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담회 1
녹취자: 최영순
(질문)
(답변)
상당히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쪽에 이슬람 소장파 신학자로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김철수 선교사가 며칠 동안 우리 교회를 돌아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정도 작은 교회에서 엄청난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는 처음 봤다 얘기할 정도로 많습니다.
절기 따라 가는 아웃리치, 국내·해외 아웃리치 말고도, 호스피스사역이라든지 국내전도사역, 화요일마다 매주 150명의 성도들이 나와서 지역을 계속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사실 많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우리들이 축호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경우에는 아파트 앞에서부터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축호전도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17년째 계속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열매가 없다하더라도 그쪽 사역을 계속해 나가고 병원 말기암 환자 호스피스사역부터 병원전도도 여러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형무소 전도, 사형수 전도 등등 굉장히 활발하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주일날 참석하는 280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두 그렇게 엔게이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사역의 장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염려는 사람들이 교리만 가르쳐서 머리만 키우는 교회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섬김의 장소에서 그것들을 펼쳐 보려는 많은 시도를 하고 있고 복지사역이나 이런 쪽들도 활발하게 이웃사랑위원회나 돌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될 삶의 영역이라는 것이 교회가 어떤 것을 조직하고 해서 교회 고유한 기능을 펼치는 것도 물론 있지만 그것들을 세분해서 60개위원회들이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교회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섹터를 나눈다고 하면 하나님을 위한 것은 예배 같은 것들로 귀결될 수 있지만 또 하나는 교회 자신을 ? 특별히 교회를 하나의 거대한 군사조직책처럼 보는 것도 문제가 있고 병원처럼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이것들이 결국은 군대하고 똑같이 군대에서 끊임없이 엄청나게 많은 군인들이 피 흘리며 전투하는 사람들이 있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부대가 있고 부상을 입고 돌아와서 병원에 가는 사람이 있고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듯이 교회의 기능이 오버론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획일화시켜서 교회는 군대라는 식으로, 병원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봐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역들이 아까 얘기한 것처럼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실제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느냐도 관계가 있지만 어느 교회든지 사역을 펼치면 그 장속에 들어와서 사역을 하는 사람은 20-30% 교인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신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사상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것을 계량화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성화의 소명 그 자체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희망과 의지를 자신의 모든 삶속에서 정직과 이런 것들을 펼쳐 보이며 살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질문)
(답변)
우리들이 교리를 교회에서 무시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사조적으로 보면 교회 속에 세속주의의 정신이 스며들어온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 사상을 예수쟁이로 만드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들이 2세기의 교부 테르틀리아누스 우리들이 교회사시간에 배운 토틀리안입니다. 토틀리안 시대 때만 하더라도 교회 와서 입교를 하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우주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사를 배우셨으니까 초대 교구중의 대표적인 사람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을 한번 보십시오. 오리겐이 쓴 ‘신학원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최초의 조직신학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개혁신학적이 아니라고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 철학책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해서 지옥 갈 영혼을 구원받게 하고 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함께 교회를 이룬다는 개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근거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인간인 나는 누구이고 이웃은 누구이고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런 사상의 얼개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와 가장 잘 비교되는 공산주의는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면 모든 세상의 역사와 경제활동, 정치, 사회구조, 도덕까지 공산주의 시각에서 봅니다. 진짜 기독교인은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기본적인 골격은 교리입니다.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오늘날의 가치 포기적인 정신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개념들을 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도 그런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어느 교수는 부부관계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 성을 판다 그 정도까지는 동성애인데 그 정도까지가 아니다 동물하고도 부부가 될 수 있다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려오는 절대적인 가치개념 같은 것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자체가 굉장히 기분 나쁜 것이 됩니다. 오늘날의 설교들이 탈신학적인 설교가 되어가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가치에 대한 거부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앙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감정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이야기 하면서 교리를 가르치는 자체가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굉장히 생경스러운 것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면 사람들이 딱딱하고 지겨워서 싫어할 거라는 것은 절대로 편견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냐면 짧은 시간 안에 기독교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린이 교리교육부터 잘 스며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교회하면서 가장 어렵고 교리적인 설교를 교인들이 가장 모이는 주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사상이 견고하게 설 때 체계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심각합니다. 여러분 돌아가셔서 영혼들을 불러놓고 하나님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80%가 양태론입니다. 모달리즘 샤벨리아니즘 전부다 교회사속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양태론을 믿든지 삼신론을 믿든지 뭐가 중요하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이 왜 피를 흘리며 싸웠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물어보십시오. 대개 호모 이우슈스입니다. 호모 우슈스가 아닙니다. 예수는 신이다 생각안합니다. 신과 유사한 존재다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80%이상이 다 그렇습니다. 방치하고 내버려 둡니다. 그러는 속에서 교리적 관용주의 속에서 수많은 이단과 자유주의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픈데이즘 아십니까? 미국에서 활발하게 논의가 되는데 한국에서 식자층이라는 사람들이 배워 와서 온 교회 다니면서 전파합니다. 교인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도 미래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배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헬라기안주의의 부활입니다.
