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하반기 교역자 수련회 (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인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1~15)
녹취자: 안두현
에베소서 4장의 11절의 앞의 부분에는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게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제 그 승천하신 것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심이라 했는데 이 충만하게 한다는 말이 번역이 애매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신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승천하심으로 그분이 머리가 되시고 자기의 모든 창조한 세계들을 당신 안에서 이렇게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친히 통치자가 되시기 위함인데 온 우주의 시련들, 당신의 아름다운 통치를 가장 먼저 실현하신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선지자와 그다음에 복음 전하는 자, 교사를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교사는 교회의 선생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박사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세운 이유가 목회자를 세운 이유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믿는 것, 아는 것, 사는 것 이렇게 셋으로 요약이 됩니다. 믿는 것, 아는 것, 사는 것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우리를 세우신 것입니다. 사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데 목회가 목회다워지려면 어제 우리가 밤늦게까지 회의했듯이 이것도 안 되고 그럽니다. 이렇게 더듬어가면은 회심의 문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은 그 어디든지 간에 목양이 안 됩니다.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아도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양이 아니라 사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랬는지 잊어버렸는데 회심이 없이 사람들이 그 교회 안에서 훈련을 통해서 목회자를 잘 따르고 교회의 질서를 따르는 것을 길들여지는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혼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끝없이 일어나서 우리로 하여금 잘 믿게 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어떤 참다운 회심과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이 가르치고 여러 가지 시스템들을 잘 만들고 훌륭하게 교회를 조직한다고 해서 잘 믿게 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믿게 되는 것은 그런 것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교회의 자체를 하나의 경영체로 보고 모든 문제를 그런 경영과 전략으로 해결을 하려고 하는데 사실 그 한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는 것 없이는 모든 경영이나 전략이 지혜나 이런 것들이 소용없습니다. 새가족 환영회를 아무리 정성껏 기가 막히게 해도 실제로 믿는 사람이 없으면 감격스러울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참 놀라운 것이 뭐냐 하면 그 영혼들을 돌보아서 그들을 유익하게 하는 사역과 목회자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유익을 나누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의 목회자를 세운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하심이니라 이렇게 객관적으로 말해놓고 바로 그 뒷 절에 가면 우리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과 아는 것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려고 하니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 자기를 포함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을 목회하는데 자기가 그 몸의 일부로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가 돌보는 양떼들을 잘 믿게 하는 것과 자기가 잘 믿는 것과 나뉘어지지 않는다 그 뜻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모이면 목회 이야기를 합니다.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모이면 목회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절반씩 해야 합니다. 신앙 이야기도 절반하고 목회 이야기도 절반을 해야 하는데 관심사 자체가 자기 신앙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하기 싫어하고 안하는 사람이 앉아 있을 때 제일 짜증나는 자리가 어디냐 하면 공부 열심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공부 이야기하고 최근에 나온 학서 이야기하고 그리고 자기네끼리 앉아서 박수를 치고 맞어 맞어 하면서 계속해서 학술적인 이야기를 할때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좀 더 말을 해보겠습니다. 기도 지겹게 안하는 사람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는 기도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자기 기도 속에 응답해주신 하나님 그리고 기도의 신비를 이야기 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지체들에게 하나님을 잘 믿게 하는 것과 자기가 주님을 잘 믿는 것이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닌데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목회자들은 이미 완성된 사람인 것처럼 우리들이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쑥스러운 것처럼 이미 그점에 있어서는 온전한 상태에 도달한 사람인 것처럼 자신들은 제껴 놓고 그리고 하는 것은 정말 잘 못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 자신이 배구하듯이 목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배구의 특징이 뭐냐 하면 공이 날라오면 쳐서 패스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시면 패스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을 불덩어리처럼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기가 마치 그 태몽을 꾸는 여자들이 달을 마시고 뜨거운 기운을 느끼는 것처럼 자기를 벌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여 마셔서 이 안의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토해서 내야 합니다. 그런데 패스하는 것처럼 한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말씀이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 모여서 목회자들이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의 독특성입니다. 그래서 아주 목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도성 인심의 원리가 아주 그대로 적용이 되게끔 그렇게 하나님께서 격려하시고 이끄신 것입니다. 그래서 잘 믿어야 합니다. 그 믿는 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애매하지 않습니까? 