하면 안 되고 항상 신앙이 내면이라고 하면 일반은총은 외면이 되어서 양자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단정하고 예쁘면 화장도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지 않습니까?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한창 예뻤는데 지금은 펑퍼짐한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신학생들이 모여서 TV를 보는데 “그렇게 매력적인 남성의 외모를 가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특별한 비결이 없습니다. 마음 착하게 먹고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던 사람들이 슬리퍼를 던지며 누구는 도둑놈 심보냐고 했다고 합니다.
정치, 인간의 정치는 이 목적에 종사한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따르면 정치는 악한 경향을 억제하고, 선한 질서와 예절을 촉진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요즘 정치를 보면 일반계시의 빛을 잘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론, 여론은 그것이 하나인의 율법과 조화되는 곳에서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를 들면, 뇌물을 받았는데 누가 대표로 걸리는 것입니다. 이번에 JS전산 180억 가짜 납품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5년을 구형 받았다고 합니다. 15년은 적은 것입니다. 그렇게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불량 전선 케이블을 납품해서 원전을 개판으로 만들어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나쁜 놈들이다. 법을 엄격하게 만들어서 다 잡아 넣어야 한다. 회사를 뺏어야 한다. 원전 1년 늦게 짓는 것 다 물어내라고 해라. 1조 5천억을 물어내라고 해라. 2조를 물어내라고 해라.” 하면서 온 나라가 들끓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짜로 팔아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슬며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론의 효과입니다. 여론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올바로 작용하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신적 형벌과 보상, 신적 형벌과 보상도 세상에서 도덕적 선을 권장한다. 형벌은 흔히 인간의 범행을 막으며, 보상은 인간에게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도록 격려한다. 어린 아이에게 판타지 같은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놀부와 흥부 같은 것도 들려주면 어른들은 황당해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확고하게 권선징악의 사상이 생깁니다. 그런 사상이 생기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반드시 악은 필벌이 따르고 선을 행하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이들이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일반 은총의 빛 아래 사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어른들이 그런 것을 다 무너뜨렸기 때문에 왜 그래야 하냐는 식으로 아이들이 행동을 하니까 도덕교육이 불가능해지고, 선생님들이 안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이 힘을 내야 합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똑바른 모본을 보여주면서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마지막 희망입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일반은총의 효과, 형의 집행유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타락했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화자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 그러면 즉시 죽여야 하는데 즉시 죽이면 하나님의 창조가 무의미 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되 씨를 남겨 놓고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씨가 다시 퍼져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형벌을 수행하십니다. 그렇게 죽음을 연기시킨 것이 일반은총의 효과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는 죄에 대한 제재, 이러한 일반은총으로 말미암아 죄는 개인과 민족들의 생활에서 억제 되는데 세상이 엉망이지만 노골적으로 엉망은 아닙니다. 법이 있고 법에 대한 제재가 주어지면 사람들이 움츠러드는데 이것도 일반은총의 효과입니다. 진리, 도덕, 종교에 대한 의식,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리, 선, 미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어느 정도 이것을 인정하며, 진리와 도덕과 종교의 어떤 형태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세상적 의, 자연인은 자연적 선 또는 시민의 의, 즉 영적 가치는 결여되었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외부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일을 행할 수 있다. 자연적 축복,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과분한 축복을 받는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에도 비는 내리고 곡식은 열매를 거두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고 밤과 낮을 정확하게 주셔서 자고 기운을 차리고 그 다음 날 일어나서 하나님께 덤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그들을 돌보시고 참으신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 더 하려고 했는데 시험 보고 가야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