지나친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엔트라이트의 new perspective on fallen Theology 오늘날의 제임스던 이나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논쟁들도 이것보다 하류이기는 하지만 이와 상당한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모든 결정과 행위의 주체라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너무나 교묘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지 않으면 판단을 못합니다. 빨려들어 갑니다.
우리는 개혁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목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문을 설교한 것을 펼쳐놓고 보면 이 사람 신학은 이거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교단마다의 특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게 아니고, 감리교라고 해서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고 ,전체 설교 자체가 하나의 오프라윈프리의 쇼같이 인간들에게 감동을 주고 이웃을 위해서 선한 삶을 살게 만드는 식으로 가는 것입니다. 애티컬 한 설교로 가고 있습니다. 구자유주의 속에서 다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나는 피를 토하고 외칠 정도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목회자의 직무유기입니다. 우리 교인들에게 카타키즘무스를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왜 태어났습니까? ”교인들이 대답합니다. “스투데오 에르고즘” 공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무얼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하여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잘 계시되었으므로 우리는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엊그제 제가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마이클 허튼 교수에게 천 페이지 되는 조직신학원고를 받았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전부 신론입니다. 신론 안에서 서론이 나오고, 신론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인간 창조, 신론 안에서 구원, 신론 안에서 교회론, 신론 안에서 종말론, 전부다 신론아래에서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신앙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는 눈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20년 만에 자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열렬하게 환영했던 사람들이 목회하는 시골 도시를 돌면서 분노하면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20년 전에 나의 종교개혁에 동참하고 분연히 일어섰던 목회자들의 교회를 찾아가니 우리교인들은 사랑스러운 돼지새끼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코가 빨간 채로 설교하러 올라갑니다. 술에 취해 올라갑니다.
그래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쓴 것이 마르틴루터의 대소요리문답입니다. 어떤 식으로 현대식으로 가르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아이들에게 차근차근히 특히 어렸을 때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아직까지는 강도 가지고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교리를 배워서 차근차근 이해를 해야 합니다. 브릿지에서 4살 먹은 아이 둘이 싸웠습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싸우는데 갑자기 남자 아이가 “너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알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내 것 뺏으려고 했잖아.” “아니야” “그럼 우리가 왜 싸워?” “너와 내 속에 새까만 게 많아서 싸우는 거야” 전적 타락의 교리를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근처에 유치원 세 개가 있는데 선생님이 크리스찬이라서 아이들에게 천국에 대해 아름답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야 천국이 정말 좋구나. 엄마한테 보내달라해야지.” 거기 우리 교회 6살 먹은 아이들이 “야, 거기는 너네 엄마한테 부탁한다고 갈수 있는 게 아니야” 옆에 있는 아이가 “그럼 나도 착하게 열심히 살아서 들어가야지” 우리 교회 아이가 “너 착하게 살아서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가는데?” “회심해야 갈 수 있는 나라야” 어려서부터 사상이 정확하게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가르친 것 같습니다.