믿음 생활 하면 교회 봉사에서 부터 시작해서 사명 받는 것까지 다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믿는 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아주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성경의 진리를 끊임없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과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믿음이 많이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확신하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이유입니다. 여기서 믿는 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성경읽기입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아무런 의심이나 그리고 자기의 이성의 판단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펼치면서 매순간 대면하는 객관적인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으면서 의심 없이 어린 아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조그만 아이가 그 엄마를 전적으로 의지하니 않습니까? 엄마한테 이리온 하면 엄마가 이렇게 서있어도 엄마가 받아줄 것을 의심하지 않고 팔을 벌리지 않습니까? 엄마가 이거 줄께 먹어 그리고 입에다가 넣어주면 아이는 칠칠하지 못한 우리 엄마가 제대로 소독을 안 해서 병균이 있는거 아냐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기농 농산물 맞아하고 생각하면서 엄마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엄마가 숟가락으로 이유식을 떠서 입가까이에 가져가면 아이는 활짝 입을 벌리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의심이나 그런 간격 같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머리 굴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기서는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개척교회 하면 될 것입니다 하면 아멘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끊임없이 아멘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그러한 믿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과 함께 그렇게 믿으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작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우리 모두 그러고 싶지만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두 주의 한번 정도는 성경을 읽다가 그 말씀이 너무나 달콤하고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리도록 밀려오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믿는 것입니다. 올해 교구 사역 잘 역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종류의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2년 후에는 개척을 해서 큰 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라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생애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한두 번 일어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이런 믿음은 성경을 매일 믿고 그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신뢰하게 되는 것의 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진짜 신비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을 읽으면서 추호의 의심이 없이 어린 아이가 엄마가 가슴을 풀어 헤쳐서 젖을 보여주면서 이리 와서 엄마 젖을 먹자 하면 눈을 감은채로 고개를 흔드면서 결국은 그 엄마의 젖을 의심 없이 빨아 먹는 그런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을 잠들면서도 엄마가 계속 옆에 있어서 밤새껏 지켜줄 것이라는 의심하지 않는 신뢰. 새벽에 잠에 깨도 바로 옆에 엄마가 옆에 있을 것이라는 의존의 감정과 마음 그런 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에서 이야기하는 그 빛을 하나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 속에서 의심 없이 그 빛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될 때 새로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내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절대로 신학은 공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추수하도록 누런 곡식이 가득 벼이삭이 고개를 숙일 때 학문은 고작해야 베어놓은 볏단들을 묶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는 낫질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믿을 때 학문을 많이 공부하지 못해도 신학적인 지식들이 막 쏟아져 들어오는 것입니다. 학문은 겨우 그것을 묶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묶는 끈을 들고 가서 고개 숙이고 있는 넓은 벼밭에 서서 무엇을 할 것인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갑한 것입니다. 2005년도에 이곳에 들어와서 신학생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은해를 많이 주셨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산속에서 시설도 안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것을 깊이 도전을 받았다고 어느 자매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김목사님의 신학생 특강을 듣고 나서 뜻을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을 세웠냐 하면 원어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했습니다. 벌써 3~4년 지난 이야기 입니다. 2005년이 아니고 2000년도 특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학생들에게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그 지체를 보니까 결국은 그 결심을 이행하지도 못했지만 또 그 결심을 이행한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달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믿는 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가 자신을 계속 비추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작용이 있어야지만 성도들에게 그 일을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애쓰고 수고하면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어제 나온 이야기들도 회심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회심을 참된 것을 행한다고 해서 사랑한다고 해서 그다음에 머 이론을 배운다고 해서 회심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특이하게 자기 속에 계속 비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왜 지체들이 믿음이 없고 회심을 안했는데도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안 드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그런 믿는 것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멈추게 되면 그런 은퇴기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나 불쌍함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는 느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적으로는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과 목회에 있어서 성경 읽기, 1년에 몇 번 성경을 읽었다는 그런 것들 말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자신에게 계속 들어와서 자기가 그것을 믿고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며 성경에서 단물을 먹는 것. 