작년의 일인데 근처에 사는 집사님 아이들 셋이 있는데 언니가 3학년, 6살, 5살입니다. 밤중에 모여서 교리배운 것을 자랑합니다. “누나 알아?” 누나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찌증나 죽겠네, 너 하나님의 존재의 필연성에 대해 말해봐” 교리라고 하는 것은 믿어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빨아들입니다. 견고해지려면 반드시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질문)
(답변)
교인이 50명도 안모이던 시절에도 엄격하게 교리시험 봤고 문답집을 완벽하게 외우지 않고, 중생에 회심의 표가 없으면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 전도사 부인이 아이의 유아세례를 주어야 하는데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신학교 나온 자매였습니다. “너는 기본이 안됐다. 신학교도 나왔고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증하지만 어떻게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겠다는 사람이 이것도 안 외웠느냐”고 떨어뜨렸습니다. 지금도 교리시험을 볼 때 장로 한 사람, 목사 한 사람, 워낙 많으니까 둘씩 나누어서 교리문답집을 한 달 동안 가르친 후에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떨어뜨립니다. 예전에는 확 떨어뜨렸는데 요새는 목회를 하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세례를 주기 두 주전에 시험을 보고 떨어지면 재시험의 기회를 줍니다. 그 때 까지도 안 외우면 떨어뜨립니다.
(질문)
(답변)
그것은 편견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재가 됩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오는 사람이 모두 붙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할 때 나는 설교 안 듣는 사람을 보고 설교하지 않고 듣는 사람을 위해 설교합니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만들 때 사먹고 가는 사람을 위해 만드는 것이지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질문)
(답변)
제가 어느 논문에서도 썼는데 1970년대까지 성령운동 하면서 교회부흥이 되었습니다. 80년대 초반까지도 괜찮았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사람이 모이는 것이 보증되었습니다. 그런데 80년 후반, 85년도 이후부터 좋은 시절들이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형집회 이런 것들에 대한 것들이 8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꺾어지게 되면서 관심이 제자훈련, 성경공부 쪽으로 많이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파라처치들이 많이 기여했습니다. 네비게이터라든지 CCC라든지 단체들이 기여했습니다. 그쪽 교재들이 가지는 신학적 취약점에 대해서는 차치하고라도 그것은 굉장히 신선하고 좋은 것이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은 사회적인 팩터와 관련이 있습니다. 60년대, 70년대까지는 외롭고 소외되고 어쩌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별보고 나가서 부지런히 밥 벌어 먹어야지만 저녁때 끼니라도 때우고 몸부림치며 사니까 여러분 알다시피 80년대 초부터 잘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자가용을 갖기 시작한 것이 85년도부터 였습니다. 사회가 갑작스럽게 74년,75년 이때에 엄청난 수출을 하면서 80년대 와서 잘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공허해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딴 생각합니다. 공허해지기 시작하고, 미친 듯이 일했는데 중동 근로자가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갔다 오니 마누라도 바람나고 사람들이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인간관계의 결핍을 느끼고 교회에서 성경공부모임, 제자훈련 같은 것들이 큰 매력을 가졌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공부가 좋다고 매달렸을 때 진짜 성경을 체계적으로 열렬히 가르치기 위한 성경공부였는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재료였고 사람들 자체가 모여서 나누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부족했던 사회적 욕구 같은 것들이 채워지는 심리학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무브먼트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소그룹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훈련 같은 것들이 소그룹의 이념과 맞지 부흥회와는 맞지 않습니다. 소그룹을 이용해서 공부하는 내용을 보면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든지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니드에 부응하는 그런 종류의 답을 성경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실존주의적인 접근방식의 바이브리스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역사가 지나가고 나서 2000년대로 들어오고 났을 때 강해설교 이야기하고 성경공부 교회마다 안하는 곳이 없었는데도 마지막에 실제로 사람들이 무얼 알게 되었나 껍질을 까놓고 보면 너무나 아는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면 우리 교회 교리반에서 보는 퀴즈 문제를 신학대학원 졸업한 사람에게 주면 20점에서 40점 밖에 안 나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녀도 제대로 교리를 공부한 게 아니라 신론 앞에 조금하다가 삼위일체 들어갈 때쯤 휴강하고 땡 쳐버리고 나머지 레포트 내 버립니다. 신학도 한 과목을 한 학기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론과 인간론을 묶어 한 학기에 하고 기독론과 교회론 묶어 한 학기에 합니다. 책은 가벼운 책이 아니라 묵직한 책이니까 자기도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주장은 싹 쓸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나는 초보자다.’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개혁신학 하는 사람이니까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공부하든지 하면서 에릭슨이라든지 이런 사람들 자유주의자들도 많으니 조심하십시오. 체계적으로 다시 공부하십시오. 자기가 은혜를 받고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에게 가르치십시오.
(질문)
기본적으로 볼 때 성경적으로나 교회역사의 전통으로 볼 때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책임은 1차적으로 가정에 있습니다. 부모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안 하면 자라나는 세대가 좋은 신앙을 갖는 것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요행이거나 기적입니다. 솔직히 부모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자녀들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행복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가정이 다 콩가루 집안이 되었는데 ‘네 자식은 네 책임이다.’라고 교회에서 던져주는 것만으로 교회가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가정이 버린 아이들을 고아원에서 데려다 기르는 심정으로 교회가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정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절반정도 밖에 안 됩니다. 우리 교회가 상태가 좀 낫다고 하는데도 절반 정도밖에 안됩니다.
심지어 부모들이 여기에서 펑펑 울고 은혜를 받아도 자기 하나만 결심하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이 변하지 않으면 똑같은 가정의 갈등이 계속됩니다. 나는 다른 교회는 절반 확신 이하라고 봅니다. 자식교육이 안되는 게 뭐냐 하면 가르치고 싶은 게 있어야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맨날 아이 놓고 목사님 주일 설교 예화까지 반복해서 가르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몇 번만 가르치면 엄마는 한소리 또 한다고 할 것 아닙니까? 장년들을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쳐서 컨텐츠가 있게 해야만 아이들을 무릎팍에 앉히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리차드 백스터가 쓴 책 가운데 ‘마더스캐터키즘’이라는 교리문답이 있는데 상당히 깁니다. 기본적인 성경의 교리와 성경의 내용 전체를 계시록까지 공부하게 되어있습니다. 첫 번 째 문답이 “얘야 교리문답 배우자” “엄마 우리가 그걸 왜 배워야 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믿고 살라고 가르친 교훈이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 “엄마 딴 사람들은 그런 거 안 배우는데 우리는 왜 그런 거 배워야 해요?” 엄마가 “신경 쓰지 마라. 그 사람들은 짐승이다. 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사는 것을 교리문답에서 배워야 한다.”
몇 달 전에 신문에 나왔는데 러시아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폐허가 된 아파트를 재개발 하는데 아이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 소년 같은 아이였습니다.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경찰이 가서 아이를 잡았는데 개가 길렀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버리고 가고 개가 젖을 먹여 5년을 길렀답니다. 안 가르치면 그렇게 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동기 한 사람이 왔는데 교회를 하면서 당했던 황당한 일을 얘기하는데 세례를 안 받은 사람이 성찬을 먹고 있더랍니다. 안된다고 잘랐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니 그 다음날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이 양반이 집사입니다. “우리 남편이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사회적으로도 목사님보다 낫고 똑똑하고 배운 사람입니다. 그까짓 떡이 몇 푼이나 된다고 우리 남편을 못 먹게 합니까?” 짐승 아닙니까? 안 가르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까짓 떡이 몇 푼이나 한다고 못 먹게 합니까? 목사가 뒤로 나자빠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겠는가? 못 받았습니다. 집사가 되었다는 사람이 성찬을 못 먹게 했더니 자기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목사보다 훨씬 나은데 그까짓 거 몇 푼이나 된다고 떡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 못 먹게 하냐고 목사한테 삿대질을 하고 대거리를 합니까? 안 가르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목회에 대한 본질과 가치에 대한 생각이 목회자 속에서 먼저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 교회가 첫 번 째 교회입니다. 물론 부교역자로 섬겼던 교회가 있지만 내가 담임 목회한 첫 번 째 교회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으면 여기서 종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한 번 더 개척을 해보고 싶은, 그러면 예전보다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별로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17년 동안 설교하면서 어떤 때는 설교를 하다가 ‘교인들이 나보고 교회를 떠나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까지 생각하면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궁금하시면 3-4년 전에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켜라’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이 시리즈 끝나기 전에 열린교회를 떠나도 좋다 그 정도로 마음먹고 설교하던 시기였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가치 자체를 자꾸 이렇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면 교회가 성장합니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엇하고 똑같은가 하면 전쟁을 하면 경제가 발전합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요새 북한 방사포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사실 별거 아닙니다. 