이러한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고 바로 그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직장을 다닐 때에는 제가 회심하고 나서이니까 26살 때에 결혼하기 직전이니 25실인가 26살 때 같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새해를 시작을 하면서 저 동두천에 있는 미디안 기도원이라는 평지에 있는 기도원인데 약간 산위라지만 평지에 있는데 무지무지 추웠습니다. 그곳에서 1주일 지내면서 직장을 출퇴근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는데 제가 새벽기도를 드렸으니까 직장을 안 나가는 날이었는지 휴가를 냈는지 어쨌는지 새벽기도 때였습니다. 목사님 한분이 성경을 봉독하셨습니다. 시편이었습니다. 시편을 천천히 읽으시는데 한 장을. 울면서 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성경읽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스위치를 누르면 믿음이 생기는 것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아이들에게 영혼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목회자를 통해서 보면서 자기가 지금 신앙의 수준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은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가르쳐서 오직 성령께서 그들에게 믿음의 작용을 일으키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 것을 위해서 목회자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믿음의 작용이 계속 일어나는 목회자들에게는 목회 사역이 결코 퍽퍽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교역자 회의를 하거나 대화를 하면 장비, 시설, 돈, 예산, 인력,… 그러니까 그 진짜 그것들을 모두 역동해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그 알파에 대한 것은 그렇게 지면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목회 사역에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하고 바로 그렇게 잘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목회자로서 교회 부름 받은 것이고 교회를 잘 세운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잘 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는 것인데 이것은 이제 믿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믿음으로 어린 아이처럼 순전하게 그분의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도록 우리를 따로 가르쳐 줄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영혼 자체 안에 그것을 적용하는 아주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적용의 어려움을 느낀다고 하는데 사실은 적용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는 것 자체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적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신비는 말씀이 추상적이되 그 적용은 아주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는 것은 그렇게 주님을 믿게 된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는 그 중간 부분입니다. 이제 학문이 필요한 부분이 여기에 필요합니다. 학문, 그다음에 구체적인 사유, 정사, 적용, 자기 규범의 수립 이런 것들은 다 이 아는 것에 들어가는 것들입니다. 그때에는 이제 어린 아이처럼 말씀을 통해 빛이 막 들어오고 믿어지는데 그때에 그 바르게 되는 신학적인 지식이 없으면 그것이 막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이 잘못된 논리를, 잘못된 생각을, 잘못된 생각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앙이 정립이 안돼있는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공평하게 진리를 붙잡기 보다는 강렬했던 경험에 제일 크게 영향을 받고 그것을 가장 굳세게 붙들게 됩니다. 그 굳세게 붙드는 것이 실은 성경에 대한 믿음보다 더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결국 아주 이상한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런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래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역시 본인이 계속 알아가는 가운데 가르칠 수 있는 것이지 본인은 알아가지 않고 가르친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가야 한다는데 그다음에는 그냥 이 책 저책 책만 뒤적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사는 것입니다. 지난 두주간의 설교였지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말은 오디오고 우리의 삶은 비디오 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듣는 것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고 오래 인상에 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것이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인이 목사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입니다. 그래서 특권의식 갖지 말고 성도들 중에 내가 한사람이라 생각을 하고 가르치는 것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서 그렇게 그 성도들이 말하자면 사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회에 있어서 성공이라는 말은 이상하지만 우리의 목회에 있어서 그 하나님의 복, 그것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입니다. 우리 목회를 통해서 내가 잘 믿고, 나의 목양을 받는 지체들이 잘 믿는 것. 그리고 내가 잘 알게 알아가고 그리고 지체들을 잘 알게 하는 것. 내가 잘 살고 그리고 나의 지체들을 잘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목회에 있어서 성공입니다. 그것을 핵심으로 해서 내용적인 성장도 있고 사역의 성장도 있고 모든 것들이 함께 뻗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이 사역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완전히 도외시 해버리고 교회의 모습에 주는 것을 어느 하나를 완전히 도외시 해버리는 것입니다. 어느 목회에 있어서는 믿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매일 책 읽히고 세계관 공부하고 토론 시키고 그리고 참된 삶도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절름발이 목회입니다. 또 어느 곳에서는 아무 것도 안 가르치고 맨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믿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거짓이지요. 