수천발의 폭탄을 쏴서 소나기처럼 수원까지 쏟아 붓는다고 칩시다. 굉장히 많이 파괴될 것입니다. 내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파괴 되서 피해는 입히지만 그걸로 전쟁이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요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고 마치 무엇하고 똑같은가 하면 주님을 사랑하면 돈이 좀 생깁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유와 반대적인 급부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니까 교리를 가르쳐도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쳐야할 진리가 목회자 속에 불붙지 않으면 그것을 가르쳐야 할 필연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어제 사실은 여러분 같이 예배드린다고 해서 예레미야서를 준비했다가 설교를 바꾸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에게 잡혔을 때 하도 자기를 핍박하니까 꼴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언 안 한다. 자기가 그 결심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붙어서 사무치는 것입니다. 토해놓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 설교자의 소명입니다. 사람도 못 볼 걸 보았다든지 마음에 기쁨과 놀라움이 꽉차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데 진리를 발견해 냈는데 외치지 않겠습니까?
제 친구 가운데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직장 다닐 때 제가 복음을 전해서 방황하다가 돌아와서 신학교 가고 목회를 잘합니다. 교인은 80명도 안 되는 교회에 가서 200명 만들고 거기서는 쉽게 사람들이 호락호락 예수 믿지 않습니다. 지금도 본토박이들은 딸 시집보낼 때 뱀을 싸서 보냅니다. 그 정도로 토테미즘이 무서운 땅입니다. 1700평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하루는 부교역자얘기가 나왔습니다. 부교역자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왜 그러냐고 하니 안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 제주도까지 봉사하러 오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지 말고 사례를 조금 더 주고 사례대로 하되 서울에서 여기 올 수 있는 비행기 표를 끊어주면 오지 않겠느냐 금요일에 와서 봉사하고 월요일에 아침에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그러니까 장로들이 협조를 안 한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전도사가 가르쳐야지 집사가 체육활동하면서 가르치면 교육이 되느냐 하니 “김 목사님 여기는 비젼이 없습니다.” “비젼이 뭔데?” “꿈이 있어야 하는데 부교역자들도 여기는 비젼이 없어서 안내려옵니다.” “비젼은 뭔데? 거기서 목회하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목사가 마음이 상했는지 비젼 없이 무슨 목회를 하냐 비젼이 뭔데 ”당신도 비젼이 있으니 사당에서 방배 평촌으로 건너오고 교회를 지은 거 아닙니까?“ 비젼은 무슨 비젼입니까? 사람들이 모이니까 할 수 없이 교회를 지은 거지. 뭐 그렇게 유쾌하고 좋은 일이라고. 난 그랬다 교회에 오고 나서 교인이 절반으로 줄면 절반 팔아버리겠다고 얘기했다. 건축 쇼하는 것이냐? 비젼이 있으니까 예배당도 짓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젊은이도 없고 당신네 교회엔 젊은이 많이 모이고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합니까? 만듭니까? 하나님이 목회하라고 할 때 젊은이 없을 걸 모르고 실수로 보냈는데 해보니까 젊은이가 안 옵니까? 다 허황된 것입니다. 젊은이라고 목회하면 신납니까? 영혼인데 젊은이를 맡겨 주시니까 하는 거고 늙은이 맡겨주시면 잘해서 예수 믿어서 봉사도 하지 자기도 지탱할 기력도 없어 골골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돌보다가 무릎팍에 놓고 축도하고 죽으면 눈 감겨서 장사지내주면 그게 목회지 그렇게 하다가 죽어버리는 게 목회지 비젼은 무슨 비젼입니까? 목사는 은혜를 안받고 사모님이 은혜를 너무 받으셨습니다. 몇 달 후에 갔는데 “목사님 그 때 비젼은 무슨 비젼입니까?” 라는 말에 목사부인은 자기는 은혜를 너무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비젼이라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어제 총회에 가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예레미야, 이사야 등 걸출한 수많은 선지자가 나오지만 왕하고 독대하고 왔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더 존경하고 예언할 때에 몇 명이 모였느냐를 보고 선지자에게 별달아주고 그랬습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존경을 받고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960-70년 들어오면서 큰 교회 목사님은 목사님이고 작은 교회 목사님은 목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가 들어오며 몹쓸 풍조들이 생겨r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큰 교회라고 절대 거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 섬기는 노예나 적은 사람 섬기는 노예나 종은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공부를 너무 안합니다. 교인들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교회는 매달 책을 제시합니다. 책을 읽으십시오. 어느 교회에 갔더니 전 교인에게 ‘가계에 흐르는 젖줄을 끊어라’ 그것을 읽히는 겁니다. 선교사 하나는 그것에 꽂혀 외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합니다. 그래서 정말 딱하다 그게 무슨 책인지 뿌리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판단력도 없습니다. 건전하게 개혁신학을 배운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미국에 가서도 그랬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가서 신학교 들어갈 수도 없고 자기가 독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약하면 네다섯 명이서 매주 월요일에 오후에 운동하기로 하고 저녁에는 가정사역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9시쯤 모여서 공부를 해라 기독교 강요를 차근차근 읽으면서 발표를 하든지 해라 한두 달 하면 별거 아니지만 10년 동안 하면 격차를 내게 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가 작다 크다 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명이라도 올바르게 가르치다가 죽으면 목회자의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질문)
저는 사실은 전도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물론 나름대로 고민하고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들이 제기해야 비성경적인 방식이 안 되고 또 그것만 고려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개혁신학자들에게는 전도에 대한 것을 별로 배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이미 기독교 천지였기 때문에 전도에 대한 관념이 없지는 않지만 매우 약했고 참된 교회냐, 거짓된 교회냐 하는 관점이 많았고 청교도 전도 많이 얘기하는데 그것도 사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청교도가 영국 청교도인데 그 당시에 에피스코퍼 church 캐톨릭 church, 아니면 디센터들인데 누구에게 전해도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들도 우리들이 참고는 하지만 100%베껴서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은 역사의 문맥을 잘못 읽은거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상황은 청교도나 16세기 개혁주의 시대의 상황과는 다르고 오히려 1세기의 문맥과 훨씬 유사합니다. 신학적인 유산들은 거기로부터 계승한다고 하더라도 전도와 선교적인 것들은 오히려 1세기 문맥에서 더 많은 고민들의 공통점을 찾아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고려를 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거를 고려를 많이 하면서도 어떤 식으로 생각 하냐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급전도자 동원해서 한 명 등록시키는데 두 당 얼마씩 지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말이 안 나와서 그렇지 상당히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보면 계속 다니는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유급 전도자로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거 욕하면서 자기네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마 담임 목회 하시는 여러분 중에서 매일 여러분이 직접 교인들을 데리고 전도 나가는 교회가 몇 개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 욕만 많이 하지 본인들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염려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보냐하면 일단 너무 세속적인 방법은 배척하고 인격적으로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교회를 오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이 선포되니까 그리고 가르칠 수 있으니까 처음에 목표 그 자체를 세속적인 방법으로 오면 비누를 주니 타월을 주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복음의 핵심적인 것들을 전하고 교회 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관계를 형성하고, 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외치고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는 차근차근히, 들어올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일대일 교육을 통해서 ,올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제도권 안에서 시스템에 따라서 공부하게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질문)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은 개혁신학에 동의하고 우리 교회에서 성장과정을 컨펌할 수 없는 사람은 파송하지 않습니다. 협력선교는 합니다. 우리는 파송하면 모든 것을 풀서포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사업이 있으면 본국을 설득해서 사업을 하고 지원을 받고 새로운 사업이 있어서 한다 해서 설득이 되면 지원하고 교회가 무한책임을 지니까 문제가 안 된다 봅니다. 선교사 자신이 거기에서 사역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그쪽의 문화와 타협하는 그런 면까지 간섭하지는 않습니다.