둘 다 아무 것도 안하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사실은 지성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잘 믿지 않는데 잘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어느 한순간에 그것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룬 목회가 되어서 온전한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이런 것을 강조하고 저런 것을 강조할 때도 있지만 1년 목회하고 나서는 전체적인 것들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강조점을 찾아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잘 믿게 하는 것, 잘 알게 하는 것, 잘 살게 하는 것. 그래서 교인들은 잘 안 따라와도 목회자 자신이 잘 믿고 잘 알아가면 감격하고 잘 살면 목회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 개인의 삶도 목회의 아주 중요한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 살면 그렇게 안사는 지체들을 보면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알면 잘 알지 아니한 지체들을 보면서 보다 잘 가르쳐야 하는 절실함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믿고 성경 속에서 날마다 진리의 빛이 쏟아져 내리면서 감격하면 이런 은혜의 세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그래서 저 어두운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하는 절실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이런 것 고려 없이 그냥 목회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머슴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머슴정신이 아니라 노예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유케하는 영의 정신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사슬이 되어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둘로스 크리스토라고 자기를 소개한 이후입니다. 어느 때도 주님은 그렇게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줄에 매여서 아주 자유한 하나님의 자녀의 영을 가지고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 것입니다. 노예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너무 너무 한 여자를 사랑하는 사내가 결혼을 하면서 나는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을 할 때 노예이지요. 그러나 몸종의 정신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만 매여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여러분 사역을 이렇게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매일 생각이 들고 공동체적으로도 생각이 되는데 눈치를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난 그것이 너무 슬픕니다. 어려서 제가 그 문제를 가지고 아주 따끔하게 들은 사람입니다. 나를 눈치 보지 마십시오. 물론 순종해야 되겠고 그 시키는 대로 해야 되겠지만 두려움 속에서 눈치를 보려 하지 마라. 그렇게 해서 사역은 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너에게 하나님이 더 두려운지 내가 더 두려운지 순서가 바뀌지 않았는지 물어봐라. 담임목사가 네 사역을 보자 할 때 깜짝 놀란다면 주님이 네 사역을 보자 할 때 더 놀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로 자유케 하는 영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잘 믿으려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면 다 마음속에서 용서가 됩니다. 그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과 차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앙생활을 잘 해서 믿음이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는 목회자는 참 하나님이 목회하시는데 그런데 참 놀랍게도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곳에서 직접 목회하지 않으시고 목회자의 가슴에 먼저 주셔서 그 창고에서 끌어내서 목회하신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인데 신기하게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을 끌어내려서 목회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있는 것을 목회자의 가슴속에 넣었다가 그 창고를 열고 꺼내서 목회를 하십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기 안에 있는 것 아니면 양떼들에게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목회자가 성도들을 기도하게 하는 것 봤습니까? 진리대로 살지 않는 목회자가 나는 이렇게 살지만 당신들은 하늘의 진리를 따라 살아달라고 성공하는 것 봤습니까? 그래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이렇게 몸부림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일은 여러분 사역에 있어서 성공이 무엇인지 개념이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믿는 것, 아는 것, 사는 것을 성도들에게 잘 가르쳐서 교회가 성장하고 하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생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제 금년 한해는 지나갔고 내년에는 잘 믿으십시오.
(찬양)
내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렇게 은혜에 젖어서 잘 믿고 잘 알고 잘 살고 이제 여기에 보면 교내 풍조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고 하는 것이 영적 미숙함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잘 믿고 잘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화반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책을 선물을 받았는데 이단에 관련된 책이었습니다. 믿음의 말씀 운동이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사라는 출판사가 있는데 그대로 옮겨온 것인데 이단입니다. 이친구가 오순절 계통인데 나중에는 오순절에 신비주의를 좀 가미하고 희랍철학 가미하고 해서 완전히 비빔밥을 만들어놨는데 하나님이 1미터 80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20파운드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처럼 그렇게 똑같이 만든 거라는 것입니다. 순 사기꾼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이 담겨진 책들은 안 읽고 그런 책에 대해서 아주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호기심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목양의 과정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들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이리저리 요동하고 휘몰아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목회를 못하는 것들입니다. 목회를 잘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견고하게 쌓여져 가는 것이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본인을 위해서 그다음에 영혼들을 위해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함께 믿는 것, 아는 것, 사는것. 기도합시다.