세계교회와의 협력을 이야기 하는데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최근 몇 년 들어 부지런히 외국에 있는 신학자들과 교류를 하고 외국에 있는 교회들과 교류를 하고 제가 가서 집회도 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부쩍 개혁신학자들이 많이 와서 예를 들면 플란테커총장이라든지 피터릴백이라든지 화란의 아자오교주라든지 등등의 사람들이 자주 와서 설교를 하고 내년에도 마이클 호튼, 웨스트민스터의 가프리총장, 줄리어스킴교수, 리차드먼로박사의 설교가 계획이 잡혀 있습니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신학교들하고도 협력관계를 구축해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함께 어쏘시에이션을 이루어 공통된 기구를 만들고 그런 것은 아니고 가능한 개혁신학 쪽에 서 있는 교회들과 연대를 가지면서 우리들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프리젠테이션 안 봤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서약 중에 하나가 후세에 어떻게 물려주는가? 질문하셨는데 ‘한국교회의 미래의 역할’책하고 논문에서 내가 얘기한 교회의 중요한 사람 중의 하나가 신학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신학교 총신을 우리만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저희들이 3년에 한 번씩 총신신대원에 1억5천 만원 정도하고 대학교에 4년에 한번씩 1억, 끝나면 또 내고 ,끝나면 또 내고 하고 있고 국내 신학교 10개 정도 가서 제가 한 번 설교하고 저서 한 권주고 점심 대접하고 장학금주고, 넓혀서 해외에 개혁신학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학교까지 돌면서 장학금도 칼빈 웨스트민스터에 25000불, 30000불 기탁했습니다. 세미나도 해주고 제 책도 보내주고 하면서 부지런히 신학발전에 이바지하고 학회나 이런 것들에 성실하게 지원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중국에 CRTS라는 개혁파 신학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교수들과 끊임없이 연대를 가지고 미래의 중국지도자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중국의 학생들이 34명 정도 모이는데 풀타임이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6주정도 인텐시브코스로 하고 월요일마다 학생들이 모여 희랍어라든지 히브리어라든지 교양강좌, 기독교 강요, 교리까지 공부하는데 첫 해에 한명을 교육시키는데 만불 들었습니다. 천 만 원 좀 더 들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떨어져서 34명인데 예산이 2억 좀 넘게 잡혔습니다. 한 사람 앞에 한 7백만 원 정도 굉장한 희생입니다. 중국에서 1천만 원은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아마 중국에서 제일 훌륭한 대학교 다니는 박사과정 학비보다 훨씬 비쌀 겁니다. 절대로 5백만 원까지는 안 됩니다. 고급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사실은 생색도 안 납니다. 그 돈이면 선교사 20가정을 파송할 수 있는데 우리는 쏟아 붓는 것입니다. 미래에 철저하게 4년제 대학 안 나오면 입학 안 받아주고 영어시험 치러야 하고 성경, 신앙고백, 한국의 최고 교수들을 보내어 충분히 교수들에게 사례를 하고 보람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지망하는 학생이 많아지고 최근에 갔더니 어느 선교사들이 아마 열린교회에서 하고 있는 CRTS가 중국의 최고의 신학교일 거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입학자격부터 지성적인 수준이 웬만하지 않으면 안 받아줍니다. 철저한 개혁신학으로 가르칩니다. 이번에는 12명인가 14명이 수학여행을 와서 2주 동안 머무르며 훈련을 받다가 갔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이바지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 청교도와 개혁신학에 심취하는 것은 좋은데 컨텍스쳐한 낼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맹종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하는 얘기가 ‘나는 청교도 좋아하지만 청교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전도 안하고 설교만 하려고 하고 기도도 안합니다. 부목사 되가지고 언제든지 강단으로 돌격할 자세만 되어 있고 나머진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됩니다. 목회 안 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청교도나 개혁주의 신학보다는 오히려 19세기,20세기에 있었던 복음주의운동 열렬한 전도운동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심지어는 정통적이지 않은 머라비안이나 백티스트들의 열렬한 선교적인 열정을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교회가 잘 안 되는 이유가 진짜 습득해야 할 개혁주의의 정수는 안 받아들이고 껍질만 받아들이는데 껍데기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수는 거기로부터 빨고 껍데기는 그 때 옷이 아니라 치열하게 복음을 전파하던 그런 시대에 옷을 입고 나타나서 전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식으로 약하게 하니까 부교역자들이 거의 전도 안하면서 교역을 배우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희가 깃발을 들었을 때는 못하는 것입니다. 해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교인들을 내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결국은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아쉽습니다.
(질문)
교인들이 대부분 성경읽고 큐티하고 있습니다. 다만 큐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하냐면 해석학적인 훈련들이 안된 상태에서 주관주의적인 방식으로 큐티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정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점에 가면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교회 공과공부 시스템에 대해 소개했는지 모르겠지만 제일 먼저 설교가 이루어집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같은 설교가 18주나 20주 정도 이루어지고 끝나고 나면 그 책이 나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책으로 공부를 합니다. 책을 묵상집 형태로 만들어서 교리묵상집이라고 해서 매일 하나씩 2페이지 내지 3페이지씩 읽으면서 교리적인 사실들을 마음에 담습니다. 성경공부가 사람을 설득하고 깨우치는 것이라면 교리묵상은 마음속에 담아두는, 그래서 우리의 삶 자체가 움직이게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열린 교회에서는 자기가 마음먹고 손을 뻗치면 자료는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설교 안내 책자를 보면 기도가 안 될 때는 무슨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고부간의 갈등이 있을 때는 어떤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그런 것 까지 나옵니다. 굉장히 친절하게 해주고 있고 이루어진 설교들이 끊임없이 교인들을 위한 재교육 교재로 쓸 수 있도록 도서관에 잘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들이 계속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큐티를 가로막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권장합니다.
(질문)
예배에 대해서는 13년 전인가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책에서 거의 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 책이 생명의 말씀사에서 리메이크 되서 개정은 별로 안했고 교정만 봐서 뒤에 MP3까지 달려서 나옵니다. 그런 정신으로 열린 교회의 특징은 예배에 대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배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예배시간 자체에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으고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는 광고도 안합니다.
예배가 이루어지면 일어나서 송영하고 신앙고백하고 찬송을 연달아 3장 정도 부르고 헌금하고 설교하고 끝나고 난 다음에 찬송하나 부르고 축도하고 예배를 마치니까 광고시간도 없습니다. 광고 끝난 다음에 성도들끼리 인사하고 교회 소식들 광고할 것들은 말로 하지 않고 영상으로 뉴스를 편집해서 ‘지난 주 열린 교회에서 있었던 소식을 뉴스로 시청하겠습니다.’ 그러면 영상으로 아나운서들이 설명을 해줍니다. 교회 돌아가는 것을 모두 공유하고 공지사항은 나중에 광고로 나오고 끝나면 대부분 기도하고 끝나는데 너무 중요하게 강조할 것이 있으면 짤막하게 광고하고 제가 기도하고 예배를 마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끝나고 교인들이 뉴스 안 보고 가면 어떡하나 했는데 아무도 안가고 뉴스를 봄으로써 한 달 동안 담임목사가 외국에서 집회한 거 교회안에 이런 모임 같은 것이 뉴스에 나오니까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열린교회 예배가 어떤가 하는 것은 예배에 관한 제 사상은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시고 뒤에 DVD가 붙어 있는데 제가 작년에 예수교장로회총회 모였을 때 신랄하게 강의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가시기 전에 ‘목양’이라는 책인데 CD까지 들어 있어서 책을 보시면 목양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것이고 기타의 자료들은 서점에서 필요하신대로 구해가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